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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2년 6월 29일)
제목: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으니"
말씀: 요한복음 12:23-25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찬양대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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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3-25,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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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난 월요일에 강릉에 다녀왔다. 비가 차 많이 내렸다. 그곳에 계신 목회자님들은 이 비를 금비라고 부르셨다. 오랜 가뭄에 정신없이 물 붓듯 쏟아지는 비가 금이 쏟아지는 것만큼 좋다고 하신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이 단비가 우리 심령에 금비 같이 쏟아져 심령이 힘을 얻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요한복음 12장이다.
 
오늘 읽은 23절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12:23-25,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영광이 무엇인가? 우리 주변에 영광스런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제가 강남역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한 번 찾아보았다. ‘고층 빌딩’이 영광스러운가? 이기도 하고 ‘화려한 매장’들이 영광스러운가? 찾아보았다. 아닌 것 같아서 신문 기사를 찾아보았다. ‘영광스런 금메달’이란 표현이 많았다. 제가 영국 단기 선교사로 잠시 있을 때였다. 영국인 집사님 댁에 잠시 머물렀다. 그분은 좀 독특한 이력이 있었다. 반가운 이력이기도 했다. 88년 올림픽 때에 영국 국가대표 체조선수로 한국에 왔었다고 한다. 영국의 금메달을 안겨주셨던 분이셨다. 금메달도 보여주셨고 시상식 시상대에서 찍은 사진도 보여주셨다. 영광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집사님이 조금 붙어서 둔해지셨고 메달도 오래 되어서 색이 바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얼굴에서 그날의 활기와 감격은 많이 사라진 것 같았다. 이것이 영광인가요?
 
영광의 사전적 의미는 ‘빛나고 아름다운 명예’라고 나와 있다. 여러분은 빛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유럽에서 허리띠에 주머니를 달아서 열쇠도 넣고 지갑도 넣고 빗도 넣고 나이프 등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이것이 ‘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루이비통’이라는 디자이너는 실용적인 디자이너로 여행용 가방을 선보이며 명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명품은 화가 난 아내나 여자 친구에게 기분을 풀어주는 최고의 묘약(妙藥)이 되었고 미용실에 갈 때 나를 가장 영예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되었다. 루이비통이 영광인가?
 
이사야서는 이 모습을 보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한다고 말씀한다. “어디서 영예를 얻으면 되는가?” 이런 말이 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출세하여 이름을 떨치다). (의금(衣錦)지영祗迎-비단옷을 입고 돌아가는 영광)이란 뜻이다. 비단옷과 출세가 여러분을 영예롭게 하는가? 이것이 영광인가?
 
성경에서 이 땅에서 최고의 영광을 솔로몬의 영광으로 표현한다. 가장 많은 돈과 온 세상의 떨친 명예, 그리고 가장 큰 학식, 많은 재산만큼 많은 여자를 가졌던 솔로몬 왕이었다.
 
*마태복음 6:29,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도대체 영광이 무엇인가? 영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죽음을 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에 한 알에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LA에 한 장의사(葬儀社)가 이런 책을 썼다. 책 제목이 좀 그렇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이상한 제목을 가진 책 제목 때문에 한 기자가 흥미를 느끼고 책의 저자인 ‘케이틀린 도티’를 찾아갔다.
 
인터뷰 후에 작가가 남긴 말이다.
“옛날에는 묘지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길거리에는 거죽이 덮인 시체를 볼 수 있었고, 방에서 할아버지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손자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은 자들을 깨끗하게 얼굴을 씻기고 살아있는 자처럼 화장을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삶에서 내쫓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죽음을 우리 곁으로 다시 불러왔습니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세상은 사망 몇 명, 감염 몇 명으로, 날마다 숫자로 죽음을 세어보았습니다. 오늘 만난 사람이 내게 죽음을 전해 줄까봐 손도 잡지 않고, 이 사람의 흔적이 남은 것은 소독제로 부지런히 지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호흡마저 마스크로 가려버렸습니다.”
 
고(故) 이어령 교수님은 ‘마스크의 그 한 장이 생명이 된 사회’라고 하셨다. 전 인류가 죽음을 잊고 돈 놀이, 관능적인 감각에 빠져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 순간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을 매일 마주하고 있음을 다시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매일 죽어가듯 살아가는 인생은 영광을 알기 어렵다. 죽음의 문제는 늘 큰 산이 되어 영광을 가린다. 죽음의 산을 옮겨야 영광을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넘어 영광을 알 수 있는가?
 
*요한복음 12:24,
24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쉽지가 않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용어가 있다. 경험해보니 알겠네, 라는 지식이다.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알 것이다. 김두환이라는 주먹쟁이가 종로에 막 나타날 때였다. 자기소개를 이렇게 한다. “나 김두환이야.” 김두환이 누구냐고 시비를 걸어오면 빠바박 ~~주먹을 날려버린다. 맞아 본 사람은 김두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알게 된다. 이런 지식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도 알게 한다. 우리 성도님들도 알 것이다. 김승진 목사와 김두환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제가 이길 것으로 말씀하시는데요. 구약 성경에 이러한 객관적 지식이 등장한다. 당시 최고였던 이집트 왕 바로가 묻는다. “여호와가 누구인데 나에게 명령하느냐?” 내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다. 이 재앙을 경험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열 번째 재앙을 경험하던 날,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게 된다. 아 놓아주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놓아줄 때까지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도님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무엇인가?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 그분을 만나야 하고 그분을 만난 이를 통해 들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지혜로운 스승을 안다는 것도 아니고, 민족의 해방과 혁명을 이루려고 했던 역사적 인물을 만나려고도 아니다. 가난한 자, 눌린 자를 사랑했던 한 박애주의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병을 고치고 복을 주는 어떤 신화 속의 인물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배웠던 이들의 증언을 듣는 것이며 예수님의 삶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하는 것이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성령을 통해 오늘 믿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요한이 만난 예수님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알려주고 계신다. 요한은 먼저 예수님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표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표적이란 예수님을 통해서 실재 하시는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어느 신학자는 이야기 한다. 기적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지만 표적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한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복음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물질을 바꿀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계신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실 때는 시간과 공간을 제약 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모습을 아니 계신 곳 없으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실 때는 어떠하셨는가? 시간의 주인 되심을 나타내셨고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는 결핍된 세상 안에 창조주 하나님의 풍성한 끊임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물위를 걷는 사건은 자연법칙을 다스리시는 이 만물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셨고, ‘이 불행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를 물어보는 그 질문 앞에 인생의 주인이 너희가 운명으로 말하는 그 주인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앞에 드디어 죽은 나사로의 이야기가 등장을 했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을 만난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 섰다. 그리고 분노하셨다. 예수님의 분노는 직업적으로 그 앞에서 곡하는 자들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을 향해 원망 섞인 말소리를 드러내는 마리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죽음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무덤으로부터 나사로를 불러낸다. “ 나사로야 나오라”, 분명히 죽었고 이제 썩어가기 시작했던 육신, 땅에 묻혀버린 육신을 불러내신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려주는 표적이다. 죽음의 권세를 꺾는 생명이 주가 누구신지, 참된 생명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요한은 요한복음에 절정이 오는 것처럼 오늘 말씀을 통해 목소리 높여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생명은 무덤에서 시작되었다. 제가 청년부사역을 했을 때, 하루 만에 인생을 다 돌아보았을 때가 있다. 토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장례식에 발인 예배와 하관예배를 인도하러 갔다. 부지런히 서둘러 정오에는 결혼식 예배를 집례 했다. 그리고 저년에는 돌잔치가 있어서 찾아가 돌 예배를 드렸다. 퀴즈를 내겠다. “김승진 목사님은 제일 영광스런 시간이 언제였을까요?” 1번 돌잔치, 2번 결혼식, 3번 장례식, 2번 결혼식이라는 생각이 드실 것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3번이라고 한다. 성경은 영광을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광은 예수님이 땅에 묻히는 것이라고 한다. 아니 태초에 저주 받은 땅에 치는 것이 영광이라고? 이것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게다가 땅은 죄로 인해 더럽혀진 곳이다. 태초에 생명이 창조되었던 곳이었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던 곳이었지만, 하지만 분명히 죄로 더럽혀졌다. 인간처럼 땅도 저주를 받아 죽음만 남아 있다. 결국 땅은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원래 땅은 다 썩게 만든다. 인간의 몸이 땅을 흙으로 돌려버린다. 이것이 이치이고 지금까지 그랬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밀알을 보여주며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묻히면 썩어서 쓸 수 없고 죽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썩고 죽고 다시 싹을 틔워가는 과정을 말씀하신다.

죽음과 생명의 사이에 서서 죽음과 영광의 사이에 서서 예수님의 죽음이 열매를 어떻게 맺게 되시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계신다. 죽음의 땅에서 소멸과 상실이 아닌, 생명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 주고 계신다. 태초에 동산, 에덴동산의 땅처럼 땅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처럼, 땅에서 생명이 일어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죽음의 나라가 회복된 나라로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것이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고 계신다. 이 놀라운 가르침을 당시 성경학자들도, 제자들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다. 우리도 그렇다.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전쟁의 소식에 생명이 위협이 될까 였다. 연일 보도되는 인플레이션의 소식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지키지 못할까 두렵다. 환경문제와 새로 만나는 바이러스 소식은 생명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렵다. 당장에 생명을 위협하는 이들 앞에 정신이 없다.

 
*요한복음 12:25,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12:10-11절에 보면 나온다.
 
*요한복음 12:10-12,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예수님이 기껏 나사로를 살려놓았다. 그런데 이 나사로를 이제 죽이려고 한다. 이유는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장에 먹고 살기 위해서 체제 유지의 위협을 받을 것 같아서 나사로를 죽이려고 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왜 살리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다. 그들이 죽이지 않더라도 나사로는 또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왜 살리셨을까?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나사로를 살린 기적은 제가 말씀 드렸던 일곱 가지 기적 중에 마지막 기적이며 표적의 절정이다. 표적이란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보면 예수님이 누군지 알 수 있다. 지금 이 손가락은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생명의 책이라고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생명,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 생명의 떡, 죽어도 사는 부활의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시다.죽음의 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말씀은 생명의 근원과 죽음이 대면하는 현장이다. 죽은 존재와 산 존재가 공존하는 장면이다. 죽음이 이기느냐, 생명이 이기느냐 전쟁이 밀알이라는 이 씨앗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죽어가는 부분들, 죽어왔던 부분들, 죽은 자들 앞에 살리시는 예수님이 계신다. 생명의 예수님이 계신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계신다. 이 생명은 죽음 앞에 선 생명이 소멸됨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다. 결국 이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생애 문제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생명의 산 주인이 되신다. 어떤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두렵게 해도 어떤 죽음의 무지가 우리를 속여 올지라도 죽음을 죽이시는 생명의 권세는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만 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일어난 뼈들이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뼈들이 다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 되었도다 하느니라.” 이 때 하나님께서 37장 2절 하반 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에스겔 37:13,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에스겔은 이미 보았다. 죽음에서 생명이 일어나는 영광된 인간을 보았다. 밀알이 열매 맺는 것을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것을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이 부활하는 것을 보았다. 죽음의 땅이 솟아오르는 희망의 땅이 되었다. 이 땅은 약속의 땅이며 좋은 땅이며 새 땅이며 소경이 보는 땅이고 앉은뱅이가 걷는 나라이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는 땅이고, 귀머거리가 듣는, 가난한 자가 없는 땅이며, 죽음이 없는 땅이고 영생하는 땅이다. 이러한 땅에서는 영광을 볼 수 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영광스럽다. 라고 말한다. 죄악으로 죽은 우리 육신이 예수의 생명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볼 때, 영광스럽다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 때, 예수님을 믿을 때, 생명의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알고 계신가? 정말 그 생명의 주 되신 우리 주님을 믿으시는가? 다시 요한복음 11장,
 
*요한복음 11:25-26,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의 몸에 생명이 거한다. 예수님 안에는 영광의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고 있다.
 

