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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5년 2월 12일) 제목: "주 안에서 기뻐하라" 말씀: 빌립보서 4:4-7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 *빌립보서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하나님을 앙망하며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는 수요 저녁 기도회에 오신 우리 모든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는 이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작년 연말부터 초대 교회의 역사와 초대교회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초대 교회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33년부터 150년 사이에 세워진 교회들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인근에 세워지고 또 사도바울이 복음 전도 여행을 통하여서 로마 제국 안에 세워진 교회들을 초대 교회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던 교회들이 바로 초대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가 정확하게 몇 개나 세워졌는지를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교회들의 이름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그중에서 빌립보교회와 그리고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서 쓴 빌립보서의 내용을 가지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세워진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2차 전도 여행 때 비슷한 코스를 다시 정하고 1차 전도 여행 때 지나며 세웠던 그 교회들을 다시 돌아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2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 여행과 비슷한 목표로 가다가 북쪽으로 1차 전도 여행 때 가지 않았던 그 북쪽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사도바울의 그 북쪽으로 가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어디로 가야 될지, 그렇게 고민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 환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입니다. 바울이 밤중에 환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마게도냐 사람이 그 환상 중에 나와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환상이 하나님의 음성이고 하나님께서 왜 나를 소아시아 북쪽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게 하셨는지를 그 환상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이제 사도바울이 드로아라는 지역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들어서 잘 아시겠지만, 마게도냐 지역은 어떤 한 도시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 북부 전체 전 지역을 의미하는 그러한 큰 지역의 지명입니다.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전도했던 지역은 지금의 터키, 튀르키예라고 하는 그 지역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제 바다를 건너서 유럽 땅에 발을 밟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배를 타고 건너서 처음 도착한 그 막의 도게도냐 땅이 바로 지금의 그리스 북부 지역인 유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길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인도하셔서 유럽 땅을 밝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는데 사도바울의 그 복음을 전하는 지경을 지금의 소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그리고 전 유럽을 뛰어넘어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사도바울이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마게도냐 지방에 처음 도착하고 그 땅에서 처음 도착한 도시가 바로 빌립보라는 도시입니다. 우리가 다 읽지는 않았지만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 했던 일들이 복음을 전했던 또 그 가운데 일어났던 사실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세 가지 사건인데요. 첫 번째는 자주 장사 루디야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줍니다. I. 첫 번째는 자주 장사 루디야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귀신 들린 여인을 고치고 그 귀신 들린 여인을 고친 일 때문에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게 되죠.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와 찬성을 하는 가운데 그 곳에 큰 지진이 일어나고 그곳에 옥문이 모두 열리게 됩니다. 옥문이 모두 열린 사건을 그 사실을 광경을 보고 그 간수장이, 감옥장이 자결을 하려고 하죠. 근데 바울이 그가 자결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 말씀을 전하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렇게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따라서 유럽 땅에 첫 발을 내딛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이렇게 특별한 애정을 가진 교회였고, 빌립보 교회도 바울을 사랑하고 바울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며 그리고 많은 선교에 대한 짐들을 함께 지며 했던 그러한 동역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를 떠나서 그리스 남부 지역에 고린도를 비롯한 아덴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갈 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비를 지원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는 이방인 교회인데 유대인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과 어려움을 당하자 예루살렘 교회를 향하여서 헌금을 하였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또한 바울이 로마에 압송돼서 감옥에 있다. 라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자 누구보다도 눈물을 흘리며 바울을 위해서 기도하고, 걱정했던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그리고 기도만 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로마 옥 중에 있을 때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서 직접 바울에게 찾아가서 위로하고 바울을 돕게 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서에는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하고 눈물 흘리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바울의 편지가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사도바울은 큰 걱정과 염려와 근신 중에 있었던 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비단 빌립보 교인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 그리스도인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짐과 염려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빌립보의 주제를 한번 살펴보면 빌립보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을 향한 큰 걱정과 염려 가운데 있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전한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가 이 빌립보서의 주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주제가 기쁨입니다. 빌립보서에는 기쁨이라는 단어가 열여섯 번이 나오고 빌립보는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4장 전체 내용 가운데 사도바울의 기쁨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우리가 빌립보서를 읽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바울이 비록 로마 1실권 자고 바울이 로마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다소 느슨한 감옥이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었고, 바울은 감옥에 갖춰져 있습니다.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고, 모든 것이 열악한 곳이 바로 감옥입니다. 사도바울은 총 세 번의 전도 여행과 그리고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 가운데서 많은 고초(苦楚)를 겪게 되었죠. 