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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6월 4일)
제목: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소서"
말씀: 마태복음 9:37~38
말씀읽기: Daria Tomareva 자매
대표기도: 전동균 안수집사님

설교자: 조지버워 선교사(OM선교회 초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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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37~38,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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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버워 선교사(OM선교회 초대총재)

 
*마태복음9:37~38
37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다른 사람
다른 나라돕는 비용은 5%

OM은 65만명 선교사배출
60주년

givers of God's surprise

*시편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마태복음16:16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로마서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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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2년 6월 1일)
제목: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말씀: 창세기 18:9-15, 21:1-6
찬양인도: 쉐키나, 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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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9-15, 21:1-6,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21:1-6,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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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은 언제 그렇게 크게 웃어보았는가? 아 열심히 청년들이 직장을 위해 준비해서 취업을 했을 때, 큰 소리로 웃을 것이다. 그토록 기다렸던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니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자녀가 태어났을 때, 손주가 태어났을 때, 아마 큰 기쁨의 웃음소리가 그 가정에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혹시 오늘 선거결과를 통해서 웃으셨던 분들도 계실 것 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웃음이 삶에 우리의 유익이 되고 몸에 좋다는 것들을 알았던 것 같다.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라는 그런 한글을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 대문에 썼다. 웃는 집안에 복이 온다는 뜻이다. ‘일소일소(一笑一笑)’ ‘(一怒一怒)’ 이런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웃음에 대해서 연구하다 보니까 그리스에 어원에 ‘헬레’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단어로부터 건강이라는 Helth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고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웃었을 때 기쁨이 오고 또 기쁨으로 말미암아 온 몸이 건강하게 된다는 것들을 동서고금을 통해서 경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코로나 불루’가 생길 정도로 코로나 펜데믹을 경험하면서 우리에게 웃음이 상실되어 갔다. 코로나가 끝나면 모든 것이 회복되어서 일상이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건만 코로나가 끝나가는 이 시점, 다시 한 번 돌아보면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의 침공, 그 전쟁으로 촉발한 식량위기, 석유와 천연가스등 자원기갈이 겹치면서 곳곳에서 물가가 상승하고 주가가 폭락하고 미래가 불안한 소리만 들리는 바로 이런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이 필요한 것 같다. 어떡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 주님께서 우리를 웃게 하는 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한 가지 배워보길 원한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두 가지 다른 차원의 웃음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창세기 18장 말씀을 보면, 사라의 웃음이 처음 나온다.
 
*창세기 18:12-15,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어떤 장면에서 이 말씀이 기록되었는가? 아브라함이 집 앞에 앉아 있는데 세 분의 아주 귀하게 생기신 분들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여 그 세 분을 집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그 세 분은 다름이 아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 하라는 하나님의 천사였다. 이 아브라함의 이 환대하는 모습, 이것은 무슬림 세계에서도 그대로 이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무슬림은 본인들은 아브라함이 큰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 모습을 그대로 본받기를 원한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무슬림이 테러리스드., 뭔가 과격한 사람 같지만 막상 무슬림 지역들, 전도 여행을 다니고 그 지역을 방문하게 되면 방문객들에게 친절하고 많은 선을 베풀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대화의 중간에 하나님께서 드디어 이런 말씀을 주셨다. “이제 너희가 그토록 기다렸던 아이가을 것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다. 얼마나 기다렸던 아들인가? 그 약속을 기다리면서 고향을 떠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바로 그 약속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자 주위에서 반응은 어땠을까? 할렐루야를 외쳤을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자기의 처한 상황을 알기에 그녀는 자기가 임신하지 못할 생리가 끝난 자기의 몸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면 쓴웃음, 어떻게 보면 비웃음, 그 웃음의 자기도 모르게 터트렸던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때로는 그런 것 같다. 자기가 처한 현실과 자기가 바라는 이상의 간극이 너무 클 때, 그 사이를 채우는 유일한 방법으로 웃어버리는 것 같다. 사라는 그토록 기다렸던 아이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제는 본인의 몸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저 웃어버린다. 이 세상에 많은 웃음이 지금 팬데믹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웃음이 이러한 웃음인 것 같다. 모든 상황을 바라볼 때, 자기의 꿈과 채워질 수 없는 너무나 막막한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웃음은 이 세상 속에서 쓴 웃음, 혹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기의 현실을 슬퍼하면서 나오는 이러한 통곡어린 웃픈 웃음이 아닌가 싶다.
 
모든 물가는 다 오르고 있지만 내 봉급만 오르지 않는 현실, 아무리 노력해도 집 한 채 얻을 수 없는 이 막막한 현실, 자녀를 출산하고 좀 번듯하게 키우고 싶지만 이 세상 사교육비의 높은 벽을 바라볼 때면 그마져도 힘든 현실들, 그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저 쓴웃음만 짓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라의 웃음을 깊이 있게 해석해 주심을 보게 된다.
 
*창세기 18: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 웃음의 깊은 곳에는 불신앙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신다. 사라가 웃은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사라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자기는 아마 뇌에서 그런 반응을 통제하기도 전에 웃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슨 아이를 낳아?”라고 하면서 씩 웃었는데 하나님은 그 장면을 보시고 믿지 아니하는 그 모습을 지적하셨을 때,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을지,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저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을 때, 끝까지 추긍하시며 “네가 웃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음으로 조롱으로 대답하는 이 사라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그저 받아주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노라고 하지만 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연약한 믿음 속에서 연약한 존재인지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서 21장에서 또 다른 웃음을 주시고 있다.
 
*창세기 21:3-6,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드디어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이라는 단어는‘ 웃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이차크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며 바로 그 뜻은 ‘웃음’이다. 아브라함이 백세, 사라의 나이 90세가 되었을 때, 이제는 모두가 다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고, 자기마저 포기했던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 이삭이라는 그 이름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는 사라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사라의 삶, 아브라함의 집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 웃음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한 데서 나오는 반응이다. 의심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다. 체험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의 반응은 웃음이었던 것이다. 18장에 웃음은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의 웃음은 비웃음, 불신앙의 웃음이었겠지만 21장의 웃음은 감탄의 웃음이다. 경이로운 체험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웃음, 바로 예배의 웃음이었으리라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이러한 반응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 하나님을 향한 찬사, 하나님을 향한 기쁨,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이삭은 많은 모습에서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사람의 능력이 끝나는 그 순간 잉태되었던 바로 그 모습도 성령으로 잉태 된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다. 특별히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 바로 거기서 가장 예수님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이 대답을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시리라.” 바로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어린양, 그 제사의 어린양으로서 이삭이 먼저 드려 질뻔 하지만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을 모리아 산에서 보여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11장 19절에서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서 11:19,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바치면서 진짜 죽이려고 했다. 왜 죽이려고 했는가? 죽은 아들, 이 아들이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삭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하나님의 자손을 많게 하실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이 이삭을 살리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누구를 보여주는가? 바로 구약 성경이지만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부활하실 예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들의 최고의 웃음, 최고의 기쁨은 누구를 통해서 오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때, 우리 삶이 진정한 만족, 진정한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매 순간 살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러한 웃음이 그 삶에 있게 될 것이다. 한 번 여쭙고 싶다. 이 자리에 계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이 웃음, 하나님이 웃게 하시는 바로 그 웃음을 웃어본 적이 있는가?
 
저는 선교현장에서 2012년부터 섬기게 되었고, 한 어떤 시기보다 훨씬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게 했던 것들을 경험한 것 같다.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두 개의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제가 유럽에서, 영국에서 선교 사역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경험이었다. 저는 처음 2011년 말에 영국 웨일즈로 파송 되었다. 선교훈련을 받고 영국에 있는 작은 신학교에서 교회를 개적하는 사역들을 돕고 왔다. 저희가 그 신학교를 돕기 시작하면서 가졌던 비전이 있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도 오셔서 비전을 선포하셨고, 또 온 교회의 성도들이 이 웨스트 신학교를 바라볼 때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웨스트 신학교를 통하여서 이 영국과 전 유럽이 다시 한 번 재 복음화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 비전, 그 기도를 들었던 영국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지 아는가? 이 작은 신학교 하나, 영국에 있는 웨일즈조차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연약한 신학교를 가지고 영국을 넘어 유럽을 복음화 한다는 것은 참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신학교가 있는 그 지역은 그냥 작은 해안가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 안에 있는 작은 신학교 하나가 전체를 위해서 쓰임 받는다는 것은 상상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기에 그렇지만 인간의 비웃음은 하나님은 인간의 웃음을 진정한 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이셨다.
 
