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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6월 28일)
제목: "십자기의 길 위에 놓인 낙원의 길"
말씀: 누가복음 23:32~43절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유현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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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3:32~43,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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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문 33절에 해골이라 하는 곳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여정의 마지막 장소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서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길 여정이 오늘 해골이라 하는 장소 다른 말로, 골고다라고 하는 이 사형장에서 끝이 났다. 예수님의 모든 길 여정은 바로 이 해골이라 하는 이 장소로 향해 왔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 사형장을 그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시고 길 여정을 걸어오셨을까? 그것은 바로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데, 주님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이면서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해골이라고 하는 단어로 시작해서 마지막 43절에 낙원이라고 하는 단어로 끝이 난다. 해골의 장소에서 낙원이라고 하는 공간을 한 행악 자가 약속받고 말씀이 마무리가 되는데. 낙원이라고 하는 이 공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온전한 인재가 있는 가장 높은 하늘 영역을 가리키는 곳이었다. 이곳은 고린도후서 12장에 사도 바울이 올라갔던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 하기도 했고, 부활 때까지 의인들이 죽은 후에 누리는 지옥의 공간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단 세 번 나오는 이 낙원이라고 하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파라데이소스이다. 구약 성경에는 약 28번이 나오는데, 그중에 19번이 이 낙원은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렇다면 해골이라고 하는 이 단어와 낙원이라고 하는 이 단어, 낙원은 에덴동산을 만약 가리키는 단어라고 한다면, 이것은 창세기의 시작과 끝과 매우 관련된 장소라고 할 수가 있다. 창세기는 2장, 3장에서 낙원 이야기, 에덴동산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낙원에 두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과 축복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속에 거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는데, 이 영생의 축복이 창세기 마지막 장인 50장에 가면 상실되어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50장 25절에서 26절을 한번 제가 읽어드리겠다.
 
*창세기 50:25,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110세의 죽음에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낙원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된 인간이 창세기 마지막 장에 이르러 죽음을 겪고 있고, 해고를 언급하고, 창세기가 종결되고 있다. 이것은 축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심각한 문제 상황을 창세기가 그 줄거리 상에서 제시하고, 창세기가 종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다시 낙원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동편 입구에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 천사들을 두어서, 생명나무 입구에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장애물을 설치해 놓으셨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 에덴동산 낙원의 임재 가운데 다시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가? 그 태초에 지음 받았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누렸던 그 지복의 상태에 다시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바로 창세기 3장 이후에 모든 성경의 구원 역사에 줄거리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창세기는 낙원에서 시작해서 해골을 언급하면서 끝났는데, 오늘 본문은 해골이라고 하는 장소에서 시작되었으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낙원을 허락하시면서 본문이 끝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왜 골고다라고 하는 장소에 오셨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우리가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낙원을 잃어버리고 해골이 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의 그 운명을 역전시켜서, 이제 해골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다시 인간을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이 넘치는 낙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기 위해 지금 십자가에 못 받게 계신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짧은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신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지금 진행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오직 단 한 명의 행악자만 예수님께 간청하여 낙원을 약속받는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왜 지고 계시는지를 먼저 알아보셔야 할 것이다.
 
I.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음성 속에 드러나 있다.
 
*누가복음 23: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의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끔찍한 십자가형의 고난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첫 일성이 저들을 사하여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하는 말씀도 중요하지만,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 군인들과, 관리들과, 백성들과 이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하는 데에 있어서는 분명한 고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은 이들이 모르고 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살해하는 살인, 범죄를 저지른 상황 속에서 이 사람들은 알고서 죄를 지은 사람들일까? 아니면 알지 못한 채 죄를 지은 사람들일까?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다. 민수기 15장에 따를 때, 알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고, 회개하여 다시 용서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고의로 죄 지은 자는 영원히 이스라엘 진영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민수기 15장 24절 말씀을 읽어드리겠다.
 
*민수기 15:24,
24 회중이 부재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재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제제로 드릴 것이라.
-그런데 고의 범죄자에 대하여 민숙이가 하시는 말씀은 매우 엄격하다.
 
