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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7월 5일)
제목: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말씀: 이사야 40:1-8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조철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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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40:1-8,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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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즘 책을 볼 때 인터넷 플랫폼에 인터넷 플랫폼 도서를 많이 이용해서 책을 봅니다. 인터넷 도서 플랫폼을 이용을 하면요 아무래도 예전처럼 종이를 산책을 집에 쌓아놓지도 않게 되고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검색을 하면서 요즘 신학 책이 아닌 다른 책의 정보를 얻을 때 사용하곤 하는데요. 최근에 과연 어떤 주제의 책들이 많이 나왔을까 검색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소망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검색을 했더니 도서 분야에서 59, 59건 정도의 책을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이렇게 살펴보니까 대부분은 다 기독교 책이더라고요. 그래서 소망이라는 단어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의 단어가 무엇일까 검색을 해봤더니 희망이라는 단어로 한번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300 27번의 책을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조금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이 아무래도 제일 많은 단어 중에 하나가 여러분 이지요. 여기 계신 분들은 돈에 관심이 없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라면 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돈을 한번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1175번이나 되는 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마음속에 그러면 코로나 이후에 위로라는 단어를 많이 우리는 얘기를 하는데 과연 얼마나 될까? 검색을 해보았더니 1157권이나 되는 도서를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제 검색했던 숫자였는데요. 사람들이 정말로 위로라고 하는 단어를 돈이라고 하는 단어만큼 많이 사용하는구나! 이것은 우리가 믿는 크리스천만의 용어가 아니라 많은 세상 사람들이 위로라는 단어를 관심 가지고 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 도서 플랫폼에서 가장 많이 읽는 책에 이렇게 표시가 되어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이름이 뭐냐면요. ‘오늘의 위로가 도착했습니다.’ 라는 책이었습니다. 제가 그래도 한번 살펴보려고 읽었더니 내용은 되게 간단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것이 가장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You have to love yourself. 라고 하는 이 단어는요. 사실 우리나라 지금 제일 잘 나가는 보이 밴드 그룹이 많이 외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한번 묵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과연 너 자신을 사랑하라. 라는 그 메시지가 정말 성경적인가? 그리고 정말로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를 주는 메시지인가? 라고 하면서 이렇게 성경을 뒤적뒤적 거리다가 제가 그러고 나서 발견했던 본문이 오늘 이사야서 40장 본문입니다.
 
여러분 이사야는요 기원전 우리가 대충 알고 있기로도 여러분들 지금으로부터 8세기 그러니까 500에서 2800년 전의 사람인데 여러분 이사야서의 뜻은 여호와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1장부터 39장까지는 주된 내용이 뭐냐면 심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40장부터 66장까지가 구원과 위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아 그러면 이사야 40장을 한번 읽으면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 위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과거 그 시대에 얘기했던 내용이 오늘날에도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변치 않으니까 한번 찾아보자. 라고 하면서 제가 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에 대해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나누려고 하는데요. 먼저 처음 본문 1절과 2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40:1-2,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너희는 누구를 위로하라고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내 백성을 위로하라. 라는 메시지지. 위에 따라오는 얘기가 뭐였냐면 노역의 때가 끝났다. 그리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 라는 것이 위로의 내용입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다. 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죄악이 사함받았다. 라는 것은 너희가 과거 포로로 끌려가서 죗값을 이젠 다 치렀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살아도 된다.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 라는 것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께서 이사에게 주셨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위로의 메시지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3절부터 5절까지 나와 있는데요.
 
이사야 40:3-5,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첫 번째가 뭐냐면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그리고요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라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너희는 뭐라고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라고 돼 있잖아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사실은 좀 쉬어도 될 것 같은데 너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 하냐면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예비하라고 하는 단어를 좀 찾아봤더니 원어에서는 클리어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또한 있더라고요.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깨끗하게 해라 정화시켜라. 그가 오실 기회를 좀 치워라. 그리고 그걸 통하여서 그러면은 우리 스스로가 그러면 깨끗하게 해야 되니까 어떻게 다시 노역이 시작된 겁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내가 올 길에 대해서 너희가 조금 정리를 해야 된다. 이것이 종으로서 삶을 정리하고 자유인으로서 살아야 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사에게 주시면서 광야에서 너희 하나님이 길을 예비하라고 하셨잖아요. 여러분 광야라고 하는 단어는 디바르라고 합니다. 다바르라고 구성이 되어 있는데요. 무슨 얘기냐면요. 모모 로부터라고 하는 m이라고 하는 접두사와 다바르 라고 하는 말씀이라고 하는 우리 명사가 합쳐져 있는 겁니다. 그럼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라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곳이 광야라는 사실 그 얘기는 광야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다. 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곳 가운데 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시면서 좀 정리하라는 얘기를 이 백성에게 주시는 거죠. 그러고 나서 사막에는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정리하고 그 골짜기를 메우고 평탄케 하면서 무엇을 보여주신다. 라고 하냐면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주겠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좀 정리를 해볼까요?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어떻게?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리고 죄악은 사라졌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좀 정리해라. 이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 삼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와 같이 정리하고 평탄케 하는 작업을 하면 사막에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준비하기만 하면 어떻게 된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께서 우리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하시겠다. 라는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러면 진정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든 이 백성이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이 여러분, 진정한 위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악이 사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그 영광을 보이겠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제 가슴 속에서 약간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심장이 뛰었습니다. 세상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러는데 사실은 그 메시지 가운데에는 끝나고 나면 공허한 게 되게 많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의 무엇을 하다 보면 사실은 나만 사랑하라는 얘기로 결국은 귀결되거든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지금 얘기하신 건 뭡니까?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기만 하면은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기만 하면은 내가 너희에게 여호와의 영광을 통하여서 위로를 주겠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면서 이 시대 가운데에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참된 위로이고, 그 영광을 볼 수 있다. 라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여러분 그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안아주심의 본당에 와서 매 주일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가 고백하는 게 주 영광 여기 임하사 열방향의 그 비추소서. 주의 은혜 구할 때 그 은혜가 이 땅 가운데 있기를 바란다.’ 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실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뭐냐면 그러면 종에서 벗어난 자들, 자유인들이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라는 얘기를 6절에서 8절을 주십니다.
 
이사야 40:6-8,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실은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요. 종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은 이제 자기를 무엇이라고 선포하고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하나님께서 이사를 통해 주신 말씀이 뭐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아멘. 저는 푸른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라는 그 찬양은 많이 불렀어도 이 말씀 가운데 주시는 의미가 이 시대를 향한 위로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사실은 좀 더 이것을 묵상하기 전까지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이 시대를 향하여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주님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나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했을 때 우리 모두의 고백 가운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라고 하는 그 고백이 우리 모든 성도들을 통하여서 흘러나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좀 더 우리가 세부적으로 세 가지 정도로 좀 나눠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첫째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요. 우리가 풀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풀이다라고 하는 사실 여러분 동의가 되십니까? 동의가 안 되면 여기서 지금 저 설교가 나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풀이라고 하는 거는요 마른다. 라고 지금 표현이 되어 있는데 마른다. 라는 것은 건조해진다. 라는 겁니다. 생명력이 없다는 겁니다. 어느 순간에 시들어서 이것은 더 이상 생명의 능력을 갖출 수 없고 죽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말할 수 있다. 라는 그 사실을 갖다가 내가 인지하면서 사는 자는 내가 결국은 마르는 존재구나라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성경을 찾아보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그렇게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아담이 있었던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가봅시다. 우리 모두는 아담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뭐냐면요.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얻기 위한 배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아담은 그것을 먹지 않았을 겁니다. 또 한 번 살펴볼까요? 여러분,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론 탑 사건이 나옵니다. 바벨탑 사건, 바벨탑 사건은 왜 일어났습니까? 인간이 모두가 다 높아지고 싶어 하는 그 욕심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 라고 하는 그 사건 그 일 때문에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을 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지요. 자신이 풀린 줄 알았다면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장면에서 풀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풀이 마른다. 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거역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때마다 제 마음속에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할 때 늘 찾아보는 성경이 뭐냐면 전도사입니다. 여러분 전도서 114절 말씀 같이 한번 우리가 읽어보기를 소원하는데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전도서 1:14,
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러분 솔로몬의 이 고백 가운데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이 땅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일을 보았는데 모두 다 헛되다. 라고 하는 헛됨, 저기 헤벨이라고 하는데 저게 원어로 무슨 뜻이냐면 숨결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숨결 숨 한 번 쉬는 것과 같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됩니까? 그만큼 인생이 뭐 하다는 거죠? 짧다. 라는 겁니다. 근데 그 짧은 인생 동안 우리는 뭐 한다는 겁니까? 바람을 잡는다는 겁니다. 바람을 아무리 잡으려고 해보십시오. 잡힙니까? 우리 인생이 그만큼 짧고 우리 인생은 무엇을 하려고 잡을 수가 없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 인생 가운데서 무엇을 잡으려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자신이 풀이라는 사실,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풀이다, 언제든지 마른다.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누구를 인지하냐면요 절대자이신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라는 사실을 내가 늘 인지해야만 언제든지 마르는 존재다 그리고 언제든지 나는 이와 같이 건조해질 수밖에 없고, 내 생명은 한계가 있다. 라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거든요. 저는 이 풀이다.’ 라고 하는 것을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게 우리 성도들과 함께 약할 때 강함 주시네.’ 라는 찬양을 우리 담임 목사님과 우리 성도님들 부를 때의 모습이 참 많이 기억이 났습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신의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는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예수 어린 양 종교 아니라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약하다. 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풀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요 그런 찬양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다 알 수 있는 존재이고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 존재라면 우리는 절대로 주님 앞에서 예수 어린 양 종기한 이름을 갖다가 마음 담아 부를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진심과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이 고백을 올려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언젠가는 죽게 되고 이 땅 가운데 더 이상 소망이 없고 한계가 있다. 라고 내가 풀이다.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 찬양이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시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내가 연약하다. 라는 사실을 아는 분에게는 이 찬양이 여러분의 가슴을 때릴 겁니다. 저는 훈련하면서 성도들에게 이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이 찬양 부르실 때만큼은 우리 교회 성도들 아마 가사 다 모르시는 분 없을 텐데 아마 부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경우들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요즘 제 주변에 얼마나 연약한 분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연약한데 너무나 몸이 안 좋고 어렵고 그리고 금방 쓰러질 수밖에 없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우리는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내가 풀이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한 참된 위로를 받으시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풀리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마다 여러분의 약함을 강함으로 채워주시는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이 여러분의 마음과 심령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누구라는 거죠? 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꽃 하면 떠오르는 게 결국은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화사함입니다. 그리고 화려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꽃이 우리가 표현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우리가 취하곤 하는데요. 여러분 운동선수들은 전성기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도 전성기라는 게 있으셨습니까? 괜히 옆에 있는 분 쳐다보지 마시고 자기만 먹고 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전성기가 있으셨습니까? 사람들은요 누구나 자신만의 전성기라고 하는 거를 참 회고하고 싶고 그때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아 그 시절이 너무 금방 지나갔구나! 라는 생각을 하실 겁니다. 맞습니까? 여러분은 여전히 전성기를 지금 구가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제가 그러면서 시편에 있는 우리 10315절의 말씀이 생각이 났는데요.
 
시편 103:15,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아멘. 여러분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고 앞서 풀에 대해서 얘기했잖아요. 풀은 마른다. 그런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결국에는 시들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예전에 왕년에는 참 저 잘 나가고 아름다웠습니다. 라고 하는 얘기 많이 하셨을 겁니다. 맞죠? 지금도 옆에 있는 분 괜히 쳐다보실 필요 없습니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 다 아름다우시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너무나 아끼시는 귀한 보배와 같은 것이 우리 성도님들이십니다. 그런데요 그 꽃으로 지낼 수 있는 이 땅 가운데 시기가 금방입니다. 꽃은 화려하긴 하지만 시들 수밖에 없다. 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고 화려하게 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땅을 사는 동안 꽃은 잠깐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보이기는 하지만 씻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풀과 마찬가지로 꽃도 동일하죠. 풀이든 꽃이든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바가 무엇이냐면 우리 인간은 한계가 있다. 라는 겁니다. ‘연약하다. 라는 거죠. 잠깐 뭔가 대단해 보이는 것 같아 보이고 이 땅을 살아가면서 권력을 영원히 누릴 것 같아 보이고 그리고 저 아름다움을 영원히 구할 것 같아 보이지만 꽃은 반드시 시든다. 라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맨날 우리는 이 땅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우리는 왠지 저 아름다움은 계속될 것 같아 보이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것이 예수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것이 중요한 부분 세 번째 진짜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하다는 겁니까? ‘영원하다.’ 라는 겁니다.
 