전도 여행 중에 심한 배를 맞기도 하고 돌을 맞아서 거반 죽게 되어서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버려버린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오면서 지중해 풍랑(風浪)을 맞아서 거의 죽을 뻔한 그러한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 안에 있는 뜨거운 기쁨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는데, 바울 안에 있는 이 기쁨이 도대체 어떤 기쁨일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같이 함께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2주 전에 담임 목사님의 주일 설교 ‘증오는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라는 설교 말씀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통하여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①첫 번째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너무나 연약해서 성경의 말씀과 성경의 명령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이 기쁨은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그런 감정적 기쁨이 아니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②두 번째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선택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일 담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서 제가 구하는 것들이 참 얄팍하고 환경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누려야 할,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은 십자가의 은혜의 기쁨이고, 구원의 감격의 기쁨이고, 믿음의 굳건한 선택의 고백이라는 것이 고백이 우리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빌립보서 4장에서는 사도바울이 그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2가지 이유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그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감격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선택해야 될 두 가지를 바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항상 기쁨을 유지하기 위한 첫 번째 선택은 바로 심판이 아니라 ①관용을 선택하라. 라고 사도바올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4:5,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관용’이라는 단어는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한다. 라는 그러한 뜻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구원의 기쁨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관용을 선택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팎으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유대주의자들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비난했고, 교회 밖에서는 로마의 정부에 심한 박해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피해 다녀야 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유대인만 구원 넣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이방인도 구워 넣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을 얻고 가운데 있었던 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라는 비난 때문에 그리고 로마의 박해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그 기쁨이 금방 잃어버리는 것을 종종 확인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방법 하나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 것을 그들에게 말씀합니다. 이는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은 무조건 참고 용서하라. 가 아니라 그렇게 하라는 근거를 대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핍박하는 이들을 위하여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비난하고 그들을 위해 복수를 준비하고 심판을 그들을 위해서 준비하다가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와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릴까 봐 너희가 너희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비난함으로 그들을 심판함으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더 큰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까 봐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들에게 심판이 아닌 관용을 선택하라. 라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동일한 이유로 우리가 은혜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나를 공격하고 나를 힘들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주일날 받았던 말씀을 읽으면서 또 훈련을 통해서 받았던 다락방을 통해서 받았던 은혜들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주일날 예배 시간에 영광스러운 예배를 경험하고 은혜를 받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교회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우리가 은혜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고 집에 돌아가는 길 가운데서 차 안에서 과자 하나 때문에 싸우는 아이 때문에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받았던 은혜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받았던 은혜를 가지고 주중에 나의 삶의 현장에서 기쁨으로 살아야 하지, 라는 결단이 하루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삶의 현장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 때문에 그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또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너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용해라. 그 이유는 너희 안에 있는 십자가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5,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곧 오신답니다. 비록 억울하고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심판(審判)하고 심판하기 위해 분노(憤怒)하지 말고 관용하라고 말합니다. 심판과 분노를 선택하지 말고, 너희 안에 십자가(十字架)의 능력의 은혜의 구원(救援)의 기쁨을 선택할 때 반드시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바울은 믿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방학이라서 집에 있습니다. 많은 엄마들이 기쁨이 빼앗기는 이유가 집에 있는 우리 아이들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을 가운데 있는 십자가의 기쁨을 빼앗기지 마시고 너그러이 품고 관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주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돌에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 가운데서 스데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테반이 돌 맞아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스테반은 억울하게 돌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스테반의 얼굴이 성령 충만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나에게 돌을 던지고 피를 나게 한 그들에게 용서(容恕)와 관용(寬容)을 선택하여 이 죽음의 극한 자리에서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자리에서 스데반의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입니다. 그때는 바울이 스테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십자가의 비밀을 소유하게 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자, 자기도 그러한 똑같은 일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복수(復讐)와 심판을 선택한 것이 아닌 관용(寬容)과 용서(容恕)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자들을 위하여서 관용하고 용서해라. 