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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0월 29일)

제목: "새벽 미영에 울리는 칠천의 기도"
말씀: 마가복음 1:35~39
대표기도: 김선철 장로님(순장반 담당)
찬양인도:: 여순장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말씀읽기: 이마리 어린이(소년부), 오한응 어린이(초등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마가복음 1:35~39,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ㅡㅡㅡㅡㅡ
 

 
"새벽 미영에 울리는 칠천의 기도“ - 오정현 담임 목사님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린다. 우리 말씀 읽은 두 아이를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할 것이다. 특새(특별새벽기도회)에 대한 우리의 기도가 많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지금 우리 ‘보라 지금 구름 타시고’ 일곱 살 아이가 그 보라색 코를 입고 왔다. “너는 오늘 왜 보라색 코트를 입고 왔니?” 했더니 “보라 주님이 구름타시고” 했다. 그 애가 특새 와서 20년 전에 말했던 이야기가 있다.
 
※어떤 형제가 자매에게 프로포즈를 하는데 자매를 딱 보니까 자기 스타일이 아니란다. 요즘 그런 거 있듯이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프로포즈를 하는데 특새 동판 여섯 개를 가져가서 프로포즈를 했다. 아 그러니까 이 자매가 특새 나오면 새벽 3시이면 나와야 하는데 새벽 3시를 6년 동안 특새(특별새벽기도회) 하면서 이 자매의 생각에 ‘동판 받은 개근의 정도라면 하나님 앞에 자기를 통제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OK해서 쌍둥이까지 낳았다고 한다. 참 기가 막히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핵심은 사람이 이 알고 깨닫는 것과 실제로 내 것으로 체득되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오늘 여러분들이 본문을 읽었다. 주님은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시고, 권능을 받아서 매일 그 3년의 공생애 사역의 현장에서 엄청난 사역을 베푸셨다. 그리고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나올 수 없다고 하신다. 특별히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기도의 능력이 나올 수 없다고 하신다. 다 듣고 이야기를 다 하셨다. 막상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나니까, 다 도망갔다. Kingdom of The God! 하나님 비유에 대한 말씀도 다 듣고 온갖 좋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말씀을 깨달음을 다 듣는데, 자기 것으로 실제로 체득되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른 차원이었다. 다 도망갔다. 그런데 그러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주일에 기름 부으심과 기도의 능력을 받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완전히 다른 차원이 되었다.
 
특새와 혹은 토요비전헌신예배를 나와야지, 이런 마음을 먹는 것과 귀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직접 나와서 삼천, 오천의 기도, 칠천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무슨 말이냐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여러 형제가 있었다. 예수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몇 명인가? 오백여 형제가 있었다. 부활하신 그 모습을 본 형제들이 오백여명이었다. 그런데 그 형제들은 주님께서 부활도 알고 예수님의 승천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기적과 능력과 치유의 현장을 경험한 사람은 120명이었다. 그러니까 4분의 1(¼)이었다. 꼭 우리가 특새 나온 분들도 우리 교회 그 정도 출석을 하는 것 같다. 오늘 강단에서 깨닫는 진리이다. 이게 파일레토 법칙이다. 2:8의 법칙이다. 그러니까, 20%가 100%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이런 사역을 하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뭐하는 것인가? 주님을 깨닫는 것과 안다는 것과 지식적으로 와 닿는 것과 내 삶으로 체득하고 체험되도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러니 오늘 제가 이 새벽미명의 칠천의 기도라고 했을 때,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머리로만 남지 말고 실제로 체득되고 이것이 나중에 간증이 되고 여러분들의 어떤 확신이 되고 실제로 삶의 현장에 체득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 일어나서 ‘주께 무릎 꿇고;!~~
 
우리가 한 달 이상 강단 기도의 응답 받고 9.26 섬김의 날에 능력과 은혜와 기름부음과 수많은 목사님들이 새로워지고 문 닫으려고 하는 교회들이 새롭게 문을 열었던 이유는 보이지 않는 영적 기도의 기백과 능력이 그분들의 삶 속에 확인되고 펼쳐지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기도하는 시간에, 주께 무릎 꿇고, 믿음이 이기네, 하는 찬송을 하며, 이것은 정말 힘들다. 이것은 잘 안 된다. 이런 것들을 주님 앞에 나와서 실제로 하나님께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을 정리하실 것이다. 사람은 finishi와 start가 있다. 한 번 여러분들의 복잡하고 두렵고 얽매이고 이해 안 되고 안타깝고 이런 것들이 다 정리되고 새롭게 출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믿음으로 말씀으로 이것을 기도 가운데 내 것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1, 2, 3층 이런 은혜 모두가 받기를 바란다. ‘기도하는 이 시간’ ♬~~찬양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자. 믿음이 이기네~~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어지기를 기도한다. 특별히 그 빚어지는 과정 가운데 하나는 깨닫는 것과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과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헌신 토비새를 강조하고 특새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3년 동안 제자훈련을 받아도 다 도망갔다. 오백여명이 예수님의 부활을 다 보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4분의 1(¼)이었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제가 섬기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은혜를 현장에서 체험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특새와 토비새가 필요한 것이다.
 
여러분 얍복 강가의 역사가 언제 일어났는가? 새벽에 일어났다. 그래서 새벽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 이 토비새를 주신 은혜가 특별하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새 , 이번에 한 주간 동안 마음을 다 열고 정말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며 야곱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이 이스라엘이 되기를 바란다.
 
-새벽 "새벽 미영에 울리는 칠천의 기도"라고 했는데 자 보자, 3천의 기도가 무엇인가? 우리 교회의 암호이다. 다른 교회는 모른다.
‘3천의 기도는?
 
◆ 칠천의 기도
1. 천장이 울리는 기도-1907년도에 평양 부흥이 났을 때, 장대현 교회의 천장이 놋이였다. 그곳이 울렸다는 것이다.
2. 천둥소리 같은 기도- 이번 9.26 섬김의 날에 오천 오백명의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기도할 때 천둥이 울리는 것 같은 서로가 서로에게 은혜를 받는 다시 현장의 역사이다.
3. 천국의 물소리 같은 기도- 하나님께 성도들이 기도할 때, 천국의 물소리 같은 능력이 있다.
4, 천사가 돕는 기도- 천사들이 도우시는 기도이다. 우리가 그럴 때가 많다. 산기도할 때마다 내 힘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내려와서 수종~~ 들어 주는 기도이다. 과거 한국교회 그런 것이 많았다.
5. 천국 금향로에 올라가는 기도- 요한계시록의 기도가 주님 앞에 뭐가 되는가? 천국에 금향로가 올라가는 기도이다.
6. 천하 만민에게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기도.
7. 천대까지 축복이 계승되는 기도- 믿음의 계승, 천대까지 축복하기를 기도한다. 8천기도 일만 기도까지 있게 하라.
-생명의 기도를 선포해야 한다. 여러분 이게 한글의 우수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걸 전 세계에 어떻게 인식이 될지 나도 모른다. 여러분이 이것을 하나하나 일곱 가지 가운데 모든 소원들이 여러분들의 기도가 포함되어서 개인기도와 함께 승화가 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리고 오백여 형제 가운데서도 120명의 기도 용사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3년 동안 제자훈련을 해도 안 되는 것이 오순절 성령의 기도의 능력과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난 다음에는 변화된 것이다. 할렐루야! 더 좋은 기도가 나오기를 바란다. 8천, 일만 기도, 2만 기도 제목이 나오기를 소원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 새벽 미명에 나와서 기도하러 나왔는가?
왜 새벽에 주님이 나와서 기도하셨는가? 예수님의 하루 일상을 보면 좋다. 예수님께서 하루 일상은 아침에 나가서 가르치시고 또 다가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또 아픈 자들을 고쳐 주시고 오후에는 장님을 고쳐 주시고, 앞에 있다. 그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였다.
 
*마가복음 1:32-33,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물론 약간의 레토리, 문장의 수사 격이 있기도 하지만 모든 병자와 모든 귀신 들린자, 온 동네가 모였더라. 병자들이 많이 모이면 아까 아픈 소리도 날 것이고, 귀신 들린 자가 많이 모이면 가만히 있겠는가? 여러분 귀신 들린 자 안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 하면, 저의 부친이 개척하신 교회에 사역하시는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그곳에 귀신 쫓아내는 계셨다. 나이가 부친보다 열 살이나 위셨다. 이분이 설 전도사님이시다. 주일 저녁에 가보면, 교회 세면 바닥에 귀신들린 사람이 앉아 모였었다. 그러면 설 전도사님이 다 나오라고 했는데, 다 나와서 같이 기도를 하는데, 그럼 기도하면 고등부 형들이 벌벌 덜었다. 왜 떠냐고 형들에게 말하면, 형들은 ‘귀신이 나갈 때 그 주위에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싹 들어간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귀신이 다 간다고 했다. ㅋㅋㅋ 그래서 벌벌 떤다. 전에는 그 형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귀신들린 자들이 나갈 때, 그냥 나가지 않고 막 소리를 지르고 거품을 내고 난리를 치면서 나간다. 그러다 쥐 죽은 듯이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잔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말 진짜인가? 하는데 진짜이다.
 
자 귀신 들린 자와 정신병자와 다르다. 그런데 비교적 제자훈련 하는 교회에는 귀신을 보내지 않으신다. 사역을 집중하라고 하는 것 같다. 귀신 들린 자들이 모이는 사역하는 곳에 가보면, 귀신 들린 자들이 많이 온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동네가 왔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요구가 있으니, 각종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와 귀신 들린 자와 온갖 사람들이 모여드니 예수님께서 어떻게 물리적으로 쉴 시간이 없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런 시간이 없다. 그리고 36절에 보면,
 
36-37절에
마가복음 1:36-37,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찾으니까 여유가 없었다. 시간적으로 그렇다. 그리고 2장 2-4절에 보면,
 
*마가복음 2:2-4,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그러니까 들어갈 수가 없어서 결국은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는 그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시간과 여유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하여 사역 적으로 너무 바쁘니까 새벽에 그 시간을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되셨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토비새와 특새는 여러분들의 삶에 복잡한 것과 어려운 것과 아비규환(阿鼻叫喚) 같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해결책이 될 줄로 믿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이렇게 하고 토요일과 목회자들은 화요일 기도 하면서 매일 그렇게 큐티하고,
 
매일 주님 앞에 큐티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지만 어쨌든 간에 21세기 살아가는 우리가 너무 바쁘니까 우리에게 어떤 시간적인, 일 년, 일주일, 매일 집중하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 인생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이란 너무나 복잡(複雜)다난(多難)하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런 시간들을 떼어놓고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칠천의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큐티 같은 것도 혼자 하면 힘들지만 훈련생들과 같이 하면 할 수가 있다. 훈련도 혼자는 못하지만 같이 하면 끝까지 거의 대부분 하면 수료한다. 기도의 삼 겹줄로 기도하면 눈빛만 봐도 달라진다. 오늘 이 자리에 어떻게 하는지 보는 자, 스파이 같은 그런 눈을 가지고 보는 사람은 없다. 없다. 서로 격려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서로 잘 될 수 있는지를 격려한다. 오늘 이 자리에도 한 명도 실족하는 자가 없기를 바란다. 모두가 다 기도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란다. 모두가 다 함께 기도하면, 공동체 능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여 공동체 능력을 가지고, 이 시대 앞에 쓰임 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기도 새벽 이 시간에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 다 바쁜데, 따로 정해 놓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따로 정한 시간이 토비새가 되고, 이 시간이 특새가 되어야 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며 나아가고 그 다음에 새벽을 강조한다. 새벽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새벽에 이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압복 강 가운데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도 언제였는가? 새벽이었다. 우리 인생의 변곡점이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이스라엘 될 때가 새벽이었다. 잘 아는 대로 홍해도 새벽에 갈라졌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두 번째 십계명 받았을 때도 새벽이었다. 우리에게 감당 못할 내 힘으로 절대 해결 안 될 그런 어려운 일, 어려운 홍해가 우리 앞에 버티고 있을 때 공동체 기도할 때, 주님은 응답해 주신다. 오늘도 수많은 애환이 많고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도 많고 정말 답답한 일들도 많고, 금송아지 가지고 고통당하고 아론과 같은 잘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돌비를 깨뜨려 버리시고 화가 나셔서 그래서 다시 받을 때 새벽이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히스기아가 새벽에 앗수르 군대를 18만 오천 명의 군대를 몰살되는 기적을 본 게 이사야 37장을 보면 새벽에 앗수르 군대가 8만5천 명이 그대로 몰살되는 것도 새벽인줄로 믿는다.
 
사자 굴에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이 다리오 왕이 언제 다니엘이 구원 받은 것을 언제 목격한가? 다니엘서 6:19절에 보면, 새벽이다. 이른 아침 일찍이다.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과 씨름할 때,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는 홍해를 갈라야 할 때, 말씀의 능력과 기름 부음이 필요할 때, 8만 오천 명이 우리를 대적하려고 할 때, 다니엘과 같이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서 그냥 억울하게 사자 굴에 갇혔을 때, 새벽의 능력을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부활의 이른 아침 그 은혜를 목격한 마리아도 그 새벽이었다.
 
제가 볼 때,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도 새벽이었다. 오후 세시에 하겠는가? 아니면 밤중에 그러겠는가? 그런 것도 있지만, 우리가 새벽에 마음먹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로 확신한다. 이 마음 가지고 여러분들의 삶에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기를 주님 앞에 영광돌리기를 바란다.
 
주사랑 한없고 주 은혜 끝없네, ~~~♪
오순절 강림도 새벽이었다. 하나님께서 120문도들이 다 같이 방언을 하니까 사람들이 새술에 취했다고 사람들이 조롱을 했는데, 베드로가 일어나서 첫 번째 설교할 때,
사도행전 2:15절에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성령 강림이 있고 이른 시간이다.그 그러니까 새벽 시간에 성령 강림이 역사하심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말씀한 대로 홍해가 갈라지는 미래역사가 쓰여지기를 소원한다. 새벼에 미래의 역사를 쓸 수가 있는 것이다. 토요비전 새벽예배를 통하여 온 교우들이 새벽에 미래의 역사를 쓰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과거에 쓰임 받은 믿음의 거장들은 새벽의 사람들이었다. 요한 웨슬레 같은 분은 88세까지 18세기 그 시대에 최고의 장수를 한 분 중에 하나였다.60년간을 매일 같이 새벽에 기도하고 5시에 예배를 드렸다. 새벽에 주님께 집중하는 믿음을 가지고 미래의 역사를 쓰도록 만들어 주심을 믿어야 한다. 가정의 역사, 미래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새벽의 은혜를 주옵소서.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라. 주여 새벽의 은혜를 주옵소서!!!
 
새벽의 여명이 비추어오면 어둠은 도망 갈 줄로 믿는다. 모든 삶의 어두움이 도망가기를 바란다. 부족한 점들은 끝내고 새로운 것을 하나님 앞에 시작되고 매주 특새가 되어야 한다. 어떤 기독교 교수님은 말씀을 하셨다. 매주 심판을 받기에 감당 못한다. 하나라도 은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볼 때, 은혜의 게시판을 보면 나를 위한 목사님의 말씀이 나에게 맞다고 했다. 내 인생을 잘 살아갈 자신은 없어도 부족한 점이 다 있다. 주님 앞에 기도하며 매주 주님 앞에 피니쉬와 스타트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매달마다, 매년 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라고, 그래서 우리 일신(日新) 우 일신(날이 갈수록 날마다 더 새롭다)이다. 그리 안하면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이 복잡 다난한 세상에,
 
어제 보니까 대통령 손톱을 기른 것을 말하고 그러는데 대통령이 손톱도 못 기르나? 물론 나 같으면 그리 안 한다. 대통령이 좀 부족해도 좀 봐 주어야 한다. 그러면 기도해주고 해라. 그것을 가지고 뭐라 말아라, 정말 유치찬란하다. 나라가 잘 되어야 하니까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기를 바란다. 아멘!!!~~하나님 앞에서 잘 감당하는 자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교회도 정치인들이 많다. 여기에 나와서 은혜를 받아야 잘 될 수 있다.
 
사랑공동체 성경 읽기 시간이다. 리더 입장에서 볼때는 말씀을 읽는 입장이다. 무기로 삼고 기도로 삼아라.. 디모데 말씀을 읽는 시간이 듣는 시간이 된다. 시편 29편, 잠언 출애굽기 17장을 들어보자. 무기로 기도로 삼아야 한다. 듣는 귀를 주옵소서. 주여 듣는 귀를 주옵소서. 기도의 산 기도의 지팡이를 우뚝 들고 다음주일까지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홍해를 가르고 요단을 가르고 여러분 앞에 수많은 일들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요한복음 13:34-35, 요한일서 3:18, 암송 아멘하나님의 능력이 말씀에 있다. 말씀으로 붙잡힌 인생이 되길 바란다.
특새(특별새벽기도회)는 행동하는 시간이다.
 
♣요약
오천, 칠천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상식을 뛰어 넘어 바꾸어 주시는 브니엘의 새 아침을 경험하며, 제 20차 특별 새벽 기도회를 통해 한국교회와 세계 선교와 교회와 개인적으로 성령의 바람을 타고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는 대 전환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번 특별부흥회가 새벽 미명에 들어주시는 기도 가운데 확실한 응답이 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은혜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일 주일 종교개혁 505주년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e), 오직 은혜(Sola Gratk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가 심비에 새겨지는 개혁 부흥의 현장이 되기를 소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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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0월 26일)

제목: "내 삶에 역동하는 기쁨의 근원"
말씀: 고린도전서 15:12-20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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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2-20,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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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설교의 제목은 "내 삶에 역동하는 기쁨의 근원"이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이 자랑하는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과 버금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있고, 신앙고백서가 있다. 그 가운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가운데 45문답에서는 오늘 우리가 말씀 속에서 상고하고자 하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한다.

 
여러분 각자에게 드리는 질문이라 여기고, 스스로 어떻게 답할지 그리고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역사적 사실은 실재 있었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가다오는지 생각해 보는 귀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의 이 질문 앞에 세 개의 답이 있다.
 
첫째 답은-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음으로써 얻으신 의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신다.
둘째 답은-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다.
셋째 답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확실한 부정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고백에 대해서 다 동의하는 줄 믿는다. 주저하듯이 부활의 감격은 우리에게 충분히 넘치도록 주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부활의 감격, 그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있다.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방금 읽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정리 그대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의 정갈을 입었고 중생, 곧 다시 새롭게 태어났으며, 거듭남을 의미한다. 마침내 영광스런 부활마저도 기적처럼 경험하게 될 놀라운 은혜를 얻었다. 또 무슨 과제, 남겨진 과제가 있다는 것인가? 적어도 성도라고 불리 우는 우리들에게는 부활의 사건이 정말로 있었나? 하는 이른바 역사적 사실성의 어려움을 우리의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늘 수요예배를 사모하며 주의 전에 달려오신 우리 성도님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그 정도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관건(關鍵)은, 부활이라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마주할 때, 정작 우리가 고백하는 부활의 감격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 삶을 부요케 하는 기쁨의 이유라기보다는 머리로는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이에 머무르는 단순한 지적 동의의 수준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목사님, 저는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우리의 전인을 이루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 모두를 강타하는 부활의 감격을 절실히 내 삶의 모든 문제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복잡다난한 좌절의 이유들과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오늘의 기쁨으로 부활의 감격을 누리고 있는가? 그 질문이 필요하다.
 
