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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2월 5일)
제목: “새로운 삶을 향한 삭개오의 결단”
말씀: 누가복음 19:1~10
찬양인도: 쉐키나(장단희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 유선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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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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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이런 경험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새 신발을 샀는데 그 신발과 맞는 옷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새 옷을 사고 새 옷을 샀는데 그 신발과 옷과 어울리는 가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또 새 가방을 사고, 남자분들은 특별히 it 쪽에 일하시는 분들은 아이폰만 살려고 했는데 아이패드를 사고 용돈을 모아서 맥북을 사고, 또 애플 워치를 사고, 전문 용어로 사과 농장을 운영하게 됐다.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하나의 소비가 비슷한 것을 소비하게 되는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것 그래서 스타일의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들이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나타납니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디드로 효과’라고 부르는데요.
*디드로효과 (Diderot effect)
-어떤 제품을 소유하게 되면 그 제품과 관련된 다른 제품들까지 그 제품에 맞춰서 갖추려고 하는 경향. -드니 디드로-
-디드로 효과는 어떤 제품을 소유하게 되면 그 제품과 관련된 다른 제품들까지 그 제품에 맞춰서 갖추려고 하는 경향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디드로 통일성 제품 간 연결성이라고도 말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드니 디드로는 18세기 프랑수아 철학자였는데요. 어느 날 그는 친구로부터 고급 실내복 비단 가운을 선물 받았습니다. 원래 스타일에 신경을 쓰지 않던 철학자였는데 그 실내 비단 가운을 입고 거실에 앉아서 거울을 한번 쳐다봤는데 나도 꽤 그럴듯해 보이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전에 자신의 스타일보다 훨씬 멋져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가운을 입고 문득 서재를 돌아보니까 너무나 제각각인 가구들 낡아서 보풀이 일어나는 양탄자 멋지지 않은 그런 가구들이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서재는 내 새 비단 가운과 너무 안 어울린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씩 둘씩 그 비단 가운과 어울리는 제품으로 서재를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책상서재에 앉아서 책상에 앉아서 서재에 앉을 수는 없죠. 책상에 앉아서 서재를 둘러보는데 그 서재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멋진 서재로 변화된 것을 디드로는 발견하게 됐습니다.
결국 그는 비단 가운 하나가 그것이 뭐라고 집 전체를 재편하는 경험을 하게 됐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디드르 효과라는 말로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험 하나의 변화가 삶의 총체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현상은 단순히 소비 현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중심 대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에 모시면은 그 사람은 마치 디드로의 비단 가운을 입은 거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을 보면,
*갈라디아서 3:27,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이 옷을 입었다. 예수님으로 옷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상징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삶의 중심으로 모신 사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신앙의 결단을 하는 것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 라는 놀라운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삶을 대대적으로 재편해 나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바로 신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옷 입고 나의 삶을 돌아보면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려고 유튜브를 켰는데 고양이 쇼츠만 50개 보고 나온 내 모습이 정말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구나. 토요일 밤에 넷플릭스에서 중증외상센터 정주행 하다가 주일까지 날을 새고, 피로도가 중증이 되어서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숙면을 취하는 것은 이건 정말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거야. 금요일 저녁에 핸드폰 5분만 하겠다고 인스타를 켰는데 쿠팡 특가를 보고 싸게 살려고 새벽 2시까지 잠들었네. 나는 토요일 날 칠천기도용사 10부장인데, 이건 정말 아닌 거 같애. 이러한 고백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은 하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나의 삶이 내가 믿는 예수님 내가 나의 주인으로 나의 중심으로 모시는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는 삶이 전개될 때 갈등하게 되고 뭔가 그 주님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삭개오는 이 디드르 효과, 영적 디드르 효과라고 할까요?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삶을 재편해 가는지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일전에 보면은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그 당시에 돈은 돈이 도는 도시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고, 동서양의 그런 무역이 아주 잘 진행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건들이 많이 팔리고 세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종려나무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농업이 발달하였고요.
