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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6월 26일)
제목: "성찬의 부흥"
말씀: 고린도전서 11:23-26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권진우 부목사님(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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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23-26,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오늘은 6.25,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72년 전에 오늘 우리 민족은 백척간두(百尺竿頭),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은 상황이었고, 풍전등화(風前燈火), 큰 바람 앞에 꺼질 촛불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열방을 보내 주셔서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이 민족을 구원해 주셨다. 근본적인 감사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를 수많은 죄악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오늘 이 6.25, 72주년에 성만찬 성찬예배를 주님 앞에 드리게 하심을 감사영광 돌린다. 지난 2년 6개월 동안 저희가 이 코로나 때문에 이 성찬의 은혜를 감당하기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는데 오늘 이와 같은 귀한 시간을 허락해 주셨다. 오늘 이 예배에 앉아만 있어도 은혜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너무 감사한 일이다. 이 자리 이 순간까지 나를 불러주심에 감사와 찬양과 감격이 있을 수 있고 어떤 분들은 내가 성찬을 받기에는 좀 부끄럽고 면구스럽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의 복합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감사도 있고 죄송하기도 할 것이다.
 
여러분,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힘들었다. 오늘 이런 성찬을 통하여 그 1세기의 압박과 고통과 수많은 박해 가운데서도 영적으로 늘 청청한 시냇물 가에 심긴 나무와 같이 그렇게 은혜의 보존 장치를 잘 감당을 했다. 오늘 이 성찬을 통하여 모두가 다 정결의 영, 거룩의 영, 부활의 영이 충만해지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훈련의 마지막 종강 식을 했다. 종각 식을 무엇으로 하느냐면 오늘처럼 성만찬과. 세족식을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종강 식을 했다. 결국 우리가 이제 신앙생활을 보면 주님의 문제를 체험하고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한다는 것은 주님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것이 You are what do you eat?=It becomes what you eat.(네가 먹는 대로 된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처럼 먹고 마시면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이다. 우리 세상의 것으로 먹고 마시고 마귀를 먹고 마시면 또 그것들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성찬식과 세족식을 예수님 제지들에게 마지막 종강 식을 하시고 그 다음 또 말씀의 고전 10장 31절을 보자.
 
*고전10:31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성찬, 떡잔을 특별히 이렇게 이제 앞에 놓고 있는데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래서 오늘 11장 뒤에 12장 14장이 은사에 관한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특별한 은사들이다. 섬김이나 말씀의 은사,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은사들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 은사들을 사용하고 13장은 가장 큰 은사는 사랑하는 은사이고 고전 13장은 사랑장이다. 그러니까 12,13, 14장은 은사를 발휘하는데 기초가 무엇이냐면 오늘처럼 성찬식의 은혜를 유지해야 은사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님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소위 은총의 통로, 은혜의 보존 장치를 두 가지를 주셨다. 하나는 말씀ㅇ르 주시고 하나는 성찬을 주셨다. 그래서 이 성찬은 눈에 보이는 말씀, 그렇게 성찬을 말씀할 수 있다.
 
이 배경을 가지고 오늘 성찬을 우리가 떡과 잔을 기념하면서 실천 사항의 몇 가지를 정리를 하겠다. 이 성찬에 대해서 우리가 2년 6개월 동안 좀 더 깊이 있게, 오늘 이 본문을 어떻게 보면 성찬의 가장 클래식한 말씀이고, 이 본문이 성찬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가장 표준 말씀이다. 이런 말씀을 앞에 놓고 이 성찬에 대해서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정리를 해야 되는데, ‘음식에 대해서 진심이다.’ 그런 말을 더러 한다. 뭐 옷에 대해서 진심이다. 찐 마음을 다한다. 그런 것처럼,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은,
 
I. 성찬에 대해서 진심인 성도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29,
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저는 어릴 때부터 성찬에 참여하면서 27-29절을 보면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성찬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분열도 있고 이 고린도교회가 문제가 많아가지고 성찬에 대해서 이렇게 식사처럼 해서 성찬을 구분을 하지 못하고 했는데 잘못 된 것을 모르게 서로 이렇게 파벌이 있었다. 진리를 지키는 데는 우리가 잘 수고를 해야 하지만, 성찬의 참여하는 데는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참여를 해야 한다. 부자는 부자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그때는 어려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찬을 제대로 잘 못 지킨 것이다.
 