*요한복음 1:14,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놀라운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땅의 흙 같은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불렀다. 토기장이가 흙을 떼어 주물주물 거려 만든 그릇을 질그릇이라고 한다. 이 그릇이 쓸모 있는지 버려야 할 것인지를 토기장이가 판단한다. 누가 볼품없고 쓸모없이 보이는 질그릇이지만 토기장이가 그 그릇을 가지고 와 귀한 것을 담는 다고 한다. 그 형편없는 그 그릇을 세계 3대 진미를 그 그릇에 담아내기 시작하며, 그 그릇은 귀한 손님을 대접한 그릇이 되고 또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이 왕의 식탁에 올라가면 왕가의 가보(家寶)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이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하나님은 담으셨다. 그것이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주셨다. 흙으로 만들어진 그분 안에 영광을 담아주셨다. 그 보배를 이 질그릇에 담으셨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질그릇 같은 내 안에 여러분 안에 영광을 담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아 주셨다. 성경에서 가장 귀한 것,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참 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을 담아 우리를 가장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죽을 수 없는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고린도후서 4:7,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담으신 그 영광이 다시 영원한 생명을 움트게 한다. 삶과 죽음의 자리를 늘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죽음이 생명의 결과이며 결국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복음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말씀을 맺겠다.

국내 전도 부를 섬기며 아주 먼 곳에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목사님에게 물었다. “왜 이 먼 곳에 교회를 세우셨나요? 이 마을에 아무리 많아도 백여 명이 될 것 같은데, 5-6분의 성도님을 모시고 평생 함께 이곳에서 목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신다. “생명이 필요한 곳,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곳, 복음이 요청되는 땅 끝을 가는 것은 이유도 까닭도 없이 가야하는 것이 마땅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내게 그분의 생명을 누구보다 멀리 외진 곳에 살았던 나를 누구보다 홀로 살아가던 날을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전 먼 곳까지 장례를 다녀온 적이 있다. 어머님이 믿지 않고 돌아가셨던 터라 성도님은 장례를 부탁하기도 어려운 것 같았다. 도착하여 입관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어머님 홀로 사셨던 그 마을에 목사님이 오셨다. 성도님이 알지 못하셨을 때,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시던 목사님께서 그 어머님을 늘 찾아오셔서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알게 하여 주셨기에 그 어머님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되셨다. 왜 밀알이라고 하셨는가? 밀알은 보이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 같다.
 
팔레스타인 섬 동네 출신인 젊은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밀알이셨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 주실 때, 사막에 쓸데없는 떨기나무에 임하실 것이 아니라, 본인이라면 정 2품 소나무에 임했을 것 같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인가? 하나님은 소박하게 위대한 일을 하셨다. 밀알은 매장 당하고 묻히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그분은 죽으셨기 때문에 위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지셨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열매와 씨앗은 다르다. 우리에게 열매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씨앗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열매를 보기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씨앗들이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파묻힐 준비를 하는 씨앗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다.
 
♣요약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따라 영광을 보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이 땅에서 국한 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니 믿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한다. 주님의 모든 제자들이 땅에 잘 심겨진 밀알처럼 죽고 썩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믿음을 통해 생명을 허락하시고 영광 가운데 우리를 만나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를 올려야 한다. 죽음의 귀결과 인생이 귀결이든 인생의 그림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변화시키실 영광의 말씀 앞에서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열매 맺는 성도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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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6월 26일)
제목: "성찬의 부흥"
말씀: 고린도전서 11:23-26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권진우 부목사님(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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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오늘은 6.25,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72년 전에 오늘 우리 민족은 백척간두(百尺竿頭),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은 상황이었고, 풍전등화(風前燈火), 큰 바람 앞에 꺼질 촛불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열방을 보내 주셔서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이 민족을 구원해 주셨다. 근본적인 감사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를 수많은 죄악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오늘 이 6.25, 72주년에 성만찬 성찬예배를 주님 앞에 드리게 하심을 감사영광 돌린다. 지난 2년 6개월 동안 저희가 이 코로나 때문에 이 성찬의 은혜를 감당하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는데 오늘 이와 같은 귀한 시간을 허락해 주셨다. 오늘 이 예배에 앉아만 있어도 은혜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이 자리 이 순간까지 나를 불러주심에 감사와 찬양과 감격이 있을 수 있고 어떤 분들은 내가 성찬을 받기에는 좀 부끄럽고 면구스럽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의 복합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감사도 있고 죄송하기도 할 것이다.
 
여러분,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힘들었다. 오늘 이런 성찬을 통하여 그 1세기의 압박과 고통과 수많은 박해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늘 청청한 시냇물 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그렇게 은혜의 보존 장치를 잘 감당을 했다. 오늘 이 성찬을 통하여 모두가 다 정결의 영, 거룩의 영, 부활의 영이 충만해지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훈련의 마지막 종강 식을 했다. 종각 식을 무엇으로 하느냐면 오늘처럼 성만찬과. 세족식을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종강 식을 했다. 결국 우리가 이제 신앙생활을 보면 주님의 문제를 체험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한다는 것은 주님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것이 You are what do you eat?=It becomes what you eat.(네가 먹는 대로 된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처럼 먹고 마시면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이다. 우리 세상의 것으로 먹고 마시고 마귀를 먹고 마시면 또 그것들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성찬식과 세족식을 예수님 제지들에게 마지막 종강 식을 하시고 그 다음 또 말씀의 고전 10장 31절을 보자.
 
*고전10:31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성찬, 떡잔을 특별히 이렇게 이제 앞에 놓고 있는데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래서 오늘 11장 뒤에 12장 14장이 은사에 관한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특별한 은사들이다. 섬김이나 말씀의 은사,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은사들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 은사들을 사용하고 13장은 가장 큰 은사는 사랑하는 은사이고 고전 13장은 사랑장이다. 그러니까 12,13, 14장은 은사를 발휘하는데 기초가 무엇이냐면 오늘처럼 성찬식의 은혜를 유지해야 은사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님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소위 은총의 통로, 은혜의 보존 장치를 두 가지를 주셨다. 하나는 말씀ㅇ르 주시고 하나는 성찬을 주셨다. 그래서 이 성찬은 눈에 보이는 말씀, 그렇게 성찬을 말씀할 수 있다.
 
이 배경을 가지고 오늘 성찬을 우리가 떡과 잔을 기념하면서 실천 사항의 몇 가지를 정리를 하겠다. 이 성찬에 대해서 우리가 2년 6개월 동안 좀 더 깊이 있게, 오늘 이 본문을 어떻게 보면 성찬의 가장 클래식한 말씀이고, 이 본문이 성찬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가장 표준 말씀이다. 이런 말씀을 앞에 놓고 이 성찬에 대해서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정리를 해야 되는데, ‘음식에 대해서 진심이다.’ 그런 말을 더러 한다. 뭐 옷에 대해서 진심이다. 찐 마음을 다한다. 그런 것처럼,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은,
 
I. 성찬에 대해서 진심인 성도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29,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저는 어릴 때부터 성찬에 참여하면서 27-29절을 보면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성찬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분열도 있고 이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많아가지고 성찬에 대해서 이렇게 식사처럼 해서 성찬을 구분을 하지 못하고 했는데 잘못 된 것을 모르게 서로 이렇게 파벌이 있었다. 진리를 지키는 데는 우리가 잘 수고를 해야 하지만, 성찬의 참여하는 데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참여를 해야 한다. 부자는 부자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그때는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찬을 제대로 잘 못 지킨 것이다.
 
*고린도전서 11:30,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찬식을 잘못 지켜가지고 약한 자, 영육 간에 약해진 것, 병든 것,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병든 것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고 잠자는 것,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성찬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어떻게 보면 거룩한 징계이다. 그리고 이 징계는 꼭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표준이니까 좀 강하게 질책을 받았다. 예를 들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을 해서 죽어버렸다. 지금 같으면 거짓말을 해서 다 죽는다면 오늘 시체가 둥둥 떠 다닐 것이다. 초대 교회는 좀 강하게 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찬에 참여해가지고 좀 진심으로 대하지 못한다고 약해지고, 병들고, 죽는다면 “나는 그냥 성찬에 참여를 안 할 거야. 나는 적당히 믿고 참여를 안 할 것이다.”라고 그런 마음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마음인 것이다. 그런 아닌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하여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것이다. 가족은 부족한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고 약한 것도 서로 나누어가지고 다시 회복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릇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는데, 성찬식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고전 11:32,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우리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징계는 사람을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는다. 징계는 자식을 망하게 하지 않는다. 나태와 태만이 자식을 망하게 하는 것이고, 나태와 태만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하는 것이지 징계는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 자신을 깊이 들어보면 거룩한 징계가 있을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자 그런 마음으로 모든 성도들이 정경의 영으로 무장하여 성찬의 진심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맞춤의 은혜를 주시길 소원한다. 그렇다면 성찬을 진심으로 다가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II. 성찬에 대한 진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절감해야 한다.
 
*고전 11:26 ,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고전 11:23-25,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어떤 교회의 전통인가? 아니면 누가 교리와 신학으로 만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인가?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직접 제정하시면서 기념하라고 하시고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두 번 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왜 기념하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속성은 잘 까먹고 은혜를 잊는다. 우리도 모르게 자꾸 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잊지 않도록 매일 단련 하도록 매일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현장이 먹고 마시는 것, 그럴 때마다 주님의 성찬을 기념하는데 기억하는데, 기억하여야 한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 오늘 이 자리에 영 가족이 참여하면서 우리는 주의 죽으심, 성찬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깊은 은혜를 절감하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지고, 마음이 뭉클 해져 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감격을 마음에 새기고 새기라는 것이다. 저는 오늘도 아침에 기도하고 나오고 성찬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나오면서 어릴 때 저희 할아버지가 주일 교회 가실 때 하얀 한복을 입고 가시는 것처럼 저도 오늘 할아버지처럼 성찬에 참여하면서 제 마음에 ‘주님, 제가 무엇이 관대,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 제가 무엇인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내 무언데 오늘 이 성찬식을 통하여 절감이 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데,’ 라고 하면서 준비를 했다.
 
