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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1월 6일)
제목: "시험을 다루는 신령한 음료"
말씀: 고린도전서 10:1~4, 13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대표기도: 금동훈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고린도전서 10:1~4, 13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ㅡㅡㅡㅡㅡ


 ▶지난 주간 특새부회(특별새벽부흥회)를 통하여 서초동에 하늘 문을 여시고 봄날의 생수를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는다. 많은 성도님들이 다시 살아났다. 오늘 주일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 온 성도들이 은혜로 채우시길 원한다. 오늘은 390명의 학습, 세례, 입교를 하겠다. 코로나 이후 제일 많은 분들이 학습과 세례, 입교를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다. 오늘 본문을 읽었는데 이 본문은 본래 세례에 관한 말씀이다. 이 본문을 가지고 한 번은 세례식에서 말씀을 하려고 했다. 온 교회가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본문 1절을 보면,
 
*고린도전서 10:1,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앞에 보니까 우리 교회 신앙생활 오래 한 분들과 오늘 세례와 학습, 입교한 분들도 꼭 무얼 해야 하는가? 여기에 구름 가운데와 바다 가운데는 홍해를 지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2절을 보면,
 
*고린도전서 10:2,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무슨 뜻인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홍해를 지나면서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뭐 여러 해석이 있지만, 예를 들어서 애굽의 군대들이 쫓아오는데, 막아주었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핵심은 홍해를 지나가는 것은 죽음을 건넜다는 것이다.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났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죽다가 살았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어떤 삶의 인생들이 보통 인생들이 목표들의 그런 가치관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죽다가 살았다. 죽음을 선포하고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에서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이 홍해를 건넜다는 것이다.
 
*고전 10:2,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오늘 세례와 입교와 학습을 받는 모든 성도님들은 모두가 다 홍해를 건넌 줄 믿는다. 이것이 핵심이고 너무 중요하다. 여러분이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많고 성처 받은 것도 많지만 모두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는 것이다. 이제 이 사람들이 이제 모세에게 속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물세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속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가는 것처럼 오늘날 모든 성도들은 물세례 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새를 지나고 하늘의 불을 받은 사람은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가고 홍해 물세례를 통하여 모세에게 속했다. 특히 율법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신약인 물세례를 통하여 정말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었다. 여러분 이렇게 세례를 받고 죽음을 통과하면 그 다음 3-4절에 보면,
 
*고린도전서 10:3-4,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전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것을 것이다. 우리가 광야를 걷게 되는데 신령한 음식을 먹고 그 다음은 신령한 음료를 먹는다는 것은 만나와 반석에서 샘물이 나와서 그렇게 물을 마시고 만나와 물을 먹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매일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삶의 신령한 음식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령한 음료는 특새를 통하여 매일 매일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의 생수(리빙 워터)이다. 우리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 날마다 생수의 강을 경험하게 된다. 문제가 무엇이냐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걸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광야 걸어가는 모든 상황, 실수한 것, 잘 한 것, 경험한 것, 그것 속에 모든 것을 통해 깨닫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5,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 광야에서 20세 이상 성인들이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하고 다 죽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고전 10:6,11,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이게 우리에게 본보기 거울이 되고, 말세에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무얼로 깨우치게 되는가? 오늘 오늘 2022년 11월 6일에 이 시간에 세례와 입교와 학습의 우리 온 성도들, 진짜 평생 기억해야 할 것은 광야 길을 걷는 그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또 아니게 나타나는 것이 있다. 홍해를 건넌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이 있는가? 만나와 생수를 주는데도 그들은 하늘이 있는가? 그래서 은혜가 너무 크다. 은혜는 끝이 없다. 이번 특새도 은혜가 크다. 너무나 커서 우리는 채무자이다. 그야말로 영적인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음료를 맛보며 살고 있는데, 문제는 무어냐? 10절에 보면,
 
*고전 10:10,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은혜를 받고 있으면서도 광야에서 맨날 7절에서는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8절에서는 우상을 숭배하고, 9절에서는 주님을 시험하고, 10절에서는 지도자 모세에게 시비를 걸고, 그러니까 이리저리 이제 막 넘어지는 것이다. 광야에서, 지금 시비 걸고 문제가 생기고, 그런데도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을 한다. 그래서 두 명 빼놓고 다 그랬다. 그래서 우리에게 거울을 삼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하면 원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게 신앙의 키이다. 어떻게 항상 깨어 있으려면 장애물과 고통과 상처 앞에서 어떻게 원망과 불평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저는 강원도 예수원이라는 곳이 대단하다. 그곳에서 20대 초반에 큰 은혜를 받았다. 그곳은 나에게 대단한 장소이다. 그런데 여러분 대천동 원장님, 잠시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잠시 있다가 남은 기간을 그곳으로 갔다. 그때가 그곳이 은혜의 장소이다. 환경적으로 열악했지만 그러나 지나고 보면 하나님이 다 공급해 주셨다. 그런데 예수원의 가장 큰 문제는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내부에서 원망하는 형제자매들이었다. 꼭 예수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홍해를 지나 새 사람이 된 우리가 어떻게 광야에서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오늘의 키는 13절이다.
 
*고전 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신령한 음식, 반석에서 생수를 마시고 다 영광스럽지만 우리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전인자를 닮아가지고 그 가운데서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고 어떻게 하면 한 결 같이 은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조금 깊이 들어가면 출애굽기 15장 홍해를 건너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데 막상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와 기쁨의 유효기간은 얼마인가이다. 우리의 속성이 원망과 불평이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면 평생 은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다.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달려있다.
 
▷시험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모든 성도들은 광야 같은 예수를 믿어도 광야 같은 삶이 지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 같은 그런 원명과 불평을 가지고 산다.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 출애굽의 영광과 홍해를 건너는 영광의 은혜의 유효기간이 3일 밖에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유효기간을 30년 40년으로 유지할 것인가이다. 시험을 잘 다루는 것이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이다. 핵심은 이제 은혜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이 시험은 시험에는 모든 시험이 있는데 이것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극복하는 것인가이다.
 
*고전 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유효기간을 은혜를 끝까지 유지하려면, 누구라도 어떤 경우에도 시험을 당한다. 시험에 관한한 예외가 없다. 그리고 시험은 다 예측 할 수가 있다. 여러분, 광야라는 곳은 물이 없는 곳이다. 광야라는 곳은 정말 살기 힘들다. 주거의 문제 등, 생사 다 예측 된다. 우리 앞에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고린도전서 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신실하시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시험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시험을 당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미쁘시기에 하나님이 인자하시므로 우리를 내 팽개치지 않으신다. 그래서 평생 긍정적으로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여러분, 모든 시험을 예측할 수 있다. 가치 있는 일, 신령한 삶, 믿음의 삶에도 시험은 있다. 주의 일을 할 때도 값을 치르고 시험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시험 대신 원망 대신 은혜를 주신다.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감사, 성숙, 온전함을 갖게 된다. 어려우면 하나님께 구하면 된다.
 
*야고보서 1:2,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래도 할렐루야! 예수원 원장님은 예수원에 불이 났다고 외쳐도 대답이 “할렐루야?” 했다고 한다. 우리도 어떤 시험을 만나더라도 할렐루야!!~ 그래도 할렐루야!!~
 
*야고보서 1:3-4,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믿음의 핵심은 인내이다. 사랑도 인내이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원망할 상황이라도 우리는 원망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은 시험을 당할 때마다 원망과 불평하지만 우리는 기도하여서 인내 가운데 온전함을 구해야 한다.
 