2016년에 갑자기 그 학교에 큰 비전을 가지고 있는 한 교수님이 합류하셨다. 아마도 저희 교회에서도 여러 번 뵙기 때문에 기억하실 것이다. 담임 목사님보다 더 큰, 190이 넘는 거구의 한 교수님이 그 신학교를 찾아오셨다. 마이클 리브스라는 분이시다. 그분은 어떤 비전을 가졌느냐면, 지금까지의 신학교 모습으로는 안 되고 신학교가 변해서 진정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습으로 바꾸어야 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느냐면, 신학교에 있는 좋은 과목을 다 영상으로 녹화를 하고 그래서 각 교회마다, 영국은 한국과는 좀 다른 제도이기 때문에 신학교를 가지 않고 교회에서 도제식으로 훈련을 시켜서 목사 안수를 줄 수 있는 제도가 아직도 있다. 아직도 교회에서 사람을 훈련을 시키고 있는데, 목사님들의 그 신학교육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히브리어, 헬라어, 교회의 어떤 긴 역사,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못한 체 목회에 필요한 몇몇 과목만으로 가르치고 목사로 세우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러한 현실을 보고서는 신학교를 좋은 과목들을 다 녹화해서 그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온라인 커뮤니티, 러닝커뮤니티를 그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학위를 하지 않는다면 이 과목들을 가지고 얼마든지 교회에 필요한 인재를 쓰는 그 이래 신학교의 모든 컨텐츠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온라인 커뮤니티, 러닝커뮤니티라고 불렀는데, 그와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영국교회와 유럽교회가 다가가기 시작했을 때, 유럽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 진짜 너무나도 비싼 신학교를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교회의 일꾼을 기를 수 있는 이런 귀한 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탄하기 시작했고, 영국 커뮤니티가 곳곳에 일어나기 시작했고, 또 영어가 익숙했던 지역들은 곳곳에 유럽 전역으로 그 상황들이 펼쳐진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그 신학교의 한 교수님이 그것을 고백하시는 것들을 제가 들었다.
 
처음에 사랑의 교회에서,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유럽전역을 돕겠다는 비전이 되었는데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비웃었다는 것이다. 신학교 하나도 살아남기 어려움에서 유럽 전역, 하나님께서 진짜 그 비전과 그 꿈대로 일하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생생히 고백하는 그 교수회의 현장 속에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율을 느꼈다.
 
사라가 처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비웃음의 웃음으로 반응했지만 그러나 진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셨을 때, 웃음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간구와 하나님의 백성의 간절한 꿈들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능력이시고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며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저는 경험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근에 선교 컴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작년부터 담임 목사님께서 올해 아주 중요한 키워드로 특새 20주년이란 것들에 대해서 강조하셨다. 올해 22년은 사랑의교회 첫 특새가 시작된 지 2003년 시작된 20년이 되는 때에 그것들을 잘 기념하는 그런 한 해로 준비하자고 2021년 마무리하시면서 2022년의 비전을 주셨고, 그러면서 올해 선교 컴퍼런스 가장 큰 문제로 2003년 첫 특새에 열매로서 키르키스탄에 학교를 짓기로 결정했는데 막상 저희 성도님들에게 그 비전과 그 진척상황을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해 말부터 뜻을 품고 2022년 올해 선교 컴퍼런스를 통하여서 키르키스탄, 사랑글로벌 아카데미를 통해서 다시 이 일들을 나누어야겠다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학교가 뭔가 좀 더 멋지게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했던 내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메타버스 시대에 우리가 먼저 그 시대를 압도하는 능력으로 4차 산업을 이끌 수 사랑의 교회가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
 
사실 그 기도를 하면서도 저는 기도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1차, 2차, 3차까지는 좀 감이 잡히는데, 4차 산업혁명시대는 어떻게 될 것이며, 그것에 걸 맞는 선교, 메타버스, 사실 머릿속에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체 그냥 그저 기도만 했다. 하나님은 놀라우시다. 이 키르키스탄을 글로벌 아카데미에서 돕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중앙아시아 선교를 적극적으로 돕던 한 권사님이 계셨다. 그 권사님이 아주 좋은 교육 기업에서 일하시면서 그 교육 기업이 이제는 메타버스 안에다 학원을 개설 했는데 이 학원의 좋은 컨텐츠가 키르키스탄과 중앙아시아의 선교 현장에 쓰이기로 먼저 제의를 하신 것이다. 아직까지 다 회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선교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걸리지만 이 컨텐츠를 가지고, 이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키르키스탄과 중앙아시아를 허락만 된다면 더 많은 나라를 더 섬기고 싶다고 계속 그 업체를 방문하면서 그 꿈들이 하나씩 하나씩 이제 실현되는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선교 컨퍼런스를 경험하시면 6월 4-5일 마당에 중앙아시아 선교에 대한 많은 것들이 전시될 텐데 그 중에 한 부분의 메타버스 체험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왜 저 기업이 교회에 와서 이것을 홍보하지?’ 라는 생각을 품지 말고 그 좋은 교육 컨텐츠가 선교 현장에 쓰이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했으면 좋겠다. 메타버스, 메타버스, 산업혁명을 우리가 외치면서 뜻도 모르고 저는 마음속에 비웃듯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진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면서 하나님은 그 꿈을 실현하고 계심을 경험하고 전율을 느끼고 있다. 이제 상상해 본다. 메타버스의 좋은 프로그램이 키르키스탄에 사랑글로벌 아카데미가 먼저 적용이 될 것이다.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감사하게 허락해 주셔서 컴퓨터도 업그레이드 하고 여러 가지 꾸밀 수 있게끔 준비가 되었다. 빠르면 9월부터 그 꿈을 향해서 키르키스탄에서 가장 최고의 영어교육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렇지만 전혀 돈을 들이지 않고 시작하게 된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역, 여러 지역에 선교사님들이 사역하는 곳곳마다 이제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참 4차 산업혁명의 초 현실, 메타버스의 위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희가 영어 학원 특히 다른 학습 공동체를 꾸미려면 참 많은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교지마다 참 고민이 사람들을 모으는 전략들이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대부분 사역하시는 곳은 마음 놓고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라, 무슬림이 많은 땅, 또 사회주의적인 그런 압박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사실 그런 곳에서 여러 아이들과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칠 수 있는 교육 컨텐츠들은 참으로 너무나도 필수적인 것인데, 그러나 또 학원을 운영한다는 것은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는 이끌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엄두를 많이 못 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타버스의 좋은 프로그램들이 선교지마다 접목이 되고 손쉽게 학생들을 모을 수 있게 되는 그런 일들이 현실화 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한다. 그것들을 경험했던 것이다.
 
여러분, 선교를 경험하면서 선교의 최전선에서 섬기면서 많은 어려움들과 고생하시는 선교사님의 소식도 듣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뛰어 넘는 모든 선교사님들이 그래도 그 현장을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바로 그것에서 모든 능력을 가지고 그 모든 불가능들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며 하나님 때문에 웃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믿는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바뀌게 된다.
 
*다니엘 11:32,
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시심을 알기에 하나님이 내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것임을 알기에 내가 무릎 꿇고 주 앞에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셔서 그 모든 불가능을 이기게 됨을 믿기 때문에,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몸소 알기 때문에 강하여 용맹을 떨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삶의 여러 가지 앞에 좌절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믿음이 모든 상황을 이기며 평강 가운데 기쁨 가운데 결국은 웃게 만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결론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웃게 하는 웃음을 우리도 체험할 수 있는가?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세 가지 그런 원리를 적용하고 이 말씀을 마칠 것이다.

웃게 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1.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라.

2.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라.

3.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라.

 
첫 번째는 웃게 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
▷1.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와 같이 이삭을 통하여서 웃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갈대아 우르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가나안 땅, 이제 하나님께서 그곳에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장 중요한 일을 펼쳐나갈 바로 그 현장 한 복판에 갔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통회하고 겸손한 자, 간절히 찾는 자에게 찾아오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다. 하나님을 내 편을 끌어들이는 것이 기도요,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아니다. 기독교는 뭔지 아는가? 내가 하나님편이 되고 하나님의 군사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현장에 나도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될 신앙의 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8:29,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이 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바로 그 역사의 현장, 하나님의 그 현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현장에 여러분의 마음을 두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복음이 증거되는 전도의 현장, 또 치열하게 진리와 비진리가 싸우고 있는 이 한국의 현실, 또 선교의 그 현장의 최전선에서 복음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그곳들, 바로 그곳을 향해서 우리가 마음이 갔을 때, 그리고 그 현장에 계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들여서 같이 주님 앞에 기도하고 주님 앞에 찬양하며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부르짖을 때, 우리가 그제서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안이와 편안한 삶에 뭔가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응답하시기 위해서 내 삶에 하나님을 끌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내가 가도록,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의 현장으로 내가 움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를 부르신다.
▷2.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라.
-우리는 귀를 기울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참 놀라운 영광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이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다. 뭔가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일손이 딸려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교를 생각하며 선교의 현장을 생각할 때, 착각에 빠지기 쉬운 일이 있다. 뭔가 하나님의 일손이 부족하시기에,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시기에, 내가 하나님을 도와드려야겠다는 큰 착각이다. 하나님은 홀로 말씀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원하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 땅,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다. 이것이 우리를 가장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우리를 최고의 문제로 대우하신다는 그런 최고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저는 믿는다.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 하나님 영광의 그 사업에 동참한 하나님의 친구, 바로 그와 같은 호칭을 우리 가운데 주시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이다.
 