아멘이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요 푸른 마르고 꽃은 시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마르지 않고 시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왜 하나님께서 이사를 통해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여러분 잘 살펴보시면요 출애굽부터 한번 살펴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종에서 자유 함을 얻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신산 언약도 주시면서 그들에게 율법과 성막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정도였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그들 모습이어야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출국 1세대들은 어느 누구도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 2세대의 삶을 한번 살펴볼까요?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아말렉 족속과 통혼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구별되라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사사 시대 한번 거슬러 가볼까요? 사사 시대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 시대가 끝나고 그리고 사무엘 이후에 이스라엘 초대 왕인 누구입니까? 사울, 오죽했으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나왔을까요? 그리고 다윗을 지나 솔로몬 시대 그리고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이 나눠지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나눠진 이스라엘 왜 나눠졌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눠졌습니다. 그런 이 백성을 향하여서 하나님께서 오늘 주시는 말씀은 이제는 더 이상 너희가 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여호와의 말씀만이 영원하다. 라는 사실을 너희가 좀 알았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으로 오늘 이 사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늘 주고 계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미래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위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하면서 이 말씀만을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하여서 참 위로,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사실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사실이 아니라 과거 1904, 1905년에 있었던 제가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 얘기를 잠깐 해드리겠습니다. 19041031일 이반 로보트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모리아라고 하는 교회의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회가 일어났습니다. 간증이 일어나고 고백이 나왔습니다. 같이 말씀을 나누면서 뜨겁게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114일 금요일 밤에 그곳에서 요한 계시록 62절과 4절의 말씀이 여호와의 인을 떼자 흰말, 붉은말, 결국 그 탄자들이 어떤 일을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이 땅의 종말에 대한 한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회개하면서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겠구나! 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115일 토요일 에베소서 518절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에베소서 5:18,
18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다. 오직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그 말씀을 통해 웨이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술집이 문을 닫고 그리고 음란한 것들이 하나하나 정리가 되면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세워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웨일즈 저녁으로 그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확산된 운동은 유럽과 미국과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거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요. 하워드 존스톤이라는 사람이 19069월에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1904년에 이미 원산에서 합의에 의해서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요. 부흥 운동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영향을 받은 웰즈와 인도에서 영향을 받은 이 사람의 하워드 존스턴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라는 것들을 알려주자 우리나라에서는 같이 시너지를 받아서 1907년에 평양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흥 운동 가운데 가장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볼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나라 부흥 운동에 있어서 가장 특징은 무엇이냐? ‘사경회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경회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통해서 변화와 회개의 자리가 일어나는 것이 사경회입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은요 선조 때부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우리를 통하여서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 민족이 이 성경 말씀을 사모하고 이 성경의 말씀을 같이 읽어가면서 문맹이 퇴치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호했다는 그 사실에서 우리 민족은 이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으로 품고 나아가는 데 앞장섰던 민족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요한복음 11절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을 함께 제가 좀 나눠드리고자 하는데요. 그 말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1, 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십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분이 이 땅 가운데 육신의 몸을 입고 와 우리를 통하여서 무엇을 하길 원하면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기 위하여 이 땅 가운데 몸소 오셨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신 로마서,
 
로마서 8:1,
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안에는 무엇이 없다고요? 정죄함이 없다. 이 민족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우신 말씀을 통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묵상함으로 그분만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고 그분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위로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을 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러면서 광야에서 외쳤던 주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태복음 33절 말씀 같이 한번 우리 읽었으면 좋겠는데요.
 
마태복음 3:3,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곱게 하라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레 요한은요. 약대 탈 옷 입고 석천 먹으면서 광야에서 무엇을 했냐면 주님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저 말씀대로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리고 세레 요한은 말씀의 성취를 하기 위해서 그곳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성취는 그 시절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우리 모두 사랑의 교회 여기 계신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이어지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난 주말에 저도 우리 사역 반 집사님들과 함께 아웃리치를 다녀왔습니다. 제 마음속에 들었던 딱 하나의 생각은 뭐냐면요. 여러분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준비하면서 어떤 곳을 가서 사약을 준비할 때, 분명한 사실은 그것을 가장 싫어하는 게 누구겠습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너 풀 아니야 너 꽃 아니야 니 힘으로 다 할 수 있어. 라고 얘기하는 그러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준비하다 보면서 내 힘을 과시하기도 하고 내가 풀이 아닌데 어떻게 나의 이런 부분들을 건드릴 수가 있어. 근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무엇 하는 자입니까? 주님께서 오실 길을 깨끗하게 하는 자일뿐입니다. 하는 자일뿐입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되냐면 딱 하나입니다. ‘나 풀입니다.’ ‘주님 당신 필요합니다.’ ‘나 꽃입니다. 내 인생 언젠가 시듭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주님 나는 이 땅 가운데 살아간 말씀이신 그리스도만을 세워 가는데, 내 모든 정성과 진심을 다하겠습니다. 주님 내 인생은 바로 오직 여호와의 말씀이신 그리고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 이것을 세우기 위해 준비된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 고백을 할 때 제일 싫어하는 건 사탄이요 제일 기뻐하시는 거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수많은 역경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야 될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이고 광야에 우리는 그 길을 준비하는 자이며,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우리는 평탄케 하는 자라는 그 사실을 기억 하신다면요. 내가 지금 풀이라서 연약한 게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내가 꽃이라서 연약해서 힘이 없는 게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진짜 부끄러운 게 무엇인 줄 아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못 세우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 이제는 너희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했던 그 말씀 기억하신다면 우리의 모든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오직 우리 주님의 말씀, 그 말씀만을 세우는 역사가 여러분 삶의 중심 가운데 온전히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무엇을 외쳐야 할까요? 무엇으로 위로받아야 될까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얘기합니다. 영원하신 말씀만 그리고 그 말씀을 세우는 일에 우리 모두가 절벽 투구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오늘도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듯이 오늘 다시금 깨달아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만을 세우며 나아가는 남은 인생 되어야 한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자가 되고, 주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데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는 들풀처럼 금방 말라져버릴 그런 인생들이지만 하나님과 날마다 말씀 안에서 교제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영원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확신하며 그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방의 포로 생활 가운데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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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6월 28일)
제목: "십자기의 길 위에 놓인 낙원의 길"
말씀: 누가복음 23:32~43절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유현수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누가복음 23:32~43,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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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보문 33절에 해골이라 하는 곳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여정의 마지막 장소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서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길 여정이 오늘 해골이라 하는 장소 다른 말로, 골고다라고 하는 이 사형장에서 끝이 났다. 예수님의 모든 길 여정은 바로 이 해골이라 하는 이 장소로 향해 왔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 사형장을 그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시고 길 여정을 걸어오셨을까? 그것은 바로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데, 주님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이면서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해골이라고 하는 단어로 시작해서 마지막 43절에 낙원이라고 하는 단어로 끝이 난다. 해골의 장소에서 낙원이라고 하는 공간을 한 행악 자가 약속받고 말씀이 마무리가 되는데. 낙원이라고 하는 이 공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온전한 인재가 있는 가장 높은 하늘 영역을 가리키는 곳이었다. 이곳은 고린도후서 12장에 사도 바울이 올라갔던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 하기도 했고, 부활 때까지 의인들이 죽은 후에 누리는 지옥의 공간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단 세 번 나오는 이 낙원이라고 하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파라데이소스이다. 구약 성경에는 약 28번이 나오는데, 그중에 19번이 이 낙원은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렇다면 해골이라고 하는 이 단어와 낙원이라고 하는 이 단어, 낙원은 에덴동산을 만약 가리키는 단어라고 한다면, 이것은 창세기의 시작과 끝과 매우 관련된 장소라고 할 수가 있다. 창세기는 2장, 3장에서 낙원 이야기, 에덴동산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낙원에 두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과 축복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속에 거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는데, 이 영생의 축복이 창세기 마지막 장인 50장에 가면 상실되어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50장 25절에서 26절을 한번 제가 읽어드리겠다.
 
*창세기 50:25,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110세의 죽음에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낙원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된 인간이 창세기 마지막 장에 이르러 죽음을 겪고 있고, 해고를 언급하고, 창세기가 종결되고 있다. 이것은 축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심각한 문제 상황을 창세기가 그 줄거리 상에서 제시하고, 창세기가 종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다시 낙원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동편 입구에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 천사들을 두어서, 생명나무 입구에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장애물을 설치해 놓으셨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 에덴동산 낙원의 임재 가운데 다시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가? 그 태초에 지음 받았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누렸던 그 지복의 상태에 다시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바로 창세기 3장 이후에 모든 성경의 구원 역사에 줄거리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창세기는 낙원에서 시작해서 해골을 언급하면서 끝났는데, 오늘 본문은 해골이라고 하는 장소에서 시작되었으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낙원을 허락하시면서 본문이 끝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왜 골고다라고 하는 장소에 오셨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우리가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낙원을 잃어버리고 해골이 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의 그 운명을 역전시켜서, 이제 해골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다시 인간을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이 넘치는 낙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기 위해 지금 십자가에 못 받게 계신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짧은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신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지금 진행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오직 단 한 명의 행악자만 예수님께 간청하여 낙원을 약속받는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왜 지고 계시는지를 먼저 알아보셔야 할 것이다.
 
I.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음성 속에 드러나 있다.
 
*누가복음 23: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의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끔찍한 십자가형의 고난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첫 일성이 저들을 사하여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하는 말씀도 중요하지만,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 군인들과, 관리들과, 백성들과 이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하는 데에 있어서는 분명한 고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은 이들이 모르고 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살해하는 살인, 범죄를 저지른 상황 속에서 이 사람들은 알고서 죄를 지은 사람들일까? 아니면 알지 못한 채 죄를 지은 사람들일까?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다. 민수기 15장에 따를 때, 알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고, 회개하여 다시 용서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고의로 죄 지은 자는 영원히 이스라엘 진영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민수기 15장 24절 말씀을 읽어드리겠다.
 
*민수기 15:24,
24 회중이 부재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재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제제로 드릴 것이라.
-그런데 고의 범죄자에 대하여 민숙이가 하시는 말씀은 매우 엄격하다.
 
*민수기 15:30,
30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 끊어질 것이라.
-고의로 범죄를 저지른 자는 속제의 절차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 이 자들이 만약 예수님을 고의로 알고서 죽이는 자들이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시면, 이 사람들은 도무지 용서받을 길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 미니이다.” 선언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죽이는 그 죄인들을 향하여 민숙의 15장에 따를 때 그들을 과실 범죄자로 만들어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일종의 율법의 해석을 하고 계시는데,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나님, 지금 저들이 알고서 저렇게 죄 짓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예수님 죽인 자들은 용서받을 길이 없어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 사람들이 알고서 죄지은 것인지 모르고서 죄지은 것인지 지금 애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들은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로 주님께서 보아주시라고 예수님이 해석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 된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율법의 해석은 최종적이며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라고 말씀하신 순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가 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죽이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이 무리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총합, 즉 범죄한 인류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로 규정해 주시면서, 민수기 15장 율법에 따를 때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또한 예수님 죽인 자요,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반역한 유대인들과 이방인인 우리도,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지 못하고 죄 지은 자로 보아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던 첫 번째 음성 속에 나타난 매우 중요한 메시지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서, 십자가 고난의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던 첫 번째 말씀이 율법의 해석을 통해서라도 그 죄인들을 구원할 길을 만들어내시고 지금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십자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타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께 제안을 드리고 싶다.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는 기독교적 상징을 바라볼 때, 십자가는 고난의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우리가 그동안 인식해 왔다. 그러나 십자가가 물론 고난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난보다도 더 강렬하게 불타고, 고난보다도 더 강렬하게 빛을 발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께서 앞으로 모든 기독교적 상징과 신앙생활 가운데 십자가를 언급하실 때, 그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사랑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 역시도 십자가를 질 때 우리가 힘들고 고난당하는 십자가만을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성령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도 사랑이 없으면 어떤 고상한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십자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 우리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첫 번째 일성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주셨던 십자가가 얼마나 큰 사랑의 십자가인지를 우리 성도님들께서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시는 시간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님을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면 바로 우리들이 그 예수님 주변에 서 있는 무리들은 그 사랑에 십자가를 지고 계신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예수님을 죽이는 무리들이 문제가 있다.
 
