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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3일)

제목: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말씀:빌립보서 4:10-13
찬양인도: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윤주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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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10-13,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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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은 부목사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쁨을 향유하겠다는 선언이다. 기쁨을 누리고 만끽하겠노라는 당당한 외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라면 기뻐하는 삶이 당연해야 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괴롭게 우울한 생활이 당연하고 불평과 우울, 분노와 짜증내는 삶이 더 자연스럽다. 기쁨을 향유하기는커녕 세상 다 사는 얼굴을 하고 힘들어 죽겠다는 그런 언어를 쓴다. ‘예수님을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마이크 메이스’라는 분이다. 이 분은 평생이 우울했다. 평생을 경계성 우울증을 앓았고 또 신경과민에 시달렸다. 술에 의존해 살면서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나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예수님을 믿는지 10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그의 친구의 두 어린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게 되었다는 그 비극의 소식을 듣고 나서 문득 성경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는 삶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90일 동안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항상 기뻐하는 삶이 가능하구나!’룰 경험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도전했지만 이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그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항상 기뻐하는 삶이 가능합니까? 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당당히 대답한다. ‘사람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기는 어렵다. 세상에는 기뻐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 이 말이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른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남들과는 다를 줄 알았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시면서 ‘조금 다르겠거니’ 생각하실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실재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경대로 항상 기뻐하는 삶인가? 담임 목사님께서는 작년 5월 2일 주일 예배 때에 감정의 온전함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주셨다. 본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라고 하는 말씀인 빌립보서 4장 4절 말씀이었다. 그때 담임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해주셨다.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만족의 감정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여러분의 형편이 현재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면 기쁨의 원천이 메마르지 않고, 감정도 치유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처럼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는 핵심은 기쁨이다. 그리고 기쁨의 비결은 자족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족하는 삶을 통해 기쁨을 회복하고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어서 생명의 부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아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써서 여러 가지 문제로 당부(當付) 한다. 당부의 말을 전하고 나니까 그동안 자신을 돌보아주고 섬겨준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도 형편이 썩 좋지 않았지만 이 바울의 물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빌립보서를 써내려가던 당시 바울은 아시다시피 감옥에 갇혀 있었다.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드 라는 사람을 파송(派送)해서 이 바울을 다시 한 번 후원한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에 크게 기뻐하면서 감사해한다.
 
빌립보서 4:10,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사상의 내용을 써내려가는 목적은 단순히 감사의 인사만이 아니었다.
 
*빌립보서 4:11,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감사는 진심이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이 성도들의 후원을 초조하게 기다리거나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을 후원해 주는 일이 감사하고 기쁜 일이고 자신에게 큰 도움은 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의지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빌립보 성도여러분, 이번에 저를 도와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다른 부탁을 하기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10절 초반에 ‘크게 기뻐한다.’ 라고 한 말은 자신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는데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것을 채워주어서 내가 힘이 나고 내가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딱 잘라 한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2-13절에 걸쳐서 자신이 어떤 삶에 도달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자신이 어떤 믿음으로 살아왔는지 그 비결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 중심에는 자족함이 있었다. 바울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자족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자족하는 삶을 통해 기쁨을 회복하고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어서 생활의 부흥으로 나아가는 삶으로 오늘 우리를 초대한다.
 
저는 오늘 말씀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려고 한다. 먼저는 자족에 대한 오해들을 풀어내고 그 이후에는 바울이 가진 자족의 원칙들을 다루려고 한다. 먼저는 자족에 대한 오해들을 몇 가지 풀어보도록 하겠다. 이런 오해를 할 수 있다. “좋습니다. 자족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처한 형편에 무감각 하면서 마냥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까? 내가 어떻든 간에, 내가 무슨 일을 당했든 간에 두 손 놓고 지내야 합니까?” 바울이 자족했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처한 형편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마땅히 반응하는 사람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좋지만 사리분별하지 않고 살아서는 안 된다. 이와 이렇게 된 것,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시편의 기자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은 자신들의 처한 형편에 무감각하거나 마냥 긍정적으로 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편을 살필 줄 알았고, 마땅히 반응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했다. 반면에 마음이 괴로워서 한숨만 쉴 때에는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주시는 그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 때 올려드리는 기도에는 억울함을 기도하고, 답답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바울의 말은 절대로 처한 형편에 무감각하거나 마냥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런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좋습니다. 자족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현재에 안주하면서 주어진 대로만 살아야 하는가? 지금의 형편에 그저 만족해하면서 뭔가를 바라거나 더 잘하려고 하거나 더 나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바울의 자족한다는 것은 역시나 그런 말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발전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신뢰할 때에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고 처음보다 끝이 더 좋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이끌어 가실 줄 믿는다.
 
이처럼 바울의 말은 절대로 현재에 안주하거나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바랄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고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자족에 대한 오해는 이쯤으로 정리하고 이제 바울이 가진 자족의 원칙들을 나누려고 한다.
 
I. 자족은 배워야 한다.
 
*빌립보서 4:11-12,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본문을 이해하려면 네 가지 핵심 표현들에 집중해야 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 일체, 비결, 배웠다.’ 라고 하는 표현들이다. 바울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역하는 현장들마다 열매가 풍성했고 영광스러웠다. 물론 사역이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항상 기뻐할 일들만 있지도 않았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끊임없는 조롱과 비난을 당해야 했고, 수없이 매를 맞아야 했고, 온갖 위험을 당해야 했다. 잠을 지새운 적도 많았고, 목마르고 굶주리며 헐벗은 일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감옥에 갇혀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족쇄에 매여 있다. 여기에서 죽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사역을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동역 자들과 성도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날 수도 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어떠한 형편’이었다. 이때 바울은 우리처럼 짜증내거나, 분노하거나, 염려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족하겠습니다.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바울이 한 말이니까 뭔가 대단한 구석이 있긴 한데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한 개념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자족이란 무슨 의미인가?
 
한 마디로 자족이란 모든 형편에 맞출 수 있는 마음이다. 어떤 형편에든지, 억지로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닌 오히려 형편을 주도해 가면서 그 형편에 완전히 맞추는 것이다. 그 말은 현실에 굴복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부끄러운 결단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누리면서 감당해 나가겠다는 그러한 적극적인 결단이며 이것이 바로 자족의 의미이다. 특히 12절 끝에를 보면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라고 이야기 한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 적응력을 말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적응하고, 맞추어 살 수 있는 맞춤형의 능력, 그것이 자족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상황을 지배할지언정 상황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내 기쁨은 내게 닥치는 일들에 좌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라고 하는 바울의 고백이다.
 
여러분, 물의 저력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물의 원리가 그렇지 않은가? 물은 어떤 그릇에 담든지 그 모양대로 자유자재로 바꾼다. 둥근 사발에 담으면 둥근 모양이 되고 우그러진 쪽박에 담으면 우그러진 모양을 하게 된다. 또 깊은 골짜기에 고여 있다가도 그 물이 넘쳐흐르면 하류를 따라서 정처 없이 흘러간다. 돌이나 바위를 만나면 비켜간다. 이처럼 물은 저항을 받아 부정하는 법이 없다. 어떠한 환경이든지 묵묵히 적응한다. 이것이 물의 적응력이고 물의 저력이다.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물은 자족한다. 결국 본문에서 방점을 찍어야할 표현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자족해야 하는데 어떠한 형편에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가능할 때만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고 바울이 보여준 삶의 모범이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소개하면서 이렇든지 저렇든지 어떠한 형편에든지 맞출 수 있고 적응할 수 있게 우리 가운데 도전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자족이다. 그렇다면 자족할 수 있는가? 바울은 배움을 통해 자족했다.
 
*빌립보서 4:11-12,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배웠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한다. 배웠노니, 배웠노라. 이렇게 고백하는데 이 표현의 더 나은 표현은 ‘배우게 되었다.’ 이다. 단순히 배웠다가 아니라, 배우게 되었다 이다. 바울은 배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배우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공부를 해서 무언가를 습득하듯이 어떤 이론이나 지식적인 것들을 우리가 채워가듯이 그렇게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사는 지혜’를 가리킨다. 경험은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없다. 반드시 직접 경험해야 한다. 바울은 이런 저런 형편을 직접 겪으면서 모든 형편에 맞출 수 있는 마음을 배운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운 것이다. 경험을 통해 어떠한 형편에든지 살 수 있는 사는 지혜를 이 바울이 깨달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12:9-10절을 보면,
 
*고린도후서 12:9-10,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바울이 그렇게도 고생했던 육체의 가시가 나온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했다. “하나님, 없애 주세요. 가시를 좀 가져가십시오.” 이렇게 세 번이나 간구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뽑아 주시지 않았다. 그러자 바울이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러자 조바심이 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하고 사역을 더 잘하고 싶은데 이 육체의 가시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교훈을 얻는다.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충분하구나,” 바울이 깨달은 것이다. 바울의 가시를 가진 형편 가운데 불편한 것이 아니라, 짜증 낸 것이 아니라, 염려한 것이 아니라, 맞출 수 있는 마음을 배웠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고, 사는 지혜를 깨달았다.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에는 많은 굴곡과 변화가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다. 슬플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고 가난할 때가 있고 넉넉할 때가 있고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고 또 실패할 때가 있으면 성공할 때가 있는 것이 인생이다. 전도서의 기자의 따르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전도서 기자는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도서 7:14,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 바울은 그 진리를 깨달았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태를 배움의 기회로 삼고 자족하기로 결단했다. 자족이라는 것이 바울에게도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앞으로 나는 저는 자족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늘 말씀을 들은 이후로 이제는 자족하면서 살 것입니다.” 이런 막연한 의지와 결단으로는 절대로 자족할 수 없다. 자족이란 것은 나이가 먹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의 연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족은 배워야 한다. 쉽고 어려운 일들, 자꾸 큰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면서 사는 지혜를 깨달아가면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형편 가운데 놓여있는가? 재물을 잃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는가? 진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계신가? 누군가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있는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있는가? 부모들이여 날마다 자녀를 키우면서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자녀들이 아픔과 고통에 함께 신음하면서 그렇게 고통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 짜증내고, 분노하고, 염려하고 그러한 것들은 배우지 않아도 잘 한다. 그런데 자족은 배워야 한다. 사람은 절대로 어떠한 형편에 처하기 전에는 절대로 배울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은 자족함을 배워갈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인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함을 배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바울이 가진 두 번째 원칙은
 
II. 자족은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다.
 
빌립보서 4:13,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이 참 좋아하는 말씀일 것이다. 듣자마자 반갑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성도들이 큰 격려와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하는 식의 긍정의 힘으로 믿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잠재력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이해해서도 안 된다. 이 표현은 목회자는 목회자로 불리고 그러나 소천하신 ‘유진 피터스 목사님’께서 번역하신 표현이 참 좋다. 이 목사님은 13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내게 계속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분이 있어 나는 강해졌습니다.” 아멘,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족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바울은 그 힘의 근원을 자기 안에서 찾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나, 자연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자신이 그동안 이루어 온 일들로 더 찾지도 않았다. 바울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찾았다. 바울은 당시 스토아 학자들이 평소에 메시지를 전했던 그 내용들을 토대로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스토아 학자들은 모든 상황에서 필요한 모든 자원을 스스로 마련하라고 가르쳤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상처받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라.’ 이렇게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의 .특징은 오늘날의 동양종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자족함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자족함의 근원을 이해한다. 바울은 어떻게 이처럼 고백하게 되었을까? 예수님을 아는 일이 최고로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았기 모든 지혜와 지식과 힘과 용기의 원천이 예수님께 달려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을 소유하신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나는 아무것도 없지만 나도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가졌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바울이 자족했다는 말은 바울이 말하는 자족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충만함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본문 19절로 이어가면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채워주실 것을 믿었다.
 
