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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9월 19일 (766)

1. 증시가 전반적으로 약세장을 이어가는 가운데 일시적으로 반등하는 상황을 묘사한 말은?

①산타 랠리
②베어마켓 랠리
③기저효과
④캘린더 효과

2. 주가가 일정 범위에서 등락을 거듭할 때 흔히 증시가 ‘이것’에 갇혀 있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것에 적절한 말은?

①가격제한폭 ②박스권
③상한가 ④하한가

3. 다음 중 나라 살림의 건전성과 지속 가능성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는?

①국제수지 ②경상수지
③본원소득수지 ④관리재정수지

4. 다음 중 경제 상황과 전망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는?

①IRA ②LTV ③CSI ④PBR

5. 실업률은 ‘이것’ 중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중을 가리킨다. 이것에 들어갈 지표는?

①경제활동인구 ②비경제활동인구
③생산가능인구 ④총인구

6. 실업자 수와 취업자 수를 더하면 ‘이것’과 같아진다. 이것에 들어갈 지표는?

①경제활동인구 ②비경제활동인구
③생산가능인구 ④총인구

7. 일시적으로 회복세를 보이던 경기가 다시 침체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은?

①사이드카
②더블딥
③어닝쇼크
④스태그플레이션

8. 1등 업체 점유율이 A%를 넘거나 1~3등 업체 점유율 합이 B%를 넘으면 ‘시장지배적사업자’ 지정 요건이 된다. A와 B를 각각 고르면?

①33, 50 ②33, 75 ③50, 75 ④50,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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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늘어나는 세금 이대로 괜찮나



그래픽=허라미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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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운영하는 데도 돈이 듭니다. 정부가 국방과 치안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도로를 깔고 강과 하천을 정비하려면 예산이 필요하고, 교육과 복지정책을 시행하려면 재정이 필요한 거죠.

정부는 노동을 제공해 돈을 버는 가정, 생산 활동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는 기업과 달리 돈을 벌어서 쓰지 못합니다. 세 가지 방법으로 쓸 돈을 마련하는데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고, 모자란 돈을 빌리고, 급하면 화폐를 더 찍어내는 거죠. 원칙적으로 정부는 거둔 세금(세입)만큼 돈을 쓰는 게(세출) 좋습니다. 소득 범위 안에서 소비를 하는 가정이 모범적이듯이 말이죠.

유감스럽게도 모든 정부는 돈을 많이 쓰려 합니다. 유사 이래로 모든 권력이 그랬어요. 고대엔 왕과 황제가, 중세엔 교회가, 근현대엔 정부가 그런 권력이죠. 난로와 유리창 개수에 따라 세금이 부과된 적도 있고, 수염을 길렀다고 세금이 붙기도 했죠. 요즘엔 담배를 피운다고, 자동차를 산다고, 재산을 물려준다고, 집값이 오른다고 세금을 물립니다. 내년 예산액이 639조원으로 늘어나 1인당 부담액이 1356만원에 달할 정도입니다.

세금은 공동체를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하지만, 너무 많으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많은 세금 때문에 경제가 흔들리고, 정권이 교체되고, 혁명이 일어나고,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습니다. 인류 문명과 함께 시작된 세금. 그 이야기는 흥미진진합니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정부는 1년 동안 쓸 예산안을 짜서 의회에 제출합니다. 의회는 예산안을 검토해 동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행정부가 나라 살림을 계획하고 쓰지만, 의회가 그것을 살펴보고 조정한 뒤 통과시켜주는 거죠. 견제와 균형 메커니즘이 예산에도 작동한답니다.

나라 살림을 짜는 기획재정부는 2023년 예산액을 639조원으로 잡았습니다. 예산으로 쓸 재원, 즉 돈은 세금으로 마련됩니다. 대한민국 납세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둬 나라 살림에 쓴다는 뜻이죠. 기본적으론 ‘세입=세출’ 구조입니다. ‘거둔 세금과 쓰는 돈은 같아야 한다’는 거죠.

세금은 유용한 데 많이 쓰입니다. 내년 예산안을 보면 보건·복지·고용에 226조원이 들어가고, 나라를 지키는 국방에 57조1000억원이 쓰이고, 도로·교통 등 사회간접자본에 25조원, 교육에 14조원이 투입됩니다. 문화·체육·관광 분야로도 9조원가량이 들어갑니다. 세금은 마치 몸속의 피처럼 곳곳으로 흘러다니며 나라 살림을 떠받칩니다.

내친김에 세금 구분표를 한번 살펴봅시다. 세금은 크게 국세와 지방세로 나뉩니다. 국세는 중앙정부가 거둬 나라 전체를 위해 쓰는 세금이고 지방세는 지방정부, 즉 도·시·군이 거둬 자체적으로 쓰는 세금을 말합니다. 총조세 중 국세와 지방세 비율은 약 75 대 25입니다.

국세는 내국세와 관세로 구성됩니다. 내국세가 조금 복잡한데요. 내국세는 보통세와 목적세로 다시 나뉩니다. 목적세는 특수 목적에 맞춰 쓰는 세금을 말합니다. 교육세, 교통·에너지·환경세, 농어촌특별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보통세는 직접세와 간접세로 다시 갈라집니다. 직접세는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상속세, 증여세를 말하고, 간접세는 부가가치세, 개별소비세, 주세, 인지세, 증권거래세를 포함합니다. 직접세는 세금을 부담하는 사람과 세금을 내는 사람이 같은 세금이고, 간접세는 그것이 다른 세금입니다.

지방세에는 도가 걷는 취득세, 등록면허세, 레저세, 지방소비세 등이 있고, 시와 군이 걷는 담배소비세, 주민세, 재산세, 자동차세 등이 있습니다. 복잡하죠? 우리는 촘촘한 세금망에 갇혀 있는 듯합니다. 2023년 국민 1인당 내야 할 부담액(세금 등)은 1356만원이라고 합니다.

세금은 언제 잘 걷힐까요? 경제가 좋을 때입니다. 일자리와 생산이 늘면 개인과 기업이 돈을 많이 벌게 되고 그러면 소득세와 법인세 세수(稅收)가 늘어납니다. 관세도 무역이 활발하면 많이 걷히겠죠. 소비가 활발해지면 부가가치세 징수 실적도 좋아집니다.

정부가 세금을 잘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흥청망청 쓰다간 적자가 발생하고 급기야 빚을 내서 쓰게 됩니다. 지난 5년간 정부의 재정적자가 100조원, 국가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선 이유죠. 세금을 낭비하지 않는 정부가 좋은 정부입니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잠깐! 애덤 스미스의 세금징수 4원칙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세금을 부과할 때 네 가지 원칙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습니다.
①은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능력에 비례해서 내야 한다’입니다. 공정함을 강조한 것이죠.
②는 ‘지불 시기, 지급 방법, 지불 금액을 납세자가 쉽게 알 수 있어야 한다’입니다. 세무사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현대 세법을 꾸짖는 듯합니다.
③은 ‘납세자가 가장 편리한 시기에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세금을 낼 수 있어야 한다’입니다. 냉소적으로 표현하면, 이 원칙이 현대에 가장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국세청이 소득이나 소비에서 원천징수를 해가고, 현금지급기(ATM)로 납부할 수 있고, 계좌이체도 되니까요.
④는 ‘징세비용의 최소화’입니다. 세금 1000원을 걷는 데 500원이 든다면 안 되죠. 세금 신고서를 작성하거나 납부하는 데 드는 시간, 즉 ‘맨아워’(man hour: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일하는 노동량)가 너무 많이 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세금을 신고하는 데 89억 맨아워를 투입한다고 합니다. 운수업 종사자 430만 명이 다른 일을 안 하고 1년 내내 세금 신고서만 작성하는 시간과 같다고 해요. 우리나라는 스미스의 4원칙을 지키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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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9월 18일)

제목: "변명 보고 아닌, 믿음 보고를"
말씀: 출애굽기 3:11-14, 4:1-17
대표기도: 이현규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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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1-14, 4:1-17,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4:1-17,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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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보고 아닌, 믿음 보고를”-믿음으로 뱀 꼬리를 잡아보라.
-이른 아침 예배 시간에 우리 일생을 인도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 드리는 것이 특별한 축복이라 확신한다.
 
저는 오늘 ‘변명 보고 아닌, 믿음 보고를’, ‘부제로 말하면 믿음으로 뱀 꼬리를 잡아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다. 저는 모세에 대한 내용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왜냐며, 제가 어릴 때부터 저의 할아버지가 “현이는 모세처럼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이 더 와 닿아서 그다음 이 말씀을 오늘 들을 때에 ‘모세하고 나는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다 모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여러분 말씀 듣고 하나님을 체험하기 바란다. 우리는 모세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위대한 믿음의 모험가로 생각하지만 모세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늘 본문을 11절 앞부분을 보면,
 
* 출애굽기 3:11,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과 유일하게 대화를 나눈 사람이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현현하신 하나님과 만난 유일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소명을 완수하라고 사명을 주셨을 때, 따박따박 다섯 번이나 변명을 한다. 그냥 다섯 번이나, 첫 번째는 우리 속에 있는 변명하는 속성, 아니 이 시대는 변명하는 시대이고, 변명하는 우리의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l. 변명 바쁜 우리.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명령하시자, 방금 종전까지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답지 않게, 모세는 “아니, 안 됩니다.”=Impossible,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나는 아니라한다.
* 출애굽기 3:11,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첫째 번 변명-“나는 아니지요?” 한다. 나는 자격이 없다고 한다. 두 번째로

 
2)두 번째 변명-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 출애굽기 3:13,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나는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조금 전까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과 대화하고서도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한다.

 
3)세 번째 변명-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한다.
* 출애굽기 4:1,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도 나를 거부할 것이라고 말한다.

