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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특별새벽예배(주후 2022년 7월 23일)
제목: "귀가 아닌 눈으로"
말씀: 욥기 38:1~5
대표기도: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최우성 목사님 초빙(미국 보스턴 워터타운 에반젤리컬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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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8:1~5,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 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여러분 반갑다. 이 귀한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사랑의교회 식구들 여러분들을 다시 뵙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들 드린다. 우리 심령 가운데 역사하실 성령님께 감사드린다. 아멘!!!.

 
우리 가운데 고통과 고난을 겪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아무런 도움의 손길 없이 앞길이 막막할 때 ‘정말 끝이구나!, 이제는 정말 되돌아갈 수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왜 나는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어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건강 때문에 가정에 불화로 인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파도같이 밀어 닥칠 때, 하늘을 원망하신 적이 있는가?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Why me?’ 욥이 그랬다. 흔히들 욥기 서를 보면 욥의 인내와 믿음을 배우라고 한다. 고난을 인내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 그런데 과연 그런가?
 
욥기 서 1장과 2장만 읽으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많은 분들이 첫 두 장과 마지막 장을 읽고 욥기 서를 다 안다고 말하고 있다. 흔히 마지막 장, 42장에 가서는 욥기서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욥이 마지막에는 두 배로 축복을 받는다. ‘욥이 인내하니까 결국 축복 받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도 무조건 참아, 무조건 참으면 돼, 인내 하면 돼, 기도하면 되는데, 그럼 축복해 주실 거야!’
 
여러분, 이게 과연 욥의 메시지인가? 저는 욥기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38장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38장에서 41장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시간이 없어서 다 읽지는 못했지만 언제 시간이 되면 한 번 묵상해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 욥의 인생은 출발은 너무 좋았다. 1장에서 보면 그에게는 부와 영성이 있었다. 여러분 얼마나 부러운 콤비인가? 부와 영성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은 요즘 흔하지 않다. 그는 부자였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아도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물질의 축복, 만 마리 넘는 가축을 소유했다. 그리고 종도 수없이 많았다. 사업의 축복, 자녀의 축복, 아들이 일곱이고 딸이 셋이었다. 게다가 경건한 한 가장의 자리를 소홀이 하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행여나 자식들이 딴 길로 셀까봐 매일 새벽기도 제단을 쌓았다. 남들이 원하는 부와 건강과 가정과 자녀와 명예와 거기다 영성까지 있는데, 여러분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욥의 삶에 엄청난 고통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소유했던 모든 재산, 사업, 주식과 연금과 노후 퇴직금이 다 날아갔다. 재난으로 인해 열 지식을 다 잃었다. 여러분 물질을 잃는 것은 어느 정도 다 감안이 되는데,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하루아침에 잃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하루아침에 다 잃었다. 하지만 욥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1장 20절에 보면, 땅에 엎드려 예배한다고 나와 있다.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솔직히 그 상황에서 예배가 나오는가?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라고 고백한다. 2장에서는 피부병에 걸려 아내에게 구박 받는다.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한다. 욥이 뭐라고 하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리석게 말하지 말라고 오히려 꾸짖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부와 명예도 주시지만 고통과 고난도, 가난도 주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가? 재미있는 사실은 욥은 자신이 왜 이러한 엄청난 고통을 겪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사탄과 함께 그의 1장에 보니까 욥에 대한 자랑을 하신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 같은 자가 이 세상에 없어.” 라고 말씀하신다. 처음에는 저도 욥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부러워했는데, ‘야,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 하는 생각, 계속 읽다보니까 그렇게 꼭 부럽지만은 않았다. 사탄이 이간질 한다. 욥이 하나님을 따른 것은 그가 소유한 물질 축복, 인생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탄과 딜을 하는 것이다. 생명만 놔두고 앗아가라, 그래도 욥은 끄떡없다. 여러분, 욥을 향한 하나님의 자신감이 왜 이렇게 넘치신다고 생각하는가? 과연 그가 인내를 잘해서? 그의 믿음이 좋아서? 여러분 욥의 인내와 신앙고백도 얼마가지 않는다. 3장에 보니까 욥이 죽고 싶다고 고백한다.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 왜 자기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자기가 잘못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얼마나 납득이 안 가는 일이 생기고 있는가?
 
욥의 고통을 듣고 그의 세 친구가 그를 찾아온다. 결국 위로보다는 오히려 궁지에 넣고 꾸짖는다. 그들이 말이 얼마나 많은지 그 말씀에 4-31장까지의 내용이다. 이 친구들이 말만 적았어도 욥기서는 얼마나 짧아졌겠는가? 세 친구가 번갈아 가면서 욥을 쪼아대는데, 4-31장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 내용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시고 악인은 저주하신다. 욥을 계속 심문한다. 욥은 분명히 숨기고 있는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잘 생각해봐”, “네가 잘못한 것이 있을 거야, 반드시 있을 거야,” 욥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난 이 고통을 치러야 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이 고난을 받을 이유도 없다는데 있다.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시고 악인을 저주하신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인가? 적용이 잘못되었다. 이 친구들은 무작정 상황판단이 없이 마치 욥의 이유와 해답을 찾으려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며 판단을 내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한 번 따라 읽어보라. “인간의 고통은 단순히 인간의 논리와 이해로만 풀리지 않는다. 2세 친구들 때문에 욥은 더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처음에는 죽고 싶다고 했다. 이제 점점 욥이 태도가 바뀐다.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든다. 저는 이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 잘못한 것이 없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 정당한 재판을 요구한다. 1장과 2장에서 봤던 욥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베 번째 친구, 가장 나이가 적은 엘리후 라는 친구가 찾아온다. 이 친구 역시 말이 적지 않다. 그게 32장과 37장까지의 내용이다. 여러분, 그래서 말 많은 친구를 두면 피곤하다. 말이 어찌나 많은지 4장에서 32장까지 자기네들끼리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친구 엘리후가 와서 그의 말을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다.
“욥, 자네가 무지하다고 주장하는데 지금 하나님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를 보게 이것이 과연 무지한 사람의 행동인가?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반문하겠느냐? 하나님은 의인에게 이유 없이 고통을 허락 하지 않으시네, 반드시 우리가 모르는 더 높은 이유와 목적이 있을 거야,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야,”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나님은 어떤 고통과 고난을 우리의 삶에 그냥 허용하지 않으신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무슨 말인가? 욥은 그런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여러분 바른 말도 적절한 시기에 해야 약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주변에 혹시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계시는가? 함께 울어주면 된다. 함께 울어주어야 한다.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기도해 주라. 그냥 들어주면 된다. 자꾸 답을 주려고 하지 말라. 자꾸 아는 척 하지 말고, 자꾸 조언하지 말라. 같이 울어주고 함께해 주고 기도해 주어라. 여러분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한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욥기 서에서 누가 가장 많이 듣고 있는가? 욥인가? 욥의 친구들인가? 하나님이시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3장부터 37장까지 들으신다. 하나님이 잠잠하고 침묵하고 계신다. 침묵하고 계신다고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께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기억하라. 하나님의 침묵은 여러분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다.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귀를 기울이며 들으신다. 믿는가?
 
자 욥이 그동안 하나님께 무엇을 주장했는가? “하나님, 정당한 재판을 요구한다. 저는 이런 고통을 받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으니, 하나님, 공정한 재판을 주십시오.” 그게 37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38장부터 오늘 본문을 읽은 것 같이 답변하기 시작하신다. 여러분 세 구절을 보자.
 
*욥기 38:1~3,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나님이 그러신다. 반문하신다. 너 말 다했니? 욥아, -Are you gone taking Job? 여러분 제가 욥이었다면 벌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하나님의 답변을 보니 욥에 대한 고통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신다. “그래, 내가 지나쳤지, 1장에서 내가 사탄에서 내가 딜을 했어, 조금만 참아, 내가 곧 42장에 가서 축복해 줄 거야, 내가 깜박했구나!” 그러지 않으신다. “욥아, 할 말 다했니? 네가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는데, 네가 나를 의심하는데 이젠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한 번 사나이 같이 대답을 해보라”는 것이다. 여러분 그 내용이 굉장히 흥미롭다. 창조론을 강의 하신다. 38장 4-5절에 보면,
 
*욥기 38:4-5,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 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욥아, 내가 이 우주를 창조할 때, 네가 있었니? 하나님이 묻고 계신다. “육지와 바다와 해와 달, 눈과 번개와 천둥, 빛과 구름, 그 모든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으며 네가 하늘에 한 줌의 비를 보낼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39장에 가서 계속 추궁하신다. 내가 산 염소와 암사슴의 새끼를 언제 낳는지 아느냐? 들 나귀, 들소, 타조, 메뚜기, 말, 매, 독수리, 별의 벌 동물이 다 나온다. 소위 39장은 동물원 장이다.
 
여러분 이것을 언급하는 하나님의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창조한, 나의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너는 어찌 나의 생각과 나의 뜻을 의심하고 있느냐? 욥아, 네가 정녕 나의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기 전에 우리 한 번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자,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이냐?” 하나님이 묻고 계신다. Who are my to you job? -정말 네 말대로 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 번 묻고 싶다고 하신다. 네 고통의 문제를 다르기 전에 네가 다루고 있는 나 하나님, 여호와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40장 후반과 41장에 가서는 육지와 바다에 사는 거대한 괴물 같은 동물들이 나온다. “내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네가 불만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욥을 심문하는데 이 찍소리도 못한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다가 왜 이런 고통과 아픔으로 가득한지, 정말 살기 힘들다고 호소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나를 되돌아 보다는 얼마나 나의 삶을 정당화 시키고 합리화 시키려고 했는가? “하나님, 저에게 관심이나 있는가? 하나님 정말 불공평하세요. 제 기도가 들리시나요? 왜 이리 응답이 늦으십니까? 왜 하필 접니까? 하나님!” 그러한 욥을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창세기 1장으로 데리고 가신다. 창조론을 거론하신다.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하시는 것 같지 않은가? 왜 우리 하나님은 창세기 1장 창조론을 언급하시는 것인가? 왜 그런지 아는가? 우리가 너무 우리의 고통과 고난에 사로잡혀 있을 때, 기쁨이 사라진다. 안 그런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해진다. 모든 게 어두워 보이고 우울하다. 내가 믿고 알아왔던 하나님에 대한 시선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인생의 고통과 역경에 치우치다보면 우리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잊을 때가 많다.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욥의 문제는 고난처럼 보인다. 고난 밖에 안 보인다. 내가 겪는 고난의 이유를 찾으려 한다. 합리화 하려들고 정당화시키려 한다.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고통과 고난이 나의 생각으로 이해가 되는가? 이 세상의 그 해답이 있는가? 얼마 전에 교인의 손주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3개월 된 간난 아기였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숨이 멈추어져 있다고 했다. 장지에서 엄마가 “Why, Why?” 그러면서 게속 우는데, 목사로서 뭐라고 위로를 할지, 그냥 안아주었다. 같이 울었다. 고통의 해답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서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저도 모른다. 아는 척 하기도 싫다. 고통의 해답은 오직 한 곳이다. 오직 한 분,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그 해답이 있다. 그분 안에서만 해결이 가능하다. 마지막 42장에 보니까 하나님이 욥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여러분, 얼마나 걸리는지 아는가? 37장이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친구들과 욥이 계속 이야기 하는데 42장에 가서 하나님이 욥의 인생을 해결시켜 주는데 반장도 안 걸린다. 몇 구절에 끝난다. 읽어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의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
 
제가 설교하기 전에 물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신감이 왜 그리 넘쳤는가? 욥이 잘나서? 그의 믿음이 좋아서? 그가 인내를 잘해서?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 지켜 주신다. 여러분의 인생을 누가 책임져 주신다고? 바로 하나님께서 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 우리 주님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이다.
 