*이사야 6:8,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지금도 이와 같이 이사야를 부르시고 파송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선교의 현장과 선교의 많은 일들, 전도의 일들, 이 땅 가운데 비진리가 진리를 자극하는 그 현장 가운데 우리가 주님 앞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 부르심의 음성을 또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가서 이 영역들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전사로서 자기 하나님 아는 백성은 강한 용맹을 떨친다고 하였는데 하나님 아는 자로서 그 땅을 변화시키고 그곳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용사로 세워지기를 원한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웃게 하시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바란다.
 
3.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또 하나님 앞에 또 헌신하기 위해서 걸림돌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 세계선교를 생각할 때 한 없이 부족하고, 영어도 못하고, 건강도 없고,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가 찾아낼 수 있다. 그렇지만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나의 순종이하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ability가 아니라, availability이다. 하나님께서 일손이 부족하셔서, 능력이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한 뜻으로 적은 능력, 적은 정성이지만 함께 일하는 순종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았던 한 장면이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를 보여주시며 “너의 자손이 저렇게 많아질 거야”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믿음의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좋은 것, 하나님께서 칭찬받을 점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로마서 4:20-22,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 아브라함의 다른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보시고 또 순종하여서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으로 가는 그 순종을 발걸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쓰셨던 것을 보게 된다. 능력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면 저부터 하나님께 쓰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시고, 친히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믿기에 그 적은 영역,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역을 위해서 최대한 주님 앞에 헌신으로 살아가는 그 순종을 드리기 위해 작은 순종을 드리는 바로 그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그 사람과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지 적용했으면 좋겠다. 비웃음, 쓴 웃음, 조롱 웃음으로 가득한 세상, 참 많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반응이라는 것은 조롱과 비탄에 섞인 웃음 밖에 살 수 없는 그런 세상이지만 그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웃음을 우리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 영원한 웃음의 이유가 되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가장 최전선에서 주를 위해 싸우다가 주 앞에 영광스럽게 서는 그 날을 위하여 살아가는 귀한 한 분의 성도로 살아갈 때, 우리 삶의 전체가 주님 앞에 드려지는 기쁨의 산 제물로 드려질 줄 확신한다.
 
♣요약
우리를 진정으로 웃고 하시는 일하심을 깨달아서 하나님을 우리가 신뢰하고 웃음이 되게 하셔서 이러한 웃음이 나에게도 되게 하시며, 그 웃음으로 그 모든 우울함과 괴로움과 내 모든 열등감과 내 모든 것을 떨쳐 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소망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한 용맹으로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아는 백성으로 강한 용맹을 떨치는 주의 사람으로 헌신하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며,. 하나님 부르심에 귀를 기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이 하늘의 손님들은 아브라함의 친절에 보답을 한다. 곧 그들은 아브라함의 영접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하늘로부터의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웃음과 사라의 웃음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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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5월 29일)
제목: "모세의 세 가지 훈련"
말씀: 사도행전 7:20-38
대표기도: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ㅡㅡ

*사도행전 7:20-38,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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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이 모든 성도들, 본당과 별관과 온라인으로 많은 분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 이 자체가 축복인줄 믿는다. 한 번 오랜만에 묻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오늘 이 온 세대 연합예배, 어떠한가? “좋습니다!” 감사한 일이고 제가 지금부터 모세에 대한 이야기를 할 텐데, 혹시 손녀와 손자들을 놓고 할아버지가 이야기 하듯이 이야기를 하겠다. 어릴 때, 저희 할아버지가 저를 무릎에 앉혀놓고 “현”이라고 부르시면서 “현이는 모세처럼 되어라”하셨다. 제가 잊지를 못한다. 그래서 이 귀한 연합예배 때에 부모님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한 가지를 드리려고 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인 복음 전하는 사명을 받아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계 선교를 하고 우리가 열심히 애써왔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다음세대, 자녀세대, 가정 선교가 잘 안 되는 많이 있다. 오늘 우리 부모님들은 반드시 사명을 가지고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지금 동족 선교에 실패하고, 다음 세대를 실패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선교를 실패한 것이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 그리고 소아시아 터키에 가면 일곱 교회, 그 훌륭한 교회들이 지금 다 없어져 버렸다. 동족선교, 가족선교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은 다음세대에 책임이 있다.

*로마서 3:2,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부모가 다음세대인 우리 어른 세대가 우리 이스라엘이, 말씀을 맡았던 것처럼, 우리는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줄로 믿는다. 말씀을 다음 세대에 우리가 전해 주어야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부모님들은 다음세대의 신명기 6:7절처럼 다음 세대에 세계 선교뿐만이 아니라 가정선교, 믿음의 계승이 될 수 있도록 은혜주시길 바란다.


신명기 6:6-7,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부모가 세계 선교뿐만이 아니라 가정선교에 성공할 수 있도록 사랑의 교회 온 연합예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모세가 받은 훈련(3M)
여러분, 모세를 잘 아실 것이다. 이 모세는 귀한 훈련을 받았다. 특별히 모세는 3M훈련을 받았다. 머리, 몸, 마음의 훈련이었다. 이 내용은 지나간 40여 년간 제자훈련을 해오면서 제 자신이 무슨 신학이 아니라, 사역과 삶의 모든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볼 때, 내가 조금 더 머리 훈련을 잘 받았더라면, 내가 그 때 조금 더 몸의 훈령을 자 받았더라면, 내가 그 때 좀 더 마음의 훈련을 잘 받았더라면, 그런 아쉬움과 함께, 그러나 주님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늘 이 3M, 이 세 가지 훈련이 담당되게 하여 주셔서 가정마다 세계 선교뿐만이 아니라 가정 선교를 통한 믿음의 계승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부모는 신앙이 좋은데 자식이 잘못된 그런 케이스, 예를 들어서 사무엘 같은 대단한 선지자도, 사무엘 8장 3절에 보면 나와 있다. 무슨 일인지 참 아픈 내용이 있다.
 
I. 머리 훈련=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법.

*사무엘상 8: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아니라 그 아버지의 아들이 잘못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 교회 중직 자들 모두가 다 정신 바짝 차리고 다음 세대에 믿음의 계승의 축복을 주시길 소망한다. 제가 요즘 기쁜 것은 화요일 순장 반에서 여자 순장반이 1500명 정도인데 남자 순장 반, 직장인 순장반 등이 있다. 거의 3000여명의 순장님들이 있다. 화요일 낮에 어머니와 딸이 순장 반에 같이 참여하고 있다. 60대 어머니와 30-40대 따님이 같이 나오는 것이다. 모녀간에 나오는데 내가 그걸 볼 때마다 너무 기쁘다. 또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 교통봉사부가 있는데, 정말 고생이 많다. 주차 사역과 너무 고생을 하고 있다. 교통봉사부에 부자간에 아버지와 아들이 봉사를 함께 한다. 이러한 것처럼 믿음의 계승을 하기 바란다. 믿음의 계승이 제대로 되려면 모세처럼 훈련을 받아야 되는데 모세는 본래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다. 아주 혈기가 강했고 그래서 사람도 때려죽이고 이런 사람이었다. 나중에 모세가 겸손하게 되어가지고 너무 온유해져가지고 하나님이 지상에서 모세처럼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오늘 본문에


*사도행전 7:38,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사도행전 7: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쓰시는 강력한 사람으로 그 혈기 맡은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어서 주님께서 평생을 복되게 하셨다. 먼저 모세는 40년 동안 머리훈련, 몸 훈련 마음을 훈련을 한 사람이다.