 
4)네 번째 변명-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 출애굽기 4:10,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사도행전 7:22,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 애굽의 모든 행사가 능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과거에 모든 말과 행사가 능한 사람이었다.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 대화를 안 해서 그런지, 양들과만 있어서인지, 그 입이 뻣뻣하다고 그랬다. 그래서 마침내 다섯 번째 변명을 한다. 변명의 아주 종지부를 찍는다. 13절을 보면,

 
5) 다섯 번째 변명-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한다.
*출애굽기 4:13,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못 간다고 거부한다. 여러분, 나는 못갑니다. 우리교회로 말한 것 같으면, “순장님을 보내주옵소서!” 라고 하면 뭐가 생각나는가? 제가 믿음은 항해라고 했듯이, 어떤 정원 초과한 배가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 하니까,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영국 사람이 “저는 대영제국 국민입니다.”라고 하면서 신사도를 발휘해서 빠졌고, 미국 사람은 양보 하겠습니다. 라고 하고 물속으로 사라졌고, 서로 눈치 보다가 한국 사람이 벌떡 일어나 대한민국 만세!! 하면서 옆에 있는 일본 탁 쳐서 사람을 잡아 당겼다. 정말 우리에게는 변명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무얼 요구하시는지 보면, 지난주에 말씀에 우리 안에 씨앗도 주시고 전부 다 능력을 주셨는데, 우리는 변명하기 급급한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 모세가 따박따박 다섯 가지 이야기 한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보고이다. 우리교회는 지금 사실보고와 믿음보고를 구별하고 있다. 열 정탐꾼들이 말한 것은 사실보고이고, 여호수아 갈렙은 믿음보고이다. ‘faith report’ 이다. 언제 인생길 가운데 믿음보고 했는가? 우리 상황이야기 하면 이해 될 만하지만, 믿음의 보고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심을 소명대로 완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모세가 왜 그랬는가? 계속 변명을 하고 거절을 하는가? 40여 년 동안 모세는 자기도 모르게 과거의 실패의 경험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두려움이 심리적 위축으로 다가왔다. 그 심리적 위축이 뭐로 다가 오냐면 열등감으로 다가왔다. 그 열등감이 무력감으로 표현되었다.
 
-두려움>심리적 위축>열등감>무력감-하나님을 변명하게 하는 많은 원인이 되고 있다. 실제적으로 모세에게는 이집트에서는 잊혀 진 존재일 수 있다. 모세 머릿속에 계속 떠돌아다니는 내용이 있다.
 
*출애굽기 2:14,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좀 도와주려고 하는데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며 아주 심문을 하고 오히려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 그게 모세의 머릿속에 40년 간 뱅뱅 맴돌게 했는지 모른다. 모세는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지금으로 말하면, 너는 지도자가 아니라며 악성 댓글을 계속 고통당하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말 한마디로 비수처럼 꽃혀 가지고 평생을 고뇌하는 것과 같다. 그게 열등감과 무력감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모세에게 시작도 하기 전에 불가능하다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주님은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이제 뱀 꼬리를 잡으라 하시는데 그 전에,
 
*출애굽기 3:11,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내가 누구이기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자의식 문제가 있다며 반드시 함께 하신다고 12절에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12,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다.
 
*출애굽기 3:13-14,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하는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구약에 있는 위대한 말씀 중에 놀라운 말씀 중에 하나인 말씀을 14절에 하신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I am who I am. 놀라운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이시다. 영광 되는 시간에 주신 것이 아니라, 모세가 자기 변명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깨우쳐서 새롭게 하도록 하시는 것이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라고 하시니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데 불구하고 모세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라 한다.

* 출애굽기 4:1,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렇게 모세가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드디어 증거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모세에게 너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지팡이가 있다고 대답한다. 그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니까, 지판이가 뱀으로 변하는데 애굽의 상징 중에 왕관, 파라오의 왕관에 코브라로 되어 있다. 그런 것인데 뱀 꼬리를 잡으라고 한다. 그게 말이 되는가? 그 독사가 있는 뱀은 물려 죽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말하면 뱀 꼬리를 잡으면 죽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됨에도 불구하고 뱀 꼬리를 잡으라 하신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 넘는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잡아먹히는데, 뒤에 이렇게 나병 손잡고, 나일 강 피, 여러 가지 두 가지 표적과 한 가지 선포를 통해 여러 가지 있지만 오늘 핵심은 뱀 꼬리를 잡으라고 한다. 뱀 꼬리를 잡으면 죽는다. 하나님은 잡으라고 하신다. 마른 막대기가 생명으로 가득 찬 뱀으로 되었고 다시 또 죽음을 무릎 쓰고 뱀 꼬리를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로 되었다.
 
*출애굽기 4:1~2,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러분, 전에 우리 교회 오셔서 간증하신 세계무역협회 총재이신 이희돈 장로님(박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뱀 꼬리를 잡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일반적으로 바위로 계란을 치는데 뱀 꼬리를 잡는 것은 마치 무엇 같은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신앙생활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을 주님이 원하신다. 이 뱀 꼬리를 잡는 것은 우리의 이해와 상식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메시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단하게 하시는지 모른다. 뱀 꼬리 잡으면 죽는다. 왜 그런데 뱀 꼬리를 잡으라 하시는가? 일반적으로 바위로 계란을 치는 것은 다 잘 한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위로 계란을 칠 때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거는 기도를 안 해도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신앙생활은 맹숭맹숭 하는 신앙생활이니까, 그런데 계란으로 바위를 칠만큼의 그 상황이 되면 다시 뱀 꼬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되면 우리는 박박 기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다 평안하니까 없다고 한다. 그게 다 좋은 것 같지만,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삶 가운데서 한 번이라도 뱀 꼬리를 잡아보지 못하고, 계란으로 바위 한 번 쳐보지 못하는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위탁하는 어떤 절박함과 긴박함을 가진 신앙생활을 한 번 못했다면 오늘 말씀은 바로 여러분의 것이다. 자 다시 말하면 바위로 계란을 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어떨 때는 소망이 없고 절망이 되고, 하나님 의지 하지 안 되면 그 상황 그것이 뱀 꼬리 잡는 상황이다. 마음이 젊은 어른들은 ‘뱀 꼬리 한 번 잡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나이가 젊어도 애 늙은이들은 ‘못 잡겠네.’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뱀 꼬리 잡는 것이 믿음 보고이다. 이 믿음 보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이다.
 
II. 뱀 꼬리를 잡으라.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뱀 꼬리를 잡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매어달리지 아니하면 뱀이 우리를 계속 공격할 것이다. 이게 현실적으로 보면 가능하겠는가?
*마가복음 4:38-41,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이 그냥 토하고 난리가 났고 우리가 다 죽게 되었다고, 세상의 광풍으로 다 죽게 되었다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는 것을 당연한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이 깨어나셔서 “광풍이 불고 너희들이 다 죽게 되었는데 내가 잠자서 미안하다. 많이 놀라고 힘들었지?”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가? 아니다. 완전 허를 찔렀다. 일갈을 하신다.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하신다. 세상의 광풍 속에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뱀 꼬리를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광풍도 주님 때문에 순풍으로 여기는 게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폴 투르니에라고 크리스찬이 정신학자 아주 특별한 분이 한 말이다.

 
“내가 할 일은 백지 하단에 서명하는 일이라는 걸 이제 깨달았소. 하나님께서 뭐라고 쓰시든 나는 그대로 할 것이요. 하나님이 이 백지 계약서에 뭐라고 쓰실지 모르지만 어쨌든 난 오늘 섬ㅇ을 마쳤소이다.”-폴 투르니에-
-믿음이라는 것은 백지수표 하단에 서명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뭐라고 쓰시든 간에 그대로 한다는 것이며 서명을 마쳤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든 하나님 앞에서 백지수표를 써 보았는가? 백지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은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서 순종하는 것이다. 오늘 영적 세계에서 이유식에서 밥을 먹는 것이다. 서명하는 믿음의 눈이 되어야 한다.
 
III. 이해보다는 순종으로.

-모세가 뱀 꼬리를 잡으니까 다시 지팡이가 되는 것을 경험하고 모세는 아까 무기력증과 열등감이 재발 되어가지고 말을 못하는 자이고 입이 뻣뻣하다고 한다.
*출애굽기 4:10-11,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모세가 부족하다고 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2절에,
 
*출애굽기 4:12-13,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오 주여, 아론을 보내주옵소서! 한다. 실컷 이야기 했는데, 어떤 사람이 가게에 와서 물건을 다 살 것 같이 하다가 마지막에 안사고 가는 것, 그것과 비슷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성경에 쉽지 않다. 너무 놀라운 말씀이 있다. 14절을 보면,
 
*출애굽기 4:14,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불 같이 화를 내셨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셨다. shut up and go!!! 하신다. 여러분들이 오늘 부담이 느껴지면, 오늘 깊이 생각해 보라. 여호와께서 노를 하시고 자기의식이 잘못 된 사람에게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의식이 잘못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시므로 모세의 잘못된 것을 해결해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쉽지가 않았다. 오늘 키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그냥 퍼져 앉아가지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이해가 안 되더라도 오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으로 백지수표에 서명하는 심정으로 그냥 순종하면 이해할 날이 온다는 것이다. 이게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이해가 다 된다고 믿음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알 수도 없다. 수긍이 가지 않는 것도 너무 많다.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순종이 더 중요하다. 이해가 안 되어도 이해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따라서 어떨 때는 이해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
 
※어떨 때는 이해보다 순종이 더 중요하다.
-여리고 성을 빙빙 돌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순종하고 나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이다. 희한하다. 너는 세상 적으로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 하나님께서 ‘나를 신뢰하라, 나를 의탁하라’ 하시면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이 해답을 언젠가는 이해하게 하시고 해답을 주실 것을 믿고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훗날 이해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 보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변명 보고가 아니라 믿음 보고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이 교회에 오게 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온갖 상황이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가 안 되더라도 영적으로 순종하면 이해할 그 놀라운 상황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
 
*히브리서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그 당시 원시 부족사회에 그 집을 떠나는 것은 사형선고인데 그냥 주님은 떠나라고 하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종하고 나아갔을 때, 나중에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을 주님이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게 믿음이다. 우리는 앞으로의 일을 다 모른다. 다 아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안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엇보다도 내 입에 할 말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내 입과 귀를 만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우리가 신뢰하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더라도 주님 말씀을 순종하면 이해할 만한 환경으로 주님이 인도해 주신다. 백지수표를 써야 한다. 자, 그럴 때에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하게 되면, 이해가 되는 날이 온다고 했는데 그리고 이해할 날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다. 그것은 지팡이를 주신다. 모세의 지팡이는 본래 그냥 한탄하는 지팡이였지만, 내 신세타령이나 하고 땅이나 치는 지팡이였으나, 하나님이 그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신다. 그 뱀 꼬리를 잡으라고 하니까, 정말 죽음의 위협을 무릎 쓰고 그걸 잡았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지팡이를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하면 우리의 손에 지팡이를 쥐어 주시는 것이다. 이게 세상 법칙과 하나님 법칙과 다르다. 애굽을 떠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주신다.
 
