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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3년 6월 7일)
제목: "부흥(復興)의 중심에 서서 외치다"
말씀: 여호수아 14:6-12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금동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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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 14:6-12,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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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 3 상암 대회에서 부어주신 은혜와 성령의 선한 인도하심에 힘입어 오늘 부흥(復興) 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와 응답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서 14장 6절로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서 14장 6절-12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340면, 우리 한 절씩 한 절씩 교독하신 후에 12절은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서 14장 6-12절 말씀을 통하여서 ‘부흥의 중심에 서서 외치다.’ 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갈렙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갈렙의 이 이름의 의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로 ‘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당시 개는 종, 서번트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또 수탉의 울음소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약속을 백성들에게 외치는 갈렙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은 갈, 전부라는 뜻과 렙, 하트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합하면 ‘마음의 전부를 드리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이며, 언약을 외치는 자이며,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인생은 망한 것 같아요.” 한 50대 중년의 남자 집사님이 어느 날 저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젊은 날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합니다. 교회 오빠, 교회 누나, 이런 거죠. 신앙생활만 잘한 것이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잘해가지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좋은 학교에 좋은 대학교에 갔고 또 그 당시에 쉽지 않았던 유학도 다녀와서 좋은 회사에 잘 취직해서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좋은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서 이제 회사에서 그를 명퇴의 대상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참 버림받은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조차도 사춘기가 깊어가는 딸아이의 태도를 바라볼 때, 이 아빠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더라는 겁니다. 더 이상 아빠를 존경하지 않는 말투로 내뱉는 아들을 바라볼 때, 가정에서조차, 내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 중년 남성 이 남자 집사님의 마음은 참 어땠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특히 자녀 여러분 여기 자녀가 없네요. 안타깝다. 아빠들도 많이 옵니다. 다만 자녀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숨기는 것뿐이에요. 얼마나 서럽고 억울하고 당황스러웠으면 그러셨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남자도요 다치면 아파요. 남자는 무슨 우리도 아파요. 아내 분들 잘 들으세요. 남편도 마음이 상하고 삐져요. 남편도 아내 분들처럼 마음을 다칠 수 있고 상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제 인생은 쓰레기장 같습니다. 남아 있는 것들은 쓰레기밖에 안 보이는 인생입니다. 누구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저를 찾지 않아요. 저는 버려진 걸까요? 저는 낙오자일까요?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날의 많은 아버지들에게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과거 젊은 날, 우리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었습니다. 하지만 30~40년이 지나고 어느 중년의 모습을 한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마치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아버지들은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잘 살아가는 것일까요? 특히 그리스도인이지만 잊혀져가는 세대로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가치와 품격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 분들이 단지 이 시대의 중년의 남자 분들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잊혀져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이러한 현상은 여성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분들, 남성분들, 중년의 문제이기만 할까요? 아니요 여전히 가정의 불화 가운데서 내가 이 가정의 불화의 원인 같이 여겨지는 우리 자녀 세대도 동일하게 나는 무가치하고 나 내 인생은 잊혀져가는 그런 느낌을 다 받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이런 잊혀져가는 사람들, 이런 잊혀져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그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가치를 말씀으로 발견하며 다시금 열정과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45년 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출애굽 하여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12명의 정탐꾼 이야기와 이어져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이제 하나님의 땅으로 나아가기 전 그들은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40일 후에 돌아와서 보고대회를 엽니다. 그런데 12명 가운데 10명이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그 가난한 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거인 족들과 그들이 가져 가지고 있는 무기를 살펴볼 때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 말하며 패배주의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패배주의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홍해 사건과 놀란 기적 사건들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통곡하며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전가하고 모세에게 돌을 던지려고 할 때, 오늘 주인공 갈렙이 옷을 찢으며 등장하며 외칩니다. 민수기 14장 8절과 구절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민수기 14:8-9,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들려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라.
-라고 갈렙이 지금 멋들어지게 외치고 있습니다.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 갈래의 연설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래에 이런 믿음 보고를 보고 해 손을 번쩍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노하던 모든 동족들을 침묵해 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그의 모습은 끝이 났습니다. 그는 그 이후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민수기에서 몇 번 그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의 행적이나 업적에 대해서는 무안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그는 잊혀 진 존재, 마치 낙오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는 잊혀 진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45년이 흐른 겁니다. 45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출애굽 1세들은 다 죽었습니다. 광야 40년이 지나고 드디어 이스라엘에 약속한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5년의 전쟁의 시간이 더 지났습니다. 이렇게 45년이 지나고 이제 갈렙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우리가 잊고 있던 갈렙이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나타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헤브론을 요청합니다. 헤브론은 어떤 땅입니까? 창세기 13장 8절 가운데 아브라함이 구했던 성음이었고, 창세기 15장 5절 가운데 아브라함이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왕정시대,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 받게 될 땅입니다. 그렇다면 갈렙은 어떻게 45년 동안 잊혀진 존재에서 헤브론 땅, 바로 앞에서 유다 족속의 대표로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다시금 등장하여 그의 인생의 최고의 시간, 최고의 전성기를 다시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제 한물 간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죄송해요. 한물 간 이런 다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요. 저도 이걸 쓰면서 제 제가 떠오르는 거예요. 제가 내 모습이 산물 같다는 단어를 너무 쓰고 싶지 않아요. 격하게 쓰고 싶지 않아요. 근데 어떻게? 환물 간 것 같은데요... 최고의 전성기를 하나님 앞에서 다 들을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두 가지 정도를 우리가 함께 살펴볼 텐데요.

I. 첫 번째로 하나님께 전심이어야 합니다.
-오늘 갈렙의 외침처럼 하나님께 전심으로 외쳐야 우리의 최고의 전성기를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외칠 때 우리는 다시 영적 최고의 전성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45년의 공백을 모두 깨고 오늘 본문에서 다시금 이풍당당하게 등장합니다. 잘 들어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그의 외침은 글자로 적혀 있는데 마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의 소리 가운데 힘과 자신감이 넘쳐나는 것을 특별히 까랑까랑한 그의 육성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오늘 자세하게 확신 있게 적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민수기 4장 24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심이 뭐야?’ 라고 생각하는데요. 민수기 14장 24절 함께 볼까요?

*민수기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쓴 즉 그가 갖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드리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이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갈렙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그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기억하고, 아니 마치 세밀한 시나리오처럼 그를 등장시키고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는데 갈렙을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을 기억하시고 그를 다시 오늘 헤브론 땅, 약속의 땅, 왕의 땅 앞에서 위대하게 등판시키시는 이유는 바로 그의 마음이 갈렙의 마음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히브리어로 ‘누아흐’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영(靈)을 의미하는데 그러니까 그의 영적 상태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는 거예요. 갈렙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의 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 갈랩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하나님 나에게 전심을 드리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런 그의 전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을 다시 한 번 잘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서 14장 7절입니다.

*여호수아서 14:7,
내 나이 40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 하였고.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성실한 마음은 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말로 직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믿음의 인테그리티(Integrity)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복음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언약을 온전히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에게 진심이며 전심인 사람이 바로 갈렙 이였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하나님께 전심인 사람들이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우리 성경을 다시 한 번 좀 살펴볼 텐데요.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 앉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6장을 한 절 더 보겠습니다.
*신명기 6:4,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두 구절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들으리라는, 들으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구약에서 말씀에 대해서 들으라는 것과 신약에서 복음을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히어링 또한 리스닝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들으라. 라는 듣고 반응하는 걸 말합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쉐마는 쉐마에서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듣고 멈추라는 게 아니에요. 확장되어져서 듣고 반응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듣고 반응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네, 여러분들이 지금 상상한 단어 바로 그것 순종입니다.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듣고 반응함 행함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심을 인정해 주세요. 바로 갈렙이 이런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헌신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종의 헌신의 사람을 우리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잊어도 모든 가족들이 나를 다 잊어도 우리 하나님은 이 순종하는 사람을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인생의 사명의 타이밍에 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갈랩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외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갈레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으로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외치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로 갈렙처럼 믿음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잊혀져가는 우리의 인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갈레처럼 믿음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우리 오늘 성경 본문 12절 말씀을 같이 볼까요?

*여호수아 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니.
-우리가 믿음으로 온전히 설 때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그때를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갈렙은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45년을 버텼습니다. 갈렙은 45년을 기다리면서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을까요?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한 번도 마음에 의심이 없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 갈래에 그런 실망하거나 의심하는 모습은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 시편의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44편 23절, 24절 가운데 :

*시편 44편 23-24,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악재를 잊으시나이까.
-혹시 우리 마음이 이 시편의 내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참 다행입니다. 저는 이 시편의 기자의 마음에 100% 동의합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라서 말입니다. 분명 젊은 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생을 우리의 전 생애를 드리며. “주여 제발 나를 저를 우리를 사용해 달라.”고 부르짖었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그곳이 ‘아골 골짝 빈들일지라도 주여 저를 보내소서.’ 하며 우리가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안 했습니다. 저는 젊은 날부터 신학을 했습니다. 신학교에 다녔어요. 1학년 때부터 1학기 때부터 채플 시간을 채플을 매일매일 하거든요. 근데 이 찬송가를 맨날 부르는 거예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떻게 간다고요? 왜요? 자신이 없어서요. 저는 못 가겠습니다. 저는 안 가겠습니다. 저는 빼시고 옆에 있는 이분을 보내주옵소서. 저는 사실 지금도 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요. 내가 갈 곳이 아골 골짝 빈들 일까봐서요... 이거 말하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해버렸네. 그렇게 우리가 강력하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맡겨주셨던 소명과 사명에 의하여서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쌓아온 우리의 인생 앞에서 잊혀지니라. 그 어떤 고난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인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된 기다림을 잊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찾습니다. 나의 존재를 잊지 마시라고 다시 나를 불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과수원집 손자입니다. 갑자기 네 저를 자꾸 불쌍하게 보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래 뵈도 저희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서는 우리 동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과일을 사 먹어본 적이 없어요. 왜요? 과수원이 우리 할아버지 건데, 복숭아도 먹고, 포도도 먹고, 수박도 먹고 저는 왜 과일을 사 먹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그럼 과수원만 우리 할아버지 땅일까요? 아니요. 지금 정확한 제가 명칭은 말할 수 없습니다만 충북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 445번지 그 일대가 저희 본적인데요. 다 우리 할아버지 땅이 논도 우리 할아버지 땅, 밭도 우리 할아버지 땅 모두 모두 우리 땅 근데 망했어요. 망하는데 너무너무 억울해요. 왜 억울한지 아세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 땅에서 온천이 터진 거예요. 그때 그 시세로 하면 여러분이 강남의 빌딩을 살 수 있었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었습니다. 근데 망했어요. 왜 망했습니까? 모르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근데 제가 예상키로는 제가 삼형제인데요. 제가 차남입니다. 저와 제 동생이 목회자예요. 그래서 망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실 때 그냥 부르지 않고 물질을 받습니다. 신학교 시절 돈이 없어서 매끼마다 굶었던 이야기가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 번도 등록금을 제때 내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자보가 활성 되었는데요. 등록금을 안 내면요. 대자보에 그 이름이 붙습니다. 저는 항상 한 학기 가운데 한 한두 달이 지나면 대자보의 자리에 붙어요. 등록금 안 낸 사람 신학과 금동훈, 제 이름이 메뉴에 있어요. 왜요? 금씨라서요. 왜 1번부터 8번까지는 다 그렇게 등록금을 냈을까요? 그렇게 제가 네 학기를 등록금을 제대로 못 냈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한두 달 동안 대자보에 제 이름이 떡 하니 붙어 있어요. 그럴 때에 제가 부끄러워했을까? 아니요 저는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가 언제 대자보에 제 이름이 저렇게 떡하니 붙어 있었겠어요.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요. 그리고 하나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사실은 신학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등록금 안 주시면 그만두면 되지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참 신기하게 대자보 그러니까 잘리기 바로 직전에 등록금을 주세요. 그렇게 네 학기를 지냈어요. 그럼 여러분 등록금 대자부가 떨어지면 뭐 붙일까요? 학생회비 안 낸 사람 또 재학이 그렇게 새 학기를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었겠습니까? 목사님 지금 풍채가 좋으신데요? 아니에요. 굶어서 부은 거예요. 이렇게 망했는데, 무슨 소망이 있었겠어요. 신학교를 다니면서 무슨 무슨 뭐가 있었겠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는 어땠을까요? 예수님 믿고 집안은 망하고 남편은 술로 그냥 술로 사는데, 무슨 소망이 있었을까요? 근데 그 우리 어머니는 그때부터 맨날 밤만 되면 저녁만 되면 저녁 껏 드시고 교회 가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1년 2년 저는요. 그 2년의 시간 동안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 저 볼 때마다 기도하고 갔다 오셔서 저 학교 갈 때 항상 하시는 말씀 있으세요. 동훈아,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 주셔서 우리 집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거야 우리 집안을 사용하실 거야 할렐루야, 아멘! 뭘 아멘이에요. 그때 이제 서울에 살다가 돈이 없어서 쫓겨나가지고 의정부에 살았는데 의정부에서 학교 가려면 차비가 600원, 1200원이 들어요. 그 돈이 없는데요. 학교 갈 돈이 어떻게 어떻게 1300원을 구해요. 그럼 가는 데 600원 쓰고 오는 데 600원 쓰고 100원이나 남네요. 그럼 이거 어떻게 쓸 것 같아요? 돈 모아서 밥 사 먹었을까요? 아니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꼴에 신학생이라고 그때 신문이 300원이었던 거 기억해요 그거 돈 모아서 신문 사봤어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때 어떻게 우리 어머니는 견딜 수 있었을까요? 한 달도 아니고 두 달 동안이고,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그 길어진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이게 저희 어머니만의 이야기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 그 기나긴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디신 겁니까? 찬양으로요? 기도로요? 말씀으로요? 말은 좋죠. 한번 해보세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귀한 믿음의 선배님들 그 견딤의 시간이 쉽던가요? 그 견딤의 시간이 짧던가요? 그 견딤의 시간이 즐겁던가요? 여유가 넘치던가요? 제가 확신해요. 절대 잡지 않고 절대 즐겁지 않고 절대 여유롭지 않았어요.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소망합니다.

