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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2년 10월 16일)
제목: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라"
말씀: 출애굽기 40:34~38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오소협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박헌성 목사님(나성열린문교회)-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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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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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성 목사님(미국 나성열린문교회)-초빙
-할렐루야!! 여러분의 교회, 찬양대를 비롯해서 여러분의 예배, 최고이다.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줄로 믿는다. 세계적인 양대 시사 잡지를 한다면 타임지, 뉴스위크지가 있다. 두 잡지는 그 논조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타임지는 항상 사람중심, 인물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뉴스위크지는 사건중심으로 기록한다. 역사의 흐름을 해석할 때에 타임지는 인물을 잘 분석하면 인류의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뉴스위크지는 사건을 잘 분석하면 오늘 우리에게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도 여러 인물과 여러 사건이 등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속할 만큼 인간, 우리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사람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 번 밖에 사는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구상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넓은 의미로는 그의 역사를 시작으로 해서 저 예루살렘 교회로, 천국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다 교회 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중요한 곳이 없다. 교회는 우리들의 삶의 중심이다. 교회는 우리들의 상황 시와 같다. 하나의 해드쿼터(Headquarter) 가 된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관리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자녀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모든 축복의 근원이 교회이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문제가 성막에서, 교회에서 결정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 성공하고 잘 되고 부자 되고 돈 잘 벌고 다 교회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교회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로 믿는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 그때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음으로 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인간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인간들은 불쌍한 인간들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간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창세기가 다 지나갔다. 출애굽기도 다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오늘 본문에 와서 떠났던 그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하나님의 영광이 최초 에덴동산보다 더 컸다고 말씀한다. 할렐루야! 누가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인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성막,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성막을 세우라.”고 명령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체적으로 지성소를 만들고, 성소를 만들었다. 말씀대로 성막을 세웠더니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 영광이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을 대면하고 모세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 삶의 최고의 사명은 영광이 충만한 교회 세우는 일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인간들은 고통과 고생, 죄 아래서 별 볼일 없이 살았다. 그런데 교회, 성막을 세운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져서 인생이 행복하고 은혜와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에 순종해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워야 될 줄로 믿는다. 예배시간 구별하고 장소를 구별하고 내 몸을 구별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절제해야 한다. 세상 욕심, 적당히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숨 걸고 헌신하겠다고 믿음의 결심을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에 나와서 주님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교회 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 속지 말라. 세상이 아니다. 교회이다. 믿으면 아멘!
 
신학에서 ‘현존의 신학이다.’라는 말이 있다. ‘Theology of process.’라는 것은 목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환자가 옆에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의미로 이 교회에 오늘 이 시간 나와 있는지는 몰라도 여기에 앉아만 있어도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는 나와야 된다. 일찍이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가 어디인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이다. 교회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는 ‘헤쎄드’, 은혜, 은혜의 보좌, 은혜의 보좌가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 은혜의 보좌가 있는 교회가고 싶어 했다. 하나님을 늘 그리워했다. 야곱도 130년 인생을 살고 난 이후에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좋사오니”, 했다. 할렐루야! 그렇다. 교회는 인생의 필요한 모든 보물이 다 들어있다.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가? 교회에 나오는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워하는 행복, 하나님의 교회에 머무는 행복,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봉사하는 행복, 그것이 최고인 것이다. 이 교회 안에는 각양 은사, 보물이 다 들어있다. 돈과 성공도 다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교회를 나오면 우리는 최고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여기 성막을 세우다가 신약에 와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거하심에 말과 같다. 다시 말해서 성막의 중심, 교회의 중심이 뭐냐면, 예수님이다. 영광이 충만한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는 줄로 믿는다. 할렐루야!! 그 당시 역사를 보면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때이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이 칼을 가지고 있고 창을 가지고 있고, 병패를 가지고 있고, 병거가 있었다. 요즘 말하면 신예무기, 핵무기, 뭐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는 막대기 돌칼, 돌도끼, 그런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될 것이라.” 그렇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빼앗는 땅이 아니다. 싸움에서 얻는 땅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냥 주셔야 하는 땅이다. 가나안 땅에서 싸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 들고 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 교회에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 된다고 했다. 할렐루야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오늘 무얼 먹어야 하고 오늘 어디로 가야 하나요?” 라고 하나님께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에서 성막에서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아니야, 이 세상 살아가려면 ‘칼이 필요해, 창이 필요해, 병거가 필요해, 돈이 필요해, 아니야 그리고 세상 살려면 스팩들이 필요해’ 라고 한다.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잘 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어떻게 세우는가?
 
I. 첫째는 목회자가 보여 지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
-교회는 목회자가 잘 보여야 한다. 목사님의 설교가 잘 들려야 된다. 그래야 영광이 충만한 교회가 되는 줄 믿는다. 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일곱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는 말세는 이 지상에 있는 상징이나 비유라고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순서대로 점검하시는데, 일곱 교회에 나타나는 주님의 교훈은 다 다르다. 권면도 다 다르다. 책망도 다르다. 칭찬도 다르다. 그런데 이 일곱 교회에 세 가지가 똑 같은 것이 있다.
 
첫째, 그 하나는 “귀 있는 자들은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라.”
둘째, “이기는 자에게는 면류관, 상을 주시리라.”
셋째,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서머나 교회는 서머나 교회 사자에게,”
-그렇다. 이 지상의 모든 인간들은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의 주관적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된다. 받아야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 목사님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 교회든지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는 지상의 교회는 없다. 말씀하실 때는 대언을 통하여 그 교회는 사자에게 말씀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그 교회는 목회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말세에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선교,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느냐? 주의 종의 말을 잘 듣고 해라. 이다. 설교시간만 되면 졸고 있는 권사님이 있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1세대들은 다 죽었다. 그리고 세컨 제너레이션들이 이제는 후손들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살아야 되고 하나님 잘 믿고 복 받고 은혜의 삶을 살아야 되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하나님 말씀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영혼의 절규로 설교한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지켜 행하라.” 한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복 받고 잘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이 네 인생을 책임져 주고 필요를 따라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목사님을 통하여 나에게 필요한 은혜도 주시고, 복도 주실 줄로 믿는다. 교회를 에클래시아 라고 한다. 역동적 단어이다. 일종의 특공대라는 말이다. 교회는 우리 것이 아니다.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주의 종의 말씀을 잘 듣고 특공대처럼 똘똘 뭉쳐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만들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의 종,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이 성경에 집착해야 된다. 믿으면 아멘이다.
 
그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모세의 명령대로 모든 역사를 감당해야 된다. 그래서 교회를 세울 때,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냐? 당회장 목사님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강사로 세워주었더니 당회장 잘하라고 치켜세워 올린다. 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니다. 저는 조국을 떠난 지 43년째이다. 바깥은 한국 사람이지만, 속은 다 웨스턴 스타일로 변하였다. 그런 거 할 줄 모른다.
 
리더쉽 전문가 쟌 맥스웰이 쓴 ‘Thinking for a Change-생각의 법칙)’ 책을 보면 우리의 삶이 달라지려면 패러다임, 생각이 바꾸어야 된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오해하지 말고 선입견 갖지 말아라.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바꾸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먼저 생각을 바꾸어라. 그렇다. 목사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오늘부터 순종하며 살아야지, ‘우리 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제일 훌륭하신 목사님이시다.’ 항상 1등 의식이 필요하다. 왜? 교회는 신본주의이기 때문에 목사님이 잘 보여야 한다. 그래야 내 신앙의 중심이 잡히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잘 보일 때에 강해지는 것이다. 특별히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들어야 한다. 정신 차리고 들으면 영광이 충만한 교회가 되고 기적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된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설교를 할 때,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 말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 프로 받아들인다. 정말 너무 잘 듣는다. 그것을 보고 바울이, “일어나라!” 할 때 일어났다. 말씀의 능력이다. 할렐루야!!
 
II. 감사하면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
-똑 같은 세상, 똑 같은 인생살이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항상 삐딱하게, 네가티브하게 원망과 불평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세상사는 것은 자유이지만 성도는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특별히 교회 생활은 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주보 하나를 보아도 다 감사거리로 봐야 된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한 분이 보스톤에 있는데, 머리가 다 빠졌다. 왜 그러냐고 하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다 빠졌다고 한다. 주일만 되면 장로님이 주보를 들고 와서 “목사님, 여기 글씨가 틀렸네요.” 뭐 주보라는 게 대충 읽으면 되는 것이지,,, 그렇다. 삶과 죽음, 기쁨과 고난, 이상과 현실에 명암과 영역이 엇갈리는 가운데서도 오늘까지 살아오게 된 것은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축복인줄로 믿는다.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은 내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영광이 충만한 교회 때문에 산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고달파도 원망하거나, 불평할 것이 아니라, 늘 감사하면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 할렐루야!!
 
어떤 홀어머니가 아들을 키워서 외아들을 키워서 장가를 보냈다. 한 집에 사는데 어느 날 밤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는데 아들 내외가 사는 방 앞을 지나가는데, 안에서 너무 다정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여보, 여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1번이 누구야? 1번이 당신이지, 2번이 누구야? 우리 사랑하는 딸이지, 3번이 누구야? 장모님이지, 그럼 4번은 누구야? 우리 집 강아지지, 5번은 누구야? 나를 낳아주신 우리 어머니지” 라고 했다. 어머니가 밖에서 들으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는 중 마는 둥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편지하나를 썼다. “1번 보아라, 5번은 나간다.”라고 썼다. ㅋㅋㅋ그날 저녁에 거기서 나눈 대화는 수사학적 이야기이다. 부부간에 재미있게 나눈 대화인데 이것을 시어머니가 들으니까 오해가 된 것이다.
 