*출애굽기 4:17,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우리가 변명할 이유가 다 있지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의 일을 잘 모르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지팡이를 하나씩 주실 것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모세의 말라빠진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평범한 나무 막대기가, 신세 한탄한 막대기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살아계신 지팡이가 되니까, 모세가 지팡이를 올리니까 나일 강이 피가 되었고, 모세가 그 지팡이를 들고 올리니까 불가능하게 보였던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광야 같은 메마른 그 딱딱하고도 그 물이 나오지 않는 곳에서 반석에서도 모세가 지팡이를 치니까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게 되었다. 생명력 없는 마른 막대기가, 이해가 안 되어도 순종하니까, 백지수표에 사인을 하니까, 하나님이 지팡이가 되게 하셔서 우리는 살리는 영이 되게 하신 것을 믿는다.
 
마귀는 죽이는 영, 참수하는 영이지만, 성령은 창조하는 영이고, 마른 막대기가 살리는 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엑스트라 축복이 있다. 그것은 기대감이다. 제가 존경하는 A.W 토저 목사님은
 
※참된 믿음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기대감이 동행한다. 그러므로 기대감이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 -A.W 토저-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이루어지는 기대감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저는 교회 역사를 볼 때에 나름대로 교회능력이 지극히 컷을 때, 교회가 부흥할 때, 교회 안에는 기대감이 충만함을 믿는다. 교회가 믿음이 있을 때, 교회는 기대감이 있었고, 주님은 교회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누가복음을 보면,
 
*누가복음 1:45,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역사 속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큰 일, 교회의 모든 부흥들이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강렬한 기대감이 있었다. 기대감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일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기대감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여도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감이 사라진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눈에 보이는 교회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인 여러분 자신 한 분 한분의 삶의 여정 가운데 여러분의 기대감이 사라졌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기대감이 사라졌다면 오늘 이 기대감이 회복되길 바란다. 이 지팡이를 여러분들의 손에 들려주셔야 한다. 이 기대감이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말도 안 되는 5,534명의 목회자분들이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참여를 하신다. 9.26,섬김의 날, 무슨 일을 하시는가? 저 나름대로 기대감이 출렁출렁함을 믿는다. 이 은혜를 통하여 여러분의 생에 삶의 여정에도 기대감이 출렁출렁하기를 바란다. 너의 손에 있는 지팡이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팡이는 다르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섬김에 기대감과 온라인 사역과 대면예배가 회복되고 이것이 한국교회에 대한 기대감이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이제 홍해를 건너와서 모세의 이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고, 그 다음 모세는 홍해를 건너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무엇으로 전쟁을 하는가?
 
*출애굽기 17:9,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언제 여러분들은 언제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에 서는 때가 언제인가?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한다. 우리가 변명거리도 있지만 하나님이 지팡이 주실 때 기대감을 주셨다.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길 원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수많은 귀한 일이 있을 때는 영적 전쟁이 있다. 아말렉과 전쟁이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다. 결단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일반 지팡이가 아니라 그 지팡이를 잡고 인생의 산 꼭대기에 서라.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인생의 산꼭대기에 서리라.”
 
♣요약
두려움과 열등감 무기력에 사로잡혀서 변명 보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전적 위탁하여 절박할 때 뱀 꼬리를 잡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고,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고 백지수표에 서명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샘솟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 받게 되리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기대감을 가지고 9.26 섬김에 헌신하는 순종이 되어서 하나님께 온전한 믿음 보고가 되어야 한다.
 
요약-*출애굽기 3:11-14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을 하시면서 그에게도 또한 자유롭게 말할 기회를 주신다. 모세는 자신이 부름 받은 일을 하기 에는 부족하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내가 누구관대(11절). 모세는 자신이 그런 명예로운 일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용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의 재능이 부족하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건져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무장도 하지 않았으며, 훈련도 받지 않았으며, 아주 의기소침해 있었다. 모세는 그 당시에 살던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에 최고 적임자였다. 그는 학문, 지혜, 경험, 용기, 신앙, 경건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누구관대'라고 말하고 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대개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 일의 어려움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종국에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적임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임재를 약속하신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12절). 그러면 모세의 이의는 충분히 해결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공을 보장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이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임을 확증하신다. 모세는 그의 임무 수행을 위한 지시를 구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이때 무슨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실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신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 모세를 당황하게 하려, 아니면 그들 자신의 알고자 해서 할 것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고 있다.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나의 권위에 대한 증거로 내가 어떠한 이름을 그들에게 내세워야 합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 말은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존 자이심을 의미한다. 그는 그의 존재의 기원을 그 자신 속에 가지고 계시며 그 어떤 다른 존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자존하시므로 그는 자족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이 넉넉하시며 존재와 축복의 무한한 원천이 되신다. 그가 영원하시고 불변 하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탐구를 통해 그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라.
 
요약- *출애굽기 4:1-17,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와 자기 말을 믿지 않으리라는 것과 자기가 말에 능치 못하다는 것, 그리고 보낼 만한 자를 보내라는 등의 이유를 대며 불순종했다. 우리도 믿음이 연약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려고 변명을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단 부르신 사람은 반드시 쓰시고야 만다. 모세가 자신은 말에 능치 못하며 적당한 사람이 아니니 보낼 만 한 자를 보내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와 늘 함께하여 부족함을 채우겠다고 위로하시며 그를 권면하셨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다만 그 힘을 의지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내와 자비로써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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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2년 9월 14일)

제목: "이것이 싸우는 방식"
말씀: 열왕기상 18:34-38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기도)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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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34-38,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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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벌써 3번째이다. 연거푸 세 번째 물을 지금 붓고 있는 장면을 여러분이 읽어주셨다. 이쯤 되면 대강 물을 적시는 정도가 아니라, 물이 흘러넘쳐서 찰랑찰랑 될 정도이다. 불이 붙느냐, 마느냐가 관건(關鍵)인데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엘리야 갈멜산 전투(戰鬪)가 있지 않은가? 이정도로 물을 가져다 붓고 있으니까 가히 미친 짓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혹시 심리적인 압박 때문이었을까? 바알을 믿고 따르는 수백 명의 선지자들과 엘리야 혼자 싸우다 보니까 막중한 부담감 때문에 압도 되어서 정신 줄을 살짝 놓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물을 가져다 붓고 무려 세 번이나 그 행동을 연거푸 반복하는 것일까? 제가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는 절대 불이 붙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번개탄이라는 것을 사용해 보았는가? 캠핑의 경험은 유무가 다를 수 있지만, 실내외에서 바비큐를 한 번쯤 구워보시고 경험해 보셨을 것이다. 그때 숯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 먼저 태우는 그 제품을 번개탄이라고 한다. 한 번쯤은 다 사용해 보셨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 불을 붙인다는 그 기능 그대로 이름을 따서 착화(着火)탄(炭)으로 불렀는데, 사람들의 입에는 번개탄(炭)이라는 말, 빨리 불붙는다는 뜻의 번개탄이라는 말이 입에 달라붙어서 그게 품명이 된 경우이다. 그만큼 불을 빨리 피우는데 잘 붙이는데 유용한 제품이다. 그런데 제가 이 번개탄이 무언가? 어떻게 만드는 것을 보니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제가 읽어드리겠다. ‘바싹 마른 톱밥과 가루를’, 일단 바싹 마른 것이란 거부감이 있는 단어인데, 바싹 마른 톱밥과 가루를 밀가루나 전분 등으로 만든 풀에 넣어 뭉쳐놓은 숯의 일종의 불쏘시개이다.
여러분, 설명이 뭐라고 되어있냐면, 바싹 마른, 물기가 전혀 없는, 또 바싹 마른, 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래야 이렇게 해야 불이 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생각 속에는 불이 붙으려면 뗄 감, 곧 나무만 있으면 그냥 된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실제로 불이 붙으려면 그 불이 붙는 과정에는 그냥 나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어떤 나무여야 하는가? 바싹 마른, 물기가 없는, 그런 나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 그럼, 갈멜산으로 와서 한 판 붙자, 너희 바알을 섬기는 수백 명의 선지자들이여, 여기 송아지 두 마리 가져다가 한 마리는 너희, 한 마리는 내 제단에 올려놓고 불붙이기를 해보자. 그래서 누가 참 신인지, 모두 보는 앞에서 결판을 지어보자.” 그렇게 국가적이기도 하고 신앙적이기도 하고 개인의 운명과 심지어 자존심, 정체성까지 온통 결부되어 있는 이 중요한 싸움을 하는 입장에서 왜 바싹 마른 나무가 아니라 물을 갖다 붓고 있나? 그것도 세 번이나, 단순히 엘리야의 뛰어난 믿음으로만이 설명하기에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제가 그것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제 시선이 불이 아니라 자꾸 물로 간다. 물 이야기로, 불붙은 이야기인데 제 시선을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물에 관한 것이다. 그렇게 사로잡힌 시선이 오늘 본문에 이곳에서 실마리를 찾았는데, 그것이 38절이다.
 
*열왕기상 18:38,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러분, 여기에서 ‘물을 핥은지라’, 제가 이 본문에서 불이라는 주제 속에서 이 물에 자꾸 귀를 기울이다 보니까 이 표현이 저는 예사롭지 않았다. ‘물을 핥은지라’, 이 표현의 주어는 무엇인가? 물을 핥았는데 누가 핥았는가? 불, 여호와의 불이 핥았다고 38절에 되어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불은 화력이 대단한 것이다. 한 번에 물을 불이 태울 정도의 불이니까, 그러니까 불이 물을 일시에 태울 정도이니까, 오늘 이 표현은 엘리야로 이내내린 이 여호와의 불이 이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압도적, 그래서 번제물과 나무와 흙과 돌과 이런 것 태우고도 모자라서 그 주변의 물이 찰랑찰랑 넘치는 그 ‘물까지 다 태웠다.’ 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그냥 ‘ 다 태웠다.’ 라고 하면 될 것을, 도랑의 물에 가서는 동사를 바꾸는 것이냐는 것이다. 그냥 다 태웠다고 하면 왜 동사가 아닌 38절을 다시 보자.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압도적인 물에 꽂혀서 일어난 일을 성경이 뭐라고 기록 하냐면, 뭐뭐뭐는 태우고 뭐는 핥았다. 라고 이렇게 표현한다. 물만 동사를 바꾸어 주었다. 저는 당시 성경의 기록을 전할 때, 요즘처럼 타이핑해서 프린트해서 쭈욱 나누어주는 그런 간편한 시대도 아니고, 종이도 귀했겠지만, 다 일일이 수기로 써서 전헌 그런 시대에 한 단어 틀리는 게 아주 의미 있는 일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물에 있어서만큼은 ‘태우다’는 단어가 아니라 ‘핥다’라는 단어로 바꾸어준 분명한 이유, 나름의 이유, 분명한 어떤 의도들이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그래서 제가 여기에 등장하는 ‘핥다’라는 단어를 성경에서 찾아보았는데, 그게 시편 72편 9절에 있다. 9절만이 아닌 8절부터 10절까지 보자.
 
