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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0월 2일) 제목: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말씀: 마태복음 25:31~46 대표기도: 김승진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ㅡㅡㅡㅡㅡ ▶오늘 예배를 통해서 이전보다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한다. 큰일을 행하신 주님께 다함 없는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우리도 기쁘지만 우리 주님께서 더 기뻐하셨으니라 확신한다.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9.26 섬김의 날을 통해 우리가 많은 기쁨이 있었는데 우리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는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가지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허락해 주시길 소망한다. 앞에 25장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오고, 또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 비유성이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실체를 경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늘 이 양과 이 염소의 비유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여러분이 완전히 실체로 경험하는, 실체로 체험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 그리고 본문에게도 나와 있지만 모든 우리 교우들과 온라인으로 들어오시는 모든 분들도 동일하게 다시 한 번 예외 없이 적용되는 말씀이다. 먼저 양과 염소에 비유에 대해서 31-33절을 말씀하기도 하겠다. I. 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양은 의인이고 염소는 불의한 자로 이야기를 하는데 ‘인자’가 라고 할 때에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한다. 그리고 인자가 ~~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지막 심판대에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에 예수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줄로 믿는다. 이게 왜 이렇게 소중한가 하면, 이 말씀의 배경은 마치 이제 십자가 지시기 전 3일을 앞에 놓고 이 말씀을 하셨는데, 말씀하시는 자리는 감람산이었다. 감람산은 그 골짜기이고 여러분, 성지에 가보면 예루살렘 성과 높은 데에 위치해 있다. 높은 데를 향하여 보시고 골짜기에서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은 마치 겉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실패자로 보이고 겉으로 볼 때는 십자가를 지셔야 하니까 진 것 같아서 그렇게 함으로 또 대적들의 비해서 예수님이 패배자 같은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사실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주님은 패배자가 아니고 주님은 이 말씀 이후에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양으로 오셨지만, 예수님이 재림으로 오실 때는 사자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실 때는 겉으로 볼 때는 어떤 패배한 구원자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다시 재림 하실 때는 심판주로 오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심판주로 오셔서 초림 때, 양으로 오신 것 같지만 왕으로 오시는 것이다. 그 주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 누가 보좌에 앉았다고 했는가? 인자,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교나, 기독교나 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아니냐? 라고 할 수 있지만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 다원주의 이고 보좌에 앉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보좌에는 무슨 마호멧이 앉는 것도 아니고, 부처가 앉는 것도 아니고, 무슨 공자가 앉는 것도 아니고, 엘리야가 앉는 것도 아니다. 보좌에는 예수님만이 앉으신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분께서 이제 오늘 심판하시는데, 양과 염소를 심판하신다. 특별히 마태복음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데 제가 이걸 보면서 왜 이렇게 기자가 ‘양은 의인이고, 이렇게 사랑하고 염소는 미워하나?’ ‘우리 교회에서 염소 키우는 사람은 어찌해야 하나!!’ 이렇게 생각도 들고 그런데 양은 온 몸을 다해 섬기는 자이고 염소는 풀밭을 못 쓰게도 만들고 초복을 죽게 하는 일이 많아서인 듯싶기도 한데, 하여튼 주님께서 이 땅에 초림 때는 어린 양으로 오셨지만, 앞으로 주님은 사자로 오실 것이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가지고 이 배경을 갖고 하겠다. 드디어 34절을 보면, *마태복음 25:34,46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바로 판결을 하시고 어떤 재판 없이 바로 선포하시는 것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다. 뭐 어떤 뜻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판결문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상속받으라. 라고 한다. 우리가 믿음의 보고의 말씀을 많이 했는데 믿음의 모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신실한 종들에게 하나님의 판결문, 하나님의 선포, 그러니까 하나님의 평가서, 성적표를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믿음 보고 할 때, 팩트 보고가 아닌 믿음 보고를 해야 되는데, 페이스 리포트를 해야 되는데 오늘 좋은 한 예를 소개하자면 파더 리포트이다. Faith report를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평가서를 주신다. Father report, 하나님의 평가서, 하나님의 보고서, 하나님의 판단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평생 믿음보고를 쓴 제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 보고서를 주시는데 파더 리포트를 주시는 것이다. 이 시간이 아버지 보고를 받을 여러분들이 가슴이 조마 조마하는 시간인가? 아니면 가슴 뛰는 시간인가? 두 개 다?? 하여튼 가슴이 조마조마 하는 분들과 가슴이 뛰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보니까 제1판결문이 무엇인가? 35-40절까지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이 양이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을 염소라고 했다. 이것 때문에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못에 돌아가실 때에 앙편에 두 강도가 있었는데, 오른편에 있는 강도가 구원 받고, 왼편에 있는 강도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단지 추측할 뿐이다. 