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10월 2일)
제목: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말씀: 마태복음 25:31~46
대표기도: 김승진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ㅡㅡㅡㅡㅡ


▶오늘 예배를 통해서 이전보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한다. 큰일을 행하신 주님께 다함 없는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우리도 기쁘지만 우리 주님께서 더 기뻐하셨으니라 확신한다.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9.26 섬김의 날을 통해 우리가 많은 기쁨이 있었는데 우리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는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가지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허락해 주시길 소망한다.
 
앞에 25장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오고, 또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비유성이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실체를 경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늘 이 양과 이 염소의 비유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여러분이 완전히 실체로 경험하는, 실체로 체험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 그리고 본문에게도 나와 있지만 모든 우리 교우들과 온라인으로 들어오시는 모든 분들도 동일하게 다시 한 번 예외 없이 적용되는 말씀이다. 먼저 양과 염소에 비유에 대해서 31-33절을 말씀하기도 하겠다.
 
I.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양은 의인이고 염소는 불의한 자로 이야기를 하는데 ‘인자’가 라고 할 때에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다. 그리고 인자가 ~~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지막 심판대에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에 예수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줄로 믿는다. 이게 왜 이렇게 소중한가 하면, 이 말씀의 배경은 마치 이제 십자가 지시기 전 3일을 앞에 놓고 이 말씀을 하셨는데, 말씀하시는 자리는 감람산이었다. 감람산은 그 골짜기이고 여러분, 성지에 가보면 예루살렘 성과 높은 데에 위치해 있다. 높은 데를 향하여 보시고 골짜기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은 마치 겉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실패자로 보이고 겉으로 볼 때는 십자가를 지셔야 하니까 진 것 같아서 그렇게 함으로 또 대적들의 비해서 예수님이 패배자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사실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주님은 패배자가 아니고 주님은 이 말씀 이후에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양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이 재림으로 오실 때는 사자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실 때는 겉으로 볼 때는 어떤 패배한 구원자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다시 재림 하실 때는 심판주로 오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심판주로 오셔서 초림 때, 양으로 오신 것 같지만 왕으로 오시는 것이다. 그 주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 누가 보좌에 앉았다고 했는가? 인자,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교나, 기독교나 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아니냐? 라고 할 수 있지만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 다원주의 이고 보좌에 앉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보좌에는 무슨 마호멧이 앉는 것도 아니고, 부처가 앉는 것도 아니고, 무슨 공자가 앉는 것도 아니고, 엘리야가 앉는 것도 아니다. 보좌에는 예수님만이 앉으신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분께서 이제 오늘 심판하시는데, 양과 염소를 심판하신다. 특별히 마태복음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제가 이걸 보면서 왜 이렇게 기자가 ‘양은 의인이고, 이렇게 사랑하고 염소는 미워하나?’ ‘우리 교회에서 염소 키우는 사람은 어찌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도 들고 그런데 양은 온 몸을 다해 섬기는 자이고 염소는 풀밭을 못 쓰게도 만들고 초복을 죽게 하는 일이 많아서인 듯싶기도 한데, 하여튼 주님께서 이 땅에 초림 때는 어린 양으로 오셨지만, 앞으로 주님은 사자로 오실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가지고 이 배경을 갖고 하겠다. 드디어 34절을 보면,
 
*마태복음 25:34,46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바로 판결을 하시고 어떤 재판 없이 바로 선포하시는 것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뭐 어떤 뜻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판결문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상속받으라. 라고 한다. 우리가 믿음의 보고의 말씀을 많이 했는데 믿음의 모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신실한 종들에게 하나님의 판결문, 하나님의 선포, 그러니까 하나님의 평가서, 성적표를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믿음 보고 할 때, 팩트 보고가 아닌 믿음 보고를 해야 되는데, 페이스 리포트를 해야 되는데 오늘 좋은 한 예를 소개하자면 파더 리포트이다. Faith report를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평가서를 주신다. Father report, 하나님의 평가서, 하나님의 보고서, 하나님의 판단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평생 믿음보고를 쓴 제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보고서를 주시는데 파더 리포트를 주시는 것이다. 이 시간이 아버지 보고를 받을 여러분들이 가슴이 조마 조마하는 시간인가? 아니면 가슴 뛰는 시간인가? 두 개 다?? 하여튼 가슴이 조마조마 하는 분들과 가슴이 뛰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보니까 제1판결문이 무엇인가? 35-40절까지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이 양이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을 염소라고 했다. 이것 때문에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못에 돌아가실 때에 앙편에 두 강도가 있었는데, 오른편에 있는 강도가 구원 받고, 왼편에 있는 강도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단지 추측할 뿐이다. 해석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오른편에 있는 양, 왼편에 있는 염소, 이것은 무슨 차이인가?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는 하나는 영원한 영벌이고,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고 왜 이리 되었을까? 양과 염소의 차이가 무얼까? 양들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희가 내가 주릴 때에 나에게 먹이고, 내가 목마를 때 나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영접하고, 벌거벗었을 때 나를 입히고, 병들었을 때 나를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살펴주었다.” 이게 여섯 가지인데, 여섯 가지가 네 번이나 반복이 된다. 그런데 이제 반응이 너무 재미있다. 양들은 그리 말하니까, “주님, 내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한다. 나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렇게 한 것이 나를 위한 것과 같아”라고 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 어려운자, 가난한 자에게 한 것 정도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와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어려운자 가난한자, 힘든 자를 고통당한 자를 도왔다고 그랬을 때, 그분들의 도움의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향해서 한 것이다. 그런데 양들은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다. 왜 기억을 못하는가?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예수님께 전심이 너무 많으니까 자기들이 한 그런 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염소가 문제이다. 염소는 뭐냐면, 내가 주릴 때 안 먹이고, 목마를 때, 안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고, 헐벗었을 때, 입혀주지 아니하고, 병들었을 때, 돌보지 아니하고, 감옥 갔을 때, 살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벼락 같이 염소들이 아니 내가 어느 때 내가 안 했냐고, 나는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한 것을 너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양들은 내가 언제 했냐고 한다. 염소는 내가 분명히 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는 기억을 하고 있고 하나는 너무 기억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신앙의 원칙과 섬김의 원칙이 정리가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은 은혜의식이 충만해가지고 은혜가 너무 커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섬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것이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커서 자연스러운 반응과 발현으로 그걸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날마다 윤리의식 공로의식이 충만해서 언제 한 것을 기억하고 남에게 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자기의식과 공로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은혜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고 하나는 의식적으로 자기의가 충만해 가지고 그것을 기억하고 언제 안 했느냐고 이렇게 반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의식을 통한 무의식적인 것이 행동 가준이 되어야 하지, 공로 의식에 의한 의식적인 것이 행동 기준이 되면 안 된다.’
 
*마태복음 25:44,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게 누구인가? 양이다. 공로의식에 의한 의식적인 것이 행동기준이 되면 안 된다. 저 여러분 이글을 쓰느라 한참 고생했다. ㅋ 양처럼 은혜의식이 자연스런 발현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삽비라를 보라. 자기 재산을 팔아가지고 구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즉사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의식을 해서 그런 어려운 일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런 것처럼 양은 언제 내가 섬겼냐고 잊고 있고, 염소는 내가 다 했다고 나타내는 것이다. 양은 자연스럽게 자기가 베푸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고, 염소는 자기가 선행 베푼 것을 내가 어느 때, 언제 했다고 잘 기억하고 드러낸다. 겉으로 드러나는 윤리와 섬김과 구제에 대해서 신경도 쓰고 그러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섬김과 우리의 나타나는 여섯 가지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작은 자에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주님께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은혜의식에서 먼저 되어야지 이것이 공로의식이 되면 안 된다. “목사님, 둘 다 하면 안 됩니까? 했다.” 어느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를 한 다음에 주일학교 교사가 “여러분 부자가 되고 싶어요?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죽기 전에는 부자가 되고 싶고, 죽은 전에는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 했다. 너무 그건 아니다. 둘 중에 우리는 하나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했다. 둘의 차이가 있다.
 
II. 사람에게는 진심(眞心)으로, 하나님께는 전심(全心)으로.
 

*양은 예수님 이름으로 선행을 해했고, 염소는 자신의 이름으로 선행을 행했다.
-양은 예수님과 그 어려운 사람을 동일 시 보고 선행을 했고, 염소는 자신의 이름으로 선행을 행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선행에는 내 자신의 이름으로 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고, 다 잊어버릭, 자신의 이름으로 선행을 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크면 클수록 나의 기억이 아무것도 안 나는 것이고, 구원의 감격이 작으면 작을수록 나의 공로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번 한국교회 섬김의 날, 저희가 강단 기도에서 구호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이다.’ 이걸 전력투구(全力投球)룰 하니까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행하고,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하다보니까, 자신을 생각할 에너지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죄 성을 가진 이런 인간이 염소의 유혹과 염소의 위험과 염소의 판결을 피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양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하나님께 인정받는 ‘전심’이라는 뜻은 어떤 뜻인가? 구원의 감격이 크면 클수록 내 자신의 공로는 적어지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구원의 감격은 내 인생의 분모이다. 그럼 나의 공로는 내 인생의 분자이다. 예를 들어서 구원의 감격이 이 정도 되는 사람이 내 인생의 공로가 1이 분자가 되면 ½정도가 되니까 나의 공로가 커지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백만 배 큰 사람은, 백만 배 갖고 있는 사람에게 나의 공로가 백만 분의 일(100만 분의 1)의 일은 큰 가? 작은가?? 그것은 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잊어버리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이 천만 분의 일이 되면 그것은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 되겠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감격이 2이고 내 공로는 10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아니 가분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과 분수는 날마다 자기 생각하고 자기중심이 되니까 염소가 되는 자기중심적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우리 온 성도들이 이런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늘 주여, 구원의 감격에는 분모를 키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구원의 감격에 관한한 우리는 영원한 채무자인줄로 믿는다. 그리고 은혜의 받는 데에는 선봉장이 되어야 하며, 은혜의 분모를 키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를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제 받은 은혜가 정말로 간증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흡족한 은혜를 우리에게 받아야 되는 것이고 오늘의 은혜에 관한한 모두가 다 영적인 하루살이이다. 매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분모를 키워야 된다. 이것이 키워지면 우리가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하더라도 어려움이 없이 자연스럽게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반응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지고 샬롬의 평강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제 어려운 형제에게 하는 것이 우리는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정리하겠다.
 
III. 어려운 형제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다.
-이 섬김의 대상이 누구인가? 첫 번째 먼저 생각할 것은 믿는 공동체이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마태복음 25:40,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식구만이 식구라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 15절에 보면,
*야고보서 2:15,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구제 사역은, 섬김 사역은 형제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먼저 흘러 들어가야 할 줄 믿는다.
*갈라디아서 6:9~10,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형제들에게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밖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먼저 교회 안에 선행이나 구제를 먼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공동체성과 지체의식이 먼저 확보가 되면 교회가 건강해지고 공동체가 먼저 건강해지고 더 잘 믿음으로 충만해지면 그 은혜와 축복이 공동체 안에서 확보가 되면 나머지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감당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공동체의 은혜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영적으로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영적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그다음에 은혜가 자연스럽게 넘쳐서 이웃과 세상 앞에 우리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내에 형제들에게 구제를 먼저 하는 것은 공동체가 튼실하게 될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힘 있게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이 건강하지 못하고 상처로 깨어지고 에너지가 소신된다면 교회 밖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가 없다. 돕고 싶어도 껍데기로 잠시 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의 가정들에게 먼저 선행을 하라는 이유는 우리 공동체가 건강해야 빛으로 소금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보면,
 
*갈라디아서 6:2,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교회 내에 형제의 짐도 지지 않으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순서가 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형제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3:17,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먼저 주님의 공동체가 건강해야 될 줄로 확신한다. 그래서 제가 진짜 목회자로서 정말 안타까운 것이 있다. 한국교회서도 그렇고 안타까운 것이 그것이 무엇이냐면,
 
*공의와 정의를 말하면서 교회 밖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행을 베푸는 일을 교회가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정작 교회 공동체가 먼저 건강하고 튼실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뜨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비판하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교회가 튼실하게 세워지지 않는데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이다.
 
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와 형제들이 튼실하고 건강해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막 비난하고 욕하고, 그냥 상처를 주고, 교회가 건실하지 못한 데 어떻게 밖의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겠는가? 따라서 교회 밖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인 줄로 확신한다. 이번에 사랑의교회가 9.26 섬김의 날에 보면서 정말 우리 교회가 건강해 졌다는 것을 감사하고 찬양한다. 사랑의교회가 봉사자를 모집광고를 하니까 2-3천명이 봉사에 10분 만에 봉사자 신청이 마감이 되었다고 한다. 제가 정말 ‘양의 마음을 지닌 성도들이 참 많아졌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를 향한 그럴듯한 말로 온갖 비판과 비난을 주고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면서 교회로 하여금 구제와 봉사를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구제와 봉사를 잘 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도 약점들이 다 있다. 적은 자, 우리 속에도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히고 힘든 일들이 많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다 치유하고 그런 건강함을 가지고 그 다음에 이웃을 돕는 것이다. 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에 당시에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 믿는다고 고통당한 형제들이었다. 무슨 범죄를 해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감옥에 갇힌 형제들이 많았다.

 
그래서 교회가 건강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이 건강성을 가지고 튼실하게 되고 견고한 것을 가지고 이웃을 구제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의 구제의 대상이 되고 섬김의 대상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준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누가복음 6:32,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오히려 이웃을 향하여,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기도하고, 양을 때리는 자에게도 선대하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정리하면,
 
첫 번째는 병들고 헐벗고 감옥에 갇힌 우리 형제들을 먼저 도와서 교회가 건강하게 되고 튼실하게 되고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가지고 이웃을 섬기는 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기억을 했다. 앞에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자기가 예수님 제대로 믿지 않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그럴 때에 뭐라 하고 했는가? 네가 왜 그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느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냐고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다. “고통당하는 초대교회 자들이 바로 나다. 고통 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로 나야”라고 하신다. 그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반대로 그 사람들을 구제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를 돕는 것은 나를 섬기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 하는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 줄로 믿어야 한다.
 
※어느 수도원의 원칙이 손님 접대였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수도원에 접대를 받고 환대를 받았는데 그 수도원의 원칙이 손님접대이다. 나이든 고참 수도승이 아주 피곤한 주말을 보내고 수도원 문을 잠그려고 했다. 그날따라 방문객이 굉장히 많았고, 그중에 대하기가 까다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방문객들이 모두 나가는 것을 보고 수도승은 ‘이제 쉴 수가 있겠구나~!’ 속으로 생각하고 기뻤다. 문을 잠그려는 찰나 새로운 방문객이 들어와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는가?라고 요청을 했다. 속으로는 너무 피곤했다. 그렇지만 수도승이 문을 열면서 그 사람을 맞이하면서 혼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님, 또 오신 겁니까?’ 라고 했다. 여러분 약한 자, 작은 자를 돕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9.26 섬김의 날’을 통하여 귀한 일들을 했고 잘 감당했지만 이제는 더욱 이미지가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가 알리기도 다 했지만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의식이 충만해져서 우리의 품위를 키워서 이런 것이 은혜 받은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느 날 여러분둘이 파더 보고서를, 믿음 보고서를 함께 Faith report, Father report를 받을 것이다. 받을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삶의 버킷 리스트를 얼마나 잘 했느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느냐, 얼마나 책을 많이 썼느냐?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을 가지고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섬김이 주님을 섬김을 받았다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두 손을 펼치고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사랑할수록 주 날 사랑해, 매일 내 맘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은혜의 분모를 키우자, 교회가 건강해져서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하자. 우리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여 양이 될지, 염소가 될지를 판단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 섬기고 예수님을 대하듯이 그렇게 할 때에 우리가 어떤 윤리적인 기준이 아니라, 이것은 복음에 감격을 통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축복이 우리에게 있을 줄 믿는다.
 
♧요약
우리 모두가 귀한 말씀을 통해서 이제 각자에게 의식적, 윤리적인 산 정도가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드러나서 우리의 무의식조차도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구원의 증거가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보혈에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하나님의 감격함으로 그 은혜의 분모를 키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섬김이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의 선행과 구제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우리 공동체, 우리 민족이 되기를 간구하며, 공로의식이 아닌 은혜의식으로 충만해서 자연스럽게 선행하고 구제하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섬기며 튼실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임을 깨달아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비상하기를 소망하자.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0월 1일)
제목: "자녀를 축복한 이삭의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20
대표기도: 황정호 장로님(당회 총무)
말씀읽기: 최지우 어린이(소년부),권은서어린이(초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기섭 목사님(LA 사랑의교회)
-------------------
 
*히브리서 11:20,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김기섭 목사님(LA 사랑의교회)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영혼을 채워주시는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신 여러분의 한 분 한분을 만족케 하시고 또 채워주실 줄 믿는다. 지난 2년 반의 코로나는 저희들에게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는데 특별히 교회는 코로나로 인해서 과연 ‘교회는 무엇이냐? 예배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저희들에게 던졌다.
 