*시편 72:8-10,
8 그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9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10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여러분, 이 9절에 ‘핥는다’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데, 티끌을 핥는다는 태도와 동작을 묘사하고 있다. 조금 이해를 돕자면 앞뒤로 싸고 있는 8절 10절을 전체적인 분위기, 뭐하는 분위기 인가를 살펴보면 이게 굴복하는 것을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즉 어떤 왕이 더 상위에 존재에게 더 높은 왕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수그리는 모습을 표현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태도중의 하나로, 그 앞에 엎드려 신발의 먼지나 핥는, 그 앞에서 핥는, 굉장히 엎드려 그냥 아주 비굴하게 구는 모습이다. 그런 완전한 굴복, 아주 완전한 패배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오늘 갈멜산의 엘리야로 돌아와 보면 불이 붙었나, 안 붙었나, 여러분 그 유무만으로도 이미 승패를 가릴 수 있었다. 그래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여러 선지자들을 이겨먹은 대 역전극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불의 이야기만으로 읽지 말고 물의 이야기로도 한 번 보강해서 입체적으로 읽어보면, 그 불이 물을 핥음으로써 또 하나의 중요한 승부가 달려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승부가 달려있다. 그 싸움에서 완벽하게 승리했다. 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어떤 싸움인가? 여호와와 바알의 싸움이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불붙어서 싸움은 끝난 것 아닌가?’ 그럴 것이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이 불이 주변을 태우는 시각적으로도 압도적이었던 불이었던 것만큼 여호와의 이 불이, 이 승리의 이 하나님 되심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압도적인 이 하나님이 여기 담겨져 있다.
 
여러분, 하나님이 위로부터 불을 내리셔서 불이 붙는 것만이 아니라 무엇도 보여주었는가? 주변의 물을 핥았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왜? 이 당시가 사건이 벌어지는 이 당시가 딱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었냐면, 세상의 물이 누가 핥아 먹은 것처럼 바짝 마른 그런 가뭄이었다. 오늘 열왕기상 18장을 읽었다. 18장 1-2절을 보자.
 
*열왕기상 18:1-2,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여러분 장면이 시작되게 되는 여러분, 이 갈멜산의 싸움이 벌어질 때가 그때의 상황이 어떠한가? 1절에 보면 비를 내려주셔야 한다는 그런 때이다. 2절에 표현을 빌리자면 기근(饑饉)이 심한 때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5절에 보면, 여기는 제가 읽어보겠다.
 
*열왕기상 18:5,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 여러분 아합은 일국의 왕이다. 오바댜는 중요한 공무원이다. 그런데 일국의 왕과 아주 중요한 직책을 맡은 공무원이 무얼 찾아다니는가? 물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이 물을 찾는 이유가 물 곁에 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동물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시 곡식이 없는 이 기근의 시대는 물이 없기 때문이었고, 더 나아가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이다. 대지에 비가 내리지 않으니까 온 땅에 기근이 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 열왕기상 18장 38절에서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 불에 버무려져 묘사 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 당시 가뭄이 왔다면 세상에서 물을 제거 하신 분이 누구이신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세상에 다시 물을 공급하시는 분이 누구이신가? 하나님이시다. 왜 여호와의 불이 물을 핥았다고 하는 표현하는 것이 연결이 되는가? 왜 여호와께서 압도적인 이 불, 내려주시는 이 임재의 장면 속에서 이런 문학적 장치를 숨겨두었는지 링크가 되는가? 여러분 불을 내려주시는 장면으로도 압도된다. 불을 내려주시는 장면으로도 야! 하나님, 살아계시다, 박수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보고 있는 것보다 더 압도적인 임재와 표식이 이 불의 사실에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누가 이 땅의 물을 핥았겠느냐? “나다! 나 여호와이다! 나에게 와라, 엄한 데서 찾지 말고 나에게 와라.”너희들이 믿고 있는 그 비의 신, 폭풍의 신, 이 바알이 내 적수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기대고 거기다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오늘 불 내리는 장면에서도 하나님 보여주고 계신다. 존재하지도 않지만, 바알이 실제 있다고 해도, 그 녀석은 내 신발에 먼지나 털어야 할 아주 미천한 존재에 불과하다. 비를 내리거나 폭풍우를 내릴 수 없는 주장하거나 관장할 수 없는 그런 미천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너희가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고 하나님이 묻고 계시는 것이다. ‘번영과 평안을 위해서 바알을 실컷 쫓다가 세차게 놓은 너희들이다. 나 여호와가 유일한 살 길이다. 너희들의 깜깜한 무지와 칠흙 같은 어둠의 이 영안에 내가 오늘 이 불을 던져서 길을 내주려고 한다.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를 오늘 보여주고자 한다. 이제 이해하겠니?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이 압도적인 불길 속에서 물을 핥을 정도로 강력한 화력을 가진 이 압도적인 불길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두, 이 제단을 둘러싼 다 지켜보고 있는 이 이스라엘 모두에게 사실은 압도적인 질문 공세를 펼치고 계시는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진정 주목해 보아야 할 승부가 바로 이것이다. 불을 내리시면서 물의 신을 꺾으신 것, 진정 물을 다루는 주체는 바알이 아니라, 나 여호와임을 천명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의 궁극적인 의미였다.
 
저는 개인적으로 엘리야가 거기까지 알았는지, 몰랐는지를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개인적인 판단은 있지만 성경이 주체적으로 다루어주지는 않지만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리기는 어렵다. 그걸 알고 물을 부었나, 그것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저와 여러분은 오늘 이 본문을 읽었고, 여기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도 지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냥 불붙이는 쇼 이벤트의 신이 아니라 거기 하나님의 압도적인 존재와 면모를 담아서 이야기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서 충분히 전해 받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시대, 또 다른 언어로 이러한 하나님의 면모를 깨닫고 고백했던 욥은 이렇게 말한다. 욥기 1장 21절인데 여러분, 화면을 보면서 함께 읽어보자.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여러분, 믿는가? 엘리야의 시대에 땅에 물을 주시는 이도 여호와이시고,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다. 하지만 사람들은 땅에 물을 주는 이를 누구라고 말을 하는가? 하나님도 되지만 바알도 된다고 여겼다. 세상의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은 바알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바알을 따랐다. 이 많은 숫자가 따랐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을 핥는 동작을 통해서 ‘이 물을 내가 다 걷어간 것이다. 나에게 와야 산다. 내가 살려줄 수 있다. 나만이 너희들이 살 길이다.’ 천명하시고 그래서 이 문맥상 이 갈멜산 전투 뒤에 비 내리는 이야기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이 붙는 이 화끈한 이벤트가 일에 전부라는 생각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 속에 담으시려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우리가 경험하고 추구해야 될 사실 최고의 화력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앞두고 있다. 무려 오천 여명이 넘게 오늘 이야기 들으셨겠지만, 일찍 오신 분들은 약 오천 명 오백여명이 모이고 있고 교회 내부에 섬김이 들이 당일에 포함하면 교회에 6-7천여 명의 하나님의 가족들이 운집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압도적인 시간에 이 많이 모이는 이 화끈함에 속지 말고 그것으로 다 됐다라고 여기지 말고, 오늘 하나님이 그 불속에 담아주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그런 섬김이 도도록 소망하고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 압도적인 하나님의 일이 되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불붙이고 많이 모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시대에 필요한 답을 알려주시고, 그게 나라고 하나님이 등장해 주시고 임재 해 주시는 그러한 일을 사모하는 그러한 경험하는 복되고 값진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해 주셔야 한다.
 
제자훈련으로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한국교회에 불을 붙였던 사랑의 교회이다. 하나님의 강력하고도 압도적인 임재를 통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비욘드 코로나시대에, 한구교회의 감히, 감히 다시 한 번 답이 되고, 불이 되고, 통로가 되기를 기도해 주시면 한다. 이번 한국의 섬김의 날이 교회를 위축시키고 교회를 해하려는 어떤 세력들로부터 하나님이 압도적인 등자, 압도적인 임재, 한국교회 강력하게 던지시는 불이되기를 기도해 주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섬김의 날을 앞두고 우리가 해야할 두 가지를 이야기를 드리고자 한다.
 
첫째- 여호와께서 답이 되신다.라고 하는 이 믿음의 확보이다.
 
*열왕기상 18:37-38,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여러분 앞서 살펴본 대로 지금 이 시대는 물이 부족한 시대이다. 시간 상 또는 자세히 살피지는 않겠지만, 어디서 물 부족함을 가져왔나를 따져보겠지만, 그 정도로 궁금함이 생길 정도로 이 시대는 물이 참 귀했다. 그런데 37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호소를 보라. 그는 뭐라고 하는가? 응답해달고 여러분 간구하고 있다. 응답하옵소서, 응답하옵소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응답하신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무엇인가? 불이다. 그렇다. 불을 내려달라고 지금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의 맡게 응답으로 불을 던져주신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가 가뭄의 때라는 것을 한 번 기억해 보면, 이 불붙는 게 사실은 그렇게 의미는 없어 보인다. 왜냐면 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유명한 예수님의 질문이 나오는데 위 화면에 나오듯이 유명한 질문이 나온다.
 
*마태복음 7:9-11,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그런 하나님, 바라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 좋으신 하나님, 한 번 기억해 보고, 마음에 담아두고 오늘 본문으로 다시 와서 이 화답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이상하지 않는가?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언가? 이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불인가? 물인가? 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물인지 모르신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는가? 아니다. 물을 핥으시면서, 물이 왜 없어졌는지, 이게 궁극적인 문제이고 어떻게 답할지, 하나님은 파악하고 보여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모르시지 않는다. 제가 보여 드리는 것은 물을 응답으로 구하지 않고. 왜 그것을 하나님의 사인으로 구하지 않고 물이 얼마나 급한 문제인데 그 중요한 데는 관심이 없나? 이거다. 하나님은 아셨는데 엘리야는 모른가? 그건 아니다. 아까 아합과 오바댜가 물을 찾았다. 18장 6절에 각기 각기 찢어서 간다.
:
*열왕기상 18:5-6,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여러분 앞서 살펴본 대로 지금 이 시대는 물이 부족한 시대이다. 시간 상 또는 자세히 살피지는 않겠지만, 어디서 물 부족함을 가져왔나를 따져보겠지만, 그 정도로 궁금함이 생길 정도로 이 시대는 물이 참 귀했다. 그런데 37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호소를 보라. 그는 뭐라고 하는가? 응답해달고 여러분 간구하고 있다. 응답하옵소서, 응답하옵소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응답하신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무엇인가? 불이다. 그렇다. 불을 내려달라고 지금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의 맡게 응답으로 불을 던져주신다. 그런데 여러분, 이때가 가뭄의 때라는 것을 한 번 기억해 보면, 이 불붙는 게 사실은 그렇게 의미는 없어 보인다. 왜냐면 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유명한 예수님의 질문이 나오는데 위 화면에 나오듯이 유명한 질문이 나온다.
 