해석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오른편에 있는 양, 왼편에 있는 염소, 이것은 무슨 차이인가?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는 하나는 영원한 영벌이고, 하나는 영원한 생명이고 왜 이리 되었을까? 양과 염소의 차이가 무얼까? 양들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희가 내가 주릴 때에 나에게 먹이고, 내가 목마를 때 나에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영접하고, 벌거벗었을 때 나를 입히고, 병들었을 때 나를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살펴주었다.” 이게 여섯 가지인데, 여섯 가지가 네 번이나 반복이 된다. 그런데 이제 반응이 너무 재미있다. 양들은 그리 말하니까, “주님, 내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한다. 나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렇게 한 것이 나를 위한 것과 같아”라고 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 어려운자, 가난한 자에게 한 것 정도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신다. 지극히 작은 자와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어려운자 가난한자, 힘든 자를 고통당한 자를 도왔다고 그랬을 때, 그분들의 도움의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향해서 한 것이다. 그런데 양들은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다. 왜 기억을 못하는가?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예수님께 전심이 너무 많으니까 자기들이 한 그런 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염소가 문제이다. 염소는 뭐냐면, 내가 주릴 때 안 먹이고, 목마를 때, 안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고, 헐벗었을 때, 입혀주지 아니하고, 병들었을 때, 돌보지 아니하고, 감옥 갔을 때, 살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벼락 같이 염소들이 아니 내가 어느 때 내가 안 했냐고, 나는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한 것을 너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양들은 내가 언제 했냐고 한다. 염소는 내가 분명히 했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는 기억을 하고 있고 하나는 너무 기억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신앙의 원칙과 섬김의 원칙이 정리가 되는 것이다. 한 사람은 은혜의식이 충만해가지고 은혜가 너무 커서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섬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것이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커서 자연스러운 반응과 발현으로 그걸 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날마다 윤리의식 공로의식이 충만해서 언제 한 것을 기억하고 남에게 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자기의식과 공로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은혜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고 하나는 의식적으로 자기의가 충만해 가지고 그것을 기억하고 언제 안 했느냐고 이렇게 반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의식을 통한 무의식적인 것이 행동 가준이 되어야 하지, 공로 의식에 의한 의식적인 것이 행동 기준이 되면 안 된다.’ *마태복음 25:44,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게 누구인가? 양이다. 공로의식에 의한 의식적인 것이 행동기준이 되면 안 된다. 저 여러분 이글을 쓰느라 한참 고생했다. ㅋ 양처럼 은혜의식이 자연스런 발현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삽비라를 보라. 자기 재산을 팔아가지고 구제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즉사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의식을 해서 그런 어려운 일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런 것처럼 양은 언제 내가 섬겼냐고 잊고 있고, 염소는 내가 다 했다고 나타내는 것이다. 양은 자연스럽게 자기가 베푸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고, 염소는 자기가 선행 베푼 것을 내가 어느 때, 언제 했다고 잘 기억하고 드러낸다. 겉으로 드러나는 윤리와 섬김과 구제에 대해서 신경도 쓰고 그러는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섬김과 우리의 나타나는 여섯 가지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작은 자에게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주님께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은혜의식에서 먼저 되어야지 이것이 공로의식이 되면 안 된다. “목사님, 둘 다 하면 안 됩니까? 했다.” 어느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를 한 다음에 주일학교 교사가 “여러분 부자가 되고 싶어요?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한 아이가 손을 들고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죽기 전에는 부자가 되고 싶고, 죽은 전에는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 했다. 너무 그건 아니다. 둘 중에 우리는 하나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했다. 둘의 차이가 있다. II. 사람에게는 진심(眞心)으로, 하나님께는 전심(全心)으로. *양은 예수님 이름으로 선행을 해했고, 염소는 자신의 이름으로 선행을 행했다. -양은 예수님과 그 어려운 사람을 동일 시 보고 선행을 했고, 염소는 자신의 이름으로 선행을 행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선행에는 내 자신의 이름으로 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고, 다 잊어버릭, 자신의 이름으로 선행을 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크면 클수록 나의 기억이 아무것도 안 나는 것이고, 구원의 감격이 작으면 작을수록 나의 공로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번 한국교회 섬김의 날, 저희가 강단 기도에서 구호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이다.’ 이걸 전력투구(全力投球)룰 하니까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행하고,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하다보니까, 자신을 생각할 에너지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죄 성을 가진 이런 인간이 염소의 유혹과 염소의 위험과 염소의 판결을 피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양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하나님께 인정받는 ‘전심’이라는 뜻은 어떤 뜻인가? 