*민수기 15:30,
30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 끊어질 것이라.
-고의로 범죄를 저지른 자는 속제의 절차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 이 자들이 만약 예수님을 고의로 알고서 죽이는 자들이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시면, 이 사람들은 도무지 용서받을 길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 미니이다.” 선언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죽이는 그 죄인들을 향하여 민숙의 15장에 따를 때 그들을 과실 범죄자로 만들어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일종의 율법의 해석을 하고 계시는데,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나님, 지금 저들이 알고서 저렇게 죄 짓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예수님 죽인 자들은 용서받을 길이 없어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 사람들이 알고서 죄지은 것인지 모르고서 죄지은 것인지 지금 애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들은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로 주님께서 보아주시라고 예수님이 해석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 된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율법의 해석은 최종적이며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라고 말씀하신 순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가 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죽이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이 무리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총합, 즉 범죄한 인류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로 규정해 주시면서, 민수기 15장 율법에 따를 때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또한 예수님 죽인 자요,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반역한 유대인들과 이방인인 우리도,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지 못하고 죄 지은 자로 보아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던 첫 번째 음성 속에 나타난 매우 중요한 메시지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서, 십자가 고난의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던 첫 번째 말씀이 율법의 해석을 통해서라도 그 죄인들을 구원할 길을 만들어내시고 지금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십자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타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께 제안을 드리고 싶다.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는 기독교적 상징을 바라볼 때, 십자가는 고난의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우리가 그동안 인식해 왔다. 그러나 십자가가 물론 고난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난보다도 더 강렬하게 불타고, 고난보다도 더 강렬하게 빛을 발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께서 앞으로 모든 기독교적 상징과 신앙생활 가운데 십자가를 언급하실 때, 그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사랑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 역시도 십자가를 질 때 우리가 힘들고 고난당하는 십자가만을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성령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도 사랑이 없으면 어떤 고상한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십자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 우리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첫 번째 일성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주셨던 십자가가 얼마나 큰 사랑의 십자가인지를 우리 성도님들께서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시는 시간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님을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면 바로 우리들이 그 예수님 주변에 서 있는 무리들은 그 사랑에 십자가를 지고 계신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예수님을 죽이는 무리들이 문제가 있다.
 
II. 예수님을 죽이는 무리들.
 
-지금 본문 35절, 36절, 39절에 보면 백성들은 십자가를 구경하고 있고, 관리들은 비웃고 있고 군인들은 희롱하고 있고 행악자 중 한 명은 비방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고 비웃고 희롱하고 비방하는 이들이 누구일까? 오늘날로 치면 예수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일까?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오늘 이 군인들과 관리들과 행악 자들 그리고 백성들의 대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디선가 들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라든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아주 중요한 구약성경의 직분을 그들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들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어디선가 배웠고 섬겨왔던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 현실을 생각해 보자면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기독교적인 많은 메시지들에 노출되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들이 왜 그리스도를 비웃고 비방하고 희롱할까요? 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하는 말들 속에 이런 말들을 한다.
 
*누가복음 23:36,37,39,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예수님에게 요청을 한다. 그런데 이 요청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당신” 당신이 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 보라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영역과 영예와 유익과 영광을 스스로 취해보고 당신의 모든 고난에서 헤어 고난에서 벗어나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남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이 사람들의 대사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이들은 지금 성경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를 원하고 있다. 이들이 원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구원하는 그리스도, 즉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또한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그리스도이다. 한마디로 이 사람들은 이제 십자가 상해서 자신들이 그동안 생각해왔던 그리스도와 진짜 그리스도가 불일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자신들이 그동안 우상처럼 만들어왔던 그리스도를 버려야 하는데 진짜 그리스도를 살해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오류가 기독교 세계 안에 굉장히 많이 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리고 돈과 명예와 욕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돈과 명예와 욕망을 주는 그리스도를 선전한다. 이데올로기를 복음보다 더 사랑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 그리스도, 혁명과 그리스도, 그리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그리스도, 청빈한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데, 이것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은 것은 다 우상이다. 문제는 예수님 주변에 있는 이 무리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욱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의 현장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지금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가장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III.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유명한 고백을 한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주님이 하셨던 말씀이 이와 같다. 제가 누가복음 9장 22절, 23절, 그리고 26절, 27절을 한번 읽어드리겠다.
 