내가 부활의 감격을 내 삶을 통해서 어제가 아닌 바로 오늘 나의 기쁨으로 누리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경은 오순절 직후 예루살렘이 유대 권력자과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했다라고 누가를 통해서 사도행전에서 고백한다. 그리고 다시 후반기에 이렇게 이루어진다. “너희는 그를 죽였으나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다.” 이것이 사도행전 4장의 믿음의 보고이다. 바울 역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장사 지낸 바 부활하심, 나타나심에 집중한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은 죽으셨고, 장사 지낸 바 되셨고 부활하셨고, 그리고 다시 나타나셨다. 부활의 신비이며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경륜이며 은혜이다. 왜 그런가?

에베소서 2:1절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이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그래서 희망하나 꿈꿀 수 없었던,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구속과 부활하심으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기어이 다시 우리를 살려내셨다.

*에베소서 2:1,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차분히 생각해 보라. 만약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완전함의 충분한 속죄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계속 죽으신 상태로만 계셨다면, 다시 말해 부활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공개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완전하며 충분한 희생의 숙제가 이루어졌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알 수 없다. 결코 알 수 없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서의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 잔인한 피 비린내 나는 처참한 살육의 대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충만함이 가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끝내 죽음을 이기지는 못한 것이기에 실패로 귀결되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본문 가운데 15장 12-18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린도전서 15:14,17,18,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언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하심 그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 곧 부활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셔서 죄인인 우리를 대속 하셔서, 친히 대속하신 예수의 죽음을 승인하신 것, 그래서 결코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 또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은 피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의 속량의 은혜를 누리며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확정 시켜 주신 증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이 아닌가?
 
요컨대 예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신 증거가 되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승리의 찬가를 소리 높여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세상의 도전과 풍파 앞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궁극적인 승리를 깨닫고, 고통과도 같은 끝나지 않는 터널 같은 우리 인생에 수많은 고난의 순간들을 분연히 인내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과거에 이루어진 어쩌면 2천 년 전에 이루어진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 사건을 흐릿한 죄 사함의 기억으로만은 기억해서는 이 전쟁과도 같은 우리의 삶의 격동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가 없다. 치열한 오늘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능력이 어제가 아닌 바로 오늘 내 삶에서 현재 기쁨으로 역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단한 삶에 여정 속에서 죄와 결별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불안과 좌절과 낙망 속에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에게는 에베소서 1장 20절 말씀 그대로
 
*에베소서 1:20,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다름 아닌 그 부활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2022년 10월 오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라는 선포와 함께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부활이 정말 일어났는가? 라는 세상 사람들의 회의와 의심에 답하는 변증뿐만 아니라, 부활이 가진 의미와 그 참된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묵상과 함께 부활의 감격을 내 삶에서 오늘 바로 지금 기쁘고 감사히 누려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감격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추억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왜 설레임 가득한 부활의 감흥을 왜 잃게 된 것인가? 가슴 터지도록 기뻐해야 할 그게 마땅한 기쁨을, 소망의 감격을 말이다. 부활의 영광은 언제나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 삶은 즐겁지 않은 것인가? 저만 그런가요? 목사님만 그렇구나!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솔직히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목사인데도 북구하고 부끄럽게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저는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저의 일들의 여파로 우리의 사역 가운데 여러분들이 보고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목사님들의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역의 과정들이 있다. 우리 모두 선의와 진심이면 된다고 열심히 사역적인 기준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그 사역적인 기준도 희미해지고 우리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두어야 할지 모르겠고 멍해져 버렸다. 사역 안에서 삶의 단면은 꽉 찬 하루 안에서 이전처럼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정작 저 스스로는 무기력함에 싸여 있었다. 우리 모두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고 싶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영혼구원의 사역을 기쁘고 능력 있게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빨리 마음을 다잡고 사역의 궤도로 복귀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밤마다 자다 깨다가 거실의 한 구석에 처박혀서 무릎 꿇고서 기도하다가, 자가 깨다가 하며 버틴 게 다이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도 여전히 하나님은 침묵 속에 계시고 루터가 말한 그대로 숨어계신 하나님은 2022년 10월에 저에게도 동일하게 철저히 저의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하셨을 뿐이다.
 
그러다가 한 참 후에 우연히 ‘5만 번의 기도 응답’ 받은 책으로 유명한 죠지 뮬러의 글을 읽으며 예상과 전혀 다른 그의 고백을 보며 저의 정말 한 대 맞은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저는 죠지 뮬러는 우리가 아는 바와 그대로 말이 그렇지 오천 번도 아니고, ‘오만 번의 기도로 응답’ 받은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한다. 죠지 뮬러는 또 이야기 할 것이다. 어디까지 기도해 보았을까? 기도의
정요 화된 정답으로 채근하겠지 하며 저는 예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죠지 뮬러는 저의 예상과 다르게 기쁨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오만 번의 기도를 말해서 기도하면 교회 성전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기도했던 일들을 수없이 고백하는 죠지물러가 결국 이야기 한 기쁨,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매일 해야 하는 가장 우선 적이고 중요한 일이
 
※“주 안에서 내 영혼이 행복해 지는 것임을 이전보다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섬겨야 하는가? 혹은 내가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릴까? 가 아니다. 도리어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나의 영혼이 행복해질까? 나의 내면이 성숙해 질까? 왜 그런가? 나는 사역자로서 불신자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성도들을 위해서 목숨 바쳐 헌신할 수 있다. 기꺼이, 그리고 좌절과 낙심한 자를 위해 위로를 넘어 내 삶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정작 내 자신이 다른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온전히 주 안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주님 때문에 내가 다시 말해서 내가 기쁘지 않다면 결단코 단연하건데 나의 모든 다른 헌신과 희생은 도대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죠지 뮬러-
 
하나님을 믿는데 여러분 제대로 들었는가? 정작 바로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내 삶에 기쁨이 없다. 기쁨을 준다고 다 긍정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낙관적인 삶을 얼마든지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생활, 나의 신앙과 믿음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 안에 심령이 터져 나오는 기쁨이 없다면 그 믿음은 그 신앙은 무엇으로 가득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회개가 제 마음을 강타했다. 부끄럽지만 여러분께도 말하겠다. 인정해야겠다. 전혀 기쁘지 않았던 저의 일상의 삶의 단면을 말이다. 주의 종으로 내 삶의 전체를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리며 후회 없이 오직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고 서원하며 여기까지 달려와서 이제 목사까지 되었지만, 정작 때때로 아니 꽤 많은 시간과 삶의 과정 속에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내 삶의 고백이 사라졌다는 것, 이 비참한 현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만 매어 있는 답답하고도 옹졸한 신앙의 초라함이 바로 나의 모습이구나!’, ‘하나님 앞에서 고통스럽게 인정해야 할 내 신앙의 정체이구나!’ 그런 날들이 제게도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어떠한가? 성도님들께서 생각하는 위대한 신앙의 표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마땅히 기뻐하시는 헌신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평생 사모하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싶은 여러분의 삶의 단면은 오늘 바로 이 순간 여러분 가운데 과연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비로소 깨달을 때 알게 되는 그 먹먹한 가슴 저림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확정과 완전한 회복을 꿈꾸며 세계 선교의 사명에 함께 할 때, 주어지는 영적 승리의 감격인가? 죽은 영혼이 복음으로 되살아나서 영적인 성취를 경험할 때 마주하는 위대한 복음의 능력인가? 탁월하다. 모두 대단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으로 그럴듯하게 우리의 외면을 만족감을 가득 채운다 하더라도 죠지 뮬러가 말한바 그대도 우리 자신에게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인들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 자녀인 각자의 삶의 단면 안에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하루 안에 바로 그것,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는 기쁨이 없다면, 그래서 그 기쁨이 그 희락이 그 즐거움이 내게서 너무나 멀리 있다면 인정해야 한다. 무엇을 말인가? 우리 안에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구,,, 그리고 또 다시 말해야 한다. 내 안에 사랑이 없구나!!.
 
솔제니친은 이런 말을 했다. “20세기에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지만 거창하게 20세기만 특징이 아니다. 감히 송구하게도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없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필립이안시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고백은 불신자의 고백도 아니고, 무신론자의 말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실상은 하나님과 가깝게 있지 못하고 우리의 애매한 위치, 패역한 처신을 적나라하게 말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십자가의 권세를 이기고 피 값 주고 다시 사신 우리는 그러나 결코 팔 장 낀 채 우울함에 겨워서 책임하게 ‘세상사가 다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인생 뭐 있어?’ 라고 자조하며 우리의 삶을 무감하게, 무기력하게 소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불안전하다는 절망스러운 어둠속에 고발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2006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 한 권 있다. ‘마이클 부시’라는 목사님이 영어 원제로 ‘This in complete one’이라는 영어 텍스트를 냈다. 그 책이 2010년에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원래 영어의 의미가 다르게 의역한 것이지만 이 책의 독특함은 열 명 넘는 목사님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이 가운데 우리 목사님들이 잘 아는 칼바르트 자유주의 신학에 던져진 폭탄과도 같은 로마서 주사 학을 썼다는 나치에 맞서서 스위스 개혁신학을 붙잡았던 칼바르트, 해석학의 거두였던 그 모든 형상학의 슐라이어 마흐, 그리고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열 명이 넘는 이 책의 한 시대를 풍미한 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오늘의 공통적인 정체성은 자녀를 잃은 슬픈 아버지, 목사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소명이 목사이기에 자신들의 자녀를 잃고 장례식에서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딸을 위해 장례식 설교를 한다. 그 설교 문이 이 책에 담겨있다. 자기 자신의 자녀의 장례식에서 목사인 그들은 설교한다. 그 설교들을 모은 책이 바로 ‘This in complete one’,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는 책이다. 그 가운데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은 책이다. 부활은 일어났고, 우리 피 값주고 샀던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나는 천국백성에 대한 구원의 확신을 너무나 감사하게 고백하고 느끼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오늘 내 삶은 왜 기쁘지 않을까? 좀 긴 이야기인데 잘 집중해 주길 바란다.
 
다음은 존 크레이프 목사님의 설교이다. 설교 제목은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기적’이다. 과거를 추억하는 내용부터 시작된다. 설교문의 일부이다.
-눈이 내리던 어느 토요일 오후 제 어린 둘째 딸이 18개월 동안 싸워왔던 백혈병과의 사투를 끝내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신의 본향으로 돌아갔다. 그 시간은 그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온 식구들에게 참으로 말하기 힘들 만큼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 말을 꺼내기도 힘들만큼 깊은 슬픔에 젖어 완전히 탈진했었던 것 같다. 제 딸이 세상을 떠난 지 6주 정도 저는 후에 루이빌에 있는 감리교 병원에 방문했다가 왜 방문했는가? 딸은 6주 전에 죽었지만, 사역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만나고, 위로하고 목사인 내가 6주 전에 딸을 묻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많은 사역에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성도들을 위로해야 되니까, 평소 아주 친하게 지내던 유대교 랍비와 마주쳤다. 목사님이 아니라 유대교 랍비이다. 딸아이가 죽은 후 처음 만난 것이기에 그는 정중하게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뜻하지 않는 질문으로 저를 당황케 했다. “목사님 자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어. 남자대 남자로 정직하게 대답해 주면 좋겠네. 그 어렵고도 잔인하기까지 한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네와 가족들에게 무엇을 해주셨는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그럴싸한 말로 대충 둘러대기에는 우리 둘은 너무나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내 눈을 응시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했다. “자네가 얼마 전에 겪은 그 끔찍한 경험 속에서 자네가 그토록 붙잡고 있는 하나님께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무엇인가?” 저는 앞의 친구의 질문에 제 딸을 보내던 그 시절의 복잡한 마음과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레이프 목사님이 의사에게 물었다. “제 딸은 언제까지 살 수 있죠?” 남자 의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대체로 따님 또래의 이런 종류의 백혈병을 가진 아이들은 약 18개월 정도 삽니다.” 1년 6개월 후에 죽는다는 진단이다. 의사의 냉랭한 진단 그대로 제 딸은 진단 받은 날부터 정확히 18개월 하고 딱 열흘 더 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고 의료기술을 총동원 해보았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그 아이를 구제할 수는 없었다. 목사님이 믿는 그 하나님은 그 어떤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지도 않으셨고, 개입하지도 않으셨고,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기적에 함께 동역해보지도 못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기적과 상관없이 다만 저는 여전히 단 한 순간도 견디기 힘들다고 몸부림치던 절망과 낙담의 시간들도 가득했을 뿐이라고 그 시절을 생각했다.
 
그러나 랍비친구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그 순간 저는 어쩌면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아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무엇인가 깨달음이 있었음이 떠올랐다. 무엇이었을까? 성도여러분, 평생 목사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 어떤 것도 불가능이 없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그 존엄과 위엄과 권능을 성도님들께 선포하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대로 역사의 주인이시며 창조의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았던 존 크레이프 목사, 그러나 정작 로마서의 고백대로 죽은 자를 살리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성도들 앞에 증명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한 명의 사역자로서 그는 하나님의 철저한 침묵 속에 자신의 소중한 딸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는데 도대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깨달은 게 있었을까? 존 크레이프 목사님은 말한다. “저는 제 랍비 친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할 수 있다. 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었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을, 지옥과도 같은 그 고통의 시간을, 좌절을, 절망을, 맨 정신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어, 또 우리가 패배를 당하고 그로 인해 쓴 뿌리를 뽑게 하는 대신 우리 힘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일을 알 수 없는 힘으로 버텨내게 하셨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내게 주워졌던 이 고통과 인내라는 섭리 덕분에 나는 이전과는 다른 다른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야, 그래, 나는 언제나처럼 힘든 삶 가운데 있지, 그러나 나는 여전히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해.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다. 때론 우리의 삶의 굴곡마다,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그 막막함이 일상이 될 때도 있다. 오늘 주의 몸 된 교회를 달려오신 안아주심의 본당을 채우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도 2022년 10월 26일 오늘이 너무도 기뻐서, 도저히 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주의 전으로 달려오신 분들도 물론 있을 수 있지만, 어디서부터 내 삶의 좌절과 얽혀버린 내 삶의 문제를 도대체 누구에게 토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말씀을 듣고 수색이 없이 돌아가는 것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한나의 이야기가 아닌가? 라고 마음을 쥐어 잡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분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나는 만족해’, 라고 사람들 앞에서 때로는 멋지게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실재로 그 공백은 우리가 때때로, 아니, 아주 많은 시간 동안 신앙의 삶 속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구제는 내 삶 속에 여전히 고통스럽게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 가득 분노로 가득할 때, 사막의 신기루 같은 하나님, 김정우 교수님의 표현대로 부잣집 시어머님 같은 하나님, 그래서 쌀이 없어서 쫄쫄 굶고 있는 친정을 생각하며 눈물이 쏟아지는 며느리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은 부잣집 시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함께 하시는 것 같지만 어느 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향한 질문이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 질문하라. 그리고 서러운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분노 가득한 여러분의 마음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말해본적 없는 그 절망의 감옥들 속에서 눈물가득 부르짖어 보라. 그 시간이 여러분을 충분히 감싸 안을 때, 그래서 희망이라는 말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 다가올 때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끝내, 기어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알게 하실 것이다. 무엇을 말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은 우리의 마음과 심장을 걸어야 하는 일이구나, 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낭만적이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고, 복잡한 우리 삶에 기쁨을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우리의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자들,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는 자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도망치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마침내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소에서 비롯되는 피의 절규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권능의 십자가의 보혈에서 비로소 주어지는 그 평강의 놀라운 능력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길에 여러분과 제가 함께 서 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래서 단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내 삶에 욕망을 채우기 급급해서 나, 나, 나, 혹은 내 가정, 내 가정에 갇힌 그 이기심을 넘어서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내 아들이 어느 학교를 다녀서, 내 딸이 어느 전문직 직종에 있는 것이 내 유일한 자랑의 고백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하나님은 내 인생을 굽여 살펴 주시지 않는다고 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고백하는 그대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오늘 이 땅에서 이루어질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위해서, 우리의 남은 삶을 기쁨으로 의지적인 기쁨으로 기꺼이 드리자.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주신 그 즐거움에 선물, 부활의 감격, 그 이유를 가장 귀하고 가슴 벅차게 하나님께 받은바 그대로에, 그 사랑으로 누리며 갚아드리는 영광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오, 환난 중에 만날 큰 산성이시라는 그 고백을, 우리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그 기쁨으로 그 어떤 누구도 나를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기쁨의 표어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좌절과 낙망과 핍절됨을 뒤로 하고 우리의 심장을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백으로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요약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의 이 질문 앞에 세 개의 답이 있는데,.
첫째 답은-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음으로써 얻으신 의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신다.
둘째 답은-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다.
셋째 답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확실한 부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바울은 명백한 사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시한다. 고린도 교인 중에는 영혼의 불멸은 인정하면서도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 사건의 역사성에 입각해 성도의 부활의 필연성과 확실성을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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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주후 2022년 10월 23일)

제목:"나와 씨름해 주시는 하나님"
말씀: 창세기 32:9~32
대표기도: 김대규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
 
*창세기 32:9~32,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
 
▶저는 인생의 에서가 있다. 오늘 야곱의 이야기를 할 터인데, 에서 때문에 다 두려워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에서를 극복할 수가 있다. 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시리즈를 하는데 제 마음에 먼저 와 닿았던 것 하나가 부흥은 어떤 개인의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개인의 부흥은 공동체의 부흥과 같이 간다. 교회가 부흥되면 개인도 부흥한다. 제 이야기기 아니고 중요한 신앙선배 J.I 패커의 말씀이다. 닥터패커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함께 보자.
 
*“부흥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시는 일이요, 동시에 개인의 삶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J.I 패커-
-공동체가 새로워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삶도 회복되고 부흥되는 것이다. 이게 같이 가는 것이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가 막 부흥할 때, 그 교회 속한 성도들의 비즈니스가 부흥하고 그리고 그 교회 속한 가정이 새로워지고 그리고 예술을 하는 자들은 그림을 잘 그리고, 음악 하는 사람은 음악이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고, 인간의 수많은 한계를 갖고 있는 사람은 한계를 극복하고 학문의 세계에서도 부흥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번에 시리즈를 통하여 우리 교회뿐만이 아니라, 여러분 개인도 부흥하는 축복을 주시길 바란다. 아니 우리가 기도하는 이 말씀을 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 한 사람의 부흥은 바울 한 사람의 부흥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대 로마제국을 업사이드 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어거스틴은 개인의 부흥은 초대 교부 시대의 부흥을 이끌어냈고, 요한 캘빈을 비롯한 여러 루터의 부흥을 통하여 유럽의 대 부흥이 일어났고, 19세기에 미국의 대 각성을 통하여 대 각성이 일어났을 때에 여러분 단순히 미국 교회의 부흥의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미국의 팩스 아메리카나, 미국의 국가적인 대 부흥이 일어났던 것이다. 오늘 부흥 시리즈가 나오고 한국이 다시 부흥되게 도와주시며 이 민족이 다시 한 번 세계 선교를 마무리 할 수 있는 능력과 기백을 갖추기를 소원한다.
 