웬일인가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비로운 영역이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에 대해서 절실하게 깨닫고,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하게 하여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언제 감동해 보았는가? 언제 눈물을 흘려보았는가? 무얼 보면 감동이 되는가? 언제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가? 저는 메말라서 감동이 없습니다. 저는 감동의 DNA가 다 사라졌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눈물이 회복이 되어야 한다. 그게 성찬의 부흥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 코로나 걸렸다고 그러면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은 누가 코로나 걸렸다고 하더라고 그냥 무덤덤하다. 만약에 십자가의 사건이 그렇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이 밤에 아프고 불덩이가 되어가지고 잠을 못자고 여러분의 손자손녀가 아파서 어린이집을 못가고 밥도 못 먹는다고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마음이 아프고 그냥 안타까울 것이다. 자녀가 아파도 마음이 무너지는데,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심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얼마나 어려우셨으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는가? 영적인 주님의 그 처절한 고통을 생각하면 오늘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한다는 것이 너무나 특별한 것이다.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데 우리나라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다. 남북이 만나는 모습이다. 이 이산가족의 이울음은 민족의 영원한 체루 탄이다. 열두 살 난 딸아이를 잠시 놔두고 잠시 남쪽에 다녀오겠다고 어떤 어머니가 피난을 했는데 그 딸아이를 60년 만에 만나는 것을 제가 보았다. 열두 살 난 딸아이가 61세가 되고 그 어머니는 96세가 되었다. 그리고 96세의 어머니가 딸아이를 안고 어떻게 이렇게 만났는가!! 꿈속에서도 보고 싶은 너를 만났다. 60년 동안 한 번 도 잊지 못한 딸을 만난 것이기에 엉엉 울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이 눈물바다가 되었었다. 그걸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십자가의 은혜, 주님의 살과 피를 앞에 놓고 우리가 맹숭맹숭하다. 이건 진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 신비한 것이고 이것은 정말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로마서 4:25,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로마 병정들에게 내어주심이 되셨다. 육신이 다 찢기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포기한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그냥 있을 수 없다. 십자가의 피를 깨달으면,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 2장 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전 2:2,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죽하면 그래서 성찬의 부흥의 우리 나름대로 공식이 있다면
 
▷신앙생활이 은혜는 십자가와의 거리에 정비례한다.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주심 된 예수 그리스도께 십자가에 다가가 앉을수록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십자가에 더 멀어질수록 우리는 병이 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이 왜 병이 들었는가? 내가 예수 믿는다면서 왜 그렇게 우울한가? 나는 아직까지 신앙생활에서 왜 그렇게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가? 그런 분이 계시면 오늘 성찬식을 통하여 그 멀어진 십자가를 통하여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오늘 십자가 앞에 다가가 주님을 바라보는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우리는 죄의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우리는 죄의 중력권에서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력이 있는 만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죄의 본능이 더 살아나고 십자가와 더 가까워지면 죄를 이겨낸 죄의 중력을 이겨내는 힘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죄의 중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야 하고 특별히 성찬을 통하여 십자가 앞에 더 살갑게 다가가 앉는 축복을 주시기를 소망한다. 십자가에 다가가 앉을수록 그 은혜를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인생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다. 인생을 지그재그로 낭비하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 다가 앉을수록 갈지(지(之))로 살던 인생이 집중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는 것이고 덜 중요한 인생을 낭비하거나 그렇게 헛되이 하지 않는다. 집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 주님 진짜 십자가를 깊이 알고 십자가가 나에게 진정한 자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려면 오늘 두 가지 기도 제목을 가져야 한다.
 
III.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흔적(痕迹)-(상처(傷處))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다가가 앉는다는 것은 그냥 다가앉는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때문에 우리에게는 상처가 있다. 바울 같은 경우는 갈라디아서 6:17절에 무엇이라고 하는지 말씀을 보면,
 
*갈라디아서 6:17,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십자가 앞에 다가앉는 분들은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 십자가의 상처이다. 이게 상처이지만 명예로운 신앙의 훈장이다. 바울 같은 경우는 사도행전 14장 같은 경우를 보면 구스드라 섬에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져가지고 바울이 죽은 줄 알았다. 죽은 줄 알고 거적때기 에다 바울을 둘둘 말아서 버린 것이다. 바울의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고난을 당할 수가 있는가? 라고 제자들이 엉엉 울고 있는데 바울이 다시 살아났다.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냐면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고 제대로 따르려면 우리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 예수님을 따르는 흔적으로 40이 하나 감한 매를 195번이나, 서른아홉 대를 195번이나 맞았다는 것이다. 이 태장을 맞으면 당시 그 고통은 대단했다. 태장을 열 대 맞으면 살점이 찢어지고 스무 대를 맞으면 피를 토하고 30대를 맞으면 혼절한다. 이 태장을 40번을 맞아서 시체로 실려 간 사람들이 많다. 이것을 바울은 다섯 번이나 맞았다. 기가 막히다. 아마도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바울에게 있는 십자가를 깊이 묵상한 삶의 바울의 삶의 흔적이었다. 헬라어로는 ‘스티그마’이다. 흔적들-스티그마 타(복수), 수많은 흔적들이 바울에게 있었다.
 
예수님의 물과 피를 흘리신 그 흔적을 생각하면서 바울은 십자가의 흔적을 갖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늘 햇빛을 보지 못하는 분들은 사무실에서 얼굴이 하얗게 된다. 야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굴이 많이 탄다. 그것이 삶의 흔적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주시는 것처럼 흔적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흔적이다. 우리 마음에 두 가지 거룩한 상처가 있다.

▷첫째-죄를 고백하는 상처.
-회개에 대한 상처이고 죄를 자백하는 상처이다. 여러분이나 저는 회개하고 자백해봐서 알지만,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 여러분 죄를 회개 하려면 몸부림을 치고 떼굴떼굴 굴러야 한다. 죄에 대한 좋은 의미에서 상처이다. 그러니까 오죽하면 죄의 회개에서 힘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죄를 지지 말아야지 이렇게 할 정도로 죄의 고백에 대한 상처이다. 십자가에 죄를 고백하는 상처이다. 그래서 이 상처는 마음이 순전하면 순전할수록 영적으로 더 정결할수록 이 상처가 더 큰 것이다. 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내가 죄인의 괴수라고 한다. 어떻게 바울이 죄인의 괴수가 될 수 있는가? 물론 처음에 예수님을 핍박할 때 좀 그런 게 좀 있었지만 나중에 더 주님을 닮아가고 영적으로 더 순전해지고 더 정결의 영과 거룩의 영이 충만할 때도 ‘내가 죄인의 괴수이다.’ 왜냐하면 에 대한 회개와 상처 때문에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게 죄에 대한 회개와 상처가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오늘 이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죄에 대한 회개에 대한 상처가 성찬이 되기를 바란다.
 
둘째-주님 사랑하는 상처.
-주님 사랑하는 상처이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사랑 때문에 상처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것 때문에 생기는 상처이다. 우리 주님은 내 생애의 전부요, 시작과 마지막이요, 올인 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가 있는 것이다. 주님 사랑한 것 때문에 억울함을 당할 수도 있고, 손해도 볼 수도 있고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것 때문에 세상 적으로 상처가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그 본질은 으깨어지는 것이고 부서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마음의 자세는 십자가를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으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이다. 자아가 깨어지는 것이다.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깨어지는 것이다. 떡을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알갱이의 곡식이 가루로 빻아져야 하고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포도알들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 자신도 으깨어져야 하고 부서져야 하고 그런 것이다. 예전에 복음 성가가 있지 않은가?
 
♬부서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이 가사는 신앙의 깊이를 아는 고백이다. 이 사랑의 상처는 섬기다가 되는 상처이다. 교회에서 섬기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사랑하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를 섬기다보면 의견 불일치로 행정적인 일 때문에 진리 문제가 아니라 캐미가 안 맞아서 상처 받는 사람도 있다.
 
그럼 저 같이 목회자로서 상처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교회 내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아픈 분들을 보면 깊은 상처를 받는다. 장애를 가지신분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을 정도로 고통 하는 우리 젊은이들, 진짜 고통 하는 그 아이들을 보면 섬김의 상처가 있는 것이다. 생각의 틀이 좀 달라가지고 어떤 판단의 기준이 달라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볼 때마다 섬김의 상처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의 상처고 섬김의 상처이다. 우리 가운데 주님 섬기다가 예를 들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내가 남편이 예수를 안 믿어서 십년 동안 기도를 하는데도 남편이 안 돌아오는 것이다. 이십년 삼십년 기도했는데도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을 때, 남모르는 그 구원을 위한 구원사역 위한 상처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40년 이상 기도를 했는데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상처는 주님과 나만 아는 상처가 아닌 것이다. 이 상처가 십자가를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오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백의 상처와 섬김과 사랑의 상처를 주님이 치유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성찬은 오늘 우리 때문에 거룩하고 깊은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찬의 깊이 들어가면 이 성찬이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고전 10:16-17절을 보면
 
*고전 10:16~17,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오늘 강한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무슨 말이냐면 피와 떡은 이것이 떡과 피가 그냥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축복의 잔과 축복의 떡이 되는 것이다. 이중 부정은 더 큰 강한 긍정이다. 축복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참여하는 축복의 잔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떡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축복의 떡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축복이 나중에 어떻게 연결되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얼 먹느냐의 따라서 우리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요한계시록 3:20,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단순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놀라운 축복의 떡과 축복의 잔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요한계시록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나오는 것이다. 어린 양 혼인 잔치 집에서 먹고 마시는 그 하나님의 예고편을 지금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예고은혜 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늘 하는 이야기가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오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축복의 떡과 축복의 잔이 되는 것이다. 제 말씀이 아니라 요한복음 6:55절에 보면,
 
*요한복음 6:55,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무얼 먹고 무얼 마시느냐가 여러분의 영적 건강이 결정된다. 우리 평생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인 것이다. 마시는 것은 성령이 우리의 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 예수님으로 먹고 마시도록 하자. 사탄의 것을 먹고 마시면 뱀처럼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얼굴이 다 예수님의 얼굴처럼 되어간다. 얼굴이 성자처럼 되어가는 것이다. 예수님 믿는 50년 60년 70년, 80년이 되면 다 얼굴이 성자처럼 것이다. 왜냐하면 날마다 주님을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오늘 그 현장을 우리가 체험하길 바란다. 찬송가 웬 말인가 날 위하여 를 찬송하면서 오늘 다시 한 번 이 자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리, 어린 양 혼인 잔치 집에 리허설, 상처가 있더라도 그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훈장이 될 수 있도록 혼인잔치를 미리 맛보는 예고편이 되길 바란다.
  