*누가복음 9:22,23,26,27,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으어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것은 아마 문맥상에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는 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이라고 하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 하시는지 보자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지금 누가복음 9장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나시자마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인데,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라고 하신 말씀은 인자가 죽는 그 자리까지 직접 따라오라고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베드로, 너가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진술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바로 이 십자가 현장에서 확인하겠다. 라고 하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던 그 말씀을 너희들이 만약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너희를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인자가 오시는 그 사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그 사건은 죽기 전에 볼 자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죽은 후에 볼 자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시는 그 사건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 영광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느냐? 했을 때,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 누가복음 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 42절에서 행악 자가 구원받은 행악 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가복음 23:42,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지금 당신의 나라는 주 예수님의 나라이고, 이것은 누가복음 9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를 지금 이 사람이 알고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행악 자가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알게 되었고, 행악 자가 참으로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행악 자가 어떻게 하여 이 복음을 알게 되고 주님 앞에 회개했는지는 본문에 따를 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지금 이 본문은 행악 자의 입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이 고백됨을 통하여 누가복음 9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참된 제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라고 말씀하셨던 그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을 향하여 누가복음 23장이 지금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어디 갔냐는 것이다. 지금 세베대의 두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이 영광중에 임하실 때 나를 좌우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는 그때가 영광 받는 때라고 예수님 말씀하셨는데, 십자가에서 지금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따를 때, 영광 받고 계시는 그때에, 영광중에 주님의 좌우편을 요구했던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어디에 갔을까?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33절에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오게도 죽는 데에도 각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말했던 베드로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장 28절에서 30절에,
 
*누가복음 22:28,30,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 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제자들에게 비록 고난에 기르지만 십자가를 지고 인자가 고난당하고 죽는 그 자리까지 함께 따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고생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시험 중에도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목적 주님이 그 제자들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제자들과 함께 고난의 현장에도 같이 가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시고 영광중에 임하셨을 때 그 제자들이 주님과 더불어 세상을 통치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주시려고, 주님은 그 제자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걸어가자 말씀하여 주셨는데, 지금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황에서 한 명도 보이지가 않는다. 지금 구원받은 행악 자가 예수“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라고 이 이름 없는 행악 자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몰라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거라고 하셨던 그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 지금 예수님 앞에 고백하고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관청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매일 함께 자고, 먹고 마시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열두 제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 예수님 면전에서 들었으며, 또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으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누가복음 23장에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어야 하냐고 또한 23장이 질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그 예수님의 도망가 버린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질문일까? 아니다. 누가 복음의 독자들, 초대교회 성도들과 2천년 세계 교회,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이 저녁에 누가복음 23장을 읽고 있는 바로 저희에게 누가 복음서가 말씀하고 계신다.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오늘 만약 누가복음 23장에 그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이 이 땅에 펼쳐지는 그 시대에 있다면 어디에 있으셔야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오늘 본문이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결국 제자들을 향하여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그 원수들을 향해서 그냥 가만히 주님이 있으셔도 된다. 주님이 너무 화가 나셔서 아버지, 저 고의범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구원받을 가능성도 없어질 텐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마지막 한마디라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다. “아버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죄 짓는 자들이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십자가에서 불타는 사랑 인류의 역사의 하나님께서 가진 속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역사의 한복판에서 십자가에서 지금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제자들에게도 주와 함께 그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용서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어가라고 지금 누가복음 23장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죽이는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총합의 구원의 길을 내시며 그들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듯이, 해골에서 낙원으로 갈 길을 구축해 놓으셨듯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도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감으로써, 우리 아닌 다른 이들과 세상을 향하여 생명과 구원의 길을 주님과 함께 그 길을 닦아놓으라고 오늘 누가복음 23장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당하는 예수님의 현장에 잘 따라갈 것 같았다. “주님, 다른 사람은 다 부인하더라도 저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베드로가 말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마태, 마가, 누가, 공관, 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다. 제자들도 아마 그때는 진실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가 진정으로 펼쳐지자 다 도망가 버린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 된 내 자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오늘 저녁 한번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지를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그리고 낙원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가 우리 인간의 육신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럴까? 바로 낙원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 위에 놓여 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십자가의 길 위에 놓인 낙원 가는 길’이다.
 