*고린도전서 11:30,
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찬식을 잘못 지켜가지고 약한 자, 영육 간에 약해진 것, 병든 것,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병든 것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고 잠자는 것, 죽음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성찬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어떻게 보면 거룩한 징계이다. 그리고 이 징계는 꼭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표준이니까 좀 강하게 질책을 받았다. 예를 들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을 해서 죽어버렸다. 지금 같으면 거짓말을 해서 다 죽는다면 오늘 시체가 둥둥 떠 다닐 것이다. 초대 교회는 좀 강하게 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성찬에 참여해가지고 좀 진심으로 대하지 못한다고 약해지고, 병들고, 죽는다면 “나는 그냥 성찬에 참여를 안 할 거야. 나는 적당히 믿고 참여를 안 할 것이다.”라고 그런 마음은 주님과 상관이 없는 마음인 것이다. 그런 아닌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앞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하여 영적으로 한 가족이 된 것이다. 가족은 부족한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고 약한 것도 서로 나누어가지고 다시 회복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릇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는데, 성찬식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32절을 보면,
 
*고전 11:32,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우리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징계는 사람을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는다. 징계는 자식을 망하게 하지 않는다. 나태와 태만이 자식을 망하게 하는 것이고, 나태와 태만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게 하는 것이지 징계는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 자신을 깊이 들어보면 거룩한 징계가 있을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되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자 그런 마음으로 모든 성도들이 정경의 영으로 무장하여 성찬의 진심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맞춤의 은혜를 주시길 소원한다. 그렇다면 성찬을 진심으로 다가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II. 성찬에 대한 진심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절감해야 한다.
 
*고전 11:26 ,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고전 11:23-25,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어떤 교회의 전통인가? 아니면 누가 교리와 신학으로 만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인가?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직접 제정하시면서 기념하라고 하시고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두 번 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왜 기념하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속성은 잘 까먹고 은혜를 잊는다. 우리도 모르게 자꾸 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잊지 않도록 매일 단련 하도록 매일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현장이 먹고 마시는 것, 그럴 때마다 주님의 성찬을 기념하는데 기억하는데, 기억하여야 한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 오늘 이 자리에 영 가족이 참여하면서 우리는 주의 죽으심, 성찬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깊은 은혜를 절감하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지고, 마음이 뭉클 해져 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감격을 마음에 새기고 새기라는 것이다. 저는 오늘도 아침에 기도하고 나오고 성찬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나오면서 어릴 때 저희 할아버지가 주일 교회 가실 때 하얀 한복을 입고 가시는 것처럼 저도 오늘 할아버지처럼 성찬에 참여하면서 제 마음에 ‘주님, 제가 무엇이 관대,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 제가 무엇인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내 무언데 오늘 이 성찬식을 통하여 절감이 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데,’ 라고 하면서 준비를 했다.
 