*사도행전 7:22,
22 모세가 모든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웠다. 그 당시 애굽 이집트 제국은 세계의 최고의 선진제국이었다. 어떤 학자들은 건축학, 기하학, 천문학, 수학 등, 그 피라미드는 기하학과 수학이 아니면 못하지 않지 않나? 그다음에 역사학, 논리학, 수사학, 그리고 얼마나 문학적으로 뛰어났는지 나중에 모세가 얼마나 훈련을 잘 받았는지 모세 오경을 기록했다. 물론 성령님의 감동을 받았지만 토라, 창,출,레,민,신을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머리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녀로 쓰실 때에 머리훈련을 먼저 하신 줄 믿어야 한다. 제가 이 세 가지 훈련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똑똑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냐? 골로새서 2:3절을 보면,


*골로새서 2:3,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예수님에게는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인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성경을 통한 성경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판별할 수 있는 렌지를 끼어라. 이 말이다. 그래셔 메이첸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미국 신학이 자유화가 되려고 하고 자유의 물결이 들어와 가지고 자유주의는 좋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좋지 않다. 이 하나님이 주시는 정통을 오랫동안 지켜야 할 진리를 파괴하는 것인데 그러면 안 되겠다 해자기고 그 당시에 웨스터 민스터 창립 그래이 메이첸이란 분이 이분의 정기를 보면 메이첸은 16세에 성경에 관한한 모든 것이 정리가 되어 있었다. 놀랍지 않은가? 성경에 관한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이런 것들을 다 알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메이첸의 어머니가 목사님의 딸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이렇게 잘 가르쳤다.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세계 선교뿐만 아니라, 가정 선교가 제대로 되게 하여 주셔서 우리 아이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암송하고 가르치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한 평생 동안 머리가 좀 계속 발전하려면, 두 가지를 잘 해야 한다. 하나는 수학을 잘 해야 한다. 이 말을 들으면 수포 자들은 괴롭겠지만 또 하나는 제 2국어를 잘해야 한다. 그래야 머리가 좋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제2국어를 할 처지가 아니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암송하고 연구하고 성경을 공부하면, 머리가 계속 계발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다음 세대들이 머리가 계발 되는 축복을 주시길 바란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적용하고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머리를 자꾸 계발시켜 주시길 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머리만 계발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II. 몸의 훈련(29절)=양치는 목자로서 목자의 심정을 배워야 한다.

*사도행전 7:29,
29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사도행전 7:23-24,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모세가 애굽에서 모든 학문에 통달해서 잘 나가는데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훈련을 시켰듯이, 요게벳이 모세를 키우는데, 모든 그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들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양 어머니 공주 하셉스트 공주를 통해서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키우게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아주 유일한 자로서 자기 아들에게 돈 받고 젖먹이는 케이스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특별하셔서 모세의 어머니가(공주) 그 당시 실권자였다. 그 모세의 양할아버지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는 아주 실권자였다. 그 실권자의 아들로서 자랐는데 모세도 실권이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면서 23절에 있는 내용을 보면,
 
*사도행전 7:23-24,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자기는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도행전 7:25,
25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를 통하여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중에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다툼이 일어나고 있는데 모세는 왜 그러냐고 하니까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 나를 죽이려느냐?”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말 때문에
 
*사도행전 7:29,
29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당시에 실권자 왕자 정도가 되면 사람하나 쳐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죽여도 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왜 모세가 두려워서 미디안으로 도망을 갔느냐면 권력투쟁의 관계였다. 그래서 어떤 잘못되면 신임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기에 모세가 그것 때문에 두려워서 광야로 도망을 간 것이다. 모세의 개인 입장에서는 애굽의 실권 왕자로서 머리 똑똑한 왕자로선 너무 슬픈 일이었고, 너무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40년 동안 광야에서 무지막지한 훈련을 하는데 묵사발 훈련을 한 것이다. 애굽와 왕자가 광야에서 그런 것이다. 광야는 온도 조절이 안 되는 곳이다. 나무와 물이 없다. 그러니까 일교차가 너무 심하다. 신 광야에서 자동차 본 네트에 계란을 던지면 그대로 후라이가 되는 것처럼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춥고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세를 쓰려고 할 때, 애굽에 왕자로서 호의호식과 애굽의 왕자로서 그런 것 갖고는 그의 왕자로서 기름기가 빠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가 힘든 것이다. 몸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얼마나 모세의 그 몸의 훈련을 다 상상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을 시키실 때는 반드시 몸의 훈련을 시키신다. 그냥 그대로 되는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쓰시고자 우리 몸을 훈련시키실 때 도망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사람은 머리의 훈련만 가지고 안 되고 사람은 몸의 훈련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 있다. 육체는 대우하면 대우할수록 더욱 버릇이 없어진다. 몸은 잘해주면 잘해 줄수록 더욱 버릇이 없다. 사람은 그냥 좀 뭐하면 앉고 싶고, 앉고 있으면 눕고 싶고, 이게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이 몸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면 사람은 다 망한다. 특히 젊을 때, 자녀들 명심을 해야 한다. 평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몸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하면 인생은 망한다. 하나님께서 몸의 훈련을 시킬 때,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사랑의 교회 모든 자녀들이 되길 바란다.
 
그런데 하나님이 몸의 훈련을 시킬 때, 그냥 몸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무슨 훈련이냐면 목자로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로서 양을 치는 훈련을 한다. 그 양치기 훈련을 통해서 모세에게 목자의 심정을 깨닫는 훈련을 시키신다. 우리가 그냥 보통 몸의 훈련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섬기고 앞으로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고 앞으로 장래를 위하여 내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훈련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저는 우리 온 교우들은 따라하라.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특별히 어른들, 먹으면 걸어야 한다. 반드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 부친은 지금도 저에게 전화를 하면 “오 목사, 요즘 성전 관리 잘하고 있나?”라고 말씀하신다. 몸 추 스리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훈련을 해서 .다윗이 베들레헴 근교 들판에서 양치기를 통해서 몸의 훈련을 한다. 사자의 발톱, 곰의 발톱과 싸우며 훈련을 했던 것처럼 우리가 성전관리를 잘 하여야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를 바란다. 마지막 훈련은 중요하다.

 
III. 마음 훈련(36)-묵사발 훈련 : 자아가 깨어지고 온유하게 해야 한다.

사도행전 7:36,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기사와 표적을 행했지만 사실은 40년간 모세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마음의 훈련을 받았다. 얼마나 훈련을 받았느나면, 소위 자아가 깨어지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인생은 누구나 예외가 없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정말 마음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불러가지“고 너 광야길 인도하여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모세는 인간적으로 나름 자기 나름대로 꿍꿍이가 하나 있었다. 어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지난 40년간 양을 치면서 미디안 광야를 양을 치면서 돌아다녔기 때문에 그 미디안 광야 길 아는 데는 도사였다. 그러니까 광야 길의 투어 가이드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모세의 그 광야 길의 익숙함과 지식을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네가 가지고 있는 광야 길의 실력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인도한다.” 그러면서 아침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 구름 기둥 나오면 앞으로 간다. 불기둥이 나오면 멈춘다. 어떨 때는 너무 힘이 넘쳐가지고 너무 가고 싶지만 하나님은 불기둥에 그만, 하신다. 어떤 때는 너무 피곤해서 오늘은 안 가고 싶어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훈련시키셨다.
 
*민수기 11:12a,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모세는 이 훈련을 받아가지고 자아가 깨어지고 심지어 얼마나 모세를 백성들이 처음에는 추켜올리다가 나중에는 원망과 불평과 돌멩이를 던지고 괴롭혀서 모세가 내가 그들을 잉태했냐고 하면서 내가 그들을 낳았느냐고 항의한다. 고통스러운 모세의 마음의 훈련이었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힘들게 했다. 백성들이 그랬던 것이다. 자, 이런 고난 가운데서 40년 동안 마음의 훈련을 한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자아가 깨어지게 한 것이다. 혈기자인 모세가 온유함으로 되어서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머리와 몸과 마음의 훈련을 통하여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온유함이란 특징은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질 수 있는 능력, 오늘 우리도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와 사명과 비전을 끝까지 짊어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모세의 양치기 지팡이가 양치기 지팡이로 끝나지 아니하고 이 지팡이가 홍해를 가르는 지팡이가 된 것이다. 모세가 대강 그냥 그 지팡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석에 샘물을 터트리게 하는 지팡이가 된 것이다. 마음속에 이런 간절함을 가지고 모세의 전반기 40년은 어떻게 되었는가? 온유 => 십자가를 끝까지 잘 감당하는 것
 

※ 모세의 120년.
⓵자신이 중요하다는 40년,
⓶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40년,
⓷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깨닫는 40년이었다.
-자기가 썸바디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I have no nothing.~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코로나로 고생이 많았다. 2년 3개월간 우리 이 자리가 한국교회 부흥과 회복의 터닝 포인트가 될 줄 믿는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재 헌신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실 줄 확신한다. 머리도 주님으로 계발되게 하시고, 우리의 몸, 지금 건강한 분들은 잘 지키고, 아픈 분들은 내 몸을 회복시켜 주시길 확신한다. 그 순간 그리스도의 불이 임하게 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해 주시길 원한다. 지금도 마음의 훈련을 받고 있다. 지금도 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어떤 독특한 취미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깨뜨려져야 하나님이 마음껏 쓰실 수 있는 그래서 우리의 손에 잡혀 있는 이 양치기 지팡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홍해를 건너고 반석을 터트리는 지팡이가 될 줄로 믿는다. 오늘 이런 마음으로 이렇게 살면 우리가 헛발질 시간도 없고 우리 인생을 낭비할 시간도 없고 기쁘고 감사한 일로 전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할까를 생각했다. 그래서 이 노래로 한다.
 