*마태복음 7:9-11,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그런 하나님, 바라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 좋으신 하나님, 한 번 기억해 보고, 마음에 담아두고 오늘 본문으로 다시 와서 이 화답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이상하지 않는가?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언가? 이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불인가? 물인가? 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물인지 모르신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는가? 아니다. 물을 핥으시면서, 물이 왜 없어졌는지, 이게 궁극적인 문제이고 어떻게 답할지, 하나님은 파악하고 보여 주시고 계시기 때문에 모르시지 않는다. 제가 보여 드리는 것은 물을 응답으로 구하지 않고. 왜 그것을 하나님의 사인으로 구하지 않고 물이 얼마나 급한 문제인데 그 중요한 데는 관심이 없나? 이거다. 하나님은 아셨는데 엘리야는 모른가? 그건 아니다. 아까 아합과 오바댜가 물을 찾았다. 18장 6절에 각기 각기 찢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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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5-6,
5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이길 저 길로 각자 간다. 그러고 나서 7절에 가서 이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난다. 그래서 왜 뭐하다 왔는지 알 정도로 시대가 그 정도라면, 엘리야는 뭐가 문제이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곤란함과 무엇을 해결해 주어야 진짜 신으로써 각인되고 인식 될 수 있는가에 엘리야는 절대 모르지 않는다. 심지어 이 물 문제는 아까 아합은 이쪽 길로 가고 오바댜는 저쪽 길로 간다고 했듯이 아합은 여러분 세상 나쁜 사람이다. 사실 물을 안 찾았으면 좋겠다. 아주 바싹 마른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오바댜는 금방 가서 찾고, 또 찾았으면 좋겠다. 담임 목사님도 한 번 설명해 주셨지만 오바댜는 정말 이 종교적인 핍박 속에서도 믿는 이를 보호하면서 먹이기도 한 사람이라 이 사람이 찾았으면 좋겠다. 저는 여러분 정말 재미있다. 나쁜 사람이든 아주 죽어야 될 사람이든, 하나님이 칭찬도 받고 우리가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든 다 지금 궁극적으로 뭐가 필요한가? 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물이 이만큼, 이 사람이야 말고 보았다. 그 정도였다. 악인이고 의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다 물이 필요하고 물이 답인 시대이다. 물이 답이 시대였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지금 불을 내려 달라고 하고 있고, 하나님은 거기에 응답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불의 강림이라는 것은 이런 불의 강림을 통한 하나님이 강림의 임재는 여러분, 오해 받을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불로 바알과의 싸움에서 존재적 가치를 딱 드러내시면서 싸우시며 완성하시는 것은 좋은데, 그게 답은 아니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무슨 상관이야? 나는 지금 물이 필요한데?~~
 
여러분, 이 지점에서 앞서 말씀드린 우리가 하나님이 답이시라는 이 믿음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균열(龜裂)할 지점, 흔들릴 지점이 발생한다. 불은 압도적이다. 불은 화려하고 강력하다. 그런데 지켜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따지고 보면 별거 없다. 불이 붙으면 뭐하는가? 지금 필요한 것은 물인데,,, 그거해서 뭐하냐?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것인데, 난 지금 이것 때문에 힘든데, 이 생각이 뿐이다. 지금 믿음을 확보하자고 여러분에게 요청 드리고 있다. ‘한국교회 섬기는 날’에, 우리가 여기 모이는 일로 뭐 대단한 일이 일어나겠냐는 그런 불신을 우리가 제거해야 되고 우리가 믿음이 이것이 우리에게 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확보해야 한다. 하나님이 이 날을 통해서 이것을 불 삼아서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기가 막힌 답을 주시리라 믿는 것, 이것을 필두로 해서 한국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한 그 무엇, 교회의 생명력을 주시고 그 어떤 문제들로부터 해갈을 하나님이 선언해 주실 것이다. 그걸 간절히 원하는 것, 이 한국 섬김을 날을 통해서 이런 선한 영향력이 일어나기를,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대하는 것,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 일어날 일을 정말 믿음으로 확보하는 것, 내 믿음으로 확보하는 것, 그것이 남겨진 시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여러분, 매일 강단 기도회가 계속되고 있다. 담임 목사님께서 ‘9.26 섬김의 날’의 기도제목도 내놓으시지만, 꼭 끝에 가면 여러분 개인의 기도를 간절히 하라고 당부하신다. 여러분, 여기 기도제목 없으신 분 있는가? 다 있을 것이다. 저도 있다. 그래서 그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 기도를 했다. 내용은 비밀이다. 알고 싶으시면 개인적으로 연락 주길 바란다. 왜? 개인적인 기도를 이 시간에 하라고 하시는가? 궁금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 깊은 뜻을 깨달았다. 불이 붙어야 된다. 응답하옵소서!!! 응답하옵소서! 그렇게 간구해야 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이 그냥 멀뚱히 저 산위에 불붙는 나랑 동떨어진 따로국밥이 되면 안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래서 이렇게 섬기고 우리가 모이고 애쓰고 한다면, 무형교회인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도, 환경에도, 여건에도 회복과 부흥이 와야 된다는 것이다. 엘리야가 ‘불로 응답하여 주소서!!’라고 했지만 그래서 그 불이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겠지만 그 불 위에 무엇이 왔는가? 그토록 필요한 물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쏟아졌다. 이번 ‘9.26’ 이후에 ‘9.26’을 계기로 우리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우리 모두가 은혜와 소망의 응답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흠뻑 맞았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원한다. 여호와께서 여러 모양으로 각양각색으로 우리 모두에게 오늘 이 시간 답이 되실 거라는 그 믿음을 여러분, 확보하길 바란다. 이 믿음으로 기도의 행렬에도 뜨겁게 좀 동참해 주고 교회 역사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과 인생의 역사적인 변곡점(變曲點)을 경험하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두 번째가 있다.
 
 
두 번째- 물 붓기를 아까워하지 말라.
 
*열왕기상 18:38,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물이 가문 시대였다. 그럴 때 물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었고, 그 물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 한 방울도 남겨지지 않고 다 타서 없어졌다. 여러분, 등짝 스매싱(smashing)‘이라고 아는가? 잘못해서 등짝을 엄마에게 짝 맞는, 오늘도 때리고 나오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회개하라. 시원하게 맞는 것, 저 같은 경우는 때를 곳도 많고, 의외로 타격감도 좋아서 때리고 싶어볼만한 최고의 상대이지만, 때리기 좋다고 막 때리는 것은 아니다. 뭐해야 등짝 스매싱을 맞는가? 잘못한 일일 있고, 맞을 만한 일을 저질러야 맞는 것이다. 여러분, 여기를 잘 보라. 물이 가문 시대에 물 붓고 이러고 있으면 등짝 스매싱이 아닌가?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가? 게다가 그 물은 어떻게 되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여러분 이 물을 그 당시 오늘 우리 소중한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 보라. 물질이든, 건강이든, 뭐 소중한 것, 다 생각해 보라. 뭐든지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재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보라. 제가 말씀드렸듯이 아합이든 오바댜든 이것 찾느라고 난리이다. 남들 시키면 될 것을 자기들이 찾고 있다. 없어서 구하려고 찾아 헤 매이는 그런 시대이다. 이것이 없어서, 그런데 그 재화가 지금 낭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냥 불 붙여도 되지 않은가? 그냥 붙여도 된다. 그런데 가뜩이나 부족한 물을 갖다가 붓고 있으니 그걸 다 태워먹고 있으니 얼마나, 얼마나 낭비 같은가?
 