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욥의 문제는 고난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욥의 궁극적인 욥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욥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성경의 하나님이 달랐다는 것이다. 욥의 문제는 하나님을 자기중심 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을 바라보던 자기중심 적인 이해와 시각을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욥이 가졌던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놓으신다. 고난의 쓰나미가 오기 전에 욥이 가졌던, 욥은 자신이 크게 죄를 짓지 않는 한 의롭고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자신의 신앙과 경험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한정된 지식과 경험과 기대치로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을 그린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아프면 치유해 주시길 기대한다. 어떤 어려운 고통의 터널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길 기대한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이렇게 반드시 응답해 주셔야만 돼”, 여러분,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하면서 명령하듯 요구한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협박한다. “주님, 이렇게 응답 안 해주시면 이렇게 안 해주시면, 아시죠?” 그리고 내가 기대치에 못하면 실망한다. 시험 받는다. 하나님을 원망한다. 교회를 원망한다. 때론 떠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해결사가 아니다. 물론 도우신다. 역사하신다. 치유하신다. 고쳐주신다. 우리를 건져주신다. 구원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이 가졌던 하나님의 피상적이고 좁은 자기중심 적이었던 이에 도전하시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 아니야, 내가 이해하고 있는 단순히 자라면 축복하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그 수준의 하나님이 아니야’,
 
여러분,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이것이다. “내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어떤 인생의 풍랑이 몰아쳐도 나의 절대적인 주권과 변함없는 나의 사랑을 믿을 수 있겠니? 욥아, 내가 볼 때 비록 불합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여도, 이해가 안 되고 불공평해 보여도, 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나를 신뢰하고 믿고 끝까지 따라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욥기서 38장에서 41장에 하나님을 여러분이 제대로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그날 욥이 봤던 하나님을 여러분이 제대로 만난다면 체험하고 경험했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욥기 42:5,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여러분, 전에는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여러분 차이를 아는가? 욥이 예배를 안 드렸는가? 새벽 기도를 안 했는가? 욥이 가정 예배를 안 드렸는가? 10년 20년 그런데 그 수십 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여러분 귀로 들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지식으로만 알았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어떠한가?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묵상할 때, 기도할 때, 귀로만 듣는 성도들이 많다. 눈으로 살아계신 주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욥은 자신이 믿고 따랐던 하나님의 모습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하나님의 모습이었는지 그는 깨닫고 회개를 하고 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제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오니 정말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어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가?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만 듣고 있는가? 아니면 눈으로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매일 매일 만나고 있는가? 적용 두 가지를 하겠다.
 
첫 번째, 하나님의 올바른 시각과 이해 없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 하나님을 여러분의 생각과 이해의 틀, 원하는 틀 안에 자꾸 끼워 맞추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이 참 단순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 하나님의 모습이 자기중심적이고 깊이가 없이 편협한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의 신앙은 그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욥기서 38장에서 41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우리가 정녕 만난다면,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줄 믿는다.
 
두 번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선하심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겪는 그 어떤 고통도 헛되지 않다.
-여러분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을 비하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승화시키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믿는 것이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미국 맨하탄에서 사역하시던 팀 켈러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You don’t realize Jesus is all you need until Jesus is all you have.
-내가 의지할 곳이 주님 밖에 없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만이 나의 삶에 전부인 것을 깨닫게 된다.
-팀 켈러 목사님-
 
여러분, 주님 외에 의지할 곳이 있는가? 의지 하는 것들이 있는가? 아멘인가? 하나님이 욥으로부터 요구하시는 것이다. “욥아, 내가 너의 삶에 전부냐? Job am I really everything. ”욥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도 심지어 네 식구들까지도 정말 나만이 너의 삶에 전부이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만이 전부인가? 2013년 9월 22일, 파키스탄에 패셔월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ALLTHING’s 교회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9월 22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이슬람 자살 테러범이 들이 닥쳤다. 스스로 폭탄 조기를 입고 자폭했다. 그로 인해 12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70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 중에 37명이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예배당에 성도들의 시체와 피로 가득했다. 이들은 이 마을에서 왕따 당하는 소수 기독교인들이었다. 파키스탄은 아직도 이슬람국가이다. 대다수의 성도들이 청소부이거나 쓰레기장에서 청소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무슬렘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소수 공동체였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이나 재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교인들은 그 테러가 일어난 다음 날 본당에 모여서 시체를 치우기 시작한다. 주일학교에서 사용했던 성경과 교제들, 문구류 등, 본인들의 본업처럼 물건들을 분리하며 사망한 어린 아이들의 신고 있던 신발을 모아서 닦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신발은 닦으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피로 물든 벽을 닦기 시작한다. 그들은 성도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오열하며 피로 물든 벽을 닦았다. 벽을 다 깨끗이 닦고 긴 의자를 나열하며 오열했던 목소리보다 하나님을 더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럼 왜 그들이 찬양을 했는가? 그 상황에서 찬양이 나오는가? 죽어간 시체를 바라보면서 찬양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교회가 창립된 1883년, 그들은 이 무슬렘 도시에서, 이 마을에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다. 이 교회가 1883년 창립된 이후에 끝까지 신실한 교회로 남아있어야 된다. 이것으로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끝가지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하필 그날, 테러범을 막아주시지 않고 그리고 예배 한 가운데 그런 끔찍한 테러가 이루어지게 두셨을까? 하나님이 잠시 한 눈 파셨는가?납득이 안 간다. 이유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를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침에 빛과 밤에 달과 별을 띄우시며 참새 한 마리도 그 분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고 여러분의 머리카락 수도 세시는 그 하나님,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얼마나 우리가 못 믿으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의 머리카락 수도 센다. 나좀 믿어라. .최 목사, 네 머리카락 수도 다 안다.” 그 전지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 전부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인생의 마지막에 선 욥은 그의 삶의 전부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귀로 아닌 눈으로 만났다. 만약 우리가 그날 욥이 봤던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연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욥이 봤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따른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는가? 그날 욥이 봤던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심을 믿는다면,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 세상에 너희가 환난을 당하여도 담대 하라. 내가 이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 그 주님, 바로 그 주님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이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고 책임지시고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 그분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만난다면 과연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시는 그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귀로만이 아닌 눈으로 직접 만나는 역사가 이 아참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하나님을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꿰 맞추며 살았던 나를 깨닫고, 주님을 원망했던 나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더 이상 귀로 듣지 말고 눈으로 만나는 것을 원해야 한다. 눈으로 주를 뵈는 실체가 있는 신앙을 가지고 내 삶의 모든 주권을 날마다 내어 드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육체를 갖지 않은 순수한 영이시지만, 인간과 유사한 모습과 품성으로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타락한 지금도 하나님의 성품이 부패한 채 남아 있다. 이에 제한된 인간의 성품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근심(창6:6), 진노(출22:24), 질투(민25:11), 맹세(사62:8) 등의 표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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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2년 7월 20일)
제목: "결국 답은 사랑입니다"
말씀: 마가복음 6:30-44
찬양인도: 쉐키나, 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조철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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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30-44,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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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한다. 오늘 이 자리가 말씀으로 채워져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결국 답은 사랑이구나!’ 하는 그런 놀라운 깨달음이 있는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나눌 말씀을 교독하지.
 
여러분 오늘 이지라에 오시기까지 어떤 대화의 주제로 오늘 하루를 보냈는가? 대화의 주제를 갖는다는 것은 내가 오늘 그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그 생각이 나의 행동을 어느 정도 지배를 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많은 분들은 평소에 편한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여러분 그렇지 않은가? 아니면 무거운 대화를 하기를 좋아하는가? 보통 무얼 먹으러 갈까?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어떤 옷이 잘 어울릴까? 오늘의 저녁반찬은 무얼 준비해야 할까? 어떻게 보면 시시콜콜한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삶에 있어서 분명히 빠질 수 없는 대화의 주제일 것이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오늘 하루 이런 대화를 하셨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언제까지 마쳐야 하는데, 언제까지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것을 마련해야 오늘 퇴근 시간을 마칠 수 있을 텐데, 또한 여기 계신 훈련생 분들은 방학이 벌써 2주나 지나갔다고 큰 일’이라고 어떻게 하지? 할지 모른다. 하루하루 나의 대화의 주제 가운데 “집사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하면서 나의 관심사와 나의 삶의 모습들이 분명히 거기 녹아져 있을 것이다. 최근에 바쁘신 분들이 많다 보니까 제가 하는 대화의 주제가 있다. “집사님, 아버님 좀 어떠세요? 요즘 몸은 좀 괜찮아 지셨나요? 언제가 수술일정인가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최근 동기 목사님의 아내분이 2017년에 위함 3기 판정을 받고 치료를 계속 받아오면서 차도가 계속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2021년에 작년이다. 다시 결과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은 손을 쓸 수 없다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함께 동기 목사님들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대화의 주제를 끌고 가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지 않은가? 정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를 상황, 우리가 할 수 있는 대화가 무엇일까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좀 도와야 하여야 할 듯하여 말이 나왔다. 그래서 작지만 조금씩 우리가 돕자고 마음을 모았다. 물론 우리의 예상보다는 훨씬 더 나오기는 했지만 물론 그 목사님한테는 여러 가지로 싶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그 대화 가운데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앞으로 같이 기도하겠다. 같이 이겨내자. 그와 같은 마음을 나누었기 때문에 분명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는다. 여기에 분명히 비슷한 고민을 하실 분들이 또한 계시리라 생각된다. 걱정이 왜 없겠는가? 오늘 옆에 있는 동역 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기도할까요? 우리 한 번 이겨내 볼까요?” 하시다 보면 분명히 주님께서 그 문제까지 해결해 주실 줄 믿는다. 대화의 주제라는 게 우리로 하여금 그 생각을 정리하게 하고 그리고 갈 길을 잡아 준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대화의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이다. 이다.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 그 예수님의 제자라면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기 위해서 매일 그 발걸음을 하나씩 하나씩 내 디뎌야 한다. 특히 내 삶의 행실까지도 변화에 이르려면 나의 사고와 나의 의지 그 모든 것들을 다하여 정말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길 원하시는지 주님의 제자다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쫒아가야 하는지, 매일 묵상하고 그 모습을 따라가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의 일상을 한 번 보시면 그러실 것이다. 많이 바쁠 것이다. 정신이 없다. 하루하루 삶을 이끌어가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도 비슷하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30절 31절 말씀을 보자.
 
*마가복음 6:30-31,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무슨 이야기냐면 “지금까지 주님이 이런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일을 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렇게 말할 만하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시 쉬어”, 왜 이런 이야기를 하셨냐면, 음식 먹을 겨를도 없어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주님과 사역을 하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조금만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제자들이 대단하다. 주님을 따라가면서 음식 먹을 시간도 없이 그들은 사역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음식 먹을 겨를 도 없이 사역을 한 이유가 뭐냐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계속 쫓아왔기 때문이다. 제자들 뒤를 따라서 그 무리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따라갔다. 바로 그 장면에서 우리 주님께서 34저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 하신다.
 
