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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 10일).
제목: "온유한 자의 복은 왜 하필 땅의 기업일까?"
말씀: 마태복음 5:5, 시편 37:7~11
대표기도: 김은석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초빙(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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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시편 37:7~11,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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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팔복 중에 가장 듣기에 솔깃한 복이 무엇인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가 아닌가? 한국인들은 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흥분하는데,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복이니까 가장 매력적인 복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논란이 많은 복도 ‘온유한 자의 복’이다. 예를 들어 다른 복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배부를 것이다. 그 다음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러한 복들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주관적이라 확인하기 어렵다. ‘천국이 너희 것이요’ 라든지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클 것이다.’라든지, 하는 복도 미래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현실에서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주변을 보면 검증이 가능한데 솔직하게 온유한 자가 복을 받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논란이 많은 복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온유’란, 성격과 태도 따위가 온유하고 부드러움, 이라고 정의 되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변을 돌아보면 과연 성격과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가? 오히려 땅을 차지하려면 좀 대담해야 하고 조금 무모해야 되지 않은가? 주변을 돌아보면 주식도 하고 비트코인도 하고 무리하게 빚을 내서 영까지 끌어와야 아파트 한 채라도 얻는 것 같지 않는가?
 
성경을 보면 땅을 정복한 여호수아나,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윗은 대담한 사람이고 용감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 이런 점을 염두 해 두고 마태복음 5장 5절을 들여다보면, 질문이 세 개가 생긴다.

*마태복음 5: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온유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가 헬라어나 히브리어로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온유의 개념이 아닐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서 온유하다. 라고 지목한 인물은 딱 두 명이다. 한 분은 모세, 한 분은 예수님이다. 모세는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모세는 어떤 점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인가?
두 번째는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은 지위나 명예가 아니고 왜 하필 땅인가?
세 번째는 온유한 사람이 받는 땅은 무엇을 의미한가? 어떤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받는다는 것이 현실성이 없으니까 천국으로 영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의 복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복은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가 받는 땅은 물질적인 면에서는 어떤 의미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어떤 의미인가? 세 가지 질문을 염두 해 두고 주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 가는 가운데 온유한 자의 복을 깨닫고 갈망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무엇인가? 온유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하는 곳이 민수기 12장 3절이다.
 
*민수기 12:3,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의 삶을 보면 온유하지 않다. 애굽에서 사람을 때려죽이지 않나, 바로 왕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를 않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니까 하나님이 반석을 한 번만 치라고 했는데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이나 치는 바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모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 태도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존재가 아니다. 도대체 모세가 온유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온유함은 히브리어 단어를 살펴보면 히브리어로 ‘아나브’이다. 이 아나브라는 단어가 기본음에는 ‘머리를 숙이다.’ 전쟁에 패해서 머리를 숙이든, 전쟁에서 고난으로 압박으로 고개를 떨구든 머리를 숙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구약에서 이 아나브라는 단어가 25번이 나오는데, 7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한다. 겸손한자로 8번, 가난한 자가 총 6번, 온유한 자가 4번, 곤고한 자가 2번, 빈곤한 자, 가련한 자, 연약한 자, 한 번씩 쓰였다.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지만 핵심은 분명하다.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억압을 받거나 누군가의 핍박을 받거나 여러 가지 환경 상 어려움이 많은데 아무런 힘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단어로 쓰이는 단어인데 문맥상 해석하기가 어려우니까 이렇게 7가지로 성경에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이며, ‘온유한 자’라고 하는 번역은 그중에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아나브라는 단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태도를 가리킨다. 해석자들은 ‘온유한 자’라고 하기 보다는 신뢰하는 자, 겸손한 자로 번역하는 게 더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설교시간에 온유한자와 겸손한 자를 섞어서 사용하겠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의미는 인간을 대할 때, 온화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겸손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신뢰하고 겸손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볼 에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이다. 그래서 온유하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이다. 이것만 명심하라. 그렇다면 왜 모세가 이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인가? 모세를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곤고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이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만나가 지겹다고, 광야에서 고기를 내놓으라고 한다. 모세가 무슨 수로 광야에서 고기를 내어 줄 수 있는가? 울면서 불평하는 백성들을 놓고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한 번 들어보라.

*민수기 11:11-15,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 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낳았나요? 내가 낳지도 않은 백성을 내 아버지처럼 품고 가는 게 너무 힘들다고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다. 온유해 보이는가? 하나님께 대들고 있다. 그러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나인 미리암과 형인 아론이 비방을 시작한다. 12:1-2절에 보면
 
*민수기 12:1-2,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구스 여자가 모세의 아내 십보라를 가르키느냐, 아니면 다른 여자를 가르키느냐, 논란이 있는데 저는 모세의 아내는 십보라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많이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이름 두 개가 있다.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여인인데, 하박국에 보면 구산의 장막, 미디안이 나와서 구스가 미디안과 같은 지명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저는 모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인데 다른 여자를 첩으로 얻었을 가능성 보다는 구스여인이 미디안 여인이고 아내 십보라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렇게 안 믿어도 괜찮다. 미리암이 이방여인인데 모세가 아내가 된 것이 이 미리암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모세의 누나인데 갑자기 이방 여인이 들어와서 자기 사랑하는 동생의 아내가 되었으니까 이 여인들의 세계에서 뒤로 밀려난 것 같다. 자기가 앞장 서면은 되는데 안서고 오빠인 아론을 부추겨가지고 이제 구스의 여인을 취한 것이 문제인데 그것을 내 세우지 않고 모세하고도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했다. 이러면서 이제 비방을 시작한다. 실재로 미리암이 앞장을 섰지만 부추겨서 아론을 정면에 내 세운 것 같다. 여자이니까, 여자가 마음에 안 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누가 문둥병에 걸리냐면 미리암만 걸린다. 아론은 그냥 마지못해 따라가는데 하나님이 다 아시고 이제 미리암과 나병이 생기게 한다. 어쨌든 주변의 수많은 백성들이 울면서 고기를 내 놓으라고 난리이고 누나랑 형이 또 비방한다. 

실재로 미리암이 앞장을 섰지만 부추겨서 아론을 정면에 내 세운 것 같다. 여자이니까, 여자가 마음에 안 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누가 문둥병에 걸리냐면 미리암만 걸린다. 아론은 그냥 마지못해 따라가는데 하나님이 다 아시고 이제 미리암과 나병이 생기게 한다. 어쨌든 주변의 수많은 백성들이 울면서 고기를 내 놓으라고 난리이고, 누나랑 형이 또 비방한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상황에서 성경 기자가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그의 아나브가 그의 겸손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꼭 집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백성들과 자족으로부터 온갖 비난을 당하는 가장 불쌍하고 비참하기 때문에 아나브를 ‘고개 숙인 남자’, 이렇게 해석하고 모세는 비참함과 불쌍함에 지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하다. 고 번역한다. 이거보다는 더 넓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모세가 아무런 반응을 안 한다. 하나님이 들으셨다. 모세가 침묵하는 것은 온화하고 부드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겸손함과 신뢰를 가르킨다. 그래서 최근에 성경학자는 모세는 겸손함과 신뢰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했음이 더 좋다고 보인다. 그러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겸손한 모세, 온유한 모세를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는가?
 
*시편 140:6,
6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겸손한 자가 ‘아나브’이다. 민수기 12장의 스토리를 보면 여호와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회막에 불러내신 다음에 맹렬하게 비난하신다. 그리고 심지어는 진노하신다. 그리고 나서 미리암이 나병이 생겨 눈처럼 희게 되었고 끝내는 진영에서 쫓겨나 7일 동안 추방되었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하나님만 의지하는 모세를 붙드시고 미리암은 땅에 던지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겸손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럼 두 번째 문제가 무엇인가? 왜 하필 겸손한 자에게 굳이 땅을 주시는 것인가? 그 이유를 미리암과 아론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수기 12장의 6-8절에 보면,

*민수기 12:6-8,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미리암이 모세하고만 여호와하고만 말씀하시는 것이냐? 우리 랑도 하지 않았느냐? 비방을 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낸 다음에 만약에 선지가가 있다면 그 선지자에게 나 여호와가 환상과 꿈으로 이야기 하지만 내 종 모세는 그렇지 않다. 내가 얼굴을 대면하여 명백히 말한다. 이렇게 모세를 두둔한 다음에 “내 종 모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단정적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내 종이라고 부른 유일한 인물은 아브라함 밖에 없다.
 
두 번째로 모세를 향해 내 종이라고 내 종 모세는 온 집에 충성한 인물이라고 두둔하신다. 그렇다면 여러분 너무나 분명하지 않는가? 자기만 신뢰하고 자기 온 집에 충성한 모세에게 하나님이 땅과 집을 하사하지 않으시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종인 아브라함에게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느혜미야 2장 8절에 보면 그의 마음이
 
*느혜미야 9:8,
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이렇게 주는 의로우시다. 고백하자 그의 마음이 충성됨을 보시고 그 충성됨이 내 종 모세는 온 집에 충성한다고 하신다. 같은 단어이다. 모세가 이제 고기 달라고 하는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하나님께 뭐라고 하는가?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습니까, 내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들을 품듯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하신 땅으로 가라 하십니까?”라고 울부짖었지 않는가? 여호와께서 네 백성과 땅을 맡긴 것은 내가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요, 충성스런 종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 보면 황제가 충성스런 신하에게 땅을 하사한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개국공신이나 충성스런 신하가 있으면 땅을 하사한다. 

 
그래서 저도 경주 김씨 경순왕의 계림군파 39대 손이다. 맨날 저희 아버님 자랑하신다. 땅이 한 평도 없다. 뭐 11했나 몰라요. 경순왕의 후손이면 충성스럽게 해가지고 땅을 좀 하사 받아가지고 뭐 좀 대대로 유산을 물려주든지 뭐 제주도에 보니까 경주김씨 후손이 누구누구가 하사 받은 땅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봤는데 한 평도 없다. 충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말만 경순왕의 후손이다. 호적을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ㅎㅎㅎ!! 대부분 다 양반이라는데, 사실은 양반 수가 잘 안 된다. 이렇게 말하니까 행복하신가? 상대방이 귀족이 아니라니까,,, 귀족이 아닌 것 같다. 제가 봐도 너무나 충성스럽게 해서 띵을 하사 받아서 좀 후손들에게 물려주면 이렇게 힘들게 안 살 텐데, 도대체 무얼했나 이런 생각이 팍 들었다. 실제적으로 이렇게 충성스러운 표현을 잘 안 쓴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사무엘하고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 네 분이다. 사무엘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사무엘상 2:35절에 보면
 
사무엘상 2:35,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사무엘이다.
 
사무엘하 7:16,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것은 다윗에게 한 말이다. 솔로몬에게도 똑 같이 말한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너에게 주리가 경고했는데 같은 단어이다. 충실함은 든든함이란 뜻이기 때문에 사람을 보고 든든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양쪽에 쓰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와 사무엘과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온유한 자, 겸손한 자, 충성스런 사람들에게 땅을 맡기고 자신의 집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도 여러분과 제가 믿음의 선배들처럼 하나님만 의지 하는 충성된 자로 인정받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여기서 이런 성경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깊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라고 하신 것은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시편 37편은 누가 기록했냐면 다윗이 기록했다. 과거에 땅을 차지한 구속사의 선배들의 설 례들과 자기에게 하나님이 땅과 집을 주신 것을 경험하면서 누가 그러면 땅을 차지 할 수 있는지를 시편 37편에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편 37편을 읽으면 땅의 기업을 받는 온유한 자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12절, 14절 21절을 보면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고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지 하지만 길이 형통하고 큰 세력을 유지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온유한 자들이 불평하고 시기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 주변에는 영 끌 해서 부동산 사서 돈 벌었다는 이야기, 주식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심지어 암호 화폐에 투자해서 떼 돈 벌었다는 소식들이 난무하고 있다. 눈만 뜨면 부자가 되는 방법, 돈을 버는 수단이 사방에서 들여온다. 원래 세상은 돈에 눈이 먼 죽은 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십 년 전에 교수 세미나를 갔다. 말이 세미나이지 그냥 여행 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미나라고 붙인 것이다. 요세 잣대를 들이대고 가서 무얼했냐 고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 하고는 여행 한 것이다. 그러니까 세미나라고 말하기 그러니까 세미나로 한 것이다. 이해해 주시리라 본다. ㅋ ㅋ 값이 굉장히 저렴한 여행 상품이다 보니 계속 그 쇼핑몰이나 상품을 안내하는 곳에 끌려 다니는 여행인 것이다. 그래서 저희들이 상점에서 물건을 사지도 않고 교수들이 외국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보니 별로 살 것도 없고 집에 오면 쓸 만한 것도 없고 경험이 있으니까 안사는 것이다. 이제 가이드의 얼굴이 무거워진다. 마지막 곰 농장을 견학하는 것이다. 안 가려고 해도 표정이 너무 안 좋으니까 억지로 끌려 간 것이다. 농장 직원이 나와 가지고 이제 곰의 간과 쓸개가 매우 좋다고 선전하더니 갑자기 우리에 갇혀 있던 곰 한 마리가 마취가 된 채 카트에 실려서 끌려왔다. 초음파로 쓸개가 어딘지를 찾아서 바늘로 생즙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볼 수가 없어서 나와 버렸다. 마당에 실려 온 곰이 우리에 갇혀있는데 난리가 난다. 부르짖기도 하고 우리를 때리기도 하고 너무 민망해서 그 직원에게 “어떻게 그렇게 우리에 가두어 두냐?”고 물었다. 그분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선생님 너무 걱정을 마세요. 이곳에 있는 곰들은 근무를 서는 겁니다.”라고 했다. 더 넓은 곰 사육장에 있다가 3개월씩 이곳에 교대로 근무를 선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우리에 갇힌 채 마취되어 카트에 실려 나와서 생 쓸개즙을 채취당하는 곰을 가리켜 근무를 서고 있다며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그 순간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불 수 있었고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욱 슬픈 것은 이런 일을 일부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어를 바꾸어서 투기인데, 재테크, 투자하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꾼다. 물론 주식이든 부동산거래든 암호 화폐든 간에 건전한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 투자라고 말한다. 저희가 투기나, 세미나, 근무 서는 것, 다 비슷하다.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을 합리화 시키고 단어를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조차도 투자니 재테크니 하면서 투기를 한다. 그런데 자주 이런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렇게 얻은 땅은 죽은 자들의 땅이지, 산 자들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면 당연히 불평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데 아파트 값이 올라간 지역의 교우들과 그렇지 못한 교우들 사이에 심각한 정서적 차이가 있어서 시기를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같은 교인들 사이에서도 그런데 악인들과 불의한 자들이 땅을 차지하고 형통하게 된다면 불평하고 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은 아닌가? 어떤 때는 화가 나고 분노가 치민다.
 
