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9월 10일)
제목: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 마태복음 14:16~21
대표기도: 장광천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말씀읽기: 이강휘어린이(초등부), 최온유어린이(유년부)
찬양인도: 창목회(부목사님들),토요명절음악회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
---------------------------

*마태복음 14:16~21,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


▶조성환 부목사님-"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우리 옆 사람에게 ‘복된 한가위 되십시오.’ 인사하기를 바란다. 얼마 전 담임 목사님께서 미국에서 일어났던 사일런스 부흥(Sillence revival-조용한 부흥)이라는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던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이민교회 부흥이 미국에서 일어났던 시기에 저는 남가주 사랑의 교회의 지휘자로 섬기게 되었다. 제가 교회에 조인한 시기에 이미 교회에 조용한 부흥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사도행전 2장 47절의 말씀처럼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하는 말씀으로 매주 엄청난 그런 새 성도들이 주일 예배에 오셨다. 결국 한 번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를 두 번으로 나누어 드리는 것으로 결정이 되어서 저희가 한 번 드리는 그 송구영신 예배를 그 해부터 두 번씩 드리기로 결정이 되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제가 대학교 음악교수로 풀타임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처음에 찬양대 지휘자 풀타임으로 사역을 조인했었다. 제가 전도사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선임 전도사라고 부르고 있었다. 스스로, 그 당시 담임 목사님을 섬기는 분은 성함으로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오 O O 목사님이셨다. 그 때도 엄청난 믿음의 보고를 하셨다. 그분을 서울에서 최근에 2년 동안 뵙고 ‘믿음 보고’ 증상이 더욱 더 심화 되셨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그 당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때, 이미 음악 목사님이 계셨기 때문에 제가 맡은 일은 두 번의 송구영신 예배가 드려지는 동안 보조 의자를 놓는 시다 미션이었다. 그 당시 갑자기 두 번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린다는 선포로 인해서 교역자들이 생각하기를 과연 그 넓은 본당이 ‘두 번 다 꽉 찰까?’를 생각했었다. 1부 예배가 드려지는 오후 7시 전부터 이미 본당이 가득 찼다. 그래서 오 O O 목사님께서 특새처럼 청년들을 일어나라 하시고 강대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시다를 위시하는 다른 교역자들은 본당으로 오기 위해 보조의자를 열심히 놓았다. 로비뿐만 아니라 청동상이라고 있는 그 더 넓은 스페이스가 있었는데 거기에도 보조의자를 놓았는데 거기까지 가득 찼다.

 
그래서 첫 번 1부 예배를 그렇게 꽉 찬 상태로 드리고 이제 1부 예배가 끝난 다음에 두 번째 2부 예배를 준비하면서 ‘과연 2부 예배 때도 과연 찰까?’를 생각했다. 그런데 일찍부터 2부 예배에 오시는 성도들로 본당이 금방 차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두 번째 송구영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본당을 향해서 들어오는 그 발걸음이 얼마나 빨랐는지 지금도 기억이 선하다. 정말 2부 예배에 본당이 가득 찼고 다시 청년들을 강대상으로 다시 불러올리시고 그 다음에 시다와 그 무리들이 또 다시 그 보조 의자를 로비에 깔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로비에 보조를 의자를 깔다가 갑자기 제 마음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제 마음 속으로 ‘이것이 부흥이구나!!’를 그것을 정말 경험하면서 비록 시다였지만 의자를 놓으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번에도 서울에 와서 2년 밖에 안 되었는데 또 담임 목사님께서 더 강화 된 믿음 보고 증상으로 인해서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준비하게 되었고, 오늘 여러분이 읽으셨던 본문에 20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12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이 여자와 어린이 외에 5천 명이 되었더라.”
 
*마태복음 14:20-21,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여러분 왜 5천 명인가? 이번에 9.26에 첫 목표가 인원인 교역자들 초청하신 분들이 5천 명이다.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4천명이 넘는 목회자분들이 등록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또 한 번, 마음이 벅차오르면서 그 당시 ‘사일런스 리바이벌’이 일어날 때, 제가 흘렸던 그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은 이런 일은 교단 적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우리 교회가 정말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벌써 2년 전에 일이다. 코로나 중에 서울에 도착해서 주일예배를 교역자님들과 장로님들과만 드리는 그 시간을 기억한다. 우리 교회의 예배에 부어주신 말씀 자본과 기도 자본, 은혜자본, 찬양의 자본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런 풍성함이 있었다. 입례 송을 부르면서, 그렇게 또 ‘창조의 아버지’를 부르면서 미국에서도 정말 여러 해 동안 불렀던 그 찬양인데, 입례 송을 부르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예배를 통해서 제 안에 일어나는 계속되는 회개와 회복, 그리고 계속되는 변화로 인해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른다. 우리 교회가 20년이 넘도록 부른 이 ‘창조의 아버지’, 그 작업자는 우리가 이렇게 매주 부르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다. 9.26, 한국교회의 섬김의 날을 준비하면서 나누어지는 보고들을 들으면서 제 안에 있던 불신앙의 크레바스가 믿음으로 채워지고, 강단기도회를 통해 믿음의 용량이 넓어지며,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데 된다.
 
1980년도에 여의도에서 이루어졌던 ‘나는 찾았네!’ 의 행사가 있었다. 저도 그 당시 예수전도 일로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중에 예수님을 굶주렸던 구름 때처럼 몰리던 많은 성도들을 기억한다. 이번 9.26, 행사를 통해 우리의 따뜻함, 겸손함, 감동적인 섬김을 통해 한국교회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그 변곡점이 되게 하실 줄 믿는다. 시간 시간마다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기도, 찬양으로 코로나 상황을 통과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부여잡고 울던 목회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치유, 사랑, 회복을 경험하여 다시 일어나는 역사를 경험하게 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오늘 말씀 중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 가진 것이 얼마가 되든 상관없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일단 주라는 것이다. 아마도 먼 훗날 우리가 9.26을 경험 할 때 우리의 이 작은 헌신이 종을 사랑하시다가 작고하신 어떤 목사님의 그 부르심,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기까지’.라고 말씀하셨는데, 한국 청년들이 목 놓아 부르짖던 그 마음으로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9월의 한 자락이 되길 소원한다. 오늘 본문 20-21절에 보면,

*마태복음 114:20-21,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바로 이 역사가 이번 우리 9.26, 행사를 통해서 아름답게 되어 질 줄 믿는다.
 
♧요약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온전히 이루시는 그 십자가의 역사로 우리가 영생을 누리고 얻게 하심에 감사들 드리며,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님께 우리에게 오병이어를 올려 드리길 원하며 언젠가 그날이 오면 2022년 9월 26일 27일을 바로 역사의 변곡점을 함께 돌아보며 우리의 믿음 보고를 주님 앞에 감사하는 그런 영광스런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즐거이 그리고 감사히 헌신하는 섬김의 날이 되어야 한다.
 
















                                                                  ☆토요비전새벽예배-토요명절음악회 ☆


1.창목회-사랑의교회 부목사님들
피아노(최혜진 집사님)

2.김제니(소프라노)-
3.조중혁(테너)-뱃노래
4.윤종민(베이스)-가고파
5.글로리아(소프라노)-방신제, 김제니
6.기쁨-무용가(안무)-이진영
7.옷자락에서 전해지는 사랑(베이스)-윤종민
8.믿음의 고백-방신제
9.중창단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9월 4일)
제목: "달란트의 신비"
말씀: 마태복음 25:14~30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대표기도: 전승현 부목사님(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
 
▶할렐루야!!!
찬양대 찬양이 너무 좋았다. 주님을 위한 고백이 담긴 찬양임을 주님이 받으신 줄로 확신한다. 오늘 이 말씀과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 지난 한 주간의 삶의 모든 짐들이 다 벗겨지기를 바란다. 메마른 마음에 생수 강을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오늘 회중 찬송을 했는데,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그 찬송을 하면서, ~ 뒤에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 예배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확실히 깨달으면 살고, 죽은 게 그렇게 그냥 다 맡겨지는 것이다. 알겠는가? 저만 좋은 건가?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온 성도들의 삶에 진정한 나침반이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한 새 판짜기, 21번째이다. 서서히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있다. 제가 오늘 이 본문을 보면서 먼저 이런 내용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예고편인가? 천국이 예고편인가? 천국이 본편이다. 자, 오늘 본문은 25장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소위 달란트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가 나오게 된 이유는 뭐냐면 25:1절에
 
*마태복음 25:1,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태복음 25:14,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먼저 열 처녀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아주 신비한 본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깨닫는다면 동일하게 고백하는 것이 뭐냐면, 이 땅에 살면 예고편이고 천국의 삶이 본편이다. 이 땅의 삶은 예고편이고 천국의 삶은 본 편이다. 이 땅의 삶은 순례의 길이고, 천국의 삶이 진정한 실체이고 우리의 삶의 원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저는 이 땅의 삶을 꿈처럼 살다가 천국에서 진짜 깨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이 순례자, 그래서 우리가 순례자처럼 살고, 나그네처럼 살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고백이 있다. 독특한 우리의 신앙인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고 천국에서는 주인공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깨달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고, 소중한 것과 버릴 것을 구별할 수 있고, 보물과 쓰레기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껍데기와 실체를 구별할 수 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소중한 것과 버릴 것을 정리하고 껍데기와 실체를 구별하고 보물과 쓰레기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 하나님 나라의 그 어떤 핵심이 이걸 지금 말씀을 하는데 오늘 본문이 하나님 나라의 대한 중요한
 
오늘 본문은 어떤 주인이 엄청나게 부유하고 큰 부자였다. 영적으로 말하면 하늘의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인데, 이분이 타국에 가게 되었는데, 종들 가운데 좀 똘똘한 종들을 불러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한 달란트를 주었다. 그리고 이제 달란트를 주면서 얼마나 되나 했는데 성경에는 한 달란트가 어느 정도 되느냐면, 6천 데나리온은 한 달란트이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하루 품삯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으로는 노동자 하루 품삯이 15만원, 20만원 정도라면 6000데나리온이면 한 달란트가 얼마인가? 계산이 안 되는가?
한 달란트 -9억 정도가 된다.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자는 18억,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45억 정도가 되는 것이다.
 
제가 이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 그 45억이면 갖고 날리면 어떡합니까?” 라고 질문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이제 있는데 먼저 생각할 것은 이것이다. 이런 달란트 비유를 이야기 하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은사, 재능,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목사님, 어떤 특별한 목사님이나, 헌신된 주의 종이나, 선교사님들이나 그런 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우리 일반 성도 우리야 뭐 사는 대로 살지, 무슨 달란트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런 분들이 많이 계신다. 아니다. 오늘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철저하게 우리 온 성도들과 일상의 삶 속에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은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이나, 헌신된 자들만을 위하여 피 흘려 십자가에 돌아가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나, 목사님이나, 헌신된 분들만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심판대 앞에 어느 날 회개하고 정산해야 할 날이 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질문을 해야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나? 어떻게 살아야지? 마지막을 어떻게 정산해야 될까?” 마음에 질문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깔려있어야 된다. 맞는가? 뭔가 이런 의식이 있는 것이다.
 
