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비전새벽예배(주수 2022년 8월 27일) 제목: “초막절의 은혜를 기대함” 말씀: 느헤미야 8:13-18 대표기도: 강동헌 안수집사님(예배부 헌금 총괄팀장) 말씀읽기: 최윤원(초등부-오빠), 최혜원 어린이(유년부-동생) 찬양인도: 예배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느헤미야 8:13-18, 13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 할지니라 하였고. 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 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 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 ▶오정현 담임 목사님 -주한 이스라엘 관저에서 ‘사바티노(Sabatino-토요일, 안식일)’라고 안식일 만찬을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깜짝 놀란 게, 주한 이스라엘 대사, ‘아키바 토로’라는 대사이다. 그런데 그 미국 사람이다. 뉴욕에서 대학을 나오고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분이다. 누가 옆에 거실에 앉아 있는데, 완전히 중동 여자 분이 앉아 있었다. 보니까, 부인이 예맨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얼굴은 중동 사람인데, 제가 중동 여인하고 부부로 사는데, 미국출신과 사는데, 컬쳐, 문화 갭이라는 것은 없냐고 물었다. 신앙의 갭도 없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그런 건 없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했더니 지역도 다르고 태어난 곳도 다르고, 자란 것도 다르고 다른데 어떻게 결혼해가지고 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더니 “우리는 신앙이 같고, 같은 성경을 쓰고, 같은 신앙교육을 받고, 그 다음은 중요한 것은 같은 신앙의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신앙의 문화가 같아서 우리는 갭이 없다 했다. 오늘 우리 아이들 잘 읽었고, 찬양대가 기쁘게 찬양했는데, 구호를 외쳤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복음의 능력으로 이기자! 이기자! 이기자!~” 우리교회는 지금 찬양대가 각 부서별로 토비새에 나와서 모두가 다 같이 해서 수백 명이 찬양을 하는 것이 좋은 문화이다. 처음 우리 교회 오신 분은 이게 뭔가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과 기대와 소원들이 모아져서 이렇게 찬양하고 주님 앞에 예배 올려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9월 27일 한국교회 섬김의 날이 간단한 행사가 아니고 이것이 한국교회를 위한 섬김, 한국교회에 대한 방향에 대해서 사랑의교회가 섬길 수 있는 전형적 문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이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는 것처럼 그렇게 주욱 이어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도 축복하시고, 사랑의교회 사역에도 기름 부으시고, 한국교회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잘 아시듯이 이스라엘은 3대 절기가 있다. 첫째는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 우리로 말하면 구원 받은 날이다. 우리의 과거가 예수님의 피로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로 문설주에 바를 때, 구원을 받는 것처럼, 유월절이다. 둘째는 오순절이다. -오순절은 칠칠절이라고 한다.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7x7절이라고 해서 49일이 지나 50일째 되는 날, 오순절을 지킨다. 영적으로 오순절은 성령의 강림이 있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 교회가 태동되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들을 축복하시고, 지금 인도하시고, 지금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월절이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를 기억한다면 오순절은 지금 우리를 임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셋째는 초막절이다 –초막절이 이스라엘 3대 절기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절기였다. 가장 큰 절기였다. 왜 초막절이 되면 7일 동안 어디든지, 장소, 공간만 있으면 거기다가 무얼 짓느냐면, 얼기설기한 좀 원두막 비슷한 완벽하지 않는 그런 어떤 나뭇가지를 가지고 집 안에, 성전 뜰, 곳곳마다. 가는 곳마다. 빈 장소에는 이 초막절을 기념하기 위한 장막을 만들어서 거기서 일주일 동안 같이 생활하고 거기서 자고 그렇게 했다. 무얼 기념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광야 그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붙잡아 주시고 동시에 이 초막절에 중요한 것은 장례를 예표 하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생애가 어떻게 될 것이다. ‘앞으로 너희들은 새 예루살렘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대한 장례에 대한 예표가 초막절이다. 그리고 초막절을 일주일 동안 보내는 동안에 거기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초막절을 통하여 이 땅에 사는 것이 그 가운데 어마한 부자들도 멋진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도 원두막에서 그 밑에서 자면서 ‘아, 내가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이 땅은 내가 영원히 거할 곳이 아니고 여기는 술래 길이고 임시 처소이고, 여기 초막처럼 임시 처소이다.’로 그렇게 우리가 인생이 그러한 인생이다. 장차 나타날 새 예루살렘, 하나님 나라의 예표로 초막절을 통하여 확인하게 되는 중요한 뜻이다. 그래서 ▷유월절은 과거에 주신 축복, 오순절은 지금 임재하시고 우리를 붙잡으시는 은혜, 그리고 초막절은 앞으로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절기가 언제부터 시작 되냐면, 나팔을 부는 것이다. *민수기 29:1, 1 일곱째 달에 이르러는 그 달 초하루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나팔 불고 보름 지나서 초막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 설교 마치고 나팔을 불 것이다. 어떻게 불지는 나중에 보자. 이 나팔을 불고, 그 숫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불 것이다. 절기가 나팔 절이라 할 정도로 나팔을 부는 것이다. 이제 알에이 토레이 같은 그런 우리 예수원의 원장님은 한국교회가 그 유월절 부활절, 오순절, 성령강림절은 다 잘 지키는데 왜 초막절을 안 지키는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초막절은 7월 15일 경인데 그것은 유대인의 월력이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9월과 10월 사이이다. 그래서 9월 26일 이때가 초막절 비슷한 시기이다. 그래서 굉장히 그렇다. 지난번에 9.26, 하면서 ‘왕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에서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한 예표가 되는지 말씀을 드렸었다. 오늘은 ‘초막절의 은혜를 기대함“ 그렇게 해서 여러분은 다시 스가랴를 보자. *스가랴 14:16,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우리는 유대인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서 이와 같이 초막절을 지키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면 초막절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의 예표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여호와 이레 기대하면서 미래 주실 축복을 기대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초막절을 지키느냐이다. 오늘 느헤미야 13-18절까지 봤다. 느헤미야 8:13-18, 13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 할지니라 하였고. 15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 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 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 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17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 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오늘 한국교회 섬김의 장로님 부부 16분이 마음의 다짐을 하님께 올려드릴 것이다. ▶질문1 --한국교회의 섬김의 날이 무엇인지를 질문을 하겠다. 먼저 *김동현 장로님-영적 서울 수복, 서울 수복이란 9.28 서울 수복을 통하여 영적으로 영토가 확장되었듯이 9.26 섬김의 날을 통하여 영적 영토가 동서남북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박원주 권사님- 부부가 하나 되는 날이다.- 목사님께 방을 내어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질문2-한국교회 섬김의 날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가? *이윤 장로님- 곧 평양에서 특새 할 것 같다. *구환경 장로님-포괄적 차별 금지법이 폐지될 것 같다. *원영태 장로님- 모든 한국교회 성도가 배가 될 것 같다. ▶선포식 세레모니를 하겠다.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믿음의 신대기!, 거룩한 재 헌신!, 부흥의 활성화!, 각성으로 대전환!. 할렐루야!!!!~ ♣요약 우리는 9우러 26일 혼연일체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본을 붙잡고 순종하여, 정성껏 한 마음으로 모든 교회를 섬기는 헌신의 날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백성들이 말씀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였다. 다음날, 그날은 절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족장들이 다시 모여 에스라가 강해하는 것을 들었다. 이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뭇 백성의 족장들과 함께 에스라에게 왔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의 말씀 안에서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이 스스로 배우러 온 것은 백성들을 가르칠 자질을 갖추기 위한 것이다. 이제 이들은 시험을 통하여 자신들의 부족과 에스라의 뛰어남을 전보다 더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둘째 날에는 배우는 자로서 겸손하게 에스라의 발아래 앉았다. 백성들은 율법에서 자신들의 의무를 깨달았을 때, 즉시 말씀에 순종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었다. 백성들의 족장들이 7월 21일에 율법의 교훈을 받으려고 왔을 때, 에스라는 그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그 달의 절기에 관한 율법을 읽어 주고, 나머지 백성들에게는 초막절에 대한 율법을 읽어 주었던 것 같다. 그들은 율법 책에서 초막절에 관한 명령을 발견하였다. 이 초막절은 유대 민족이 광야에서 보냈던 장막 생활의 기념이며, 우리가사는 이 세상에서의 장막 생활의 모형이다. 열국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에 대한 예언이 이 절기의 비유에 들어 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도성이 없으므로 결국 초막절을 지키려온 것이다. 백성들은 스스로 나무 가지를 베어 와서(예루살렘 주민은 감람산에서 나무 가지를 가져왔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였다. 이 명령에 따라 절기 의식을 지켰다. 그들은 의식을 준수했다. 무리가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 거하니.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초막을 성전 뜰에 세우고, 집을 가진 사람들은 지붕 위에나 뜰에 장막을 짓고, 집이 없는 사람은 길가에 세웠다. 그들은 이 절기 기간 내내 축하하며 즐거워하였다. 절기 동안 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 낭독과 강론에 참석하였다. 이때는 에스라에게서 받은 것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라 성 밖으로 나아가 나뭇가지를 취하였고, 백성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여호와께서 명하신 절기를 지켰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기쁜 마음으로 맡은 바를 성실히 수행했음을 가르쳐준다.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24일) 제목: "작은 섬김, 그리고 하나님 나라" 말씀: 룻기2: 8~9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최성현 부목사님 ---------------------------------------------------- *룻기 2:8~9,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
▶개강이 다가오고 있다. 방학을 잘 보내셨나요? 지금 교역자들은 가을 학기를 준비하는 개강수련회에 또 9.26 준비를 위해서 한창 수양회 중에 있다. 다행히 이번 수양회는 금식이 아니라서 다들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화면으로 보실 수 있는 것처럼 저는 그다지 내 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목회자이다. 평범하고 평범한 목회자인데 한 가지 내 세울 것이 있다면 남들과는 다른 피부 톤을 내 세울 수 있다. 건강한 색깔을 갖고 태어나서 중고등시절 아무리 아파도 선생님은 저에게 얼굴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며 조퇴를 시켜주시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시고 구우실 때 조금 시간을 더 넣으셨는지 특별한 색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이번 여름방학을 지나고 나니 저희 교역자 실에 강력한 경쟁자 두 분이 나타났다. 본인들의 말로는 썬 크림을 깜박했다고 하는데 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까만 목사님들은 처음 보았다. 저도 좀 분발해야 하는 것 같고 정체성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 요즘 성도들 개인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엄청 잘 살고 있는 시대인데 막상 성도님들의 개개인을 살펴보면 그다지 잘 사는 것 같지 않다. 부동산이 어떻다. 주식이 어떻다. 코인으로 대박이 났다. 등등 많은 이야기들이 뉴스에 나오고 있지만 막상 그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겉으로는 커졌고 겉으로는 화려해졌고, 뭔가 된 것 같은데 막상 우리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여전히 힘듦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는 엄청 부흥했다. 또 한국교회는 엄청 커졌는데 성도님들의 신앙은 자라나지가 않는 것 같다. 성장과 달리 성숙과 깊어짐이 그리고 신앙생활의 즐거움이 요즘 특히 보이지 않다.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전부이다. 백화점 다녀오듯, 학원을 다녀오듯, 마트에 다녀오듯, 다녀온 것이 전부인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늘 총 다섯 덩어리의 이야기를 룻기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특별히 지금 다락방에서도 개강하면, 다락방 룻기를 다루게 될 텐데, 지난 개강 전에, 방학 전에 다루었던 룻기를 기억하면서 앞으로 될 룻기를 기대하면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첫 번째 –룻기는 어떤 성경인가? -룻기는 참 평범하지 않은 성경이다. 일단 룻기의 주인공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아이구! 대답 잘한다. 여자이다.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가 룻기이다. 그렇다면 성경 66권 중에서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곳이 한권이 더 있다. 어떤 성경이 더 있는가? 바로 에스더이다. 성경이 참 많이, 많은 이야기들이 구성되어 있고,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단 한권으로 배정한 성경은 에스더서와 룻기가 전부이다. 당시의 문화를 생각해볼 때, 지금부터 수천 년 전을 생각해볼 때, 여성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의 책을 구성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룻기를 읽어보면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좀 횃갈린다.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룻기를 찬찬히 묵상하다보면 룻기의 시작은 나오미로 시작한다. 룻기의 마지막도 나오미가 아기를 안고 축하받는 일로 끝이 난다. 어떤 사람들은 룻기를 룻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나오미의 이야기이다. 또 어떤 학자는 한발 더 나아가서 이것은 나오미의 이야기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볼 때 지금이야 주인공이 둘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매우 흔하지만 당시를 생각해 볼 때는 흔치 않은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룻기가 이상한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다. 어떤 게 있는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사이가 너무 좋다. 이보다 더 이상한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할지 모르겠다. 추석이 다가오고 시어머니의 전화 벨소리만 들려도 받지 않을까 하는 우리와는 달리 여러분은 아이고 이 성경에서는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너무 좋은 관점으로 등장한다. 정통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룻은 남편을 잡아먹은 며느리이다. 그리고 전통적 관점으로 본다면 나오미는 자기의 아들을 가지고 룻을 평생 저당 잡는 시어머니이다. 그런데 룻기에서는 사이가 너무 좋게 등장한다. 심지어 3장을 보면, 다들 무심하게 넘어가지만 3장으로 보면,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와 함께 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이게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어서 그렇지 요즘 우리말로 한다면 시어머니가 남자 꼬시는 방법을 며느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이상한 구성이 흔치않다. 라고 생각한다. 