십자가의 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낙원 가는 길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위에 낙원 가는 길이 놓여 져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으면 낙원 가는 길을 걸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눈물과 수고와 섬김과 헌신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극대화하는 인간의 본성적 육신의 눈으로는 그 십자가의 길을 보고 아연실색하여 도망가기가 우리의 본성에 굉장히 합치되기 때문에,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참으로 십자가와 그리고 낙원 가는 길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없을까? 예수님을 십자가 현장에서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과 군인들과 누리들과 백성들, 그들의 그 알지 못하는 눈을, 그 가리워진 눈을 치료할 치유책은 없을까? 너무나 감사하게도 누가 복음이 그 마지막 장에서 그 치유책을 말씀해 주고 계신다. 그 해결책은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열어주셔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복음 24:30-32,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이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첫 번째로 그들의 눈이 밝아져
-이 말씀을 묵상해 보겠다. ‘밝아졌다’ 라고 하는 이 단어는 동사 ‘디에 노이크세산’ 이라고 하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인데. 이 디에 노이크세산은 수동태 동사이다. 문법적인 용어를 써서 정말 죄송한데, 이것을 신적 수동태라고 한다. 그들이 눈이 밝아진 것은 스스로 눈을 밝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밝혀주셨을 때,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았다. 그전에는 누가복음 23장에 나와 있는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였다. 이 눈이 밝아진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용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가 없다. 이 눈이 밝아지는 이 위대한 사건은 특별히 열왕기하 6장에 나와 있는 내용을 생각하게 하는데,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도단 성으로 수많은 병거와 군대를 보냈다. 그러자 엘리사의 사환이 그 수많은 적국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엘리사에게 와서 떨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엘리사가 이렇게 말한다. “대답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데 저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심에 그가 보니 불만과 불변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기 전에는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떨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엘리사가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원의 문을 열어주시자, 불변고와 불 말이 엘리사를 지키고 있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보호하고 있는 성곽이 되어 주고 계시는 것을 그가 보았을 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실 때, 우리가 두려움과 낙심과 고난과 여러 가지 힘듦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길, 그 이면에 놓인 하나님이 예비하신 낙원의 축복과 생명을 우리가 밝게 보고, 기쁨과 감사함과 확신 가운데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문을 열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열 수가 없지만, 또한 이 본문에서는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언제 나타났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떼어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고대 사회에서는 함께 한 집에서 식사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가장 뜨거운 친교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함께 식사하며 친교하고 있을 때, 그들의 눈이 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우리 스스로가 내 자신과 누군가의 눈을 영적으로 밝히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전도 대상자들과 자녀들과 우리의 이웃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의 자리로 나올 수 있도록 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부탁드린다. 예수님과의 이 친교는 언제인가? 주일 예배이다. 모든 교회의 공식 예배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자리요, 찬양하는 자리요, 다락방에서 모여서 말씀과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교제를 나누는 그 자리, 바로 예수님과의 친교의 자리이다. 그래서 참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주님과 함께 친교 할 수 있도록 우리 주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눈이 열려서 주님을 온전히 따라갔던 사람, 존경하는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주기철 목사님이 계신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 참배에 온몸으로 맞서다 해방 1년을 앞두고 순교하셨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연회를 하면서 아내 오정모 사모님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라고 하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모님의 믿음이 더 놀랍다. 자녀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정 형편도 극도로 궁핍했지만, 사모님께서는 약한 말씀 대신에 감옥에 있는 주기철 목사님을 면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주 목사님의 입관 예배에서도 조용히 일어나서 비장한 얼굴로 조문객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제 아내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ㅋㅋㅋ 이런 놀라운 신앙 승리의 비결이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주기철 목사님께서 작사하신 찬송과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사절 가사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사절 가사를 한번 읽어드리겠다.
 