그런데 시편 37편 기자는 일절부터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시기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왜 그러면 악인들이 형통과 악인들의 번영으로 인해 시기하고 불평하지 말라고 하는가? 악인들의 형통과 부는 잠시 있다가 베임을 당하는 풀과 같지만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편 37편에는 땅을 차지한다는 표현이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 한 결 같이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마태복음 5:9-11,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37:22,
22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시편 37:28-29,
28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9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37:34,
34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이 다섯 번 다 악인은 끊어지고 베임을 당하고 없어진다. 이렇게 되어 있고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 온유한 자, 주의 복을 받은 자,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 땅을 차지한다. 이렇게 되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충성스러운 종들이 하나님만의 말씀만을 겸손한 자들이 어떻게 땅을 차지하였는지 자신의 삶의 토대로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똑 같다. 아무런 역사적 설 례가 없이 그냥 추상적으로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시편 37편을 인용한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온유한 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고, 온유한 자에게 굳이 땅을 주시는지를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교회 역사에서 온유한 자가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받는지 살펴보겠다.
 
1855년에 이제 중국 선교를 허드슨 테일러가 이제 5년 만에 병이 생겨가지고 귀국해서 영국으로 치료를 하면서 길이 잘 열리지 않았기에 오 년 동안 선교를 못하다가 혼자 하기 보다는 여러 명이 선교하는 게 좋겠다고 이래서 1865년에 중국 내지 선교를 결정하고 16명의 선교사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는데 그 때 비용이 이천 파운드가 필요했다고 한다. 선교 소식지에다가 필요한 액수를 제시 했고 개인적으로 호소하거나 모금 하거나, 헌금 명단을 게시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놀랍게도 날마다 합심하여 기도만 했는데,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 사실 굳이 다 채워졌다는 사실을 광고할 필요가 없는데 소식지에 이 사실을 광고하고 다 채워졌다고 광고하고 난 후에 일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예물이 너무 많이 들어왔으므로 성막에 쓸 물건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했던 모세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헌금을 하라고 덜 요청하고 거룩하신 성령님의 능력의 더 의존하며 우리의 영성을 더 깊이 판단하면 모세의 체험이 기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될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
 
-한 번은 중국에 관련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헌금하지 않고 그 자리에게 두 번째 헌금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는 조건으로 허락을 했다. 큰 지도를 가지고 가서 중국이 얼마나 큰 지, 중국의 인구가 얼마인지, 어떤 영성의 각성의 필요성을 설명해서 아마 감동을 준 것 같다. 초대한 사회자가 마지막에 헌금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런 하나님의 선한 사역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게 되면 마음의 부담이 있을 것 같으니까 허드슨 테일러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헌금을 하면 좋겠다. 라고 이렇게 광고를 한 것이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서전에 ‘나는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감정적인 이유로 부담을 지우는 것보다 부담을 안고 집에 돌아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기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헌금을 하라”고 하는 게 확신이 든다면 중국관련 선교 단체이거나 런던에 있는 우리 선교 본부에 도움을 우송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한 자녀들을 선교사역에 보내는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나는 자칫 헌금을 하다보면 돈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상을 남길 수가 있다고 했다. 강력히 나의 소원을 이야기 하자 사회자가 내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에 나를 초청한 사회자가 이렇게 말했다. “테일러 선생, 어제 밤에 나는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오늘은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소. 나는 어젯밤 죽음으로 향하는 수많은 중국 영혼들을 향해 주님, 내게 무엇을 하시길 원하시는지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소.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고, 이것이 바로 그 결과요.” 그는 오백 파운드짜리 수표를 건네주면서 전날 밤 헌금 시간이 있었으면 몇 파운드만 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그 수표로 배 삯을 지불했다. 우리는 1866년 5월 26일 라메르 무호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22명의 손님 가운데 16명이 선교사였고 이것이 중국 내지 선교회 첫 출발이었다. 우리는 허드슨 테일러에게서 하나님은 겸손 자에게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지를 볼 수 있다.

 
라이프 윈터가 이렇게 말한다. 대학도 못 가보고 더구나 선교 훈련도 못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의류학교의 학력과 과거의 적당한 경력만으로 선교 현장에서 그렇게 멋진 활약상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를 멸시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사용하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의 모든 약점을 감추어 주셨으며 중국 내지 선교회는 6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해 중국 내지 선교사역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세 번째 질문이 남았다. 과연 온유한 사람이 받는 땅은 무슨 의미인가? 그냥 영적으로 생각해서 땅을 천국이라고 얼버무리면 안 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복은 인간이 몸과 영혼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이 받은 땅은 물질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고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겠다. 이를 알기위해 세상 사람들이 차지하는 땅은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겠다. 우리는 땅과 학벌이 중요한 한반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무작정 앞으로 달리고 있다. 그렇게 달리면 땅을 차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렇게 무작정 달리고 나면 원하는 땅에 도착할 수도 있고 땅을 차지할 수도 있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무작정 달렸는데 도착해보니 우리가 바라던 땅이 아닐 수 있다. 영화감독 장진이라는 사람이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착해 보니 지옥이었다.” 그렇다. 어딘지 모르고 세상 사람들처럼 달리다 보면 도착한 곳은 지옥이고, 죽은 자들의 땅일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의 상류층 안에 진입을 했고 자녀교육에 올 인을 했고, 원하는 대학과 직장에 들어갔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가? 그 사이에 일부 자녀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고 교회보다 세상이 너무 좋아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주일 성수를 예로 들어보겠다. 학원을 가기위해 주일 성수를 드리지 않는 것이 이제는 예사 일이 되었다. 주일에 공부하지 않고도 원하는 대학에 갔다는 1960년대, 70년대 시대의 간증은 이제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었다. 중간고사 학기말 고사가 되면, 교회의 주일학교 출석률이 반 토막이 난다. 심각한 것은 오히려 교회의 중직 자 자녀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서 입시나 학벌보다 더 센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하나님도 성적 앞에서는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원하는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고 땅을 차지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열 정탐꾼의 그 말에 그 대답이 들어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나안 땅이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교육을 무시하고 세속 교육에 올 인하다 보면 도착한 곳은 약속의 땅이 아닐 수 있다. 왜냐면 그 땅은 산 자들의 땅이 아니라, 자녀를 삼키는 땅, 죽은 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주는 땅은 죽은 자의 땅이 아니라 산 자의 땅이다. 시편 142편 5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시편 142:5,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죽은 자들의 땅일 수도 있고, 산 자들이 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향락을 즐긴다면 그 땅은 죽은 자들의 땅이다.
 
* 디모데후서 5:5-6,
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다닌다 해도 죽은 자들의 땅에서 살수도 있다.
 
*요한계시록 3:1,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신뢰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땅을 선물로 주실 것이고 그때 그 땅은 비로소 산 자들의 땅이 된다.
 
시편 기자는 27장 13절에서 노래한다.
*시편 27:13,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온유한 자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게 되면 그 땅은 비록 이 썩어져 가는 세상 안에 있다 하더라도 산 자들의 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 하는 겸손한 자로서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종으로 인정이 되어 하나님께 기업으로 받은 것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산 자들의 땅이 되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이든, 땅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다 산 자들이 땅인 것이다. 겸손한 자로 인정받아 우리가 얻은 직장, 우리가 얻은 지위, 우리가 얻은 신분, 우리가 얻은 재물, 우리가 얻은 명예는 모두 하나님이 산 자들에게 주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땅이 비슷해 보여도 이렇게 주님이 겸손한 자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으면 그 땅은 산 자들의 땅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산 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 그 영원한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이것을 깨달았다. 이 땅은 성도들이 살게 될 일종의 하늘이며, 그래서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사는 곳은 낮은 영역이라고 본다면 그곳은 땅이다.
 
그러나 저 위에 하늘과 비교할 때, 그곳은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린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진짜 신학자가 아닌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은 일종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낮은 영영이니까 땅이긴 하지만, 저 위의 하늘과 비교할 때, 그곳은 이미 산 자들의 땅이고 주님이 오시는 영원한 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기업을 받을 것이라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미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다. 땅을 차지하니까...어떤 사람들은 불의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은 온갖 불법을 동원하고 온갖 방법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땅은 산 자들이 땅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시기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고, 끝내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악이 아닌가?
 
제가 아는 친구가 20만원을 암호 화폐에 투자를 했다고 한다. 갑자기 알람이 울리더니 두 배로 뛰었다는 것이다. 팔까 하다가 내일 아침에 팔자. 라고 생각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이다. 불과 여덟 시간 사이에, 20만원을 투자 했으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몇 천 만원 몇 억씩 집어넣고 나면 악이다. 그게 무언가? 자기를 해치는 해가 아닌가? 얼마 벌겠다고,, 많이 벌어서 뭐할 것인가? 그거 가지고 선택하겠는가? 하나님은 안 바라신다. 그런 것은,,, 산 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온유한 자의 땅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그 비전으로 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 그 땅을 기업으로 삼아 산 자들이 땅에서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복된 교우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요약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함과 신뢰함과 온유함으로 무장되고 땅의 기업을 받는 축복과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깊이 새겨서 죽은 자들의 땅 가운데서 산 자들의 땅으로 주시는 기업을 고대하고 기대하는 또한 우리에게 지금 주셨다고 한다면 그 산 자들의 땅 안에서 이 아름다운 안아주심의 본당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맛보는 복된 남은 생애가 되어야 한다.
 
-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영적 복은 풍요한 화평이다. 이는 아무리 물질적 부요함을 누릴지라도 악인으로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하늘의 놀라운 복이다. 또한 이러한 화평은 현세적인 복을 넘어 천국에서 누릴 영광과 기쁨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인의 일시적인 번영보다 영원한 영적 복을 사모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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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7월 9일)-(여름특별토비새-I)
제목: "예수님을 위한 아름다운 행함"(Doing Something Beautiful for Jesus)
말씀: 요한복음 14:8~14
대표기도: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ㆍ김원준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폴 칠더스 목사님(하와이 열방대학 총장 )
통역 : 이성현 교수님(미국 주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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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8~14,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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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다. 정말 제가 이아침에 여러분과 다시 함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다시 한 번 우리 오 목사님께 새벽에 이렇게 오게 하심과 여러분과 함께 하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다시 한 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게는 큰 기쁨이자 큰 영광이다. 제가 하와이에서의 인사를 드리기를 원한다. 하와이에서는 ‘알로하’ 라고 인사를 한다. 그래서 제가 알ㆍ로ㆍ하ㆍ라고 인사를 하면 여러분 모두가 똑 같이 인사해 주면 된다. 따라하라. 아침에 그렇게 하실 수 있나요? 알로하! 우리 모두 이렇게 하와이에 와 있는 거 같다. 정말 그 단어가 능력 있는 단어인데 '알로'라는 뜻은 '임재 안에 있다.'는 그런 뜻이 있고 '하'는 '생명의 숨결'이란 뜻이다. 정말 하나님의 숨결이며 이 말은 다양한 뜻이 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또한 사랑을 표현할 때도 쓴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사랑으로 이렇게 인사한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서 여러 번 제가 이곳을 방문했지만 그런데 지금까지는 혼자만 왔었다. 정말 기쁜 것은 정말 저희 가족이 하와이로부터 함께 오늘 왔다. 제 아내 '수지' 제 아내 수지는 사진작가 선교사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들을 다니시는 그런 사진작가 선교사인데 그래서 사진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알로하’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 사진을 통해서 기도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 수지 사모님의 역할이다. 그리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행함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주 아름다운 두 명의 하와이 소년을 데리고 왔다. 오늘 하와이의 축복을 여러분에게 전달하기 원한다. 그래서 훌라 댄스 –웨이크 업(Wake up), ‘깨어나라’의 제목이다. 뒤에 이제 사진이 나올 텐데 제 아들 리바이‘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그래서 사랑의 교회에 ‘하와이’를 가져오겠다. 훌라춤,,,, 너무 잘했다. 아이들아.
 