*야고보서 1:5,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원망대신 감사하라. 저 말씀은 신앙의 단계마다 이해도가 다르다. 결론은 감사하면, 유효기간 3일에서 30년이 된다.
예배와ㆍ말씀, 소그룹, 큐티와 설교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고 기쁨과 감사를 주실 것을 믿는다.
 
♣요약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시험을 주시고, 때를 따라 피할 길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우리의 의지가 죄악에 걸려 쓰러질 때에 당하는 어려움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강하게 하고, 우리의 교만함을 겸손케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한다. 죄악의 홍해를 건너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세례를 받는 분들과 우리들이 생수를 경험하고 인생 광야에서 시험을 만날 때,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말고 늘 할렐루야를 외치는 은혜가 풍성한 긍정의 삶을 살아가서 본이 되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 믿음의 헌신이 되고 이웃과 형제 앞에 복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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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차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2년 11월 5일)-여섯째 날
제목: "복음의 기도의 능력을 잃지 않는 방법", "내 영혼의 풀 콘서트"
말씀: 창세기12:3, 
설교자: 오스 기니스 교수님(소명의 저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내 영혼의 풀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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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3,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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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차 가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2년 11월 4일)-다섯 째 날
제목: "다시 부흥케 하소서", "하나님의 부흥전략"
말씀: 시편 85:6, 요나 3:1~10,

설교자: 피터 릴백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총장님-통역 이원준 부목사님)-"다시 부흥케 하소서",
김한요(베델교회 목사님)-"하나님의 부흥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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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릴백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총장님-통역 이원준 부목사님)."다시 부흥케 하소서"

*시편 85:6,

6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

-하나님만이 하실 일을 구할 때 부흥이 가능하다. 진정한 부흥을 위해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의로움을 향해 걷게 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의 걸음을 걷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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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요(베델교회 목사님)-"하나님의 부흥전략"

1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가장 놀라운 부흥은 실패자인 우리를 부흥의 주자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교회는 착한 사람을 만드는 데게 목적이 아니라 새 사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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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차 가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2년 11월 3일)-넷째 날
제목: "부흥",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말씀: 열왕기상 18:41-46, 베드로전서 4:7-11.

설교자: 크리스챤 소니아 목사님(루마니아 호프교회), 김의식 목사님(치유하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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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소니아 목사님(루마니아 호프교회)-"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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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41~46,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 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가 기도할 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무언가를 위해 기도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가 여러분도 있지 않은가? 마음이 어렵고 낙심될 때도 계속 기도하면서 믿음보고(faith report)를 하라. 하나님은 반드시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작은 구름으로부터 시작하시는 분임을 알고 있었다. 루마니아 교회 건축할 대에도 작은 구름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위대한 일을 하셨다. 하나님은 은혜의 비를 내리시고 그 은혜에 젖게 하실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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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식 목사님(치유하는교회)-"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베드로전서 4:7~11,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
전염병이 만연한 것을 보니 말세의 마지막 때의 징후와 비슷하다. 지금은 근신하며 기도하는 것이 우일한 길일 것이다. 기도의 불을 붙이면 축복과 부흥과 영광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불이 붙으면 성령의 불이 붙고, 권능의 불이 붙으며 기적의 불로 승리의 불로, 부흥의 불로, 영광의 불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 그리고 화해를 위해 기도하라.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세요!! 새벽제단에 엎드리고 하나됨을 지키고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고 가르쳐라. 믿음의 인생을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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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1월 2일)

제목: "근심하지 마소서"
말씀: 창세기 45:4-5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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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5:4-5,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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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 20차 가을 글로벌 특별새벽기도회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고 있다. 전야제를 포함해서 오늘이 4일째인데, 하루하루가 역사이고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혹시 4일의 시간 가운데 우리 개인적으로 가장 기쁘고 중요하고 살의 전환점이 되었던 한 시간 한 장면을 뽑아낼 수 있는가? 기억의 카메라를 휘리릭 돌려보기를 바란다. 지난 주일부터 지난 4일을 쭈욱 돌아보았을 때, 이때가 가장 나에게 좀 전환점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좋다. 이제는 우리가 지금 4일을 돌아보았는데, 혹시 다시 나의 전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중요하고 좋은 의미로서의 삶의 전환점이 된 어떤 순간들, 혹시 기억해 낼 수 있는가?
 
주님을 만난 그 사건, 인격적으로 교제했던 그 시간은 0순위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외하고, 한 번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들을 한 번 기억해 보기를 바란다. 기억하기가 너무 오래 걸리면 그것은 중요한 것과는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금방 이렇게 기억이 나는 것이 있었을 수 있다. 어떤 사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어떤 분은 굉장히 중요한 시험에 합격했을 때이고, 어떤 분은 사랑하는 이에게 프로포즈 하는 장면, 어떤 분은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질병에서 온전히 나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내 인생이 전환점이라고 삼을 수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원의 어느 교회에서 텅 빈 예배 실에서 홀로 기도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절대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른 되도록 도망치던 저에게 말할 수 없는 주의 은혜로 목회자의 길로 가기로 결단하는 마음을 주셨던 저의 그 장면이 개인적으로 떠오른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마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오늘 본문 요셉을 읽었다. 요셉의 삶에 가장 중요한 좋은 의미로서의 삶의 전환점이 언제일까? 보는 사람마다 시점이 다를 수 있겠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요셉의 인생을 잘 알듯이 형제들에 의해 17세에 팔려온 요셉은 정말 고생을 많이 한다. 종으로 사는 것도 억울한데, 그래도 열심히 살았는데, 주인 보디발에게 의리를 지키려다가 옥살이를 하게 된다. 미시즈 보디발 때문에 옥살이를 하게 된다. 거기서 간수장이의 인정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생활해 보려고 하는데, 두 관원이 들어와 가지고 꿈을 해몽해 주다가 한 관원의 꿈을 잘 해몽해 준다. 그 사람이 걱정하지 말라고 요셉을 빼준다고 하고 나서 그 사람이 잊어버린다. 그래서 또 2년의 시간이 옥(獄)에서 보내진다. 뭔가 될 듯 될 듯 하다가 시간이 계속 가면 참 힘들다. 요셉의 시간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인생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그 꿈의 해몽의 실력을 바로에게 인정받게 된다. 애굽 최고의 통치자, 바로의 꿈, 곧 7년 풍년, 7년 흉년, 그 꿈을 잘 해몽하여서 바로의 총리가 되는데,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그때가 바로 요셉이 30세가 되던 해이다. 결혼도 한다. 아들도 낳게 된다. 아들의 이름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인데 므낫의 뜻은 ‘하나님께서 나의 괴로움과 내 온 집안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이다. 므낫세 낳고 ‘나 이제 다 잊었어.’ 라고 하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뜻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애굽이다. ’나를 풍성하게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전 것은 다 잊고 나 여기서 풍성하게 잘 나가! 자녀의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고백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많은 분들이 요셉이 총리가 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이렇게 선포하는 이때가 가장 복 된 시간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정말 애굽에서 넘버 2, 엄청난 권세와 함께 없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형통한 상황이 요셉의 상황이다. 그렇게 풍년의 시간이 지나고 흉년의 시간이 접어들었을 때, 요셉이 38세~39정도쯤이다. 어느 날 두 둥이, 기근(饑饉) 중에 곡식을 사러온 혈육,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이후에 내용을 우리가 잘 알듯이 형제와 요셉 간에 옥신각신한 내용이 있다. 요셉이 그 형제들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 보여주기 위하여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기도 하고 전대 안에 무엇인가를 넣기도 하고, 형제를 잠시 억류해 두기도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어렵고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나서 요셉은 결국 그 형제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그것 아는가? 요셉이 형제들과 이렇게 옥신각신 하는 시간들을 보내면서 굉장히 통쾌해 하거나 사소한 복수해 하며 고소해 할 것 같은데, 요셉은 이 모든 과정을 크게 세 번을 운다. 두 번은 형제들에게 엄하게 한 다음에 돌아서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운다. 마지막은 모든 신하들을 물리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며 운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서러움이었을까? 아니면 보고 싶은 베냐민의 얼굴을 보았기에 그러는가? 아버지가 그래도 평안히 잘 계신 것을 확인해서 일수도 있다.
 
