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0월 26일) 제목: "내 삶에 역동하는 기쁨의 근원" 말씀: 고린도전서 15:12-20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호 부목사님 --------------------------------------- *고린도전서 15:12-20, 12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14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설교의 제목은 "내 삶에 역동하는 기쁨의 근원"이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이 자랑하는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과 버금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있고, 신앙고백서가 있다. 그 가운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가운데 45문답에서는 오늘 우리가 말씀 속에서 상고하고자 하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묻고 답한다. 여러분 각자에게 드리는 질문이라 여기고, 스스로 어떻게 답할지 그리고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역사적 사실은 실재 있었던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가다오는지 생각해 보는 귀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의 이 질문 앞에 세 개의 답이 있다. 첫째 답은-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음으로써 얻으신 의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신다. 둘째 답은-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다. 셋째 답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확실한 부정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고백에 대해서 다 동의하는 줄 믿는다. 주저하듯이 부활의 감격은 우리에게 충분히 넘치도록 주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부활의 감격, 그 이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있다.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방금 읽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정리 그대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의 정갈을 입었고 중생, 곧 다시 새롭게 태어났으며, 거듭남을 의미한다. 마침내 영광스런 부활마저도 기적처럼 경험하게 될 놀라운 은혜를 얻었다. 또 무슨 과제, 남겨진 과제가 있다는 것인가? 적어도 성도라고 불리 우는 우리들에게는 부활의 사건이 정말로 있었나? 하는 이른바 역사적 사실성의 어려움을 우리의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늘 수요예배를 사모하며 주의 전에 달려오신 우리 성도님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 그 정도의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관건(關鍵)은, 부활이라는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선물을 마주할 때, 정작 우리가 고백하는 부활의 감격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 삶을 부요케 하는 기쁨의 이유라기보다는 머리로는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이에 머무르는 단순한 지적 동의의 수준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목사님, 저는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우리의 전인을 이루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 모두를 강타하는 부활의 감격을 절실히 내 삶의 모든 문제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복잡다난한 좌절의 이유들과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오늘의 기쁨으로 부활의 감격을 누리고 있는가? 그 질문이 필요하다. 내가 부활의 감격을 내 삶을 통해서 어제가 아닌 바로 오늘 나의 기쁨으로 누리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성경은 오순절 직후 예루살렘이 유대 권력자과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했다라고 누가를 통해서 사도행전에서 고백한다. 그리고 다시 후반기에 이렇게 이루어진다. “너희는 그를 죽였으나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다.” 이것이 사도행전 4장의 믿음의 보고이다. 바울 역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장사 지낸 바 부활하심, 나타나심에 집중한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은 죽으셨고, 장사 지낸 바 되셨고 부활하셨고, 그리고 다시 나타나셨다. 부활의 신비이며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경륜이며 은혜이다. 왜 그런가? 에베소서 2:1절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이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던, 그래서 희망하나 꿈꿀 수 없었던,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구속과 부활하심으로 인해 죽었던 우리를 기어이 다시 우리를 살려내셨다. *에베소서 2:1,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차분히 생각해 보라. 만약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완전함의 충분한 속죄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계속 죽으신 상태로만 계셨다면, 다시 말해 부활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공개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완전하며 충분한 희생의 숙제가 이루어졌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알 수 없다. 