*빌립보서 4:19,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비록 자신은 감옥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 이런 모든 것을 누구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채워주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게 하실 줄로 믿었다. 이것이 바울의 자족함이었다. 여러분도 믿는가?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요구되는 두 가지 삶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사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나는 약하지만 예수님 안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부정하지만 죄 많은 죄 투성이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강하심을,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또 하나의 모습은
 
두 번째는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살면서 한번쯤은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서 오는가? 를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 세상에는 참된 만족함이 없구나!’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구나!’ 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참된 만족을 주시는 예수님을 정답이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고 치유와 응답을 체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답대로 그렇게 살면 된다.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충만함으로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극치이요, 최상의 기쁨인줄로 믿는다.
 
여러분, 내 안에서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할 수 있다. 내 안에서는 할 수 없지만 늘 뒤통수만 치는 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의지하면 할수록 할 수 없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인도하시는 예수님 안에선 할 수 있다. 여러분이 아는 사람, 여러분이 가진 것들 물질과 권력과 그동안 이루어 왔던 수많은 것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여러분에게 계속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예수님 안에서는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어떤 형편이 주어지든지 그것이 심지어 불의의 사건일지라도 여러분은 그 형편 가운데 자족할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약속하신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그 충만함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넉넉히 부어질 줄 믿는다. 그러므로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자족할 수 있는 고백이 되길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가진 세 번째 원칙은
 
세 번째는 주님께서 내 모든 형편을 섭리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배고픔과 비천함에 처하는 것, 배부름과 풍부함이 처하는 것, 그 어떠한 형편도 바울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바울은 현재 자신이 처한 형편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것인 줄로 믿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형편 가운데에 먹이시고 입히시고 채우시며 인도해 가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이후에는 믿는 자의 유익을 위해서 선이 되도록 역사하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이 바울은 ‘주님께서는 모든 내 형편을 아신다.’ 이 믿음 가지고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심지어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일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라고 고백을 한다.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은 것이다. 빌립보서 1:12절을 보자.
 
*빌립보서 1:12,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우리의 이 형편 가운데 두실까?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오늘의 형편 가운데 두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늘의 형편 가운데 두셔서 한계를 만나게 하여 주시는 것은 “한 번 살아보아, 너 믿음의 실력 좀 보자.” 도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저런 형편에 머물면서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고 예수님의 신실한 온전한 제자가 되게 하려는 것, 하나님의 뜻,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을 사는 가운데 우리를 두시는 이유이다. 사람이 한 단계 성장하고 성숙하려면, 사람이 실력이 되려면, 가장 좋은 비결은 자신이 마주한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다. 운동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육체의 한계를 만난다. 그만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그 한계를 뛰어 넘어야만 비로소 실력이 늘고 육체가 더욱 건강해진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형편 가운데 두시고, 한계를 만나게 하실 때에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 나는 싫습니다. 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형편을 만나게 하여 주실 때에는 그래서 한계를 만나게 하여 주실 때에는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순종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는 실력이 늘 수 있다. 그래야 감정의 온전함을 이룰 수 있고, 그래야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겠다는 결단이 아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어제 무엇을 해주셨는지 오늘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내일 무엇을 해주실지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여러분, 결국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찬송가 310장의 고백대로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 그렇게 선포하고 그렇게 묵상하고 그렇게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고 헤아리시며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주님 안에서 우리도 자족할 수 있음을 믿는다. 우리가 처한 형편을 묵상하면 거기에는 답이 없다. 묵상하면 우리의 믿음만 사라져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묵상하면 거기에 답이 있고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말씀을 정리한다.
 
-저는 중학교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비록 녹녹치 않은 유학 생활이었지만 학업을 마치고나면 나름대로 탄탄대로가 펼쳐지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제가 미국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제가 목회자가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 저는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부르심을 확신하고는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신학과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십년 도 더 된 이야기이다. 비록 바울이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리고 모든 목회자들이 그런 과정이 다 있었겠지만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부르심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가족 하나 없이 나 홀로 궁핍하고 초라한 시간을 보내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제 마음을 매일 짓눌렀다. 그래도 두 얼굴의 인생을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하나하나 세워 가시고, 자라게 하시며, 이루어가셨다. 지난 모든 형편 가운데 데 아내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내 모든 형편을 주님이 다 아신다. 숱한 밤을 지새우면서, 제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을 참 많이도 묵상하고, 선포하고 찬송했던 것 같다. 그렇게 믿음 안에서 몸부림쳤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 이런 저런 형편 속에 있던 지난 모든 시간은 결국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해 주신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주 앞에서 사랑하고 응원하는 영 가족 여러분,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고 싶은가?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고 싶은가? 그래서 생활의 부흥으로 나아가고 싶은가? 저도 그런 은혜를 소망한다. 그런데 현실은 쉽지 않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 저런 형편이 놓여 산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다 나름의 형편이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형편이 없다. 그래서 자족하라고 하는 이 말이 참 많이 무겁다. 이런 저런 형편 가운데 바울처럼 자족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족하라고 제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시는 것이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여러분 포기하겠는가? 포기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을 선포하면서 묵상하면서 이렇게 찬송하면서 자족하는 삶이 하나님의 명령인줄 믿고 그 삶을 살아낼 줄 믿는다. 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세 가지 원칙을 기억하라. 자족함을 배워가라.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살 수 있음을 고백하라. 주님께서 내 모든 형편을 아심을 믿으라. 모든 형편이 섭리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바라기는 이렇든지 저렇든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결단하기를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족하는 삶을 통해 기쁨을 회복하고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어서 생활의 부흥으로 나아가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시고 채우시는 우리 하나님께 오늘 자족하는 마음을 주심에 감사하고 예수님을 믿는데 기쁨이 없는 우리의 삶을 뛰어 넘어서 우리는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자족하는 삶을 통해서 기쁨을 얻어서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어가서 생활의 부흥으로 나아가길 소원해야 한다. 인생에는 두 얼굴이 있음을 깨닫는 지혜를 간구하여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함을 배우면서 내 안에서는 할 수 없지만 내게 힘들 불어넣어 주실 줄 믿고 예수님 안에서는 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내 모는 형편을,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서 자족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은 곧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사랑한다는 증거였으며, 아울러 그들 가운데서 바울이 사역한 것이 성공하였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곧 바울이 궁핍을 겪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궁핍을 겪었기 때문이 아님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지극히 적은 것으로 만족했으며 또 그것이 그를 만족케 했던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가 궁핍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님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에게 공급해 주실 것을 믿었으며 따라서 만족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겠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와 같이 그에게 있어서도 고난과 역경 속에서 경험하여 배울 필요가 있는 교훈이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이와 같이 삶의 모든 여건에 사진을 순응시키는 것은 은혜에서 비롯된 특별한 생활의 태도이다. 우리가 고난의 여건에 순응하는 것 이것은 비천에 처할 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부유한 여건에 순응하는 것, 이것은 풍부와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것으로서 자만이나 안주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천에 처할 줄 아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교훈이다. 이는 배부름과 부요의 상태에서 오는 유혹이 고난이나 궁핍의 상태에서 오는 유혹보다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모든 여건 속에서 자족하도록 그의 힘이 우리를 가르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바울 사도는 마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힘에 대해서 자랑한 것처럼 보인다. 12절의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에서 그렇게 느끼기가 쉽게 그러나 13절에서 그는 모든 찬양을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있다. 즉 그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은 그의 끊임없이 새롭게 공급되는 힘에 의해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을지라도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다. 이는 모든 일에 있어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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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31일)
제목: "주께서 이루실 회복"
말씀: 출애굽기 4:10~17
대표기도: 나모세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쉐키나), 영광찬양대(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윤대혁 목사님-초빙(미국 LA 사랑의빛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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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0~17,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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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혁 목사님-초빙(미국 LA 사랑의빛선교교회)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풍성함을 내려 주실 줄 믿는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 주시고, 모세에게 사명과 비전을 주신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세는 이 부르심 앞에 “못합니다. 안하겠습니다.‘ 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하고 있는데, 우리 같으면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주님, 나 한 번만 만나주시면 내가 세상 돌아가지 않고 오직 우리 주님만 바라보고 살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주셔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습니다.”라고 말할 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모세는 이와 같은 만남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못합니다. 나는 안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기도 가운데, 예배 가운데 우리를 모세와 같이 만나 주신다면 우리가 모세와 같지 않게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우리도 모세와 같이 안 됩니다. 못합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못 한다고 말할 때는 모세의 실력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7:20절에 보면,
 
*사도행전 7:22,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 모세는 언어와 능력이 누구보다도 출중했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같이 명령하시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지도자로서, 싸움도 잘 했는데 외국 건장한 군사를 죽게 이르게 할 만큼 그의 전투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 앞에 “나는 못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항상 자기 마음 안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나는 무가치한 인생이다. 나는 그 때 나일 강에서 죽었어야 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나처럼 형편없는 인생은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40년을 살았을 텐데, 왜 그가 그렇게 살았냐면 모세 안에는 항상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40년을 살았을 것이다. 모세는 누구와 비교했냐면 항상 어린 시절 함께 자랐지만 지금은 애굽이라는 큰 나라의 왕이 되어버린 그 바로와 자신의 인생을 비교하면서 나보다 못했던 저 바로는 지금 왕이 되어 지금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나는 지금 평범한 무명의 양치기가 되어 살아가니 ‘나의 인생은 끝없이 부족하고 형편없는 무가치한 인생이야.’ 라고 늘 되 뇌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누구는 왕이 되었고 나는 무가치한 인생이 되었고,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누군가 나를 비교하는 순간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나보다 잘 난 사람을 만날까, 안 만날까? 만난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만날까, 안 만날까? 만난다. 나보다 주관적인 생각에 좀 부족한 사람을 만날까, 안 만날까? 만난다. 그런데 살면서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나보다 눈이 큰 사람을 만나면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눈이 작을까?’ 눈이 큰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스스로 눈이 큰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눈이 커졌을 거야’ 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나보다 눈이 더 작은 사람을 만나면 ‘역시 내 눈만큼 크고 아름다운 보석 같은 눈이 없을 거야’라는 그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열등감으로 가든지, 또는 교만함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비교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절대로 주신 마음이 아니다. 인류의 최초의 범죄 함이 이 비교의식 때문에 시작되었다. 미스터 사탄이 뱀을 가장해서 아담과 하와를 속인다. 그러면서 이런 마음을 준다.
 