우리는 요셉의 그 복잡한 심경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런데 확실한 것은 요셉이 그 자신의 아들을 므낫세라고 하며 “나, 다 잊었어!” 말하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잊어지는 것이 분명한 것인 것 같다. ‘내가 여기서 풍성하게 잘 살아’, 에브라임이로 이름 하였지만 한 인생의 있어서 성공과 번영이 그 인생에 일생동안 난 그 구멍과 그 허한 심령, 그 빈 공간을 다 채울 수 없다는 것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複雜)다난(多難) 한 그 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 형제들은 가까이 부른 다음에 나를 판 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한탄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는 아주 정확하게 밝힌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애굽에 판 요셉이요.”라고 정확하게 팩트 체크를 한다. 그런데 그 말을 한 다음에 바로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세요. 한탄하지 마세요.” 라고 말한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놀라운 성공이 요셉에게 관대한 마음을 주었을까? 아니면 그의 고도의 정치적인 처세술인가? 저 같으면 아무리 봐주어도 형제들 중에 몇 명은 종살이 체험을 몇 년 보내고, 몇 명은 따로 떼어다가 옥살이, 특별 투어 반으로 해서 좀 보내고, 그래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고 이해시키고 싶었을 텐데, 그는 왜 이럴까?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 이유가 5절에 나온다.
 
*창세기 45:5,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렇다 요셉이 이 놀라운 고백이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 적 계획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당신들이 팔았다고 말하지만 곧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바꾼다. 명백한 하나님의 중심적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 주어이다. 우리 하나님이 인도자로서 요셉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팔리기 전부터 요셉이 팔린 이후에도 계속해서 천천히, 하지만 더 명확히, 그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보여주셨다. 요셉의 사명을 깨닫게 해주셨다. 물론 그 요셉 인생에 대단 모든 것을 알려주시진 않으셨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과 섭리를 우리 인생들에게 다 알려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감당을 못한다. 종말의 때를 위하여 신비로 남겨 주신다. 필요한 만큼 알려주신다.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의 인생에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지, 어떻게 예비 된 존재인지, 내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필요한 만큼 보여주시고 믿음으로 달려가게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요셉의 인생 가운데 그가 종살이, 옥살이 할 때나 총리로 섬길 때나 점차 점차 더 명확히 보여주시니까 그의 억울한 것, 압제 당한 것, 서러운 것, 맞은 것, 갇혀 있는 것, 잘 될 줄 알았는데 안 된 것, 실망감만 가득한 인생을 섭리 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 내가 하나님 손에 내가 쓰임 받고 있구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이 고백할 수 있는 것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 -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저는 주님께서 요셉에게 때마다 너 근심하지마, 위로해 주셨다는 확신이 든다. 제가 확신을 하냐면, 요한복음에 있다. 요한복음 14:1절이다.
 
*요한복음 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때는 바야흐로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분위기가 너무 안 좋다. 얼마 전까지 누가 더 크냐고 치고 박던 제자들이 이제 한 자리에 쭈욱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이제 주님이 잡히신다는 직전인 것이다. “누가 나를 팔 것이다. 나는 잡혀간다. 너희가 잠시는 나를 따를 수 없다.” 라는 이런 말씀을 하시니까 제자들의 가슴에 근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이제 어떻게 되나? 지금까지 주님 따라서 왔는데 이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나, 버려지는 것인가? 고향 떠나올 때는 우리 주님이 왕이 되시면, 집안 관리라도, 영주라도 한 자리 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갈 곳이 없고 머물 곳이 없네.’ 어떤 고귀한 근심보다는 제자들 심령 가운데는 이걸 어떡하나? 한다. 그러데 베드로는 이제 세 번 배신할 베드로는 ‘죽기까지 따르오리다.’ 하고 큰 소리로 나아간다. 주님은 제자들의 세상적 근심을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다 아신다. 이들이 주님을 배신하고 곧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아신다. 부활하고 나서도 제자들이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 하고 자기가 본업으로 돌아와 고기 잡으러 갈 것을 아신다. 속속들이 알고 제자들을 알고 계신다. 속속들이 우리를 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제 십자가에 달리셔야 된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실 정도로 십자가를 준비하셨던 우리 예수님, 그렇게 심령이 어렵고, 육신이 어렵고, 그리고 곧 배신할 제자들을 놓고 우리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제자들을 위로 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다.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 할 거야.” 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할 거야.”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위로 자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영접해 주시는 주인이시고,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세상 적 염려로 점철(點綴)된 제자들에게 세상적인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본질적 염려도 내가 다 해결했으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신다. 영원토록 동일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 가운데도 그렇게 찾아오시며 동행해 주셨다. 그가 옥살이를 할 때, 그가 종살이를 할 때, 그가 해방되기를 기다리며, 내가 도와 준 관리가 내일 오나, 오늘 오나 하면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때(학수고대 할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요셉과 동행하시면서 야,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형통한 거야.’ 라고 말씀하신다. 나중에 거기 형통한 단어가 많은지를 찾아보라. 우리 하나님께서 요셉과 동행하시면서 요셉의 기도를 때마다 밤마다 들으시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안 하셨을까? 저는 100%, 하셨을 것이라 여겨진다.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데, 요셉에게 역사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위로하지 않았겠는가? 하셨을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 인생 가운데 점차 자신을 향한 섭리 적 계획,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니까 요셉은 반응한다.
 
요셉은 세 가지 반응을 한다.

첫째반응-상처가 감사가 된다.
-요셉이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그의 섭리 적 계획을 다 받았으니까, 자기가 팔린 것이 막 기쁘고 유쾌하고 외롭고 고단한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될까? 그때 아픔의 괴로움은 사실은 요셉의 몸과 마음에 상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프고 눈물이 난다. 대성통곡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픔과 눈물의 기억이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감사와 소망의 기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섭리를 알게 되기 때문에 감사한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니까 나를 이렇게 사랑하심을 감사하게 되며, 이 나라를 구원해 주시니,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이렇게 구원해 주시는구나!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니까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상처가 흔적이 있지만 그것이 감사로 바뀐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 하면, 이전에 배신당한 것, 아픈 것, 억울한 것, 여러 생각들로 눈물이 나는데, 주님 크신 은혜라!!~~ 하면,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고 여기까지 살게 하시고, 그리고 지금 주의 사명자로 세워주시니 감사의 고백이 나온다. 그때는 참 힘들었는데, 눈물로 시작하지만 주님 얼마나 감사한지를 우리의 고백이 바로 요셉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반응이 그래서 상처가 감사로 바뀌는 반응이다.
 