그다음에 대추야자와 그다음에 향유 같은 귀한 물건들이 많이 나는 부유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다음에 향유 같은 귀한 물건들이 많이 나는 부유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오늘날 서울 대한민국의 서울과도 굉장히 유사한 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절에 보니까,
*누가복음 19:2,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누가는 삭개오를 등장시키는데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고, 세리장이라는 걸 언급하고, 부자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누가 모금에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어떤 사람은 이름 없이도 이렇게 등장시키는데 누가가 이렇게 삭개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뭔가 의도가 있다. 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 의로운 자란 뜻을 갖고 있는 사케오 오늘날도 그랬듯이 그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식들의 이름을 지을 때 굉장히 신중하고 좋은 이름을 지어줬다. 라고 합니다. 내 아들이 내 딸이 이 이름을 갖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좋은 이름 지어주는 것 아닙니까? 삭개오도 부모님이 그 당시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이 중심이 되는 그런 백성이었기 때문에 외로운 삶을 살아라. 율법 대로 살아라.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며 살아라. 이러한 의도로 삭개오에게 최고의 이름을 고르고 골라서 지어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도 어렸을 때는 그 이름대로 삭개오답게 살려고 노력하며 하루 이틀 이렇게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자라서 세리가 됐고 세리장이 되었죠. 삭개오도 돌 때부터 이렇게 세리가 되어서 떼돈을 벌겠다.라는 생각을 안 했을 겁니다. 왜 세리가 되었을까요?
그 당시 세리는 로마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그 하청업자였다고 합니다. 로마가 아웃소싱을 한 것이죠. 그래서 세리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금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걷게 한 다음에 이렇게 받치게 했는데, 그 세대들 중에는 그런 과정에서 조금의 그런 이익이 아니라 부당하게 과하게 이익을 얻어가지고 부를 축적할 사람들이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세리로 부자가 된 사람은 그래서 당시 부패한 로마 경제시스템을 악용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부자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를 유발했고, 구타 유발자와 같은 그런 사람이었고요. 매국노라고 칭해지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삭개오는 아마 처음에는 세리가 되어 부당한 부자가 되려고 생각하면서 이 길을 들어섰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신체적으로 매우 약했습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일은 하기 어려웠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찌 보니까 직업을 찾기 위해서 아니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그 가운데 세리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분명히 돌 때부터 세리가 되겠다. 라고 결단하는 사람은 아니었을 거란 말이에요. 당시 세리들의 또한 관행들이 있지 않습니까? 세리가 되었는데 다들 세리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 관행에 조금 조금씩 천천히 물들어 갔던 것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그가 의로운 자라는 신앙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녹록치 않은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경제적 압박과 또한 생존의 문제로 타협하지 않기가 보통 쉽지 않은 그런 상황에 삭개오가 놓인 것입니다.
결국 삭개오는 의로운 정체 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과 타협(妥協)하고 그 부정과 손잡을 수밖에 없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딜레마를 부각 시켜주는 1명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삭개오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는 직장에서 사회에서 신앙의 길과 세상의 유혹과 관행과 끊임없이 갈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서는 김 집사지만 직장에서는 김 대리인 것입니다. 시장에서 실적을 위해서 정직함을 포기하고 그 거짓 보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다 학원 보내고 그런 불안감 속에서 주일 성수와 자녀 신앙 교육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내기가 쉬운 것입니다. 삭개오가 의로운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지키려고 하지만 세상의 방식과 믿음이 충돌하는 그 현장이 바로 우리 오늘 교회 문을 열고 나가면 맞이하는 우리 하루하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도 어찌 보면 21세기 삭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삭개오가 뒤에 구원을 받기 때문에 앞에 구원받기 전에 삭개오가 우리와 어떤 스탠스가 다를지 모르지만 이렇게 신앙과 어떤 삶의 현장에서의 그 갈등하는 모습은 삭개오와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입니다. 3절 상반부에 보니까,
*누가복음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궁금했습니다. 이 궁금함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지만 궁금해 하지도 않는 분들이 있는데, 이 삭개오에서 에게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 이유이겠지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저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거지 소문이 들었습니다. 자기와 동종 업계에 일하는 마태가 예수님의 12명 그 이너서클 안에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손가락질 받고 멸시 받고 욕을 먹으며 살았던 그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들었다는 것은 삭개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나도 주님이 받아주실까 나도 주님께 가면 나의 이 탐욕이 치유 받을 수 있을까? 나도 주님과 한번 식탁 교제를 나누는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을까? 삭개오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주님을 향한 갈망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3절에 보니까,