결코 알 수 없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서의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 잔인한 피 비린내 나는 처참한 살육의 대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충만함이 가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끝내 죽음을 이기지는 못한 것이기에 실패로 귀결되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본문 가운데 15장 12-18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린도전서 15:14,17,18,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언 그대로, 하나님의 약속하심 그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 곧 부활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셔서 죄인인 우리를 대속 하셔서, 친히 대속하신 예수의 죽음을 승인하신 것, 그래서 결코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 또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은 피 값 주고 사신 그 구속의 속량의 은혜를 누리며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확정 시켜 주신 증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이 아닌가? 요컨대 예수의 부활은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신 증거가 되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승리의 찬가를 소리 높여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세상의 도전과 풍파 앞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궁극적인 승리를 깨닫고, 고통과도 같은 끝나지 않는 터널 같은 우리 인생에 수많은 고난의 순간들을 분연히 인내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과거에 이루어진 어쩌면 2천 년 전에 이루어진 그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 사건을 흐릿한 죄 사함의 기억으로만은 기억해서는 이 전쟁과도 같은 우리의 삶의 격동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가 없다. 치열한 오늘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능력이 어제가 아닌 바로 오늘 내 삶에서 현재 기쁨으로 역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단한 삶에 여정 속에서 죄와 결별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불안과 좌절과 낙망 속에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에게는 에베소서 1장 20절 말씀 그대로 *에베소서 1:20,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다름 아닌 그 부활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2022년 10월 오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라는 선포와 함께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부활이 정말 일어났는가? 라는 세상 사람들의 회의와 의심에 답하는 변증뿐만 아니라, 부활이 가진 의미와 그 참된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묵상과 함께 부활의 감격을 내 삶에서 오늘 바로 지금 기쁘고 감사히 누려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의 감격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추억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왜 설레임 가득한 부활의 감흥을 왜 잃게 된 것인가? 가슴 터지도록 기뻐해야 할 그게 마땅한 기쁨을, 소망의 감격을 말이다. 부활의 영광은 언제나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 삶은 즐겁지 않은 것인가? 저만 그런가요? 목사님만 그렇구나! 여러분은 어떨지 모르지만 솔직히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목사인데도 북구하고 부끄럽게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저는 그야말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저의 일들의 여파로 우리의 사역 가운데 여러분들이 보고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목사님들의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역의 과정들이 있다. 우리 모두 선의와 진심이면 된다고 열심히 사역적인 기준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그 사역적인 기준도 희미해지고 우리 각자의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두어야 할지 모르겠고 멍해져 버렸다. 사역 안에서 삶의 단면은 꽉 찬 하루 안에서 이전처럼 정신없이 돌아가지만 정작 저 스스로는 무기력함에 싸여 있었다. 우리 모두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고 싶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영혼구원의 사역을 기쁘고 능력 있게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빨리 마음을 다잡고 사역의 궤도로 복귀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있었지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 밤마다 자다 깨다가 거실의 한 구석에 처박혀서 무릎 꿇고서 기도하다가, 자가 깨다가 하며 버틴 게 다이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도 여전히 하나님은 침묵 속에 계시고 루터가 말한 그대로 숨어계신 하나님은 2022년 10월에 저에게도 동일하게 철저히 저의 혼자만의 시간을 허락하셨을 뿐이다. 그러다가 한 참 후에 우연히 ‘5만 번의 기도 응답’ 받은 책으로 유명한 죠지 뮬러의 글을 읽으며 예상과 전혀 다른 그의 고백을 보며 저의 정말 한 대 맞은 것 같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저는 죠지 뮬러는 우리가 아는 바와 그대로 말이 그렇지 오천 번도 아니고, ‘오만 번의 기도로 응답’ 받은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한다. 죠지 뮬러는 또 이야기 할 것이다. 어디까지 기도해 보았을까? 기도의 정요 화된 정답으로 채근하겠지 하며 저는 예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죠지 뮬러는 저의 예상과 다르게 기쁨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오만 번의 기도를 말해서 기도하면 교회 성전을 떠나기 전에 자기가 기도했던 일들을 수없이 고백하는 죠지물러가 결국 이야기 한 기쁨,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매일 해야 하는 가장 우선 적이고 중요한 일이 ※“주 안에서 내 영혼이 행복해 지는 것임을 이전보다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주님을 섬겨야 하는가? 