*창세기 3:5,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단 마귀가 비교의식의 마음을 준 것이다. 누구랑 비교했나?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니까 영원하심,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자기를 비교하니까 자기가 한 없이 초라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그 열매를 따먹고 보자는 유혹을 그 범죄를 시작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사단이 주는 마음이다. 여러분 비교의식은 절대로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의 가치도 잃어버리고 우리의 사명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제가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가서 많은 수업 가운데 설교 학에 관심이 있었다. 모든 전도사님들은 설교 학에 관심을 갖는다. 교수님이 수업을 할 때, 오리엔테이션 할 때, 앞으로 강의하기 전에 한 열 분의 전도사님이 뽑혀서 매주. 마다 이어서 강의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마음에 나도 뽑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열 명 중에 나도 뽑혀서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뽑히지가 않았다. 뽑히지 않음과 동시에 갑자기 그 설교 학에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맨 뒤에 앉아서 엎드리면서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강의 하는데 그 강의 전에 전도사님 한 분이 설교를 하는데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설교가 귀에 잘 안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별로 은혜가 되지 안 되고 버벅 거리시고 설교를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 마음에 평안이 드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기쁨이 이렇게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전도사님 설교를 좀 잘 준비하시지. 내가 뒤에서 중보기도를 해드려야겠다.’ 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이제 설교가 끝나고 나가는 길에 제가 그 전도사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전도사님, 저는 윤대혁 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데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설교를 잘 하세요?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하면서 갔다. 그런데 어느 날은 다른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다. 너무 잘하시는 것이다. 와! 그 잘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왜 이렇게 잘하지? 저 분이 저렇게 잘하는데 이유가 있을 거야 나보다 나이가 세 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나도 3년 후에는 저렇게 잘하지 않을까? 나의 합리화하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제가 그 전도사님을 찾아갔을까? 안 찾아 갔을까? 어떻게 잘하는가? 안 찾아갔다. 그냥 쌩 갔다.
 
여러분 그 신학생이 모인 자리가 어디인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내 목숨의 모든 것들을 드렸던 헌신된 자리에서 이 비교의식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고, 비교의식에 빠져서 가치와 사명을 잃어버리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여러분, 누군가와 비교한다는 것은 나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길에 서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모세와 이와 같았다. “하나님, 나는 안 돼요. 나는 무가치한 인생이에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모세를 다시 만나주셔서 그를 회복시켰던 하나님의 손길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역시도 회복이 필요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회복이 임하게 도는 거룩한 은혜를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키셨는가?
 
I. 첫 번째-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셔서 제일 첫 번째 던졌던 말씀은 이것이다.
 
*출애굽기 3:4,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그런데 이름 없는 사람은 업지 않은가?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는 것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모세가 회복을 누릴 수 있는가? 여러분 모세는 도망자의 인생으로 40년의 광야의 생활을 하면서 그는 내가 모세라는 이름을 누구에게도 한 번도 말할 적이 없다. 아니 말하지 못한 것은 도망자의 인생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된다. 그래서 자기의 신분을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모세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 아니다. 그 뜻이 무엇인가?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았다. 특별한 이름이다. 지금이야 영어이름, 한글 이름으로 듣지만, 그 당시의 애굽에 모세라는 이름은 딱 한 사람, 모세 밖에 없었다. 특이한 이름이었다. 여러분 이런 이름 없지 않은가? 한강에서 건짐 받았다고 해서 한건인가? 낙동강에서 건짐 받으면 낙건? 이런 이름은 안 짓는다. 특이한 이름이다. 내가 모세라는 이름을 아는 순간 그는 신분이 노출되고 잡혀간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장래에 자기의 아내가 되는 십보라가 그 마을에 불한당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모세가 도와준다. 자기의 생명의 은인에게 십보라가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물을 때, 내가 모세라고 말을 못했다. 집에 가서 아버지께 이렇게 이야기 했더니 이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그 이름이 무어냐?” 라고 “너 도와 준 사람의 이름은 알아야 될 것 아니냐?” 라고 했더니 그 여인들이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하면,

*출애굽기 2:19,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모세의 이름을 몰랐다. 한 애굽 사람이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한 애굽 사람으로 불리었지, 모세라는 이름으로 불려 진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다. 여러분 모세에게 이게 얼마나 충격적이겠는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아니, 대체 당신은 누구이기에 내 아내도 그 누구도 이름을 이야기 하지 않았던 나의 이름을 아십니까? 내가 모세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대체 누구이기에 내 이름을 부르십니까?” 걱정과 불안함이 앞섰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 이름을 부르신 것은 모세에게 이런 메시지는 “내가 너를 알이 내가 너를 지었고, 내가 너를 보냈고, 나일 강에서 너를 건졌으며, 네가 애굽에 있을 때, 네가 광야에 있을 때, 지키고 보호한 여호와가 나다.”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모세야, 모세야, 하는 것은 이거다. “너는 나의 존귀한 자녀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고, 너는 내가 지었으며,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모세야, 모세아”, 하는 이름에 담겨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모세 이름만 아시는가? 오늘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 계시는 모든 분들의 이름을 다 아신다. 그래서 목자 되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를 불러내어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아신다. 목회하면서 성도님들이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목사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한다. 그러면 “그럼요, 집사님, 집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요.” “그런데 목사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그 바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그럼요. 그래서 기도를 들어주시니 바쁘신 거 에요 집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 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집사님을 다 알고 계세요..” “정말 그럴까요?” 라고 묻는 분들이 많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임을 믿는다.
 
저에게는 대학원생 아들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방학하기 일주일 전에 컴퍼런스 대회를 한다. 그때는 교실에 부모님을 다 초대해서 아이가 일 년 동안 한 내용들, 아이가 공부한 글짓기, 미술품 이런 것들을 이렇게 전시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내와 함께 갔더니 아이가 설명해 준다. “아빠 내가 그린 그림이야”, “그래? 너무 잘 그렸다. 피카소도 이 만큼 못 그릴 것이다.” 사진도 찍어주고 네가 쓴 글이야? 너무 잘 썼다. 옆에 서봐 하면서 찰칵 찍어주고, 공작품을 소개해서 너무 잘 만들었구나. 하면서 찍어주었다. 그래서 그것을 가져가려고 하니까 선생님이 아직 수업이 일주일 남았기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만 오기를 기다렸다. 방학이 되어서 그것을 가져왔다. 그것을 보면서 그림 잘 그린다. 글 잘 쓴다. 그러니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어느 날 그 애 방을 가보니 그림과 그 공작품들이 집안을 어지럽히는 쓰레기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랑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때깔이 안 난다며 우리가 작정했다. 그래서 아내와 저는 과감하게 버렸다. 집이 너무 깨끗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서 갑자기 아들이 나와서 “엄마, 이것 어디 갔어?” “아니 뭐가?”, “내가 일학년 때 그린 그림과 글짓기 한 것 말에요. 어디 갔냐고?: 했다. 그래서 “그 쓰레기인데 버렸지” “왜 버렸어, 왜 버렸어.” 하면서 방바닥에 누워서 울부짖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아들, 그거 아빠가 발로 그려도 그거보다는 잘 그릴 것 같다.”고 했더니 그래도 “왜 버렸냐?”고 하면서 하는 말이 “할머니 할아버지 오시면 그거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왜 버렸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막 우는데 납득이 잘 안되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안을 어지럽히는 하나의 종이쪼가리에 불가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아들은 속상해 했겠는가? 이유가 무얼까? 하나다. 자기가 만든 것이니까, 내가 만든 것이니까. 너무나 귀하고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가진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있다 없다. 를 평가한다. 그렇다보니까 우리가 세상에 눌려있어서 너무나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쉽게 판단한다. 우리들의 존재를 누가 정하는가?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내가 가진 소유로 결정하지 않는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으시고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이 존귀하고 가치 있는 이유가 됨을 믿는다. 모세가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Calling 앞에 회복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누구와 나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내가 좀 실수가 있고 내가 부족할지라도 내가 좀 연약하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고 무너질 필요가 없다.
 
저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설교학적으로 좋지 못한 핸디캡과 같은 나쁜 습관이 있다. 그게 무어냐면, 저는 설교나 이야기 할 때. 손을 자주 이용해야 한다. 이게 설교학적으로 솔직히 손을 방해하고 시선을, 주위를 산만하게 하기 때문에 좋은 게 아니다. 고쳐보겠다고 한 번은 강대상을 붙잡고 설교를 했더니 말이 안 나왔다. 아무래도 저는 두뇌 에너지와 이 엔진이 이 손에 있는 것 같다. 손이 움직여야 말이 잘 나오는 스타일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도 저는 손을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이렇게 뻗어야 기도가 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선교단체 훈련을 갔는데 아침 열시에 조금만 방에서 7-8명이 이렇게 동그랗게 좁은 공간에서 앉아서 한 시간 반 정도 중보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어떻게 이렇게 기도하니까 옆 사람들이 눈감고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뭐가 왔다 갔다 하면 이게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 전는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계속해서 하는 것이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나가는 문 앞에서 “형제님, 죄송합니다. 자매님, 죄송합니다. 기도할 때 좀 안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가 안 됩니다.”라고 한다. 어떤 형제는 “아, 알겠습니다.” 하고 시큰둥하면서 간다. 어떤 자매는 “아니에요. 형제님, 형제님이 기도할 때, 이렇게 하는데요. 이렇게 손을 뻗으시는 모습이 이 손이 성령의 검 같아서 어둠의 권세가 두 동강이가 난 것 같아요.” 한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그 다음 날 더 크게 했다. 더 크게,,,
 
여러분,
우리 인생에 실수가 같고 좀 연약한 것 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은 우리를 독특하게 고유하게 만드신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나고 체계적인 중보기도 사역자이신 조이도 호슨이 세미나를 했다. 그때 세미나를 하면서 영적인 기도를 강의 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어둠의 권세 공격 가운데 눌려있다면 그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기도하라. 손을 가지고 그것이 ‘성령의 검’인 줄 알고 이렇게 손으로 자르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들은 3만원 주고 세미나를 듣는데 알면서도 타고난 그런 것을 습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버릴 것이 없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하나님은 우리를 고유하게, 독특하게, 존귀하게 지으신 줄 믿는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못해요, 안 해요. 라고 말하는 모세를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시키셨던 것인가?
 
II. 두 번째-날마다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너를 ‘도와줄게’ 하십니다.

-모세가 난 못해요, 난 안 되요. 하니까 하나님께서 갑자기 설득하신다. 그런데 그 설득에도 안 되니까 모세가 출애굽기 4:13절에서 너무나 생뚱 맞는 표현을 한다.
 
*출애굽기 4:13,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이 모세의 숨겨진 스토리가 여러분 있는데 그 내용은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이 되었지만 그를 키운 사람은 모세의 친모인 요게벳이라는 여인이 유모가 되어 모세를 키우는데 모세에게 젓을 먹이고, 어렸을 때부터 무얼 가르쳤냐면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히브리사람이다” “너를 지금까지 지켜 주신 것은 하나님이시다.” “나일 강에서 건진 것은 너의 양모인 바로의 공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신 것이다. 네가 이 애굽의 왕자가 된 이유는 지금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라고 너를 이 자리에 보내신 것이다.” 이것을 교육 받으면서 모세가 자랐다. 모세가 만약에 애굽 땅에서 애굽 사람처럼 살겠다고 했다면, 모세가 한 선택은 누구보다도 히브리사람들을 괴롭혀야 된다. 그가 못 살게 굶으로 “나는 히브리 사람이 아니야, 나는 애굽 사람이야.” 라는 것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안 했다. 모세는 내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나의 민족 형제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통 받고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가 살고 있는 마을에 간다. 딱 가보니까 애굽 사람이 자신의 형제를 때리면서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화가 나서 그걸 말리면서 애굽 사람을 쳤는데 죽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모래에 숨겼다. 그때 모세의 마음이 어땠을까? 뿌듯했을 것이다.
 
내가 왕의 권세를 가지고 내가 나의 민족을 도왔다. 아마 어깨 힘이 가득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의기양양해서 자신의 형제들을 만나고 가면 자신을 박수치고 환영해 줄줄 알았다. 그런데 가보니까 이제는 나의 형제들끼리 유대인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힘을 합쳐도 힘들 판에 우리가 서로 싸우면 어떻게 하냐고 말리는 가운데 그렇게 말한다. “어, 네가 우리의 왕 노릇하려고 하냐? 이제는 판단 자가 되어서 왕 노릇을 하네.” 그래서 모세를 고발해 버린다. 저자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고....
 
