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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2년 6월 29일)
제목: "삶과 죽음이 여기에 있으니"
말씀: 요한복음 12:23-25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찬양대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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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3-25,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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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난 월요일에 강릉에 다녀왔다. 비가 차 많이 내렸다. 그곳에 계신 목회자님들은 이 비를 금비라고 부르셨다. 오랜 가뭄에 정신없이 물 붓듯 쏟아지는 비가 금이 쏟아지는 것만큼 좋다고 하신다. 오늘 이 시간 성령이 단비가 우리 심령에 금비 같이 쏟아져 심령이 힘을 얻기를 원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요한복음 12장이다.
 
오늘 읽은 23절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12:23-25,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영광이 무엇인가? 우리 주변에 영광스런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제가 강남역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한 번 찾아보았다. ‘고층 빌딩’이 영광스러운가? 이기도 하고 ‘화려한 매장’들이 영광스러운가? 찾아보았다. 아닌 것 같아서 신문 기사를 찾아보았다. ‘영광스런 금메달’이란 표현이 많았다. 제가 영국 단기 선교사로 잠시 있을 때였다. 영국인 집사님 댁에 잠시 머물렀다. 그분은 좀 독특한 이력이 있었다. 반가운 이력이기도 했다. 88년 올림픽 때에 영국 국가대표 체조선수로 한국에 왔었다고 한다. 영국의 금메달을 안겨주셨던 분이셨다. 금메달도 보여주셨고 시상식 시상대에서 찍은 사진도 보여주셨다. 영광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집사님이 조금 붙어서 둔해지셨고 메달도 오래 되어서 색이 바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얼굴에서 그날의 활기와 감격은 많이 사라진 것 같았다. 이것이 영광인가요?
 
영광의 사전적 의미는 ‘빛나고 아름다운 명예’라고 나와 있다. 여러분은 빛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대 유럽에서 허리띠에 주머니를 달아서 열쇠도 넣고 지갑도 넣고 빗도 넣고 나이프 등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이것이 ‘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루이비통’이라는 디자이너는 실용적인 디자이너로 여행용 가방을 선보이며 명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명품은 화가 난 아내나 여자 친구에게 기분을 풀어주는 최고의 묘약(妙藥)이 되었고 미용실에 갈 때 나를 가장 영예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되었다. 루이비통이 영광인가?
 
이사야서는 이 모습을 보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한다고 말씀한다. “어디서 영예를 얻으면 되는가?” 이런 말이 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출세하여 이름을 떨치다). (의금(衣錦)지영祗迎-비단옷을 입고 돌아가는 영광)이란 뜻이다. 비단옷과 출세가 여러분을 영예롭게 하는가? 이것이 영광인가?
 
성경에서 이 땅에서 최고의 영광을 솔로몬의 영광으로 표현한다. 가장 많은 돈과 온 세상의 떨친 명예, 그리고 가장 큰 학식, 많은 재산만큼 많은 여자를 가졌던 솔로몬 왕이었다.
 
*마태복음 6:29,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도대체 영광이 무엇인가? 영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죽음을 보아야 한다. 오늘 말씀에 한 알에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LA에 한 장의사(葬儀社)가 이런 책을 썼다. 책 제목이 좀 그렇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이상한 제목을 가진 책 제목 때문에 한 기자가 흥미를 느끼고 책의 저자인 ‘케이틀린 도티’를 찾아갔다.
 
인터뷰 후에 작가가 남긴 말이다.
“옛날에는 묘지가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길거리에는 거죽이 덮인 시체를 볼 수 있었고, 방에서 할아버지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손자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은 자들을 깨끗하게 얼굴을 씻기고 살아있는 자처럼 화장을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삶에서 내쫓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은 죽음을 우리 곁으로 다시 불러왔습니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 세상은 사망 몇 명, 감염 몇 명으로, 날마다 숫자로 죽음을 세어보았습니다. 오늘 만난 사람이 내게 죽음을 전해 줄까봐 손도 잡지 않고, 이 사람의 흔적이 남은 것은 소독제로 부지런히 지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호흡마저 마스크로 가려버렸습니다.”
 