♬내 하나님은 크고 힘 있고 능 있어 못할 일 전혀 없네! ~ 저 산들도 주의 것, 골짝도 주의 것, 별들도 주의 솜씨~♪
 
♧요약
우리가 모든 세대가 지식을 성경적 관점으로 조명하는 세대로 자라야 한다. 젊은이들이 광야학교에서 머리 훈련, 몸의 훈련, 마음의 훈련으로 무장되어서 십자가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온유의 지팡이로 쓰임받아야 한다. 부모가 묵사발 훈련을 통과하는 가정 선교사로서 말씀의 수선대후를 위해 헌신할 때, 21세기 모세를 키우는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기를 소망한다. 

-모세의 생애를 통한 스데반의 강조점.
여기서 스데반이 강조하려는 바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모세를 통해 구원하셨음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언제나 지켜 보시며 인도하여 주심을 알 수 있다. 또한 모세는 나이 40이 되었을 때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동족을 돌보았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희생하며 이웃을 돕고 있는지, 여전히 도움과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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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5월 28일)

제목: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말씀: 마가복음 4:35~41
찬양인도 : 여직장 순장반
말씀읽기: 성기석 형제(청년 3국), 나고은 자매(대학7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예배 마무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
 
설교자: 고현종 목사님(미국 디사이플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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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
 
▶다시 뵙게 되어 반갑다. 정말 기쁜가? 코로나를 잘 견디셨다. 오늘 본문은 ‘그날 저물 때’로 시작한다. 그날이 어떤 날인가? 마가복음 4장 1절을 보면 된다.
 
*마가복음 4:1,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그날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해변 가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날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동안 해가 저물었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쉬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날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신다. 저편이 있으면 이편이 있다. 이편은 아마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가버나움 지역이었을 것이다. 저편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인 거라사인의 땅이었다. 거라사인의 땅은 유대인의 땅이 아니고 이방인의 땅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사역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그날 밤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거라사인의 땅으로 가려고 하신 것은 무엇인가 급한 일이 있을 것 같다. 제자들도 피곤했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날 밤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바람과 파도가 얼마나 강한지 배가 흔들리고 물이 배위에 가득 찼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아시다시피 갈릴리 호수 어부출신들이 최소한 네 명이나 있었다. 저 정도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고무래에서 베개를 베고 곤히 주무실 수 있으셨을까?
제자들이 이 위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예수님께서 보시려고 주무시는 척을 하신 것인가? 한 쪽 눈은 감고 한쪽 눈은 뜨고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걸으셨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셔서 주무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배가 흔들리고 물이 들어오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주무셨던 것은 피곤하실 뿐 아니라, 평안하셨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예수님께서 타신 배를 침몰(沈沒)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평안하셨지만 제자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즉지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졌다. 강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라고 책망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가? 이제는 강풍으로 인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두려워 떨었다. 이것이 본문에 스토리이다. 아주 짧은 에피소드이지만 정말 많은 영적 교훈들이 담겨져 있다. 여기서 두 가지만 나누겠다.
 
첫 번째는 –순종의 길에서도 풍랑을 만나게 된다.
-순종의 길에서도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건너 거라사인 땅에 가자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원했던 것이 아니다. 아마 제자들 중에서는 ‘이렇게 피곤한데 집에가 가서 쉬지 굳이 그것도 거라사인의 땅에 가야하나?’ 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의 명령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제자는 없었다. 다 순종했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순종의 길이었다. 그럼 이제 평탄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길에서 제자들은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순종의 길은 평탄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그렇지만 않는다. 여러분도 다 경험을 했을 것이다. 순종의 길에도 풍랑이 있다. 고난을 만나게 된다.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목회자로 주님이 부르셔서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 그 순종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저희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다. 저는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반겨주는 자가 없었고 다 욕을 했다. 왜 그 길을 가냐고 비판했다. 이민가정으로 브라질에서 자랐다. 이민 가정이 대부분 그렇듯이 현지 언어가 안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서 장사를 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아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 졸업식 일주일 앞두고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부모님께 통보를 하고 상의 드린 것이 아니고, 통보를 했다. 그게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이 섰기 때문에 그것도 브라질이 아니라, 미국으로 갔다. 신학교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저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어떤 확신이냐면,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했다. 내가 부모님을 돌봐야 하지만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돌봐주실 것을 확고한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부담 없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일 년 정도 지났을 때에 저의 어머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57세의 이른 나이셨다. 그렇게 12년 동안 병상에 누워계셨다고 돌아가셨다. 그 시간은 저와 저희 어머님은 물론 가족에게 너무나도 힘든 기간이었고, 정말 인생의 큰 풍랑이었다. 순종의 길을 가면 평탄했을 것 같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외에도 목회자의 길을 가는 동안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을 많이 만났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거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의 내용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이 타신 배를 뒤집어엎으려는 이 광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그냥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기면 되는 것인가? 갈릴리 호수에는 평상시에는 고요하고 잔잔한데, 이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헬몬 산에서 차가운 바람이 내려오고 따뜻한 호수의 바람이 차가운 바람과 만나면 큰 광풍을 일으킨다. 이런 설명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만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광풍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물의 창조자가 되시고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타신 배를 뒤집어엎으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가시려고 하는 길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사역하셔서 피곤하셔서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데 예수님이 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광풍이, 그리고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매우 어색한 표현이 있다. 예수님께서 광풍을 어떻게 잠잠케 하셨는지를 주목해 보셔야 한다.
 
마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고요 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예수께서 잠에서 일어나시매, 바람과 바다가 잠잠케 되더라. 이것이 자연스럽다. 또는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더라,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마치 어떤 인격체에게도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은가? 여러분 이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비슷한 상황이 성경에 또 나온다. 언제이냐면,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시던 후에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를 하셨고 제자들은 먼저 보내셨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가운데서와 똑 같은 시츄에이션이다. 큰 광풍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밤새도록 노를 젓고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 큰 광풍을 이길 수가 없었다. 큰 위험 가운데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다. 어떻게? 물위로 걸어가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만약 주님이시거든 나로 물위로 걷게 하소서” 엄청난 요구를 한다. 베드로가 물에 뛰어든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다. 그런데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 빠진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산을 잡으시고 건지신다. 그리고 배로 돌아오신다. 그러자. 마태복음 14:32절에 보자.
 
*마태복음 14:32,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그런데 이게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똑 같은 상황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셨는데 바다에게는 이르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자 바다가 잠잠해 진 것이다. 이것이 정상이다. 제가 지금 마이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마이크가 소리가 안 나온다고 해서 마이크를 꾸짖지 않는다. “마이크야, 정신 차려라.” 하지 않는다. 마이크 소리 잘 나오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마이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크를 조절하는 음향 간사님께 이야기 하는 것이다. 왜? 마이크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 바람도 파도도 인격체가 아니다.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이르셨던 것이다. 여러분 이 큰 광풍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힌트를 이어지는 마가복음 5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 우여곡절 끝에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을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발을 내 딛는 순간, 아주 신가한 일이 일어난다.
 
*마가복음 5:2,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곧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Immediately(즉시),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고 거라사인의 땅에 발을 내 딛는 순간, 곧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온 것이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가?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귀신이 예수님을 기다린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기 전에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에게 “내가 곧 있으면 너에게로 찾아가 너를 자유케 해 줄테니 나를 기다리라”. 라고 카톡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나 그 누구에게도 예수님의 계획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갈릴리 바다를 그 밤에 건너야 하는지를,,,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존재가 있었다. 누구인가? 귀신들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들이 귀신같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을 멸하려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가셔서 하신 일을 단 하나 뿐이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이 귀신 들린 사람을 자유케 해주시는 것뿐이었다. 이 사람은 참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귀신이 아니라 귀신들,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해하고 무덤 사이에 살던 사람들이다. 가족은 이미 그를 버렸을 것이고, 마을의 골칫덩어리였다. 이 이름 모를 한 이방인, 귀신들린 이 한사람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늘 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날 밤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신 것이다. 한 영혼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열심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타신 배를 침몰시키려는 이 큰 광풍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인가? 이것은 어둠의 세력이다. 마귀(魔鬼)가 귀신들을 결박(結縛)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여러분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또는 고난, 어려움이 마귀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시험을 허락할 때가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妨害)하고 공격(攻擊)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순종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낙심케 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를 무섭게 하고, 좌절(挫折)과 절망(絶望)에 빠지게 하는 어둠의 세력의 공격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영적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대상이 아니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어둠의 영과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全身)갑주(甲冑)를 입으라고 하신다.
 