※피터 드라크라는 세계적인 크리스천 경영학자가 있었는데 돌아가셨다. 20-30년 전에 그 때 책 가운데 최고의 책이라는 것은 ‘해프타임(밥 버포드)’,이란 책이 있는데 그 책을 평가를 했는데 그 하프타임 책에 제일 뒤에 보면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 앞에 선다면 마지막 날, 최후의 심판에서 주님 앞에 서는 날에 꼭 두 가지 질문이 있다. 그것은 너는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하고 살았냐? -피터 드라크-

첫 번째 질문은 너는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두 번째 질문은 너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무엇을 했는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무얼 했는가? 이것이 두 가지의 결국은 가장 중요한 쓰레기와 보물을 구별하는,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실체와 엉터리를 구별하는, 중요한 질문인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면 ‘목사님, 그거야 대단한 분들이 하는 것이지요.’ 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못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이 맞는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질문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마음이 뜨끔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가? 저나 여러분이나 대상이다 오늘 제가 전체적으로 그림을 그려 드렸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 무엇이냐? 또 이걸 통해서 예수님 비유 또한 새 판짜기가 일어나야 하는데 뭔가 우리의 삶에 어떤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가 무어냐?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라고 그랬을 때 어떤 사람은 음악적 재능이 있고, 예술적 미술적 재능이 있고, 수학적, 문학적 재능이 있고, 어떤 사람은 리더쉽에 은사가 있고 그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이 말씀 안에 담긴 풍성한 진리를 생각한다면 오늘 이 말씀 안에 담겨 있는 풍성한 지혜를 다 깨달을 수 없다.
 
달란트가 무엇인가? 달란트에 대해서 제대로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실마리가 한두 가지가 있다.
 
(1)첫 번째 실마리는 -달란트에 대해서 제대로 눈을 열 수 있도록 14절을 보면,14 절-자기소유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오늘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재능, 은사, 내가 갖고 있는 어떤 능력, 내가 갖고 있는 남들에 비해서 내가 독특한 것, 어떤 사람은 기억을 그렇게 잘한다. 한 번 보면 다 기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억을 못한다. 그것도 그의 은사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평가를 하지만 이 달란트의 첫 번째 실마리는 무엇이냐면, 철저하게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시다가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I.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인가?
 
(1)첫째는 실마리-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데 이것의 달란트는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자기소유
 
*마태복음 25:14~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His money? My money
하나님의 것, 첫 번째 달란트, 달란트는 하나님이 소유 하시다가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오늘 예배 참석한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준 달란트는 Not my money, but He's money. Not my talent, but he's talent. 하나님의 달란트이고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중요한 것들을 여기서 정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달란트는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시다가 나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다. 이게 첫 번째 복선이며, 신비이다.
 
그래서 여러분,
내게 주신 재물, 시간, 건강, 자녀, 은사, 근본적으로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 것이다. 만약에 여러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것은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고달파진다. 남은 인생이 상당히 순례자의 길이 힘들다. 그리고 고달픈 인생이 시작되고 인생이 안 풀린다. 예를 들어 만약에 자식이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고 내 소유라고 생각하면 자식을 원하는 대로 자식을 키운다면, 내가 부족하지만 예언 하나 할 수 있다. 그것이 뭐냐면, 여러분의 순례의 길과 여러분의 인생길이 고달프게 될 것이다. 너무 진지한가? 어떻게 보면 그 자식 때문에 지옥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이고, 내가 기뻐한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로 키워야 한다. 그런데 내가 기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키운다면 피곤할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실마리이다. 여러분이 키우는 애완동물과 반려견도 있는데 반려견도 내 말 안 듣는다. 잘 안 듣는다. 자식은 더 한다. 자 이런 말씀 드리면, 목사님, 제가 고생하고 애써서 이만큼 자수성가 했는데, 자수성가 한 분들은 마음에 안 들지도 모르지만, 내가 죽도록 고생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소리이냐고 한다. 그러나 여러분, 이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죽도록 수고하고 힘들게 자수성가가 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와 신실한 제자들은 동일하게
 
*야고보서 1:17,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많은 분들이 이것을 깨닫고 우리가 갖고 있는 재능이 내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초보적으로 깨닫는 분들은 ‘아. 내 재능과 내 소유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교만해서는 안 된다.’ 이 정도까지가 초보이다. 좀 더 중요하게 단계가 올라가면 ‘내가 가진 재능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성공하는 삶에서 가치 있는 삶으로 옮겨가는 줄’로 믿는다. 성공하는 삶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살다보면 70-80, 살다보면 어느 순간 삶이 무덤덤해진다. 뭐 재미도 없고 큰 설렘이나, 슬픔도 없고 이럴 때가 오는 것이다. 반드시 사람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달란트가 하나님께서 왔다는 이 사실을 철저하게 시인하고 하나님께 마음이 열려 있으면 여러분들 남은 인생이 70,80,90세가 되더라도 무덤덤하고 적당이가 아니라, Fresh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믿음의 모험을 할 수 있다. 설레 일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까 말씀한 대로 버릴 것과 소중한 것이 구별 될 것이다. 그래서 자기 소유를 나누어 주셨다. 내 재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내가 주님께로 왔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는 사람을 신약에서 고백하는 청지기 의식이다.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청지기 의식, 이것은 성경의 독특한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청지기’ 하면, 주인의 집안일을 맡아 보거나 시중을 드는 사람, 매니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청지기는 독특하다. 오늘 본문 25장 앞에
 
*마태복음 24:45,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소유에 대한 이 복선에 눈이 열린 사람들은 청지기 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 청지기의 해석은 충성되고 주인의 것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것을 완전히 깨닫고 난 다음에 “내가 하나님의 제자이지만 하나님의 충성된 청지기이구나!” 라고 깨닫고 베드로전서에서 고백한다.
 
*베드로전서 4:10,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청지기 의식이다. 다시 말하면 첫 번째 복선은 하나님의 소유, 이걸 못 깨닫는 구약의 예수님의 심정이나, 피의 복음이나, 은혜를 깨닫지 못한 구약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걸 못 깨닫고 율법적으로 살다 보니까 사실은 마음은 그게 아니니까 하나님께서 말라기 3:8절을 주신다. 하나님이 질책하신다. 어떻게 보면 너무 강한 어조이다.
 
*말라기 3:8,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깨달아지고 와 닿기를 바란다. 이 달란트의 신비를 이제 오늘 너무 중요하다. 다음 주에 한 번 더 할 것이다. 오늘 기본이 있어야 된다. 첫 번째 실마리는 - 하나님의 자기 소유, 하나님의 소유이다.
 
(2)두 번째 실마리-각 각 그 재능대로-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준 것이다.
-하나님이 그 분의 소유를 재능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이 재능 대로라는 말은 능력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원리대로 라는 뜻이다. 창조의 원리대로 라는 말씀은 다양하게, 나답게, 창조의 원리대로 다양하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 달란트이다. 이것이 재능 대로이다. 여기에는 다양성, 독특성, 나다움과 창조성이 숨어 있는 신비가 숨어있다. 어떤 사람은 수학 잘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과학 잘하는 사람이 다 있듯이...
 
※제가 몇 년 전에 저희 집 사람이 TV를 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데 제가 보니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 뭐 봐?” 했더니 EBS 교육 방송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재미있냐?” 라고 하니 “여보, 너무 재미있네요.”라고 했다. 수학 미적분을 보고 있는 것이다. 미분 적분이 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은사이다. 저는 수학은 별로인데, 집사람은 희한 하다. 은사의 차이 라는 것을 느끼고 집사람은 사이언스쪽이고 저는 문학 쪽이다. 사람마다 다양하고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다양하고 창조적인 것이 없다면 우리가 살맛이 안 난다. 여러분 장미 좋아하지 않는가? 장미,,, 좋다. 그런데 온 천하에 다 꽃이 가는 곳마다 모두가 다 장미이다. 그러면 그것만 보면 징글징글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장미만 주시지 않고 들꽃도 주시고 이름 없는 풀도 주시고, 하나님은 산도 주시지만 강도 주시고 계곡도 주시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누구는 무 먹고, 누구는 인삼 먹나? 그러면서 하나님께 뭐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은사가 달라서 그 은사라는 것이 부모의 영향력이 크고 예를 들어서 말씨만 하더라도 다 다르다. 다이렉트 이 방언에 엑센트가 다 다르다. 저희들 같은 경우 남쪽에 태어난 사람들은 이 말이 또박또박 분명하지 않다. 말이 분명하지 않다. 호남이 더 낫지만, 이북의 분들은 말이 또박또박 하다.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은 “새 사람이 되어야 합네다.” 자 이게 이북에 태어나고 싶지만 이북에 못 태어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거는 하나님이 각 각 그 재능대로 주신 것이다. 대신 이런 의성어 의태어를 제가 잘 한다. ㅎㅎㅎ~~~서울 사람들은 이걸 못한다. 그러니까 이게 이동운 목사님 같은 경우는 말씀이 또박또박 아나운서 같이 잘하신다. 이름도 ‘동원’이니까 사람들을 많이 온다. ㅎㅎㅎ, 자 나는 동원이 아니고, 나는 정현이다. 바르고 어질다는 뜻이다. ㅋㅋ
 
이렇게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누가 더 낫다, 못하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맞는 재능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 재능대로, 뒤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삐쭉하면 안 된다. 그래서 여러분, 네덜란드 같은 데를 보면, 네덜란드는 초등학교 1-6학년까지 교사가 담임이 한 명이다. 한 명으로 끝까지 가는 것이다. 대신 초등학교 교사를 훌륭한 자질을 가진 사람을 거기에 보낸다. 그래서 이 초등학교 교사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할 사명은 계속해서 이 아이의 달란트가 무엇인가를, 이 아이의 재능이 무엇인가? 그것만 계속 집중한다. 아, 이 아이는 손으로 만드는 재능이 있네, 애는 학문을 하는 재능이 있네. 를 구분해서 대학 갈 은사가 아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대학 진학률이 20%가 안 된다. 대신 자기 재능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농사지을 사람 농사짓고 원예 하는 사람은 원예 사업하고, 항해 할 사람은 항해사 하고, 장사할 사람은 장사하고, 자기 재능대로 행복하게 산다. 네덜란드는 감옥이 텅텅 비었다. 행복하니까, 안 싸운다. 그래서 감옥이 비어서 옆에 있는 프랑스의 죄수들을 수입하는 것이다. ㅎㅎㅎ
 
제가 무얼 이야기 하냐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다. 첫 번째 실마리는 하나님의 소유, 두 번째 실마리는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재능이다. 창조적이 원리이다.
 