♣요약

6.25 72주년을 맞이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가 주님의 구원하심의 인도하심으로 나라가 살았던 것처럼 코로나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답답하고 영적으로 패배주의에 빠진 것들이 있다면 오늘 성찬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살아나고 부흥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은밀한 죄들, 나태와 오염된 것, 부끄러운 것을 주님께서 오늘 성찬을 통하여 다 씻어져서 우리가 떡을 받고 기념하는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치유와 새 힘을 공급받기를 소원한다. 주님의 보혈의 잔을 통하여 영적 가족 모두가 주님 안에 참된 팀웍을 가져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서로가 소중함을 깨닫는 영안이 열리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먹고 마실 때마다 은혜의 보존 장치인 말씀과 성찬을 기억하고 주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성찬식을 통해서 진정한 기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 때문에 창에 찔리시고 상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고 메마른 눈물이 우리의 가슴을 은혜로 충만히 적시는 성찬의 부흥이 되길 소망한다.
 
-성만찬은, 유월절 전날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성례로서, 행동하는 설교의 형태를 가진다. 성만찬은 교회의 2,000년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거행되어 왔다. 이는 주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고, 재림의 소망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으로 말세의 교회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먼저 자기를 살피고 분별한 후에 믿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자신을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또한 성만찬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귀중한 교회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의식은 단순한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구속 사건의 재연으로써, 이미 주신 위대한 구원을 재확인하는 놀라운 은혜가 내포되어 있다. 만일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하면 주님의 징계를 받아, 초대 교회처럼 교회 안에 병든 자와 죽는 자들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은 때로 징계를 통해 우리들에게 우리의 무지와 죄를 가르쳐 주신다. 따라서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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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6월 25일)
제목: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말씀: 여호수아 14:6-15
찬양인도: 사랑광주리, 이웃사랑선교부, 한중국제교류재단 연합
대표기도: 이석우 집사님(복음통일아카데미 1기 생도 회장)
말씀읽기: 김호재 형제(북사선 청년순장), 설주향 자매(북사선 청년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학진 목사님(미국 뉴욕장로교회)
마무리기도, 암송: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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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4:6-15,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제 마음의 영적 고향인 사랑의 교회를 다시 만나서 정말 기쁘고 참으로 반갑다. 특별히 복음적 평화통일 토비새에 귀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담임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감사드리면서 이 시간을 통해서 작은 종의 입술을 통해서 귀한 말씀이 우리 모두가 함께 은혜를 받고 소망을 받고 믿음으로 다시 한 번 힘 있게 전진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한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지금 내게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내용이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 가나안 땅을 약속한 땅을 정복한 후에 12지파들이 땅을 하나님의 약속대로 분배를 받는 이런 상황 가운데에 유다지파의 대표였던 갈렙이 이 헤브론 산지를 내게 달라고 요청의 내용의 말씀이다. 이 요청의 내용이 얼마나 귀하고 이 믿음의 담대한 요청인지를 우리가 뒤 배경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특별히 7절을 보면,

*여호수아 14:7,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내 나이 사십 세, 지금 갈렙의 나이는 85세이다. 그러니까 45년 전에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그 그때 받은 약속인 이 산지를 45년이 지난 이 시간에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가데스 바네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모세가 이 가나안 약속이 땅을 이제 정탐하기 위해서 12지파 중에 각 지파의 리더 한 명씩 뽑아서 이제 그 가나안 땅으로 정탐하도록 보낸다. 그중에 한 사람이 유다지파 갈렙이었다. 이 열 지파의 사람들은 돌아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한다. 보았던 현실 그대로 저희들은 보고를 하면서 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심란케 하고 간담하게 하였다고 표현한 것처럼 절망스러운 슬픔 가운데 빠지게 했다. 그들의 보고를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이 그 땅을 우리가 도저히 존경할 수가 없고 비교가 안 된다며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로 느꼈고 그들이 우리를 보았을 때도 메뚜기와 같은 그러한 존재로 여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다른 보고를 했다. 믿음의 보고를 했다.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올라가서 점령할 수가 있고 그들은 우리의 먹이이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담대한 믿음의 소리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부정적인 시대 보고의 마음에 동요가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은 저들의 믿음을 더욱 더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이제는 긴 광야의 생활을 통해서 연단을 시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지금이라는 이 시점에서 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는 과정 가운데에 이 헤브론 산지를, 모세를 통해서 헤브론 약속한 산지를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십시오.”라고 갈렙이 지금 요청하고 있다.
 
여러분,
‘이 산지를 내게 달라’ 라고 하는 이 믿음이 왜 귀한가? 왜 이 갈렙이 지금 하나님 앞에 특별히 여호수아 앞에 달라고 하는 이 믿음이 귀한가? 45년 전에 갈렙이 성령 충만 했다. 그 가운데서 민수기 14장을 보면
 
*민수기 14:8,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믿음을 갈렙이 그 견고한 땅을 통해서 보았던 것이다. 바로 이 믿음이 갈렙에게 있었고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45년이 지난 이후에 이 땅을 결국 갈렙에게 준 것이다. 여러분 이 산지는 실은 아직 정복되지 않은 45년 전에 보았던 그대로 그 강력한 아낙 자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조금 더 올라가면 더 강력한 드빌, 주민들이 살고 있는 난공불락의 산지이다. 열 두 지파들이 거의 지금 땅들을 점령해서 분배를 받고 있지만 지금 갈렙이 그 헤브론 산지를 요청했을 때는 헤브론 산지는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견고한 점령되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다.
 
갈렙은 그 땅을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비록 85세이지만 지금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능히 싸울 수 있다.”라고 한다. 더욱 더 나아가서 갈렙은 다음 세대와 함께, 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하는 일에 참여할 자들을 초청한다. “누구든지 나와 함께 이 헤브론 산지에 가서 이 땅을 차지하는 일에 동참한다면 내 딸 악사를 그에게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청년 옷니엘이 그 일에 감동을 받고 믿음으로 참여하여서 결국 이 갈렙의 사위가 되고 잘 아시는 대로 이 사사기 시대의 첫 번째 사사가 되는 제너레이션트 제너레이션, 하나님께서 그 다음 세대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믿음의 아름다운 영적 가문이 된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다.
 
작년 5월 달이었다. 코로나 한창 힘겨운 그 시기 가운데에 하나님 주신 마음도 있고, 뭔가 돌파가 참으로 필요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주신 감동이 있어서 40일 연속 금식기도 릴레이 특별 40일 특별새벽부흥회를 하자고 했더니 아멘!! 하셔서 ‘40일 특별새벽부흥회’를 부족하지만 저 혼자 인도하는 시간이 있었다. 하나님이 주셨던 주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1:3,이 저에게 큰 감동으로 왔다. 도대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저도 신학하고 다 했지만 깊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생각할 기회는 없었다. 어떤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루하루 물어가면서 40일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주제를 기도하면서 말씀을 나누었는데 저나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가운데 흐르는 중요한 뼈대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이 언약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이라고 하는 흐름 속에서 당신이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것을 성취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나라, 구약에서는 ‘굿투’, 신약에서는 ‘마실래’ 라고 하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는 땅의 회복들, 이것이 하나님이 이 땅을 바라보시는 마음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죽어서 가야 되는 그 하늘나라 천국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가운데 가지고 온 지금 우리가 누려야 되는 우리가 차지해야 되는 다스리고 점령해야 되는 그 하나님의 땅들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 가운데 불가능한 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한 영에게 잠시 빼앗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선포하고 점령하고자 신실한 충성스런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땅들을 땅 끝까지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 갈렙이 바로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에 모세를 통해 약속했던 “그 땅을 지금 내게 주십시오.”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가장 아린 아픔이 무엇인가? 너무나 잘 안다. 분열된 이 땅의 아픔이 아닌가? 뭐 저희 아버님은 평안도, 저희 어머님은 황해도이시다. 제가 결혼해서 보니까 아내 아버님 어머님 다 함경도 분이셨다. 순수한 이북 분들이시다. 이야기를 듣는다. 저희 어머님은 중학교 때 친척집에 갔다가 전쟁이 나서 다시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남한으로 내려오셨는데 사랑하는 어머니가 내려오셨고, 딸 세 분이 있었는데 언니, 둘째가 우리 어머님, 셋째가 내려오셨다. 그리고 장인어른도 지금 90세이신데 중학생 때에 홀로 단신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보니까 아무도 못 내려오신 것이다. 그래서 장인어른은 지금도 어머니 이야기만 하면 눈물을 흘리셨다. 어린 아이와 같이 눈물을 흘리셨다. 도대체 이런 아린 아픔에 우리 1세대 우리 어르신들의 눈물을 우리는 가까이 보는 것 아닌가? 세계에서 같은 민족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나라가 유일하게 우리 대한민국이다. 가장 견고하고 실재로 가장 견고하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먼 땅 끝이 북한이 아니겠는가? 어떤 목사님이 북한 평양을 다녀오셔서 보았던 그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있는 곳을 지나가면서 옆에 있는 장로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목사님, 저 김일성 동상 보이시죠? 야, 굉장히 크네, 저곳이 어느 곳인지 아십니까? 바로 그 자리가 평양 신학교가 있었던 곳입니다.”라고 하는 그 말에 목사님께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는 그 내용의 글을 읽어본 기억이 있다.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었던 그 평양 땅, 저는 믿는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셨던 약속의 땅이고 하나님의 때에 다시 회복시키실 땅인 줄로 믿는다. 우리에게는 아직 점령해야 될 그 땅, 갈렙의 심정으로 이 산지를 달라고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

그 땅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45년 전에 이 모든 과정을 통달하여야 얻을 수 있는 이 땅,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갈렙이 허락을 받을 때,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이 먼저 점령해야 할 영역의 땅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우리는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영역들을 우리가 나열할 수 있겠지만 크게 몇 가지를 예를 든다면 우리 안에 있는 이 사회적 참 만족으로 만연되어 있는 우리 한국교회 가운데도 마찬가지이다. 견고한 진들이 먼저 무너져 내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여리고 성은 가장 먼저 점령되어야 되고 무너져야 되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헤브론 산지는 그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다. 견고한 진, 절대로 무너져 내려 갈 것 같을 것 같지 않은 나의 안일함 속에서 성공과 부에 나를 보호해 줄 거라고 믿는 그 여리고 성들이 우리 가운데 먼저 무너지게 될 때에 우상들이 무너지게 될 때에 1차적으로 하나님께서 통치시켜 주시고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을 우리에게 완전하게 주시는 줄로 믿는다.
 