여러분, 순종의 길에서 우리가 만나는 풍랑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 영적 통찰력이 필요한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靈的) 갑주(甲冑)를 입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것은
 
두 번째는 인생의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한다.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두려워 떨었던 것은 분명하다. 저들은 저들과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자, 저들의 반응은 무엇이냐면, 41절에 무어라고 하는가?
 
*마가복음 4:41,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Who is this?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다. 그리고 믿지 못했다. 믿음의 문제였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하셨다. 이 말은 “어떻게 아직까지 나를 믿지 못하느냐?”라는 뜻이다. Do you still have no faith?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보는 곳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들을 쫓아 주셨고, 또 권위 있는 말씀들을 저들에게 전해주셨다. 저들이 예수를 믿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수많은 역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만약 저들이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믿었다면 그 풍랑가운데서도 그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예수님 같이 평안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은 같은 우리와 같은 배에 있다. 우리가 한 배에 탄 사람들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공동 운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같은 배에 계신다는 것은 나와 예수님은 공동운명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하는 약속인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이사야 43: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물 가운데로 지나고 불 가운데로 지나는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시편 23:4,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물 가운데 지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불 가운데 지나도 함께 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가운데 지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코로나 기간 가운데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멘!!~~ 그런데 왜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가? 왜 걱정과 근심과 늪에 빠져서 죽겠다고 하는가? 그리고 두려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성부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영광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존하신다. 그 만물 안에는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은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비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공급자가 되신다. 우리가 지칠 때,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쳐주시고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만져주신다.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님이 우리와 같은 배를 타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그 말씀에는 내가 너와 함께 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내가 너와 같은 배를 타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란다. 똑 같은 풍랑을 만나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누구는 제자들처럼 두려워 떨 수 있고, 누구는 예수님처럼 평안할 수 있다. 믿음의 문제이다. 똑 같은 풍랑을 만나도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믿음이 다른 것이다.
 
제가 섬기는 디사이플 교회에 다음으로 사랑으로 섬기는 사역이 있다. 브라질 아마존 인디오 사역이다. 제가 2001년부터 그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21년째이다. 제가 브라질에서 그 이민자로 살았지만 아마존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여러분 브라질에 산다고 해서 옆집 이웃이 인디오이고 막 바나나가 떨어져 있고,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제가 사는 곳은 대도시이다. 아마존에 가려면 비행기를 서너 시간 타야 한다. 그런데 2001년도에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대학부 사역을 했을 때에 아마존에서 사역하신 박선교사님을 남가주 사랑의 교회 목도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제가 선교사님 만나자 마자 생각이나 약속도 없이 이번 여름에 대학생들을 데리고 아마존에 가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그리고 난 다음에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아마존이 너무 무서웠다. 아마존의 눈물이다. 정말 약속은 해 놓았기에 취소할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 대학부에서도 나이 많은 시니어들, 죽어도 별로 찾는 사람이 없는 그런 아이들, 간사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위험하다고, 그리고 생전 처음 생명보험을 들어보았다. 아마존에 가면서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 그런데 사역하신 선교사님은 4-5년이 되셨고 선교사님을 처음으로 우리를 맞으시는 것이며 별로 경험이 없었다. 선교사님께서 개척하신 몇 교회를 돌아가면서 제가 사역을 했다. 아마존 인디오들은 지금 21년이 지났는데 그때 모습과 지금 모습과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때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냥 예배를 드리면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아이들이 우리들을 보면 하나 같이 다 울었다. 외부인들 거부감이 있었다. 주일이 바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사역들이 있었는데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을 옮기는데 보통 두 세 시간을 배를 타고 가야 한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새벽 6시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그 교회들을 돌면서 마지막 저녁 될 때까지 사역을 했다. 그래서 우루뚜발이나는 마을에서 마지막 사역을 하고 이제 선교관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한 신간 반 정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길인데, 작은 배다. 큰 배를 상상하면 안 된다. 선교사님이 가지고 다니는 작은 배이다. 한 배는 자매 여학생들이 타고 한 배는 저희가 인디오 배를 빌려서 여섯 명 정도 타는 아주 낮은 배이다. 엔진이 있다. 그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데 배를 타고 가던 중 한 십분 정도 지났을 때에 비바람이 쳤다. 이 비바람과 강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강이지만 상당히 크다. 한강과 비교가 안 된다. 열 배정도 넓은 강인데 이 비바람이 부니까 파도가 바다처럼 쳤다. 그리고 불도 없다. 제가 그 가지고 간 후레쉬 라이터를 비치는 것이다. 그 배가 올라가는데 후레쉬로 보니까 파도가 덮치는 것이 보인다. 파도가 위로 올라오고 강가에 후레쉬를 비치면 시뻘건 눈들이 보인다. 그것이 악어들이다. 아마존은 두 계절 밖에 없다. 건기와 우기가 있는데 저희가 갔을 때, 건기가 시작할 때였다. 물이 빠지는 때였다. 우기 때 있었던 악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강가로 드러난다. 후레쉬로 비치면 빨간 눈들이 보인다. 얼마나 두렵던지, 후레쉬를 붙잡고 비치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선교사님께서 배를 타기 전에 이야기 해주셨던 이야기들이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 강 이름이 히오마데이루인데 우드, 나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강이 나무 강인 이유는 레인풀이어서 비가 많이 오면 나무들이 쓰러져서 나무들이 떠다녀서 배가 나무에 부딪히면 그냥 나무가 뒤집혀서 죽기 때문에 일 년에 몇 백 명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지금도 그렇지만 구명조끼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없는 것이 아니다. 선교사님 배에 있었다. 선교사님께 제가 물으니 미국 개념에서는 구명조끼를 입어야 되지 않냐고 하니 선교사님께서 구명조끼를 입는 것보다 안 입는 게 낫다는 것이다. 왜냐면 아마존 강에 빠지면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물 위에 떠 있으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그 풍랑 가운데 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죽음을 경험했다. 이러다가 죽는 거구나, 이러다가 죽으면 집에 있는 세 아이와 아내가 생각났다. 생명보험을 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으면 어쩌나 하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고, 그러면서 마음속에 원망이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선교사님께서 험한 길을 인도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그런 일은 없었다. 정말 위험했다. 그러면서 각오를 했다. 다시는 아마존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절대로 오지 않는다고 떨면서 히오마데이루를 거슬러 올라갔다. 정말 은혜가 하나도 안 되었다.‘이러다 죽은 거구나!’ 하면서 풍랑가운데 두려워 떨었다 도착을 하고 나서 선교사님께서 다를 은혜들을 나누어보라고 말씀했다. 정말 은혜가 안 되었다. 선교사님과 이제는 여기서 인연은 끝이야, 라고 정말 그랬다. 제가 짧게 한 마디 했다. 선교사님, 제가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했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하니 선교사님 사모님이 가만히 웃으시면서 “전도사님, 우리는 이 길을 매주 다닙니다. 소원이 뭔지 아세요? 목사님 손 붙잡고 아마존 강에 폭 빠져 주님 만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아이들 앞에서, 큰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았다. 저는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사모님은 평안하셨다. 그날 밤이 저의 라이프체인지가 되었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21년째, 매년 7월이면 아마존에 가 있다.
 
여러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풍랑 속에서 제자들처럼 두려워 떨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평안할 수 있어야 하는데 똑 같은 풍랑을 만나도, 결코 믿음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는 지난 2년 이상 이 코로나 풍랑을 겪고 있다. 아직도 진행 중이다. 모두가 다 똑 같이 반응하는가? 아니다. 믿음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내가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자야, 어찌하여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꾸짖고 책망하는 음성이 아니다.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다.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와 함께 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이 생애 풍랑은 이미 지나갔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데 왜 또 무서워하느냐? 왜 아직도 너는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 “나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옵소서. 주여, 내가 믿기를 원 하나이다.” 세상의 어떠한 풍랑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내게 주옵소서. 우리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반드시 행해주실 것이다.
 