여러분이 이아침 보신 것이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깨어나라.’ ‘알로아로 깨어나라.’ ‘하나님의 삶의 임재 가운데 깨어날지어다.’ 오늘 전할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나눌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깨우시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 예수님께서 나누시는 것인데 13장 후반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주 중요한 새로운 전환점 가운데 준비시키신다. 그 중요한 전환점은 이제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신다는 것이다. 3년간 제자들과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정말 예수님이 정말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직접 보았다. 사람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반응하는지도 보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곧 하나님 아버지께도 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제자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내려질 때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사역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정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깨우시는 모습이 아주 흥미롭다. 그리고 충격저인 방법을 사용하신다. 요한복음 13장에 테이블에 제자들이 둘러앉는다. 정말 그 테이블에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사역을 하시는데 저녁을 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신다. 그래서 정말 그 유대인 예전에 있던 시절에는 그 식탁에 약간 비스듬히 앉아 있다. 왼손을 이렇게 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발은 뒤쪽으로 비스듬하게 눕는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중간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신다. 그런데 제자들이 약간의 긴장을 했다. ‘랍비, 선생님이 일어나셨네, 그래서 우리도 같이 일어나야 되는 것은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다. 예수님이 그러셨을 것이다.. “너희는 일어설 필요 없어, 앉아 있어라.”
 
그다음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겉옷을 벗으신다. 좀 불편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여러분도 불편하지 않겠는가? 정말 선생님, 랍비가 겉옷을 벗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가지고 오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신다. 정말 충격적이고 너무 불편했을 것 같다. 여러분이 그 사람이라면 어떠실 것인가? 여러분한테 그 상황이 발생한다면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정말 불편한 일인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어주신다. 그래서 드디어 제자 베드로까지 오셨다. 베드로는 아주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소리친다. “예수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네가 내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언제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다시 뭐라고 하는가? “주님 안 됩니다.” “주님 안 됩니다.”를 하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주님한테는 순종을 해야 하는데, 주님 안 됩니다. 라고 말을 한다. “주님 절대로 제 발을 씻길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발을 씻지 않으면 내가 너와 상관이 없다.”라고, “주님 그러면 제 손과 머리와 다리 다 씻어주세요.”라고 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좀 침착하라. 괜찮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실 말씀을 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주목을 받고 계시는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서 깊이 나누고 계신다. 정말 예수님의 그 사역과 예수님의 미니스트리에 대한 실재를 설명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떠난 후에도 제자들이 그 사역을 지속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정말 제자들이 예수님이 떠난 후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신 것 중에 한 가지 나누고 싶은 것은 10절 말씀이다.

*요한복음 14:10,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너희한테 한 것을 너희도 똑 같이 해야 한다” “너는 내가 한 것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정말 우리를 부르심이고 우리가 해야 할 큰 사명이다. 정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보다 더 큰일을 할 거라고 말씀하신다. 정말 그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거하시는 그 능력을 보여 주셨고, 그 능력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정말 그 사역을 감당하셨다. 똑 같은 방식으로 성령님께서 그 예수님의 임재를 제자들의 삶으로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정말 제자들도 예수님과 똑 같은 그런 사역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실재로 제자들이 들어가게 인도하신다. 하나님을 위해서 제자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텔레사 수녀의 그 예가 저에게 최근에 감동을 준 것이 있다. 수녀가 종종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아름다운 일을 하고 싶지 않은가? 지난 세기의 사랑의 사도 같은 역할을 했다. 전쟁과 분쟁이 있는 지역의 사랑의 사도의 역할을 하신 분이다. 그래서 이것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가 전류의 비유로 말씀을 한 것이 있다. 전선들, 얇은 전선, 두꺼운 전선을 볼 수 있다. 싼 것도 있고 비싼 것도 있을 텐데, 그런데 전류가 전선에 흐르기 전까지는 빛이 통과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한다. 전선이 여러분과 제가 전선과 같은 존재이다. 전류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류가 흐를 수 있는 그런 전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용하시옵소서 우리를!“ “우리를 정말 하나님의 빛을 우리를 통해서 통과하시고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아멘으로 화답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시다. 그리고 우리도 세상의 빛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래서 그녀의 삶으로 우리가 따라가야 될 본을 보여 주셨는데,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다. 정말 제가 흥분되고 있다. 테레사 수녀였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살도록 부르셨다. 그래서 정말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난하나 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주 비싸고 그런 것을 가져갈 필요도 없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할 때 아름다운 것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정말 살았다.
 
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을 어떻게 돌봤는지에 대한 그런 예가 있다. 그래서 ‘카르마’라고 하는 힌두교의 종교 때문에 그 천민계층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아프다면, 너의 과거의 죄 때문에 너는 고통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캘커타에서, 길거리에서 병으로 고통 받다가 죽도록 그렇게 내버려 둔다. 그래서 정말 쥐가 와서 사람들을 파먹기도 하고 구더기도 덮여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하루는 캘커타에서 어떤 남성을 맞았다. 정말 구더기로 덮인 몸이었다. 그래서 그를 우리 집으로 들였다. 그 남자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욕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길거리에서 짐승처럼 살았다. 그런데 이제 천사처럼 죽을 수 있다. 사랑 받았고 돌봄을 받았다.”라고 했다.
 
그 사람을 씻기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 드디어 다 씻긴 다음에 저를 그 남자가 쳐다보면서 말했다. “수녀님, 저는 이제 하나님 곁으로 갑니다.”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저는 인간 중에서 그렇게 빛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집으로 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여러분, 보시고 계시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역의 길로 가도록 준비시킨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정말 그렇게 급진적인 사랑에 한 예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정말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을 먼저 사랑하라고... 때때로 정말 멀리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정말 집에 같이 살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이다. 그래서 저 멀리 있는 길거리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데,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을 다툴 때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말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런데 그 사랑은 가족에서부터 시작된다. 정말, 우리가 자녀를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우리 서로를 위해서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 부족함이 많은 고통을 초래한다. 정말 우리가 급진적으로 사랑하자. 우리가 서로 서로 섬기자.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자. 그래서 정말 우리가 가족에게 예수님 같은 그런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말하는 것 보다는 행하는 것이 더 어렵다. 제 아내와 저도 하루는 다툼이 있었다.
 
제가 집에 있는 컴퓨터를 가지고 제가 모든 비번을 바꾸어버렸다. 아내의 패스워드는 ‘나를 폴을 사랑해.’이며 나는 ‘수지를 사랑해’ 였다. 제 아이들의 비번도 바꾸었다. 제가 제 아내와 제가 다투었을 때, “나 지금 지하로 가서 일을 좀 할 거야.” 라고 했다. 그런데 컴퓨터 로긴을 하기 위해서는 ‘나는 폴을 사랑해’라고 비번을 사용해야 한다. ‘비번을 바꾸어야지’,
 
정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가? 성 프란체스카의 기도는 능력이 있다. 위로를 받기보다 위로를 하라는 것이며, 우리가 줄 때, 받는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용서할 때, 용서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 영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정말 놀라운 생각이다. 여러분 사랑을 경험하고 싶다면 사랑을 먼저 주라. 그런 긍휼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먼저 긍휼함을 베풀라. 우리가 그렇게 줄 때, 우리가 받게 될 것이다. 너무나 많은 문제로 인해서 우리는 가득 채워져 있다. 우리가 정말 고민들이 있다. 정말 스트레스도 있다. 이아침에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자. 저는 그 예수님의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이 깨어진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을 펼치고 나가자. 그것은 우리 가족에서부터 시작이다. 정말 행함으로 우리의 사랑을 보여줄 때, 그 사랑은 놀라운 역사를 할 것이다. 이제 사랑은 그냥 감정이 아니라, 여러분이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의 사랑을 담아라. 그렇게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자녀들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유이다.
 
북 나이지리아에서 했던 프로젝트가 기억이 난다. 그 북 나이지리아에서는 많은 그리스도 형제 재매들이 핍박을 받고 있다. 교회는 붍 태워서 없어지기도 해서 그래서 그곳에 제 아내와 제가 교회를 재건하자고 했다. 헌금을 받아서 그 헌금으로 나이지리아로 다시 보내서 교회를 지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행동이 그 교회를 불 태워버린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게 했다. 그 사람들이 사랑의 행함을 본 것이다. 그 사람 중에서 ‘나도 예수님을 이제 따르기를 원한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사랑 때문이다. 우리도 이 새벽에 여러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아름다운 일을 하겠는가?
정말 예수님이 육신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 육신에 대해서 하나님의 실재를 성경에 살아내셨다.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여러분에게 어떻게 도전을 주시는가? 정말 저에게 도전을 주셨던 것은 오래전이기도 하다. 그 신약 전체를 마음으로 암송을 하는 것이다. 목사님에게는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시간이 많으면 그냥 성경을 압축해 버리면 된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저에게 도전하게 해 주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순종하기로 하고 그렇게 따랐다. 그래서 하나님께 “주님 이것을 주님께 선물로 드립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아름다운 일을 하기 원합니다.” 제가 이렇게 할 때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제 삶을 하나님께 선물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모두 드립니다.” 이아침에 여러분도 저와 함께 하지 않으시나요? 주님, 함께 하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아름다운 일을 하는데 동참하겠습니다. 정말 그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같이 걷기를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여러분, 일어나 보라! 함께 기도하겠다. 제가 통역으로 기도한 것을 따라서 하시기 바란다.
“사랑하는 주 예수님, 주님의 임재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께 네, 라고 순종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의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사는 이 세상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이 손과 발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사용하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시옵소서. 세상의 빛이 되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합니다.”
 
오 목사님과 사랑의 교회 성도님을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여기에 있는 한 사람 한사람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우리가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원한다. 주님을 정말 섬기는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이 교회와 이 한국을 사용하여 주시길 기도한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길 기도한다. 여기 있는 한 사람 한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심에 오 목사님과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들 드린다.
 
제 가족을 함께 왔는데 책도 소개를 하기 원한다. 지금 이 책은 제 아내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도록 여러분에게 도전을 줄 것이다. 이 책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림을 넣은 책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게 알 수 있는 책이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정말 감사하다.
 
♣요약.
우리 교회가 이번 토비새에 강력한 말씀을 통하여 영감의 갑절을 구할 때, 삶의 현장마다 생명의 진동이 일어나 가정과 일터에 온전히 세워져야 한다. 우리 교회에 명하신 한국교회의 섬김을 통해 모든 영 가족이 단장지애 섬김으로 힘들고 지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진심으로 섬기게 하시며 방문하는 교회마다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는 소망의 빛을 목도하길 소원한다.  바로 이곳에서 훌라춤을 하나님을 경험했듯이 특별한 시간이다. 앞으로 주실 기대를 여름 사역을 위해 모든 부서에 축복하시길 기도해야 한다.  9.26일 한국교회의 섬김을 준비하는데 부족함이 없이 사랑으로 섬기며 가장 아름다운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방학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원한다.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과 중직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많은 섬기는 사역에도 충만한 은혜가 있도록 기도하고 섬기자.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만이 우리 영혼은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모습은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가 당신을 보는 것같이 우리의 육안으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족하겠나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그의 믿음의 연약성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보여 주는 복음의 방법에 대한 그의 무지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제도와 방편을 주신다. 주님은 빌립에게 그가 본 것에 관해 말씀하신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주님은 빌립에게 두 가지 책망을 하고 계신다. 빌립이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도 그에 대한 분명하고도 뚜렷한 지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빌립아,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빌립은 처음 주님을 만나던 날 그가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이분이 바로 메시아라고 고백하였지만, 이때까지 주님 안에 계신 아버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으나 그분에 대하여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보아야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그리스도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머물수록 점점 성장하기를 바라시지, 우리가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부르짖는 빌립의 나약한 기도를 책망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나약함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서투른 요청을 청하는 것이다. 빌립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 육신으로 그리스도를 본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하나님을 본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들 본 모든 사람도 그들이 하나님을 본 것을 즉시 알아차리지는 못하지만, 결국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본 것이다. 흠 없고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보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다.
 
주님은 빌립에게 그가 믿을 만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므로. 나를 보는 네가 아버지를 본 것임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우리는 주께서 하신 말씀으로 인해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네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10절). 그는 자의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인도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행하신 일로 인해 믿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절). "그러므로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믿어라."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거하신다. 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므로 그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여호와를 찾되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라. 그러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일하신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많은 권능의 사역과 은혜로운 사역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들이다. 우리는 바로 그 사역 때문에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기적들은 그의 신적 사명에 대한 증거로서, 믿지 않는 자들을 뉘우치게 할 뿐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주님과의 이별의 슬픔과 주님이 떠나가시면 그들을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하는 염려로 가득 찼다. 주님이 그들을 떠나가시면 제자들은 목자 잃은 양같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어려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옷을 입게 될 것이라고 확신 시켜 주시고 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 말씀은 그분의 능력을 다른 어떤 말씀보다는 더욱 확고하게 나타내신 말씀이며, 그리스도 자신만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기적의 능력을 다른 모든 이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그런 일을 고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지 않으셨는가? 그들도 그렇게 행할 것이다.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로하시고 회개시키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시지 않았던가? 제자들도 그렇게 행할 것이다. 주님은 비록 떠나시지만 주님의 사업은 시들지 않고 패배하지도 않을 것이며 지속될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위대한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물론 조금한 기적이란 없다. 단지 우리가 보기에 어떤 기적은 다른 기적보다 더 위대하게 보일 뿐이다. 그리스도 는 한 나라에서 2,3년 동안만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의 제자들은 여러 나라를 다니며 여러 시대에 걸쳐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베풀었다. 은혜의 시대에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 거두신 승리보다 복음으로 더 큰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세계의 거대한 부분을 그리스도께서 소유할 수 있게 했다는 이 사실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것들을 주시는 이유: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2절). "내가 떠나기 때문에 너희들에게 그러한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떠나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그러한 능력으로 채워 줄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13절).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떠나가신 후 그리스도와 교제를 계속하고 그로부터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기도뿐이다. 정든 친구들이 먼 곳으로 떠나가게 되는 경우에 그들은 서로 서신을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미리 마련해 두는 법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로 떠나가시려고 할 때, 제자들이 모든 일을 당할 때 어떻게 주님께 연락을 취할 것인지 또 그들의 편지가 안전하고 확실히 전달되는 방법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너희가 믿고 기도하면 너희는 성령을 통하여 응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기도할 때에는 겸손히 요구된다. 제자들은 간청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께 아무 것도 권리로 요구해서는 안 되며 겸손히 요청하고, 빌고 갈망하며 구하고 간구해야 되는 것이다.
 