오늘 첫 번째 주인공은 야곱이다. 이 야곱은 잘 아시는 대로 인생의 고비 고비에 종합 선물세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장자권이 마음에 쓰여 가지고 하나님이 알아서 주실 텐데 이 야곱은 늘 자기가 더 아버지 속이고 형 속이고 어쩔 수 없이 그 라반의 집이라고 야곱의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가서 20년 동안 죽을 고생을 한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던 것은 개인의 흑 역사이다. 그 흑 역사 때문에 도망을 갔다. 가서 20여 년 동안 죽을 고생을 했다. 중간에 14년 정도를 지나서 돌아올 기회도 있었지만 이십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이 내용은 20년 지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너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런데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야곱이 지금 하란이다. 야곱이 20년 동안 있었던 곳이 아브라함은 단순하게 가버렸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똑똑하니까 온갖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20년 동안 이 시간이 걸렸는데 사실 하나님께서 이십년을 기다려주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에서가 있고, 우리 가운데 흑 역사가 있는 분들이 오늘 이 20년을 하나님이 기다리셔서 이 시간 이 예배를 참석하시게 하신 줄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이십년을 기다려주신 것이다.
 
사랑의 교회 성도들이여, 이 말씀을 듣는 권속들이여,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여, 20년 30년에 걸쳐오는 신앙의 가문 중에서도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 있거든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해결이 되길 바란다. 정말 진리 지식과 지혜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많은 인물들을 앞에 놓고 아브라함이다. 바울이다. 라고 하면 우리는 너무나 먼 당신이다. 아브라함이나 바울은 좀 멀어 보이지만 야곱은 우리와 좀 가까운 당신이다. 왜냐하면 우리와 속성이 좀 비슷하다. 구약에서는 야곱, 신약에서는 베드로, 오늘 야곱을 앞에 놓고 우리가 “사랑하는 성도야, 내가 너를 20년 동안 기다렸다. 이제 회복을 해야 할 때이다.” 라고 하시면 그 마음에 마음을 열기를 바란다. 잘 아시는 대로 야곱은 두 아내와 11명의 자녀가 있었다. 엄청난 수의 염소와 양과 나귀와 소가 있었다. 돈도 많았다. 이제는 두 떼를 이루고 부자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는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이 있었다. 말씀한 대로 아버지와 형을 속였다. 그래서 그 형을 속이고 난 다음에 자기가 머리를 많이 굴렸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살아볼까?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그런 것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잔 머리를 많이 굴렸다. 그래서 잔 머리를 잘 굴리는 것을 우리는 JQ지수가 높다. 라고 할 수 있다. IQ가 아니라 JQ가 발전된 사람이다. 그리고 형을 다시 만나는 과정에도 야곱의 잔꾀가 발달이 되었다. 먼저 종들을 에서에게 보내서 에서으 어떤 상황, 마음, 에서가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의 대해서 반응을 떠보려고 했다. 사실은 야곱이 좀 더 성숙했으면 이 문제를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터인데 자기 나름대로 삶을 통제하고 살아서인지 그렇게 종들을 보내가지고 그렇게 알아본 것이다. 종들이 돌아와서 무어라고 보고를 하냐면, 오늘 앞에 32장 6절을 보면,

*창세기 32:6,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인가? 왜 이렇게 오지? 자기가 잔머리를 굴리니까 나를 죽이려고 사백 명을 데리고 온다고 느끼고 자기의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니까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미리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이 두려움이 있고 상처가 있으면 전체를 보는 시각이 약해져서 자기 지레 짐작을 많이 한다. 그래서 삶에 헛발질을 할 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기도하지 못했다. 야곱은 지금 사람에게는 진심, 하나님께는 전심이 아니고, 사람에게는 의심, 하나님께는 무심이었다. 그래서 JQ를 굴려서 하나님께 무심이 발동해서 자기 그 형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 자기 무리를 둘로 나누었다. 앞 그룹은 자기가 덜 아끼는 그룹을 먼저 보내고, 뒤 그룹은 자기가 더 좋아하는 그룹을 보낸다. 8절을 보면 나와 있다.
 
*창세기 32:8,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 ‘만약 앞에 있는 그룹을 먼저 치면 그 순간 나는 도망가리라.’ 하는 마음이었다. 대단한 JQ이다. 그런데 야곱을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신 분은 누구인가? 9절에 나온다.

*창세기 32:9,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하셨으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을 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하면 되는데 그게 참 안 되는 것이다. 워낙 똑똑하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1절과 2절을 보면 너를 지킨다고 하신다. 옛날에 벧엘에서 혼자 아버지 엄마를 떠났을 때,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보여주신 것처럼, 지금 오늘 돌아갈 때, 천사를 보내어 너를 지키겠다고 하신다. 그것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군대, 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하니까 드디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시작한다.

*창세기 32:1~2,
1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I. 회복의 기도는 이렇다
 
-그래서 야곱이 오늘 9-12절까지 야곱이 기도를 하는데 야곱이 이 기도가 회복의 문을 열게 해 주신다. 우리 모두에게 에서가 있고 우리 모두에게 두려워하는 트라우마가 있다하더라도 이 네 가지 기도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회복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창세기 32:9,
9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의 기도 첫째,
첫째 -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님이 위대하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먼저 초점을 맞췄다.
-옛날에는 항상 자기중심이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아주 재미있다.
*창세기 32:20-21,
20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21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야곱의 기도 둘째,
둘째-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고백하는 인정한다.
*창세기 32:10,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마음이다.
 
*야곱의 기도 셋째,
셋째- 구체적인 기도 제목으로 간구했다.
*창세기 32:11,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자기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구체적으로 고백한다.
 
*야곱의 기도 넷째,
넷째- 하나님의 약속을 재차 언급했다.
*창세기 32:12,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
 
- 이 언약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이삭에게 주었던 것을 리컨펌(재확인)하는 것이다. 이건 좋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이렇게 기도한 다음에 야곱이 하는 여러 가지 절차를 보면 기도는 이렇게 멋있게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게 문제이다. 기도는 하지만,,,
 
 
II. 기도는 하지만 믿지 않는 아이러니.

*창세기 32:13,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너무나 과도한 예물을 가지고 형에서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형 에서가 자기를 칠 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믿기는 믿는데 실제로 안 믿는 이중성이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확실한 응답을 믿지 않는 약점이 있는 것이다. 멋진 기도를 드렸지만 훌륭한 기도는 하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이것이 야곱만이 아니라, 우리의 약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야곱과 공감대가 있는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면 믿어야 되는데 인간적인 불신이 날마다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 같은 경우도 기도는 그렇게 멋지게 했는데 하나님의 권능보다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다. 나중에 실제로는 어떻게 되냐면 야곱이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뭐 에서가 야곱이 에서에게 더 잘해준다고 해서 감동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33장 4절에 보면,
 
*창세기 33:4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내 동생이 왔다고 막 울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20년간 야곱은 속으로 그랬다. 복수의 칼날을 갈았는데 이게 무언가? 했을 것이다. 야곱이 나름 대책을 세운 것이 전혀 계락이 효과가 없었다. 에서를 향하여 580마리의 소떼와 양떼와 이런 것을 갖다가 그 당시로서는 어머한 선물이다. 정주영씨가 1차로 북한에 소를 가지고 갔는데 소떼 500마리를 가지고 갔듯이 그러나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제가 볼 때 그러면 에서가 왜 400명 데리고 갔느냐고,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나도 이만큼 대단하다. 나도 400명 데리고 올 수 있다. 동생에게 좀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은 순전히 제 생각이다. 그러나 큰 무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야곱이 인간의 꾀를 쓰고 애쓴다고 했지만 그 애쓴 것이 별로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드디어 22절부터 24절까지
 
 
III. 구체적 회복의 시작

*창세기 32:22~24,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창세기 32:24a
24a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아마 혼자 남아서 더 깊은 기도를 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대일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 만난 간접적인 만남, 마치 온라인 같은 비대면의 경험이었다. 오늘 드디어 대면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간접경험에서 직접 경허믕ㄹ 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 20여년 전에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은 좀 멀리 계시는 것 같았지만 오늘 만남은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난다. 24절 뒤에 홀로 남아가지고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면,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러분, 이 내용은 구약에서 너무나도 신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이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 야곱을 찾아와서 씨름한 사람은 누구인가? 제가 묻겠다. 야곱이 먼저 씨름하자고 했는가? 이분이 먼저 씨름하자고 했는가? 아주 흥미롭다. 이분이다. 이분은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32:30,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호세아 12:3~4,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야곱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회복의 시작을 정리를 하자면 회복의 시작은 인간적인 계획과 나름 기도는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는 내가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똒똑하니까,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이 400명이 나를 치러온다고 했을 때, 나름대로 자기 프레임이다. 오늘 이런 일이 많다. 유튜브를 보는 대로 여러분의 프레임이 가는 것이다. 지금 유튜브에 나오는 것이 그게 여러분이다. 저는 9.26 섬김의 날이다. 우리 아이들이 주일학교 아이들이 “주 하나님은 크고 능있어 못할 일 전혀없네. !!~~이번주일에 그 노래를 해야지 했다. 유튜브로 켜는 것이 바로 나의 프레임이 된다. 그러니까 4백 명이 나를 칠 것이다. 아닌데, 지레짐작해서 그런 일이 많고, 기도를 하지만 믿지 않는 기도를 하지만 그래도 내 삶을 통제해야 한다는 우리의 성향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를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복의 시작과 나름 인간적인 기도와 나를 치료하는 4백 명의 오해 이런 것들을 깨부수고 업그레이드가 되어야 한다. 좀 깊이 들어가면 힘 빼기 작업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야곱의 문제는 무엇인가?
 
*야곱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그 사실을 깊이 믿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을 하시는 것을 믿지 않은 것이다. 믿으면서도 믿지 않았다. 그의 내면은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기는 하지만 내가 내 삶을 통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타깝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 하나님은 너희 진짜 믿음의 용략이 커지고 진짜 믿음의 조상이 되고 진짜 부흥하려면 자기중심적 생각이 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야곱의 기도가 나름 괜찮고 신학적으로 옳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능력 있게 일하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깨부수려고 하신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들이 다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교회가 큰데 부흥을 많이 해서 또 얼마나 사람을 모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다 자기 프레임이다. 부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은 나중에 나타날 열매이고, 부흥은 내가 깨어지는 것이다. 부흥은 내게 있는 에서를 처리하는 것이다. 부흥은 내가 내 삶을 통제하려고 하는 하나님을 믿지만 기도도 하지만, 그러나 막판에서는 내가 마지막 결론을 내는 이런 스타일을 정리하는 것이 부흥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그럴듯하게 교회 내에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 하는 자도 있지만 한국교회 내에 진짜 부흥을 맛보는 것은 자기 힘 빼기요, 에서를 처리하는 것이요, 자기 속에 있는 프레임을 처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도 이런 성향이 있다. 우리 모두의 기도도 괜찮고 신학적으로 자리가 잡히고 신앙적으로 나름대로 흑 역사가 있어서 나름 멋진 기도를 하긴 하는데 하나님께서 내 삶에 실제적으로 일하시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옛날에 할머니 권사님들, 교회에 와서 날마다 새벽 기도를 다 기도를 제목제목 다 하고 나서 갈 때는 그 기도제목을 다시 거두어서 보따리에 싸서 가서 고민한다. 우리가 특새에 귀한 분들이 간증을 하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김권사, 박집사, 장로님이나 기도가 되는 것이지 나에게는 되는 것이 아니야, 라고 한다. 나에게는 역사가 안 일어나!’ 한다. 그러니까 수천 년의 이 이야기나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특별히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 중에 이런 신드롬이 많다. 남은 은혜 받는데 정작 내 스스로는 안 되는 것이다. 주로 언제가 위험하냐면, 3대가 위험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3대, 그래서 내 의지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별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기대를 하지만 늘 신앙이 상식선이 된다. 신앙은 상식이 아니다.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다. 신앙은 부흥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다. 내 상식선에 하나님을 믿으니까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생각도 안 해보고 부흥을 눈도 못 뜨는 것이다. 드디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신앙의 잔재들이 이번에 이 기회를 통하여 청소되기를 소망한다.
 
*창세기 32:25,26,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위골되었다. 골반 뼈가 어긋났다. 야곱이 저항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버리신 것이다. 야곱이 인간적으로 저항할 만한 힘의 근원을 차단시켜버리셨다. 그래서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낯선 분 앞에서 엎어져서 그분을 의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엎어지면 항복해야 되는데 야곱은 저는 26절에 보면 엎어져놓고 성격 자체가 독특하다.
씨름하는 사람이 매달릴 수밖에 없다.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27a,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세기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무언가? 속이는 자, 악착같은 자, 자기의 삶을 자기가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이 뭐냐고 물어보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엘이 하나님이 승리하신다. 하나님이 싸워주신다. “너희 힘으로 싸우며 인생 살지 말고, 내가 싸워줄게, 네 힘으로 인생 사려고 하지 말고 내가 싸워줄게. 네 인생 네 지팡이로 혼자 살지 말고 나한테 의지 하면 내가 싸워줄게” 그게 이스라엘이라는 뜻이다. 많은 분들이 야곱이 밤새도록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야곱의 기도의 용사였다고 하지만 사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고 하지만 싸워주시고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것이 아니라 야곱과 씨름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나와 씨름해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 야곱의 고집스러운 자기 의와 자기 처신에 대한 과도한 의를 쳐부수기 위해 하나님이 씨름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워주시는 인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 주신 것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최고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져 주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져 주신 것이다. 실제로 야곱은 하나님을 이기지 못했다. 그의 환도뼈가 위골이 된 다음에야 하나님을 붙잡고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님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져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환도 뼈가 완전히 위골이 되어서 내가 무너져서 하나님을 붙잡는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이 볼 때믄 실패일지 모르지만 이 시간부터 야곱이 참으로 승리하는 시간이 되는 줄 믿는다.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워주는 아주 그냥 신비한 인생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바울도 깨닫고 내 능력이 약한 것에서 온다고 했다. 내 능력이 약할 때에 강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싸워준다고? 하나님이 싸워주시며 날마다 힘 빼기 작업을 하시고 오늘 내 인생에 환도 뼈를 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오늘 이것이 회복의 플렛폼이 되는 것이다. 잔꾀를 부리고 생각을 많이 할 때는 에서의 얼굴이 많이 보였는데, 오늘 이렇게 자기가 위골 되고 난 다음에 드디어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무얼로 바꾸었냐면 브리엘이다. 맨날 에서 때문에 맨날 흑 역사 때문에 마음도 흑심이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시니 회복이 되고 도움이 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흑 역사가 바뀌길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했다.
 
*창세기 32:30~31,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동안은 간접적으로 만났는데 이제는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비 대면이 아니라 대면하여 만나고 내 삶이 보전 되었다.
 
*창세기 32:31,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참 여기에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야곱이 지금 허벅지로 인해서 위골이 되어서 절었다. 지금 의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영적을 해가 돋는 인생이다. 새로운 차원의 삶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의 강을 지나왔다. 지나오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트라우마도 상처도 많고 우리 사회도 수많은 많은 어려움이 생겼다. 이것을 우리 힘으로 해보려고 별짓을 다 한다. 기도도 많이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서도 믿지를 않는 것이다. 이런 속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싸워 주심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싸울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워주실 인생으로 살도록 만들어 주신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위골된 환도 뼈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리의 삶의 역사에 우리를 다리 절게 하신 하나님의 강력하게 인도하심이 있는 것이다. 믿는 가족에게 배신당해서 가족의 다리를 절게 할 수도 있고, 남보다 공부를 많이 못해서 우리의 어떤 지성의 다리가 절개 된 것도 있고, 육신의 질병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되는 일도 있고 사업의 실패로 다리를 절게 될 수도 있고, 심리적으로 다리를 다칠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로 다리를 절게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리를 절게 될 때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싸워주심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는 이제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지만 겉으로 볼 때는 내 힘으로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를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싸워주시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브니엘로 만들어 주신다.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이 열렸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인생의 다리를 절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시길 주님이 나와 싸워주시면 더 이상 에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인생에 해가 돋을 것이다. 이것이 부흥의 시작이다.
 
Oh- I could not live without Him.!!~~
 
♣요약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의심하는 나를 찾아오셔서 독대하여 주실 때,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불신앙의 허벅지 환도 뼈를 깨뜨려 주시길 간구하며 내 인생에도 회복과 부흥의 창문을 활짝 열어주시길 소원해야 한다.
 
-야곱은 형의 위협에 직면하여 겸손히 하나님께 구원에 대해 간구하였다. 야곱은 욕심도 많고 경쟁심도 많아 얻고자 하는 바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겸손하게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단련시키며 믿음을 성숙시키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한 씨름은 영육이 혼연일체가 되어 하나님께 매어달려 결사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사람으로서 할 일을 모두 끝내고 남은 일, 곧 하나님과 씨름하며 은총을 구하는 일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야곱의 기도 가운데 끈기가 있음을 알려 주는 사실은 야곱의 환도 뼈가 위골된 점에서 알 수 있다. 환도 뼈는 허리 아래 넓적다리 상단에 위치한 뼈를 가리킨다. 환도 뼈가 위골되도록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당해 내지 못했으나 필사적으로 매달려 기도한 결과 마침내 응답을 받았다. 이 개명(改名)은 야곱의 삶과 인격이 근본적으로 변화됨을 의미한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또는 왕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야곱처럼 우리는 자신을 위한 삶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변하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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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부흥회(주후 2022년 10월 22일)
제목: "포괄적 성교육에 대한 국제적 저항운동"
대표기도:
찬양인도: 사랑브라더스(교역자님들)
말씀: 히브리서 11:21 
사회: 오정현 담임 목사님

설교자: 위르겐 욀커스 교수님(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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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21,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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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욀커스 교수님(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수),통역(정일광 교수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한국 교육계를 위해서 기도해 주길 바란다. 지금 우리 교과서 개정안 때문에, 우리 교과서 개정안에 사회주의 성 정치사상, 쾌락주의적 성 이해, 과잉 성 이해와 조기 성 이해와 사상이 많이 도입되려고 해서 이 관련된 길원평 교수님께서는 이틀 전부터 삭발투쟁에 들어가셨고, 위르게 욀커스 교수님이 국회에 오셔서 유네스코 포괄적 성 교육의 이해의 교육에 대한 국제적 저항 운동에 대한 소개 하셨는데 본래 ‘유네스코 포괄적 성교육’의 원안에 의하면 5세 아이들에게 자위 교육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고, 세계 기독교계가 저항하자 그 원안이 사라졌다.
 
