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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5월 28일)

제목: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말씀: 마가복음 4:35~41
찬양인도 : 여직장 순장반
말씀읽기: 성기석 형제(청년 3국), 나고은 자매(대학7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예배 마무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
 
설교자: 고현종 목사님(미국 디사이플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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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35~41,
35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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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뵙게 되어 반갑다. 정말 기쁜가? 코로나를 잘 견디셨다. 오늘 본문은 ‘그날 저물 때’로 시작한다. 그날이 어떤 날인가? 마가복음 4장 1절을 보면 된다.
 
*마가복음 4:1,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그날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해변 가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신 날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동안 해가 저물었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쉬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날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신다. 저편이 있으면 이편이 있다. 이편은 아마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가버나움 지역이었을 것이다. 저편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갈릴리 바다 건너편인 거라사인의 땅이었다. 거라사인의 땅은 유대인의 땅이 아니고 이방인의 땅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사역하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그날 밤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거라사인의 땅으로 가려고 하신 것은 무엇인가 급한 일이 있을 것 같다. 제자들도 피곤했지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날 밤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중에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바람과 파도가 얼마나 강한지 배가 흔들리고 물이 배위에 가득 찼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아시다시피 갈릴리 호수 어부출신들이 최소한 네 명이나 있었다. 저 정도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고무래에서 베개를 베고 곤히 주무실 수 있으셨을까?
제자들이 이 위급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예수님께서 보시려고 주무시는 척을 하신 것인가? 한 쪽 눈은 감고 한쪽 눈은 뜨고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걸으셨기 때문에 몹시 피곤하셔서 주무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배가 흔들리고 물이 들어오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주무셨던 것은 피곤하실 뿐 아니라, 평안하셨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예수님께서 타신 배를 침몰(沈沒)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평안하셨지만 제자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즉지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졌다. 강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라고 책망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는가? 이제는 강풍으로 인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두려워 떨었다. 이것이 본문에 스토리이다. 아주 짧은 에피소드이지만 정말 많은 영적 교훈들이 담겨져 있다. 여기서 두 가지만 나누겠다.
 
첫 번째는 –순종의 길에서도 풍랑을 만나게 된다.
-순종의 길에서도 풍랑을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건너 거라사인 땅에 가자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원했던 것이 아니다. 아마 제자들 중에서는 ‘이렇게 피곤한데 집에가 가서 쉬지 굳이 그것도 거라사인의 땅에 가야하나?’ 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도 예수님의 명령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제자는 없었다. 다 순종했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순종의 길이었다. 그럼 이제 평탄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길에서 제자들은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순종의 길은 평탄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런데 그렇지만 않는다. 여러분도 다 경험을 했을 것이다. 순종의 길에도 풍랑이 있다. 고난을 만나게 된다.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목회자로 주님이 부르셔서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 그 순종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저희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다. 저는 목사가 된다고 했을 때 반겨주는 자가 없었고 다 욕을 했다. 왜 그 길을 가냐고 비판했다. 이민가정으로 브라질에서 자랐다. 이민 가정이 대부분 그렇듯이 현지 언어가 안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서 장사를 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아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 졸업식 일주일 앞두고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부모님께 통보를 하고 상의 드린 것이 아니고, 통보를 했다. 그게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이 섰기 때문에 그것도 브라질이 아니라, 미국으로 갔다. 신학교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저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어떤 확신이냐면, 내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했다. 내가 부모님을 돌봐야 하지만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돌봐주실 것을 확고한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부담 없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하고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일 년 정도 지났을 때에 저의 어머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57세의 이른 나이셨다. 그렇게 12년 동안 병상에 누워계셨다고 돌아가셨다. 그 시간은 저와 저희 어머님은 물론 가족에게 너무나도 힘든 기간이었고, 정말 인생의 큰 풍랑이었다. 순종의 길을 가면 평탄했을 것 같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외에도 목회자의 길을 가는 동안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을 많이 만났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거형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의 내용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님이 타신 배를 뒤집어엎으려는 이 광품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그냥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기면 되는 것인가? 갈릴리 호수에는 평상시에는 고요하고 잔잔한데, 이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헬몬 산에서 차가운 바람이 내려오고 따뜻한 호수의 바람이 차가운 바람과 만나면 큰 광풍을 일으킨다. 이런 설명 들어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만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광풍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물의 창조자가 되시고 만물의 주관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타신 배를 뒤집어엎으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가시려고 하는 길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사역하셔서 피곤하셔서 곤히 주무시고 계시는데 예수님이 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광풍이, 그리고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매우 어색한 표현이 있다. 예수님께서 광풍을 어떻게 잠잠케 하셨는지를 주목해 보셔야 한다.
 