여러분, 예수님의 가나안 혼인잔치에 물 떠온 하인이 있다면, 여기는 물 붓는 사람이다. 신약에 물 떠온 하인의 기쁨이 있다면 오늘 여기 물 붓는 사람이 알게 될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뭐냐면 마중물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물을 부을 때는 잘 모른다. 붓고 나서 불이 붙어서 물이 타서 없어질 때도 잘 모른다. 그러나 이후에 비가 올 때는 안다. 이게 마중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도 알고 있다. 여러 모양으로 극심한 가뭄의 때가 우리의 생활을 조여오고 있고, 환경을 조여오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저도 피부로 느낀다. 돈 안 쓰는 게 유행인 시대이다. 젊은이들은 하나도 돈을 안 쓰는 첼린지에 재미 삼아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이면서 도전하고 있는 요즘이다. 재화와 물질의 사용이 되어서 두 번 세 번 곱씹고,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지출하는 그런 시대이다. 돈만 그러하겠는가? 나의 돈과 시간에 대해서는 더 칼 같이 고민할 시기이다. 그런 와중에 남모르는 오천 명을 초대한다고 한다. 거기에 나의 물질을 드리고 나의 시간을 드리고 섬김을 드린다? 이 가뭄이 시대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 붓고 나면 증발해 버리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나님이 물을 핥으시면서 자기 배만 채우는 탐욕의 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다. 길을 줄 테니까, 내가 보여 줄 테니까, 이리로 오라고 살려주시려고 지금 이야기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맥 아래 이 불붙이시는 장면에서 물은 증발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손에 붙들려서 온 나라를 적시는 비가 되어 내릴 것이라는 이 사실도 여러분은 믿는가? 그래서 저는 소망한다. 간절히 저는 기도한다. “주님, 성도들의 이 나눔과 헌신, 각양의 섬김, 이 사랑의 교회의 수고 가운데 반드시 역사하여 주옵소서!” 한 번 타버리고 마는 소비가 아니라, 하나님 붙들고 사용하시는 거룩한 낭비되게 하여주옵소서! 드린 자들이 상상치 못했던 그런 생명의 강수로 되돌려 받고 되 맞게 하여 주옵소서!“ 마치 초대교회처럼 물건을 통용하고 아낌없이 나누고자 하는 성도들의 그 손길에 하나님의 마음 부어주시고 폭발적인 부흥을 일으켜 주신 것처럼, 우리의 이 나눔과 섬김과 헌신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회복과 부흥을 이루어 가시길, 참석한 목회자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이 땅을, 내 가정을, 내 자녀를, 하나님 살려주옵소서. 할수있거든이 무슨 말이라고 하셨으니까,
“하나님, 할 수 있거든, 이 일을 통해서 이 땅에 가람을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물 붓는 자의 기쁨을 소망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나의 작은 것을 생명의 조각구름 삼으셔서 이 땅을 위한 생명비로 바꾸어 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작은 것을 내려놓고 잠잠히 기도하는 내게 하나님의 뜨거운 임재, 불같은 임재를 보여주실 뿐 아니라, 그 불 뒤에 있을, 그 불 뒤에 오게 될 은혜의 비를 이름으로 소망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은 허탄한 신화에 잠식되어 오래되었다.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 인생의 길이고 답이 예수님이 아니다. 예수에게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시대의 변모된 바알에게 가장 된 여러 각양각색의 바알에게 있다. 그렇게 심취하라. 그렇게 심취한지 오래이다. 심지어 교회조차 코로나를 겪으면서 바알인지, 하나님인지 여러 혼란 중에 지금 노출되어 있다. 이 때 누가 당당히 나서서 “하나님, 여기 임재 하여 주옵소서!” 요청할 것이다. “여기 불을 내려 주사 무너진 제단을 일으켜 주사 가람을 해결을 하여 주옵소서!” 누가 외치며 손을 들 것인가? 저는 사랑의 교회에 맡기신 일이고 무형의 교회인 여러분들, 저와 여러분들의 이 사랑의 교회에 내어주신 일이라고 믿는다. 부흥에 불붙이시는 이 하나님 앞에 물 타고 있고, 물 아까워하고 있는 내 안에 바알이 있다면, 이 시간 기도함으로 다 날려버리고 혹여나, 각자의 인생에 메말라 가기 시작한 어떤 샘물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라면 오늘 이 자리에서 기도로 쏟고, 반드시 여호와의 손에 목을 축이시고 돌아가길 바란다. 아울러 한국교회 9.26 섬김의 날이 화려한 불 쇼로 그치지 않도록 여러분이 기도해 주어야 한다. 화려한 쇼라고 여겨지지 않도록 그런 쇼라고 여기는 불신으로 여기는 오해의 세력들을 제거해 달라고 여러분 기도하라.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면 내 소유와 시간을 부어서 이 땅을 향한 주님의 몸 된 너무나 영광스런 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한 부흥의 마중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길 기도해야 한다. 우리를 사용하시고, 너무 열악한 곳에서 예배드리고 있을 교회들을 살려주시며 눈물로 강대상 앞에서 씨름하고 앉아 있을 그 목회자를 살려 주시길 기도하자. 큰 싸움을 앞두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이 싸움을 싸울 방식을 알려주시길 기도하며, 기꺼이 내놓을 믿음도 주시며, 환경과 여건도 주장하여 주시며, 이 싸움의 방식을 가르쳐 주시며 사모하며 매어 달리는 자가 되어 하나님이 필요한 불을 내려주실 줄 믿는다. 우리 모두를 사로잡아 주실 줄 원한다.
 
♣요약
우리의 믿음과 불을 붙여주시고 메말라 가는 이 시대에 누가 앞서나가 이 싸움을 싸울 것인가에 나를 부르시고 이 교회를 부르신 것처럼, 이 때, 우리를 불러주셨으니 그 부르심에 반응하고, 응답하여 주심을 믿고 하나님의 그 불을 체험하고 초청하는 바로 기도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것을 원하시면 기꺼이 드리고, 나의 생명을 원하시면, 기꺼이 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이 가시는 길에 작은 헌신과 섬김을 보태고 나와 성정이 같았던 여호와의 엘리야의 기도도 이루어졌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개인과 한국교회를 역사하시길 소원하오니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고, 각양각색의 기도의 제목을 응답하여 주시며, 여호와의 불로 응답하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생명의 강수에 벅차 오르는 가슴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를 섬기는 9.26일을 기억하여서 우리가 믿음의 보고, 감사의 보고가 되며, 물 붓는 사람만이 아는 기쁨을 누리고, 부흥의 마중물로 사용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어떠한 여건에서도 임재 하셔서 모든 과정을 도우시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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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10일)

제목: "강하고 담대하라"
말씀: 여호수아 1;1-9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하상범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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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1-9,
1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4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5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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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범 부목사님

-거룩한 습관을 따라 치유와 응답을 체험하시는 오늘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한다. 강하고 담대한 용기를 심령에 가득 부어주시는 시간되시기를 소망한다. 저는 종종 소설을 읽을 때가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저와 전혀 다른 상황 속에 있는 그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공감하며 읽을 때가 있다. 또 소설책을 읽다보면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변 책들을 뒤적거리며 저의 협소한 상식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또 감정이 언어로 정리가 되어서 저의 마음이 시원케 되는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한다. 성경 속 인물에게 수평적으로 연결이 되어 감정을 공감한다. 그리고 시야가 넓어지는 것들을 경험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어를 진리가 되어 마음이 시원케 된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연결이 되는 은혜를 경험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읽을 때에 제 삶을 넓어지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게 하는 놀라운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하신다. 오늘 이 시간 여호수아 말씀을 통해서 저희 모두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넓어지고 깊어지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소망한다.
 
*여호수아 1:6-9,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설교 제목이기도 한다. 어떤 단어가 반복이 되는가? 바로 강하고 담대하라.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했을 때, 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의 대해서 질문이 들었다. 왜냐하면 찬송가 347장을 보면 ‘허락하신 새 땅에 들어가려면 여호수아를 본받아서 들어가야 된다.’라고 우리가 찬양을 한다. 왜 본 받아야 하냐면, 여호수아가 강하고 담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본받자.’ 라고 찬양을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강하고 담대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시 여호수아가 성경에 처음 등장했던 그 장면을 기억하는가?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처음 등장한다. 출애굽기 17장 9-13절 말씀을 보자.

*출애굽기 17:9,10,13,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여호수아가 성경에 처음 등장할 때 성경은 여호수아의 감은 초년의 역사, 그의 경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그들 앞에 잘 훈련된 그들 앞에 아말렉 민족이 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였다. 그런데 잘 훈련된 군사를 가진 아멜렉과 지금 전투를 싸움을 해야 될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호수아, 사람들을 취하여 아말렉과가 싸우라.” 그 말은 들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명을 받들어 순종하여 사람들을 취하여 아말렉과 싸움을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싸움을 나가서 승리를 취하여 돌아오는 장면이 바로 오늘 그 장면이다. 저희가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한 인물이며 전사요, 무사이고, 이미 모세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한 장면을 보면 출애굽기 24:13.15,18을 보자.
 
*출애굽기 24:13.15,18,
13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돌아오는 주일 청계산 산상 기도회를 앞두고 있는데, 마치 그러한 상황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시내 산 산상 기도회를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와 함께 산에 올라간다. 모세는 그런데 홀로 여호수아를 산에 남겨 두고 더 깊은 산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올라간다. 출애굽기 32장 1절에 보면 산 아래서 진에서는 40일 동안 그들을 이끌고 온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급함에 두려움에 사라진다.

*출애굽기 32:1,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왜냐하면 그들을 이끌고 온 리더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론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급함과 같이 전이되어 버린다. 그래서 백성들과 똑 같은 불경건과 불신앙의 선택을 하고 만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홀로 산에서 40일 40야를 두려움과 맞서 싸우며 모세가 돌아올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린다. 그런 여호수아를 향해서 민수기 32:12장 하반 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신다.
 
*민수기 32:12,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온전히 따랐다는 것은 여호수아가 죄 없는 삶을 살았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수아 삶이 불신앙이 가득하고 배도가 판을 치는 그 시기에 두려움을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고 하나님께 충성하였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한 인물이었다. 두려움을 모르고 하나님께만 충성하던 자였다. 그 여호수아가 여수룬에서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통치자 되었다. 강하고 담대한 인물이며 두려움을 모르고 담력을 가진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강하고 담대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반복해서 강조하시면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통해서 실현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약속을 내가 실천만 하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강하고 담대한 여호수아라 할지라도 두려움을 모르고 거룩하고 충성스런 여호수아라 할지라도 두렵고 놀라, 발이 땅에 붙고 몸이 얼어붙어서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고 몸이 얼어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강하고 담다하라’는 이 말씀은 여호수아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업의 풍성함이 이미 주어진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팬데믹 시대에 무언가로 인한 불안, 초조, 떨림을 느끼며 살아간다. 왠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왠지 모를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래서 한 발짝 떼면 된다는 것을 아는데, 용기를 내면 된다는 것을 아는데, 몸이 얼어붙고 말 때가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 마이스 교수는 ‘의지력의 재발견’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의지만큼 믿을 수 없는 게 없으니 믿지 말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기도교 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무심적 의지로는 자유하게 하지 못 한다.” 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담대하지 못하다고 해서 자책하지 말라. 자신이 강한 의지력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라. 그러면 이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부터 보자.
 
I. 소중한 것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1-2,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모세가 죽었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을 하며 광야기간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바라본다.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곧 법이었고 모세의 입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모세를 통해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모세를 통해서 만나가 떨어지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물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가나안 땅을 들어가야 된다. 가나안 땅에 일곱 족속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가장 필요한 그 순간에 모세를 상실했다. 여호수아에게 있어서는 더 특별한 존재였다. 왜냐하면 여호수아가 전투하러 나갔을 때에 산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는 모세를 바라보며 여호수아는 전투를 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는 모세를 바라보면 여호수아는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삶에서 분별이 되지 않고, 판단이 되지 않고 햇갈리는 상황이 있으면 모세를 찾아서 상의를 했다. 그런데 지금 가장 필요한 그 순간에 모세를 상실한 것이다.
 
목회자로 소중한 사람들뿐 아니라, 소중한 일을 상실했다고 말씀하시는 성도님들을 만나야 할 때가 있다. 좋아하고, 의지하고 전부였던 것을 잃어버렸다고, 빼앗겨버렸다고 표현하시며 말씀하실 때가 있다. 육신적으로 보면 깊은 미스터리이다. 지극히 아픈 섭리이다. 그분들의 믿음에 대한 쓰라린 시련이다. 상실로 인해 비어버린 그 자리를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야 되는지 그 방법들을 물어보신다.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에게도 지금 그러한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수아 1:2b,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신명기 34:8절에 보면,

*신명기 34:8,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죽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가 그들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애곡하고 애도하는 30여 일의 기간을 기다려 주신다. 그리고 오늘 본문 2절 하반 절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냐면 곧 너희들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그 땅이 어떤 땅인가? 본문 말씀 3절이다.
 