한국 초대교회 순수한 이 복음적 영성이 점점 흐려지고 믿는 자라도 세상이 주는 안일함과 세상이 주는 견고함을 주는 이 견고한 진들이 무너져야 된다는 것이다. 참예배적 영성과 복음의 능력으로 우리가 무장되지 않으면 이 견고한 진들을 절대로 무너지지가 않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그리고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견고한 진들이 무너지지 않는데 어떻게 북한 땅을 복음으로 우리가 무너뜨릴 수 있는가? 아이 성의 탐욕, 우상도 철저히 타파해야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하게 영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패배한 것은 아이 성과의 여리고 다음에 전쟁이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그다음에는 식은 죽 먹기라고 높아진 그 영적 교만함, 마음의 탐심의 우상, 다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아군과 같은 이 탐욕의 우상들이 우리 가우데 있다면 이것이 무너져야 된다. 이 탐욕주의와 영적 교만함이 먼저 진정한 회개로 녹아져 내려갈 때에 하나님은 마지막 남은 이 헤브론 산지를 북한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갈렙과 같은 이 순수하고도 순전한, 그러나 담대한 믿음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저는 마지막으로 한 간증을 마치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다. 저를 아시는 분들은 지금은 뉴룍장로교회에서 사역을 하지만 뉴욕장로교회 전에 자카르타 인도네시아에서 만 6년을 사역한 것으로 아실 것이다. 그렇다. 제가 이번에 자카르타 인도네시아에 방문차 한국을 들른 것이다. 저는 2대 목사였고 1대 목사님이시던 서만수 선교사님께서 그 비전 가운데 세우신 한 땅이 있었다. 그 땅은 델타마스라고 하는 곳에 아주그냥 평지이다. 버려진 땅인 평지에 2만평을 사서 여기에는 기독교 종합대학을 세워야 된다고 하셔서 마지막 가장 점령해야 되는 이슬람, 이 무슬림 선교를 위한 영적 리더를 만들어 낸다는 뜻으로 그 땅을 사시고 나서 돌아가셨다. 여러분 인도네시아에서는 기독교 종합대학을 허락받고 이 사역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곳이다. 제가 갔더니 저는 그 사역에 참 눌림이 되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되나, 은사 적으로 그런 쪽에 은사가 전혀 없다. 목회도 억지로 하는 사람이다. 가방 끈도 짧다. 그렇다. ‘하나님 저는 정말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눌리는 것이다. 그 땅은 지금 정리 작업이 안 되었고 버려진 땅 가지고 거기에 계속 눌리는 것이다. 기도했다. “하나님 어떡할까요?” 너무나 위치적으로나 인도네시아에서 영적 무게 때문에 포기를 할 수 없어서 제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예상하지 않은 담대한 믿음이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용규 선교사님 같은 분이면 하겠네요.” 왜 그렇게 웃으신가?
 
그 때 그분은 몽골에 계셨다. 그분이 전혀 저를 알지 못한다. 그분은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분을 간접적으로 뵈면서 참 은혜가 있었다. 아 그런 분이 오시면 되겠다는 그림이 잡혀졌다. 영어로 하는 것이고 무엇보가 그분의 활짝 웃는 순수함 속에 겸손한 자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겸손하고 온유한 자가 그분 같은 분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분 같은 분은 이용규 선교사님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분을 보내 주시라고 그런 기도를 했다. 그런 가운데에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그 때 미션필드에서 이 대학교를 하시는 총장님들을 모시고 하는 컴퍼런스가 있었다. 오정현 목사님께서 저와 같이 섬기는 장로님을 초청해 주셨다. 그래서 참석하는데 그 가운데 메인 스테프 중에 한 분이 이용규 선교사님이셨다. 마당에서 만났다. 제가 만나자마자 반가워서 ”저는 이런 이런 사람이고 인도네시아에 우리 교회에 수련회 강사로 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했다. 기도하고 결정하시는 분이시니 오시겠다고 그래서 아싸!!~~ 그래서 그분이 오시게 되었다. 그래서 수련회를 인도하시고 친분을 갖게 된 다음에 그분을 딱 잡고 잠시 보여줄게 있다고 했고 간곳이 델타마우스에 땅이었다. 그 땅이 이용규 선교사님 오시기 전에 믿음으로 정리 작업을 막 해놓았다. 작업을 하라고 해서 했는데 그 다음에 스텝이 중요한데 이 분이 오셔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땅을 보여 주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비전을 나누었다. 그때는 감동 있게 듣지 않으셨다. 그때 손을 잡고 ”선교사님, 이 땅 위에서 기도해 주세요.” 그 한 가지 부탁드렸다. 그 때 이 찬양을 너무나 감동 있게 불렀다. “기도하기 전에 찬송 같이 해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 날에 주께서 말씀하신 이젠 내가 주님의 믿음으로 그 땅을 취하리~~♩
그 때 찬송하면서 막 소름이 끼치면서 어떻게 이분과 손을 잡고 찬송을 하고 있지? 하면서 정말 그때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면서 “네가 하는 것도 너 혼자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다. 정말 외로웠거든요. 그런 그래서 기도해 보시겠다고 하셨다. 기도하시는 모든 사람들이 가라고 그런다고 왔다. 고생 무지 했다. 제가 인도네시아 가는 게 공동설립자로 첫 번째 졸업식이 이번 다음 주에 금요일에 있다. 그래서 졸업식 연사로 간다. 그 연사를 꼭 해달라고 하셔서 너무 영광으로 생각하구요. 제 평생에 어디 대학 졸업식에 연사로 하겠습니까? 저는 그 쪽 방향이 아닌데도 꼭 와서 해달라고 하신다. 그래서 가게 되었다. 바로 2주 전에 이용규 선교사님께서 카톡을 보내주신 내용을 읽으면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다.
 
※“기쁜 소식이 있어서 함께 나눕니다. 우리가 가진 두 개의 단과 대학, -자카르타 인도네시아 유니버스티를 말한다. 상과 대학과 어문 대학을 합치고, 전산 대학을 신설하기 위한 신청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고등교육부의 최고 결제 권자의 허가가 나와서 마침내 종합대학교로 인준을 받게 되었습니다. 2년 넘은 시간 동안 준비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오늘 수요일 아침에 허가증 수여행사를 가질 예정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세 개의 대학 레벨이 있습니다. 단과대학(Institute), 어학대학교입니다. 보통 단과대학의 허락을 받는 것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 단과대학이 종합대학으로 가기 위해서는 또한 최소 십 수 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로운 교육정책 하에 이 모든 과정을 단축시켜 시켜주셔서 단과대학을 허가 받은 지 4년 만에 종합대학이 된 것입니다. 저희 첫 졸업생들도 종합대학인 자카르타 국제대학교의 이름으로 졸업장을 받고 싶어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최소한 졸업식 3주 전에 대학교 허가가 나와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종 결재권자가 대통령을 수행해서 미국에 가서 장기간 머물면서 졸업생들이 자카르타 국제대학교의 졸업장이 아닌 단과대학 졸업장으로 졸업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극적으로 마지막 며칠을 남겨놓고 허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운영했던 기관은 단과대학이기 때문에 ‘자카르타 인터내셔널 유니버시티’라고 하는 이 이름은 브랜드 이름이지만, 법적으로 인증 된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그 이름은 제가 지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저는 이런 것을 모르면서 정했는데 하나님은 때로는 무식하지만 용감하게 일을 만들면 이루도록 하나님은 바꾸신다. 정말 그랬다. 제이아이유 상과대학, 제이아이유 어문대학을 허가를 받은 이름이었다. 우리가 인터넷 상으로 전국적으로 ‘자카르타 국제대학’이라고 이름을 넣어서 홍보를 하기가 불편했던 이유였다. 자카르타 라고 이름을 넣는 것도 어려움이 있었고, 인도네시아 학교 이름이 인터내셔널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대해서 허용하지 않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신 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아시아권 많은 나라에서 사역자분들과 연결해서 받을 학생들을 위해서는 이러한 중립적인 이름이 꼭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밀고 가야했고 결국 그 이름으로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돌파한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일이 있기까지 함께 기도하며 후원해 주신 여러분들의 손길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사람의 눈으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했고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금을 주신다고 했다. 갈렙이 받았던 이 산지에 놀라운 언약의 성취에 선물의 땅이 사랑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자그만 영역에서부터 백두까지, 그리고 열방까지, 하나님이 이름과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는 갈렙과 같은 주님의 사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갈렙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에서 볼 수 있어 감사하며, 이 믿음이 분열된 우리 조국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 아버지께 함께 믿음으로 삼게 하시고 적은 일이든 큰일이든 우리가 정복해야 되는 이 지상 명령에 하나님 말씀 앞에 약속의 성취자로 설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산 믿음의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선도하는 믿음의 선봉장으로 쓰임 받고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하심으로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순종함이 있어야 한다. 성도는 비록 육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혈통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갈렙은 원래 그나스(그니스) 사람이었는데, 그니스 족속은 에돔의 후손으로 가나안에 거주했고, 정복 대상의 목록에 나왔던 족속이다. 그런데 이 족속은 어느새 이스라엘에 편입되어 들어왔고, 특히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되었으며,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자로 활동했던 것이다. 갈렙은 성실과, 온전한 순종의 사람으로, 말씀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또한 불의를 보면 분개했으며, 영적인 강건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나안 땅에서의 기업과 건강, 장수의 복을 받았다. 이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성실한 신앙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된다. 언약→믿음→순종→복은 영원히 변함없이 시행되는 하나님의 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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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2년 6월 22일)
제목: "생명수의 강이 넘치는 삶"
말씀: 요한복음 7:37~39
찬양인도: 쉐키나(김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장광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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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제가 목회자로서 지금까지 사역을 하면서 계속해서 배우고 깨닫는 것이 있다. 누군가가 고생하면 누군가는 은혜를 받고 누군가가 희생하면 누군가는 살아난다. 라는 것이다. 제가 사역을 하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데 내가 왜 이렇게 희생을 해야 하는가? 왜 나만 이렇게 고생을 해야 되는가? 많이 생각이 들 때 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가 고생하면 누군가는 은혜를 받고 누군가가 희생하면 누군가는 살아난다..라는 것이다. 희생과 대가 지불 없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난 일은 없다. 지금의 사랑의 교회가 세워진 것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수고했는지 그것 때문에 이런 사랑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고생한다는 것, 그리고 희생한다는 것은 결코 낭비나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의 그 하나님 나라의 역사 가운데 우리가 동참하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모든 수고에 대해서 하나님이 갚아 주실 줄 믿는다. 우리는 더 많이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할수록 그만큼 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확률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나의 내면이 메마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내 영혼 가운데 그 기쁨과 사랑이 식어져 가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인생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쥐어짜는 인생과 흘러넘치는 인생이 있다는 것이다. 빨래 짜듯이 막 쥐어짜서 한 방울이라도 더 누군가에게 그렇게 영향력을 그렇게 끼치려고 노력을 한다. 이것은 희미하고 그래서 결과도 좀 좋은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금 새 메말라버리고 피곤해 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기쁨과 사랑으로 시작했는데 내 마음 가운데 기쁨이 없고 사랑도 없다. 그렇지만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하여 또 내가 해야 될 의무이기 때문에 그냥 묵묵하게 하게 한다.
 
▷인생을 두 가지로 분류
1. 쥐어짜는 인생,
2. 흘러넘치는 인생.