기도할 때에 다음과 같은 자유가 허용된다. 즉 "무엇이든지 구하라.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너희가 알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질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들은 은혜와 보좌 앞에 상달되며 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 누구의 이름으로 청원할 것인가? 본문에 '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기록되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의 중재와 공로에 의지하여 탄원한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면,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상달되기란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사실 우리는 죄인이고 하늘나라에 좋지 못한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귀한 이름이요 하늘나라에서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기도를 통하여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그리고 14절에도 '내가 시행하리라'고 기록되었다. 즉 "내가 시행하리라는 것을 너희는 확신하라. 그것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내가 시행할 것이다." 그의 이름을 믿으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들의 기도가 그토록 잘 이루어지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3절). 주기도문에서 첫째 간구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이미 응답된 기도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쳐진 기도는 이미 다른 모든 간구들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는 그리스도가 승인하시는 기도이며, 이렇게 기도드릴 때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은 그리스도의 제자와 목회자들이 위대한 사역을 행할 때 구속자를 통하여 찬양된다. 즉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은 위대한 사역으로 그들의 가르침이 입증되는 가운데, 그리고 이 가르침이 성공적으로 실현되는 가운데 찬양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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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7월 6일)
제목: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말씀: 고린도후서 6:11-18
찬양인도: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강대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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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6:11-18,
11 고린도 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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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모태에서 나오면서부터 부모를 만나게 되고 가족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도 엄마를 만나지만 엄마도 처음 아이를 만남으로 아이를 만나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둘째를 낳게 되면 부모만이 아니라 언니 오빠를 같이 만나게 돼서 형제를 만나게 된다. 부모나 형제, 더 나아가 친지, 부모의 형제들, 그 외에 자녀들까지 우리는 좋든 싫든 관계라는 것을 맺고 살아가게 된다. 유년기를 보내면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기도 하고 유치원, 학교, 학원 등등, 다니면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취업을 하고 나서도 일터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를 우리는 더 키워가기도 하고 관계의 어려움이 생겨서 관계가 소원해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관계가 시작되기도 하고 또 어떤 관계는 끝나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관계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이렇게 관계적인 존재로 독특하고 특별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그러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도 이런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서로서로 간에 관계 속에서 이렇게 함께 서로 연합하여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즉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면서 성부성자성령이 영원한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계시는데 그런 것처럼 이 삼위일체 하나님만의 단일성과 차별성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투영되고 있다. 그래서 신학자 마이클 리브스는 그의 선하심의 하나님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성부성자성령 사이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관계적, 인격적인 개념이라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인격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사랑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도 흘러넘치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 -마이클 리브스-
 
라고 이야기 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관계를 맺도록 지어진 존재임과 동시에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도록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과 사람들 간에 관계에 대하여 아주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서로 함께 사랑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때론 미워하고 질투하고 증오하고 떠 싸우는 사람들, 또 어떤 것을 계획하면서 음로를 꾸미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서로 함께 웃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애도하고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튼 좋든 싫든 많은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을 주실 때 토라의 말씀을 주듯이, 율법 안에도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또 그의 백성 안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으라는 내용으로 가득 담겨있다.
 
신약에서 새 계명을 주신다. 그럴 때도 이 율법 본체를 관계라는 것으로 그 관점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22: 37-40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22: 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의 관계, 구약의 모든 계명은 관계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서는 관계를 빼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어떤 자리가 형성이 되어 지고 이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삶도 바뀌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좀 나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동일하게 타락하게 될 수 있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위로도 받고, 도움도 받고 때로는 우리를 강하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관계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누구를 만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제가 심방을 하다보면 많은 기도 제목 중의 하나가 만남의 복을 달라고 하는 기도를 많이 받게 된다. 일터에서도 좋은 만남을 허락해 달라고, 또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선생님 혹은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많은 기도를 부탁받게 된다.
 
이 만남이 믿을만해서 서로 위로가 되고 돕고 강하게 해주는 그런 만남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 속담에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이 있다. 친구와 같이 사랑의 교회에 와서 믿음 안에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처럼 관계 속에 살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성장하려면 다른 성도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관계를 더욱 더 개선시키고 강화시켜야 한다. 동시에 전혀 다른 세계관과 정반대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 그런 불신자를 대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는 조심스럽게 유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관계를 맺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이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전 된 본분을 지켜 나가면서 세상에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좋은 관계도 있고 나쁜 관계도 있는데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의 모든 관계를 우리 가운데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서 이야기 한다. 그들을 자신이 정말 아끼고 사랑하였다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향하여서 사랑하는 마음을 고린도교회에서 가득 담아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는 무언가 바울에게 있어서 좀 편하게 이야기 하지 않고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마음을 대하고 있다. 왜냐면 예수님과 3년간 공생애를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뭔가 사도성에 있어서 좀 부족할 것이다. 그가 사도가 맞을까?’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것은 맞는데 그보다는 그 안에서 사역을 하였던 아볼로, 혹은 베드로를 더 신뢰하였던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바울에 대해서 말로만 우리 고린도 교회에 다시 방문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방문하지 않아서 불만을 표했다. 그리고 계획했던 그 시간대로 오지 않아서 ‘혹여 라도 우리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닐까?’라고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유대교 이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왜냐면 그들은 율법주의를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구하고 율법주의를 계속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발은 구약에 한 발은 신약에 담고 있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들은 회당을 다니면서 동시에 그들은 회당을 기독교와 유대교를 이렇게 양다리를 같이 함께 걸치면서 그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니까 혼합주의가 그들에게는 섞여있었고 그들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울이 주장했던 그 본질적인 요소,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그들은 그 본질을 훼손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으로 인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에 대해서 어떤 실천적인 것에 대해서 그들은 훼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권면하면서 사역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정말 바른 관계 속에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사역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 또 그들 가운데 대면하여서 사랑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사역이다. 진정한 사역이라는 것은 바로 관계를 소중이 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서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정말 당신들을 사랑한다. 그 고린도 교인들, 한 사람 한사람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역한다는 것은 다시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락방에 가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한 돕고 격려하는 것, 이것이 다락방이다. 제자훈련도 마찬가지이다. 제자훈련을 그저 영상을 보고 내가 습득을 한다는 것은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훈련이라는 것은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것이 바로 훈련인 것이다.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사역은 관계인 것이다. 관계를 통하여서 사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바울은 관계, 관계가 곧 사역이라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11,
11 고린도 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바울은 숨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그들을 향하여서 마음이 넓어졌다. 효과적으로 당신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그들과 진실하게 관계를 맺고 싶다. 그래서 진심을 다해서 진솔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 넓어졌다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이 넓어졌다는 것은 그들에게 사랑을 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되게 그 속 깊은 곳으로부터 행동으로 진심으로 애정 어린 표현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고린도인 들이여, 라고 시작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찾아보니 세 번 나타난다. 갈라디아서에 그 갈라디아 교인들이 탈선하고 있는 모습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면서 꾸짖으면서 ‘이 어리석은 갈라디안인 들이여,’ 라고 표현하고 있고 또 한 번은 빌립보에 나타나고 있는데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까지 바울을 성실히 지원해 주었다는 것에 대하여서 너무 기쁘게 생각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서 빌립보교인들이여, 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린도인 들이여, 진실 된 마음으로 그들을 향하여 부르면서 내가 당신들을 아낌없이 사랑했다고 화답해 주면 좋겠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인 들이 그 사랑을 잘 받아서 화답하고 있는가? 문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바울이 진심을 다하여서 사랑하고 있었지만 고린도인 들은 애정표현에 있어서 아주 인색했다. 심지어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고린도후서 6:12,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이 심정이라는 것은 간, 심장, 폐부, 우리 안에 있는 장기 기관들을 표현하고 있는데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장기들을 표현할 때, 장기들이 막 울렁거린다고 생각해서 인간의 감정은 장기로부터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정’이라고 표현한다. 정말 고린도인 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바울을 어떠하였냐면 바로 그 심정이 좁아졌다고 생각한다. 마치 고린도 교인들이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흥’, 하면서 그 사랑에 대해서 인색하게 표현하고 있다. 간 쓸개 다 내어 빼주면서 정‘말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사랑에 대해서 정말 마음을 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 말씀처럼 자녀에게 말씀하는 것처럼 자상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하여서 이렇게 표현한다.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내가 마음을 더 넓히라고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서 마음을 넓히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동일하게 마음을 넓혀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여러분 자녀들을 향하여서 너무나 이뻐서 안아주고 뽀뽀도 있는데 이 아이가 뻣대고 도망하고 힘주어 피하고 있는 아이를 혹시 안아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에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아이하고 대화하고 싶은데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는 아이, 이때 사춘기 자녀들을 대하여 본 적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아무리 내 마음을 다 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동일하게 아마 대할 것이다. 그런 자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관계라는 것은 서로가 거리낌 없이 마음을 내어주고 그 감정을 진정성으로 대화가 오갈 때, 서로간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과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적 아비와 같은 이 에 대해서 쌀쌀맞게 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고린도교인들은 믿지 아니하는 그런 자들과는 사적으로, 혹은 직업 적으로, 여러 가지로 아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참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지 아니하던 그러한 바울에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오히려 해가 되는 자들과는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서 진심이었던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서 솔직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뭐라고 지적하는가? 그 말씀이 14절에 나와 있다.
 
*고린도후서 6:14,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멍에는 소나 말이 어떤 것을 밭을 갈기 위해서 지고 있는 어떤 나무인데 이것을 한 마리에 한 마리에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지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이 둘은 같이 함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신명기 22장 10절에도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 하여 갈지 말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둘이 같이 지고 가게 되면 소와 나귀가 보폭이 다르고 힘이 다르기 때문에 가고 싶은 그 길로 밭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신명기 22:10,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이 둘이 같이 가게 되면 소와 나귀가 보폭이 다르고 또 힘이 다르기 때문에 가고 싶은 그 길로 갈 수 없다는 라는 것이다. 한 멍에를 메면 똑바로 쟁기를 끌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을 이 신명기의 말씀처럼 비유적인 표현을 가지고 어떻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관계할 수 있느냐는 것이며 함께 관계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가 같이 결혼을 한다거나 혹은 사업을 한다거나 공식적이고 지속적인 계약 관계를 맺어 나간다면 이렇게 한 방향을 바라보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면 이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 안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세계관이 다르고 목표관이 다르기에 가치가 다르고 방법이 다르다. 그들 간의 규칙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 가기가 힘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데 이 말씀을 좀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세속적인 어떤 학교에 가지 아니하고,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그런 대안 학교에 가면 된다. 혹은 기독교 중심으로 운영하는 사업체, 그곳을 운영해야 하고 그것을 운영할 때도 믿는 자들만 함께 그들을 고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혹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음식점에 들어간다거나 혹은 그리스도인 친구들과만 교류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실수인 것이다. 우리가 늘 믿는 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5:1-10,
9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무슨 말인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도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사랑의 교회 공동체 고백에서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셩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세상으로 보냄 받은 제자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그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보냄 받은 소명자로서 여전히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사귀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멍에를 멘다는 것은 의미가 좀 다르다. 같이 함께 동행 관계로서 지속적으로 함께 그 길을 나아가는 그러한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동행자, 동반자, 혹은 깜부,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동행관계, 동행관계에 있어서는 함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된다.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참 어렵다. 오늘 말씀
 
*고린도후서 6:14-16,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과 정 반대되는 그들은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그들과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지를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비교하는 것이 의와 불법에 대해서 빛과 어둠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벨리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정과 우상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함께 하고 싶어도 함께 할 수 없다. 함께 하고 싶어도 일치할 수 없다. 양립할 수 없다. 우리의 관계는 친밀하고 상호의존적이며 마음을 공유하고 한결 같은 그런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들과 그렇게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동행 관계로서 멍에를 같이 메는 관계로는 같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들 불신자와 관계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 기준들을 양보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일관 모습이 때로는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가나안 길을 가고 있었던 그 광야 길을 걸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을 진멸하라고, 왜 그런가? 그들과 함께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많은 가치관이 그들에게 잠입하여 들어올 것이다. 솔로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혜를 구했던 그 솔로몬이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고 나서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여러분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목사님, 이미 불신자와 결혼을 했는데 어떡해야 합니까” 묵사님, 믿는 자인 줄 알고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불신자였어요. 안 믿었더라구요.” 아니면 아예 성장할 마음이 없습니다.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인 것 같다. “목사님 어떡해야 됩니까? 목사님, 저는요 이렇게 믿는자 믿지 아니하는 자가 멍에를 같이 메고 동행하면 안 된 다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어떡해야 하지요? 이혼해야 합니까?” 이 멍에를 풀어야 되는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런 관계로 시작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지 이미 맺고 있는 관계를 끊어야 하는 거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가 같이 살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관계를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유지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쉬운 소명은 아니다.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를 메고 가면 결국 한 쪽이 서로 끌고 나가다 보니 서로 힘든 것이다. 여러분 2인 3각을 해보았는가? 발이 안 맞면 한 사람만 발이 아픈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다 아프다. 둘 다 고생하는 것이다.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
 
“목사님,
불신자와 계약을 했는데요. 이 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그것도 아니다. 갈라디아서 3:15절을 보면,
 
*갈라디아서 3:15,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즉 사람과 한 약속을 함부로 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합법적으로 좀 문제가 있다. 라고 할 때는 그 계약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여러분 작은 약속이라 할지라도 쉽게 사소하게 외면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멍에를 메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 왜 안 되는가? 무엇이 근본적으로 문제인가?
 