만약 기독교가 침묵하고 저항하지 않는다면 지금 잠시 영상을 보면, 우리 지난 정부에서 김두리 교수님께서 가장 교육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성 교육이 가장 중요한 정치교육이라고 외쳤고, 이런 독일에서도 교육혁명, 사실 교과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려고 하는 찰나이다. 그래서 교회가 만약 침묵한다면 이런 소아들과 청소년들의 성적인 쾌락을 정치화해서 아동들에게 쇠뇌 교육을 하는 사상들이 7년 동안 교과서를 통해서 강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 분들이 이야기 하는 성교육은 사실은 성교육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치교육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성교육이 아니라 사회적주의적 정치교육이고, 이들이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주의적 새 인간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이 본래 그들의 어떤 도금화였다.
 
그래서 오늘 위르켄 욀터스 교수님을 모셔서 본래 이 교과서 문제나 성 교육 문제를 위해서는 아니었는데, 섭리 적으로 이 교과서 문제 개정안과 맞물리면서 이렇게 잘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래서 김두리 교수님께서 이야기 하는 ‘독일 68혁명’은 사실 2014년에 독일 녹색당이 소아 성 이해의 운동을 하다가 공식 사과를 했다. 당 대회에서 당대표가 했다. 그리고 2010년에는 독일 진보교육의 상징인 ‘오덴발트’이라는 학교에서 교사에 의해서 약 900명의 학생들이 수십 년간 아동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그것이 폭로되면서 그 ‘오덴발트’ 학교에 대한 아동강간 사건으로 인해서 교육학적 배후 이념에 대해서 위르겐 욀커스 교수님께서 가장 유럽 독일 권에서 대표적으로 이 문제를 공론화 한 분이기 때문에 저희가 모셨다. 그래서 이런 ‘독일 68교육 혁명’은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마치 진보적인 것처럼 포장되어서 우리가 저항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유네스코 포괄적 성교육의 원안처럼 그렇게 도입 될 수밖에 없다. 독일어로 이 교수님의 강의를 듣겠다.
 
▶▶위르겐 욀커스 교수님(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수)
-박수로 맞이하겠다. 굿모닝!! 네 명의 아들이 있고 손자들이 많은데, 유네스코 포괄적 성 교육과 같은 성교육 없이도 이렇게 훌륭하게 잘 성장했고, 스위스에서는 이런 ‘유네스코 포괄적 성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마치 이것이 따라야만 하는 국제적인 트렌드인 것인 양 호도해서 지금 이렇게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유네스코 포괄적 성교육’은 포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더 비판적이라고 말씀한다. 모든 분야를 섭렵해서 강제적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되고 실용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 성 교육, 사춘기에 집중하는 그런 교육, 그리고 성 적인 쾌락을 조장하는 그런 교육이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유럽에서 많은 학부모들이 이 포괄적 성교육에 대해서 저항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성 교육을 지나치게 쾌락주의적으로 쾌락을 강조하면서 쾌락의 정치화를 통해서 성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어떤 성 교육이 사랑이나 관계와 같은 그런 것을 강조하지 않고 오직 쾌락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유럽에 특별히 독일어권에서는 강하게 학부모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이렇게 국제기구에 통해서 강제들은 포괄적 성교육은 학부모들의 교육들을 명백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학부모들이 저항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포괄적 성교육에 통해서 사실은 헤게모니(hegemony)를 향한 문화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포괄적 성교육 도입에 대한 반대 의견이라며 잘못된 성교육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를 지적하는 학술 세미나가 국회에서 열렸는데 포괄적 성교육에 대한 부적절함을 알리기 위해서 여러 시민 단체의 목소리가 거셌다. 위르겐 욀커스 교수가 참석해서 해당 성교육을 여러 국가가 반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포괄적 성교육에 대해서 프랑스에 본부를 둔 유네스코가 제작한 교육과정이다.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성 행동, 임신과 성병에 대한 성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을 유네스코는 홍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괄적 성교육은 지나치게 청소년의 탐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다. 유럽의 상황을 제시한 위르겐 욀커스 교수는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포괄적 성교육이 개별 국가의 상황과 각각의 아동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러면서 실용적 성 교육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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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2년 10월 19일)
제목: "은혜에 반응하는 신앙"
말씀: 마태복음 21:12-17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권진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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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2-17,

12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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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우 부목사님
-수요저녁기도회에 주님께서 풍성한 은혜와 기쁨을 허락해 주시길 소망한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21장 12-17절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성전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매매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성전 제사의 희생 제물로 드릴 짐승을 판매하는 사람들을 보시자 그들을 내 쫓으신다. 그리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그리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오늘 본문을 이야기 하고 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려드릴 희생 제물을 파는 자와 성전 세를 환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강한 분노를 표출하고 계신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종종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잘못된 신앙과 가르침으로 유대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때, 그들을 질타하시면서 분노를 나타내시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분노한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는, 성경에서 오늘 성전에서 있었던 사건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을 내쫓고 상을 뒤엎으실 정도로 그 예수님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인가? 오늘 그의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잠시 살펴보면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율법의 명령에 따라서 일 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성전에 와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 세 번은 유월절, 초막절 그리고 오순절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세 절기 중에 아마 유월절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 성전 안에서는 이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동물들을 돈을 받고 파는 자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첫째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에 희생 제사들 드리기 위해서 찾아오는 자들의 거주지가 먼 경우에 성전에 자신이 기르던 소와 양과 같은 제물을 끌고 오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전을 향해서 먼 여정을 오는 길에 예물로 드릴 짐승이 병이 들거나 다칠 수가 있었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관련된 율법을 보면, 하나님께 드릴 예물은 흠이 없어야 한다고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재물을 보고 제사로 드리기에 부적합하다고 판정을 하면 멀리서 자신의 짐승을 가져온 것들이 헛수고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먼 곳에 사는 유대인들은 주로 성전 근처에 와서 재물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재물을 주로 성전에서 구입하는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성전에 오는 자들이 직접 자신이 가져온 제물에 대해서 제사장들이 제사에 드리기에 합당한 것인지, 판단할 때, 매우 엄격하게 판단을 하고 그렇게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이 성전에서 매매하는 이 제물의 돈들은 제사장들의 부를 쌓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집에서 직접 가져온 짐승에 대해서는 적합성여부, 그러니까 희생제물을 드릴지의 합당한지, 적합성 여부를 더 엄격하게 해서 가능하면 성전에서 돈을 주고 희생 제물을 구입하도록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물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해서 시중에 같은 종류의 짐승보다 훨씬 더 비싼 값에 그 당시 팔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성전에서 제물을 매매하는 것이 활성화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성전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냐면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나오고 있다. 이들은 다른 말로 사람들은 환전 상인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당시 이 제사장들은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고, 또 성전에 유지 보수를 위한 명목으로 성전 세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 성전 세는 세겔과 같은 유대인들의 화폐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그런 동전과 화폐로만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로마 화폐는 로마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 화폐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신성모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화폐나 이방인의 화폐를 유대인의 화폐로 환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환율을 임의로 올려서 폭리를 취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누가 나오느냐면 비둘기를 파는 자들이 등장한다. 이 비둘기는 가난한 자들이 드리는 제물로 하나님께서 정한 것이다. 성전 안에서는 이 가난한 자들이 이 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도록 매매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정하신 희생 제물인 이 비둘기를 이 판매상들은 이 역사적인 자료를 보면 당시 시중가의 무려 80배 이상을 받고 파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특별한 예물이라는 명목으로 그렇게 폭리를 취해서 판매들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전에 뜰에서는 절기에 맞혀서 성전에 찾아오는 자들이 희생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짐승을 파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성전에 나올 때,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은 또 율법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제물 판매상들을 내 쫓으시고 장사하는 자의 상과 의자를 뒤엎으실 정도로 이렇게 본문 이 말씀에서 분노를 표출하셨던 것인가? 물론 방금 전에도 살펴본 것처럼 이 제물을 매매하는 자들은 시중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폭리를 취해서 이 성전을 말 그대로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 분명히 있었다. 자신들이 욕심을 채우고자 성전 제물 매매를 통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잘못 된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쭈욱 살펴보면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이 희생 제물에 대한 이해와 생각이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음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이 부분이 어떻게 잘못되어서 예수님을 분노하게 했는가? 이것을 우리가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자들은 짐승에 대해서 일정한 가격을 정해놓고 판매를 한다. 그리고 그 짐승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릴 특별한 제물이기 때문에 같은 종류의 짐승, 시주에서 파는 것보다 더 비싼 가격에 매겨서 판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비둘기에 대해서도 만찬가지이다. 시중가보다 수십 배의 가격을 매겨서 비둘기를 판매한다. 이처럼 이 당시 제사장들은 특별한 정성과 헌신이 담긴 희생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생기게 되고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사장들이 희생 제물이 희생 제사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겼던 부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얼마 만큼에 대가와 정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느냐에 대해 관심이 더 크다. 거기에 대해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을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성전에 나아가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딱 정하실 때, 그 의도가 오늘 이 제사장들, 오늘 판매상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레위기 1장 2절을 보자.
 
*레위기 1:2,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먼저 소와 양으로 드릴 때에는 자신이 키우는 가축 중에서 흠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하여 자신의 소유 중에서 제물을 드릴 수 없는 내용을 법의 내용을 따로 정하셨다. 우리 레위기 5:7절을 보자.
 
*레위기 5:7
7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
-소나 양과 같은 제물을 드리기가 힘든 형편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중에서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이다. 이 비둘기라는 것은 당시 어떤 특별한 어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주위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그런 짐승이었던 것이다. 그런 동물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이 제사들 드리기기 위해서 나오는 이 대상에게 그의 사정에 맞혀서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시는가? 지금 호의를 베풀고 계신다. “너 가난하냐? 소나 양으로 드릴 수 없느냐? 그럼 비둘기를 제물로 내라.” 그 형편에 맞혀서 지금 호의를 베풀고 계시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희생 제물을 통해 인간에게 어떤 하나님의 정성과 대가를 요구하시고 대가를 바라기 원하셨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아셨겠는가? 무게 얼마 이상의 흠 없는 한 마리, 이런 식으로 상당한 제물의 특정한 제물을 정해 놓고 그것만 가져오게 하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제물 드리는 자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든지 빚을 내서든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취해서라도 딱 정해진 제물만을 드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형편에 맞혀서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정하시고, 호의를 베푸시고 배려를 하신다. 소유하고 있는 가축 중에 흠 없는 소와 양이 있으면 그것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가난해서 어렵니?” 가난해서 형편이 미치지 못하면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비둘기를 제물로 정해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호의를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 하나님이 강조점을 두시는 것이 내가 만드는 어떤 대가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 자체에 초점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존재이다. 이 죄에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는 나의 죄로 인한 이 상황의 형벌에 대신할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제물을 드려야 하는지 정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뭐라고 하시는가? 드리는 자의 형편에 맞추는 호의를 계속 베풀고 계신다는 것이다. 또 이거 안 되면 더 이거 드려!! 이걸로 제물로 드리면 돼! 기르는 가축이 없어서 소와 양이 안 되면, 가장 흔히 구할 수 있는 비둘기로 제물을 삼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로 말미암아서 결국에는 장차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이 만드는 어떤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완전한 희생 제사,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과 화목 하게 될 것임을 예표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호의로 인한 제물을 통해서 인간과 화해하고 우릴 만나실 것이다. 이 예표라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이러한 희생 제사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와전시켜서 제물이 담고 있는 의미보다 제물을 드리는 자가 만드는 대가와 수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또 어느 정도 이상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받으시고 성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너희가 하나님 앞에 나올만한 어떤 자격을 갖추고, 죄에 대한 하나님에 노여움을 풀만한 특별한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나님 만나러 성전에 나올 수 있다고 제사장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상을 뒤엎어 버릴 정도의 분노를 표출하고 계신다.
 
※제가 이 내용을 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한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어떤 아이가 하나 있는데, 이제 친구들과 이 아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축구를 하다가 그만 볼을 잘못차서 남의 집 일층 베란다 유리창을 와장창 깨뜨렸다. 하필 왜 구를 차다가 유리창 깨는 것이 의아해 하실 수 있는데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실제로 일으켰던 사건이다. 가장 와 닿는 일이기에 예를 들었다. 유리창을 깬 아이는 어떠하겠는가?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른다. 그런데 함께 축구를 하던 이 친구들이 한 편으로는 걱정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살짝 놀리기도 한다. “어떡하냐? 너희 엄마가 아시면 엄청 놀라실 텐데? 이 유리창 값 물어주기 전에는 너 집에 못 들어갈 걸?” 그러면서 아이의 애간장을 태운다. 그런데 이 유리창을 깬 아이의 엄마와 잘 알고 지내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 광경을 보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의 엄마에게 찾아가서 사고 소식을 전한다. 볼을 잘못차서 유리창을 깼다고 했다. 그러자 이 아이의 엄마가 서둘러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래서 그곳에 갔더니 겁나서 울고 있는 애를 아이들이 둘러싸고 하는 말이 “너 이거 물어주기 전에는 집에 못 들어간다. 너희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할 걸? 너 기물 파손 죄로 경찰서에 갈 수도 있어.” 계속 겁을 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그 아이 엄마는 이 아이들에게 가스라이팅 하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들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고 빨리 집에 가!!”라고 호통을 친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다가가서는 이야기 한다. “너 엄마가 항상 조심하라고 했지, 축구를 왜 운동장 가서 안 차고 아파트 단지에서 차고 그래? 또 그럴 거야? 잘못 했어 안 했어, 잘못했어요.” “다음에서 조심하면 돼, 알겠지?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저녁 먹어.” 그리고는 엄마가 대신해서 아들이 깬 유리창을 다 치르고 상황은 끝난다.


지금 오늘 본문의 상황을 우리의 정황에 맞추어서 이야기하자면,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성전이 어떤 곳인가? 만왕이 왕 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고, 하나님의 궁전이다. 제사장을 위시한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이 비둘기파는 자들은 유대인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너희 스스로 대가를 지불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성을 보이지 않으면, 너희 절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 만날 수 없다.” 라고 유리창을 깬 친구들처럼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짠! 나타나셔서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 쫓으시고 상과 의자를 뒤엎어 버리시면서, 방금 우리가 나누었던 예화의 어머니처럼 “너희 내 자식에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말고 집에나 가!” 그리고 나서 본문 13절에서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1:13,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는 “네 집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라고 하신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는 하나님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기도하러 나올 때마다 하나님 만날 어떤 자격이나 대가를 준비해놓고 기도하는 분은 계시는가? 앞에 헌금 봉투 놓고 그러고 기도하는 분이 계시는가? 사실은 만드는 게 하나도 없다. 그냥 기도하러 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도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은혜로 베풀어주신 완전한 희생 제물대신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내 영혼을 우리 지금 신약시대 영혼을 성전삼아 함께 하시는 주님을 기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만난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가 바로 그런 뜻이다. 우리 편에서 만드는 어떤 대가와 정성으로 하나님 만나는 곳이 성전이 아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이 모든 조치와 수고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마련해 놓으셨고 장차 그 아들의 희생 제물 됨을 통해서 다 이루어 놓으실 것이다. 위에 아까 봤던 그 엄마가 아들의 잘못을 대신해서 모든 문제를 처리하듯이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지하여 관계가 회복되고 그분과 교제하는 것이 바로 성전이다. “이 사실을 왜곡해서 우리 자녀들을 나와 멀어지게 하지 말고 불행에 빠뜨리지 말아라.” 집에나 가라. 하시는 것이 “내 집은 기도하는 곳이라.”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참된 의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이 왜곡되는 것을 가장 큰 분노를 표출하고 계시다는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와의 관계를 이간질 시키고 어긋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과 행동들, 이것에 분노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 사실을 말로써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기 위해서 14절에서 보면 어떤 액션 행동을 취하신다.
 
마태복음 21:14,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무얼 하시냐면, 맹인과 저는 자들, 즉 불치의 질병가운데 있는 병자들이 성전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그 즉시 이 병자들을 고쳐주신다. 보시면 지금 맹인이 저는 자들이 고침 받기 위한 하나님께 어떤 대가를 지불했는가? 병원비를 냈는가? 희생 제물을 드렸는가? 그저 예수님께서 일방적인 호의와 은혜로 이 병자들을 고쳐주신다. 주님께서는 맹인과 저는 자들을 그들이 만들어 내는 예수님께서 드리는 어떠한 대가없이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그들을 고쳐주신다.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호의로 이루어지는 만남과 사랑의 그 산 증거를 맹인과 저는 자들의 치유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내 놓으신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 영혼이 구원함을 받았다. 또한 우리 내면의 아픔과 우리 마음의 상처도 주님의 조건 없는 은혜와 사랑에 의하여 고침을 받을 수가 있다.
 
오늘 날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대표적인 마음의 병은 어떤 것이 있는가? 우울증을 들 수 있다. 우울증의 발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사람과의 관계의 어려움에서 찾아올 수 있고, 육체가 연약하여지거나 환경이 어려움이 찾아와서 우울증이 생길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해결되고 환경의 좋은 영향으로 변하면 마음에 우울감도 사라질 수 있다.
 