고(故) 이어령 교수님은 ‘마스크의 그 한 장이 생명이 된 사회’라고 하셨다. 전 인류가 죽음을 잊고 돈 놀이, 관능적인 감각에 빠져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든 순간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을 매일 마주하고 있음을 다시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매일 죽어가듯 살아가는 인생은 영광을 알기 어렵다. 죽음의 문제는 늘 큰 산이 되어 영광을 가린다. 죽음의 산을 옮겨야 영광을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넘어 영광을 알 수 있는가?
 
*요한복음 12:24,
24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쉽지가 않다. ‘객관적 지식’이라는 용어가 있다. 경험해보니 알겠네, 라는 지식이다.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알 것이다. 김두환이라는 주먹쟁이가 종로에 막 나타날 때였다. 자기소개를 이렇게 한다. “나 김두환이야.” 김두환이 누구냐고 시비를 걸어오면 빠바박 ~~주먹을 날려버린다. 맞아 본 사람은 김두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알게 된다. 이런 지식은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도 알게 한다. 우리 성도님들도 알 것이다. 김승진 목사와 김두환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제가 이길 것으로 말씀하시는데요. 구약 성경에 이러한 객관적 지식이 등장한다. 당시 최고였던 이집트 왕 바로가 묻는다. “여호와가 누구인데 나에게 명령하느냐?” 내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다. 이 재앙을 경험하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열 번째 재앙을 경험하던 날,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게 된다. 아 놓아주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놓아줄 때까지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도님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무엇인가?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 그분을 만나야 하고 그분을 만난 이를 통해 들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지혜로운 스승을 안다는 것도 아니고, 민족의 해방과 혁명을 이루려고 했던 역사적 인물을 만나려고도 아니다. 가난한 자, 눌린 자를 사랑했던 한 박애주의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병을 고치고 복을 주는 어떤 신화 속의 인물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배웠던 이들의 증언을 듣는 것이며 예수님의 삶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신하는 것이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성령을 통해 오늘 믿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요한이 만난 예수님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알려주고 계신다. 요한은 먼저 예수님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표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표적이란 예수님을 통해서 실재 하시는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라고 어느 신학자는 이야기 한다. 기적은 단순히 놀라운 사건이지만 표적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한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복음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물질을 바꿀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계신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실 때는 시간과 공간을 제약 없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모습을 아니 계신 곳 없으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실 때는 어떠하셨는가? 시간의 주인 되심을 나타내셨고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는 결핍된 세상 안에 창조주 하나님의 풍성한 끊임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물위를 걷는 사건은 자연법칙을 다스리시는 이 만물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셨고, ‘이 불행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를 물어보는 그 질문 앞에 인생의 주인이 너희가 운명으로 말하는 그 주인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오늘 말씀 앞에 드디어 죽은 나사로의 이야기가 등장을 했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을 만난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 섰다. 그리고 분노하셨다. 예수님의 분노는 직업적으로 그 앞에서 곡하는 자들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을 향해 원망 섞인 말소리를 드러내는 마리아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죽음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무덤으로부터 나사로를 불러낸다. “ 나사로야 나오라”, 분명히 죽었고 이제 썩어가기 시작했던 육신, 땅에 묻혀버린 육신을 불러내신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려주는 표적이다. 죽음의 권세를 꺾는 생명이 주가 누구신지, 참된 생명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요한은 요한복음에 절정이 오는 것처럼 오늘 말씀을 통해 목소리 높여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생명은 무덤에서 시작되었다. 제가 청년부사역을 했을 때, 하루 만에 인생을 다 돌아보았을 때가 있다. 토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장례식에 발인 예배와 하관예배를 인도하러 갔다. 부지런히 서둘러 정오에는 결혼식 예배를 집례 했다. 그리고 저년에는 돌잔치가 있어서 찾아가 돌 예배를 드렸다. 퀴즈를 내겠다. “김승진 목사님은 제일 영광스런 시간이 언제였을까요?” 1번 돌잔치, 2번 결혼식, 3번 장례식, 2번 결혼식이라는 생각이 드실 것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정확하게 3번이라고 한다. 성경은 영광을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영광은 예수님이 땅에 묻히는 것이라고 한다. 아니 태초에 저주 받은 땅에 치는 것이 영광이라고? 이것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게다가 땅은 죄로 인해 더럽혀진 곳이다. 태초에 생명이 창조되었던 곳이었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던 곳이었지만, 하지만 분명히 죄로 더럽혀졌다. 인간처럼 땅도 저주를 받아 죽음만 남아 있다. 결국 땅은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원래 땅은 다 썩게 만든다. 인간의 몸이 땅을 흙으로 돌려버린다. 이것이 이치이고 지금까지 그랬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밀알을 보여주며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묻히면 썩어서 쓸 수 없고 죽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썩고 죽고 다시 싹을 틔워가는 과정을 말씀하신다.