또한 룻기의 배경은 사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기에는 사사시대에 어울릴만한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뭔가 전쟁도 나타나지 않고 타락하거나 고난 받는 일도 없고, 영웅도 등장하지 않고, 영화로 친다면 드라마로 친다면, 크라이막스로 될 만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굉장히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작은 여자들의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다. 고난이 와도 극적으로 해결이 되어도, 오벳이 태어나도, 다윗의 족보가 등장해도 매우 담담하게,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토록 빈번하게 등장하시던 하나님도 룻기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연이라는 표현이 여러분 반복되는 만큼 심심하게 쓰여 진 성경이 룻기이다. 지나치리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성경이 바로 룻기이다. 그렇다면 룻기의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다. 이 평범하지 않은 일반적이지 않은 성경을 통해 두 번째-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창세기를 시작으로 해서 사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삼손 등 뭔가 큰 인물들의 이야기로만 쭈욱 이어져오던 성경이 갑자기 소소한 이야기로 바뀌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성경이 룻기인데, 이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조금 전에 이야기 일인데, 선물을 할 일이 있어서 사플(사랑플러스 서점)에서 어린이 성경을 살펴볼 일이 있었다. 어린이 성경이 종류가 굉장히 많이 있었다. 그림도 예쁘고 편집도 잘 되어 있고 이야기도 잘 쓰여 져 있고, 전문 용어로 글 밥도 매우 적어서 이 책으로 목회를 한다면 우리 다락방 이 순장님들이 다락방을 이끌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순원 여러분!!!, 이렇게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성경은 주요 사건이나 인물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세상을 만드는 하나님, 홍해를 가른 모세, 아들을 바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등, 아이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사건, 구성, 인물로 되어 있다. 마치 일 년 만에 득음에 성공한 이원준, 헤어스타일이 웃으셔야 되는데, 헤어스타일의 최강자 이의수,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썬텐을 완성한 최성현 같은 위인전을 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 저와 아이들도 그렇고 뭔가 요셉처럼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을 멋지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인물이 되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하나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꿀 것이다. 얼마나 귀하고 좋은 꿈인 줄 모른다. 그런데 마음 한 편으로는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고, 성경은 큰 인물을 찾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큰 인물을 만드시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은 훌륭한 사람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고, 뛰어난 사람, 아닌 사람을 구분하시는 분도 아니고, 마치 의사, 변호사, 판사쯤은 되어야 되고 스카이를 나오고, 유학을 다녀오고, 대기업을 취업해야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듯이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일차적인 수준에서 이해하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룻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같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길고도 길었던 노예 생활이 끝나고 죽음의 광야 생활도 마쳤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를 이끌고 들어왔는데, 이제는 무언가 될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모세는 보이지 않고 여호수아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왕좌왕하고 조충우돌하면서 소견의 옳은 대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이 보인다. 애굽의 시대보다 광야의 삶보다 더 엉망으로 살고 있는 자신들을 보게 된다. 이만하면 좀 더 나아진 삶을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흉년 속에 있고 여전히 망한 인생이고 아들도 남편이 없는 인생이고, 또 남편도 자식도 없는 인생이고, 심지어는 잘해보려고 했던 모든 선택이 오히려 망한 것으로 되어가는 즐거움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나오미가 쓰다, 괴로움으로 변해버린 인생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대체 룻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데 나는 그냥 두시는가? 이스라엘이 잘 되면 내 인생도 잘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는 커지고 부유해지고 있는데 왜 나는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와 영웅과 큰일에만 있는 것일까? 내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나에게도 관심이 있을까? 하나님은 나를 돌보고 계실까의 질문이 룻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호소하지만 따뜻하지만 깊고 의미 있는 그런 답을 주시는 것이 바로 룻기이다. “내가 너희를 돌보고 있다. 나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영웅들과 큰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한 영혼 한 영혼에 있다. 나오미와 룻기도 돌보고 있고 또 돌보고 있고 텅 빈 인생도 돌보고 있고 쓴 인생도 돌보고 있다. 아픔 속에 있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잊지 않고 보고 듣고 기억하고 돌보고 있다. 너희도 이 돌봄에 함께 참여하지 않겠니?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지 않겠니?” 라고 하신다. 룻기가 우리의 삶에 주는 따뜻한 주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 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는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세 번째- 하나님이 갚으시지만 누구를 통해 갚으시는가? -목회를 하다보면 좋은 순장님들을 만나게 된다. 교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귀한 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쪼개서 다락방을 섬기고 공동체를 섬기고 어려운 분들을 섬기는 귀한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분들의 섬김과 헌신을 서로 기억해 주면서 서로 돌봐주는 좋은 분들도 많음을 보고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이런 분들의 헌신을 고마워하기는커녕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순장님께서 복주실거야, 하나님께서 도우실거야, 라고 말로 모둔 것을 퉁치는 분들을 보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시는지는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헌신과 수고를 기억하고 복 주실 것이다. 라는 좋은 의미의 말씀이라고는 알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미루는 듯한 그런 말처럼 들려서 마음이 편치가 않을 때가 있다. 순장님 중에 우리 공동체 않에 보상을 바라면서 사역을 하는 분은 하나도 없다. 교회에서 섬김을 하면서 무엇을 바라는 분도 없다. 하나님이 좋아서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또 이 교회를 사랑해서 나에게 주어진 여혼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돕고 섬기고 돌보는 것이 대부분의 헌신이다. 그런데 그 돌봄의 섬김은 하나님을 향해 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향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하나님만 향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섬기고 돌보다 보면 많은 수고와 헌신이 사람을 향해진다. 그런데 그 헌신과 섬김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끝내버리면 그 상황이 참 거시기 한다. 순자님을 통해 헌신하시는 분을 통해 섬김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저이다. 그리고 여러분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같으셔야 하는가? 하나님이 갚으시지만 누구를 통해 갚으시는가? 우리를 통해 서로를 통해 갚아야 한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이런 예를 들어보겠다. 여러분들이 환갑, 회갑이 되어서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자식들이 보상해 줄 것을 바라고 키우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날이 되면 자녀들이 찾아와서 축하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싶고 또 가족이 모여 식사라도 하고 싶고, 케이크도 자르고, 또 당연히 거기에 알맞은 헌금도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자녀가 60, 70의 생일에 와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등을 두드리더니, “어머니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하나님께서 다 갚으실 거에요.”하고 집에 가버린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60년 곱하기 365일을 해서 최소한 21,900대를 때려야 풀리지 않겠는가?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으실 거에요.” 라는 말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이 사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에 말씀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는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는가? 메추라기가 동풍을 타고 오는가? 아침에 일어났더니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가? 물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잘 사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 우리가 있다는 게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돌보신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 돌보신다. 오고가면서 나는 진심의 감사의 한 마디, 또 커피 한 잔, 성의 표시, 그리고 무엇보다 일한 만큼 정당하게 치러지는 월급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방법이다. 룻기가 바로 이런 성경이다. 어려움에 처한 시어머니를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는 룻을 통해 하나님을 돌봄이 나타나는 성경,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는 룻을 돌보는 보아스를 통해 그 돌봄을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이 드러나는 성경, 그래서 나오미와 보아스와 룻기가 서로를 돌보며 이 돌봄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성경이 바로 룻기이다.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께서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돌보는 것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사랑, 헤쎄드, 인애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그 사랑을 의지해서 돌봄을 하는 것, 어쩌면 그 사랑이 다 뭔지도 모르지만 율법에 하나님의 말씀에 고아와 가난한자와 아픈 자와 연약한자와 어린이를 돌보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냥 돌봤던 그 돌봄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이어져 감을 보여주는 성경,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룻기이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은 곧 우리가 돌본다는 의미이다. 네 번째-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 땅에 남겨주셨는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죽어서 가는 곳, 혹은 죽어야지만 가는 곳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천국, 하나님 나라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고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보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제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다 알지는 못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세상을 싹 밀어버리고 다시 창조하는 방법이다. 또 괜찮은 사람만 하늘에서 이렇게 보시면서 괜찮은 사람만 오늘 수요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 정도만 뽑아서 구원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더 쉽고 편한 방법이 분명 하나님께는 있으셨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그것도 33년 동안 죽을 날만 기다리고 계시면서 살고 계시다가 가장 수치(羞恥)스럽고, 가장 고통(苦痛)스럽고, 가장 저주(詛呪)스러운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시는 방법은 사실 생각하기 쉬운 방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그리고 이곳에 살고 계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곳이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곳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를 회복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에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셨는데 예루살렘도 아닌 베들레헴에 오셨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로마가 아닌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그 이후에로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라 주로 갈릴리에 지내시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과 함께 하시더니 심지어는 가장 치욕(恥辱)스런 방법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들이야 마르고 닳도록 들은 이야기이니까 이것이 아무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고 그냥 감사한 은혜로만 다가오지만 왜 하나님이 굳이 이 방법을 택하셨을까? 라고 질문을 던져보면 조금 다른 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를 이 땅에 그대로 남겨두셨다.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편한가? 구원과 동시에 천국에 사는 것이 편한가? 천국에 사는 것이 훨씬 편하다. 죄와 싸울 일도 없고 하나님이 혹시 나를 버리실까 두려워할 일도 없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헤맬 이유도 없고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순간 저를 싹 뽑아서 데려가시면 그 얼마나 편한 인생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 땅에 그대로 남겨두셨다. 구원받은 자들을 다 천사로 만들거나 혹은 힘센 자로 만들어서 예수님의 대리 통치자를 세우고 그들이 악한 자를 심판하고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그대로 남겨두셨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 그 자리에서 이 삶 속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구원하시고 그렇게 구원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는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이 땅에 남겨두셨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오늘 읽은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룻기 2:8~9,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이 본문은 보아스가 룻에게 부탁하고 허락하는 말씀이 들어있는 장면이다.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내 땅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한다. 밭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해 둘테니 마음껏 이삭을 줍고 물도 마시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말해서 공급해서 받으라는 보아스의 말이 이 본문이다. 자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다. 원래 주관식으로 드리려고 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안 될 것 같아 객관식으로 드리겠다. 주관식이 두 가지 이니까 50% 확률을 갖고 있다. 잘만 찍으시면 서울대에 간다. ▷보아스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는가? ⓵번 보아스는 룻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 ⓶번 보아스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룻과 결혼하게 될 것을 알았고, 그래서 오벳을 낳게 될 것을 알았고, 그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어서 심지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것을 알고 다 알고 큰 그림 속에 다 알 고 했다. ⓵번인가? ⓶번인가? ⓵번.