구원의 감격이 크면 클수록 내 자신의 공로는 적어지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구원의 감격은 내 인생의 분모이다. 그럼 나의 공로는 내 인생의 분자이다. 예를 들어서 구원의 감격이 이 정도 되는 사람이 내 인생의 공로가 1이 분자가 되면 ½정도가 되니까 나의 공로가 커지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백만 배 큰 사람은, 백만 배 갖고 있는 사람에게 나의 공로가 백만 분의 일(100만 분의 1)의 일은 큰 가? 작은가?? 그것은 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잊어버리는 것이다. 구원의 감격이 천만 분의 일이 되면 그것은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 되겠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감격이 2이고 내 공로는 10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아니 가분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과 분수는 날마다 자기 생각하고 자기중심이 되니까 염소가 되는 자기중심적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다. 우리 온 성도들이 이런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늘 주여, 구원의 감격에는 분모를 키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구원의 감격에 관한한 우리는 영원한 채무자인줄로 믿는다. 그리고 은혜의 받는 데에는 선봉장이 되어야 하며, 은혜의 분모를 키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를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제 받은 은혜가 정말로 간증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흡족한 은혜를 우리에게 받아야 되는 것이고 오늘의 은혜에 관한한 모두가 다 영적인 하루살이이다. 매일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분모를 키워야 된다. 이것이 키워지면 우리가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하더라도 어려움이 없이 자연스럽게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반응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지고 샬롬의 평강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제 어려운 형제에게 하는 것이 우리는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정리하겠다. III. 어려운 형제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다. -이 섬김의 대상이 누구인가? 첫 번째 먼저 생각할 것은 믿는 공동체이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마태복음 25:40,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식구만이 식구라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 15절에 보면, *야고보서 2:15,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구제 사역은, 섬김 사역은 형제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먼저 흘러 들어가야 할 줄 믿는다. *갈라디아서 6:9~10,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그리스도인들의 형제들에게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밖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먼저 교회 안에 선행이나 구제를 먼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공동체성과 지체의식이 먼저 확보가 되면 교회가 건강해지고 공동체가 먼저 건강해지고 더 잘 믿음으로 충만해지면 그 은혜와 축복이 공동체 안에서 확보가 되면 나머지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감당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공동체의 은혜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영적으로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영적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그다음에 은혜가 자연스럽게 넘쳐서 이웃과 세상 앞에 우리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내에 형제들에게 구제를 먼저 하는 것은 공동체가 튼실하게 될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힘 있게 살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이 건강하지 못하고 상처로 깨어지고 에너지가 소신된다면 교회 밖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가 없다. 돕고 싶어도 껍데기로 잠시 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의 가정들에게 먼저 선행을 하라는 이유는 우리 공동체가 건강해야 빛으로 소금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6장 2절에 보면, *갈라디아서 6:2,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교회 내에 형제의 짐도 지지 않으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돕는다고 하는 것은 순서가 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형제들을 돌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3:17,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먼저 주님의 공동체가 건강해야 될 줄로 확신한다. 그래서 제가 진짜 목회자로서 정말 안타까운 것이 있다. 한국교회서도 그렇고 안타까운 것이 그것이 무엇이냐면, *공의와 정의를 말하면서 교회 밖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행을 베푸는 일을 교회가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정작 교회 공동체가 먼저 건강하고 튼실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뜨지 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비판하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교회가 튼실하게 세워지지 않는데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돕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와 형제들이 튼실하고 건강해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막 비난하고 욕하고, 그냥 상처를 주고, 교회가 건실하지 못한 데 어떻게 밖의 사람들을 제대로 도울 수 있겠는가? 따라서 교회 밖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선순위인 줄로 확신한다. 이번에 사랑의교회가 9.26 섬김의 날에 보면서 정말 우리 교회가 건강해 졌다는 것을 감사하고 찬양한다. 사랑의교회가 봉사자를 모집광고를 하니까 2-3천명이 봉사에 10분 만에 봉사자 신청이 마감이 되었다고 한다. 