*여호수아 1:3,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3절에 보면, 시제가 좀 이상하다. 뭐가 이상한가? 밟는 곳을 아직 안 밟았는데 하나님께서 이미 주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5장을 먼저 이해하셔야 한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통해서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언약을 맺는다. 그러다가 나중에 출애굽기 2:24절에서 애굽 땅에서 그들이 너무 힘이 들어 고통소리를 기억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들의 언약을 기억하신다.
*출애굽기 2:24,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 사랑하는 성도님들,
언약을 기초로 구원의 행위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기에 가나안 땅은 그들의 땅이 될 땅이다. 다만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8절에 형통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형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개념과 의미가 다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형통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지금 다가와 주셔서 내가 상실한 것들을 채워주시고 위로를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성취해 주시는 것이 형통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자신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형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영적인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상실의 체험과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실의 체험이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상실의 생각에 발목을 잡혀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잃어버린 그 자리를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소중한 것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예정된 완성을 향하여 순종의 전진을 멈추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순종의 자리‘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통하여 ’약속된 기업‘을 얻기들 원하신다. 여호수아는 이 영적인 비밀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중에 40년 동안 해어지지 않았던 신발과 옷이 해어지는 상실이 닥친다. 그리고 40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내렸던 만나가 그치는 상실을 닥친다. 그래도 여호수아는 순종의 전진을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상실의 순간이 닥친다하더라도 강하고 담대함으로 순종의 전진을 멈추지 않아 약속된 기업을 받는 형통함의 은혜를 누리시길 소망한다.
 
II.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게 될 때이다.
 
*여호수아 1:1,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나님은 모세의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자리에 서서 백성을 이끌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옆에서 섬기고 돕는자였다. 그 누구보다도 모세가 어떤 자였는지 잘 아는 자였다. 성경에 보면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2:2,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겼다는 표현이 되어 있다. 외모적으로 칭찬이 된 것이 아니라, 원어로 보면 토브라고 숨겨져 있는데 그 ‘토브’가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낼 것’이라고 뜻이 숨겨져 있다.
*출애굽기 33:11,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사야 6장에 보면 천사도 경외함 가운데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는데 모세는 친구와 같이 하나님과 대면하였다. 그 결과 출애굽기 34:29절에 보면,
 
*출애굽기 34:29,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는 은혜를 누렸다고 말한다. 민수기 12:3절에도 그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더 은혜를 누렸다. 그리고
 
*민수기 12:3,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신명기 34:10,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시편 90편 표제에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표제에 적혀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여호수아 1:1절에 보면 여호수아를 향해서 여호와의 종 모세,
 
*여호수아 1:1,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미국의 백 년 전에 살다간 연방 대법관 월리홈스는 이런 말을 했다. 삶이란 총 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월리홈스의 지적처럼 삶을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되는데 그것이 잘 되지가 않을 때가 많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다짐을 하면서 산다. ‘남보다 잘 살아야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비교하면서 모순된 다짐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남보다 잘 살아야지’ 하면서 남과 비교하면서 극단으로 치 닫을 때가 있다. 이 극단으로 치 닫을 때가 언제냐면 나도 모르게 ‘나는 지금 이 나이까지 뭐했나?’ 생각을 줄 때가 있다. 그러다가 잘 된 친구를 보면서 저친구 나이가 어떻게 되었었지? 그러면서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낄 때가 있었다.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렇게 모세와 비교하여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여호수아 1:5절이다.
 
*여호수아 1:5,
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바로 그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할 용기를 주신다.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의 성곽은 하늘에 닿을 만큼 크다. 그들의 병거는 철로 되어있다. 그들과 싸워야 할 군사는 거인과 같이 크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들과 비교할 때에 자신들이 초라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으며,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으며,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와 비교했을 때에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먼저 너와 함께 있다는 신적 확신이 가득 부어주셨어야만 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너와 함께 있으며,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에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용기를 주신다. 강하고 담대할 용기를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성경은 기록된 이 말씀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 이 상실을 자주 상기하라. 내 자신이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라.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하라. 우리가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일을 더하면 우리의 수고가 예수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확신하라.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떠나지 아니하실 것이다. 우리 안에 생명을 더하는 믿음, 풍성하며 확고하며 흔들리지 아니하며, 회복력을 더하는 믿음을 더 주실 것이다.
 
욥도 자신이 초라해졌을 때, 나를 떠나지 않으시며 버리지 않으실 때, 맞으십니까? 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울부짖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 칭찬하셨다. 뿐만 아니라 야곱도 하나님 앞에 나아갔더니 하나님께서 그 야곱에게 넌지시 져 주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아간의 죄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여호수아가 이 본문 말씀을 붙잡고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수아 7:9절이다.
 
*여호수아 7:9,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도 강하고 담대 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신다. 마지막 세 번째이다.
 
III. 영적 왕관의 무게가 부담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명기 34:5,7,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씀은 어떤 뜻이냐면, 모세가 죽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에 개입하셨다는 것이다. 왜 개입하셨는가하면, 그 이유가 민수기 20자에서 나온다. 모세의 여동생 미리암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물이 없어서 물이 없어서 물을 달라고 불평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박하다. 모세의 여동생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향하여 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모세가 명하여 물을 주지 않고 반석을 쳐서 물을 준다. 딱 한 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 그 대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영적 왕관의 무게를 여호수아가 본 것이다. 얼마나 불순종하는 대가가 얼마인지를 여호수아가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 부담 앞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여호수아 1:7-8,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호수아 이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의 명령과 규례들을 지켰다. 모세 역시 신적인 권위를 좇아 처신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명령과 규례들을 받았다. 그런데 여호수아부터 달라진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들을 기록하게 한다. 그리고 신명기 31장에 가면 언약궤를 메는 레위 제사장들에게 모든 장로들에게 그것을 기록한 모든 율법 책들을 주어서 보관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7년에 한 번씩 온 회중들에게 낭독하여서 듣게 만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7년에 한 번씩 온 회중들에게 낭독했던 것을 이제는 주야로 묵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다 할지라도 그의 처신이 율법 책 위에서 규정된다고 말씀하신다. 그의 처신의 표준을 율법 책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그이 규범이 그의 말씀 가운데서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따르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해야 되는 것은 성실히 그 율법 책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그의 임무가 되었다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내 삶의 표준을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아야 한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되어야 한다. 오직 저희들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새로운 법을 만들 필요가 없다. 새로운 세계관을 기준을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성경을 폈을 때, 때로 이해가 안 되고 의심이 되는 내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할 때에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의심의 대명사를 나타내는 신자가 한 명이 있다. 바로 도마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그 도마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현하여 나타나신다. 그 때 도마가 무엇이라고 고백한 줄 아는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도마 한 사람 밖에 없다. 묵상하여 성경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은혜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적 그 무게가 부담으로 느껴진다 하더라도 강하고 담대하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의 말씀을 통해서 그 길이 복된 길임을 은혜의 길임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고 누리게 하여 주실 것이다. 이제 말씀을 맺겠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나안 땅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신명기 12:9,
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델이 아니다. 이미 잘 아시는 거처럼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실질적인 경험에 있어서는 힘겨운 싸움의 시작이다. 가나안 땅이 의미하는 것은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로 들어가서 믿음의 삶의 훈련을 받기 시작한 곳이 바로 가나안 땅이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양심의 평안을 영원의 안식이 시작되었다. 값 주고 산 소유에 대해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실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아직은 먼 미래에 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수없이 많은 강하고 담대한 순간들을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그의 자녀들을 향해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신다.
 
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 가운데서 아버지 하나님만 전적 순종함으로 의지하는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의지의 온전함을 회복시켜 주시며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을 부어주시는 평생 되는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소망한다.
 
♣요약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순종 위에서 강하고 담대함을 주심으로 의지의 온전함을 회복하고 주님이 부어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누리기를 소망해야 한다. 보배롭고 큰 약속을 의지하여 나아가 우리 안에 착한 일을 하신 이가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믿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며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믿고, 우리 안에 생명을 얻게 하는 믿음, 풍성하며 확고하고 회복력 있는 믿음을 더하시기를 간구하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갈 때에 슬픔이 기쁨이 되는 역전을 경험하며 내 일의 삶 가운데 전적 위탁으로 그 은혜를 펼쳐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명예와 능력의 원천이 되시고 세상 통치자들의 근원이 되시는 분에 의하여 명예가 여호수아에게 입혀지고 큰 능력이 그의 손에 들리워진다. 아마도 모세에게 말씀하신 때처럼 하나님게서는 '회막에서' 여호수아를 향하여 말씀하시는데, 그에게 더 큰 힘을 주시고자 직접 말씀하신다. 어떤 이들은 꿈이나 환상 중에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 모세의 죽음으로 출애굽 1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종결된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새 지도자로 임명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다. 하나님은 그에게 가나안 정복과 율법을 지킬 것으로 명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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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 17일)
제목:  "다시 복음으로"
말씀: 로마서 1:16~17
찬양인도: 쉐키나,  이다니엘 부목사님
대표기도: 한재준 부목사님(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정성욱 목사님(덴버신학대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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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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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아멘!!

오늘 이 아침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소망과 신령한 기쁨과 평강이 넘치시길 바란다. 기도.
 
-코로나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참 피곤함과 어떻게 보면 지친 느낌이며 계속해서 이 터널을 우리가 통과하여 가면서 이 상황을 타계할 수 있는 우리의 삶 속에 어려움과 고난과 이 현실을 한 방에 해결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한 순간에 이것을 종식시키고, 모든 것을 완전히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한 방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를 우리가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우리 한국 교회가 지난 2년 반 동안 코로나 상황을 잘 견디어 왔는데, 앞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고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복음으로”!!! 아멘....
 
