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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2년 6월 1일)
제목: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말씀: 창세기 18:9-15, 21:1-6
찬양인도: 쉐키나, 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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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9-15, 21:1-6,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21:1-6,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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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은 언제 그렇게 크게 웃어보았는가? 아 열심히 청년들이 직장을 위해 준비해서 취업을 했을 때, 큰 소리로 웃을 것이다. 그토록 기다렸던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니면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자녀가 태어났을 때, 손주가 태어났을 때, 아마 큰 기쁨의 웃음소리가 그 가정에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혹시 오늘 선거결과를 통해서 웃으셨던 분들도 계실 것 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웃음이 삶에 우리의 유익이 되고 몸에 좋다는 것들을 알았던 것 같다.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라는 그런 한글을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집 대문에 썼다. 웃는 집안에 복이 온다는 뜻이다. ‘일소일소(一笑一笑)’ ‘(一怒一怒)’ 이런 말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웃음에 대해서 연구하다 보니까 그리스에 어원에 ‘헬레’라는 단어를 썼는데, 그 단어로부터 건강이라는 Helth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고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웃었을 때 기쁨이 오고 또 기쁨으로 말미암아 온 몸이 건강하게 된다는 것들을 동서고금을 통해서 경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코로나 불루’가 생길 정도로 코로나 펜데믹을 경험하면서 우리에게 웃음이 상실되어 갔다. 코로나가 끝나면 모든 것이 회복되어서 일상이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하건만 코로나가 끝나가는 이 시점, 다시 한 번 돌아보면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의 침공, 그 전쟁으로 촉발한 식량위기, 석유와 천연가스등 자원기갈이 겹치면서 곳곳에서 물가가 상승하고 주가가 폭락하고 미래가 불안한 소리만 들리는 바로 이런 시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이 필요한 것 같다. 어떡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 주님께서 우리를 웃게 하는 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 가지 한 가지 배워보길 원한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두 가지 다른 차원의 웃음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창세기 18장 말씀을 보면, 사라의 웃음이 처음 나온다.
 
*창세기 18:12-15,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어떤 장면에서 이 말씀이 기록되었는가? 아브라함이 집 앞에 앉아 있는데 세 분의 아주 귀하게 생기신 분들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하여 그 세 분을 집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그 세 분은 다름이 아닌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 하라는 하나님의 천사였다. 이 아브라함의 이 환대하는 모습, 이것은 무슬림 세계에서도 그대로 이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무슬림은 본인들은 아브라함이 큰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 모습을 그대로 본받기를 원한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무슬림이 테러리스드., 뭔가 과격한 사람 같지만 막상 무슬림 지역들, 전도 여행을 다니고 그 지역을 방문하게 되면 방문객들에게 친절하고 많은 선을 베풀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대화의 중간에 하나님께서 드디어 이런 말씀을 주셨다. “이제 너희가 그토록 기다렸던 아이가을 것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다. 얼마나 기다렸던 아들인가? 그 약속을 기다리면서 고향을 떠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바로 그 약속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자 주위에서 반응은 어땠을까? 할렐루야를 외쳤을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자기의 처한 상황을 알기에 그녀는 자기가 임신하지 못할 생리가 끝난 자기의 몸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면 쓴웃음, 어떻게 보면 비웃음, 그 웃음의 자기도 모르게 터트렸던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때로는 그런 것 같다. 자기가 처한 현실과 자기가 바라는 이상의 간극이 너무 클 때, 그 사이를 채우는 유일한 방법으로 웃어버리는 것 같다. 사라는 그토록 기다렸던 아이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이제는 본인의 몸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저 웃어버린다. 이 세상에 많은 웃음이 지금 팬데믹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웃음이 이러한 웃음인 것 같다. 모든 상황을 바라볼 때, 자기의 꿈과 채워질 수 없는 너무나 막막한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웃음은 이 세상 속에서 쓴 웃음, 혹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기의 현실을 슬퍼하면서 나오는 이러한 통곡어린 웃픈 웃음이 아닌가 싶다.
 
모든 물가는 다 오르고 있지만 내 봉급만 오르지 않는 현실, 아무리 노력해도 집 한 채 얻을 수 없는 이 막막한 현실, 자녀를 출산하고 좀 번듯하게 키우고 싶지만 이 세상 사교육비의 높은 벽을 바라볼 때면 그마져도 힘든 현실들, 그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저 쓴웃음만 짓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라의 웃음을 깊이 있게 해석해 주심을 보게 된다.
 