*고린도후서 6:16-18,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친 백성,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함께 멍에를 멜 수 없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어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과 있을 수 없다. 라고 이야기 한다. 16-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이렇게 언약 관계를 맺어 주신 것이다. 아주 친밀한 관계로 있기 때문에 거룩하신 그 하나님의 속성을 부여받았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속하지 말아야 된다. 라고 분면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과 맺은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고 융화된 관계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믿지 아니한 자들로서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마이클 리브스의 말씀처럼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흘러넘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 쉐키나의 영광이 우리로부터 흘러넘쳐 나타나야 된다. 라고,, 우리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경험해야 할 그 성도 안에 조화와 순결함, 성도 안에 친밀한, 그 어떤 것을 훼손하는 일이 단 하나도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이 몸 된 성전을 지켜 나가기 위해 우리가 유지해야 할 것이 있다. 두 가지이다.
 
I. 정서적인 유대감으로 진실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다른 영 가족들과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잘 쌓아나갔으면 좋겠다. 이번에 다락방 다시금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사이좋은 다락방을 하는 사이다. 라고 하는데 바로 우리 간의 관계가 이러한 사이였음 좋겠다. 서로 진심으로 꾸밈없이 자신을 내 보내야 된다. 허심탄회하고 정직하고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연약한 사람이 있다면 이 연약한 사람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이 연약함을 서로 보완해 주는 관계가 되어 한다. 정말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이러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문제인 것이다. 여러분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가정예배를 통해서 회복하길 바란다.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서도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누고 이러한 관계가 회복 될 줄 믿는다.

 
II. 영적인 동행 관계를 맺어나가야 한다.

-영적으로 대등하지 않는 관계에 있어서는 좀 관계를 어느 정도 선을 그어야 한다. 영적으로 결국에는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과 잘 동행 관계가 엮이지 않도록 우리는 잘 선을 그어야 된다. 이것이 결혼이든, 사업이든, 어떤 다른 것이든, 어떤 다른 관계 속에서든, 서로 영적으로 다르다가 혹은 가치관이나 그 방향성이 다르다고 생각된다면 영구적인 관계로 이어나가는 데 있어서 언젠가는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우정이든 이성이든 어떤 관계속에서든 불신자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유지되는 그런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에 있어서는 늘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가? 늘 우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친밀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이 지어주셨다. 그 관계가 아주 건강하고 건전하고 또 순수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도와가는 그렇게 균형 있는 관계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어 주시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잘 지켜나가길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쪽으로 치우쳐진 관계, 그런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여러분 왜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말씀에서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타협하고 있는가? 잘 한 번 들여다보면 좋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잘 밝힐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이 약화되지 않도록 이 건강함을 유지하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잘 세워나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요약
우리의 관계적 존재로 설계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건강하고 진실 된 영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가 하며 끊지 못하는 세속적 관계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전으로 거룩한 정체성을 지켜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자리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의 관계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우리 삶에 실천이 되어서 건강한 관계, 진실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세속적인 그 유혹가운데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타협하지 말고 우리의 거룩한 정체성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를 통하여서 예수님의 향기가 곳곳마다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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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 3일)

제목: “왕의 잔치에 환영합니다.”
말씀: 마태복음 22:1-14
대표기도: 윤현수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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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 이어 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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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이 예배를 통하여 사랑의 교회, 교회가 팬더믹 이후에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갈 뿐만이 아니라, 한 분 한 분 여러분 개인도 부흥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교회 부흥과 개인 부흥이 같이 가기를 소망한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상당히 무게감이 있는 특별한 비유라고 말씀할
수 있다.
 
*마태복음 22:2,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천국은 마치 바로 이것이다.’ 라고 바로 정의해 주지 아니하고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깨달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나라와 마치 is like,,,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어떤 임금과 같다. 라고 한다. 그러니까 왕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이다. 고대 근동 그 당시에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이라든지 페르시아, 바벨론은 그 당시에 최고의 잔치는 왕의 잔치였다. 그리고 그냥 보통 잔치가 아니라 왕의 잔치였다. 특징 중에 하나는 잔치 집에 4절에 보면
 
*마태복음 22:4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 입장하고, 그 당시의 왕의 잔치와는 좀 다르다. 어느 정도가 되었는가 하면, 잔치에 음식은 당연한 것이고 예복을 입혔는데 잔치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예복을 준다. 미국 같은 경우는 지금도 들러리를 많이 서는 것처럼 들러리들의 옷을 주로 혼주 측에서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복을 준비하는 데 예수님 당시 로마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로마의 큰 귀족들은 잔치 집을 위하여 예복을 오천 벌을 준비했다고 한다. 별로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오천 벌을 준비했다. 완벽하게, 대단하게 준비를 한 것이다. 오늘 이런 말씀과 비슷한 맥락으로 되어 있던 누가복음 14장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누가복음 14:17,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 이것은 구원 역사를 살펴보면 혼인잔치집의 비유가 이 정도가 아니고 잔치 집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요한계시록 19:9,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크게 보면 이 자리가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시고 우리를 붙잡으신 자리인 줄 믿는다. 그게 얼마ㄴ나 귀한 것인지, 복음의 신비가 담긴 이 혼인 집의 특징 중에 하나는 100퍼센트 주인을 위하여, 동시에 100퍼센트 초대받는 사람을 위해 이게 하나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독특한 신비한 것이다. 아주 비밀이다. 마치 혼인잔치 집에 100% 신성을 가지시고, 100% 인성을 가지신 것처럼 세상의 어느 잔치도 100% 초대 받은 사람을 위한 잔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100% 왕 되신 하나님을 위함뿐만이 아니라 그리고 100% 초대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열린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이 문제가 잘 해결되면 오늘 초대 받은 사람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독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생각해보면, 1-7절까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ㅣ. 초대를 거절한 사람

*마태복음 22:3,
3 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완벽하게 초대를 하고 보니까 오기를 싫어했다. 초대를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왕의 초대장을 들고 갔던 왕의 하인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지금이야 결혼식 초대를 하면 어떠한가? 우리가 e 메일이나 문자나, 요즘은 다 그렇게 한다. 당시는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이 왕의 혼인잔치를 만들어 놓고 하인들이 전부가 다 일일이 초대장을 다 전달하고 구두로 전달하는 일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하인들이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다 거절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인들을 보냈다.
 
*마태복음 22:5,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초대해줘도 감사하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으로 자기 사업으로 갔다. 그리고 이제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혼인 잔치를 말할 수 있고 또 일차로 보낸 받은 사람은 구약의 선지자로 이야기 한다. 2차로 보냄 받은 사람들은 신약에 복음 전하는 자로 말할 수 있는 특별한 해석이다. 그래서 초대를 했는데 자기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거절을 했지만 심지어 6절을 보면,
 
*마태복음 22:6,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아주 무리하기 짝이 없은 악당 같은 그런 역할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왕이 7절에 너무나 화가 난 것이다.
 
*마태복음 22:7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저는 이 비유를 보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초대한 것을 거절했다고 이렇게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 동네를 다 불 사른다는 것이 너무 과격 하는 것이 아닌가를 어릴 적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분 단순한 잔치가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 나라 혼인잔치이고 복음의 잔치이다. 그리고 복음을 거부하면 영원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잔치에 밥 먹으로 오라고 이정도가 아니고 왕이 노하였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가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진노한 왕이 초청 대상자를 복음의 신비가 담겨 있어가지고 그래서 초청을 만들어 놓고 오라고 하는데 안 오니까 이제 플랜a와 플랜b가 발표된 것이다.
 
*마태복음 22:8,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성경 전체 구원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우선 선택을 해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하니까, 그 왕의 아들을 이렇게 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졌냐면, 복음 전도자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의 소식을 이 잔치의 초대가 간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플랜a가 플랜b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초청을 거절하게 되면 이것이 오히려 평소에 초대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기회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부하니까 이방 사람들에게 이 초대장의 기회가 넘어 간 것이다. 마치 구약의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하는 것에 불구하고 계속 거절하고 계속 팅기고 그러니까 민주기에 이렇게 말한다.
 
*민수기 14:30,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광야 길을 통과해서 가나안에 다 들어가야 되는데 사람들이 그 초대를 거부하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외에는 못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플랜b를 보냈다.
 
*마태복음 22:9,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마태복음 22:10,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 한 마디로 플랜a로 볼 때는 무자격자들인데? 누구나 아무나 되는가? 하는 사람들을 다 모아서 드디어 잔치 집이 가득 찬 것이다. 오늘 날 차별 없이 허락하시는 주님의 복음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런 내용들이다. 그런데 멋진 잔치가 시작되었는데 오늘 중요한 주제가 하나 있다. 왕이 드디어 잔치를 들어왔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 한 사람이 자신만의 자기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12절을 보면,
 
*마태복음 22:10,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예복을 안 입었다고 자기 옷을 입었다고 어떻게 손발을 묶어 바깥에 내어 던지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다 말씀의 깊이에 들어가겠다. 그리고 평소에 신앙관이 잘못되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신앙관을 눈을 교정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새 판짜기를 하는 것이다. 무얼 이야기 하는 것인가? 첫째는 초청을 거절한 사람, 이야기를 했다. 두 번 째로 중요한 것은 예복을 입되 올바른 예복을 입어야 한다.
 

II. 준비된 예복을 입어야.
 
-자기 옷을 입으면 안 된다. 우리가 잔치의 초대장을 받았는데 초대에 응했으나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보았다. 그런데 오늘 키는 자기 옷이 아니라 올바른 준비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멋진 옷이라도 자기 맘대로 입으면 안 된다. 논산 훈련소에 훈련하러 들어갔는데 들어가면 우리가 군복을 입어야 되는 것이다. 훈련복을 입어야 되는 것이다. 세상에 입던 세계 전체 명품 옷을 입어도 떠날 때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왜 자기의 옷을 입고 참여했는가?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왕이 예복을 준비해 주었지만 이 사람은 “그냥 내 옷을 입겠습니다. 내 옷이 더 좋습니다. 저는 제 옷이 좋습니다.” 한다. 그리고 왜 입지 않았냐고 하면 그 마음이 이런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저는 제 옷에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의의도 자신이 있고 제 능력과 제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저는 정당합니다. 한 번 보세요. 내 선을 보고 내 인격이나 삶을 보세요.“라고 팅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무리 멋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일 하시는 의의 예복을 입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플랜a가 끝나고 플랜b가 들어온 것에 충분하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예복을 입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진 새로운 의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저 우주에 갈 때, 우주복을 안 입으면 우주에 가기도 전에 다 죽는다. 아무리 지상에 최고의 명품의 옷이라도 우주에 가면 우주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왕이 준비한 예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믿고 찬양하고 고백하는 자가 입는 옷인 줄로 확신한다. 예수님이 입혀주시는 옷이다. 자기 의로움으로 잘 못 입는다. 아마 본문에서 자기 옷을 입는 사람은 세상 적으로 대단할 수 있지만 이 사람은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아마 이 사람은 존경 받고 있는 사람이다. ”제가 만들어 입고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교만하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의는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이사야 64:6,
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자기의의 멋진 옷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예비하신 올바른 의의 옷, 어린양에게 씻겨 진 예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
 
*마태복음 22:13,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잘못된 옷을 입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고 예수님이 주시 의의 옷을 입은 사람은 영원한 잔치에 들어가게 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의 의로움과 나의 힘, 나의 정당함으로 서는 것이 아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조하시고 직접 직조하시고 만드시고 수놓으신 예복을 입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건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다. 믿음으로 이 잔치 초청을 하고 이 옷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보면 오늘 이 혼인 예복은 우리에게 전가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의가 전가되었다는 것, 트랜스퍼 되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그 의의 옷이 우리에게 전가된 은혜를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에게 더러워진 예복이 있으면
*요한계시록 7:14,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저는 이렇게 한복을 입었다. 이거는 서너 번 입고 나면 더러워질 것이다. 특별히 한국 동정은 쉽게 더러워진다. 그런데 깨끗이 씻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입은 옷이 더러워진 것들이라도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의 우리가 목욕하게 되면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줄로 확신한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더러워진 누더기 옷과 같은 오염된 옷을 입고 있다면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다시 한 번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벗어서 샘물과 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깨끗하게 씻김 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예복을 입고 새로워진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제가 최근에 한국교회 중견 남자 탤런트가 계시는데 자신의 어머님이 타종교를 믿다가 아주 예수님을 잘 믿게 되었다. 그래서 이 분이 새벽기도도 나가시고 열심히 믿었다. 아들 탤런트에게 “자네 말이야, 나 요즘 예수 믿고 큰 은혜를 받았다.” 라고 하셔서 무슨 은혜를 받으셨냐고 했더니 “나 이제 교회에서 집사 되었다.” 집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천국에 집을 사 놓는 것이란다.” 라고 이야기 하셨다고 한다. 얼마나 순전한가!! 사랑의교회 집사님들 천국에 집을 사놓기를 바란다. 아직까지 사랑의교회 집사님 안 되신 분들은 집사님 되시길 바란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소망한다.
 