제가 어떤 탈북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분이 대한민국으로 오시고 처음에는 완전히 별 천지에 온 것 같아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니 북한보다 훨씬 한국이 더 잘 사니까,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3년간 이분이 우울증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아니 한국에 와서 자유를 누리고 더 나은 삶을 사는데 왜 이분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것일까? 바로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들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제들이 마음에 아픔으로 남고 죄책감이 되어서 함께 이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좋은 것을 먹어도 맛을 느낄 수가 없고, 좋은 곳을 가도 그냥 가서도 눈물만 나더라는 것이다. 형제들이 지금 고생하고 있을 텐데, 북에 두고 온 가족들로 인해서 대한민국에 좋은 나라에 와서도 좋은 것을 누릴 수가 없고,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탈북한 지 3년 만에 돈을 벌어서 브로커를 통해서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대한민국으로 모시고 올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자신의 우울증도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되면 우울증도 고쳐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상황에 변화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좀 더 깊은 우울증일 것이다. 이 같은 경우는 대부분 그 원인이 과거의 성장 과정과 관련이 되어 진다. 사람은 밥을 잘 먹으면 육신이 건강하게 성장한다. 그리고 교육을 잘 받으면 지적인 성장도 잘 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보이지 않은 우리의 내면과 정서적인 부분도 함께 자라고 성숙해 가야 하는데, 이것은 주로 바로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 매일 내가 접하는 가정을 비롯한 주변의 안정된 환경 속에서 성장하게 되게 된다. 이를 통해서 밝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되고 높은 자존감을 통해서 사회에서도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 있어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비판과 지적을 주로 받고, 자주 남과 비교를 당하게 되면 우울감이 높아지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그리고 이것이 심해지면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이 우울증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 다른데 내성적인 기질과 작용하게 되면 그 사람들을 회피하고 은둔형의 사람으로 빠져들기 쉽다. 반대로 외향적으로 작용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고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내면의 어려움이 근본적으로 치유가 되지 않으면 평생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우리가 보게 된다. 이 깊은 우울증은 어떤 의학적인 치료나 약으로도 근본적인 치료가 사실 쉽지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우리가 과거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부모님이나 가족들로부터 그동안 못 받은 것을 사랑과 격려를 다시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치유가 가능하겠는가? 오늘 조건 없이 일방적인 호의와 은혜를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그분과 교제할 때, 이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에서도 해방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영혼까지 지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우리 존재자체로 너무나 사랑하셔서 일방적으로 뜻을 정하시고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셔서 우리 인생에 찾아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이 조건 없고 일방적인 호의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 언제나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지속적으로 거할 때, 오늘 예수님의 일방적인 호의로 병자들이 오늘 말씀에서 치유되듯이 우리의 마음에 힘이 생기고, 상처가 아물고, 치유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혹시 마음에 어려운 분이 계시다면, 어떤 대가나 노력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 어떤 수준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일방적인 은혜로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여서 치유 받고 자유 함을 누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처럼 일방적인 호의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 일방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는 무얼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대가와 노력을 요구하지 아니하시니까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하시지 그냥 있으면 되는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무얼 해야 되는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을 해야 한다. 오늘 설교 제목에 나오는 이 반응이라는 단어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네 집은 무슨 집이라고 하는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그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는 그 사랑에, 하나님의 사랑에 기도라는 제목으로 반응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14절에 맹인과 저는 자들이 치유받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만들어 내지 않았지만 치유하시는 예수님께서 무얼 했다고 했는가? 나아오는 반응을 한 것이다. 그때 고쳐주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한 노력이나 대가를 만들지는 않지만, 이미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과 교제하는 반응은 해야 된다. 리엑션을 해야 된다. 그래서 ‘브라아언 채플’이란 신학자는 그의 책 ‘성화에 은혜’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기 같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이미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은혜의 시간을 통해 그와 같은 사랑을 좀 더 풍요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은혜의 수단이란 이미 온전히 베풀어진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그저 경험하는 수단일 뿐이다. - 브라이언 채프의 “성화의 은혜” 중에서 -
-은혜의 수단은 하나님의 사랑을 만드는 게 아니고 대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인정받을 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어떤 행위가 아니라, 이미 무한하게 베푸는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한 반응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기가 주변이 있지만 무얼 해야지 내 것이 되는가? 호흡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중에 유일하게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영원히 함께 사랑의 교제를 주님께서 우리와 나누시기를 원하신다. 이 반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반응하며 교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은혜 충만히 받으면 기도가 되고, 뭔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괴로운 일이 생기면 또 느슨해졌다가 하는 게 우리의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기도는 노동이다.’ 라고 하는 자들도 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지속적인 반응해 나가기가 한 결 같이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나님과 한 결 같은 마음으로 그 만남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그 만남이 더 깊어지기 위해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만남이 즐겁고 행복하면 된다. 어떤 의무감으로 만나는 것은 지속적인 것이 쉽지가 않고 그 관계가 언젠가는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무엇이든지 행복해야 오래간다.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우면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 그 만남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서로 사랑하면 된다. 사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그리고 이 주님과의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이 기도와 함께 무엇이 병행되어야 하는가 하면, 말씀이 병행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원천적으로 죄 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죄 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고, 심지어는 두려운 대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원래부터 처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자리에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되고 마치 차가운 벽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제가 이제 제자훈련과 사역 훈련을 하는데, 훈련을 하면 첫 시간에 훈련생들에게 꼭 하는 질문이 있다. 무슨 질문이냐면, 집사님께 하나님은 어떤 이미지로 다가오는가? 라고 묻는다. 그랬더니 다양한 대답을 한다. 예전에 어떤 집사님이 뭐라고 하냐면, ‘교장 선생님과 같다.’라고 한 성도님도 있다. 교장선생님이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교장 선생님을 정말 친밀하게 느끼기는 쉽지가 않았다. 걷다가 교장 선생님이 가까이 오시면 일부러 옆으로 싹 돌아가기도 하고, 그랬던 경험도 있었던 것인데 그만큼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경외 분이긴 한데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표현을 그 성도님은 표현을 그렇게 했다. 그런데 이분이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거듭하면서 말씀을 나누고 매일 과제로 인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찐한 사랑을 느끼게 되고 주님과의 시간에 기도로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훈련 말미에는 뭐라고 했나면 결국 하나님은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로 느껴진다고 이 고백을 했다. 이처럼 말씀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주님을 알아갈 때, 죄로 인해 어그러졌던 하나님에 관한 내 안에 이미지가 올바로 정립이 된다.
 
그리고 오늘도 말씀을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었는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우리 마음에 젖어 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과 연결 되냐면 연이어서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고 기도가 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고 가장 행복하고 우선순위의 시간으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이다. 마치 연애할 때, 이제 막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는데 또 상대방이 보고 싶어서 전화기를 붙들고 밤새 통화하는 것처럼 이다 그때가 떠오르는가? 이처럼 말씀으로 주님을 알아가는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의무를 넘어서 사모함과 자원함으로 항상 주님의 만나는 자리에 있게 되고, 그것은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는 자를 주님께서 기뻐하셔서 그와 깊이 연합하시고, 그 모든 연약함을 치유하시고, 더 나아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복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과 행위로까지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사랑의 풍요로움을 누리시며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우리 교회는 부흥. 헌신 토요비전 새벽예배와 앞으로 다가올 가을 특별 새벽부흥회예배와 같은 주님의 사랑을 마음껏 반응하며 행복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이 은혜의 자리,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는 최고의 이 자리를 놓치지 말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서 믿음 보고를 통해 주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이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에게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듯이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시고 한 결 같음에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이 은혜의 자리에서 그 하나님의 자리에서 반응하는 최고의 이 자리를 놓치지 말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 보고를 통해 함께 동행 하여서 그 사랑에 반응하며 주님의 사랑의 손길에 반응해서 언제나 변함없이 주님께 헌신하기를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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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2년 10월 16일)
제목: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라"
말씀: 출애굽기 40:34~38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오소협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박헌성 목사님(나성열린문교회)-초빙
ㅡㅡㅡㅡ
 
*출애굽기 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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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성 목사님(미국 나성열린문교회)-초빙
-할렐루야!! 여러분의 교회, 찬양대를 비롯해서 여러분의 예배, 최고이다.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줄로 믿는다. 세계적인 양대 시사 잡지를 한다면 타임지, 뉴스위크지가 있다. 두 잡지는 그 논조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타임지는 항상 사람중심, 인물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뉴스위크지는 사건중심으로 기록한다. 역사의 흐름을 해석할 때에 타임지는 인물을 잘 분석하면 인류의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뉴스위크지는 사건을 잘 분석하면 오늘 우리에게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도 여러 인물과 여러 사건이 등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속할 만큼 인간, 우리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사람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 번 밖에 사는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구상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넓은 의미로는 그의 역사를 시작으로 해서 저 예루살렘 교회로, 천국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다 교회 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중요한 곳이 없다. 교회는 우리들의 삶의 중심이다. 교회는 우리들의 상황 시와 같다. 하나의 해드쿼터(Headquarter) 가 된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관리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자녀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모든 축복의 근원이 교회이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문제가 성막에서, 교회에서 결정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 성공하고 잘 되고 부자 되고 돈 잘 벌고 다 교회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교회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로 믿는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 그때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음으로 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인간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인간들은 불쌍한 인간들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간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창세기가 다 지나갔다. 출애굽기도 다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오늘 본문에 와서 떠났던 그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하나님의 영광이 최초 에덴동산보다 더 컸다고 말씀한다. 할렐루야! 누가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인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성막,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성막을 세우라.”고 명령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체적으로 지성소를 만들고, 성소를 만들었다. 말씀대로 성막을 세웠더니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 영광이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을 대면하고 모세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 삶의 최고의 사명은 영광이 충만한 교회 세우는 일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인간들은 고통과 고생, 죄 아래서 별 볼일 없이 살았다. 그런데 교회, 성막을 세운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져서 인생이 행복하고 은혜와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에 순종해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워야 될 줄로 믿는다. 예배시간 구별하고 장소를 구별하고 내 몸을 구별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절제해야 한다. 세상 욕심, 적당히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숨 걸고 헌신하겠다고 믿음의 결심을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에 나와서 주님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교회 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 속지 말라. 세상이 아니다. 교회이다. 믿으면 아멘!
 
신학에서 ‘현존의 신학이다.’라는 말이 있다. ‘Theology of process.’라는 것은 목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환자가 옆에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의미로 이 교회에 오늘 이 시간 나와 있는지는 몰라도 여기에 앉아만 있어도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는 나와야 된다. 일찍이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가 어디인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이다. 교회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는 ‘헤쎄드’, 은혜, 은혜의 보좌, 은혜의 보좌가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 은혜의 보좌가 있는 교회가고 싶어 했다. 하나님을 늘 그리워했다. 야곱도 130년 인생을 살고 난 이후에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좋사오니”, 했다. 할렐루야! 그렇다. 교회는 인생의 필요한 모든 보물이 다 들어있다.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가? 교회에 나오는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워하는 행복, 하나님의 교회에 머무는 행복,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봉사하는 행복, 그것이 최고인 것이다. 이 교회 안에는 각양 은사, 보물이 다 들어있다. 돈과 성공도 다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교회를 나오면 우리는 최고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여기 성막을 세우다가 신약에 와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거하심에 말과 같다. 다시 말해서 성막의 중심, 교회의 중심이 뭐냐면, 예수님이다. 영광이 충만한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는 줄로 믿는다. 할렐루야!! 그 당시 역사를 보면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때이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이 칼을 가지고 있고 창을 가지고 있고, 병패를 가지고 있고, 병거가 있었다. 요즘 말하면 신예무기, 핵무기, 뭐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는 막대기 돌칼, 돌도끼, 그런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될 것이라.” 그렇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빼앗는 땅이 아니다. 싸움에서 얻는 땅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냥 주셔야 하는 땅이다. 가나안 땅에서 싸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 들고 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 교회에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 된다고 했다. 할렐루야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오늘 무얼 먹어야 하고 오늘 어디로 가야 하나요?” 라고 하나님께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에서 성막에서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아니야, 이 세상 살아가려면 ‘칼이 필요해, 창이 필요해, 병거가 필요해, 돈이 필요해, 아니야 그리고 세상 살려면 스팩들이 필요해’ 라고 한다.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잘 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어떻게 세우는가?
 
I. 첫째는 목회자가 보여 지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교회는 목회자가 잘 보여야 한다. 목사님의 설교가 잘 들려야 된다. 그래야 영광이 충만한 교회가 되는 줄 믿는다. 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일곱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는 말세는 이 지상에 있는 상징이나 비유라고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서대로 점검하시는데, 일곱 교회에 나타나는 주님의 교훈은 다 다르다. 권면도 다 다르다. 책망도 다르다. 칭찬도 다르다. 그런데 이 일곱 교회에 세 가지가 똑 같은 것이 있다.
 
첫째, 그 하나는 “귀 있는 자들은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라.”
둘째, “이기는 자에게는 면류관, 상을 주시리라.”
셋째,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서머나 교회는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그렇다. 이 지상의 모든 인간들은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의 주관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된다. 받아야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님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교회든지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는 지상의 교회는 없다. 말씀하실 때는 대언을 통하여 그 교회는 사자에게 말씀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그 교회는 목회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말세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선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느냐? 주의 종의 말을 잘 듣고 해라. 이다. 설교시간만 되면 졸고 있는 권사님이 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1세대들은 다 죽었다. 그리고 세컨 제너레이션들이 이제는 후손들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아야 되고 하나님 잘 믿고 복 받고 은혜의 삶을 살아야 되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 말씀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영혼의 절규로 설교한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지켜 행하라.” 한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복 받고 잘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이 네 인생을 책임져 주고 필요를 따라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목사님을 통하여 나에게 필요한 은혜도 주시고, 복도 주실 줄로 믿는다. 교회를 에클래시아 라고 한다. 역동적 단어이다. 일종의 특공대라는 말이다. 교회는 우리 것이 아니다.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주의 종의 말씀을 잘 듣고 특공대처럼 똘똘 뭉쳐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만들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의 종,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이 성경에 집착해야 된다. 믿으면 아멘이다.
 
그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모세의 명령대로 모든 역사를 감당해야 된다. 그래서 교회를 세울 때,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냐? 당회장 목사님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강사로 세워주었더니 당회장 잘하라고 치켜세워 올린다.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니다. 저는 조국을 떠난 지 43년째이다. 바깥은 한국 사람이지만, 속은 다 웨스턴 스타일로 변하였다. 그런 거 할 줄 모른다.
 
리더쉽 전문가 쟌 맥스웰이 쓴 ‘Thinking for a Change-생각의 법칙)’ 책을 보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려면 패러다임, 생각이 바꾸어야 된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오해하지 말고 선입견 갖지 말아라.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바꾸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먼저 생각을 바꾸어라. 그렇다. 목사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오늘부터 순종하며 살아야지, ‘우리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제일 훌륭하신 목사님이시다.’ 항상 1등 의식이 필요하다. 왜? 교회는 신본주의이기 때문에 목사님이 잘 보여야 한다. 그래야 내 신앙의 중심이 잡히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잘 보일 때에 강해지는 것이다. 특별히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들어야 한다. 정신 차리고 들으면 영광이 충만한 교회가 되고 기적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설교를 할 때,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 말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 프로 받아들인다. 정말 너무 잘 듣는다. 그것을 보고 바울이,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났다. 말씀의 능력이다. 할렐루야!!
 
II. 감사하면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
-똑 같은 세상, 똑 같은 인생살이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항상 삐딱하게, 네가티브하게 원망과 불평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세상사는 것은 자유이지만 성도는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특별히 교회 생활은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주보 하나를 보아도 다 감사거리로 봐야 된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한 분이 보스톤에 있는데, 머리가 다 빠졌다. 왜 그러냐고 하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다 빠졌다고 한다. 주일만 되면 장로님이 주보를 들고 와서 “목사님, 여기 글씨가 틀렸네요.” 뭐 주보라는 게 대충 읽으면 되는 것이지,,, 그렇다. 삶과 죽음, 기쁨과 고난, 이상과 현실에 명암과 영역이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오늘까지 살아오게 된 것은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축복인줄로 믿는다.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은 내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영광이 충만한 교회 때문에 산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고달파도 원망하거나, 불평할 것이 아니라, 늘 감사하면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 할렐루야!!
 
어떤 홀어머니가 아들을 키워서 외아들을 키워서 장가를 보냈다. 한 집에 사는데 어느 날 밤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는데 아들 내외가 사는 방 앞을 지나가는데, 안에서 너무 다정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여보, 여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1번이 누구야? 1번이 당신이지, 2번이 누구야? 우리 사랑하는 딸이지, 3번이 누구야? 장모님이지, 그럼 4번은 누구야? 우리 집 강아지지, 5번은 누구야? 나를 낳아주신 우리 어머니지” 라고 했다. 어머니가 밖에서 들으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는 중 마는 둥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편지하나를 썼다. “1번 보아라, 5번은 나간다.”라고 썼다. ㅋㅋㅋ그날 저녁에 거기서 나눈 대화는 수사학적 이야기이다. 부부간에 재미있게 나눈 대화인데 이것을 시어머니가 들으니까 오해가 된 것이다.
 
여러분, 감사하면서 살아가길 바란다.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언제까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 돈 하겠는가? 받은 축복 누리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라. 주일날도 교회 올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와라. 화장도 예쁘게 하라. 좋은 보석이 있으면 하고 나와라. 예수 믿는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굳어지면 안 된다. 익숙해지면 안 된다. 종교 매너리즘에 빠져서 ‘오늘 주일이네, 교회에 가야 되는구나’ 그렇게 나오지 말라. 늘 새롭게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결혼 20주년을 맞이한 어떤 부부가 기념에서 옛날에 데이트 할 때 같이 아주 고급 레스토랑을 갔다. 대게 그런 곳에 가면 여자들은 소녀가 된다. 자기가 아이를 몇을 낳아 주부로 20년 산 것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좋아서 난리이다. 그 때에 클래식 음악이 쫙 흘러나오면 더 정신을 못 차리고, “여보 여보, 이곡이 무슨 곡이지?” 하니까 앞에서 정신없이 칼질 하면서 먹던 남편이 “이 고기가 소등심이지”라고 한다.
 
구원 받은 성도는 교회가 있어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감사해야 되고 교회 때문에 인생을 즐기라. 교회 때문에 행복 하라. 교회 때문에 기뻐하며 감사하라. 쓸데없이 오해하지 말고, 쓸데없이 시비하지 말고, 할렐루야, 어떤 분은 그런 이야기도 한다. “나 죽으면 시집 갈 거야?” 여러분, 그런 질문을 주고받는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죽으면 산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는가? 안 가면 안 가는 거고, 안 간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간다고 해서 섭섭해 할 것도 없다. Anyway, 감사하면서 교회 세우면, 성공, 실패 다 뛰어 넘을 수 있다. 여러분, 제가 설교하면서 제가 웃기니까, 웃는 분도 있고 안 웃는 분도 있다. 웃음이란 내가 건강한 사람이 잘 웃을 수 있고 잘 울 수 있다.
 
1965년도에 프랑스에 폴 브로커 라는 학자가 우리 뇌가 좌 뇌와 우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좌 뇌, 우뇌가 좌 뇌는 합리적, 논리적, 지성적, 우뇌는 감성적, 예술적, 그런 것을 컨츄럴 한다. 이것이 두 개가 다 건강해서 작동을 해야 웃을 줄도 알고, 울 줄도 안다. 병든 사람, 인생이 너무 힘든 사람은 이것이 잘 안 된다. 요즘 과학자들이 바이돌핀이라는 유명한 호르몬을 발견했다. 그것이 엔돌핀보다는 4천배 강하다고 한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이 바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이 언제 생기냐면 영적으로 기뻐할 때, 이렇게 은혜로운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이러면서 내 영혼이 기뻐 춤출 때, 그때 막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나면 어떤 일이 생겨나느냐 면은 막 암세포를 막 죽인다. 우리 몸 안에서 여러 가지 바이러스가 죽어나간다. 영적으로 살아야 된다. 잘못도 실수도 감사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잘못할 수도 있는 것인데,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냥 잊어버려야 한다. 사람이 실수 안 하면 좋지만 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아브라함, 베드로 바울도 다 실수를 했지만 다 겸손해지고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았다. 이민 교회는 결혼을 네 번을 한 사람도 있다. 다섯 번째 나에게 주례를 맡긴 자도 있는데 네 번까지는 해봤지만 다섯 번째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냥 살아라, 어차피 헤어질 것인데”라고 했다.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라고 했다.
 
감사로 교회를 세우면, 우리의 모든 병든 영역이 치유 받는다. 감사로 교회를 세우면 기적이 일어난다. 감사로 교회를 세우면, 사랑이 있다. 감사로 교회를 세우라. 기쁨과 신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워야 할 줄로 믿는다.
 