*창세기 18:13-14,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 웃음의 깊은 곳에는 불신앙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신다. 사라가 웃은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하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았음을 하나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사라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자기는 아마 뇌에서 그런 반응을 통제하기도 전에 웃음이 터져 나왔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슨 아이를 낳아?”라고 하면서 씩 웃었는데 하나님은 그 장면을 보시고 믿지 아니하는 그 모습을 지적하셨을 때,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을지,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저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을 때, 끝까지 추긍하시며 “네가 웃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음으로 조롱으로 대답하는 이 사라를 용납하시고 용서하시고 그저 받아주고 계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노라고 하지만 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연약한 믿음 속에서 연약한 존재인지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서 21장에서 또 다른 웃음을 주시고 있다.
 
*창세기 21:3-6,
3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세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드디어 이삭이 태어났다. 이삭이라는 단어는‘ 웃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이차크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며 바로 그 뜻은 ‘웃음’이다. 아브라함이 백세, 사라의 나이 90세가 되었을 때, 이제는 모두가 다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고, 자기마저 포기했던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 아들을 품에 안고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 이삭이라는 그 이름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경험하는 사라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사라의 삶, 아브라함의 집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 웃음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한 데서 나오는 반응이다. 의심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다. 체험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그의 반응은 웃음이었던 것이다. 18장에 웃음은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의 웃음은 비웃음, 불신앙의 웃음이었겠지만 21장의 웃음은 감탄의 웃음이다. 경이로운 체험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웃음, 바로 예배의 웃음이었으리라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이러한 반응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 하나님을 향한 찬사, 하나님을 향한 기쁨,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구약 성경의 이삭은 많은 모습에서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사람의 능력이 끝나는 그 순간 잉태되었던 바로 그 모습도 성령으로 잉태 된 예수님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다. 특별히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 바로 거기서 가장 예수님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이 대답을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시리라.” 바로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신 어린양, 그 제사의 어린양으로서 이삭이 먼저 드려 질뻔 하지만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을 모리아 산에서 보여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11장 19절에서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서 11:19,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바치면서 진짜 죽이려고 했다. 왜 죽이려고 했는가? 죽은 아들, 이 아들이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기 때문에 이삭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하나님의 자손을 많게 하실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이 이삭을 살리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누구를 보여주는가? 바로 구약 성경이지만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부활하실 예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들의 최고의 웃음, 최고의 기쁨은 누구를 통해서 오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실 때, 우리 삶이 진정한 만족, 진정한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매 순간 살아가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러한 웃음이 그 삶에 있게 될 것이다. 한 번 여쭙고 싶다. 이 자리에 계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이 웃음, 하나님이 웃게 하시는 바로 그 웃음을 웃어본 적이 있는가?
 
저는 선교현장에서 2012년부터 섬기게 되었고, 한 어떤 시기보다 훨씬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체험하게 했던 것들을 경험한 것 같다.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두 개의 장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제가 유럽에서, 영국에서 선교 사역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경험이었다. 저는 처음 2011년 말에 영국 웨일즈로 파송 되었다. 선교훈련을 받고 영국에 있는 작은 신학교에서 교회를 개적하는 사역들을 돕고 왔다. 저희가 그 신학교를 돕기 시작하면서 가졌던 비전이 있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도 오셔서 비전을 선포하셨고, 또 온 교회의 성도들이 이 웨스트 신학교를 바라볼 때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웨스트 신학교를 통하여서 이 영국과 전 유럽이 다시 한 번 재 복음화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 비전, 그 기도를 들었던 영국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지 아는가? 이 작은 신학교 하나, 영국에 있는 웨일즈조차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연약한 신학교를 가지고 영국을 넘어 유럽을 복음화 한다는 것은 참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럽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신학교가 있는 그 지역은 그냥 작은 해안가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 안에 있는 작은 신학교 하나가 전체를 위해서 쓰임 받는다는 것은 상상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기에 그렇지만 인간의 비웃음은 하나님은 인간의 웃음을 진정한 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이셨다.
 