그런데 왜 초대를 거부하고 잔치에 와서도 왜 예복을 입지 않는가? 결국은 예복을 안 입고 거절한 이유는 왕권을 인정하기 싫어서이다. 왕 되심을 인정하기 싫어서이다. 그 아들 대신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기 싫어서이다. 이 비유에는 복음의 신비가 들어있다. 심지어 왕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임금에게 권위를 표현하지 않고 왕좌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것, 계속 자기의 독립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밭과 사업을 핑계로 사실 그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왕권도 왕조도 인정하지 않는 패역의 마음, 반역의 마음, 정말 싫어하는 배신의 마음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려고 할 때에 아도니아라는 다른 왕자가 거부하고 그 유명한 요압과 아비아달이 합세를 해가지고 쿠테타를 일으켰다. 왜 그랬을까? 아도니아는 나도 왕자인데 솔로몬의 왕좌됨과 왕의 등극을 싫어하는 것이다.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압 같은 사람은 내가 다윗 왕자에 개국 공신인데 또 그 공로의식이 충만해서 솔로몬의 왕의 등극을 반대하고 쿠테타를 일으킨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면 여디디야, 하나님은 아예 처음부터 ‘다윗 왕 다음에 솔로몬이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초청을 응하지 아니하고 예복을 입지 아니하고 근처에는 하나님의 왕 되심과 주인 되심을 거부하고 그런 생각들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당시에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결국은 응하지 않겠다면 것, 더 심각한 것은 왕국을 내가 지키고 내가 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새로운 신앙관, 새로운 시판짜기를 해야 할 줄로 믿는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모든 분들, 자기의 옷이 아니라 내가 준비한 옷이 아니라 주님이 예비하신 흰 세마포 옷을 입고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귀한 백성들이 되어서 주인뿐만이 아니라 초대받은 여러문의 운명이 바뀌는 축복을 하나님이 허락해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해주신 줄로 확신한다. 찬송가에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3절에 보면 주님 예수 다시 올 대 영접할 예복이 있는가? 그대 몸은 거룩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모든 죄, 더러워진 예복을 주 앞에 지금 다 벗어서 샘물 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흰 눈 보다 더 희게 씻으라.~♪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더할 터인데 의의 옷과 예복을 제대로 입고 잔치에 참여하면 잔치의 기쁨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니까 의의 옷을 입고 주님이 예비하신 예복을 입고 의의 옷을 입으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무어냐면 잔치의 기쁨이다. 여러분 보이지 않은 무형교회, 우리 자신도 그러고 눈에 보이는 사랑의교회 근본적으로는 교회는 잔치집이다.
 
III. 교회는 잔치집이다
교회는 잔치집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쁜 소식을, 여러분, 복음이라는 거은 기쁜 소식이며 굿 뉴스이다. 복음이란 갓스플 기쁜 소식이 담겨있다. 아주 그냥 기쁜 소식을 하인들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 복음의 현장, 교회와 무형교회인 우리 자신은 기본적으로 잔치와 희락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오늘 교회오신 여러분들은 기본적으로 이 잔치의 기쁨이 있어야 되고 교회는 혼인잔치의 설렘임이 가득해야 한다. 인생은 여러분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다. 어제 저녁만 하더라도 죽고 싶고 우울하고 기가 막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오늘 이 복음의 신비와 능력을 깨달으면 이 자리에서 예수님이 예비하신 기쁨과 잔치의 희락 성을 다시 한 번 장착하고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말씀 하셨을 때에 천국이 마치 무엇 무엇과 같다고 했는가? 자주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냐면 “천국은 마치 혼인 잔치 집과 같다.”라고 하셨다.
-Feast Home(잔치 집)
 
그리고 예수님이 첫 기적을 베푸실 때도 가나 혼인 잔치집을 사용하시고 왜냐면 그 당시 사람들이 마음이 지옥이었다. 우울하고 어둡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와 기적과 부활도 안 믿는 사두개인들의 잘못된 자유주의와 당시의 에센에파의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팽배해가지고 잔치는커녕 우울증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올바른 잔치 집에 초대를 받고 올바른 의의 예복,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진 예복을 제대로 입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혼인 잔치집의 기쁨이 다가오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혼인 잔치 집과 같다.”라고 하셨다. “천국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니라.”
-바울이 이걸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니라.” 바울이 고백한 것이다. 주님은 완벽한 음식, 완벽한 예복, 완벽한 잔치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매주일 교회는 완벽한 주님의 잔치집이고 교회는 목마른 자들이 와서 잔치집의 생수를 마시는 것이며 배고픈 자들이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피곤한 자들이 잔치 집에 와서 힘을 얻는 것이다. 교회는 잔치하는 곳이고 쉼과 생명의 떡과 생수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옛날 교회는 항상 잔치하는 주일마다 교회에서 잔치국수도 먹고 교회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이 먹었다. 교회는 잔치하는 곳이다. 기뻐하는 곳이다. 문제는 팬데믹 이후에 많은 교회들이 잔치집의 기쁨이 상실이 되고 있다. 심지어 대면 예배를 많이 드리지 못하니까 이 안아주심 본당에서 오늘 이 시간 체험할 수 있는 생수와 생명의 떡과 쉼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무리 온라인 예배가 감사하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 자리에 참여해서 여러분들이 받을 수 있는 기쁨과 설레임과 잔치의 희락성은 질과 수준과 깊이가 차이가 있다. 먹 방보는 것 하고 직접 드시는 것과의 차이이다. 여행을 TV로 보는 것과 직접 여행에 참여하는 것과의 차이다.
 
오늘 온라인 생중계로 들어오신 분들이 한국교회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두 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무자격자가 없어야 되고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자들은 다 참여할 수가 있다. 그래서 누가복음 13장에 이런 내용의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 13:29,
29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 잘 믿으면 처량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십자가 지고 고난도 겪지만 제가 분명히 외칠 수 있는 것은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이다. 그리고 잔치가 있는 곳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경건은 ‘차갑고 무거운 경건’이 아니라 순전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양하는 ‘잔치 성을 지닌 경건’이다.
-오늘 우리 교회 올해 교회를 섬긴 우리 중직 자분들, 여러 성도님들 생각을 해보라. 교회가 이런 잔치성도 없고 이런 잔치 집에 기뻐하지도 않고 교회가 초상집 같다면 어떻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안 되는 것이다. 여러분과 저는 초상집의 하인이 아니고 잔치 집의 하인인 것이다. 교회 오면 생명이 거듭남, 삶이 거듭남, 잔치의 거듭남, 생명의 떡의 거듭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처럼 얼굴을 하지 말고, 잔치 집의 기쁜 순전한 얼굴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기독교인의 잔치 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성품, 새 판짜기를 만들어 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새로운 기질을, 새로운 캐릭터를 주님이 주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에 있든지 잔치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크게 합독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 잔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평생 우리는 결심하고 얼굴이 우울하고 마스크 속이 여러분이 잘 안 보인다. 그런데 오늘 환한 은혜의 잔치의 눈빛으로 반짝반짝하면서 이 예배당을 나가야 할 줄로 믿는다. 그리고 이 잔치가 될 때까지 예수님은 계속 우리를 이렇게 추적하신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 제자들을 통해서 추적하신다. 야고보가 죽으면 베드로를 보내시고 스테반이 죽으면 나중에 또 바울을 보내신다.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보내신다. 토마스선교사가 죽으면 언더우드 선교사를 보내시는 것이다. 윌리암 케리가 죽으면 허드슨 테러를 보내신다. 잔치가 될 때까지, 그 집이 다 찰 때까지, 저는 오늘 제 생애가 될 때까지 언제가 가장 큰 잔치였나? 1978년 7월에 옥한흠 목사님을 모시고 우리 대학부 청년들이 수련회를 했다. 40여명이 참여했다.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다. 그 수양회를 정리하면서 교제와 기쁨이 충만했다.
 
*요한일서 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생명의 능력과 기쁨의 능력을 실제로 입체적인 능력과 부흥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주님과의 올바른 교제와 사귐이 있게 하셨다. 소위 의의 예복을 입은 것이다.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생명과 교제와 기쁨의 능력을 실제로 체험했다. 소위 의의 예복을 입은 것이다.
 
사랑의교회 그 당시 8월 달 그 당시 가만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9월에 생명 교제 기쁨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영적인 비상사태를 8월 한 달 동안 9월 25일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에 캠퍼스에 가서 그 다음에 아침에 못 가면 오후에 가서 하루도 안 빠지고 대학 전체 집회에서 비상벨을 한 번 울리고 그다음에는 우리가 영적인 기쁨을 우리가 나누자고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우리는 돈 받고 하지 말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잔치하자고 했다. 그래서 생명의 시간, 기쁨의 시간, 교제의 시간을 만들었다. 먼저 생명의 시간을 위해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친구들을 초대해서 복음을 나누고 교제하고 다 같이 밥 먹고 저녁을 다 같이 준비하자고 했다. 저녁 먹고 7시부터 9시까지 집회를 했다. 기쁨의 시간, 생명의 시간을 가졌다. 대학생들이 돈이 없는데도 기쁨으로 헌금을 했다. 우리식으로 300만원이나 모았다. 그 당시 서민 아파트 한 채가 천만 원이었다. 50명이 모은 것인데 많이 모은 것이다. 그래서 대학생들이 500명을 초대했다. 열 배를 초대했다. 그때부터 폭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 시대에는 안 될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 사랑의 교회가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갖게 되었다. 우리 교회가 지방에 있는 교회들과 미 자립교회를 5천명의 교회 목사님들과 함께 우리가 받은 생명과 기쁨과 교제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사랑의교회 다락방과 순장반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꿈과 기쁨을 어린아이부터 포에버까지 영적 재생산의 기본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여러분 어떠한가? 50명이 500명이 초대하는 것보다도 5천명을 초대하는 것이 더 훨씬 쉽다. 지금 우리가 오천 명을 초대하는 것이 훨씬 쉽다.
 
♣요약
왕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갖추시고 초대하실 때에 핑계와 거절을 회개하며 준비된 보혈의 예복을 입고 영원한 왕의 잔치에 참여하자. 우리 공동체가 모든 죄에 더러워진 세속의 옷을 벗어놓고 샘물같이 솟아나는 보혈로 씻음 받게 하여 주시길 간구하고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인생의 새 판짜기를 경험해야 한다. 9월 26일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맞아서 26일과 27일을 위해 기도하고 가정의 스테이 홈으로 잔치를 창조할 때 한국교회가 혼인 잔치집의 기쁨이 가득한 부흥으로 비상하기를 소원해야 한다.
- 왕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사람은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신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를 받고도 오지 않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는 상당히 완강하시다. 하나님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와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 그리고 하나님을 버린 자들에게는 분노를 발하시며 가차 없이 벌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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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7월2일)
제목: "SR(사랑)랜드로의 초대"
말씀: 여호수아 15:13~17
대표기도: 이성민 안수집사님,(유치부 교사), 권혜민 자매(대학 1부 리더)
말씀읽기: 전주희 어린이(소년부), 오준영 어린이(초등부)
 
설교자: 홍재훈 선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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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사역나눔
이민형 부목사님-주일학교 팀장
이기호 부목사님 -대학부 팀장
이원준 부목사님-청년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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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5:13~17,
13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유다 자손 중에서 분깃으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니 아르바는 아낙의 아버지였더라. 

14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15 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주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7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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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에 토비새의 말씀을 듣고 오늘 말씀은 그 후속편으로 이어서 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셔서 제가 준비한 본문을 좀 변경을 해서 후속편으로 ‘내 산지를 내게 주소서’인데 내 산지를 어떻게 정복하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셨으면 한다.

 
오늘 성경 본문의 배경은 다 아시는 것처럼 출애굽 이후에 광야 40년을 지내고 그 생활을 청산한 이후에 이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정복하는 여호수아서가 계속 나온다.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주님께서 주신 그 기업들을 정복해 나간다.
 
그러면서 13장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이야기 하신다. “네가 이제 나이가 많으니까 남은 땅은 많으니까 이것들을 잘 분배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들은 갈렙이 여호수아를 찾아간다. 찾아가서 이야기 한다. “모세야, 모세, 기억하지? 예전에 우리 40여 년 전에 모세가 우리한테 이야기 해주었던 그 말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라고 하면서 말씀하신다.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 발로 밟는 땅은 너와 내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우리가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라고 이렇게 고백했었던 것, 그런데 40년 전에 실패를 했다. 아마 여호수아와 갈렙 사이에는 아마도 큰 트라우마가 남지 않았을까 한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렸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있었던 여호수아 갈렙은 그 말씀이 분명히 성취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외상후의 트라우마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외상 후 성장을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계속 키워가고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이제 다시 한 번 나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오늘 읽었던 본문이 나온다. 갈렙이 험지를 선택한 이후에 그것을 어떻게 정복해 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호수아 15:14-16,
14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15 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주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 갈렙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들을 정복해 나가는 행군도 있었지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뭐냐면 말씀 속에 ‘쫓아내었다. 쳤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왜 갈렙이 다시 한 번 이 땅을 향해서 이 땅을 쳐서 점령하는 자, 라는 이 이야기를 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약간 이상하다는 의문점을 품게 되었다.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라고 이야기를 한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쫓아내었고, 치다. 이렇게 동일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을 하고 있는데 로마 성경을 보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다.
 