II. 예수님을 죽이는 무리들.
 
-지금 본문 35절, 36절, 39절에 보면 백성들은 십자가를 구경하고 있고, 관리들은 비웃고 있고 군인들은 희롱하고 있고 행악자 중 한 명은 비방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고 비웃고 희롱하고 비방하는 이들이 누구일까? 오늘날로 치면 예수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일까?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오늘 이 군인들과 관리들과 행악 자들 그리고 백성들의 대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디선가 들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라든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아주 중요한 구약성경의 직분을 그들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들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어디선가 배웠고 섬겨왔던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 현실을 생각해 보자면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기독교적인 많은 메시지들에 노출되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들이 왜 그리스도를 비웃고 비방하고 희롱할까요? 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하는 말들 속에 이런 말들을 한다.
 
*누가복음 23:36,37,39,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예수님에게 요청을 한다. 그런데 이 요청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당신” 당신이 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 보라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영역과 영예와 유익과 영광을 스스로 취해보고 당신의 모든 고난에서 헤어 고난에서 벗어나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남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이 사람들의 대사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이들은 지금 성경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를 원하고 있다. 이들이 원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구원하는 그리스도, 즉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또한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그리스도이다. 한마디로 이 사람들은 이제 십자가 상해서 자신들이 그동안 생각해왔던 그리스도와 진짜 그리스도가 불일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자신들이 그동안 우상처럼 만들어왔던 그리스도를 버려야 하는데 진짜 그리스도를 살해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오류가 기독교 세계 안에 굉장히 많이 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리고 돈과 명예와 욕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돈과 명예와 욕망을 주는 그리스도를 선전한다. 이데올로기를 복음보다 더 사랑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 그리스도, 혁명과 그리스도, 그리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그리스도, 청빈한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데, 이것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은 것은 다 우상이다. 문제는 예수님 주변에 있는 이 무리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욱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의 현장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지금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가장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III.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유명한 고백을 한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주님이 하셨던 말씀이 이와 같다. 제가 누가복음 9장 22절, 23절, 그리고 26절, 27절을 한번 읽어드리겠다.
 
*누가복음 9:22,23,26,27,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으어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것은 아마 문맥상에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는 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이라고 하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 하시는지 보자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지금 누가복음 9장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나시자마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인데,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라고 하신 말씀은 인자가 죽는 그 자리까지 직접 따라오라고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베드로, 너가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진술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바로 이 십자가 현장에서 확인하겠다. 라고 하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던 그 말씀을 너희들이 만약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너희를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인자가 오시는 그 사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그 사건은 죽기 전에 볼 자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죽은 후에 볼 자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시는 그 사건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 영광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느냐? 했을 때,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 누가복음 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 42절에서 행악 자가 구원받은 행악 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가복음 23:42,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지금 당신의 나라는 주 예수님의 나라이고, 이것은 누가복음 9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를 지금 이 사람이 알고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행악 자가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알게 되었고, 행악 자가 참으로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행악 자가 어떻게 하여 이 복음을 알게 되고 주님 앞에 회개했는지는 본문에 따를 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지금 이 본문은 행악 자의 입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이 고백됨을 통하여 누가복음 9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참된 제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라고 말씀하셨던 그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을 향하여 누가복음 23장이 지금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어디 갔냐는 것이다. 지금 세베대의 두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이 영광중에 임하실 때 나를 좌우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는 그때가 영광 받는 때라고 예수님 말씀하셨는데, 십자가에서 지금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따를 때, 영광 받고 계시는 그때에, 영광중에 주님의 좌우편을 요구했던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어디에 갔을까?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33절에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오게도 죽는 데에도 각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말했던 베드로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장 28절에서 30절에,
 
*누가복음 22:28,30,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 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제자들에게 비록 고난에 기르지만 십자가를 지고 인자가 고난당하고 죽는 그 자리까지 함께 따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고생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시험 중에도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목적 주님이 그 제자들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제자들과 함께 고난의 현장에도 같이 가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시고 영광중에 임하셨을 때 그 제자들이 주님과 더불어 세상을 통치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주시려고, 주님은 그 제자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걸어가자 말씀하여 주셨는데, 지금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황에서 한 명도 보이지가 않는다. 지금 구원받은 행악 자가 예수“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라고 이 이름 없는 행악 자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몰라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거라고 하셨던 그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 지금 예수님 앞에 고백하고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관청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매일 함께 자고, 먹고 마시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열두 제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 예수님 면전에서 들었으며, 또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으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누가복음 23장에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어야 하냐고 또한 23장이 질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그 예수님의 도망가 버린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질문일까? 아니다. 누가 복음의 독자들, 초대교회 성도들과 2천년 세계 교회,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이 저녁에 누가복음 23장을 읽고 있는 바로 저희에게 누가 복음서가 말씀하고 계신다.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오늘 만약 누가복음 23장에 그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이 이 땅에 펼쳐지는 그 시대에 있다면 어디에 있으셔야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오늘 본문이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결국 제자들을 향하여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그 원수들을 향해서 그냥 가만히 주님이 있으셔도 된다. 주님이 너무 화가 나셔서 아버지, 저 고의범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구원받을 가능성도 없어질 텐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마지막 한마디라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다. “아버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죄 짓는 자들이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십자가에서 불타는 사랑 인류의 역사의 하나님께서 가진 속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역사의 한복판에서 십자가에서 지금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제자들에게도 주와 함께 그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용서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어가라고 지금 누가복음 23장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죽이는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총합의 구원의 길을 내시며 그들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듯이, 해골에서 낙원으로 갈 길을 구축해 놓으셨듯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도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감으로써, 우리 아닌 다른 이들과 세상을 향하여 생명과 구원의 길을 주님과 함께 그 길을 닦아놓으라고 오늘 누가복음 23장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당하는 예수님의 현장에 잘 따라갈 것 같았다. “주님, 다른 사람은 다 부인하더라도 저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베드로가 말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마태, 마가, 누가, 공관, 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다. 제자들도 아마 그때는 진실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가 진정으로 펼쳐지자 다 도망가 버린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 된 내 자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오늘 저녁 한번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지를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그리고 낙원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가 우리 인간의 육신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럴까? 바로 낙원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 위에 놓여 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십자가의 길 위에 놓인 낙원 가는 길’이다.
 
십자가의 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낙원 가는 길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위에 낙원 가는 길이 놓여 져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으면 낙원 가는 길을 걸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눈물과 수고와 섬김과 헌신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극대화하는 인간의 본성적 육신의 눈으로는 그 십자가의 길을 보고 아연실색하여 도망가기가 우리의 본성에 굉장히 합치되기 때문에,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참으로 십자가와 그리고 낙원 가는 길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없을까? 예수님을 십자가 현장에서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과 군인들과 누리들과 백성들, 그들의 그 알지 못하는 눈을, 그 가리워진 눈을 치료할 치유책은 없을까? 너무나 감사하게도 누가 복음이 그 마지막 장에서 그 치유책을 말씀해 주고 계신다. 그 해결책은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열어주셔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복음 24:30-32,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이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첫 번째로 그들의 눈이 밝아져
-이 말씀을 묵상해 보겠다. ‘밝아졌다’ 라고 하는 이 단어는 동사 ‘디에 노이크세산’ 이라고 하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인데. 이 디에 노이크세산은 수동태 동사이다. 문법적인 용어를 써서 정말 죄송한데, 이것을 신적 수동태라고 한다. 그들이 눈이 밝아진 것은 스스로 눈을 밝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밝혀주셨을 때,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았다. 그전에는 누가복음 23장에 나와 있는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였다. 이 눈이 밝아진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용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가 없다. 이 눈이 밝아지는 이 위대한 사건은 특별히 열왕기하 6장에 나와 있는 내용을 생각하게 하는데,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도단 성으로 수많은 병거와 군대를 보냈다. 그러자 엘리사의 사환이 그 수많은 적국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엘리사에게 와서 떨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엘리사가 이렇게 말한다. “대답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데 저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심에 그가 보니 불만과 불변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기 전에는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떨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엘리사가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원의 문을 열어주시자, 불변고와 불 말이 엘리사를 지키고 있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보호하고 있는 성곽이 되어 주고 계시는 것을 그가 보았을 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실 때, 우리가 두려움과 낙심과 고난과 여러 가지 힘듦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길, 그 이면에 놓인 하나님이 예비하신 낙원의 축복과 생명을 우리가 밝게 보고, 기쁨과 감사함과 확신 가운데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문을 열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열 수가 없지만, 또한 이 본문에서는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언제 나타났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떼어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고대 사회에서는 함께 한 집에서 식사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가장 뜨거운 친교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함께 식사하며 친교하고 있을 때, 그들의 눈이 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우리 스스로가 내 자신과 누군가의 눈을 영적으로 밝히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전도 대상자들과 자녀들과 우리의 이웃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의 자리로 나올 수 있도록 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부탁드린다. 예수님과의 이 친교는 언제인가? 주일 예배이다. 모든 교회의 공식 예배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자리요, 찬양하는 자리요, 다락방에서 모여서 말씀과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교제를 나누는 그 자리, 바로 예수님과의 친교의 자리이다. 그래서 참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주님과 함께 친교 할 수 있도록 우리 주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눈이 열려서 주님을 온전히 따라갔던 사람, 존경하는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주기철 목사님이 계신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 참배에 온몸으로 맞서다 해방 1년을 앞두고 순교하셨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연회를 하면서 아내 오정모 사모님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라고 하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모님의 믿음이 더 놀랍다. 자녀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정 형편도 극도로 궁핍했지만, 사모님께서는 약한 말씀 대신에 감옥에 있는 주기철 목사님을 면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주 목사님의 입관 예배에서도 조용히 일어나서 비장한 얼굴로 조문객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제 아내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ㅋㅋㅋ 이런 놀라운 신앙 승리의 비결이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주기철 목사님께서 작사하신 찬송과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사절 가사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사절 가사를 한번 읽어드리겠다.
 
※아픈 다리에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기를 보여주니 7전8기 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곡에 나도 가게 하옵소서.
 
누가복음 23장에 엠마오로 가는 그 두 제자의 눈을 열어주셨던 예수님의 역사가 2천 년의 시간과 극동아시아와 근동아시아의 그 엄청난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역사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주기철 목사님의 고백과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만 그 눈이 열려지셨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듣게 되면 우리에게는 유익이 없다. 오늘 저녁 저와 여러분 모두 주기철 목사님이 보았던 것처럼 영생의 길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더욱 밝히 허락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두 번째 묵상을 하시고 마치겠다.
 