웬일인가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비로운 영역이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에 대해서 절실하게 깨닫고, “주님, 이 성찬에 참여하게 하여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언제 감동해 보았는가? 언제 눈물을 흘려보았는가? 무얼 보면 감동이 되는가? 언제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가? 저는 메말라서 감동이 없습니다. 저는 감동의 DNA가 다 사라졌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눈물이 회복이 되어야 한다. 그게 성찬의 부흥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 코로나 걸렸다고 그러면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은 누가 코로나 걸렸다고 하더라고 그냥 무덤덤하다. 만약에 십자가의 사건이 그렇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여러분이 밤에 아프고 불덩이가 되어가지고 잠을 못자고 여러분의 손자손녀가 아파서 어린이집을 못가고 밥도 못 먹는다고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마음이 아프고 그냥 안타까울 것이다. 자녀가 아파도 마음이 무너지는데,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심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얼마나 어려우셨으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는가? 영적인 주님의 그 처절한 고통을 생각하면 오늘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한다는 것이 너무나 특별한 것이다.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데 우리나라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다. 남북이 만나는 모습이다. 이 이산가족의 이울음은 민족의 영원한 체루 탄이다. 열두 살 난 딸아이를 잠시 놔두고 잠시 남쪽에 다녀오겠다고 어떤 어머니가 피난을 했는데 그 딸아이를 60년 만에 만나는 것을 제가 보았다. 열두 살 난 딸아이가 61세가 되고 그 어머니는 96세가 되었다. 그리고 96세의 어머니가 딸아이를 안고 어떻게 이렇게 만났는가!! 꿈속에서도 보고 싶은 너를 만났다. 60년 동안 한 번 도 잊지 못한 딸을 만난 것이기에 엉엉 울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이 눈물바다가 되었었다. 그걸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십자가의 은혜, 주님의 살과 피를 앞에 놓고 우리가 맹숭맹숭하다. 이건 진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 신비한 것이고 이것은 정말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로마서 4:25,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로마 병정들에게 내어주심이 되셨다. 육신이 다 찢기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포기한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그냥 있을 수 없다. 십자가의 피를 깨달으면,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 2장 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전 2:2,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죽하면 그래서 성찬의 부흥의 우리 나름대로 공식이 있다면
 
▷신앙생활이 은혜는 십자가와의 거리에 정비례한다.

-우리의 범죄 때문에 내어주심 된 예수 그리스도께 십자가에 다가가 앉을수록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십자가에 더 멀어질수록 우리는 병이 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이 왜 병이 들었는가? 내가 예수 믿는다면서 왜 그렇게 우울한가? 나는 아직까지 신앙생활에서 왜 그렇게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가? 그런 분이 계시면 오늘 성찬식을 통하여 그 멀어진 십자가를 통하여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오늘 십자가 앞에 다가가 주님을 바라보는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우리는 죄의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우리는 죄의 중력권에서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력이 있는 만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죄의 본능이 더 살아나고 십자가와 더 가까워지면 죄를 이겨낸 죄의 중력을 이겨내는 힘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죄의 중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야 하고 특별히 성찬을 통하여 십자가 앞에 더 살갑게 다가가 앉는 축복을 주시기를 소망한다. 십자가에 다가가 앉을수록 그 은혜를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인생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다. 인생을 지그재그로 낭비하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 다가 앉을수록 갈지(지(之))로 살던 인생이 집중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는 것이고 덜 중요한 인생을 낭비하거나 그렇게 헛되이 하지 않는다. 집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 주님 진짜 십자가를 깊이 알고 십자가가 나에게 진정한 자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려면 오늘 두 가지 기도 제목을 가져야 한다.
 
III.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흔적(痕迹)-(상처(傷處))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 다가가 앉는다는 것은 그냥 다가앉는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때문에 우리에게는 상처가 있다. 바울 같은 경우는 갈라디아서 6:17절에 무엇이라고 하는지 말씀을 보면,
 
*갈라디아서 6:17,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십자가 앞에 다가앉는 분들은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 십자가의 상처이다. 이게 상처이지만 명예로운 신앙의 훈장이다. 바울 같은 경우는 사도행전 14장 같은 경우를 보면 구스드라 섬에 그가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이 돌멩이를 던져가지고 바울이 죽은 줄 알았다. 죽은 줄 알고 거적때기 에다 바울을 둘둘 말아서 버린 것이다. 바울의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고난을 당할 수가 있는가? 라고 제자들이 엉엉 울고 있는데 바울이 다시 살아났다.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냐면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고 제대로 따르려면 우리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 예수님을 따르는 흔적으로 40이 하나 감한 매를 195번이나, 서른아홉 대를 195번이나 맞았다는 것이다. 이 태장을 맞으면 당시 그 고통은 대단했다. 태장을 열 대 맞으면 살점이 찢어지고 스무 대를 맞으면 피를 토하고 30대를 맞으면 혼절한다. 이 태장을 40번을 맞아서 시체로 실려 간 사람들이 많다. 이것을 바울은 다섯 번이나 맞았다. 기가 막히다. 아마도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바울에게 있는 십자가를 깊이 묵상한 삶의 바울의 삶의 흔적이었다. 헬라어로는 ‘스티그마’이다. 흔적들-스티그마 타(복수), 수많은 흔적들이 바울에게 있었다.
 