2016년에 갑자기 그 학교에 큰 비전을 가지고 있는 한 교수님이 합류하셨다. 아마도 저희 교회에서도 여러 번 뵙기 때문에 기억하실 것이다. 담임 목사님보다 더 큰, 190이 넘는 거구의 한 교수님이 그 신학교를 찾아오셨다. 마이클 리브스라는 분이시다. 그분은 어떤 비전을 가졌느냐면, 지금까지의 신학교 모습으로는 안 되고 신학교가 변해서 진정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습으로 바꾸어야 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느냐면, 신학교에 있는 좋은 과목을 다 영상으로 녹화를 하고 그래서 각 교회마다, 영국은 한국과는 좀 다른 제도이기 때문에 신학교를 가지 않고 교회에서 도제식으로 훈련을 시켜서 목사 안수를 줄 수 있는 제도가 아직도 있다. 아직도 교회에서 사람을 훈련을 시키고 있는데, 목사님들의 그 신학교육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히브리어, 헬라어, 교회의 어떤 긴 역사,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못한 체 목회에 필요한 몇몇 과목만으로 가르치고 목사로 세우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러한 현실을 보고서는 신학교를 좋은 과목들을 다 녹화해서 그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온라인 커뮤니티, 러닝커뮤니티를 그때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학위를 하지 않는다면 이 과목들을 가지고 얼마든지 교회에 필요한 인재를 쓰는 그 이래 신학교의 모든 컨텐츠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 온라인 커뮤니티, 러닝커뮤니티라고 불렀는데, 그와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영국교회와 유럽교회가 다가가기 시작했을 때, 유럽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 진짜 너무나도 비싼 신학교를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교회의 일꾼을 기를 수 있는 이런 귀한 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탄하기 시작했고, 영국 커뮤니티가 곳곳에 일어나기 시작했고, 또 영어가 익숙했던 지역들은 곳곳에 유럽 전역으로 그 상황들이 펼쳐진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그 신학교의 한 교수님이 그것을 고백하시는 것들을 제가 들었다.
 
처음에 사랑의 교회에서,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유럽전역을 돕겠다는 비전이 되었는데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비웃었다는 것이다. 신학교 하나도 살아남기 어려움에서 유럽 전역, 하나님께서 진짜 그 비전과 그 꿈대로 일하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생생히 고백하는 그 교수회의 현장 속에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율을 느꼈다.
 
사라가 처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비웃음의 웃음으로 반응했지만 그러나 진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켜주셨을 때, 웃음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간구와 하나님의 백성의 간절한 꿈들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능력이시고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며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저는 경험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근에 선교 컴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작년부터 담임 목사님께서 올해 아주 중요한 키워드로 특새 20주년이란 것들에 대해서 강조하셨다. 올해 22년은 사랑의교회 첫 특새가 시작된 지 2003년 시작된 20년이 되는 때에 그것들을 잘 기념하는 그런 한 해로 준비하자고 2021년 마무리하시면서 2022년의 비전을 주셨고, 그러면서 올해 선교 컴퍼런스 가장 큰 문제로 2003년 첫 특새에 열매로서 키르키스탄에 학교를 짓기로 결정했는데 막상 저희 성도님들에게 그 비전과 그 진척상황을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해 말부터 뜻을 품고 2022년 올해 선교 컴퍼런스를 통하여서 키르키스탄, 사랑글로벌 아카데미를 통해서 다시 이 일들을 나누어야겠다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학교가 뭔가 좀 더 멋지게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했던 내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메타버스 시대에 우리가 먼저 그 시대를 압도하는 능력으로 4차 산업을 이끌 수 사랑의 교회가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다.
 