2)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는 주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있다. 여기서 ‘풀어주실 때’라고 하는 단어가 ‘눈을 열어주실 때’라고 하는 단어와 사실 동사가 똑같다. 이 동사는 ‘디아 디아노이고’ 라고 하는데요 이 동사는 ‘해설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또한 있다. 무엇인가를 열다, 보다 그리고 해설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3장에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셨는데, 지금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상세히 설명해 주셨을 때 가리켜 성경을 풀어주셨을 때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시니라. 할 때 이 상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하는 이 단어 역시도 해석하다, 번역하다, 설명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 어떤 말씀일까요? 성경을 풀어주신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자세하게 능력 있게, 해석해 주신다. 라고 하는 의미이다. 바로 성경을 하나님께서 해석해 주실 때 그리고 그 해석된 성경 말씀을 성도가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성도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자가 성도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 장로교회를 창시하셨던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했었던 언급을 한 번만 읽고 마치도록 하겠다. 기독교 강요. 제6장에서 칼빈은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빛을 바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의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올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조금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순전하게 바라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이 똑바른 길을 따라 전진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게로 나아와야 한다. - 존 칼빈-
-이와 같이 주님께서 성경을 해석해 주실 때, 그리고 그 성경을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실 때,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십자가의 길 안에 있는 낙원 가는 길을 볼 수가 있다. 십자가의 눈물과 고난과 인내의 점철된 그 고난으로 덮여진 그 안에 있는 천국 가는 보화와 하나님의 영광과 낙원의 길을, 우리는 주님이 성경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눈을 밝혀주실 때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 마을로 가는 그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풀어주셨던 예수님의 역사는 장차 부활하시고, 오순절 날 성령님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신 다음에 교회를 통하여 하실 예수님의 사역의 전조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누가 복음 23장에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불어주셨던 그 일을 하게 하시려고 교회를 설립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불러주셨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오늘 안아주심의 본당 이 자리에도 와 계신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4장은 그 옛날 예수님을 만났던 2천 년 전에 그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경험케 하시고, 또한 경험한 이 은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주님을 비방하고, 희롱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군인들과 관리들과 백성들과 같은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살아계신 주님 앞으로 인도할 사명을 주시려고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신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 주님과 더욱 깊은 친교를 가지시고,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시므로, 눈이 밝아져 더욱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고난도 함께 받으실 뿐만 아니라 낙원의 영광도 확실히 약속받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요약
누가 복음서를 통하여 가장 처참한 죽음의 장소에 찾아가셔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주님의 은혜를 조명하여 주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깊이 누리도록 해주신 것과 또한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눈을 밝게 열어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케 하셨으니 하나님 말씀을 통해 더욱 뜨거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로마어로 붙었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을 경멸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쓴 것이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며,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셨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과 수욕이 하늘의 영광이 된 것이다. 행악 자는 예수님을 비방했으나 다른 행악 자는 회개와 함께 예수님께 은총을 구했다. 악한 행악 자는 자신의 처형이 억울하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행악 자는 자신의 악행을 자인하며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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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6월 21일)
제목: "다른 신은 없다"
말씀: 열왕기하 5:14~1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강경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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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5:14~19,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16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 앞에서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하되 그가 거절하니라.
17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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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수요 저녁 기도회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이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온전히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오니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이에 끝나는 시간까지 온전히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옵고 살아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말씀 부흥과 또 예배의 부흥에 새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 부흥 보고 수요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수요일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를 경험하고 응답받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5장 14절부터 19절입니다. 구약 568쪽, 열왕기하 5장 14절부터 19절 말씀이다. 교독함.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어떤 일을 결정하려고 할 때 갈등할 때가 있다. 예컨대 사업을 하시는 분은 자기가 좋은 일을 또 좋은 일에 쓰기 위해서 돈을 벌려고 할 때, 어떻게든지 세를 줄이기 위해서, 세금을 줄이기 위해서 절세를 하려고 하는 것을 뛰어넘어, 예를 든다면 탈세를 하는 그런 환경이 주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일 직장인이 자기가 직장생활하면서 좋은 정보를 얻게 되었을 때, 그 정보를 직장을 위해서 써야 하는데 자기의 경쟁력을 위해서 그것을 숨긴다면 그 숨기려고 할 때 그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을 두신 우리 학부모 입장에서 좋은 학교를 보내려면 좋은 학군에 있는 학교를 보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학군에 가기 위해서는 좋은 주소가 또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위해서 위장 전입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이렇게 그동안 우리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을 때, 여러분은 갈등하셨습니까 아니면 아예 내 생각대로 해버리셨습니까? 특히 주일 예배 드리는 것이 시간이 있을 때 드리겠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큰 고민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고민하셔야 한다. 아니요, 고민만 해서는 안 되고 고민에 대한 선택과 그 행동을 하셔야 한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생명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예배가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원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 백성이 되었다면 그 은혜의 마땅한 행동을 반응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기쁨이오, 구원의 감사로 표현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는 선택이 될 수가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릴 때, 주일을 지킴으로 인해서 우리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느껴야 된다. 라는 그런 두려움에 직면한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그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시기를 소망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배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결단할 때가 있다.

예컨대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사업하다가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돈 쓸 곳이 많은데 수입은 적고 십일조를 드려야 하나? 일주일의 시간이 부족한데 주일을 성수해야 되나 나의 신앙도 부족한데 전도도 해야 되나? 이런 믿음의 갈등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라는 것을 믿으신다면 그 모든 문제는, 그 모든 갈등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믿음의 갈등의 문제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답을 찾으시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아름나라 장군 나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교장 강의에 몸을 7번 받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이후에 하나님이 하나님 위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믿게 된 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고,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네 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시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1.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역사하심에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람 나라 군대장과 나아만 열왕기하 5장 1절에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다.

*열왕기하 5:1,
1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성경은 나아만에 대해서 나아만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라는 이 사실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들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비록 이방 나라 군대 장관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전쟁에서 승리케 하셨다. 라는 것이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택하신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나라 군대장과 나만을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만 다스리고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이끄심과 인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라는 것이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에게도 모든 일들이 다 펼쳐질 것인데, 여러분의 있는 모든 일들도 다 하나님의 능력에, 하나님의 수하에, 손 안에 다 들어와 있다. 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뜻, 다신 바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민족의 신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계가 없다. 우리 성모님 중에 요즘 경제적으로 어려워하거나 육체적으로 힘들어하시는 분 계실 것이다.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원망의 마음으로 하늘만 물끄러미 쳐다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야 될 것이고, 우리의 그 어려움에서 건져내달라고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 상반 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야고보서 5:13,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운영하고 계시는 이 하나님은 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일깨워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안다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손해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 받는

2.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사람의 진심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의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이 나병, 이 나병 환자인 나아만이 이스라엘 땅에서 잡아온 어린 소녀 자신의 아내의 종으로 두게 되었다. 그 어린 소녀가 나아만 장군의 병을 안타깝게 여겨서 그런지 그에게 치료에 좋은 정보를 주게 된다. 그 어린 소녀가 나아만에게, 나아만 아내에게 치료할 수 있다. 라는 그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데, 이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자신을 종으로 삼은 이 장수를 과연 치료해 줄 만큼 고마운 존재일까? 그리고 그 정보를 믿는 이 장수의 태도는 과연 어떤 마음의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것일까? 우리 여기에서 나아만과 나아만의 아내와 그리고 이 어린 소녀의 마음을 통해서 이 사람들이 서로가 어떻게 서로를 대했는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종으로 잡혀온 어린 소녀가 나아만과 그의 아내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 만일 나아만과 그의 아내가 이 어린 소녀를 종으로 잡아서 자기네들이 실컷 부려먹고, 괴롭히고, 타박하고 그리고 또 괴롭혔다면, 어린 소녀는 자기 주인 나아만이 그런 중병에 걸렸을 때, 그에게 그 병에 대해서 관심조차 갖고 싶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린 소녀가 평소의 말과 행동이 진실하지 않고 불성실했다면, 나아만과 그의 아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우리의 평소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깨닫게 된다.

사람들에게 평소에 우리가 어떤 마음 자세로 다가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내용이다. 이렇게 해서 나아만 장군은 그 치루의 정보를 듣고 나서 그 내용을 자기 주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왕은 그 정보대로 이 나아만 장군을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에 보내게 된다. 아람 왕이 나만 장군의 보고를 들었을 때, 이 왕의 입장에서는 치료하라고 결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다. 왜 그럴까요? 그 정보를 누구에게서 얻었느냐를 물었을 때, 그 정보는 바로 종으로 삼았던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서 종으로 삼았던 어린 소녀에게서부터 나온 이야기라고 한다면 얼마나 믿음이 가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러한 어린 종의 말의 귀를 귀담아 듣지 않을 법한데, 이 아람 왕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나아만 장군을 이스라엘에 보내게 된다. 자, 이 내용을 보면서 만일 어린 소녀가 주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없어서 이스라엘 선지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치료에 이 과정이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나아만의 아내가 어린 이 소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이 치료 과정이 이루어졌을까? 또 나아만 장군이 자기 아내의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 치료의 과정이 이루어졌을까? 마지막으로 왕이 이스라엘 선지자가 나만 장군을 치료할 수 있다. 라는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과연 이 치료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끄심이 있음을 알게 된다. 참 하나님의 이끄심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환경임을 알 수 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불치의 병이 낫는다는 것은 이것은 상식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방법적인 부분에 있어서 우리 두 가지 사실, 이 문제를 해결 받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사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첫 번째는 눈에 보인 그 사람의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이끄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이루어질 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받는

3. 세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그 정하신 방법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보내어 자신의 군대장과 나만을 치료해 달라고 한다. 그 병을 고쳐달라고 하면서 그에게 은, 10달란트, 금 6천 개, 또한 의복 10벌을 선물로 보내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보다 강국이었던 아람으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이 소식을 접하자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 불치병이었던 나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보다 강대국인 나라가 이것을 빌미로 자신들을 공격하려고 전쟁으로 자신들에게 공격해 오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너무나 힘든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선지자는 사람을 보내서 왕에게 그 나아만을 자기 집에 오게 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나아만이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집 앞에 서게 된다. 그런데 이 엘리사 앞에 서 있는데, 엘리사가 바로 와서 자기를 마중 나오고 환대할 줄 알았는데, 그러기는커녕 엘리사의 사제에게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요단강에 몸을 7번 씻으라 내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이 말을 들은 이 나아만 장군은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이렇게 자신을 대할 수 있는지,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이 치료 방법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 심정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열왕기하 5장 11절이다.

*열왕기하 5:11,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게 너무나 다른 치료 방법 제시에 비해서 나아만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너무나 먼 길을 왔겠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이 치료 방법에 대해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더 갈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갈등을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갈등이 이렇지 않는가? 인간적으로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 그보다 더 못한 방법으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제시를 받는다면 여러분은 그 방법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의문을 갖게 된다. 왜 다른 강이 아닌, 요단강에 몸을 씻으라고 했을까? 그 당시에 요단강보다 깨끗하고 큰 강인 아바나, 아바나와 바르발 강이 이 다메섹 강에 이 아람에 있었는데 왜 더 좋은 이스라엘에서도 볼 수 없는 그 좋은 강에 씻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스라엘까지 왔기 때문에 가까이에 있는 요단강의 씻으라고 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왜 7번 씻으라고 했을까? 성경에서는 이 7이라는 숫자를 굉장히 좋은 숫자로 상징하고 또 쓰이고 있다. 이 7이라는 숫자는 성부, 성자, 성령 3의 숫자와 그리고 동서남북의 이 세상을 이야기하는 사회 숫자가 합해져서 완전한 수라고 하기도 하고 또 세븐, 행운의 숫자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이 치료만 했을까? 예를 들면 이 하나님께서 여리 성을 붙일 때, 7일 동안 돌게 하시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게 한 다음에 그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할 때도 7이라는 숫자는 믿는 사람들에게 7일째 되는 날, 안식년을 갖게 하고 그리고 7년에 7번이 지나면 그다음 해에 50년에 희년이라고 해서 모든 종들을 자유하게 하는 그런 너무나 좋은 수로 우리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좋은 의미와 다르게 생각해봐야 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굳이 7번 해야 된다. 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 번으로도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6번도 아니고 8번도 아닌 이 7번을 통해서 쉽게 했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7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정한 그 방법대로 그것에 순종하게 했을 때, 그 결과를 낳게 하려고 했다. 라는 것이다. 그 말은 나만이 나병에서 나온 이유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순종했을 때, 깨끗한 물도 아니고 우연히 한 번, 우연치 않게 한 번 물에 담가서 낫게 하는, 그런 오해를 살 만한 방법도 아닌, 하나님께서 정한 7번의 그 방법대로 순종하게 함으로써 낫게 했다는 것이다. 자, 이렇게 치료의 방법을 정한 이유가 있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나아만이 낫게 된 것은 우연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길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컨대 이스라엘의 제사장 선지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붓게 되는데 그때 그 기름을 관유라고 한다. 그 관유를 만드는 방법이 출국기의 30장 23 25절에 나와 있다.