(3)세 번째 실마리는-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주인의 뜻에 투자해야 하는 것.
-전체적으로 보면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은 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투자를 하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내게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믿음의 모험을 하는 것이다. 투자 하는 것이다. 믿음의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70,80,90이 되더라도 나이 많다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냥 억울해 하고 추억과 한에 사로잡힌 인생이 아니라, 70,80,90세가 되더라고 계속 은사를 가지고 믿음의 모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슨 사업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그 사역을 위해, 사명을 위해 투자하고 모험하고 좋은 의미로 리스크를 거는 것이다. 그러니까 삶이 은혜롭게 되고 믿음의 모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나를 위한 모험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모험을 하게 될 줄 믿는다. 그래서 이제 총정리를 하면 달란트가 무엇이냐면, 달란트의 정의는 무엇인가?
 
◎달란트의 뜻- 주인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잘 사용해서 주인의 뜻에 따라 모험과 투자하는 행위, 혹은 모든 기회이다.
-주인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사용해서 주인의 뜻에 따라 모험하고 투자하는 행위, 혹은 모든 기회이다. 그러면 하룻밤도 꿈이 없이 깨지 않고, 하룻밤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어제 달과 해가, 오늘 또 뜨는 것이 아니라, 오늘따라 이 해와 달이 더 새롭다는 것이며 신선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예수님 앞에 무얼 했냐?”의 질문 앞에서 계속해서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모험을 할까?”를 생각하니 신선해지고, 프레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II. 우리의 순례의 길이 끝날 때 회계의 길이 온다.

*마태복음 25:21,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하고.
-오늘 주인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참 종들이 궁금했다. 내가 달란트를 주었는데 제대로 남겼을까? 아니면 낭비했을까를 궁금해서 종들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기쁨의 얼굴로 “나는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목사님, 그게 만민의 감사와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뒤에 보면 우리가 유추할 수가 있다. 감사한 얼굴로 그리한다.
 
*마태복음 25:21,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하고.
-이미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감사함으로 보고했지만 감사함으로 또 참여할지어다. 하니까 또 기쁜 것이 배가 되는 것이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왔다. 와가지고 내 놓았다. 그 주인이 그에게도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너에게 맡긴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눈을 살펴야 할 것은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의 주인의 반응이 한 자도 다르지 않고 똑 같다. 이것 발견하느라고 애썼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두 달란트를 남기던, 다섯 달란트를 남기던, 내게 주신 은사대로 내가 모험하고 주님 앞에 투자하고 헌신하면 똑 같은 은혜와 상급을 주실 것을 믿는다. 칭찬과 상급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제 한 달란트 받은 자이다. 마지막이다. 보나마나 짐작된다. 인상 막 그려가면서, 등장하는 자세가 심상치 않고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와 비교해서 인상을 찡그린 것이다. 그것을 땅에 파묻어 놓은 것을 다시 가지고 나오니까 그러면서 말이 많다.
 
*마태복음 28:24,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여러분 누가 이런 말 하라고 했는가? 주인에 대한 평가를 자기가 미리 하는데 주인이 시켰는가? 주인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하는 것이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굳은 사람이라.” 한다. 무슨 말인가? 땅에 씨도 안 뿌리고 추수를 하고 그 다음에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인에 대해서 악덕 기업주라고 한다. 폭리를 취하고 그저 먹는 악덕업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주인에 대한 의식은 뭐냐면, 늘 주인을 안니 꼽게 생각하는 것이다. 주인에 대해서 배배 꼬는 것이다. 노동을 착취하는 주인으로 주인의 부에 대해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다. 눈에 한 번 삐딱해지면 시작부터 끝이 다 그렇게 보이게 된다. 마음이 꼬이면 이런 반응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주인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것을 땅에 파묻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파묻었다가 가지고 온 것만으로 감지덕지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혀 청지기 의식이 없다. 전혀 주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자기 생각과 ㅈ기 꼬임과 자기 의견에 꽉 사로잡혀서 주인을 평가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주인의 말이 얼마나 단호한지 무어라고 말씀하느냐면,
 
*마태복음 25:26,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태복음 25:30,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자를 쫓아내고 거기서 슬픔에 이를 갈도록 놔두라고 하시는 것은 이만한 강도로 나오는 말씀이 또 많은가 싶을 정도로 그렇다. 제가 어릴 적부터 성경을 읽었기에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의문이 있었다. ‘아니 한 달란트 숨겼다고 어떻게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의문이었다. 이해가 안 되었다. 뭐가 그리 잘못 되었나? 주인이 못 받았다고 억울한 것인가? 그래도 원금은 드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중에 이 말씀을 깨닫게 되면서 눈이 열렸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마음이 주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주인의 주인 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속셈이 다 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무얼 잘못했다는 것인가? 첫 째 마음이 잘못된 것이다. 마음에 청지기 의식이 없다. 주인의 뜻에 관심이 없다. 마음이 관심이 없고 행동 자체도 믿음으로 모험으로 투자하는 것을 생각도 안하는 게으르기 짝이 없다. 마음이 안 가니까 몸도 안 가는 것이다.
 
한 달란트의 받은 자의 잘못과 핵심은 주인의 종, 주인의 청지기, 주인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데 관심이 있다. 종인 척 했지만 실제로 종이 되고자 하지 않았다. 진짜 종은 주인의 편에 서야 한다. 주인의 종에 서지 않았다. 주인의 편에 서야 하는데 주인의 심정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섬기는 종이 아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귀한 날,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마음과 행동이 총 정리되기를 바란다. 삶은 우리가 여러 우여곡절이 있다. 주인의 뜻에 민감해지고 주인의 뜻에 전력투구해지면 여러분들이 삶에 많은 난관과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뜻에 관심이 너무 많다. 저 사람이 어떻게 생각 할까의 관심이 많은데 문제는 끝까지 해결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아예, ‘살뜰하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겠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면 수많은 삶의 난관들이 해결되리라 믿는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의 뜻에 모험하지 않았다. 여러분 모험하면 상처도 받을 수 있다. 모험하면 짐도 질수 있고 모험하면 리스크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모험하는 그 길에 나머지 결과를 주님이 계산해 주신다. 무슨 뜻인가? ‘사랑’에는 결혼, 부부, 가정, 성도, 자녀, 우리의 삶, 이 땅에서의 모든 관계, 최고는 사랑이다. 그런데 그 사랑에는 얼마나 위험이 따르는지 모른다. 모험에도 위험이 따른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많은 위험이 따르는지 모른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는 그 강력한 모험을 하시는 것이고 십자가의 상처가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을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 시키는 것이다. CS. 루이스.
-우리의 교우들 관계, 가족 관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관계 가운데서 상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랑을 안 할 수 있는가? 아닌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받는 상처를 안 받으려고 여러분의 마음을 이기심이란 상자에 넣어서 안전하게 상자에 넣어보라. 거기서 우리가 어떤 특별한 상처를 안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서 굳어지고 고착될 것이다.
 
III. 믿음으로 모험을 해야.
-오늘 믿음으로 모험하는 축복을 주셔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땅에 파묻지 아니하고, 상처도 감수하면서 모험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하실 것이다. 지난주일 4차 산업시대는 ‘빅 데이터의 대항’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신앙으로 우리의 삶을 항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유인 인생의 배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각 그 재능대로 노를 저을 수 있는 재능을 주셨다. 하나님은 인생의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배를 주시고, 또 우리에게 은사대로 노를 주셨다. 직접 저어주시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 은혜를 깨닫고 우리가 저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인생이라는 순례의 길을 함께 할 수 있는 배를 주시고 배를 저을 수 있는 노도 주신다. 그러나 직접 하나님이 노를 저어 주시지는 않으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를 저어야 할지는 다음 주일 날 말씀하겠다. To be continued.~~~ 중요한 것은 He’s money, his talent. 재능대로, 믿음의 모험, 한 달란트 받은 자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마음이 잘못되니까 행동도 잘 못 되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이 주신 부요와 풍성이 있기를 바라며 소망한
 
♣요약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시간, 재물, 자녀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인생을 결산하는 그날까지 종의 설레임으로 가슴 뛰는 평생이 되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양한 재능대로 나답게 주셨으니 재능대로 헌신하며 선한 청지기로 쓰임 받아서 한국교회를 9.26날 충성 되이 섬겨서 한국교회가 회복과 부흥으로 가게 하시며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쓰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달란트를 주신 이유는 각각의 재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은혜를 다양하게 주셨다. 그것에는 양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질의 차이는 없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받은 은사를 잘 활용하여 봉사해야 한다. 우리가 이 달란트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바른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청지기는 열심히 충성하여 최선을 다한다. 또한 청지기는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믿음을 지켜 나가는 삶을 살며 충성하여 양 무리의 본이 된다. 두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재능을 가지고 봉사하는 데 태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게 편견이 있었고, 주인이 부여한 재능을 활용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하나님께 받은 재능을 하찮게 여기거나 남의 것을 시기하는 자는 그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성실한 종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과 재능대로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충성된 종은 두 배의 소산을 남김으로써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고, 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했다. 그러나 게으른 종은 소산을 남기지 못하여 주인에게 책망을 받았으며 가진 것도 빼앗기고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그 차이가 미미해 보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벌어질 수 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재능을 가지고 봉사하는 데 태만하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과 재능대로 그분께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하나님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활용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을 하찮게 여기거나 남의 것을 시기하는 자는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종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9월 3일)

제목: "드림과 채움"
말씀: 마가복음 15:42~47
대표기도: 이정보 집사님(남사역 2반 총무)
찬양인도: 제자, 사역훈련반

말씀읽기::정지윤자매(청년 6국), 박주용 형제(대학6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마무리 기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마가복음 15:42~47,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
 
▶이 시간 ‘드림과 채움’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겠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 전날 십자가에 달리셨다. 주님이 달리셨던 그날은 정오부터 어둠이 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의 기세는 하루의 시간대 중 가장 밝아야 될 그 시간대를 어둠으로 꽉 채우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지속하고 있었다. 마침내 오후 3시 어간, 우리 주님께서 숨지시고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을 때에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고 그나마 남아있던 여자들이 그 너덜해진 마음 가운데 아마도 소망의 끈도 그 순간 끊어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을씨년스런 분위기, 제비를 뽑는 군병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들, ‘나사렛 예수’라는 자는 이제 처리가 되었으니 그를 따르던 도당들을 발본색원하려던 그런 관계 어린 눈빛들이 하루 종일 어우러지고, 여기저기 도망치고, 흩어진 제자들의 심령은 아마도 상실감, 패배감, 절망감으로 점철(點綴)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 하셨다. 끝내 승리하신다고 알려주셨다. 그러나 들은 것과 아는 것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또 아는 것과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임을 우리 역시 여실히 느끼기에, 우리는 제자들을 안타까운 심령으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안타까운 심령으로 이 순간 바라보게 된다.
 