마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고요 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예수께서 잠에서 일어나시매, 바람과 바다가 잠잠케 되더라. 이것이 자연스럽다. 또는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서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더라,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인데 마치 어떤 인격체에게도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은가? 여러분 이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비슷한 상황이 성경에 또 나온다. 언제이냐면, 예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시던 후에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를 하셨고 제자들은 먼저 보내셨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가운데서와 똑 같은 시츄에이션이다. 큰 광풍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이 밤새도록 노를 젓고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 큰 광풍을 이길 수가 없었다. 큰 위험 가운데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다. 어떻게? 물위로 걸어가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만약 주님이시거든 나로 물위로 걷게 하소서” 엄청난 요구를 한다. 베드로가 물에 뛰어든다.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다. 그런데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 빠진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산을 잡으시고 건지신다. 그리고 배로 돌아오신다. 그러자. 마태복음 14:32절에 보자.
 
*마태복음 14:32,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그런데 이게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똑 같은 상황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셨는데 바다에게는 이르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자 바다가 잠잠해 진 것이다. 이것이 정상이다. 제가 지금 마이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마이크가 소리가 안 나온다고 해서 마이크를 꾸짖지 않는다. “마이크야, 정신 차려라.” 하지 않는다. 마이크 소리 잘 나오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마이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크를 조절하는 음향 간사님께 이야기 하는 것이다. 왜? 마이크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 바람도 파도도 인격체가 아니다.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이르셨던 것이다. 여러분 이 큰 광풍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힌트를 이어지는 마가복음 5장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 우여곡절 끝에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을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발을 내 딛는 순간, 아주 신가한 일이 일어난다.
 
*마가복음 5:2,
2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곧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Immediately(즉시),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고 거라사인의 땅에 발을 내 딛는 순간, 곧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온 것이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인가?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귀신이 예수님을 기다린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기 전에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에게 “내가 곧 있으면 너에게로 찾아가 너를 자유케 해 줄테니 나를 기다리라”. 라고 카톡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나 그 누구에게도 예수님의 계획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갈릴리 바다를 그 밤에 건너야 하는지를,,,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존재가 있었다. 누구인가? 귀신들이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들이 귀신같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을 멸하려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계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거라사인의 땅에 가셔서 하신 일을 단 하나 뿐이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이 귀신 들린 사람을 자유케 해주시는 것뿐이었다. 이 사람은 참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귀신이 아니라 귀신들,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들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자해하고 무덤 사이에 살던 사람들이다. 가족은 이미 그를 버렸을 것이고, 마을의 골칫덩어리였다. 이 이름 모를 한 이방인, 귀신들린 이 한사람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늘 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날 밤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신 것이다. 한 영혼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열심을 우리는 보게 된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타신 배를 침몰시키려는 이 큰 광풍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무엇인가? 이것은 어둠의 세력이다. 마귀(魔鬼)가 귀신들을 결박(結縛)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길을 막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여러분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또는 고난, 어려움이 마귀에게서부터 비롯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시험을 허락할 때가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妨害)하고 공격(攻擊)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순종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낙심케 하고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를 무섭게 하고, 좌절(挫折)과 절망(絶望)에 빠지게 하는 어둠의 세력의 공격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영적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대상이 아니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어둠의 영과 싸움이라’고 말한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全身)갑주(甲冑)를 입으라고 하신다.
 
여러분, 순종의 길에서 우리가 만나는 풍랑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 영적 통찰력이 필요한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靈的) 갑주(甲冑)를 입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것은
 
두 번째는 인생의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한다.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두려워 떨었던 것은 분명하다. 저들은 저들과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자, 저들의 반응은 무엇이냐면, 41절에 무어라고 하는가?
 