*출애굽기 30:23^25,
23 너는 상등 향품을 가지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과.
24 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로 하고 감람기름 한 힌을 가지고.
25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여기에 보면 몰약 6개, 창포, 계피 2대 1 대 2의 이 비율 하고 또 올리브유를 섞어서 만들게 되는 이 성경에서 정했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런 방법으로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 이 방법대로 관유를 만드는 이 방법 중요하기 때문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방법 향 기름을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는 그런 직분의 사람들에게 그 기름을 만들어서 사용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법대로 관유를 만들고 그것을 구별하게 사용하라는 것이고 이 향이 좋다고 해서 아무나 만들어서 사용하여서는 안 될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출애굽기 30장 31절과 3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출애굽기 30:31-32,
3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내게 거룩한 관유니.
32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이 방법대로 이와 같은 것을 만들지 말라 이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히 여기라.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법대로 하느냐? 입니다. 비슷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 아담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분향을 하게 되는데, 이 분향을 할 때, 이 두 아들이 다른 걸로 분향을 하였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레위기 10장 1절에서 이것을 말씀한다.

*레위기 10:1,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그 결과
*민수기 26:61,
61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죽었더라.
-26장 61절에 나온 대로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들리다가 죽었더라.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명령한 불이 어떤 불인지, 구체적으로 설명은 되어 있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정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하나님 앞에 분양을 하였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과 똑같지는 않지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 그대로 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지시를 하고 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비로 나만이 제시 받는 치료 방법이 자신의 생각대로, 그런 방법대로 제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자신이 생각하지 아니한 이 방법과 이것에 대해서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방법을 따르시겠습니까? 이 상황에서 남한과 함께한 그의 종들이 열왕기하 5장 13절에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열왕기하 5:13,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 이보다 더 한 방법을 제시받았어도 순종하지 않았겠습니까? 라고 그의 종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의 생각과 달라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아만의 종들이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평소에 이 종들이 너무나 순종을 잘한 삶을 살지 않았나, 거기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런 약한 자를 들어서 쓰는 것을 또한 보게 된다. 어찌 이런 말을 나만의 종들이 할 수 있는지, 너무나 대단하게 생각이 든다. 이 종들의 말을 들은 이 나아만이 이 갈등을 하였을 때, 이 종들의 말을 통해서 그는 답을 찾게 되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과 내 생각이 다를 때, 갈등을 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회복과 부흥의 길이다. 나아만이 종들의 말을 듣고 순종했을 때, 그 결과가 무엇인지 열왕기하 5장 14절에서 증언하고 있다.

*열왕기하 5:14,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이렇게 치유함으로 이렇게 순종함으로 치유를 경험한 나아만 장군은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는데 여란기하 5장 15절에 보면,

*열왕기하 5:15,
15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이방인인 나아만이 어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하나님을 참신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는지, 그리고 다른 신은 없다. 라고 고백할 수가 있는지, 어떻게 이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나만이 의심할 수 없는 방법으로 치유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치료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이 나만을 스스로 체험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여러분도 그렇게 고백이 되십니까? 어느 성도님께서 심방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자신은 여느 부모처럼 자녀들을 공부에 공부를 계속 강조하면서 세상에 뒤지지 않고, 세상에서 잘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신앙보다도 공부의 우선순위를 두고 키웠다고 한다. 그런데 열심히 공부한 이 자녀는 변호사가 되고, 또 다른 자녀는 의사도 되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세상 적으로 잘 키웠다고 칭찬을 해주는데 이 부모는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고, 그에게는 마음의 근심이 생기게 됐다. 이 자녀들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게다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건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가 왜? 하나님보다 또 하나님 말씀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지 않고, 저 아이를 키웠을까? 그는 마음에 한이 마음에 마음의 아픔을 그는 겪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제일 우선순위에 두는 자녀로 키우고 싶은데, 지금 자녀들이 이미 커버려서 자기에게 다시 한 번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제일 우선순위에 두는 자녀로 키우고 싶다. 라고 그렇게 눈물로 그의 고백을 하였다.

예배에 참여하신 우리 성도님들도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우선순위에 두는 자녀로 키우시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한 믿음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소망한다. 나아만의 이제 오직 제사를 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에게나 드리지 않고, 다만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리겠다. 라고 선포한다.

나아만이 전쟁에서 승리했던 것이나, 이 어린 종 소녀의 말을 시작으로 해서, 믿음이 없으면 결단할 수 없는 이 왕의 허락이나,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자기의 불치의 병이 낫게 되는 이 상황을 보면서, 나만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주변의 상황을 보시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고백할 수 있으시기를 소망한다. 성경 말씀을 통해 받는

네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나아가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천하에 다른 신이 없다고 고백한 나아만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자신의 왕이 우상 리몬의 신당에서 제사를 드릴 때, 경배할 때, 자기도 그 옆에 서서 그를 지지하면서 같이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충신으로서 왕을 보좌하는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상에게 절을 하는 그 상황에 놓이게 된다. 라는 것을 고민하게 된다. 이럴 때 이런 우상승배의 모습에 대해서 용서해달라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이 마음이 없었다면, 이런 고민, 이런 이야기를 엘리사에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원했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거기에 못 미치는 모습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평안히 가라 너는 평안히 가라.” 라고 이야기를 해준다. 이 말은 내가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왕의 시중을 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행동으로 왕에 대한 충성이지, 우상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의미였다.

우리 여기에서 나아만의 자세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길 원한다. 겉으로 보면 우상숭배에 대해 타협한 거 아니냐? 라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타협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하는 하나의, 하나의 예라고 저는 생각이 든다. 나아만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다. 라고 결단하고 고백했는데 현실은 녹록치 않다. 본인이 직접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왕이 숭배할 때 신하로서 그 위치를 지켜야 하는 상황 속에서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만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 나만의 결정을 이해해 주고, 또 그가 그 있는 위치에서 상당히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나만의 마음을 엘리사가 헤아려 준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나아가는 자의 자세이다.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섬기고자 할 때, 조금이라도 마음의 거리낌이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향하여 깨어 있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이 마음,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부응한 상태이다.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이다.

정리하겠다. 나아만의 고백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이끄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하심을 느끼게 해주실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다를 때 갈등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내 생각대로 하고 싶은 마음의 충동을 꼭 이기시기 바란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치료와 회복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참 신이시며,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국민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런 믿음의 경험이 계속 쌓여갈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회복과 부흥을 경험하는 여기 계신 모든 성로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요약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른 신이 없음을 알려주시고, 우리의 신앙의 갈등이 생길 때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로 결단하여야 한다.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나아만을 승리하게 하시고, 치유하게 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주변에 믿지 않는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참 신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과 부흥을 주실 분이심을 인정함으로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아무것도 아닌 그런 나의 존재, 그런 상황 속에서 내게 들려줄 때, 내가 원하는 방법과 내가 원하는 상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의 100% 전심으로 순종하는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이 이루어지는 줄로 믿어야 한다. 나아만이 고백했던 그 이상의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것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구원에 아무런 역할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은사를 자기 치부(致富)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은 큰 불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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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6월 14일)
제목: “구원에 사로잡히다”
말씀: 마태복음 8:28-34
찬양인도: 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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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28-34,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아주 잘 오셨습니다. 말씀의 생기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함께 보실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8장 28절부터 34절까지 말씀을, 마태복음 8장 28절부터 34절까지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겠습니다.
 
-저는 휴전선 GOP라는 곳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휴전선 자체는 거대한 무덤 같았습니다. 죽이려는, 죽으려는 살기가 있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속에 속고 속이는 대남 방송, 대북 방송만 들려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에 그렇게 십자가가 많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십자가 불빛 하나 없는 곳이었습니다. 교회가 없는 곳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언제가 주일인지도 모르고 예배가 있는지도 모르고, 요일도 모르고, 시간도 모른 채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무덤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생명의 이야기보다 죽음의 이야기가 많은 곳이라 음산함은 대단했습니다. 그중에도 근무자들이 교대하는 모든 불빛이 다 꺼지는 시간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달 빛없이 안개가 아주 자욱했던 그런 날이었습니다. 저도 알고 있었던 한 병사였는데 그 병사가 총을 자기 가슴에 대고 쏘았습니다. 3발의 총알이 관통을 하였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 이후가 더 문제였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이 흘러 그 병사의 빈 침장에서 그 병사가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소대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또 죽은 병사와 이야기를 밤새 나누웠다는 병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열 명을 넘어 서기 시작하자 그 소대는 난리가 나기 시작했고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일이 생겨나기 시작하면 부대 지휘관들은 제가 군 종병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저를 찾았습니다. 퇴마사와 신학생을 같은 업종이라 여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지휘관들은 늘 쉽습니다. 가서 처리하고 와! 명령만 내리면 됩니다. 저도 귀신 무서워합니다. 혼자 가려니 더 무섭습니다. 신학교 갈 때도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는데,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그 소대에 도착을 했습니다. 소문대로 벌써 병사들은 하얗게 질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제가 별로 두려워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온 담대함인지 죽은 병사가 늘 누웠다. 라는 그 침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제가 누워버렸습니다. 병사들이 몰려들어서 저를 말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누운 이상 자존심 상하지 않게, 어떻게든 여기서 끝까지 자야 된다. 라는 생각 속에 기도를 하며 눈을 감았는데 너무 쉽게 제가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눈을 떠보니 병사들이 제 주변을 둘러싸 저를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눈을 떴네! 어 살았네!”라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저는 정말 잘 잤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귀신을 봤다는 병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군대 이야기의 특징은 허세와 허구와 허위사실입니다. 하지만 축구 이야기처럼 부풀려 말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이런 사건을 직접 경험한 군인들에게는 잊지 못할 사실이 됩니다. 제게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는 귀신이라는 그 존재의 기억이었고 또 하나는 귀신이 떠나간 기억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마가복음에도, 누가 복음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새 복음서를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합니다. 한자로 함께 공, 볼 관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기록한 제자들이 함께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때 보았던 귀신이라는 존재와 쫓아내던 예수님을 기억하며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귀신의 특징도 보입니다. 사로잡는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자세히 풀어써 보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귀신은 돼지들도 사로잡아 함께 바다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사탄을 ‘디오 블로스’ 라고 합니다. 디오 블러스는 비난하는 자, 고소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를 비난하며 죄로 묶어버리는 존재입니다. 귀신은 이 사탄의 수하입니다. 우리 말씀 한 절 같이 보실까요? 마태복음 12장 26절과 27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26-27,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발 세부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사탄을 귀신의 군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사탄처럼 우리를 속이고 두렵게 하여 사로잡아버립니다. 어떻게 사로잡는지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배에서부터 오늘 말씀은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몰아치는 환경들, 항해의 길을 아무리 돌리려 해도 소용없는 상황들, 꼼짝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물이 배 위에 차올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바다에 자신이 있었던 갈릴리 뱃사람의 바다에 대해서는 아주 자신 있었던 이 갈릴리 뱃사람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고 있습니다. 이때 주무시던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독특한 장면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장면과 함께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 2절에 보면요, ‘배에서 나오심에’ 이렇게 기록이 시작됩니다.
 