사실 나사로 죽었을 때도 그랬다. 주님께서 일부러 늦게 도착하셨을 때, 이렇게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아마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우리 주님도 사랑하는 나사렛의 죽음을 앞에 두고 아파하시며 마르다에게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때 마르다는 대답한다. “네, 마지막 날 살아나겠지요.” 이렇게 대답을 한다. 마르다의 대답은 확실히 잘 배운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계획은 더 원대하고, 더 역사적이며, 비상 적이셨다. 우리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하신다. 그때도 마르다가 말한다. 이렇게 4자를 가리킨다. 실제로 가리킨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 “벌써 나흘이 되었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제발 이러지 마시와요.” 라고 한다. 다 맞는 말이다. 마르다는 열심히 배워서 신학적, 학문적, 지식도 출중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데도 눌려있다. 슬픔에 정복당했다. 어둠과 무거움 밑에서 허둥대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우리 안에도 이럴 때도 있는지?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 가정과 기업에 걸어간 그 여정 중에서 이런 마음이 들 때도 있었고, 혹시 지금이 그런 중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를 지나오며, 우리 한국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기도할 때, 혹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된다. 우리 사랑의 교회 안에서는 코로나 전이나 중이나, 지금이나 오직 은혜, 오직 감사, 오직 기쁨이 충만한데, 조금만 눈을 들어 돌리고 조금만 귀를 열어보면, 여전히 끝나지 않는 코로나와 안정되지 않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 그리고 적대적인 여러 사회적인 이미지, 한국교회가 신음(呻吟)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며 마음이 시원해지신 적이 근래에 많은가?
 
저는요? 얼마나 답답하면, 근래에 권사님들이 더 많이 가슴을 치시며 기도하시는 것 같다. 물론 우리 주님 오시면 해결된다는 것,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주님께서 끝내 책임지실 것도 안다. 영원토록 주님의 교회가 영원토록 있을 것을 우리는 확실히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알고 고백하는데도, 이러한 사회적 기세에 환경적 어려움에, 신앙적 위협에, 마치 주님이 달리시는 그날과 같이 무거움과 비관적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 물과 피를 쏟던 그날, 어두움과 무거움이 지배하던 그 시간, 아리바대 지역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육신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존경 받는 공회원 산헤드린 멤버 활동을 하였다. 존경 받는 바리새인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다. 그 시절 존경 받는 바리새인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가 흔치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과 관계없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육신을 달라고 한다.
 
이 마가복음에서는 이 ‘당돌한’ 그 표현을 그대로 썼다. 이것의 헬라어는 ‘톨마오‘라고 한다. 성경에서 어디에서 이 단어를 썼는지 살펴보면, 로마서 5장 7절에 있다.
*로마5:7,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이 ‘용감히’가 ‘톨마오’이다. 빌립보서 1장 14절에도
*빌립보서 1:14,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여기서 ‘담대히’도 ‘톨마오’이다. 이때 사용한 단어이다. 아리마대 요셉이 용감히, 담대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육신을 달라고 한다. 원래 그는 당돌한 사람인가? 감사하게도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서 신약 성경 4복음서가 다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이 선하고 의로운데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라고 평이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이 아리마대 요셉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예수의 제자라고 설명하며 그런데 유대인이 두려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라고 말씀한다. 그러고 보면 이 아리마대 요셉은 원래 외향형, 돌출 형으로서 여기저기서 당돌히 담대히 튄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 두려움 가운데 늘 조심하던 사람이었다. 주님의 제자로서 그 마음가운에 정체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튀지 않고 조심조심 조신조신 그렇게 무리 되지 않게 나아가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합치면 유대인이 두려워서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조신하던 그가 당돌히, 담대히, 용감히,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 육체를 요구한 것이다. 조용히 가만히 자신의 역학을 하던 그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에 어둠이 장악하고 있을 때에 두려움이 그 모든 길을 주도하고 있을 때, 기적을 행하며 주가를 행하던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이제 아무것도 없다 할 때에 당돌히 주님의 육신을 거둔다. 자기가 죽은 후 누워야 하는 돌무덤에 말이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쌌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염(殮)을 한 것이다. 주님의 머리에서 가시관을 벗겨내고 찢겨진 손과 발을 씻어내고, 포개고, 피와 땀으로 얼룩진 것을 닦아내고, 세마포를 입히는 과정, 그 모든 현장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당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소위 “나 예수님의 제자요!”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 지난 순장 반시간에 우리 강사 목사님께서 커밍아웃(comming out)이라는 말씀하시며 이 단어가 특정한 노출하는 제한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시대에 아주 담대한 커밍아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예수님의 제자요.” 이후에 그를 바라보는 동료 바리새인들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그는 이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에 세상 적으로 유대인 사회에서 더 이상 존경 받는 공회의에 멤버로 역할을 당하기에는 ‘이제 글렀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섬긴 이모든 것은 재정적으로 큰 손해였을 것이다. 그 무덤은 사람을 장사하는 무덤이 아니다. 새 무덤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가문을 위해, 예루살렘 바로 근처에 준비한 무덤이다.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육체를 거두며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중에 천국에서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가 당시의 습관을 쫓아서 무덤에 돌을 굴러서 막은 것으로 보아서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실 거야!’ 라고 백 프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물어봐야 된다. 정확하게는 모른다, 제자들도 다 도망갔는데, 엠마오 제자들도 슬픔과 두려움 가운데 고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마가도 돌을 조금 돌을 열어두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본다. 오히려 ‘사랑하는 예수님, 우리 주님 몸이라도 내가 건사해야지’, 하는 그런 주님 사랑하는 갸륵한 마음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본다. 무지막지한 평판의 손해, 재정의 손해, 관계의 손해, 미래의 출세에 있어서의 손해를 감수하고 그의 행동은 결코 어떻게 결과 지어지는가? 기적의 역사의 현장이 된다. 온 인류와 피조물이 간절히 고대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그 역사의 자리, 그 시간을 그 빈 무덤이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만물의 변곡점이 이루어지고 바로 그 시간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방문하여 은혜를 누리고 주님이 누우셨던 자리라고 하는 곳에 입을 맞추며, 은혜의 불쏘시개 역할을 감당했던 곳이 바로 그 자리이다. 그리고 아미마대 요셉이 바로 그 자리에 주인인 것이다. 이렇듯 아리마대 요셉의 결단과 헌신은 우리에게 큰 은혜의 도전으로 다가온다.
 
특별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우리가 소마트 예수라고 헬라어도 이렇게 편히 많이 이야기 한다. 소마가 육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당돌히 비움의 자리로 들어간 자신을 비워드림으로 예수님이 육체를 모시는 아이마대 요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성경적 의미를 더욱 확장하여 생각한다면, 오늘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살아계신 우리 주님의 몸이다. 가장 작은 교회나, 주님께서 사역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신 교신 교회나, 도시에 있는 교회나, 시골에 있는 교회나, 모두 우리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 교회를 지 교회라고 한다고 부르기도 하는데, 때 앞에 있는 이 지자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본사 지사라고 할 때 그 지자를 쓰지 않는다. 그 지자는 갈리워질 지(枝) 자이다. 바로 갈리워 질 지(枝) 자 옆에 나무 목자가 붙는다. 지(枝), 그래서 가지 지 자를 써서 지(枝)교회(敎會)라고 한다. 왜 그럴까? 한 몸기 때문에 그렇다. 갈리워져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한 몸통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한 줄기에 붙어 있고 한 뿌리에 연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웃에 있는 교회, 또 도시에 있는 교회, 시골에 있는 교회, 많은 교회들에 나뭇가지의 색이 바래지고 병충해가 들며 신음하고 힘들고 아파할 때에, 어찌 우리가 우리의 가지는 튼실하고 우리의 줄기는 굵으며, 우리의 나뭇잎은 청청하니 괜찮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님의 육체가 신음하고 있다. 주님의 약속을 많은 교회들이 붙잡고 있으면서도 이 땅의 어두움과 무거움의 기세에 그 마음이 위축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달리시던 그날, 멀리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지금 이 시간 주의 제자들이 주의 몸 된 또 다른 많은 교회들이 안타까움으로 지금의 무거움과 어려움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한국교회가 지상 교회가 한 몸 공동체로서 함께 부흥해야 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와 민족도 산다.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할지 많이 고민 안 해도 된다. 우리 주님께서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우리에게 아름답고 귀하게 섬기게 허락해 주셨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를 나누어주기만 한다거나, 도와주는 지혜자로서 우리가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회복하고, 함께 부흥하는 수혜자로서 우리가 서는 것이다. 바로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 뵈올 때까지 전투하는 지상 교회가, 여러 지역의 교회 서로 상처를 보듬어 주고 필요를 채워주며 함께 기름을 바르고 기도할 때 우리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우리는 한 몸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함을 확신해야 한다.
 
두 번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우리의 비움 가운데 생명의 역사를 우리는 간절히 기대해야 된다. 한 몸 공동체를 기억해야 된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우리는 기대해야 된다.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은혜를 누리면 우리의 힘으로 한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으로 눈물로 기도하고 우리의 진심을 담아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이 귀한 것으로 감당할 때, 오직 우리 주님만 영광 받으실 줄 확신한다.
 
아리마대 요셉이 모든 희생으로 자신을 제자로 드러내고, 그의 자리를 주님께 드렸을 때에 그가 생각했던 것에 몇 백만 배의 역사가 일어나듯이 우리는 그저 제자로서 우리 자신을 드려보는 것이나, 그냥 제자로서 우리의 것을 주님 앞에 우리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나, 우리 주님께서는 9.26 주님의 섬김의 날을 어떤 변곡점으로, 어떤 출발점으로, 어떤 결과들로 채우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얼마나 기대해야 될까? 저는 정말 많이많이 우리가 소망하고 기대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간절함, 기대함, 우리의 소망이 바로 믿음 보고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당돌함으로 세상의 기준에 앞서며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우리가 소원한다. 지금 강단 기도회가 한주일 진행되었다. 이제 3주 더 진행 될 텐데, 와봐야 기도의 영적 기백과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이 모든 일이 정말 담대한 것이다. 당돌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후추파 정신이 발휘되기를 소원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9절에서
 
*고린도전서 16:9,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그가 기도하며 애쓰며 주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나아갈 때에 선교할 광대함이 전도할 유효한 문이 영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할 때, 연이어서 사도바울의 고백은 ‘그러나 대적하는 자’가 많다고 또 고백한다. 악한 세력들은 교회들이 살아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단 마귀의 권세는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란다. 위장된 평화 속에서 그저 천천히 우리 교회들이 잠식되기를 소원하고 원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성경 안에서 깨어있는 영 가족 여러분, 시간의 당돌함을 선포하기를 바란다. 기도의 당돌함을 선포하라. 재정이 담대함을 선포하라. 강단 기도회 중, 담임 목사님을 통하여 주신 뱀 꼬리잡기는 그날 이후 계속하여 영적 울림으로 남아 있다. 어떻게 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우리가 붙잡았던 그 지팡이가 평생 모세가 들고 의지하며 왔었던 그 지팡이가 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거, 생활, 건강, 재정, 노후 문제 등, 든든히 붙잡아야 될 우리의 지팡이가 우리의 혹시 우선순위가 가장 1번으로 등극을 할 때에 그것은 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에 순종하든지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당돌히, 담대히, 그 뱀의 꼬리를 잡으면 뱀에게 물리고 죽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막대기, 주님께서 주신 전략무기가 되어서 홍해를 가르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무지하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뱀 꼬리를 잡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가 아니고, 말씀 안에서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보다 복음의 비밀을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더 잘 아는 모든 이 하나님의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더 잘 아는 복 받은 성도들이다. 우리가 한 몸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더 크고 넓고, 놀라운 일을 기대하기를 바란다. 아리마대 요셉 같이 당돌히, 담대히, 세상이 기준에 맞서서 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해 비워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기쁨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운 것처럼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통한 우리의 비움의 섬김이 우리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기쁨의 충만한 채움으로 역사할 줄 확신한다.
 