그러나 흘러넘치는 인생은 섬기면 섬길수록 은혜와 기쁨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생명이 있고 또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고 그래서 많은 열매가 맺혀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복음7:37~38,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쥐어짜는 인생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인생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청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살펴보면 바로 명절 끝날 곧 큰 날이라는 것이다. 어떤 명절인가? 7장 2절을 보면,
 
*요한복음 7:2,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이 초막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이후에 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모습을 기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셨다. 만나로 먹여주셨다. 그리고 목마르고 마실 물이 없을 때, 반석을 깨서 거기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셨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것이 바로 초막절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했었던 종교의식의 하나 있었다. 그것은 흰 못을 입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금 항아리를 들고 실로 암 못 가로 간다. 실로 암에 가서 금 항아리에 물을 담아서 행진을 한다. 그때 주변에 있었던 회중들이 이사야 12장 3절을 가지고 이렇게 노래를 하는데, “네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기르리로다.” 이렇게 찬송하면서 행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제단 앞에 갔을 때는 제단을 돌게 된다. 그리고 난 다음에 금 항아리에 담았던 물들 그 제단에 붓는다. 이것을 7일 동안 진행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일곱 번째 날에는 이 금 항아리에 담아서 그리고 나서 제단 앞에 가서 일곱 번을 돈다. 마치 여리고성을 돌듯이 일곱 번을 돌고 거기에 다시 또 물을 붓는다는 것이다. 지극정성을 다해서 이런 종교의식을 하는 이유는 광야 있을 때, 반석으로부터 물이 터져 나왔던 것처럼 바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기를 소망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신 것처럼, 초막절 이후에 하나님께서 또 다른 비를 내려주셔서 또 다시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소망하는 마음에 이런 의식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막절은 물의 절기 물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행했던 이 종교의식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명령이었는가? 구약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그들은 만들어서 열심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초막절 기간 중에 선지서 중에 스가랴 14장을 읽었는데, 스가랴 8절에 보면,
 
*스가랴 14:8,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 이것은 에스겔 47장의 말씀이 성취될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에스겔 47:9,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에스겔서 47:12절도 마찬가지이다.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생명나무에 실과들이 자라기 시작하게 되고 또 많은 생물들이 살게 되고 또 그 잎사귀는 약 재료로 사용되게 되는 이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었던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그들이 곧 회복될 것이다. 다시금 예루살렘의 성전이 재건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이 간절히 성취되는 소망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이러한 종교의식을 행했던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열망을 뜨겁게 가지고 있었는데, 나라를 빼앗기고 로마와 같은 열강들의 의하여 그들은 압제와 고통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메시아가 나타나서 그들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해방시켜 주시고 그리고 종교적인 부패와 메마름 가운데서 그들을 건져내 주시는 생수의 강물이 터져 흘러지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소망하고 열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막절에 실로 암 물가로 가서 거기에 금 항아리에 담아서 행진하고 한 바퀴 돌고 마지막 일곱 바퀴 도면서 물을 붓기 시작한다.
 
그런데 제단에 물을 붓고 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중요하다. 제단에 물을 부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하는가? 생명수의 강물이 콸콸 솟아나야 하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단에 물을 붓는다. 또 붓는다. 또 다시 메말라 버린다는 것이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메말라버리고 지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종교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7:37~38,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성경의 이름과 같이 바로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는 선포하고 게시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아무리 종교 적을 노력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도 유대인들이 금 항아리에 물을 담아서 제단에 쏟아 붓는 것처럼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간다.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열심히 하면서 마지막 한 방울이라도 쏟아 부으며 살아간다. 노력하면 될 듯 될 듯 하는 데 또 다시 되지 아니하는 그 이들 가운데 때로는 실망하게 된다. 때로는 낙심한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좋은 결과가 나올 것에 대해서 기대하고 또 다시 시도하고 노력하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쏟아 붓는다. 그래서 예배 때 은혜 받은 것 가지고 조금 순종한다고 하고, 노력한다고 하고서 쏟아 붓는데, 그런데 뭐가 촉촉하게 적서 지는 것 같고 뭔가 눈빛이나 말이나 조금 상향해 지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오게 되는 그 가족의 모습, 배우자나 자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답답해져오기 시작한다.
 
제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제자훈련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옥한흠 목사님, 오정현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는데,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열심히 해서 쏟아 붓고 밤낮 가리지 않고 사람들 만나고 청년들을 만나고 열심히 했다. 그러면 애들이 사랑을 안다. 청년들은 받은 대로 돌려줄 줄 안다. 그래서 뭔가 변화된 것 같은데 그래서 6개월 지나고 1년 지나고 나면 그런데 돌아보니까 그렇게 변화되었다고 했던 청년이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목회자이니까 어떻게 하면 또 다시 쏟아 붓기 시작하고, 쏟아 부으면 조금 좋아진 것 같고 숫자도 늘어난 것 같고, 그래서 겉모습은 더 좋아 보이지만 제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갔다. 기쁨이 없는데도 열심히 사역했다. 사랑이 없는데도 사랑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다. 우리 순장님들이나 여러분은 어떠한가?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는데 뭔가 촉촉하게 적셔지는 것 같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만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어 지는 그 모습을 볼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가?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날 수 있다. 실망할 수 있다. 그런데 내 힘으로 되지 않을 때,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에 메말라 버리는 그 모습을 볼 때에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배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님을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마신다. 라는 것은 상징적인 뜻이다. 예수님을 마심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나의 생명과 인격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내가 연합이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요한복음 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자가 곧 믿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 6장에도 보면, 생명의 떡은 먹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는다 라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서 예수님께서 나의 생명과 구원이 되시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을 마시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내 힘과 내 능력을 할 수 없을 때, 무엇을 하라고 하는가? 그때 바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같고, 다시 메말라지는 상황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더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더 열심히 섬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다. 그때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6:28,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예수님께 묻는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될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되지 않을 때, 그 때 진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내 생각 대로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예수님의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며 그 생명수가 닿는 곳마다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는다. 그렇다면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되는가? 세 가지를 말씀 드리고자 한다.

 
I.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에스겔서 47장이 성취되는 장면이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게 된다.
 
*요한계시록 22:1-2,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에스겔 47장의 말씀과 사실은 병행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겔 47장은 성전 문지방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왔는데,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어디서부터 흘러나왔는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1-2절에는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시라고 말씀한다. 무엇이 성전인가? 하나님과 그의 어린 양 되시는 분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거하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장막을 치다’이다. 성자 하나님께서 바로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 장막을 치는 사건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거하는 바로 성전이 되셨다. 그래서 물이 안에서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치는 이유는 성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줄 믿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셔서 우리 안에 생명수의 강물을 흘려보내신다.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우리 안에 목마름이 해결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가 우리 안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특별히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했는데, 이 배는 헬라어로 코일리아이다. 이 단어는 자궁, 모태라고 그렇게 번역도 되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내면 가장 깊숙한 곳, 우리 영혼의 깊숙한 곳이 배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배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무엇이냐면, 바로 성령이라고 말씀한다.
 
*요한복음7:39,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나온 물을 물세례로 해석을 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이 물을 물 세례로 해석하지 않는다. 물은 성령을 의미한다.
 
*에스겔 36:25,27,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에서 물로 하는 일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정결하게 씻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이다. 새 언약의 특징이 무엇인가? 옛 언약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부패한 육신에 가지고 있는 인간은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 마음 가운데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따로 놀기 시작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부패한 본성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또 다시 죄악에 빠지게 되고 불순종의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새 언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기록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새겨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가기 시작하고 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했을 때, 바로 이 새 언약의 말씀인, 에스겔 36장의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예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게 만드시겠다는 것이 바로 새 언약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4:14,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면 우리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물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모두가 다 성령의 사람이다.
 
*요한복음 8:14,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냐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다.
 
*로마서 8:9,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람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성령으로 인치신다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주신 이 영원한 생명, 이 구원의 선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심으로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이미 우리 가운데 뭐가 흐르는가? 바로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내주 하시고 말씀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럴 때 우리가 변화 되는 것이다.
 
어느 청년이 제자훈련을 하다가 귀신이 들려도 사람이 변하는데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면 왜 나는 변하지 않는가? 의 질문에 마음이 부딪혀 왔다. 진짜 내가 거듭났다면 내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신다면 왜 나는 변화되지 않을까? 수련회를 앞두고 있을 때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내 안에 성령의 강이 흘러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하나님이 내 가운데 충만히 역사하시는 그 은혜를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가득 채워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다. 자신의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다. 자신의 죄악들이 회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령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길 기도하라. 그런데 조금씩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조금씩 채워져 가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주체할 수 없는 성령의 강물이 흘러넘치길 시작했다. 기쁨이 시작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이제는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순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전에 했던 일을 더 기쁨으로 능력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뭐라고 질문을 하냐면, “목사님, 제가 정말 이전에 거듭났던 것이 맞는 것일까요?” 제가 정말 거듭났다면 왜 지금 일어나는 이 역사가 그 때는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많은 성도님들이 물을 쏟아 부었던~~제단에 쏟아 부었던 그 종교인들의 모습처럼 인간적인 열심을 가지고 기독교 종교생활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되는 것인 줄 믿는다. 우리 안에 이 성령의 강물이 흘러넘치기를 더욱 사모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II. 생명수의 강으로 나의 생각과 욕구가 변화됨을 믿으십시오.

-우리 배는 우리 영혼의 가정 깊은 곳이라고 말씀드렸다.
 
*빌립보서 3:19,
19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배를 신으로 삼는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육체의 욕구와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가장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치는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욕구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배에서부터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친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순종해야지, 순종해야지, 그렇게 하는데 마음속으로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게 되고 음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그것을 원하는데 어떻게 죄를 안 지어야지, 이렇게 몸부림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강물이 우리 안에서부터 흘러넘치기 시작할 때, 예전에 원하지 않았던 그 거룩함을 사랑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놀라운 변화이다.
 
*갈라디아서 5:16,-17,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둘이 싸운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이것을 해석을 할 때,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되면 의지적으로 이제는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고 그래서 죄를 이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성령과 함께 걷다 보면 성령의 소욕이 점점 우리 가운데 강물처럼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전에는 기뻤다면 이제는 육체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냥 안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의 성령의 소욕을 이제는 더욱 더 사모하고 갈망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이 진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정말 우리 가운데 필요한 것, 정말 우리의 영혼, 속사람이 원하는 것을 성령께서 원활하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제가 어느 집사님을 만나서 심방을 하게 되었는데 맏딸에 대한 사랑이 컸다. 그래서 공부에 대해서 막 잔소리를 많이 하고 때론 딸과 싸우면서까지 공부에 대한 압박을 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했다. “따님이 성공하기를 바라시는데 딸과의 관계가 깨어져도 딸이 공부를 잘하기를 원하신가요?” “그렇게 정말 깨어지면 점점 공부를 안 할 수 있는데 왜 그리 관계가 깨어져가면서까지 공부에 대해서 압박을 하십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다시 물어보았다. 딸의 관계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성적이 더 중요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대답이 딸이 상처를 받고 관계가 깨어져도 공부 잘해서 좋은 직장 가는 게 더 좋다.”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공부 잘하라고 막 하면서 그렇게 압박하고 상처와 고통을 줄 때, 이런 마음으로 하는가? 그게 진짜 여러분이 원하시는 것인가? 제가 그분을 다시 만났을 때 고백을 하셨다. “딸의 성적보다 딸과의 좋은 관계가 더 나에게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딸이 더 열심히 믿음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격려하는 아버지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정말 원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원하는 것이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자녀를 잘 키워보겠다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보겠다고 그렇게 애썼는데 알고 보니까 내가 제일 원했던 것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물이 우리 가운데 흘러가게 되어 질 때,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새로운 욕구와 갈망을 일으켜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습관을 통해서 형성이 된다. 이 습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맛을 알게 되고, 기쁨을 알게 된다.
 