*마가복음 5:2,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환경과 상황을 뒤흔드는 바다의 풍랑이 예수님과 악한 영과의 1차전이었다면 이제 2차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귀신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흔들어 몰아쳐서 배의 키를 놓치듯 자신마저 통제가 불가능해진 귀신 들린 사람이 달려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무덤에 살고 있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공간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의 인간을, 우리 인간을 철저하게 고립시켜버립니다. 묶는 것, 족쇄조차 귀신 들린 자를 제어하는 데, 실패합니다. 당시에 주술용으로 사용되던 여러 기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족쇄도 있고 밧줄도 있는데 이 주술용 기구에는 악령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단에게 속박된 자를 다루는 방식이 오히려 사단에게 더 도움을 주는 것 같습니다. 호수의 폭풍을 일게 하는 악한 존재가 간단한 밧줄로 묶는다고 잠잠할 일이 아닙니다. 풍랑이 일게 하는 존재가 바다뿐만 아니라 이미 귀신 들린 사람 안에 맹렬한 폭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옷을 다 벗고 무덤에 살게 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스스로 자해하게 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채 살아가게 합니다. 처한 무기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결국 의욕도 소망도 잃은 채 살아갑니다. 그냥 귀신에게 몸을 맡기며 살아가게 합니다.
 
강남역을 나가보면 ‘타로’점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 어느 때는 강남역이 아니라 타로 역 같기도 합니다. 이미 우리 민족은 수많은 전쟁, 그리고 강탈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내일을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있습니다. 팔자라는 단어입니다. 굴레 속에서 자신의 삶을 우리는 그냥 팔자려니 여기며 던지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말마다 무속 인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회로부터 고립된 인생을 살아가며 귀신에게 능력을 구했던 사람, 마치 귀신이 악령을 쫓을 수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런 지독한 죄악의 굴레가 이제 젊은이들에게 문화처럼 놀이처럼 다가왔습니다. 운세라는 이름으로, 점괴라는 이름으로 내 인생을 돌아보며 맡기라고 합니다. 중독에 익숙한 이들은 내 몸을 맡기는 것에도 익숙합니다. 게임에 쉼을 맡기고, 포르노에 가정을 맡기고, 게으름에 시간을 맡기고, 술 취함에 생각을 맡기고 살다 보면 타로와 운세를 통해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됩니다.
 
어느 날 타로 점을 잘 보는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뜻밖의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싶다고 합니다. 왠지 타로를 통해 예수님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리마저 합니다. 근데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청년이 예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청년의 표현이 놀랍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이 어떤 타로를 삶에서 놓아버렸습니다. 자신의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고, 명성이었고, 인생이었는데 이제는 구원이 청년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청년을 찾아왔던 타로 고객들에게, 청년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에 등록을 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구원이란 이런 수많은 우리의 삶의 상황들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벌거벗은 채 날 뛰는 귀신 들린 자에게 옷을 입혀주시고 피를 닦아주십니다. 덜렁거리는 쇠사슬도 족쇄도 풀어주십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신 사건입니다. 사로잡힌 자를 만나 풀어주시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바다가 고요해지듯, 귀신 들렸던 사람도 이제 잠잠해졌습니다. 옷도 입고 멀쩡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말씀 함께 보실까요? 마가복음 5장 15절 말씀인데요.
 
*마가복음 5:15,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귀신 들린 사람이 달려들 때 두려워해야 합니다. 무덤과 산을 뛰어다니는 모습 보며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나으니 두려워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이 두려운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5장 17절 말씀인데요.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마가복음 5:17,
17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라’ 말합니다.
 
※ 존 옥스 햄이라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랍비여, 떠나주시옵소서. 당신의 능력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재산에 손실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길은 당신의 길과 다릅니다. 당신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저 돼지입니다. 그러니 전능하신 주여 떠나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녀석도 데려가 주십시오. 의 영혼이라고요? 그 영원히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그 녀석을 온전케 하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돼지를 잃어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누구의 영혼이, 이 돼지 값 앞에서 중요하지 않다. 라는 것입니다. -존 옥스 햄-
 
예전에 성경 번역을 하는 선교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성경을 번역할 때, 이해시킬 때 가장 어려운 성경 구절이 이 구절이라고 합니다. 그 원주민들에게 돼지 값과 한 사람의 값은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2천 마리의 돼지가 어떻게 한 사람과 바꿀 수 있는지, 그들에게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웠다고 합니다. 먼 아프리카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 시대도 돈이라면 영혼도 팔겠다고 말하는 청년을 만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래된 영화중에 알파치노와 키아노 리브스가 함께 나왔던 ‘데블스 에드버킷’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유능한 젊은 변호사에게 사탄이 찾아옵니다. 무조건 너에게 승소하게 해줄 테니 넌 나에게 무엇을 줄래? 젊은이는 진실을 팔아버립니다. 그리고 또다시 가족도 팔아버립니다. 그는 결국 스스로가 악마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존 옥슨 햄이라는 분은 계속해서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갑니다.
그리스도는 문밖에 서서 부드럽게 문을 두드리신다. 하지만 만약 당신의 금이나 돼지가 그 출입구를 막는다면 그는 억지로 밀치고 들어오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를 떠나실 것이며 당신의 마음이 보아를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다. 조금은 극단적으로 레디컬 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쉽게 떠나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떠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내 삶에 좀 적당히 일어나면 좋겠다. 상처 난 곳에 소독약, 빨간 약을 바르는 것은 쓰라려 싣습니다. 몸에 아픔이 있는 것처럼 우리 내면의 상처에도 구원의 능력이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즐거운 경험들을 기억하기를 좋아합니다. 즐거운 기억들이 즐거움의 기억이 과거의 즐거움을 재현시켜줘서 지금도 내가 즐거운 것처럼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의 기억도 그렇습니다. 과거의 고통은 기억 속에서 복제되어서 우리를 찾아옵니다. 상처가 크고 기억이 정확할수록 과거의 기억의 괴로움은 현재의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성도님들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구원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이후에 인생에서 일어난 그 괴로웠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과거의 상처는 치유되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대로 남아 고통스럽게 곪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받은 구원은 과거의 기억을 향해, 그동안 사로잡혔던 숨겨왔던 상처의 기억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구급약품과 수술함을 들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아무리 폭풍 같을지라도 아무리 군대 같을지라도 악한 영이 사로잡은 모든 영역들, 죄와 고통과 상처의 영역을 치료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시간 말씀 한 절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29절 하반 절인데요. 하반절만 우리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마태복음 8:29,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귀신들이 최후의 심판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예수님 왜 벌써 오셨습니까? 하고 묻는 장면입니다.
 
다시 말해서 귀신들이 멸망하도록 정해진 시간 그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왔으니, 이제 우리는 그냥 좀 내버려 두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듯 예수님께 흥정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귀신들은 물에 던져집니다. 누가복음에는 귀신들이 물로 상징되는 그 시면, 무저갱 안에 갇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귀신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를 사로잡아왔던 모든 것을 끝장 내는 능력입니다.
 
어느 날 참 사랑하는 친구가 찾아와 이런 얘기를 제게 합니다. ‘아 나 잠을 한숨도 못 잤어.’ 이 친구는 이런 친구였습니다. 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는데요. 머리도 좋아 공부도 너무너무 잘했었습니다. 그냥 마냥 행복할 것 같았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폭풍처럼 찾아온 일이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변해버렸습니다. 남은 어머님과 여동생을 책임지기 위해 그 좋은 성적 다 내려놓고, 젊은 나이에 취업하여 가정을 책임지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내려놓은 자리에 가족이라는 무게를 올려놓고 살아가던 친구였습니다. 지칠 줄 몰라 달리던 이 친구는 정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참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젊은 친구 젊은 때여서 그랬는지 그 많은 상황들보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던 것이 그렇게 힘들었나 봅니다. 자신에게 큰 위로였는지 너무 실연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이때가 기회다 싶어 복음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렇게 지내던 친구가 날 찾아와서 잠 못 잔다. 라는 이야기를 하며 늘어놓는 마음의 이야기였습니다. 난 왜 교회를 가도 가위에 눌릴까? 너 가위에 눌려 잠을 못 자겠어. 지갑 좀 볼 수 있을까? 하는 말에 보여주었는데 지갑 안에 부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 집에 가서 베개속도 뒤져보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몇 장의 부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베개뿐만 아니라 방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부적은 제가 다 받아 가서 태워버렸습니다. 며칠 후 친구는 아주 개운한 표정과 뽀송뽀송한 얼굴로 또 찾아왔습니다. 일평생 가위에 눌려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적을 버렸던 바로 그날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가위에 눌리지 않고 너무 잘 잤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 잘 되라고 큰 돈 들여 사 온 부족이라고 합니다. 아들이 어머니를 붙잡고 펑펑 울며 평생 가위에 눌렸던 이야기를 처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부적을 버리는 그 순간부터 너무 잠을 잘 자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엄마, 우리 교회 가자. 엄마도 나처럼 평안히 잠드는 인생 살았으면 좋겠어. 라는 말에 어머니가 교회를 따라 나오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구원의 사로잡히다.’입니다. 제 친구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지독한 인생의 무게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했던 감춰진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귀신을 만나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로마의 정치적 악재가 군대 귀신이라는 것입니다. 민족의 해방을 설명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에 있는 폭풍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자보다 못한 모습으로 때로는 지켜 달라. 소리치고 살려 달라. 부르짖어도 깨울 스승조차 없는, 누가 보아도 버려진 한 개인의 구원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귀신 들린 사람은 민족이 로마로부터 해방되어도 여전히 무덤에서 소리 지르며 산을 뛰어다녔을 것입니다. 하지만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민족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셨지만 모든 일정을 뒤로 하고 이방 도시를 찾아 나서셨으며, 그리고 한 사람, 귀신 들린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말씀하십니다. 이 한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 내면에도 시도 때도 없이 폭풍과 같이 불어오는 상처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아픔을 준 기억도 있고, 여전히 숨겨두고 싶은 고통의 기억도 있습니다. 난 잊었어! 라고 수도 없이 되 내이며 망각이 은혜야! 섣부른 위안을 하며 무덤을 떠나 집에 왔는데, 여전히 무덤에 지내는 것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역사는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구원의 일들은 오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우리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기억은 악몽과 같은 시간 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억은 구원받지 못했는데, 과거의 아픔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지금 나는 평안하다 말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던 한 신학자의 이야기를 한참을 읽어보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문으로 정말 긴 시간 자신을 괴롭혔던 한 사람을 기억하며 아주 긴 페이지를 할애하며 책의 많은 부분들을 그 사람에 대한 이름을 불러가며 이렇게 글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오랜 시간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찾아서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이며, 모든 분노를 저는 더욱 키웠습니다. 그런데 당한 악행을 잘못 기억하는 것은 내 영혼을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악이라는 것이 완전히 승리하려면, 온전히 승리하려면, 한 번만 이겨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악은 꼭 두 번의 승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악행이 벌어지는 바로 그 순간 첫 번째 승리를 맛보고, 악을 되갚을 때 두 번의 승리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기 쉽습니다. 더 지독한 악으로, 더 지독한 복수로, 더 지독한 파멸로 왜곡되기 쉽습니다.
 