죽음과 생명의 사이에 서서 죽음과 영광의 사이에 서서 예수님의 죽음이 열매를 어떻게 맺게 되시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계신다. 죽음의 땅에서 소멸과 상실이 아닌, 생명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 주고 계신다. 태초에 동산, 에덴동산의 땅처럼 땅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처럼, 땅에서 생명이 일어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죽음의 나라가 회복된 나라로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것이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고 계신다. 이 놀라운 가르침을 당시 성경학자들도, 제자들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다. 우리도 그렇다.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전쟁의 소식에 생명이 위협이 될까 였다. 연일 보도되는 인플레이션의 소식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지키지 못할까 두렵다. 환경문제와 새로 만나는 바이러스 소식은 생명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어렵다. 당장에 생명을 위협하는 이들 앞에 정신이 없다.

 
*요한복음 12:25,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요한복음 12:10-11절에 보면 나온다.
 
*요한복음 12:10-12,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예수님이 기껏 나사로를 살려놓았다. 그런데 이 나사로를 이제 죽이려고 한다. 이유는 나사로 때문에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장에 먹고 살기 위해서 체제 유지의 위협을 받을 것 같아서 나사로를 죽이려고 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왜 살리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다. 그들이 죽이지 않더라도 나사로는 또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나사로를 왜 살리셨을까?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나사로를 살린 기적은 제가 말씀 드렸던 일곱 가지 기적 중에 마지막 기적이며 표적의 절정이다. 표적이란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 보면 예수님이 누군지 알 수 있다. 지금 이 손가락은 생명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생명의 책이라고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생명,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 영원히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 생명의 떡, 죽어도 사는 부활의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시다.죽음의 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말씀은 생명의 근원과 죽음이 대면하는 현장이다. 죽은 존재와 산 존재가 공존하는 장면이다. 죽음이 이기느냐, 생명이 이기느냐 전쟁이 밀알이라는 이 씨앗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죽어가는 부분들, 죽어왔던 부분들, 죽은 자들 앞에 살리시는 예수님이 계신다. 생명의 예수님이 계신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계신다. 이 생명은 죽음 앞에 선 생명이 소멸됨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다. 결국 이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 생애 문제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생명의 산 주인이 되신다. 어떤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두렵게 해도 어떤 죽음의 무지가 우리를 속여 올지라도 죽음을 죽이시는 생명의 권세는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만 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일어난 뼈들이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뼈들이 다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 되었도다 하느니라.” 이 때 하나님께서 37장 2절 하반 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에스겔 37:13,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에스겔은 이미 보았다. 죽음에서 생명이 일어나는 영광된 인간을 보았다. 밀알이 열매 맺는 것을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것을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이 부활하는 것을 보았다. 죽음의 땅이 솟아오르는 희망의 땅이 되었다. 이 땅은 약속의 땅이며 좋은 땅이며 새 땅이며 소경이 보는 땅이고 앉은뱅이가 걷는 나라이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는 땅이고, 귀머거리가 듣는, 가난한 자가 없는 땅이며, 죽음이 없는 땅이고 영생하는 땅이다. 이러한 땅에서는 영광을 볼 수 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영광스럽다. 라고 말한다. 죄악으로 죽은 우리 육신이 예수의 생명으로 새로워지는 것을 볼 때, 영광스럽다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 때, 예수님을 믿을 때, 생명의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알고 계신가? 정말 그 생명의 주 되신 우리 주님을 믿으시는가? 다시 요한복음 11장,
 
*요한복음 11:25-26,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의 몸에 생명이 거한다. 예수님 안에는 영광의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고 있다.
 