내가 쓸데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지요. 내가 쓰레기장이 아니라고요. 내가 정말 필요한 존재라고요. 지금 이런 오랜 기다림에서 지쳐 잊혀져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요. 우리가 한 소절 한 소절 버티며 살아온 이 인생에 대반전이 준비되어져 있다고요. 이 말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마음이 그동안 나 자신도 나를 의심했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마음의 한으로 서러워지는 그 나날들이 봄날 햇볕에 눈이 녹듯 다 누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기다리는 겁니다. 이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자녀의 희귀한 질병 앞에서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마음을 압니다. 부모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셀 수 없는 항암 치료와 수술, 끝이 날 수 없는 치료의 질식대로 지쳐버린 아픈 가족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조금은 다 다 이해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압니다. 소망 없는 상태로 좌절과 패배감에 휩싸여 있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너무나도 더디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야 합니다. 우리의 재 등판의 최고의 시기는 무기력하고 절망적으로, 비관으로 점철(點綴)되어져만 합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거룩한 인내의 몸을 삶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신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4,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그리고 이런 우리에게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
3 너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익숙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인내와 연단을 요청합니다. 불 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 13절 말씀은 이렇게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늘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3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랑받는 거룩한 성도도 고난과 시련을 견뎌야 된다는 것을 겪어야 된다는 것을 내가 받는 고난이 시련이 이 기다림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합니다. 이 고난이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이 나라를 살릴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께서 죽음, 어둠 가운데 던져진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타이밍에 우리의 타이밍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다림에 대하여 인내하고 마지막까지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 우리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하박국 2:4,
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의는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
-여기서 믿음은 바로 히브리어로 애 문화라는 단어입니다. 이 애 문화는 버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의는 마지막까지 말씀 언약 약속으로 버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갈렙이 그렇게 사실 45년을 버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만이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45년을 버팀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가장 최고의 타이밍에 도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갈렙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마지막까지 버티는 믿음 안에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하고 마칠까 합니다. 한강에는 난지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꽃이 피어 섬이라고 하여 중추도라고 기록하고 있는 난지도(蘭芝島)는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 섬이 되어 버렸습니다. 1973년 서울의 모든 쓰레기를 이 섬에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로 만들어진 작은 산 2개가 생기기 시작하여 8,090년대에는 이 섬에 쓰레기 섬이 쌓여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약 1만 톤으로 이루어진 높이 100mm, 8만 평의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성들이 만들어졌습니다. 1973년 5월 30일, 빌리그레함 목사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 가득 메운 청준들 앞에서 설교하던 그 시절, 여의도에서 지척이었던 난지도에서는 꽃과 함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땅이 되었고, 우거진 갈대와 꽃들이 피어 산새와 들새가 지적이며 사람들로 북적이던 난지도는 잊혀져버렸습니다. 대신에 쓰여 쌓여진 쓰레기 성은 침전수와 악취, 그리고 파리 떼가 들끓는 아골 골짜기 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조차 싫어하는 절망만이 드나드는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구도 그곳에서 꿈을 꾸거나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거대한 쓰레기 섬에 누군가가 꽃을 심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리고 거대한 경기장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는 공원과 경기장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경기장, 공원 이름이 하늘을 닮아서 하늘공원, 노을공원이라는 공원이 생겼고, 그리고 그 옆에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 가운데 하나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2002년 한일 월드컵과 함께 모든 사람들과 산새와 들새, 이들에게 문이 활짝 열게 되었습니다. 쓰레기로 버려진 죽음의 땅에 꽃을 심고, 피어 생명의 공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10대 경기장을 지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월드컵 경기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50년이 지난, 지난 6월 3일, 1973년 여의도에서 나타났던 부흥의 역사가 50년 만에 상암 경기장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다시금 나타난 부흥의 빵바레와 복음의 선포의 생명력은 우리 담임 목사님의 개회사의 외침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의 요청 앞에 비좁아서 앉을 수도 없는 그곳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 부흥의 자리, 응답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부흥의 초대를 옮겨가지 마시옵소서.” 그렇게 외치고 젊은 날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결정하고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며 외쳤던 저의 젊은 날의 서원이 기억났습니다. 서 있지도 못하고 앉아있지도 못하고 어디, 꿇을 한 평의 공간조차 없는 곳에 무릎을 구겨놓고, 머리를 땅에 박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나를 잊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잊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다시 한 번 부흥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이 땅에 하나님의 부의 물결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다시 한 번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 부흥에 중심에 저와 같은 이 시대와 갈렙들이 수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그곳이 바로 부흥의 중심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능력이 이 자리까지 임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갈렙처럼 마음의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며,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기억하여 주옵시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고백함으로 다시 한 번 부흥의, 열정의,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우리 귀한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오늘 주님의 놀라운 말씀 말씀처럼, 우리가 이 시대에 갈렙이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심이 되어, 우리가 믿음의 중심에 서서, 부흥의 중심에 서서 다시 한 번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가 21세기의 갈렙이 되어 고난도 기쁨으로 인내하고, 믿음으로 견디어 내서 수많은 영혼들이 갈렙처럼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갈렙이 45년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에 인내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아야 하는 그 시간들 가운데 그의 영혼이 가난함과 그의 영혼이 메마름과 주의 의와 주의 응답의 역사를 사모하는 그 심령으로, 버티고 버텼던 시간이 45년이다. 이 쓰레기통 같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면 반드시 이루실 줄로 믿어야 한다. 갈렙은 끝까지 버티고 끝까지 남았기 때문에 승리했고, 땅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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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31일)
제목: "싫음과의 싸움"
말씀: 출애굽기 4:10-17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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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0-17,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오주여, 오늘 모세의 이 짤막한 발언을 따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10절인데요. 제가 읽어드릴게요.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뒤에 좀 넘어가면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두 번째 부분은 어디서 오 주여가 등장하죠? 13절에 등장합니다. 여기도 한번 제가 읽어드리면

13 모세가 이르되 오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두 번 다 모세는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두 번이 아니에요. 이 본문 앞에 무려 세 번의 거절이 더 있습니다. 본문의 길이 상 오늘 읽진 않았지만, 오늘 자막으로 추리기 3장 10절 11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 텐데요.

*출애굽기 3:10-11,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렇죠 여러분, 여기서도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하면서 분명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거절은 우리가 잃지 않은 두 번의 거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의 두 번의 거절을 더해서 총 다섯 번입니다. 다섯 번이나 거절해요. 왜 그럴까? 왜 모세는 이토록 반복해서 좀 거절을 할까? 어쩌면 하나님과 모세도 삼요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닐까 여러분 삼요 아세요? 잘 모르시죠? 3요는 이걸요?
제가요? 왜요? 라는 질문입니다.

신세대들이 자주 한다고 그래서 기업의 임원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질문으로 어느 tv 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질문인데요. 저도 그러고 보니까 모세가 참 신세대 같아요.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요셉까지의 그 족장 시대를 다 지나고, 무려 400년 만이라고 하는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 출연한 인물이잖아요. 아주 참 신세대 아닙니까? 그래서 이 신세대의 느낌으로다가 이 걸요? 제가요? 왜요? 라고 묻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겠죠? 여러분,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요. 모세가 다섯 번 거절할 동안 지금 지시하시는 그 일에 대한 명확한 그림, 목적, 심지어는 필요한 능력에 대해서 아주 소상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러면 왜 모세는 다섯 번이나 주저하고 거절하는가? 그 질문에 좀 답을 하기 위해서 오늘 네 번째, 다섯 번째 거절 단락을 지금 여러분하고 같이 읽은 것인데요. 왜 제가 네 번째 다섯 번째를 좀 설정했냐면 뒤로 갈수록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모세의 속마음이 뭐냐, 네 번째 다섯 번째 줄 어디를 읽으면 속마음이 더 진하게 담겨 있을까요? 제가 아까 뒤로 갈수록 속마음이 드러난다고 했으니까 어디일까요? 다섯 번째겠죠 다섯 번째 거절 단락은 13절이었습니다. 여기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13절 같이 읽겠습니다.

13 모세가 이르되 오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여러분 모세의 속마음은 무엇이냐면요. 그냥 가기 싫은 거예요. 다른 사람 보내라 다른 사람 써 달라 이겁니다. 왜 이렇게 모세에게 하나님이 맡기시려는 이 일이 좀 싫은 일이 무조건 싫은 거, 그냥 무작정 거절하고 싶은 일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네 번째 거절 단락에서 힌트를 좀 얻을 수 있는데요.
10절을 한번 보시면 여기 제가 읽어드릴게요.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렇게 돼 있죠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요 나는 뭘 못하는 사람입니까?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이 부분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모세가 실제로 말이 어눌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명기라고 하는 모세의 장편 설교 3개나 되는 그 장편 설교를 성경으로 갖고 있습니다. 말을 과연 잘 못했을까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어디서 성장을 했냐면 당대 최고의 권력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절대 군주의 딸의 양아들로 자란 사람인데 그런 그에게 왕궁이 어떤 교육을 시켰을까요? 왕궁은 여러분 최고를 키우는 곳이죠? 최고가 아니라면 최고가 되게끔 하는 곳입니다. 근데 어찌 모세가 입이 둔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가진 이 배움이나 어휘력이나 어떤 필력이 모자랐다면 ‘토라’라고 부르는 이 모세 오경이 집필되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저는 그래서 좀 더 나아가서 그가 왕궁에 있었기 때문에, 또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언어도 접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냥 단순히 하나의 언어, 말 못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의 언어도 접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입이 둔하다.’ 라는 모세의 발언은 납득하기 어려운 거절 사유죠 그럼에도 불쑥 모세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뭐냐면 그가 가진 철 천지 한(恨) 때문이에요 철 천지 한 출애굽기 2장 11절부터 15절인데요. 여기 화면에도 한번 띄워주실 텐데 여러분 출애굽기 2장 11절부터 15절도 한번 천천히 교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11-15,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여러분이 익히 잘 아시는 이 본문은요 모세가 왕궁에서 자란 이후로 처음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그 장면입니다. 처음으로 어떤 액션을 취했다는 것에서도 주목할 만하지만 13절만 보시면 2장 13절만 보시면 처음으로 성경에서 모세가 입을 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 앞에 안 나와요 입을 떼요. 성경에서 등장하는 모세의 첫 발언이라는 건 뭐냐면 히브리 사람이 싸울 때 가서 왜 동포끼리 그러냐? 라고 하는 그 중재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무엇이었냐면 누가 너를 재판관 삼았냐? 니가 뭐라고 이렇게 하냐? 라고 하는 핀잔이었고 언어적 폭력이었고 정서적 몰매였어요. 그로 인해 신변의 위협이 왔고 너무 좋게 지내던 자신의 처소에서 박차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 할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오늘 여기서 이 시점에서의 모세라면 이런 자들에게 돌아가서 그 입을 다시 떼서 너희들이 나의 동포라고 말하고 ‘너희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라고 말하고 너희들에게 언약을 지키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라고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처음 입을 뗐는데 그런 반응과 이런 타격이 왔는데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런 발언을 하러 갈 수가 있겠어요?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어쩌면 그 마음이 툭 입이 사용돼야 되는 문제에서 입이 툭 나가서 나는 입이 분한자입니다. 사실은 속내는 ‘뭐야 난 말하기가 싫어.’ 모세의 속마음 어디선가 나는 그들과 말도 섞기 싫어요. 괜히 가서 또 입 댔다가 무슨 봉변을 내가 당하려고 무슨 억하심정의 상황에 처하려고 나는 싫어요. ‘아론 붙여준다 그래도 나는 싫어요.’ 이거 이럴 줄 알고 아론을 다 준비시켜서 지금 오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날 도와주신다고 해도 나는 싫어요. 상관없어요. 이게 모세의 속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 무척 신기한 건 뭐냐면 하나님이에요. 왜냐하면 무려 이렇게 다섯 번이나 거절하고 있는 이 모세를 하나님은 계속 붙들고 설득하고 물론 이제 나중에 화를 좀 내시면서 강하게 밀어붙이시긴 합니다만 모세가 말 잘 못한다고 하니까 야 아론도 준비해 놨다. 이렇게 말하는 그 하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오늘 이 장면에서 저는 하나님에 대한 작은 단상 두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게 뭐냐면?