※아픈 다리에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기를 보여주니 7전8기 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곡에 나도 가게 하옵소서.
 
누가복음 23장에 엠마오로 가는 그 두 제자의 눈을 열어주셨던 예수님의 역사가 2천 년의 시간과 극동아시아와 근동아시아의 그 엄청난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역사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주기철 목사님의 고백과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만 그 눈이 열려지셨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듣게 되면 우리에게는 유익이 없다. 오늘 저녁 저와 여러분 모두 주기철 목사님이 보았던 것처럼 영생의 길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더욱 밝히 허락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두 번째 묵상을 하시고 마치겠다.
 
2)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는 주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있다. 여기서 ‘풀어주실 때’라고 하는 단어가 ‘눈을 열어주실 때’라고 하는 단어와 사실 동사가 똑같다. 이 동사는 ‘디아 디아노이고’ 라고 하는데요 이 동사는 ‘해설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또한 있다. 무엇인가를 열다, 보다 그리고 해설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3장에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셨는데, 지금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상세히 설명해 주셨을 때 가리켜 성경을 풀어주셨을 때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시니라. 할 때 이 상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하는 이 단어 역시도 해석하다, 번역하다, 설명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 어떤 말씀일까요? 성경을 풀어주신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자세하게 능력 있게, 해석해 주신다. 라고 하는 의미이다. 바로 성경을 하나님께서 해석해 주실 때 그리고 그 해석된 성경 말씀을 성도가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성도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자가 성도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 장로교회를 창시하셨던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했었던 언급을 한 번만 읽고 마치도록 하겠다. 기독교 강요. 제6장에서 칼빈은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빛을 바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의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올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조금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순전하게 바라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이 똑바른 길을 따라 전진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게로 나아와야 한다. - 존 칼빈-
-이와 같이 주님께서 성경을 해석해 주실 때, 그리고 그 성경을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실 때,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십자가의 길 안에 있는 낙원 가는 길을 볼 수가 있다. 십자가의 눈물과 고난과 인내의 점철된 그 고난으로 덮여진 그 안에 있는 천국 가는 보화와 하나님의 영광과 낙원의 길을, 우리는 주님이 성경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눈을 밝혀주실 때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 마을로 가는 그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풀어주셨던 예수님의 역사는 장차 부활하시고, 오순절 날 성령님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신 다음에 교회를 통하여 하실 예수님의 사역의 전조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누가 복음 23장에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불어주셨던 그 일을 하게 하시려고 교회를 설립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불러주셨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오늘 안아주심의 본당 이 자리에도 와 계신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4장은 그 옛날 예수님을 만났던 2천 년 전에 그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경험케 하시고, 또한 경험한 이 은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주님을 비방하고, 희롱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군인들과 관리들과 백성들과 같은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살아계신 주님 앞으로 인도할 사명을 주시려고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신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 주님과 더욱 깊은 친교를 가지시고,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시므로, 눈이 밝아져 더욱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고난도 함께 받으실 뿐만 아니라 낙원의 영광도 확실히 약속받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요약
누가 복음서를 통하여 가장 처참한 죽음의 장소에 찾아가셔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주님의 은혜를 조명하여 주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깊이 누리도록 해주신 것과 또한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눈을 밝게 열어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케 하셨으니 하나님 말씀을 통해 더욱 뜨거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로마어로 붙었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을 경멸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쓴 것이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며,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셨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과 수욕이 하늘의 영광이 된 것이다. 행악 자는 예수님을 비방했으나 다른 행악 자는 회개와 함께 예수님께 은총을 구했다. 악한 행악 자는 자신의 처형이 억울하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행악 자는 자신의 악행을 자인하며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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