이런 도전 앞에서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많이 위축되고 그리고 쉽게 패배의식에 빠질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번 사랑의 교회가 섬겨주신 한국교회 섬김의 날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이번에 총회 참석차 한국에 나왔는데 저를 위해서 준비해 주신 것 같다. 이번에 제가 참석하면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구나! 누군가가 생각해 주는구나! 우리가 함께 모이면 힘을 얻는구나! 코로나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한계,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의 한계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 도약에 대한 용기를 주신 사랑의 교회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참석한 모든 목회자들의 마음을 모아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저는 35년째 이민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민교회 목회자이다. 장로회 가정에서 태어나서 모태 신앙으로 교회 생활을 쭈욱 했지만 자라면서 교회를 통해서 험한 일을 많이 보면서 제 아내는 교회에 대한 소망이 없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은 저를 그런 교회를 섬기라고 목회자로 계속 Calling을 해주셨다. 20대를 많이 방황을 하다가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저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다가 호주를 선택해서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저를 깨시고 그리고 순종을 결단하면서 친구들이 대학을 다 졸업한 늦은 나이에 저는 시드니에게 학부와 대학원을 7년을 공부하게 되었다. 제가 호주에 가서 받은 충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호주 교회에서 젊은이와 어린 자녀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몇 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텅빈 건물 교회에 열 명, 열다섯 명의 희끗희끗한 노인들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또 하나는 한인 교회를 섬기는 1.5세대의 2세 젊은이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이민을 왔다고 한다. 쭈욱 10년, 15년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예수님과 찐한 만남을 가지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교회가 깨어지는 아픔 속에서 한인교회의 부모 1세대에 대한 적계심이 가슴 가운데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이 아이들이 졸업하고 독립했을 때, 과연 이 아이들이 신앙 생활을 할 것인가? 제가 볼 때는 그러할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짧은 기간의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순교의 피 위에 교회를 세워주셨는데, 아무리 이민의 땅에 옸다 할지라도 한 세대가 되기 전에 과연 이 신앙이 끝나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까 마음에 위기감이 오고 절박해 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저를 전도사로 불러준 것도 아니고 저에게 사례를 준 것도 아니지만, 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젓 번째 사역이 되었다. 제가 시드니에서 학부와 신대원의 7년의 학업 기간 동안에 저에 가장 큰 고민은 다음 세대에 어떻게 신앙을 계승할 것인가? 저는 이 부분을 고민을 하다가 우리 한국 민족보다도 더 먼저 호주에 이민을 와서 정착한 다른 이민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떻게 자녀세대에게 신앙을 계승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제가 찾아본 열 몇 군데 이민 교회 가운데 신앙 계승을 성공한 민족은 한 민족 밖에 없었다. 자,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더 절박해졌고 위기의식이 더 강해졌다. ‘과연 신앙의 세대 계승은 불가능한 일인가?’ 의 가운데 있을 때, 제 안에 이런 질문이 들어왔다. 지는 2000년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자녀들에게 신앙의 계승했을까? 가 저는 이것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시드니에서 학업을 마치고 미시간의 캘빈 신학교에서 다음 과정을 공부하면서 틈나는 대로 도서관에 앉아서 지난 2000년 교회사를 읽기 시작했다.
 
지난 2천년 교회사를 보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바울을 통하여 유럽과 미국을 거쳐 아시아로 계속해서 이렇게 서진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확장되는 것은 복음의 계승이라기보다는 복음의 전파라고 봐야 될 것 같다. 제가 교회 역사에서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복음을 처음 받았던 그 민족이 자기의 민족 안에서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승했는가? 의 이 부분이었다. 지난 2천년의 교회역사를 보면, 한 민족 안에서 신앙이 계승될 때에 이런 패턴들이 있었다.
 
신앙의 1세대가 있다. 이 신앙의 1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고 만났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몸으로 체험한 세대이다. 그래서 1세대는 뜨겁다. 살아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 다음 2세대는 어떨까?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난 그러한 체험한 부모를 눈으로 목격한 세대이다. 그래서 2세대까지는 신앙이 살아있다. 그러면 신앙의 세대는 어떻게 되겠는가? 신앙의 형식은 남아 있지만 예수의 생명과 능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세대이다. 자, 이렇게 한 세대가 더 넘어가 4세대가 되면 어떨까? 4세대의 신앙은 그냥 문화로만 남는다. 그래서 신앙은 어느 세대이냐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만남에 깊이가 다르고 신앙의 내용이 다르고 영적 체험과 능력이 다르고 헌신과 희생의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럼 복음이 한 민족 안에서 이런 패턴으로 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에까지 내려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이 더 이상 그 민족과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셨다. 이게 역사의 흐름이었다.
 
자, 여러분이 역사를 보라. 바울세대가 복음을 증거 했던 소아시아는 그 초대교회 당시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던 땅이었다. 바울 서신을 받은 교회들이 그곳에 있고, 사도요한의 환상가운데 나타났던 교회들이 다 그곳에 있다. 지금은 어떠한가? 99% 이슬람의 땅이다. 교회는 유적지로만 남아있다. 여러분 신앙이 세대계승이 안 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한 민족 안에서 신앙의 계승이 아름답게 이루어진 그러한 일들이 있다. 보통은 1세대가 2세대에, 3세대가 4세대에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촛대가 옮겨지곤 했는데 아주 드물게 신앙의 3세대가 다시 영적 1세대가 되는 그러한 경우들이 있었다. 분명히 세대 계승으로는 3세대인데 영적 체험으로는 1세대가 되는 것이니까 4세대가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한 부모를 보면서 몇 세대가 되는 것인가? 2세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민족 안에서 신앙의 계승이 된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 저는 도서관에서 이러한 기록들을 읽을 때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어떻게 3세대가 1세대가 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어떤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때에 가능했다면 지금도 가능하다. 하나님이 그때 가능했으면 지금도 은혜를 주신다. 사실 신앙의 3세대에게 하나님은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기보다는 부모의 하나님이다. 주일에는 그저 교회를 출석해주다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면 교회를 떠나가는 세대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3세대가 영적 체험의 새로운 1세대가 될 수 있었는가? 3세대 중, 소수의 사람들이 먼저 영적을 각성을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주님의 보혈의 그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 전에는 자기 세대에 관심이 없었다. 나의 세대에 개념 없이 살았다. 그냥 나만 잘되면 되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의 세대가 너무 불쌍한 것이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의 세대, 개념 없이 살았다. 그냥 나만 잘되면 되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 없이 자기의 세대가 너무 불쌍한 것이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세대를 가슴에 품는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달려 나와,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서 때로는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고 “하나님, 나의 세대를 살려주십시오. 우리의 세대가 내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이사야 64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하나님,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 가운데 강림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직접 강림하셔서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 떨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영적 각성을 체험한 이들이 자기의 세대를 가슴에 품고 바로 이 이사야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 필요하시면 나의 육신을 불러 쪼개시고 우리 세대 가운데 임재 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떠나가는 세대가 하나님이 여전히 통치하심을 보게 해주십시오. 내가 맛본 하나님의 세대가 우리가 함께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저들이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한 낮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는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비록 소수의 무리지만 자기의 세대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을 때에 하나님이 이 부르짖음을 들으셨다. 그리고 그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시작하신다. 이 때 이 세대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사랑했던 것들이 이 따의 것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던 것인 줄을 보게 되고, 그토록 마음 졸이며 붙잡으려고 애썼던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신앙의 3세대가 영적 1세대로 새롭게 태어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 민족 가운데 일하셨다. 저는 35년째 이민교회를 섬기고 있다. 저는 늘 우리의 자녀 세대를 주님 앞에 세우지 못하면 우리 부모세대는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희의 교회에게 나의 자녀를 주었는데 너희 자녀가 어디 있느냐?” 하실 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주신 하나님 자녀를 다 빼앗겼습니다.”라고 우리가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한국교회도 위가 같아 보이는데, 이 중차대한 시대에 우리 부모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오늘 본문이 이삭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사실 이삭의 삶에는 대단한 기적이 잆다. 대단한 영적인 체험이나 간증도 별 기록이 없다. 요셉처럼 고난 가운데 다져진 영성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자, 그런데 성경은 지금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근거로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이삭이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했다. 이삭이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했다.
 
자, 여러분, 부모라면 자녀를 축복하는 것 아닌가? 아니, 부모가 자녀를 축복하는데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가? 자 그런 한 번 생각해보라.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얼마나 축복하였는가? 내가 자녀를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그거 말고, 결국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그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지난 한 주간 얼마나 축복해 오고 있는가?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믿음으로 축복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이삭은 자녀를 믿음으로 축복했다. 믿음으로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 자 그럼 이삭은 어떤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했기에 하나님이 이것을 위대한 믿음으로 평가하고 있는가? 이삭의 삶에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창세기 22장 번제 단 사건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 자, 이삭의 목을 따기 직전에 천사가 아브라함을 말리면서 아브라함을 향해서 이런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창세기 22:16-17,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이 주실 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하는 승리를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세상 모든 민족이 너의 자손 때문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기고 약속하신 축복의 내영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아브라함아, 너의 믿음이 너무 이뻐서 너의 믿음 때문에 감동을 먹었는데 내가 너를 안아줄게, 내가 반드시 너와 너의 자녀들을 축복할거야, 내가 너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이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겠다.” 그리고 그 복의 내용이 자녀들을 향한 축복의 도장이었다. 자, 그러면, 천사가 축복할 때 이삭은 어디에 있었는가? 번제 단에 누워있었다. 죽을 뻔하던 그 번제 단 위에 이삭은 누워있었다. 이삭은 그 번제 단 위에 누워서 천사가 축복하는 이 선포하는 약속을 들었다. 저런 이삭은 자신은 어떠한 존재일까? 이삭이 볼 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일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내가 누구냐? 은사가 무엇이냐? 가능성이 무엇이냐? 여러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이삭이 붙잡고 살았던 믿음이고 이삭은 실제 자신의 살면서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이삭은 물이 귀한 그 토양에서 가는 곳마다 땅을 팠고 땅을 파면 물이 나왔다. 창세기 16장을 보라.
 
온 땅에 가뭄이 들었다. 농사를 지을 때, 홍수보다 무서운 게 가뭄이다. 가뭄이 들면 그 지역자체가 피해갈 수가 없다. 그때 이삭은 그 가뭄에 백배의 결실을 맺어서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이삭은 자신이 왜 그 복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아버지의 믿음과 순종 때문이다. 이 복은 자신만 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녀들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삭은 이것을 믿었다. 이삭이 야곱에게 두 번의 축복을 한다. 처음에는 야곱에게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하고, 또 한 번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기 전에 작별 인사를 왔을 때, 이삭이 야곱을 더 축복한다. 그런데 여러분, 이삭이 야곱을 축복했던 이 두 번의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리아 산에서 천사가 전달해 주었던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이다. 자신이 번제 단 위에서 들었던 하나님이 약속 그대로를 당신의 아들들에게 똑 같이 선포하고 있다. 무슨 의미인가? 이삭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기억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했던 것이다.
 
자 여러분, 이삭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할 당시에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한 백 명쯤 되었는가? 그럼 이삭에게는 아들이 두 명 밖에 없었다. 자 그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와 같이 그러한 후손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가능성이 있었는가? 아니다. 여러분, 눈의 현실에서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또한 야곱과 에서의 삶을 한 번 보라. 그들이 무슨 선한 삶을 살았는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믿음의 여정을 걸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삭이 자신의 자녀들을 축복했던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가 자신의 여력에 달려 있었는가? 자녀들의 가능성에 있었는가? 아니다. 이삭은 단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다. 자녀들의 현재 모습에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이 인생은 된다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자녀들의 하나님이다. ‘내가 축복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을 이루신다.’ 이삭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다. 이걸 믿은 것이다. 이 믿음으로 자녀들을 축복했고 하나님은 이것을 위대한 믿음으로 인정하고 계신다.
 
여러분 이삭이 복을 받은 것은 누구 때문인가?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다. 야곱과 에서가 복을 받은 것은 그 이삭의 믿음 때문이다.
 
민수기 6장에 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가 22절부터 읽겠다. 하나님이 모세와 제사장들에게 축복을 하라고 명령을 하신다. 자기들의 축복이 무엇인가? 여러분, 축복의 내용을 주셨다
*민수기 6:22-27,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아멘인가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자녀를 축복해야 한다. 현재 아름다운 모습이 선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속을 뒤집어 놓을 때도 자녀들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축복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선포할 때마다 여러분의 자녀들의 삶에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이렇게 되실 것이다. 저희 모친이 한국나이로 93세이신데, 저희 아버님은 함경도에서 월남하신 장로님이셨는데 저희 어머니 35세에 그리고 제가 한 살 때에 돌아가셨다. 제가 태어난 강원도, 저희 집에서 읍내 교회에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 1시간이 걸렸다. 저희 어머님은 저희 누님 셋과 저, 4남매를 키우시면서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새벽예배를 빠지신 일이 없다. 저희 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16개월 동안 어떠한 모임도 하지 않았다. 교회가 완전히 문을 닫았던 이 16개월 동안 저희 어머님과 제가 새벽 제단을 지켰다. 저희 어머님은 지금도 의자에 앉으시면 이렇게 손을 드시고 일단 앉으시면 두 시간이시다.
 
여러분, 우리 어머님의 무릎의 복을 누가 받겠는가? 제가 받는 것이다. 믿고 축복하시는 어머님 때문에 그 복을 제가 받는 것이다. 저는 어머님의 평생의 눈물을 먹고 오늘까지 살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를 위해 흘린 눈물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자녀를 위해 꿇었던 무릎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축복의 선포는 반드시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이 약속을 믿고 축복하라. 선포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일하신 위대한 간증들이 많아지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요약
우리 가정에 언약의 가정을 주신 하나님을 보며 죄악이 넘쳐 가치관이 무너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녀들이 악한 영의 공격과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 한 분을 참된 창조주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고백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길 소원해야 한다. 우리 자녀들의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건케 하여 믿음이 말씀 위에 뿌리 내려져서 세상을 분별하는 맑고 깨끗한 영을 부으셔서 이 시대와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자랑스런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영광과 성령의 임재의 날마다 사로잡히게 하는 기도를 올리며, 어릴 때부터 분별력과 민감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목마른 가슴으로 달려 나와 은혜를 구하는 뜨거운 신앙인으로 자라나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믿음과 인격과 품성과 꿈과 비전의 능력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고, 자신을 세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자신이 신실하게 준비되어 한 번 사는 인생에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이 되고 믿음으로 축복하는 부모, 교사가 되어야 한다. 내일 예배 준비와 모든 영역에서의 봉사도 주님께 하듯이 전심으로 하며, 모든 성도님들과 지체들에게는 진심으로 섬기며 늘 하나님이 자녀로서 기쁨으로 헌신하며 살아가야 한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9월 29일)
제목: 빚진 자(임직식 헌신예배)
대표기도: 박진석 목사님(동서울노회회장)

말씀: 로마서 1:8-15
찬양인도: 할렐루야찬양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권순웅 목사님(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장, 주다산교회)
 
----------------------------
*로마서 1:8-15,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권순웅 목사님(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장, 주다산교회)
30년 전에 제가 교회를 개척했다. 하나님 앞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하나님, 제가 왜? 개척을 합니까?” 이렇게 여쭈어 보았다. 그때 저에게 주신 감동은 “네가 은혜 받기 위해서”라 하신다. 그 뒤에 30년 동안 보니까 우리 교회에서 가장 은혜 받은 사람이 저였다. 저는 공 예배를 빠질 수가 없다. 모든 프로그램에 제가 뒷걸음질 칠 수가 없다. 헌신할 때도 제가 도망갈 수가 없었다. 보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 받게 하기 위해 주셨다. 오늘 이 임직 귀한 말씀을 주신 이 시간도 제가 여기에 온 것은 제가 은혜 받기 위해서이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교회가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일할 때에 하나님이 사랑의 교회를 가지고 큰 부흥의 역사를 허락하셨다. 할렐루야!!!
 
제가 담임 목사님을 통해서 잠깐 말씀을 들었다. 어제 5,543명의 목사님들이 모이셔서 함께 기도하는데 정말 천정이 무너질 줄 알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진동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성령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고, 바람 같은 성령께서, 불과 같은 성령께서, 생수 같은 성령께서, 부어주신 줄 믿는다. 그 주신 감동이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그 말씀을 받으면 오늘 임직 자 다 받았다. 그래도 저를 설교자로 세워주셨으니까 조금 설교를 하겠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빚진 자이다. 저는 옥한흠 목사님한테 빚진 자이다. 어떻게 목회를 할까? 어떻게 교회를 섬길까를 놓고 기도하는 중에 제가 직접 제자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저는 컨닝을 한 제자이다. 테이프를 다 구하고 다른 교회 목사님을 통해서 배웠다. 그 중에 1강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광인론이었다. ‘미칠 광(狂)’자였다. 예수에게 미쳐라, 복음에 미치라, 교회에 미쳐라. 제자훈련에 미쳐라, 미쳐라 하는 것이다. 그 감동을 제가 받는 즈음에 총신신학대학원 재학을 할 때였다. 학생들이 저를 보고 학생회 대표를 하라고 했다. 제가 기도원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제가 대표를 해야 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구호를 하게 하셨다. 그 구호를 시연하겠다. 구호 준비, “야!! 이렇게 이러이러 하라했나 했나? 저칼라고 저칼라고 저래했나?” 해석을 좀 다르게 하겠다. “이렇게 하려고 했나? 저렇게 하려고 저렇게 하려고 했다. 이겨라! 뛰어라! 미쳐라 야!!” 이게 제 구호였다. 그 구호를 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왔다. ‘와, 응답이구나!’ 해가지고 제가 회장 출마를 했다. 우리 클래스에 70여명이 모였었는데, 제가 여러분들이 회장을 하라고 하니까 출마의 변호를 하겠다. 출마의 변을 제가 구호로 하겠습니다. 했다. “야!! 이렇게 이러이러 하라했나 했나?” “저칼라고 저칼라고 저래했나? 이겨라! 뛰어라! 미쳐라 야!!” 여러분 같이 아무도 웃지 않고 너무 깜짝 놀래가지고 저를 가만 보고 있는 것이다. 끝나고 나서 저에게 몇 명이 왔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우리 표 찍어 줄 테니까“ 그래가지고 제가 원회장이 되었다. 그 뒤도 제가 신학교 졸업하고 어떻게 목회를 할까? 광인론, 그래서 그 목회를 저는 오리지날 목회, 오리도 지랄하면 날 수 있다. 오리지날 목회, 광인론 목회였다. 그런데 이 ‘오리지날’이라는 말을 오리도 지랄하면 날 수 있다는 말을 철학자들은 좀 견해를 달리 한다.
 
*‘안드레 센’은 절대 오리가 지랄해도 나을 수가 없다. 왜? 원래부터 백조였다. 백조가 어떻게 오리가 될 수 있게냐?고 이야기 했다.
 