♣요약
우리의 생애에 담대히, 당돌히 믿음 보고할 수 있기를 원한다. 주님의 작정과 뜻을 기억하여서 주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게 하심을 믿고 이제 분연이 일어나 담대히 당돌히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 우리 사랑의교회가 9.26 섬김의 날을 위해 헌신을 시간과 기도와 비움으로 준비하여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이 약속하신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한국교회를 채우시도록 간절히 원하며 각자의 개인의 삶에도 드림과 채움이 충만하기를 소원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31일)

제목: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마가복음 5:21-43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천동원 부목사님
-----------------------------------------------------


*마가복음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시련은 내가 믿고 의지 했던 이로부터 당하게 되는 배신이다. 배신이라는 표현이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사에서 배신감을 느낀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한다. 정서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신뢰감을 잃게 될 때 일상용어로 종종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배신감을 느끼는 때가 있다. 바로 하나님께 느끼는 배신감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랐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 내 삶에 축복의 기회를 주시리라 기대하고 또 하나님 앞에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복은 고사하고 삶에 고난이 많다. 믿음으로 시작했던 일들이 그것도 주님에 확실한 응답이라는 확신 속에서 진행했던 일들이 정작 정반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 응답은 고사하고 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일들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 더 이상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여러분, 그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더 이상 귓전에 들리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 밖에 남아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 밖에 남아있지 않게 된다. 실망과 낙심이 너무 커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회당 장 야이로는 마치 이 같은 처지에 놓인 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딸이 죽을 위기를 맞이하자 한 걸음에 주님께 달려와 엎드려 간절히 간구한다. 회당 장 야이로에게 발견되는 단면을 살펴보면, 예수님만이 딸 아이를 살리실 유일한 분이심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 앞에 납작 엎드려 간구한다. 여러분 이 당시 발아래 엎드리는 행위는 두 부류의 계층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신하가 왕 앞에 행하는 충성의 표시로서의 동작이 바로 발 앞에 엎드리는 행위였다. 또는 종이 주인 앞에 행하는 복종의 태도가 바로 이 같은 행위였다는 것이다. 바로 당시 회당장이라는 직책은 해당 예배를 주관하고 또 회당의 사람들을 감독하여 회당 건물을 돌보는 사람이었다. 또한 예배 시에 구약을 낭독하고 설교할 사람을 지명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지도자였다. 우리 예수님의 공생 회를 살펴보면 회당중심으로 말씀사역과 치유사역을 행하셨는데 이것은 회당장의 허락 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당시 회당 장은 유대 사회 내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 회당 장 야이로가 수많은 무리들이 지켜보는 그 시선에 개의치 않고 마치 신하가 왕 앞에 행하듯 마치 종이 주인을 맞이하는 예수님 발 앞에 납작이 엎드려 간구하고 있다. 자신이 지닌 사회적 지위와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한 절박한 부성애 때문이었다. 적어도 회당 장 야이로는 예수님이만이 내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에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이다. 그는 간절하고 구체적으로 고한다. 본문 22절, 23절은 다음과 같이 고한다.
 
*마가복음 5:21-23,
22 회당 장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딸의 몸에 손을 얹어 살게 해 달라 간구한다. 즉 그의 간구는 막연하지 않았다. 매우 구체적으로 간구했다. 이에 본문 2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5:24,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우리 주님께서 야이로와 함께 가신다.” 여러분 무슨 말인가? 회당 장 야이로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구체적인 간구대로 친히 찾아가서 그 딸의 몸에 손을 얹어 살게 하겠다는 우리 주님의 약속인 것이다. 다시 종료하면 회당 장 야이로는 주님만이 죽어가는 딸을 살리실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간절히 간구한다. 궁극적으로 주님께 응답에 대한 분명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 마치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 할 때,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면 이와 방불한 세 가지 내용이 언급 된다 첫 째 주님은 기도에 응답하는 분이시다.
 
둘째는 기도는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응답도 구체적이다.
셋째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면 반드시 응답된다. 여러분 야이로의 행보를 살펴보면 야이로는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 응답에 대한 가르침의 정석대로 행했다. 그러나 회당 장 야이로가 직면한 엄연한 현실은 딸의 죽음이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딸아이가 죽지 않도록 간구했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현실은 딸아이의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만이 응답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구주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하고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을 믿고 따랐는데 정반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이 같은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주님께 배신감을 느낀다는 표현 외엔 달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혹여 야이로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성도님들이 계시거나 내게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우리 성도님들께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본문의 말씀을 보다 세밀히 살펴보면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회당 장 야이로의 열두 살(12세) 난 딸과 열 두해(12년) 혈루 증 여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은 마치 별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한 내용이다. 회당 장 딸 아이 나이가 열두 살이라는 것과 여인이 혈류 증을 12년을 앓았다는 이 숫자적인 동일성 외에는 그 어떤 닮은꼴을 발견할 수 없다. 엄밀히 따지자면 12란 숫자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회당 장 딸 아이에게 12라는 시간은 ‘생과 사’를 오가고 있는 딸아이의 입장에서는 꽃다운 시간이었고 인생의 정점에 지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반면 혈류 증을 앓은 여인에게 12년이라는 세월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외로움 속에 가산을 다 허비해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병은 완화되지 않았다. 혈류 병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병이요 죄 대가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여인이 겪었을 12년이라는 세월은 지옥의 시간이요, 고통의 기간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사건은 그 어떤 닮은꼴을 발견할 수 없는 별개의 사건으로 비춰진다.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흔적을 살펴보면 각 사건마다 개별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한 시간의 흐름의 선상에서 다루고 있다.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적어도 야이로 사건에서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문은 혈류 증 앓은 여인의 사건이 마치 회당 장 야이로 사건에 종속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하다. 예수님께서 회당 장 야이로의 간증을 듣고 그의 집으로 이동 할 때, 큰 무리가 에워싸며 뒤를 뒤따르게 된다. 그때 열 두해 혈루 증 않은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 여인이 생각하기를 ‘그 예수님에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을 하고 무리들 틈을 비집고 나아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댄다. 그 순간 그녀의 혈루 병의 근원이 깨끗하게 치유하게 되는 기적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 27절에 이 같이 말씀한다.
 
*마가복음 5:27-29,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12년 동안이나 고통당했던 혈루 병이 그 자리에서 깨끗하게 치료되었다. 그동안 많은 의사를 찾아가며 자신의 모든 가산을 허비하기까지 백방으로 뛰었지만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악화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단지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었을 뿐이었는데 그녀의 혈루 병이 깨끗하게 나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우리 주님은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무리 가운에 돌이켜 말씀하신다. 30절 말씀이다. 무리가 에워싼 과정 속에 이상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주님은 제자들의 말에 게의 치 않으시고 또다시 찾으신다. 그제 서야 이 여인이 이실직고를 한다.
 
*마가복음 5:30,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있는 데 발생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주님은 제자들 말에 게의 치 않으시고 또 다시 주위를 살펴보신다. 그제 서야 이 여인이 이실직고를 하는데 33절에 보면,
 
*마가복음 5:33,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사랑하는 여러분, 이 광경을 지켜본 회당 장 야이로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단지 예수님의 옷 가에 손만 대어도 12년간 앓았던 그 혈루 병이 그 깨끗이 치유되었다면,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예수님이 우리 사랑하는 딸의 몸에 손을 댄다면, 이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리라.”는 기대가 당연지사인 아닌가? 회당 장 야이로는 혈루 증 여인이 치유되는 이 기적의 광경을 자신의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그 기적의 광경을 지켜보았을 때 ‘내 딸도 저 여인처럼 깨끗하게 치료되겠다.’는 믿음의 확신이 용솟을 쳤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회당 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비운의 소식을 전하게 되는데,
*마가복음 5:34-35,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 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 것이다. 여러분, 회당 장 야이로가 주께 엎드려 간곡히 구하였던 것이 무엇인가? 죽어가는 딸아이를 살려달라는 간청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러나 딸아이의 죽음이었다. 딸아이가 죽지 않도록 간청했는데 결과적으로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그것도 어떤 상황인가?
 
*마가복음 5:34-35,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 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 것이다. 여러분, 회당 장 야이로가 주께 엎드려 간곡히 구하였던 것이 무엇인가? 죽어가는 딸아이를 살려달라는 간청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러나 딸아이의 죽음이었다. 딸아이가 죽지 않도록 간청했는데 결과적으로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이다. 그것도 어떤 상황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의 말씀은 12년간 혈루 병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치료를 받아 우리 예수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이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라고 축복하신다. 회당 장 야이로는 기적적인 치유를 눈앞에서 목격하며 자신의 딸도 그 여인처럼 깨끗하게 치료될 것이라는 그 부푼 소망을 품은 바로 그때에 딸의 죽음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와 방불한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주위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기도응답의 체경험담을 접하게 된다. 특히 특새라든지, 또 특별한 집회 때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행하셨던 그 간증을 듣게 되면, 부푼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된다. 그래서 동일한 응답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더욱 간절하게 찾고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야이로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님 때문에 절망 속에서 소망을 붙잡았건만, 되려 예수님 때문에 그 소망이 다시 절망으로 급변하기도 한다. 달리 표현하면 믿었던 예수님께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님께 찾아가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내 인생의 궁극적인 답을 주실 것이라 소망한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혼란스러운 순간순간이 많다. 주님 때문에 실족하게 된다. 배신감을 느낀다. 문제는 이 같은 일들이 신앙생활을 탓하게 되고 미숙한 신자들만이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믿고 주님을 향한 헌신과 섬김이 뛰어난 이들에게도 이 같은 일들이 종종 목격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깊이 들여다보면 믿음의 인물들 가운데 그 같은 사례가 많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애굽의 왕자였던 모세, 그는 나이 40이 되자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할 생각으로 백성들의 편에 섰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애굽의 군사를 쳐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오히려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면당하고 또 살인자라는 그 사실이 발각되면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주하게 된다. 그러면 40년의 세월이 흘러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시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얼마나 실족했었는지, 자기 눈앞에,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그 불이 나무를 태우는 그 신비로운 광경 앞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극구 사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실족함 때문이었다.
 