첫 번째는 하나님은 모든 걸 아세요.
-모든 걸 아세요. 아론이 14절에서 오늘 보면 14절에 보면,
출애굽기 4:14,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아론이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 말은 시차 상 모세가 나 말 잘 못하겠어요. 나는 말이 있어서는 둔합니다. 라고 핑계 댈 때 야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면 누구를 골라서 이제 도와주러 가게 만들어야 되지? 누구를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이렇게 전략을 그때 짜는 게 아니라 모세가 이런 핑계를 다 될 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야 인마 벌써 준비해서 오고 있어 그런 핑계에 될 필요가 없어. 이걸 보여주세요. 그래서 생각되는 하나님의 단상 하나님에 대한 단상.

두 번째가 뭐냐면 이런 질문이에요. 아론을 준비시키실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모세여야 했을까?
-왜냐하면 모세는 지금 아론은 지금 움직이고 있고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고 모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요. 모세의 말을 구지 그대로 믿어보자면 아론은 말을 잘하는 거고 모세는 안 해요 못해요. 여러분 누구를 택해야 정상적입니까? 아론을 택해야 사실 정상적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가 이렇게 거절을 하고 심사가 뒤틀리는 반응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설득하고 타이르고 굳이 일을 맡기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요? 오늘 이 중요한 질문에 본문 속에 이게 가장 제가 드리고 싶은 핵심 질문인데, 이 핵심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중요한 분리가 일어나야 돼요. 어떤 분리냐면 싫어하는 걸 말하는 것과 원하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의 분리입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것과 원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분리해야 돼요. 왜 이걸 분리하자고 말씀드리냐면, 보통은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두 개가 같은 거라고 여깁니다.


※제가 첫 사역지에서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공동체를 섬겼던 적이 있어요. 여러분 신혼 3개월 차에 결혼 10년 차 되었고 아이들도 막 키우고 있는 사람들한테 가서 뭘 말합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토요일 오후에 아내랑 주일 모임이었기 때문에 해당 부서 실에 가서 토요일 오후에 청소하고 그 애들 때문에 장판이 깔린 공간이었거든요. 바닥 다 걸레질하고 장난감 이렇게 청소해 놓고 둘이 손꼭 붙잡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어요. 살려달라고. 근데 그때 하나님 불쌍히 여기셔서 깨닫게 하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첫 번째는 ‘이게 경험으로 목회하는 게 아니구나 말씀으로 목회하는 것이구나! 말씀이라는 본질로 쓰임 받는 것이구나!’이것을 경험하기도 했고요. 또 하나는 거기에 있는 부부들을 이제 케어하고 목양하다 보니까 부부도 살아나지만 저희 가정도 막 활기가 넘쳤어요. 왜냐하면 왜 부부가 다투는지 알았고, 왜 세상 적으로 신앙적으로 고비에 처하는지를 알고 나니 저희는 그 선을 안 넘으려고 하고 저희는 거기서 미리 서로를 보호하고 사랑하니까 저희 부부가 더 좋아지더라고요. 그리고 또 하나 앞서 말씀드린 분리가 안 되는 선택을 할 때가 참 많구나! 이 사실도 많이 깨달았어요. 한 사람이요, 여러분 성장의 과정에서 겪은 중요한 어떤 사건들이 있으면 그것이 기억에 깊이 남고 존재의 깊이 새겨집니다. 그런데 그게 배우자를 고를 때 필연적으로 제거돼야 할 요소, 아주 중요한 요소 그래서 정작 고려했어야 할 여러 아주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소홀히 여기고 가벼이 여겨서 놓치고 가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걸 제가 거기서 봤어요. 이 사실은 그 그룹을 제가 설명 드리면 개인정보 보호에 위반될 수도 있으니까 개인정보 보호에 위반되지 않는 저희 어머니를 예로 들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시죠. 술 마시는 것이 그렇게 싫어서 술 안 마시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것이 저희 아버님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아시잖아요. 인생은 그것만 보면 안 된다는 거. 두 분이 부부로 지내시는 동안 수없이 그 외에도 고려할 상황이 참 많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어머님이 그런 선택을 주저 없이 나는 술 안 마시기만 하면 된다. 그런 남자면 된다. 다른 거 다 안 보고 그거 하나만 볼 거다. 라고 주저 없이 결정을 하셨을까요? 왜 기꺼이 그 선택으로 뛰어드셨을까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게 자기가 원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모세도 그래요. 모세도 지금 그냥 싫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 그냥 싫어요.
그 일 너무 싫어요. 심지어 오늘 이 장면이 추리기 4장이니까 3장에서 이어지는 장면이거든요. 3장이 무슨 장면이냐면 떨기나무에 하나님 불을 붙이셔서 놀라운 광경 임재를 목격하게 하신 그 이야기에 붙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확실한 증표가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오늘 모세가 분명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여기 신을 벗어라 여기서는 그 압도적인 장면을 지금 모세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거절의 핑계를 무려 몇 번이요? 5번 장수 돌 침대도 아니고, 다섯 번!!, 여러분 왜요? 가기 싫은 거예요? 다시 가기가 싫은 거예요. 말이 어눌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말을 섞기가 너무 싫은 겁니다. 나를 억울하게 보았던 나를 억눌렀던 그래서 인생을 완전히 꼬아버린 그 민족에게는 그 못돼먹은 민족에게는 다시는 가기 싫은 거죠. 더 고생해야지 내가 뭘로 거기 가서 그들을 구출합니까?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 싫은 일을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붙드세요. 그리고 설득하세요. 그리고 여러 번 권하세요. 왜인지 아세요? 이것이야말로 모세의 영혼이 갈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싫어하는 일을 안 하는 게, 지금 자기가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철저히 믿고 있는 오늘 모세에게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너의 영혼이 그토록 원하던 일이 이거야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오는 것, 이스라엘을 리더가 되는 것 구출하는 것 이게 니 영혼이 원하던 일이야. 지금은 부정하고 있지만 지난 실패로 인해서 너무 두렵고 지금 실증도 나고 그러겠지만 아니야 이게 니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일이야. 그래서 너도 일어났었잖아. 동포를 치던 애굽 사람을 죽일 정도로 사납게 매섭게 한 번 일어났었잖아. 히브리 동포의 싸움에 개입해서 들여다보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이건 너의 영원히 갈증하던 갈망하던 바로 그 목말라 하던 일이야. 그래서 내가 이토록 너를 붙들고 설득하는 거야. 아론을 시켜도 되지만 굳이 너를 붙들고 설득하는 거야. 그러니까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니가 원하는 일이라고 착각하지 마. 오히려 그 일을 통해 믿음의 발걸음을 떼면 내가 사람을 붙이든, 능력을 허락하든 너를 도와 너의 그 깊은 영혼의 갈망을 이루어 줄게’ 라고 하는 그 씨름을 지금 하나님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혼동할까요? 왜 심지어 같은 것이라고 여길까요? 예레미야 17장 9절이 그 해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17:9,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 부패한 심령이 여러분 뭘 알 수 있겠습니까?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 모세의 행동과 우리의 평소 경향이 다를 리 없는 이유입니다. 부패하였기 때 선악과를 떠올려보십시오. 인류는 하나님이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싫었어요. 뱀은 그걸 싫어하도록 만들었고 싫어하는 그것에 더욱 집중하도록 만들었어요. 씨름과의 씨름에 매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악과를 원하게 만들었죠. 그러면서 자신이 그 아담과 하와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지금 놓쳐버렸어요. 선악과를 원하느냐고?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원했어야 하는 건 에덴에서의 하나님과 깊이 있는 영혼의 교제였어야 합니까? 아니면 선악과 실고 하나 먹는 겁니까? 왜 씨름과의 씨름을 세상에 걸어오는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씨름과의 씨름이 어디서 오는지 그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분리하고 분별해야 할 이유가 지금 여기에 있다.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죄가 시작되었고 인류가 넘어졌습니까? 싫은 것이 생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그걸 붙들고 씨름을 해도 다룰 줄을 몰랐기 때문에 엎어진 것이 저 또한 그래서 이 질문에서 결코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사람이란 모름 직이 기호라는 게 존재해요. 좋고 싫은 게 항상 존재합니다. 그 사이에서 선택하느냐고 인생을 시간을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그 고민하고 또 그것과 그냥 씨름하느냐고 분주하다고 느끼는 것이,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수록 내가 진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 영혼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 데서 바라고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그걸 안다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모세의 진정한 원함을 알고 그래서 그를 설득하고 그를 꾸짖으시던 그 하나님께 나의 이 씨름에 씨름을 맡기고 구하고 엎드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씨름과의 씨름을 하느냐 정작 원해야 하는 것을 여러분 놓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요 십자가에 매달리시면서 고통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얼마만한 고통이 있는지 모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입으로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걸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간구할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분명 싫은 것이었죠. 피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건 분명한 것이었어요. 싫어할 이유도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할 이유도 명백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의 뜻 때문에? 세상을 구원해야 되는 그 아버지의 뜻 때문에, 싫어하는 것을 하는 방향으로 정면 돌파하는 방향으로 그의 인생을 몰아가셔서 제가 오늘 이 순간 그 말씀을 드리면서 단순히 여러분 하나님 뜻이니까, 그냥 무조건 꺾여라. 그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요. 예수님이 자신의 시름과 싸움하면서 씨름하면서 오히려 그걸 통과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뭐냐면 그 시름보다 더 강력한 원함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는 그 자신, 예수님 자신의 갈망에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름이 고통을 향한 시름이, 고난을 향한 시름이 원함을 가리고 덮으려 할 때가 있었지만 기도하며 그 시름과의 씨름 속에서 끝끝내 자기 영원히 원하는 거, 자기 존재가 원하는 거, 그 진정 원하는 것의 성취를 이루어 가시려고 뚜벅뚜벅 걸어가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시는 휘한 성도 여러분 혹시 요즘 무언가 싫은 것이 막 다가 오세요? 무엇이 싫은 것으로 내 존재와 인생 앞에 떡하니 여러분 버티고 서 계세요? 무시하면 될 일일 수도 있고 거부해도 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원함이 오히려 거부되고 있고, 여러분 영혼의 진정한 원함이 지금 무엇이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씨름과의 씨름 속에서, 이걸 이길 강력한 그 강렬한 원함이 무엇인지 내 영혼의 속내를 들추어보시길 바랍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우리의 심령 저를 포함하였어요. 그걸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한 힘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요청하시며 나아가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장하세요. 왜냐하면 싫은 것을 하는 것은 우리를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올 초에 제천에 가서 기도하다가 연 초 계획을 저 나름대로 이것저것 세우다가, 하나님이 저에게 강하게 주신 마음이 뭐였냐면 이 세상 누구나에게 다 성장 욕구가 있다. 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없는 줄 알았거든요. 이미 커서 더 이상 성장하면 안 되고 욕구 부리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너의 영혼도 겸손하다는 이유로, 낮아진다는 이유로 성장하는 것에 대해선 관심 없다는 듯 살지 말고 너희 안에도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있다. 그 마음을 주셨어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성경을 일도 하고 싶고 기도의 진중함에 빠지고 싶은 건 우리 모든 이들의 영원이 연 초마다 또는 월 초마다 어떤 분위기가 바뀔 때마다 늘 바라고 원하는 거잖아요? 왜요? 성장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으면 당연히 성장하고 자라나고 싶잖아요. 아닌 게 더 이상하잖아요. 근데 여러분 성장하려면 뭐가 필요하냐면 싫은 것을 할 줄 아는 훈육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것만 해서는 좋은 것만 해서는 도통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첫째가요 키도 크고 발도 큽니다. 저를 닮아 덩치는 않고서 하나님 크신 은혜를 우리 가정에 주셨다고 생각하는데, 근데 여러분, 가끔 그 녀석이 발이 아프다고 할 때가 있어요. 그게 언제냐면, 신발을 살 때예요. 새 신발 살 때 워낙 이제 좀 쿨하고 좀 무던한 녀석이라서 그런지 가타부타 말이 별로 없어요. 그러다가 신발이 좀 낡아서 뭔가 이제 신발을 교체하게 될 때가 오면 신발 고르는 장소에 가서 새 신발 신고 얘기해요. ‘그동안 발이 아팠다.’ 부모 마음에서 여러분 마음이 무너지죠. 일찍 얘기하지 일찍 얘기하지, 발이 아팠다고 왜 이제 얘기 하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아프면 뭘로 참고 있어? 왜 그 씨름과 씨름을 하고 있어?