그래서 모세가 40년의 광야, 도망자의 인생을 시작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내가 도와주었던 나의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한다. 그랬더니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면서 모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후회, 후회의 시간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그때에 매를 맞는 형제를 도와주지 말았어야 했어. 매를 맞아 죽도록 내가 가만히 놔두어야 하는데, 내가 그들에게 형제가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들을 도와주어서 지금 이게 뭐냐? 배신당하고 내가 그들을 돕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 후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고통 받고 있는 너의 형제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의 손에서 구하라.” 이 말을 들었을 때 모세가 어땠을까? “하나님, 나를 아신다면서요? 나를 지으셨다면서요? 제가 젊었을 때 40살의 나이에 힘이 있었을 때, 제가 그 일을 하려고 제가 그들의 힘이 되어주려고 했는데요.” “광야생활이 배신입니다. 광야생활 40년을 고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보고 그 일을 하라구요? 하나님,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세요. 저는 안합니다. 저는 절대로 안합니다. 보낼만한 보내세요.” 지금 모세의 심정이었다.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한다. 이 모세의 심정이 우리 모두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담겨져 있다. 열심히 신앙생활과 기도와 봉사와 선교도 훈련도 받았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의 가정만은 지켜주세요. 우리 부모님의 건강과 자녀를 보호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했고, 열심히 봉사했고, 수고의 헌신을 했건만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이다. 마음이 어떤가? ‘하나님 저는 다시는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헌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낼만한 사람 시킬만한 사람을 시키세요. 저는 절대로 다시는 예배는 드려도 기도도, 봉사도, 헌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도 많이 만나게 된다.

 
‘하나님, 저는 안 해요.’ 혹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있지는 않은가? 저도 이 모세와 같이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어둠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저의 아버님은 개척교회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저는 어린 시절에 개척교회가 1-2년 지나고 나면 개척교회가 아닌 줄 알았는데 저의 아버지가 섬겼던 교회는 계속 개척교회였다. 그렇다보니까 경제적으로 이렇게 넉넉하지가 않았다. 초등학교때 제 작은 마음이 뭐냐면, 일 년치 육성회비를 한꺼번에 내보는 게 제 소원이었다.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육성회비가 5860원이었다. 항상 육성회비 안 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기도 했다.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님은 왜그리 자식은 많은지, 저의 형제가 일곱이다. 누나가 7명에 아들 저 막내 하나이다. ㅎ그러니까 여섯 번째 누나를 낳고 나서 누나를 안고 기도는 안 해주시고 “하나님, 나도 아들 주세요. 아들 주시면 목사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제 허락도 없이 저를 드려서 제가 이렇게 목사로 와 있다. ㅎㅎㅎ. 뭐 그래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목회자의 길이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잘 지내왔다. 어려움이 굳이 없었다.
 
‘하나님, 저는 안 해요.’ 혹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있지는 않은가? 저도 이 모세와 같이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어둠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저의 아버님은 개척교회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저는 어린 시절에 개척교회가 1-2년 지나고 나면 개척교회가 아닌 줄 알았는데 저의 아버지가 섬겼던 교회는 계속 개척교회였다. 그렇다보니까 경제적으로 이렇게 넉넉하지가 않았다. 초등학교때 제 작은 마음이 뭐냐면, 일 년치 육성회비를 한꺼번에 내보는 게 제 소원이었다.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육성회비가 5860원이었다. 항상 육성회비 안 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기도 했다.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님은 왜그리 자식은 많은지, 저의 형제가 일곱이다. 누나가 7명에 아들 저 막내 하나이다. ㅎ그러니까 여섯 번째 누나를 낳고 나서 누나를 안고 기도는 안 해주시고 “하나님, 나도 아들 주세요. 아들 주시면 목사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제 허락도 없이 저를 드려서 제가 이렇게 목사로 와 있다. ㅎㅎㅎ. 뭐 그래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목회자의 길이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잘 지내왔다. 어려움이 굳이 없었다.
 
제가 총신대학을 딱 들어가고 나서, 이제 입학소식을 듣고 등록하는 시점에서 얼마 안 남기고 저희 아버지께서 고향을 내려가시는 길에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어머니가 전화가 아버지가 안 보이신다며, 전화가 왔다. “그래요? 아버지 장난 잘 치시니까 출발할 시간에 나타나실 거 에요.” 라고 하고 기다렸는데, 출발시간이 30분이 지났는데도 또 아버지가 안 보이신다고 하셨다. 저희 어머니가 고속버스 온 전체를 찾아나 다니셨다. 이곳에 인상착의를 물어도 모른다고 한다. 화장실에 술 취한 사람이 한 분 누워있긴 한데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세 시간, 네 시간이 흘렀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어머니 머릿속에 술 취한 사람이 누군가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 화장실에 갔더니, 외투를 벗어놓고 거기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이다. 4시간 만에 발견되었다. 강남 성모병원에 갔지만 수술실이 없었고,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바로 수술을 못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수술을 했는데, 수술을 앞두고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수술을 해도 살 가망은 10%도 안 된다고 했다. 살아도 말씀은 못하시고, 한 쪽 몸은 못쓰시고, 생각도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했다. 그 수술을 하셨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오전에 다녀오시면 그 다음 오후 시간에 제가 이제 들어갔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모습을 보면서 제가 아버지 앞에 했던 말은 “저 목사 안합니다. 목회 안합니다. 아버지를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저 목사 안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하고 나왔다. 밖에 기다렸던 누님이 아버지 어떠시니? 제가 아버지 형편을 보지 않았다. 제 할 말만 하고 나왔다. 누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누나, 나 학교 등록 안 해, 나 목회자 안 해,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하나님, 나 믿을 수 없어. 나 안 해”라고 했다. 누님이 듣고 있다가 너무나 속상했던지, “너 아빠가 신학대학 갔다고 얼마나 기뻐하셨는데, 깨어나셔서 대혁아, 너 열심히 공부하고 있니?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말씀드릴래?”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그래서 억지로 대학을 등록하고 다녔다. 그러고 나서 오랜 시간 중환자실에 계시고 재활병동에 계시면서 5-6개월 계시다가 퇴원을 하셨는데, 그러면서 저희 아버지의 통장을 정리하다 보니까 마이너스 통장이 4개나 발견되었다.
 
개척교회 목사님은 다 마찬가지이다. 먼저 현찰을 받아서 교회 물건을 사고 있을 법한 그 물건이 다 교회 에어컨, 의자, 컴퓨터 등을 바꾼 것이다. 교회는 우리와 상관없다고 그것을 감당해 주지 않았다. 더 이상 말씀이 어버버 하시고 생각이 짧아져서 목회를 하실 수 없어서 퇴직금을 가지고 어머니가 사셔야 하는데, 치료비로 모든 퇴직금이 나갔기 때문에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교회에 대한 상처가,,, 하루는 이 뇌출혈로 쓰러지신 분은 환경이 바뀌면 안 된다고 저희 어머니가 운동을 시키신다고 큰 벨트를 사다가 아버지를 그 안에 놓고 이렇게 운동을 하시는데, 하루는 장로님이 찾아오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모님, 목사님 운동을 안 하시면 안 되냐고, 목사님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말씀도 못하시고 저렇게 되셨는데 덕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운동을 안 하시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저희 어머니 은평구에 사셨다가 가장 끝 방향인 도봉구로 바로 이사를 하셨다. 제가 이런 것을 봤으니 제가 이 목회를 하고 싶었겠는가? 그래도 목회자 아들로 갖고 있는 십계명 외 열 한 번째 갖고 있는 것이 ‘들키지 말자.’ 열심히 봉사해도 항상 들키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까 제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학교는 다니지만, 제가 친구 만날 때 제가 했던 것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봐도,,, 뻔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살았다. 그것도 그런데 하나님은 저에게 다가오셨다. 내적 치료를 해주셨다. 저를 만나주신 것이다. 저에게 다가오셨다. 남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고 감격이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께 이야기 한 것, “하나님, 왜 그러신 거에요? 하나님, 왜 우리 아버지 왜 그렇게 만드신 거 에요? 우리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 왜 그러신 것이냐?” 라고 얼마나 하나님께 따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시간이 꽤 흘렀다. 제 주변에 하나님께서 무너지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가 더 문제이다. 그때부터 제 기도가 바뀌었다. “하나님, 나 이제 어떡해요?” 목회자의 서원기도로 태어나서 그 길만이 다 인줄 알았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제가 하나님 원망하고 저주하고 살았는데, “이제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다. 아버지를 멘토 삼았는데 지금은 저렇게 누워계시고 아무것도 못하시는데 “이제는 하나님 어떡해요?”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니 너는 내게 와 배우라 내가 너를 가르치리라.” “너는 내게 와 배우라 내가 너를 가르치리라.” 하신다. 이 말씀이 제 가슴에 확 오셨다. 그 때 기도했다. “주님, 이제는 제가 어떤 인생이고 어떤 일을 경험했던지 간에 저는 날마다 하나님께 엎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가르쳐 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제가 하나님 앞에 날마다 엎드리겠습니다.” 그런 기도와 함께 저를 신비롭게 저의 삶을 이끌어 가셨다.
 
제 능력과 실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셨다. 오륜교회에 사역자로 사역을 하게 하시고 꿈은 있었는데 어떻게 막막하게 생각만이 있었는데 갑자기 미국에 남가주 사랑의교회에서 저를 불러주시는 것이다. 함께 사역하자고 하신다.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2013년도에는 아버지가 인생 가운데 아픔의 시간 가운데 계실 때, 사랑의빛선교교회에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지금 안아주심의 본당 현장의 교회에서 설교 하고 있다는 것에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있는지, 내가 내 힘으로 해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맡겼더니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열어 가시는데, 이렇게 되어 지게 하시는 역사가 있을까? 늘 감사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빛선교교회에 부임(赴任)할 때는 저희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셨다. 그렇게 쓰러지고 나셔서 20년을 투병하시고 사셨다. 마지막을 침상에 누우셔서 아무것도 기력 없이 사실 때에 사랑의빛선교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되었다는 이야기를 저희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누워계신 채로 힘이 없는데도 손을 들더니 박수를 이렇게 치시더라는 것이다. 어머니 옆에 계시는데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어머니보고 갔다 오라고 손짓 하신 것이다. “당신 아픈데 어떻게 가”라고 했다고 하신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제가 청빙 후에 2주 만에 하나님이 아버지를 부르셨다. 지나왔던 인생이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의 시간이었지만,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을 사니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셨다.
 
여러분, 저에게만 이런 일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줄게 다시 한 번 시작하자. “내가 너에게 준 이 지팡이를 가지고 사명의 길에 서서 그 일을 감당하지 않을래?” 우리 주님께서 손 내밀어 주실 때, 우리가 그 손 붙잡으면 산다. 그 손 붙잡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못해요. 나는 안 해요.” 하는 그 모세를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 시키셨을까?