여러분, 감사하면서 살아가길 바란다.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언제까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 돈 하겠는가? 받은 축복 누리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라. 주일날도 교회 올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와라. 화장도 예쁘게 하라. 좋은 보석이 있으면 하고 나와라. 예수 믿는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굳어지면 안 된다. 익숙해지면 안 된다. 종교 매너리즘에 빠져서 ‘오늘 주일이네, 교회에 가야 되는구나’ 그렇게 나오지 말라. 늘 새롭게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결혼 20주년을 맞이한 어떤 부부가 기념에서 옛날에 데이트 할 때 같이 아주 고급 레스토랑을 갔다. 대게 그런 곳에 가면 여자들은 소녀가 된다. 자기가 아이를 몇을 낳아 주부로 20년 산 것을 다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좋아서 난리이다. 그 때에 클래식 음악이 쫙 흘러나오면 더 정신을 못 차리고, “여보 여보, 이곡이 무슨 곡이지?” 하니까 앞에서 정신없이 칼질 하면서 먹던 남편이 “이 고기가 소등심이지”라고 한다.
 
구원 받은 성도는 교회가 있어서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감사해야 되고 교회 때문에 인생을 즐기라. 교회 때문에 행복 하라. 교회 때문에 기뻐하며 감사하라. 쓸데없이 오해하지 말고, 쓸데없이 시비하지 말고, 할렐루야, 어떤 분은 그런 이야기도 한다. “나 죽으면 시집 갈 거야?” 여러분, 그런 질문을 주고받는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죽으면 산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는가? 안 가면 안 가는 거고, 안 간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간다고 해서 섭섭해 할 것도 없다. Anyway, 감사하면서 교회 세우면, 성공, 실패 다 뛰어 넘을 수 있다. 여러분, 제가 설교하면서 제가 웃기니까, 웃는 분도 있고 안 웃는 분도 있다. 웃음이란 내가 건강한 사람이 잘 웃을 수 있고 잘 울 수 있다.
 
1965년도에 프랑스에 폴 브로커 라는 학자가 우리 뇌가 좌 뇌와 우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좌 뇌, 우뇌가 좌 뇌는 합리적, 논리적, 지성적, 우뇌는 감성적, 예술적, 그런 것을 컨츄럴 한다. 이것이 두 개가 다 건강해서 작동을 해야 웃을 줄도 알고, 울 줄도 안다. 병든 사람, 인생이 너무 힘든 사람은 이것이 잘 안 된다. 요즘 과학자들이 바이돌핀이라는 유명한 호르몬을 발견했다. 그것이 엔돌핀보다는 4천배 강하다고 한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이 바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이 언제 생기냐면 영적으로 기뻐할 때, 이렇게 은혜로운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이러면서 내 영혼이 기뻐 춤출 때, 그때 막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나면 어떤 일이 생겨나느냐 면은 막 암세포를 막 죽인다. 우리 몸 안에서 여러 가지 바이러스가 죽어나간다. 영적으로 살아야 된다. 잘못도 실수도 감사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잘못할 수도 있는 것인데, 이해하고 용서하고 그냥 잊어버려야 한다. 사람이 실수 안 하면 좋지만 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아브라함, 베드로 바울도 다 실수를 했지만 다 겸손해지고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았다. 이민 교회는 결혼을 네 번을 한 사람도 있다. 다섯 번째 나에게 주례를 맡긴 자도 있는데 네 번까지는 해봤지만 다섯 번째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냥 살아라, 어차피 헤어질 것인데”라고 했다. 너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라고 했다.
 
감사로 교회를 세우면, 우리의 모든 병든 영역이 치유 받는다. 감사로 교회를 세우면 기적이 일어난다. 감사로 교회를 세우면, 사랑이 있다. 감사로 교회를 세우라. 기쁨과 신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워야 할 줄로 믿는다.
 
III. 믿음으로 교회를 세워야 한다.
“구름이 성막위로 떠오를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서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오늘까지 살아온 경험이 중요하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번 것,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 받은 것,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 뭐 이런 것 다 귀하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그것이 비록 실패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일 소중하다. 우리 인생은 공짜로 된 것은 없다. 그만한 값을 지불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까지 살아온 경험이 중요한데, 내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한 번, 믿음으로 교회 세워보자. 믿음으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면, 우리의 미래에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증명할 수 있는 것과 증명할 수 없는 것 사이에는 갭이 있다. 지식과 신비에서 갭이 있다. 물질세계, 영적세계 다 갭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무엇으로 뛰어넘는가? 믿음으로 뛰어넘는다. 불교의 성철 스님이 서울대학병원에서 죽으면서 제자들이 찾아가서 “선생님, 한 말씀해주세요.” 하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대한민국 지성인들을 강타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된다. 그분이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은 자기가 40년 넘게 도를 닦아도 믿는 사람이 없더라. 라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이다. 를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벌써 2천 년 전에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모른다. 죄와 용서, 삶과 죽음의 세계, 시간과 영원의 세계는 다 갭이 있다. 그것도 우리가 믿음으로 다 뛰어넘어 야 된다. 과학은 경험 안에 있지만 믿음은 경험 밖에 있다. 믿을 수 있는 것, 믿는 것 과학이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것, 믿는 것, 믿음이다.
 
※제가 특새를 할 때에 목사님들이 한 네 명이 돌아가면서 집회를 하는데 작년에 1월에 토론토에 있는 이형광 목사님이란 분을 초청을 했다. 그런데 이분이 깡패 김태촌 밑에서 부두목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이 되어 와 있는데 우리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그때만 해도 캐나다나 미국도 이 코로나 때문에 힘들 때이다. 조사도 많고, 검사도 많고, 이럴 때, 비행기를 타러 가려고 검사를 했더니 이 파시티브가 나온 것이다. 큰일 났네!! 제가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강사가 왔다가 가야될 때, 가야된다. 안 가고 있으면 내가 힘들게 된다. ㅋㅋㅋ다른 사람 오는데, 다른 강사를 또 데리고 와야 되는데 이게 힘들다. 그래서 “하나님, 이게 뭡니까? 코로나가 무엇인데 우리 집회를 방해합니까?” 했다 그런데 머리가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권사님 한 분이 나에게 우황청심환을 하나 주셨다. 그 청심환을 들고 안수를 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우리 사무실에 전도사님을 시켜서 “가서 내가 이렇게 말을 해라. 우황청심환을 먹고 가서 조사해서 비행기를 타라고 해라. 했다. 그런데 오늘 파시티브(positive)가 나왔는데 오늘 해보니 네가티브(negative)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캐나다에 들어갔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음은 단순해야 된다. 처녀의 몸에서 아이를 낳게 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곤두박질치던 닛산을 일본의 최고의 경영자로 말하는 카를로스 본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아마추어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프로는 문제를 쉽게 단순화 시킨다.” -카를로스 회장-
-아마추어와 프로의 결정적 차이는 단순화의 능력이다. 볼링 칠 때, 공의 핀을 다 쓰러뜨리면 스트라이크라고 하는데, 그 스트라이크를 치려면, 제일 앞에 있는 1번 핀을 잘 보아야 한다. 그래서 1번 핀을 킹 핀이라고 한다. 그 다음에 벌목공들이 나무를 베어서 냇가를 통해서 운반을 하다보면 어느 지점에 오면, 걸려가지고 못 내려갈 때가 있다. 그런데 그 걸리기 나무 하나가 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을 ‘프로페셔널’이라고 한다. 그것을 킹 핀이라고 한다. 그것을 뽑아내면 저절로 잘 내려간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단순하신 하나님이시다. 믿음이라는 것은 단순해야 된다. 복잡하면 능력이 없다.
 