불의 선지자 엘리야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의 기적을 통해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처단하고 또한 3년 6개월 만에 지속되었던 가뭄을 종식시켰던 비의 기적을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이 뜻대로 하나님의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니, 자기가 원했던 그림대로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시니 그만 실족하여 로뎀 나무 곁에서 죽기를 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이다. 광야에 외치는 자여, 주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도 예수님께 실족하게 되니, 그 입으로 예수님을 증언했던 자가 도리어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참으로 고대하던 메시아가 되는지’ 질문해야 할 만큼 그는 예수님 앞에 실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는 말할 나위도 없다.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께 실족하여 대제사장들에게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뿔뿔이 흩어져 삼 년 육 개월 동안 수고했던, 3년의 그 공생의 시간이 무색하게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이전 생업의 길로 돌아서는 민낯의 실족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 세례요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믿음의 인물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족한 이들이었음을 성경은 여지없이 우리에게 말씀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느끼게 되는 실망감, 혹은 배신감은 신앙의 성숙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며 어쩌면 이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도 예외일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혹여 하나님께 실족하여 스스로를 자책하고 계시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들려주시는 말씀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를 소망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우리 주님은 마치 간절한 기도가 거들 되어 실족한 야이로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본문 36절 말씀
 
*마가복음 5:36,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딸의 죽음 소식에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하고 있을 이 야이로에게 우리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신다. 여러분 36절에서 ‘곁에서 들으시고’ 라는 이 헬라 원문을 번역하면 ‘들어 넘기다. 무시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즉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의 죽음 소식을 가져온 이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던 이 비운의 소식과 함께 야이로에게 더 이상 예수님을 괴롭게 말라며 정답 같은 충고를 한다. 딸은 이미 죽었고 이제 예수님도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가지고 온 이 비보는 사실에 기초한 정확한 소식으로 마치 정답을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보라. 우리 주님은 정답이 아니라 그분의 해답을 제시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해답이었다. ‘두려워 말라. 라고 말씀하신다. 믿기만 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믿기만 하라. 의 헬라 원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현재형으로 흔들리지 말고 네가 처음 내게 가졌던 믿음을 지금도 그대로 굳게 간직하라는 의미이다. 세상 사람들의 비보와는 달리 우리 주님은 회당장의 딸의 죽음을 선언하고 있지 않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아직 끝이라고 선언하지 아니하는 한 끝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아니할 분명한 이유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 같은 일들이 얼마나 자주 재현되는지 모른다. 주신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주위에서 사실을 보고하며 정답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두려움 가운데 사로잡히는지 모른다. ------
 
결국 이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약화 시키고 믿음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오직 저와 여러분은 두려움을 조성하고 믿음의 근간을 뒤 흔드는 세상의 정답 같은 소리가 아니요, 오직 주님이 주시는 해답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신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이 있기를 바란다. 본문에서 딸의 죽음 소식 앞에서도 야이로가 절규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쨌든 야이로는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붙들었던 것 같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붙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야이로는 주님이 주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권면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믿음의 근간을 뒤 흔드는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본문 38절이다.
 
*마가복음 5:38,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소식으로만 들었던 비보를 이제 직접 야이로가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사람들이 심히 통곡하는 이 광경 앞에서 딸이 죽었다는 이 죽음의 실체를 야이로가 직접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딸이 죽지 않도록 결박하게 간구했지만 결과는 딸의 죽음이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붙잡고 힘겹게 그 자리에 나아왔지만 결국 야이로가 맞이하게 된 현실은 부인할 수 없은 엄연한 딸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적인 순간의 우리 주님은 회당 장 야이로에게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5:39,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때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4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40a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여러분, 사람들의 반응은 비웃음이었다. 주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시며 희망과 소망을 주시는 반면에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일제히 비웃는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낙심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약속 있는 말씀을 비웃음으로 만들고 끊임없이 낙심케 한다. 여러분, 낙심은 기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능숙한 마귀는 바로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 너의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어”, 낙심을 조장하는 일이다. 낙심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 백성과의 창조된 관계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구원의 문제와는 별게이다. 이것은 불행의 문제이다. 기억하기를 바란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간섭할 수 없다. 그러나 사탄은 낙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이 땅을 살아내는 성도를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낙심하는 순간,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불행해진다. 마치 삶이 지옥 같아진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을 통해 성도들에게 낙심을 경계하도록 당부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불의한 재판관 비유는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끈질긴 이 간청함으로 인하여 결국 그 원한을 들어주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들의 그 원한을 갚아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며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비유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 18장 8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8:8,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무슨 말씀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낙심 때문에 믿음을 저버린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여러분, 낙심은 믿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임을 기억하고 혹여 낙심 속에 거하고 있는 성도가 있다면 야고보서 4:7절의 권면처럼 마귀를 대적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의 말씀처럼 담대히 대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계속해서 본문
 
*마가복음 5:40-42,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 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절망의 임계점에서 주님은 소녀를 향해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신다.
“소녀야, 일어나라 명령하신다.” 그때 죽었던 소녀가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그 순간, 야이로를 괴롭혔던 모든 불신과 그 낙심의 그림자가 일제히 물러가게 된다. 죽은 자를 일으키신 전능자, 하나님은 전능을 보이시는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을 밝히 그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달리다굼의 주님의 음성을 듣기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하기를 바란다. 터널에는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함께 하실 때, 고난에도 그 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의 끝에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시면 새 일을 행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나타남을 믿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달리다굼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 자는 본문에 의하며 야이로 부부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뿐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불신을 조장하고 비웃음으로 낙심케 하는 무리들을 다 내보내신다. 본문 40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가복음 5:40-42,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 사.
-결국 끝까지 주님 말씀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달리다굼’의 음성과 지적을 보여주셨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당 자 야이로는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갔다. 그 과정 속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예수님도 이제 소용없다’는 그 불신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야이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 음성 앞에 야이로는 결단코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죽음의 그 실체를 이제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적인 순간에도 야이로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달리 표현하면 믿었던 예수님께 배신감을 느껴도 믿었던 예수님께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해 낙심이 찾아와도 결단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야이로는 ‘달리다굼’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결국 야이로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낙심과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여러분 믿기를 바란다.
 
여러분 신앙의 큰 위기는 당장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응답으로 인해, 그 낙심으로 인해, 주님 곁을 떠나는 일이다. 주님 곁을 떠나는 순간,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된다. 낙심으로 인해 주님 곁을 떠나는 순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는 그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주님의 음성을 더 이상 못 듣게 되니 세상의 소리,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도 소용없다.” 그 불신과 비웃음 앞에 억장이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자포자기(自暴自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위에라도 설령 이제는 끝이라고 하는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결단코 주님 곁을 떠나지 말기를 바란다. 마치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그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주님 곁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게 된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곁에 있으면 반드시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께서 때가 되면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믿기를 바란다. 야이로는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는 그 어떤 경우라도 설령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도 결단코 주님 곁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 곁을 떠나는 순간 더 이상 달리다굼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뿐 더러 달리다굼의 기적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 소개 된 나오미의 두 자부, 룻과 오르바를 보라. 그들은 이방 모압 여인이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는 무관한 자들이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게 되었을 때, 나오미는 두 자부, 룻과 오르바에게 그들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그 때 두 자부 모두 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오미가 계속해서 권하니 결국 오르바는 자신의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는다. “어머니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고백하며 그 곁을 결단코 떠나지 않았다. 그 결과 룻은 보아스를 만나 기업을 얻게 되고 훗날 다윗의 조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계보를 잇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를 덧입게 된다. 그 어머니 나오니 곁에 함께 하느냐, 떠나느냐, 룻과 오르바, 이 두 사람의 행보가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경우에라도, 룻처럼, 회당 장 야이로처럼 주님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 인생에 해답을 제시하실 것이요, 궁극적으로 달리다굼의 기적으로 우리 인생을 성대하게 하심을 믿기를 바란다.
 
▷신대원(신학대학원) 시절로 기억하는데, 참 가진 것이 없고 어쩌면 미래가 기약할 수 없는 참 암울한 한 시간에 선상에 섰던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 나름 주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했던 기도제목이 있었다. 그런데 정반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때 제마음의 당혹감 때문에 어찌할 줄 몰랐다. 제 마음속에 드는 마음은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신대원 안에 ‘소래교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3일 금식하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가 없는 시간은 그 시간에 소래교회에 나가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데, 너무 사람이 힘이 들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 것 알지 않는가? 과장된 표현이 아니고 그 예배당의 차디찬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데, 한 마디도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너무 힘이 드니까 그냥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도 어찌 되었던 강의가 없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 시간을 지키는데 3일 금식이 끝나는 가운데 주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찬송을 떠올려 주셨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 되는 것” 사실 그 기도를 드릴 때, 제 마음은 살고 싶지 않았다. 제가 신앙인이라, 차마 죽고 싶다는 표현은 못하더라도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이 찬양을 주시는데 제 마음에 “하나님, 어이하면 내 인생에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이 저에게 살 의지를 주셨다. 그 이후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인도하심, 더 좋은 것으로 선대하셨던 마치 달리다굼의 기적, 이제는 끝이라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던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내 삶 가운데 기적 같은 삶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에 등장하는 야이로를 보면, 딸아이가 죽었다는 소식 외에 야이로는 주님 앞에 어떤 간구를 드렸다는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저는 생각하건데, 아마 야이로는 더 이상 기도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죽었다는 비보 앞에, 그 죽음의 실체를 목격한 이 상황 앞에, 무엇을 기도하겠는가? 그냥 주님 앞에 곁에 매달린 것 외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 시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끙끙 앓았던 그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마치 구하지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새 일을 행해 주셨다는 그 고백처럼, 야이로에게 동일한 달리다굼의 기적을 허락해 주신 줄 믿는다. 말씀을 맺겠다. 우리 신앙 성숙에 여부와 상관없이 마치 기도가 거절 당하는 상황 속에 놓이게되면 누구나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끼고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게 된다. 그리고 또 믿음으로 구하고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정반의 시간으로 흘러갈 때, 그 낙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이로처럼 절망 속에도 낙심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머물게 된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해 주실 것이다. 달리다굼의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런 표현을 용서하세요. “좋은 말 할 때, 주님께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는 심정으로 여러분, 예배의 자리에 나와 주님과 함께 하시길 바란다. 낙심이 되어 한 마디 기도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의식적으로 성경 말씀을 펼치고 내 곁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살 길이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 곁에 붙어있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요, 우리 주님께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길이심을 믿어야 한다. 지금도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며 달리다굼의 기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하시길 축복한다.
 