*‘키에르 코르’도 같이 이야기 했다. 오리가 아니고 원래 기러기였다는 것이다. 기러기가 오리한테 섞여 살다보니까 기러기가 타락해서 오리 같지만 오리는 절대 날을 수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도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 있는 시계의 진자와 같다. 고통과 권태 사이에 있는 진자와 같기 때문에 오리가 날 수 없다고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이다. 육체와 세상의 종, 마귀의 종노릇 하던 자이다.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신학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지옥의 뗄 감의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이 죄인을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공의화 하나님의 사랑을 만족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 보혈을 흘려주셔서 우리 억만 죄악을 다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셨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생이다. 이 죄인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무조건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가 바로 그 복음을 받은 자이다.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내가 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이다.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빚진 자이다. 성삼위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그 십자가의 희생의 속죄의 제물과 성령 하나님의 인 치심으로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다시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의 복을 받았다.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영생권을 받았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교권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권세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로 이 땅에 살게 하셨다.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이다. 또한 오늘 말씀에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우리는 교회에 빚진 자아다.

 
*로마서 1:14,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를 핍박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을 때, 그 자리에서 옷을 지키는 스데반을 살해하는 그 모든 자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사명을 가지고 초대교회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서 제사장으로부터 그 자격증을 받아가지고 다메섹 도상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다. 이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교회이니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가 핍박하는 예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몸인 것이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다. 사울을 그곳에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에 했던 첫 마디 말씀이 무엇인가? “주여,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제가 복음을 만났습니다. 제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일생이 무엇입니까? 제가 하리이까?”라고 한다. 복음의 빚진 자는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오늘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 안수집사님들, 복음을 만났다. 주님을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를 이렇게 주님을 만나게 해 주었던 바로 교회인 것이다. 오늘 우리 임직 자 가운데 특임 장로님이신 이병구 장로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 저의 고등학교 선배님이시다. 저는 대구 계성 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계성 학교는 아담스 선교사님이 세운 학교이다. 그 아담스 선교사님의 누님이 먼저 조선에 와서 보니까 그 죽은 아이들을 담에 널어놓았더라는 것이다. 저게 무어냐고 하니까, 그 당시 아이들이 마마에 걸려 죽으면, 손님이 와서 죽었기 때문에 손님이 떠나려면 바로 담장에 널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티푸스 콜레라로 죽은 수많은 사람들도 다 버려졌다. 과학을 모른다. 이 지식을 모른다. 복음을 모른다. 그러한 가운데 아담 선교사님이 경북에 와가지고 그곳에서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그 학교가 대구 계성학교였다. 그곳에서 복음을 만났다. 우리는 교회의 빚진 자이다. 그 선교사님들이 생명을 걸고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받았겠는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고 오늘 바울 같이 ‘로마에 있는 교회, 당신들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내가 날마다 기도한다.’ 라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이 교회 때문에 우리가 세워진 줄로 믿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영혼구원의 빚진 자이다. 오늘 말씀에도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전하지 않는데 누가 들으며, 듣지 않는데 누가 믿으리요.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여, 라고 말씀했다. 그 복음은 증거 되어져야 한다. 그 복음을 받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전도를 받아서 내 영혼이 구원을 받고 내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직분자로 세워지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겠는가? 저희 교회에 황선애 집사님이라고 있다. 제가 개척교회일 때이다. 이분은 유방암 말기에 우리 교회에 왔다. 유방암 말기에 너무 고통이 심해서 얼마나 아프시냐고 물으니까, 대바늘로 콕콕 찍는 느낌이 어떠한지 아느냐고 했다. 그분은 밤마다 교회에서 기도를 했다. 그분의 찬송 소리가 지금도 저의 귀에 맴돌고 있다.
 
♬주님이여, 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 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이여 날인도 하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제가 그 때 홍콩에 단기 선교에 가게 되었다. 제가 가기 전에 임직 자 수련회를 했다. “목사님 제가 교회에 가서 강의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테잎이라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시면 제가 주의 일을 하겠습니다. 저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면 하나님을 하겠습니다.” 했다. 그 테입을 또 듣고 또 듣고 했다고 한다. 홍콩 선교를 다녀오니 그분이 소천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흡을 주셨다.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다. 우리는 살아있다. 빚진 자로서 복음의 빚진 자, 우리는 교회 빚진 자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주셔서 이 빚진 자의 사명을 가지고 감당하기 원한다. 이러한 큰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성도가 영적으로 빚진 것은 먼저 복음을 받은 것과,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과, 다른 성도들의 사랑과 도움을 받은 것이다. 

임직자는 빚진 자로서 사명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주님 앞에 사랑과 헌신으로 평생을 살아서 몸 된 교회에 충성자, 하나님의 기쁜 자녀가 되기를 축원한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9월 25일)
제목: "풍랑 앞에서"
말씀: 마가복음 4:35~41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구성찬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마이클 리브스 목사님(영국 유니온 신학교 총장), 이원준 부목사님 통역.
--------------------------------
 
*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마이클 리브스 목사님(영국 유니온 신학교 총장), -이원준 부목사님 통역.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이렇게 제한 없이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이 3년 만이다. 유니온과 웨일즈에서는 여러분을 위해 그동안 계속 기도해 왔다. 제가 섬기고 있는 유니온과 웨일즈에서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수 없었지만 마음과 기도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면하여 여러분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정말 사랑의 교회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그 우정과 따뜻함과 하나님을 향한 그 열정, 그리고 저에게 주시는 수많은 격려들을 참 그리워했었다. 오늘은 이 시간, 제가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권면과 은혜가 되기를 소망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광풍을 잠잠케 하신다. 저는 여러분과 이 말씀은 보고 싶은 이유가 있는데 우리가 앞으로 어떤 날씨를
맞닥뜨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햇빛이 비치는 시간도 있을 터이지만 광풍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계의 동향을 미루어보면 우리는 머지않아 광풍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계를 살펴보면 교회들이 연약하여 지고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작은 숫자의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마치 예수님께서 배에 잠을 주무시고 계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주님께서 주무시고 계시면서 우리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 인지가 없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세계 곳곳에서는 이 팬데믹의 이후 현상들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공항의 상황도 우리 앞에 있다. 우리가 그동안 건강을 두려워했던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재정 상태를 걱정해야 되는 상황을 만나고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걱정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오늘 마가복음 4장으로 나오라. 광풍을 주님과 함께 돌파에 가는 그 과정들을 함께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 제자들이 배에 오르기 전까지는 매우 좋은 날을 보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내셨고, 가르치시고 이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처럼 보였고 구름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이 광풍이 찾아온다. 교회 역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성공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정진이 있는 나라의 다음에는 다양한 고난과 도전들이 생겨났다. 복음이 전진하는 곳에는 마귀가 분노하고 있다. 자 이제 이 광풍이 다가왔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 번 보자. 그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이 광풍이 그들이 믿음마저도 굴러 나가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상관하시는지 돌보시려는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것이 보이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얕은지를 잘 모르게 된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믿음이 굉장히 단단하고 큰 것처럼 느껴지는데 모든 것이 순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풍이 일어나는 때에 진정한 믿음이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들로 인해서 우리의 믿음과 삶이 연약해지고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이런 광풍이 우리의 삶에 찾아올 때에 우리는 피로해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광풍이 찾아올 때에 예수님께서 나를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광풍이 찾아올 때에 배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은 저 위에서 상관하지 않고 돌보시지 않으시고 주무실 때가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 제자들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보기를 바란다. 제자들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들이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을 향한 감사한 마음이 사라진 채로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불신은 이런 경향을 만들어 낸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 평온함이 없을 때,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하는 그 기능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풍랑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불안함과 불친절함으로 이어지게 된다. 자, 우리도 한 번 질문해 보자. “선생님, 우리가 죽는데 상관하지 않으시겠는가?” 여러분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를 상관하지 않기 시작했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지만 예수님은 제자들과 똑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다. 예수님도 똑 같은 위협 앞에 놓여 배가 침몰하게 되고 전복하게 되면 예수님도 빠지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런 위험 가운데 예수님은 어떻게 주무실 수 있었는가? 예수님께서 주무신 것은 그가 단순히 피곤하셨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의 아버지의 손 안에 그 삶이 있다는 그 믿음 때문에 주무시고 평안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를 보면서 예수님의 주무심에 대해서 잘 살펴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가 여기 등장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그의 주무심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의 주무심이 설교였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셨다.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광풍이 있는 가운데도 너는 안식할 수 있어. 너를 그토록 돌보심에 그분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안식할 수 있는 거야.” 그의 주무심은 그가 우리를 돌보시는 것을 끊어내신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잠잠히 주무심이 느껴지는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돌보심은 그분의 끝남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유혹이 다가온다면, 그러니까 주님이 주무시는 것 같아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는 이런 유혹이 찾아온다면,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삶이 여러 가지 고단함과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이 상관하거나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이 느껴지는 그 순간이 다가온다면 여러분 기억하기 바란다. 그른 우리를 향한 그 돌보심과 사랑을 끊으실 수 없는 분인 줄 믿는다. 그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영원하시다. 그는 그의 모든 역사 가운데 친절하시다. 그의 이름, 존재 자체가 사랑이시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다. 여러분 기억하라. 여러분을 위해 그의 보혈을 흘려주셨다. 여러분을 잊으시거나, 여러분을 향한 그 사랑이 식으실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을 던져서 얻으신 바로 여러분이 바로 상급이요, 보물인 것이다. 여러분을 내 버려두기 원하셨다면 이미 전에 짐작하셨을 것이다. 여러분의 어떤 죄악도 그를 놀라게 하는 죄악은 없다. 그의 사랑을 먼저 작정하셨을 때에 그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는 절대로, 절대로 그이 자녀들을 버리시지 않으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광이 그 길로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있는 어려움과 아픔을 그도 느끼신다. 여러분 기억하라.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가 정말 돌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오히려 이 광풍을 통하여 제자들과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제일 먼저는 제자들의 자신의 대한 것이었다. 이 광풍이 없었다면 아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여러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다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례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광풍이 이들이 얼마나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게 되었다. 그리고 이 광풍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만 그를 신뢰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광풍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욱 의지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예수님께는 이 광풍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어떠한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다. 여러분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오를 때에 어떤 유람선을 타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타라고 하셨기 때문에 탔다. 잘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이다. 고난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쳤을 때 이런 현상이 이와 같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가 무얼 잘못했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평탄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 광풍을 거쳐서 그와 함께 영광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고난의 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등을 돌리신 시간이 아닌 것이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훈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의 금을 용광로(鎔鑛爐)에 집어넣는다. 여러분의 삶의 고단함과 고초가 있다고 해서 그가 여러분에게 등을 돌리셨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말라. 하나 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있다. 바다와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그 주님의 능력을 이 광풍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이 광풍이야말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게 되는 현장이었다. 자, 여러분 이 가르침을 제자들이 깨닫게 될 때, 조금이라도 깨닫게 될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한 번 살펴보길 바란다. 자, 여러분 파도가 일어날 때, 이들의 두려움이 찾아온다.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시고, 그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면,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이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두려움인 것이다. 이 두려움이 이 두려움을 교체해 버린 것이다. 이제 파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두려움을 사라지게 한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이 진정 예수님임을 믿고 그 안에 안식하게 될 때에 우리 안에 모든 불안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가 그분이 말씀을 깨닫고 안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모든 광풍을 해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줄로 믿는다. 어떤 계절, 어떤 날씨가 찾아와도 주님이 함께 배에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파도의 주인이 되신다. 자, 모든 것들의 주인 되신 그분이 파도에게 어떤 것을 하시는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그가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일으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리고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절박한 상황도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곧 이 세상을 덮고 있는 광풍을 주님께서 잠잠케 하실 날이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우리가 그를 바라보며 그의 영광을 바라보게 될 때에 그저 잠잠해진 바다 이상을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그로 채우기 시작할 때에, 우리의 모든 불안함은 잠잠해지고 주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될 줄로 믿는다. 교회가 주님을 이런 경외함과 경이로움과 흠모함으로 바라보게 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뭐라고 부르는가? 바로 부흥이라고 하는 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그저 파도만 바라보고 광풍만 바라본다면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불안함으로 우리의 삶이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든 관점을 그로 채우기 시작할 때에, 그의 모든 사랑과 위엄을 바라보게 될 때에 교회가 살아나게 될 줄 믿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부흥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성도들이 일어나 기쁨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바로 부흥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이 세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광풍을 통해서 제자들은 하늘과 땅의 주인 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어두운 시간일수록 그의 영광은 가장 더 밝게 빛나는 줄 믿는다. 우리의 삶도 이러하기를 바란다. 이제 눈을 들어 파도를 보지 않고, 위를 바라보기를 바란다. 모든 것들을 통치하시는 그분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여러분의 면류관을 벗어 그에게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엎드릴 때, 그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엎드릴 때에, 교회는 일어날 줄 믿는다. 부흥으로 이어질 것을 믿는다. 시편 34편은 그를 바라보는 자는 해와 같이 빛난다고 말한다. 그를 바라보라.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주시고 지키시길 원한다. 그의 영광스런 얼굴의 광채를 여러분에게 비치시고 복 주시길 원한다. 그의 얼굴을 들어 그의 얼굴을 비추시고 평강 주시길 원한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 아멘,
 
♣요약
인생 항로에는 잦은 풍랑이 있는데 그러한 풍랑 중에는 주님이 즉시 구원치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풍랑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풍랑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풍랑이 닥치자 크게 두려워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 인생은 세상의 풍파만 보면 겁먹고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임마누엘 신앙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하겠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9월
제목: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말씀: 로마서 14:7~8
대표기도: 박주형 피택장로님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9월말씀읽기: 권승혁학생(다니엘중등부), 김은서 학생(다윗증등부)
찬양인도: 신임 임직자 일동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로마서 14:7~8,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오늘 이 고백이 그대로 된 줄로 믿는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다. 수많은 권속들이 꿈을 꾸고 헌신할 때,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우리가 집중하고 헌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 교회가 살아야 이 민족이 사는 것이다. "교회가 살아야 민족이 산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가 죽으면 민족이 죽는 것이다. 교회가 망하면 민족이 망하는 것이다. 교회가 살면 가정이 사는 것이다. 교회가 살면 아이들이 사는 것이다. 교회가 살면 우리 모든 공동체가 이 민족과 우리 시대가 살아지는 것이다. 따라서 어찌하든 간에 상관없이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는 살아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가 살기 위해서, 아니 이 민족이 살기 위하여 하나님나라가 새로워지기 위하여 오늘 임직 자들 헌신 예배를 주님이 받아주시기를 원한다. 저 오늘 긴 말씀을 드리지 않는다.
 
오늘 말씀은
*로마서 14:7~8,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저는 잠깐 73년에 서울에 올라와서 서울 상황을 보고 74년도에 서울에 올라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뭐 그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차도 무궁화도 못타고 완행열차를 타고(부산역출발-서울역에 도착 못하고 용산역에 도착하는 기차이다. 시간은 11시간 반 결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11시간 반이었다.73-74년 이때에 알 사람은 알 것이다. 알 사람은 알 것이다. 오는데 그때는 서울에 아는 분도 거의 없고, 그냥 올라오는데 우리 부친이 저에게 봉투를 하나 주셨다. 저는 정말 이 안에 얼마가 들어있을까를 기대하고 있는데 봉투를 딱 열어보니 봉투 안에 돈은 한 푼도 없고 오늘 이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과 한두 줄이 더 있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가 왜 이래야 되는가? 이렇게 되어야 될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여러분이 인생을 열심히 살아봐야 결국은 여러분은 안 된다.
막판에 가면 아무리 애써봐야 마지막 주님 앞에 서면 아무도 자기를 위해서 살았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생을 살다가 주님 앞에 서는 것이다. 여러분 대한민국에 작년에 죽은 5대 부자가 죽었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래서 그 딸 미성년자 딸이 전 세계의 최고 부자가 되었다. 그 미성년자가 가운데서, 지난주에 나온 소식이다.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도 불쌍하다. 대단한 것 같지만 안 불쌍한가? 그리고 그 대통령을 공격하는 야당도 불쌍하다. 다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하는데,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수고해도 내 것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살아야 되는데, 부모가 자기 자녀를 위해서 살면 그 나름대로 고상한 것이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살고 아내가 남편을 이해서 살고 그것도 나름 고장하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고상하다. 그 나름대로 의미와 뜻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나중에 막판에 가면 자식 때문에 가슴앓이 하고, 자식 때문에 상처받고 남편과 아내 때문에 눈물과 한숨으로 지내는 그런 어떤 부부가 얼마나 많은가? 그럼 딱 하나 알아야 된다. 결국 인생 앞에 살아도 자기 것이 안 된다. 웃음이 있는 것 같지만 여러분 70-80가면 다 그렇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들었다. 90된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할머니가 계시는데 밥해드리고 왜 살아있냐고 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공동묘지에 저 가 있는데 당신은 왜 살아있냐고 했다는 것이다. 아!, 기가 막힌 인생이다. 나름, 그러니까 나름 국가를 위해서 산다. 는 것도 고상하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살아도,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살아도, 국가를 위해 살아도 다 나름대로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나은 인생이지만 최고의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사는 다 주의 것이로다.’ 이것을 우리가 죽을 때까지 기억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아무리 살아도 내 것이 안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주을 사는 것이다.
주님이 무엇인가? 여기에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도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그 사이에 비어 있는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우해서 희생(犠牲)하셨다.’ 저의 부친이 저에게 주신 생명부지의 말씀이다. 그 다음에 또 하나와 두 구절을 더 주셨는데 고전 6장 19절이었다.
*고린도전서 6:19-20,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저는 부족함이 없겠는가? 저는 제 마음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저도 청년의 시절, 그 질풍노도와 같은 시절을 저도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 ‘너는 네 것이 아니야, 너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것이야.’ 라고 값은 주고 산 것이었으니 주님이 희생하셨으니 그럼으로 너의 몸을 가지고 네 맘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하신 것이다. 거기에 오늘 임직하신 분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값을 주고 희생하셨기 때문이며, 그러니 우리가 적용을 하면 이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깨닫고 희생하면 그 희생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희생이 능력이 되는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우리 교회는 강단기도를 계속했다. 어제 같은 경우는 천여 명 이상이 와가지고 어제 오후 완전히 마무리를 하면서 우리가 그 지팡이를 하나씩 다 받았다. 얼마나 큰 지팡인 줄은 묻지 않아도 된다. 지팡이를 하나씩 다 받았다. 말씀의 지팡이를 다 받았다. 우리가 한 달 동안 주님 앞에 기도하고 헌신하고, 주님 주신 지혜를 가지고, 영적인 한 제목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사람에게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그렇게 기도하고 헌신하고 좋은 의미에서 거룩한 희생을 하니까 그렇게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여러분 능력은 희생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의교회 지난 44년간은 곳곳마다 희생의 발자취가 여기에 다 있다. 그 희생 때문에 사랑의교회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만큼 시대 앞에 누가 뭐래도 한국교회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능력을 베풀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부모 중에 할아버지 할머니 중에 누군가가 희생하니까, 그 다음 자녀 세대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시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큰 헌신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물질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은사도 주시고, 능력도 허락해 주신 것이다. 오늘 임직 헌신예배를 드리는 분들, 이번 주 임직 헌신예배에서 제가 못한다. 임직헌신 예배는 우리 총 회장이 오셔서 설교를 하신다. 오늘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다른 것이 없다. 주님 나라를 위하여 눈뜨고 어차피 살아도 내 것이 안 되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서 희생하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주님을 본받아 우리가 주님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면, 그 희생이 능력이 되는 줄로 믿는다. 그러면 이 희생이 희생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여러분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처럼 나를 완전히 주님께 올려드리고 맡겨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님이 책임을 지신다.
 