*누가복음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그가 예수께 어떠한 사람인지 하여 보고자 하듯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는 이 가운데 두 가지 장애물(障碍物)을 발견합니다. 한 가지는 키가 작은 것입니다. 키가 작은데 어느 정도 작냐면 무리 속에서 예수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자였다는 것이죠.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께 나아가려는데 그 개인적인 장애물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아까 말씀드린 거짓 보고서를 작성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을 수 있구요. 1주 2주 교회를 안 가다 보니까 늦잠을 자게 되는 그 게으름의 관성이 그랬을 수도 있구요. 또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다닌다고 혼나고 이렇게 핍박(逼迫)받았던 것들이 기억나서 그랬을 수도 있구요. 혹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받았던 어떤 상처가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데 그런 개인적인 장애물로 작동할 때가 우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장애물은 환경적인 장애물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이 많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개인적인 장애물만이 아니라 외적인 장애물도 나타나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그런 외적인 장애물이 있습니다. 교회를 안 다니는 가정 형편이 얼마나 교회에 다니기가 어렵습니까? 그런 가정형편도 그렇고요.
또한 뭐 눈만 뜨기만 하면 수많은 뉴스와 콘텐츠들의 홍수 가운데 우리는 살고 있구요. 또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고지서에 무슨 뭐도 납부해야 되고, 뭐도 챙겨야 되고 뭐도 해야 되고 연말정산도 해야 되고, 안 돼서 또 신경질도 나고 그러한 일들이 너무 우리에게 많이 있고요. 그다음에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안 좋게 보는 그 시선(視線)도 바로 외부적인 장애물로 우리에게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4절에 보니까,
*누가복음 19:4,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삭개오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또 이것이 흔치 않은지를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부지런히 어떻게 하면 이 장애물을 극복할지 굉장한 순발력을 가지고 굉장한 창발성을 가지고 이 장애물을 극복했습니다. 돌 무화과나무는 그 당시에 키가 크지 않은 나무고 가지를 넓게 펴고 있는 나무여서 삭개오라는 사람이 이렇게 오르기 쉬운 나무였다라고 합니다. 그 나무는 삭개오가 개인적인 장애물과 외부적인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아주 절호의 기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도움을 받아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돌 무화과 나무와 같은 것이 있죠. 오늘 이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세상의 소음(騷音)에서부터 우리가 차단(遮斷)되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삭개오의 돌 무화과나무와 같은 곳이 바로 이 교회입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고 다락방에 나면 나가면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도움을 받아서 돌 무화과 나무의 도움을 받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또한 돌 무화과 나무의 역할을 감당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삭개오와 같이 주님께 나아가는데 힘들어하고 게으름의 관성과 안 나가다 보니까 못 나가게 되고 또 불러주지 않으니까 먼저 나가기 힘들어하는 그런 분들에게 먼저 다락방에 초대를 하고, 중보기도를 하고, 안부를 물어보는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돌 무화과나무가 되는 우리 개인 개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의 공동체가 그런 돌 무화과나무와 같이 오르기 쉽게 아주 낮고 가지를 넓게 편 돌 무화과나무와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다락방이 그러한 돌 무화과 나무와 같은 다락방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5절에 보니까,
*누가복음 19:5,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누군가 미리 알려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확하게 삭개오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저기 나무에 올라가 있는 키 작은 아저씨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삭개오야 라고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온기와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들었던 삭개오야라는 그런 부드러운 목소리 말고 세리가 되어서 삭개오는 이러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러한 따뜻한 목소리로 주님을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죄인과 동일시되었는데 예수님이 부르실 때는 마치 삭개오 이름과 같이 너는 의인이야, 라고 선언하신 것 같은 그 부드러운 주님의 목소리를 삭개오는 들었을 때 이미 그의 안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빨리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초를 질 테니까. 뭐 10초 안에 내려오라 이런 것이 아니라 주저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거리낄 것 없이 나에게 내려오라. 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대로 가도 될까, 내가 이렇게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게 살았는데, 라고 우리도 일주일에 고민하며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도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입구에서 우리의 일주일 동안에 세상에서의 우리 제자다움을 점검하는 어떤 빅 데이터를 분석해서 상위 10%만 안아주시면 본당에 들어올 수 있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언제나 이 삭개오를 부르신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특권, 오늘 우리도 지금 삭개오와 같이 주님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안아주심의 본당에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 충격적인 삭개오에 충격적이었는데, 내가 오늘 내 집에 유학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단순히 방문이 아니라, 그와 함께 거주하겠다는 것이고. 그와 교제하겠다는 것이고. 그와 친밀(親密)한 관계 를 맺겠다는 주님의 선언(宣言)이셨습니다. 그 전에 그의 집은 부유(富裕)하고 텅 비고 적막(寂寞)하고 쓸쓸한 집이었는데.