*요한복음 1:14,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놀라운 영광이 우리 가운데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땅의 흙 같은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불렀다. 토기장이가 흙을 떼어 주물주물 거려 만든 그릇을 질그릇이라고 한다. 이 그릇이 쓸모 있는지 버려야 할 것인지를 토기장이가 판단한다. 누가 볼품없고 쓸모없이 보이는 질그릇이지만 토기장이가 그 그릇을 가지고 와 귀한 것을 담는 다고 한다. 그 형편없는 그 그릇을 세계 3대 진미를 그 그릇에 담아내기 시작하며, 그 그릇은 귀한 손님을 대접한 그릇이 되고 또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이 왕의 식탁에 올라가면 왕가의 가보(家寶)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이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하나님은 담으셨다. 그것이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주셨다. 흙으로 만들어진 그분 안에 영광을 담아주셨다. 그 보배를 이 질그릇에 담으셨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질그릇 같은 내 안에 여러분 안에 영광을 담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아 주셨다. 성경에서 가장 귀한 것,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참 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을 담아 우리를 가장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죽을 수 없는 생명,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고린도후서 4:7,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담으신 그 영광이 다시 영원한 생명을 움트게 한다. 삶과 죽음의 자리를 늘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죽음이 생명의 결과이며 결국이라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복음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말씀을 맺겠다.

국내 전도 부를 섬기며 아주 먼 곳에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목사님에게 물었다. “왜 이 먼 곳에 교회를 세우셨나요? 이 마을에 아무리 많아도 백여 명이 될 것 같은데, 5-6분의 성도님을 모시고 평생 함께 이곳에서 목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신다. “생명이 필요한 곳,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곳, 복음이 요청되는 땅 끝을 가는 것은 이유도 까닭도 없이 가야하는 것이 마땅해서 그렇습니다.”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내게 그분의 생명을 누구보다 멀리 외진 곳에 살았던 나를 누구보다 홀로 살아가던 날을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전 먼 곳까지 장례를 다녀온 적이 있다. 어머님이 믿지 않고 돌아가셨던 터라 성도님은 장례를 부탁하기도 어려운 것 같았다. 도착하여 입관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어머님 홀로 사셨던 그 마을에 목사님이 오셨다. 성도님이 알지 못하셨을 때,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시던 목사님께서 그 어머님을 늘 찾아오셔서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알게 하여 주셨기에 그 어머님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영원한 나라에 거하게 되셨다. 왜 밀알이라고 하셨는가? 밀알은 보이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 같다.
 
팔레스타인 섬 동네 출신인 젊은 예수님은 땅에 떨어진 밀알이셨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 주실 때, 사막에 쓸데없는 떨기나무에 임하실 것이 아니라, 본인이라면 정 2품 소나무에 임했을 것 같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인가? 하나님은 소박하게 위대한 일을 하셨다. 밀알은 매장 당하고 묻히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그분은 죽으셨기 때문에 위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지셨다.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열매와 씨앗은 다르다. 우리에게 열매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썩어질 씨앗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열매를 보기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씨앗들이 일어나기를 원하신다. 파묻힐 준비를 하는 씨앗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다.
 
♣요약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을 따라 영광을 보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이 땅에서 국한 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니 믿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한다. 주님의 모든 제자들이 땅에 잘 심겨진 밀알처럼 죽고 썩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믿음을 통해 생명을 허락하시고 영광 가운데 우리를 만나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를 올려야 한다. 죽음의 귀결과 인생이 귀결이든 인생의 그림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변화시키실 영광의 말씀 앞에서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열매 맺는 성도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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