-여러분 근데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씨름과의 씨름은요 뭔가 성장할 시기가 왔다는 분명한 사인이에요. 그럼에도 새신 더 큰 신을 맞춰서 바꾸어 신기보다 나의 용량을 넓히시려는 용적을 넓히시려는 걸 하나님께 붙들려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보다는 여전히 좁아터진 그 신발 안에서 꾸역꾸역 그 씨름과 씨름만 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어리석은 일이고 불쌍한 인생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보실 때, 혹시 여기 지금 씨름과의 씨름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가운데에 성장시키실 줄 믿으십시오. 싫은 것을 말하는 게 답이 아니라, 그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길을 지나 내가 진짜로 원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것을 이루어 좀 주십시오. 그리고 그에 맞게 나를 성장시켜 주십시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그렇게 이 씨름을 견뎌내고 이기실 수 있는 귀한 인생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이번 주 내 금요일 또 토요일 여러 귀한 시간이 여러분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저는 이번 일을 앞두고 하나님이 저한테 이렇게 많이 물으세요. ‘야, 너의 영혼은 갈망하지 않냐? 한 사람이 더 전도되는 걸 갈망하지 않냐? 하나의 교회라도 더 세워지는 걸 갈망하지 않냐? 너희의 영혼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거 너 그래서 목회하는 거 아니냐? 너 그래서 예수 믿고 나 따라오고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많이 물어보시면 여러분은 우리 앞에 놓인 이 일을 놓고 어떻게 바라보고 또 생각하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아내랑 결혼을 고민할 때 너무 가난한 나머지 아내가 저한테 시집오는 게 너무 미안해서 결혼의 단계로 넘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게 너무 고민일 때가 있었어요. 그때 저의 멘토 중에 한 분이 제 고민을 막 듣다가 음악 듣다가 이렇게 짧게 얘기했는데, 그게 저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었어요. 그게 뭐였냐면 그게 됐고 제가 뭘 많이 얘기했거든 뭐 이래서 이건 고민이고 이러면 어렵고 이건 어떻게 할까 이렇게 했더니 한참 됐다. “이거 됐고, 됐고, 이 사랑하냐? 고 되게 묵직한 한 방이잖아요. 됐고, 됐고 우리가 알았으니까 다 됐고 사랑하냐?” 고 거기서부터 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일으키시려는 오늘의 그 어떤 일 속에 영원히 기적, 영원히 살아나는 어떤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여러분 사모하십니까? 누군가를 이끌어주는 일 또는 그 때문에 헌신하고 고난 받아야 된다면 오늘 이제 모세의 앞길이죠. 두렵고 떨리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 안에 그 속에 내가 진짜 원하는 그 일이 담겨 있으니까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잖아요. 그게 담겨 있으니까 주여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씨름과의 씨름에서 고전하는 나를 좀 건져내셔서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고 하나의 교회라도 더 세워지는 그 일에 나를 좀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집회에도 누군가 은혜를 받아서 오늘 모세와 같이 이 민족을 이 교회를 새 땅으로 이끄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좀 발탁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게 나이길 원하고 우리 교회이기를 원하고 내가 모르지만 거기 참석한 아무개이기를 원하고 주여, 그 일을 위해서 우리를 필요하다면 꾸짖어주시고 설득해 주셔서 우리의 진정 원하는 그 일, 우리가 진정 바라는 그 일로 우리를 좀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 가운데에 나아가시고 마음 모아주시고 또 기도해 주시는 귀한 우리 사나의 교회, 우리 귀한 연 가족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내 영혼에 어떤 질문이 긁히고 체 이는지, 나는 무엇을 갈망하며 살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피하느냐 정신이 없는지, 나를 성장시키시려 씨름하시고, 오늘도 내게 수백 번, 수천 번 권하시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에 온전히 순전히 붙들려서, 나의 인생 씨름과 씨름하는 이 나의 인생 성장하기를 원하면서도 좋은 것만 해내려는 내 기호에 맞는 것만 하려는, 이 연약한 나의 영혼에 하나님께서 꾸짖음과 하나님이 밀어붙이심과 만져주심을 받아서, 나를 통해 이루고 싶은 그 일, 구원받은 내가 너무나 원했던 그 일, 내 평생 내 면류관이 될 그 일, 그 일을 위하여 힘껏 나아가는 헌신된 인생을 간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모세가 자신은 말에 능치 못하며 적당한 사람이 아니니 보낼 만 한 자를 보내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와 늘 함께하여 부족함을 채우겠다고 위로하시며 그를 권면하셨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다만 그 힘을 의지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내와 자비로써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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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24일)
제목: "하나님의 본심"
말씀: 예레미야애가 3:29~33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전승현 부목사님
ㅡㅡㅡㅡ

*예레미야애가 3:29~33,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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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부흥 보고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우리 영 가족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와 응답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구약 성경 예레미야 애가 3장에 주신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9-33절에 주신 말씀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 구약 성경 1146페이지에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29~33,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 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 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또 이 저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하여서 함께 은혜 받는 귀하고 복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애가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이제 남쪽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을 때 예레미야가 지은 5개의 시로 이루어진 성경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끊임없이 남쪽 유다에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회심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 앞에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하셨듯이 바벨론이라는 민족을 들어서 이 남쪽 유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이스라엘 백성, 남쪽 유다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그 시온 성, 예루살렘이 멸망, 방해지고 함락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봤던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모습을 봤던 예레미야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지으며 탄식하며 이렇게 노래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그저 남쪽 유다, 북쪽 이스라엘이라고 하나의 민족으로 하나의 나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아픔과 고통이 나의 아픔이요, 고통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과 고통이 나에게 임하였다. 앞 절을 보게 되면 그 고난이 나에게 내가 그 고난을 당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 유다가 당하고 있는 그 고난이 내 앞 절 본문을 읽진 않았지만 그 앞 절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나오는데요.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애가 3:4-16,
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7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10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12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15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아멘이 되십니까? 이 말씀을 읽으니까 어떠십니까? 너무나도 끔찍하고 잔인하고 무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기에 나와 있는 제가 지금 앞줄에 있는 말씀을 전부 다 여기에 기록하고 있지는 않고요. 중간 중간 발췌해서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 유다 또 예레미야가 자기를 표현하면서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 고난을 말하는 것이 어느 것 하나 쉬운 고난, 녹록치 않은 고난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죠. 근데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그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무엇이 있다. 라고 말 하냐면, 소망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나와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으셨고, 내 허리에 그 활들을 쏘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쓴 것들로 배부르고 속에 치여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약돌로 나의 이빨이 이가 다 빠졌고, 나를 죄로 덮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어떤 소망이나 희망 단 1도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근데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가운데 소망이 있다 말할까요? 그건 바로 여호와의 인자, 긍휼하심이 그 사랑하심이 무한하시고, 주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라고 그가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앞절 21절에 보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예레미야애가 3:21,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 왜냐하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운데 소망을 분간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백하고 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또한, 또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어요.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29절에 보니까
*예레미야애가 3:29,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너의 입을 땅에 티끌에 대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대의 입을 땅에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입술을 땅에 티끌에 땅에 먼지에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여러분 입을 땅에 대기 때문에 그 어떠한 탄식이나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어요. 입을 땅에 대니까 그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위로 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 땅을 향하겠죠. 그래서 너는 너에게 당하는 그 고난 고통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위를 바라보지 말고, 그냥 밑을 보면서 당하라고 겸손히 그 고난을 당하라고, 고통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절에 더 나아가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30,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너를 때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너의 뺨을 대주고 너를 욕하거든 기꺼이 그 욕을 들으라. 그 수치와 모욕을 당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고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발버둥을 쳐서라도 그 고난을 피하려고 도망치려고 했을 텐데, 예레미야는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이 너를 반드시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에 그 소망 가운데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을 겸손한 마음으로 그 수치와 모욕을 당하라고 그렇게 권면해 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믿겨지십니까? 여러분 이것은 믿음으로 수용이 가능하시겠습니까? 근데 더 뒤에 나와 있는 말씀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32절 보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예레미야애가 3:32-33,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래요.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고, 근심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자유를 누리고 해망을 누리고 그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본인의 본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근데 왜 하나님은 그게 본심인데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무서운 모습일까? 왜 우리가 그 당하는 고난과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그냥 놔두실까요? 저의 이야기를 좀 잠깐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많이 맞고 자랐습니다. 누구한테 많이 맞고 자랐냐면 저희 아버지한테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저희 집에 한 제 기억으로는 한 1m 정도 되는 한 PVC 파이프 관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그걸로 많이 맞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좀 많이 맞았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제 기억이 맞다면,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 맡기 시작해서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예 물론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간헐적으로 맞은 적이 있지만 정기적으로 맞았던 건 그렇게 초등학교 6년의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마 모르시는 분은 저 목사님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 길래 자식을 저렇게 때렸을까 혹시 조직에 무슨 몸을 담고 있는 분이 아닐까?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데요 저희 아버지는 목사님입니다. 저를 그렇게 많이 때렸는데요. 제가 기억나는 게 있다면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학교를 끝나고 난 다음에 제가 친구들과 같이 놀았어요. 놀다 보니까 약간 제가 정확히 어떤 위치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높은 곳에서 떨어졌습니다. 떨어져가지고 다리를 접 질렀는데 걸을 수 없을 만큼 다리가 팅팅 부어 있었어요. 제 친구들이 저를 업고 집에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았던 저희 아버지가 그리고 보통 부모님이라면 걱정을 먼저 하실 텐데, 저한테 대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매를 가지고 그리고 난 다음에 맞았습니다. 제가 맞은 이유는 이것입니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올 것이지 누가 밖에 나가서 놀았냐? 부모님 허락도 받지 않고, 또 하나는 놀려면 안전하게 놀아야지 왜 그렇게 위험하게 놀아서 다치고 들어왔느냐? 그래서 제가 맞았어요. 어느덧 제가 아버지가 됐습니다. 어떨까요? 제가 그때 당시에는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되더라고요.
무엇이 이해가 되냐면 아 내가 맞을 만했구나. 그리고 또 하나는 부모님들 많이들 사랑의 매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다 사랑의 매는 아니더라고요. 저도 자녀를 키워보니까 항상 자녀에게 훈계하고 때로는 때릴 수도 있는데 그게 사랑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때로는 너무 미워 보일 때도 있다. 라는 거예요. 제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건 제가 아버지가 되니까, 그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는 거예요. 정말 웃긴 건 그렇게 맞았는데 제가 왜 초등학교 육학년 때까지만 맞은 지 아십니까? 제가 육학년이 되고 난 다음에 처음에 아버지한테 맞을 때 맞고 난 다음에 너무나도 아파서 울었습니다. 때리지 말아달라고... 근데 육학년 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마치 그 모습을 제가 상상해 봤어요. 근데 남자답지 않더라고요. 사나이답지 않은 거예요. 그냥 맞으려면 떳떳하게 맞지 어차피 맞을 거 멋지게 한번 맞아보자. 그래서 맞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처음에는 몇 대를 더 때리셔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별로 때리지 않고 이제 더 이상 더 이렇게 매질을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오해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늙었구나! 아버지가 병이 들었구나! 맞았는데 아프지가 않는 거에요. 저희 아버지가 결혼을 좀 일찍 하셔가지고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30대 중반밖에 되지 않는 그런 나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그만큼 컸다. 라는 거죠.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제가 아버지가 되니까 그게 이해가 되더라는 거예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의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그 입장이 되면 그것이 이해가 쉽게 되고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고난 가운데 있고,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셨는데, 그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이 된다면 그 입장이 그 말씀이 이해가 될 텐데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잖아요. 어찌 보면 이 말씀이 너무나도 우리 삶에 있어서 괴리감이 느껴지고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라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 본심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가 이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게 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 부분들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I. 첫 번째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고난 받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한을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한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 두 인물만이 타락하고 죄 가운데 거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이 타락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타락했다. 라는 거예요. 이 세상 또한 그 죄로 말미암아 고난 가운데 있다. 라는 사실이죠. 여러분 더 쉽게 말씀을 드릴까요? 여러분 진흙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진흙탕에 있습니다. 근데 그곳에서 뛰어놀고 있는데, 그 아이가 자기의 몸에 진흙을 묻히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이곳에서 그저 뛰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면 이 진흙이 나한테 뛰지 않을 거야 묻혀 지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여러분 그 진흙탕에 있을 때 그 아이 혼자만 있습니까? 아니요. 그 진흙탕에서 뛰어노는 또 다른 아이들도 있다. 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아이가 뛰어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그 진흙이 저절로 나에게 묻혀 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이 바로 그거예요. 이 세상이 그런 진흙과 같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진흙탕 속에서 묻혀 지는 그 진흙이 우리에게는 고난이 된다. 라는 거죠. 어찌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고난을 당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자연스러운 거예요. 근데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고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이 고난을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가운데 19세기에 독일의 천재 철학자라고 말하는 니체 여러분 그 니체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입니다. 근데 그 목사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가 하나님은 죽었다라고 말을 했을까요? 여러분 여기에서 니체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신론자로서 이 표현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삶에 있어서 더 이상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 하나님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초인이 되어서 우리 스스로 또 다른 세계,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세계를 만들어야 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마치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처럼, 신 바벨탑 사건이 이 말 한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어떻습니까? 우리의 힘은 변화가 가능합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정책으로 사람의 힘으로 능력으로 이 세상이 변화가 됩니까? 여기 계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20세기에 사셨을 겁니다. 20세기에 태어나셨고, 그 시간들을 보내셨을 겁니다. 저도 20세기에 초중 대학교를 다녔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21세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였을 때, 저는 되게 마음 함 속에 기대감이 있었어요. 세상이 많이 바뀔 거야,,, 지난 20세기에는 전쟁도 많았고 아픔도 많았고, 고통도 많았는데, 이제 글로벌 시대라고 말하는 21세기에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통합되고 평화만이 공존할 것이다. 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신제국주의도 끝나고 그 냉전 체제도 다 끝날 거야.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2023년, 21세기에 들어온 지도 벌써 23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오늘 이 시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지난 20세기에 여러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지역 갈등, 세대 갈등 그러나 여전히 그 갈등은 어떻습니까? 존재합니다. 지난 20세기에 듣도 보도 못했던 젠더 갈등, 역사적 갈등, 그런 새로운 갈등들이 생겨났습니다. 냉전 체계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신냉전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 이 세상은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우리가 애를 쓰고 아무리 우리가 바꾸려 한다 할지라도, 이미 죄악으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조차도 그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15장 11절에 보면,