요약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다. 책망을 하시는 것도 아니다.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이다. 같은 배에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신 것을 잘 깨달아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겸손히 마음의 무릎을 꿇고 주님께 내가 믿음이 연약함을 도우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의 믿음이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아뢰어야 하며, 진정으로 믿기를 간구해야 한다. 수없이 흔들리는 믿음을 주님이 붙잡아 주시고 세상의 어떠한 풍랑 속에서도 굳건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인생 항로에는 잦은 풍랑이 있는데 그러한 풍랑 중에는 주님이 즉시 구원치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풍랑에도 주님은 성도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풍랑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풍랑이 닥치자 크게 두려워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 인생은 세상의 풍파만 보면 겁먹고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임마누엘 신앙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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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5월 25일)
제목: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말씀: 창세기 50:15-21
찬양인도: 이 다니엘 부목사님, 쉐키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임상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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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50:15-21,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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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은혜를 사모하며 치유와 응답을 체험하는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온 우리 모든 영 가족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오늘 이 기도회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 놀라운 신비(神祕)한 능력을 경험하길 소원한다.

 
‘버려짐’이라는 상처는 인간의 영혼을 황폐(荒廢)하게 만든다고 한다. 버려짐을 경험한 사람은 그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또 누군가에 버려짐을 당할까봐 그의 삶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정지 상태에 들어간다고 한다.
 
어느 마을에 작을 실수를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그 실수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비난이라는 것이, 또 소문이라는 것이, 계속적으로 부풀지지 않는가? 그러다보니 이 소년에 대한 소문이 너무 나쁘게 퍼지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이 소년을 찾아온다. 그리고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소년을 하루하루가 너무 힘겨웠다. 사람들이 자기를 비난하는 것들도 힘겨운데 돌을 맞고 돌을 피하기도 하고 매일 매일이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의 실수를 용서해 주겠지. 그리고 나의 실수를 만회할 날이 반드시 오겠지’ 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넘기며 살고 있었다. 그렇게 고달픈 시간을 보내는 그 어느 날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신뢰하던 선생님이 그 소년 앞을 지나가는 것이다. 소년은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다른 사람들은 나를 다 비난하고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질지라도 저 선생님만큼은 나를 품어줄 거야., 저 선생님만큼은 나를 반드시 용서해줄 거야.’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선생님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갑자기 이 소년을 보더니 주위의 시선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꺾은 다음 그 소년에게 집어던졌다. 그 장미꽃이 정확하게 그 소년의 가슴 밭 한 가운데 팍, 부딪혔다. 그동안 참고 견뎌왔던 이 소년이 그 장미꽃 한 송이에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돌이 힘이 센가? 장미꽃이 힘이 센가? 돌이 힘이 세다. 그런데, 그 소년은 장미꽃에 쓰러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돌보다 더 강력한 자기를 믿고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자기가 버려짐을 당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 가운데 믿고 사랑했던 그 누군가로부터 버려짐을 당해본 슬픔이 있는가? 아마도 우리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대상은 가족일 것이다. 그 가족이 상처를 주면 우리는 너무 괴로울 것이다. 가장 사랑했던 남편이 나를 외면한다.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던 아내가 나를 자꾸만 무시한다. 가장 믿고 사랑하는 엄마아빠가 나에게 실망감을 주고 나를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쳐다보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속에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 관계가 하나씩 하나씩 깨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사랑했던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그냥 버림의 정도가 아니라, 아주 처절하게 버림을 당했던 그 한 사람, 바로 요셉이 있다. 요셉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무너지고 쓰러졌다.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아, 이제 끝이다. 이제 끝났다.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다.’ 라고 말해야 되는데, 성경은 요셉을 가리켜, 요셉이 그 어디에도 복수의 길, 보복의 길, 그리고 자기 인생의 포기하는 길을 가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도대체 요셉의 삶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나님은 이 요셉의 삶의 어떻게 역사하신 것인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요셉을 붙드시고 요셉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주목하면서 특별히 우리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창세기 50:15,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창세기 50장은 야곱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야곱이 드디어 죽는다. 인간의 죽음은 신비이고, 인간은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깊이 되돌아보게 된다. 야곱은 이 죽음의 앞에서 요셉은 정말 깊은 경외감과 아버지를 진실로 공경하는 그 마음을 담고 슬픔 가운데 처한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고이 모신다. 정성을 다해서 40일 동안 향을 처리한다. 향 처리 이후에 30일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애곡(哀哭)하며 정중히 장례를 치른다. 모든 애굽 사람들이 요셉과 더불어 이 야곱의 장례를 함께 슬퍼한다. 그리고 아버지 유언(遺言)대로 야곱은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 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 죽음이 그들에게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셉의 형제들은 야곱의 죽음이 자신들의 마음을 옥죄어 오는 두려움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형제들이 모여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살아계셨으니까, 요셉이 우리를 보복하지 않고 우리를 살려둔 거야, 이제 야곱이 죽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하지, 반드시 우리를 보복할 거야.” 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왜 그들은 그토록 두려움에 직면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버려짐을 당했다. 요셉은 야곱에게 특별한 아들이었다. 요셉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이었고 노년에 낳은 아들이었다. 그 요셉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하다. 가끔 이렇게 교회를 지나가다가 보면 손자를 데리고 가시는 권사님과 장로님들이 보인다. 그런데 하나같이 얼굴에 미소가 절로 스며들어있다. 야곱에게 요셉은 그러한 존재였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채색 옷을 입었다라고 기록한다. 채색 옷을 입었던 요셉,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이 요셉을 바라보는 형들은 마음이 불편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다.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이 표현이 너무 좋지 않는가? 우리가 불편한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굳어진다. 말이 헛 나온다. 형들에게 요셉은 그러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요셉이 나이가 적지 않았다. 열일곱 살, 웬만큼 아는 나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꾼다. 그 꿈은 바로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꿈을 형들에게 말을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침묵은 자유이다. 말하지 말아야 하겠죠?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가서 말한다. “형, 내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형들이 나에게 다 절을 했어” 형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또 꿈을 꾼다. 그 꿈은 더 나아가 아버지 어머니까지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이었다. 형들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요셉을 향하여 이런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저 요셉,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한다.
 
*창세기 37:20,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요셉이 가까이 오자 형들은 요셉을 잡아 구덩이 속에 집어던진다. 구덩이 속에 들어간 요셉이 소리를 친다. “형, 형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형 저를 꺼내주세요!” 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형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도리어 형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 요셉을 죽여버리자. 저 요셉을 없애버리자.”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만약 사랑하는 가족 누군가가 여러분을 구렁텅이에 빠뜨려 놓고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고 하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찢겨지겠는가? 요셉은 그 소리를 다 들으면서 애타게 형들을 찾으면서 부르짖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요셉을 형들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은 20에 팔아버린다. 요셉의 채색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 옷을 찢을 때, 형들은 분노와 분개를 했던 것이다. 마치 찢겨진 옷처럼 요셉은 온몸에 갈기갈기 상처를 입고 광야의 길을 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형들에게 버려진 것만으로도 당한 것만으로도 힘들고 어렵지 않겠는가?
 
그런데 요셉은 애굽으로 와서 한 장군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간다. 명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이제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오직 하나, 그는 종이었다. 요셉은 하지만 거기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 모습을 눈여겨본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는다. 가정 총무로 맡기고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맡긴다. 무엇인가 풀리는 것 같다. 이제는 좀 회복의 길이 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예고 없이 또 하나의 문제가 찾아온다. 바로 보디발의 아내였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 아줌마가 요셉을 향하여 말한다. “요셉, 요셉”, 무슨 말인가? 자기와 동침(同寢)하자는 것이다. 요셉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 거부한다. 거절하고 거부한 일이 잘 한일인가? 잘못한 일인가? 잘한 일이다. 옳은 일이었다. 그런데 요셉은 주인에게 도리어 버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는 감옥으로 향하게 된다. 형들에게 버려지고 당한 일만해도 힘들고 어려운데, 요셉은 주인에게까지 자기에게 신뢰를 주고 사랑을 주었던 주인에게까지 버려짐을 당한다.
 
이제 장면이 옮겨진다. 요셉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監獄)에 갇혀있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요셉은 거기서도 열심히 일한다. 불굴의 청년 같다. 최선을 다해 맡겨진 일들을 소화해 낸다. 이번에는 간수장(看守長)이 요셉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다. ‘아, 마지막 기회이다. 정말 마지막 기회이다’라고 하는 찰나(刹那)에 왕의 최측근이었던 술 팥은 관원장과 똥 맡은 관원장이 꿈을 꾼다.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데 요셉만이 그 꿈을 해석한다. 그리고 그 꿈을 해석하는 대로 술 맡은 술 맡은 관원장이 왕에게 다시 복직한다. 그런데 참 가슴 아프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 라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줄기의 빛, 그 희망의 빛마저도 사라졌다. 요셉은 진실했다. 정직하고 순결했다. 그런데 안 되는 인생이다. 뭘 해도 안 되는 인생, 그것이 요셉의 인생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안 되는 요셉을 향하여, 우리가 생각하기에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한 성경을 기록해 두었다. 우리가 39장 2절을 살펴보다.
 