장로님 가정에 며느리를 봤는데 불임이다. 아기를 못 낳는다. 좋은 것을 다 먹여도 안 된다. 항상 성도들도 안 되면 나중에 목사님께 안수 받으러 온다. 그런데 며느리를 데리고 우리 아이를 낳아야 된다고 안수를 받으러 왔다. 후손을 얻고자 기도를 받으러 왔다. 목사님이 둘을 앉혀놓고, 한 손은 권사님 머리위에 한 손은 며느리 머리에 올려놓고 “태의 문을 열어주세요. 장로님 가정이 번창 하게 하세요.”라고 막 열심히 기도했다. 이 며느리는 신앙이 없어서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아멘, 아멘 했다. 나중에 누가 임신을 했는가? ㅋㅋㅋ 믿음으로 교회를 세운다. 이게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찬양대도 하고 교사도 하고 봉사 차량 주차 다 하는 것이 열심히 믿음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다. 정말 그것도 이것도 못하는 사람은 돈이라도 내놓고 가라. 왜냐하면 리스펀스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 이 교회 안에 오면 전파가 수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안에도 모든 것이 들어와서 있는 것처럼, 연결한 것만 나온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은혜와 복을 받으려면,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연결된 것이 무언가 있어야 한다. ‘위너의 팩트’ 라는 말이 있다. 승자효과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면 제일 힘 센 놈이 암컷을 차지한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중간 놈들이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힘을 키우는 것이다. 힘을 키워서 나중에 어느 때가 되면 제일 강한 놈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게 승자의 효과이다. 믿음의 능력은 계속 반복을 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할 때, 승리를 맛볼 수 있다. 왜 우리가 잘 안 되느냐? 승자의 효과를 몰라서이다. 그러니까 낙심하고 좌절하고 힘들어 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 때, 승자의 효과를 자주 경험해야 된다. 그것이 상식이 되게 한다. 상식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렇다 믿음으로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는다. 믿음으로 교회 세우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믿으면 아멘!! His part, Our part, 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은 구별되어야 된다. 내가 먼저 믿음으로 살아야 일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내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지, 말씀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지, 이렇게 말로 선포하면 이미 시험 없고 실패 없다. 고민과 갈등이 없다. 무조건 내가 믿음으로 살아야지, 불가능한 일 없다. 무조건 교회가 먼저이다. 하면 하나님이 내 일을 해주신다. 무조건 나는 십일조를 드린다. 재물의 시험이 없다. 축복 받는다. 무조건 나는 새벽 기도이다. 기적이 일어난다. 꿈이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님이 보여 지고 감사하면서 교회 세우고, 믿음으로 영광이 충만한 교회 세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에서 목사님의 말씀 속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은혜를 받아서 그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어떤 실패도 뛰어넘는 믿음으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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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2년 10월 16일)
제목: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우라"
말씀: 출애굽기 40:34~38
대표기도: 오소협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박헌성 목사님(나성열린문교회)-초빙
ㅡㅡㅡㅡ
 
*출애굽기 40:34~38,
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

  
▶박헌성 목사님(미국 나성열린문교회)-초빙
-할렐루야!! 여러분의 교회, 찬양대를 비롯해서 여러분의 예배, 최고이다.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줄로 믿는다. 세계적인 양대 시사 잡지를 한다면 타임지, 뉴스위크지가 있다. 두 잡지는 그 논조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타임지는 항상 사람중심, 인물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뉴스위크지는 사건중심으로 기록한다. 역사의 흐름을 해석할 때에 타임지는 인물을 잘 분석하면 인류의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뉴스위크지는 사건을 잘 분석하면 오늘 우리에게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도 여러 인물과 여러 사건이 등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속할 만큼 인간, 우리들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사람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는데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 번 밖에 사는 인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구상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넓은 의미로는 그의 역사를 시작으로 해서 저 예루살렘 교회로, 천국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다 교회 론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중요한 곳이 없다. 교회는 우리들의 삶의 중심이다. 교회는 우리들의 상황 시와 같다. 하나의 해드쿼터(Headquarter) 가 된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관리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자녀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모든 축복의 근원이 교회이다.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문제가 성막에서, 교회에서 결정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 성공하고 잘 되고 부자 되고 돈 잘 벌고 다 교회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교회는 축복의 통로가 될 줄로 믿는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 그때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음으로 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인간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인간들은 불쌍한 인간들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간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창세기가 다 지나갔다. 출애굽기도 다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오늘 본문에 와서 떠났던 그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하나님의 영광이 최초 에덴동산보다 더 컸다고 말씀한다. 할렐루야! 누가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인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성막,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성막을 세우라.”고 명령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체적으로 지성소를 만들고, 성소를 만들었다. 말씀대로 성막을 세웠더니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 영광이 얼마나 컸으면 하나님을 대면하고 모세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 삶의 최고의 사명은 영광이 충만한 교회 세우는 일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인간들은 고통과 고생, 죄 아래서 별 볼일 없이 살았다. 그런데 교회, 성막을 세운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져서 인생이 행복하고 은혜와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에 순종해서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세워야 될 줄로 믿는다. 예배시간 구별하고 장소를 구별하고 내 몸을 구별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절제해야 한다. 세상 욕심, 적당히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숨 걸고 헌신하겠다고 믿음의 결심을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에 나와서 주님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교회 생활을 잘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 속지 말라. 세상이 아니다. 교회이다. 믿으면 아멘!
 
신학에서 ‘현존의 신학이다.’라는 말이 있다. ‘Theology of process.’라는 것은 목사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환자가 옆에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의미로 이 교회에 오늘 이 시간 나와 있는지는 몰라도 여기에 앉아만 있어도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워도 교회는 나와야 된다. 일찍이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가 어디인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이다. 교회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대신하는 ‘헤쎄드’, 은혜, 은혜의 보좌, 은혜의 보좌가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 은혜의 보좌가 있는 교회가고 싶어 했다. 하나님을 늘 그리워했다. 야곱도 130년 인생을 살고 난 이후에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하나님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좋사오니”, 했다. 할렐루야! 그렇다. 교회는 인생의 필요한 모든 보물이 다 들어있다. 우리에게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가? 교회에 나오는 일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워하는 행복, 하나님의 교회에 머무는 행복, 하나님의 교회에 나와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봉사하는 행복, 그것이 최고인 것이다. 이 교회 안에는 각양 은사, 보물이 다 들어있다. 돈과 성공도 다 교회 안에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교회를 나오면 우리는 최고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여기 성막을 세우다가 신약에 와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거하심에 말과 같다. 다시 말해서 성막의 중심, 교회의 중심이 뭐냐면, 예수님이다. 영광이 충만한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는 줄로 믿는다. 할렐루야!! 그 당시 역사를 보면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때이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이 칼을 가지고 있고 창을 가지고 있고, 병패를 가지고 있고, 병거가 있었다. 요즘 말하면 신예무기, 핵무기, 뭐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는 막대기 돌칼, 돌도끼, 그런 것 밖에 없었다.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될 것이라.” 그렇다 교회가
중요한 것이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빼앗는 땅이 아니다. 싸움에서 얻는 땅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냥 주셔야 하는 땅이다. 가나안 땅에서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창 들고 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 교회에서 전쟁의 승패가 결정 된다고 했다. 할렐루야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오늘 무얼 먹어야 하고 오늘 어디로 가야 하나요?” 라고 하나님께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에서 성막에서 물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아니야, 이 세상 살아가려면 ‘칼이 필요해, 창이 필요해, 병거가 필요해, 돈이 필요해, 아니야 세상 살려면 스팩들이 필요해’ 라고 한다.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에서 하나님 만나고 하나님 말씀 듣고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잘 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영광이 충만한 교회를 어떻게 세우는가?
 
I. 첫째는 목회자가 보여 지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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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0월 12일)
제목: "그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말씀: 요한복음 21:15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박단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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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5,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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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의 삶에 큰 울림을 주는 만남이 있다. 모든 만남이 그렇지는 못하겠지만 특별한 감동,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그런 만남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스승의 만남의 때 일수도 있고, 마음이 딱 맞는 친구 혹은 동역 자를 만날 때, 배우자를 만날 때 일수도 있다. 이러한 만남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다. 기존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에 있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만남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과의 만남이다. 아마도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경험하고 그 만남의 기쁨과 감사로 인해 오늘까지 살아왔으리라 생각한다. 성경에는 주님과의 특별한 만남의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 중 누가복음 19장에는 자신의 민족을 수탈하고 살아갔던 한 세리장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 당시 지중해 패권을 쥐고 있던 강력한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드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확충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지배한 국가에 무거운 세금을 부여하고 그것을 거두어 들였다. 이러한 세금 부여는 이웃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속 정부와 우상숭배에 사용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세금을 내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억지로 세금을 내었기에 그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맡은 세리들은 그들에게 원망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세리들 자신들도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매국노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으며 로마제국이 책정한 세금 이상으로 거둬들여 남는 이익을 가져가는 세리들을 향해 유대인들은 창녀와 함께 가장 천한 죄인 취급을 하였다. 그런 세리들의 우두머리였던 삭개오는 비록 부유한 삶을 살았지만, 그 마음에 진정한 행복과 평안이 없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여리고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삭개오는 이전부터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의 삶에 대한 근심, 유대인이지만 유대인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세리들 중에 세리, 세리 장이었던 삭개오는 세상을 구원할 만한 선지자로 알려진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길 원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살고 있는 여리고로 오셨을 때 삭개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여 만나고자 했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았고 잘 알려진 것처럼 삭개오 키가 매우 작았기에 예수님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로 알려진 돌 무화과 나무에 올라갔다.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가 선택했던 방법이었지만 그것으로 그이 궁금증은 온전히 해결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보면,
 
*누가복음 19:5,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 이 부르심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를 원했던 삭개오에게는 너무나도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그 어떤 유대인 지도자도 어떠한 일반백성도 삭개오의 집에 오가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삭개오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한다.
 