한 달 동안 저는 그렇게 많은 잠을 못 잤다. 좀 육신적으로 좀 한계가 있었다. 잠을 잘 때보다 한두 신간 덜 잤는데도 그 덜 자도 조금 괜찮았다. 이유는 ‘에라 모르겠다. 주님이 알아서 하세요!’ 했더니 그냥 주님께 맡겨버렸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면, 편안한 잠을 주시는 것이다. 집중력 있는 잠을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 너무 중요한 일이다. 희생하고 맡기면 평안을 주신다. 희생하고 맡기면 단 잠을 주신다. 희생하고 맡기면 집중력을 주신다. 오늘 이 마음이 오늘 모든 임직 자들에게 평생의 지팡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살아봐야 우리 것이 안 된다.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희생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신다. 이 정도만 하면 그냥 잠을 자도 평안하고 어쩔 때는 가슴이 벙벙하고 온갖 일이 불안하고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 다 날려 주시고 그것 다 맡기고 나면 삶이 평안해지고 일상의 삶이 즐거워지고, 아내와의 교제가 너무 감사하고 말을 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오늘 영상을 하나만 보아도 감격이 되고, 축복이 되고, 능력이 되고, 오늘 이 자리가 그런 헌신의 자리라 믿고 우리 헌신하고 주님 앞에 임직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속에 평생 이런 마음을 갖고 여러분들에게 단잠을 주시고 인생의 단잠 같은 일들이 펼쳐지길 여러분 생애을 머리부터 말끝까지 축복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번에 우리가 이와 같이 강단 기도를 마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이렇게 하고 나니까, 중요한 것은 주의 능력과 은혜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 중에 하나가 서로 깨어지고 형제자매들끼리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현상이었다. 하나 됨의 축복이었다. 그래서 저는 찬송과 존귀 영광과 권능, 거기에 대한 감동이 된다. 그 찬송은 우리 코로나 시대를 이겨내게 하는 중요한 하나님이 주신 찬양임을 확신한다. 그러니까 부흥의 현장과 흔적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곳에 찬송이 배어 있는 것이다. 제가 70년대, 80년대 강력하게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부흥을 주실 때, 악보를 받은 대로, 제목대로 하나님께서 하나 됨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70년대, 80년대 대 부흥을 주셨다. 특별히 청년 대학생들에게 갑절의 은혜와 강력한 부흥을 주셨기 때문에 청년 대학생들이 나중에 90년대, 200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나라 곳곳마다 요직에 퍼지게 되었다. 그 때 청년들이 유학을 갔다가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해서 깨어지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아서 그 때에 부흥했던 사람들이 지역 곳곳마다 다 산재해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께 쓰임 받고 그래서 이 민족이 이만큼 오게 된 것이다. 정치를 잘해서 그런 게 아니다. 정치가 잘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준비되고 무장되어 와가지고 이만큼 된 것이다. 어떤 의식단체의 몇 명이 나라를 난리를 치기도 하고, 어떤 단체가 그런 사람이 대통령도 만들고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런 거룩한 의식 개혁을 통해서 마음을 모을 때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같이 완전히 이 악보를 가지고 찬양하고 마음을 다하여 같이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 온 ‘9.26의 5543명의 목회자와 사모님들, 아마도 5600명이 넘을 수도 있다.
 
이 모든 분들이 오셔서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부흥을 하고,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새로워질 것인가?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겠는가?’의 제목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25개 교단에서 따로 따로 오신 모든 분들이 각 지역마다 골고루 오신 모든 분들이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주님의 보혈과 희생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할 줄 믿는다. 그리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희생하신 것인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은,,,
⓵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두를 섬기셨다. 섬김으로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시길 기도하고
⓶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자훈련을 하셨다. 그 훈련을 통하여 하나가 되게 하여 주셨고,
⓷주님이 그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다.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 나누어졌던 것을 하나가 되게 하심을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⓸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우리 모두가 부흥하도록 만드셨다. -헌신을 통하여 모든 악한 마귀의 세력을 다 묶어주시길 소원한다. 하나님도 한 분, 우리 왕도 한 분, 한 몸이라는 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가사 하나하나를 가지고 5600명이 다 다르지만 이 찬송을 같이 하면서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부흥의 초석이 되길 소원한다. 우리 마음도 한 마음이오니 한 마음으로 찬양하고 헌신하다.
 
♪한 마음 주소서
한 마음 주소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한 마음 주서서. 한 마음 주소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하나님 한분이듯 우리 왕도 한분이듯
우리가 한 몸이오니 한마음 주소서
한 마음 주소서 한 마음 주소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한 마음 주소서 한 마음 주소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
--------------------------------------
 
요약
우리 교회 모든 봉사자들이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에 참석하시는 목회자의 부부 분들을 예수님의 따뜻함과 겸손으로 섬길 때 준비된 모든 순서들마다 벅차오르는 감동과 은혜가 넘치게 해 주시길 기도하며 우리 교회가 진심이 되게 하며, 한국교회에 대 부흥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게 하시길 한마음으로 섬기며 기도해야 한다.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 거룩한 의병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한국교회사(史)의 새 전성기를 시작하게 되명 평생이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자.
 
모든 신임 임직 자들이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낮은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던 예수님을 따라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지사충성(地死忠誠)하는 착하고 충성되게 쓰임 받아야 한다. 영적 산실인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내일 예배에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은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오니 평생 사명으로 살고 말씀을 중심으로 실천하는 자가 되고 헌신하는 다짐을 모두가 갖어야 한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9월 19일 (766)

1. 증시가 전반적으로 약세장을 이어가는 가운데 일시적으로 반등하는 상황을 묘사한 말은?

①산타 랠리
②베어마켓 랠리
③기저효과
④캘린더 효과

2. 주가가 일정 범위에서 등락을 거듭할 때 흔히 증시가 ‘이것’에 갇혀 있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것에 적절한 말은?

①가격제한폭 ②박스권
③상한가 ④하한가

3. 다음 중 나라 살림의 건전성과 지속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는?

①국제수지 ②경상수지
③본원소득수지 ④관리재정수지

4. 다음 중 경제 상황과 전망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는?

①IRA ②LTV ③CSI ④PBR

5. 실업률은 ‘이것’ 중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가리킨다. 이것에 들어갈 지표는?

①경제활동인구 ②비경제활동인구
③생산가능인구 ④총인구

6. 실업자 수와 취업자 수를 더하면 ‘이것’과 같아진다. 이것에 들어갈 지표는?

①경제활동인구 ②비경제활동인구
③생산가능인구 ④총인구

7. 일시적으로 회복세를 보이던 경기가 다시 침체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은?

①사이드카
②더블딥
③어닝쇼크
④스태그플레이션

8. 1등 업체 점유율이 A%를 넘거나 1~3등 업체 점유율 합이 B%를 넘으면 ‘시장지배적사업자’ 지정 요건이 된다. A와 B를 각각 고르면?

①33, 50 ②33, 75 ③50, 75 ④50, 90

-------------------------------------------------

[커버스토리] 늘어나는 세금 이대로 괜찮나



그래픽=허라미 한국경제신문 기자
---------------------------------------------

국가를 운영하는 데도 돈이 듭니다. 정부가 국방과 치안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도로를 깔고 강과 하천을 정비하려면 예산이 필요하고, 교육과 복지정책을 시행하려면 재정이 필요한 거죠.

정부는 노동을 제공해 돈을 버는 가정, 생산 활동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기업과 달리 돈을 벌어서 쓰지 못합니다. 세 가지 방법으로 쓸 돈을 마련하는데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고, 모자란 돈을 빌리고, 급하면 화폐를 더 찍어내는 거죠. 원칙적으로 정부는 거둔 세금(세입)만큼 돈을 쓰는 게(세출) 좋습니다. 소득 범위 안에서 소비를 하는 가정이 모범적이듯이 말이죠.

유감스럽게도 모든 정부는 돈을 많이 쓰려 합니다. 유사 이래로 모든 권력이 그랬어요. 고대엔 왕과 황제가, 중세엔 교회가, 근현대엔 정부가 그런 권력이죠. 난로와 유리창 개수에 따라 세금이 부과된 적도 있고, 수염을 길렀다고 세금이 붙기도 했죠. 요즘엔 담배를 피운다고, 자동차를 산다고, 재산을 물려준다고, 집값이 오른다고 세금을 물립니다. 내년 예산액이 639조원으로 늘어나 1인당 부담액이 1356만원에 달할 정도입니다.

세금은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하지만, 너무 많으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많은 세금 때문에 경제가 흔들리고, 정권이 교체되고, 혁명이 일어나고,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인류 문명과 함께 시작된 세금. 그 이야기는 흥미진진합니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정부는 1년 동안 쓸 예산안을 짜서 의회에 제출합니다. 의회는 예산안을 검토해 동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행정부가 나라 살림을 계획하고 쓰지만, 의회가 그것을 살펴보고 조정한 뒤 통과시켜주는 거죠. 견제와 균형 메커니즘이 예산에도 작동한답니다.

나라 살림을 짜는 기획재정부는 2023년 예산액을 639조원으로 잡았습니다. 예산으로 쓸 재원, 즉 돈은 세금으로 마련됩니다. 대한민국 납세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둬 나라 살림에 쓴다는 뜻이죠. 기본적으론 ‘세입=세출’ 구조입니다. ‘거둔 세금과 쓰는 돈은 같아야 한다’는 거죠.

세금은 유용한 데 많이 쓰입니다. 내년 예산안을 보면 보건·복지·고용에 226조원이 들어가고, 나라를 지키는 국방에 57조1000억원이 쓰이고, 도로·교통 등 사회간접자본에 25조원, 교육에 14조원이 투입됩니다. 문화·체육·관광 분야로도 9조원가량이 들어갑니다. 세금은 마치 몸속의 피처럼 곳곳으로 흘러다니며 나라 살림을 떠받칩니다.

내친김에 세금 구분표를 한번 살펴봅시다. 세금은 크게 국세와 지방세로 나뉩니다. 국세는 중앙정부가 거둬 나라 전체를 위해 쓰는 세금이고 지방세는 지방정부, 즉 도·시·군이 거둬 자체적으로 쓰는 세금을 말합니다. 총조세 중 국세와 지방세 비율은 약 75 대 25입니다.

국세는 내국세와 관세로 구성됩니다. 내국세가 조금 복잡한데요. 내국세는 보통세와 목적세로 다시 나뉩니다. 목적세는 특수 목적에 맞춰 쓰는 세금을 말합니다. 교육세, 교통·에너지·환경세, 농어촌특별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보통세는 직접세와 간접세로 다시 갈라집니다. 직접세는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상속세, 증여세를 말하고, 간접세는 부가가치세, 개별소비세, 주세, 인지세, 증권거래세를 포함합니다. 직접세는 세금을 부담하는 사람과 세금을 내는 사람이 같은 세금이고, 간접세는 그것이 다른 세금입니다.

지방세에는 도가 걷는 취득세, 등록면허세, 레저세, 지방소비세 등이 있고, 시와 군이 걷는 담배소비세, 주민세, 재산세, 자동차세 등이 있습니다. 복잡하죠? 우리는 촘촘한 세금망에 갇혀 있는 듯합니다. 2023년 국민 1인당 내야 할 부담액(세금 등)은 1356만원이라고 합니다.

세금은 언제 잘 걷힐까요? 경제가 좋을 때입니다. 일자리와 생산이 늘면 개인과 기업이 돈을 많이 벌게 되고 그러면 소득세와 법인세 세수(稅收)가 늘어납니다. 관세도 무역이 활발하면 많이 걷히겠죠. 소비가 활발해지면 부가가치세 징수 실적도 좋아집니다.

정부가 세금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흥청망청 쓰다간 적자가 발생하고 급기야 빚을 내서 쓰게 됩니다. 지난 5년간 정부의 재정적자가 100조원, 국가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선 이유죠. 세금을 낭비하지 않는 정부가 좋은 정부입니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잠깐! 애덤 스미스의 세금징수 4원칙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세금을 부과할 때 네 가지 원칙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습니다.
①은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능력에 비례해서 내야 한다’입니다. 공정함을 강조한 것이죠.
②는 ‘지불 시기, 지급 방법, 지불 금액을 납세자가 쉽게 알 수 있어야 한다’입니다. 세무사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현대 세법을 꾸짖는 듯합니다.
③은 ‘납세자가 가장 편리한 시기에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세금을 낼 수 있어야 한다’입니다. 냉소적으로 표현하면, 이 원칙이 현대에 가장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국세청이 소득이나 소비에서 원천징수를 해가고, 현금지급기(ATM)로 납부할 수 있고, 계좌이체도 되니까요.
④는 ‘징세비용의 최소화’입니다. 세금 1000원을 걷는 데 500원이 든다면 안 되죠. 세금 신고서를 작성하거나 납부하는 데 드는 시간, 즉 ‘맨아워’(man hour: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일하는 노동량)가 너무 많이 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세금을 신고하는 데 89억 맨아워를 투입한다고 합니다. 운수업 종사자 430만 명이 다른 일을 안 하고 1년 내내 세금 신고서만 작성하는 시간과 같다고 해요. 우리나라는 스미스의 4원칙을 지키고 있을까요?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9월 21일)
제목:"서로 발을 씻어주라"
사회: 박주성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박주성 부목사님
--------------------------------

*요한복음 13:14,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


 
▶할렐루야, 예배를 사모하며 오늘 믿음 보고, 수요저녁 기도회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주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맞춤형으로 허락해 주실 줄 믿는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자.
 
-여러분 우리는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준비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5543명의 목회자님들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셨다. 원래는 제목은 ‘한국교회 코로나 극복 세미나’였다. 대게 좀 촌스럽지 않은가? ‘한국교회 코로나 극복 세미나’, 라고 해서 한국교회가 코로나, 긴 터널, 어둡고 힘들었던 터널을 벗어나는 계기를 좀 만들어야 되겠다. 는 생각과 그래서 현장예배를 복원하고 능력 있게 쓰임 받아 갈 수 있는 그런 교회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우리 담임 목사님의 생각으로 ‘한국교회 코로나 극복 세미나’로 하자고 하셨다가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께 감화 감동을 주셔서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라고 붙여야 된다고 하셨다. “목사님, 이틀인데요?” 했더니 “9.26, 9.27 보다는 낫지 않은가?”라고 하시면서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하자고 하셨다. 아마 제가 평생 살면서 ‘9.26’은 절대로 6.25처럼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제가 처음에 기안을 하면서 “목사님, 제가 한국교회 목회자 4천명을 초빙하는 것으로 계획을 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목사님께서 “아니, 오천 명이야, 오천 명, 그것도 선착순이라고 꼭 붙여야 된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선착순은 마감되면 마감일자까지 계속 받는 것인가? 미리 선착순 등록 되면 문 닫는 것인가? 문 닫아야죠. 목사님의 믿음이 좋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제가 생각할 때, “목사님, 정말 최선을 다하면 한 3천 명, 목사님들을 초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천 명, 그러면 굉장히 믿음 보고 한 것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제 믿음이 목사님의 믿음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러시면서 목사님께서 “오천 명을 모으려면, 절대로 목사님들이 등록하는 것만으로 안 될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초청을 해야 된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5천 5백 43명이 등록을 하셨다. 자발적으로 등록 하신분이 3,412분이시다. 나는 여기 가야되겠다고 하신 분들이 목사님들이 직접 정보를 입력하시고 등록 하신 분이 3천 4백 12명이시다. 나머지 분들은 2131명 되시는 분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초청하기로 오신 분들이다. “제가 열심히 하면 3천 명 모으겠습니다.” 라고 했던 제 믿음보다도 하나님이 더 크게 보시고 3천 4백 명을 보내 주시고 오천 명 모으려면 절대로 등록만으로는 안 된다고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2천 1백 31명이 성도님들이 초빙하기로 이렇게 섬김의 날에 동참하시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담임 목사님께 믿음의 큰 그릇을 주셨다. 뱀 꼬리도 어마 무시한 뱀 꼬리여서 제가 뱀 꼬리를 잡고 온 몸이 흐느적대고 있다. 여러분, 이번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은 사랑의 교회가 한국교회의 발을 씻어주는 사역이다. 그런데 왜? 굳이 한국교회의 발을 사랑의 교회가 씻어주어야 되는가? 왜? 그 지치고 힘들고 어려웠던 목회자님들의 발을 사랑의 교회가 씻어주어야 되는가? 그리고 왜? 사랑의 교회가 한국교회 성도들의 재 헌신을 부흥을 위해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달려가는 계기의 길을 만들어 주어야 돼? 질문을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곳에 수요예배에 오신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 안 오고 오늘도 방바닥에 누워서 열심히 TV보고 ,드라마 보고 있는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여기 오신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왜 이 일을 해야 되는지를 다시금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가 한국교회의 발을 씻어주어야 하는가?
 