둘째반응- 분노와 복수심이 사라진다.
-지금 요셉은 비록 울고 있지만 그의 심령에 상처와 흔적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섭리와 놀라움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을 향한 분노와 복수심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완악했던 그들의 마음, 변화지 않는 그들의 심정, 그들의 지금 상황 때문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나중에 뒤에 본문에서도 자꾸 이런 것이 반복되니까 너무 슬퍼서 운다. 요셉이 어찌 나의 마음을 몰라주나, 왜 이렇게 나의 형들은 불안해하는가? 그에게 분노와 복수심이 없기에 정직한 마음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한다. 나중에는 “내가 당신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한다. 혹시 우리 안에 어떤 사건에 대한 누군가에게 분노와 복수심이 벌떡벌떡 살아있다면 오늘 우리의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서 주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주님의 계획에 우리의 몸을 맡겨야 할 것이다. 주님을 오래 안다고 하지만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주님을 더욱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위로를 받고 섭리를 깨달은 자의 반응이다.
 
셋째반응- 자신의 마음을 이입(移入)하여 진정으로 위로하게 된다.
-정말로 위로하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하는 근심하는 말은 부모님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야, 내일 시험 걱정하지마, 너 운동하는 것 너무 걱정하지마. 괜찮아 잘 될 거야!” 할 때, 이런 근심하고는 차이가 크다. 구약 성경에서 오늘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본문을 찾아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력을 당한 다음에 그 다음에 오빠들의 그 심령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썼다. ‘근심’, 어떤 느낌인지 알겠는가? ‘아차부’라는 단어를 썼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게획 한 것을 요나단이 듣고 그 마음이 ‘아차부’해졌다. 사랑하는 압살롬이 죽고 나서 다윗의 마음이 ‘아차부’ 근심하게 되었다. 이사야 54장 6절에서는
 
*이사야 54:6,
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버림받음을 당한 아내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냥 살짝 염려하는 마음이 아니다. 죽을 것 같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마음, 그것이 바로 ‘아차부’라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 자신에게도 이 단어를 언제 쓰셨느냐면, 창세기에 6:6절에서 사용하신다.
 
*창세기 6:6,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나서 ‘모든 사람들이 온갖 죄를 저지르고 먹고 마실 때에 내가 이들을 지은 것을 한탄한다. 내 마음에 이들의 죄악을 보니 근심이 된다.’고 하신다. 이 근심이 이것이다. 죄악을 앞에 놓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죄악과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가슴을 치며 마음을 두드리며 아파하고 힘들어 하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죄악으로 분노하고,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 하는 이 단어가 바로 이 단어이다. 그러니까 요셉은 형제들에게 너무 그렇게 힘들고 너무 그렇게 죽을 것 같이 마음이 ‘어려워하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근심하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제들이 정말 이만큼 힘들어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이 죄악으로 회개하고 눈물로 오열하면서 요셉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흔적은 안 보이는 것 같다. 오히려 요셉이 혹시 자기들을 죽일까, 힘이 있으니까,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서도 득달같이 달려온다. “아버지가 우리들 죽이지 말라고 했어.” “너 아버지 죽었다고 우리한테 그러면 안 돼” 라고 한다. 그렇게 요셉에게 하는 것이다. 형제들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런 단어를 썼다는 것은 형제들이 그런 마음을 꼭 가져야 된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이렇게 팔려 와서 내가 이렇게 종살이, 옥살이 하면서, 오해 받으면서, 다른 종족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얼마나 근심 된 일이었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요셉의 마음의 탄성인 것이다. 피해자인 당신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가해자인 당신들 얼마나 지금 힘들겠는가요? 당신들 죄악을 마주하면서 평생 어떻게 어렵게 그렇게 사셨는가요? 얼마나 그렇게 사셨는가요? 밥은 먹고 다니셨나요?” 이것이 괜찮다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힘든 군대 생활, 엄한 시어머니 밑에 있으면 본인도 엄한 것으로 나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일 수 있는데 요셉은 자신의 마음에 이렇게 힘든 어려움들을 가지고, 영 가족을, 자신을 사랑하는 형제를, 위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섭리 적 계획을 알게 되었기에 이렇게 하나님께는 감사로서 전심의 고백을, 그리고 형제들에게는 진심의 고백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영 가족 여러분, 제가 오늘 이 장면이 요셉에 있어서 이 장면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그 억울한 인생이 해소되고 대 반전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유쾌 통쾌한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렇지가 않다. 아팠던 기억이 그냥 마치 아팠던 순간이 지우개로 지울 수 있듯이 싹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이게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스토리를 제일 중요하냐면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암행어사로 나와 가지고 변학도를 쫓아내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한다. 그때 카타르시스를 확 느낀다. 이제까지 기다렸다.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한 주인공이 영화에서 어찌어찌 해가지고 마지막에 그냥 힘차게 복수를 완성했을 때, 자기의 복수를 완성했을 때 그냥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너무너무 악한 사람들을 연약한 주인공이 정의구현을 하면서 이겨버리니까 시원한 것이다.
 
그러나 요셉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위로와 함께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그 마음을 알게 되면서 요셉이 위로하면서, 사명자로서 선포하기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이제 사명자로서, 형제들을 위로하고, 70인 가족을 위로하며, 온 민족을 위로하는 위로자로서 이제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전 것은 다 준비가 되었고, 너무너무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제자들은 주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다 뿔뿔이 흩어지고, 부활이후에도 그렇다. 하지만 제자들이 주님의 마음을 깨닫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혀 같이 갈라지는, 정말 불의 혀 같이 성령의 임재가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달려 나가게 된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게 되고, 복음을 가지고 피스 메이커 역할을 힘 있게 생명을 걸고 감당하게 된다. 그래서 저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시점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순교하는 그 순간보다도 오히려 공회 앞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라고 고백하던 그 순간인 것 같다. 사명자로서 그 고백의 시작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쓰임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 요셉도 주님의 제자들도 위로받고 주님의 섭리를 조금이라고 깨닫게 된 자는 그 심령이 매에 있으면서, 꼬여 있으면서 억울하면서 분노해서 자유하게 된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슬픔과 고통이 서러움이 잠시 깃들일 수 있다. 하지만 곧 이내, 주님의 섭리와 주님의 인도에 감사함으로 기대함으로 변하게 되고, 복음 들고 사명자로 선포하게 되고, 위로자로 공급자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가?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혹시 달려가고 나서 얼마 안 된 요셉의 모습인가? 아니면, 사명을 깨닫고 위로하는 모습인가? 누가 크냐고 싸우던 제자들이 모습인가? 아니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 받고 주님께 사용되던 그 제자들의 모습인가? 정말 혹시 우리의 모습이 요셉의 위로를 듣고 있는 그 형제들의 모습은 아닌지? 주님 앞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서게 된다. 이 시간 우리에게 사도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빌립보서 4:6-7절에 말씀이다.
 
*빌립보서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근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계신다. 우리를 향한 계획이 주님께는 있다. 우리가 다 모를 뿐이다. 지금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캉통이라고, 고통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보시며 형통이라고 명령하실 수 있다. 우리가 특새 기간에 기도할 때에 먼저 하나님이 섭리적 그 은혜를 깨달아지기를 소원하며 감사함으로 기도하길 바란다. 하나님, 깨닫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만 알려주십시오. 기도하게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 주님은 알려 주실 것이다.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특색 기간에 기도할 때, 요셉과 같이 이제는 먼저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나에게 섭섭하게 한사람, 내 마음을 찢어놓은 그 어떤 이, 회사, 내 수고를 몰라주는 가족, 내 모든 상황 중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 용서를 선포하라. 사명 자는 연연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사명 외에는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눈물과 아픔이 내 마음에 흔적으로 상처로 남아 있지만 복수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용납함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 적 역사를 이해했다는 것이 바로 증거이다. 그게 증거이다. 아무리 예수님 잘 믿는 것 같고 매일 예배당에 있어도 여전히 심령에 맺히고 꼬여 있는 것이 있고, 풀리지 않는 것이 가득 차 있다면,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용서하고 싶지 않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거기에는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십자가 앞에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님 앞에 나를 맡기시고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못 내려놓아도 우리에게 내려놓게 하신다. 정말 신가하다. 역기를 들어보았는가? 10kg로 짜리는 들어서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런데 100kg 짜리를 들어 올려서 서있다고 하면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그것 못 내려놓는다. 서있지도 못한다. 더 있다가 못 내려놓는 것이다. 바들바들 떨면서 무릎도 못 굽힌다. 도와주어야 내려놓는다. 우리 주님께서 기도할 때에 용납하고 용서하고 내려 놓 수 있는 은혜를 주실 줄 확신한다. 아울러 이제 위로자로서 소원하면서 서길 바란다. 복음의 들고 사랑하는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요셉처럼 근심하지 말라고, 우리 예수님처럼 염려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한다.
 