*창세기 39:2,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요셉이 어떤 상황인가? 애굽의 노예(奴隸)로 팔려온 상황이다. 요셉이 버려진 상황이다. 형들에게 버려짐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노예로 끌려온 상황(狀況)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고 말한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완전한 버림을 받은 것 아닌가? 하나님마저 요셉을 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라고 말한다. 답답해 죽겠다. 그런데 39:21절에 다시 한 번 이런 말씀이 반복된다.
 
*창세기 39:21,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다시 한 번 말한다. 보디발의 아내 유혹을 거부해서 감옥에 갇힌 이 요셉을 향하여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 라고 말씀한다. 회복된 상황이 아니다. 승진한 것도 아니다. 요셉이 여전히 감옥에 죄수(罪囚)가 된 상황이다.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함께하시고, 함께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쎄드의 은혜가 요셉 가운데 비추어질 뿐만 아니라, 요셉 가운데 더욱 더 큰 은혜가운데 베풀어 주고 계신다. 분명히 상처받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요셉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요셉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성경이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았는가? 가족들 다 있는데 나 혼자 외톨이 같다. 내가 열심히 섬기고 살아왔는데 마치 내가 버려진 것 같다. 버티고 버텼는데 내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 앞으로 나온다. 교회로 발걸음이 향한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깜깜한 예배당에 홀로 앉아서 기도도 안 나오고 답답한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있는데 어느 순간에 우리를 만지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요셉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호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가 머리로만 알았던 하나님, 야곱의 품 안에서 품었던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그 생생한 살아 역사하시는 그 실체를 버려지고 또 버려지는 그 처참(悽慘)한 현장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요셉은 처절한 침묵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다. 절망스런 상황이었지만 그 상황 가운데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내가 노예이지만 내가 죄수이지만 내가 지금 하나님의 손아래 놓여 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창세기 49장 9절에 보면,
*창세기 49;9,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게 말한다. “우리 주인인 보디발이 아무것도 나에게 금하지 않았고, 금한 것은 딱 하나, 바로 당신이다.” 라고 이야기 하며 “당신은 그의 아내이고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겠는가?” 라며 요셉이 마지막으로 하는 고백이 바로 진짜 마음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보디발에게 죄를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보디발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보디발 위에 계신 하나님, 그분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요셉은 그 유혹을 전전했던 것이다. 요셉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의 손아래 있는가?’ 가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이제 삶의 모든 주권과, 삶의 모든 해석을 하나님께 위탁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당한 고통, 고난, 버려짐, 이것을 나의 관점으로 해석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기 시작한다. 창세기 45장 5-8절을 살펴보면,
 
*창세기 45:5-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이 드디어 형들을 만난다. 형들은 요셉을 보고 두려워한다. 두려워하는 형들을 보고 무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애굽으로 보낸 분이 형들이 아니에요. 애굽으로 보낸 분은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요셉을 먼저 보내신 이유는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지위, 자신의 위치, 그것을 누가 주신 것이라고 말하는가?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형들의 시기(猜忌), 욕망(慾望)으로 빛나는 것 같이 보였던 인생이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救援)계획(計劃)을 요셉이 발견한 것이다. 더 이상 삶의 어려움과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살지 않는다. 현실을 견뎌냈다. 현실을 결국 이겨낸 것이다. 무엇으로? 구원의 관점으로, 생명의 틀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인생의 주어가 하나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자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요셉은 상처를 받았다.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그 상처와 아픔에 임한 더 큰 하나님을 은혜를 경험했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요셉을 어루만져 주셨다. 요셉은 고요한 중에, 침묵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 하나님의 손아래에서 요셉은 점점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기 시작한다. 요셉은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심정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애끓는 목자의 심정이 무엇인지 성숙한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 창세기 17장에 보면, 형들이 요셉에게 나와서 이렇게 말한다. “야곱이 이렇게 말했다고 말한다. ”요셉, 형들이 참 못났다. 형들이 정말 미안하다“ 고 말하면 되는데, 형들이 자신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자신들이 행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도 뉘우치지 못한다. 죽은 야곱의 유언을 끌고 와서 거짓말을 한다. 요셉도 형들이 하는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정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아버지는 생전에 무슨 말 하셨는지를 안다. 이 말을 요셉은 듣고 운다. 뉘우침도 회개도 없이 두려움에 허우적거리는 형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다. 가슴이 저며 온다. ‘나는 이미 형들을 용서했는데, 형들을 사랑하는데, 그 용서를 믿지 못하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형들을 바라보며 요셉은 억장이 무너진다. 형들은 요셉을 알지 못했다. 요셉이 하나님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요셉이 하나님의 손아래 어떻게 빚어져 갔는지를 도무지 알지를 못한다. 요셉은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요셉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봤으면 형들이 요셉이 진짜 아프구나! 요셉이 우리 때문에 아팠구나!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요셉이 보복과 원한의 눈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창세기 50:19,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두려움에 떠는 형들을 오히려 위로한다. 요셉은 삶을 통해 배운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은 나를 버리고 세상은 나를 지켜주지 못할지라도 심지어 가족들마저도 시기와 질투로 죽음에 던져지게 했을지라도, 하나님만을 나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나를 버리지 않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던 것이다. 그 앎의 고백이 그 믿음의 고백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요셉은 바보가 아니다. 형들이 행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 형들이 한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상처가 가슴에 흉터로 남아있다. 그런데 요셉은 그것을 더 이상 꺼내지 않는다. 상처와 아픔을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상처를 자기의 자신을 해하는 악으로도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를 철저하게 지킨다. 하나님의 자리,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侵犯)하지 않는다.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원한(怨恨)과 내 복수심(復讐心)으로 인생을 불태워버리지 않는다. 도리어 형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창세기 50:20,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형님들이 저를 해하려고 했던 것을 압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도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픔 속에, 그 악함 속에 그것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생명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을 살리시고 또한 수많은 영혼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저를 건져내신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요셉은 단 한번도 빈말을 하지 않는다.


*창세기 50:21,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말로만이 아니다. 내가 형님들을 진실로 용서하고 형님들을 품고 형님들의 자녀까지도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이것이 요셉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상처는 우리의 마음에 남는다. 때때로 그 상처가 우리의 마음을 마비(痲痹)시키기도 한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직장 동료와 친구,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지체들과도 우리가 상처 때문에 마비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상처받은 마음만 갖고 있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교회생활도, 예배도 드리지만, 신앙의 기쁨과 은혜가 사라져버린다. 오늘 하나님,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임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희 인생에 상처와 아픔이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아, 그 상처는 감추고 지우려고 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란다. 너의 상처와 아픔, 그 슬픔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에게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역사하시면, 그 아픔은 반드시 극복된다. 누군가를 세우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요한일서 4:20,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시는가? 다시 한 번 질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실망시킨 남편, 나를 힘들게 하는 아내, 제 멋대로 반항하는 아들과 딸을 사랑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두렵고 떨린 말씀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요셉은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 용서할 때,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를 요셉이 먼저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문구를 함께 읽어보자.
※사랑할 때, 죽음은 사라지고, 아픔이 길 잃을 때, 생명이 돋아난다. 사랑할 때, 우리의 관계 앞에 놓여 진 죽음은 조용히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의 아픔이 우리의 상처가 길이 될 때,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돋다나기 시작한다. 주님 손에 맡기라. ‘내가 대신 하리이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삶을 받으시고 책임져 주시고 제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던지 간에 하나님의 용서를 실천하는, 하나님이 만져주시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경험하는, 참된 회복, 참된 부흥을 경험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고백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요약
우리의 삶에 놓여 진 수많은 아픔과 상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이 있고 우리의 관계가 깨어질 때가 너무나 많지만, 하나님께서 버려진 요셉을 향하여 찾아오시고 그의 삶을 빚으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며, 우리의 상처가 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거룩한 주의 용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나의 관점으로 해석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여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여야 한다.
-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빌어 용서를 구했다. 이에 요셉은 이미 용서한 자신의 진심을 다시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그러나 요셉은 결코 화를 내거나 앙심을 품지 않고 형들을 긍휼히 여기며 자신의 진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요셉은 그들의 안전뿐만 아니라 그들 자녀들에 대한 양육까지도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 성도는 용서해야 할 위치에 설 때에 주님의 진심을 바로 헤아려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곱이 죽은 후 과거에 저지른 죄악으로 인하여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을 요셉이 간곡히 위로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는 굳게 결속될 수 있었다. 요셉의 용서와 사랑이 열두 지파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촉매제가 된 것이다. 요셉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그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과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형들의 과오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의 형들에 대한 용서와 사랑은 이미 전에 나왔던 부부간의 사랑, 부자간의 사랑에 이어 가족 안에서의 형제 사랑의 모본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갖는 진정한 이해와 용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립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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