♣요약
우리가 주님 앞에 믿고 구했던 간절한 기도가 때로는 거절당하고 더 이상 절망할 수밖에 없는 낙심의 때를 맞이해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 곁에 머무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며 우리 인생 가운데 해답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달리다굼의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며 세상이 원하는 정답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해답으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서 세상일에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 주님 곁을 지켜서 달리다굼의 기적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의 앞서 갈 길을 인도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 돌리며 9월 26일 섬김을 위해 더욱 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헌신해야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8월 28일)
제목: "믿음 보고의 근거"
말씀: 로마서 8:26~29
대표기도: 손문수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로마서 8:26~29,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오늘 찬양대 찬양 어떠했는가? 제가 가을 사역을 앞에 두고 특별히 기도했다. 이 찬송은 제가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찬송이다. “이 육신 쇠하여!!”~~♪ 이 찬송은 귀한 일 있을 때 부른 찬송이다. 오늘 저도 믿음 보고를 드리는 것이다.

 
오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주님의 진심이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란다. 제가 지금 믿음 보고에 근거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드릴 텐데, 지난주일 날에 신앙의 역사는 우리 삶의 흐름이 연대기처럼 그것만이 신앙의 역사가 아니고, 믿음 보고가 있는 소위 신대기, 믿음 보고의 역사가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삶의 역사는 믿음보고의 두께와 신앙의 역사는 비례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다보면 태산 같은 장애물들이 많다. 고난의 골짜기도 있다. 어떤 때는 집채만 한 파도가 우리를 휩쓸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럴 때 어떤 식으로 신앙의 방향을 받아야 할 것인가? 오늘 주님이 제게 깨닫게 하신 것을 여러분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란다. 지난 주간에 저희 교회는 가을 사역을 앞에 놓고 교역자 수양회를 했다. 교역자 수양회에서 나눈 것 중의 하나가 앞으로 이 미래의 시대는 데이터의 대항해 시대가 올 것이다. 데이터의 대항해 시대, 우리가 데이터의 대항해 시대에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의 삶에 항로를 열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열어가야 할 것인가? 사랑의 교회는 44주년이 지나고 이제 앞으로 5년 동안 사랑의 교회 희년을 맞이한다. 희년 맞이할 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나? 를 놓고 기도를 했다. 앞으로 50년, 희년을 향한 믿음 보고 대 항해를 해야 할 때, 믿음 보고가 믿음의 대로가 될 줄 믿는다. 대로(大路)는 큰 길이라는 뜻도 된다.
 
▷희년을 향한 믿음 보고의 대항해, ‘믿음 보고 믿음 대로’.
-그러니까 믿음의 큰 길을 내는 것이다. 대신 믿음 보고를 하면 이 내용은 대로가 그냥 큰 길도 있지만 믿음대로, 의존 명사가 되어서 믿음 보고는 믿음대로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믿음의 항로를 통해서 믿음의 보고를 하면 우리 삶이 새로워지고 거룩한 혁신을 가져올 것이다. 오늘 그래서 로마서 8장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반드시 인생의 여정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는 줄 믿는다. 주중에서 수양회가 있는데 미래 학자들과 함께 했는데 앞으로의 사회는 대 항로를 걸어갈 것이다. 데이터 대항의 시대가 올 것이다. 오늘 로마서 8장 26부터 29절의 말씀, 우리 인생 가운데 믿음의 항로를 개척해서 우리 앞에 골짜기와 장애물과 큰 파도가 있다할지라도 이것을 한 결 같이 항로를 개척하고 살아가야 하는 근거가 무엇일까?
 
*로마서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다 알듯이, 이 구절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베스트 성경구절 5, 안에 들어간다. 로마서 8장은 얼마나 귀한지, 성경의 노른자위 중에 노른자위이다. 얼마나 중요한지
 
▷마르틴 루터 킹은 ‘성경이 불타더라도 로마서 8장만 불타지 않으면 괜찮다’고 했다.
 
8장 가운데서도 28절은 빛나는 노른자위, 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제가 묵상하면서 지난 오랜 제자훈련과 접목이 되는 것 중에 생각이 나는 것이 무엇이냐면, ‘아, 내가 주님 앞에 믿음 보고 없이는 살아올 수도 없었고, 믿음보고 하지 않고는 사역을 할 수 없었는데, 또 우리 성도들과 함께 믿음 보고 없이는 신앙생활 못했을 것인데, 우리 신앙의 역사는 믿음보고 신대기가 되는데, 이 로마서 8장을 통하여 저는 우리의 삶에 믿음보고를 할 만큼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동원 되셔서 우리의 인생이 가치가 있는구나!’라고 묵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먼저 본분의 기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인생의 항로를 개척하고 우리의 항해를 해야 하는데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이다.
 
*로마서 8:26,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6절에 알지 못하나,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그러니까 우선 기본으로 저와 여러분은 알지 못하는 것과 아는 것 사이를 걸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알지 못하는 것 아홉 개와 아는 것 하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우리가 얼마나 알지 못하는 존재인가? 바로 앞의 일을 알지 못한다. 바로 앞의 일을 안다면, 우리가 사고를 당할 이유가 없다. 1분 뒤를 안다면 교통사고가 날 이유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인생이다. 저는 그 요즘 성도님들이 “목사님, 이게 좋습니다.” 등등 하시지만, 제가 요즘 눈이 좀 안 좋다. 눈에 좋은 것이 무언지 모르겠다. 여러분 속에 있는 장기 등을 잘 알 수 없다. 모두 좋다고 먹는데 사실은 우리가 내장에 좋은지 안 좋은지를 잘 모른다. 그 미국의 농구 선수 가운데 유명한 커비 브라이언트가 있는데, 최근에 그가 헬리콥터 타고 가다고 딸과 죽었다. 너무 안타깝지만 그가 일 분 뒤를 알았다면 안 죽었을 것이다. 여러분, 아내인 여러분 남편이 결혼 전에 비교하면 남편이 이렇게 달라질 줄 알았는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고 하더니 결혼 후에는 손에 물 안 묻게 고무장갑 끼라고 한다. 남편 여러분 아내가 결혼 전에는 단정하게 꾸미고 다녀서 결혼 후에도 단정할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나니 집안이 청소가 안 되었고 ‘어떻게 이렇게 청소를 안 할까?’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아는 것이 있다. 우리가 무얼 아는가? 우리가 알거니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우리가 안다. All things, All together. 분리함이 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어떤 정점 중에 하나가 우리는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력과 능력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덮어가지고, 예수님의 의로 그걸 믿는 믿음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벽이 아니라, 문이 되는 것이다. 죄 형벌이 아니라, 영광의 궁전에 육신의 장막을 벗고 입성하는 것이다. 이걸 안다. 모세는 이것을 알고, 히브리서에 보면,
 
*히브리서 11:26,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 앞에 집채만 한 파도가 덮쳐도 이겨내는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본다고 한다. The day of the Word! 마지막 그날, 우리는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다. 우리는 아는 것,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모른 것에 비하면 많이 모른다. 아는 것이 모른 것에 비하면 적다. 그런데 이런 삶에 여정 가운데 우리가 끝까지 소위 믿음 보고의 두께를 가지고 인생의 항해를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동원 되셔서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를 붙잡으시고 인도하시는 은혜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보고를 갖는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 보고의 근거를 갖는가?
*로마서 8:26a,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태산 같은 장애물이 있어도 믿음보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령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때문이다.
 
l.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다. 너무나 연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감기하나, 코로나도 제대로 못 이기는 연약한 존재이다. 아니 우리는 바울이 고백한 대로 영적으로 너무 연약한 존재이다. 로마서 앞부분 7장으로 보면,
 
*로마서 7:24,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예수 믿는 바울 같은 사람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왜 연약한가? 말씀을 받았는데도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좌절도 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어떤 스트레스도 있다. 동시에 비겁한 존재이다. 베드로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수석 사도로서 그가 무얼 아는 것 같이 큰소리도 쳤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큰 소리를 쳤다. 모두가 주님을 버리더라도 내가 결코 버리지 않고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해놓고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죽음의 공포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비겁한 존재이다. 그런데 연약하고 비겁한 존재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무지한 존재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무지한 존재이다. 잘 모른다. 특별히 기도가 중요한지 모르지만 무슨 기도가 좋을지, 어떤 기도를 해야 될지, 그걸 잘 모르는 무지한 존재이다.
 
우리가 다 바라는 대로 다 응답해 주셨으면 여러분 큰 일 날 일이 많지 않은가? ‘저분과 결혼하게 하옵소서!’ 만약 그랬다면?~~엘리야 같은 능력의 선지자도 자기가 번 아웃 되고 싶다고 하니까 열왕기상 15장에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한다. 생명을 거두어 가면, 그게 올바른 기도도 아니고, 최선의 기도도 아니다. 만약 엘리야가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면 엘리사도 못 키웠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도하면 불 말과 불 병거의 기적도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무지한 존재이다. 무엇이 최선의 기도인지, 무엇이 우선순위의 기도인지, 어떻게 하면 가장 응답받을지를 잘 모른다. 히스기야 같은 왕은 좋은 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너 이제 와라, 하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저 더 있고 싶습니다.” 라고 열심히 기도해서 15년을 더 허락 받았다. 그런데 그게 자기는 최선의 기도인 줄 알았는데 히스기야도 그 15년 사이에 사고치고, 특별히 그 히스기야 죽고 난 다음에 열두 살 므낫세가 왕이 등극했는데, 성경 기자는 므낫세 때문에 남쪽 유다왕국이 다 망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열왕기하 23장에 보니까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해서 그것 때문에 남쪽 유다왕국이 망했다고 한다. 차라리 15년 더 안 살고 그냥 하나님 부르실 때, 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무지해서 잘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연약할 때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보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8:26c,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27,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는 무지하고 비겁하고 연약한 존재인데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올바른 기도를 하게 하시고 특별히 성령의 생각을 하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로마서 8:5,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여러분들의 생각이 성령께 집중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성령께 생각을 의탁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생각을 성령이 장악해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보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이 저에게는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 되었던 것이 영적을 깊이 있는 찬양들이었다. 이 찬양들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공간이동을 하게 성령을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되었다. 우리가 9월 26일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하겠다고 했듯이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데 우리 한국교회는 어려운 교회에 빚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성령께서 기도하는 중에 주신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보고 하도록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무엇인가? 어떻게 도우시는가? 올바른 기도하게 하실 때, 성령을 통하여 올바른 기도를 하게 하시는데, 성령 충만한 찬양을 통하여 공간 이동을 통하여 육신의 차원에서 성령의 차원으로 올라감으로 믿음의 보고를 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게 한다.
 