III. 세 번째-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를 준비하였다” 하십니다.
 
*출애굽기 3:10-11,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 이야기를 들었던 모세가 이렇게 반문한다. 11절에 보면, 내가 누구이게, Why me?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까?” 한다.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궁에 있는 애굽 사람들이 바로를 만나게 해주겠는가? 당시 애굽은 권한과 권력을 가진 나라이다. 당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로다.” 의 신앙의 고백을 했던 것은 그의 삼촌 모르드게가 하만의 누명을 쓰고 죽게 되었던 것을 전달하면서 네가 사랑받는 왕비이니까, “네가 왕에게 가서 하만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고 네가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냐?”고,. “우리 민족을 살려 달라고 이야기 하면 안 되겠냐”고 하라고 물을 때에 에스더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왕비라고 할지라도 왕이 저를 부르지 않는데 왕을 만나러 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믿음의 고백으로 이 표현을 한다. 그러면, 양치기였던 모세가 “내가 바로를 만나겠소.” 하면 그 문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왕에게 전하세요.. 모세가 왔다고”, 그러면 바로가 모세가 왔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을 했겠는가? “누가 왔다고? 어린 시절 함께 지낸 그 모세가 왔다고?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고? 그 모세가 왔다고? 얼른 들어오라.”고 할 것이다. 왕을 무사통과할 사람은 모세 밖에 없었다.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로 왕에게 전해야 하는데 거기는 언어가 달랐는데, 그 애굽에서 쓰는 말과 그 지혜와 명철함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모세 밖에 없었다.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서 누구도 옴짝달싹을 못하고 지금 살고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데, 포로가 되어서 있는데 유일하게 유대인 사람 누구밖에 없는가? 모세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미지의 땅, 그 광야로 인도해야 하는 한 번도 애굽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했던 그 이백만의 백성들이 애굽이 밖에 무엇이 있고 그 광야에 뭐가 있는지 모를 때, 유일하게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은 모세 밖에 없었다.
 
여러분, 모세를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셨다. 40년의 광야 시간들이 잊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들이 내 인생에 버려진 시간 같지만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큰일을 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의 굴곡은 은혜의 저장소’이다. 우리는 살면서 굴곡 없는 인생은 없다. 다리미로 필 수만 있다면 그 굴곡을 피고 싶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그 굴곡은 뭐가 되냐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면 그 길은 평지가 될 수 있고 그 채워진 그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복되고 귀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게 될 줄 믿는다.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낸다 할지라도 어떤 어려움의 시간을 보낼지라도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심을 믿고 날마다 우리를 복되게 쓰실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누구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다. 저와 여러분은 늘 실패하고 넘어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늘 가다가와서 손을 내밀어 주신다. “다시 한 번 믿고 나를 의지하고 시작하지 않을래?” 하신다. 그 손을 붙들면 다시 회복의 길에 설 줄 믿는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생의 어떤 어려움과 형편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복되고 귀하게 쓰실 그날을 소망하며 날마다 회복의 길에 서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요약
우리가 세상이 던져주는 말과 세상이 무너뜨리는 말 가운데 우리가 늘 무가치 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저는 못합니다. 저는 안 돼요” 라고 하면서 실패 가운데서 살고 있는 왜 나만 이러하냐고 원망하며 사는 우릴 용서하여 주시길 기도하며 우리에게 주신 회복으로 날마다 존귀한 자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광야의 길이지만 모든 것이 은혜의 저장소가 되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게 되는 도구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모세가 자신은 말에 능치 못하며 적당한 사람이 아니니 보낼 만 한 자를 보내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와 늘 함께하여 부족함을 채우겠다고 위로하시며 그를 권면하셨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다만 그 힘을 의지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내와 자비로써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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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2년 7월 30일)-(여름특별토비새-Ⅳ)
제목: "우리를 보내신 이유"
말씀: 요한복음 20:19~23
찬양인도: 쉐키나, 오준석 전도사님
대표기도: 김도훈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암송인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설교자: 고석찬목사님-초빙(대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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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9~23,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 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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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찬목사님-초빙(대전중앙교회)
-여러분 반갑다. 잘 지내신가요? 사랑의교회가 은혜 중에 굳건히 서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 중에 한 사람이다. 은혜 중에 모든 예배가 회복되고 또 이전 보다 더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우리 옆에 분과 인사하자. “당신의 얼굴을 보니 살맛이 납니다.”
 
좀 오래전에 이야기이다. 새벽에 전화가 왔다. 새벽에 보통 전화가 오면 좋은 전화는 많이 없다. 새벽에 전화가 왔는데 과테말라에 선교를 나갔던 우리 유스 담당 페스터가 전화가 왔다. 전화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목사님, 아임 쏘우 쏘리!, 그냥 목사님, 미안합니다. 하면 되는데, 목사님, I’m so sorry!” 그리고 난 다음에 계속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목사님, 정말 미안해요.!” 한다. 그 이유가 뭐냐면 저희 딸도 그 선교 팀에 포함되어 있는데 여러 사람을 모아서 이 선교 팀을 꾸려서 갔는데 미안하다고 하는 모습을 보니까 사고가 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냐고 했더니 밤에 사역을 마치고 11시 넘어서 버스를 타고 오는데, 모두가 다 잠이 들고, 운전사도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덕을 넘어오다가 추락을 했는데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했는데 다행히도 그 밑에 공사로 흙을 파놓아서 좀 많이 흙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서 다행히 큰 사고는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아이들이 많이 다쳤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우리 아이도 있지만 그 중에 한 아이는 응급실로 갔고 다 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인데 너무 미안하다며 그래서 사태 수습을 한 것이다. 그 중에 한 아이는 얼굴을 109바늘이나 꿰매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교나 전도사역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다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순교 당하는 일도 우리 한국교회 역사상, 또한 해외 선교 나갔다가 죽게 되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더군다나 여러분, 요즘처럼 인식이 좋지 않고, 코로나로 인해서 분위기가 좋지 않고 사회적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 전도한다. 접촉한다. 또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우리에게 지금 부담되는 일이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자, 다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는 부름을 받았지만, 보냄을 받은 제자들이다. 그러나 여러분, 요즘처럼 이러한 상황에서 더군다나 여러 비용도 많고 힘든 상황에서 매년 선교 활동을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인재와 또 사고로 다치는 이런 가운데서 더군다나 이런 시기에서 우리는 계속 선교사명, 전도의 사명을 해야 한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전도에 대한 것을 알지만 아마 마음은 무거울 것이다. 입술로는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지만 여러분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고 입술로는 고백해도 우리 마음으로는 내키지 않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전도를 해야 하는가? 할 수 있다.
 
여러분, 어떠한가? 이런 한국사회 이런 형편 속에서도 우리는 전도하고 선교해야 하는가? 계속해서 사고가 일어나고 누군가에는 사랑하는 아들인데 얼굴에 109바늘을 꿰맨 이런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계속 선교해야 되는 것인가? 이 한국 사회의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전도해야 되는 것인가? 예수님이 만약 이것을 물으신다면, 아마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실 것이다. 지체하지 않고 “YES” 하실 것이다. 그 이유가 뭐냐면 오늘 본문을 읽은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자마자 제자들 앞에서 처음 인사를 하사는 시간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다. 제자들이 다 도망치고 그런 상황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을 만나서 할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베드로를 지목 했을 것이다. “내가 너를 눈 여겨 보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부활하신 그날 오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무서워서 다 모여서 숨어 있는 이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야기 하시고 그리고 나서 가장 하신 말씀이자 명령과도 같은 사명, 오늘 우리가 읽은 21절 말씀이다.
 
*요한복음 20:21,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지금 제자들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모른다. 제가 아무리 이 말씀을 묵상해도 제자들이 이 말씀을 이해했다고 하는 그런 이해가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말씀을 안 하셔도 되는데 지금 부활하시자마자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처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만나자마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신 다음에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것이 예수님의 첫 말씀이자 주신 사명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 땅에 있는 교회는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야 하는가? 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자마자 제자들에게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시는가? 오늘 이 땅에 있는 한국교회, 우리 조국 교회는 이 어려운 상활 속에서도 왜 우리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위해서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야 하는가? 입술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자신이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는 왜 자신 있게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오늘 저는 우리가 세상의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내는 이유,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이유.
 
I. 우리 하나님이 보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여기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시면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천사를 보내시고 하나님의 일꾼들을 보내신다. 어려움이 있을 때,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못할 때,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수많은 주의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 주셨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모든 사람들, 천사들을 보내시더니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들을 보내셨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을 부르셨다.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시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보내시고, 우리 이 대한민국에도 보내시고,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찾아가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시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보내시는 것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인가? 왜 성경전체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가? 왜 성경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 아들까지 보내시는 이야기로 이 성경이 채워져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랑하면 보내신다. 한국은 배달이 잘 되어 있다 누군가가 무얼 보내주어서 사실 다 보진 않지만 제목이 특이해서 보았다. 제목이 무어냐면, ‘너에게 밥을 보낸다.’는 것이다. 밥을 보내고 장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봤다. 내용이 이것이다. 아들 생일인데 바닷가에 사는 그러니까 고향은 바닷가이고., 아들은 도시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 같다. 바닷가에 있는 어머니가 빨래를 널면서 아들 생일이어서 아들을 생각한다. “아들, 너는 소고기 국보다 황태 미역국을 더 좋아했지”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 그렇다. 소고기보다 황태 미역국을 더 좋아했다고, ‘오늘 아들 생일인데, 미역국은 먹으려나?’ 부모의 마음이다. 그 아들은 영상이 바뀌는데 엄마의 염려와는 관계없이 열심히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열심히 오락을 하고 이제 집에 들어와서 공부하려고 하는데 공부가 잘 안 된다. 침을 흘리면서 자고 있다. 자고 있는데 카톡이 온 것 같다. 깜짝 놀라서 아이가 보더니 메시지에 이렇게 씌어있다. “아들, 생일 축하해, 좋은 것 먹어.” 아마 황태 미역국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그 영상이 나오면서 이런 글이 있는 것이다. ‘지금 밥 한 끼 보내주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사랑하면 지금 밥을 보낸다는 것이다. 사랑하면 여러분 보낸다. 사랑하면 준다. 뭐라도 준다. 게리 채프먼의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라고 하는 책이 있다. 결혼한 커플들에게 많이 선물했다는 책이다. 뉴욕 타임지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 중에 하나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계와 또 여러 가지들을 연구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섯 가지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공통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의 언어, 다 말은 아니지만 몸짓 이러한 여러 가지를 통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쉽게 이야기 하면 사랑하면 다섯 가지의 언어로 나의 마음을 알려주고 사랑을 보낸다는 것이다.
 
※게리 채프먼의 사랑의 다섯 가지 언어.
1)인정하는 말(Words of Affirmation). 2)함께 하는 시간(Quality Time).
3)선물(Gift) 4)노동과 봉사(Acts of Service). 5)스킨십(Physical Touch).
 
1)인정하는 말(Words of Affirmation).
-그중에 첫 번째가 뭐냐면 인정하는 말이다. 사랑하면 인정한다. 잘못했는데도 너무 잘했다고 한다. 너니까 이 정도라고 이야기 한다. 네가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아름답다고 이야기 한다. 사랑하면 인정해 준다. 여러분 어떠한가? 많이 인정하는가? 우리 삶에서 우리는 인정이 많이 필요하다. 오늘 이 시대는 너무 힘들기 때문에 인정이 필요하다. 옆에 분과 이야기 해보라. “너 때문에 대한민국이 사는 거야.”
 