*마가복음 6:34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목자 없는 양, 불쌍히 여기사 우리가 이걸 딱 보면 온전 론에서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셨다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이다. 이 단어를 영어단어로 살펴보면 ‘compassion’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파피, 함께 고통을 겪는다는 단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이 무리들을 보시면서 어떤 감정으로 대하셨는가? 그들을 보셨을 때, 나와 다른 감정이 아니라 그들의 간절함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나와 동일하다고 그 모습을 공감하기 위해서 그들을 보시고는 그들을 바라보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장면은 지금 제자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좀 전에 주님께서 뭐라 하셨는가? ‘잠깐 쉬어라.’ 하셨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따라온 무리들을 향하여서 불쌍히 여기고 그들과 감정을 교감하기 시작했다. 제자들ㅇ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달갑지 않을 생각이 얼핏 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적한 곳인데 우리는 지금 잠깐 쉬라고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그 무리들을 보시고 주님은 불쌍히 여기셨다. 함께 고통을 나누길 원하셨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6:35,
35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지금처럼 날이 저문다고 별빛 달빛이 환하게 비친다고 우리처럼 그렇게 지내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전히 흑암이 몰려오고 깜깜한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빈들에 있다. 아무것도 없다. 그 아무것도 없는 그 가운데에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냐면, 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아니 주님 좀 전에 쉬라고 하셔놓고 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니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고 먹을 것을 구하려면 2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그런 떡을 구해야 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즉시 무리들을 거기에 앉히시고 제자들을 통하여서 있는 것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을 통해서 다 먹이신다. 그리고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거기 있는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자, 여기까지, 오병이어 사건의 전체 이야기이다.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하면 기적의 역사의 사건으로 떠올린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완벽한 기적의 역사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무리의 입장에서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기 시작하면 이것은 완벽한 주님께서 이루신 공감의 역사이다. 무리들의 간절한 심정을 내팽개치지 않으시고 그 모습을 보고는 같이 공감하시면서 저들의 영혼까지도 가르치면서 영혼까지도 채우시면서 육체까지도 내가 책임지겠다. 라고 주님께서는 ‘내가 저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먹이는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기적의 역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철저하게 목자의 심정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음을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제자로서 주님의 모습을 좀 더 쫓아갈 수 있을까를 한 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는데 제가 세 가지로 한 번 정리해 보겠다.
 
I. 정성으로 섬기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보여주셨는지 보자.
*마가복음 6:34,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 어떻게 가르치셨다고 하는가?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다. 여러 가지는 '포브스'라는 헬라어의 단어 뜻에는 성경에 다양하게 쓰이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many, much, great 라는 단어로 쓰인다. 무슨 일인가? 내가 이들을 먹일 수 있는 많은 방법으로, 풍성한 방법으로, 정말 탁월한 방법으로 위대한 방법으로, 목자 없는 저들을 먹이겠다. 라고 하시면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다보면 우리가 배가 고프거나 피곤하거나 쉴 상황이 못 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가르쳐야 될 상황이 왔다고 보자. 그때 여러분 정말로 여러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 보통은 우리가 이렇게 표현한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 최선을 다했다는 그 말 가운데는 어떤 마음이 포함되어 있냐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여기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실 제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지금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배가 안 고프신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 는 것이다. 메니, 머치, 그레이트(many, much, great)라는 그 방법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가르치시면서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이들을 정성을 다해서 섬기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성을 다해서 섬긴다는 것,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사실 온전하신 분이시다. 아멘 하는가? 우리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쫓아가야 되는 입장에서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야 되는데 우리는 온전치 않다. 그러면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따라가려면 철저하게 사실 뭐가 필요한 줄 아는가? 준비가 필요하다. 영적으로 내가 먹을 것들을 내가 준비하지 않으면 내 마음 속에 목자의 심정을 갖게 위해서 주님 앞에 정성으로 내가 사람을 섬기겠다. 라고 다짐하지 않으면 그곳 가운데 그와 같은 헌신과 섬김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저희 담임 목사님께서 책을 한 권 소개시켜 주셨는데 기억나는가? 손웅정님이 쓴 책이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된다.' 의 책을 보니까 이런 구절이 있었다.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훈련법을 계발해야 한다. 기존에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웬만한 빅 매치는 다 찾아보며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내가 생각해도 미쳐 있었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된다. 손웅정-

제가 저 책을 읽으면서 어떤 마음이 와 닿았냐면 모든 훈련인 인도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준비를 해야 된다. 모든 연구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알아내야 된다. 어떻게 하면 성도를 양육하고 훈련시키는데 최선의 방법인지 그것이 무엇인지가 다가오면서 숨이 콱 막혔다. 그런데 일반 축구 선수를 양육하기 위한 코치도 이와 같이 하는데, 우리 주님을 쫓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섬기고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같은 마음을 하지 않으면 이 혼란한 세상 가운데서 성도를 온전히 양육해야 하고 그리고 여기 수많은 순장님들이 계시는데 수많이 섬겨 나가는데 늘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지 않으면 세상은 금방 잡아먹을 정도로 늘 발전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다. 지금 주님께서는 육신으로는 어떻게 보면 최고로 피곤한 상태에서도 우리에게 목자 잃은 양을 목자 있는 양으로 하시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섬기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주님의 그 모습을 닮아가는 그런 정성을 다하는 모습, 메니, 머치, 그레이트(many, much, great)하는 그런 모습을 함께 담아서 여러분 탁월한 리더로,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여러분 있는 자리에서 섬겨 가시길 바란다. 여러분, 그와 같은 섬김 가운데 기쁨이 있을 것이며, 그와 같은 섬김을 통해서 자라나는 사람을 보면서 여러분 또한 우리 교회가 표방하는 목회철학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데 같이 마음을 모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의 가정에도 있기를 소망한다. 두 번째로 우리 주님이 보여주셨던 방법을 보자.

 
II. 영혼에 대해서 책임감이다.

-여러분, 제자들은 예수님께 많은 무리를 책임질 수 없다고 이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길 원했는가? “두루 촌으로 마을로 보내옵소서.” 그때 하신 말씀이 있다. 우리 같이 읽어보자.
 
*마가복음 6:37,
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2백 데나리온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라고 이야기 한다. 저는 저 장면을 읽으면서 제자들이 질문이 상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빈들이고 때는 저물었고 우리가 누군지로 모른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지만 이것을 먹이기 위해서는 2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한데, “주님 사다먹이리이까?” 그런데 주님은 이 자리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하신다. 주님은 철저하게 누구 중심으로 생각하시는가? 무리들을 중심으로 생각하신다. 제자들은 철저하게 이상적인 판단에 근거하여서 주께 말한다. 자기들 중심으로 말한다. 지금 한 적한 곳에서 오랜만에 휴가도 주셨는데 내가 이걸 누려야 될 상활 속에 있는데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다. 답답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사실은 이와 같은 모습은 사랑의 교회 처음 훈련 때도 많이 보았던 모습이다.
 
여러분 코로나 이전에 저희가 제자훈련 할 때 어떻게 하는가? 집을 돌아가면서 그 집에 가면은 그 집 주인 되시는 훈련생께서 자신이 모인 그 훈련생들을 대접했던 문화 있는 것을 기억하는가? 있었다. 그런데 어떤 걸 목격했냐면 섬기기 쉽지 않으신 분이었다. 여러모로. 저도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어떤 장면을 목격했냐면, 섬기기 싶지 않은 분이었다. 여러모로 환경 상, 저도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런데 그 상황을 아시는 그 순장님께서 그날 자기 집에서 먹을 것뿐만이 아니고, 그릇 준비하고 숫가락 준비하고, 젓가락 준비하고 와서는 몰래갖다 놓고 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제가 뒤통수 하나를 맞았다. ‘왜 그 순장님은 순원을 그렇게 섬겼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저도 훈련 초창기라 잘 준비하고 제 나름 대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핵심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영혼에 대한 순장님의 모습에서, 저 영혼이 훈련하기도 빡빡한데 저 섬김이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인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오셨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의 모습 가운데는 머리로만 섬기는 모습이 있지 않다. 상황을 보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불가능하다. 어떻게 주는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자 했는가? 주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했을 때, "네 주님, 주님 알겠습니다." "제가 먹을 것을 준비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그 순종을 보고자 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야 섬긴다고 하고 순종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머리가 먼저 앞서는 경우가 있지만
 
성도 여러분,
영혼에 대한 책임감은 머리로부터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혼에 대한 머리가 빨리 돌아가면 빨리 돌아 갈수록 내 가슴은 뛰고 있는가? 내 손과 발은 움직이고 있는가? 를 질문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다. '아 나는 순장이 아니니까 저렇게 안 해도 된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신 제자이다. 주님 부르신 제자의 모습으로 계속 가려면 왜 주님이 저와 같은 모습을 하셨을까 를 고민해야 되지 않겠는가? 머리로 판단하는 거 "너 네 잘하고 있어. 맞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는 게 더 나아. 그래 두루 촌으로 보내는 것이 훨씬 나아! 그런데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먹이는 거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는 거야!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라온 자들이 아니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면 좋겠다.“ 영혼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오신 주님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가?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그와 같은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주님으로부터 배운 자들이다. 주님께서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십자가를 통하여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따라가겠다고 늘 쫓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면 한 번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는가? 주여, “내 머리로만 판단하는 이 모든 상황을 주님, 내려놓게 하시고 나의 가슴과 나의 손발이 움직일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랬을 때, 여러분이 그런 섬김을 주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분명히 여러분 가운데 더할 나위 없는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가정에도 흘러갈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III. 주님과 함께 하면 할 수 있다는 마음이다.

-우리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면 제자들의 손에는 구해 온 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다. 이게 현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복음9:13절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한 번 보자.
 
*누가복음 9:13,
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이 부분이다. "불가능 합니다" 'I can't' 불가능하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행보를 하시냐면 그냥 그 자리에 무리들을 앉히시고 푸른 잔디에서 식사할 수 있게 준비를 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이 갖고 온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 사, 그리고 나서 손에 들고 축복기도를 하신 후에 제자들을 통하여서 그들에게 먹이게끔 하신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섬김을 하다보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목사님, 정성을 다하고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다면 다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어떻게 하셨는가? 직접 그곳 가운데 현실을 깨는 기도를 올리시면서 그곳 가운데 함께 하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I can't, 나는 할 수 없어, 라고 하는 그 제자들을 통해서 세어주어서 나누게끔 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철저하게 그곳에 불신하고 있는 그 제자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통하여서 그 역사에 동참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주님은 동일한 모습으로 주님은 나아가신다.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 잔치를 할 수가 없다. 그때 하인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냥 물로 채워라”라고 하셨더니 하인은 순종만 했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가장 좋은 포도주로 만드셔서 잔치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힘으로만, 내가 뭔가를 하려고만 하지만 실제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는 마지막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그 장면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RC 스포로울’ 이라는 학자가 보통 성화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성화’란 그리스도인이 실생활에서 점점 더 죄에서 멀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하는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RC 스포로울-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하는 점진적인 과정, 이라고 한다. 여러분 ‘성화’를 잘 아시겠지만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계속 주님을 닮아가면서 주님을 쫓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중에 주님 오실 때, 모두가 다 성화로운 존재가 되겠지만, 그러나 이 땅 가운데서 온전함을 추구하기만 하지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성화의 과정을 주님께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점진적으로 갈 수 있도록 하신다. 이 성화를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아멘, 이와 같은 일들을 하실 수 있도록 내어드림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한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주님이 이 모든 사역의 주체이심을 보이시면서 나의 부족함을 충족시키시고, 충족시키신 후에는 풍족케 하시는 역사를 이 오병이어(五甁二魚)의 현장에서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부족해 보이지만, 그것을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열두 바구니를 남기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그게 주님의 역사이다. 부족을 넘어 충족을 넘어 풍족케 하시는 그 주님의 역사 가운데 여러분이 동참하기만 하면 그와 같이 주님께서 일하시니 우리가 무엇을 더 걱정이 있겠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 가운데 정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지만 주님 앞에서 그것들을 솔직하게 고백하라. “주님, 내가 아직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게 내 정성입니다. 내가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 밖에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주님, 내 정성입니다.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합니다만 주님, 이렇게 나아가고 싶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먹이겠습니다. 내가 먹을 것을 주겠습니다. 주님 그때 나의 부족함을 아시고 충족을 넘어 풍족케 하는 역사를 보여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나가신다면, 우리 삶 가운데 온전함을 통하여서 주님 원하시는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는 한 걸음 한걸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와 같은 역사의 현장 가운데 여러분들이 함께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모여서 찬양올리고 예배드리면 주님께서 분명히 그와 같이 일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여러분, 주님이 이와 같이 오병이어의 현장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주님께서 이 땅을 어떻게 생각하셨느냐가 답이 있다.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하시는가?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독생자가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공감하는 역사를 보여주셨다.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노라, 간절함으로 나를 찾아온 자들, 내가 먹이겠다.”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다가가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지금까지 이 모든 역사를 보이신 것의 답은 결국 하나이다. 이 땅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여기 모인 자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영생으로서 구원을 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늘 이와 같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사랑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냐면, 바울은 4:1절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 한다.
 