III. 믿음으로 교회를 세워야 한다.
“구름이 성막위로 떠오를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서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오늘까지 살아온 경험이 중요하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번 것,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 받은 것,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 뭐 이런 것 다 귀하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그것이 비록 실패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일 소중하다. 우리 인생은 공짜로 된 것은 없다. 그만한 값을 지불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살아온 경험이 중요한데, 내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한 번, 믿음으로 교회 세워보자. 믿음으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면, 우리의 미래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증명할 수 있는 것과 증명할 수 없는 것 사이에는 갭이 있다. 지식과 신비에서 갭이 있다. 물질세계, 영적세계 다 갭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무엇으로 뛰어넘는가? 믿음으로 뛰어넘는다. 불교의 성철 스님이 서울대학병원에서 죽으면서 제자들이 찾아가서 “선생님, 한 말씀해주세요.” 하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대한민국 지성인들을 강타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된다. 그분이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은 자기가 40년 넘게 도를 닦아도 믿는 사람이 없더라. 라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이다. 를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벌써 2천 년 전에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모른다. 죄와 용서, 삶과 죽음의 세계, 시간과 영원의 세계는 다 갭이 있다. 그것도 우리가 믿음으로 다 뛰어넘어 야 된다. 과학은 경험 안에 있지만 믿음은 경험 밖에 있다. 믿을 수 있는 것, 믿는 것 과학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것, 믿는 것, 믿음이다.
 
※제가 특새를 할 때에 목사님들이 한 네 명이 돌아가면서 집회를 하는데 작년에 1월에 토론토에 있는 이형광 목사님이란 분을 초청을 했다. 그런데 이분이 깡패 김태촌 밑에서 부두목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이 되어 와 있는데 우리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그때만 해도 캐나다나 미국도 이 코로나 때문에 힘들 때이다. 조사도 많고, 검사도 많고, 이럴 때, 비행기를 타러 가려고 검사를 했더니 이 파시티브가 나온 것이다. 큰일 났네!! 제가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강사가 왔다가 가야될 때, 가야된다. 안 가고 있으면 내가 힘들게 된다. ㅋㅋㅋ다른 사람 오는데, 다른 강사를 또 데리고 와야 되는데 이게 힘들다. 그래서 “하나님, 이게 뭡니까? 코로나가 무엇인데 우리 집회를 방해합니까?” 했다 그런데 머리가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권사님 한 분이 나에게 우황청심환을 하나 주셨다. 그 청심환을 들고 안수를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우리 사무실에 전도사님을 시켜서 “가서 내가 이렇게 말을 해라. 우황청심환을 먹고 가서 조사해서 비행기를 타라고 해라. 했다. 그런데 오늘 파시티브(positive)가 나왔는데 오늘 해보니 네가티브(negative)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캐나다에 들어갔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은 단순해야 된다. 처녀의 몸에서 아이를 낳게 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곤두박질치던 닛산을 일본의 최고의 경영자로 말하는 카를로스 본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아마추어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프로는 문제를 쉽게 단순화 시킨다.” -카를로스 회장-
-아마추어와 프로의 결정적 차이는 단순화의 능력이다. 볼링 칠 때, 공의 핀을 다 쓰러뜨리면 스트라이크라고 하는데, 그 스트라이크를 치려면, 제일 앞에 있는 1번 핀을 잘 보아야 한다. 그래서 1번 핀을 킹 핀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벌목공들이 나무를 베어서 냇가를 통해서 운반을 하다보면 어느 지점에 오면, 걸려가지고 못 내려갈 때가 있다. 그런데 그 걸리기 나무 하나가 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프로페셔널’이라고 한다. 그것을 킹 핀이라고 한다. 그것을 뽑아내면 저절로 잘 내려간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순하신 하나님이시다.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해야 된다. 복잡하면 능력이 없다.
 
장로님 가정에 며느리를 봤는데 불임이다. 아기를 못 낳는다. 좋은 것을 다 먹여도 안 된다. 항상 성도들도 안 되면 나중에 목사님께 안수 받으러 온다. 그런데 며느리를 데리고 우리 아이를 낳아야 된다고 안수를 받으러 왔다. 후손을 얻고자 기도를 받으러 왔다. 목사님이 둘을 앉혀놓고, 한 손은 권사님 머리위에 한 손은 며느리 머리에 올려놓고 “태의 문을 열어주세요. 장로님 가정이 번창 하게 하세요.”라고 막 열심히 기도했다. 이 며느리는 신앙이 없어서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아멘, 아멘 했다. 나중에 누가 임신을 했는가? ㅋㅋㅋ 믿음으로 교회를 세운다. 이게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찬양대도 하고 교사도 하고 봉사 차량 주차 다 하는 것이 열심히 믿음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다. 정말 그것도 이것도 못하는 사람은 돈이라도 내놓고 가라. 왜냐하면 리스펀스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 이 교회 안에 오면 전파가 수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안에도 모든 것이 들어와서 있는 것처럼, 연결한 것만 나온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은혜와 복을 받으려면,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연결된 것이 무언가 있어야 한다. ‘위너의 팩트’ 라는 말이 있다. 승자효과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면 제일 힘 센 놈이 암컷을 차지한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중간 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힘을 키우는 것이다. 힘을 키워서 나중에 어느 때가 되면 제일 강한 놈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게 승자의 효과이다. 믿음의 능력은 계속 반복을 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할 때, 승리를 맛볼 수 있다. 왜 우리가 잘 안 되느냐? 승자의 효과를 몰라서이다. 그러니까 낙심하고 좌절하고 힘들어 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 때, 승자의 효과를 자주 경험해야 된다. 그것이 상식이 되게 한다. 상식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으로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는다. 믿음으로 교회 세우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믿으면 아멘!! His part, Our part, 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은 구별되어야 된다. 내가 먼저 믿음으로 살아야 일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지, 말씀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지, 이렇게 말로 선포하면 이미 시험 없고 실패 없다. 고민과 갈등이 없다. 무조건 내가 믿음으로 살아야지, 불가능한 일 없다. 무조건 교회가 먼저이다. 하면 하나님이 내 일을 해주신다. 무조건 나는 십일조를 드린다. 재물의 시험이 없다. 축복 받는다. 무조건 나는 새벽 기도이다. 기적이 일어난다. 꿈이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님이 보여 지고 감사하면서 교회 세우고, 믿음으로 영광이 충만한 교회 세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에서 목사님의 말씀 속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은혜를 받아서 그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어떤 실패도 뛰어넘는 믿음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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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2년 10월 16일)
제목: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라"
말씀: 출애굽기 40:34~38
대표기도: 오소협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박헌성 목사님(나성열린문교회)-초빙
ㅡㅡㅡㅡ
 
*출애굽기 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

  
▶박헌성 목사님(미국 나성열린문교회)-초빙
-할렐루야!! 여러분의 교회, 찬양대를 비롯해서 여러분의 예배, 최고이다.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줄로 믿는다. 세계적인 양대 시사 잡지를 한다면 타임지, 뉴스위크지가 있다. 두 잡지는 그 논조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타임지는 항상 사람중심, 인물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뉴스위크지는 사건중심으로 기록한다. 역사의 흐름을 해석할 때에 타임지는 인물을 잘 분석하면 인류의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뉴스위크지는 사건을 잘 분석하면 오늘 우리에게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도 여러 인물과 여러 사건이 등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속할 만큼 인간, 우리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사람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 번 밖에 사는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구상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넓은 의미로는 그의 역사를 시작으로 해서 저 예루살렘 교회로, 천국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다 교회 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중요한 곳이 없다. 교회는 우리들의 삶의 중심이다. 교회는 우리들의 상황 시와 같다. 하나의 해드쿼터(Headquarter) 가 된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관리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자녀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모든 축복의 근원이 교회이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문제가 성막에서, 교회에서 결정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 성공하고 잘 되고 부자 되고 돈 잘 벌고 다 교회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교회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로 믿는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 그때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음으로 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인간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인간들은 불쌍한 인간들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간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창세기가 다 지나갔다. 출애굽기도 다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오늘 본문에 와서 떠났던 그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하나님의 영광이 최초 에덴동산보다 더 컸다고 말씀한다. 할렐루야! 누가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인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성막,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성막을 세우라.”고 명령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체적으로 지성소를 만들고, 성소를 만들었다. 말씀대로 성막을 세웠더니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 영광이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을 대면하고 모세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 삶의 최고의 사명은 영광이 충만한 교회 세우는 일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인간들은 고통과 고생, 죄 아래서 별 볼일 없이 살았다. 그런데 교회, 성막을 세운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져서 인생이 행복하고 은혜와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에 순종해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워야 될 줄로 믿는다. 예배시간 구별하고 장소를 구별하고 내 몸을 구별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절제해야 한다. 세상 욕심, 적당히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숨 걸고 헌신하겠다고 믿음의 결심을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에 나와서 주님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교회 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 속지 말라. 세상이 아니다. 교회이다. 믿으면 아멘!
 
신학에서 ‘현존의 신학이다.’라는 말이 있다. ‘Theology of process.’라는 것은 목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환자가 옆에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의미로 이 교회에 오늘 이 시간 나와 있는지는 몰라도 여기에 앉아만 있어도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는 나와야 된다. 일찍이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가 어디인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이다. 교회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는 ‘헤쎄드’, 은혜, 은혜의 보좌, 은혜의 보좌가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 은혜의 보좌가 있는 교회가고 싶어 했다. 하나님을 늘 그리워했다. 야곱도 130년 인생을 살고 난 이후에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좋사오니”, 했다. 할렐루야! 그렇다. 교회는 인생의 필요한 모든 보물이 다 들어있다.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가? 교회에 나오는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워하는 행복, 하나님의 교회에 머무는 행복,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봉사하는 행복, 그것이 최고인 것이다. 이 교회 안에는 각양 은사, 보물이 다 들어있다. 돈과 성공도 다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교회를 나오면 우리는 최고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여기 성막을 세우다가 신약에 와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거하심에 말과 같다. 다시 말해서 성막의 중심, 교회의 중심이 뭐냐면, 예수님이다. 영광이 충만한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는 줄로 믿는다. 할렐루야!! 그 당시 역사를 보면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때이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이 칼을 가지고 있고 창을 가지고 있고, 병패를 가지고 있고, 병거가 있었다. 요즘 말하면 신예무기, 핵무기, 뭐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는 막대기 돌칼, 돌도끼, 그런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될 것이라.” 그렇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빼앗는 땅이 아니다. 싸움에서 얻는 땅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냥 주셔야 하는 땅이다. 가나안 땅에서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 들고 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 교회에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 된다고 했다. 할렐루야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오늘 무얼 먹어야 하고 오늘 어디로 가야 하나요?” 라고 하나님께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에서 성막에서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아니야, 이 세상 살아가려면 ‘칼이 필요해, 창이 필요해, 병거가 필요해, 돈이 필요해, 아니야 세상 살려면 스팩들이 필요해’ 라고 한다.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잘 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어떻게 세우는가?
 
I. 첫째는 목회자가 보여 지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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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0월 12일)
제목: "그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말씀: 요한복음 21:15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박단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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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5,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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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의 삶에 큰 울림을 주는 만남이 있다. 모든 만남이 그렇지는 못하겠지만 특별한 감동,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그런 만남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스승의 만남의 때 일수도 있고, 마음이 딱 맞는 친구 혹은 동역 자를 만날 때, 배우자를 만날 때 일수도 있다. 이러한 만남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다. 기존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에 있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만남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아마도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하고 그 만남의 기쁨과 감사로 인해 오늘까지 살아왔으리라 생각한다. 성경에는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의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 중 누가복음 19장에는 자신의 민족을 수탈하고 살아갔던 한 세리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 당시 지중해 패권을 쥐고 있던 강력한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드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확충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배한 국가에 무거운 세금을 부여하고 그것을 거두어 들였다. 이러한 세금 부여는 이웃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속 정부와 우상숭배에 사용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세금을 내었기에 그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맡은 세리들은 그들에게 원망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세리들 자신들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매국노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으며 로마제국이 책정한 세금 이상으로 거둬들여 남는 이익을 가져가는 세리들을 향해 유대인들은 창녀와 함께 가장 천한 죄인 취급을 하였다. 그런 세리들의 우두머리였던 삭개오는 비록 부유한 삶을 살았지만, 그 마음에 진정한 행복과 평안이 없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여리고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삭개오는 이전부터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의 삶에 대한 근심, 유대인이지만 유대인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세리들 중에 세리, 세리 장이었던 삭개오는 세상을 구원할 만한 선지자로 알려진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길 원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살고 있는 여리고로 오셨을 때 삭개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여 만나고자 했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았고 잘 알려진 것처럼 삭개오 키가 매우 작았기에 예수님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로 알려진 돌 무화과 나무에 올라갔다.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가 선택했던 방법이었지만 그것으로 그이 궁금증은 온전히 해결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보면,
 
*누가복음 19:5,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 이 부르심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를 원했던 삭개오에게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그 어떤 유대인 지도자도 어떠한 일반백성도 삭개오의 집에 오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삭개오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한다.
 
*누가복음 19:6,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그분께 나아온다. 그렇게 삭개오는 자신의 깊은 갈증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모두가 꺼려하는 죄인 중에 죄인인 세리장, 삭개오 집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수근 거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9:10,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때때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통해 어떠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삭개오가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각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우리 삶에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 각자의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감으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그 앞에 나아갈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님들의 삶에도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반문이 있었는가? 여러분 각자에게 어떠한 뚜렷한 사건이 있었는지 저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제가 확신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를 부르신 그 사건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우리 생각이 바뀌고, 우리 행동이 변화되었을 것이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어떤 존재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너무나 중요하다. 또한 내가 힘들 때 나를 위로하시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그분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딱 거기까지만 한정짓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 분,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 분, 딱 여기까지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으로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과 같이 너무도 크고 위대하시고 아무것도 필요가 없으실 것 같은 그 하나님께서 세상에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신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신명기 6장 4절과 5절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신명기 6:4-5,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출 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하나님은 지도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해 주신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출애굽의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며, 자기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놀라운 역사였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나 강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시는지 홍해사건 직후에 모세는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출애굽기 15:11,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이렇게 강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마음과 뜻과 힘들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세상이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지키시고, 필요를 채우시는 것으로 멈추시지 않으시고, 우리와 더 깊고 우리와 더 특별한 관계를 맺기 우해 원하시는데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가? 많은 경우에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너무 당연한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색하게 느낄 때가 많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으로 나를 건지시고 나의 삶에 자리에 찾아오셔서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날마다 은혜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도 너무나 감사하지만 우리 믿음 생활에 있어서 정말 감사할 수 있고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한 낮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그 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여러분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시선은 그 대상을 향하게 된다. 아주 옛날로 돌아가서 여러분의 학창시절이나 대학시절을 생각해 보라. 누군가 맘에 든 이성이 있다면 나도 모르게 계속 그 친구를 바라보게 된다. 계속 눈길이 가게 되고 관심이 가게 된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몰라도 옆에 친구가 자꾸 이야기한다. “너는 왜 자꾸 그 애를 보냐?” 무슨 의미인가? 그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한다. ‘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할까? 무슨 취미를 가졌을까?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그 대상에 대한 생각으로 여러분의 머릿속에 가득 찼던 그 순간이 기억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내 시선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잠자리에 들 때나, 아침에 새로운 날을 맞이할 때, 하나님 생각으로 두근두근 하고 그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대한 깊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더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했던 적이 있는가? 하나님과 더 깊이 있게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깊은 자리에 더 나아가 그 때 느꼈던 감격과 기쁨을 경험했던 적이 있는가? 찬송가315장(512장), 내 주 되신 주, 참 사랑하고 나는 찬송가가 있다.
 
*찬송가315장(512장)
1.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2.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3.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4.큰 영광의 구주 날 사랑하사
그 풍성한 은혜 더 하시리니
금 면류관 쓰고 늘 찬송할 말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믿음의 고백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1-4절까지를 보면, 공통된 가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를 그런 아름다운 찬양의 고백이다. 저는 여러분이 살아가는 날 동안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기도할 떼 작년보다 올해가 더 사랑하며 지난달보다 이번 달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지난주보다, 이번 주, 어제보다 오늘, 오늘 아침 일어날 때보다 오늘밤 잠자리에 들 때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라는 기도의 제목이 우리 모두의 기도의 제목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 큰 변화가 따라오게 된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처음에는 단순한 관심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우리의 마음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어 지게 된다.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대상에게 아무것도 해주고 싶은 것이 없다면 정말로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 같다. 마찬가지로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삶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할지라도 때론 그 가운데 눈물과 감격이 있다할지라도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해서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전환이 없다는 것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는 부족할 것 같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지 우리 각자가 확인해 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나는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데에 나 또한 관심을 갖고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 마음이 설레 본적이 없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고, 그 가운데 주시는 감사함이 너무나 가득해서,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원하고, 하나님의 관심 있는 곳에 내 관심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지를 원하는 방법은 이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가?.
*갈라디아서 1:10,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초점을 맞출 때가 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과연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자신에게 가장 따랐던 제자 베드로와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한복음 21:15,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또한 택한 백성들, 아직까지 하나님을 잘 잊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또한 그들을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시키는데 우리가 함께 하는데 원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 때로는 순장님이면 순원 들일 수도 있고, 우리가 또 주일학교 교사라면 우리들에게 맡겨준 학생들일 수도 있고, 나에게 맡겨진 조원들일 수도 있고, 그 영혼들이 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나의 동역 자들일 수도 있고 직장에서 나보다 더 하급 자일수도 있고 그런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 하나님이 자녀들이 실족하고 시험 들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우리가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누군가를 상처주고 그들을 낙심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인 것 같다.
 
어떤 때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여 모든 일에 너그러워지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지만 조금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뎌지거나 멀어져도 우리의 마음이 금새 날카로워져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런 연약함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남아있지 않는가? 그것은 또한 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저 스스로도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지만 여전히 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하고, 또 잘 되는 사람들을 시기(猜忌) 질투(嫉妬)하고 또한 더욱더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주고 그들을 낙심케 하는 제 자신을 볼 때마다 작은 괴로움이 저에게 있다.
 