*누가복음 19:6,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그분께 나아온다. 그렇게 삭개오는 자신의 깊은 갈증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모두가 꺼려하는 죄인 중에 죄인인 세리장, 삭개오 집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수근 거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9:10,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때때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통해 어떠한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삭개오가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는 해답을 찾을 수각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우리 삶에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 각자의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감으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반응하고 그 앞에 나아갈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님들의 삶에도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반문이 있었는가? 여러분 각자에게 어떠한 뚜렷한 사건이 있었는지 저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제가 확신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우리가 각자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우리를 부르신 그 사건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우리 생각이 바뀌고, 우리 행동이 변화되었을 것이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어떤 존재보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너무나 중요하다. 또한 내가 힘들 때 나를 위로하시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그분은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딱 거기까지만 한정짓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는 분,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 분, 딱 여기까지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인격적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으로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과 같이 너무도 크고 위대하시고 아무것도 필요가 없으실 것 같은 그 하나님께서 세상에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하신다는 것이다. 구약성경 신명기 6장 4절과 5절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신명기 6:4-5,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출 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무리할 즈음, 하나님은 지도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해 주신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출애굽의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며, 자기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놀라운 역사였다. 그런 하나님께서 어찌나 강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시는지 홍해사건 직후에 모세는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출애굽기 15:11,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이렇게 강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마음과 뜻과 힘들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세상이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지키시고, 필요를 채우시는 것으로 멈추시지 않으시고, 우리와 더 깊고 우리와 더 특별한 관계를 맺기 우해 원하시는데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가? 많은 경우에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너무 당연한데,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색하게 느낄 때가 많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으로 나를 건지시고 나의 삶에 자리에 찾아오셔서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날마다 은혜로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도 너무나 감사하지만 우리 믿음 생활에 있어서 정말 감사할 수 있고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한 낮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그 큰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여러분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시선은 그 대상을 향하게 된다. 아주 옛날로 돌아가서 여러분의 학창시절이나 대학시절을 생각해 보라. 누군가 맘에 든 이성이 있다면 나도 모르게 계속 그 친구를 바라보게 된다. 계속 눈길이 가게 되고 관심이 가게 된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몰라도 옆에 친구가 자꾸 이야기한다. “너는 왜 자꾸 그 애를 보냐?” 무슨 의미인가? 그 대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한다. ‘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할까? 무슨 취미를 가졌을까?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 그 대상에 대한 생각으로 여러분의 머릿속에 가득 찼던 그 순간이 기억나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내 시선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하게 되고 잠자리에 들 때나, 아침에 새로운 날을 맞이할 때, 하나님 생각으로 두근두근 하고 그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대한 깊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더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했던 적이 있는가? 하나님과 더 깊이 있게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의 깊은 자리에 더 나아가 그 때 느꼈던 감격과 기쁨을 경험했던 적이 있는가? 찬송가315장(512장), 내 주 되신 주, 참 사랑하고 나는 찬송가가 있다.
 
*찬송가315장(512장)
1.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2.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3.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4.큰 영광의 구주 날 사랑하사
그 풍성한 은혜 더 하시리니
금 면류관 쓰고 늘 찬송할 말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믿음의 고백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1-4절까지를 보면, 공통된 가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를 그런 아름다운 찬양의 고백이다. 저는 여러분이 살아가는 날 동안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기도할 떼 작년보다 올해가 더 사랑하며 지난달보다 이번 달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지난주보다, 이번 주, 어제보다 오늘, 오늘 아침 일어날 때보다 오늘밤 잠자리에 들 때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라는 기도의 제목이 우리 모두의 기도의 제목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 큰 변화가 따라오게 된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처음에는 단순한 관심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우리의 마음은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어 지게 된다.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도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대상에게 아무것도 해주고 싶은 것이 없다면 정말로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 같다. 마찬가지로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삶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는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입술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할지라도 때론 그 가운데 눈물과 감격이 있다할지라도 사랑하는 하나님을 향해서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전환이 없다는 것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데는 부족할 것 같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지 우리 각자가 확인해 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나는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관심이 있는 데에 나 또한 관심을 갖고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여러분, 그런 마음으로 마음이 설레 본적이 없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고, 그 가운데 주시는 감사함이 너무나 가득해서,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원하고, 하나님의 관심 있는 곳에 내 관심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지를 원하는 방법은 이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가?.
*갈라디아서 1:10,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말로는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초점을 맞출 때가 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가운데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과연 무엇일까? 오늘 본문에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자신에게 가장 따랐던 제자 베드로와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한복음 21:15,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내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또한 택한 백성들, 아직까지 하나님을 잘 잊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또한 그들을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시키는데 우리가 함께 하는데 원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 때로는 순장님이면 순원 들일 수도 있고, 우리가 또 주일학교 교사라면 우리들에게 맡겨준 학생들일 수도 있고, 나에게 맡겨진 조원들일 수도 있고, 그 영혼들이 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나의 동역 자들일 수도 있고 직장에서 나보다 더 하급 자일수도 있고 그런 여러 사람들 가운데 그 하나님이 자녀들이 실족하고 시험 들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 또한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우리가 입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누군가를 상처주고 그들을 낙심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인 것 같다.
 
어떤 때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여 모든 일에 너그러워지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지만 조금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뎌지거나 멀어져도 우리의 마음이 금새 날카로워져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런 연약함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남아있지 않는가? 그것은 또한 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저 스스로도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지만 여전히 제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려하고, 또 잘 되는 사람들을 시기(猜忌) 질투(嫉妬)하고 또한 더욱더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주고 그들을 낙심케 하는 제 자신을 볼 때마다 작은 괴로움이 저에게 있다.
 
아주 예전에 저는 스스로 연약함으로 인해 마음에 큰 눌림이 있던 어느 날 우리가 방금 나누었던 이 찬송가의 ‘내 주 되신 주’의 가사를 깊이 묵상했던 적이 있다. 가사를 하나하나 되새기며,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라는 구절을 보자 나는 참 부족하지만 언젠가 더욱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면 그때는 내 삶이 좀더 거룩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구절을 가지고 이 찬송가를 묵상했는데 그러던 중에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서 이 가사의 원곡에 대해서 어떤 내용인가를 찾아보게 되었다. 찬송가로 되어 있고 여러 가지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제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의 원 가사를 한 번 의역해 보았다. 그것을 해석해 보며 이렇다. ‘만약 나의 예수님을 가장 했던 사랑했던 순간이 언제인가?’ 라면 ‘그것은 바로 지금입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사실 그전까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라는 구절이 막연한 어떤 미래를 이야기 한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부족하지만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나에게 있다면 거기를 걸어간다면 어느 순간에는 그래도 내가 믿음의 고백으로 “주님, 내가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찬송 시는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내 삶의 어떤 순간보다도 ‘내 현재의 삶에 지금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미래의 어느 순간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나 연약한 그 모든 상황들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며 그 연약함 들을 이겨내고자 애써야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가사, 이 찬송가의 가사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어려움과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문제가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할 때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정답으로 돌아와야 되는데, 그 정답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 지난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위한 강단 기도회, 한 달 동안 진행되는 그 기도회 가운데 큰 은혜가 있었다. 한 달 동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몸 된 한국교회들을 섬기기 위해 우리가 기도회의 자리로 나아갈 때에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잠시 뒤로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기도제목을 우리의 삶에 우선순위에 놓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우리는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일이 그렇게 기도한 이후에 우리가 정말 섬김을 마친 이후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문제 또한 순리대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들려지고 해결되는 것을 경험했다. 제 개인적으로도 몇 달간 고민하고 준비하던 일들이 잘 해결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중에 강단 기도회가 지나고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 지난 며칠 뒤에 그 일들이 차례차례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우리의 삶에 많은 순간 가운데 하나님을 날마다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줄 믿는다. 이중에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던 분들이 있을 것이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레고 기쁨이 충만했던 그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여러분은 어떠한가? 현재는 그 설레었던 그 하나님의 대한 그 사랑을 사랑이 약간은 퇴색된 채, 과거의 하나님과의 좋았던 때만을 기억하며 언젠가는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의 삶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는가?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가? 바로 지금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므로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 자리에 나오신 귀한 주님의 자녀들인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가? 지금까지 여러분의 신앙의 그 모든 여정 가운데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 나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나에게 필요하시는 그 하나님, 그 분을 가장 사랑해야 하는 그 순간이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요약
은혜의 자리로 나오게 하심에 감사하며 연약한 피조물이자 죄인 된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심에 감사와 영광 돌리며,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극히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우리의 삶을 올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용납하기보다는 힘으로 억누르려는 우리가 매 순간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순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삶의 자리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갈 때에 성령 충만을 허락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덕을 세우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함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를 지켜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는 믿음 보고를 올려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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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기도회(주후 10월 8일)-부흥토요비전새벽예배
제목: “7,000 기도용사의 지팡이‘
말씀: 출애굽기 17:8-16
대표기도: 홍진기 부목사님(목양9팀, 영상사역담당)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제자반, 사역훈련생
말씀읽기: 김미경 자매(청년N국), 김준영 형제(대학4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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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7:8-16,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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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0 기도용사의 지팡이‘
-영광스런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심에 찬양한다. 찬양하자!!!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자. 여러분 오늘부터 이제 한국교회 진짜 부흥이 보이고 각 교회마다 다시 부흥이 왔을 때, 그때 온다는 것을 확인이 될 때까지 토비새는 앞으로 부흥 헌신 토비새가 될 것이다. 부흥, 헌신 토비새가 되어야 한다. 진짜 은혜는 헌신할 때 받는 것이다. 오늘 보니까 자매들만 나오셨는데 남자 분들 정신 차리자. 오늘 이 시간이 저는 ‘한국교회 9.26 섬김의 날’ 귀한 시간들을 보내고 또 강단 기도를 하고 제가 다 느낀 것, 제 마음에 받은 은혜 중에 하나가 우리 온 성도님들과 함께 정말 주님을 죽기까지 피 흘리기까지, 끝까지 승리하게 해달라고 했다. 정말 은혜는 헌신할 때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 가족이라고 했는데 영 가족, 가족이라는 말은 언제 어느 때, 끝까지 일하는 사람을 가족이라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우리가 끝까지 죽을때까지 죽기까지 피 흘리기까지 전력투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1970년대 후반, 80년도에 세워져 가지고 그때에 한국교회 앞에 수요일마다 옥 목사님이 ‘Great awake’, ‘전 세계 대각성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셨다. 그리고 그 대각 성 이후에 사랑의교회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각 성 전도 집회’를 시작했다. 그것이 전도 집회와 새 생명 축제와 많은 한국교회의 이런 일 년 동안 제대로 준비하고 이렇게 부활을 품은 생명, 대 각성을 통해 추수하자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대각 성 전도 집회’가 시작되었다.
 
