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5월 18일)
제목:"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말씀: 마태복음 26:36-46
찬양인도: 쉐키나, 
사회: 김두훈 부목사님
 

설교자: 임병영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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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 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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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과의 사이에서 고민해 본적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또한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기에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이 두 가지가 우리의 삶의 일치가 되면 얼마나 좋은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이 같아서 고민과 갈등을 겪지 않고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 같다. 저에게 아홉 살 난 아들이 있다. 이 친구는 제가 쇼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놀자!!~~”한다. 이러면서 달려와서 제 몸에 안기고 제 몸을 붙들어서 놓지를 않는다. 한 두 번이야 아빠가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하고 그냥 씨름을 하곤 하는데 매번 앉아서 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혼자 놀다가도 달려와서 씨름을 하자고 한다. 피곤하니 오늘 잠깐 쉬고 조금 있다가 하자고 말해도 듣지를 않는다. 어느 날 휴대폰을 조금이라도 핀다 싶으면 어김없이 어디선가 뛰어와서 저에게 안기고 씨름을 하자고 존다. 이 녀석은 제가 집에 없을 때에도 언제 오는지를 확인하고서 잠시라고 시간이 허락되는 것 같으면 저와 씨름을 하기 위해서 달려드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참 고민이 많다. 하고 싶은 것은 분명히 그냥 쉬는 것인데, 해야 할 아빠 노릇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의 고민이자 내적 갈등이 되고 있는 시간들이 있는 요즘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내적 갈등을 겪으셨다. 지난 주 수요예배 때에 말씀을 기억하는가? 설교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시고 발을 씻기시고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은 그 이후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하는 곳에 가신 사건을 말씀하고 있다. 동안 누구나 알고 있다. 당시 겟세마네는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산기슭에 위치한 동산이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하시는 그 동안에 제자들과 함께 야영지로 사용했던 곳이다.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던 장소였다. 그곳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셔서 이번에는 변화 산에서 함께 데리고 가셨던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다시 추려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신다. 그렇게 들어가시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시는 것 같았는데 이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가신 그 예수님의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성경의 저자는 예수님이 고민하고 슬퍼하셨다. 라고 말한다. 많은 사역을 감당하시고 다시 새벽에 올라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을 여러 번 보았지만, 제자들은 그날따라 희한하게 예수님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감정, 그 안에 내적의 갈들이 있었던 그 이후, 그들에게 부탁하시는 모습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6:38,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마음의 고민과 슬픔으로 죽을 것 같다. 라고 표현하면서 마음속에 심각한 갈등이 있다. 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고 계신다. 그 고민과 슬픔의 이유는 제자들을 그곳에 두고 다시 혼자서 조금 거 깊은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러 가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39절에서


*마태복음 26:39,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기에서 이 잔이란 무슨 표현인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 가운데 내려오셔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말씀으로 하나님과 다시 한 번 더 화목하기 위해서 올려드려진 제사의 제물처럼 마치 구약의 화목제물처럼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으셔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이 잔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길 이제 본격적으로 고난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자신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아버지 하나님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뒤 따르는 기도의 내용을 보면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리고 기도한다. 자신의 바람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신다. 그러고 나서, 두 번째 기도를 하실 때, 이보다 조금 더 진전된 내용을 가지고 기도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6:42,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기도하고 계신다. 이제r는 자신의 바람을 말씀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뜻을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세 번째 기도도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이 모든 기도들을 하나 씩 하나 씩 살펴보니 예수님께서 하셨던 가장 커다란 초점은 무엇이냐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바람과 자신의 뜻을 위해 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서 의식적인 노력과 능동적인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말하면, 그가 그 안에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기도하시는가? 완벽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에도 저와 여러분들과 같이 두 가지 마음이 있어서 갈등하고 계신 것이다. 두 마음이란 무엇인가?
 
 
한 마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 하는 마음이다. 또 다른 한 마음은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본격적인 고난을 앞둔 시점에 그 두 가지 마음이 지금 갈등하고 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러 가시는 마음에 고민과 슬픔이 가득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완벽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저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쉽게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의 심정을 묵상하면서 많은 위로가 되었다. 예수님은 특별하신 분이시기에 우리 같이 두 가지 마음의 갈등이 있다면, 쉽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선택하고 살아가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니 예수님도 저와 같이 그러한 두 가지 마음에 갈등하고 있을 때, 고민하고 슬퍼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을 것 같다.’의 표현이 참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마음의 갈등으로 인하여서 힘겨워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총 몇 번의 기도를 하러 가셨는가? 세 번이다. 세 번의 기도의 자리로 반복해서 나아가신다. 그리고 그 모든 기도의 초점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시는 것이 반복되면 반복 될수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욱 더 분명하게 기도의 내용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집중하시면서 두 마음이 갈등으로 인한 고민고과 슬픔을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운명을 받아들이신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인데, 여러분들의 가정과 일터, 삶의 현장에서 두 마음의 갈등이 있을 때 어떻게 선택하는가? 자기의 뜻을 따르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이 서로 갈등하고 고민하며 슬퍼하는 마음과 같을 때, 여러분들은 어떠한 선택을 하고 계시는가? 여러분들이 매주 진행되는 다락방을 통해서 그리고 매주 주일 날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아마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에 많이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경우가 많지 않는가?