아주 예전에 저는 스스로 연약함으로 인해 마음에 큰 눌림이 있던 어느 날 우리가 방금 나누었던 이 찬송가의 ‘내 주 되신 주’의 가사를 깊이 묵상했던 적이 있다. 가사를 하나하나 되새기며,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라는 구절을 보자 나는 참 부족하지만 언젠가 더욱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내 삶이 좀더 거룩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구절을 가지고 이 찬송가를 묵상했는데 그러던 중에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서 이 가사의 원곡에 대해서 어떤 내용인가를 찾아보게 되었다. 찬송가로 되어 있고 여러 가지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제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의 원 가사를 한 번 의역해 보았다. 그것을 해석해 보며 이렇다. ‘만약 나의 예수님을 가장 했던 사랑했던 순간이 언제인가?’ 라면 ‘그것은 바로 지금입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사실 그전까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라는 구절이 막연한 어떤 미래를 이야기 한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부족하지만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나에게 있다면 거기를 걸어간다면 어느 순간에는 그래도 내가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 내가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찬송 시는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내 삶의 어떤 순간보다도 ‘내 현재의 삶에 지금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미래의 어느 순간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나 연약한 그 모든 상황들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그 연약함 들을 이겨내고자 애써야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가사, 이 찬송가의 가사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어려움과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제가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할 때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정답으로 돌아와야 되는데, 그 정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 지난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위한 강단 기도회, 한 달 동안 진행되는 그 기도회 가운데 큰 은혜가 있었다. 한 달 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몸 된 한국교회들을 섬기기 위해 우리가 기도회의 자리로 나아갈 때에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잠시 뒤로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기도제목을 우리의 삶에 우선순위에 놓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우리는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일이 그렇게 기도한 이후에 우리가 정말 섬김을 마친 이후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문제 또한 순리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들려지고 해결되는 것을 경험했다. 제 개인적으로도 몇 달간 고민하고 준비하던 일들이 잘 해결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중에 강단 기도회가 지나고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 지난 며칠 뒤에 그 일들이 차례차례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우리의 삶에 많은 순간 가운데 하나님을 날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줄 믿는다. 이중에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던 분들이 있을 것이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기쁨이 충만했던 그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여러분은 어떠한가? 현재는 그 설레었던 그 하나님의 대한 그 사랑을 사랑이 약간은 퇴색된 채, 과거의 하나님과의 좋았던 때만을 기억하며 언젠가는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의 삶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가?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가? 바로 지금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므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 자리에 나오신 귀한 주님의 자녀들인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가? 지금까지 여러분의 신앙의 그 모든 여정 가운데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 나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나에게 필요하시는 그 하나님, 그 분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 그 순간이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요약
은혜의 자리로 나오게 하심에 감사하며 연약한 피조물이자 죄인 된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심에 감사와 영광 돌리며,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의 삶을 올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납하기보다는 힘으로 억누르려는 우리가 매 순간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순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삶의 자리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갈 때에 성령 충만을 허락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덕을 세우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함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를 지켜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는 믿음 보고를 올려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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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기도회(주후 10월 8일)-부흥토요비전새벽예배
제목: “7,000 기도용사의 지팡이‘
말씀: 출애굽기 17:8-16
대표기도: 홍진기 부목사님(목양9팀, 영상사역담당)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제자반, 사역훈련생
말씀읽기: 김미경 자매(청년N국), 김준영 형제(대학4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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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7:8-16,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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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 기도용사의 지팡이‘
-영광스런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심에 찬양한다. 찬양하자!!!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자. 여러분 오늘부터 이제 한국교회 진짜 부흥이 보이고 각 교회마다 다시 부흥이 왔을 때, 그때 온다는 것을 확인이 될 때까지 토비새는 앞으로 부흥 헌신 토비새가 될 것이다. 부흥, 헌신 토비새가 되어야 한다. 진짜 은혜는 헌신할 때 받는 것이다. 오늘 보니까 자매들만 나오셨는데 남자 분들 정신 차리자. 오늘 이 시간이 저는 ‘한국교회 9.26 섬김의 날’ 귀한 시간들을 보내고 또 강단 기도를 하고 제가 다 느낀 것, 제 마음에 받은 은혜 중에 하나가 우리 온 성도님들과 함께 정말 주님을 죽기까지 피 흘리기까지, 끝까지 승리하게 해달라고 했다. 정말 은혜는 헌신할 때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 가족이라고 했는데 영 가족, 가족이라는 말은 언제 어느 때, 끝까지 일하는 사람을 가족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우리가 끝까지 죽을때까지 죽기까지 피 흘리기까지 전력투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1970년대 후반, 80년도에 세워져 가지고 그때에 한국교회 앞에 수요일마다 옥 목사님이 ‘Great awake’, ‘전 세계 대각성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셨다. 그리고 그 대각 성 이후에 사랑의교회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각 성 전도 집회’를 시작했다. 그것이 전도 집회와 새 생명 축제와 많은 한국교회의 이런 일 년 동안 제대로 준비하고 이렇게 부활을 품은 생명, 대 각성을 통해 추수하자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대각 성 전도 집회’가 시작되었다.
 
오늘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또 주일마다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아니 회복도 쉽지 않은데, 무슨 부흥이냐고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흥, 헌신, 토비새를 통하여 앞으로 가을 사역과 주일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부흥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부흥에 대한 기도와 말씀과 능력을 우리의 삶으로 그대로 체화화 함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사실은 우리가 코로나의 지난한 어려움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우리가 마음속에 다시 한 번 각오하고 깨닫고 은혜 받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진짜 기도를 함께 모여서 하는 것이 소중하구나!, 자유롭게 예배드리는 것이 소중하구나!, 마음껏 성도들이 모여가지고 영적 교제하는 것이 소중하구나!, 우리가 함께 모여 말씀으로 훈련 받는 것이 너무나 귀하구나! 사역의 본질과 핵심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정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정말 집중해서 우선순위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그 부흥의 현장에 저와 여러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특새 하면서 한 번씩 이야기하지만은 여러분과 제가 없을 때 부흥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부흥에 대해서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고, 주님 앞에 부흥의 불쏘시개가 될 때에 하나님은 일하실 것이다. 그럼 부흥의 역사의 키가 무엇인가? 우리가 평양 장대현 교회가 부흥할 때에 이 부흥의 그 장대현(장대재교회) 교회의 그 천정이 구리로 되어 있는데 구리가 울릴 정도로, 교회에서 박명수 교수님 말씀에 천정이 무너질 정도로 그렇게 처음에는 맹숭맹숭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길선주 목사님이 그분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서 애통하고 회개하고 각성하고 그럴 때, 그냥 한국식 스타일로 기도를 하는데 천정이 뚫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토비새 할 때마다 우리가 3천의 기도를 할 것이다. 3천의 기도가 무엇인가? 쓰리 싸우전드가 아니고
 
첫 번째, 삼천의 기도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기도할 것이다.
세 번째는 천국의 물소리처럼 기도할 것이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를 보면 미국 같은 경우를 보면 소위 건초더미라고 운동이라고 해서 사무엘윌즈와 이런 사람들이 20세기 초반에 같이 우리 건초더미에서 6명 정도로 모여가지고 하나님 나라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그 젊은이들이 순수하게 기도했을 때, ‘Haystak Movement’ 라고 건초더미라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거기에 이만 여명의 전 세계 선교사들을 파송할 수 있는 ‘Student volunteer movement’ 라고 자원하는 선교이다. 그 다음에 ‘제레미아 레피어’ 라고 뉴욕에서 또 보스톤에서 정오 될 때마다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제레미아 레피어’ 라고 있는데 남들이 모여가지고 그 정오기도회가 나중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그 은혜를 가지고 대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 이 토비새에 정말 하나님께서 많은 분들을 보내주신 것으로 확신한다. 감사드리고,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아니다. 오늘 들어오면서 깜짝 놀랐다. 미어터져야 하는데 아직이다. 지금부터 미어터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아니다. 여러분들, 새벽 토요일 5시부터 자리가 없어서 난리가 이 자리가 난리가 나야 한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줄로 믿는다. 그래서 오늘 그런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가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재사회 부흥이 일어나는 부흥의 르네상스가 되기를 소원한다. 서로 부흥의 불씨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3천의기도, 청정이 울리는 기도, 천둥의 물소리 같은 기도, 천국의 물소리 같은 기도가 있게 되길 기도한다. 80년 초반에 대각성 전도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한국교회 수많은 분들이 부흥으로 주님 앞에 돌아온 것처럼 돌아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부흥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이 자리부터 시작하여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올려드리겠다. 합심해서 일어나서 3천의 기도를 할 터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자리가 부흥과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는 자리가 되어 주시옵소서. 토비새에 나오는 분들이 이 자리가 기준이 되고 집안이 화평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내 기도의 제목이 새로워지고 그리고 진짜 은혜는 헌신할 때이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끝까지 우리의 사역과 우리의 신앙이 변심이 없이 한결 같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나라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귀를 향한 선제공격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다 함께 주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오늘 기도하는 이 시간, 이 찬송이 우리 강단의 주제가 였다.
 
강단 기도의 주제가이기 때문에 이 찬송을 하자.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무릎 꿇고
우리 구세주 앞에 다 나아가네.
믿음으로 나가면 주가 보살피사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2. 기도하는 이 시간 주가 곁에 오사
인자하신 얼굴로 귀 기울이네.
우리 마음 비우고 주를 의지하면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3.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엎디어서
은밀하게 구할 때 곧 응답받네.
잘못 된 것 아뢰면 측은히 여기사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4. 기도하는 이 시간 주를 의지하고
크신 은혜 구하면 꼭 받으리라
의지하는 마음에 근심 사라지고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삼천의 기도를 할 것이다.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기도할 것이다.
천국의 물소리 같은 기도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부흥, 헌신 토비새를 통하여 한국교회 코로나 이후에 다시 한 번 부흥의 현장을 주실 줄로 믿는다. 오늘 이 말씀으로 기도의 지팡이를 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지팡이를 들게 하여 주시고, 이 시간 뱀 꼬리를 잡게 하여 주시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주님 앞에 백지 수표에 사인을 하게 하시며, 우리 생애 부흥을 체험하고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며, 우리 자녀들도 부흥을 체험하며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고, 주여 부흥의 은혜를 주시옵소서!!~~우리 가정도 결정적인 순간에 와 있사오니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사오니 우리 교회와 우리 가족을 부흥하고 헌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천의 기도를 통하여 큰 은혜 받기를 바란다. 저희가 9.26 한국교회를 하면서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인 줄 알았고, 그것이 바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엄청 주셨고 너무 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주신 줄로 믿는다. 바위를 깨뜨리지 못하면 스크래치라도 내겠다고 목회자님들이 그러하셨다. 막힌 곳이 뜷렸다. 멈춰버린 심장이 다시 뛴다. 그리고 아픈 분들도 몸도 회복되었고 사기충천한 주님의 은혜로 축복한다. 새벽기도가 선제 공경이 되고 이제 부흥, 헌신, 토비새가 선제공격이 될 것이다. 선제공격으로 모세가 이런 뱀 꼬리 잡고 죽을 각오로 잡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지팡이로 만들어 주셨다. 사명의 지팡이로 만들어 주셨다. 은혜를 주신 것이다. 지팡이를 잡았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다. 바로 왕과 대결을 해야 하고 홍해도 갈라야 하고 오늘 읽은 이 전투, 아말렉과의 전투, 아말렉 족속의 공격도 받아야 되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산이 되어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홀은 모세의 손을 바쳐 들고 있다. 오늘 이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의 들고 받혀주지 않고 모세의 지팡이에다 돌을 얹어가지고 있다.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우리는 산에 올라가서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들기를 바란다. 모세처럼, 동시에 모세와 함께 우리가 서로 손을 아론과 홀처럼 기도의 지팡이를 받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두 가지가 겸직해야 한다. 지팡이도 들기도 하고 옆에서 받혀주기도 해야 한다. 오늘 8절에 보면,
 
*출애굽기 17:8,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들어와 가지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시고 마실 것이 없을 때, 목마를 때, 생수를 주시고 만나와 생수의 축복이 있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하나님의 기적이 있는, 그런 시간에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운다. 아말렉이란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을 침략하는 것이다. 이 아말렉은 무언가? 아말렉은 좀 야비한 족속이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한 신명기 25:17-18절까지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신명기 25:17-18,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늘 이 본문을 해석한 것이다. 아말렉이 너에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얼마나 야비한 일이냐면 피곤한데, 뒤로 가서 약한 자들을 쳤다. 못된 하이에나가 물어뜯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25장 19절에 보면,
 
*신명기 25:19,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아말렉을 지상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도말시키기로, 멸절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은 토벌, 멸절하시려고 작정을 하신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아말렉은 무엇인가? 아말렉은 교회가 싸워야 할 영적대적을 통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제일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오는 마귀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적 대적을 통칭하는 것이고, 우리 연약한 부분을 고통을 주고, 연약한 부분을 치는 아주 야비한 것이다.
 
오스 기니스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 가지 물결이 있다. 라고 하셨다. 조심해야할 첫 번째는 레드, 붉은 물결이 있다. 겉으로 붉다는 것은 네오 막스, 해서 그 여기에 모든 정치적인 올바름을 가지고 온갖 뚤레랑스를 갖고, 온갖 다원주의를 가지고, 온갖 차별금지법, 이런 동성애, 이런 것 등, 그걸 하는 사상적 토대이다. 네오 막시즘(marxism)이다. 두 번째는 레인보우, 무지개, 이것은 성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창조의 질서를 다 무너뜨리고 가정을 파괴하고 엉망진창을 만들어가지고 애들이 마약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만든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아이들을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게 하고, 성경을 듣게 하고, 성경을 묵상하게 하고, 성경을 암송하게 만들어야 한다. 성경만 제대로 알면 성경의 토대가 세워지면, 어떤 붉은 물결, 무지개 물결이 와도 이겨내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검은 물결이다. 극단적인 사람, 우리는 우리 앞에 수많은 아말렉들이 있다. 이 아말렉을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들고 이겨내야 한다. -오스 기니스 박사-
 
-이 자리가 여호와의 산의 지팡이를 들고 이겨내야 한다. 홍해 앞에 있는 지팡이를 들고 이겨내야 한다. 오늘 여러분들 들어올 때, 늦게 온 분들은 못 보았을 것이다. 보여드리자면, 홍해를 가르는 모세가 손을 든 장면이다. 지난 번 몇 십 년 가지고 있었던 그림을 미국에서 갖고 온 것이다. 제가 설교하러 들어올 때, 길목에다 걸어놓았다. 지하 4층에 있다. 강사 실에서 나오면 있다. 얼마나 멋있는가? 불을 끄면 더 멋지다. 불을 다 끄고 보자. 더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더 확연해 보인다. 파도가 치는 홍해, 저 내리칠 것 같은 홍해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있다.
 
여러분, 이런 것 보면 기백이 생겨야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제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웠으니 뭔가 이렇게 저 지팡이를 들고 사명을 감당할 그런 기백이 있어야 그게 살아가는 의미이지,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빨리 주님을 만나는 것이 낫다. 사명 없이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러니까 저 홍해를 보라, 모세가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파도가 갈라지는 것이다. “마른 땅 같이 건너리라.” 하셨다. 두 가지이다.
 
주여 이 사랑의교회 토비새의 부흥, 헌신 토비새가, 이 자리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하나님 여호와 산이 되게 하여 주시고, 아론과 홀처럼,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본문에 보면 모세가 손을 들면, 백성 가운데 전쟁을 할 용사를 뽑아서 적군들과 싸우라고 하신다.
 
*출애굽기 17:9,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 먼저 적군들과 싸우라, 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을 응원하마, 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산 위에서 기도해주는 모세가 있고, 모세의 기도를 도와주는 아론과 홀이 있고, 평지에는 직접을 전쟁을 수행하는 여호수아 백성들이 서 있다. 아마 이 세 가지가 서로 반복이 될 것이다. 어떨 때는 모세의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오르는 역할도 있고, 어떨 때는 아론과 홀의 역할을 해야 되고, 어떨 때는 직접 싸우는 역할을 해야 된다. 이 세 가지가 이제는 다 기도와 거룩한 선순환이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 토요일마다 이 자리는 은혜의 성산이 되고, 마귀의 공격은 선제공격의 역사가 되게 하시고, 아론과 홀과 모세처럼 팀웍을 가지고 시대를 승리하는 한 마음이 될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다 승리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한국교회 제 1의 부흥은 1907년도의 평양 부흥회였다. 제2의 부흥은 한국교회가 건국할 때,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세워진 나라인줄로 믿는다. 우리나라 헌법은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헌법이었다. 그걸 고치려고 난리히다. 수많은 모략과 주민자치위원이라고 있다. 그 주민자치위원회가 법을 갖다가 어렵게 하고 무효와 시키고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예수 믿는 사람을 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가려고 했던 그것이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운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속에 갖는 간절한 것은 우리 민족이 기독교적 가치관과 헌법위에 세워진 줄로 믿는다. 제3의 부흥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73-80년대 대부흥이 일어났다. 우리가 계속 기도해 왔던 것처럼, 제4의 부흥이 코로나 이후에 일어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코로나 진원지 중에 하나가 이 토요부흥의 토비새가 되어야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해 교회뿐만이 아니라, 개인도 동일한 은혜를 주시길 원한다. 한 번뿐인 인생, 적당히 살지 말고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부흥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 토요부흥, 헌신, 토비새가 하나님께 영광되기를 소원한다. 자 이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찬양하자.
 
♬자 이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찬양합시다. 오늘 이 자리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기도의 성산이 되어야 한다. 아론과 홀이 함께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조심하여 옆 사람의 손을 들고 기도하면 좋겠지만 마음으로만 세워주기를 기도하자.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
 
 
그러면,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역사의식으로 일어나는가? 부흥은 내 생각이나, 나의 간절함으로 일어나는가? 그것은 아니다. 부흥은 반드시 말씀의 반석위에 세워져야 한다.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래서 토요일에 암송도 하고 그런 것이다. 시편 107편 20절에 보면,
*시편 107:20,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
- 여러분들 고침 받고 위험한 지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삼천의 기도를 통하여 죽을 똥 살똘 전력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말씀의 게시를 주신다. 위에서부터 말씀을 부어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뭐라고 말씀하는가? “네 사역에 너무 중요한데, 끝까지 이것을 지켜라. 내가 너에게 부탁한다.”라고 했다.
 
*디모데전서 4:13,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우리가 이런 전력기도를 하나님께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게시의 말씀을 주신다. 물론 출애굽기 17장을 가지고 그 때에 그다음에 모세, 여호수아, 아론과 훌, 다 말씀을 했듯이 여러분들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듣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읽는 것과 구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말씀에 관한 것인데, 읽는 것은
 
읽는 것-(public reading of scripture=PRS).=공동체 성경읽기이다.
-당시에는 이렇게 케논, 성경 66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당시는 주로 회람 형식으로 에베소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서, 고린도전서, 등은 서신서가 이렇게 보내졌을 때, 그 교회의 지도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지금처럼 같이 읽는 것이다. 공동체가 모여서 지도자가 읽으면 듣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었다. 매일 마다 오늘마다 속한 잠언을 한 장씩 읽고, 매일 오늘날짜에 속한 시편을 읽고, 하루에 5편씩 읽으면 된다. 우리가 일 년에 성경을 두 번 읽으면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살 길을 열어주신다. 온 회중이 오늘과 같이 모두 열 명 이십 명 주님 앞에 들을 때, 우리가 삼천의 기도처럼, 우리에게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을 것이기에 수많은 성도들이, 만 여명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거룩한 전율이 일어날 것이다. 사랑의 교회 거룩한 공동체 성경읽기를 감당하게 되면 전율과 오싹함을 느끼게 될 정도로 말씀이 있어야 한다. 오늘 8이이다. 시편 8편과 잠언 8장을 읽고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모두가 들어야 된다. 영상을 보자. 다윗의 시, !~~~◆공동체 성경 읽기.
 
♣요약
우리가 모세의 지팡이를 들고 시대 앞에 서게 되어야 한다. 모두가 다 토비새에 7,000기도용사가 되어서 임명하오니 오늘 하나님이 임명하는 것이니 토요일 새벽 기도하는 자 되어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고 매주 선제공격을 하고 하나님 나라의 헌신하고, 부흥을 온전히 체험하는 자로 헌신하여야 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을 인솔하였고,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모세가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했다. 그러다가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자 아론과 훌이 양쪽 손을 받쳐 주어 그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할 때 그 크신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이다.
