첫 번째,
I. 우리가 먼저 일방적인 발 씻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주와 선생이 되어서 우리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다시 씻어 드렸는가? 아니면 예수님만 일방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는가? 여러분은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렸는가? 아니면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발을 씻어주시고 여러분의 죄의 짐을 내려 주시고, 문제를 해결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기쁨을 누리게 해주셨는가? 첫 번째인가? 두 번째인가? 두 번째 주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셨다. 저도 일방적으로 주님께 발 씻음을 당했다. 그래서 그 발 씻어주심에 감동이 되어서, 감격해서 제 인생을 내어 드렸다. 오늘 여러분도 이 저녁에 주님께로 달려 간 것은 우리 주님이 여러분의 발을 일방적으로 씻어주시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맛보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줄 믿는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 발을 씻어주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신데 그 다스려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게 될 독생자.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오신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해서 목숨의 값을 내어 놓으시면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발을 씻기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도록 해주셨다.
 
여러분, 팔래스타인 지방에서 원래 발을 씻어주는 사람은 노예가 하는 일이다. 종중에서도 가장 아랫 단계 노예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는 것처럼 구두나 운동화처럼 발을 양말 신고 구두나 운동화처럼 다 발을 감싸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샌들을 신고 다닌다. 포장도로가 아니라 비포장도로를 걷고, 하루 종인 바깥에서 활동하다가 집에 들어오면 온 발에 먼지가 땀이랑 범벅이 된 채로 들어오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발을 씻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 집에 가장 낮은 종이 발을 씻어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낮아지셔서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자 먼저 헌신해 주신 일방적인 섬김, 일방적인 사랑이셨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씻어주시고 나서 우리 주님께 다른 사람에게 발을 씻어주라고 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본문 말씀에 보면, “너희가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라. 내가 제자들의 발을 일방적으로 씻어주었지, 제자들이 내 발을 씻기지 않았잖아, 내가 너희들의 발을 일방적으로 씻겨주었지, 너희가 내 발을 씻겨주지 않았잖아, 그러나 너희는 일방적으로 남의 발을 씻어주는 일을 쉽지 않으니, 너희는 그 만큼의 내공은 없으니, 입이 툭 튀어나와서 불평불만을 할 것이니, 너희는 서로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저에게 “주성아. 너는 냄새나는 발을 일방적으로 씻어주어라.”라고 해도 저는 씻어 주었을 것이다. 믿어주세요. 우리 주님이 “주성아, 너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어라.” 저에게 명령을 하셨어도, 저에게 옳은 길이다. 라고 하셨어도 저는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었을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 힘든 내색을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주님이 저에게 명령하셔서 순종해야만 했다. 일방적으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미 우리의 수준을 아신다. 저 박주성의 수준을 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을 씻어주는데 일방적으로 씻어주라고 하지 않으시고 “서로 발을 씻어주라.”라고 그렇게 명령하지 않으시고 그렇데 하신다. 내가 남의 발을 씻어주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내 발을 씻어주는 은혜도 공급 받아야 또 내가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힘과 능력과 에너지가 내 속에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 주님이 아셨던 것이다.
 

사실, 지방에 있는 교회들, 작은 교회들, 그런 교회들이 사랑의 교회들을 위해서 이미 발을 씻어주었다. “무슨 물이요? 목사님, 발을 씻어주었다니요? 지금 이번에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라고 스타리아와 노트북에다가 엄청나게 홈스테이 헌금하고, 사역 물품 지원하는 헌금을 하고 있으면서 한국교회 발을 씻어주고 있는데, 씻어주겠다는데, 한국교회가 사랑의 교회를 발을 이미 씻어주었다니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러분, 오늘 수요예배에 오신 성도님들 중에 한 번 손을 들어보겠다. ‘나는 서울 토박이가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분은 손을 들어보라. ‘나는 지방에 있는 교회 있는 교회에서 믿음 생활 하다가 대학 들어가면서, 직장구해서 서울로 올라와서 사랑의 교회에서 믿음 생활 하고 있다.’는 성도님들도 손을 들어보라. 네, 감사하다. 적지 않은 분이 손을 들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기둥같이 일하고 헌신하고 섬기는 분들이 서울 토박이 분들이 아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처음 예수 믿은 분들만 사랑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이미 지방의 작은 교회, 도서벽지 산간에 있는 교회, ‘경북 의성군 다인면 삼분동, 다인교회’ 출신 오정현 목사님께서도 시골에서 믿음을 가지고 서울 사랑의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고, 이번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 총괄을 맡고 있는 박주성 목사도 저 지방 시골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창촌리 246번지’, 반성교회에서 열심히 믿음을 키우고 성장을 하다가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교회 연간 장례 통계를 받아보았다. 우리 교회 장례 통계를 받으니까 보통 부모님 장례이지 않은가? 부모님 장례 건수가 서울 경기 인천이 60-70%정도 된다. 연간 기준들이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지방까지 부모님 장례 때문에 내려가야 하는 비율이 많으면 40%, 적으면 36-37%이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서울 토박이 교회가 아니다. 이미 우리 교회는 저 도서 지방 산간벽지에서 궁벽한 시골에서 믿음을 기르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을 꾸었던 성도들이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걷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교회라는 곳에 등록을 해서 이곳에서 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하며 함께 동역해 가고 있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면 한국교회가 사랑의 교회를 발을 씻어준 것인가? 안 씻어준 것인가? 한국교회가 이미 사랑의 교회를 위해서 발을 씻어주셨다. 이미 섬겨주신 것이다. 저 시골에 작은 교회들, 청년들이 한 명도 없는 교회에서 한두 명 있는 청년들이 대학진학을 하고 나면 다 고향 떠나서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고 있다. 일꾼이 한 명이 부족한 곳인데, 다 우리 교회로 먼저 보내주신 것이다. 여러분, 서로 발을 씻어주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 말씀이 참 은혜로우니까 제가 한 번 발을 씻어드리겠습니다.” 제가 발을 먼저 씻어드릴 테니까 집사님은 제가 씻어 드리고 나면 조금 있다가 발을 씻어주세요.” 이런 실랑이와 싸움이 벌어지겠는가? 아니면 “당신이 먼저 씻어주면 제가 그 다음에 씻어드릴게요.” 요런 실랑이가 벌어지겠는가?
 
‘왜? 사랑의 교회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먼저 발을 씻어주어야만 되는가?’라고 하며 ‘한국교회가 우리 교회를 발을 씻어주어야지, 왜 우리가 발을 먼저 씻어주어야 하냐?’고 하는 이런 실랑이를 하는 수준의 교회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미 한국교회는 사랑의 교회의 발을 씻어주었다. 이미 한국교회는 사랑의 교회에 수많은 자원을, 수많은 영적 자원을 주셨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가 꼭 섬겨야 합니까? 우리가 꼭 먼저 해야 됩니까?’ 싸워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이미 한국교회가 우리의 교회를 씻어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자원하여 한국교회의 발을 씻겨야 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을 한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이번 한국교회에 발을 씻겨 드리고 나면, 수많은 한국교회가 다시 사랑의 교회를 씻겨줄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이번에 도움을 받은 교회들이, 이번에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은혜를 받은 목사님들이 다시 내려가서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면, “예야, 너는 저기 서초동에 있는 교회를 가거라. 너는 저기 역에 있는 교회에 가거라.” 라고 목사님이 권유하실 것 같은가?” 저는 이번에 발 씻음 당한 한국교회가 다시 사랑의 교회의 발을 씻어주는 은혜의 선순환이 일어나게 될 줄 분명히 믿는다. 우리가 먼저 한국교회의 섬김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한국교회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두 번째,
II. 감동이 되는 발 씻음을 해야 한다.
-여러분, 세상에 돈을 벌기 위해서도 적당히 해서도 돈을 못 번다. 여러분, 적당히 음식을 해서 내 놓은 식당에 가고 싶은가? 아니면 와!! 입이 벌어지는 식당에 가고 싶은가? 여러분, 세상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 헌신한다. 제가 그래서 고객 감동 사례를 알아보았더니 우리나라에 용인에 있는 ㅇㅂ랜드, 랜드를 갔는데 어떤 간이 화장실에 갔는데 반지를 빠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나와“어머, 어떻게 해요!! 제가 반지를 빠뜨렸어요. 결혼반지가 빠졌다는 것이다. 유 아무개 대리라는 사람이 ”고객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망치를 가져와서 간이 화장실을 부수고 두 시간 동안 변을 해 집으면서 반지를 찾아서 깨끗하게 씻어서 소독해서 고객에게 되돌려 주었다. 여러분, 그 고객은 그 랜드의 홍보 대사가 되겠는가? 안 되겠는가? 랜드를 가면 그 랜드만 가겠는가? 디즈니랜드만 가겠는가?
 
미국의 어떤 분이 출장을 자주 다니는 분이었다. N백화점에 갔다. 세일 기간에 양복을 사가지고, 두 벌을 사가지고 이것은 수선을 맡겨놓고 이제 내일 출장을 떠나는데, 찾으러 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보니까 세일 기간에 구입을 한 양복은 하루 만에 수선이 안 되는 것이다. 직원이 잘 몰랐다. 그래서 그 다음날 찾으러 갔더니 “죄송합니다.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러고, 이분이 세일 때 산 옷을 입고 출장을 가고 싶었는데 새 양복을 입고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그 양복을 입지 못하고 출장을 떠났다. 출장 떠나서 호텔에 딱 들어갔더니 페덱스(FedEx)로 택배가 와 있었다. 당일 배송 택배가 와 있는 것이다. 열어보니까 수선을 한 양복 두 벌과 주문하지도 않았던 넥타이 세 개까지 사은품으로 선물로 보내와서 고객에게 들어가는 편지까지 넣어서 딱 배달이 되어 있는 것이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더 면밀하게 안내해 드리고 섬겼어야 되는데, 고객님 불편하지 않도록, 사업에 도움이 되도록 배송이 드립니다.” 그리고 양복 두 벌과 넥타이 세 개까지 선물로 온 것이다. 배송비가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이었다. 그 고객은 양복 사면 그 백화점만 가겠는가? 그 옆에 백화점만 가겠는가? 여러분 세상은 돈을 벌기 위해서도 그저 그런 수준의 섬김이 아니라 감동이 되는 섬김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의 교회가 돈을 버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겨내겠다고, 한국교회를 섬겨내겠다고,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선포하고 이번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의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적당한 수준의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 수준, 우리 주님 수준의 감동이 되는 섬김을 제공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감동이 있는 섬김의 핵심은 무엇인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교회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참여하게 되는,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 참여하시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디 메모리얼 교회에서 무디기념 교회에서 오랫동안 담임 목사님이신 알리언스 아이드 목사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은 물의 온도에도 신경 써야 한다. -알리언스 아이드 목사-

-내가 발을 씻어주고 싶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좋은 일인데 아주 얼음물을 가져와서 발을 씻어주거나 아주 뜨거운 물을 가져와서 발을 씻어주면 섬김을 받는 그 사람은 “내가 참 대접 받았다. 감동이다.” 라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뭐 이런 섬김이 있어?”라고 발을 뿌리치겠는가? 여러분 우리가 한국교회를 섬기겠다고 오천 오백여명을 초청했다. 우리는 섬김에서 물의 온도까지 신경을 쓰고 이틀간 섬겨야 할 줄 믿는다. 안내 하시는 분들도, 제가 강의실, 은혜 채플이라는 있는데, “은혜 채플은 어떻게 가야되나요?”라고 하시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쭈욱 가시라고 우회전해서 쭈욱 복도를 따가 가시면 은혜채플 입구가 나옵니다.” 이렇게 라고 하면 그분이 쭈욱만 기억되고 어디로 가라는지 하나도 기억되지 못하실 것이다. 안내하시는 분도 감동이 있는 안내가 되려면, 우리교회 성도들을 안내 하듯이 하면 안 되고 다른 태도로 접근을 해야 될 것이다. 네, 홈스테이 하시는 분도, 주차봉사를 하시는 분도, 세미나 강의를 담당하시는 우리의 교역자들도, 의전을 하시는 분들도, 모두 물의 온도까지 신경을 써서 이번에 오시는 목사님들에게 감동이 있는 섬김, 우리 주님이 우리 각자를 위하여서 친히 발을 씻어주셔서 우리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시고 감동을 주셔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재 헌신하게 만드셨던 그런 감동이 있는 섬김을 우리 사랑의 교회가 한국교회를 위해서 내어드릴 수 있는 역사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
 
여러분, 그러려면 적당한 수준을 넘어서 감동이 되는 섬김을 우리가 감당해 내려면, 우리의 힘과 능력만 가지고 되겠는가? 아니 되겠는가? 사랑의 교회에 역량을 가지고 될까? 안 될까? 안 된다. 우리 담임 목사님의 말씀하시듯이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는가? 저는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께 “저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하는 것은 제가 이번이 처음이다. 자 웬만한 사역 가지고는 겁먹지 않고, 웬만한 사역 가지고는 버텨낼 능력이 있는데, 저는 이번에 사역하면서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하나님, 저는 도저히 저의 힘으로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믿음이 작아가지고,,, “도저히 제 능력으로는 이것은 못하겠습니다.” 그런 기도를 여러 번 드렸다. 그러면서 또 기도했다. “이거 하라고 하셨으면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주셔야 하겠습니다. 제 힘으로는 못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드렸다. 저는 여러분, 우리 주님의 발 씻음의 감동 수준만큼 사랑의 교회가 한국교회가 먼저 발 씻어준 은혜를 갚아가는 발 씻음의 은혜의 선순환의 고리를 이어 가려면, 우리 모든 순장님들과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힘과 능력을 긁어모으고, 모으고 모아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육신의 은혜를 뛰어넘는 성령의 은혜의 능력이 부어져야 한다.
 
이 시간에 하늘 문을 여시고 가장 최 일선에서 헌신하셔야 할 우리 수요저녁기도회의 동지들부터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은 은혜와 능력으로 무장되어야 하나님 수준의 감동 있는 섬김을 다음주간 월화를 감당해 낼 줄 믿는다. 할렐루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병이어를 내어드리면, 아무리 오병이어를 긁어모아도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남길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주님이 축사해 주셔야 한다. 우리가 여러 교회의 사역 물품 지원을 위해서 헌신하고 오병이어를 내어 드리지만, 내어 드린 것에 주님이 친히 손을 들어 축사하시고, 기름 부으시고, 은혜 내려 주셔야 그 사역의 물품이 사용되는 곳마다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나타나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고, 열두 광주리가 차고도 남음이 있는 은혜와 능력의 역사가 맺히게 될 줄 믿는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사랑의 교회에 참 잘 왔네.’ 그게 아니라 “진짜 하나님 대단하신 분이시네.”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9.26이 될 줄 믿는다.
 
요약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 헌신하는 우리 영 가족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 성령의 은혜를 허락하셔서 감동이 있는 섬김이 되게 하시고, 섬김의 날을 통해 천국잔치를 경험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오천 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며,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셨으니 우리도 주님처럼 내어드리는 발을 씻어드리고 지금도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친히 일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저녁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천국잔치, 나눔의 잔치, 섬김의 잔치, 발 씻음의 잔치를 위로부터 부으시는 능력으로 무장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 받아주시고, 우리 힘으로 감당키 어려운 힘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수준의 감동이 있는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9월 18일)

제목: "변명 보고 아닌, 믿음 보고를"
말씀: 출애굽기 3:11-14, 4:1-17
대표기도: 이현규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출애굽기 3:11-14, 4:1-17,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4:1-17,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


▶"변명 보고 아닌, 믿음 보고를”-믿음으로 뱀 꼬리를 잡아보라.
-이른 아침 예배 시간에 우리 일생을 인도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 드리는 것이 특별한 축복이라 확신한다.
 
저는 오늘 ‘변명 보고 아닌, 믿음 보고를’, ‘부제로 말하면 믿음으로 뱀 꼬리를 잡아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다. 저는 모세에 대한 내용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왜냐며, 제가 어릴 때부터 저의 할아버지가 “현이는 모세처럼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더 와 닿아서 그다음 이 말씀을 오늘 들을 때에 ‘모세하고 나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다 모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여러분 말씀 듣고 하나님을 체험하기 바란다. 우리는 모세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위대한 믿음의 모험가로 생각하지만 모세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늘 본문을 11절 앞부분을 보면,
 
* 출애굽기 3:11,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과 유일하게 대화를 나눈 사람이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현현하신 하나님과 만난 유일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소명을 완수하라고 사명을 주셨을 때, 따박따박 다섯 번이나 변명을 한다. 그냥 다섯 번이나, 첫 번째는 우리 속에 있는 변명하는 속성, 아니 이 시대는 변명하는 시대이고, 변명하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l. 변명 바쁜 우리.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명령하시자, 방금 종전까지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답지 않게, 모세는 “아니, 안 됩니다.”=Impossible,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나는 아니라한다.
* 출애굽기 3:11,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첫째 번 변명-“나는 아니지요?” 한다. 나는 자격이 없다고 한다. 두 번째로

 
2)두 번째 변명-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 출애굽기 3:13,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나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서도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한다.

 
3)세 번째 변명-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한다.
* 출애굽기 4:1,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도 나를 거부할 것이라고 말한다.