공급함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하여야 한다. 이 소원하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 시간, 바로 지금 이 시간이 우리 삶에 가장 유의미하고 중요하고 전환점이 되기를 소원한다. 이게 믿음보고이다.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믿음보고이다. 그것이 바로 삶에 정점이며, 하이라이트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해야 되고, 앞으로 그것을 경험하기를 소원해야 된다. 남은 특새 기간 동안 정말 사랑하는 모든 영 가족들이 주님 손에 붙들리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요약 
형들은 요셉의 정체를 알고는 놀라며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을 만난 기쁨에 앞서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이 이를 알고 안심시키기까지 그들은 참 기쁨을 잊고 있었다. 성도의 참 기쁨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섭리(攝理)란 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간섭하시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믿었다. 그가 하는 말에는 항상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다. 이 단어는 그의 전 생애를 조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인 것이다. 요셉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형들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된 가해 행위 자체 만을 보고 형들을 미워하거나 복수심을 갖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을 들어 그런 행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폈던 것이다. 다만 용서하기에 앞서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했기에 그는 형들을 시험하며 회개의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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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차 가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2년 11월 2일)-셋째 날
제목: "교회안의 부흥", "은혜의 길"
말씀: 시편 26:3, 히브리서 10:19-25
설교자: (조쉬 멕도엘 - 미니스트리 설립자), (김삼환 목사님-명성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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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쉬 멕도엘 - 미니스트리 설립자.
시편 26:3,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교회의 성도들의 부흥은 성도들의 관계의 부흥과 연관이 있다. 더부어 관계를 중요시한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 
첫째로- 관계가 없으면 규칙에 저항을 한다. 
둘째로- 관계가 없으면 진리를 거부한다. 
셋째로 관계가 없으면 훈계에 분노하고 원망하며 억울해 한다. 자녀들의 삶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필요하다.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가 유지된 자녀는 진리를 인정하고 선을 지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의 친밀한 관계를 가정에서 세울 수 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부흥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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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환 목사님-명성교회 원로.
히브리서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성도의 살 길은 은혜뿐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바로 은혜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풍성하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더불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세밀하다. 안될 것 같은 것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며 세밀히 예비되어 있는 기적의 길이 열리게 된다. 광야의 길을 건너게도 하시고 막힌 담을 풀어 주시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교회를 통해 경험할 수 있다. 교회에 들어와야 한다. 그곳에서 부요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은혜를 받기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동이 트기 전에 교회에서 기도하는 새벽기도이다. 새벽기도를 하면 기적이 일어나며 새 길을 만드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은혜 아래 있는 성도라면 어떠한 기도 막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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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차 가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2년 11월 1일)-둘째 날
제목: "우리가 복음을 계속 전해야 하는 이유", "휘장 없는 장막"
말씀: 이사야 6:1-4, 사무엘하 6:12-15
설교자: 리처드 코킨 (교회 개척 네트워크 코미션 대표)-초빙, 박신일 목사님(미국 그레이스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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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코킨 (교회 개척 네트워크 코미션 대표)-초빙

*이사야 6:1-4,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하더라. 

-이사야의 삶을 보면 국가적인 위기와 불안에 환상을 보이시며 사명을 허락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우리를 각성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책감보다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사함을 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죗값을 치르셨다.  우리가 받을 고난을 대신 받고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모두가 구원받기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화되어 이사야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선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도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마음에 두고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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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일 목사님(미국 그레이스 한인교회)-초빙

*사무엘하 6:12-15,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첫째,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다윗은 자신의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모셨던 것이다. 우리도 주님을 가슴 속에 모시고 인격적인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살아있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둘째, 하나님만이 만왕의 왕이시다. 
-다윗의 아내 미갈은 언약궤가 들어올 때 춤추는 다윗을 보며 비웃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휘장을 위로부터 찢은 것처럼 미갈과 같은 냉소주의가 사라져야 한다. 주님은 순전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원하신다. 주님이 좌정하기 원하시는 곳은 솔로몬의 성전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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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차 가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2년 10월 31일)-첫째 날
제목: "기독교인의 선교", "체감신앙 체감온도"
말씀: 창세기 5:1, 히브리서 11:5-6
설교자: (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님-랭팸 파트너십 인터네셔널 국제 디렉터),
(권성수 목사님-대구 동신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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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라이트 목사님-랭팸 파트너십 인터네셔널 국제 디렉터)
"기독교인의 선교"

*시편 33:3-5, 히브리서 11:5-6,
3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여 하나님의 행동은 진실하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의롭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바로 잡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첫째로- 말씀은 세상을 변회시킬 능력이 있다. 
둘째로- 말씀은 모든 것을 그대로 창조할 능력이 있다. 
셋째로- 말씀은 세상을 다스릴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뿐만 아니라 변화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런 능력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절대 진리가 사라진 이 세대 속에서 세상을 바꾸고, 창조하시며, 다스리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드시 서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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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수 목사님-대구동신교회 원로
"체감신앙 체감온도"

*히브리서 11:5-6,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체감신앙의 온도를 높여야 한다. 

첫째로 -지존자 하나님을 체감해야 한다.
-말씀을 가슴으로 붙잡고 하나님이 바로 여기 계심을 체험하며 살아야 한다. 더 분명하게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동행한다면 바로 그곳에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둘째로- 보상자 하나님을 체감해야 한다. 
-하나님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이 상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이 상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만나야 한다. 그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맞춤형 하나님을 체험하며 믿어서 반드시 체험신앙의 온도를 높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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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0월 30일)
제목: "잃어버린 10년 회복합시다"
말씀: 창세기 35:1~15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대표기도: 남동우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창세기 35:1~15,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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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은 1-4부까지 찬양이 오늘 같다. 종교개혁기념의 날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가 505주년이다. 전 세계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는 날이다. 거기에 가사를 보면 2절에 “내 힘만 의지하면 패할 수밖에 없도다.” 어떻게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우리 힘만 의지하여 패하는 것이 축복이다. 그리스도인이 내 힘만 의지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사실 축복이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승리하는 것이다. 오늘 이 장수 누구뇨?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 장수이시기 때문에 내 힘만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늘도 주님만 전적으로 의탁하고 의지하는 그런 시간이 되길 바란다. 우리의 삶의 실천, 고백이 되어야 한다. 부흥 역사에 있어서 닥터 닥터 월터 카이즈는 이분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만일 성령께서 어떤 장소나 시간 혹은 개인을 통해서 주기적인 부흥을 주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지극히 비참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부흥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함께 그것을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른다. -월터 카이저-

-우리가 여러분이나 저나 구체적인 장소나 시간 현장에서 우리가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면 우울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답답하기 짝이 없고, 우리의 인생은 메마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흥을 체험하면 새로운 심령이 된다. 부흥을 체험하면 내 심령이 옥토로 바뀌게 되는 것이고 부흥을 체험하게 되면 뭔가 달라진다. 오늘부터 20차 가을 특별새벽부흥회 전야가 있다. 저는 이 특새가 늘 말씀드리지만 새 중에 가장 아름다운 새가 특새이다. 부흥은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 축복이다. 자녀의 새벽기도, 부모의 노후대책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데 이 자리가 부흥의 현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럴 때 이 특새의 부흥의 현장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특새는 어두움의 파도 가운데 지난 20년 동안 우리 교회에 등대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러니까 빛이 오면 어두움이 물러가게 되는 것이다. 빛이 여명이 트면 어두움이 도망가게 되는 것이다. 바퀴벌레 우글 하다가 빛을 밝히면 다 도망간다. 내 인생과 삶에 바퀴벌레들이 다 물러가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럴러면 이 야곱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넘버 2, 여러분의 마음속에 다 내 것으로 되기를 소망한다.
 