*로마서 8:28(NASB),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바로 여기에 주어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
God causes all things to work together for good to those who love God...
-성부 하나님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주어가 되신다. 하나님이 주어가 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시기에 믿음 보고를 할 수 있다. 우리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전지적 하나님에 대해서,
 
*로마서 11:33,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지식은 완벽하시고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하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주어가 되셔서 성부하나님이 전지적 능력이 되셔서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2:24-25,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심지어 우리의 맘속에 모든 것들을 다 아신다. 모든 것, 주님은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입고 오셔서 백 프로 우리를 다 아시는 것이다. ‘오늘은 주님이 모르겠지’ 하는 그 모든 것도 주님이 다 알고 계시는 것이다. 성부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마음의 상태, 마음에 아픔, 관계, 원인, 경험, 모든 마음의 욕망, 모든 삶의 수수께끼, 모든 감추어진 것과 미지의 것을 하나님은 다 아신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 보고를 할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시고, 다 아신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다 아시는 것에 대한 자기 인생이 아픔과 슬픔과 모든 것들을 토로하는 내용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가? 다윗의 인생을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는 인생의 무명의 설움을 알았다. 저 베들레헴 골짜기에 목동으로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동이었다. 골리앗 같은 자와 전쟁을 해야 했을 때, 담대하게 나갔지만 속은 어떠했겠는가? 속이 얼마나 떨렸겠는가? 다윗은 잘 나간다고 했지만 다윗을 죽이려고 장인어른이 3천 명의 살인 특공대를 조직해가지고, 킬링 특공대를 조직해서 다윗을 끝까지 추적해서 죽이겠다고 하는 기가 찬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윗에게는 아히도벨 같은 모략 가들이 그리고 그 잘난 아들이 반역을 하는데 이름도 압살롬이다. 놈, 그 놈이 아히도벨 같은 못 된 인간들과 같이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모략을 다 짜는데, 시편 곳곳마다 토로를 하는데 창자가 터져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창자가 터져 안 죽은 게 다행이다. 뼈가 쇠골이 상하는데 잠을 못 이루는 것이다. ‘마치 나는 밤에 부엉이와 같은, 저 외로운 참새와 같다’고 한다. 그래도 다윗은 어떻게 이겼다. 창자가 터져 죽을 만한 상황 가운데서도 당시 믿음 보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시편 23편에 다윗의 그 아름다운 시가 있지만 정말 멋진 시는 139편이다. 거기에는 이렇게
 
*시편 139:1-3,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그러니까 완전히 뒤집어지는, 완전히 드러누워야 할 만 한 하고 완전히 뒤집어쓰고 고통 해야 할 그 상황 가운데서도 다윗이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다 아시니, 주님이 다 아시니’, 이다. 진짜 고난당하면 만날 사람이 없다. 진짜 고난당하면 갈 때가 없다. 대단히 유명한 분들이라도 갈 때가 없고, 그 순간 어려운 가운데서 믿음 보고를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 아시게 되면 우리의 삶을 전적 위탁할 수 있다. 놀라운 일이다. 내 삶의 실오라기 하나라도 주님께 다 맡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자 사자는 가까운 사람, 남편, 아내, 자식, 가까운 사람들과 영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죽자 사자 하는 그런 사람들과 하나님께 전적위탁 되고 영적으로 독립하면 여러분은 믿음 보고를 할 수 있다. 대신 하나님께로는 독립하고 죽자 사자 가까워지면 어마 무시한 상처를 받는다. 인간은 그렇게 되어 우리는 주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경거망동 하지 않고 자기 주제파악이 확실하고 주님이 다 아시는 것 이것 때문에 우리는 믿음 보고를 할 수 있는 줄로 믿는다. 주님이 다 아심을 바울이 이것을 깨닫고, 바울의 독특한 언어습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울은 곳곳마다 ‘내 주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 다 아시는 것을 인정한 가운데서 고백한 그 자기 표현은 그 중의적 함의가 포함되어 있다. 여러분, 종이란, 원래 과거에 벤허 영화에서 종들이 난파 배에서 노예가 노를 젓듯이 진중하고 고생하고 노예처럼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벌레와 노예와 같다고 하는 종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 아시면 구약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아무나 하나님은 종이라고 말을 하시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 아무에게나 붙이지 않는다. 누구에게 주시는가? 모세 같은 사람이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종, 모세’ 종이라는 말을 붙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모세, 여호수아, 갈렙, 다니엘, 이 정도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하나님이 다 아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이지만, 하나님의 순종해야 할 서번트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역을 맡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영광스런 사역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잘 조합이 되고 잘 이렇게 서로 연계가 되면 자기 주제파악이 확실하고 이 주제파악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믿음 보고할 수 있다. 우리가 믿음 보고 할 수 있는 근거들을 우리가 확인 하는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과정 과정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다. 선이 무엇인가? 평온하고 안정되고 축복되고 그것도 물론 선이기도 하지만 핵심은 오늘 29절에 나와 있다.
 
III.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로마서 8:29a,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성부 하나님이 다 아시는 것을 기초로 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믿음 보고를 하게 되는데, 그 믿음 보고의 목표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최고의 선인줄 믿는다. 이게 key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환경들을 통하여 그 환경들을 가지고 주님을 더 닮아가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선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로 안 좋다. 아니네,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을 더 깊어지고, 주님을 더 신뢰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선한 것이다. 반대로 세상 적으로 잘 나가면 멋있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을 우습게 알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좋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선한 것이 아니다. 죄송하지만 돈이 억수로 많아가지고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좋지만 돈이 억수로 많아가지고 주님을 닮아가지 아니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니다. 돈이 억수로 많아지면 주님을 닮아가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일수록 조심하다.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 인간은 할 수 없다. 인간은 주님을 못 닮아간다. 그런데 태산 같은 장애물과 집채만 한 파도가 있어도 우리가 그런 가운데서도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믿음 보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이나 다니엘을 보라, 그 고난의 주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울왕 같은 사람은 무명의 사람이 이스라엘의 초대 통일 왕이 되어서 왕이 되고나서 초심을 잃었다. 왕이 되고나서 자기 명예만 지키려고 하거나 주님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버린 것이다. 왕이 된 게 결국 안 좋다. 우리는 신앙에서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 받은 믿음은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으로 승화가 되어야 한다. 이걸 신학적으로 승화는 쉽게 말하면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은 반드시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과 연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 얻는 믿음은 내 운명이 바뀌는 것이지만,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내 인격과 삶이 바뀌는 것이다.

-운명과 삶이 해결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깨닫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신앙의 여정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
 
*로마서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8:29b,-우리의 신앙은 믿음으로 믿음이 이루어진다. (From faith to faith) -구원 얻는 믿음이 주님을 닮아가는 믿음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모든 주의 권속들, 구원 얻는 믿음으로 승화되길 바란다. 너무 중요한 것이다.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부류가 있고, 또 하나는 닮아가기 보다는 그리스도께 감탄만하고 구경만 하는 사람이 있다. 주님을 닮아가려고 하는 찐 믿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밖에서 구경만 하고, 우리는 감탄만 하지 않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하는 찐 믿음 보고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 결과 29절 뒤에를 보면,
 
*로마서 8:29b,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게 되면, 우리 주님이 제일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는 나중에 성화 될 때, 가족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같이 연약하고, 비겁하고, 무지한 자들이 너무나 영광스럽게 나중에 주님의 가족이 되는, 너무나 놀라운, 예수님처럼 꿈을 갖고 살도록, 그렇게 만드신 이 귀한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 오늘 이 은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넘치기를 원한다. 이것을 바울이 알아가지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뭐라고 애야기 하냐면,
 
*갈라디아서 4:19,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히브리서 7:25,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저는 제가 목회자로서의 꿈이 있다.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주님을 닮은 권속들이 이 본당을 가득차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정리하겠다. 우리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를 걸어간다. 그런데 그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이지만 우리는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전지전능 하신 것과 성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이 참 삼위일체 총동원 되는 하나님을 믿어서 우리의 삶의 나침반을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 어제 안수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믿음보고에 대해서 대화를 하다가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본인은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일기를 쓴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일기가 아니라, “믿음보고 일기를 쓰겠습니다.” 라고 했다. 또 다른 안수 집사님은 칭찬릴레이, 요즘 첼린지 릴레이를 하자고 하신다. 우리는 믿음 보고 감사 릴레이를 하면 어떻겠냐고 하니까, 우리 교회 게시판을 ‘믿음 보고 게시판’으로 바꿀까 싶다.
 
9월 26일 섬김의 날 한국교회 섬김의 날 이렇게 그 우리교회 ‘기드온’이라고 있는데 나이가 좀 들어도 계속 청년이다. 이 분들은 믿음보고를 하신 것이다. 특별히 이번에 산간벽지의 목사님이 오시면 우리 기드온에서 롯데 타워에 올려 보내드리겠다고 하셨으며, 어제 아침에 시골에 있는 목사님 중 심방 잘하시고 목양 잘 하실 수 있도록, 우리 교회가 이벤트로 ‘스타리아’ 한 대를 드리겠다고 하셨다. 계획이었고 원래 한 대였다. 새벽예배 마치고 그 차는 두 대는 되면 좋겠다고 했더니, 어제 오후에 40대 젊은 집사님 부부가 우리 시골 교회를 생각하면서 ‘스타리아’ 한 대를 기증하신다고 했다. 이제 제 믿음보고이다. 이왕 주님 섬기는 것 주님 기뻐하시는 성령님이 도우시는 믿음 보고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부 하나님께, 성 삼위 하나님께 믿음 보고할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90년대 중반에 저는 처음 평양을 갔는데, 저보고 나와서 간단히 미국에서 나왔으니 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그 봉수교회 목사님이 이 성봉 목사이신데 나름 제가 볼 때는 신앙인이었다. 모두들 가짜라고 하는데 우리는 들어보면 안다. 왜 진짜인지는 우리끼리 통하는 뭐가 있다. 그것을 말하면 북한에서 알면 안 되니까, 찬양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양을 하는데 우리 언젠가 이런 찬송을 할 날이 오리라는 그런 뜨거운 마음이 생겼다. 여러분들에게 믿음보고 하는 것이다. 모든 형제, 태산 같은 장애물,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온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이 소원은 무엇이냐면,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성부 하나님은 다 아시고, 성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목표가 되면 우리는 반드시 믿음보고 할 줄로 믿는다.

요약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하고 비겁하고 무지한 우리를 도와주실 때, 믿음보고의 축복이 됨을 믿으며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확신할 때, 하나님을 절대주어로 전적으로 의탁하고 우리 교회 섬김의 날 9월 26일을 민족의 항로로 인도하여 주시길 간구하며,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따라 온전히 섬겨서 믿음 보고의 근거가 되기를 소원 한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