혹은 내가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릴까? 가 아니다. 도리어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나의 영혼이 행복해질까? 나의 내면이 성숙해 질까? 왜 그런가? 나는 사역자로서 불신자 앞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성도들을 위해서 목숨 바쳐 헌신할 수 있다. 기꺼이, 그리고 좌절과 낙심한 자를 위해 위로를 넘어 내 삶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름 아닌 정작 내 자신이 다른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 온전히 주 안에서 행복하지 않다면 내가 주님 때문에 내가 다시 말해서 내가 기쁘지 않다면 결단코 단연하건데 나의 모든 다른 헌신과 희생은 도대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죠지 뮬러- 하나님을 믿는데 여러분 제대로 들었는가? 정작 바로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내 삶에 기쁨이 없다. 기쁨을 준다고 다 긍정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낙관적인 삶을 얼마든지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생활, 나의 신앙과 믿음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 안에 심령이 터져 나오는 기쁨이 없다면 그 믿음은 그 신앙은 무엇으로 가득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회개가 제 마음을 강타했다. 부끄럽지만 여러분께도 말하겠다. 인정해야겠다. 전혀 기쁘지 않았던 저의 일상의 삶의 단면을 말이다. 주의 종으로 내 삶의 전체를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리며 후회 없이 오직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고 서원하며 여기까지 달려와서 이제 목사까지 되었지만, 정작 때때로 아니 꽤 많은 시간과 삶의 과정 속에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내 삶의 고백이 사라졌다는 것, 이 비참한 현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만 매어 있는 답답하고도 옹졸한 신앙의 초라함이 바로 나의 모습이구나!’, ‘하나님 앞에서 고통스럽게 인정해야 할 내 신앙의 정체이구나!’ 그런 날들이 제게도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어떠한가? 성도님들께서 생각하는 위대한 신앙의 표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마땅히 기뻐하시는 헌신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평생 사모하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싶은 여러분의 삶의 단면은 오늘 바로 이 순간 여러분 가운데 과연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비로소 깨달을 때 알게 되는 그 먹먹한 가슴 저림인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확정과 완전한 회복을 꿈꾸며 세계 선교의 사명에 함께 할 때, 주어지는 영적 승리의 감격인가? 죽은 영혼이 복음으로 되살아나서 영적인 성취를 경험할 때 마주하는 위대한 복음의 능력인가? 탁월하다. 모두 대단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으로 그럴듯하게 우리의 외면을 만족감을 가득 채운다 하더라도 죠지 뮬러가 말한바 그대도 우리 자신에게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인들이라고 불리우는 하나님 자녀인 각자의 삶의 단면 안에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하루 안에 바로 그것,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는 기쁨이 없다면, 그래서 그 기쁨이 그 희락이 그 즐거움이 내게서 너무나 멀리 있다면 인정해야 한다. 무엇을 말인가? 우리 안에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구,,, 그리고 또 다시 말해야 한다. 내 안에 사랑이 없구나!!. 솔제니친은 이런 말을 했다. “20세기에 가장 큰 특징은 아마도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지만 거창하게 20세기만 특징이 아니다. 감히 송구하게도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하나님이 없을 때가 많은 것 같다.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필립이안시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고백은 불신자의 고백도 아니고, 무신론자의 말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실상은 하나님과 가깝게 있지 못하고 우리의 애매한 위치, 패역한 처신을 적나라하게 말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십자가의 권세를 이기고 피 값 주고 다시 사신 우리는 그러나 결코 팔 장 낀 채 우울함에 겨워서 책임하게 ‘세상사가 다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인생 뭐 있어?’ 라고 자조하며 우리의 삶을 무감하게, 무기력하게 소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불안전하다는 절망스러운 어둠속에 고발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2006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 한 권 있다. ‘마이클 부시’라는 목사님이 영어 원제로 ‘This in complete one’이라는 영어 텍스트를 냈다. 그 책이 2010년에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원래 영어의 의미가 다르게 의역한 것이지만 이 책의 독특함은 열 명 넘는 목사님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이 가운데 우리 목사님들이 잘 아는 칼바르트 자유주의 신학에 던져진 폭탄과도 같은 로마서 주사 학을 썼다는 나치에 맞서서 스위스 개혁신학을 붙잡았던 칼바르트, 해석학의 거두였던 그 모든 형상학의 슐라이어 마흐, 그리고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적 입장과는 상관없이 열 명이 넘는 이 책의 한 시대를 풍미한 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오늘의 공통적인 정체성은 자녀를 잃은 슬픈 아버지, 목사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소명이 목사이기에 자신들의 자녀를 잃고 장례식에서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딸을 위해 장례식 설교를 한다. 