제가 정말 ‘양의 마음을 지닌 성도들이 참 많아졌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를 향한 그럴듯한 말로 온갖 비판과 비난을 주고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면서 교회로 하여금 구제와 봉사를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구제와 봉사를 잘 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도 약점들이 다 있다. 적은 자, 우리 속에도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히고 힘든 일들이 많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다 치유하고 그런 건강함을 가지고 그 다음에 이웃을 돕는 것이다. 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기에 당시에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 믿는다고 고통당한 형제들이었다. 무슨 범죄를 해서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감옥에 갇힌 형제들이 많았다. 그래서 교회가 건강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이 건강성을 가지고 튼실하게 되고 견고한 것을 가지고 이웃을 구제하고 섬기게 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의 구제의 대상이 되고 섬김의 대상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준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누가복음 6:32,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오히려 이웃을 향하여,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욕하는 자를 기도하고, 양을 때리는 자에게도 선대하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정리하면, 첫 번째는 병들고 헐벗고 감옥에 갇힌 우리 형제들을 먼저 도와서 교회가 건강하게 되고 튼실하게 되고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가지고 이웃을 섬기는 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기억을 했다. 앞에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자기가 예수님 제대로 믿지 않고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그럴 때에 뭐라 하고 했는가? 네가 왜 그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느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냐고 그렇게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셨다. “고통당하는 초대교회 자들이 바로 나다. 고통 받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로 나야”라고 하신다. 그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반대로 그 사람들을 구제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를 돕는 것은 나를 섬기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 하는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 줄로 믿어야 한다. ※어느 수도원의 원칙이 손님 접대였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수도원에 접대를 받고 환대를 받았는데 그 수도원의 원칙이 손님접대이다. 나이든 고참 수도승이 아주 피곤한 주말을 보내고 수도원 문을 잠그려고 했다. 그날따라 방문객이 굉장히 많았고, 그중에 대하기가 까다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방문객들이 모두 나가는 것을 보고 수도승은 ‘이제 쉴 수가 있겠구나~!’ 속으로 생각하고 기뻤다. 문을 잠그려는 찰나 새로운 방문객이 들어와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는가?라고 요청을 했다. 속으로는 너무 피곤했다. 그렇지만 수도승이 문을 열면서 그 사람을 맞이하면서 혼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님, 또 오신 겁니까?’ 라고 했다. 여러분 약한 자, 작은 자를 돕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9.26 섬김의 날’을 통하여 귀한 일들을 했고 잘 감당했지만 이제는 더욱 이미지가 새로워져야 한다. 우리가 알리기도 다 했지만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의식이 충만해져서 우리의 품위를 키워서 이런 것이 은혜 받은 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느 날 여러분둘이 파더 보고서를, 믿음 보고서를 함께 Faith report, Father report를 받을 것이다. 받을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삶의 버킷 리스트를 얼마나 잘 했느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느냐, 얼마나 책을 많이 썼느냐?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을 가지고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섬김이 주님을 섬김을 받았다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두 손을 펼치고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사랑할수록 주 날 사랑해, 매일 내 맘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은혜의 분모를 키우자, 교회가 건강해져서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하자. 우리가 오늘 말씀을 기억하여 양이 될지, 염소가 될지를 판단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 섬기고 예수님을 대하듯이 그렇게 할 때에 우리가 어떤 윤리적인 기준이 아니라, 이것은 복음에 감격을 통한 자연스런 반응으로 축복이 우리에게 있을 줄 믿는다. ♧요약 우리 모두가 귀한 말씀을 통해서 이제 각자에게 의식적, 윤리적인 산 정도가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드러나서 우리의 무의식조차도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구원의 증거가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보혈에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하나님의 감격함으로 그 은혜의 분모를 키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섬김이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의 선행과 구제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우리 공동체, 우리 민족이 되기를 간구하며, 공로의식이 아닌 은혜의식으로 충만해서 자연스럽게 선행하고 구제하고 공동체 안에서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섬기며 튼실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임을 깨달아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비상하기를 소망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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