예수님의 물과 피를 흘리신 그 흔적을 생각하면서 바울은 십자가의 흔적을 갖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늘 햇빛을 보지 못하는 분들은 사무실에서 얼굴이 하얗게 된다. 야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굴이 많이 탄다. 그것이 삶의 흔적이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주시는 것처럼 흔적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흔적이다. 우리 마음에 두 가지 거룩한 상처가 있다.

▷첫째-죄를 고백하는 상처.
-회개에 대한 상처이고 죄를 자백하는 상처이다. 여러분이나 저는 회개하고 자백해봐서 알지만,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 여러분 죄를 회개 하려면 몸부림을 치고 떼굴떼굴 굴러야 한다. 죄에 대한 좋은 의미에서 상처이다. 그러니까 오죽하면 죄의 회개에서 힘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죄를 지지 말아야지 이렇게 할 정도로 죄의 고백에 대한 상처이다. 십자가에 죄를 고백하는 상처이다. 그래서 이 상처는 마음이 순전하면 순전할수록 영적으로 더 정결할수록 이 상처가 더 큰 것이다. 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내가 죄인의 괴수라고 한다. 어떻게 바울이 죄인의 괴수가 될 수 있는가? 물론 처음에 예수님을 핍박할 때 좀 그런 게 좀 있었지만 나중에 더 주님을 닮아가고 영적으로 더 순전해지고 더 정결의 영과 거룩의 영이 충만할 때도 ‘내가 죄인의 괴수이다.’ 왜냐하면 에 대한 회개와 상처 때문에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게 죄에 대한 회개와 상처가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오늘 이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죄에 대한 회개에 대한 상처가 성찬이 되기를 바란다.
 
둘째-주님 사랑하는 상처.
-주님 사랑하는 상처이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사랑 때문에 상처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것 때문에 생기는 상처이다. 우리 주님은 내 생애의 전부요, 시작과 마지막이요, 올인 해야 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가 있는 것이다. 주님 사랑한 것 때문에 억울함을 당할 수도 있고, 손해도 볼 수도 있고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것 때문에 세상 적으로 상처가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성찬의 떡과 포도즙은 그 본질은 으깨어지는 것이고 부서지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마음의 자세는 십자가를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으깨어지고 부서지는 것이다. 자아가 깨어지는 것이다.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깨어지는 것이다. 떡을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알갱이의 곡식이 가루로 빻아져야 하고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는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포도알들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 자신도 으깨어져야 하고 부서져야 하고 그런 것이다. 예전에 복음 성가가 있지 않은가?
 
♬부서져야 하리, 깨어져야 하리~~
-이 가사는 신앙의 깊이를 아는 고백이다. 이 사랑의 상처는 섬기다가 되는 상처이다. 교회에서 섬기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사랑하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를 섬기다보면 의견 불일치로 행정적인 일 때문에 진리 문제가 아니라 캐미가 안 맞아서 상처 받는 사람도 있다.
 
그럼 저 같이 목회자로서 상처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교회 내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아픈 분들을 보면 깊은 상처를 받는다. 장애를 가지신분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을 정도로 고통 하는 우리 젊은이들, 진짜 고통 하는 그 아이들을 보면 섬김의 상처가 있는 것이다. 생각의 틀이 좀 달라가지고 어떤 판단의 기준이 달라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볼 때마다 섬김의 상처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의 상처고 섬김의 상처이다. 우리 가운데 주님 섬기다가 예를 들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내가 남편이 예수를 안 믿어서 십년 동안 기도를 하는데도 남편이 안 돌아오는 것이다. 이십년 삼십년 기도했는데도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을 때, 남모르는 그 구원을 위한 구원사역 위한 상처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하여 40년 이상 기도를 했는데도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상처는 주님과 나만 아는 상처가 아닌 것이다. 이 상처가 십자가를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오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함으로 말미암아 이 자백의 상처와 섬김과 사랑의 상처를 주님이 치유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성찬은 오늘 우리 때문에 거룩하고 깊은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찬의 깊이 들어가면 이 성찬이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가를 알아보자. 고전 10:16-17절을 보면
 