*마가복음 4:41,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Who is this?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다. 그리고 믿지 못했다. 믿음의 문제였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하셨다. 이 말은 “어떻게 아직까지 나를 믿지 못하느냐?”라는 뜻이다. Do you still have no faith?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보는 곳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자들을 쫓아 주셨고, 또 권위 있는 말씀들을 저들에게 전해주셨다. 저들이 예수를 믿어야 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수많은 역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만약 저들이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믿었다면 그 풍랑가운데서도 그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예수님 같이 평안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은 같은 우리와 같은 배에 있다. 우리가 한 배에 탄 사람들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공동 운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같은 배에 계신다는 것은 나와 예수님은 공동운명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하는 약속인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
 
*이사야 43: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물 가운데로 지나고 불 가운데로 지나는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시편 23:4,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물 가운데 지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불 가운데 지나도 함께 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가운데 지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 코로나 기간 가운데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멘!!~~ 그런데 왜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가? 왜 걱정과 근심과 늪에 빠져서 죽겠다고 하는가? 그리고 두려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성부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영광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보존하신다. 그 만물 안에는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은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스스로 비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공급자가 되신다. 우리가 지칠 때,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신다. 우리의 상한 심령을 고쳐주시고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만져주신다.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님이 우리와 같은 배를 타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그 말씀에는 내가 너와 함께 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내가 너와 같은 배를 타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란다. 똑 같은 풍랑을 만나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누구는 제자들처럼 두려워 떨 수 있고, 누구는 예수님처럼 평안할 수 있다. 믿음의 문제이다. 똑 같은 풍랑을 만나도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믿음이 다른 것이다.
 
제가 섬기는 디사이플 교회에 다음으로 사랑으로 섬기는 사역이 있다. 브라질 아마존 인디오 사역이다. 제가 2001년부터 그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에 21년째이다. 제가 브라질에서 그 이민자로 살았지만 아마존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여러분 브라질에 산다고 해서 옆집 이웃이 인디오이고 막 바나나가 떨어져 있고,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제가 사는 곳은 대도시이다. 아마존에 가려면 비행기를 서너 시간 타야 한다. 그런데 2001년도에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대학부 사역을 했을 때에 아마존에서 사역하신 박선교사님을 남가주 사랑의 교회 목도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제가 선교사님 만나자 마자 생각이나 약속도 없이 이번 여름에 대학생들을 데리고 아마존에 가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그리고 난 다음에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아마존이 너무 무서웠다. 아마존의 눈물이다. 정말 약속은 해 놓았기에 취소할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 대학부에서도 나이 많은 시니어들, 죽어도 별로 찾는 사람이 없는 그런 아이들, 간사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위험하다고, 그리고 생전 처음 생명보험을 들어보았다. 아마존에 가면서 정말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 그런데 사역하신 선교사님은 4-5년이 되셨고 선교사님을 처음으로 우리를 맞으시는 것이며 별로 경험이 없었다. 선교사님께서 개척하신 몇 교회를 돌아가면서 제가 사역을 했다. 아마존 인디오들은 지금 21년이 지났는데 그때 모습과 지금 모습과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때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냥 예배를 드리면서 웃지도 울지도 않고 아이들이 우리들을 보면 하나 같이 다 울었다. 외부인들 거부감이 있었다. 주일이 바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사역들이 있었는데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을 옮기는데 보통 두 세 시간을 배를 타고 가야 한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새벽 6시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그 교회들을 돌면서 마지막 저녁 될 때까지 사역을 했다. 그래서 우루뚜발이나는 마을에서 마지막 사역을 하고 이제 선교관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이 한 신간 반 정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길인데, 작은 배다. 큰 배를 상상하면 안 된다. 선교사님이 가지고 다니는 작은 배이다. 한 배는 자매 여학생들이 타고 한 배는 저희가 인디오 배를 빌려서 여섯 명 정도 타는 아주 낮은 배이다. 엔진이 있다. 그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데 배를 타고 가던 중 한 십분 정도 지났을 때에 비바람이 쳤다. 이 비바람과 강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강이지만 상당히 크다. 한강과 비교가 안 된다. 열 배정도 넓은 강인데 이 비바람이 부니까 파도가 바다처럼 쳤다. 그리고 불도 없다. 제가 그 가지고 간 후레쉬 라이터를 비치는 것이다. 그 배가 올라가는데 후레쉬로 보니까 파도가 덮치는 것이 보인다. 파도가 위로 올라오고 강가에 후레쉬를 비치면 시뻘건 눈들이 보인다. 그것이 악어들이다. 아마존은 두 계절 밖에 없다. 건기와 우기가 있는데 저희가 갔을 때, 건기가 시작할 때였다. 물이 빠지는 때였다. 우기 때 있었던 악어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강가로 드러난다. 후레쉬로 비치면 빨간 눈들이 보인다. 얼마나 두렵던지, 후레쉬를 붙잡고 비치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선교사님께서 배를 타기 전에 이야기 해주셨던 이야기들이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 강 이름이 히오마데이루인데 우드, 나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강이 나무 강인 이유는 레인풀이어서 비가 많이 오면 나무들이 쓰러져서 나무들이 떠다녀서 배가 나무에 부딪히면 그냥 나무가 뒤집혀서 죽기 때문에 일 년에 몇 백 명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지금도 그렇지만 구명조끼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없는 것이 아니다. 선교사님 배에 있었다. 선교사님께 제가 물으니 미국 개념에서는 구명조끼를 입어야 되지 않냐고 하니 선교사님께서 구명조끼를 입는 것보다 안 입는 게 낫다는 것이다. 왜냐면 아마존 강에 빠지면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물 위에 떠 있으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그 풍랑 가운데 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죽음을 경험했다. 이러다가 죽는 거구나, 이러다가 죽으면 집에 있는 세 아이와 아내가 생각났다. 생명보험을 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으면 어쩌나 하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고, 그러면서 마음속에 원망이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선교사님께서 험한 길을 인도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그런 일은 없었다. 정말 위험했다. 그러면서 각오를 했다. 다시는 아마존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절대로 오지 않는다고 떨면서 히오마데이루를 거슬러 올라갔다. 정말 은혜가 하나도 안 되었다.‘이러다 죽은 거구나!’ 하면서 풍랑가운데 두려워 떨었다 도착을 하고 나서 선교사님께서 다를 은혜들을 나누어보라고 말씀했다. 정말 은혜가 안 되었다. 선교사님과 이제는 여기서 인연은 끝이야, 라고 정말 그랬다. 제가 짧게 한 마디 했다. 선교사님, 제가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했다.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하니 선교사님 사모님이 가만히 웃으시면서 “전도사님, 우리는 이 길을 매주 다닙니다. 소원이 뭔지 아세요? 목사님 손 붙잡고 아마존 강에 폭 빠져 주님 만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아이들 앞에서, 큰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았다. 저는 두려워 떨고 있었는데, 사모님은 평안하셨다. 그날 밤이 저의 라이프체인지가 되었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21년째, 매년 7월이면 아마존에 가 있다.
 