 
4)네 번째 변명-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 출애굽기 4:10,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사도행전 7:22,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 애굽의 모든 행사가 능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과거에 모든 말과 행사가 능한 사람이었다.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 대화를 안 해서 그런지, 양들과만 있어서인지, 그 입이 뻣뻣하다고 그랬다. 그래서 마침내 다섯 번째 변명을 한다. 변명의 아주 종지부를 찍는다. 13절을 보면,

 
5) 다섯 번째 변명-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한다.
*출애굽기 4:13,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못 간다고 거부한다. 여러분, 나는 못갑니다. 우리교회로 말한 것 같으면, “순장님을 보내주옵소서!” 라고 하면 뭐가 생각나는가? 제가 믿음은 항해라고 했듯이, 어떤 정원 초과한 배가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 하니까,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영국 사람이 “저는 대영제국 국민입니다.”라고 하면서 신사도를 발휘해서 빠졌고, 미국 사람은 양보 하겠습니다. 라고 하고 물속으로 사라졌고, 서로 눈치 보다가 한국 사람이 벌떡 일어나 대한민국 만세!! 하면서 옆에 있는 일본 탁 쳐서 사람을 잡아 당겼다. 정말 우리에게는 변명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무얼 요구하시는지 보면, 지난주에 말씀에 우리 안에 씨앗도 주시고 전부 다 능력을 주셨는데, 우리는 변명하기 급급한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 모세가 따박따박 다섯 가지 이야기 한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보고이다. 우리교회는 지금 사실보고와 믿음보고를 구별하고 있다. 열 정탐꾼들이 말한 것은 사실보고이고, 여호수아 갈렙은 믿음보고이다. ‘faith report’ 이다. 언제 인생길 가운데 믿음보고 했는가? 우리 상황이야기 하면 이해 될 만하지만, 믿음의 보고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심을 소명대로 완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세가 왜 그랬는가? 계속 변명을 하고 거절을 하는가? 40여 년 동안 모세는 자기도 모르게 과거의 실패의 경험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두려움이 심리적 위축으로 다가왔다. 그 심리적 위축이 뭐로 다가 오냐면 열등감으로 다가왔다. 그 열등감이 무력감으로 표현되었다.
 
-두려움>심리적 위축>열등감>무력감-하나님을 변명하게 하는 많은 원인이 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모세에게는 이집트에서는 잊혀 진 존재일 수 있다. 모세 머릿속에 계속 떠돌아다니는 내용이 있다.
 
*출애굽기 2:14,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좀 도와주려고 하는데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며 아주 심문을 하고 오히려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게 모세의 머릿속에 40년 간 뱅뱅 맴돌게 했는지 모른다. 모세는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지금으로 말하면, 너는 지도자가 아니라며 악성 댓글을 계속 고통당하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말 한마디로 비수처럼 꽃혀 가지고 평생을 고뇌하는 것과 같다. 그게 열등감과 무력감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모세에게 시작도 하기 전에 불가능하다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주님은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이제 뱀 꼬리를 잡으라 하시는데 그 전에,
 
*출애굽기 3:11,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내가 누구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자의식 문제가 있다며 반드시 함께 하신다고 12절에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12,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다.
 
*출애굽기 3:13-14,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하는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구약에 있는 위대한 말씀 중에 놀라운 말씀 중에 하나인 말씀을 14절에 하신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I am who I am. 놀라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이시다. 영광 되는 시간에 주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자기 변명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깨우쳐서 새롭게 하도록 하시는 것이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라고 하시니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데 불구하고 모세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라 한다.

* 출애굽기 4:1,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렇게 모세가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드디어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모세에게 너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지팡이가 있다고 대답한다. 그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니까, 지판이가 뱀으로 변하는데 애굽의 상징 중에 왕관, 파라오의 왕관에 코브라로 되어 있다. 그런 것인데 뱀 꼬리를 잡으라고 한다. 그게 말이 되는가? 그 독사가 있는 뱀은 물려 죽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하면 뱀 꼬리를 잡으면 죽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됨에도 불구하고 뱀 꼬리를 잡으라 하신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잡아먹히는데, 뒤에 이렇게 나병 손잡고, 나일 강 피, 여러 가지 두 가지 표적과 한 가지 선포를 통해 여러 가지 있지만 오늘 핵심은 뱀 꼬리를 잡으라고 한다. 뱀 꼬리를 잡으면 죽는다. 하나님은 잡으라고 하신다. 마른 막대기가 생명으로 가득 찬 뱀으로 되었고 다시 또 죽음을 무릎 쓰고 뱀 꼬리를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로 되었다.
 
*출애굽기 4:1~2,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러분, 전에 우리 교회 오셔서 간증하신 세계무역협회 총재이신 이희돈 장로님(박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뱀 꼬리를 잡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일반적으로 바위로 계란을 치는데 뱀 꼬리를 잡는 것은 마치 무엇 같은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신앙생활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을 주님이 원하신다. 이 뱀 꼬리를 잡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상식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메시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단하게 하시는지 모른다. 뱀 꼬리 잡으면 죽는다. 왜 그런데 뱀 꼬리를 잡으라 하시는가? 일반적으로 바위로 계란을 치는 것은 다 잘 한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위로 계란을 칠 때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거는 기도를 안 해도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신앙생활은 맹숭맹숭 하는 신앙생활이니까, 그런데 계란으로 바위를 칠만큼의 그 상황이 되면 다시 뱀 꼬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되면 우리는 박박 기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 평안하니까 없다고 한다. 그게 다 좋은 것 같지만,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삶 가운데서 한 번이라도 뱀 꼬리를 잡아보지 못하고, 계란으로 바위 한 번 쳐보지 못하는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위탁하는 어떤 절박함과 긴박함을 가진 신앙생활을 한 번 못했다면 오늘 말씀은 바로 여러분의 것이다. 자 다시 말하면 바위로 계란을 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어떨 때는 소망이 없고 절망이 되고, 하나님 의지 하지 안 되면 그 상황 그것이 뱀 꼬리 잡는 상황이다. 마음이 젊은 어른들은 ‘뱀 꼬리 한 번 잡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나이가 젊어도 애 늙은이들은 ‘못 잡겠네.’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뱀 꼬리 잡는 것이 믿음 보고이다. 이 믿음 보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이다.
 
II. 뱀 꼬리를 잡으라.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뱀 꼬리를 잡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매어달리지 아니하면 뱀이 우리를 계속 공격할 것이다. 이게 현실적으로 보면 가능하겠는가?
*마가복음 4:38-41,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이 그냥 토하고 난리가 났고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고, 세상의 광풍으로 다 죽게 되었다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는 것을 당연한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이 깨어나셔서 “광풍이 불고 너희들이 다 죽게 되었는데 내가 잠자서 미안하다. 많이 놀라고 힘들었지?”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가? 아니다. 완전 허를 찔렀다. 일갈을 하신다.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하신다. 세상의 광풍 속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뱀 꼬리를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광풍도 주님 때문에 순풍으로 여기는 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폴 투르니에라고 크리스찬이 정신학자 아주 특별한 분이 한 말이다.

 
“내가 할 일은 백지 하단에 서명하는 일이라는 걸 이제 깨달았소. 하나님께서 뭐라고 쓰시든 나는 그대로 할 것이요. 하나님이 이 백지 계약서에 뭐라고 쓰실지 모르지만 어쨌든 난 오늘 섬ㅇ을 마쳤소이다.”-폴 투르니에-
-믿음이라는 것은 백지수표 하단에 서명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뭐라고 쓰시든 간에 그대로 한다는 것이며 서명을 마쳤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든 하나님 앞에서 백지수표를 써 보았는가? 백지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은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서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 영적 세계에서 이유식에서 밥을 먹는 것이다. 서명하는 믿음의 눈이 되어야 한다.
 
III. 이해보다는 순종으로.

-모세가 뱀 꼬리를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가 되는 것을 경험하고 모세는 아까 무기력증과 열등감이 재발 되어가지고 말을 못하는 자이고 입이 뻣뻣하다고 한다.
*출애굽기 4:10-11,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모세가 부족하다고 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2절에,
 
*출애굽기 4:12-13,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오 주여, 아론을 보내주옵소서! 한다. 실컷 이야기 했는데, 어떤 사람이 가게에 와서 물건을 다 살 것 같이 하다가 마지막에 안사고 가는 것, 그것과 비슷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성경에 쉽지 않다. 너무 놀라운 말씀이 있다. 14절을 보면,
 
*출애굽기 4:14,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불 같이 화를 내셨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셨다. shut up and go!!! 하신다. 여러분들이 오늘 부담이 느껴지면, 오늘 깊이 생각해 보라. 여호와께서 노를 하시고 자기의식이 잘못 된 사람에게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의식이 잘못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시므로 모세의 잘못된 것을 해결해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쉽지가 않았다. 오늘 키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그냥 퍼져 앉아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이해가 안 되더라도 오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백지수표에 서명하는 심정으로 그냥 순종하면 이해할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해가 다 된다고 믿음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알 수도 없다.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너무 많다.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순종이 더 중요하다. 이해가 안 되어도 이해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따라서 어떨 때는 이해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
 
※어떨 때는 이해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
-여리고 성을 빙빙 돌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순종하고 나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이다. 희한하다. 너는 세상 적으로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나님께서 ‘나를 신뢰하라, 나를 의탁하라’ 하시면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이 해답을 언젠가는 이해하게 하시고 해답을 주실 것을 믿고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훗날 이해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 보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변명 보고가 아니라 믿음 보고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이 교회에 오게 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온갖 상황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가 안 되더라도 영적으로 순종하면 이해할 그 놀라운 상황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
 
*히브리서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그 당시 원시 부족사회에 그 집을 떠나는 것은 사형선고인데 그냥 주님은 떠나라고 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종하고 나아갔을 때, 나중에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을 주님이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게 믿음이다.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다 모른다. 다 아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안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내 입에 할 말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내 입과 귀를 만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우리가 신뢰하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더라도 주님 말씀을 순종하면 이해할 만한 환경으로 주님이 인도해 주신다. 백지수표를 써야 한다. 자, 그럴 때에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하게 되면, 이해가 되는 날이 온다고 했는데 그리고 이해할 날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다. 그것은 지팡이를 주신다. 모세의 지팡이는 본래 그냥 한탄하는 지팡이였지만, 내 신세타령이나 하고 땅이나 치는 지팡이였으나, 하나님이 그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신다. 그 뱀 꼬리를 잡으라고 하니까, 정말 죽음의 위협을 무릎 쓰고 그걸 잡았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지팡이를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하면 우리의 손에 지팡이를 쥐어 주시는 것이다. 이게 세상 법칙과 하나님 법칙과 다르다. 애굽을 떠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주신다.
 
*출애굽기 4:17,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우리가 변명할 이유가 다 있지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의 일을 잘 모르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지팡이를 하나씩 주실 것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모세의 말라빠진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평범한 나무 막대기가, 신세 한탄한 막대기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살아계신 지팡이가 되니까, 모세가 지팡이를 올리니까 나일 강이 피가 되었고, 모세가 그 지팡이를 들고 올리니까 불가능하게 보였던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광야 같은 메마른 그 딱딱하고도 그 물이 나오지 않는 곳에서 반석에서도 모세가 지팡이를 치니까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되었다. 생명력 없는 마른 막대기가,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하니까, 백지수표에 사인을 하니까, 하나님이 지팡이가 되게 하셔서 우리는 살리는 영이 되게 하신 것을 믿는다.
 
마귀는 죽이는 영, 참수하는 영이지만, 성령은 창조하는 영이고, 마른 막대기가 살리는 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엑스트라 축복이 있다. 그것은 기대감이다. 제가 존경하는 A.W 토저 목사님은
 
※참된 믿음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기대감이 동행한다. 그러므로 기대감이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 -A.W 토저-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이루어지는 기대감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저는 교회 역사를 볼 때에 나름대로 교회능력이 지극히 컷을 때, 교회가 부흥할 때, 교회 안에는 기대감이 충만함을 믿는다. 교회가 믿음이 있을 때, 교회는 기대감이 있었고, 주님은 교회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누가복음을 보면,
 
*누가복음 1:45,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역사 속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큰 일, 교회의 모든 부흥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강렬한 기대감이 있었다. 기대감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일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기대감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도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감이 사라진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교회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인 여러분 자신 한 분 한분의 삶의 여정 가운데 여러분의 기대감이 사라졌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기대감이 사라졌다면 오늘 이 기대감이 회복되길 바란다. 이 지팡이를 여러분들의 손에 들려주셔야 한다. 이 기대감이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말도 안 되는 5,534명의 목회자분들이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참여를 하신다. 9.26,섬김의 날, 무슨 일을 하시는가? 저 나름대로 기대감이 출렁출렁함을 믿는다. 이 은혜를 통하여 여러분의 생에 삶의 여정에도 기대감이 출렁출렁하기를 바란다. 너의 손에 있는 지팡이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팡이는 다르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섬김에 기대감과 온라인 사역과 대면예배가 회복되고 이것이 한국교회에 대한 기대감이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이제 홍해를 건너와서 모세의 이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고, 그 다음 모세는 홍해를 건너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무엇으로 전쟁을 하는가?
 
*출애굽기 17:9,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언제 여러분들은 언제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에 서는 때가 언제인가?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한다. 우리가 변명거리도 있지만 하나님이 지팡이 주실 때 기대감을 주셨다.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길 원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수많은 귀한 일이 있을 때는 영적 전쟁이 있다. 아말렉과 전쟁이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다. 결단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일반 지팡이가 아니라 그 지팡이를 잡고 인생의 산 꼭대기에 서라.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인생의 산꼭대기에 서리라.”
 
♣요약
두려움과 열등감 무기력에 사로잡혀서 변명 보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전적 위탁하여 절박할 때 뱀 꼬리를 잡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고,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고 백지수표에 서명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샘솟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 받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기대감을 가지고 9.26 섬김에 헌신하는 순종이 되어서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 보고가 되어야 한다.
 
요약-*출애굽기 3:11-14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면서 그에게도 또한 자유롭게 말할 기회를 주신다. 모세는 자신이 부름 받은 일을 하기 에는 부족하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누구관대(11절). 모세는 자신이 그런 명예로운 일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의 재능이 부족하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건져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장도 하지 않았으며, 훈련도 받지 않았으며, 아주 의기소침해 있었다. 모세는 그 당시에 살던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에 최고 적임자였다. 그는 학문, 지혜, 경험, 용기, 신앙, 경건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누구관대'라고 말하고 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대개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 일의 어려움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종국에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적임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임재를 약속하신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 그러면 모세의 이의는 충분히 해결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공을 보장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임을 확증하신다. 모세는 그의 임무 수행을 위한 지시를 구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이때 무슨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실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신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모세를 당황하게 하려, 아니면 그들 자신의 알고자 해서 할 것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고 있다.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나의 권위에 대한 증거로 내가 어떠한 이름을 그들에게 내세워야 합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말은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존 자이심을 의미한다. 그는 그의 존재의 기원을 그 자신 속에 가지고 계시며 그 어떤 다른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자존하시므로 그는 자족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이 넉넉하시며 존재와 축복의 무한한 원천이 되신다. 그가 영원하시고 불변 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탐구를 통해 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
 
요약- *출애굽기 4:1-17,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와 자기 말을 믿지 않으리라는 것과 자기가 말에 능치 못하다는 것, 그리고 보낼 만한 자를 보내라는 등의 이유를 대며 불순종했다. 우리도 믿음이 연약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단 부르신 사람은 반드시 쓰시고야 만다. 모세가 자신은 말에 능치 못하며 적당한 사람이 아니니 보낼 만 한 자를 보내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와 늘 함께하여 부족함을 채우겠다고 위로하시며 그를 권면하셨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다만 그 힘을 의지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내와 자비로써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9월 17일)-복음의 서진
제목: “주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말씀: 이사야 58:12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대표기도: 백진호 집사님(복음의 서진 총무님)
말씀읽기: 최유주 자매(청년부), 강주영 자매(대학부)
찬양인도: 글로벌 선교회, 남순장반

 
설교자: 덕 버셀 목사님(전 로잔 국제총재, SaGA 교수님)-통역 이원준 부목사님)
--------------------------
 
*이사야 58:12,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


▶덕 버셀 목사님(전 로잔 국제총재, SaGA 교수님)-통역 이원준 부목사님)
-사랑의 교회에서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매우 큰 특권이다. 이렇게 새벽부터 함께 하신 여러분께 감사와 환영의 마음을 전한다. 저는 이곳에 여러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6천 마일을 날아왔다. 이 새벽에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을 통해서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망과 미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벅참이 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기 전에 담임 목사님과 잠시 인사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목사님께서 저에게 “머리가 점점 더 하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원래 머리카락 검정색인데 하얀색으로 염색을 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이렇게 하얗게 보여야 지혜롭게 보이기 때문에,,, 제가 이제 70이 되었다. 그런데 더 중요하게는 65년 동안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가 선교사역을 감당한지 43년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말씀으로 나아갈 때에 저는 특별히 유럽 재복음화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다. 제가 2007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사랑의 교회의 리더 한 분을 만난 그 이후로부터 사랑의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그 복음을 향한 열정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의 교회를 이렇게 복 주시기까지는 여러분의 심장 가운데 있는 복음화와 전도를 위한 구령의 열정 때문이 아닌가? 하는 그렇게 생각도 든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실 때에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사랑의 교회가 이렇게 수많은 자원들과 젊은이들을 열방 가운데 보내고 있다는 것이 이것이 간증이 되는 것 같다.
 
2010년에 있었던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진행된 로잔대회 준비를 위해서 오정현 담임 목사님과 고성삼 목사님을 만난 기억이 있다. 그 대회에서는 복음화를 세계 재 복음화를 위한 여섯 가지 중요 과제를 안고 모인 모임이었다. 하나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가 바로 유럽대륙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것에 관련해서 잠깐만 말씀을 드리자면 그 로잔대회를 치르기 위해서 이 세상 그 어떤 교회보다 사랑의 교회가 가장 많은 헌신을 해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정말 위대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랑의 교회, 그리고 위대한 비전과 힘께 하시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이다. 이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값지게 사용하기 위해서 유럽 재복음화를 위해서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이 아침 여러분과 계속 나누고 싶다.
 