그 설교 문이 이 책에 담겨있다. 자기 자신의 자녀의 장례식에서 목사인 그들은 설교한다. 그 설교들을 모은 책이 바로 ‘This in complete one’,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는 책이다. 그 가운데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은 책이다. 부활은 일어났고, 우리 피 값주고 샀던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나는 천국백성에 대한 구원의 확신을 너무나 감사하게 고백하고 느끼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오늘 내 삶은 왜 기쁘지 않을까? 좀 긴 이야기인데 잘 집중해 주길 바란다. 다음은 존 크레이프 목사님의 설교이다. 설교 제목은 ‘우리의 기대와 하나님의 기적’이다. 과거를 추억하는 내용부터 시작된다. 설교문의 일부이다. -눈이 내리던 어느 토요일 오후 제 어린 둘째 딸이 18개월 동안 싸워왔던 백혈병과의 사투를 끝내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신의 본향으로 돌아갔다. 그 시간은 그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온 식구들에게 참으로 말하기 힘들 만큼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 말을 꺼내기도 힘들만큼 깊은 슬픔에 젖어 완전히 탈진했었던 것 같다. 제 딸이 세상을 떠난 지 6주 정도 저는 후에 루이빌에 있는 감리교 병원에 방문했다가 왜 방문했는가? 딸은 6주 전에 죽었지만, 사역은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만나고, 위로하고 목사인 내가 6주 전에 딸을 묻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많은 사역에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성도들을 위로해야 되니까, 평소 아주 친하게 지내던 유대교 랍비와 마주쳤다. 목사님이 아니라 유대교 랍비이다. 딸아이가 죽은 후 처음 만난 것이기에 그는 정중하게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뜻하지 않는 질문으로 저를 당황케 했다. “목사님 자네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어. 남자대 남자로 정직하게 대답해 주면 좋겠네. 그 어렵고도 잔인하기까지 한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네와 가족들에게 무엇을 해주셨는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그럴싸한 말로 대충 둘러대기에는 우리 둘은 너무나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내 눈을 응시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했다. “자네가 얼마 전에 겪은 그 끔찍한 경험 속에서 자네가 그토록 붙잡고 있는 하나님께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무엇인가?” 저는 앞의 친구의 질문에 제 딸을 보내던 그 시절의 복잡한 마음과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레이프 목사님이 의사에게 물었다. “제 딸은 언제까지 살 수 있죠?” 남자 의사가 냉랭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대체로 따님 또래의 이런 종류의 백혈병을 가진 아이들은 약 18개월 정도 삽니다.” 1년 6개월 후에 죽는다는 진단이다. 의사의 냉랭한 진단 그대로 제 딸은 진단 받은 날부터 정확히 18개월 하고 딱 열흘 더 살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고 의료기술을 총동원 해보았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그 아이를 구제할 수는 없었다. 목사님이 믿는 그 하나님은 그 어떤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지도 않으셨고, 개입하지도 않으셨고, 저는 목사로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기적에 함께 동역해보지도 못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기적과 상관없이 다만 저는 여전히 단 한 순간도 견디기 힘들다고 몸부림치던 절망과 낙담의 시간들도 가득했을 뿐이라고 그 시절을 생각했다. 그러나 랍비친구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그 순간 저는 어쩌면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아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무엇인가 깨달음이 있었음이 떠올랐다. 무엇이었을까? 성도여러분, 평생 목사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 어떤 것도 불가능이 없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그 존엄과 위엄과 권능을 성도님들께 선포하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대로 역사의 주인이시며 창조의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았던 존 크레이프 목사, 그러나 정작 로마서의 고백대로 죽은 자를 살리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성도들 앞에 증명할 수 없었던 무기력한 한 명의 사역자로서 그는 하나님의 철저한 침묵 속에 자신의 소중한 딸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는데 도대체 하나님 앞에 무엇을 깨달은 게 있었을까? 존 크레이프 목사님은 말한다. “저는 제 랍비 친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할 수 있다. 그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었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을, 지옥과도 같은 그 고통의 시간을, 좌절을, 절망을, 맨 정신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속에서 견딜 수 있는 힘,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어, 또 우리가 패배를 당하고 그로 인해 쓴 뿌리를 뽑게 하는 대신 우리 힘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일을 알 수 없는 힘으로 버텨내게 하셨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내게 주워졌던 이 고통과 인내라는 섭리 덕분에 나는 이전과는 다른 다른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이야, 그래, 나는 언제나처럼 힘든 삶 가운데 있지, 그러나 나는 여전히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해.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다. 때론 우리의 삶의 굴곡마다,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그 막막함이 일상이 될 때도 있다. 