여러분,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풍랑 속에서 제자들처럼 두려워 떨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평안할 수 있어야 하는데 똑 같은 풍랑을 만나도, 결코 믿음의 문제이다. 우리 모두는 지난 2년 이상 이 코로나 풍랑을 겪고 있다. 아직도 진행 중이다. 모두가 다 똑 같이 반응하는가? 아니다. 믿음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내가 믿습니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자야, 어찌하여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꾸짖고 책망하는 음성이 아니다.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음성이다.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와 함께 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느냐?”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 너무 많지 않은가? 이 생애 풍랑은 이미 지나갔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데 왜 또 무서워하느냐? 왜 아직도 너는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 “나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옵소서. 주여, 내가 믿기를 원 하나이다.” 세상의 어떠한 풍랑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내게 주옵소서. 우리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반드시 행해주실 것이다.
 
요약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다. 책망을 하시는 것도 아니다.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이다. 같은 배에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신 것을 잘 깨달아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겸손히 마음의 무릎을 꿇고 주님께 내가 믿음이 연약함을 도우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의 믿음이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아뢰어야 하며, 진정으로 믿기를 간구해야 한다. 수없이 흔들리는 믿음을 주님이 붙잡아 주시고 세상의 어떠한 풍랑 속에서도 굳건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인생 항로에는 잦은 풍랑이 있는데 그러한 풍랑 중에는 주님이 즉시 구원치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풍랑에도 주님은 성도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풍랑을 이겨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주님의 제자들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풍랑이 닥치자 크게 두려워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심을 믿지 못하는 연약한 우리 인생은 세상의 풍파만 보면 겁먹고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임마누엘 신앙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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