첫 번째 쫓아내었고 -throw out, 거기서 약간 이렇게 몰아낸 것이다. 그리고 나서 ‘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주민을 쳤는데’ 라고
두 번째라는 단어는- aginst, 단어를 사용한다.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닌가 상상을 해본다. 갈렙이 어떤 땅을 향해서 막 간다. 그 땅을 향해서 행진하면서 나아간다. 개선장군처럼 이 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땅이다. 라고 하면서 나가니까 거기 살고 있던 주민들이 이렇게 물러나고 있었던 그 장면들, 그래서 갈렙이‘ 이 땅은 내 땅이야’ 라고 선포를 하던 그 시간을 가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나서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았을 것이다. 그런 후에
 
*여호수아 15:16,
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여기서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 -Attack and capture, 여기서는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 control. 이라고 사용한다. 내가 이렇게 행진하면서 전진하는 것 같은데 완전한 정복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중에서 마음이 동하는 자,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이 지역의 곳곳에 가서 ‘모든 땅을 완벽하게 점령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그런 제안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이 제안 가운데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는가? 크게는 두 그룹으로 나누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듣고 갈렙이 내 건 상품, 그 상품에 현혹되어서 해볼까하는 그런 그룹이 생길 것 같다. 내가 갈렙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겠다. 내가 인생 역전을 하지 않을까? 그래 한 번 해보자는 것, 상품에 현혹되어서, 상품으로 인해서 뭔가를 얻을 마음으로 달려드는 사람,
 
또 하나의 그룹은 불평 그룹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갈렙, 지금 다 했는데, 이미 거의 다 정복을 했는데 굳이 우리가 나서서 해야 하는 것이 있나? 귀찮게 당신이 다 하면 되는데? 왜 우리를 굳이 이렇게 우리를 끌어들입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말씀을 묵상을 하면서 주님께서 주셨던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 갈렙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요? 제가 12년 전에 대학부를 섬겼다. 때 교역자 들끼리 단합대회를 한 번 하자고 해서 월요일에 교역자들끼리 에버랜드를 가기로 했다.
 
우리 팀장님께서 이야기 하섰다. 저희 첫째 딸이 다섯 살 정도였다. 제가 이야기를 했다. 지금 “유치원에 언제 어느 날은 한번 빠져야 할 거야”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아빠가 좋은 곳에 데리고 갈게” 라고 했다. 이야기를 그리하니 평상시 그렇게 모범적이지 않은 것 같지 않았던 딸이 갑자기 저한테 “아빠 나 거기 안 갈 건데, 놀러 안 가고 유치원을 갈 건데! 한다. 거기 재미없을 거 같아! 안 가!” 라고 하는 것이다.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하지? 좋은 데 갈 수 있는 기회 에버랜드, 얘가 평상시 놀던 동네 놀이터와는 규모가 다른 그곳을 데려가야 하는데 어떻게 데리고 가야할 지를 고민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자하게 이야기를 했다. “세린아, 에버랜드라는 곳에 가자, 그날은 유치원에 빠져야 해, 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 친구가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다렸다. 여러분 그 육아로 힘든 30대 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육아를 막 힘든 시기를 보내면 나만의 자유시간이 너무 그립다. 그래서 유치원에 아이를 잠시 맞기고 아내와 연애 때의 기분을 내고 싶어서 에버랜드에 가서 내가 타고 싶은 놀이공원에 있는 롤러코스트 같은 다이나믹 같은 것을 타면서 즐길 수 있는 기회! 그것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이 아이를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할 것인가와 이 아이가 탈 수 있는 회전목마, 저에게는 재미없지만 아이에게는 재미있을 것 같은 것, 회전목마를 타면서 아이와 함께 즐겁게 보낼 것인가에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저희 딸을 설득하는 것이 좀 치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아비니까 하는 마음으로 딸에게 다시 이야기 했다. “세린아, 아빠랑 제발 가주었으면 좋겠다. 진짜 아빠 믿고 따라와!” 이렇게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딸이 가기로 했다. 당일이 되었다. 저희 집에서 에버랜드까지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제가 차에 타고 나서 “세린아, 에버랜드란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이다. 그래서 네가 한 시간 반 동안 시간이 걸리는데 지금부터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잠을 자거라.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을 자야애” 라고 했다. 감사하게도 잠을 잤다. 도착을 해서 딸에게 “세린아, 일어나, 에버랜드를 왔어”, 이 아이를 안고 매표소를 데리고 갔다. 혹시 에버랜드를 최근에 가보신 적 있으신가요? 자연농원도 그렇고, 매표소에 가면 어마어마한 캐슬(성)이 있고 너무 아름다운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꿈과 희망의 나라!~,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행복한 곳이다. 그래서 딸이 깨었을 때, 딸이 눈을 비비며 성을 보면서 “우아!!” 하면서 감탄을 했다. 하루 종일 너무 즐거워했다. 재미있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올 때 한 마디 했다. 부모는 이게 약간 문제이다. 이렇게 교훈을 하려고 하는 부모의 문제, “세린아, 아빠가 만약에 다음에도 너에게 네가 알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가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그럴때마다 이 에버랜드를 기억해주렴, 네가 가기 싫었는데 아빠가 인도하는 곳은 에버랜드야! 라고 생각해서 따라와. 그러면 그곳이 에버랜드다. 기대해라, 기억해” 그러면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
 
사랑의 교회에서 열심히 사역을 하고 저에게 주셨던 중동에 마음을 주셔서 때의 시점이 되어서 그곳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다시 한 번 딸에게 이야기 했다. “세린아, 우리는 중동 에버랜드에 갈 것이다. 그곳은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나라다. 놀이터에가 가면 모래 장난 이런 것 재미있지? 중동에 가면 우리 동네 놀이터의 모래보다 더 좋은 네가 만져봐야 되는 장난이 아닌 모래가 깔려 있는 곳이 그런 곳이 중동이야, 기대되지? 너 아이스크림 좋아하지? 아빠가 겨울이 되면 아이스크림 못 먹게 하잖아, 중동은 늘 덥단다. 네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아빠가 365일 매일 0사줄 수 있는 곳이 중동이란다.” 이렇게 꼬셔서 제가 중동으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제 딸을 구슬려서 중동으로 갔는데 하나님께서 저는 중동에 있는 동안에 다이나믹하고 에버랜드 같은 곳으로 저를 인도해 주셨다. 제가 선교지를 정할 때, 세계 지도를 펴놓고 ‘하나님, 제가 선교사가 없는 지역으로 가고 싶습니다.“라고 하면서 아라비아 반도로 정했다. 그곳에 가니까 이유가 있었다. 너무너무 처음에 힘들었다. 특별히 경제적인 너무 잘 사는 나라,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 경제적인 압박을 참 많이 받았다.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담대함으로 나가야 하는데 어느 때 담대함으로 나가야 하는데도 어느 때는 쪼그라드는 제 자신을 보았다. 사역 초창기 때에 ’사랑플러스‘라는 문화센터를 설립을 하게 되었다. 저희 센터에 나무가 있는데 중동에서 나무는 귀하고 비싸다. 센터 주인이 저에게 이야기 한 것이 있다. 나무를 죽이면 안 된다고 했다. 비싸니까 물어내야 한다고 경고를 들었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물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물 값이 너무 아까웠다. 어떡하면 물 값을 줄여보려고 샤워를 할 때 제가 물에 바가지를 넣었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을 조금씩 들고 와서 물을 주곤 했다. 옆집 메이드와 친해졌다. 옆집에 물을 주는 메이드에게 ”너희 집은 현지인이 사니까 물 값이 공짜잖아“ 그러니까 우리 것에도 달라고 했다. 그 호수가 기니까 물을 좀 주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콜라도 갖다 주고 이렇게 좀 극단적인 절약의 삶을 살았다. 옆집 메이드가 저를 메이드인줄 알고 정말 친근감 있게 이방인 메이드끼리 친하게 지내보자고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량이 없이 지냈는데 대중교통 수단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차량이 없으면 가히 상상하기 힘든 그런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장을 가야하는데 최대한 가지 않는 것 또는 택시를 타고 가는 귀찮은 생활과 절약을 하고 가지 않는 그런 삶을 계속 살았다. 그러다가 쌀이 없을 때까지 왔다. 그런데 어떤 분이 쌀을 들고 저희 집에 찾아와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런 일들을 계속 겪으면서 한국에서 어떤 손님이 오게 되었다. 차량이 없으니까 현지 친구한테 “너 나랑 공항에 롸이드로 같이 좀 가줄 수 있나?”하고 부탁을 했다. 

그 나라는 현지인이 잘 살고 외국인을 고용하는 나라이다. 현지인들이 갑, 외국인들이 을이 되는 경제적 계급화가 고착화 되어 있는 그런데 갑자기 외국인이 자기한테 시키는 것이다. 현지인이 이런 일을 처음 당해 보는 것이다. “뭐야, 나를 시켜먹어? 말이 돼? 무얼 믿는 구석이 있어?” 이렇게 하면서 제 롸이드를 했다. 그러면서 제가 현지인들을 기사로 부려먹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지냈다. 그렇게 지냈는데 힘들어서 그렇게 지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거기 있는 현지 사람들, 그리고 또 제 3국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토대를 만들어 주시는 그런 시간들을 저에게 주셨다. 특별히 현지인 친구들이 저에게 찾아와서 친한 친구들이 같은 행사를 하고 나서 뒤풀이를 할 때 저에게 질문을 했다. “너는 문화센터 원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차도 없고 집도 없고 이상한 것 같다. 왜 이렇게 살아?” 라고 질문했다. 제가 그곳에서 2년 째 되는 때에 받았다.

 
그 질문을 받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 되신 만왕의 왕이신 그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수 있는 제 삶의 작은 부분을 이들에게 또 다른 비유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을 마련해 주었구나!’ 의 그 감사함이 넘쳤다. 비록 제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때로는 “하나님, 차량이 있어서 저도 운전하면서 다니고 싶다고” 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더 좋은 것,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선교사가 그곳에 가서 해야될 가장 중요한 것을 명확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그 일들을 계속해서 하시고 계셨던 것을 제가 경험했다.
 
또 하나는 제가 지금까지 생존을 위한 알바를 하고 있다. 알바를 하고 있는데 기도하면서 “하나님, 그래도 해야될 우선순위가 있으니까 사역과 연관되는 일들만 하면 좋겠습니다.” 라는 그러한 기도를 하고 그 원칙에서 제가 살고 있습니다. 라고 그런 다짐을 했다. 그러다가 제가 그곳에 있다가 우리나라에 있는 ‘시장 개척단’이라는 그 팀들이 오게 되었다. 그 팀들이 저에게 안내와 통역을 부탁을 했다. 안내와 통역을 하다보니까, 저는 제가 알지 못하는 그 영역들, 삶의 구석구석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너무 좋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렇게 하면 우리나라의 기업들이 조금 더 마케팅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더 이렇게 하면 시장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고 해서 제가 맡게 된 그 사장님께 조금씩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러다가 시장개척단의 그분들이 제 조언들을 보고 제 이력을 후에 보고나서 그러면 “다음부터는 시장개척단 팀들이 오면 컨설팅을 해 주십시오”. 라고 해서 그 팀이 오면 오자마자 첫날은 제가 모든 사장님들과 스텝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한 분 한분씩 이 시장에서 잘하기 위해서 좋은 방법들을 고민하고 컨설팅을 해주게 되었다. 그러다가 정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정부의 기관들이 일을 할 때, 저를 찾아주시는 그런 일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고위층 사람들과 그 나라 정부 고위층간의 만남의 중간 역할을 해서 같이 만남을 했다. 우리나라 고위층들이 만나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저는 현지 친구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제가 문화센터를 하고 있으니까 이 문화센터가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인가? 하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저를 더 신뢰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제가 건강한 관계로, 현지 사회와 더 깊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일들을 만들어 갔다. 그러고 나서 후에는 한국에서 G템이라는 글로벌 무역 전문가를 만나는 일이 있는데 그 대학 강의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다. 제가 그곳에서 지내면서 첫 번째 에버랜드 중에 하나는 특별히 기술이 없는 자,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을 잘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떻게든 도구를 만들어주시는 그 하나님이심을 제가 배우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약속의 땅을 정복하면서 나아간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을 정복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복해 가는 과정 가운데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정복되어 가는 것 그것을 가장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랑의교회에서 하는 제자훈련, 사역훈련,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 회심한 사람들이 그러나 여전히 연약해서 육신의 소욕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이제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그 성령의 열매를 계속해서 내기 위한 전쟁과 싸움들을 훈련을 통해서 해나가고 있는 그 과정, 그 과정을 저에게 허락해 주셨던 것이다.
 