오늘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또 주일마다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아니 회복도 쉽지 않은데, 무슨 부흥이냐고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흥, 헌신, 토비새를 통하여 앞으로 가을 사역과 주일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부흥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부흥에 대한 기도와 말씀과 능력을 우리의 삶으로 그대로 체화화 함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사실은 우리가 코로나의 지난한 어려움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우리가 마음속에 다시 한 번 각오하고 깨닫고 은혜 받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진짜 기도를 함께 모여서 하는 것이 소중하구나!, 자유롭게 예배드리는 것이 소중하구나!, 마음껏 성도들이 모여가지고 영적 교제하는 것이 소중하구나!, 우리가 함께 모여 말씀으로 훈련 받는 것이 너무나 귀하구나! 사역의 본질과 핵심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정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교회가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정말 집중해서 우선순위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그 부흥의 현장에 저와 여러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특새 하면서 한 번씩 이야기하지만은 여러분과 제가 없을 때 부흥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부흥에 대해서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고, 주님 앞에 부흥의 불쏘시개가 될 때에 하나님은 일하실 것이다. 그럼 부흥의 역사의 키가 무엇인가? 우리가 평양 장대현 교회가 부흥할 때에 이 부흥의 그 장대현(장대재교회) 교회의 그 천정이 구리로 되어 있는데 구리가 울릴 정도로, 교회에서 박명수 교수님 말씀에 천정이 무너질 정도로 그렇게 처음에는 맹숭맹숭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길선주 목사님이 그분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서 애통하고 회개하고 각성하고 그럴 때, 그냥 한국식 스타일로 기도를 하는데 천정이 뚫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토비새 할 때마다 우리가 3천의 기도를 할 것이다. 3천의 기도가 무엇인가? 쓰리 싸우전드가 아니고
 
첫 번째, 삼천의 기도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기도할 것이다.
세 번째는 천국의 물소리처럼 기도할 것이다.
-그래서 부흥의 역사를 보면 미국 같은 경우를 보면 소위 건초더미라고 운동이라고 해서 사무엘윌즈와 이런 사람들이 20세기 초반에 같이 우리 건초더미에서 6명 정도로 모여가지고 하나님 나라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그 젊은이들이 순수하게 기도했을 때, ‘Haystak Movement’ 라고 건초더미라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거기에 이만 여명의 전 세계 선교사들을 파송할 수 있는 ‘Student volunteer movement’ 라고 자원하는 선교이다. 그 다음에 ‘제레미아 레피어’ 라고 뉴욕에서 또 보스톤에서 정오 될 때마다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제레미아 레피어’ 라고 있는데 남들이 모여가지고 그 정오기도회가 나중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그 은혜를 가지고 대각성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 이 토비새에 정말 하나님께서 많은 분들을 보내주신 것으로 확신한다. 감사드리고,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아니다. 오늘 들어오면서 깜짝 놀랐다. 미어터져야 하는데 아직이다. 지금부터 미어터지고 있다. 아직까지는 아니다. 여러분들, 새벽 토요일 5시부터 자리가 없어서 난리가 이 자리가 난리가 나야 한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줄로 믿는다. 그래서 오늘 그런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가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재사회 부흥이 일어나는 부흥의 르네상스가 되기를 소원한다. 서로 부흥의 불씨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3천의기도, 청정이 울리는 기도, 천둥의 물소리 같은 기도, 천국의 물소리 같은 기도가 있게 되길 기도한다. 80년 초반에 대각성 전도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한국교회 수많은 분들이 부흥으로 주님 앞에 돌아온 것처럼 돌아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부흥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이 자리부터 시작하여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올려드리겠다. 합심해서 일어나서 3천의 기도를 할 터이다. 하나님 아버지, 이 자리가 부흥과 헌신의 역사가 일어나는 자리가 되어 주시옵소서. 토비새에 나오는 분들이 이 자리가 기준이 되고 집안이 화평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내 기도의 제목이 새로워지고 그리고 진짜 은혜는 헌신할 때이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끝까지 우리의 사역과 우리의 신앙이 변심이 없이 한결 같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나라를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귀를 향한 선제공격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다 함께 주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오늘 기도하는 이 시간, 이 찬송이 우리 강단의 주제가 였다.
 
강단 기도의 주제가이기 때문에 이 찬송을 하자.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무릎 꿇고
우리 구세주 앞에 다 나아가네.
믿음으로 나가면 주가 보살피사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2. 기도하는 이 시간 주가 곁에 오사
인자하신 얼굴로 귀 기울이네.
우리 마음 비우고 주를 의지하면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3. 기도하는 이 시간 주께 엎디어서
은밀하게 구할 때 곧 응답받네.
잘못 된 것 아뢰면 측은히 여기사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4. 기도하는 이 시간 주를 의지하고
크신 은혜 구하면 꼭 받으리라
의지하는 마음에 근심 사라지고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 있네.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속에 기쁨 충만하네.
 
 
-삼천의 기도를 할 것이다.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기도할 것이다.
천국의 물소리 같은 기도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부흥, 헌신 토비새를 통하여 한국교회 코로나 이후에 다시 한 번 부흥의 현장을 주실 줄로 믿는다. 오늘 이 말씀으로 기도의 지팡이를 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지팡이를 들게 하여 주시고, 이 시간 뱀 꼬리를 잡게 하여 주시고, 계란으로 바위를 치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주님 앞에 백지 수표에 사인을 하게 하시며, 우리 생애 부흥을 체험하고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며, 우리 자녀들도 부흥을 체험하며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고, 주여 부흥의 은혜를 주시옵소서!!~~우리 가정도 결정적인 순간에 와 있사오니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시지 않으면 살 수가 없사오니 우리 교회와 우리 가족을 부흥하고 헌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천의 기도를 통하여 큰 은혜 받기를 바란다. 저희가 9.26 한국교회를 하면서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인 줄 알았고, 그것이 바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엄청 주셨고 너무 큰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주신 줄로 믿는다. 바위를 깨뜨리지 못하면 스크래치라도 내겠다고 목회자님들이 그러하셨다. 막힌 곳이 뜷렸다. 멈춰버린 심장이 다시 뛴다. 그리고 아픈 분들도 몸도 회복되었고 사기충천한 주님의 은혜로 축복한다. 새벽기도가 선제 공경이 되고 이제 부흥, 헌신, 토비새가 선제공격이 될 것이다. 선제공격으로 모세가 이런 뱀 꼬리 잡고 죽을 각오로 잡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지팡이로 만들어 주셨다. 사명의 지팡이로 만들어 주셨다. 은혜를 주신 것이다. 지팡이를 잡았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다. 바로 왕과 대결을 해야 하고 홍해도 갈라야 하고 오늘 읽은 이 전투, 아말렉과의 전투, 아말렉 족속의 공격도 받아야 되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산이 되어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홀은 모세의 손을 바쳐 들고 있다. 오늘 이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의 들고 받혀주지 않고 모세의 지팡이에다 돌을 얹어가지고 있다.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우리는 산에 올라가서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들기를 바란다. 모세처럼, 동시에 모세와 함께 우리가 서로 손을 아론과 홀처럼 기도의 지팡이를 받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두 가지가 겸직해야 한다. 지팡이도 들기도 하고 옆에서 받혀주기도 해야 한다. 오늘 8절에 보면,
 
*출애굽기 17:8,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들어와 가지고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를 주시고 마실 것이 없을 때, 목마를 때, 생수를 주시고 만나와 생수의 축복이 있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는, 하나님의 기적이 있는, 그런 시간에 그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운다. 아말렉이란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을 침략하는 것이다. 이 아말렉은 무언가? 아말렉은 좀 야비한 족속이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한 신명기 25:17-18절까지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신명기 25:17-18,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늘 이 본문을 해석한 것이다. 아말렉이 너에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얼마나 야비한 일이냐면 피곤한데, 뒤로 가서 약한 자들을 쳤다. 못된 하이에나가 물어뜯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25장 19절에 보면,
 
*신명기 25:19,
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아말렉을 지상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도말시키기로, 멸절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은 토벌, 멸절하시려고 작정을 하신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아말렉은 무엇인가? 아말렉은 교회가 싸워야 할 영적대적을 통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제일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오는 마귀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영적 대적을 통칭하는 것이고, 우리 연약한 부분을 고통을 주고, 연약한 부분을 치는 아주 야비한 것이다.
 