예수님의 공생에 사역, 그리고 초대교회의 모습, 그리고 이후에 있는 모든 시간들 속에 유럽은 특별히, 북유럽은 매우 이도교적인 사회였다. 오순절 사건 이후로 많은 제자들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3세기 이후 하나님이 은혜로 복음이 유럽지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여러분, 유럽을 지금 여행해 보면 곳곳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이 사건들의 유산인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중심이었던 마틴루터를 통해서 유럽 전역에 다시 한 번 복음의 불길이 솟아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라비안과 윌리암 케리를 통해서 17세기에도 이어서 계속해서 복음의 불길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9세기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구 90%가 유럽에 뿌리를 가지고 있든지,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인도에서 윌리엄 케리가 감당했던 귀한 사역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아프리카를 전역으로 다녔던 데이빗 리빙스턴을 생각해 보라. 중국에 갔던 허드슨 테일러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큰 능력으로 미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웨스트 리 형제를 생각해 보라. 정말 세기 동안에 임펨트를 끼쳤던 유럽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세계 전쟁, 1차,2차에 이르기까지 시간들을 통해서 유럽에 그 정신세계에 유럽에 큰 영향이 생겼다. 그리고 교회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19세기만 하더라도 그 90%를 차지하던 그 기독교인구가 이제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전 세계의 10%도 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미래를 생각할 때에 많은 희망을 가지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프랭크 울프라고 하는 워싱턴 D.C에서 굉장히 유망한 정치인을 제가 2년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유럽과 북미 지역에 부흥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고 저에게 말해주었다. 이제 그 의회 밖의 장소에서 만나면서 잠시 뒤에 그 부흥에 대한 발표를 하는 그런 시간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에 세속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가운데 이렇게 하락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있었다.
 
죠지 위프와 조나단 에드워드를 통해 일어났었던 영적 대각성 운동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추억하면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질문했다. “덕 우리의 평생, 우리의 삶 동안에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라고 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이 나라가 영어 하나만을 썼었는데, 유럽에 기독교 백그운드를 가지고 배경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는데, 지금 미국은 너무나도 많은 세계관들이 있고 수많은 언어들이 있어서 문화와 종교가 충돌이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프랭크 이것은 너무 하나님에게도 힘든 일이 아닐까?”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저희는 그 순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일 거라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하나님께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사야도 동일하게 예고했다. “내가 새 일을 행하고 있다. 광야의 이슬은~~” 하나님께서 유럽 가운데 새 일을 행하는 줄 믿는다. 그리고 여러분 가진 것 모든 것을 하나님이 역사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제가 여러분과 다섯 가지의 아주 짧은 이야기들을 하겠다.
 
먼저는 저와 케이프타운에서 시간을 함께 보냈던 베이그 나간이라고 하는 목사님과 함께 3년 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쪽에 복음주의 연맹에 대표로 있었던 한서라고 하는 분을 저에게 데리고 왔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북유럽이 굉장히 세속적인 나라이다. 너무나도 많은 돈들, 그리고 마약과 문란한 성문화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팽배했었던 그런 모습으로 모든 것이 이제는 지겨운 상황이 아닌가 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저희가 그와 점심을 먹는 그 순간에 저희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저희는 그 때 케이프타운에 있었던 것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 케이프타운에 있었던 그 대회에서 한 개의 세미나가 저의 모든 의식을 바꾸었고 혁명적으로 우리의 사역을 일으켜 내고 있다. 이 세미나는 그냥 호기심에 이끌려서 간 세미나였는데, 민족의 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세미나였다. 그들은 이것이 흥미가 있을 것 같은데 우리와 큰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덴마크는 그저 북유럽에 단일 민족이고, 그리고 강의를 담당했던 그 필리핀 강사께서 “여러분이 만약 이정도 규모의 도시에서 산다면 이 정도의 아프리칸이 있을 것이고, 이정도의 동양 사람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들도 그것을 들으면서 ‘다른 도시는 그러하지만 코펜하겐을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청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그 사람들이 바로 그 도시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결 점들이 없었던 것이다. 제가 조금 더 빨리 이야기를 움직여 보겠다. 그는 저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저희는 필리핀 여성들의 모임의 70개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다섯 명, 열 명,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이란 출신의 학생들이 50명, 100명 단위로 세례를 베풀고 있다. 코펜하겐에 들어온 불교 신자들을 전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아프리카 출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기도회 움직임들을 다시 일으키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덴마크 코펜하겐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 줄 믿는다. 이 세라브로어라고 하는 브라질에서 태어난 여성분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싶다. 레네라고 하는 성경을 정말 탁월하게 가르치시는 분과 결혼한 분이다. 그 카돌릭으로 가득한 로마 한 복판에 그들은 교회를 개척했다.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영적으로 깨어 있고 파워풀한 분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우시고 총명하시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는 분이다. 이게 법적으로 가능하다면 제 딸로 입양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녀는 ‘리바이블 유럽’, ‘유럽을 다시 부흥으로’라고 하는 그 모임을 시작했다. 매 2년마다 격년으로 약 1500명의 젊은이들을 이 크리스마스 연휴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모으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들을 큰마음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러분, 이제 며칠이 지나면 오스 기니스와 함께 할 텐데, 오스 기니스도 유럽피안인데 유럽과 전 세계에서 귀하게 쓰임 받고 계시는 분이다. 린지 브라운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을지 모르지만 웨일즈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정말 많은 영향력을 끼친 분이다. 이 개학을 중심으로 한 정말 지적인 접근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많이 깨닫고 계시며 그런 사역들을 유럽에서 하고 계신다. 유럽대학 신앙의 교재를 하는 단체를 만들어서 지금 운영하고 계신다. 그 스펠링을 이렇게 따라가 보면 독일 말로 불이라는 뜻의 파이어, 라고 하는 그런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 정말 새로운 일을 정말 유럽 가운데 펼쳐내고 계신다. 하나 더 말을 하겠다. 유럽에 재 복음을 위해서 더 뜨겁게 하는 목사님 한 분이 대한민국에 계신다. 그는 그리고 유럽에 1000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마음을 쏟고 계시는 분이다. 그 비전을 가지고 계시고, 그 열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 두 분이 계신다. 그리고 바로 앞자리에 앉아 계신다. 오정현 목사님과 고성삼 목사님이 유럽대륙에 천 개의 교회가 세워질 거라고 믿고 전진해 나가시는 분들이라고 믿는다. 박수....
 
그래서 이 목사님들과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예수님 만나게 된 분들을 만나보았다. 저는 미국에서는 더 버셀이다. 그런데 이사야가 여기 있었다면, 이스라엘의 정말 이 선지자가 여기에 왔었다면, 사랑의 교회 여러분, 하나님은 새 일을 행하고 계신다. 유럽에 새 교회를 개척하고 계신다. 전도자들을 일으키고 계신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중동과 남미에서 전도자들을 일으켜서 데리고 오신다.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는 줄 믿는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는 특권을 주실 줄 믿는다. 유럽을 새롭게 하고 온 열방을 축복할 비전에 하나님께서 복을 더하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요약
복음의 불모지가 되어 버린 유럽을 품고 진행하는 복음의 서진 사역을 통해 예수님께서 주신 대 사명이 유럽 전역에 실현되고 천 개의 교회가 세워지고 새 역사가 집필되길 소원하며, 우리 교회가 9.26 섬김의 날을 통해 강력한 말씀 자본, 기도자본, 헌신자본을 다시 회복되고 이 나라와 민족이 다시 살아나고, 매일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어 간구하는 강단 기도회를 통해서 교단과 지역 교회 5,500여며의 목사님들이 함께 회복되고 부흥이 되어 세계 복음화의 새로운 전환점을 경험하길 기도해야 한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9월 11일)

제목: "믿음으로 모험해 봅시다"
말씀: 마태복음 25:14~30
대표기도: 이선복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


▶태풍도 지나가고 전형적인 가을의 청명함을 주신 주일이다. 자 우리 왜 청명함을 왜 원래 이렇게 얘기 하느냐 하면 전 어릴 때 성경을 읽는데 어느 날 모세하고 장로님들이 시내 산에 올라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그렇게 기가 막힌 말씀이 있다. 어릴 때 제가 보고 너무 이렇게 머리에 뇌리에 남아가지고 하나님 우리 예배가 그렇게 해달라고 제가 기도하고 있는데 그게 뭐냐면 출애굽기 24장 10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출애굽기 24:10,
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할렐루야!~. 얼마나 좋은지 여러분 청옥이 뭐냐면 사파이어이다. 사파이어 반지 여자분들 하나만 줘도 좋다. 대부분 없겠지만 그런데 이 사파이어가 아스팔트처럼 깔린 것이다. 다시 사파이어가 아스팔트처럼 깔린 것이다. 우리 인생의 도로이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좋은데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오늘 예배가 삶의 모든 짐들이 벗겨지고 우리의 삶에 청옥같이 또 우리의 삶에 청량감이 넘치는 그런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주일 저는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고 오늘 to be continued~, 그렇게 해서 오늘 계속 이어서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인생의 인생을 향해할 때 배를 주시는 것이다. 배를 주시고 또 그 배를 저를 노도 주시는 것이다. 노도 주시는데 우리에게 뭐는 안 해주시는가? 노는 우리가 저어 가야지 하나님이 저어주시는 않으신다. 그러니까 우리의 말씀의 노도 주시고, 기도의 노도 주시는데 우리가 말씀을 읽고 말씀의 자리에 나와서 기도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이다. 물론 크게 보면 그것도 내주지 않은 것이지만 일단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우리가 믿음과 말씀과 기도의 노를 져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를 젓는다는 말은 믿음의 모험을 해야 한다 자, 믿음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런데 믿음의 모험을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의 어떤 관념이나 생각과 우리의 신념을 실천 한다 그런 뜻인가? 뭐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잘못된 관념이나 생각도 많이 있다. 자기 믿는다고 해서 막 그거 하면 되는 것, 아닌 것 많아요. 북한 같은데 가보면 아이들 어릴 때부터 잘못된 세뇌를 시키니깐 거기가 지금 지상낙원인 줄 안다. 그런 식으로 자기 믿는 대로 하면 안 된다. 우리가 믿음의 노를 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신념의 노를 젓는 게 아니고 말씀이 얘기하는 노를 저어가야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 standard(기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믿음의 모험은 성격이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여러분 어떠한가. 이게 우리의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기준이라는 것이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삶의 항해를 저어갈 항해를 해야 할 때에 요즘 무슨 최첨단의 어떤 하이테크의 노도 있다. 그런데 오늘 순박하지만 오늘 말씀 그대로 말씀의 노를 저어갈 때, 하나님 은혜주시면 여러분들의 삶의 청명함이 넘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말씀의 노가 뭘까?
 
첫 번째 말씀의 노는 오늘 지난 주일에 제가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다. 14절에 자기 소유를 하나님의 소유를 그 다음 15절 살펴보면,
*마태복음 25:14~15,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각각 그 재능대로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은 이 각각 그 재능대로 그랬다. 이 재능대로라는 말에 굉장히 중요한 것들이 많이 담겨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재능대로라는 말은 흔히 재능이라고 하면 talent(재능)라고 생각해 talent가 아니다. 이것은 ‘능력’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대단한 부모님을 만나가지고 강남 8학군 출신이고 어떤 사람은 무학하신 농촌의 부모님 만나가지고 시골에서 자라고 어떤 사람은 암이 있고, 어떤 사람은 병이 없고,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뭐 대단한 사람,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고생해 가지고. 우리는 다 모른다. 우리는 다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그랬을 때 그 재능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다섯 달란트, 두 달란, 한 달란트 이것을 비교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만 주신 그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키는 이거 첫 번째는 뭐냐면
 
I. (믿음의 모험)비교하지 말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모험이라는 것은 받은 그 재능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일반 talent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능력을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냐 이것이 말씀의 standard(기준)이라는 것이다. 조금 이것이 차이가 있는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저도 ‘참 그렇구나!’
 
여러분,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 남긴 것 하고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 남긴 것 하고 나중에 악한 게으른 종이 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한 달란트 남겼다면, 셋 다 칭찬의 양과 질과 수준이 똑같을까? 다를까?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 비해서 반반 밖에 안 주고 한 달란트는 반주고 이렇게 칭찬할 것인가? 아니면 다 똑같을까? 대답이 왜 이런가? 자, 키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각각 능력을 주셨다. 어떻게 보면 기적의 씨를 사람마다 개인마다 넣어주셨다. 어떤 사람은 언어에 재능이 없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재능을 주시고, 키는 무엇이냐, 이미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나는 남에 비해서 적게 받았다고 비교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보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있다. 그러면 30배 받으면 30배고, 60배는 더 많고 100배는 더 많이. 이 뜻이 아니야. 30배도 100점, 60배도 100점, 100배도 100점인 것이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어떤. 다시 얘기해. 어떤 언어의 은사가 있다. 우리가 영어 잘하는 분들 많지 않는가? 어떤 분들은 진짜 해도 경상도 사람들은 경글리쉬 경상도 잉글리쉬를 경글리쉬라고 발음이 안돼요. 그러니까 그 받은 것을 가지고 그 받은 것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남겼느냐. 내게 주신 그 여러분 재능이 아니라 여러분 무엇이라고 그랬냐. ‘능력’. 그래서 이 단어가 무엇이냐면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단어가 두나미스. 헬라 원어가 뒤나미스, 여러분 두나미스에 대해 어디서 들어본 적 없는가?“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말씀 너희에게 뭘 받는가? 권능을 받고 두나미스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각각 재능.
 
*디모데후서 1:7,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
-저 능력이 여기서 말하는 재능이다. 잘났던 못났던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신 줄 믿는다. 이걸 가지고 비교하지 말고 이미 결정된 것 가지고 비교하지 말고 내가 어디서 태어났다 내가 어떤 부모를 만났다 내가 어 키가 뭐 얼마다 이거 절대로 능력 비교하지 말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이 능력 주셨다. 내가 어떻든 간에 내게 주신 은사에 따라서 능력 주셨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주님 더 사랑할 수 있다. 주님과 더 영적 교제 할 수 있고, 더 믿음의 모험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더 찬양하고, 더 기도문 읽고, 다 믿음의 모험 여기서 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모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주신 줄을 믿는다. 내 손에 있는 것을 가지고 모세에게도 내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냐? 그랬다. 너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미 내게 주어진 그것을 가지고 내가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걸 가지고, 그래서 하나님이 각각 그 재능 능력 들어주신 것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눈을 뜨면 그 때부터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존 에릭슨이라는 사람을 아실 것이다. 17살 때 다이빙을 하다가 목뼈를 다쳐가지고 사지가 마비가 되었다. 원래 존은 수영과 테니스, 승마, 등산, 등, 이 스포츠심이 발달되어 가지고 아주 그냥 열정적인 아주 그냥 그런 것을 잘하는 청소년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척추를 다쳐가지고 목뼈를 다쳐가지고 사지가 마비되었으니까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다. 누워만 있는 것이다. 처음엔 하나님 원망도 하고 그런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입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네! 그러니깐 입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존 에릭슨에게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입을 가지고 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그림이 손으로 그려도 그렇게 잘 그릴 수 있을 것인가 할 만큼 입으로 그림을 잘 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리고 난 다음에 항상 수개월 후에 거기다 사인을 하는데 ‘PTL’이 무엇이냐. ‘Praise to the lord’ 말이 되는가? 사지가 마비되고 입만 갖고 이렇게 그렸는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랬을 때 존 에릭슨을 통하여 수많은 참 사람들 다시 일어나기 힘든 사람들 다시 용기를 갖기 힘든 사람들이 용기를 갖고 다시 믿음의 모험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희 교회에도 한 번 간증했는데 ‘닉 부이지치’라고 들어보셨는가? 닉 부이지치. 그는 팔 다리가 없다. 어린 시절에 자신의 팔 다리가 없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려워서 자살 시도도 몇 번 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깐 차이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가 보니까, 자기는 팔다리도 없는 이 상황인데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니까, 그게 능력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단지 팔과 다리가 없어 불편한 장애인이 아니라 나는 믿음으로 모험하는 사람’에 대한 눈이 열린 것이다.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 당신이 가진 것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을 할 수 있다.” -닉 부이지치-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주고 자신이 지금 받은 걸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 원리를 깨달은 사람들은 남들이 볼 때, 초라해 보이는 한 달란트라 할지라도 믿음의 모험을 가지고 그것이 기적의 씨가 되어가지고 하나님 앞에 세기를 열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는 다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 어떻게 하면 오래 갈 수 있는가? 오늘 이 원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이 원리를 깨달은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의 모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명암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제가 말씀을 드릴 테니까 잘 한 번 생각해보라.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자 청년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너의 소유가 어떻게 하라 그러니깐 그거 갖고 아무것도 못 하였다. 그 능력이 안 되었다. 근심하고 돌아갔다. 아무것도 없는 과부가 있었다. 두 렙 돈 밖에 없었다. 그것 가지고 자기 있는 것 가지고 주님께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두 렙 돈을 하나님께 드리니깐 하나님이 그 통해 과부에게 기쁨을 주었다.
 