야곱은 어릴 때는 장자 권에 대해서 한 눈 팔려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말씀대로 얍복 강의 씨름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되는데 은혜를 받았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제 사건이 나오게 된다. 이 사건이 상당이 엄청난 사건이었다. 어떻게 보면 멸문(滅門)치하(治下)를 당할 만큼 힘든 어려운 상황에 접해 있다. 이유는 거기에 보면 벧엘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오늘 제목에 "잃어버린 10년 회복합시다"인데 부제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갑시다.” 이다. 교회생활 오래 한 사람은 벧엘로 올라가는 것을 알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내용을 깊이 있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창세기 35:1~,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오늘 본문에 벧엘의 단어가 6번이나 나온다. 1절에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오라가 하신다. 3절에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자고 한다. 다시 한 번 따라 해보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갑시다.” ‘벧 엘’, 벧은 집이라는 뜻이고 엘은 하나님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 벧엘은 30년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 장자 권 탈취 때문에 도망 나와서 어떻게 광야에 누웠는데, 거기서 보니까 꿈을 꾸는데 그 하나님께서 야곱의 사닥다리 알지 않는가? 아!!~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가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야곱의 개념은 야곱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한 개념은 자기 집안에 있는 신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보니까 아니야!!, ‘하나님이 광야에도 계시는구나!’ 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구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소위 옴미션스는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옴니프레전스는 어느 곳이나 계시는 하나님, 그래서 그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구나!, 그래서 벧엘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밧단아람 하란에 가서 거의 20년 있다가 다시 돌아와서 이제 이 벧엘로 올라가야 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냐면, 벧엘로 올라간 그 시간 전데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고 난 다음에 세겜이란 땅에 십년을 있었다. 바로 벧엘로 가야 되는데 세겜에 십년을 있으면서 사고가 일어났다. 무슨 사고가 일어났는가 하면, 아마 자식들의 영향이 많았던 것 같다. 자식들이 아버지 지금 바로 세겜으로 갑시다. 세겜이 좋으네요. 세겜에는 푸른 초장도 있고, 물도 풍성하고 세겜은 그 당시에 가나안 문화의 중심지, 아주 좋은 가나안의 발전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야곱은 유목민이니까, 유목민은 유목민처럼 살아야 어떤 거친, 그 하나님과 야곱만이 같이 살아야 하는 그런 유목민의 삶이 있다. 그런데 세겜에 정착된 아름다운 문화와 발전된 문화를 보니까 자식들이 “아버지, 여기 있습니다.” 했을 것이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야곱의 딸 중에 디나라는 딸이 있었는데, 디나가 앞에 보면,
 
*창세기 34:1,
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가나안의 땅에 딸들을 보러 나간 것이다. 밤에는 나가지 말아야 하는데 거기서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것이다. 거기서 아주 겁탈을 당했다. 그 순간 세겜이라는 지역에서 족장이라는 이름도 세겜이었다. 세겜이라는 곳에 그 족장에게 겁탈을 당한 것이다. 그 일을 당하자 디나의 큰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있다. 친오빠가 너무 화가 나서 자기 여동생을 그랬다고 이 세겜의 족장을 복수를 하게 된다. 디나에게 반해서 세겜이라는 족장이 디나를 자기 아내로 달라고 했다. 시므온과 레위가 준다고 하면서 조건을 내 세운다. 우리는 유대인으로써 할례를 받아야 한다. 너희들도 할례를 받으면 준다고 한다. 연모하던 그 세겜 족장이 다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다. 남자가 다 할례를 받게 되면 꼼짝을 못하고 아파 있는데 그 순간 시므온과 레위가 그 세겜 사람 남자들을 칼로 싸그리 다 죽여 버린다. 졸지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의 학살자가 되었다. 세겜의 잔인한 도살자가 된 것이다. 무자비하게 학살을 했다. 이 소식을 야곱이 들었을 때, 기가 막힌 것이다. 속으로 겁이 났다. 어떡하지? 한다. 왜냐하면 다른 부족들이 자기들을 이 사건을 알면, 다 죽일 텐데, 많아봐야 그 당시 야곱의 가족들이 합해도 70여명에 지나지 않는데, 그 가나안의 족속들이 복수를 하려고 덤벼들면 어떻게 감당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3절에 보면,
 
*창세기 35:3,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멸문치하를 당할 만한 이런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좀 생각할 것이 있다. 오늘 9절에 보니까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보니까, 앞에 보면 사실은 밧단아람이란 곳은 그 넓은 지역이고, 하란은 그 중에 일부분이다. 밧단아람이란 곳, 자기 외삼촌 집에 가서 있었는데 거기 있다가 20년 있다가 돌아와서 10년 전에 가나안에 들어왔는데 9절에 보면, 마치 세겜에서의 십년의 삶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그냥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십년의 세월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오늘 제목처럼 잃어버린 십년이 된 것처럼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십년 전에 가나안 땅에 돌아왔는데 아직 성경은 야곱이 돌아오는 중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자,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적용할 것은 우리 가운데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잃어버린 사람이 참 많이 있다. 아니 이런 삶은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을 사는 자는 다 있기 마련이다. 하란에 있다가 가나안에 들어와서 십년을 살았는데도 하나님은 마치 그 십년이 없었던 것처럼 밧단아람에서 바로 벧엘로 가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는 것이다. 야곱의 잃어버린 10년은 우리 모두의 잃어버린 10년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 내가 십년만 젊었다면 더 열심히 일을 할 텐데, 라고 오늘 말씀처럼 커버하기를 바란다. 세겜의 십년이 잃어버린 세월이다. 예수 믿으면서도 세겜에 그렇게 기거한다든지 이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구약에서는 바벨론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 세겜과 바벨론은 그리스도인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을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특별히 바벨론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곳이다. 오죽하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50:8,
8 너희는 바벨론 가운데에서 도망하라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 나오라 양 떼에 앞서가는 숫염소 같이 하라.
-2주일 전에 다락방 교제 스가랴에서 볼때는 스가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스가랴 2:7,
7 바벨론 성에 거주하는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세겜과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는 이사야 13: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사야 13:19,