*고린도전서 14:1,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다. 믿음, 소망, 사랑, 그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랑은 추구하는 것이다. 사랑은 쫓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그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기 위해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께 자리를 내어놓고, 정성으로 영혼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도 아직 부족하지만 계속 그 사랑을 쫓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그냥 너희만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으신다“너희도 애 쓰냐? 나도 이와 같이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결국 답이 어디에 있느냐? 사랑 가운데 있다. 라고 하시는 사실을 여러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여러분, 사랑은 강하다. 이 세상을 주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그 독생자를 통하여서 우리 모두를 주님의 제자로서 지금도 이끌어 가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마다 저도 주님께 다가가기 어려워서 정말 어떻게 해야 되나? 하는 고민이 될 때가 참 많다. 앞서 처음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혼자서 영혼을 섬길 때도 혼자서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는데, 함께 그 자리에서 함께 모인 동역 자들과 우리의 정체성을 고백하고 우리는 부름 받은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인지 할 때 우리가 고백할 때 무엇인가 사랑이라. 그 사랑을 나누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다른 것은 다 내려놓고 주님께 그 사랑을 조금이라고 따라가기 원한다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온전함의 그 고봉에 올라가기를 원하며 그 자리까지 쉽지 않지만 나의 삶의 행실을 주님의 모습으로 맞추어 가겠다고, 그러니 나와 동행하시고 역사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와 같은 은혜가 각 개인마다, 일터마다, 가정마다 여러분이 메신저가 되어서 잘 나누고 섬기며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나누는 그런 사랑의 교회 성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요약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보여 주신 기적과 공감의 역사를 묵상하며, 제자로서 고봉을 향하여 정성 다해 준비하고 섬기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온전한 제자로 행실이 닮아가서 머리만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며, 사랑이 가득 담기는 섬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사랑이 답이라는 것을 실천하여 온전한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 (6:30-44)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었으며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메시야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지 세상의 왕은 아니시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천국 복음이 가져다주는 풍성한 복을 상징하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풍성한 잔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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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 17일)
제목:  "다시 복음으로"
말씀: 로마서 1:16~17
찬양인도: 쉐키나,  이다니엘 부목사님
대표기도: 한재준 부목사님(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정성욱 목사님(덴버신학대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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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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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소망과 신령한 기쁨과 평강이 넘치시길 바란다. 기도.
 
-코로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참 피곤함과 어떻게 보면 지친 느낌이며 계속해서 이 터널을 우리가 통과하여 가면서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우리의 삶 속에 어려움과 고난과 이 현실을 한 방에 해결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한 순간에 이것을 종식시키고, 모든 것을 완전히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한 방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를 우리가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우리 한국 교회가 지난 2년 반 동안 코로나 상황을 잘 견디어 왔는데, 앞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고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복음으로”!!! 아멘....
 
 
다시 복음으로 가야만, 다시 복음으로 우리가 올인 해야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권능과 지혜와 능력을 회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부흥하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복음만이 우리의 힘이요, 우리 희망이요,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영광인줄로 믿는다.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 말씀을 통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한다.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자랑한다. 나는 복음을 찬양한다. 나는 복음을 예찬한다. 복음만이 나의 소망이다. 복음만이 나의 능력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부정어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내가 복음을 자랑한다.’라고 긍정적인 말로 했으면 되는데,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도바울이 생명을 걸고 전하는 복음이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자가는 우리의 목걸이로 만들어서 메고 다니고 십자가로 우리의 옷을 장식해서 다니고, 십자가로 우리의 영광스러움을, 우리의 정말 놀라운 희망을 주는 것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1세기에 사도 바울이 살았던 그 시대에 십자가는 가장 치욕적이었다.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다. 가장 치욕이자 수치스러운 것이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막 자랑하면서 내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는 숨겨야만 했던 것이고 덮어야만 했던 것이고 결코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십자가는 가장 극악한 범죄자, 가장 치욕적인 가장 천륜의 범죄, 가장 악한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을 처형하는 틀이다. 가장 악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처형 틀인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내 가족 중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면 또 어떤 사람이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 순간, 나는 매우 수치스러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 죽으셨다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나는 결코 부끄럽지 아니하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한다.”고 성토하고 예찬하고 바울은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복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서 두나미스, 능력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에서 오늘의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나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폭탄이다. 이것을 영적인 것으로 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영적인 ‘핵폭탄’이다. 모든 문제를 일발에 일소해버리고 모든 문제를 정리하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다 덮어버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지혜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적인 핵폭탄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한하신 능력이 고도로 응축되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이 드러나 최고도의 강도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인줄로 믿는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핵폭탄이다. 자 그러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핵폭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 복음의 능력인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그 사람이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사람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그 사람이 콩고이든 인도사람이든, 그 사람이 브라질 사람이든 캐나다 사람이든, 누구든지 간에 모든 믿는 자에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배경이 무엇이든지, 그 사람의 삶의 어떤 경험을 했든지, 그 사람이 어떤 성품이 가지든지, 그 사람이 피부색깔이 어떠하든지, 그 사람이 속한 종족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다. 아멘~^^
 
오늘 저는 ‘구원’이란 말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 교회 와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예배를 하다보면 ‘구원’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다. 찬양 속에도 구원이 나오고, 성경에도 구원이 나온다. 제자훈련 받을 때도 구원이 연속되고, 여러 가지 상황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접하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그 생동 력, 구원이라는 말이 그 능력, 그 신선함, 구원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그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주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구원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로 정리하겠다. 다시 한 번 복음으로 돌아가야만 우리 개인의 삶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이, 우리나라가, 전 세계가 다시 회복되고, 복음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 드리겠다. 우리에게 구원 받는 의미가 무엇인가?
 
 
I. 구원은 죄 사함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을 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의 첫 번째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때, 찔끔찔끔 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의지 할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의 과거의 죄와 우리의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완전히 덮어주시는 줄로 믿는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과거의 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현재의 죄, 우리가 싸우고 있는 죄, 장차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 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미래에 짓게 될 그 죄까지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완전히 덮으시고, 사하여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한 의인이라고 선언을 받은 줄로 믿는다. 완전한 죄 사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 던져 버리시고 깊은 바다의 심연으로 우리의 죄를 던져 버리신 줄로 믿는다. 더 나아가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너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운 역설이다. 우리 안에 죄 성이 남아 있다.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와 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날마다 성령과 동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의로운 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한 자가 된다고 우리를 서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의에 옷을 입혀 주시는 줄로 믿는다. 그게 죄 사함이다. 그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완전한 죄에서 해방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적인 죄 의식, 이제는 두려움의 죄 의식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안타까움의 죄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죄 사함이다.
 
II.구원은 거듭남이다.

-구원은 중생하며 거듭남이다. 니고데모가 찾아왔다. 가장 유명하고 걸출한 사람인데 율법학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랍비여 제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다. 그 말을 듣고 니고데모는 “제가 모태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인가요?”라고 한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라고 하신다. 왜 거듭나고 중생해야 하는가? 저와 여러분이 태어날 때,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서 태어나지만 영적으로 죽어서 태어난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우리의 영이 죽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적으로 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야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 우리의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 주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의 영혼이 다시 거듭날 때, 새로운 생명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고, 새로운 목적과 삶을 갖게 되고, 우리는 삶의 방향을 갖게 되고 새로운 인종,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줄로 믿는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아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새로운 줄로 믿는다.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고 중생해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얻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III.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우리의 인격에 무릎을 꿇을 때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될 줄로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더 이상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아들과 딸들이 된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 이것을 수사학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나님의 딸이구나, 여러분의 아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믿는가? 여러분 그런데 왜 그렇게 재미가 없는가? 왜 힘이 없는가? 왜 그렇게 인생이 무미건조한가? 드라이하고 삶의 패션(passion)이 없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고 정말 믿는다면, 정말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달라진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아버지, 아빠인가? 아멘, 여러분, 자녀의 특권을 사용하기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 앞에 무시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우리 사정을 말하고 하나님, 아빠,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 오늘 하나님 아빠, 저를 좀 도와주세요. 무시로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 하고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인 줄 믿는다. 특권을 부리시길 바란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부른다. 그냥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특권을 사용하기 바란다. 그 특권을 사용하면 무얼 받느냐면, 하나님 아버지께 무시로 나아가면 담대하게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힘입어 우리는 담대하고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하나님의 지성소 앞으로 들어가서 그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정을 낱낱이 보고해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안수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우리를 안아주심을 경험하게 된다. 또 우리의 자녀가 됨을 모든 부요함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물의 주인이시다. 모든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영하시고 우주에 있는 모든 것에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었다. 그러면 이 땅에서 가장 부요한 존재는 누구인가? 이 땅에서 가장 부유한 존재는 빌 게이트도 아니고 일론 머스크도 아니고 이 땅에서 한국 땅에서 가장 부요한 자가 이재용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존재는 저와 여러분이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이고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요함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본받는 자이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의 겉모습이라도 닮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우리가 아들과 딸이 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본받고 닮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원하시는가?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줄로 믿는다. 무엇을 담게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담게 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하나님 신실하심과 진심하심과 하나님의 온유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깊은 통찰과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과 사람을 품어주는 능력,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저와 우리가 닮아가고 그것의 놀라운 특권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기본적인 이미지가 하나님이 그냥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우리가 잘못하면 꿈 밤이나 때리고 채찍이나 때리고 우리가 잘못하는 순간 징계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스바냐 3:17,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저와 우리를 바라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들과 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신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잠잠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우리를 향하신 기본적인 자세는 바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볼 때, 우리를 향해 웃으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웃으시면서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신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우리를 바라보시며 춤추시고 신나하신다.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기뻐하시는 그 놀라운 복음의 말씀을 오늘 진심으로 여러분 신뢰하기를 바란다.
 
 
Ⅳ. 구원은 성령님을 받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님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령님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에게도 온 우주 만물에게도 존재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성령으로 우리를 인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심령 속에 우리의 영혼 속에 자리하시고 성령 가운데 내주해 계신 줄로 믿는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말로만이 아닌, 지식적으로도 아닌 정말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한다. 나의 마음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 성령님이 내 마음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조명해 주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을 접할 때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상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악들을 우리로 하여금 확인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게 해서 그 진리를 따라 살게 하시는,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하시는 순종의 영이시다.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는다. 때로 우리가 범죄 할 때에,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님의 마음을 나쁘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시는가?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 줄로 믿는다. 때로는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마음 아파하시고 때론 근심하실 수 있다. 그러나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인 치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된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무슨 말인가? 이미 내 안에 계셔서 내주하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내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지배하시고, 내 삶을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내 삶을 주님 앞에 온전히 의탁하오니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기도를 하기 바란다. 이렇게 기도드릴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줄로 믿는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Ⅴ. 구원을 받는다는 자유케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유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진리를 알지니 내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라고 하신다. ‘자유’는 너무나 좋은 것이 자유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좋은 것이 자유이다. 여러분이 자유가 없다면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서로를 격려할 수가 없다. 자유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처음 창조하시고 뭐라고 하시는가? “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너희가 임으로 먹되” 무슨 말이냐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은 너의 자유롭게 먹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가장 첫 번째 주신 것이 자유이다. 그런데 우리가 범죄 함을 그 자유를 상실하고 잃어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 되고, 사망의 종이 되고, 거짓의 종이 되고, 노예가 종이 된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신 줄로 믿는다. 무엇보다 마귀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다. 마귀는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노예 삼아서 우리를 범죄 함을 살게 한다.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지배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순간, 마귀의 주도권과 마귀의 지배권은 파괴된다. 우리는 마귀로부터 자유케 된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마귀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신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마귀가 역사한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명하노니 모든 사탄과 마귀는 물러갈 지어다. 아멘” 이렇게 물러가도록 우리는 마귀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말한다.
 