*신명기 15:11,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11,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흔히 말할 때 부의 재분배, 그 가난을 극복하려고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주고 계십니다. 가난한 자는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다. 예수님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주님 다시 올 때까지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이상이나, 어떠한 사상이나 어떠한 제도적으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라는 거예요. 왜요? 이 세상은 고난 가운데 이 세상은 타락하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할까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고난 속에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볼 수가 있죠. 여러분 우리가 다가오는 그 고난을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을 볼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힘들게 하기 위해서 쓰는 도구라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시 그 고난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지만, 그러나 그 고난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본심, 하나님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II. 두 번째,
우리는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32절에 보니까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32-33,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우리가 때로는 아픔이나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나 그런 의구심이 먼저 우리의 삶 가운데 생겨날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사랑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상당히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의 말씀도 그중에 하나가 되겠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여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을 하였던 1세대들이 그 광야에서 40년 생활 가운데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잔인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그 가나안 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만 당하는 고난이 그렇게 잔인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들 아닌 타 민족들 가운데서도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잔인하게 베푸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 불과 유황으로 그들을 시험하십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사울 왕 때 아말렉과 전투를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사무엘을 통해서 명령하십니까? 그 아말렉 백성을 다 멸하는데, 그곳에 있는 젖 먹는 아이들까지도 다 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습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맞나? 정말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맞으신가? 라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그 의구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을 수 없겠죠. 그러나 여러분 저는 종종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여러분, 혹시 주위에 당뇨나 어떠한 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몸의 일부가 괴사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도 예전에 심방하면서 당뇨병으로 다리를 발가락을 절단하시는 한 성도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조직 이걸 떼어내지 않는다면 그 괴사 부위는 점점 커집니다. 처음에는 발끝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발전체로, 발전체가 다리 전체로 나중에는 내 생명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썩어가는 부위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썩어지는 부위를 도려내야 되겠죠. 잘라내야 되겠죠. 만약에 그 부분을 잘라내지 않는다면 그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울 겁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볼 때, 여러분 나의 몸의 일부를 괴사로 말미암아 잘라내는 사람이 그 신체 일부를 보면서 나의 다리를 잘라낸다면 이 다리는 더 이상 나에게 필요 없어. 빨리 잘라버리라고 의사에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든지 의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자르지 않고 내 다리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겠습니까? 왜요? 나의 몸이잖아요 사랑하는 나의 신체잖아요. 근데 저는 그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인 거라고 생각돼요.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멸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그 민족을 심판하십니까? 때로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잔인해 보이고 너무나도 인정 없는 그런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민족을, 그 나라를 멸하실 때, 너희는 더 이상 필요 없어. 너희는 사라지라 하고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에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그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눈물을 머금고 그것을 감당하지 않으셨겠습니까? 디모데전서 4장 2절에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 말하냐면,

*디모데전서 2:4,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들만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때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내가 이해되지 않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놓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의심하지 아니하고 달려갈 수 있는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때 우리가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본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III. 세 번째.
우리가 그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있다면 그 부분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하는 말씀이에요.
*시편 119:71,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우리는 고난이 유익이라.
-그래서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하여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서 나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많이 알고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에게 지금 고난의 시간이 있다면, 고난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혹시 그 고난이 기대될, 기대되는 분이 계십니까? 아 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네. 야, 이 고난이 끝나면 하나님은 나에게 놀라운 복으로 덧입혀주실 거야. 이 고난이 너무나도 기대되고 설레어, 라고 생각되고 혹시 계십니까? 없겠죠. 어떻게 해서든지 이 고난의 터널이 끝나기를. 어떻게든 이 고난의 잔이 나에게서 물러가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제가 몇 개 성경 구절을 준비해 봤는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무나도 잘하는 말씀 중에 구절입니다.

*욥기 5:17-18,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미약하였으나 내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청하건데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라. 내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내 장막에서 구리를 멀리하리라. 그런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냐 보라, 그의 눈에는 다리라도 빛을 바라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이 말씀을 읽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아까 처음에 읽었던 말씀 “하나님을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말씀, 성경 구절 가운데 또 한 구절에 생각되십니다.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너희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여러분, 제가 이렇게 준비했던 이 성경 구절은 전부 다 욥기 서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 저절로 아멘이 나아지고 저절로 은혜가 되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이 역에 나와 있는 이 말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공통점이 있냐면 바로 요벨 새 친구들 누구입니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이 욥에게 하고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말이 신학적으로 문제되는 말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벗어나는 표현 없습니다.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근데 여러분, 이 새 친구들이 욥에게 이 말을 했을 때, 어떠한 목적으로 이 말을 했을까요? ‘욥아, 네가 하나님 앞에 득죄하였기 때문에, 너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너의 모든 소유, 심지어 너의 사랑하는 10명의 자녀들까지 다 몰살당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라. 너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너의 지금 시작은 미약한데 너의 나중은 창대하게 하리라. 하나님이 너의 아픔을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다시 고치실 것이다 회복시킬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결론을 말씀을 드리면, 이들은 이 세 친구들은 이 욥을 고발하였지만 그 고발하는 정확한 목적을 상실해 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치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맞는 것처럼 들려줘요.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 있는 이 성경 구절 가운데 이 말 가운데 무엇이 결여되어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의 마음이 이 가운데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때로는 그래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 고난을 보게 되면, 우리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하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권한을 주셨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일까?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나?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치시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 혹시나 같이 신앙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모습 가운데 있었는데 이러한 고난 가운데 처한 성도를 보게 되면, 그래 그래 저렇게 될 줄 알았어. 하나님께서 가만히 놔두시겠어. 하나님께서 치시지 함부로 그렇게 정지할 때가 있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좀 살펴보십시오. 정말로 내가 그 가운데 하나님의 그 목자의 심정, 아비의 마음을 가지고 그 상황들을 보고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의 편협적인 그 성경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씀을 볼 때 저는 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크다. 라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성경에 우리의 사고로 이해되지 않을 때도 참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다윗이라는 인물을 좋아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별히 다윗도 하나님 앞에 실수하였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 있어서는 다윗이 뭔가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그래서 다윗이 인간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무엘하를 묵상하게 되면 사무엘하에 11장에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취하게 되죠. 여러분 이 밧세바를 치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서 다윗을 책망하십니다. 이미 그 상황 가운데서는 밧세바의 남편이었던 우리아 다윗이 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너무나도 용서받지 못할 큰 악행을 이 다윗이 저지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나다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너의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너의 눈앞에서 너의 아내를 빼앗아 너의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너의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의 가문 가운데 칼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었던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죠. 하나님 앞에 내가 이러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눈물로써 회개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금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 그러니 당신이 죽지 아니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이후에 다윗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근데 다윗의 가정에 비극적인 일들이 생겨납니다. 어떤 일입니까? 바로 다말 사건이 퍼지죠. 형제가 서로 칼부림을 갖게 됩니다. 근친이 이루어집니다. 결국에는 그로 말미암아 암논이라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죠. 압살롬이라는 동생에게, 여러분 이후에 보면 압살롬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반란을 일으키게 돼요. 그때 다윗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도망가게 됩니다. 그 가운데 이 압살롬이 아이도벨, 계략가였던 아이도벨을 통하여서 또 하나님 앞에 큰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무엇이었냐면 바로 아버지의 아내들 후궁들을 자신이 취하게 됩니다. 옥상에서 백주 대낮에,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던 그 예언 그 징벌이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주석 책에서도 그렇게 해석이 되더라고요. 여러분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용서하셨나요? 용서하지 않으셨나요? 용서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용서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용서의 개념이 무엇이에요? 그거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 용서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셨지만, 다윗의 죄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신다. 징벌하신다. 형벌하신다. 우리는 그렇게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가끔 그렇게 말을 해요. 죄 용서함은 받지만 그러나 그 죄에 대해서 벌은 받아야 된다. 형벌은 받아야 된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죄의 용서를 받지 마 그 죄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된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그 죄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니? 여러분 마태복음에 오면 예수님께서 일만 달란트 비유를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임금 앞에 나아가서 이제는 그것을 정산하게 됩니다. 갚지를 못해요. 그때 임금이 어떻게 합니까? 그 빚진 자에게 아내와 자식들을 다 팔고, 모든 소유들을 팔아서 그것을 갚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가 임금 앞에 빌게 되죠. 살려달라고 그때 그 모습을 봤던 임금이 측은히 여겨서 어떻게 합니까? 그 일만 달란트를 모두 다 탕감해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근데 때로는 우리가 이 부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그 용서에 대해서 오해를 할 때가 있다, 라는 여러분, 그 오해가 더 나아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받고 있는 그 고난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그 잘못은 너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징벌이다.
마치 그렇게 우리에게, 우리가 때로는 그 고난이 찾아오게 되면, 이 고난이 어디에서 출발되었지?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회개하지 못했던 그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이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라는 거에요. 여러분 그러나 고난을 우리가 그렇게 받아주지 않기를 원합니다.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나요?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이다. 여러분 그 이후의 성경 구절은 무엇으로 말하냐면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그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내가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희망과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었다라고 이 시편의 저자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본심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깊이 상고하는 이 시간되기를 원합니다. 혹시나 우리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의 자의적으로 우리의 형편에 맞게 우리가 생각나는 대로 혹시나 판단하고 있고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본심 가운데 결코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아, 결코 나는 너를 버려두지 않아, 결코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하심을, 인자하심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기에 이 세대에 끊임없이 고난과 아픔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무너지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 하나님의 그 사랑을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주께 영광 돌리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든 영 가족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눈물과 고통이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서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을 믿고 고난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분별하여야 한다. 우리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로 응답하시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본심을 깨닫고 믿음의 길을 달려가야 하며,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신실하신 사랑을 결코 의심하지 않고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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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17일)
제목: "주님은 나의 피난처"
말씀: 시편 16:1~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소문수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시편 16:1~2,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ㅡㅡㅡㅡㅡ
 
​▶새 봄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며 부흥 보고 수요 저녁 기도회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 저녁 기도회를 통해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회복을 넘어 부흥이 체험되어지고 또한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내용들이 응답되어지는 이 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16편 1절과 2절, 2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 1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시편에 많은 시대를 기록하였는데요. 그 가운데에 오늘 다윗은 다의 믹담이라는 제목의 시로 16편을 지었습니다.
 
시편에 있는 제목은 그 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목이 무엇인지 알고 그 실에 읽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가 가지고 있는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가 있고요. 시가 가진 음악적인 요소를 말하여 줄 때도 있고, 시가 가진 성격을 알려줄 때도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믹담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인데 사실 ‘믹담’이라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두 가지 정도로 해석을 해볼 수가 있는데
 
첫 번째는 황금이라는 뜻입니다. 주옥같은 시, ‘황금 같은 시’라는 뜻을 의미하고요.
두 번째는 새기다. 비문 같은 곳에 새겨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새김이 있는 시다. 라고 하여서 ‘새기다’ 라는 뜻으로 두 번째를 해석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로 해석하든지 두 번째로 해석하든지 오늘 시편 16편은 굉장히 중요한 시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죠. 특별히 시편에 150편 가운데 믹담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는 오늘 우리가 읽은 16편과 56편- 60편까지 총 6편의 시가 믹담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오늘 16편은 첫 번째 믹담의 시입니다. 이 내용을 아시고 우리가 함께 첫 번째 9절 1절을 하나님께 또 면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시편 16:1,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오늘 1절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의 내용을 볼 때에 다윗은 지금 적지 않은 위기 가운데에 놓여 있다. 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가 있죠. 지금 우리가 이 위기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구하며 지켜보하여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사무엘상 큐티를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는데, 이제 한 내일 모레쯤이면 아마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3월 삼규 뒤로 마무리가 될 텐데 여러분 성경에서 계속 사울과 다윗을 비교하고 있는 모습들을 여러분 발견하셨습니까? 큰 차이점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다윗은 이렇게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께 자신의 이야기를 토로한다라는 것이죠. 하지만 사울은 위기 앞에 섰을 때의 다급함 앞에 섰을 때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자기중심적인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사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께 존심으로 달려 나아가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간절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절에 사용된 지켜 달라. 라는 단어의 ‘슈마르’는 양떼를 지키고 보호할 때 사용되어지는 ‘울타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하다. 라고 여겨지는 장소 중에 하나가 어디였냐면 바로 자기가 지키는 울타리 안이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그 기억을 생생하게 되새기면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를 지켜주십시오. 나의 울타리가 되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어떤 느낌이 좀 오시나요? 굉장히 일상적이고 실제 상황 가운데에 화려한 미사여구라든지, 이런 단어를 써야만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다. 라는 어떤 그런 단어들이 아니라, 자기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도 평안하고 너무나도 함께할 수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혹 제가 이렇게 심방을 가다 보면 오늘은 집사님 집사님이 한번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눈이 두 배로 커지시면서 “목사님, 저 기도 못해요!” 저는 사실 이렇게 있으면서 어떻게 하는 게 기도를 못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상의 언어들과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하나님께 그냥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도일진데, 어떻게 기도를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건지 여러분 이제 오늘 수요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은 절대로 기도 못한다는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여러분들이 생각되어지는 일상의 단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익숙한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곧 기도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자신에게 울타리가 되어 주십사, 요청하는 그 단어 뒤에는 ‘하나님께 피할 것이다.’ 라는 다윗의 고백이 또 있죠. 한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 전절과 호절 사이에는 키라는 왜냐 하면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를 지켜주시옵소서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께 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피하다.’라는 하스이라는 단어는 ‘신뢰 하다.’라는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울타리 안으로 나아가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의 울타리가 되어 주십사,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뭐냐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다윗의 고백이라는 거죠.
 