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맞히다니. 룻은 그렇다면 룻은 어떤 마음으로 나오미를 따랐는가? 내가 시어머니를 따르면 내가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게 되고 그렇다면 다윗의 할머니가 되어서 성경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오미를 도왔는가? 나오미는 내가 여기서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면 성경에 길이 기억되는 좋은 시어머니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며느리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는가? 보아스는 기업을 무를 차례도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룻을 돌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몰랐다. 룻도 마찬가지이고 나오미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룻이 좋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있으니 그냥 호의를 베푼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율법을 따라서 잘 모르지만 그냥 도와야 한다고 하니까 이삭 몇 개 줍는 것이니까 도왔을지 모른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그냥 작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작은 일이, 그 작은 섬김이, 그 작은 돌봄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간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허락하시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허락하시는 그 일들, 도대체 나에게 이 사람을 붙여주시고 이 상황을 붙여주시는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일들만 붙여주시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봐도 원수 같은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과 그 일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돌보는 것,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이것이 하나님의 돌봄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방향이다. 룻기에는 나름 큰 비중을 가지고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두 사람이 있다. 혹시 누구인지 아는가? 사라지는 인물, 바로 한 사람은 오르바, 또 한 사람은 이름조착 기록되어 있지 않은 아무개라는 친척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이라고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성경의 룻기에서 가장 공감이 되는 사람들이다. 아무개라는 사람은 너무 인간적이다. 법적인 순서로 따지면 무엇을 책임져야만 하는 사람이 이 아무개이다. 처음에는 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룻을 젊은 여인을 아내로 취할 수 있다는 말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기업을 묻겠다고 했다가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올 수 있다고 하자 바로 취소해 버리는 사람이 바로 아무개이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얼마나 당연한 선택인가? 오르바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떠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먼저 고향으로 가라고 한다. “더 이상 우리가 함께 살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가업을 이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 것도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니 너희들도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제가 오르바였더라도 알겠다고 이야기 했을 것이고, 제가 오르바의 어머니였다면 나오미에게 백번 천 번 고맙다고 절을 했으며 제 딸 오르바를 데려갔을 것이다. 오르바나, 아무개나, 둘 다 너무 인간적이고 너무 합리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룻기에서도 이 사람을 정죄하는 뉘앙스를 볼 수 없다. 그런데 꼭 우리들이 모습처럼 느껴진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 악하지도 않는다. 찾아오는 이들을 굳이 외면하지 않지만 알고도 손해를 보려하지 않는다. 굳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이정도로는 충분해 라고 생각하면서 따라가는 사람이 우리이고, 오르바이고, 아무개라는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들, 돌봄을 실천하는 사람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을 돌봄을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엄청난 큰 손해, 엄청난 큰 결심이 아니라, 삶에 순간순간 찾아오는 작은 결심과 작은 섬김을 택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성경의 역사가 진행되어 오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다. 물론 제가 시어머니를 모셔야겠디고 결단한 룻의 결심을 작은 결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룻을 돌보겠다고 하는 보아스를 작은 결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룻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을 때, 보아스의 그 멋진 모습을 별거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다. 제가 작은 결심이라고 드리는 이유는 자신들의 섬김과 헌신과 돌봄이 만들어 낼 그 큰 결과를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작고 작은 소소한 결단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작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다. 섬김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방법으로 사용되었을지 그 섬김이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루어갈지 알지 못했지만 내 삶에 주어지는 상황들을 포기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돌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작은 결정이 하나님의 돌봄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다. 그 증거가 어디에 나타나는가? 룻기의 제일 마지막이다. 룻기의 제일 마지막에는 무엇이 등장한가? 족보가 등장한다. 이 족보는 길지도 않다. 그리고 매우 간결하게 쓰여 져 있다. “또 족보야, 라고 지겹네!” 라고 보시면 안 되고 가만히 아주 가만히 몇 번을 묵상해 보시면 조금씩, 조금씩 얼굴에 미소가 나타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 족보에는 다말이라고 하는 과부가 등장한다. 생각해보면 라합이라는 기생의 인생이 보이고 룻이라는 과부이자 이방인이었던 여인이 이 족보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짧고 아주 소소하고 아주 간결한 족보이지만 마치 하나님께서 룻과 보아스와 나오미에게 또 우리에게 작은 선물을 주시듯이 “봤지 그렇게 사는 거야” 그렇게 했더니 “너희의 삶은 내가 돌보고 있어, 또 너희 스스로 돌보니 잘하고 있네, 이렇게 살아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거야, 그 작은 돌봄이 하나님 만들었어,”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마지막에 나타나는 족보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맺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 때, 그 비행기가 이렇게 날아다니고 우주를 날아가 다녀오는 그런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냥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에 정신 나간 짓을 했던 일이 큰 변화를 만들었다. 열 두 제자도 바울도 룻도, 보아스도 자신들의 삶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았다면 영원토록 남아서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쉽게 제자가 될 수 있고 배신할 수 있고 예수님을 모른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삶에 주어지는 수많은 선택들을 하나씩 하나씩, 믿음으로 말씀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의 방법으로 실천하고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세워져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 주셨고, 자신을 주셨듯이 자신의 삶을 쪼개어서 돌봄에 참여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자신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아픈 자들과 가난한 자를 돌보셨듯이 그들을 돌보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삶에 주어지는 일들과 영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하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 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고 계신다. 우리의 삶을 하나 하나 돌보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우리를 통해 돌보고 계신다. 그 돌봄에 동참하고 있는가? 자신의 것을 내주면서도 너무 부끄러워했던 그 따뜻한 돌봄에 의해서 자신의 삶도 어렵지만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었던 그 돌봄을 통해서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지만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영혼과 일들을 끝까지 섬겼던 그 돌봄을 통해서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돌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 돌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돌봄이 다윗으로 이어졌듯이 하나님 나라가 이어진다.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했던 자는 가고, 어머니를 돌보겠다고 했던 자는 가고 이삭을 줍도록 허락했던 관용과 나눔, 며느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 비록 손해가 올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던 그 보아스의 헌신이 하나님의 돌봄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룻기를 통해 볼 수 있다. 가을이 오고 있다. 수많은 기대도 있지만 수많은 걱정도 공존한다. 코로나는 끝나지 않고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으며 부동산이 오르라고 했던 그 탐심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찌르는 무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은 여전히 갈 길을 몰라 인생에서도 신앙에서도 방황하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차마 꺼내지도 못할 그러한 기도제목들이 우리의 삶에 많이 있다. 도대체 누가 내 삶을 돌보는지 햇갈리는 그런 때가 있다. 이런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결심, 작은 섬김, 작은 돌봄 들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위해 그 돌봄이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작은 관심이 누군가를 살려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힘이 될 것이다. 이번 가을 학기는 룻처럼, 나오미처럼, 보아스처럼 작지만 따뜻한 이야기, 모르고 한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이야기, 나에게 찾아온 일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는 이야기 그래서 그 작은 돌봄이 하나님을 돌봄이 되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펼쳐지는 그런 사랑의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요약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돌봄이 다윗으로 이어졌듯이 하나님 나라가 이어져야 한다. 비록 손해가 올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던 그 보아스의 헌신이 하나님의 돌봄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룻기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우리도 작은 결심, 작은 섬김, 작은 돌봄 들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9월 26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헌신하여 그 작은 결심으로 우리는 서로 돕고 챙기면서 공동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장으로 만들어가고, 말로만이 아닌 진정한 실천으로 다락방과 순장님과 공동체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다.
주일예배(주후 2022년 8월 21일) 제목: "믿음 보고" 말씀: 민수기 13:25~14:10 대표기도: 이윤기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민수기 13:25~14:10, 25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 14:10,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
▶오정현 담임목사님 -오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생수의 강이 되길 소망한다. ‘은혜 게시판’에 장애인 사랑부에 아들과 함께 청계산 산상기도회 참석한 후에 어떤 한 어머니의 기도가 올려 져 있었다. “더위도 잊어버리고 산에 올라 아들의 손을 들고 같이 기도를 했는데, 신기하게도 비가 안 오다가 목사님의 마지막 축도와 함께 비가 떨어졌다.”고 게시판에 썼다. 지난주일 날 청계산 기도를 하는데 그 같은 시간에 효자동에는 천둥과 폭우가 쏟아지고 분당과 청계 역에도 비가 오는데 그 위에는 비가 안 왔다. 뭐 어쩌다 그렇겠지 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 “내려올 때, 안전 팀 남 순장반의 에스코트로 내려왔는데, 20년 가까이 사랑의 교회를 다니면서 이런 대접 받기도 처음인 것 같다. 같은 시간 다른 곳은 비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이 불 말과 불 병거로 청계산 기도회를 지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청계산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으로 내년도 산상 기도회가 벌써 기대가 된다. 나무다리, 화장실, 벤치의자, 돗자리 강단 등을 마련하느라고 섬긴 분들은 어떤 분들은 하루에 20회 정도 산을 오르내렸다고 하니 그 수고의 결실을 하나님이 보여 주게 하신 것 같다. 정말 행복합니다.”라고 썼다. 이런 믿음의 보고를 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저는 저의 사역을 돌아보면, 저의 사역은 이 믿음 보고의 간절함을 먹고 사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까 불신의 보고냐, 인면 믿음의 보고냐, 아니면 확신의 보고냐, 아니면 눈에 보이는 어떤 사실만의 보고냐, 믿음의 해석을 가진 보고냐, 이걸로 사역을 쭈욱 보니까 그렇게 나눠진 것 같다. 오늘 여러분들이 잘 아는 민수기 13장에 열 두 정탐꾼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호수아 갈렙과 열 정탐꾼의 보고에 대한 이야기인데, 우리 교회는 이 열 정탐꾼은 눈에 보이는 보고, 사실 보고, 팩트 리포트 보고만 하고 여호수아, 갈렙은 그 눈으로 보았지만 거기에다 주님과 함께 믿음의 보고인 소위 페이스(faith) 쓰리 리포트를 한 것이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들을 본문 배경들을 조금 더 말씀드리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출애굽한 지 2개월 만에 시내 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내 산에서 1여년을 머물렀다. 그 시내 산꼭대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율법을 받았다. 그 율법을 받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정체성이 바뀌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애굽의 노예였는데,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내 말씀의 자녀 언약의 자녀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것이다.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친 백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친 백성의 대한 하나의 증거는 성막을 만들고 그 성막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기둥으로 빽빽하고 쉐키나의 영광으로 증거를 보여주셨다. 그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제는 너희들을 과거에 어떤 애굽의 통치자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과 하나님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너희를 통치하느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백성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 한지 2년쯤 지난 다음에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해서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먼저 우리가 생각할 것은 본문의 사건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어떤 사람마다 그 성향 가운데서 불신앙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불신앙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포텐셜, 보이지 않는 불신앙의 성향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열 정탐꾼을 통하여 숨겨진 우리가 불신앙 성향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I. 숨겨진 분신앙의 성향을 조심해서.