네슬레(nestle)에서 일본에 커피를 팔기 위해서 했었던 전략 중에 하나가 커피 쿠키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커피 향에 노출되고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 커피 향에 익숙해진 어린 아이는 잠재적인 이 커피고객이 된다고 한다. 우리가 김치와 청국장을 좋아는 것처럼 그러나 외국인들은 전혀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왜 김치를 먹게 되고 청국장을 좋아하는가? 어려서부터 먹고 익숙해지면서 그 습관에 따라 반복되고 그 행동에 따라서 그 맛을 경험했기 때문이고 나의 생각할 요구가 변화됨을 믿어야 한다. 우리 배는 영혼이 가장 깊은 곳이라고 말씀드렸다.

 
여러분이 지금 워하는 것이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여러분이 경험했었던 그 사건이나 누군가의 경험이나 그 사건의 해석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성령의 강물이 흘러넘친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그 기쁨을 깨닫게 되어 질 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해야 할 것, 하나님의 뜻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배자크 선교사님이 토비새에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그분이 선교사로 헌신 하셨을 때, 어머니가 했었던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네가 장군이 되는 것보다 선교사 된 것이 더 기쁘단다.” 제가 오늘 새벽에 기도하면서 이것이 제 마음에 큰 감동이 되었다. 여러분 중에 장군이 되는 것보다 회사의 CEO 되는 것보다 선교사 되는 것이 더 영광스럽고 기쁘다. 고 생각 되시는 분, 몇 분이나 되시는가? 그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부어질 때 우리 가운데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치게 될 때, 할 수 있는 믿음의 고백인줄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서 8:5-6,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령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기쁨 가운데 살아갔다고 할지라도 내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서 그래서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6절과 같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어제까지 은혜받고 기쁨으로 했던 것, 그것 소요없다. 어제까지 사랑으로 인내 하면서 꾹 참았었던 것, 그것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이 들어오는 순간, 육신의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부터 사망이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생명과 능력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 핵심은 성령의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생각을 해야 한다. 그 말씀을 순종을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의 몸과 우리의 뇌가 우리의 손과 발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갈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인 것처럼, 우리 가운데 생명과 평강이 흘러넘치게 될 줄 믿는다.

 
III. 생명수의 강이 흘러갈 때, 생명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십시오.

-제임스 몽고베리 보이스 목사님이 이 표현을 했는데 여러분도 아시는 예화일 수 있다. 어느 배가 갯벌 진흙에 박혀있다. 사람의 힘으로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끔적하지 않는다.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로 밀물이 밀려들어오면 배가 저절로 뜨게 되고 그 배는 항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갯벌에 처박혀 있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 나의 변화 역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때가 있다. 그때 생명수의 강물이 우리가운데 흘러나오길 사모하시길 바란다. 생명수의 강물이 우리 가운데 흘러나오기 시작할 때,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줄 믿으시길 바란다. 특별히 자기 부인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성도님들이 자기부인 하려고 많이 애쓰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 힘과 능력으로 된다면 우리가 그냥 죽이면 된다. 예수님이 죽으실 필요가 없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 우리는 권능을 받는다. 그 권능이 무엇인가? 그 권능은 내 욕망이 죽는 것이다. 내 옛 사람의 습관과 행위에 따라서 살아갔었던 것들을 죽일 수 있게 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성령께서 증거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경험케 하시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바로 성령께서 하게 만드신다. 어떻게 가능한가? 나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생명수의 강물이 나를 통하여 흘러감으로 말미암아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를 만났는데 너무나도 우울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는 가운데 마음의 위로가 되었고 마음 가운데 소망을 경험해 본적이 있는가? 마음이 막히고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데 우리 순장님이 손을 잡고 기도해 주시는데 마음에 눌렸던 것들이 뻥하며 뚫리게 되면서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되고 응답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도무지 복음을 전파해도 예수 믿을 것 같지 않은데 그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지는 그런 이들을 경험을 해보았는가? 다 그것은 그들을 통하여 생명수의 강물이 바로 우리 가운데 흘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를 통해서 그 영혼 가운데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마주 할 때마다 더 노력하지 말라. 더 몸부림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강물이 우리 가운데 넘쳐흐르길 사모하길 바란다. 그리고 노력한다면 성령의 강물이 우리 가운데 흘러넘치고 그 생명수의 강물이 우리 가운데 넘쳐흐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순종하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은사를 듣기를 간구하며 우리 가운데 목마름과 메마름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워주시고 만족케 하여 주시기에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흘러넘치는 생명수의 강물로 말미암아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서 또 다른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우리의 가정과 일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날마다 믿고 그의 생명수를 마심으로 우리 안에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쳐서 모든 더러운 것과 우상을 버리고 정결하게 되면  목마름이 충만히 채워질 것이다. 또한 생명수의 강물이 흘러넘침으로 내 안에 솟아나는 예수님의 생명이 나를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 가정과 일터와 나라가 가운데에 놀라운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리라 믿는다. 
-이 강은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새 예루살렘 길 한가운데로 흐르며 만국을 소성케 한다. 즉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온 이 강은 죽은 바닷물을 소성케 하고 모든 생명을 풍성케 하며, 나무에 많은 열매를 맺히게 한다. 또한 이 강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성도의 마음속에서 솟아나 참 자유와 평안, 기쁨, 만족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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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6월 19일)
제목: “신앙의 기본기((基本技)
말씀: 골로새서 3:16-17
대표기도: 이기원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오정현 담임 목사님
---------------------------
 
 
*골로새서 3:16-17,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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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 목사님(신앙의 기본기(基本技).
-오늘은 복음적 평화통일 주일이다. 제가 오늘은 다락방에 대한 말씀을 하겠다. 이것이 복음적 평화통일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오늘 신앙의 기본기를 이야기 하겠다. 다락방 말씀을 할 터인데, 우리 교회는 다락방이 3천 개 정도이다. 이 3천개의 다락방이 북한의 3천 지역을 향하여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날 줄 믿는다. 북한에 있는 시, 면, 동 이렇게 나누어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다락방이 선교지들을 놓고 기도하기에 이제 한국교회 선교는 세계 1위 선교나라가 되는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셨는데 남북문제에 관해서 우리 다락방이 은혜를 받아서 각 다락방마다 3천여 개의 북한 지역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실 줄 믿는다.
 
신앙의 기본기에 대해서 오늘은 이야기 하겠다. 오늘 이 기본기를 말씀 드리냐면 지난 2년 반 동안에 코로나 펜데믹으로 많은 부분들이 뼈가 어긋난 것처럼 좀 탈골이 되었다. 그래서 어긋난 뼈를 교정을 해야 되겠고 또 바퀴가 균형이 안 잡히면 바퀴를 정렬하듯이(얼라이먼트), 이 말씀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신앙의 기본기이다.
 
※ 지난 주일날 저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책을 한 권 선물하셨다. ‘축구선수 손흥민’ 자매들은 안 좋아해도 할 수 없다. 다 좋아합니다.!!! 손흥민 선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의 이야기이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된다. 이 책을 제가 선 채로 다 읽었다. 삶의 기본기가 3가지였다.
첫째는 개인운동: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이다.
둘째는 청소: -청소는 새벽 4시부터 한다고 한다. 두 시간 동안 철저하게 청소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한다. 수양하는 시간이고, 철학자처럼, 수도승처럼 청소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본인이 만난 월드클래스 축구 선수 중에 인성이 안 좋은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늘 가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기본기를 제대로 만드는 분이다. 세상은 감사하는 자 것이기도 하다고 한다.
셋째는 책읽기: 마음을 비운다고 한다. 욕심이 없이 살고 겸손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분이다.


▷그러면 교회 사역의 기본기는 무엇인가?

신앙의 기본기를 이야기 하면 우리는 21세기를 살지만 1세기 교회가 우리의 롤 모델이다. 1세기 교회인 예루살렘과 초대교회가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가 롤 모델이 되는가이다.
 
*사도행전 2:46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⓵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⓶집에서(집집이 돌아가면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성전 예배가 모범이 되었고 또 하나는 집에서 떡을 떼는 것이다. 우리 교회로 말하면 다락방이다. 말씀과 교제가 있는 영적 변화의 산실인 이 다락방이다. 주중 다락방, 주일에는 성전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는 이렇게 소그룹 다락방을 통하여 영적 변화를 통해서 은혜를 경험했음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교회는 신앙생활에서 Large group 아래, 큰 모임의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Small group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제자로 무장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골로새서에서 말씀한다. 앞에 1장에 보면 온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성전 모임과 주중 모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로 보면 반 이상은 주중 모임을 잘 못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렇다. 그런데 주중에 우리가 승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 요즘 주일 예배를 한 두 시간 드리지만 일주일에 몇 시간인가? 168시간이다. 그 가운데 주일 예배 한 번이지만 나머지는 주중에 하는데 여러분 모두가 다 유 선생님의 명령을 너무 많이 받는다. 이 유 선생님이 누군가 하면 유튜브 선생님이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영항을 받아서 쓸데없는 편향된 시간을 버린다.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하지 못한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예배의 은혜에 감격하고 말씀의 능력에 감사하며 지난주 같은 경우도 이 시대의 병거와 마병이 되기를 소원했다.
 
지방에 어느 총장님께서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초심으로 돌아가서 시대의 병거와 마병이 되어야겠다. 고 소식이 왔다. 주일 예배 나름대로 사명이 같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오늘의 말씀이 key는 신앙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기초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한다. 주일 예배 뿐만 아니라, 주중의 은혜를 계속 받아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승리를 해야 한다. 그러면 주중의 삶은 어떠한가? 어떤 사람은 아내로서, 어떤 사람은 남편으로서, 어떤 사람은 직장인으로서, 어떤 사람은 자녀로서, 어떤 사람은 직원으로서, 어떤 사람은 오너로서, 이런 것으로 오늘 우리 시대뿐이 아니라, 그 당대 초대 교회와 똑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본기를 다지면서 주중 모임의 승리를 하기 위하여 오늘 두 가지를 적용해야 한다.


I. 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

*골로새서 3:16,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이 거하며 모든 지혜로 피차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 피차가 나오는데 그 당시에는 목회자 제도라든지, 교회 리더쉽이 확고한 것도 아니고 교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을 말씀한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교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사도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서로 비슷했다. 피차 말씀을 나누는데 여기에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한다는 것은 필요한 내용들,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러하다는 것이며, 권면한다는 것은 좀 잘못된 것에 대해서 도전도 하고 어떤 때는 책망도 하고 교훈도 하고 이런 것들이 권면이라는 것에 다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가르치고 권면하는 이 두 가지를 통하여 주님의 보혈은 가정 가정마다 모이는 그 주중의 삶에서 승리할 수 있는 동역을 얻는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하면,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 이 편지의 내용을 가지고 서로 받은 말씀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로마 식민시대에서 그 어려운 고통에서 어떻게 삶을 유지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역사를 하나님께서 하시는지를 그런 내용 바탕을 가지고 말씀한다. 이것을 골로새서 3장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이다. 오늘 똑 같이 에베소서에도 나온다. 구조적으로 두 번 반복이 된다. 성경을 깊이 알면 좀 더 마음에 와 닿을 것이다. 쌍둥이 서신서이다. 골로새서와 같다.
 