그것은 너희 안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이렇게 권면(權勉)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이 스테반의 기도가 스테반이 원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기도는 사실 예수님이 하신 기도였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23장 34절 말씀, *누가복음 23장 34절,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증오와 복수와 심판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관용을 선택하시는 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극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관용을 선택하신 모범(模範)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대단한 성인군자라서 이렇게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증오와 심판을 선택하지 않고 관용을 선택하는 것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그 기쁨을 한순간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이들을 향하여서 심판이 아닌 관용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서 관용과 용서를 선택할 때,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이 더욱더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5절 말씀에 보면, *빌립보서 4:5,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그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 관용에 차별(差別)이 없게 하라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든,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든, 모두가 우리가 이 관용을 선택하여서 그들이 내가 선택한 관용을 알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든지 증오와 심판과 복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그 증오와 복수와 심판이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의 구원의 기쁨을 빼앗아갈까 염려되기 때문에 또 내가 하는 심판보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그 심판이 더 완벽한 심판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복수와 심판이 아닌 관용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조 여러분,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고 여러분들의 은혜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수와 그리고 심판이 아니라 관용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용서하고 관용함으로써 여러분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지 않도록 깊은 선택을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도바울은 두 번째로, 항상 기쁨을 유지하기 위한 두 번째 선택의 권면을 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염려가 아닌 기도를 선택하라는 것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두 번째 아주 고약한 그 유혹이 바로 염려입니다. 6절 말씀해보면, 아 II. 두 번째 염려가 아닌 기도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6,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는 앞에 앞으로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고, 여러모로 마음을 써서 걱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6절 말씀의 원어 ‘매립나오’라는 원어에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근심에 빠져 스스로 괴롭히다. 라는 그러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염려는 하나님께서 나의 주님 되시고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 라는 것을 의심하는 그 결과가 바로 염려입니다. 성도가 기쁜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성도가 항상 기쁨의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염려는 아주 최고의 적 중에 하나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항상 기뻐하는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앞서 염려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앞서서 우리가 미움과 복수가 아닌 관용을 선택해야 되는 이유가 주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가 동일하게 염려하지 말아야 될 근거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할 수 있는 자격을 우리가 얻었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작은 고민과 염려는 있겠지만, 성인들이 하는 삶의 큰 고민(苦悶)은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아이들에게는 부모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삶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얼굴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부모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자기를 지켜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아이는 그렇게 큰 염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아버지가 되십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염려를 선택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어버리지 말고 주님을 붙잡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염려 대신에 선택하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가 구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냐? 하면 6절 말씀해 보면, *빌립보서 4:6,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을의 기도와 강구로 너희 구할 것을 무엇으로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아뢰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에 가득한 구원의 기쁨과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염려의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그 염려를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하면 감사하므로 기도로 추님 앞에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떨 때 감사합니까? 그렇습니다. 기도한 후 응답받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6절 말씀에 감사하므로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가 응답받았다. 라는 것을 믿음으로 기도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무엇인지 7절 말씀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7절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4:7,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기도한 것을 다 들어주겠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겠다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성도인들이 경험하셨겠지만, 염려를 마음에 품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엉망이 됩니다. 염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질서가 없습니다. 질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고, 그렇게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가 걱정하는 것을 염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를 하게 되면 밤을 이루지 못합니다.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생각에 질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룻밤에 수십 번의 집을 짓고, 집을 허물고 하루에 수백 번 내가 염려하는 그 집에 들락날락하는 그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기도하면 염려 대신 기도를 선택하면 하나님께서 질서의 평안을 주십니다. 