19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그러니까 우리가 거기 있으면 안 되는 곳이다. 세겜이라는 곳은 야곱이 십년 동안 있었던 그 세겜이란 곳은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거기는 임박할 진노로 멸망할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 시대에 세겜과 그 시대의 바벨론에서 반드시 떠나도록 도전하시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세겜과 바벨론은 갈대아 우르였다. 거기서는 안 되는 우상의 장소이고 거기서는 나와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부르시고 떠나게 하신다. 창세기 19장에는 롯이 소돔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거기서 임박한 진노를 피하도록 강제도록 소돔과 고모라에서 떠나게 하셨다. 룻기 1장에 보면 나오미처럼 환경적인 흐름을 통하여 우상의 땅 모압 땅으로부터 거기 있지 말고 나오라 하신다. 그래서 나오미에게 있어서 모압은 세겜과 같은 곳이었다. 오죽하면 앞에 34장 30절에 보면,

*창세기 34:30,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이렇게 이야기가 되었으면, 자식들이 멸문치하를 당하는 날에, 이 환난 날에 어찌 그렇게 생겼으면, “아이고 아버지, 저희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절말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납작 엎드려야 되는데 그 잔인한 도살자의 폭행을 했던 그 자식들이 “아버지 아이고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34장 31절에 보니까,

*창세기 34:31,

31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아버지가 이야기 했는데, 뭐 말하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아버지에게 반항을 한다. 옛날에 이 부족시대에는 족장의 말처럼 권위가 있었던 시대이다. 야곱이 그렇게 말하면 “그렇습니까? 잘못했습니다.” 하고 같이 해야 했는데 아버지에게 반항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 택도 없는 소리 마세요.”한다. 자식이 머리가 커졌다. 실컷 키워놓으니 자시농사 잘못한 것 같다. 인생 헛것 살아온 것 같다. 요즘 그런 이야기들 한다. 자식 집에 가면 부모 사진 한 장 없다. 부모님들은 공감을 한다. 그 부모 사진 한 장도 없으면 되나? 하면, “아버지 엄마 사진 갖다놓으면 장인 장모 사진도 갖다 놓아야 합니다.” 라고 한다. 요즘은 사진은 촌스럽다고 변명한다. 시대가 다르니까 그렇다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섭섭하다. 우리가 세겜이나 바벨론에서 인생을 허비하면 자식들이 고개를 바짝 들 수 있는 것이다. 영적권위가 사라진 것이다. 사실은 이 야곱은 영적 권위로 살았던 사람인데 영적 권위가 자식들에게 통하지 않으니까 굉장히 당황했을 것이다. 막 무슨 일인지 어떡하면 좋을지를 생각하게 한다. 야곱의 입장에서 그런 참 그렇게 상처를 입었을 텐데 감사한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러하신다. “야곱아, 너 자식 농사 잘못했지? 너 인생 헛살았어!.”라고 하나님은 추궁하지 않으시고 야곱에 잘못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으시고 목자의 심정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야곱에서 세겜에서 나와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다. 벧엘로 올라가라.
 
우리 모두는 잘못하고 죄송한 것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를 쥐 잡듯이 잡거나 우리로 하여금 추궁하시고 우리에게 상처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서 회복되고 부흥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인줄로 확신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있는 곳이 세겜과 바벨론이라면 빨리 나오기 바란다. 나오면 하나님이 추궁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을 잘 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돌아온 탕자를 보고 “너 이 자식아 내 재산 허랑방탕하게 다 버리고 하나님이 쥐 잡듯이 그렇게 추궁하지 않으시고 잃었던 내 자식을 얻었다고 하신다. 주님의 목표는 우리가 망하고, 우리가 주저앉고 우리가 상처받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오늘도 다시 일어나고, 회복하고 일어서고, 벧엘로 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핵심 두 가지를 다루겠다. 첫째는 벧엘로 올라가되 적당히가 아니라 엘 벧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I 엘벧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창세기 35:1,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주로 예베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 벧엘은 처음 은혜를 받던 장소이다. 그 처음 은혜 받던 장소에서 다시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7절에 보면,
 
*창세기 35:7 ,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벧엘은 하나님의 집인데 엘이 하나 더 붙었으니까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 The house of God! of God. 하나님의 집 정도가 아니라 더 큰 은혜를 받는 장소, 더 큰 예배의 장소, 더 큰 하나님의 심정을 받는 장소가 되도록 만들어 주신다. 여러분들의 우리 모두의 벧엘이 있다. 우리 모두는 처음 은혜의 첫 장소가 있다. 우리 모두는 처음 하나님 만났던 장소가 있다. 저는 지금도 용산 앞을 지나가면 그 용산에 옛날에 그 철도병원이 있었다. 지금은 중앙대학병원이 되었는데 그 철도병원 거기에 만 8년을 주일 새벽 4시에 나가서 그 병원 전도를 했다. 적을 때는 20명, 많을 때는 40명을 전도했다. 제가 책임자가 되어서, 병실에 들어가면 기가 막힌 병실도 있다. 외상 환자들이 반산불수가 되어 다리가 다 잘린 사람도 있고 온몸이 상처가 받은 사람도 있고 그런 분들과 복음을 나누고, 거기에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마음이 편하다 주 예수 주님 늘 평안하도다. A 플래시(b)의 곡이다. 그것을 아카펠로로 부르는데, 늘 주일이 거기가 벧엘이었다.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여러분들이 은혜 받은 장소, 사랑의 교회로 말하면 지난 번 9.26이 벧엘이 은혜가 있는 줄 믿는다. 우리교회는 대각 성 집회에서 은혜를 주셨고, 도곡동 자장면 집 2층에 있을 때도 은혜를 주셨고, 우리가 서초 예배당에 들어올 때도 은혜를 주셨고, 최근에는 9.26 섬김의 날에 은혜를 주셨고, 우리 모두에게는 벧엘이 다 있다. 여러분들이 처음 주님을 만났던 장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장소, 하나님 앞에 깨어진 장소, 그것이 여러분들의 벧엘인 것이다. 많은 분들이 80년대의 복음화의 음성받고, 73년 74년에 엑스플로 대회 때에 빌리그램에게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또 대부분이다. 여러분들이 처음 은혜를 받았던 그 장소가 벧엘의 장소가 된다. 이 시간 순전하게 주여, 다시 벧엘의 은혜를 회복하여 주시길 간구하며 예배가 회복되고 더 큰 은혜를 받게 하시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그럴 때, 그 장소가 엘 벧엘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은혜 위에 은혜의 장소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집에 하나님이 되게 해 주시는 것이다. 저는 오늘 오후 4시반부터 특새 전야부터 시작해서 이번 한 주간동안에 있을 제 20차 특별새벽부흥회가 온 성도들에게 엘벧엘의 장소가 되기를 축원한다. 너무 소중한 것이다. 그러면 엘벧엘의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제 오늘 마지막 키이다. 엘벨의 은혜가 오늘의 클라이맥스이다. 엘벧엘의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4절에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창세기 35:4,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타락한 문화에 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는 그랬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상을 처리하라는 것이며, 세겜과 너의 높아진 것을 처리하라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영 가족 여러분, 오늘 말씀으로, 방송으로 듣는 여러분, 이 자리에 들어온 모든 자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벧엘의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 엘벧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을 것이다. 처리할 것 처리하라, 우상들 처리하라. 아내 이외에 다른 것들 처리하라. 처리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다 처리하라.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일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받아야 처리가 된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된다. 내 힘과 능력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은혜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을 쳤다. 너무 귀한 것이다. 아까 30년 전에 벧엘에서 온리 프레젼스 하나님!, 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야곱에게 뭐라고 하시냐면, ‘너는 모든 민족의 아비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고, 기뻐하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되라. 아브라함의 언약했던 그 말씀을 다시 야곱에게 주는 것이다.
 