그래서 오늘 이 내용을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에는 좀 더 간절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지켜주소서. 죽을 힘 다해 죽게 피합니다.’ 이렇게 유진 피터스는 자기의 메시지 성경에 쓰고 있습니다. 라는 표현을 하면 죽을힘을 다해서 주님을 신뢰합니다. 죽을힘을 다해서 주님께 매달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번역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절박한 심정 가운데 매달리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여러분 한번 상상할 때, 여러분 그 마음이 좀 전해지시는 것 같습니까? 근데 여러분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에는요. 아마 이런 생각하실 분도 있으실 것 같아요. 역시 다윗이구나. 다윗은 이 절박한 순간에 사월과 달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기도하는구나! 우리는 힘들 때, 혹은 저는 굉장히 힘들고 어려울 때는 기도의 소리조차도 나오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냥 이렇게 망연자실하게 있을 때가 있죠. 그래서 이 다윗의 이런 고백을 보면서 다윗은 정말 하나님께서 합당하고, 합당하다. 라고 여겨질 만한 성품과 신앙을 가졌구나!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지만 여러분 다윗의 일생을 잠시 한 번 살펴보면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와 절박하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뭐냐 하면 그 어느 곳에서도 다윗이 발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제가 지금부터 짧게짧게 사건을 중심으로 다윗의 인생을 한번 좀 살펴볼 건데 여러분도 한번 잘 따라와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윗이 역사 앞에 딱 가장 출사표를 내며 등단했었던 때는 골리앗과의 전투겠죠.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죽이고 난 다음에 민족의 영웅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인 즉은 사울의 적수가 되어 버렸다는 뜻이었어요. 주님을 위해 용기를 낸 결과가 왕의 눈 밖에 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다윗을 사울은 궁으로 불러들여서 가까이 두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이렇게 아주 달콤한 유혹을 하나 하죠. 내가 너를 가까이 두기를 위해서 나의 딸 미가를 너희에게 주겠다. 근데 내가 미가를 너에게 주를 때에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네가 우리의 원수 같은 나라, 블레셋 나라에 가서 남자의 표피 100개를 가지고 와야 한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100명의 남자를 쓰러뜨려야 한다.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 혼자의 몸으로 블레셋으로 들어가 백 명의 남자의 포피를 벗긴다. 라는 것은 사울에게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죠? 다윗이 이 일을 하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라는 뜻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100개가 아니라, 200개를 가지고 와 사울 앞에 내어놓았고, 사울은 오히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윗을 더욱 미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두려워하는 마음까지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번 해보게 됩니다.
 
왕국에서 사울은 다윗에 대한 마음이 점점점 악해지면서, 단창을 던져가며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었고요. 다윗이 미갈과 함께 있는 그 집 가운데 부하들을 보내어서 다윗를 직접 죽이고자 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미갈이 먼저 그 소식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을 창틀 밖에 달아 내리면서 도망시키죠.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은 사울의 수하 가운데 죽었을 것이에요. 유리(流離)방황(彷徨)하며 이리저리 돌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도읍 지역으로가 제사장들의 도움을 얻으며 이 진설병, 떡을 먹고 힘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그 칼을 얻고 다시 방황하는 시간을 갖게 되지. 이 이야기가 사울의 귓가에 들렸을 때, 사울은 너무나도 분개(憤慨)한 나머지 도읍에 있는 제사장들을 전부 죽이게 되죠. 여러분, 이 소식을 다윗이 들었겠죠? 자기를 도와준 것으로 인하여서 그 제사장들이 다 죽음 가운데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정말 슬픔과 절망 가운데에 빠져 있지 않았을까요?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 나라에 발붙일 것을 찾지 못하여서 블레셋이라는 나라, 아기스 왕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구걸하게 되죠. 이때 가드 사람들이 모함을 하는 것을 통하여서 다윗의 목숨이 위태(危殆)해지자, 다윗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하여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체하며, 그 앞에서 목숨을 연명하는 구걸하는, 여러분 이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과는 철 천지 원수의 나라인데, 그 원수의 수장 앞에서 미친 체하며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인생 나락으로 떨어진 다윗 그래서 겨우겨우 살아날 수가 있었죠.
 
아둘람 골로 간 다윗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을 만나게 됐고, 그곳에서 계속 유리 방황하며 도피(逃避)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도피 생활 중에 다윗은 두 번의 좋은 찬스를 맞이하게 되죠. 여러분, 어떤 찬스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찬스였습니다. 근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아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여러분, 이 과정을 통하여서 아마 다윗은 다윗의 동료들에게 아주 큰 신임을 잃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울을 죽이게 된다면, 다윗과 함께 유리방황하는 그 사람들의 도망자의 생활이 곧 끝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좋은 찬스를 두 번이나 놓쳤으니, 다윗은 주변에 있는 동료들에게 불신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고요. 다시 볼레세으로 찾아간 다윗은 시글락이라는 아주 작은 동네를 얻게 됩니다. 근데 그곳에서 잘 사는가 했더니, 이제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다윗과 그의 용사들을 징집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기의 칼끝이 자기의 동족을 향하여 전쟁을 하는 위기 가운데 다윗이 봉착했다는 것이 우여곡절 끝에 그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고, 시글락으로 돌아오지만, 돌아왔을 때 다윗을 맞이했던 그 마을의 상황은 아말렉이 전부 약탈에 가서 부녀자들이 다 포로로 끌려간 상황이었습니다. 이때에 다윗을 가장 신임하던 그 동료들이 어떠한 일을 하죠? 돌로 쳐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급했을 때에 다윗은 다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정신을 차리며 구했을 때, 하나님이 그 위기를 다시 승리로 갚아주시게 되죠. 왕이 된 이후에 다윗도 평탄치만은 않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군대와의 충돌도 있었고요. 계속되어지는 정복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 성경에 수많은 전쟁들을 통하여서 다윗은 아마 갑옷을 벗을 날이 없었을 것 같아요.
 
계속되어지는 전쟁터에서의 그 삶, 아무리 우리가 다윗이 싸움을 잘한다고는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결과로 봤을 때지 그 수많은 전쟁터를 나가는 다윗의 그 매순간은 얼마나 위태롭고 위기였던 위기였을까요? 급기야 그의 마지막 전쟁 이후에는 조금 더 평안해지는가! 했더니 밧세바를 취(取)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께 큰 죄를 얻게 된다. 그리고 압살로 아들의 반역을 통하여서 마지막 다윗의 손에는 그 수많은 적군에 피를 씻어야만 하는 명도 있었지만, 자기 아들이 나무에 달려 죽어 있는 모습을 손수 장사해야 하는 아주 비운의 인생을 산 것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여러분, 제가 조금 사건 중심으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때, 여러분, 어떤 감정이 드신가요?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파란만장(波瀾萬丈)하게 여겨지시지요? 하지만 어느 순간도 편하게 지낼 수 없었고, 어느 순간에도 발을 뻗고 편하게 잘 수 없었던 위기와 전쟁과 배신과 외로움과 급기야는 아들의 반역까지 겪어야만 했던 한 인생에 있어서 하나 정도만 겪어도 아주 큰 불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수많은 일들을 다윗은 그 한 일생 가운데 오롯이 담아내야만 했던 것이죠. 그런 다윗의 삶을 볼 때, 다윗은요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더 성숙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하나님 외에는 다른 곳으로 피할 곳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때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윗처럼 하나님에게로만 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절박한 외길, 외통수와 같은 그 골목 앞에 섰을 때에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 제가 찬송가를 많이 부르고 싶어서 찬송가를 많이 부를 수 있는 예배가 어디 있는가? 찾아보다 보니, 금요 철야 시간에는 우리 머리가 하얗게 된 우리 권사님들과 함께 찬송가를 기본으로 한 10곡 정도는 부를 수 있는 곳이어서 제가 금요 천하를 자주 갔더랬습니다. 그때 자주 불렀던 곡 중에 하나가 뭐냐면 여러분도 다 아실 텐데 천보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는 그런 찬양이었어요. 찬송가 338장이고 찬송가는 280장인데요. 이 곡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레의 동생이었던 찰스 웨슬레가 찬송 시로 고백한 내용이고요. 이 곡조는 스코틀랜드의 미녀입니다. 근데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 ‘천부여 의지 없어서’ 라는 찬송가가 나오게 되면 우리 권사님들은 누구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전부 다 손을 들고 찬양을 하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몇 번이나 이 찬송가를 부르고, 부르고, 부르다 보면 저쪽에서부터 훌쩍훌쩍 눈시울이 붉어지시며 그 눈물 콧물을 닦으시면서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아가 찬양하는 그 모습을 저는 함께 바라보면서
 
그 찬송가가 그때 당시에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이런 마음으로 우리 권사님들께서 그 찬송가를 불렀겠구나! 그분들의 삶의 여정과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아니고서는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 나와 찬양하셨구나!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께만 절박하게 그렇게 찬양하셨구나! 라는 걸 이제 조금은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찬송과 1절만 한번 불러보고 싶은데 여러분 어떠십니까? 괜찮을까요? 여러분 그러나 너무 처지지 않게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담아서 여러분이 찬송과 1절만 함께 찬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이 찬송가를 알았다면 아마 수십 번, 수백 번도 더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아니요 주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심을 꼭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다음 두 번째로 우리가 이제 2절을 함께 살펴볼 텐데 여러분 이 2절의 내용을 깊이 있게 묵상하다 보면 왜 다윗이 1절에 그렇게 고백하였는지가 또 기가 막히게 연결이 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데요.
 
*시편 16:2,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우리 2절을 다 같이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절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표현 중에 하나가 바로 주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는 표현이 한글 성결로는 한글 성경으로는 주님을 당신이라고 하기에는 좀 우리 정서가 맞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라고 표현했지만 원래 더 표현대로 이 표현을 원어대로 더 해석을 하다 보면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을 향하여서 ‘당신은 나의 주권자이십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유 아 마이 로드(You are my Lord!) 라고 쓰여 있습니다.
모든 삶의 생사(生死)여탈(與奪)권(權)까지 다윗에 있는 모든 인생의 순간순간을 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주권자가 되어 주셔서 인도하여 주고 있으시다. 라는 고백인 것이지요. 이 주권자라는 인식은 단순하게 그냥 하나님 다 나의 삶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되어지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신앙 고백이 있는데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가 바로 뒤에 나오는 후반 절을 읽어보면 주 밖에는 나의 목이 없다 하였나이다. 라고 표현되어 있죠 하나님이 나의 복이 되십니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얼핏 이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공급하여 주시는구나! 하나님이 나의 복이 되시고 풍족하게 하여 주시고, 장수하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좋은 것을 허락하시는 분이시구나! 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쓰여 있는 복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복은 ‘빠라크’라는 단어를 쓰는데 그 단어가 바로 ‘번영하게 되다, 풍성하게 되다 좋은 것을 갖게 되다 우리의 직경이 넓어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2절 가운데 쓰여 있는 복이라는 단어는 바라크라는 단어가 아니라, ‘토바티’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토바티라는 단어의 원형은 ‘토브’ 라는 단어예요. 여러분 토브라는 단어 한 번쯤 들어보시지 않았습니까? ‘좋다 선하다, 완전하다, 완성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 단어가 너무 좋기 때문에 자녀의 이름으로 사용하시는 것도 제가 보았습니다. 애칭으로도 쓸 수 있으니까, 저희 아이들에게도 이 ‘토브라는 이름을 한번 붙여볼까?’ 라고 생각하다가 제 성이 소라는 걸 생각하고 내려놓았습니다. ‘소 토브’ 좀 이상하죠?
 