오늘 이 첫 번째 중요한 원리 비교하지 말고, 비교하지 말고 이미 내게 주신 것을 능력인줄 믿고 두나미스이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셨던 그 이적의 두나미스이다. 하나님 우리에게 이적과 두나미스의 씨를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는다. 비교하지 말고, 이걸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지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하려면
 
II. 무엇이 믿음의 모험을 방해하는가?

-두 번째 믿음의 모험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오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지난 주일에 말씀 한 대, 땅에 파묻어 놓았다. 땅에 파묻어 놓고 주인에 대해서 주인에 대해서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그러면서 그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잘못된 것이 뭐냐면 자기의 세계관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한 달 반쯤 본래 자기는 종이었는데 종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종의 정체성을 망각했다. 그리고 주인을 함부로 판단했다. 자신의 주인이나 정체성을 가지고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된 것이다. 정체성 이탈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정체성,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되고, 말씀을 순종해야 되고, 말씀에 충성해야 되는데, 이걸 제일 못하게 하는 작전이 무엇인가 사탄의 작전이다. 정체성 이탈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있을 때, 사탄이 어떻게 했는가. “야, 니가 뭐냐. 너 네가 하나님 앞에 그냥 종이냐? 아니야! 너 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으면 너는 하나님 같이 돼” 라고 한다. 피조물이 하나님같이 되겠다는 정체성 이탈에 대한 걸 가지고 생각을 오염시키고 잘못 되게 하였다. 이 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요즘 말로 하면 너 생각대로 해, 너 느낌대로 살어, 왜 너가 내가 너의 주인인데 누가 너를 간섭할 수 있냐?
 
여러분 이 세계관이 정말 문제라는 것이다. 이게 한 달란트 받은 소위 인본주의적인 생각의 핵심이다. 그래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 세계관, 자기 가치관으로 볼 때에 땅에 묻는 행위가 정당한 것이었고, 그것도 불순종이라고 생각도 안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그러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것 좀 땅에 파묻어 놓았다고 어떻게 그렇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그렇게 강력하게 질타를 하시냐? 그래서 다른 뜻이 아니다. 너는 위치 이탈을 한 거야! 너는 너의 가치관이 변질이 된 것이야,. 너 자리 이탈한 거야. 너의 세계관이 변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악 하다는 말을 다른 복음서에는 많이 없었는데 이 마태복음에만 유독 악하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그 이유는 다른 복음서는 누가복음 같은 건 이방인에 위해 쓰여 졌지만 마태복음만 히브리 사람들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 졌다. 그 유대인들 가운데 오랫동안 신앙생활 한다고 하나님 섬긴다고 그러지만, 사실은 자기 세계에 묻혀 가지고 하나님 판단하고 특별히 바리세인들, 자기부인하지 아니하고, 그걸 보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악하고 게으른 종아, 여기 이렇게 생각이 변질된 사람들 같은 경우, 한 달란트 받는 사람들 경, 이런 사람들은 뭘 해도 꼬였다. 뭘 해도 꼬였다. 그래 가지고 뭘 해도 이렇게 전체를 보지 못해. 자기 세계에 갇혀 있으니까, 이런 사람들이 교회 내에 삼분의 일이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다들 긴장하셔 가지고 삼분의 일이니깐 ‘내가 그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 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 중에 하나이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갖고 있는 약점들이 무엇인가? 전체를 못 보고 자기중심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한국 교회를 누가 비난한다는데 교회 내에서도 한국 교회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전도 더 안 하고, 왜? 더 영혼을 얻는 일에 힘쓰지 않는가? 왜? 교회는 더 부흥하지 않는가? 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 더 선교하지 않는가? 그런 것 때문에 교회를 비난하지 아니하고, 뭐 가십성 갖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걸 갖고 물론 교회는 교체 교회 자체가 정화 되어야 하고 다 해야 되겠지만, 별로 중요한 것들도 아닌 것을 가지고 교회 내에서 서로 내부 총질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바둑으로 말하자면 저는 바둑은 잘 못 두지만 바둑으로 말하면 그 바둑 전체 큰 걸 봐야하는데 오목이나 두고 대마를 보지 못하고, 그 바둑판 앞에 놓고 알까기나 하고 있는 것이다. 알까기. 전체를 못 보는 것이다. 그 자기 생각대로, 우리는 사역의 큰 그림 전체를 보아야 할 줄로 믿는다.
 
여러분 ‘포레스트 검프’를 아실 것이다. 남들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이었고, 근데 그걸 가지고 한탄하거나 그러니 않고, 그냥 해피하게 내게 주신 그게 뭘까? 하면서 자기는 잘 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막 계속 달리다 보니깐 마라톤 승자도 되고 어떻게 하다 보니깐 대통령도 만나고, 그 자기는 너무 사과가 좋다. 그래서 사과를 먹고 좋다고 그렇게 해서 계속 사과 회사에 투자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깐 애플 주식이었다. ㅋ ㅋ ㅋ 애플 주식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다 기적의 씨를 주셨다. 근데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내 생각으로 변질되면 안 되고, 내 세계관에 갇히면 안 되는 것이다.
 
또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문제는 뭐였냐면, 주인을 자기 나름대로 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하나도 몰랐다. 주인을 모르니까 주인을 믿지 못 한 것이다. 주인을 믿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한 달란트도 못 남기고 가진 것 마다 다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어둠속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게 악순환이다. 조심스럽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지옥 같다. 또 과격하게 말하면 이런 하나님 뜻을 모르고 하나님 주신 기회를 가지고 믿음의 모험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악순환의 굴레가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읽으면서 몰골이 송연한 것이다. 머리털이 쭉 서고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야고보서 5장 9절에 보니까
 
*야고보서 5:9,
9 서로 원망하지 말고 서로 원망하지 말고 그리하여 심판을 면하리라.
-받은 은사 비교하지 말고 내게 주신 기적의 씨앗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믿음의 모험 믿음의 노를 저어 갈 때, 그래야 심판을 면하리라. 자, 이제 우리가 비교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 뭘 어떻게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잘못된 것 자기 세계관에 갇힌다든지,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이런 것들 정리하면서 그렇게 잘하게 믿음의 노를 저어가게 되면 어느 놀라운 말씀 오늘 주보의 제일 앞에도 있다.
 
*마태복음 25:21,23,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다 똑같은데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동일한 보상을 받게 된 것이다. 자, 같이 한 번 읽어 보겠다. 다시 한 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아멘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자. 하나님께서 세 가지 축복을 주셨다. 보상을 주셨다. 첫 번째 무엇이냐.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첫 번째, -주님께서 영원한 칭찬을 주셨다. -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다. good job 잘하였도다. 주님이 칭찬하신 것이다. 그런데 한 번만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주님의 칭찬은 영원한 칭찬이다. 세상 사람들이 한 번 밖에 하는 그런 칭찬이 아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제가 독특한 영어 선생님을 만났다. 제가 뭘 했더니 중학교 2학년인데 그 레포트를 제출했더니 앞에 뭐라고 써 놓았냐면 excellent!!!(엑설런트)였다. 그랬었다. 그 때 단어를 이거를 뭔가 중2가 엑설런트를 어떻게 알겠는가. 사전을 찾아보니까 엑설런트 잘 하였도다. 잘 하였도다. 그러니깐 여기서 말하는 착하다는 것은 뭐 좋다 good 이 정도가 아니라 훌륭하다 우수하다 탁월하다 여러분 ,중학교 2학년 때 들었던, 쓰였던 그것이 오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 이 시간에도 50년이 지난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엑셀런트 그것이 생각이 난다. 인간이 칭찬하는 정도, 여러분 주일학교 교사들이 우리 학생들에게 제대로 잘 해가지고 믿음으로 칭찬하는 그 아이가 평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학교 교사가 중요한 것이다. 영원한 칭찬을 받는 것이다. 히브리어 ‘토브’에서 발생된 단어인데 너무 좋은 것이다. 하나님 여러분들의 ‘토브’. 잘하였도다!. 엑설런트!! 칭찬하시길 바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칭찬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지고 무슨 일이 있느냐 거기 보니까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님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기신다고 약속하셨다. 많은 것을. 여기에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라는 이 말이 미완료 과거이다. 이 뜻은 한 번만 충성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충성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충성한 자에게 많은 것을 맡기게 됐다. 그러니까 주인과 종의 관계가 더 큰걸 맡기면서 더 깊은 신뢰감이 형성되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과 나만이 아는 신뢰감을 통하여 영혼의 감탄사가 나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많은 것을 맡기리니, 누가복음에서는 열 문화의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께 충성하고 이렇게 참한 사람들에게 독점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왕국에서 성읍을 다스릴 기회를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역량, 이들 뭐 믿음의 모험이 커지니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업과 사업을 맡기시는 것이 우리 선교 적으로 말하면 우리 교회에 중앙아시아도 맡겨주시고, 러시아도 맡겨 주시고 동유럽도 유럽도 맡기시고, 브라질이나 인도네시아나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아프리카를 맡겨주시는 것이고, 이게 우리 세계도 다 마찬가지다. 많은 것을 맡긴다.
 
오늘 이 자리도 172개 꽃마을이 변하여 안아 주심에 본당으로 변화되는 것에도 맡겨주신 줄로 믿는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시고, 제가 물어보니까 제가 물어보니까 사랑의 교회가 지나간 십여 년 동안 유럽교회 개척을 했는데, 25개국에 지난주에 162개 교회를 개척하게 한 것이다. 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그렇게 하신 것이다. 많은 것을 맡기리니,
 
첫 번째 뭐 한다고 칭찬해 주시고, 두 번째 맡기고, 세 번째가 중요한데 세 번째는 무엇이라고 되어있냐면 이렇게 나와 있다.
 
세 번째 –주님의 영원한 즐거움에 챰여 하게 된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믿음의 모험을 내게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한 달란트이든 어떻든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최선을 다하면, “너의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즐거움은 그냥 하루 이틀의 즐거움이 아니다. 한 때 즐거움이 아니다. 이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을 허락해 주신다. 신앙의 세계는 기가막히다고 했다. 아무리 ,아무리 좋아도 2년, 잘하면 2년, 어떤 사람은 3개월 4개월이다. You are my sunshine! 해도 아무리 따라다녀도 2년이다. 그런데 이 즐거움을 깨닫는 사람이 성숙해지만 가면 갈수록 더 성숙이다. 새 자동차 그렇게 원하는 것을 사면 두 달, 한 달, 이발하고 미용실 가면 하루,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세상의 어떤 즐거움도 허망하지 않은 게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 어떤 즐거움도 유효기간이 없는 게 어디 있겠는가? 다 유효기간이 있다. 얼마 못 간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 제가 ‘아랑드롱’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이 사람이 세상에서 멋진 남자이고 수많은 여인과 수많은 물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은 ‘안락사’였다. 자기 마지막 소원이었다. 오늘 우리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닉 부이지치, 조니 에릭슨, 아니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는 이렇게 하고 누구는 저렇게 하는데 이게 어떻게 되나? 하지 않고 다시 말해 이미 결정된 것 가지고 고민하지 않고 내게 주신 것이 능력이 되고, 내게 주신 것이 기적이 씨엇이 되면,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나도 즐겁지만 우리가 즐거워하면 주님에게도 기쁨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도 즐거움을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제가 어떤 90이 다 되가시는 목사님과 길을 걷는데,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셨다. 흥얼거리셨다. ‘야, 연세가 90이 넘어도 저렇게 후레쉬 하게 살 수 있구나! 를 생각했다. 우리가 즐거워하면 하나님께도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즐거워하면 남들이 ’아, 저 사람은 예수 믿고 저렇게 즐거워하는구나!‘ 를 보여 지면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오늘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자가 되도록 한 분 한 분, 맞춤형의 은혜를 주시길 소원한다. 그럴 때 우리가 일하는 것이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되는 것이다. 억지가 아니라, 갑과 을이 관계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봉급 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세 가지, 칭찬 받고, 우리의 믿음의 영역이 확장되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님의 영원한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도 주시고, 노도 주시지만, 우리의 노를 하나님이 직접 저어주시지 않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모험을 통하여 노를 저어가게 하는 줄로 믿는다. 그렇다면 배의 특징은 항구에 정박하고 항해를 하는데 배는 정박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항해하기 위하여 있는 줄로 확신한다. 그런데 정박을 하기는 해야 된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 무엇을 하는가? 잘못된 곳을 수리도 하고 거기에 기름도 넣고 음식물도 제공받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이제 항해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넣듯이 괴혈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레몬도 많이 갖다놓고, 여러 가지들을 정박하는 시간 동안에 그 항해를 위한 물자들을 다 공급 받고 정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주일 예배는 두 가지가 거룩한 긴장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믿음의 모험에 대한 꿈을 갖고 그 믿음의 모험을 위하여 우리가 정박해 가지고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고 공급 받고 치유하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매주일 마다 정박하고 다시 내일부터 항해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니쉬와 스타트가 확실하다. 그리스도인들은 finish와 start가 매 주일마다 믿음의 모험을 하기 위한 정박을 하고 하늘의 청옥과 같은 청명함을 받아서 다시 내일부터 항해 할 수 있도록 매주일 기름부음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은 그냥 가는 것이다. 그냥 상처 받은 대로 계속 가고, 그냥 세상 적으로 대단할지 몰라도 그냥 늘 가니까, 피니쉬와 스타트가 없으니까, 늘 후레시 하지 않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프레쉬 하다. 주일 이 시간이 최고의 청명함과 청옥을 편듯함을 받아서 내일부터 믿음의 모험을 할 수 있는 영적인 연료를 공급 받는 것이다.
 
제가 오늘 예배를 들어오면서 제가 들어오기 전에 내가 아닌 것 같다. 제가 지난주에 무지하게 피곤했다. 어제 어떤 분과 밥을 먹었다. 식당을 갔는데 식당 메니저가 나를 보더니, 목사님, 왜 이리 늙었어요? 한다. “와!!! 목사님, 늙었네!~~” 했다. 그런 말을 왜 할까? 그런데 제가 오늘 아침 설교하려고 나오기 전에 나의 모습을 보니 어제 내 모습이 아니었다. 이것을 알 사람이 없도다. 오늘 이 시간은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모험을 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기적의 씨앗과 능력들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믿음의 모험을 하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강단에 서는 목사님과 다르네요.’ 라고 하지 말고, ㅎㅎㅎ, 매 주일마다. 이 주일 예배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이 시간은 특별한 시간이다. 믿음 모험을 위하여 정박하고 여기서 준비하고, 계획하고 물자를 모으고, 여기에서 모든 자료들을 공급 받고, 그래서 내일부터 다시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니쉬와 스타트가 매 주일마다 있는 사람과 그것이 없는 사람과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아까 90이 다 되가시는 목사님이 그렇게 밝고 환하고 누군지는 말하지 않는다. 인생은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느냐의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이 판결난다.

전반전에서는 잘 못했던 분들도, 후반전에서는 승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자리에는 인생의 전반전에서 몇 번의 실수로 충격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전반전에서 수많은 죄책감과 중독과 여러 경험을 겪은 분들이 인생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여기에는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것, 건강악화로 인해서 인생의 어려운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리고 인생 경기하다가 전반전에 갑자기 꼴을 먹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후반전에 믿음 모험 잘하면 반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반전에 계신 분들은 다시 한 번 믿음 모험을 주님 앞에서 작정하기 바란다. 늘 말씀대로 세상의 어떤 일, 귀한 일에도 내가 아무런 기도도 안하고, 아무런 설레임도 없고, 아무런 기대도 안 하고 아무런 꿈도 안 꾸고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하나님의 일은 다 안다. 누군가가 어디서인가 집안에 누군가가 할머니든지, 할아버지든지, 누군가가 내게 주신 것 불평하지 아니하고 이게 능력과 기적이라고 믿고, 비교하지 아니하고,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땅에 파묻어 두지 아니하고, 그렇게 감당하면,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청옥 같고 청명한 삶을 펼쳐주시리라 믿는다. 이제 우리가 2주일 후면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놀랍다. 제가 처음에 어떤 분들은 오천 명을 한다고 할 때, 천명와도 많이 참여할 거라고 했다. 요즘 오백 명도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4천 7백 명이 참여했다. 하나님 은혜이며 감사한 일이다. 이것은 교회를 통하여 믿음의 모험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을 보게 되는데, 놀라운 일은 저 흑산도 사는 목사님도 참여하게 된다. 백령도에 사는 목사님도 등록을 하셨다. 전국에 26개 교단에서 골고루 오시게 된다. 14일이 마감인데, 저는 5500명이 등록하길 원한다. 오백 명이 무어냐고 하지만 그것은 묻지 말아라. 제가 생각하는 것이 있다. 설명을 드리는 것이다. 흑산도, 백령도에서도 그분들도 모험을 하러 오시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강단에서 하는 기도대로 따뜻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한 순서가 감동이 있게, 이 믿음의 모험을 통하여 회복을 넘어 부흥의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 ♪
 
♣요약
우리는 믿음의 거룩한 모험가들이 되어서 인생의 노를 힘차게 저어갈 수 있어야 한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했다. 칭찬 받는 충성 된 종이 되고,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허락하신 영원한 즐거움을 가지고 기쁘고 신선하게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믿음의 모험을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하게 하실 줄 믿고, 믿음의 모험으로 눈을 뜨고, 감게 하여 주시며, 어린 아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살만한 인생이 되어야 한다. 남과 비교하기보다는 각기 받은 재능과 능력대로 오직 순종과 충성으로 믿음의 노를 저어가고, 믿음을 방해하는 게으름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칭찬을 받고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성경이 말씀하신 대로 믿음의 모험을 하여서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통해 회복과 부흥의 대해를 항해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달란트를 주신 이유는 각각의 재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은혜를 다양하게 주셨다. 그것에는 양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질의 차이는 없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여 봉사해야 한다. 우리가 이 달란트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바른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청지기는 열심히 충성하여 최선을 다 한다. 또한 청지기는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믿음을 지켜 나가는 삶을 살며, 충성하여 양 무리의 본이 된다. 두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재능을 가지고 봉사하는 데 태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게 편견이 있었고 주인이 부여한 재능을 활용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하나님께 받은 재능을 하찮게 여기거나 남의 것을 시기하는 자는 그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성실한 종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과 재능대로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충성된 종은 두 배의 소산을 남김으로써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고, 또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했다. 그러나 게으른 종은 소산을 남기지 못하여 주인에게 책망을 받았으며 가진 것도 빼앗기고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그 차이가 미미해 보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벌어질 수 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재능을 가지고 봉사하는 데 태만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과 재능대로 그분께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두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활용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을 하찮게 여기거나 남의 것을 시기하는 자는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종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