오스 기니스 박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 가지 물결이 있다. 라고 하셨다. 조심해야할 첫 번째는 레드, 붉은 물결이 있다. 겉으로 붉다는 것은 네오 막스, 해서 그 여기에 모든 정치적인 올바름을 가지고 온갖 뚤레랑스를 갖고, 온갖 다원주의를 가지고, 온갖 차별금지법, 이런 동성애, 이런 것 등, 그걸 하는 사상적 토대이다. 네오 막시즘(marxism)이다. 두 번째는 레인보우, 무지개, 이것은 성 평등이라는 미명하에 창조의 질서를 다 무너뜨리고 가정을 파괴하고 엉망진창을 만들어가지고 애들이 마약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만든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아이들을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게 하고, 성경을 듣게 하고, 성경을 묵상하게 하고, 성경을 암송하게 만들어야 한다. 성경만 제대로 알면 성경의 토대가 세워지면, 어떤 붉은 물결, 무지개 물결이 와도 이겨내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검은 물결이다. 극단적인 사람, 우리는 우리 앞에 수많은 아말렉들이 있다. 이 아말렉을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들고 이겨내야 한다. -오스 기니스 박사-
 
-이 자리가 여호와의 산의 지팡이를 들고 이겨내야 한다. 홍해 앞에 있는 지팡이를 들고 이겨내야 한다. 오늘 여러분들 들어올 때, 늦게 온 분들은 못 보았을 것이다. 보여드리자면, 홍해를 가르는 모세가 손을 든 장면이다. 지난 번 몇 십 년 가지고 있었던 그림을 미국에서 갖고 온 것이다. 제가 설교하러 들어올 때, 길목에다 걸어놓았다. 지하 4층에 있다. 강사 실에서 나오면 있다. 얼마나 멋있는가? 불을 끄면 더 멋지다. 불을 다 끄고 보자. 더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더 확연해 보인다. 파도가 치는 홍해, 저 내리칠 것 같은 홍해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있다.
 
여러분, 이런 것 보면 기백이 생겨야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제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웠으니 뭔가 이렇게 저 지팡이를 들고 사명을 감당할 그런 기백이 있어야 그게 살아가는 의미이지, 정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빨리 주님을 만나는 것이 낫다. 사명 없이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러니까 저 홍해를 보라, 모세가 손에 지팡이를 들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파도가 갈라지는 것이다. “마른 땅 같이 건너리라.” 하셨다. 두 가지이다.
 
주여 이 사랑의교회 토비새의 부흥, 헌신 토비새가, 이 자리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던 하나님 여호와 산이 되게 하여 주시고, 아론과 홀처럼,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본문에 보면 모세가 손을 들면, 백성 가운데 전쟁을 할 용사를 뽑아서 적군들과 싸우라고 하신다.
 
*출애굽기 17:9,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 먼저 적군들과 싸우라, 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을 응원하마, 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산 위에서 기도해주는 모세가 있고, 모세의 기도를 도와주는 아론과 홀이 있고, 평지에는 직접을 전쟁을 수행하는 여호수아 백성들이 서 있다. 아마 이 세 가지가 서로 반복이 될 것이다. 어떨 때는 모세의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오르는 역할도 있고, 어떨 때는 아론과 홀의 역할을 해야 되고, 어떨 때는 직접 싸우는 역할을 해야 된다. 이 세 가지가 이제는 다 기도와 거룩한 선순환이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 토요일마다 이 자리는 은혜의 성산이 되고, 마귀의 공격은 선제공격의 역사가 되게 하시고, 아론과 홀과 모세처럼 팀웍을 가지고 시대를 승리하는 한 마음이 될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다 승리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한국교회 제 1의 부흥은 1907년도의 평양 부흥회였다. 제2의 부흥은 한국교회가 건국할 때,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세워진 나라인줄로 믿는다. 우리나라 헌법은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헌법이었다. 그걸 고치려고 난리히다. 수많은 모략과 주민자치위원이라고 있다. 그 주민자치위원회가 법을 갖다가 어렵게 하고 무효와 시키고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예수 믿는 사람을 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가려고 했던 그것이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운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속에 갖는 간절한 것은 우리 민족이 기독교적 가치관과 헌법위에 세워진 줄로 믿는다. 제3의 부흥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73-80년대 대부흥이 일어났다. 우리가 계속 기도해 왔던 것처럼, 제4의 부흥이 코로나 이후에 일어나게 하십시오!! 그리고 코로나 진원지 중에 하나가 이 토요부흥의 토비새가 되어야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해 교회뿐만이 아니라, 개인도 동일한 은혜를 주시길 원한다. 한 번뿐인 인생, 적당히 살지 말고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부흥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 토요부흥, 헌신, 토비새가 하나님께 영광되기를 소원한다. 자 이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찬양하자.
 
♬자 이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찬양합시다. 오늘 이 자리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기도의 성산이 되어야 한다. 아론과 홀이 함께 기도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조심하여 옆 사람의 손을 들고 기도하면 좋겠지만 마음으로만 세워주기를 기도하자.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날 주소서
오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
 
 
그러면, 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역사의식으로 일어나는가? 부흥은 내 생각이나, 나의 간절함으로 일어나는가? 그것은 아니다. 부흥은 반드시 말씀의 반석위에 세워져야 한다. 말씀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래서 토요일에 암송도 하고 그런 것이다. 시편 107편 20절에 보면,
*시편 107:20,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
- 여러분들 고침 받고 위험한 지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삼천의 기도를 통하여 죽을 똥 살똘 전력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말씀의 게시를 주신다. 위에서부터 말씀을 부어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뭐라고 말씀하는가? “네 사역에 너무 중요한데, 끝까지 이것을 지켜라. 내가 너에게 부탁한다.”라고 했다.
 
*디모데전서 4:13,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우리가 이런 전력기도를 하나님께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게시의 말씀을 주신다. 물론 출애굽기 17장을 가지고 그 때에 그다음에 모세, 여호수아, 아론과 훌, 다 말씀을 했듯이 여러분들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듣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읽는 것과 구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말씀에 관한 것인데, 읽는 것은
 
읽는 것-(public reading of scripture=PRS).=공동체 성경읽기이다.
-당시에는 이렇게 케논, 성경 66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당시는 주로 회람 형식으로 에베소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서, 고린도전서, 등은 서신서가 이렇게 보내졌을 때, 그 교회의 지도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지금처럼 같이 읽는 것이다. 공동체가 모여서 지도자가 읽으면 듣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었다. 매일 마다 오늘마다 속한 잠언을 한 장씩 읽고, 매일 오늘날짜에 속한 시편을 읽고, 하루에 5편씩 읽으면 된다. 우리가 일 년에 성경을 두 번 읽으면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살 길을 열어주신다. 온 회중이 오늘과 같이 모두 열 명 이십 명 주님 앞에 들을 때, 우리가 삼천의 기도처럼, 우리에게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이 있을 것이기에 수많은 성도들이, 만 여명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에 거룩한 전율이 일어날 것이다. 사랑의 교회 거룩한 공동체 성경읽기를 감당하게 되면 전율과 오싹함을 느끼게 될 정도로 말씀이 있어야 한다. 오늘 8이이다. 시편 8편과 잠언 8장을 읽고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모두가 들어야 된다. 영상을 보자. 다윗의 시, !~~~◆공동체 성경 읽기.
 
♣요약
우리가 모세의 지팡이를 들고 시대 앞에 서게 되어야 한다. 모두가 다 토비새에 7,000기도용사가 되어서 임명하오니 오늘 하나님이 임명하는 것이니 토요일 새벽 기도하는 자 되어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고 매주 선제공격을 하고 하나님 나라의 헌신하고, 부흥을 온전히 체험하는 자로 헌신하여야 한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을 인솔하였고,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모세가 손을 올리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패했다. 그러다가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자 아론과 훌이 양쪽 손을 받쳐 주어 그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의뢰할 때 그 크신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이다.
















★토비새에 나오면 좋은점들 -다윗 중등부(천예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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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0월 5일)
제목: "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선 사람들"
말씀: 신명기 34:1-12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윤현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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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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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약속의 땅의 경계에 선 사람들(윤현수 부목사님)

-작년 여름 저희 교규의 한 성도님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성도님 본인의 동의를 받고 그 문자 메시지의 일부를 읽어드리겠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기도 부탁드립니다. 지난 주 어떤 성도님의 간증을 듣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부모님의 보호에 평안히 자라 신앙 좋은 남편과 시어머니 인도로 교회에 오자마자 모든 게 믿어지고 모든 게 하나님 덕분이라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저의 상황은 몇 달 채 몸은 아프고, 직원은 그만둔다고 하고, 회사 대표님과의 대화 부족으로 일은 힘들고, 아이들을 제대로 못 챙기니 소소한 어려운 일들이 지속되고 물질적인 부분은 해결의 길이 안 보이는데, 제 지금 상황과 그 성도님은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예배 또한 아픈 몸을 이끌고 간신히 가고 있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저리 쉬이 주시기만 하시는데, 나는 왜 이리 곤고하고 힘들게 주시려고 하지 않으시는 건지, 사람에게 치이고, 경제 상황에 치이고, 건강마저 저를 치는 이 상황이 하나님이 ‘벌주심’이 아님은 무얼까? 자꾸 이런 생각이 지칩니다. 하나님 은혜를 잊은 백성이라 하실 수도 있지만, 참 마음이 외롭고 힘들고, 이럴 거면 ‘내가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인데 날 좀 빨리 데려가 주시지 않는구나!’, 싶음 마음이 이후 내내 떠나지 않습니다.
 