*빌립보서 1ㅣ23,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러나 바울은 이 몸 안에 남아 있어야 되고 이 땅에 살아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너희를 위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 혼자만 생각하면 나는 내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믿는가?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을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된 자 인줄 믿는다. 마귀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물질이 최고라고 세상은 말한다. 황금이 최고라고 한다. 뭐니뭐니해도 세상의 가치관이다. 물질을 숭상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서 우리는 물질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 사용한 사람인 줄로 믿는다. 물질의 종이 되지 아니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잘 관리하고 사용하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항상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의의 밑에 있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우리는 자유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기를 믿는다. 우리가 자유케 된다는 것은 부정적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어떤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제는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순종, 하나님께 자발적 순종, 감사의 순종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해 함께 살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삶으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자유 함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자유를 얻게 될 줄로 믿는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주신 구원의 놀라운 영광은 제가 다섯 가지로 설명한 그거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것이다. 오늘 제가 다섯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핵폭탄인줄로 믿는다.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우리의 현실은 어떻게 보면 회색처럼 보이고, 어두워 보이지만 모든 현실 속에서 이미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고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우리를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면서 날마다 성소에서 기쁨과 감사와 행복으로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붙들어주고 그들을 견인해 주는 영광스런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의 교회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새 날을 열어가는 것을 확신하고 축복한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찬양하고 복음의 능력을 머리로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의 심령으로 온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실천하는 살아가는 자가 되어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야 한다. 복음의 권능을 회복하고 다시 복음으로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으로 우리가 무장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의 산 증인이 되길 소망한다.
 


















이 영상은 2부 예배 영상이므로 1부예배 내용과 다소 약간의 차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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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7월 16일)-(여름특별토비새-II)
제목: "꽤 괜찮은 해피엔딩"
말씀: 이사야 61:3
찬양인도: 쉐키나, 오준석 전도사님
대표기도: 김도훈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이지선 교수님(한동대)-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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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3,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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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귀한 교회에 불러주셔서 이 새벽에 여러분들과 은혜 나누게 해 주심에 감사하다. 이 새벽에 저를 깨워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렇게 안전하게 여러분을 만나러 올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를 만나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자매로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좀 거리가 있어서 종종 오빠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가곤 했었다. 그날도 늘 다니던 길로 다니던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뒤에서 음주 운전하신 분이 저희가 신호대기 중 정차하고 있던 중에 이미 작은 사고를 내고 도망을 가다가 아주 빠른 속력으로 달린 차가 저희 차의 뒤를 들이박게 되면서 그 충격으로 저희 차가 일곱 대의 차와 부딪히게 되었다. 여기 저기 튕겨지다가 차에서 불이 난 모양이고 오빠가 먼저 정신을 차려서 저를 꺼냈을 때는 이미 제 상반신에 불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피부가 워낙 연소되기 좋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오빠가 저를 꺼내려고 안았을 때에 오빠 팔에도 불이 옮겨 붙어서 저의 오빠가 티셔츠를 벗어서 불을 꺼주었다고 한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예고 없이 순식간에 그렇게 일어났다. 저는 그렇게 사고를 만나고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고, 오빠에게 지금 동생이 화상 입은 제가 아니라 맥박도 잡히지 않으니 곧 갈 것 같다고 빨리 작별인사를 하라고 했다고 한다. 저의 오빠가 저에게 “잘 가라, 좋은 동생이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인사를 다 했는데 아직까지 안 가고 이렇게 잘 살아있다. 살아남는 과정은 쉽지가 않았다. 처음에 중환자실에 들어가서는 의식도 없었고, 또 산소 호흡기도 끼워져 있었고, 폐에 찬 유독가스를 빼내는 튜브도 꽂아져 있었다고 한다. 생사를 오고가던 그 시간에, 제가 기도할 수 없었던 그 시간에 저희 교회에서 ‘청년 하나를 살려달라고’ 얼굴도 제대로 모르시는 권사님들, 집사님들께서 중보 기도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 제가 혼자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폐가 회복이 되기 시작했고, 의식이 돌아왔다. 산소 호흡기를 떼게 되었고 몇 시간 뒤에 간호사님이 오랫동안 호흡기를 끼고 있었으니까 물이 잘 넘어가는지 물에 빨대를 넣어주시면서 조심스럽게 한 번 넘겨보라고 했다. 제가 너무 많이 부어있을 때라서 눈도 안 떠질 때였는데 캄캄한 중에 물을 빨아들이니까 입안으로 물이 들어오는 것인 게 그 와중에 그 물이 너무 시원하고 맛있는 것이다. 꿀꺽 꿀꺽 넘기고 싶은 만큼 너무 시원하고 맛있었다. 살면서 물이 맛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은 제가 그 물을 마실 때만도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 그 뒤에 지나가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들이 있었다. 그런데 진짜 많이 아팠다. 그럴 때마다 정말 사는 게 죽는 거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 사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제가 마셨던 그 물의 한 모금을 기억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너무 사소한 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어마어마한 기쁨이 있는 이 살아있음에 대해서 내가 살아서 누릴 수 있는 작지만 아주 큰 기쁨의 대해서 그 시간들을 지나오게 되었다.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이야기를 할까 한다.
 
병원에 있을 대에 제 모습이고, 저는 55%면적의 3도 화상을 입었다. 제 몸의 전체 면적 중에 만 이상이 화상으로 인해서 없어진 상태가 된 것이고 또 3도 화상이라는 말은 화상의 깊이를 진단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피부가 재생되지 않을 만큼 깊이 상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식 수술을 해야 했다. 아주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고, 얼굴에까지 이식수술을 마쳤을 때, 제 모습이다. 사실 저 때만 하더라도 수술을 받았기에 만져도 아프지 않는 피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냥 고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학교도 돌아가게 될 것이고 성가대도 다시 서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번 불이 지나간 자리는 자꾸 줄어들고 당겨지는 성질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위에 얇게 표피만 이식을 해놓으니까 같이 쪼그라드는데, 그 힘이 얼마나 센지, 목 피부가 쪼그라들기 시작하니까 턱을 당겨 내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입을 다물 수 없게 되고 침을 흘리게 되었다. 진짜 침만큼은 흘리고 싶지 않은데 입이 안 다물어지니까 침을 흘렸다. 흘리게 되니 수건을 물고 있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1차 치료가 끝났다고 한 2-3개월이 지나야 수술을 다시 받을 수 있다고 퇴원을 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집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을 하고 7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다. 다 그대로인데 저만 변해 있었다. 제가 굳이 거울을 찾아서 들여다볼 용기는 없었는데, 밤이 되니까 유리창에 사람 모습이 반사가 되니, 여기 나밖에 없는데 제가 아니었다. 제 입이 작아져서 어린이용 숟가락을 엄마가 사주셨는데 그게 새것이다 보니 밥 먹을 때, 자꾸 숟가락에 얼굴이 비치는 것이다. 너무 빨갛고 눈썹도 없고, 외계인 같았다. 이게 나 아니라고, 나 이렇게 안 생겼다고, 제가 본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던 그런 시간도 있었다. 아무리 제가 기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제 진짜 없어지는 얼굴이 아니지 않는가? 어느 토요일 오후에 TV를 보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는 예능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저는 하나도 재미가 없는 것이다. 사고 전에 그냥 그때, 마음을 가지고 똑 같이 살아가기에는 제 삶이 너무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젠 아무리 아픈 것을 참고 수술 수백 번 더 받아도 이제는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현실을 보고 나니까 마음에 절망이 왔다. 절망을 가득히 채우고 나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두 가지 남았다.
 
하나는 아파트 옥상을 찾아 올라가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찾는 일이었다. 몇 시간 고민을 하다가 엄마에게 교회를 가자고 했다. 좀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살려달라고는 했는데 사실 이 모습으로 살게 하실 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교회 가서 토요일 밤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냥 엎드려서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를 어떡하실 것인지요? 라고,,, 살려 놓았으면 무슨 대책이 있을 것이 아니냐고,,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서요?”라고 그 때는 그 말이 너무 야속했다. “왜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하시냐고, 나는 어떡하실 거냐고?” 그렇게 몇 시간을 따지고 물었는데 대답이 없으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약간 그런 스타일 이시잖아요?.... ㅎㅎㅎ~
 
아시듯이 울다가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주일이 되었고 늘 다니던 교회이니까, 예배를 드리러 몸은 나와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정말 바닥에 있었던 것 같다. 제가 함께 했던 성가대가 앞에서 막 찬양을 하는데,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 설 수 없기에 그 밑에서 남들이 볼까봐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 하고 또 흘러내리는 침 때문에 수건을 계속 갈아 끼워가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찢어져 버릴 것만 같은 쭈그리고 앉아있는데, ‘여기가 끝이야, 더는 할 수 없어, 이거보다 더 떨어지는 바닥은 없을 것 같애.’ 이게 끝이라는 생각이 마음을 꽉 채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찬양도 부르고 싶지도 않고, 목사님의 설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앉아서 ‘하나님이 설마 무슨 계획이 있지 않았겠냐고, 내 인생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이 무슨 계획이 있어서 나를 이렇게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게 하신다면 하나님, 그 계획을 나도 좀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야 좀 나도 살아볼 수 있지 않겠냐고’ 마지막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제 옆에 오시는 것이다. 저를 안아주시면서 기도를 하시는데, “사랑하는 딸아,”라고 시작되는 기도를 해주시는 것이다.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저조차도 저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저에게 여전히 저를 “사랑하는 딸아!” 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저 목사님 딸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사님이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음성을 통해서 저에게 약속을 주셨다. “너를 세상 가운데 반드시 다시 세우겠다고, 병들고 힘들고 약한 자들에게 네가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할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이다. 사실은 제가 기도했던 약속은 아니다. 제 기도는 ‘네 기도는 회복 될 거야, 금방 좋아져서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를 제일 기다린 기도였다. 그 말씀은 아니었다. 사실은 다 이해되지도 않았다. 참 이상하게도 제가 기다렸던 이야기도 아니었고, 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그 약속이 차라리 끝나버리면 좋겠어, 여기가 끝이야, 더는 없어, 그러고 있는 저에게 하나님께서 아주 분명하게 ‘여기가 끝이 아니다. 내가 준비한 해피엔딩이 있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끝내지 말아달라고, 하나님이 저를 향해서 애원하시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일을 이루어 가실지 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어쩌면 성경 속에 살아계셨던 그 하나님이 진짜로 살아계신다면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해피엔딩, 제 계획과는 좀 다르지만 제 기대와는 좀 다르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해피엔딩을 저도 보기 위해서 그때부터 저는 저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를 마음먹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은 이제 저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주제파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제게 주어지는 오늘을 살아오고 있고, 그러면서 집에 돌아가서 저에게 8개월 동안 일어난 저의 삶의 일들을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마음에 자그마한 용기가 자라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거울을 보는 것이었다. 처음에 거울 앞에 섰을 때는 너무도 어색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거울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처음 만났으니까 인사해야겠다고 “안녕 지선아” 하면서 쓰윽 지나갔다. 또 보면 인사하고, 그런데 자꾸 보니까 이 얼굴이 좀 정이 들어갔다. 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 갔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이게 나구나!’ 제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너무 너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제 자신을 그렇게 받아들여가기 시작했다.
 