2)함께 하는 시간(Quality Time).
-사랑하면 말만 주는 게 아니다. 거정 먼저는 말이고 사랑하면 입이 열린다. 그래서 말을 한다. 그 다음에 사랑하면 일단을 시간을 같이 보낸다. 시간은 삶을 주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대부분 시간을 주는 것에 많이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남자들은 말을 잘 못한다. 격려하는 말, 인정하는 말, 하려고 애쓰는데 이상한 말을 하기 때문에 말을 안 하는 것이 많을 때가 많다. 그래서 말을 주로 안 하고 대답을 하고 그리고 주로 같이 있다. 여러분 혹시 남편, 사랑하는 사람이 표현도 잘 못하고 그저 같이 있기만 원하지만 우리는 그렇다. 여성분들이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한다. 이렇게 같이만 있냐고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사랑하는 것이냐고 하는데, 여러분 그것은 굉장히 사랑하는 것이다. 한국 남성들은 특별히 같이 있는 것, 이거 그냥 하는 것 아니다. 싫으면 안 한다. 물론 싫어도 같이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있긴 하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함께 하는 시간은 Quality Time이다. 아주정말 양질의 시간인데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을 같이 한다.
 
3)선물(Gift)
-시간, 인생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내가 가진 물질, 이것으로 선물도 준다. 물론 사람마다 가질 형편이 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사랑하면 무엇이든지 주고 싶다.
 
4)노동과 봉사(Acts of Service).
-이것은 수고를 해도 힘들지 않은 것이다. 연애하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가면서 운전하고 코피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피곤하냐고 하면 하나도 안 힘들다고 한다. 사랑하면 수고해도 자식이 필요한 것을 위해서 새벽부터 일하면서 수고해도 힘든지를 모른다. 사랑하면 노동과 수고 이것이 따라간다. 나의 힘을 준다.
 
5)스킨십(Physical Touch).
-내 몸을 주는 것이다. 사랑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준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는지를 여러분 생각해 보셨는가? 우리 예수님의 삶을 묵상해 보면 이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가 다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아들의 입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신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인정한다.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네가 치유함을 받았도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로다.” 말씀하시고 축복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땅에 보내셔서 이 땅에서 사랑하는 자녀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도록 하셨다. 이 땅에서 시간을 보내시고 이 땅에서 함께 먹고, 함께 살면서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귀신 들린 자들에게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 음식과 양식과 병 고침과 치유와 회복의 선물을 주셨다. 그리고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심지어는 오 밤중에 밤새도록 밤이 맞도록 기도하기까지 우리 주님은 모든 수고를 하셨지만 힘들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골고다로 걸어가시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자신의 온 몸을 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렇게 보내시고 주시고 결국에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3:16절에서 우리에게 잘 설명해 주신다.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요한일서 4장 9절을 좀 더 우리에게 의미가 다가오게 설명한다.
 
*요한일서 4:9,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셨기에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이유, 아들을 보내시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사랑하는 일꾼들을 보내시는 이유, 그것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사랑하시는 방법은 누군가가 가야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낸 누군가가 가서 그 보낸 사람이 있을 때, 이 보냄 받은 그런 사람이 보낸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증거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아들을 보내시고 사랑하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셔서 생명에 이르기 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아프리카 오지에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가? 여러분, 누가 이 조선 땅, 누가 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 중에 하나였던 이 대한민국에 자기의 아끼는 자녀들을 보내겠는가? 오자마자 풍토병에 죽고, 아픔 가운데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는 이러한 일들, 토마스 선교사 같은 경우에는 26살에 대동강에 와서 성경책 던지고 죽었다. 여러분, 누가 자기 아끼는 자식을 보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보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사람은 보냄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불타고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시면서 사랑을 표현하기 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구나! 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사랑은 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일꾼으로 보내시고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시고, 지금도 성령 안에서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시고 여러분이 놓고 기도하는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금도 하나님이 일꾼들을 보내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셨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땅에 교회는 보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코로나가 범람하고 접촉하는 것이 쉽지 않고, 선교와 전도에 수많은 비용이 든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직접 가지 않으면 보내는 사람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가야만 우리 뒤에 보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사랑의 하나님을 전할 수가 없고 우리가 가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십자가의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서 교회는 계속해서 보내야 하고, 그리고 우리는 가야하는 것이다. 어떤 대가와 어떤 환경의 문제가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이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조국 교회가 쉽지 않은 상황에 있다. 이 땅에는 성도를 전도하면 부담스러워한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번 특새와 토비새의 주제처럼 하나님께서 성령의 갑절의 은혜를 주셔서 영감의 갑절을 부어주셔서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의 심령을 깨닫고 그 갑절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저와 여러분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보냄 받은 자로 사랑하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이유, 이 땅에 있는 교회가 계속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일꾼을 보내야 하는 이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II. 우리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교회에 주셨고 교회에만 죄 사함의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여러분 23절의 말씀을 보겠다.
*요한복음 20:23,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곧 이 말씀을 하셨다. 가서 너희가 누구의 죄를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우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 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죄, 자신의 죄도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친히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허물 많은 우리 죄인들을 통해서 죄 사함의 권세가 나타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영혼은 살리는 일, 마귀 권세를 이기는 일은 우리 힘으로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서 먼저 이 말씀을 하셨다. 22절 말씀을 보면
 
*요한복음 20:22,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 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이제는 성령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전도의 심령, 죄 사함의 권세가 나타나고 하나님으 ㅣ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것은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오직 너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를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주신 이유는 권능을 받고 권능의 능력 안에서 증인되기 위한 것이다. 성령을 받아야 입이 열리는 것이고,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 선포되며, 성령을 받아야 죄 사함의 권세를 능히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을 받아야 입이 열리며 이 땅에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죄 사함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조국 교회가 하나님의 영을 사모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코로나로 힘들고 모든 것이 쉽지 않고 모든 것이 회복이 더딘 가운데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성경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구하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이 다시 열리게 하시고 우리의 머릿속에 방해 했던 생각들을 소멸되게 하시고 지금도 보내기를 원하시는, 그리고 지금도 죄 사함의 권세가 나타나게 원하시는, 지금도 한 영혼, 한 영혼이 아버지께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지금도 문 밖에서 기다리시는 탕자를 바라보고 계시는 우리 그 아버지의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가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하는가? 우리가 전도하고 또 선교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오늘 20절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요한복음 20:20,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시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 주신 것은 손과 옆구리이다. 손에는 못 자국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못 자국이 있다. 옆구리에 무엇이 있는가, 창 자국이 있다. 못 자국과 창 자국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모든 피를 다 흘리시고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이야기 한다. 뿐만 아니라 손과 옆구리의 창 자국은 이 모든 상처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왜 보내셨는지를 알려 주신다. 죄 사함의 권세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를 알려 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손과 옆구리는 우리를 사랑한 흔적(痕迹)이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흔적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대가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보여 주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잘남과 우리의 가진 것과 우리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가서 우리 대한민국이 얼마나 잘 살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선교와 전도를 막을 수 있다. 우리가 가서 보여주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주셨는지, 우리가 이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우리 주변에 있는 영혼들에게 다가가서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것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우리 몸에 생긴 손자국과 창 자국과 우리 삶에 우리 몸에 인생에 우리의 마음과 얼굴에 새겨진 사랑하는 대가의 그 흔적들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한다. 영혼을 섬기는 다락방 순장님들은 그 영혼들을 끌어안기 위해서 정말 감당할 수 없는 그러나 주님께서 남겨주셨기 때문에 사랑해야 해야 하는 그 영혼들을 사랑하다가 생긴 못 자국과 창 자국과 우리의 마음의 상처와 눈물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알려 주시는 하나의 증표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창 자국이고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이렇게 계속해서 보내시는지, 우리 자신의 삶에 허락하신 그 모든 삶이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 자국이요 못 자국인 것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 여러분 포기하지 말라.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열면 죄 사함의 권세가 나타나지만, 우리가 닫으면 죄 사함의 권세가 사라진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우리 가족 식구들, 내가 엎드리고 내가 간구하지 않으면 죄 사함의 권세는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죄 사함의 권세로 해방시켜 주실 영혼들이다. 우리 교회,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 일터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분들이다. 그분들에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들을 위하여 얼마나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지 그들 때문에 얼마나 고통가운데 있는지, 사도 바울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고백하고 수많은 유대인들로부터 핍박(逼迫)울 받으면서도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토록 기도하며 엎드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 또한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죄 사함의 권세가 그들에게 나타나도록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오스틴 시티 라이프 교회의 조나단 닷슨 목사님의 제안은 이 부분에 대해서 여덟 가지의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오스틴 시티 라이프 교회의 조나단 닷슨 목사님의 제안.
⓵비 기독교인들과 식사하라.-성도들 간의 식사만이 아니라 직장에서 이웃들과 기회를 만들라.
⓶자동차를 이용하지 말고 걸어라.-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라. 걸어야 만난다. 개를 가지고가라. 애완견들이 먼저 인사를 한다.
⓷같은 장소를 같은 시간에 가라.-사람은 습관적으로 같은 장소를 가라. 그 시간에 있는 사람과 대화.
⓸비 기독교인들과 취미를 함께하라.-서로 기도하고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축복하고 격려하라.
⓹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라.-휴식이나 일과 시간 이후에 서로 묻고 대화 하고 학부모와 대화 하고 영향력의 기회를 만들라.
⓺자역의 비영리 단체 봉사에 관심을 가져라.-주변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라.
⓻지역사회 행사에 참여하라.-봉사나 행사에 참여하여 섬겨라.
⓼이웃을 섬겨라.-우리 주변의 일들과 이웃들과 어떤 개선에 대한 참여에 동참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영성가인 헨리 나우웬이 쓴 책 중에 ‘거울 너머의 세계’라는 책이 있다. 어는 음산한 아침에 뒤에서 조용히 다가오던 지나가던 차에 넘어져서 헨리 나우웬이 다치게 되는데 이것이 그렇게 큰 부상으로 중환자실에 오랫동안 머물도록 할 줄 몰랐다. 헨리 나우웬이 죽음이 바로 앞에 이르렀다고 느낄 정도로 그에게는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헨리 나우웬이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발견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와 남 속에 남아 있던 해결되지 않은 분노가 자기 인생의 마지막에 괴롭혔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인지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분노, 내가 해결하지 못한 분노,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해결되지 않은 이 분노, 이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남이 나를 용서할 기회를 주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헨리 나우웬이 이 죽음 앞에서 발견하게 된다. 내가 용서 못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남이 나를 용서할 기회가 없이 내가 죽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나 때문에 남은 삶을 죄책감에 시달려야 되고, 이것으로 인해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남긴 채 떠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그가 고백을 했다.
 