-이것은 열 정탐꾼을 통하여 숨겨진 우리가 불신앙 성향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예배들 드리면서, 우리 속에 있는 불신앙의 성향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물리쳐주시길 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열 정탐꾼도 제대로 보고는 했다. 27절에 보면, *민수기 13:27,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가지고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라고 그림도 보아서 잘 알겠지만, 큰 포도송이를 가지고 그런 가나안에 있는 것, 풍요한 것을 가지고 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나름 보고를 잘 했다. 그때는 어떤 성향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28절에 보면, *민수기 13:28,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좋기는 좋은데 그러나 그러나가 문제이다. 불신이 나온 것이다. 열 정탐꾼이 가나안 땅이 심히 견고하고 크다고 했다. 사실은 그렇게 큰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건축을 하는데 국고성, 비돔과 라함셋을 건축을 하는데 그 당시 피라미드를 본 사람들이 그러니까 피라미드의 그 큰 규모를 본 사람들이 볼 때 가나안이 물론 성읍이 크지만 별거 아닌데 생각의 틀이 불신이 되니까 그런 보고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 제국 이집트를 경험한 눈에는 가나안의 성읍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세계관으로 바라보느냐이다.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참 큰일 났다. 이야기 하니까 열 명이 아니라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이 말한다. 30절에 이렇게 나온다. *민수기 13:30,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래 겁먹을 것 아니야, 우리가 올라가면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 다음에 그 말이 나오자마자 31절에 열 정탐꾼이 뭐라고 하냐면 *민수기 13:31,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그렇게 하면서 불신의 보고를 하면서 그렇게 하게 되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32절에 이런 내용의 말을 하게 된다. *민수기 13:32,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시각이 불신의 보고가 되면 오판을 하게 되고 과장을 하게 되고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고 거기는 젖과 꿀이 흐르는 딸이라고 말했는데 판단이 틀리니까 믿음 보고를 못하게 되니까, 거주민을 삼키는 저주받은 땅이라 한다. 그리고 아낙자손이 있다고 말했는데 과장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네피림의 후손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 식으로 오버하고, 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들의 불신 보고 정도가 아니라 14장 11절을 보면, *민수기 14:11,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불신과 믿지 않는 불신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 하나님에 대한 의심하는 것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이것이 그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멸시하는 것과 불신앙이 그대로 같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열 정탐꾼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을 이제 흔들어놓기 시작한다. *민수기 13:33,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불신의 표현을 뭐라고 말하느냐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그들 앞에서 메뚜기와 같다고 한다. 이 불신앙의 이 내용이 나중에 집단으로 가는데, 지금 우리는 이런 내용의 전지적 시점을 가지고 열 정탐꾼이 잘못했다고 나름대로 평가를 하고 그러지만 막상 그 상황에 그 장소에 있다면 우리들도 우리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이 잠복적인 불신앙이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불신앙의 크레바스이다. 빙하가 있는데 크레바스는 갭이 벌어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은혜의 차원이 있고 내 삶의 수준이 따라가지 못하는 gap갭이 너무 큰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해서 불신앙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열 정탐꾼의 크레바스에 있는 것이다. *민수기 13:33,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 33절에 다시 한 번.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우리 속에 이런 잠복된 불신앙의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 예배와 말씀을 통한 이 잠복된 불신앙의 성향이 있다면 이것을 주님이 처리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그러고 그렇게 얘기하고 난 다음에 32절 보니깐 그 주변을 삼키는 땅이다. 같은 땅을 이렇게 다르게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거 영상을 보았는데 80년 복음화 대상에 대한 거 저거를 보여준 이유는 아마 그날 금요일 전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국 분들 특징으로 비가 오는데 미국 분들이 와가지고 보았더니 사람들이 다 도망갈 줄 알았는데, 미국 사람들은 밤 새워서 기도를 못 한다. 왜냐하면 밤 새워서 기도하다가 감기 걸리면 주최 측을 고소하는 것이다. 그것이 suit의 나라 미국인데. 한국은 어떻게 하냐면 80년대 미국에 있는 선교사님이 와서 보니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밤새워 수십 만 명이 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 폭우 때문에 아마 그런 비교를 한 것 같은데 사실은 한국교회 부흥의 새로운 전환점, 역사 흐름의 전환점이 된 것이 73년도, 지금으로부터 49년 전에 빌리그램 전도대회였다. 이 가운데 아마 빌리그램 전도대회를 기억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년도 50주년 희년인데 그 때 73년도 빌리그램 전도 대회를 하는데, 100만 명이 모인다고 그랬을 때, 사람들이 다 기쁘고 감사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음 보고를 하지 못하고 불신의 보고를 한 분들이 많다. 100만 명이 모여 밥은 어떻게 먹을 거야? 또 백만 명이 모여가지고 잠은 어떻게 잘 거야? 심지어 백만 명이 모이면 화장실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극단적인 사람들은 백만 명이 모이는데 한꺼번에 모이면 이북에서 미사일 쏘면 한꺼번에 다 죽을 텐데, 그러니까 백만 명이 모여서 그 빌리그램 집회를 못할만한 70가지 80가지가 되는 것이다. 많은 내용들을 가지고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서 이 믿음보고를 한 분들 때문에 그 빌리그램 전도 집회 이후에 74년도 78년도 복음화 대성회에서 대해서 한국교회가 대상이 당시로 우리나라가 인프라도 제대로 돼있지 않은 그런 상태인데 100만 명이 모여가지고 밥은 어떻게 먹을 거며, 100만 명이 모여 가지고 잠은 어떻게 잘 거야, 심지어 100만 명이 화장실은 어떻게 되는데? 그리고 극단적인 사람들은 100만 명이 모여 있는데 이북에서 미사일 쏘면 한꺼번에 다 죽을 텐데 그러니깐 100만 명이 모여서 빌리그래엄 그 집회를 못할 만한 이유가 70가지 80가지가 되는 것이다. 많은 내용들을 가지고 준비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근데 그 가운데서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 가운데 이 믿음 보고를 한 분들 때문에 그 빌리그래엄 전도 집회 이후에 그 다음 74년도 엑스플러 80년도 복음화 대성회, 이런 식으로 해서 한국교회가 다시 한 번 새로운 비상을 하게 된 것이다. 참 특별한 일이다. 문제는 이제 이런 내재된 불신앙이 내 혼자만의 불신앙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게 악성 바이러스가 되는 것이다. 치명 율 높은 이 악성 바이러스가 되는 것이다. 이 악성 바이러슨 모든 것을 의심의 안경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악성 바이러스가 되니깐 집단적으로 막 퍼져 나가는데, 그래가지고 오늘 14장 여러분들이 읽은 말씀 어떤 악성 바이러스로 번지느냐하면, 14장 1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의심이 퍼지니까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는 것이다. *민수기 14:1~2,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의심이 퍼지니까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는 것이다.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의심의 악성바이러스가 퍼지니깐 백성들이 이 말 듣고 밤새도록 통곡을 하는 거 밤새도록.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 다음을 다 모두가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되었다. 모두가 다 예외 없다. 다 원망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차라리 애굽에서 안 나왔으면 좋아할 광야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까? 그러니까 이 10명의 어떻게 보면 소수의 부정적인 사실 보고가 자기들 나름대로는 fact report라고 그러지만 사실보고가 단순한 보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룩처럼 공동체에 퍼져가지고 전체의 불평보고 불평이 커지고 있다. 순식간에 부정적이 여론이 형성되어 가지고 공동체를 병들게 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전쟁을 앞에 놓고 지도자들은 영적 전쟁이나 특별히 성경의 전쟁을 앞에 놓고 지도자들은 무엇을 조심했냐면 부정적인 생각과 의심의 바이러스를 먼저 물리쳐야겠다. 이 불신의 바이러스를 먼저 척결시키는 것이 잘 아시는 대로 사사시대 때 기도온의 300용사가 나오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미디안 연합군 13만 5천 명이 쳐들어 왔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랬을 때 제일 먼저 기도온이 신경을 썼던 것이 무엇인가 하면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했다. 두려워 떠는 자는 많아봐야 소용없다. 이것은 사기를 다 망치게 하고 오염시켜 이렇게 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신명기 모세 오경에도 20장 8절에도 뭐라고 나오느냐 이런 말씀, 다시 또 보겠다. *신명기 20:8, 8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고. -오늘 이 말씀을 기도온이 그대로 적용한 것이 너 두려우냐? 마음이 이렇게 두려우냐? 마음에 불평이 되는 마음의 짐이 있느냐? 그럼 집으로 돌아가라. 오늘 예배는 집으로 가는 자가 없기를 바란다. 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게 바이러스가 막 전체를 여러분 그리고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더 재밌는 것은 이 믿은 보고라든지 감사한 거라든지, 이런 것들보다도 일어났던 것들의 부정적 생각들의 전파 속도가 믿음의 생각들의 전파 속도 보다도 더 빠르다. 안 빠르다. 어떻게 아는가?. 다시 믿음의 생각보다도, 부정적인 생각의 전파속도가 더 빠르다. 남들에게 칭찬 들은 것들은 여러분 금방 잊어버리는데, 남들에게 흉본 것은 오래 기억한다. 그러니깐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은혜 안 주시면 우리가 믿음 보고 살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여러분, 왜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가? 우리 왜 신앙의 선배들처럼 그런 능력이 없는가? 단순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3:58절에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단순한 것이다. *마태복음 13:58,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귀한 예배드리러 오셨는데 여러분 모두가 다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란다. 그런데 능력 있는 신앙생활이 중요한 원천이 무엇이냐면 여러분들과 저의 믿음의 문제이다. 다시 한 번 믿음의 순도를 새롭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의 순도, 그걸 위해 도전을 받아야 한다. 그걸 우리가 도전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열 명의 이 믿음 없는 사람들의 보고가 불평 보고가 되니까 온 백성들에게 확산 되니까 14장 1-2절 다음에 3절 4절에 뭐라고 나오는가? *민수가 14:3~4,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애굽으로 돌아가자 한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 출애굽한지 2년이 되었는데 이제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기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 쓰러지게 하는 하나님이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말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다. 기가 막힌 내용이다. 좋은 기가 막힌 말이 아니고 나쁜 기가 막힌 말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으로 데려와서 우리를 칼에 맞아 죽게 한다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2년도 되기 전에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신 그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해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그렇게 한 그 입을 가지고 그 입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하고 원망하는 입이 된 것이다. 우리도 비슷한 때가 많다. 1-2년 전에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정말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던 자가 하나님을 흘겨보고 말이지 하나님 은혜에 두 손 모아 기도하던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삿대질 하는 그런 형편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 되는가? 이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14장 뒤에를 보니까 결말이 무슨일이 벌어지는가? *민수기14:28,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좀 겁나는 말씀이다. 너희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한 말 대로 29-30절에 *민수기14:29-30,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 뒷부분은 무섭다. 20세 이상 된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그 약속의 땅 가나안에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오늘 우리가 대부분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이 내 것으로 확인되고 체화되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내 속에 있는 불신앙을 극복하고 잠복된 악성 바이러스 처리하고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완전히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줄로 믿는 것이다. *민수기 14:34, 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 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8년 동안 더 광야를 헤매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는 믿음 보고를 위하여 우리 속에 잠재 되어 있는 불신앙의 바리러스들이 오늘 강력한 믿음 보고의 백신을 통하여 다 섬멸되고, 정리되고, 치유되기를 소망한다. 오늘 이 자리가 믿음보고 자리가 되기를 원한다. 아니 이 안아주심의 본당이 믿음 보고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믿음 보고를 하고, 사도행전 29장 28장 뒤에 우리가 믿음 보고의 행적을 우리가 써 나가야 할 일이고, 오늘 다시 한 번 본당 자체가 믿음 보고의 현장인 줄 믿는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런 사실을 놓고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는 믿음보고를 제대로 하려면 비교의 대상을 올바르게 정리를 해야 한다. II. 믿음의 보고는 비교의 대상을 올바르게 정리하는 것이다.