염려는 무질서이고 평화는 질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평안이 있을 때 우리는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질서를 통해서 그 평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기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염려를 통해서 내 마음과 생각이 혼란하도록 나를 내버려두지 마시고 그 염려를 감사하므로 기도의 제목 삼아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무질서가 질서의 평안으로 하나님 바꿔주시고, 그 염려 때문에 우리 안에 기쁨이 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평안함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도적이고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전도 여정의 일정을 보면 얼마나 그가 열심히 계획하고 얼마나 열심히 그 계획을 따라서 치밀(緻密)하게 전도(傳導) 여행(旅行)을 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치밀한 사람이 또 주도적인 사람이 자기가 계획한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밤에 잠을 자지 못합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염려(念慮)가 돼서 밤에 잠을 자질 못하고 꼬박 밤을 새우며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왜 이 계획이 되지 않을까? 왜 저 계획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기쁨을 잃어버리는 그러한 성향(性向)을 가진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그 전도 여행을 통해서 이것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염려하지 마라 너의 계획대로 안 된다고 염려하지 마라.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내가 허락하는 곳에 가서 내가 만나게 하는 사람에서 내가 허락하는 상황 가운데서 너는 내가 부탁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주어라. 그러면 그 모든 상황은 내가 책임진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전도여행 가운데 실패의 경험을 통하여서 이 일은 내가 염려함으로 내가 계획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따라갈 때, 내 염려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이 일을 이루시고 그것이 가장 기쁨의 삶이라는 사실을 고백(告白)하게 됩니다. 그렇게 바울의 염려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계획된 일들이 바로 샤도바올이 유럽 땅의 첫 발을 밟게 되는 일이었고, 그리고 유럽 땅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그리고 그 빌립보 교회를 통하여서 유럽 복음의 전진 기지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드로와에서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환상(幻象)에 순종(順從)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그것은 제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효과적(效果的)이지 않습니다.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자기의 뜻대로 갔다면 유럽 복음화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염려하는 일들은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서 해결(解決)이 잘 안 됩니다. 그 시간에 염려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벌떡 일어나 기도(祈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염려로 뒤죽박죽 되어서 기쁨을 잃어버린 내 마음 가운데 질서의 하나님께서 평강(平康)을 허락(許諾)하셔서 우리 안에 기쁨을 허락해 주실 줄 그 평강이 어떤 평강입니까? 오늘 7절 말씀해 보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4:7,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는 이상의 평강이라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생각하고 기대하고 경험할 수 있는 그 이상의 평강을 유지하면서 바울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오늘 이렇게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내 안에 있는 이 기쁨을 너희도 누리기를 원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지금 갇혀있는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나를 위해 걱정할 거 없다. 나를 위해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곳에서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하다. 오히려 나를 위해 걱정하지 말고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린 너희들을 위해 걱정하라. 너희들은 너희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복수와 심판을 통해 심판을 생각하며 선택하며 너희 마음 가운데 있는 예수 그리스도일 수도 있겠다. 기쁨을 놓치지 마라 너희는 염려함으로 인하여서 내 삶이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염려함으로 인하므로 너의 마음과 생각이 무질서하게 되는 일을 선택하지 마라. 그 염려가 너의 기도의 재목이 돼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께서 질서의 편광을 주기를 원한다. 그렇게 빌립보 성도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바울의 말은 이 말씀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우리도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슬픔 가운데 염려하면서 걱정하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복수할까 하면서 이를 갈며 살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를 통하여서 내 안에 허락하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기쁨과 그 감격을 유지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증오와 복수와 심판 대신 관용을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염려와 걱정 대신에 감사의 기도를 선택하므로 우리 안에 기쁨을 빼앗기지 말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4장 말씀 쭉 아래로 내려가면 우리가 너무나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보서 4:13,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 우리 성도님들 다들 좋아하시죠. 특별히 시험 보기 전에 이 말씀을 암송하고 꼭 내가 해서는 안 될 것들 앞에서 이 말씀을 암송합니다. 이 말씀의 문맥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바올이 말씀하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이 모든 것은 바로 12절에 말씀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비천(卑賤)이나 풍부(豐富)나 배고픔이나 배부름이나 어떤 곳에서도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일체(一切)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복수와 심판 대신에 관용을 선택하고 내가 염려 대신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선택했더니, 내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 세상이 나의 기쁨을 빼앗아갈 수 없는 일체의 비교를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면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응원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환경 속에서도 어떤 형편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므로, 증오와 복수와 심판 대신 관용을 선택하므로, 염려가 걱정되신 감사의 기도를 선택하므로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워서 주님이 내게 어떤 상황을 허락하시더라도 내가 주의 은혜 가운데 내게 능력을 그런 기쁨의 능력을 주시는 은혜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결국은 주님의 은혜의 수레바퀴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으며, 불안한 환경과 변덕스러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예수께 의탁(依託)하여 흔들림 없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계승해 온 그리스도의 사랑과 관용을 나도 선택하며, 영혼의 좌소(左蘇를 억울함과 미움에 뺏기지 않도록 십자가로 마음의 중심이 끄떡없게 다짐해야 한다. 염려에 사로잡혀 아래만 바라보는 절망(絶望)과 낙심(落心)의 시선(視線)이 주께 묶여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아 기쁨과 평강으로 하늘 문이 열리는 응답의 축복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진정한 염려가 아닌 기도가 주님과의 교제가 해결점이라는 것을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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