“우리는 사랑에 주리고 목말라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줄 수 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모두를 품어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라고 보냄을 받았다.” -헨리 나우웬-
-하나님이 나를 죽이지 않으시고 다시 보내신 것은 남아 있는 관계를 해결하다. 죽기 전에, 아직도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 주셨다면 내가 해결할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아직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고 아직도 내가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아직도 내가 다가가야 할 사람이 있고 내가 용서하고, 용서 받는 사람이 있다면 온 세상의 영원한 심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돌아와야만 하는 그런 인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아침에 여러분도 아직 사명이 남아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내기 위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여러분이 용서할 사람들이 있고 여러분이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살려 주셨다면 우리는 아직 누군가에게 보냄을 받기 위한 우리를 기다리는, 우리를 만나기 원하는 누군가를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여러분을 살려 두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이 6.25때에 안동에 교회의 집회를 가셨다. 봉사이니까 안동에서 집회하시고 그 다음 날 빨치산들이 내려와서 집을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너무 마음이 아픈 가운데 성도들이 와서 이야기 한다. 예배에 더 많이 왔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까 이제는 집을 지킬 집이 있었고, 집에 애들이 있어서 지금은 집이 없기 때문에 다 함께 교회로 왔다고 했다. 이러한 말들을 듣고 한 편으로는 감사하고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파서 지은 시가 있다. 여러분이 아마 느낌이 있을 것이다. 다 알고 있겠지만,
 
“가시 밭에 백합화 주의 성도여, 쉬지 않고 찌르는 고통에 남모르는 눈물이 몇 번이던고, 주님께서 내 눈물을 씻으리,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나의 사랑은 아름다운 향기를 떨친다.” -이성봉 목사님-안동 색거리-

-이 시를 가지고 현대에 맞게 노래를 만든 것이 그 노래이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때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태양을 보라
저기 서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아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겠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때
나는 만족하였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의 백합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의 백합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려울 때 더 부흥했다. 고통이 임할 때, 그 때가 예수 향기를 더 날린다. 백합화가 가시밭에 들어가 있을 때, 바람이 불고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면 믿음이 흔들리면서 더 많은 상처를 입게 되고 더 많이 아픔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더 많은 향기를 진동하게 되는 것처럼 이 땅의 성도, 이 땅의 주님의 교회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힘들수록 사회가 압박하면 할수록 고통가운데 있을수록 이때가 바로 부흥의 때이고 이때가 하나님의 은혜의 때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펼쳐질 때이기에 지금이 바로 전도할 때이다. 지금이 선교할 때이고 지금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보냄 받은 자의 삶을 살면 우리를 사령하셔서 지금도 보내시고 나까지도 이 굳은 마음, 메마른 마음, 영혼을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까지도 변화시키셨다.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그 주님을 찬송하고 죄 사함의 역사를 나타내야 할 줄로 믿는다.
 
♣요약
리를 세상으로 보내신 이유를 깨달아서 가족 형제 이웃, 일터에서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하여 주님 앞에 데려오는 삶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사명을 순종해서 기쁨의 삶을 누리며, 여름 특별토비새가 사랑의교회의 믿음의 4대 모두에게 영감의 갑절의 은혜를 받는 현장이 되어서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영적으로 재충전이 되어 일상에서 참된 부흥의 실재를 경험하길 소원한다. 9.26일 섬김을 통해 우리나라 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 가기를 소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방문하여 허탈감과 고통을 느끼는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비난하거나 책망치 않으시고 새로운 약속과 사명을 맡기셨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사명을 감당하라고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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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7월 27일)
제목: "눈을 드는 자의 찬양",
"2022년 획기적 합창세미나"
말씀: 시편 121:1-8
찬양인도: 쉐키나, 오준석 전도사님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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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1:1-8,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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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요찬양예배 축제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어제 아침에 제 설교를 들으셨던 분들은 지금부터 무얼 해야 되는지 알 것이다. 제가 한국에서 유명해지는 첩경은 설교를 길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뉴스를 보면 우리 국민들이 사기를 진작시키는 내용들보다는 우울하게 만들고 기대를 저버리는 일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만큼 미디어의 역할이 너무나 큰 역할이다.
 
우리와 똑 같이 인생의 생사고락을 겪고 있던 어떤 한 사람이 이런 시편을 썼다. 오늘 여러분들 시편 121편을 보면 제목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로 되어 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던 예배 자가 눈을 들겠다고 한다. 왜?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이 말씀을 이 획기적 세미나에 오신 분들에게 적용하면 금방 떠오르는 찬양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나의 눈을!!~~”그러면 다른 것 한 번 해보겠다. “주품에 품으소서!”~~ 이제 따라 하신 분들이 조금씩 생긴다. ㅎ ㅎ “주를 찬양 손을 들고 찬양, 전쟁은~~”이런 찬양들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주일날 그렇게 열정적으로 찬양을 하다가도 갑자기 어느 의사에게서 전화가 와서 피검사를 해보라고 하면 갑자기 맥이 팍 풀리고 그리고 두려움이 몰려올 것이다. 우리는 연약한 인생이다. 마귀와 육적인 삶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의 마음을 마음과 시선을 자꾸 땅을 바라보게 만든다. 자꾸 아래로 끌어내린다. 그런데 오늘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 눈을 드는 대신 자꾸 땅을 보는 대표적인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 바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다.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나게 하신 다음에 마른 땅을 지나가게 했다고 하니까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놀라운 일 가운데 마른 땅을 걷게 하셨다. 거기를 건너가게 하셨는데 뒤에 따르는 애굽 군대를 멸하셨던 그 주님을 경험한지 바로 며칠도 되지 않아서 물과 고기가 부족하다고 하니까 자꾸 땅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는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면서 출애굽 하던 1세대가 광야에서 몰살을 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는가? 만약에 그분들이 불평과 불만 대신에 자기들이 땅만 보면서 물과 고기가 없었다고 하는 땅을 바라보고 있다가 만약에 거기에 시편기자의 고백대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그래서 예배는 무엇이냐면 눈을 계속해서 눈을 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광야에 있던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과 부족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들이 눈만 들면 낮에는 구름기둥과 함께 했고, 밤에는 불기둥이 함께 하셨는데 그들은 눈을 들지 않는 것이다. 계속해서 땅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스라엘의 예가 있고, 또 한 사람을 말하자면 요셉가 정혼하기로 되어 있던 마리아는 자신이 임신하게 된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의 말을 사람에게 들은 것이 아니고. 천사에게서 들었다. 예를 들어서 그냥 와서 차라리 ‘암에 잠깐 걸렸다가 너는 나을 거야.’ 이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혹은 ‘너희 가정에서 운영하는 비즈니스가 금방 망할 텐데, 다시 회복될 거야’ 이렇게 했으면 괜찮은데 그것이 아니라, 처녀에게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누가복음 1:31-33,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여러분 예상치 못한 일이 마리아에게 왔다. 그런데 마리아의 고백이 너무나 이상하다. 마리아가 가로되 누가복음 1:38절을 보면,
 
*누가복음 1:38,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거기서 찬양을 드린다. “내 영혼 주 찬양하며” 한국말에는 찬양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성경에는 Prais, 여기에서 마리아가 사랑했던 단어는 Magnify다. 그 말은 여러분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생물이나 이런 것들을 크게 보려면 현미경(Microscope)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물체들을 우리가 좀 자세하게 보려면 어떤 기구를 사용해야 하냐면 망원경(Telescope)으로 보아야 한다. 여러분이 뉴스에서 보셨겠지만 우주에 은하계를 볼 수 있는 그런 텔레스코프가 사진을 계속 보내주어서 우리가 그 우주가 멀리 볼 때는 그냥 밝은 빛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땡겨 보니까 엄청나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는가? 바로 그것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보다 훨씬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로 I want magnify. 는 찬양이 마리아의 찬양이다. 내가 닥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와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되냐면 그 문제와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나의 모든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로 마리아의 삶의 태도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엄청나게 신뢰했다. 그러나 보니까 음악사를 통해서 많은 작곡가들이 그 마리아의 고백을 가지고 작곡을 했다. 그것이 마그니티카트라고 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마리아의 찬미, 마리아의 송가라고 했다. 또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과 인생의 도전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닥쳐온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될 자세는 계속해서 눈을 드는 것이다. 세상과 문제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시고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 같은 사람은 이렇게 고백한다.
 
*시편 16:8-9,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옛날 성경에 보면 요동치 아니하리라. 이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항상 다윗의 삶의 바로 앞에 계시니까 골리앗을 봤는데도 골리앗을 크게 보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크니까 자기가 물맷돌 던졌을 때 맞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진 엄청난 사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드는 것이 예배이다. 오늘 수요예배에 성도님들과 많은 획기적 세미나에 참여하신 음악가들이 많이 오셨다. 우리가 여러 교회의 찬양 단이 나와서 찬양을 합창하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잘하는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정말 주님이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의 마음으로 이분들의 찬양과 함께 내가 눈을 들어서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한다. 그래서 눈을 드는 것이 예배이고 우리의 눈을 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면 바로 찬양인 것이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엄청난 일에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내 구주를 기뻐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오늘 저녁에 이 수요예배에 참여하신 분들은 인생에 어려운 일, 예상하지 못했던 그런 어려운 가운데 성도로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믿음으로 나오신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오늘 이 저녁에 이 귀한 분들의 찬양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만져주시고 축복해 주실 줄 믿는다.
 
♣요약
하나님께서 이 저녁에 모여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많은 찬양대가 오늘도 주님을 높이고 그들과 함께 우리 영혼의 눈을 들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며 오늘 찬양과 함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안전히 거할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영원히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한 순간도 방심치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세심하게 감찰하시고 철두철미하게 보호하신다. 이와 같은 당신의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거룩한 열심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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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양세미나 차례
사회: 한 경 진 아나운서









1.수지소망교회(이상엽 담임목사님)
지휘: 이미영
반주: 이미르









                                                  ==============================================


2.서울영동교회(정현구 담임목사님)
지휘: 김은주
반주: 정희원













                                                       ==========================================


3.온누리교회(이재훈 담임목사님)
지휘: 최경열 성가나
반주: 최은미












                                                   ============================================



4.영락교회(김운성 담임목사님)
지휘: 배정진
오르간: 김진



















                                                =============================================




5.사랑의교회(오정현 담임목사님)
지휘: 이기선
반주: 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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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 24일)
제목: "인생은 고 스톱"
말씀: 민수기9:15~23
대표기도: 신성식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 이 다니엘 부목사,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이동원 목사님 초빙(지구촌 교회 원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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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9:15~23,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21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22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2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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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인가? ‘인생은 Go, Stop이다. 우리가 연상하는 그 게임이 아니다. go and stop이다. 오늘 본문의 주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도전과 승부라는 go의 연속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다가 걷다가 달리다가 종종 달려갔던 길을 설계하기 위해서 멈출 필요가 있다. 스톱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이 그랬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 민수기9:17,
17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보면 성막을 덮고 있던 구름이 떠오르면 가라는 것이다(That means go!). 머무는 것에서 멈춘다. 그리고 진을 친다. 자 17절에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을까 한다. 구름이 성막에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본문에 두 단어가 반복된다. 행진하였고 머물렀고,
 
* 민수기9:18,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행진하였고, 머물렀고, 가 반복이 아닌가? go, stop의 반복이다. 이것의 반복이 아니겠는가? 이 행진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 하나님의 도구가 구름이었다. 구름, 이 광야의 뜨거운 열사의 태양이 내려 쪼일 때, 구름은 얼마나 그들의 시원한 보호막이 되었을까? 동시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구름의 색깔과 형태는 그들이 가는 길에 얼마나 멋진 인도의 그림이었겠는가? 오죽하면 한국의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 박목월에 시 가운데 인생의 길을 가리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라고 표현을 했을까? 그런데 밤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밤에도 사실은 진행 할 필요가 있었다. 밤에도 계속해서 앞으로 가야할 필요가 있었다. 행진의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밤중에 또한 쉬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런 시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또 하나의 방편으로 사용으로 사용된 자연의 도구가 불빛이었다. 본문에는 불, 모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민수기9:15~16,
15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불 모양이라고 계속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기사를 출애굽기에서 읽어보면 거기에서는 불기둥이라고 칭하고 있다.
 