-여호수아 갈렙은 하나님과 환경을 비교한 것이다. 그러니까 환경과 자기를 비교하니까 아낙자손을 보고 대단하다고 하고 큰 거인들을 보니까 우리가 주눅 들어서 힘들다고 그러는데 여호수와, 갈렙은 하나님과 비교하는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한다. 그러면서 여호수아 갈렙이 그러면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민수기14:8,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그러면서 여호수아 갈렙이 어떻게 말을 하냐면,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위 Faith report를 하는 것이다. 발음을 잘하라. 진짜 믿음의 보고여야 한다. 불신의 보고가 아니라, *민수기14:9,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러면서 하나님과 그들을 비교하니까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 우리의 먹이라, 밥, 문제 핵심은 먹이 사슬이 달라지는 것이다. 영적인 먹이 사슬이 달라지는 것이다. 딱 보면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과 그들을 비교하면 그들이 우리의 먹이라 한다. 여러분 가나안 사람들이 기골이 장대 한가 아닌가? 그것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가나안 성벽이 높으냐 낮으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비교하니까 가나안 성벽이 높낮이, 튼튼한 것이 아닌, 이런 것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안하시는가? 이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영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데 투명한 상태가 되어가지고 믿음의 눈을 열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신앙이다. 오늘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온 성도가 믿음 보고를 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게 되겠나?’ 하면 안 된다. 여러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열왕기하 6장 7절에 보면, 아람나라 사람들이 사마리아 성을 둘러쌌다. 그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사마리아였기 때문에 사마리아 둘러싸서 포위를 하고 있으니까 아무것도 이렇게 보고 품이 없으니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한다. 심지어 엄마들이 자기 아들을 잡아먹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그 때 엘리사 선지자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에서 밀가루와 보리가 매매되리라.” 그러니까 왕의 장관이 있다가 말도 아니라고 우습게 여긴다. 열왕기하 7장 2절을 보면, *열왕기하 7:2 ,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불신이다. 어찌 일이 있겠냐 한다. 당신이 장관인데,,, 그러고 포위하던 아람 군대에 하나님께서 병거의 마병소리와 큰 군대 소리가 들리게 하셔서 아람군대가 놀라서 급하게 도망을 가버렸다. 다 도망가면서 그들이 병참 보고품을 그대로 두고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고 그 의심하던 그 장관이 밀가루와 그 보리가 매매되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보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인파에 밟혀서 죽고 말았다. 조금 섬뜩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환경을 비교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환경을 비교해야 한다. 못 믿다가 밟혀죽는 경우가 우리 가운데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열 정탐꾼들은 의심은 죽음을 가져온다. *민수기 14:37, 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즉각 처리가 되고 다 죽었다. 오늘 이제 긴장된 말씀을 해드렸다. 그러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두 달 전에 강원도 정선에서 우리교단 장로님들이 3천명이 모였다. 제가 밤 집회를 했는데 지방에 있는 어떤 장로님이 연락을 했는데 “목사님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셨다. 무슨 은혜를 받았느냐고 하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고기를 못 먹는다고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한 달 동안 고기를 먹게 하겠다. 그런데 모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쉽지 않은 일인데, 땅에 있는 모든 육축을 다 모아도 그게 가능하겠냐고, 바다의 모든 고기를 다 잡아도 그게 가능하겠냐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반응을 하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못하겠느냐? 하신다. 서울에서 30킬로 사방을 1미터 높이로 메추라기 떼를 보내서 떼거리로 상상도 못한 일을 보여주셨다는 말씀을 듣고, 본인들이 그것을 알지만 그 장로님들과 모여서 그 말씀을 강력하게 들을 때, 하나님이 마음속에 믿음의 눈을 열어주셨다는 것이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끝났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패배하고 끝났다고 영적으로 비관주의적인 분들이 있다. 우리의 부족함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 비관주의를 극복하고 영적인 쾌거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에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두 가지를 이야기 했다. 우리 속에 있는 잠재해 있는 악성 바이러스를 은혜의 백신으로 믿음의 백신으로 극복하자. 또 하나는 비교의 대상을 새롭게 해야 되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제 실천이 있어야 한다. 담론, 총론에만 그치지 말고 이것을 내가 실천을 해야 한다. III. 믿음 보고를 하는 믿음의 모험가가 필요하다.
-온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에 갈렙과 여호수아가 어떻게 반응했는가? *민수기 14:6,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그 엉터리 같은 불신보고에서 너무 가슴이 아파서 자기들의 옷을 찢었다. 라고 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시대를 향하여 우리의 가슴을 찢고 통곡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불신앙과 의심의 옷을 찢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의 용기를 믿음의 모험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한 번 샘솟듯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제가 아달랴 사건을 이야기 했다. 아달랴는 악한 여왕이었다. 그가 남쪽 왕국을 완전히 그냥 악한 이세벨의 우상을 그대로 가져와가지고 온 나라를 오염하고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럴 때, 여호야다 라는 대 제사장이 이러면 안 된다고 했다. 그 악한 아달랴가 왕족들을 씨를 말리고 다 죽일 때, 딱 한 사람, 여호야다가 한 사람, 요아스를 보호해가지고 6-7년을 길렀다. 일곱 살 때 그를 왕으로 등극 시켰다. 만약에 여호야다라는 대제사장의 용기가 없었다면 안 되었다. 그걸 역대하의 기자가 말하고 있다. *역대하 23:1, 1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용기를 내어 백부장 곧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와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과 오벳의 아들 아사랴와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와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 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매. -용기가 필요하다 아달랴의 용기가 없었으면 8년이 가고 9년이 갔을 것이다. 10년이 되가지고 남유다 왕국은 거덜이 났을 것이다. 그냥 시간만 지난다고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데 시대를 바꾸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여호야다가 용기는 안 냈으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야다 자체는 어영부영 하다가 끝났을 것이다. 용기를 낸 여호야다를 하나님은 어떻게 대우하셨는가? 이렇게 나와 있다. *역대하 24:16, 16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놀라운 일이다. 용기를 낸 제사장이 왕의 묘실에 장사된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요아스는 왕의 묘실에 못 들어갔지만 여호야다는 왕의 묘실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용기를 낸 주의 백성들을 통하여 21세기의 왕 같은 제사장의 은혜를 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왕 같은 대제사장, 왕처럼 대접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앞에 두려움과 의심을 가질만한 의심의 환경이 주어지고 우리 앞에 어려움의 파도가 덮치면, 우리도 약해질 수 있지만 오늘 하나님과 환경을 비교하고 다시 한 번 말씀 앞에서 믿음의 용기를 내야 한다. 용기라는 것은 모든 것이 잘되는데 용기가 왜 필요한가? 모든 것이 평탄한데 무슨 용기가 필요한가?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과제들이 있고 믿음으로 헤쳐 나가야 할 역할들이 있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사명들이 있을 때, 우리 앞에 쉽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사랑의교회와 한국교회 성도들이 다시 한 번 믿음의 용기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불신앙의 다시 한 번 불신앙의 크레바스를 극복해야 한다. 자 이제 말씀을 정리하십시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신앙의 역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을 할 것인가? 당신의 신앙의 역사를 말해 달라 했을 때, 여러분은 무슨 말씀을 하기를 원하는가? 우리의 신앙의 역사는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우리는 신앙의 연대기이다. 역사를 쓸 때 소위 연대기라 한다. 여기서 연대기는 역대상 역대하 하듯이, 크로니칼하다. 우리는 신앙의 연대기가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모태신앙이다.’ 또 나는 내 신앙의 연대기는 직분의 역할을 쓸 수 있듯이 나름대로 그것도 신앙이 연대기라고 할 수 있지만, 진짜 신앙의 모험을 들어가면 우리는 신앙의 연대기를 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내가 믿음 보고를 하는 내가 신앙의 믿음보고의 신대기를 써야 할 것이다. 제가 이런 용어를 만들어 보았다. 우리는 ▷신앙의 역사가 연대기(年代記)가 아니라 신대기(信代記)이다. 그런 역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을 신(信) 자를 말한다.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 신앙의 역사의 두께는 믿음보고의 두께와 비례하는 것이다. 신앙의 역사의 두께는 믿음의 역사의 두께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의심의 담쟁이 넝쿨이 여러분들의 삶의 나무를 타로 올라가서 나무를 고사 키시려고 할 때에 불신앙의 바이러스가 내 삶을 타고 올라와 삶 전체를 덮으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감정과 환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반석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믿음의 보고를 하는 그런 축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믿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시편 107편 *시편 107:20,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무얼 보내셔서 위험한 지경에 구원하시는 것인가? 말씀의 의인화, 말씀의 인격화, 말씀이 인격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니까,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읽은 민수기 13장과 14장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인격화 되어가지고, 이 말씀이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믿고, 믿음보고 할 때, 우리의 신앙의 역사는 우리가 예수님을 몇 년 믿었다 오래되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역사는 내가 어떻게 믿음으로 보고하는가이다. 태산 같은 장애물이 우리 앞에 있을 수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우리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고, 집채만 한 파도가 우리를 압도할 수 있지만 아니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슴도 쪼이고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무섭고 두려울 때도 있지만, 결국은 우리의 이 믿음보고를 통하여 말씀을 중심으로 한 믿음보고를 통하여, 인생의 산과 바다와 골짜기를 넘어가게 하실 하나님이신 줄을 믿는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은 지 20년, 30년, 40년, 50년, 이것도 소중하지만, 더 중요하한 것은 예수님 오년 믿었더라도 불신앙의 크레바스를 극복하고 의심의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믿음의 역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신앙의 연대기가 신대기가 된다. 거룩한 믿음의 보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결론을 내리면 이런 여호수아 갈렙은 믿음 보고를 통하여 자기 혼자만 사는 게 아니라, 그 다음 세대를 일으켰다. 20세 이상은 다 죽었지만 20세 이하는 성경에 나타나는 유일한 믿음의 보고 세대, 유일한 순종의 세대, 그래서 가나안을 정복하는 7년 14년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 보고가 전쟁에 승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특별한 것은 나중에 가나안 정복할 때, 약간 힘이 빠졌을 때, 갈렙은 “제가 이 산지를 얻기를 원합니다.” 헤브론 산지 그 어려운 곳을 믿음으로 눈을 열고 “내가 이 산지를 얻기를 원합니다.” 갈렙 다시 한 번 그 가나안 전쟁 중에 다시 한 번 믿음 보고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기를 준 것이다. 그러니까 젊을 때, 믿음보고를 한 것이 그것이 믿음 보고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 보고도 습관이 되는 것이다. 따라 하겠다. “믿음 보고도 거룩한 습관이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들, 모든 주의 권속들은 믿음 보고에 관한한 거룩한 습관 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 거룩한 습관이 되면 남들을 살리는 것이다.