그 힘이 제 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저를 향해서 “사랑하는 딸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 가족들이, 교회 식구들이, 저의 친구들이, 제가 모습이 이렇게 많이 달라졌는데, 저를 다른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제가 원래 사랑했던 우리 조카, 우리 자매가 여기 살아있다고 똑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저에게 사랑이구나! 그 사랑의 힘으로 알았고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사랑의 힘으로 제 자신을 안을 수 있게 되었고 다음 사진을 보시면, 저의 가족사진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가장 따뜻한 선물이다. 그간 너무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다 너 때문이야, 이렇게 말하지 않고 네가 못하는 것, 내가 대신 해줄게,” 하는 마음으로 함께 해준 저의 가족이 있어서 그 때를 감사한 기억으로 떠올리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제가 엄마하고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나누려고 한다. 사고 후에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다. 그때는 살아가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사는 게 그렇게 좋지는 않을 때이다. 눈만 뜨면 아픈 것이다. 사는 게 그렇게 좋지는 않을 때다. 눈만 뜨면 아픈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저 오래는 안 살면 좋겠다고,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럽다고, 그런 기도를 종종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하나도 안 아프다. 그래서 지금은 대게 오래 살고 싶고 그렇게 되었다. 그때는 그랬다. 인생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거구나, 그런 생각이 자주 들던 때에 엄마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한테 물었다.”엄마 인생이랑, 내 인생이랑, 바꿀 수 있으면 엄마가 좀 바꾸어줄 수 있나요?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저희 엄마가 “엄마가 바꿀 수만 있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엄마는 바꾸어 주고 싶다.”고 그러시는 것이다. 저의 엄마가 한 번도 제 앞에서 우시는 것을 적을 본 적이 없다. 사실 딸이 이 정도 됐으면 매일 붙잡고 너 어떻게 사느냐고 너 죽고 나죽고 하자. 라고 매일 대성통곡을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다. 저의 엄마가 제가 모르게 정말 안 보이는 곳에서 정말 많이 우셨을 것이지만 적어도 제 앞에서는 한 번도 우시지 않았다. 너무너무 씩씩하셨다. 정말 울 수조차 없었던 엄마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진심을 꺼내 놓으시는 그날 너무 감사했다. 부모님의 사랑은 이런 거구나, 자식이 힘들고 아플 때,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냥 내가 대신하고 싶은 마음이 그게 부모님 사랑이구나, 그 사랑이 있어서 내가 그렇게 견딜 수 있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 하나님의 생각이 났다. 하나 밖에 없는 예수님을 이 땅에, 너무너무 아픈 길 가운데, 내려 보내셨다. 십자가에서 몸 안에 있는 피를 다 쏟아야만 하는 길 가운데에 아들을 내어 보내신 아버지가 계신 것이다. 살다보면 내가 너무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는 날도 있다. 그래서 더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쩌면 지금 어떤 분은 나는 지금 지선씨처럼 그런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고 그런 마음이 드시는 분도 계실지 모른다. 그런데, 그럴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나보다 소중한 자기 아들을 내어보내신 아버지가 있음을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자임을 우리 생명이 그렇게 귀한 것임을 우리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다음 사진을 보시면 사고 때에 저를 구해준 저의 친 오빠이다. 생명의 은인이고 너무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저 살려놓고 마음고생 혼자 다 했다. 괜히 살려서 이렇게 아픈 시간을 보내게 했다고, 안 그래도 되는데 맨날 미안 한다. 제가 다 낳기 전까지는 자신이 결혼을 안 할 거라고 하더니 아이가 셋이다. ㅋㅋㅋ!!~~ 너무 우습다. 하나님께서 오빠의 회복을 주신 것에 너무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저 때만 해도 오빠의 눈에 늘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오빠가 저런 동생을 업고도 참 행복해 하는 미소가 사진에 담겨서 제가 종종 글도 쓰고 사진도 올렸던 제 홈페이지에 저 사진을 올렸다.
 
그랬더니 아래 댓글들 중에 ‘솔직히 지선씨가 무섭고 징그럽다.’라고 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이게 사실인가 보다. 나 이렇게 생겼구나!’. 마음이 많이 바닥으로 떨어지려고 하는데 그전까지 몰랐던 선물 하나를 발견했다. 제 눈이 그분들의 눈 같지가 않은 게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 분들이 저를 보는 눈처럼 제가 거울을 한 번도 그렇게 본 적이 그렇게 본 적이 없다. 보기만 하면 나름 내가 꽤 귀엽게 생겼다고 하면서 그러고 살았다. 하나님께서 이 모습 이대로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게 남들처럼 밝지는 않은 눈, 그만큼 솔직하지 않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 날개 아래 지켜졌던 생명이었구나!.이마져도 하나님이 하셨구나!’ 저는 사실 다 보인다. 얼마나 울퉁불퉁 한지, 얼마나 독특한 색깔을 가졌는지, 저는 다 보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자신을 보는 이 눈을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 저에게는 기적이었던 같다. 글을 썼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선물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사고를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던 이야기들을 좀 하고 싶었다. 그 글들이 책이 되어서 출판이 되고 일본어, 중국어로도 번역이 되면서 이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가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하게 제 책을 읽고 보내온 편지들은 인생에 대한 다짐이 들어있다. 내가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지선씨가 붙잡은 삶의 희망을 나도 붙잡고 살아가겠노라고, 나 이번 주에 교회에 가볼 거라고 그런 다짐들을 꾹꾹 눌러서 편지를 보내오신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사실은 제 몸에만 남은 흉터이고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는 대게 불쌍한 여자, 대게 안 된 여자, 그런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제 삶을 저의 흉터마저도 가장 귀한 것, 생명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제 삶을 통해서 배우고 있다.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일을 통해서 많은 힘을 얻었다.
 
제가 넘어져 있을 때, 저를 향해 그 손을 통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제 네가 이렇게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손을 내밀어주면 어떻겠니? 내밀어 줄 손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주면 어떻겠니?” 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손 내미는 일을 하고 싶어서 사회복지를 공부를 하게 되었고, 제가 사회복지 공부를 마치고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서 지금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지 이제 6년째가 되어간다. 교수는 가르치는 일 말고도 연구를 하면서 지낸다. 이렇게 작은 목소리를 가진 우리 사회에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단하지는 않지만 저의 연구를 통해서 담아내고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대신 소리치는 목소리로 살고 있다.
 
제가 했던 연구 중에 하나가 저처럼 화상을 입은 화상환자 경험자들이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연구 중에 하나인 제가 ‘외상 후 성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제가 여러분들과 나누면서 삶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참 많은 선물이 있었다고 이야기 드렸듯이 그런데 저 말고, 저처럼 이름도 알려지고 책도 쓰고 하는 이런 사람 말고, 다른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화상을 입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저처럼 똑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은 시간은 빠르게 ‘외상 후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한다. ‘외상 후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트라우마’, 상처를 입은 일을 지나고 나서 우리가 회복 과정 중에 어떤 마음의 크기들이 좀 더 커지기도 하고, 성숙되기도 하고 자라나기도, 하는데 이게 상처를 입기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내 삶이 훨씬 좋아졌다고 행복해졌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바로 ‘외상 후 성장’이라고 말한다. ‘교회 안에서는 고난은 축복이었어요.’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개념인 것 같다. 인생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76%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쯤은 이 트라우마에 노출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이혼을 경험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도 한다.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좋은 음식만 먹고 운동만 하면서 살았는데 생각지도 않은 병을 진단 받기도 한다. 저처럼 사고를 만나거나 폭행 사건이나, 자연재해 같은 피해를 입기도 한다. 예상하지 못했고 통제할 수 없어서 막을 수 없어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 마음에 보호막을 찢어버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일들을 겪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트레스 반응들이 나타난다. 불안해지기도 하고 똑 같은 일이 또 일어날까봐 과민하게 경계하기도 하고 실제 수면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 슬퍼하고 애도하고 우울 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일이 몸에 어떤 반응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는 생각보다 오래 이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기억할 것은 이런 반응들은 상처 입은 후에 나타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제가 여러분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외상 후 스트레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상처가 주는 좋은 것, ‘외상 후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에게서 새롭게 깨닫게 된다. 전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새롭게 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삶에 대한 우선순위가 변화하기도 한다.
 
‘은혜’라는 찬양에 세상에 당연한 것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그 고백이 바로 이런 삶에 대한 철학이 바뀌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진실인데, 우리가 외면하고 살았던 그 진실 옆에 모든 것이 선물이었음을 고백하는 삶의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게 되는 것, 공감능력이 향상되기도 한다. 영적으로 성숙하기도 한다. 인생을 살면서 비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맞서서 저항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비바람이 너무 세서 휘청하고 넘어갔다가 또 자리로 돌아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하기도 한다. 저처럼 외모가 변하기도 하고, 삶의 어떤 한 부분이 우리 관계가 마음의 모양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된다.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린 아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 우리는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이 아픈 진실을 깨닫게 되는데, 놀랍게도 이런 진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꽃병이 깨졌다. 너무너무 소중했던, 어쩌면 내 인생에 전부였던 어떤 것들이 깨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원 상태로는 돌릴 수 없다. 너무너무 가슴 아프다. 도대체 누가 깨뜨렸냐고 본인의 잘잘못을 따지고, 사람들을 비난하다가 결국은 ‘처음부터 꽃병 같은 것은 가지지 말았어야지’, 욥처럼, ‘어머니의 태에서조차 나오지 말았어야지’ 라고 자신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 앞에서 이러한 상처를 입히는 사건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산산 조각이 난 조각을 두고, 깨어진 꽃병을 두고, 슬퍼하기를 멈추고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깨진 조각들, 우리 인생에 소중한 것이 깨졌지만 이 마음을 돌리기를 우리를 향해서 바라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 안에서 깨진 조각들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들을 우리가 보게 되는데 이 깨진 꽃병으로 나는 이제 무엇을 만들까? 하나님은 무엇을 만들까? 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외상 후 성장’이라고 말한다고 했듯이, 깨진 것으로 새로운 조각으로 만들려면 끊임없이 생각해야 된다고 한다. 나에게 주는 일이 무엇인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끊임 없이 아프지만 마주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에 어떤 감정들이 일어났는지 열심히 노출해야 된다고 한다. 완전한 관계 안에서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 내가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는지, 얼마나 슬펐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마음을 잘 노출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잘 표출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성장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이 사회적 지지라고 이야기 한다. 무너진 한 사람을 향해서 “응 안 됐다.”가 아니라 “네가 할 수 있을 거야”라고 믿어주는 것, “우리가 너를 사랑하고 관심을 보내주고 있어.”라고 그렇게 보내주는 눈빛과 마음과 토닥임이 결국은 깨어진 모습이지만 다시 일어나고자 하는 마음과 스트레스를 이길 힘들 가져다주기도 한다고 한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외상 후 성장으로 갈 수 있다고 하자들은 이야기 하는데,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다시 쓰기’의 방법을 권하고 싶다. 제가 초반에 여러분들과 이야기 하면서 제가 좀 독특한 표현을 썼다. 저는 사고를 만났다고 이야기 한다. 사고를 당했다. 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이 맞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제가 사고를 당했어요.” 라고 하는 말이 좀 불편해졌다. 사고를 당했다고 말할 때마다 제 자신을 “저는 음주운전의 피해자에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피해자로 살고 싶지 않았고 또 하나님께서 피해자로 살게 하지 않으셨다. 당한 일에 결과는 피해일 수 있지만 만난 일에 결과는 헤어짐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고를 만났지만 저는 잘 헤어진 사람으로 살고 있다. 우리 인생을 다시 썼으면 좋겠다. 상처 입은 희생자인가? 아니 나는 어려움을 극복해 낸 사람인가? 나는 실패자? 나는 다시 일어서려고 도전하는 사람, 이라고 자기 자신을 정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다시 쓰기를 진짜 잘 하는 분이 저를 사고와 잘 헤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각각의 인생에 바로 다시 쓰기를 하고자 하신다. 우리 함께 읽었듯이 이사야 61장 3절에 보면,
 
*이사야 61:3,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더 크게 써있는 말씀을 먼저 보자. 슬픈 자들을 더 이상 슬퍼하는 자들로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다시 부르신다. 너는 이제 의의 나무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다시 쓰게 하신다. 상처입고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연약한 자, 슬퍼하는 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너는 의의 나무, 이제 나의 영광을 드러낼 자라고 다시 부르신다. 그 은혜로 저 역시 사고를 당한 사람이 아니라 이제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주셨다. 깨어진 그릇인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아니, 너는 깨어진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담은 보물그릇이라고 다시 불러주셨다. 세상 사람들은 너는 불행을 만난 화상환자, 너는 이제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저를 내 사랑하는 딸이다.”라고 다시 불러주셨다. 우리 인생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그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하나님은 나를 뭐라고 부르시는지 그 소리를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은혜로 우리가 실패한 자가 아니라, 의의 나무라고 부르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 자신으로 붙잡고 다시 쓰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잘 아시는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주시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생각이 재앙이 아닌, 평안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통해서 깨어진 일이 발생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희망과 미래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기가 막히게 이 말씀이 제 책 제목과 연결이 된다. 나쁜 일이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제 인생을 바꾸셨다. 제가 기대하는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고,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하셨다. 우리 인생을 향해서 미래와 소망을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기대를 안고 제가 이제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은 들어가기만 하면 깜깜하기만 하는 동굴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더 들어가면 위험해 지는 것 아니야? 출구 같은 것은 없는 것은 아니야?’ 라고 그런 생각이 드는 시간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공동체의 사랑이, 저를 다시 붙잡아 주셔서 그 힘을 일어나서 인생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었음을 꽤 괜찮은 해피엔딩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임을 다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여긴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각자에게 계셨기를 간절히 바라며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선한 일들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무 귀 기울여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피곤치 않게 잘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고맙다.
 