*출애굽기 13:21,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 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 그렇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있다. 사막의 밤은 춥다. 뼈가 시리도록 춥다. 무섭도록 추운 광야에서 불기둥은 얼마나 그들의 따뜻한 도구가 되었을까? 또 불기둥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스텝바이 스텝, 옮겨가는 그 행진은 얼마나 신나는 모험이었을까? 이 광야를 지나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한 마디로 우리는 구름 따라 불빛 따라, 혹은 구름기둥 따라, 불기둥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의 삶, 광야의 행진은 행진하다가 멈추고, 행진하다가 머무는 고우 앤 스톱의 리듬을 조화시키는 행진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 저와 여러분의 광야의 삶은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다면 행진을 왜 하는지, 행진의 의미를 알고 멈춤, 왜 멈추어야 하는지, 멈춤의 의미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첫째로 행진의 의미는
 
I. 행진(Go)의 의미.

-왜 행진하고 있는가? 이 행진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행진을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열쇠의 단어가 있다면,
 
▷행진의 두 가지 열쇠-(약속과 순종)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의 행진은 약속의 땅을 향한 나아감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삶의 주인공을 만난 순간부터 우리에게도 약속의 땅이 있다. 궁극적인 약속의 땅이 우리의 궁극적인 본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는 그 본향, 하늘나라 본향을 바라보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외국인처럼, 혹은 나그네처럼, 순례자로 살아간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히브리서 11:13,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천국이 궁극적 본향이 된 순간 우리는 외국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외국인이고 나그네이며 순례자이다. 우리는 어디를 바라보고 행진을 하는가? 히브리서 11장 16절을 같이 읽어보자.
 
*히브리서 11:16,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성, 시온성이라고 또는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바로 그 성이 약속의 땅의 종착역이다. 저와 여러분이 모두 부끄러움이 없도록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행진하기 위해 주신 선물이 약속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걸어가는 것이다. 걸어가면서 기대하시는 중요한 행진에 목적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순종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는 이 말씀을 순종하는 백성으로서 날마다 성숙해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행진은 그냥 앞으로만 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돌격 행진이 목적이 아니었다. 사실 애굽 땅에서 가나안 땅까지 직진으로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두 주간이면 가능하다. 그런데 광야를 40년 동안 하나님이 뺑뺑 돌리신 이유, 순종을 배우게 하시기 위해,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한국사람 같으면 40년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4년이면 가버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 광야의 방황을 통해서 가르치신 중요한 순종이다. 다시 한 번 18절을 보라.
 
* 민수기9:18,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19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20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민수기9:23,
2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이 중요하다. 순종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심지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류의 구원이다. 또 하나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 백성들에게 순종의 본을 보이시고자 하셨다.

*히브리서 5:8~9,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여러분, 우리 오 목사님을 통해서 ‘온전함’의 제자훈련을 많이 공부한 것으로 들었다. 그런데 온전케 되는 것이 순종을 배워야 온전케 된다. 또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고난을 주셨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배울 필요가 있었다면 여러분과 저는 얼마를 더 배워야 온전해지는가? 순종을 배워야 순종이 된다. 잘 이해가 되는가? 조금 더 이해를 위해서 따라해 보라. “순종을 배워야 잡종이 되지 않습니다.” “순종을 배워야 순종이십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사역한 엔드류 모레이는 늘 이것을 강조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에서 평생 배워야 할 중요한 레슨이 순종의 레슨이다. -엔드류 모레이-
-그래서 고난이 필요했고 광야의 수많은 방황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 걸음 한걸음 순종을 배우라고 그런데 한 마디로 광야의 고(go), 행진의 목적이 무엇이냐면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을 배우기 위한 행진이다. 여러분 믿는가? 그런데 광야의 행진 속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go하는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따라 멈추는 것도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명령 속에는 멈춤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행진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면 멈춤의 의미는 무엇인가?

 
II. 멈춤(Stop)의 의미.

-왜 멈추어야 하는 것인가? 행진의 의미는 약속과 순종이었다면 멈춤의 의미는 무엇인가? 멈춤은 우리의 행동을 그치고 쉬는 것을 뜻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런 멈춤을 ‘셔바트’ 라고 말한다. ‘안식’이다. 이 셔바트를 정하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그는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일곱 째 날에 안식하시면서 너희도 이렇게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매주 안식일이 탄생한다. 매주 한 번씩, 한 날만 휴식이 아니라 6년을 지나고 제 7년에는 안식년이 기다리고 있다. 7x7=49, 49년이 지난 다음에 50년 해에 안식하는 한 해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인생이란 무엇이냐? 매주 안식일을 지키다. 7년마다 안식년을 지키다. 희년을 지키고 영원히 안식하러 간다는 것이 그게 인생이다. 요즘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져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희년을 두 번 지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게 인생이다. 자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닌 신약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셔바트의 의미, 오늘 우리의 셔바트의 의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물론 이 힘은 구원의 다른 그림 언어 일 수가 있다. 구원 받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나의 멍에를 매고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셔바트, 오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셔바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오리지널 셔바트의 의미를 존 성찰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명문 대학인 위튼 대학에서 기독교 문학을 가르친 롸이켄 교수, 아들은 총장님으로 지냈는데 그 오리지널 셔바트의 의미를 알아야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안식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도록 세 가지 R이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해 주셨다.

▷셔바트의 세 가지 정신(Ryken)

 
1. (reflection/리플렉션-과거를 돌아봄).
-반영시킨다. 돌아본다. 과거를 돌아본다. 이며 안식의 첫 번째 의미는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제7일에 안식하신 이유, 그가 창조하신 것을 다시 돌아보기 위해서 사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하루하루 창조가 진행될 때마다 기도가 끝나면 성경은 기록하기를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루 끝나고 돌아보시는 것이다. 좋은데 하루를 돌아보셨다. 그리고 엿새 동안 마침내 마지막 날 하나님이 형상을 닮은 아담과 하와, 남녀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만물을 마무리 지으시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하신다. 오늘 이 자리에도 부부가 나란히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 보시기에 심히 좋지 않는가? 부부가 분명히 있는데도 혼자 와서 덩그러니 있는 분을 보면 과히 좋지 않지 않는가? 또 우리가 코로나 시대라고는 하지만 부부로 와서 떨어져 계시고, 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움,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반영할 때인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얼마나 보시기에 좋아하시는지,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열심히 살면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그것을 돌아보면서 ‘아참 좋은데, 감사하구나!’ 여러분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 돌아볼 수 있는 기쁨, 돌아볼 수 있는 기도가 있는가?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자신의 성취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돌아보고 기뻐하고, 돌아보고 감사하고, 돌아보고 찬양할 여유도 없이 그냥 바쁘게만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있는 인생은 아닌가? 그래서 안식이 필요하다. 돌아보기 위해서, 안식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는,
 
2. (Refreshment/리프레쉬먼트-현재를 새롭게 함).
-미래를 새롭게 창조하는 시간, 그것이 안식인 것이다. 우리가 안식일의 목적이 단순히 안식만 하였다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일을 마치시고 그리고 쉬셨다. 하나님도 쉬시고 하나님의 창조물인 아담과 하와도 안식했다. 그리고 끝나야 된다. 2장 3절에서 성경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지속된다. 하나님이 만두시고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 동산에 두셨다. 그리고 창세기 2:15절을 보자.
 
*창세기 2:15,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경작하게 하셨다는 말이 영어성경에는 Cultivation/Cultivated-경작하다. 그런데 같은 단어에서 나온 단어가 Culture-문화이다. 다시 말하면 안식하고 나서 아담과 하와가 문화생활을 시작한다. 자, 문화라는 것은 진정한 문화는 태양이 내려쬐는 그곳에서 땀을 뻘뻘 흐르면서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비오는 안식일, 아담과 하와가 동굴에서 하염없이 내리치는 빗방울을 멍 때리고 바라보다가 마음속에 스쳐가는 아이디어, 거기서 문화의 불꽃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말한 문화 학자가 있다. 그러니까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불 멍이 필요하다. 불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시간도 필요하십니다.” 왜? 리크리에이션을 위해서,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우리의 진정한 창조적인 인생을 위해서 그러한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주간의 성경적 구조는 안식일을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한 주간 열심히 일하고 월,화,수,목,금, 토요일과 일요일은 쉬고 그런데 그것이 한 주간의 구조가 아니다. 한 주간의 성경적 구조는 먼저 쉬는 것이다. 여러분 아담의 인생의 첫 번째 날은 안식일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여섯 째날 지음을 받았다. 아담과 하와가 지음을 받고 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안식일이 밝아온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날이다. 이미 그때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들어 놓으시고 아름다운 꽃을 만들어 놓으시고 딱 보니까 안식일이다. 안식일에 에덴동산을 엔조이 하시고, 즐거워하시고 그리고 아담은 역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우리 달력도 성경적인 이런 안식일을 반영한 구조이다.. 대부분의 달력이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니다. 일월화수목금토이다. 일요일이 먼저오고 그 다음에 온다. 쉼이 주는 여유, 쉼이 주는 창조성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인생의 도전을 시작한다. 이제 이번주간과 다음주간에는 여름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영성의 스승 가운데 한 분이 한 이야기 중 ‘켄 가이어’라는 분의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멕시코 시장에 인디언 노인 이야기이다. 멕시코시티 어느 한 골목에 시장에서 양파를 파는 자인데 그 양파 스무 줄을 걸어놓고 장사를 하는 포타모라라는 인디언 노인이 있다. 관광객이 그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양파 한 줄에 얼마인가요? 대답에 10센트라고 답한다. 두 줄을 사면 얼마인가? 하니 20센트, 세 줄을 사면 얼마인가요? 하니 30센트라고 답한다. 안 깎아 주시네요?“ 했다. 그러면 여기 스무 줄 다 사면 얼마나 깎아주겠냐고 하니 인디언 노인은 그것을 다 사도 안 깍아 준다고 답한다. 아니 왜요? 양파를 팔러 나온 거 아닌가요? 하니, 노인은 저는 양파만 파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려고 여기에 나왔습니다. 지금 양파를 다 팔아버리고 집에 가면 이 시장에 북적대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고, 이 시장의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 종려나무의 그늘을 즐길 수 없구, 저기 뛰어놀고 있는 천진난만한 노래 소리,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요. 어쩌면 나를 만나러 오는 내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지금 양파를 다 팔아버리면 저는 인생을 다 잃어버립니다.” “양파를 팔고 돈을 버는 것이 집채가 되더라도 저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 참으로 복된 인생, 거룩한 인생을 살기 위해선 가던 걸음을 멈추고 쉴 줄 알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휴가 간다고 하면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한 군데 있지 않는다. 돌아올 때는 파김치가 되어서 지쳐서 돌아온다. 그리고 직장 가기 싫다고 한다. 그건 휴가가 아니고 셔바트도 아니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다르다. 한 군데 가서 푹 쉰다. 가족들끼리 밀렸던 대화도 하고 가까운 곳에 가서 예배도 드리고 리프레쉬 한다. 다시 남은 생을 멋지게 살아야지 한다. 이게 휴가이다. 이게 베이케이션이다. 이게 셔바트이고 안식일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된 인생, 거룩한 인생을 살기 원하는가? 이제 한 걸음 멈추라. 멈추어 생각하라. 멈추어 기도하라. 멈추어 여러분이 내일을 설계하라. 그래서 이번 여름 후회 없는 진정한 휴가, 진정한 베이케이션, 진정한 셔바트의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God bless you.!!~~
 
♧요약
우리가 주님 안에서 행진을 알고, 멈춤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걷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멈추는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이번 여름 온전한 회복으로 하나님이 주신 나머지 인생 앞에 거룩한 도전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육체를 갖지 않은 순수한 영이시지만, 인간과 유사한 모습과 품성으로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타락한 지금도 하나님의 성품이 부패한 채 남아 있다. 이에 제한된 인간의 성품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근심(창6:6), 진노(출22:24), 질투(민25:11), 맹세(사62:8) 등의 표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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