이제 올 세상을 품을 만큼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의 주님이 그의 집에 오셔서 머물러 삭개오와 단둘이 교제하시겠다고 선언하는 것 이것은 삭개오오에게 그야말로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사케오는 단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는데 예수님을 삭개오와 머물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삭개오가 원했던 것보다 더 강한 마음으로 삭개오와 교제하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삭개오의 갈망에 100배 천 배 만 배로 큰 갈망으로 주님은 지금 여리고 성에 진입하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한 발짝 내 딛었다면 주님은 100걸음 다가오신 것입니다.
아니 삭개오가 한 발짝 내 딛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먼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누추한 이 땅에 오셔서 삭개오를 만나시기 위해 백 걸음 천 걸음 먼저 발걸음을 내딛으셨기 때문에 삭개오가 주님께 한 발짝 내 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면, 우리 주님을 삭개오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무에 못 박혀 달려서 몸 찢으시고 피를 내셔서 삭개오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죄 때문에 멸시(蔑視)를 받았다면 죄 없으신 우리 주님은 삭개오를 위하여 친히 저주를 받으시면서까지 삭개오를 구원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런 주님을 만나고 8절에 이렇게 선언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19:8,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당시 율법의 배상은 원금의 120%만 갚으면 되는데, 삭개오의 이러한 정말로 급진적이고 과감한 헌신과 결단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시고 주님과 교제하는 순간 삭개오에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삭개오는 완전히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그런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책을 연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이곳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안아주심을 영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변혁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그 고급스러운 비단 가운을 입고, 디드로가 이제는 전과 같이 살지 않고 자신의 서재를 완전히 재편했던 것처럼, 예수님과 만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을 사람이 된 삭개오는 자신의 삶을 주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겠다. 라고 선언하고 그의 삶을 주님께 재편한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겠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삭개오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삭개오의 이 선언을 통하여 우리는 회심과 성화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회심이란 무엇인가 하면 함께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회심
사람이 성령의 역사로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고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
-이것은 인생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삶의 중심에 모시면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가운데 진행되지만 우리도 그 안에서 우리의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결단이 바로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턴하겠다. 라는 것이 바로 우리의 회심인 것이죠.
삭개오가 그의 소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회심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회심이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신자의 삶을 계속 이렇게 변화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인데 성화가 무엇이냐면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성화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성화란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 바로 성화입니다. 물론 회심과 동일하게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 가운데 진행되지만 이 성화의 과정도 신자의 결단과 실천을 약화 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성화의 과정을 갖지만, 오늘 우리가 분명히 결단해야 되고 나의 삶을 정리하고 주님께 어울리는 삶으로 마치고자 부단히 애를 써야 되는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인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선택과 결단을 통하여 주님과 울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의지, 우리의 동정이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디드로의 비단 가운을 입고 디드로가 서재를 정리했죠. 처음에는 양탄자 하나만 정리했지만, 결국 그의 비단 가운은 그의 삶 그의 서재 전체를 정리했다. 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성령의 은혜로 놀라운 변화를 입은 우리는 분명히 우릴 삶 동안에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예수님과 어울리는 재편의 삶을 살고자 우리가 그렇게 추구해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삭개오의 결단을 통하여 몇 가지 마지막으로, 적용 점을 찾고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어울리는 낡은 어울리지 않는 습관과 결별하라입니다.