사실 그 기도를 하면서도 저는 기도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1차, 2차, 3차까지는 좀 감이 잡히는데, 4차 산업혁명시대는 어떻게 될 것이며, 그것에 걸 맞는 선교, 메타버스, 사실 머릿속에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체 그냥 그저 기도만 했다. 하나님은 놀라우시다. 이 키르키스탄을 글로벌 아카데미에서 돕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중앙아시아 선교를 적극적으로 돕던 한 권사님이 계셨다. 그 권사님이 아주 좋은 교육 기업에서 일하시면서 그 교육 기업이 이제는 메타버스 안에다 학원을 개설 했는데 이 학원의 좋은 컨텐츠가 키르키스탄과 중앙아시아의 선교 현장에 쓰이기로 먼저 제의를 하신 것이다. 아직까지 다 회사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선교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은 걸리지만 이 컨텐츠를 가지고, 이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키르키스탄과 중앙아시아를 허락만 된다면 더 많은 나라를 더 섬기고 싶다고 계속 그 업체를 방문하면서 그 꿈들이 하나씩 하나씩 이제 실현되는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선교 컨퍼런스를 경험하시면 6월 4-5일 마당에 중앙아시아 선교에 대한 많은 것들이 전시될 텐데 그 중에 한 부분의 메타버스 체험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왜 저 기업이 교회에 와서 이것을 홍보하지?’ 라는 생각을 품지 말고 그 좋은 교육 컨텐츠가 선교 현장에 쓰이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했으면 좋겠다. 메타버스, 메타버스, 산업혁명을 우리가 외치면서 뜻도 모르고 저는 마음속에 비웃듯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진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면서 하나님은 그 꿈을 실현하고 계심을 경험하고 전율을 느끼고 있다. 이제 상상해 본다. 메타버스의 좋은 프로그램이 키르키스탄에 사랑글로벌 아카데미가 먼저 적용이 될 것이다.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감사하게 허락해 주셔서 컴퓨터도 업그레이드 하고 여러 가지 꾸밀 수 있게끔 준비가 되었다. 빠르면 9월부터 그 꿈을 향해서 키르키스탄에서 가장 최고의 영어교육을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렇지만 전혀 돈을 들이지 않고 시작하게 된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역, 여러 지역에 선교사님들이 사역하는 곳곳마다 이제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참 4차 산업혁명의 초 현실, 메타버스의 위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희가 영어 학원 특히 다른 학습 공동체를 꾸미려면 참 많은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교지마다 참 고민이 사람들을 모으는 전략들이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대부분 사역하시는 곳은 마음 놓고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라, 무슬림이 많은 땅, 또 사회주의적인 그런 압박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사실 그런 곳에서 여러 아이들과 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칠 수 있는 교육 컨텐츠들은 참으로 너무나도 필수적인 것인데, 그러나 또 학원을 운영한다는 것은 얼마나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서는 이끌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엄두를 많이 못 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메타버스의 좋은 프로그램들이 선교지마다 접목이 되고 손쉽게 학생들을 모을 수 있게 되는 그런 일들이 현실화 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은 우리로 말미암아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한다. 그것들을 경험했던 것이다.
 
여러분, 선교를 경험하면서 선교의 최전선에서 섬기면서 많은 어려움들과 고생하시는 선교사님의 소식도 듣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뛰어 넘는 모든 선교사님들이 그래도 그 현장을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바로 그것에서 모든 능력을 가지고 그 모든 불가능들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며 하나님 때문에 웃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임을 믿는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바뀌게 된다.
 
*다니엘 11:32,
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시심을 알기에 하나님이 내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것임을 알기에 내가 무릎 꿇고 주 앞에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셔서 그 모든 불가능을 이기게 됨을 믿기 때문에,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몸소 알기 때문에 강하여 용맹을 떨칠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삶의 여러 가지 앞에 좌절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믿음이 모든 상황을 이기며 평강 가운데 기쁨 가운데 결국은 웃게 만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결론은 어떻게 하면 이렇게 웃게 하는 웃음을 우리도 체험할 수 있는가? 웃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세 가지 그런 원리를 적용하고 이 말씀을 마칠 것이다.

웃게 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1.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라.

2.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라.

3.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라.