청년부의 사역을 하면서 청년들을 참 만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청년들을 만나며 놀라운 사실을 하나 듣게 됐었습니다. 생각보다 참 많은 청년들이 학교 폭력에 시달렸었다. 라는 것입니다. 학교 폭력이라는 것은 감히 쉽게 누구에게 말할 수 없고, 내가 어디 가서 작은 당했던 흔적마저 드러낼 수 없는 것이라, 누구나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라 정말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또 학교 폭력의 특징은 잊혀진듯하지만 우리 삶에 깊이 새겨져 기억된다는 것입니다. 폭력을 당했던 당사자는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어떤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가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집니다. 하지만 남은 기억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남자 청년이나 여자 청년이나 비슷한 양상인데요. 남자 청년에게 나타나는 것은 이런 모습들이 좀 나타납니다. 예전에 우리 남자 집사님들도 공감하실 텐데 무협지 많이 읽어보셨죠? 저만 읽어봤나요? 영웅 문이라고 들어본 적 없으십니까? 손에서 장풍이라는 것이 나가고 사람이 날아다니는 소설 보신 적 없으십니까?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너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내가 악한 무리들을 마음껏 때려보시는 것들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잔인한 컴퓨터 게임에 몰입을 하게 됩니다. 소설 속에서 나는 강하고 게임 속에서 나는 잔인합니다. 나를 괴롭혔던 일을 생각하며 모든 분노와 그날의 기억들을 쏟아내며 보상받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게임이나 그런 소설 안에서 오히려 내 기억은 더 붙잡히게 되고, 어느새 기억은 더 과장되게 되고, 감당할 수 없는 수준 되면 급하게 닫아버리듯 망각이라는 섣부른 방법만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가 기억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가해자들을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이며, 그들이 수치심과 죄책감과 도덕적 열등감을 느끼지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기억 속에서 악이 승리하도록 내 삶을 바치는 것 밖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1년 전 뉴스마다 개에게 물려 축 늘어진 아이의 모습을 연신 보도하던 기사가 기억납니다. 이 뉴스를 보며 도스토에프스키가 지독한 이야기를 던졌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네 살배기 아이가 개들에게 던져져 먹히는 것을 지켜본 그 어머니의 경험은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글을 읽던 신학자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마치 큰 사고로 발 모양이 다 찌그러져 이전에 신발은 다시 신지 못하는 인생이 된다. 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다시 신지 못할 신발은 버리듯 잊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려면 기억은 무시하라고 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라고 되 내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에 지하실에 가두라고 합니다. 지하실에서 이 기억이 야수처럼 소리 지르고 발을 울지라도 외면해야 우리는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맞습니까? 이렇게 살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이게 구원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귀신 들린 것 같은 삶의 현장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그 걸음이며 맞이함입니다. 누구도 절대로 예수님조차 절대 할 수 없어 확신하는 그곳에 예수님이 오셔도 안 돼, 내 삶의 이곳에서는 예수님이 오셔도 이거는 소용없어, 아니 오시지 않아도 돼. 라고 그렇게 거부하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바로 그 순간이 구원입니다. 우리가 상처받고 부서지고 깨어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우리를 마주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순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예수님을 만나 사랑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말씀은 출애굽기를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장면과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과 비교합니다. 제어할 수 없는 귀신의 그 능력, 귀신에 들렸던 사람의 그 능력과 바로가 가졌던 그 제어할 수 없는 권세를 비교합니다. 돼지들이 바다에 익사하는 것과 이집트인과 병거가 바다에 수장되는 것들을 비교합니다. 성경이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비교하며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기억들, 그걸 붙들고 복수와 분노로 부르르 떨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기억, 구약 성경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은혜의 기억, 말씀 가운데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신성한 기억, 거룩한 기억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진실 된 기억들이 우리를 찾아오기 시작하면, 그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기억들이 우리를 사로잡아가게 되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지옥의 우리의 고통의 시면에 끝까지 도달하여 내가 지옥으로부터 구원된 사람임을 떠올리며 그 사실을 붙잡고 살아가게 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만 우리는 과거로부터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으며, 현재로부터 우리의 삶 속에 구원의 일들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으며, 미래의 그날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들을 붙잡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막막한 현실 앞에 하나님의 역사는 타협도 망설임도 없습니다. 어떤 기억도, 어떤 경험도, 삶의 어떤 현장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늘 내가 예수를 믿는 믿음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지은 듯한 기억과 오늘을 사는 치열함과 내 일에 대한 두려움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에 정이 놓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재판관이 될 것이며, 그분은 우리의 기억을 틀림없고 정확하고 완전하게, 모든 악행들은 그 의도까지 낱낱이 기억하여 이웃에게 간위에어나 하나님의 정항한 모든 심판까지 주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은혜로 살려주시고 구원하신 일들만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의 저주와 그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끊어지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은혜의 생명이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요약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무지하고, 무능하고 연약한지, 풍랑이 있는 것 같은 인생의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하고, 내면에 몰아치는 상처받은 기억과 잊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죄의 문제를 구원의 능력으로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의 기운과 생명의 역사와 생명의 일들이 삶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신하며, 여전히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게 하심에 감사해야 한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여 주신 것과 우리로 새 생명을 입으며 살아가게 하신 주님을 경배하며, 그 능력을 의지하며, 과거의 상처와 기억이 아니라, 과거에 묶여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에 사로잡혀 결국에 찾아올 천국의 소망을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 사단의 권세는 우리의 인생을 사로잡기를 원하나 구원의 능력이 이미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에 우리가 붙잡고 있던 과거의 상처 받은 기억과 지독한 죄의 문제까지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마음 가운데 다 처리해 주신 줄로 확신해야 하며, 사랑의 교회가 동일한 본향을 사모하며 사랑의 동산을 준비할 때, 시대를 바꾸는 제자도와 세계 선교를 일깨우는 믿음 계승의 플랫폼으로 쓰임 받는 자가 되고, 제2의 양화진이 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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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3년 6월 7일)
제목: "부흥(復興)의 중심에 서서 외치다"
말씀: 여호수아 14:6-12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금동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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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 14:6-12,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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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 3 상암 대회에서 부어주신 은혜와 성령의 선한 인도하심에 힘입어 오늘 부흥(復興) 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와 응답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서 14장 6절로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서 14장 6절-12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340면, 우리 한 절씩 한 절씩 교독하신 후에 12절은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서 14장 6-12절 말씀을 통하여서 ‘부흥의 중심에 서서 외치다.’ 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갈렙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갈렙의 이 이름의 의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로 ‘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당시 개는 종, 서번트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또 수탉의 울음소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약속을 백성들에게 외치는 갈렙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은 갈, 전부라는 뜻과 렙, 하트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합하면 ‘마음의 전부를 드리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이며, 언약을 외치는 자이며,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인생은 망한 것 같아요.” 한 50대 중년의 남자 집사님이 어느 날 저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젊은 날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합니다. 교회 오빠, 교회 누나, 이런 거죠. 신앙생활만 잘한 것이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잘해가지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좋은 학교에 좋은 대학교에 갔고 또 그 당시에 쉽지 않았던 유학도 다녀와서 좋은 회사에 잘 취직해서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좋은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서 이제 회사에서 그를 명퇴의 대상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참 버림받은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조차도 사춘기가 깊어가는 딸아이의 태도를 바라볼 때, 이 아빠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더라는 겁니다. 더 이상 아빠를 존경하지 않는 말투로 내뱉는 아들을 바라볼 때, 가정에서조차, 내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 중년 남성 이 남자 집사님의 마음은 참 어땠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특히 자녀 여러분 여기 자녀가 없네요. 안타깝다. 아빠들도 많이 옵니다. 다만 자녀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숨기는 것뿐이에요. 얼마나 서럽고 억울하고 당황스러웠으면 그러셨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남자도요 다치면 아파요. 남자는 무슨 우리도 아파요. 아내 분들 잘 들으세요. 남편도 마음이 상하고 삐져요. 남편도 아내 분들처럼 마음을 다칠 수 있고 상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제 인생은 쓰레기장 같습니다. 남아 있는 것들은 쓰레기밖에 안 보이는 인생입니다. 누구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저를 찾지 않아요. 저는 버려진 걸까요? 저는 낙오자일까요?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날의 많은 아버지들에게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과거 젊은 날, 우리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었습니다. 하지만 30~40년이 지나고 어느 중년의 모습을 한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마치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아버지들은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잘 살아가는 것일까요? 특히 그리스도인이지만 잊혀져가는 세대로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가치와 품격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 분들이 단지 이 시대의 중년의 남자 분들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잊혀져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이러한 현상은 여성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분들, 남성분들, 중년의 문제이기만 할까요? 아니요 여전히 가정의 불화 가운데서 내가 이 가정의 불화의 원인 같이 여겨지는 우리 자녀 세대도 동일하게 나는 무가치하고 나 내 인생은 잊혀져가는 그런 느낌을 다 받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이런 잊혀져가는 사람들, 이런 잊혀져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그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가치를 말씀으로 발견하며 다시금 열정과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45년 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출애굽 하여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12명의 정탐꾼 이야기와 이어져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이제 하나님의 땅으로 나아가기 전 그들은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40일 후에 돌아와서 보고대회를 엽니다. 그런데 12명 가운데 10명이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그 가난한 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거인 족들과 그들이 가져 가지고 있는 무기를 살펴볼 때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 말하며 패배주의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패배주의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홍해 사건과 놀란 기적 사건들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통곡하며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전가하고 모세에게 돌을 던지려고 할 때, 오늘 주인공 갈렙이 옷을 찢으며 등장하며 외칩니다. 민수기 14장 8절과 구절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민수기 14:8-9,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들려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라.
-라고 갈렙이 지금 멋들어지게 외치고 있습니다.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 갈래의 연설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래에 이런 믿음 보고를 보고 해 손을 번쩍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노하던 모든 동족들을 침묵해 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그의 모습은 끝이 났습니다. 그는 그 이후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민수기에서 몇 번 그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의 행적이나 업적에 대해서는 무안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그는 잊혀 진 존재, 마치 낙오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는 잊혀 진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45년이 흐른 겁니다. 45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출애굽 1세들은 다 죽었습니다. 광야 40년이 지나고 드디어 이스라엘에 약속한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5년의 전쟁의 시간이 더 지났습니다. 이렇게 45년이 지나고 이제 갈렙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우리가 잊고 있던 갈렙이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나타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헤브론을 요청합니다. 헤브론은 어떤 땅입니까? 창세기 13장 8절 가운데 아브라함이 구했던 성음이었고, 창세기 15장 5절 가운데 아브라함이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왕정시대,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 받게 될 땅입니다. 그렇다면 갈렙은 어떻게 45년 동안 잊혀진 존재에서 헤브론 땅, 바로 앞에서 유다 족속의 대표로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다시금 등장하여 그의 인생의 최고의 시간, 최고의 전성기를 다시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제 한물 간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죄송해요. 한물 간 이런 다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요. 저도 이걸 쓰면서 제 제가 떠오르는 거예요. 제가 내 모습이 산물 같다는 단어를 너무 쓰고 싶지 않아요. 격하게 쓰고 싶지 않아요. 근데 어떻게? 환물 간 것 같은데요... 최고의 전성기를 하나님 앞에서 다 들을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두 가지 정도를 우리가 함께 살펴볼 텐데요.

I. 첫 번째로 하나님께 전심이어야 합니다.
-오늘 갈렙의 외침처럼 하나님께 전심으로 외쳐야 우리의 최고의 전성기를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외칠 때 우리는 다시 영적 최고의 전성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45년의 공백을 모두 깨고 오늘 본문에서 다시금 이풍당당하게 등장합니다. 잘 들어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그의 외침은 글자로 적혀 있는데 마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의 소리 가운데 힘과 자신감이 넘쳐나는 것을 특별히 까랑까랑한 그의 육성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오늘 자세하게 확신 있게 적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민수기 4장 24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심이 뭐야?’ 라고 생각하는데요. 민수기 14장 24절 함께 볼까요?

*민수기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쓴 즉 그가 갖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드리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이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갈렙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그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기억하고, 아니 마치 세밀한 시나리오처럼 그를 등장시키고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는데 갈렙을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을 기억하시고 그를 다시 오늘 헤브론 땅, 약속의 땅, 왕의 땅 앞에서 위대하게 등판시키시는 이유는 바로 그의 마음이 갈렙의 마음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히브리어로 ‘누아흐’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영(靈)을 의미하는데 그러니까 그의 영적 상태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는 거예요. 갈렙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의 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 갈랩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하나님 나에게 전심을 드리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런 그의 전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을 다시 한 번 잘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서 14장 7절입니다.

*여호수아서 14:7,
내 나이 40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 하였고.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성실한 마음은 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말로 직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믿음의 인테그리티(Integrity)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복음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언약을 온전히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에게 진심이며 전심인 사람이 바로 갈렙 이였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하나님께 전심인 사람들이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우리 성경을 다시 한 번 좀 살펴볼 텐데요.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 앉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6장을 한 절 더 보겠습니다.
*신명기 6:4,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두 구절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들으리라는, 들으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구약에서 말씀에 대해서 들으라는 것과 신약에서 복음을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히어링 또한 리스닝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들으라. 라는 듣고 반응하는 걸 말합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쉐마는 쉐마에서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듣고 멈추라는 게 아니에요. 확장되어져서 듣고 반응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듣고 반응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네, 여러분들이 지금 상상한 단어 바로 그것 순종입니다.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듣고 반응함 행함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심을 인정해 주세요. 바로 갈렙이 이런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헌신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종의 헌신의 사람을 우리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잊어도 모든 가족들이 나를 다 잊어도 우리 하나님은 이 순종하는 사람을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인생의 사명의 타이밍에 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갈랩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외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갈레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으로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외치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로 갈렙처럼 믿음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잊혀져가는 우리의 인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갈레처럼 믿음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우리 오늘 성경 본문 12절 말씀을 같이 볼까요?