*고전 10:16~17,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오늘 강한 이중 부정은 강한 긍정이다. 무슨 말이냐면 피와 떡은 이것이 떡과 피가 그냥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축복의 잔과 축복의 떡이 되는 것이다. 이중 부정은 더 큰 강한 긍정이다. 축복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참여하는 축복의 잔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떡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축복의 떡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축복이 나중에 어떻게 연결되느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얼 먹느냐의 따라서 우리 인생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요한계시록 3:20,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단순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놀라운 축복의 떡과 축복의 잔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요한계시록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나오는 것이다. 어린 양 혼인 잔치 집에서 먹고 마시는 그 하나님의 예고편을 지금 우리가 성만찬을 통해서 예고은혜 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늘 하는 이야기가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오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축복의 떡과 축복의 잔이 되는 것이다. 제 말씀이 아니라 요한복음 6:55절에 보면,
 
*요한복음 6:55,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무얼 먹고 무얼 마시느냐가 여러분의 영적 건강이 결정된다. 우리 평생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인 것이다. 마시는 것은 성령이 우리의 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 예수님으로 먹고 마시도록 하자. 사탄의 것을 먹고 마시면 뱀처럼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얼굴이 다 예수님의 얼굴처럼 되어간다. 얼굴이 성자처럼 되어가는 것이다. 예수님 믿는 50년 60년 70년, 80년이 되면 다 얼굴이 성자처럼 것이다. 왜냐하면 날마다 주님을 먹고 마시기 때문이다. 오늘 그 현장을 우리가 체험하길 바란다. 찬송가 웬 말인가 날 위하여 를 찬송하면서 오늘 다시 한 번 이 자리가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자리, 어린 양 혼인 잔치 집에 리허설, 상처가 있더라도 그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훈장이 될 수 있도록 혼인잔치를 미리 맛보는 예고편이 되길 바란다.
  
♣요약

6.25 72주년을 맞이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가 주님의 구원하심의 인도하심으로 나라가 살았던 것처럼 코로나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답답하고 영적으로 패배주의에 빠진 것들이 있다면 오늘 성찬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살아나고 부흥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은밀한 죄들, 나태와 오염된 것, 부끄러운 것을 주님께서 오늘 성찬을 통하여 다 씻어져서 우리가 떡을 받고 기념하는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치유와 새 힘을 공급받기를 소원한다. 주님의 보혈의 잔을 통하여 영적 가족 모두가 주님 안에 참된 팀웍을 가져서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서로가 소중함을 깨닫는 영안이 열리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먹고 마실 때마다 은혜의 보존 장치인 말씀과 성찬을 기억하고 주님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성찬식을 통해서 진정한 기념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 때문에 창에 찔리시고 상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고 메마른 눈물이 우리의 가슴을 은혜로 충만히 적시는 성찬의 부흥이 되길 소망한다.
 
-성만찬은, 유월절 전날 만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성례로서, 행동하는 설교의 형태를 가진다. 성만찬은 교회의 2,000년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거행되어 왔다. 이는 주님의 구속 사역을 기념하고, 재림의 소망을 더욱 견고히 하는 것으로 말세의 교회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먼저 자기를 살피고 분별한 후에 믿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자신을 살피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또한 성만찬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귀중한 교회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의식은 단순한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구속 사건의 재연으로써, 이미 주신 위대한 구원을 재확인하는 놀라운 은혜가 내포되어 있다. 만일 합당치 않게 성만찬에 참여하면 주님의 징계를 받아, 초대 교회처럼 교회 안에 병든 자와 죽는 자들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은 때로 징계를 통해 우리들에게 우리의 무지와 죄를 가르쳐 주신다. 따라서 환난이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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