I. 첫 번째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어울리는 낡은 어울리지 않는 습관과 결별하라.
회개는 낡은 가구를 버리는 것과 같죠. 망가진 서랍과 삐걱거리는 탁자 또 저도 겨울에 보니까 입는 옷이 몇 개 없더라고요. 근데 또 서랍장 안에는 겨울옷이 너무 많이 있죠. 또 드라이 크리닝 하려면 돈이 아까우니까 또 안 입고 그래서 한 옷만 계속 입고 다니게 되는데, 그렇게 안 입는 것들이 또 이렇게 우리 집에 많이 있다는 것이죠. 공간만 차지하고 먼지만 펄펄 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필요 없는 가구를 정리하고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회개입니다.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과 어울리는 새로운 습관과 성령의 열매들을 채우기 위해서 공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이 회개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다 보면 우리 안에 정든 옛날 낡은 습관들이 있는 거죠. 이것 없으면 나 굉장히 심심할 것 같고, 이건 좀 나쁘지 않은 것 같고, 그 이것도 이 정도 하면 안 하고 어떻게 사나 하는 이거 다 관행이야 괜찮아 관행 하면서 이렇게 또 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 거죠.
그러나 조금 불편하고 조금 어렵더라도 과감하게 회개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1순위가 어울리는 아름다운 것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 때 참회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처음 아주 처음 저도 우리 교회에 왔을 처음 왔을 때, 참회의 기도 시간이 너무 긴 것 같은 거예요. 아 이거 너무 길다. 이거 좀 끝나야 될 것 같은데, 이거 뭔가 방송 사고는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만큼 이 참회의 기도 시간이 오르간 연주 시간이 길게 느껴졌는데 아 이것에 가지고 있는 귀한 의미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내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 그러한 시간이 5분 내기도 일주일에 어렵다는 것, 이 정도로 우리가 바쁜 일상에 살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 시간에 내 입술로 또렷또렷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낡은 가구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이 우리 안에 일하실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시간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새해 한 주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너무 또 주일까지 묵혀두지 마시고요.
우리 또 보면은 뭐 이렇게 분리 수거하는 날이 또 며칠 며칠로 정해져 있어서 우리가 분리 수거 벌이기는 또 매일매일 하기는 어렵지만 매일매일 우리가 큐티를 하면서 주님 앞에 회개하는 기도의 시간을 영적 루틴으로 잡아서 매일매일 회개하는 것, 매일 매일 주님 앞에 우리의 먼지와 더러운 것들을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아뢰는 그런 은혜로운 개인의 회개의 시간을 통하여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가구들을 매일매일 정리하는 그런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결단하라입니다.