여러분, 이러한 갈등과 어려움과 슬픔과 고난 가운데에 이런 선택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두 마음의 갈등에도 여전히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지로 무장할 수 있는가? 특별히 여러분들의 삶이 날마다 좋으면 괜찮겠지만, 계속되는 삶의 문제와 어려움에도 의지의 온전함을 이루고, 상황과 환경,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온전히 의지함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보다 어떻게 하면 힘겹게 그것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적용의 말씀으로 두 가지를 살펴보겠다.
 


I.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분임을 기억하라.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 속에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예수님께서는 심한 고민과 슬픔에 죽을 것 같은 마음에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계속 강조하셨다. 왜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는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이해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바로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렇게 선하신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진행하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선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십자가의 죽음은 분명 고통스럽고, 아프고 힘들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앞두고 무척이나 갈등하시며 ‘죽을 만큼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것은 정말로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이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획하셨으니 그 결과가 반드시 선하게 나타날 것을 예수님께서는 확신하셨기에 자신이 가야할 그 길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계속해서 간구하고 계신다. 예수님 안에 자기이 반응보다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확신하고 있으니 비록 힘겨운 길이라 할지라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계속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우리는 구약에 말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러분이 어쩌면 잘 아시는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이외 비슷한 뜻을 알 수 있다. 우리 함께 창세기 50:19-21을 읽어보자.


*창세기 50:19-21,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 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당함을 받았고 많은 세월을 고생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는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서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다가 팔았던 그 형들을 용서하는 그 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이 죽자, 다시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요셉의 용서가 진짜 용서가 아니면 어떡하지? 아버지께서 살아계셨기 때문에 요셉이 용서했던 것은 아닌가?’ 그들의 마음 가운데 야곱이 죽은 후에 다시 한 번 더 요셉이 복수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 떨기 시작했던 것이다. 눈치 빠른 이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장례 이후에 바로 요셉을 찾아와서 다시 한 번 더 용서를 구한다. 그렇게 구하는 그 핑계가 더 가관(假觀)이다. ‘아버지께서 유언으로 남기셨으니 너는 꼭 용서를 해야 된다.’ 이런 말을 하면서 요셉에게 간청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어떠했는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그 용서를 형제들이 잊지 못한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운다. 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형제들에게 자신이 용서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이유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더 확인시켜 준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 자신을 해하려고 했지만 그 해하려고 했던 그 모든 뜻들을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바꾸어 주셨다. 자신이 형들에게 겪은 고난과 고통과 아픔과 그 모든 슬픔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주셨음을 그는 삶을 통해서 확신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근거가 되었지, 시간이 지난 뒤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어서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요셉의 마음에 형제들을 향한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요셉은 10여년의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만나기만 하면 내가 한번만 만나기만 하면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하는 것을 다짐했을 텐데, 요셉의 마음에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는가! 반복해서 어려운 일들이 또 경험하고 또 경험하는 일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요셉의 마음에 분명이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소욕, 자신의 뜻을 이루려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시는 것을 수용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고, 능동적인 그 마음을, 다시 말하면 의지를 가지고 형제들을 용서한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요셉과 같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외에 이 세상에서 선한 것이 없다. 라는 것을 정말로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 속 안에 있는 의지의 온전함을 다시 말하면 내 뜻이 아닌, 내 마음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식적인 노력과 능동의 마음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모든 것들을 이루어 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II.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이 본문과 이어지는 본문을 계속 살펴보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은 도망가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통하여서 산헤드린 공회에 잡혀서 예수님은 심문을 받게 되신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 중에 70%에서 한 명, 70명과 대제사장을 포함한 71명의 사람들이 모든 법적인 것을 판결하는 곳이 산헤드린이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이 잡히셔서 대제사장이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인가?” 이런 질문 가운데 이렇게 대답하신다.