 
다시 복음으로 가야만, 다시 복음으로 우리가 올인 해야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권능과 지혜와 능력을 회복하고, 다시 한 번 새롭게 부흥하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복음만이 우리의 힘이요, 우리 희망이요, 우리의 능력이요,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영광인줄로 믿는다. 오늘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 말씀을 통해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한다.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자랑한다. 나는 복음을 찬양한다. 나는 복음을 예찬한다. 복음만이 나의 소망이다. 복음만이 나의 능력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부정어법을 사용하고 있는가? ‘내가 복음을 자랑한다.’라고 긍정적인 말로 했으면 되는데,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도바울이 생명을 걸고 전하는 복음이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자가는 우리의 목걸이로 만들어서 메고 다니고 십자가로 우리의 옷을 장식해서 다니고, 십자가로 우리의 영광스러움을, 우리의 정말 놀라운 희망을 주는 것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1세기에 사도 바울이 살았던 그 시대에 십자가는 가장 치욕적이었다.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다. 가장 치욕이자 수치스러운 것이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막 자랑하면서 내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는 숨겨야만 했던 것이고 덮어야만 했던 것이고 결코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 십자가는 가장 극악한 범죄자, 가장 치욕적인 가장 천륜의 범죄, 가장 악한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들을 처형하는 틀이다. 가장 악한 사람들을 처형하는 처형 틀인 십자가는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내 가족 중에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면 또 어떤 사람이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는 순간, 나는 매우 수치스러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수치스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십자가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 죽으셨다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나는 결코 부끄럽지 아니하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한다.”고 성토하고 예찬하고 바울은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복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기서 두나미스, 능력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에서 오늘의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나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폭탄이다. 이것을 영적인 것으로 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영적인 ‘핵폭탄’이다. 모든 문제를 일발에 일소해버리고 모든 문제를 정리하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다 덮어버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지혜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적인 핵폭탄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한하신 능력이 고도로 응축되어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이 드러나 최고도의 강도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인줄로 믿는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핵폭탄이다. 자 그러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핵폭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왜 복음의 능력인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그 사람이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사람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그 사람이 콩고이든 인도사람이든, 그 사람이 브라질 사람이든 캐나다 사람이든, 누구든지 간에 모든 믿는 자에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배경이 무엇이든지, 그 사람의 삶의 어떤 경험을 했든지, 그 사람이 어떤 성품이 가지든지, 그 사람이 피부색깔이 어떠하든지, 그 사람이 속한 종족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이다. 아멘~^^
 
오늘 저는 ‘구원’이란 말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한다. 교회 와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예배를 하다보면 ‘구원’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다. 찬양 속에도 구원이 나오고, 성경에도 구원이 나온다. 제자훈련 받을 때도 구원이 연속되고, 여러 가지 상황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접하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그 생동 력, 구원이라는 말이 그 능력, 그 신선함, 구원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그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주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구원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로 정리하겠다. 다시 한 번 복음으로 돌아가야만 우리 개인의 삶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민족이, 우리나라가, 전 세계가 다시 회복되고, 복음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 드리겠다. 우리에게 구원 받는 의미가 무엇인가?
 
 
I. 구원은 죄 사함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선물로 받을 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의 첫 번째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때, 찔끔찔끔 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의지 할 때,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우리의 과거의 죄와 우리의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완전히 덮어주시는 줄로 믿는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과거의 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의 현재의 죄, 우리가 싸우고 있는 죄, 장차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 성으로 인하여 우리가 미래에 짓게 될 그 죄까지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완전히 덮으시고, 사하여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한 의인이라고 선언을 받은 줄로 믿는다. 완전한 죄 사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 던져 버리시고 깊은 바다의 심연으로 우리의 죄를 던져 버리신 줄로 믿는다. 더 나아가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너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운 역설이다. 우리 안에 죄 성이 남아 있다.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와 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날마다 성령과 동행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너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의로운 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한 자가 된다고 우리를 서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의에 옷을 입혀 주시는 줄로 믿는다. 그게 죄 사함이다. 그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은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완전한 죄에서 해방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적인 죄 의식, 이제는 두려움의 죄 의식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안타까움의 죄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구원은 죄 사함이다.
 
II.구원은 거듭남이다.

-구원은 중생하며 거듭남이다. 니고데모가 찾아왔다. 가장 유명하고 걸출한 사람인데 율법학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랍비여 제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네가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다. 그 말을 듣고 니고데모는 “제가 모태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인가요?”라고 한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라고 하신다. 왜 거듭나고 중생해야 하는가? 저와 여러분이 태어날 때,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살아서 태어나지만 영적으로 죽어서 태어난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우리의 영이 죽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적으로 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야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을 때에 우리의 죽은 영혼을 다시 살려 주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의 영혼이 다시 거듭날 때, 새로운 생명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고, 새로운 목적과 삶을 갖게 되고, 우리는 삶의 방향을 갖게 되고 새로운 인종, 새로운 존재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줄로 믿는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아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 새로운 줄로 믿는다.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고 중생해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생명을 얻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III.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우리의 인격에 무릎을 꿇을 때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될 줄로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더 이상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아들과 딸들이 된 것이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 이것을 수사학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나님의 딸이구나, 여러분의 아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믿는가? 여러분 그런데 왜 그렇게 재미가 없는가? 왜 힘이 없는가? 왜 그렇게 인생이 무미건조한가? 드라이하고 삶의 패션(passion)이 없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고 정말 믿는다면, 정말 여러분의 삶은 반드시 달라진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아버지, 아빠인가? 아멘, 여러분, 자녀의 특권을 사용하기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 앞에 무시로 돌아가서 하나님 앞에 우리 사정을 말하고 하나님, 아빠,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 오늘 하나님 아빠, 저를 좀 도와주세요. 무시로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 하고 친밀한 교제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인 줄 믿는다. 특권을 부리시길 바란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부른다. 그냥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는 특권을 사용하기 바란다. 그 특권을 사용하면 무얼 받느냐면, 하나님 아버지께 무시로 나아가면 담대하게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보혈의 힘입어 우리는 담대하고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하나님의 지성소 앞으로 들어가서 그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정을 낱낱이 보고해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안수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우리를 안아주심을 경험하게 된다. 또 우리의 자녀가 됨을 모든 부요함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물의 주인이시다. 모든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영하시고 우주에 있는 모든 것에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었다. 그러면 이 땅에서 가장 부요한 존재는 누구인가? 이 땅에서 가장 부유한 존재는 빌 게이트도 아니고 일론 머스크도 아니고 이 땅에서 한국 땅에서 가장 부요한 자가 이재용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존재는 저와 여러분이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이고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의 부요함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본받는 자이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의 겉모습이라도 닮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우리가 아들과 딸이 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본받고 닮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원하시는가?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줄로 믿는다. 무엇을 담게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담게 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하나님 신실하심과 진심하심과 하나님의 온유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깊은 통찰과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과 사람을 품어주는 능력,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저와 우리가 닮아가고 그것의 놀라운 특권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기본적인 이미지가 하나님이 그냥 아무런 표정도 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우리가 잘못하면 꿈 밤이나 때리고 채찍이나 때리고 우리가 잘못하는 순간 징계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스바냐 3:17,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저와 우리를 바라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들과 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신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잠잠히 우리를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우리를 향하신 기본적인 자세는 바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볼 때, 우리를 향해 웃으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웃으시면서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신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 우리를 바라보시며 춤추시고 신나하신다.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기뻐하시는 그 놀라운 복음의 말씀을 오늘 진심으로 여러분 신뢰하기를 바란다.
 
 
Ⅳ. 구원은 성령님을 받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님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령님은 어디에 계신가? 우리에게도 온 우주 만물에게도 존재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성령으로 우리를 인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심령 속에 우리의 영혼 속에 자리하시고 성령 가운데 내주해 계신 줄로 믿는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다. 이것을 믿어야 한다. 말로만이 아닌, 지식적으로도 아닌 정말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한다. 나의 마음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 성령님이 내 마음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조명해 주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을 접할 때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상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악들을 우리로 하여금 확인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게 해서 그 진리를 따라 살게 하시는,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하시는 순종의 영이시다.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는다. 때로 우리가 범죄 할 때에,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고 성령님의 마음을 나쁘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성령님이 우리를 떠나시는가?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 줄로 믿는다. 때로는 하나님의 성령님은 우리의 죄악으로 마음 아파하시고 때론 근심하실 수 있다. 그러나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인 치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된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무슨 말인가? 이미 내 안에 계셔서 내주하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서 “오늘도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내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고, 지배하시고, 내 삶을 지도하여 주시옵소서. 내 삶을 주님 앞에 온전히 의탁하오니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기도를 하기 바란다. 이렇게 기도드릴 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될 줄로 믿는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다.
 
Ⅴ. 구원을 받는다는 자유케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자유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진리를 알지니 내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라고 하신다. ‘자유’는 너무나 좋은 것이 자유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좋은 것이 자유이다. 여러분이 자유가 없다면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서로를 격려할 수가 없다. 자유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처음 창조하시고 뭐라고 하시는가? “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너희가 임으로 먹되” 무슨 말이냐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은 너의 자유롭게 먹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가장 첫 번째 주신 것이 자유이다. 그런데 우리가 범죄 함을 그 자유를 상실하고 잃어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마귀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 되고, 사망의 종이 되고, 거짓의 종이 되고, 노예가 종이 된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을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신 줄로 믿는다. 무엇보다 마귀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다. 마귀는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노예 삼아서 우리를 범죄 함을 살게 한다.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를 지배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순간, 마귀의 주도권과 마귀의 지배권은 파괴된다. 우리는 마귀로부터 자유케 된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마귀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신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마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마귀가 역사한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명하노니 모든 사탄과 마귀는 물러갈 지어다. 아멘” 이렇게 물러가도록 우리는 마귀로부터 자유 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말한다.
 
*빌립보서 1ㅣ23,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그러나 바울은 이 몸 안에 남아 있어야 되고 이 땅에 살아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너희를 위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 혼자만 생각하면 나는 내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 믿는가?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을 얻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된 자 인줄 믿는다. 마귀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물질이 최고라고 세상은 말한다. 황금이 최고라고 한다. 뭐니뭐니해도 세상의 가치관이다. 물질을 숭상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서 우리는 물질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잘 사용한 사람인 줄로 믿는다. 물질의 종이 되지 아니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하고 잘 관리하고 사용하는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항상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의의 밑에 있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우리는 자유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기를 믿는다. 우리가 자유케 된다는 것은 부정적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어떤 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이제는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순종, 하나님께 자발적 순종, 감사의 순종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해 함께 살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삶으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마음 속 깊이 자유 함으로 감사와 기쁨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자유를 얻게 될 줄로 믿는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주신 구원의 놀라운 영광은 제가 다섯 가지로 설명한 그거보다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것이다. 오늘 제가 다섯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핵폭탄인줄로 믿는다.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우리의 현실은 어떻게 보면 회색처럼 보이고, 어두워 보이지만 모든 현실 속에서 이미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고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우리를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면서 날마다 성소에서 기쁨과 감사와 행복으로 살기를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붙들어주고 그들을 견인해 주는 영광스런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사랑의 교회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새 날을 열어가는 것을 확신하고 축복한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찬양하고 복음의 능력을 머리로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우리의 심령으로 온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실천하는 살아가는 자가 되어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야 한다. 복음의 권능을 회복하고 다시 복음으로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으로 우리가 무장하여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의 산 증인이 되길 소망한다.
 


















이 영상은 2부 예배 영상이므로 1부예배 내용과 다소 약간의 차이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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