II. 두 번째는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결단하라.
-저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천천히 합시다. 라고 적용점을 찾으려고 했는데 본문을 계속 보면 볼수록 본문은 또렷이 뭐라고 말하냐면은 과감하고 급진적인 결단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변화에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삭개오와 같은 과감하고 급진적인 결단인 것입니다. 이 결단은 오늘 우리 예배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는 자리입니다.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이 어떤 뜻이냐면 언약을 갱신(更新)한다는 것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깨닫고 주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새롭게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요소 안에 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번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는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의 아름다우심과 우리를 위해 베푸신 놀라운 구원을 깨닫고 우리의 헌신과 결단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이렇게 살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삭개오가 주님 앞에 서서 결단했던 것처럼 예배의 이런 언약의 갱신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디드로와 같이 매일매일 우리의 삶의 작은 부분을 주님과 어울리도록 그렇게 재편하도록 우리가 결단하고 실천해 나아가는 첫 발걸음, 일주일을 삶의 예배로 드리고자 그 시작을 위해서 결단하는 언약적 철 첫 발걸음이 바로 바로 주일 예배에서 드리는 우리 결단의 시간입니다. 귀한 우리 담임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적용 찬양을 부르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우리가 결단하는 것 아닙니까? 합심 기도 제목을 하면서 결단하는 것 아닙니까? 이 결단의 요소가 예배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매 주일주일 예배 나올 때, 오늘은 어떤 말씀으로 나를 은혜 받게 해주실까 오늘은 얼마나 찬양 부를 때 얼마나 내 마음이 뜨거워질까, 그런 은혜의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나오는 것도 너무 좋지만 오늘 나는 내 무너져 있는 이 부분을 주일 날 나아가서 주님 앞에 결단하고 돌아와야겠다. 이것이 예배가 가지고 있는 언약의 갱신을 의미하는 너무나도 중요한 예배 속성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예수님으로 옷 입을 사람들과 함께하라입니다.
III. 세 번째는 예수님으로 옷 입을 사람들과 함께하라.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다섯 명의 평균이 나다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저도 생각해 봤습니다. 나랑 가까운 사람 5명의 평균이 나더라구요. 성경에 보니까 잠언 27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철이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잠언 27장 17절입니다.
*잠언 27장 17절,
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은 성도가 서로의 신앙생활을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날카로운 모습, 주님을 향해 예리해져 있는 모습을 닮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재 안에는 성화로 나아가는 성도의 거룩한 영적인 견주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은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한다. 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모이는 거거든요. 저 사람은 서재 가봤더니, 주님과 너무 어울리게 개편되어 있는 거예요. 암송도 하고, 실천도 하고, 훈련을 통해서 소그룹을 통해서 만나서 다락방에서 이야기해 보니까 그러면 우리가 도전을 받는 것이죠.
견주임을 통하여 우리가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같이 예수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가 회심을 통하여 성화의 길을 걷고자 하는 그 불같은 마음이 공동체 안에서 그 온기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왜 제자훈련을 할까요? 다 1순위가 어울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데 안 되기 때문 아닙니까? 함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이제 인제 다락방도 다시 시작하는데 다시 한번 과감하게 결단하여 다락방을 안 나가시는 분이 있다면 다락방에 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혹은 제자 훈련을 받아야 되는데 뭐 1년, 2년, 10년 이렇게 연장하셔서 미루신 분도 계실 수 있을 것 같애요.
학교와 같이 과감하게 결단해서 성경 대학도 듣고 성경 파노라마도 듣고 해서 1년 후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옷 입은 사람과 함께 주님을 닮아갈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한 주는 삭개오의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52주, 1년은 삭개오의 이야기의 반복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현실의 갈등 가운데 주님 앞에 늘 죄송한 마음과 나아가도 될까라는 마음이 있지만 다시 주님을 바라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과 따뜻함으로 우리를 영접해 주시는 주님 앞에 나아와 받아들여지고 치유 받고 회복되고 주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며 한 주를 또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여정을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합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을 보면,
*빌립보서 1:6,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주신 우리 하나님께서 단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시는 것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어울리도록 총체적으로 재편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열심이 을 맞이하는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줄 믿습니다. 그 은혜에 반응하며 매 주일마다 회개하고 주님 앞에 언약을 갱신하며 일수 그리스도 옷 입은 우리 성도들과 함께 주님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고자 결단하며 실천하는 2025년 은혜의 한 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요약
회개를 통해 주님과 어울리지 않는 습관과 결별하는 낡은 가구를 버리는 마음으로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결단해야 한다. 예배를 통해 언약을 갱신함으로 언약을 갱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 깨닫고 주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새롭게 결단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예수님과 어울리는 낡은 어울리지 않는 습관과 결별하고, 과감하고 급진적으로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삶을 결단해야 한다. 예수님으로 옷 입을 사람들과 함께하며, 매일 큐티와 말씀과 암송과 소그룹에서 더욱 서로 사랑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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