근데 여러분,
이 ‘토브’ 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 쓰일 때는 언제냐면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창조물을 바라보시며 보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실 때 그 좋다가 ‘토브’예요. 사람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보시기에 힘이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심히 좋았더라. 가 그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창조물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 그대로 꼭 맞게 있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상태를 토브라고 말한다. 라는 것이죠. 그러면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여러분 다윗에게로 다시 한 번 돌아오겠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 되시고 하나님이 나의 토브가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이 고백의 내용은 나의 인생에 비록 위기와 전쟁과 피로 얼룩진 인생일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의 인생은 사울이 저의 생명을 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해야 하는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만, 그러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하나님, 나의 인생길은 ‘토브’였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하나님 칼과 전쟁의 위협이 하나님 늘 제 앞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인생은 풍전등화와 같았지만 그러한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만 한다면 그 인생도 저에게는 토부의 인생 라고 고백한다. 라는 것이지요. 연약함과 범죄 함과 인생의 밤과 같은 시기를 보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 가운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다면, 그 인생도 저에게는 좋은 인생이었습니다. 라고 다윗이 지금 고백하고 있다. 라는 것이. 제가 이 대목을 읽고 깨달았을 때 제 가슴에 뭔가 묵직한 것이 올라온 것이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제 속에는 늘 제 인생의 길에 대해서 불평과 부족함과 횧ᅟᅡᆫ이 너무나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늘 쫓기듯이 살면서 막 다른 길로만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제 속에 조금 있었다. 라는 것, 녹록치 않았던 저의 경제생활을 저희 가정의 경제생활로 인해서 저에게는 살면서 그렇게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저에게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없었던 것 같아요. 늘 그거 아니면 안 되는 인생으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공부를 잘해서 여러 대학을 붙어서 어느 대학을 가야 될지 고민하는 고민도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이 대학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한 대학만 놓고 주구장창 죽도록 기도하는 게 저의 인생이었어요. 자매들이 많이 있어서 누구와 사귀고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되는지 선택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있는 제 아내에게 가서 제발 저를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며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 부임하기 전에 잠시 호주에 있었는데, 호주에 있을 때,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외국 생활을 하고 또 거기에 아예 살고 싶은 마음으로 나갔기 때문에, 제가 가진 몇 가지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두 번째, 호주에 나가니 외제차를 주고 타면 어떨까요? 제가 저희가 호주에 갔을 때, 정원이 있는 집에서 저희가 살았어요. 그런데 그 집은 어떤 집이었냐면 저희 교회 멤버가 되시는 1927년 권사님의 별채 같은 집, 이곳에서 살았어요. 근데 이분이 어떤 분이냐면 이북 출신의 분이셨는데 ,이분이 잠시 동안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던 권사님이세요. 1927년 권사님을 모시고 그 집에서 주기철 목사님이 목사님으로 생각되어지는 권사님과 함께 이 철 없는 목사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죠. 근데 정확하게 그 집에 정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저에게 차를 이제 주었어요. 제공해 주었습니다. ‘기아 스펙트라’였습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호주에서 기아는 외제차였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이 정확하게 기도의 제목을 응답해 주신 거더라고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한국에 돌아와서도 저에게는 작은 아주 소박한 기도 제목이 있었어요. 그냥 교회 근처의 작은 집, 너무 소박하지 않습니까?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교회 근처의 작은 집,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집은 큰 산에 둘러싸여서의 아파트 단지 하나가 덜렁이고요. 조용하고 공기가 매우 좋습니다.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어요. 저에게는 늘 선택이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 그 일 그거라도 놓치게 된다면 저에게는 차선이 없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라는 생각으로 아등바등 살 수밖에 없는 게 저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삶에 대하여서 하나님께 참 어려운 마음을 토로할 때, 하나님이 호주에서 제가 기도를 하는데 응답을 주셨어요. 호주에서 기도해서 응답을 주셨을 때에는, 0으로 응답을 주시더라고요. 이렇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I give you best way. 근데 여러분 이게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제 안에 이 응답을 주시면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저에게는 없었던 그 선택들 수많은 외통수 길에서, 이거 아니면 안 된다고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던 저의 시간들이 쭉 지나가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런 삶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최고의 길로 인도하셨다면,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아니 수천 가지의 기회가, 나에게 선택의 기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게 있더라면, 더 고민하고 더 염려하고, 더 괴로움만 더 했겠구나!. 오히려 그런 말을 잘 아시고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셨구나! 라고 생각을 하니 여러분 저에게 있어서 더 이상 어떠한 선택도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문수야,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길을 준 염려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길을 내가 너에게 줄 거야.”
 
그래서 여러분 저는요 오늘 마치 다윗이 그러한 길일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다면, 저는 그 길이 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 길이 저에게 토브였습니다. 라고 고백한 다윗의 고백이 너무나 마음으로 동의가 되고 공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요 시편 16편 8절에서부터 11절까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데 여러분 다윗의 심정으로 한번 저희가 8절부터 11절까지를 같이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6:8-11,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아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 참석하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기쁨의 고백을 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반드시 이 길 가운데 우리가 서서 하나님 앞에 이 고백을 하시도록 하나님 우리를 붙잡고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어떠한 기도 제목으로 여러분들의 삶이 가득 채워져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기도 제목일지라도 그 길 위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울타리 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시고, 남겨진 우리의 삶에도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토브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단순히 우리의 삶에 우연처럼 만난 어떤 당혹스러운 일을 정리하기 위한 정리용 멘트가 아니에요. ‘아니야 괜찮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 이 길이 그래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좋은 길일 거야’ 이렇게 그냥 정리하기 위한 정리용 멘트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당혹스러운 우리 인생길 앞에, 어쩌면 선택이 아무것도 없는 그 외통수와 같은 길 앞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거야,’라고 끊임없이 세뇌하며 끊임없이 나를 나의 신념을 붙잡는 그런 류의 고백이 아닙니다. 다윗의 입술 가운데 이렇게 고백하도록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에게 넣어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실제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 그의 인생 가운데 끊임없이 주입되어지고 있고, 끊임없이 경험되어지고 있고 체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이 길을 거는, 걸어가고 있는 과정도 우리에게 너무 중요하다. 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그 과정에 안내, 하나님의 섭리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 하나님에게 붙들린바 되었을 때, 가장 안전하고, 가장 편안하고, 가장 따뜻한 그 울타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주님의 그 피난처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수렁 같은 인생의 고비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섭리를 바라본 것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고백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고백을 다윗의 입술 가운데 담아주셨듯이, 이제 우리 입술에도 그 믿음의 선한 고백 담기를 간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으로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여 주심을 믿고, 그 믿음과 그 마음의 고백으로 나아가서,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주님의 함께하심을 바라보고, 늘 주님을 찬양하고, 변화무쌍한 인생의 파도 앞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심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한다. 가장 좋은 포부의 길, 베스트 웨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하며, 응답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그 시간을 지켜서 토비새와 공 예배에 기쁨을 현장에서 받아 누리고, 이 힘든 세상을 이기는 힘을 주심을 감사하며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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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2023년 5월 10일)
제목: "한 영혼을 살리시고 먹이시다"
말씀: 누가복음 8:54~56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정명철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누가복음 8:54~56,
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고 지금 이곳 안아주심의 본당에 모여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예배를 올려드리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여전히 우리 삶에 답답한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오직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함으로 회복을 넘어 부흥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오늘도 말씀의 풍성한 은혜를 사모하며 부흥헌신 수요 기도에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8장 54절부터 5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 5월인데요. 잘 보내고 계십니까? 몸도 많이 바쁘고 돈도 많이 들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한 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가정에 중학교 1학년 딸이 하나 있어요. 제가 사랑의 교회에 와서 나은 앤데 벌써 중학생이 됐습니다. 얘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러는 거예요. 아빠 올해 어린이날에는 어떤 선물을 해줄 거야 그래서 제가 매우 합리적으로 설명해줬습니다. “선우야, 너는 중학생이잖아. 그러니까 어린이가 아니고 청소년이다.” 이렇게 제가 설명해줬더니요. 제 딸이 더욱 합리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생일이 안 지났으니까 법적으로 어린이야.” 자기가 만 12세니까 아직 어린이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이런 주장입니다. 그래서 옷도 사주고 치킨도 사주고 어린이 대우를 해줬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아이도 12세 12살이죠. 이 아이를 본문에 41절 42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같이 보실까요?
 
*누가복음 8:41-42,
41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42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밀려들더라.
우리 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첫 번째는 이 아이의 아빠가 회당장인데 이름이 야이로였다.
 
두 번째는 이 아이는 12살이었고 외동딸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아이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어가고 있었다. 이것들을 확인할 수가 있어요. 아마도 이 야이로가 가버나움의 회당 장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고 있는데요. 당시에는 10명의 관리자들이 회당을 섬겼다고 합니다. 그중에 3명의 원로가 회당 장이 돼서 나머지 일곱 사람들을 지도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야이로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상당히 지혜가 있었을 것 같아요. 또 외동딸이 12살밖에 안 됐다면, 아마도 늦은 나이 이 딸을 얻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이 아이가 가정에서도 지역사회 안에서도 많은 사랑과 주목을 받으면서 자랐을 거예요. 그런데 이 아이가 아파서 죽어가고 있으니까,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까맣게 타겠습니까? 그 아내, 아이의 엄마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알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로가 체면이 뭐고 다 다 내 팽개치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간구하는 것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과연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몇 가지 사역의 원리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원리는 예수님은 한 영혼에 집중하신다. 예수님은 한 영혼에 집중하십니다.
 
I. 예수님은 한 영혼에 집중하신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우리가 잘 생각해 보면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누굽니까? 말라기죠? 말라기 이후에 400년 만에 예수님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거예요. 바벨론 포로 이후 600년 동안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또 전파하고 또 치유하는 사역 하실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던 것이죠. 누가복음 8장 4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누가복음 8:4,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갈릴리 주변 동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던 것 같아요.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심지어 19절 말씀에 보니까
 
*누가복음 8:19,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에 모여 있어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따르는 큰 무리에게 눈길을 주었을까요. 아니면 야이로에게 집중하셨을까요? 저는 큰 무리에게 눈길이 갔을 것 같아요. 왜냐면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 유혹이 더 컸을 거예요. 조금 외람된 표현일 수 있지만 예수님이 신흥 종교의 수장으로 되고자 했다면, 이 무리들을 동원해서 선동해서 쉽게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또 심지어 예수님이 다윗 왕국의 재건이라고 하는 비전을 제시했다면 이 무리들을 선동해서 로마 총독부를 공격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은 철저히 한 영혼에 집중하십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예수님이 한 영혼에 집중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기록돼 있어요. 여러분 26절부터 보시면 예수님이,
*누가복음 8:26,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귀신 들린 한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귀신 들린 한 사람 이 사람은 많은 귀신이 들렀었기 때문에 이름이 군대였어요.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무덤 사이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광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십니다. 심지어는 이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를 희생시키세요.
 
여러분 요즘 돼지 한 마리가 얼만지 아세요? 50만 원 2천 마리면 10억입니다. 10억 우리는 태신자를 위해서 10만 원 쓰기도 좀 아깝잖아요. 안 그런가요? 엄청 도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으로 40절 보시면,
*누가복음 8:40,
40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
-예수님이 다시 가보나무 들어오실 때 무리가 막 몰려들어서 환영하는데, 예수님은 야이로 한 사람에게 집중하십니다. 또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으로 이동하실 때, 우리가 막 몰려들었는데 이때 예수님의 옷 가에 살짝 손을 대었던 그 여인을 집중하시죠. 야로의 입장에서는 한시가 급한데 예수님이 굳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 여인을 찾아내서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구원과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오롯이 이 아이에게 집중하시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이처럼 한 영혼에 집중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사람의 변화가 갖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예수님이 정확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갖는 영향력 여러분 혹시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1ml 정도 되는 종이가 한 장 있습니다. 1ml 되는 종이를 한 번 접고 두 번 접고 30번을 접으면 높이가 얼마나 될까요? 무려 1천 74킬로미터입니다. 1천 74킬로미터, 에베레스트 최고봉이 8848m 잖아요. 그러니까 에베레스트보다 120배가 높은 거예요. 어마어마하죠. 안 놀라시니까 제가 눌러야겠네요. 어마어마한 겁니다. 담임 목사님 가끔 언급하시는 승법 번식이 이런 원리잖아요. 그리고 제자 훈련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훈련의 대헌장이라고 하는 골로새서 1장 28절에 보시면 이렇게 돼 있어요.
 
*골로새서 1:8,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잘 아시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 보면 세 번 반복되는 단어가 있어요. 뭘까요? 각 사람 각 사람입니다. 제자 훈련은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가르치고, 각 사람을 세우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한 영혼에 집중하는 것 그게 제자 훈련이죠. 물론 제자 훈련 반 편성을 할 때는 12명 이내의 소급으로 만들잖아요. 그런데 훈련 교육자들의 관심은 훈련생 한 명 한 명이 있는 거예요. 왜냐 이 훈련소에 한 사람이 변화되면 그 파급력이 엄청날 것이다. 이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도 폭발 훈련 부를 담당했을 때 이야기인데요. 어느 날 훈련을 받고 있었던 한 청년 저 찾아왔어요. 하는 말이 자신이 청년부의 전도팀장인데, 청년부 전도 학교에 저를 강사로 초대하고 싶다. 그래서 제가 흔쾌하게 허락을 했습니다. 당시가 전도 폭발 복음 지시가 클래식에서 저스트로 변화되는 시기였거든요. 그러니까 새로운 버전의 복음 제시를 배우고 싶다. 이래서 요청했던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몇 주 뒤에 이 형제가 저 다시 찾아왔는데 의기소침한 상태로 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청년부에 전도 학교를 홍보를 하고 있는데, 신청자가 거의 없다. 이러는 겁니다. 제가 뭐라 그랬을까요? “형제님 염려하지 마세요. 한 명이 신청해도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네, 그 한 명이 변화되면 수많은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잖아요. 그 형제가 처음에는 깜짝 놀라더니 안심하고 돌아갔습니다. 실제로 여러 명이 왔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한 영혼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믿음의 세대 계승을 간절히 바라는 엄마 아빠는 내 자녀가 그 한 사람입니다. 일터 선교를 꿈꾸고 있는 직장인들은 내 옆에 앉아 있는 김 과장님이 한 사람입니다. 캠퍼스의 복음화를 갈망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내 친구 그 애가 한 사람인 것이죠.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한 영혼을 위해서 집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이 한 영혼에 집중하셨다. 이 사실을 살펴보았는데 그러면 조금 구체적으로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사역이 어떻게 나타났느냐.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II. 먼저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리신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아이에게 “아이야 일어나라.” 어떻게 말씀하시니까? 아이가 일어났어요.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아이를 살리는 장면을 우리가 잘 관찰해 보면 두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우리 함께 54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54절 시작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여러분 두 단계 찾으셨나요.
 