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살리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보고를 우리가 기대하고 기도하지만 남들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만이라도 지금 주님 앞에 믿음보고를 하고 살도록 하자. 믿음보고도 거룩한 습관이 된다면 불평보고도 습관이다. 의심보고도 습관이다. 하여튼 의심보고의 은사 받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 그런 것이 습관화 되지 말고, 믿음보고의 습관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언제 믿음보고 해보았는가? 아니 질문한다. 언데 믿음의 모험을 해보았는가? 언제 해보았는가? 오늘 이 말씀 듣고 주님이 내게 무엇을 가지고 믿음보고 하기를 원하시는가? 깨닫게 하는 것이 있으면, 주님 앞에서, 환경을 비교하지 아니하고 말씀과 이 상황을 앞에 놓고, 오늘 이 영적으로 투명한 상태에서 믿음보고를 하므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 연대기가 아니라, 신대기를 쓰는 주의 권속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여기에는 사업가, 주부, 여러 종류에 형편에 있지만,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함께 일을 해야 하는가? 믿음보고를 하는 사람과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 주위에도 많은 믿음보고 하는 사람들을 주시길 소망한다. 손을 펼치고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요약 우리가 부정적이고 숨겨진 불신앙을 믿음보고의 백신으로 깨끗이 치유 받아서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의 보고를 하여서 영 가족 모두가 연대기가 아닌 신대기의 인생을 써 가도록 하여 영적인 쾌거를 이루어가며, 9월 26일 한국교회의 섬김에 앞장서 지혜롭게 섬기고 실천하여 하나님의 기쁜 자녀가 되어야 한다.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확인했다고 보고하고, 거기서 따온 실과를 그 증거로 보였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실제로 보고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정탐꾼들은 그 땅 거민들이 너무 강하고 성읍도 견고하여 그들과 싸워봐야 질 것이 뻔하다고 주장하였다. 정탐꾼들은 하나님께서 그동안 보여주신 권능을 간과한 채 인간적인 관점에서 양쪽의 힘을 비교하고 판단을 내렸다. 백성들은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밤새도록 곡을 하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고 지도자를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들의 불신앙적인 관점에서 내린 판단에 근거하여 좌절감에 빠져 이런 반역적인 행동을 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소란해진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며, 하나님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니,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 열 두 명의 정탐꾼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신앙에 입각한 보고를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8월 20일) 제목: "기적의 세대의 헌신" 말씀: 누가복음 5:3~6 대표기도: 궁한경 장로님(교통봉사부) 말씀읽기: 박지은자매(대학 8부), 박종열형제(청년 5국)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교통봉사부 마무리인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설교자: 금동훈 부목사님(목양 4팀, 교통봉사팀 담당) ----------------------------------- *누가복음 5:3~6,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 ▶ 금동훈 부목사님(목양 4팀, 교통봉사팀 담당) -오늘 누가복음 5장 3절에서 6절의 말씀, 사실 1-11절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기적의 세대의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나누기를 원한다. 제가 이제부터 이 말씀을 하려면 성경의 인물들을 공통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라. 하늘에 불을 내린 엘리야의 기도, 사자도 굴복한 다니엘의 믿음, 순종의 횃불로 승리한 기드온, 그리고 풀무 불을 이겨낸 다니엘의 세 친구, 여리고를 점령한 여호수아 세대, 유혹을 이겨낸 순결한 요셉, 지금 방금 말씀 드린 것은 미라클 제너레이션이라는 찬양 곡 가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 가사에 나온 인물이 성경에 나오는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다. 생각해 보라. 제가 볼 때 성경의 인물들의 공통점은 바로 기적을 경험한 세대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기적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아니 기적의 한 가운데 서고 싶어 한다. 도대체 왜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바랄까?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전을 찾아보니, 상식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신에 의해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자신의 뜻대로 더 멋져지거나 위대해지지 않은 자신의 인생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조금 더 밝게 빛내줄 무엇, 자신의 삶을 좀 더 위대하게 해 줄 수 있는 무엇, 그 기적을 바라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의 세대라고 말하기 보다는 기적이 필요한 세대이다. 이런 기적을 간절히 원한다면 어떻게 우리 삶 가운데 어떻게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일 들이 우리 삶, 현재에 나타날 수 있을까? 방금 말했던 성경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이제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의 삶 가운데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했던 것은 헌신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삶 가운데 헌신이 있었기에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이 발생했다. 그 헌신의 모습은 다양하지만 우리 주님의 위대한 섭리와 뜻에 따라 자기 것을 내어드리고,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고, 마지막 자신의 생명까지 기꺼이 바친 헌신의 세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위대한 부르심 가운데 우리는 헌신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으로 응답할 때, 우리 삶에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토요 비전 새벽 예배 참여 믿음 4대, 이 세대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 주님의 부름과 사명에 응답하므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을까? 오늘 성경 본문 누가복음 5:3-6절에서 등장하는 베드로의 헌신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베드로의 헌신의 모습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 번째가 바로 헌신의 첫 번째 단계로, offering이다. -내 것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 3-5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무엇을 내어드리는가? 배를 내어 준다. 또 무엇을 내어드리는가? 자신의 시간을 내어준다. 또 무엇을 내어드리는가? 자신의 생각도 내어드린다.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가 내어주신 배 위에서의 말씀을 전하시고, 시간과 자신의 생각, 어부로서의 전문적인 상식,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 한 상황 가운데, 어부출신도 아닌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라는 상식에 맞지 않은 어부의 전문적인 지식에 맞지 않은 예수님의 명령 가운데서 자신의 생각을 내어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된다.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자신의 것을, offering, 자신의 것을 내어드리므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어떤 기적을 직면하게 될까? 어부에게 진짜 기적은 뭘까? 어부가 자신의 삶 가운데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아주 쉽다. 엄청나게 물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다. 어부의 꿈, 어부의 간절한 소망 어부의 기적은 배가 침몰할 정도로 물고기를 잡는 것이 기적이 아닌가?.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어부의 전문적인 지식도 아니고, 어부의 어떠한 능력도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내어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소망했던 어부의 꿈 만선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성경을 보면 *누가복음 5:6,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고기를 너무 잡아서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 베드로는 만선의 기적을 경험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만선의 기적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는 어부가 아니니까 없을 것이다. 물고기를 많이 잡으려면 쉬운 방법이 있다. 예배 마치자마자 노량진 수산시장 가면 된다. 하지만 우리의 꿈, 기적은 고기를 많이 잡고, 고기를 많이 가져다가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기적은 다른 모습 가운데 있다. 지난주일 기억하는가? 청계산 산상기도, 대단하지 않았는가? 교통봉사부를 섬긴다. 가서도 무엇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겠는가? 차량, 교통 등을 보게 된다. 깜짝 놀랐다. 그동안 산상 가운데 이렇게 주변 정리가 잘 된 적이 처음이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교통 봉사부만이 아니다. 올라가보신 분은 알게 된다. 올라가면 힘들다. 덥고 미끄럽다. (중략) 그 모습을 보면서 올라가니 마지막까지 힘들었다. 장관이었다. 산상기도 가운데, 우리가 나를 위한 기도를 했을까? 아니다. 사랑의 교회와 나를 넘어서, 사랑의 교회를 넘어서 한국교회와, 한국교회를 넘어서 열방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기도 가운데, 누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가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 번째 단계는 Surrender이다. 항복이다.
*누가복음 5:8,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나의 의지, 나의 삶, 나의 모든 것을 항복한다.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에게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내간 지금 만선의 기적을 경험한 베드로라면,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께서 말도 안 되는데, 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셔서 내렸더니, 배가 침몰할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다. 여러분이 베드로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저라면 우선은 고기를 다 잡은 후, 예수님에게 달려가서 당당하게 손을 딱 내밀고 5:5!! 6:4? 8:2? 가능한가? 아마 저는 동업하자고 제안했을 거다. 이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헌신을 통해서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태도는 다르다. 베드로의 태도는 다르다. 두 번째 헌신으로 나가기 전에 surrender, 항복하는 것이다. 내 인생, 그 동안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가 내어드림으로 offering으로 헌신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만든 기적을 깨닫게 되는데,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내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 surrender이다. 이런 기적과 고백이 있을 때, 헌신의 고백이 있을 때, 이 베드로 어부 베드로에게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는데, 그 동안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surrender 항복하는 헌신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낚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는 기적을 경험한다. *누가복음 5:10,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이런 surrender의 헌신이 우리 삶 가운데 있는가? 담임 목사님 모르셔야 되는데 비밀이다. 지난 주 강단 기도회에 올라오셨을 분들은 안다. 담임 목사님 아시면 안 된다. 지난 강단 가운데 기도하고 청계산 산상 기도회를 위해서 기도한 후에 목사님께서 소감을 물으신다. 토요비전 새벽예배가 어떠한가? 목사님, 하며 저도 말씀을 드렸다. “내일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헌신은 흐르는 것이다. 헌신은 위에서부터 흐르는 것이다. 아실 것이다. 지난 주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강남 서초에 폭우로 말미암아 엄청난 일이 있었고 우리 사랑하는 성도 분들 가운데서도 어려운 일을 경험한 분들도 있다. 그런 폭우를 아니 무서움을 안다. 그 폭우가 또 언제 예견되었는가? 하필, 주일 오후 3시였다. 항복이 이런 헌신이 우리 삶 가운데 있을까? 그래서 다들 마음이 어렵다. 대안을 찾았다. 만약 폭우가 오면 본당에서 산상기도회를 하시면 어떠하냐고 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께서 이 마지막 기도회 마치고 하시는 말씀이 “저는 한복 입고 두 손 들고 기도하겠다.”라고 하셨다. 비오면 맞으면 되지 않은가? 다 갑시다. 하셨다. 헌신은 흐르는 것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다니는 곳곳마다 내일 비는 안온다고 전하고 다녔다. 날씨를 보여 주면서 내일 비가 안 온다고 계속 했다. 담임 목사님 가신다고 하니 절대로 비가 안 온다. 정말 가보니 비가 안 왔다. 언제 비가 왔냐면 끝나는 시간 쯤 축도 끝나고 비가 왔다. 담임 목사님 말씀대로 그랬다. 축도 끝나고 비 엄청 맞았다. (중략) 헌신은 Surrender, 항복하는 헌신은 나의 의지를 항복시키고,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다.