오늘 주의 몸 된 교회를 달려오신 안아주심의 본당을 채우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도 2022년 10월 26일 오늘이 너무도 기뻐서, 도저히 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서, 주의 전으로 달려오신 분들도 물론 있을 수 있지만, 어디서부터 내 삶의 좌절과 얽혀버린 내 삶의 문제를 도대체 누구에게 토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말씀을 듣고 수색이 없이 돌아가는 것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한나의 이야기가 아닌가? 라고 마음을 쥐어 잡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분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나는 만족해’, 라고 사람들 앞에서 때로는 멋지게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실재로 그 공백은 우리가 때때로, 아니, 아주 많은 시간 동안 신앙의 삶 속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구제는 내 삶 속에 여전히 고통스럽게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속 가득 분노로 가득할 때, 사막의 신기루 같은 하나님, 김정우 교수님의 표현대로 부잣집 시어머님 같은 하나님, 그래서 쌀이 없어서 쫄쫄 굶고 있는 친정을 생각하며 눈물이 쏟아지는 며느리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은 부잣집 시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함께 하시는 것 같지만 어느 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향한 질문이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 질문하라. 그리고 서러운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분노 가득한 여러분의 마음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말해본적 없는 그 절망의 감옥들 속에서 눈물가득 부르짖어 보라. 그 시간이 여러분을 충분히 감싸 안을 때, 그래서 희망이라는 말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 다가올 때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끝내, 기어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알게 하실 것이다. 무엇을 말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은 우리의 마음과 심장을 걸어야 하는 일이구나, 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낭만적이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고, 복잡한 우리 삶에 기쁨을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우리의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믿는 자로서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자들,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는 자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도망치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마침내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소에서 비롯되는 피의 절규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권능의 십자가의 보혈에서 비로소 주어지는 그 평강의 놀라운 능력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길에 여러분과 제가 함께 서 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래서 단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내 삶에 욕망을 채우기 급급해서 나, 나, 나, 혹은 내 가정, 내 가정에 갇힌 그 이기심을 넘어서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내 아들이 어느 학교를 다녀서, 내 딸이 어느 전문직 직종에 있는 것이 내 유일한 자랑의 고백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하나님은 내 인생을 굽여 살펴 주시지 않는다고 토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고백하는 그대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오늘 이 땅에서 이루어질 오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위해서, 우리의 남은 삶을 기쁨으로 의지적인 기쁨으로 기꺼이 드리자.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가운데 주신 그 즐거움에 선물, 부활의 감격, 그 이유를 가장 귀하고 가슴 벅차게 하나님께 받은바 그대로에, 그 사랑으로 누리며 갚아드리는 영광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오, 환난 중에 만날 큰 산성이시라는 그 고백을, 우리의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그 기쁨으로 그 어떤 누구도 나를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기쁨의 표어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좌절과 낙망과 핍절됨을 뒤로 하고 우리의 심장을 영광스런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백으로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요약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의 이 질문 앞에 세 개의 답이 있는데,. 첫째 답은-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음으로써 얻으신 의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신다. 둘째 답은-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다. 셋째 답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확실한 부정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바울은 명백한 사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시한다. 고린도 교인 중에는 영혼의 불멸은 인정하면서도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바울은 그리스도 부활 사건의 역사성에 입각해 성도의 부활의 필연성과 확실성을 역설하였다. |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