*에베소서 5:18b-19,
18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골로새서와 같은 구조이다. 에베소서에는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고 골로새서는 말씀이 풍성하라 한다. 아내들, 남편들, 자녀들, 아비들, 종들, 상전들, 그 시대의 삶의 영역이 다 포함된 것이다. 다 포함된 것이며 우리가 다 이 시대에 접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골로새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이 거하라. 했으며, 에베소 교회는 성령 충만 하라. 했다.
그런데 왜 차이가 있냐면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몇 년 동안 직접 목양한 교회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목양한 교회는 말씀이 풍성한 것이다. 말씀이 풍성하니까 성령도 충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목회 한 적이 없다. 바울은 간접적으로 사역을 했다. 그런데 이 골로새교회는 그 지역에는 그 당시에는 이단이 있었다. 엉터리들이 너무 많았다. 그 당시 골로새 교회는 온갖 사이비가 많았다. 헬라의 영지주의, 유대 율법주의, 동방의 신비주의,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이단이 난무하니까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야 균형을 잡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어려운가?
 
사랑의 교회는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가? 아니면 성령이 충만한가? 둘 다 그렇다. 아마 우리 교회는 말씀 사역에 전념하고 있으니까 사랑의 교회에서는 성령 충만함이 더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할지 모르겠다. 저 순복음교회는?? 그게 그렇지만 우리 자신도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로서 똑 같다. 말씀 주의로 말씀을 깊이 공부하는 사람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기도하고 사모하는 사람은 말씀의 풍성함에 거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자녀로서 직원으로서 오너로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라는 것이다. 서로 피차 권면하고 가르치고 받은 말씀을 실천하고 그 당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으로 초대교회는 66권이 다 없었고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필요한 대로 복음서도 주시고 서신 서를 주셨다. 대표적으로 보면
 
*골로새서 4:16,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서로 나누어주면서 피차 말씀을 서로 나누라는 것이며, 말씀을 서로 나누는 가운데 공감대가 형성되고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그 어려움을 가운데 서로 나누면서 나는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가지고 서로 공감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같이 기도하고 그러면서 말씀 앞에서 접목하고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치유를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다락방은 어떤 은혜가 있는가? 다락방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하나님이 힐링을 주시고 축복의 장소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최고의 힐링의 장소가 다락방이다. 최근에 통계에 의하면 펜데믹 이후에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4명 중에 한 명이 우울증에 시달린다. 우울증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른다. 예수 믿는 가운데서도 많다. 마음의 치료를 위해서 의사도 찾아가야 하겠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마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치유해 주신다. 성전 모임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주중에 각 지역마다 흩어진 다락방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락방에서 치유하시는지 연대하고 서로 나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 공감대를 갖고 서로 소통하고 서로 기도제목 나누고 삶의 여정 고난 길 비탈진 언덕길에서 그 말씀을 통하여 벌떡 일어나고 소생하고 머리만이 아니라 소생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락방에서 머리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변화한다. Not only the head changes, but the mind also changes. 그렇게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주중 모임에 이런 은혜를 주시기를 소망한다.
 
II.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면 감정적인 치유가 일어난다.
정서적인 치유가 일어난다. 다시 3장 16절을 보면,
 
*골로새서 3:16-17,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의 치유와 변화가 일어나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데 시와(시편), 찬송(영광송)이다. 영광송, 찬송과 찬미이다. 그러니까 신령한 노래는 스피릿 송, 성경 구절 자체가 그냥 찬양이 된 것이다. 우리 다락방은 보통 문제가 있다. 지금 룻기를 하고 있는데 많은 분들이 옛날에는 다락방에서 순번으로 하기도 하고 지금은 다락방에서는 치유가 일어나는 곳은 1번, 2번, 3번을 정해서 자신들이 스스로 한다고 한다. 미리 자신들이 공부를 해서 나눈다는 것이다. 신나는 다락방이다. 말씀을 통하여 치유가 일어나고 신령한 노래를 통해서 정서가 회복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왜 드리나면, 사실 1세기 교회 만큼 우리는 지금 줌이나 비 대면에 익숙해졌다. 1세기 교회만큼 비 대면이 필요한 교회는 또 있었겠는가? 1세기에 교회만큼 줌이 필요한 적은 있었는가? 무슨 말이냐면 1세기교회는 같이 예배드리다가 걸리면 어떤 사람은 감옥 가는 것이다. 그때는 함께 모이여 예배드리면 감옥 가고 심지어 1세기 교회는 함께 모이다가 걸리면 사자의 밥이 되는 것이다. 화형대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함께 모여서 말씀을 통하여 피차 가르치고 권면함으로 신령한 노래를 불러서 정서적 회복을 통해 일생에 그 암흑의 시기에 그 모든 고난과 아픔과 슬픔과 수많은 핍박과 압박들을 이겨내는 능력을 받았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지난 토요일 사랑의 교회는 정식으로 대면 예배 대면 다락방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능력 가지고 은혜를 받아 누리기를 바란다.
 
제가 다락방과 대면 다락방을 강조 하냐면, 사랑은 은혜를 받고 성숙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모임을 통해 점점 더 은혜를 받아서 은혜로 자라게 되기 때문이다. 주일에 받은 예배에서 주중에 잘 감당을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상전으로서 직원으로서 다 저들을 허그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러니까 주일예배만으로 멈추고 주중 모임이 없으면 은혜가 잘 자랄 수 없다. 은혜도 자라야 한다. 여러분 은혜가 자라는 좋은 것은 받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다. 나누어야 한다. 은혜는 나눌 때 배가 되는 것이다. 주일 예배에 받은 은혜가 지속되기 위하여 그 은혜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텅빈 영혼에 공간을 이렇게 주중 모임을 통해서 그것이 채워질 수 있도록 그 서로의 빈 공간이 나눔과 공감을 통하여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교회 다락방을 순장이라고 그러고, 순원이라고 한다. 대나무 순(筍)자이다. 다락방아 대나무처럼 점점 잘 자라는 것이다. 순모, 순장, 순원이라고 한다. 우리 교회 다락방은 영적교회의 산실이 되길 원하고 우리 교회 다락방은 말씀과 기도가 있기를 바라며, 우리 교회 다락방은 영적인 모판이 되길 바라고, 우리 교회 다락방은 말씀의 기도의 생명 계보를 이어가는 생명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주여 북한에 마음껏 예배하는 날이 오기를 소원합니다.”
 
은혜를 나눌 때 배가 된다. 그래서 다락방에는 꼭 들어가야 한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참석해야 하고 내 영혼의 생명을 유지 시키는 생명 유지 장치가 되는 것이다. 생명 유지 장치라면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우리는 그냥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생명 유지 장치가 작동을 해서 온도와 습도와 산소가 잘 조화를 이루어서 공급하기 때문에 고공에서도 사는 것이다. 높은 고도에서도 편안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제자가 되겠다는 목적지가 있다.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우리 신앙생활에 맞게 온도와 습도와 산소가 있어야 하고 세상의 영향과 압력을 막아주는 장치를 다락방이 제공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거룩한 갈증이 있다.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 다락방을 참여를 못 할 수도 있다. 오늘 주보 안에 무얼 넣어놓았다. 다락방 편성과 다락방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하라고 기회를 드리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결단을 하고 다락방에 참여해서 주일 성전 예배뿐만 아니라, 주중의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은혜가운데 점점 자랄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목사님, 저는 환경이 허락할 때까지 참석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참여하겠습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 아직까지 마음이 감정이 아직까지 참여하는 게 쉽지 않다. 감정도 못 따라오고 환경도 못 따라오니, 환경과 감정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딱 되면 참여하겠다고 한다. 이런 분들도 있다. 그런데 여러분 다락방에 참석할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참석을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참석하게 되면 정말 잘 참여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저에게는 거룩한 갈증이 있다. 이 마음을 여러분도 가지고 권면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듣고 복음적 평화통일도 우리 귀한 성도들이 다락방에서 나라를 위하여 통일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겠다. 내가 다락방에 참석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영원히 참석을 못한다. 도전을 받든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지 참여하면 부족해도 다락방과 순장 시스템이 잘 되어 있으니 다락방에 집중하여야 한다. 우리 교회 대학, 청년부도 대단하다. 오늘 사랑의 교회 순장님들 수고에 격려하고 기도하면 좋겠다. 대학청년 리더들도 너무 소중하다. 서로 손을 펼쳐서 하나님의 축복을 하기를 바란다.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열방이 주께 돌아오기를 바란다.

 
▷우리 다락방은....☆
다락방은 영적 변화의 산실입니다.
다락방은 사랑의 교회의 모판입니다.
다락방은 말씀과 기도로 생명의 계보를 이어가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다락방은 복음 전도의 교두보입니다.
다락방은 사랑의 교회의 영적 비밀병기입니다.
다락방은 영적 기본기를 장착하는 곳입니다.
  
요약
우리가 성전에서 예배와 주중 다락방으로 신앙의 기본기를 굳건하게 하여서 어긋난 뼈들이 잘 맞추어져서 온전한 제자로 살기를 소망하며, 공동체가 다락방에서 풍성한 말씀과 은헤로 피차 권면하며 나누며 은혜가 자라나서 배가 되어 영혼의 뿌리까지 서로 치유되어서 우리의 다락방이 세상의 본이 되고 영적 산실로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신실한 믿음의 신앙의 기본기를 갖추고 생명 유지 장치로서 역할을 지혜롭게 감당하여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완전하게 비상하기를 간구하자.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해야 하되 종으로서가 아니라 주인으로서 모셔야 한다. 말씀은 우리 속에 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말씀은 모든 경우에 우리와 항상 가까이 있어서 적절한 대를 따라 감화를 받고 또 이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해야'한다. 이 말은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모실 뿐만 아니라 풍족하게 모셔야 한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를 속에 거하게는 하나 그것은 단지 빈약하게 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될 때 우리 영혼이 부요하게 된다. 말씀 안에 모든 지혜가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모든 지식과 사변에 있어서 박사로 만들어 주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혜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기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각성을 하게 된다. 우리는 '시와 참미와 신령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신앙적인 시들은 이런 형식들을 취하여 큰 감화력을 기칠 수 있었다. 그런 우리가 시를 노래할 때 우리의 마음이 은혜로 충만하여 부르지 않는다면 좋은 노래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북돋우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피차 가르치고 권면해야'한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한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이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이 동영상은 2부 이므로 1부 말씀과 상이할 수 있습니다. 설교 말씀은 1부 예배임.-작성자 사랑의교회-향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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