갈렙의 마음은 이렇다. 아비로서 모든 것을 다 마련해준 다음에 “애들아 이곳에서 편히 살아라, 내가 다 마련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애들아 난 여기까지, 너희들이 한 번 해봐!” 라고 하는 그러한 것들을 하는 갈렙의 마음을 제가 보게 되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사람인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남은 1세대, 출애굽을 한 정말 남은 1세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노예생활부터 시작해서 출애굽 한 다음,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건넌 사건,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신, 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우리를 먹이시는 르비듬의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시는, 아멜렉과 전투에서 승리케 하시고, 시내 산에서 빽빽한 구름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셨던 그 하나님, 그 만왕의 왕되신 내가 경험했던 그 하나님을 “애들아, 이제는 너희도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것을 주기 위한 선물로 내가 여기까지 이렇게 했는데 이 이후에는 너희들이 했으면 좋겠다.”.라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최근에 경험했던 에버랜드 경험을 소개하려고 한다. 제가 그 카타르라는 곳에서 처음 사역을 하고 지금 살고 있는 아랍 에미레이트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퀸스메이커’ 라는 그런 하나님께서 또 다른 비전을 주셨다. 그래서 그 일들을 하기 위해서 막 열심히 했고, 그 사역을 잘 끝내고 나서 다시 현지인들과 깊게 사역을 하는 그 일들로 다시 전환을 하였다. 그래서 그동안 저에게 주셨던 무기인 ‘세계시민이해 교육’을 약간 변형을 해서 ‘로드마스터’라는 이름으로 제자훈련과 복음을 소개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좀 더 공적인 이 보수적인 사회에서 이 친구들과 잘 신뢰 관계를 쌓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무슬림 친구들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큰 오해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래서 그냥 외국인이 와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거 외국인이 믿는 그런 종교잖아.” 라고 하면서 거부를 한다. 선교의 가장 기본이다. 성육신, 그들과 함께 되고 “너도 우리와 같은 부족인 것 같아‘ 라고 그 안에 들어간 그 사람이 무언가 이야기 했을 때, 신뢰관계에 있을 때, 그들이 우리의 소리를 듣는 것을 제가 뼈저리게 느꼈다. ”하나님, 제가 다시 한 번 이 지역을 옮겨서 이 지역에서도 이 친구들과 더 깊게 계속해서 더 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다가 ’서적을 내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곳에서 운전을 하다가 사막을 가면서 별의 별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 이것 될까요? 해볼까요?” 라고 무식하게 해보는 그런 일들을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지냈다. 디테일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 나라에서는 사회적 호칭이 되게 중요하다. 그래서 어떠한 사람, 어떤 소속, 좀 유명한 사람을 신뢰하는 문화가 있다. 저는 그런 것이 없는 그냥 하나의 외국인 평민이듯이 “하나님, 어떡하죠?”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때에 마음을 주셨는데, 한국에서 작가가 중동에서도 책을 내는 것, 제가 한국에서 급히 책을 내면서 이것은 한국 독자에게 쓸려고 하는 책이 아니어서 너무 부끄러운 책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안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른 출판을 한 다음에 중동에 와서 이야기를 했다. 출판사랑 이제 접촉을 했다. 한국에서 책을 쓴 것을 여기서 출판하기를 원한다. 하면서 이력과 이런 것을 하면서 출판사랑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출판사만 저에게 주셨던 주님의 마음이 있다.
 
그 출판사는 두바이에서 가장 큰 출판사이고 두바이 왕족들이 책을 냈던 그런 곳이다. 정부 간행물을 내는 곳이다. 제가 가장 큰 곳이어서 거기서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가장 신뢰 받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은 저기요!” 그래서 접촉을 했는데 저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다. 돈을 많이 내면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제가 마음이 평안하지가 않고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확신이 없었다. “하나님, 이게 맞을까요? 저는 이제 못 하겠어요.”라고 하면서 다른 출판시장들을 다 조사했다. 거기는 출판 업계가 대게 좁아서 금방 알 수 있는데, 그러면서 알아본 것은 이곳에서 최소한 출판하기 위한 최소 비용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 제가 이 최소비용까지 깎으면서 하는 것까지 하면 도둑놈인 것 같아요.“ 그거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아닌 것 같고 해서 “최소 비용으로 이 출판사랑 꼭 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를 했다. 계속해서 협상을 했다. 그동안 시장 개척단에서 수많은 업체들을 받았던 그 협상의 나름 달인이거든요. 그래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협상을 했다. 절대 가격을 안 깎아서 저도 알았다고 하고 나는 너랑 너무 하고 싶은데 안 되겠다. 이게 전부야 하면서 길은 열어두되 계속해서 제 의견을 이야기 했다. 그래서 거기랑 결렬이 된 것 같다. 3-4개월 후에 또 연락을 해서 조금 깎아주었고 그래도 이 가격으로 안 되겠니?안 된다고 했다. 또 후에 조금 뒤에 또 연락이 왔다. 혹시 이 가격도 안 되겠니? 하면서 그렇게 해서 1년 반이 지나갔다. 벼랑 끝에서 “주님, 저에게 확신을 주십시오. 이 가겨이 아니면 저는 못하겠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이 가격에 해주세요.”라는 벼랑 끝 전술로 주님께 나아갔다. 그랬더니 어느 시점에 제가 제안을 했다. 이것이 아니면 진짜 못해, 했더니 거기서 받아 주었다. 그러면서 저한테 “너 같은 애는 처음 봐” 감사하게 출판사랑 계약이 되었다. 계약을 하고 최소비용을 기도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카톡이 왔다. 사랑의 교회 홍진기 목사님께서 예전에 저희 우리를 방문하셨는데 카톡을 주셨다. “어떤 분이 헌금을 하려고 하는데 코로나로 힘드시죠? 어려운 선교사님을 돕기 위해서 헌금을 했던 한 분이 계셔서 생각나서 헌금을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답을 드렸는데 제가 “코로나지만 할만합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대신 제가 어제 이런 기도를 해서 혹시 이렇게 사용해도 된다면 제가 그 헌금을 출판을 위해서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목사님이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다. 그래서 그 헌금과 선교부와 나머지 분들과 여러 채널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판매했었던 그 돈까지 십일조까지 채우니까 딱 되었다. 일사천리로 잘 되었다.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출판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는 정부 검열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원고를 내면 출판사가 정부에게 검열기관에 맡긴다. 정부 검열을 하면 3개월 뒤쯤 빨간 줄이 막 그려져서 수정을 하라고 온다. 열심히 고치고 삭제할 것 삭제하고 고쳐서 보내고 나면 1-2개월 뒤쯤 다시 온다. 이것저것 고치라고 연락이 와서 계속 10개월의 수정 기간을 거쳤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셨던 마음이 무엇이냐면, 이 친구들이 언론을 통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언론의 통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못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곳에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 너무 필요하구나. 너무 지치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제가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면서 끝내 출판을 했다. 그 책이 결국 나왔다. 그래서 그 현지 친구들에게 주었다. “야, 이런 책이 나왔어.”했더니, 거기는 작가가 대게 귀하다.


그리고 왕족들이나 로얄 패밀리들만 책을 낸다. 그래서 갑자기 제가 로얄 패밀리 그룹에 입성하게 되는 듯 은혜가 되었다. 현지 친구가 이것을 우리 왕 쉐이크한테 좀 봐주셨으면 좋겠어. 라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도 너무 바치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를 긴데, 딱 줄이면 만나게 되었다. 왕의 초청을 받았다. 초청을 받아서 라마다 기간인 11시에 초청을 받았다. 제가 그날 평일이었는데 그날은 학교를 가지 말고 우리 왕궁으로 가자고 했다. 아내가 현지 학교 음악교사로 섬기고 있었다. 아내가 마음이 불편해 했다. “음악교사가 천직인데 거기 가는 것이 맞을까?” “우리가 큰 그림에서는 이것도 중요하다.”고 이렇게 설득을 했다. 아닌 것 같다고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제가 왕의 비서실에 이야기를 했다. 약속 시간을 바꾸자고 했다. 아내가 학교 끝나고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중동 라마단 때 가장 힘든 오후 두 시 시간인 그 시간에 방문을 했다. 사진도 찍고 등등 좋은 시간을 가졌다. 체가 책을 내면서 여러 가지 작가 의도와 달리 수정되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셨던 마음이 있다. “하나님, 제가 이 책을 통해서 예수님을 은연중에 드러내기 원하는데 그게 안 되면 어떠하죠?” 하나님이 그것을 보여 주셨다. 뭐냐면 “한국기독 역사를 보아라. 광혜원, 연희전문대학,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의사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것이 아니잖아, 그 이름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한반도를 향해서 사랑의 손짓을 하셨던 주님이 남았잖아, 너의 책, 그 책에 퀄러티가 얼마나 좋은지, 작가가 얼마나 훌륭한지가 남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이전부터 이 땅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손짓, 그것이 남을 거야.”라고 하셨다. 그리고 왕을 만나게 해주셨다. 라마다 기간 동안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다. 제가 가는 곳마다 라마다 기간 동안 무브먼트를 좀 하자고 했다. 죄송하기도 하지만 무슬림 친구가 있으면 한 권씩 선물을 하기의 프로젝트를 했다. 그리고 후에 이야기를 들었다. 어떠한 한 성도님이 자기 석유회사 다니고 있는 친하게 지냈던 아래 직원에게 책을 주면서 로드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로드 마스터를 이야기를 하니까 너한테는 예수님, 나한테는 알라신, 이냐고 그런 종교적인 이야기를 계속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좋았는데 제가 왕이랑 찍은 사진을 그 분이 보여주니까, 현지인이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뭔데? 우리 쉐키크의 초청을 받아서 이 사람과 사진을 찍었지? 라고 하면서 갑자기 저를 신뢰해 주는 그런 일을 하면서 이제 책을 신뢰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라고 한다. 현지인이 또 다른 현지인에게 가서 로드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작가가 우리 왕이랑 사진까지 찍고 초청 받고 이랬던 사람이라고 하면서 초기 전도자로 성장하면서 그런 은혜까지 지금 누리고 있다. 사실 오늘 다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길들을 만들어 가시고 계신다.

 
오늘 갈렙의 제안에 반응했던 옷니엘이 나온다. 그 제안에 손을 들고 나아간다.“제가 해볼게요.” 삼촌의 노년의 삶을 본다. 그리고 그 제안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경험했던 그 옷니엘이 사사시대에 처음에 하나님이 그 옷니엘을 지켜보다가 정말 필요할 때, 그 옷니엘을 다시 들어서 첫 번째 사사로 사용되어 지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랑의 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왜 오셨는가? 이 새벽, 여러분의 사랑 랜드로 제가 초대하려고 한다. 로드마스터 중동 랜드, 여러분, 제가 너무 감사한 그룹이 있는데, 카타르를 2005년에 방문해 주셨던 분들과 순장님들과 3권사회, 그분들이 열심히 기도해 주신다. 제가 소식지를 가끔 보내다가 그 권사님들을 만났을 때, 권사님들이 기도를 게속 하니까 매일 보내주셔도 된다고 하셨다. 너무 진정성을 느끼고 일주일에 한 번이나 보내고 있다. 그분들을 제가 ‘로드메이커’라고 명명했다. 정말 그분들이 기도하니까 저는 현장에서 문을 두드리니까 길이 열렸다. 제가 절망하고 있을 때, 제 영성보다는 그분들의 중보로 좀 더 빨리 회복되어 진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로드메이커, 오목사님 설교하실 때, 다락방 3천개가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라고 제가 여러분에게 나누고 싶다. 어마어마한 일들이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다. 여러분을 로드메이커로 초청한다. 어떻게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저와 접촉할 수 있도록 정말 원하시면 해주시길 바란다. 제가 사랑의교회에서 있었던 좋았던 것 중에는 오 목사님이 말씀하시다가 아이디어를 이야기 하신다. 그러면 교역자들은 힘들어하신다. “그걸 어떻게 하지?”하면서 그런데 오 목사님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그 말씀이 갈렙의 마음이었구나. 하나님께서 받은 말도 안 되는 일들, 사랑랜드에 어마하게 많지 않은가? 여러분 사랑랜드에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 부르신 것에 주님 아멘 하면서 손을 들고 나아가야 한다. 왕이 없는 이 혼돈된 이 시기에 옷니엘처럼 쓰임 받는 자 되어야 한다. 믿음의 세계, 또 다른 세계에 초청하는 갈렙과 같은 증인으로, 그리고 오늘 새롭게 다음 세대, 그동안 당연했던 수련회가 당연하지 않았던 것을 다시 한 번 당연하게 만들려고 하는 그러한 다음 세대의 모든 부서가운데 아름다운 사랑랜드, 그곳으로 옷니엘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랜드, 사랑의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이 시간 갈렙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정복하셨듯이 저희를 다시 부르셔서 주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경험하기 원하시는 그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아멘 하면서 나아가기를 원해야 한다. 그 믿음으로 나아간 사랑랜드에 모든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여서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전수하여야 한다. 사랑의교회 다음세대가 현장에서 펼쳐지는 여름 사역을 통해서 수선대후의 역사를 써 내려가길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심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성도가 승리를 얻으려면 절제해야 하고 주를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이고 완전한 성도의 승리는 부활의 때에야 가능해진다. 본 서 기자는 갈렙에 대해서 기록할 때마다 매우 즐거워하는 듯이 보인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기 때문이었다.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헤브론을 기업으로 준 것이 여기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갈렙이 그 분깃을 취하는데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음을 보게 된다. 헤브론을 정복할 때 그는 자신의 용기를 나타내었다.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곧 그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그와 그를 도와주는 자들이 함께 이 일을 행하였다. 드빌을 정복할 때 그는 그와 함께 싸우는 이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때 여호수아가 직접 드빌을 정복했었으나, 이스라엘 군대가 없는 틈을 타서 가나안 사람들이 다시 그곳을 차지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그곳을 정복해야 했다. 갈렙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헤브론을 완전히 정복했을 때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만큼이나 전체를 위한 열심히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드빌로 진군해 나아갔다. 갈렙은 그 성읍을 정복하는 자에게 자기 딸과 좋은 분깃을 주겠다고 제안을 하였다. 갈렙의 집안은 단지 영광이 높거나 부유할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집안이었다. 그 곳은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아마도 갈렙도 처음 제안할 때부터 옷니엘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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