▷사고를 만났다.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사고와 헤어지게 하는 것이다. ​깨어진 그릇이 아니라, 다른 작품으로 빚기 위함을 만들어 주시고 다시 쓰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뭐라고 하시는지 귀 기울이자. --‘꽤 괜찮은 해피엔딩’-- 저자 이지선-
 
 
요약
우리 영 가족이 외상 후 성장하는 자 되어서 하나님이 심으신 의의 나무로 세워지며 세상의 핍박과 공격에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믿음의 4대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잔치를 누리는 예배가 되어 매일의 일상이 회복되고 더 복되고 주님께 영광 돌리며 9.26일에 초대되는 한국의 교회 목사님들을 섬기는 데에 헌신하는 가정이 되어서 주님의 깊은 뜻을 올려드리자.
 

 

















































"꽤 괜찮은 해피엔딩"-저자 이지선 교수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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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7월 13일)
제목: “남겨진 칠천 명”
말씀: 열왕기상 19:15~18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소문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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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9:15~18,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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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장마 비가 오랜만에 굉장히 많이 내리고 있다. 운전을 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이 예배에 어떤 분들이 오실까를 기대했는데 여러분들이 오셨다. 오늘도 내리는 장맛비처럼 하나님의 큰 은혜가 우리의 삶 가운데도 넘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일에 대해서 간절히 소망하고 오랫동안 기도하였던 제목이 있는가? 아마 한두 가지 정도는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오랫동안 하나님께 간절하게 나갔는데,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지 않거나 혹은 반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우리의 기도가 낙망되고 지칠 때도 여러분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 원망과 섭섭함으로 기도하기도 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하나님께 원망과 섭섭함에 감정을 표현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답답함과 좌절과 원망이 올 때에 오히려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관계함에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성경에서 오늘 그러한 한 사람이 등장을 한다. 바로 엘리야이다. 이 엘리야의 답답한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가 오랫동안 기도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던 기도의 제목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갔던 그 답답함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를 생각해 보니까 그 답답함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함과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그 하나님 때문에 또 한 번의 상처를 받고 순장님이나 믿음의 동역 자나 목회자를 향해서 나아간다. 저에게도 그런 분들이 오셨었다. 그런 분들을 향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이분들의 마음을 돌이키며 다시 신앙으로 정진할 수 있도록 어떤 말씀을 주면 좋을까를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여기 계신 모든 순장님들이 저와 같은 고민을 하였을 줄로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돌이키며, 다시 그의 삶의 궤도로 돌이켰던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반응이다. 어찌 우리가 집중하여 보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말씀을 묵상하며 묵상하여 보다가 제 눈가에 한 가지 단어가 들어왔는데 그 단어는 오늘 설교의 제목이었던 ‘칠천 명’이었다. 도대체 왜 칠천 명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길 래 위대한 선지자, 구약을 통 털어서 위대한 선지자를 꼽으라면 몇 명 뽑을 수 있는데 그 몇 명 안에 들어가는 위대한 선지자 마음에 위로와 돌이킴을 주기 위해 예시 사용되었을까? 이 칠천 명의 인생이 너무나 궁금했다. 이 칠천 명의 사람이 어떠한 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니까 이 칠천 명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가 않았다. 그런데 칠천 명이 나오지 않다고 하여서 그냥 성경을 덮기에는 너무 이 칠천 명이라는 단어에 미련이 남는 것이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엘리야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사용한 칠천 명이니까, 엘리야의 인생을 한 번 살펴보면 엘리야의 어떠한 모습들을 되돌리게 원하실까? 를 유추하여 보면서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7천 명의 인생과 그들의 삶과 신앙이 어떠한지를 한 번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먼저 칠천 명의 이야기를 마음 한켠에 마음을 두시고, 그 목적을 향해서 그 엘리야라고 하는 한 삶의 인생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러분, 엘리야는 역사에 너무나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람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열왕기상 몇 장만 앞으로 가보자. 열왕기상 17장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엘리야란 이름에 엘 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엘리야의 등장은 그저 역사의 한켠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완전한 적진이라고 여길 수 있는 아합왕 바로 앞에서부터 엘리야의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
 
*열왕기상 17:1-2,
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오늘 말씀을 보니까 엘리야의 등장과 함께 하나님은 엘리야와 함께 하나의 기적을 준비하신다. 이것이 뭐냐면 엘리야의 마음이 없으면 앞으로 수년 간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1절과 2절을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가 영적인 도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였다. 그런데 엘리야가 시대를 향하여서 침묵(沈默)한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이 시대 가운데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등장시켜 놓고 침묵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셨는가?
 
여러분,
교실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를 한 번 상상해 보라. 그날따라 아이들이 너무 소란스럽게 떠드는 것이다. 그러면 선생님이 초심자 선생님 같은 경우는 이렇게 반응을 할 것이다. 교탁을 막 두드리면서 “애들아, 조용히 해, 시끄러워! 조용히 안 할래, 너 뒤로 나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베테랑 선생님은 아이들이 막 시끄럽게 떠들면 어떻게 하는지 아는가? 말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침묵한다. 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스스로가 들을 때, 얼마나 시끄러운지를 너희가 들으라는 것이다. 여러분, 설교를 할 때, 우리 청소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면 이 아이들이 간혹 52주 가운데 몇 주간 미치고 반응을 할 때가 있다. 그때 여러분, 설교자가 핏대를 높여가며 더 큰 소리로 설교하기 보다는 아주 나지막한 소리로 그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장년들은 설교 시간에 이렇게 떠들거나 다른 말씀을 하시는 분들은 안 계시는 것 같다. 그런데 제가 알았다. 오히려 청소년들은 막 그렇게 시끄럽게 하고 있지만 목회자의 설교를 다 듣고 있다. 그런데 우리 장년들은 다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오늘 에어컨을 끄고 왔는지, 마치고 돌아가면 어떤 국을 끓여야 될지, 반찬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수만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제가 알았다. 여러분 그렇게 여러분이 복잡할 때, 마냥 설교를 하면서 아주 조용하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화들짝 놀라게 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왜 이 엘리야라는 위대한 선지자를 역사의 전문 앞에 내어놓으시며, 침묵이란 방법을 택하였냐면 우상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그 소리들이 난무한 가운데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알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갈(飢渴)이다. 이 말씀은 아모스 선지자는 8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모스 8:11,

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여러분, 이 기갈이야 말로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기갈일 줄로 믿는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인생 가운데 이렇게 침묵하시며, 하나님의 목소리 외에 아닌 다른 소리가 우리의 귓가에 들리게 하심을 통하여서 우리도 또한 침묵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침묵의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또 다른 방법, 정 반대 방법으로 하나님의 입술 가운데 나팔을 달고 “내가 여기 있다. 나의 임재가 여기 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 이 엘리야의 짧은 인생 가운데서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갈멜산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백 오십 명과 함께 엘리야는 당당히 맞서는 대결을 펼친다. 이때 당시 종교는 열광주의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자신의 제단에 쌓아놓고 자기의 몸을 그어가며 자해하면서 피를 흘리고 그런 과정들을 통하여서 자기 자신이 믿는 신을 자극하고 이 자극을 통하여서 쉽게 응답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죽은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엘리야가 그 뒤에 이스라엘의 열두 돌, 열 두 지파와 상관없이 열두 돌을 잘 모아서 제단을 수축한다. 그런 다음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보란 듯이 불로 임해야 하는 그 제단에 물을 붓기 시작한다. 마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 모습을 함께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서 갈팡질팡하며 머뭇머뭇 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 제단이 완전히 타 없어질 듯한 크고 강한 불을 내려주셔서 그 제단을 살라버렸다. 그리고 엘리야는 넘겨져 있는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목숨을 끊으며 그 흐르는 시내를 피로 물들게 했다. 여러분, 이 정도의 기적이고 이 정도의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라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마음껏 누리며 선명하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온다. 여러분, 아합은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조차도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엘리야 한 사람만 없애버리고 나면 이 일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 열왕기상 19장 1절에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열왕기상 19:1,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아합은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고서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엘리야 한 사람만 죽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세벨은 최후통첩(最後通牒)을 한다. “저기 널 부러져 있는 저 선지자들 중에 한 사람의 목숨처럼 엘리야 너의 목숨을 내가 취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 위대한 기적 앞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아합과 이세벨의 모습도 놀라운 일이지만, 우리를 더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그런 이세벨 경고 앞에 한 방에 무너져 버리고 마는 엘리야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엘리야는 그 상황을 외면해 버린 채 호렙산까지 도망을 오게 된다. 호렙산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 있는 것을 만족하지 못해서 엘리야는 깊은 굴속으로 숨어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묻는다.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니?” 하니까 엘리야가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저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상황이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결과를 제가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계시기는 한 것입니까?” 라고 하니 엘리야가 이렇게 실의해 있을 때, “엘리야야, 너 굴 밖으로 나와라.”하신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어?”라고 하신다. 이것은 엘리야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거기 있으면 안 되는 엘리야의 모습이지만 “왜 이렇게 실의에 빠져있니? 왜 이렇게 절망 가운데 있니? 왜 이렇게 나의ㅏ생각과 뜻을 알지 못하니?” 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광풍을 보내신다. 지면이 완전히 흔들릴 듯한 지진을 보내신다. 불을 보내신다.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하나님의 임재는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세미한 음성이 하나 들린다. 그 세미한 음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청아한 음성이었다. 그러면서 엘리야 앞에 제가 제 사명을 다시 허락하게 주게 된다. 여러분, 이 엘리야를 통하여서 칠천 명의 삶을 유추해 내기 위해 엘리야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가운데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를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엘리야가 그의 모든 삶을 통하여서 나타나는 결과, 그 결과가 나오지 않자 한 방에 무너졌다. 결과 중심의, 결과를 바라보는 것에 하나님의 역사의 유무를 판단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다는 것으로 알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그 원하는 결과 이전에 모든 과정들까지도 다 부정해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러분 그 처참한 결과 앞에 엘리야가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고 살 소망이 없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가 걸어온 모든 과정들까지도 다 부정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모습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결과를 우리 식대로 보기를 원하는지, 유튜브에 만들어지는 영상이 십분 이상을 넘어가면 안 된다. 왜 인줄 아는가? 사람들이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십 분짜리 동영상조차도 사람들도 그 십분 을 다 보지 않고 빨리 그 결과를 보고 싶어 한다.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설교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그 한 편이 아무리 짧은 설교라 하더라도 30분 내외를 넘어가는데, 여러분 그 설교를 3분으로 압축해야 된다. 그래서 이 3분으로 압축하는 것이 정말 기적적이어서 ‘3분 미라클’ 이라고 한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그 3분이라는 시간 동안이라도 온전하게 그 설교를 듣고 있다면 정말 너무 감사하다. 여러분 이게 우리의 모습이다.
 