 
첫 번째는 웃게 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
▷1.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와 같이 이삭을 통하여서 웃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갈대아 우르에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가나안 땅, 이제 하나님께서 그곳에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역사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장 중요한 일을 펼쳐나갈 바로 그 현장 한 복판에 갔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통회하고 겸손한 자, 간절히 찾는 자에게 찾아오신다. 그렇지만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다. 하나님을 내 편을 끌어들이는 것이 기도요,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 아니다. 기독교는 뭔지 아는가? 내가 하나님편이 되고 하나님의 군사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현장에 나도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될 신앙의 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8:29,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이 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바로 그 역사의 현장, 하나님의 그 현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현장에 여러분의 마음을 두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복음이 증거되는 전도의 현장, 또 치열하게 진리와 비진리가 싸우고 있는 이 한국의 현실, 또 선교의 그 현장의 최전선에서 복음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그곳들, 바로 그곳을 향해서 우리가 마음이 갔을 때, 그리고 그 현장에 계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들여서 같이 주님 앞에 기도하고 주님 앞에 찬양하며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부르짖을 때, 우리가 그제서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 안이와 편안한 삶에 뭔가 하나님께서 보너스로 응답하시기 위해서 내 삶에 하나님을 끌어드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내가 가도록,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의 현장으로 내가 움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를 부르신다.
▷2.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라.
-우리는 귀를 기울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참 놀라운 영광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홀로 이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다. 뭔가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일손이 딸려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교를 생각하며 선교의 현장을 생각할 때, 착각에 빠지기 쉬운 일이 있다. 뭔가 하나님의 일손이 부족하시기에,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시기에, 내가 하나님을 도와드려야겠다는 큰 착각이다. 하나님은 홀로 말씀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원하시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 땅,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다. 이것이 우리를 가장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우리를 최고의 문제로 대우하신다는 그런 최고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고 저는 믿는다.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가장 큰 특권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 하나님 영광의 그 사업에 동참한 하나님의 친구, 바로 그와 같은 호칭을 우리 가운데 주시기 위해서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 것이다.
 
*이사야 6:8,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지금도 이와 같이 이사야를 부르시고 파송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선교의 현장과 선교의 많은 일들, 전도의 일들, 이 땅 가운데 비진리가 진리를 자극하는 그 현장 가운데 우리가 주님 앞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 그 부르심의 음성을 또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가서 이 영역들을 위하여서 하나님의 전사로서 자기 하나님 아는 백성은 강한 용맹을 떨친다고 하였는데 하나님 아는 자로서 그 땅을 변화시키고 그곳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용사로 세워지기를 원한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웃게 하시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바란다.
 
3.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또 하나님 앞에 또 헌신하기 위해서 걸림돌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 세계선교를 생각할 때 한 없이 부족하고, 영어도 못하고, 건강도 없고,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가 찾아낼 수 있다. 그렇지만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나의 순종이하다.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ability가 아니라, availability이다. 하나님께서 일손이 부족하셔서, 능력이 부족하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한 뜻으로 적은 능력, 적은 정성이지만 함께 일하는 순종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찾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았던 한 장면이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를 보여주시며 “너의 자손이 저렇게 많아질 거야”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믿음의 이것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좋은 것, 하나님께서 칭찬받을 점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로마서 4:20-22,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 아브라함의 다른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보시고 또 순종하여서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으로 가는 그 순종을 발걸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쓰셨던 것을 보게 된다. 능력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면 저부터 하나님께 쓰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시고, 친히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믿기에 그 적은 영역,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역을 위해서 최대한 주님 앞에 헌신으로 살아가는 그 순종을 드리기 위해 작은 순종을 드리는 바로 그 순종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그 사람과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지 적용했으면 좋겠다. 비웃음, 쓴 웃음, 조롱 웃음으로 가득한 세상, 참 많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반응이라는 것은 조롱과 비탄에 섞인 웃음 밖에 살 수 없는 그런 세상이지만 그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웃음을 우리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기쁨, 영원한 웃음의 이유가 되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가장 최전선에서 주를 위해 싸우다가 주 앞에 영광스럽게 서는 그 날을 위하여 살아가는 귀한 한 분의 성도로 살아갈 때, 우리 삶의 전체가 주님 앞에 드려지는 기쁨의 산 제물로 드려질 줄 확신한다.
 
♣요약
우리를 진정으로 웃고 하시는 일하심을 깨달아서 하나님을 우리가 신뢰하고 웃음이 되게 하셔서 이러한 웃음이 나에게도 되게 하시며, 그 웃음으로 그 모든 우울함과 괴로움과 내 모든 열등감과 내 모든 것을 떨쳐 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소망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한 용맹으로 우리가 주님을 그렇게 아는 백성으로 강한 용맹을 떨치는 주의 사람으로 헌신하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가며,. 하나님 부르심에 귀를 기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소망한다.

-여기서 이 하늘의 손님들은 아브라함의 친절에 보답을 한다. 곧 그들은 아브라함의 영접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하늘로부터의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웃음과 사라의 웃음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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