세 번째 단계는 Sacrifies, 희생하는 헌신이다. 이 희생하는 헌신은 자기희생이다. *누가복음 5;11,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삶 가운데 최고의 기적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일 수도 있다. 귀하신 성도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돈을 많이 버는 것, 아픈 몸 가운데 회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좋은 학교 가는 것 등등 좋은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 기적이다. 제가 생각할 때 진짜 최고의 기적은 우리 주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것으로 판결난 것, 이미 죽은 자와 같이 된 저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저를 부흥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대신 십자가 위에 죽으신 것이 저에게는 최고의 기적이다. 저에게 진정한 최고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나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 그 헌신, Sacrifies가 바로 최고의 기적이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장본인이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을 통해 나타난 기적의 산물이다. 나와 우리 귀한 성도님들의 값은 예수 그리스도 전지전능하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값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sacrifies의 헌신으로 나타난 기적의 열매들이다. 이러한 기적의 열매가 쫓아가야 될 길, 우리가 명확히 해야 되고, 확고히 나아갈 one way는 어디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길, sacrifies, 희생의 길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할 one way이다. 이 희생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기적을 이루기 위한 이 시대에 기적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헌신이, 기적의 산물이며 기적의 열매인 우리의 헌신이 필요하다. 지난 주, 청계산 산상 기도회를 경험했다. 이제는 무엇인가? 9월 26일, 한국 교회 섬기는 날, 기적은 선점하는 것이다. 제가 산상 기도회에 좀 늦게 갔다. 이미 자리가 없었다. 밀리고 밀려서 미끄러졌다. 그때 깨달았다. 아!! 기적은 선점하는 것이다. 기적은 빨리 찾는 것이다. 한국교회 섬기는 날, 가장 선점해야할 것이 무엇인가? 홈스테이. 제빠르게 예약을 했따. 아마 저는 sacrifies인 것 같다. 여러분들은 세이프인가? 우리에겐 기적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기적도 있겠지만, 코로나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역의 돌파구가 필요한 이 땅, 모든 지역교회, 한국교회 모든 열방과 회복과 부흥, 나를 넘어서 우리를 넘어선 기적, 한국교회 섬김의 날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 기적의 산물이고 열매인, 나와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랑의 교회 영 가족 분들의 offering과 surrender와, sacrifies의 헌신이 필요한 영적인 시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헌신으로 기적의 세대가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적을 요청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헌신이다. ♣요약 -기적의 세대로 기적을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산상기도를 하게 하시고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를 기도하며 우리에게 능력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적을 일으키기 위한 헌신 3가지를 기억하여 offering과 surrender와, sacrifies의 헌신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한 헌신 자가 되어야 한다. ▷담임 목사님 마무리 기도와 찬양. -9.26 섬김의 날을 위해서 실제적인 대안이 있어야 한다. 역사의 전환점이 되고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교통봉사부에게 주님의 임재 안에서 복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이다 8월27일부터 매일, 매일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1. 실제적인 대안 2. 재활성화 3. 한국교회 역사의 전환점.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17일) 제목: "내 안에 거하라" 말씀: 요한복음 15:4-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남수현 부목사님 -------------------------------- *요한복음 15:4-9,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남수현 부목사님 -오늘 요한복음 15장을 자세히 보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잡혀 달리시기 바로 전날 밤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자기가 세상을 떠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제자들은 갑작스럽게 예수님의 떠남에 대하여서 두려움과 충격에 휩싸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제자들이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과 질문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왕 없이 그의 나라는 어떻게 이루게 될 것인가? 그와 같은 두려움과 함께 끊임없는 질문들, 장래와 미래의 대한 불안감들이 제자들의 마음과 그 모이는 가운데 암흑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또 함께 살고 함께 있었지만 아직 성숙되지는 못했다. 3년간 동안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말하고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그 진리의 말씀이 자신들의 삶 가운데 도전 받아 본적도 시험을 받아 본적도 없었을 것이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 뿐 아니라 진리로 믿고 확신하는 것이지만 그 확신과 진리의 말씀으로 여기기 전에 예수님이 떠나가신다는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라는 15장 1절부터 시작되는 우리가 잘 아는 이 비유의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고별 설교라고 하여서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설교이다. 간략한 주제들을 보면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서로 사랑하라.’이다. 14장에서는 진리의 말씀, 15장에서는 오늘 본문 이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16장에서는 성령, 17장에서는 하나 됨에 대하여서 말씀하고 계신다. 그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이 15장인데 오늘 15장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관계에 대하여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한 것 같지만 15장을 간략하게 화면으로 표로 보시겠다.
-앞에는 간략하게 여기서 가장 핵심 키워드는 거하라,- 연합, 가운데는 제자와 제자, 성도와 성도에서 서로 사랑하라. 이다. 사랑-교제, 뒤에는 제자들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세상이 미워할 것이며 박해할 것이나 너희들은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도전과 힘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다. -오늘 요한복음 15장은 그 시대, 그 때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아직 채 진리가 내게 도전도 해보기도 전에 제대로 시험도 한 번 받아보기 전에 두려움과 내일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서 위로와 평안과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것처럼,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일에 대한 불안함과 내일에 대한 염려와 근심 걱정이 있는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으로 능력과 힘과 소망과 용기와 치유와 회복이 되는 말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첫 번째는 앞서 표로 말씀 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떠나가시기 직전에 “거하라”, 라고 명령하신다. 거하라, 15장 4절에 있다. *요한복음 15:4,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포도나무의 농부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구약에서 종종 백성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혹은 이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하고 상징할 때, 종종 쓰였던 표현이다. 시편 80장 8절을 보자. *시편 80:8, 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시편 80편을 보면 포도나무를 어떻게 한다고 하시는가? 어디서 가지고 온다는 것인가? 애굽에서 뽑아 가나안 땅에, 가나안에 사는 민족들을 쫓아내고 그것을 심으셨다는 것을 보아서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백성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몰래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심으셨다는 것은 바로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로 인하여서 은혜의 결실과 은혜의 통로가 됨을 알리고자 하는 그 사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었으며, 순종하는 하나님의 의의 열매를 맺고 의의 나무를 자라나게 하고 성숙되게 하는 그 표본으로 삼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다. 그것이 여러 장에 있지만 이사야 5장 2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이사야 5:5,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나이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하나님께서 의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는데 안타까움과 들 포도가 되어 버린 것에 실망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15장 1절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그냥 포도나무도 아니고 참 포도나무다. 그것은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자신이 참 포도나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다. 나는 무엇 무엇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정의를 말씀으로 하신 것과 같이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라고 자신의 존재를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만큼 이 포도나무를 강력하게 제시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이라고 하는 말이 붙은 것은 거짓의 반대되는 참 의미는 온전하고, 완전하게, 완벽하게, 이제는 그 뜻을 이루실 것이다. 승리할 것이다. 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복잡하고도 우리의 많은 물음표를 주는 말씀이 있다. *요한복음 15:2-3,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께서는 2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뭇가지를 제자들에게 제거해 버리겠다. 그리고 또 깨끗하게 하신다. 그리고 깨끗해졌다. 이미 깨끗해졌다. 알 듯 모를 듯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은 말씀을 주신다. 사실 제거하다와 깨끗하다 의 뜻은 단어가 똑 같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제거해 버린다는 것이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이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 더 깨끗하게 한다. 라는 것이다. 이 말은 2절에 자세히 보면 궁금증이 생긴다. 정말 이 말이 맞는가 하는 의심의 물음표가 생긴다. 분명히 알고 있기로 구원을 얻게 되고 경험하게 되면 절대로 실수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변경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해서 ‘제거한다. 버린다.’ 라고 하시는가? 그러면 내가 얻은 구원도 취소할 수 있고 제거될 수 있다. 라고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6,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그 가지를 모아 불살라 버린다. 심판에 관한 말씀이 더욱 햇갈리게 한다. 그런데 오늘 아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얻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 될 수 없다. 2절에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가롯 유다와 같이 외형적으로는 제자인척, 제자였던 척 하는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없이 예수님은 알지만 예수님 믿지 아니하는 종교지도자들 이 당시에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이 바로 제거해 버리는 불에 태워버리는 가지다.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3절에 이미 깨끗해졌다는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로 오를 우리의 죄 된 심령이 바뀌어져서 깨끗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 이 포도나무의 이 비유의 말씀은 아직 믿지 않는 대상, 사람들을 향한 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깨끗하여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인 된 신분의 존재가 변화 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하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있다는 우리에게 “너희가 정말 참 열매가 맺고 있느냐? 깨끗하여졌느냐?”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오염된 죄인이 깨끗하게 되는 유일한 비결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는 것임을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듣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구원받는 신분이 바뀌고 우리의 심령이 깨끗하게 되어 지는 줄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다. 거함에 상태’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한 단어로 말씀하면 ‘순종’이다. 본문에는 없다. 본문에 있는 것은 두 가지 표현으로 되어 있다. 계명을 지키고 사랑하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순종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0,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는 방법과 상태를 설명하시기 위하여서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서 온전히 순종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모형으로, 표현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 땅에 계실 때에나 하늘에 계실 때에나 언제든지 온전히, 완전히 순종하셨다. 상황이 불리하고 불완전하다고 할 때에도 온전히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순종의 모습이었다. 순종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1,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 충만한 기쁨은 우리가 경험하게 될 이 충만한 기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경험한 그 순종으로 얻은 질과 동일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동일한 순종한 기쁨이, 그 유익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순종하게 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될 줄 믿는다. 아멘, 또 하나 더 있다. *요한복음 6:56,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십자가 사건이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믿어지게 되고 그럴 때에 그리스께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삶을 주장하게 되시는 것이 거하게 되는 상태라는 것이다. 바로 요한복음 14장 2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사실 거하다는 것은 장소와 공간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장소는 물리적인 장소적인 공간적인 개념을 뛰어 넘는다. 생명이 내 안에 꿈틀대는 것이다. 부활하심을 믿고 고백하고 인격적으로 경험할 때에 그 생명이 내 안에 꿈틀대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삶이 비록 넘어지더라도 실수하고 실패하고 연약하더라도 할지라도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기를 바란다. 그 풍성한 연합과 교제를 통하여서 주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고, 주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되는 것이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충만한 기쁨이 넘친다고 하는 이 사실을 믿으시길 바란다. 