★토비새에 나오면 좋은점들 -다윗 중등부(천예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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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0월 5일)
제목: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선 사람들"
말씀: 신명기 34:1-1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윤현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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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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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선 사람들(윤현수 부목사님)

-작년 여름 저희 교규의 한 성도님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성도님 본인의 동의를 받고 그 문자 메시지의 일부를 읽어드리겠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기도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 어떤 성도님의 간증을 듣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부모님의 보호에 평안히 자라 신앙 좋은 남편과 시어머니 인도로 교회에 오자마자 모든 게 믿어지고 모든 게 하나님 덕분이라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저의 상황은 몇 달 채 몸은 아프고, 직원은 그만둔다고 하고, 회사 대표님과의 대화 부족으로 일은 힘들고, 아이들을 제대로 못 챙기니 소소한 어려운 일들이 지속되고 물질적인 부분은 해결의 길이 안 보이는데, 제 지금 상황과 그 성도님은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예배 또한 아픈 몸을 이끌고 간신히 가고 있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저리 쉬이 주시기만 하시는데, 나는 왜 이리 곤고하고 힘들게 주시려고 하지 않으시는 건지, 사람에게 치이고, 경제 상황에 치이고, 건강마저 저를 치는 이 상황이 하나님이 ‘벌주심’이 아님은 무얼까? 자꾸 이런 생각이 지칩니다. 하나님 은혜를 잊은 백성이라 하실 수도 있지만, 참 마음이 외롭고 힘들고, 이럴 거면 ‘내가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인데 날 좀 빨리 데려가 주시지 않는구나!’, 싶음 마음이 이후 내내 떠나지 않습니다.
 
이 문자를 받고 마음이 참으로 먹먹했다. 성도님의 어려운 상황에 안타까움도 문제였지만 그에 더하여 진실로 제 자신에게도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도님의 문자는 우리가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우리 대부분이 마음 속 깊숙이 가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분명한 문제 상황은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성경에 약속된 축복이 아직 온전히 경험되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겨왔는데도 질병, 사업의 파산, 인간관계의 갈등, 가정의 깨어짐, 갑작스런 사고와 같은 재난을 경험할 때가 많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이 차별적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병 고침과 기도 응답, 그리고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람 못지않게 신실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데도 그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하늘의 복이 어떤 점에 있어서는 매우 확실하고 공통적이지만, 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불확실하고 애매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이 상황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보기에 차별적으로 주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풍만하게 경험되지 않는 우리의 이 현재 상황에 대한 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성경을 읽어나가던 중에 오늘 읽은 신명기 34장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때로는 확실한 것 같으나 때로는 애매해 보이는 우리 신앙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의 권면을 굳게 붙드는 시간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매우 특별하다. 왜 특별할까? 모세 5경의 맨 마지막 장면이기 때문이다. 성경책 맨 앞에 다섯 권의 책,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 5경, 또는 5경이라고 한다. 유대인 이 다섯 권의 책을 ‘토라’라고 하여 그들의 기본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보통 이 5경과 같은 긴 분량의 이야기는 결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5경의 결말이 조금 이상하다. 5경의 시작부분은 천지창조라고 하는 거대한 사건으로 5경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5경의 마지막 장면은 사실상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5경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모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허망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장면으로 5경이 끝난다. 그리고 5경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 주셨던 땅의 약속이라고 하는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출애굽기에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그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이 가나안 땅 목전에 와서 신명기 마지막 장면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5경이 끝나버리고 만다. 매우 허망하고 마치 미완성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겠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글자도 의미 없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미완성인 것 같고 허망하게 끝나는 이야기 상황 자체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이 있다고 분명히 믿는다. 그렇다면 오늘 신명기 34장에서 그 약속의 땅, 경계 앞까지 왔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모세와 들어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시는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도록 하겠다.
 
본문 7절에 보면 모세가 죽는다. 죽는데 모세가 죽을 때. 그 나이가 120세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34:7,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가 죽었던 이 나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창세기 6:3,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5경에 맨 앞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6장에서 아담이후에 계속되는 인류의 범죄의 결과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백이십 년으로 단축시키는 저주를 내리셨는데, 모세 5경에서 모세를 빼고 그 누구도 백이십 세에 죽지를 않는다. 모세 5경의 맨 앞부분에서 인간에게 내린 백이십 세의 달수의 연한을 설정한 그 저주가 모세 5경 맨 마지막 장면에서 모세가 백이십 살에 죽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은 모세가 바로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와 같은 역할로 신명기 34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온 인류의 백이십년의 연한으로 설정된 그 저주로 이 모세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날 수가 백이십년으로 한정된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여정을 나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지금 그 모세가 어디에 서 있는지 오늘 34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에 서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백이십 세의 저주 가운데 그저 허무하게 죽는 인생으로 끝이 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그러한 범죄로 인한 저주를 그 굴레 안에 있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로 모세 5경은 그리고 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과 거룩이 충만한 에덴동산과 같은, 성소와 같은 땅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이러한 땅을 선물로 받은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데 여러분,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이다. 경계는 어떤 장소인가? 혹시 경계에 살아보았는가? 제 고향은 광양시 진월리 라고 하는 곳이다. 제가 태어나서 살았던 고향 동네가 경계였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는 강가에 살았다. 섬진강은 우리 한강보다도 그 폭이 좁았기 때문에 제 고향은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지만 경상남도와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제 고향은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서로 섞이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저는 어릴 적부터 광주 사투리와 부산 사투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두 개가 섞인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소풍도 저는 전라남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남도에 있는 지역들에 주로 소풍을 가곤했다. 이처럼 경계라고 하는 지역은 그 경계를 사이에 둔 양쪽 지점이 서로 섞이고 교차하고 융합되기 쉬운 장소이다. 그래서 사실 애매한 장소이다. 제가 행정구역상으로 분명히 전라남도 주민인데, 우리 동네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보았을 때는 우리가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경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한쪽 지역의 영향력에 강력해지면 비록 반대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향을 받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경계는 사실 굉장히 위기의 장소이다.
 
예를 들자면, 군사분계선 그 지역에 분명히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우리 남한 군인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그 지역은 우리 남한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은 언지든지 북한의 진입이 가장 먼저 이루어질 수 있는 위기의 장소이다. 바로 이점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이 맞닿아 있는 지점, 그 경계에 오늘 신명기 34장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 있다고 하는 점은 지금 하나님이 백성이 서 있는 그 장소가 굉장한 위기의 장소라고 하는 곳이다. 거기서는 광야의 양항을 받을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의 생명과 임재와 복이 충만한 약속의 땅에 영향도 받을 수 있는 두 땅의 힘이 교차하고, 융합되는 그래서 때로는 광야의 시험 앞에서 넘어질 수도 있는 위기의 장소에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아는 물이 없다. 식량이 없다. 물이 없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양식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지 않으시면 생존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는 불 뱀의 유혹이 있고 아말렉과 같은 대적들이 도전이 있다. 거짓 선지자, 발람과 같은 거짓 선지자의 유혹도 있는 장소이다. 바로 오늘 요단 강가에 서 있는 그 약속의 땅과 광야의 경계선에서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부정과 유혹과 시험에 그 혼돈으로 가득 찬 끝자락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경계는 그 광야를 뒤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앞쪽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생명과 하나님의 복과 임재가 충만한 약속의 땅이 앞에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소는 비록 광야에 발을 딛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생명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성소와 같은 그 땅에 아름다운 향기를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경계라고 하는 곳이다. 백이십년 한정된 날수의 저주의 굴레를 가지고 광야의 모래 바람과 때론 저 요단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약속의 땅, 저 아름다운 향기가 뒤섞여 있는 경계선은 위기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위기의 장소, 시험의 장소는 희망의 장소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경계선에 모세와 이스라엘만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 분이 더 계신다.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과 모세와 함께 그 경계선에 와 계신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 그 경계선에 있는 모세를 느보 산으로 불러올리신다. 그리고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그 땅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다. 신명기 34정에 1-4장까지를 제가 한 번 더 읽어 보여드리겠다.
 
*신명기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우리 성도님들은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저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시면서 도대체 왜 보여주시는가? 그리고 왜 출애굽기부터 모세를 부르셨다고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시켜놓고 왜 보여만 주시고 너는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선언을 하시는가? 우리 하나님은 너무 얄밉고 잔인하신 분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러나 땅을 보여주시는 의미는 땅을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마지막 소원성취도 아니다.
 
구약성경이 기록될 시절, 고대 근동의 법과 관습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신약학자 다우드는 스터디스 인 비브리컬 로우(Sthuddy's in Biblical Row) 라고 하는 책에서 로마법과 또 성경시대의 법에서 토지소유권이 이전되는 방식에 관하여 연구를 하였다. 그것은 땅을 넘겨주는 양도인이 그 땅을 받는 양수인에게 그 땅을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그 땅을 보여주면 그 땅을 보여줄 때 소유권이 양수인에게 이전된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으로 한 번 비교를 해보자면 물론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여기 토지매매 계약을 했다. 양도인과 양수인이, 이 땅을 사고팔기로 계약을 한 후에 그 땅을 사는 사람에게 그 땅에 대한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주면 드디어 땅을 산 사람의 땅이 된다. 그러면 그 땅을 사람은 소유권 등기를 마치면 그 땅에 들어가지 않고, 살지 않더라도 자기 땅이 된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땅을 보여주시는 이 행위가 오늘날 등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리라.”라고 약속하신 다음에 오늘 그 아브라함의 후손인 모세, 이스라엘 대표자인 모세를 느보산에 올라오라고 하신 다음에 모세에게 그 땅을 보여주시는 것은 모세가 지금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고대 근동세계의 법률의 관습에 따를 때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그 땅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받은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무엇인가 바로 느낌이 올 것 같다. 하나님께서 땅을 먼저 주신다고 약속을 먼저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땅을 바라보게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을 바라볼 때, 그 땅을 법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너무나 신약 적이다.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구원과 영생 천국을 약속하셨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영생 천국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 예수님의 생애와, 성령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루어 가시는 모든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성도들에게는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성령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꿈과 영생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고 바라보는 순간 구원과 천국이 우리의 것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바로 기독교 구원의 이 메커니즘, 이순서가 모세가 땅 보는 이 장면의 메키니즘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인 모세가 보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보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모세와 하나님의 백성은 그 땅을 보지만 애굽인들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였던 그 이방인들, 그 대적들은 그 땅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선물하시는 그 땅을 하나님이 보여주셔서 그 땅을 보여주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보여주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그 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땅은 우리 인간이 노력하여 보려고 해도 볼 수 있는 떵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34장 1-4절까지 모세가 보았던 그 모든 지리적인 영역을 다 조사해서 보면 느보산에서 물리적인 우리 육신의 눈,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다. 바로 신약시대에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님의 역사와 우리 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이 이룩하셨던 그 구원의 역사를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자들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를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기 생명을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예배하시고 기도하러 나오셨을 텐에 바로 우리 성도님들께서 붙들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우리 예수님의 그 구원의 사역은 우리가 보고 싶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그런데 또한 그 땅을 보는 사람과 그 땅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의미와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그 애굽에서 국고 성을 지었다. 국고성은 거대한 애굽의 건축물로써 국고성의 용도가 무엇인지 역사학자들이 관찰해 보았더니 애굽의 조세 행정과 군사 행정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국고 성이다. 한마디로 세상 제국의 영광과 세상 나라의 통치를 위하여 그것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왜 거기서 그것을 만들었는가? 애굽이 유월절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애굽의 모든 첫 째 난 남자아이들이 다 죽음으로써 애굽의 심판이 내려졌다는 것은 그 애굽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곳이고 장차 망할 도성이라는 곳에도 불구하고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실 약속의 땅, 젖고 꿀이 흐르는 땅, 생명의 땅이 있다는 것을 애굽 인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의 땅 애굽에서 평생 자기들은 살아가기 위한 처소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애굽에 머물러서 국고 성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광야에 나왔어도 그 광야에서 고정적 그 건축물을 건축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땅, 약속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고정식 건축물을 지을 그러한 목적도, 목표도 그러한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르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오늘 드디어 그 땅을 모세에게 그 땅에 경계선 앞에서 보여주시고 소유권을 이전해 주시고, “모세야, 네가 비록 들어가지는 못할지라도 네가 그 땅을 소유했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과연 이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는 마지막에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그 땅을 바라보았고 소유했던 모세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세 가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첫 번째로 모세는 자신이 무덤 묻힐 땅 한 평 갖지 않았다.
-신명기 34장 6절에 보면,
*신명기 34:6,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었는데 모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기록이 성경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무덤이 거기에 가서 사람들이 숭배할까봐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체를 하나님께서 감추었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구태여 모세만 이렇게 어디 묻혔는지 알 수 없다. 라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은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모세가 묻힌 땅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만약 광야에 행정기관이 지적부나 등기부를 만든다고 했을 때, 모세가 소유한 땅은 한 평도 없다는 뜻이 된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의 시신이 묻힐 땅 한 평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다. 모세는 땅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세는 광야에 조금도 집착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겠다.
 
왜? 모세가 광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세가 약속의 땅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광야의 부정함과 광야의 혼돈을 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정한 날수가 있어서,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이 광야를 지나가고, 우리가 장차가 거할 도성은 하나님 품안이라는 것을 모세는 알았기 때문에 광야에 땅을 소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 사실 약속의 땅과 광야의 경계에 선, 두 땅이 교차하는 장소요, 두 땅의 힘이 맞닿아서 성도를 시험하는 그 위기의 장소에서는 사실 고난과 환난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난과 환난 때문에 사람들이 실족하지는 않는다. 바로 그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이는 자들은 실족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왜 실족하는가? 자기 눈앞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 천국을 이미 믿음으로 소유하신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에서는 이 땅에서 결핍과 양식 없음과 유혹과 고난 앞에 좌절하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지금 우리는 매우 열악하고 빗물이 새고 저녁이 되면 모기와 해충들이 들어오는 그러한 열악한 집에서 전세 월세로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지금 현실은 너무너무 좋은 집에 임대차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전세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여 그날 입주 일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잠시 비가 새고 해충이 들어오는 월세 집에 좀 좋지 않는 곳에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입주 일을 기다리는 즐거움 때문에 여러 어려움과 힘듦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모세는 죽을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아니하었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신명기 34:7,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다라고 한다. 왜 흐리지 아니한가? 오늘 34장에서 모세의 눈이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가? 모세의 눈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약속의 땅을 보는 데에 사용된 신체기관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죽을 때까지 그 시력이 흐려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 약속의 땅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때, 그 땅을 바라보는 그 시야가 죽을 때까지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시력이 좋으면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할 것이다. 광야의 흙먼지와 광야에 돌아다니는 불 뱀과 광야의 모든 시험의 요소들을 우리가 시력이 좋은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약속의 땅에 우리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축복과 영광과 즐거움과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시력이 좋으면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의 땅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보면 그 땅에 들어가고 싶은 소망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하야 준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력이 흐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광야의 시험, 광야의 위험한 함정들, 광야의 그 흙먼지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진다. 그래서 내가 지금 광야에 있는지, 아름다운 땅에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는 시야가 흐려지면 이제 드디어 그 땅에 대한 소망도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유지하는 일에 먼전을 기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우리가 시야가 뚜렷해질 때, 우리 예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구원의 역사, 현재 나와 함께 하시는 구원의 역사, 장차 미래에 백성들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는 항상 뚜렷하게 바라보고 주님 앞에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주님께서 이룩하실 그 구원을 항상 소망하며 기대하게 될 것인데 우리가 그 영적인 시야가 흐려지면, 우리는 세상의 죄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하늘의 영광도 분간하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 상태가 되어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의 깨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로서의 삶과 소명을 우리는 점차 잃어갈 위험에 빠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적 시야를 유지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기를 부탁드린다. 이 시력은 본문에 따르면, 죽을 때까지 유지를 해야 한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그 시야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24절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하기를


세 번째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갔다.
*에베소서 6:24,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만남이 주로 이루어졌던 장소가 있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는 시내 산이었고, 오늘 마지막 모세 5경에서는 느보 산이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산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자주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이 반포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라가면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오늘 우리에게 느보 산이 어디인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그리고 그 느보 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보며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성된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보지 못하는 눈을 열어서 영생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장소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매주 선포되는 장소이며, 교회는 구원 받은 백성이 우리 주님과 뜨거운 연합의 교제를 이루는 장소가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나아옴으로써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 교회에 힘써 오르고 오름으로써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있다. 느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없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역사의 필수적은 기관이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기관이다. 위기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인 경계선에서 안전한 장소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요, 천국을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로 교회이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우리의 삶을 시시각각으로 유혹해 오고 광야의 그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치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피난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힘써 오르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들어가지 못했는가? 좀 넣어주시면 안 되었는가? 모세 5경이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언약을 성취시키시는 장면으로 모세 5경을 종결시키면 안 되시는 것인가? 출애굽기에서 부르심을 받아 무려 4권에 걸쳐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그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처럼 죽게 하시면 안 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모세 5경을 이렇게 미완성으로 마무리 지으신 데는 또한 깊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신약시대의 바로 우리가 모세가 서 있는 이 경계선과 같은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느보 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바라본다. 우리 성도님들도 바라본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라고 표현하고 이사야서와 베드로후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표현을 한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그 시점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예수님과 함께 하고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와 계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셔서 예수님의 인성은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이 땅을 와 계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의 신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떠나셔서 재림의 날까지 우리 성도가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만큼 축소된 상태라고 볼 수가 있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장차 온전한 하나님의 임재와 교회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약 성도들도 오늘 신명기 34장과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처럼 하나님의 그 약속의 땅을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모세가 죽는다. 신약의 사도들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다 죽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그날까지 죽음에 관문을 통과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장차 재림하실 그날에 상한 권세를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모세처럼 죽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에서 있었는데, 바로 신약시대의 성도들 역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 그 경계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 5경의 마지막 장면은 교회를 위하여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마지막 장면이 디자인되었음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겠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약속의 땅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기다리고 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법적으로 소유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느보 산에 올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광스런 땅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신약 시대의 느보 산은 교회이다. 광야와 세상에서 발생하는 고난과 시험 앞에 상처입고 때로는 피투성이가 되는 우리의 마음과 몸을 이끄시고 여러 기도제목을 품고 느보 산인 교회에 올라가 하나님의 손에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기도로써 다 올려드리기를 부탁을 드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을 다하여 듣고 그 말씀을 생명처럼 붙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부탁드린다. 이를 통해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이 경계선에서 그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그 시력을 온전히 유지하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요약
신명기의 마지막 장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깨우쳐서 우리의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 모세와 같이 이 땅에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영적인 시력이 흐려지지 말고 끝까지 주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힘써 느보 산에 올라가서 약속의 땅을 모세가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힘써 교회에 나아와 예비하신 구원의 완성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땅을 소유하는 은혜를 받아 세상 유혹을 물리치며 이 땅의 생명을 다할 때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대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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