이 문자를 받고 마음이 참으로 먹먹했다. 성도님의 어려운 상황에 안타까움도 문제였지만 그에 더하여 진실로 제 자신에게도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도님의 문자는 우리가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우리 대부분이 마음 속 깊숙이 가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분명한 문제 상황은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있어서 성경에 약속된 축복이 아직 온전히 경험되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겨왔는데도 질병, 사업의 파산, 인간관계의 갈등, 가정의 깨어짐, 갑작스런 사고와 같은 재난을 경험할 때가 많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이 차별적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병 고침과 기도 응답, 그리고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사람 못지않게 신실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데도 그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하늘의 복이 어떤 점에 있어서는 매우 확실하고 공통적이지만, 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불확실하고 애매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다. 이 상황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보기에 차별적으로 주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풍만하게 경험되지 않는 우리의 이 현재 상황에 대한 답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성경을 읽어나가던 중에 오늘 읽은 신명기 34장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때로는 확실한 것 같으나 때로는 애매해 보이는 우리 신앙의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성경의 권면을 굳게 붙드는 시간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은 매우 특별하다. 왜 특별할까? 모세 5경의 맨 마지막 장면이기 때문이다. 성경책 맨 앞에 다섯 권의 책,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 5경, 또는 5경이라고 한다. 유대인 이 다섯 권의 책을 ‘토라’라고 하여 그들의 기본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보통 이 5경과 같은 긴 분량의 이야기는 결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5경의 결말이 조금 이상하다. 5경의 시작부분은 천지창조라고 하는 거대한 사건으로 5경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5경의 마지막 장면은 사실상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5경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모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허망하게 들어가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장면으로 5경이 끝난다. 그리고 5경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 주셨던 땅의 약속이라고 하는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출애굽기에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민족의 그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이 가나안 땅 목전에 와서 신명기 마지막 장면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5경이 끝나버리고 만다. 매우 허망하고 마치 미완성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겠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한 글자도 의미 없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미완성인 것 같고 허망하게 끝나는 이야기 상황 자체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이 있다고 분명히 믿는다. 그렇다면 오늘 신명기 34장에서 그 약속의 땅, 경계 앞까지 왔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모세와 들어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시는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도록 하겠다.
 
본문 7절에 보면 모세가 죽는다. 죽는데 모세가 죽을 때. 그 나이가 120세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34:7,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모세가 죽었던 이 나이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창세기 6:3,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5경에 맨 앞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6장에서 아담이후에 계속되는 인류의 범죄의 결과 하나님께서 인간의 수명을 백이십 년으로 단축시키는 저주를 내리셨는데, 모세 5경에서 모세를 빼고 그 누구도 백이십 세에 죽지를 않는다. 모세 5경의 맨 앞부분에서 인간에게 내린 백이십 세의 달수의 연한을 설정한 그 저주가 모세 5경 맨 마지막 장면에서 모세가 백이십 살에 죽는 것으로 성취되는 것은 모세가 바로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와 같은 역할로 신명기 34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온 인류의 백이십년의 연한으로 설정된 그 저주로 이 모세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날 수가 백이십년으로 한정된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여정을 나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지금 그 모세가 어디에 서 있는지 오늘 34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에 서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백이십 세의 저주 가운데 그저 허무하게 죽는 인생으로 끝이 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그러한 범죄로 인한 저주를 그 굴레 안에 있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로 모세 5경은 그리고 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과 거룩이 충만한 에덴동산과 같은, 성소와 같은 땅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바로 이러한 땅을 선물로 받은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데 여러분,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이다. 경계는 어떤 장소인가? 혹시 경계에 살아보았는가? 제 고향은 광양시 진월리 라고 하는 곳이다. 제가 태어나서 살았던 고향 동네가 경계였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는 강가에 살았다. 섬진강은 우리 한강보다도 그 폭이 좁았기 때문에 제 고향은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남도에 속해 있었지만 경상남도와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제 고향은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서로 섞이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저는 어릴 적부터 광주 사투리와 부산 사투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두 개가 섞인 동네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 소풍도 저는 전라남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남도에 있는 지역들에 주로 소풍을 가곤했다. 이처럼 경계라고 하는 지역은 그 경계를 사이에 둔 양쪽 지점이 서로 섞이고 교차하고 융합되기 쉬운 장소이다. 그래서 사실 애매한 장소이다. 제가 행정구역상으로 분명히 전라남도 주민인데, 우리 동네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보았을 때는 우리가 전라도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경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한쪽 지역의 영향력에 강력해지면 비록 반대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향을 받기가 쉽다. 그렇기 때문에 경계는 사실 굉장히 위기의 장소이다.
 
예를 들자면, 군사분계선 그 지역에 분명히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우리 남한 군인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그 지역은 우리 남한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은 언지든지 북한의 진입이 가장 먼저 이루어질 수 있는 위기의 장소이다. 바로 이점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이 맞닿아 있는 지점, 그 경계에 오늘 신명기 34장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 있다고 하는 점은 지금 하나님이 백성이 서 있는 그 장소가 굉장한 위기의 장소라고 하는 곳이다. 거기서는 광야의 양항을 받을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의 생명과 임재와 복이 충만한 약속의 땅에 영향도 받을 수 있는 두 땅의 힘이 교차하고, 융합되는 그래서 때로는 광야의 시험 앞에서 넘어질 수도 있는 위기의 장소에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 있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아는 물이 없다. 식량이 없다. 물이 없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양식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광야에 있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지 않으시면 생존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는 불 뱀의 유혹이 있고 아말렉과 같은 대적들이 도전이 있다. 거짓 선지자, 발람과 같은 거짓 선지자의 유혹도 있는 장소이다. 바로 오늘 요단 강가에 서 있는 그 약속의 땅과 광야의 경계선에서 서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한 부정과 유혹과 시험에 그 혼돈으로 가득 찬 끝자락에 서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경계는 그 광야를 뒤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앞쪽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생명과 하나님의 복과 임재가 충만한 약속의 땅이 앞에 놓여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장소는 비록 광야에 발을 딛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생명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성소와 같은 그 땅에 아름다운 향기를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경계라고 하는 곳이다. 백이십년 한정된 날수의 저주의 굴레를 가지고 광야의 모래 바람과 때론 저 요단강 건너에서 불어오는 약속의 땅, 저 아름다운 향기가 뒤섞여 있는 경계선은 위기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위기의 장소, 시험의 장소는 희망의 장소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경계선에 모세와 이스라엘만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 분이 더 계신다. 바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과 모세와 함께 그 경계선에 와 계신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 그 경계선에 있는 모세를 느보 산으로 불러올리신다. 그리고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그 땅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다. 신명기 34정에 1-4장까지를 제가 한 번 더 읽어 보여드리겠다.
 
*신명기 34:1-12,
1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2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우리 성도님들은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저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시면서 도대체 왜 보여주시는가? 그리고 왜 출애굽기부터 모세를 부르셨다고 하나님께서는 그 광야에서 그렇게 고생시켜놓고 왜 보여만 주시고 너는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선언을 하시는가? 우리 하나님은 너무 얄밉고 잔인하신 분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다. 그러나 땅을 보여주시는 의미는 땅을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마지막 소원성취도 아니다.
 
구약성경이 기록될 시절, 고대 근동의 법과 관습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으로 신약학자 다우드는 스터디스 인 비브리컬 로우(Sthuddy's in Biblical Row) 라고 하는 책에서 로마법과 또 성경시대의 법에서 토지소유권이 이전되는 방식에 관하여 연구를 하였다. 그것은 땅을 넘겨주는 양도인이 그 땅을 받는 양수인에게 그 땅을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그 땅을 보여주면 그 땅을 보여줄 때 소유권이 양수인에게 이전된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으로 한 번 비교를 해보자면 물론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여기 토지매매 계약을 했다. 양도인과 양수인이, 이 땅을 사고팔기로 계약을 한 후에 그 땅을 사는 사람에게 그 땅에 대한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주면 드디어 땅을 산 사람의 땅이 된다. 그러면 그 땅을 사람은 소유권 등기를 마치면 그 땅에 들어가지 않고, 살지 않더라도 자기 땅이 된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땅을 보여주시는 이 행위가 오늘날 등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리라.”라고 약속하신 다음에 오늘 그 아브라함의 후손인 모세, 이스라엘 대표자인 모세를 느보산에 올라오라고 하신 다음에 모세에게 그 땅을 보여주시는 것은 모세가 지금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고대 근동세계의 법률의 관습에 따를 때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그 땅의 소유권을 법적으로 받은 것이다.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무엇인가 바로 느낌이 올 것 같다. 하나님께서 땅을 먼저 주신다고 약속을 먼저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땅을 바라보게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땅을 바라볼 때, 그 땅을 법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은 너무나 신약 적이다.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구원과 영생 천국을 약속하셨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영생 천국으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 예수님의 생애와, 성령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루어 가시는 모든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성도들에게는 그것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성령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꿈과 영생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고 바라보는 순간 구원과 천국이 우리의 것으로 확정되는 것이다.
 