예수님은 순종으로 예수님은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으로 그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두 번째는 앞서 표로 보여드린 것 기억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과 제자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을 주셨다. 제자와 제자, 성도와 성도,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 가를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12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요한복음 15:12,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여기서 언급하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이다. 세상 적으로 이 사랑을 이해한다면, 불가능해보인다. 알지 못하는 사람하고 감정이 끌리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이렇게 질문 할 수 있다. 세상에서의 사랑은 자기 지향적으로 한다. 행위를 바탕으로 한다. 언제 변할지 모를 변덕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말하는 사랑은 변덕스런 에로스도 아니다. 친구 간에 필리아도 아니다. 오늘 여기에 쓰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하시고 죽으신 아가페의 사랑이다. 자격을 따지거나 감정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과의 그 관계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현재 시제를 사용했다. 계속 사용하라는 것이다. 감정과 자격과 환경과 불합리와 상관없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요한복음 15:13,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서로 사랑을 말씀하시다가 친구 말씀을 하실 때, 자세히 이야기를 보면 그 친구가 누구를 말하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을 말한다. 우리에게 당신 스스로 친구가 되어서 우리와 동격으로 맺어주신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호칭은 주로 주님, 선생님, 랍비여, 나의 하나님, 이렇게 보통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 분이, 하나님이신 분이, 내게 친구가 될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친구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그 거룩하신 예수님을 내가 감히 어떻게 친구로 여길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성도와 성도, 제자들 간에 서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친구라고 하시며, 친구를 위하여 죽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도와 성도 간에 사랑할 때에, 서로 사랑 가운데 친구가 되어 서로 사랑이라고 하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묵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서로 사랑하라’ 이 예수님이 하신 그 ‘서로 사랑하라’의 의미는 매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친구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오늘 우리 생활 가운데 매우 익숙한 단어이고 용어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스스로 친구가 되셔서 오늘 우리 세상 가운데에 아가페의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은 열심인데 살의 경건에 떠밀려 가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치유와 회복, 말씀과 기도, 은혜의 자리가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 일상의 삶 가운데서 제자들 간에 성도 간에 서로 간에 아니면 이웃 간에 사랑하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줄 믿는다. 신앙은 열심인데 경건은 떠밀어 버렸다. 교회는 열심인데 동네에서는 나쁜 소문으로 제일 유명한 사람이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는가? 이런 교회에 다니는 분은 없는가? 오늘 이 본문 앞에 내가 납작 엎드려야 한다. 그것이 오늘 이 모습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그 열매인가? 예수님이 친구가 되셔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시는 것일까? 서로 생명력 있는 제자와 제자 간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면 13절, 14절, 친구를 위해 희생하는 관계도 될 수가 있다.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헌신하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15절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과의 비밀스럽고 특별한 관계, 지난 8월 14일 저녁, 주일, 청계산 산상기도회에서 세상 어떤 이도 모르는 나만이 하나님과의 비밀스런 그 관계, 그것도 경험한다는 것이다.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 이러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친구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일상의 삶 가운데서도 사랑의 열매가 맺어져 온전한 치유와 회복의 삶이되기를 바란다. 아멘. 남아 있는 열 한 제자들이 자신이 떠난 후에 사역을 잘 감당하고 세상 가운데서 사는 이후의 삶에 대 세 번째는 예수님은 성도가 세상에서 분명히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제자들은 평안하고 안전할 때, 말씀을 많이 받았다. 이 상황은 불안하고 불편하고 불합리한 것 같은 이 상황 가운데에 예수님이 갑자기 떠나가신다는 이 상황 가운데 말씀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하여서 그들을 지키고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승리하도록 하기 위하여서 당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시험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세상 가운데서 반드시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다. 세상이 미워하게 된다. 세상이 너희를 박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분명한 것은 승리가 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에 있는 바로 그 악한 사단의 세계, 그 한 가운데에, 끼어있는, 같이 살고 있는 군사들이다. 세상에서 믿는 자들을 향한 미움은 감당해야 하는 요소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 때문이다. 사탄의 가치관대로 돌아가려고 하고 저주아래 놓여 진 그 세상, 그 세상에 살지만 절대로 속하려고 하지 않아야 하고 사탄이 유혹하지만 절대로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랑의 열매는 기쁨과 은혜이지만 미움의 열매는 박해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받을 믿음에 대한 보상은 은혜가 아니라 박해라고 말씀하셨다. ‘박해’라는 것은 추적한다. 들짐승처럼 쫓아간다. 어쩌다가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시기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워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의적으로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 있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관계된 것은 무엇이든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 진리에 맞서도록 되어 있고, 성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므로 원래 그렇게 되어 가는 것으로 운명 지어져 있다. 세상이 성도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 가운데에 승리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라고 고민을, 묵상을, 생각을, 한참 했다. 그러다가 창세기 39장 요셉이 떠올랐다. 하면으로 보자. *창세기 39:2-3,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우리가 잘 알다시피 형들의 의해서 형들에게 꿈을 이야기 했다가 형들에게 팔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노예로 팔린 그 나이 때가 청소년 15-16세 그 시기다. 그런데 노예로 팔리자마자 나온 이 내용이 39장 2절이다. 고난의 세월이 다 지나고 객관적으로 증거들이 정말 형통한자가 되었을 때에 2-3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있었고, 형들은 동생 요셉을 애굽 보디발 장군의 집에 팔았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꿈을 철저히 파괴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2-3절에서도 보디발의 아내가 그와 같은 고백을 했던 것이다. 우리 집에 있는 요셉을 보니 하나님의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겠더라, 보이더라고 한다. *창세기 39:23,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 감옥에 있는데 무슨 형통인가? 감옥에 있는데 형통할 수 있는가? 감옥에 갇히면 어둠이고 암흑인데 그것을 형통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무엇인가? 미움이 있고 시기가 넘쳐나고 핍박이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사실은 절대로 믿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내 심령 깊은 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하신다.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 믿는 그것이 형통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증거하고 있다. 여러분, 세상 가운데 제자의 삶의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증인된 삶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결론을 맺겠다. 예수님께서 고별 설교를 통해 13장부터 시작하여서 새 계명을 주시고, 15장에서 연합하라고 하는 이 말씀을 주심은 장차 다가올 세상과 세상에서의 그 승리를 위하여 주신 도전의 말씀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에게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세상에서의 그 어려움을 이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오늘 앞에서 나눈 말씀 가운데 몇 가지를 한 번 정리해보겠다. 첫 번째는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면 반드시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이 ‘열매 맺다’ 라고 하는 이 표현은 이 성경의 말씀에 우리는 오해가 있다. 열매의 그 원인은 생산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야 열매를 맺는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여러분이 한 번 읽어보면 원인이 생산에 있지 않다. 열심히 하고 열심히 또 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된 것이 우리는 내 탓으로 돌린다. 열매를 풍성하게 많이 맺지 못하는 것이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탓으로 나에게로 향하고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고 했다. 우리는 가지이다. 우리는 무엇을 생산해 내거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없다. 열매에 붙어 있는 가지일 뿐이다. 그 나무가 잘 자라고 얼마나 성숙 되느냐에 따라서 나무에 의하여서 포도가 맺히는 것이지 가지, 포도나무 가지는 쓸데가 없다. 지팡이도 만들 수 없을 만큼 건드리면 뚝뚝 부러진다. 그 가지가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을 때에 승리하게 할 것인 줄 믿는다. 오늘 우리 모두 능력의 근원이 예수님께 있음을 바란다. *요한복음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열심히 더 좋은 열매를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붙잡아야 우리가 세상 가운데에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 이길 수 있다. 말이 좀 어렵다. 이 말씀을 꼭 나누고 싶어서 앞에서 8절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른다. *요한복음 15:8,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열매를 맺는데 그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실까? 열매를 맺는 것이 왜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가?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영광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간 족속이었다. 거룩하시고 영광스런 하나님과는 절대로 한 자리에 같이 있을 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였다는 그 사실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족속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나간 그 자리에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깨끗하여져서 하나남의 자리에 나와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이 되어 기도의 응답을 바라고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응답받게 하여 주옵소서. 내 삶에 하나님의 열매가 맺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어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바뀐 것으로 그 맺어지는 열매를 통하여서 그것으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사실이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릴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원하시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존재 자체가 바뀌어 진 것이 맞는가? 예수님이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 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지금 영과 육이 깨끗하여져 있는가? 예수님의 피로 나는 깨끗한 존재로 맡기어진 것이 맞는가? 수많은 질문 앞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줄 믿는다. 세 번째는 하나가 될 때 온전한 승리를 주실 줄 믿는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요한복음 15장은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제자와 관계, 제자와 제자의 관계, 제자와 세상과 관계, 세상 속에서 제자가 해야 될 사명, 그 관계에 대하여서 말씀드렸다. 그 관계를 잘 세워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15장에서는 그 말씀이 맞다. 13-17장 전체를 새 계명, 진리의 말씀, 포도나무와의 비유,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 성령이 함께 하심, 17장에 하나 되심, 이 모든 고별 설교, 예수님의 마지막 강의 설교는 결론은 하나 됨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17:23절을 보자. *요한복음 17:23,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지루하고 나태하고 도무지 금방금방 응답이 나타날 것 않을 것 같은 일상의 생활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이루고 승리하고 삶을 살아 내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 됨의 은혜를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특징은 분리와 교만과 우리의 타락을 증명할 뿐이다. *갈라디아서 5:19-20,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우리 타락을 증명할 뿐이다. 분리와 화냄과 분열이다. 우리는 가만 두면 분리하는 데 일등이다. 시기, 질투하는 데에 선수이다 그러나 연합함에 그 특징은 교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성도와 성도 간에 연합함에 이루는 그 결실은 하나 됨에 있다. *갈라디아서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우리를 하나로 붙잡아 맬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말씀을 사모함으로 오늘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 살아내며 근본적인 그 하나 됨을 이루어 갈때에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합리한 상황과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줄 믿는다. 세상의 수많은 어려움과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 됨을 통해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요약 오늘 예수님께서 떠나가시면서 ‘내 안에 거하라, 서로 사랑하라,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나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라고 말씀을 주신 것처럼, 오늘 이 계명을 우리가 순종하여서 일상의 삶 가운데 살아내는 삶이 되고 열매 맺어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되길 소망해야 한다. -먼저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이시다. 그분만이 죄가 없으시기에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이와 반대로 세상 모든 종교는 들포도나무로서 들포도나무에 연결된 가지는 실과를 맺을 수가 없다. 그리고 가지치기를 잘해야 한다. 세속적인 가지를 잘 전지(剪枝)할 때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절제된 생활로 영육간의 경건을 유지함으로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 말씀 읽기와 기도 생활은 신령한 거름을 받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