저는 오랫동안 청소년 사역을 하면서 또 고 3,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이 아이들의 고3 생활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제가 옆에서 잘 살펴보았다. 짧게는 3년, 길게는 중학교까지 6년, 더 길게는 초등학교까지는 12년, 대입을 위해서 이 아이들이 뛴다. 그런데 여러분, 대입의 결과가 나오면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모든 인생을 걸어왔던 시간 시간들이 다 한 방에 부정되어 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여러분 이 결과로 모든 과정들의 결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여러분 이 결과에 걸어왔던 모든 순간의 시간들이 한 방에 부정되어지는 것이 옳은가? 우리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저에게 이 마음을 바꾸어주셨던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작은 간증거리가 하나 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그때에 20대에 정말 10년을 하루처럼 여기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했던 제목이 있다. 가족의 복음화와 우리 가정 안에서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제가 기도했다. 여러분, 어떤 기도제목을 가지고 온전히 오랫동안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면 여러분 그 삶 자체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 여러분은 아시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살다가 우리가 뭔가 잘못한 일을 하면 그 잘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아닌가? 그냥 마음 편하게 기도하시는 것인가? 여러분 저는 그렇다. 정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마음으로 이 기도를 정말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10년을 하루처럼 그렇게 기도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때에 상황이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어지는 관계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너무 무너지는 것이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원망과 섭섭함의 마음으로.,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나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10년이란 세월을 보냈는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조금도 변함이 없이 이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한 번도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이렇게 반응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막 원망할 때, 하나님이 제 속에 어떤 섬광과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게 무슨 마음이었느냐면, “문수야, 너는 결과만 바라보고 지금 10년을 달려왔지? 그런데 나는 네가 이 기도제목 때문에 지나왔던 그 10년을 하루처럼 매일 나에게 찾아와 웃고 울었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어, 너는 이루어지지 않는 그 일 때문에 그 십년 이라는 과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만 네가 나에게 울었던 그때를, 네가 나에게 절름발이로 와서 엎드렸던 그때를 나는 기억해, 네가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왔던 나는 그 날을 기억해, 네가 이 기도제목 때문에 내 앞에 나와서 하루하루 기도했던 그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기쁨이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굉장히 짧은 순간에 저에게 역사하셨는데 이렇게 풀이해서 해석하다보니 길어지는 것을 여러분 알죠? 저는 오로지 기도의 제목의 결론에만 있었는데, 하나님은 그 기도의 결론뿐만 아니라, 가는 모든 여정과 과정 속에서 저와 함께 동행 하셨음을 알려 주셨다. 그때 저의 기도의 시간 시간의 매일 매일의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은혜가 저에게 있었다.
 
두 번째로 엘리야가 한 실수를 살펴보면, 외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찾았다. 외적인 상황 속에서 드러나지는 그 평가들과 판단들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일들을 가늠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어쩌면 하나님은 엘리야 안에 있는 외적인 환경과 상황들보다 엘리야의 그 마음속의 내면에 있는 그의 성장과 엘리야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가운데 더 집중하고 계셨는지 모른다. 신앙은 두 가지 차원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으로 영접할 때, 외적이 차원의 신분이 변화된다. non 크리스천이었다가 크리스천으로 변화된 것, 예수를 믿지 않고 세속에 물들어가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다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의 외적인 부분들이 조금씩 변화되는 외적 변화가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러한 외적인 신분의 변화뿐만 아니라 우리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기를 원하시는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생의 시간들을 통하여 긴 시간을 가지고 훈련하시며 빚어 가시고 만들어 가시며 이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원하는 어떤 순으로까지 우리를 인도하여 가신다는 것이다.
이 내용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여전히 외적인 상황 가운데 우리의 신앙을 맡기게 되고 우리의 외적 변화만을 위해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이 가득 차 넘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재정이 부족합니다. 하나님, 지위가 부족합니다. 하나님, 학식이 부족합니다. 하나님, 건강이 부족합니다. 하나님, 관계가 부족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길 원합니다.”라고 한다. 물론 여러분 이런 것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간구들을 들으신다. 그렇지만 우리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끊을 수 없는 그 실존적인 정체성이 그것보다 어떠한 것도 앞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면이 뛰어나게 성숙되어지는 사람들은 자유 함을 누리게 된다. 어떤 자유 함인가?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그 목적대로 살아가는 나다움의 자유 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지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면서 내가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매일의 삶에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하여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우리는 자유 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이 뭔지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내가 교회를 있든지, 밖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안에 있든지, 일터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모든 상황 속에서 나의 자유로움을 가지고무엇을 선택 하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왜? 우리 내면 가운데 하나님과의 동행하심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내가 외적인 어떤 것에서 나의 나다움의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어느 누구도 끼어들을 수 없는 그 관계 속에서 나의 나다움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이런 두 가지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 속에서 깨달아야 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우리가 읽은 세 가지의 말씀을 부탁한다.
 
1. 첫 번째는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라고 명령하신다.
-하사엘은 아람왕 벤 하닷의 군대 장관이었다. 그런데 벤 하닷을 죽이고 난 이후에 왕위에 오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람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을 줄곧 괴롭히는 하나님의 회초리로 사용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 이방나라의 왕까지도 기름 부으라는 명령을 허락하신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주권은 ‘이스라엘을 뛰어넘는 온 열방 가운데 다 있다.’라는 것을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것 같다.
 
2. 두 번째는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신다. 사실 님시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 아들이라고 표현된 벤은 자손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기 때문에 님시의 아들, 예후가 아니라 족보대로 표현하면 님시의 손 예후라고 표현해야 되는 것이 맞지만,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표기법이 자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후의 이름의 뜻은 그는 여호와이시다의 뜻이다. 아람의 왕, 요람의 군대장관 중에 한 명이었다. 이후에 유혈 쿠테타를 통하여서 당시에 우상 숭배로 점철되어진 아합의 왕조를 멸하고 이스라엘의 왕조를 5대 왕조인 예후왕조에 이스라엘의 10대 왕조로 즉위하게 된다. 그런데 그 즉위했던 시점은 여러분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14년의 시간의 공백이 있다.
 
3. 세 번째는 아벨볼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신다. 잘 아는 것처럼 엘리사는 엘리야의 후계자이다. 아합 왕의 말기에서부터 아하시아 왕 때까지 오랜 시간동안 활동하며 정치적 인물이고 종교적인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 오늘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엘리야의 손을 통하여서 이루어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내용을 접할 때,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의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이 된다. 첫 번째 하사엘은 엘리사에게 왕으로 즉위될 거라는 예언을 받게 된다. 열왕기하 8장 13절 하반 절에 보면,
 
열왕기하 8:13,
13 하사엘이 이르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기에 이런 큰일을 행하오리이까 하더라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더라.
-첫 번째, 엘리사를 통하여서 아람이 왕이 된 예언을 듣게 하신다.
두 번째, 예후는 엘리사의 선지 생도 중에 한 명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는다. 열왕기하 9장 1절과 6절에 말씀을 보자.
 
열왕기하 9:1,6,
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청년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세 번째,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신의 선지 적 계승을 이어갈 때, 어디에도 ‘기름 부었다.’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 세 가지를 말씀하셨던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가야한다는 것이다. 엘리야는 원했다. 이 위대한 심판과 이 위대한 대결을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완전히 종교적으로 모든 것을 다 뿌리 뽑기를 원했다. 여기서 끝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엘리야는 자신이 경험한 그 충만한 하나님의 역사함을 통하여서 이제 하나님이 여기서 완전히 모든 것을 다 결판내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아니야, 나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야”. 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데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바로 칠천 명이다. 이쯤에서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다시 한 번 칠천 명을 끄집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여러분 왜 엘리야는 이토록 외로웠을까? 엘리야의 눈에 칠천 명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칠천 명의 삶이 당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많은 학자들이 이 ‘칠천’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정말 한 사람이 한 사람 한사람을 세며 꼭 맞는 칠천이다. 라고 보지 않는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수였을 것이라고 보지만 만약 그런 의미로 성경에 쓰여 졌다면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야야, 네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느니라, 혹은 엘리야야 네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대신하여 기다리고 있느니라.”라고 이렇게 표현 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칠천 명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위대하고 뛰어난 선지자, 엘리야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한명 한명이 인생이 셈하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카운팅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카운팅 하시겠는가?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주고 그들과 함께 이 역사의 이야기를 써나나가고 계시는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매일의 순간 가운데 좌절도 있고, 넘어짐도 있고, 무릎도 까지고, 피도 나지만, 오늘 이것이 나의 결론일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 되어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가고 계실 것이라고 마음으로 결단하고 있는 그 한 사람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 이 시대의 칠천 명의 이야기 인줄 믿는다. 하나님은 이 시간 이 시대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매일의 동행하심으로 하나님과 매일이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을 통하여서 오늘 우리에게도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써나가게 될 줄 믿는다. 오늘 저는 성경 두 구절을 더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임하시고 오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과 정말 하고 싶으셨던 한 가지가 있었다.
 
*마가복음 3:14-15,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제자들은 나가서 전도했다. 제자들은 나가서 권능을 행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궁극적인 첫 번째 목적은 무엇이냐면, 그들을 기능인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길 원하셨다. 그들과 함께 마시며, 그들과 함께 동행 하며 매일의 크고 작은 순간 가운데 같이 있기를 원하셨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치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예수님의 삶을 그들의 인생 가운데 받아들였으며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누가 오라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부탁하셨다. 오늘 우리의 삶이 주와 동행할 때,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동행 하는 하루하루가 되어야 한다. 때론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닌 것들도 보일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성으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론 어떤 것들이 너무나 후퇴하여 내 적인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을까 생각되어 지고 염려 되는 인생의 순간도 만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는 그 하루하루가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이 이야기, 끝나지 않는,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서 이 시대 가운데 계속 이어져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의 일상의 삶을 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이야기가 변함없이 이어가게 됨을 믿고 사람들이 눈에 보여 지는 삶이 아닌 하나님 눈에 셈하여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결과만을 지향하며 살지 말고 내면이 자라고 성숙해져서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기억하심을 믿고 우리를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남겨진 칠천 명이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평범한 이야기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항 향기가 배어있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과정을 통하여서 바른 선택들 할 수 있는 용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선명하게 붙들려서 사람들의 장단에 춤을 추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신 그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하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때로는 사람들 앞에 세상 앞에 감추어 두실 때가 있다고 여기고 칠천 명을 남기셨듯이 그들이 무명용사처럼 그들이 멋지게 쓰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감 추인 바 되어서 우리의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기억하심을 믿고 우리를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해 도망을 다녀 굴속에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여기에 있냐고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자손이 주를 버리고 주의 선지자들을 죽여 나 혼자 남았다고 두 차례 더 고백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셨다. 이방 땅인 다메섹에 가서 아람 왕을 세우는 것과 이스라엘 왕 예후를 세우는 것과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는 것 이 세 가지 사명을 주셨는데 엘리야는 의인이 자기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교만을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통해 마음을 내려놓게 하셨다. 이방 땅에서 아람 왕을 세우는 것과 이스라엘 땅에서 왕을 세우는 것 이 두 가지는 목숨이 달려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어려움을 통해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었다. 18절 말씀에서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 하지만 그 안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의인 7000명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주셨다. 새로운 사명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동역 자가 있다는 사실이 엘리야에게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성도들에게 먼저 확신을 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여 용기를 더하시고, 위로하여 열정을 불어넣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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