바로 기독교 구원의 이 메커니즘, 이순서가 모세가 땅 보는 이 장면의 메키니즘과 너무 유사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인 모세가 보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보았다는 의미가 되겠다. 모세와 하나님의 백성은 그 땅을 보지만 애굽인들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였던 그 이방인들, 그 대적들은 그 땅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선물하시는 그 땅을 하나님이 보여주셔서 그 땅을 보여주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보여주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그 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땅은 우리 인간이 노력하여 보려고 해도 볼 수 있는 떵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34장 1-4절까지 모세가 보았던 그 모든 지리적인 영역을 다 조사해서 보면 느보산에서 물리적인 우리 육신의 눈,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셔야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다. 바로 신약시대에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님의 역사와 우리 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이 이룩하셨던 그 구원의 역사를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자들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를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기 생명을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예배하시고 기도하러 나오셨을 텐에 바로 우리 성도님들께서 붙들고 계시고 보고 계시는 우리 예수님의 그 구원의 사역은 우리가 보고 싶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오늘도 감사와 기쁨으로 예배하고 기도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그런데 또한 그 땅을 보는 사람과 그 땅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의미와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그 애굽에서 국고 성을 지었다. 국고성은 거대한 애굽의 건축물로써 국고성의 용도가 무엇인지 역사학자들이 관찰해 보았더니 애굽의 조세 행정과 군사 행정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국고 성이다. 한마디로 세상 제국의 영광과 세상 나라의 통치를 위하여 그것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왜 거기서 그것을 만들었는가? 애굽이 유월절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애굽의 모든 첫 째 난 남자아이들이 다 죽음으로써 애굽의 심판이 내려졌다는 것은 그 애굽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곳이고 장차 망할 도성이라는 곳에도 불구하고 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실 약속의 땅, 젖고 꿀이 흐르는 땅, 생명의 땅이 있다는 것을 애굽 인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의 땅 애굽에서 평생 자기들은 살아가기 위한 처소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애굽에 머물러서 국고 성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광야에 나왔어도 그 광야에서 고정적 그 건축물을 건축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땅, 약속의 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고정식 건축물을 지을 그러한 목적도, 목표도 그러한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르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오늘 드디어 그 땅을 모세에게 그 땅에 경계선 앞에서 보여주시고 소유권을 이전해 주시고, “모세야, 네가 비록 들어가지는 못할지라도 네가 그 땅을 소유했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신다.
 
과연 이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 의미는 마지막에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그 땅을 바라보았고 소유했던 모세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세 가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첫 번째로 모세는 자신이 무덤 묻힐 땅 한 평 갖지 않았다.
-신명기 34장 6절에 보면,
*신명기 34:6,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었는데 모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기록이 성경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무덤이 거기에 가서 사람들이 숭배할까봐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체를 하나님께서 감추었다.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 구태여 모세만 이렇게 어디 묻혔는지 알 수 없다. 라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은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모세가 묻힌 땅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만약 광야에 행정기관이 지적부나 등기부를 만든다고 했을 때, 모세가 소유한 땅은 한 평도 없다는 뜻이 된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의 시신이 묻힐 땅 한 평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다. 모세는 땅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말은 모세는 광야에 조금도 집착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겠다.
 
왜? 모세가 광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모세가 약속의 땅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광야의 부정함과 광야의 혼돈을 영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정한 날수가 있어서,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이 광야를 지나가고, 우리가 장차가 거할 도성은 하나님 품안이라는 것을 모세는 알았기 때문에 광야에 땅을 소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 사실 약속의 땅과 광야의 경계에 선, 두 땅이 교차하는 장소요, 두 땅의 힘이 맞닿아서 성도를 시험하는 그 위기의 장소에서는 사실 고난과 환난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난과 환난 때문에 사람들이 실족하지는 않는다. 바로 그 약속의 땅이 눈앞에 보이는 자들은 실족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왜 실족하는가? 자기 눈앞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 천국을 이미 믿음으로 소유하신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에서는 이 땅에서 결핍과 양식 없음과 유혹과 고난 앞에 좌절하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지금 우리는 매우 열악하고 빗물이 새고 저녁이 되면 모기와 해충들이 들어오는 그러한 열악한 집에서 전세 월세로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지금 현실은 너무너무 좋은 집에 임대차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전세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하여 그날 입주 일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잠시 비가 새고 해충이 들어오는 월세 집에 좀 좋지 않는 곳에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입주 일을 기다리는 즐거움 때문에 여러 어려움과 힘듦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모세는 죽을 때까지 눈이 흐리지 아니하었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신명기 34:7,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다라고 한다. 왜 흐리지 아니한가? 오늘 34장에서 모세의 눈이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가? 모세의 눈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약속의 땅을 보는 데에 사용된 신체기관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죽을 때까지 그 시력이 흐려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 약속의 땅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때, 그 땅을 바라보는 그 시야가 죽을 때까지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시력이 좋으면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할 것이다. 광야의 흙먼지와 광야에 돌아다니는 불 뱀과 광야의 모든 시험의 요소들을 우리가 시력이 좋은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멀리 약속의 땅에 우리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축복과 영광과 즐거움과 생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시력이 좋으면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의 땅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보면 그 땅에 들어가고 싶은 소망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하야 준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력이 흐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광야의 시험, 광야의 위험한 함정들, 광야의 그 흙먼지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진다. 그래서 내가 지금 광야에 있는지, 아름다운 땅에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약속의 땅을 볼 수 있는 시야가 흐려지면 이제 드디어 그 땅에 대한 소망도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유지하는 일에 먼전을 기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우리가 시야가 뚜렷해질 때, 우리 예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구원의 역사, 현재 나와 함께 하시는 구원의 역사, 장차 미래에 백성들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우리는 항상 뚜렷하게 바라보고 주님 앞에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주님께서 이룩하실 그 구원을 항상 소망하며 기대하게 될 것인데 우리가 그 영적인 시야가 흐려지면, 우리는 세상의 죄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하늘의 영광도 분간하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 상태가 되어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의 깨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로서의 삶과 소명을 우리는 점차 잃어갈 위험에 빠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적 시야를 유지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기를 부탁드린다. 이 시력은 본문에 따르면, 죽을 때까지 유지를 해야 한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그 시야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24절에서 사도바울이 말씀하기를


세 번째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갔다.
*에베소서 6:24,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만남이 주로 이루어졌던 장소가 있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는 시내 산이었고, 오늘 마지막 모세 5경에서는 느보 산이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산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자주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이 반포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올라가면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오늘 우리에게 느보 산이 어디인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그리고 그 느보 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보며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성된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보지 못하는 눈을 열어서 영생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장소이며,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날마다 매주 선포되는 장소이며, 교회는 구원 받은 백성이 우리 주님과 뜨거운 연합의 교제를 이루는 장소가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 나아옴으로써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 교회에 힘써 오르고 오름으로써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있다. 느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약속의 땅을 볼 수가 없다.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역사의 필수적은 기관이요, 나의 구원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기관이다. 위기의 장소요, 시험의 장소인 경계선에서 안전한 장소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요, 천국을 보여주시는 장소는 바로 교회이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우리의 삶을 시시각각으로 유혹해 오고 광야의 그 무서운 폭풍이 휘몰아치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피난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 날마다 힘써 오르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하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들어가지 못했는가? 좀 넣어주시면 안 되었는가? 모세 5경이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언약을 성취시키시는 장면으로 모세 5경을 종결시키면 안 되시는 것인가? 출애굽기에서 부르심을 받아 무려 4권에 걸쳐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그 모세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처럼 죽게 하시면 안 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모세 5경을 이렇게 미완성으로 마무리 지으신 데는 또한 깊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바로 신약시대의 바로 우리가 모세가 서 있는 이 경계선과 같은 곳에 서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느보 산에 올라가 약속의 땅을 바라본다. 우리 성도님들도 바라본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라고 표현하고 이사야서와 베드로후서와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 이라고 표현을 한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그 시점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예수님과 함께 하고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와 계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셔서 예수님의 인성은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이 땅을 와 계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의 신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만 사실 예수님께서 떠나셔서 재림의 날까지 우리 성도가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만큼 축소된 상태라고 볼 수가 있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장차 온전한 하나님의 임재와 교회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그 약속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약 성도들도 오늘 신명기 34장과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처럼 하나님의 그 약속의 땅을 기다리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모세가 죽는다. 신약의 사도들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다 죽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그날까지 죽음에 관문을 통과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장차 재림하실 그날에 상한 권세를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모세처럼 죽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광야와 약속의 땅 경계에서 있었는데, 바로 신약시대의 성도들 역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 그 경계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 5경의 마지막 장면은 교회를 위하여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마지막 장면이 디자인되었음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겠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약속의 땅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기다리고 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법적으로 소유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느보 산에 올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광스런 땅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신약 시대의 느보 산은 교회이다. 광야와 세상에서 발생하는 고난과 시험 앞에 상처입고 때로는 피투성이가 되는 우리의 마음과 몸을 이끄시고 여러 기도제목을 품고 느보 산인 교회에 올라가 하나님의 손에 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기도로써 다 올려드리기를 부탁을 드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을 다하여 듣고 그 말씀을 생명처럼 붙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부탁드린다. 이를 통해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이 경계선에서 그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그 시력을 온전히 유지하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요약
신명기의 마지막 장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깨우쳐서 우리의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 모세와 같이 이 땅에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영적인 시력이 흐려지지 말고 끝까지 주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힘써 느보 산에 올라가서 약속의 땅을 모세가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힘써 교회에 나아와 예비하신 구원의 완성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땅을 소유하는 은혜를 받아 세상 유혹을 물리치며 이 땅의 생명을 다할 때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대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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