*여호수아 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니.
-우리가 믿음으로 온전히 설 때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그때를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갈렙은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45년을 버텼습니다. 갈렙은 45년을 기다리면서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을까요?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한 번도 마음에 의심이 없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 갈래에 그런 실망하거나 의심하는 모습은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 시편의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44편 23절, 24절 가운데 :

*시편 44편 23-24,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악재를 잊으시나이까.
-혹시 우리 마음이 이 시편의 내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참 다행입니다. 저는 이 시편의 기자의 마음에 100% 동의합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라서 말입니다. 분명 젊은 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생을 우리의 전 생애를 드리며. “주여 제발 나를 저를 우리를 사용해 달라.”고 부르짖었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그곳이 ‘아골 골짝 빈들일지라도 주여 저를 보내소서.’ 하며 우리가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안 했습니다. 저는 젊은 날부터 신학을 했습니다. 신학교에 다녔어요. 1학년 때부터 1학기 때부터 채플 시간을 채플을 매일매일 하거든요. 근데 이 찬송가를 맨날 부르는 거예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떻게 간다고요? 왜요? 자신이 없어서요. 저는 못 가겠습니다. 저는 안 가겠습니다. 저는 빼시고 옆에 있는 이분을 보내주옵소서. 저는 사실 지금도 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요. 내가 갈 곳이 아골 골짝 빈들 일까봐서요... 이거 말하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해버렸네. 그렇게 우리가 강력하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맡겨주셨던 소명과 사명에 의하여서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쌓아온 우리의 인생 앞에서 잊혀지니라. 그 어떤 고난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인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된 기다림을 잊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찾습니다. 나의 존재를 잊지 마시라고 다시 나를 불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과수원집 손자입니다. 갑자기 네 저를 자꾸 불쌍하게 보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래 뵈도 저희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서는 우리 동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과일을 사 먹어본 적이 없어요. 왜요? 과수원이 우리 할아버지 건데, 복숭아도 먹고, 포도도 먹고, 수박도 먹고 저는 왜 과일을 사 먹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그럼 과수원만 우리 할아버지 땅일까요? 아니요. 지금 정확한 제가 명칭은 말할 수 없습니다만 충북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 445번지 그 일대가 저희 본적인데요. 다 우리 할아버지 땅이 논도 우리 할아버지 땅, 밭도 우리 할아버지 땅 모두 모두 우리 땅 근데 망했어요. 망하는데 너무너무 억울해요. 왜 억울한지 아세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 땅에서 온천이 터진 거예요. 그때 그 시세로 하면 여러분이 강남의 빌딩을 살 수 있었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었습니다. 근데 망했어요. 왜 망했습니까? 모르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근데 제가 예상키로는 제가 삼형제인데요. 제가 차남입니다. 저와 제 동생이 목회자예요. 그래서 망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실 때 그냥 부르지 않고 물질을 받습니다. 신학교 시절 돈이 없어서 매끼마다 굶었던 이야기가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 번도 등록금을 제때 내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자보가 활성 되었는데요. 등록금을 안 내면요. 대자보에 그 이름이 붙습니다. 저는 항상 한 학기 가운데 한 한두 달이 지나면 대자보의 자리에 붙어요. 등록금 안 낸 사람 신학과 금동훈, 제 이름이 메뉴에 있어요. 왜요? 금씨라서요. 왜 1번부터 8번까지는 다 그렇게 등록금을 냈을까요? 그렇게 제가 네 학기를 등록금을 제대로 못 냈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한두 달 동안 대자보에 제 이름이 떡 하니 붙어 있어요. 그럴 때에 제가 부끄러워했을까? 아니요 저는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가 언제 대자보에 제 이름이 저렇게 떡하니 붙어 있었겠어요.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요. 그리고 하나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사실은 신학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등록금 안 주시면 그만두면 되지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참 신기하게 대자보 그러니까 잘리기 바로 직전에 등록금을 주세요. 그렇게 네 학기를 지냈어요. 그럼 여러분 등록금 대자부가 떨어지면 뭐 붙일까요? 학생회비 안 낸 사람 또 재학이 그렇게 새 학기를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었겠습니까? 목사님 지금 풍채가 좋으신데요? 아니에요. 굶어서 부은 거예요. 이렇게 망했는데, 무슨 소망이 있었겠어요. 신학교를 다니면서 무슨 무슨 뭐가 있었겠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는 어땠을까요? 예수님 믿고 집안은 망하고 남편은 술로 그냥 술로 사는데, 무슨 소망이 있었을까요? 근데 그 우리 어머니는 그때부터 맨날 밤만 되면 저녁만 되면 저녁 껏 드시고 교회 가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1년 2년 저는요. 그 2년의 시간 동안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 저 볼 때마다 기도하고 갔다 오셔서 저 학교 갈 때 항상 하시는 말씀 있으세요. 동훈아,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 주셔서 우리 집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거야 우리 집안을 사용하실 거야 할렐루야, 아멘! 뭘 아멘이에요. 그때 이제 서울에 살다가 돈이 없어서 쫓겨나가지고 의정부에 살았는데 의정부에서 학교 가려면 차비가 600원, 1200원이 들어요. 그 돈이 없는데요. 학교 갈 돈이 어떻게 어떻게 1300원을 구해요. 그럼 가는 데 600원 쓰고 오는 데 600원 쓰고 100원이나 남네요. 그럼 이거 어떻게 쓸 것 같아요? 돈 모아서 밥 사 먹었을까요? 아니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꼴에 신학생이라고 그때 신문이 300원이었던 거 기억해요 그거 돈 모아서 신문 사봤어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때 어떻게 우리 어머니는 견딜 수 있었을까요? 한 달도 아니고 두 달 동안이고,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그 길어진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이게 저희 어머니만의 이야기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 그 기나긴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디신 겁니까? 찬양으로요? 기도로요? 말씀으로요? 말은 좋죠. 한번 해보세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귀한 믿음의 선배님들 그 견딤의 시간이 쉽던가요? 그 견딤의 시간이 짧던가요? 그 견딤의 시간이 즐겁던가요? 여유가 넘치던가요? 제가 확신해요. 절대 잡지 않고 절대 즐겁지 않고 절대 여유롭지 않았어요.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소망합니다.

내가 쓸데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지요. 내가 쓰레기장이 아니라고요. 내가 정말 필요한 존재라고요. 지금 이런 오랜 기다림에서 지쳐 잊혀져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요. 우리가 한 소절 한 소절 버티며 살아온 이 인생에 대반전이 준비되어져 있다고요. 이 말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마음이 그동안 나 자신도 나를 의심했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마음의 한으로 서러워지는 그 나날들이 봄날 햇볕에 눈이 녹듯 다 누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기다리는 겁니다. 이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자녀의 희귀한 질병 앞에서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마음을 압니다. 부모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셀 수 없는 항암 치료와 수술, 끝이 날 수 없는 치료의 질식대로 지쳐버린 아픈 가족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조금은 다 다 이해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압니다. 소망 없는 상태로 좌절과 패배감에 휩싸여 있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너무나도 더디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야 합니다. 우리의 재 등판의 최고의 시기는 무기력하고 절망적으로, 비관으로 점철(點綴)되어져만 합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거룩한 인내의 몸을 삶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신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4,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그리고 이런 우리에게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
3 너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익숙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인내와 연단을 요청합니다. 불 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 13절 말씀은 이렇게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늘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3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랑받는 거룩한 성도도 고난과 시련을 견뎌야 된다는 것을 겪어야 된다는 것을 내가 받는 고난이 시련이 이 기다림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합니다. 이 고난이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이 나라를 살릴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께서 죽음, 어둠 가운데 던져진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타이밍에 우리의 타이밍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다림에 대하여 인내하고 마지막까지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 우리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하박국 2:4,
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의는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
-여기서 믿음은 바로 히브리어로 애 문화라는 단어입니다. 이 애 문화는 버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의는 마지막까지 말씀 언약 약속으로 버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갈렙이 그렇게 사실 45년을 버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만이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45년을 버팀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가장 최고의 타이밍에 도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갈렙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마지막까지 버티는 믿음 안에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하고 마칠까 합니다. 한강에는 난지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꽃이 피어 섬이라고 하여 중추도라고 기록하고 있는 난지도(蘭芝島)는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 섬이 되어 버렸습니다. 1973년 서울의 모든 쓰레기를 이 섬에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로 만들어진 작은 산 2개가 생기기 시작하여 8,090년대에는 이 섬에 쓰레기 섬이 쌓여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약 1만 톤으로 이루어진 높이 100mm, 8만 평의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성들이 만들어졌습니다. 1973년 5월 30일, 빌리그레함 목사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 가득 메운 청준들 앞에서 설교하던 그 시절, 여의도에서 지척이었던 난지도에서는 꽃과 함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땅이 되었고, 우거진 갈대와 꽃들이 피어 산새와 들새가 지적이며 사람들로 북적이던 난지도는 잊혀져버렸습니다. 대신에 쓰여 쌓여진 쓰레기 성은 침전수와 악취, 그리고 파리 떼가 들끓는 아골 골짜기 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조차 싫어하는 절망만이 드나드는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구도 그곳에서 꿈을 꾸거나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거대한 쓰레기 섬에 누군가가 꽃을 심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리고 거대한 경기장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는 공원과 경기장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경기장, 공원 이름이 하늘을 닮아서 하늘공원, 노을공원이라는 공원이 생겼고, 그리고 그 옆에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 가운데 하나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2002년 한일 월드컵과 함께 모든 사람들과 산새와 들새, 이들에게 문이 활짝 열게 되었습니다. 쓰레기로 버려진 죽음의 땅에 꽃을 심고, 피어 생명의 공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10대 경기장을 지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월드컵 경기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50년이 지난, 지난 6월 3일, 1973년 여의도에서 나타났던 부흥의 역사가 50년 만에 상암 경기장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다시금 나타난 부흥의 빵바레와 복음의 선포의 생명력은 우리 담임 목사님의 개회사의 외침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의 요청 앞에 비좁아서 앉을 수도 없는 그곳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 부흥의 자리, 응답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부흥의 초대를 옮겨가지 마시옵소서.” 그렇게 외치고 젊은 날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결정하고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며 외쳤던 저의 젊은 날의 서원이 기억났습니다. 서 있지도 못하고 앉아있지도 못하고 어디, 꿇을 한 평의 공간조차 없는 곳에 무릎을 구겨놓고, 머리를 땅에 박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나를 잊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잊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다시 한 번 부흥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이 땅에 하나님의 부의 물결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다시 한 번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 부흥에 중심에 저와 같은 이 시대와 갈렙들이 수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그곳이 바로 부흥의 중심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능력이 이 자리까지 임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갈렙처럼 마음의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며,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기억하여 주옵시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고백함으로 다시 한 번 부흥의, 열정의,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우리 귀한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오늘 주님의 놀라운 말씀 말씀처럼, 우리가 이 시대에 갈렙이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심이 되어, 우리가 믿음의 중심에 서서, 부흥의 중심에 서서 다시 한 번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가 21세기의 갈렙이 되어 고난도 기쁨으로 인내하고, 믿음으로 견디어 내서 수많은 영혼들이 갈렙처럼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갈렙이 45년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에 인내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아야 하는 그 시간들 가운데 그의 영혼이 가난함과 그의 영혼이 메마름과 주의 의와 주의 응답의 역사를 사모하는 그 심령으로, 버티고 버텼던 시간이 45년이다. 이 쓰레기통 같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면 반드시 이루실 줄로 믿어야 한다. 갈렙은 끝까지 버티고 끝까지 남았기 때문에 승리했고, 땅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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