*마태복음 26:64,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이 ‘당신이 그리스도냐?’ 하는 질문 앞에 그렇다고 대답하시면서 이후에 자신이 재림에 자신이 심판자가 되어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두 마음의 갈등 속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그 순간에 그 선택하는 그 너머에, 그 고난의 너머에, 그 마지막 십자가의 그 너머에,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이후 부활과 영광을 회복하실 것을 확신하셨기에 비록 육신적으로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아픔이 있고 힘겹고 감당하기 어려워 죽을 것 같은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지를 품으셨던 것이다. 여러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신약에서 더 내용을 살펴보자. 신약에 바울을 통해서 살펴보자.


*디모데후서 4:4-8,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 바울을 하나님이 명령을 따라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회심한 이후에 평생을 복음을 증거 하는 주님의 도구로 삶을 살았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말씀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겪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한다. 죽을까봐 한 대를 덜 때리는 39대의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3번의 태장을 맞았고, 한 번 돌을 맞았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일을 깊은 바다가운데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가운데 강과 강도, 동족과 이방, 시내와 광야, 바다와 거짓 형제 중에 위험을 당했다. 라고 고백한다. 또한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던 삶을 살았다라고 기록한다. 이렇게 바울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자신이 가진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사역에 충실했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바울이 이렇게 수고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예배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도 계속해서 고난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두 마음의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오늘 매를 맞고 내일 매를 맞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내가 돌을 맞고 내일 또 다시 고통 가운데 있는 것을 기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저와 여러분들이 바울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바울이 그것들을 감당해 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모든 아픔과 고난과 염려와 근심과 죽음의 고난 속에서도 인간적인 욕망을 이겨낼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이걸 마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라는 그 분명하고도 확실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길을 묵묵하게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은 결코 공허한 삶이 되지 않는다. 많은 수고와 노력을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내 뜻을 위해 나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았는데,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삶은 없다. 매순간 내 뜻을 내려놓고, 내 욕심을 내려놓고, 내 원하는 것을 내려놓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삶은 세상은 결코 줄 수 없는 의의 영광의 선물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약속하신다. 또한 눈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의지의 온전함을 삶의 열매를 같아내기를 소원한다. 다시 저희 가정으로 돌아오겠다. 쉬고 싶다. 라는 제 마음과 아빠노릇을 해야 하는 마음이 갈등이 있을 때마다 저는 꼭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맞다. 아빠 노릇을 선택한다. 물론 아빠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제가 아들을 참 많이 사랑하기 때문인 줄 믿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첫 번째는 정서적으로 바르게 자라는 선한 열매가 맺힐 것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그 아이가 그렇게 저와 함께 씨름을 하며 몸을 비비며 자라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될 것을 제가 알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사역을 하고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몸이 피곤해서 잠시 쇼파에 앉아서 쉬고 싶고, 저도 휴대폰을 보고 싶고, 눕고 싶은 그런 마음을 기쁘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그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을 살면서 우리는 두 갈래 길에서 선택해야 될 때가 많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해야 할 것을 말이다.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이 생긴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들은 요셉과 바울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하고 싶지만 예수님을 닮기엔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당신 같이 느껴지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들었던 요셉과 바울을 기억해 보라. 우리는 구약의 요셉과 신약의 바울을 통해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으지의 온전함을 가지고 사는 자에게 주는 상을 확신함으로 우리의 온전하게 할 마음의 동력을 얻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오전한 의지를 삶의 열매로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갈라디아서 5:16,
16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그렇다. 이 모든 일을 성령을 따라 행하면 가능하다. 그렇기에 의지의 온전함을 위해서 우리 모두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을 살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란다.
 
♣요약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서,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이 되어 예수님께서 잠들었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대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는 말을 우리가 핑계 삼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으로 인해 갈등할 때마다 요셉과 바울처럼 예수님을 따라 의지의 온전함을 이무며 열매 맺는 삶을 살아 가가길 성령님을 통해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아버지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길 소원해야 한다. 우리 힘만이 아닌 우리의 기대치와 우리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기대하면서 그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특별히 의지의 온전함을 이루어내는 자가 되길 소원하며 수많은 갈등의 순간에도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여 사는 것을 기뻐하고 우리의 의지가 온전해져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억하는 예식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결국 우리 각 개인의 죄를 위해 죽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찢기신 몸은, 대신 죽을 우리의 몸과 피 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찬식의 의미를 생각하며 엄숙하게 참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이 가까이 다가오자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로 가셔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할 수 있거든 잔을 옮겨주시기를 간구 하면서도 그 분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셨다. 주님도 인간적인 약점과 연약함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이 온전히 모든 일을 이루게 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간절히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이처럼 영적으로 잠든 제자들의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늘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 이 밖에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해, 믿음에 굳게 서기 위해,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 찬송하기 위해,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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