첫 번째 단계는 아이의 손을 잡은 거예요.
두 번째 단계는 입을 열어서 말씀하신 겁니다. 조금 일반화시키면 사랑의 터치와 능력의 말씀 선포 사랑의 터치와 능력의 말씀 성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어요. 먼저 사랑의 터치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요즘은 아이를 이렇게 함부로 만질 수가 없죠. 잘못하면 이게 성추행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이 아이의 손을 잡는 것이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수가 있어요. 지금 이 아이가 죽은 상태죠 그러니까 이 아이의 몸이 시체입니다. 구약 율법에 보면 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하게 돼요. 7일 동안, 그래서 제3일째 또 마지막 7일째 이렇게 정결예식을 진행해야 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게 돼 있습니다.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이 본문에서 아이의 손을 과감하게 딱 잡으시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을까요? 그것은 이 시체로부터 부정함이 예수님께로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생명력이 흘러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감하게 잡을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이 죽은 아이의 손을 잡는 그 순간부터 부활이 시작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터치가 살아있는 사람들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필요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이제 많이 변해서 출산 신방을 굉장히 좀 늦게 하는 편이잖아요. 첫 번째 이유는 산후조리원에서 외부인 통제를 심하게 하기 때문에 못 가고 두 번째는 우리 자매들이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못 갑니다. 근데 진짜 15년 전만 해도 제가 목사 안수 받고 얼마 안 됐으면 해도, 출산 심방을 바로 갔어요. 그런데 저는 출산 심방이 너무 어려운 거예요. 왜냐하면 애를 낳아봤어야지 그 심정을 알죠. 그래서 어떻게 위로를 하나 상당히 좀 어려웠었는데 그래서 제가 생각해낸 게 있어요. 야, 출산 심방을 갈 때 우리 여 순장님을 모시고 가자 여 순장님 모시고 가면 어떻게 될까요? 순장님이 그냥 산모의 손을 다 잡고 자매님, 너무 수가 많았어요. 이러면 끝나요. 제가 다른 말 안 해도 왜 그럴까요. 네, 그 마음을 아니까 서로 통하는 거죠. 사랑의 터치가 생명력을 전달해 주는 겁니다. 근데 어떤 목사님은 남자 제자 반을 맡잖아요. 그러면 이분은 꼭 어떻게 하시냐면 매일 훈련 시간마다 훈련생들이 서로 이렇게 포옹을 하고 인사를 하게 한대요 서로 안아주라는 거죠. 왜냐하면 남자들은 이렇게 손만 잡아서는 정서적 교류가 안 된대요 그게 안아야 된대 여기 남자 분 선생님들 많이 계시는데 맞습니까? 네, 그래서 이 목사님이 끌어안기 하는데 이렇게 가슴을 탁 대고 심장 박동을 좀 느끼면서 또 귓가서의 훈련생의 목소리 소리 들으면 이렇게 생명력이 흘러간다는 것이죠. 얼마든지 이렇게 손을 잡든지 간에 포옹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 사랑의 터치를 통해서 생명력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터치를 통해서 생명력을 흘러 보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다음으로 능력의 말씀 선포인데요.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기록돼 있습니다. 7장 끝에 보면, 마태가 이렇게 이야기 하고 했어요. 마태복음 7장 28절입니다.
 
*마태복음 7:28-29,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예수님 말씀에 영적인 권위가 막 나타나는 거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셨는데 제자들이 광풍에 있는 바다를 보면서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예수 이름을 깨우니까 어떻게 됩니까? 네 누가복음 8장 24절 하반 절입니다.
 
*누가복음 8:24,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의 그 말씀의 권위가 바람과 물결도 잔잔하게 하는 자연 만물을 다스리는 영적인 권위로 나타나는 것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딱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 하실 때 그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죠. 창조주 하나님의 영적인 권위가 그대로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제가 매년 훈련생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어요. 뭐냐 여러분이 훈련을 수료하면 두 가지가 남아야 된다. 두 가지가 남아야 되는데,
첫 번째는 뭐냐 사랑의 관계가 남아야 된다.
두 번째 여러분의 인격과 삶을 관통하는 말씀이 남아야 된다.
그렇게 강조를 합니다. 오늘 두 번째 인격과 삶을 관통하는 말씀에 대해서 조금 더 강조해 드리고 싶은데요. 이 자리에 이미 수료하시고 여러 사역 현장에 섬기시는 분들이 많이 앉아 계세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변화를 경험하셨나요? 다시 말해서 ‘야 내가 다시 살아났다 영적으로 되살아났다.’ 이렇게 느꼈던 적이 언제입니까? 네, 많은 성도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무엇이냐면 ‘내 인격과 삶을 흔들어 놓았다.’ 그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순종했을 때 그랬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인 mri가 되어서 우리의 인격과 삶의 모난 부분 다 비춰주실 때 또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의 날선 검처럼 살아서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 그것이 메스처럼 우리의 상처를 찌를 수 있지만 우리가 비록 아프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면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살리는 창조의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훈련을 받으시면서 주일 설교 말씀을 요약하거나, 또는 날샘 큐티를 하거나 또는 훈련 아이비에스(IBS)를 하거나, 심지어 다락방에서 말씀을 나눌 때, 내 마음에 딱 와서 부딪히는 말씀이 있으면 순정의 방향으로 결단할 때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훈련생 여러분 아시죠? 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지금까지의 긴 말씀드렸는데 정리를 하자면 예수님은 한 영혼를 살리십니다. 어떻게요? 먼저는 사랑의 터치를 통해서 생명력을 살리시고 결정적으로는 능력의 말씀 선포로 그 영혼을 살리시는 거예요. 이해가 되었을 것으로 보고...이제 세 번째입니다. 본문에서 발견한 세 번째 예수님의 사랑 권리 우리와 함께 55절 말씀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8:55,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후에 뭐라고 말씀하세요? “먹을 것을 주라 먹을 것을 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제가 동일한 질문을 집에서 딸에게 한번 해봤어요. 왜 그러셨을까? 딸이 하는 말이 얘가 아파서 오랫동안 누워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배고파서 그랬겠지 어떻습니까? 굉장히 합리적이죠. 네, 맞아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예수님께서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로 한 것은 그 아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죠. 여기서 발견한 세 번째 원리 예수님은 한 영혼을 먹이십니다 한 영혼을 먹이십니다
 
III. 한 영혼을 먹이십니다.
-이 말을 우리가 조금 더 이렇게 바꿀 수가 있는데 어떻게 바꿀 수 있냐면 예수님은 한 영혼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을 공급해 주시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지난 특새 때 많은 은혜를 받았던 찬양 중에 ‘주님의 그 모든 것’이라고 하는 찬양이 있어요. 가서 한번 보여주실까요?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나의 공급자 또 내 생명 놀라우신 하나님, 주 나의 상급 삶의 이유 놀라우신 하나님 주님의 그 모든 것이 내 삶을 가득 채우네. 내 모든 갈증과 필요 주 사랑으로 만족시키니 부족함 없네.
-여러분, 아시죠? 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필요를 알고 계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좀 주의할 것이 있어요. 무엇이냐면 우리는 가끔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착각한 오류에 빠집니다. 조금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필요로 포장하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네 아주 쉬운 예인데 물은 필요고요 커피는 욕망입니다. 우리 가운데 목사님 저는 커피 없이 못 삽니다. 이런 분이 있을 수 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물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커피 없이는 살 수 있습니다. 커피는 욕망이에요. 커피는 필요를 넘어서는 물 이상의 그 무엇이다. 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죠. 자, 그런데 예수님 우리 필요를 채우신다고 했잖아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시면 예수님은 다시 살아난 아이에게 먹은 것을 주라. 라고 하셨어요. 그 아이의 필요를 알고 그에게 꼭 필요한 그것을 채워주고자 하셨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한 영혼을 먹이는 일에 힘써야 되겠죠. 제가 지금까지 여러 말씀드렸는데요. 본문에서 발견하는 예수님의 사역 원리 세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첫 번째가 뭐였죠.
 
첫 번째는 예수님은 한 영혼에 집중하신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리신다.
세 번째는 예수님은 한 영혼을 먹이신다.
-네 잘 기억하고 계시는데, 제가 이와 관련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지금 여직장인 순장 반을 담당하고 있거든요. 우리 순장 반에서 지난 1월 달에 캄보디아로 단기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저희가 함께 사약과 선교사님이 약 30년 가까이 캄보디아 땅을 섬기고 계시는 분이셨어요. 우리 선교팀이 이분의 사역 현장을 쭉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현장이 어디였냐면, 움직이는 안식처, 버스를 타고 살아가는 것인데 움직이는 안식처라는 사역 현장이었어요. 송 교사님이 현지인 사역자들 2명과 함께 버스를 타고, 노숙자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시는 거예요. 이 아이들이 글을 모르니까 주로 활동 위주의 놀이를 하거나 성경 공부를 하는 거죠. 나이가 조금 있는 애들은 버스 안에 들어가서 프로그램을 하고, 어린아이들은 마당에 이렇게 공터에 돗자리를 깔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현진 사역도 이렇게 사역을 하고 있는데, 우리 선교사님이 한 귀퉁에 딱 자리를 잡으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아이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부릅니다. 부르시고 어떻게 하시냐면 물티슈를 꺼내가지고 애들 다 닦아주는 거예요. 손을 닦아주고 얼굴을 닦아주고 그러고 나서 정성껏 손톱을 다 깎아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몸에 상처가 난 아이들은 일일이 소독제로 이렇게 꺼져 닦아주시고 연고를 발라주시더라고요 물론 맨손으로 하십니다. 마스크도 쓰지 않고 하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딱 바라보는데 마음이 뭉클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제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드냐면 ‘우리 선교사님은 예수님 같다.’ 이런 느낌이 확 와 닿았습니다. 참 부끄럽지만 저는 그 마스크를 벗는 것조차 어려웠어요. 왜냐하면 첫 번째는 냄새가 많이 날 것 같아서 노숙자니까 두 번째는 코로나나 다른 질병이 나한테 오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 때문에 그렇게 못했습니다. 근데 선교사님이 그 아이들 한 영혼 한 영혼을 다 집중하시는 거예요. 그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의 터치를 하시는 거죠. 그리고 그들의 필요 그들이 먹을 것과 선물을 나눠주시는 사역들을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이 선교사님이 어떻게 그와 같은 사약을 묵묵히 30년 가까이 계속할 수 있었을까? 선교사님에게 이런 확신이 있었대요. 내가 이 캄보디아 아이들을 변화시키면 이 아이들은 캄보디아 땅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 확신 속에서 일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선교사님이 운영하고 있는 ‘주님의 학교’라고 하는 그런 학교가 있는데 그 담벼락에 이렇게 돼 있어요. 제목에 나올 텐데 ‘티칭 더 월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체인징 더 월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삶도 이런 삶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이 선교사님처럼 한 영혼에 집중하고, 그 영혼을 살리고, 먹이는 일에 동참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오늘 본문 56절에 보시면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누가복음 8:56,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야이로와 그의 아내가 자신의 딸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엄청 놀랐어요. 네, 여기서 놀랐다는 단어가 어떤 의미냐면 완전히 압도당해 있다. 이런 의미입니다. 완전히 압도당할 정도로 놀랐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질문입니다. 정말 이 야이로와 그의 아내가 이 일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말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를 내 눈 앞에서 봤어요. 내 삶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딸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봤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입을 꾹 닫고 살아간다.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랬을 겁니다. 오히려 그 딸의 손을 잡고 다니면서 얘가 바로 예수님이 살린 애다 이러고 다니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것 같아요. 다시 살아난 이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이 아이가 공 예배에서 간증을 했는지도 몰라요. 여러분, 저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이렇게 했을지 몰라요. 네 당당하게 그런 삶을 살았을 겁니다. 이와 같이 이 야이로의 부부와 그 딸은 그 삶이 완전히 바뀌었을 거예요. 뒤집어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변화시키신 겁니다. 하나님이 사역자로 세우신 것이죠. 예수님은 한 영혼을 살리시고, 먹이실 뿐만 아니고 한 영혼을 세우십니다. 그것이 오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세우십니다.
 
 
IV. 예수님은 한 영혼을 세우십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님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은 사람들이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제 우리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또 다른 영혼을 살리시고 먹이시고 세우시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영혼을 살리고 먹이고 세우는 사역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부탁을 드립니다.
 
요약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한 영혼에 집중하시는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 예수님이 사랑의 터치와 능력의 말씀 선포로 우리를 살리셨음을 확신하고, 예수님이 여전히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 되심을 고백하는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한 영혼을 살리고, 먹이고, 세우는 사역이 되어 사랑의 터치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만들어내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을 전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구하여서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아가며, 사람의 변화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재생산의 역사를 계속 이어나가서, 예수님이 죽은 아이의 손을 잡아 말씀으로 다시 살리신 것처럼 사랑의 터치와 능력의 말씀 선포로 내 주변의 한 영혼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이웃의 필요에 민감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역자로 세워지는 은혜를 경험하는 현장과 가정과 이웃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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