여러분 야곱이 열다섯 살 때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거의 비슷비슷한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자식이니까, 그러니까 그때 말씀들, 모둔 민족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씀들, 얼핏 비추었는데 오늘 드디어 말도 안 되는 순간이다. 우상도 제거해야 되고 힘든 순간이다. 그 멸문치하에 대한 어떤 압박, 세겜의 흑 역사의 상황 가운데서 무슨 수로 해결하는가? 무슨 수로 부흥시리즈 넘버 2를 할 것인가? 11절이 요절이다.
 
*창세기 35:11,
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이런 어려운 가운데 멸문치하를 당할까 흑역사 가운데 자식들이 머리를 들고 말도 안 되는 어려운 가운데서 죽을 것 같은 상황인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는가? 무슨 생육하고 번성인가? 내 자식들도 제대로 처리를 못하겠는데, 내 한 몸 가누기도 힘든데, 그러하신다. 그 다음 말씀이 더 기가 막힌다. 아니 하나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백성들의 총회가 너에게서 나올 것이며 왕들이 너의 허리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신다. 백성들의 총회라는 원어는, 히브리어로 KAL이다. 이 칼이 신약의 에클레시아와 같은 말이다. 신약에 에클레시아는 교회라는 뜻이다. 구약에는 칼은 백성들의 총회이다. 엄위하시고 장엄하신 말씀이시다. 우리가 부족한 인생을 놓고 오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 허리에서 백성들의 총회와 왕이 나온다고 하신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우리 세겜에서의 탈출과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흑역사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더 크신 사명과 더 큰 주님이 주시는 소명과 더 큰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갖지 아니하면 우리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지금 내 입에 풀칠하기 힘든 상황가운데서도 정말 야곱이 엄청난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사명과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과 비전을 확인시켜 주신다. 네 허리에게 백성들의 총회가 나올 것이다. 네 백성들의 교회가 나오며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신다.
 
그 이후에 막상 그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고, 못된 일도 많이 생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야곱은 끝까지 주님을 믿고 결국은 야곱의 유다 지파를 통해 다윗 왕들이 나오게 하시고 왕들이 나오게 하시고,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인 줄 믿는다. 영적 에너지는 영적 에너지를 받아야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세겜을 떠나고 영적인 능력과 힘을 받아야 한다. 인간이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더 큰 능력이 사로잡히는 것이고 더 큰 능력을 받아야 되는 것인데 그 능력과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냐면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과 메시지가 무엇인가? 너의 백성들의 총회에서 에클리시아가 나올 것이며, 너희 허리에서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을 의심 없이 주님 앞에 받아야 한다. 그대로 받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야곱이 그토록 사모했던 장자 권의 회복이 되는 것이다. 인간적인 방식을 안 쓰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텐데, 야곱은 참치 못해서 형을 속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것을 통하여 야곱에게 허락하신 장자 권을 회복시켜 주신 줄로 확신한다. 우리가 특새를 나오고 주님을 사모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우상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우리의 소원을 갖고 있는데 영적인 장자 권을 회복해야 하는데 오늘 오후에 있을 부흥집회에서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다시 들으시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와 상관이 없다.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부복하는 자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좀 깊이 들어가면,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시는가?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 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는 것이다. 언약은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듣고 지금 적용하고 지금 마음에 받아들이고 지금 실천하는 마음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갈라디아서 3:7,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이 된 것인 줄 믿을지어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슨 육신의 피가 없더라도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내 것으로 받은, 지금 내 것으로 받은, 지금 실천의 마음으로 집중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는 하나님의 자손으로 알 지어다.’ 하신다.
 
*갈라디아서 3:29,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 모두가 다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셔서 아브라함의 손자가 야곱이니까, 야곱이 받았던 이 축복을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여러분, 야곱은 자기가 왕 되는 것보다 나았다. 당시에 추장, 족장은 자기 후손들 가운데 왕이 나오는 것이 정말 귀했다. 야곱은 자기가 왕 되는 것보다도 이런 말씀을 통하여 자손이 왕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저는 세겜에서 나와서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 무엇일까? 엘벧엘이 무엇일까? 오늘 여러분들이 더 큰 은혜를 받는 엘벧엘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흥이라는 말씀은
 
◆부흥은 내가 믿었던 은혜의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오늘 저녁부터 특새 20차가 지난 20년의 모든 은혜의 축적이 다 모은 시간이 되고 이번 한 주간 동안 개인마다 가정마다 자녀마다 평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엘벧엘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부흥을 주시기 위하여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셨다. 아브라함은 한 집안의 아버지 정도이다. 맴이라고 해서 히브리어에서 함이 들어가면 복수가 되어서 아브라함이 되면 열국의 아비가 되는 것이다. 그 당시 부족시대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광야시대에 하나님께서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야.’ 했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시고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고 오늘 네 허리에서 왕들이 나오고, 백성들의 이스라엘로 만드시고, 오늘 네 허리에서 왕들이 나오고 백성들의 총회가 나오리라. 하신다. 나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리라고 하신다. 이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 조상들 때문에 우리가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가정마다 부모가 확실히 믿으면 그 집안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전 세계에 크리스천 기업인들과 비즈니스 가운데서 대단한 일가를 이루고 대단한 일가를 이룬 분들을 보면 그 집안의 부모들이, 본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축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나는 부족하지만 내 허리에서 왕들이 나오고 백성들의 총회가 나오기를 바란다고 믿어야 한다. 내 이름을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되기를 원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런 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적 같은 큰 비즈니스가 태어나게 하신다. 뭔가 영감으로 다가와서 나는 부족하지만 우상도 제거해야 되지만 하나님, 내 허리에서 왕들이 나오고, 내 허리에서 백성들의 총회가 나오게 하시길 믿으며, 하나님의 귀한 복으로 채워 주시길 기도하자. 내 것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것을 확신하고 믿어야 한다.
 
♣요약
제 20차 글로벌 특새가 벧엘의 장소가 되게 기도하며, 안아주심의 본당이 엘벧엘이 되는 장소가 되어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세겜과 세상에 오염되어 있는 것들을 제거하고 처리하여, 세겜에서 뻐져 나와서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주님을 만나 감격으로 벧엘로 올라가 백성들의 총회가 나오게 하시며, 각 가문에 허리에서 왕들이 나오는 기적이 되는 특별부흥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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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새벽부흥회 전야제(주후 2022년 10월 30일)-전야제

제목: "하나님의 의"
말씀: 로마서 3:23-31

설교자: 박영선 목사님(남포교회 원로)-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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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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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님(남포교회 원로)
-올 때마다 늘 감동스럽다. 거두절미하고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구원에 관해서는 여러분들이 익히 알고, 마음으로 믿고 이미 충분하겠지만 오늘 다시 본문을 읽어보면 놀라운 것이 구원에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나타난다. 그 구원이 방법론이고 운명에 관한 것이고 보상에 관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누구신가?’ 를 증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자기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방법론을 넘어서는 것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이 자꾸 조건이 되는 이해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 구원을 선포하는 자리는 믿음은 율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법이 아니다. 이다. 법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다.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심하지만 말하자면 그런 수사학적 역설이 들어있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의 증거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해하기 좋게 하나님의 의라 하면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는 것이 부족해서 말을 하나 만들었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우리에게 의리를 지켰다. 의리라 하면 어디에서 많이 쓰냐하면 도덕과 윤리가 없는 조직에서 쓰는 말이다. 법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에서 그들이 질서와 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의리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데는 우리의 조건과 자격을 넘어서는 것을 썼다는 것이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리란 다시 생각해보면 신앙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감동시킬 것인가? 내 책임은 무엇인가? 어떤 결과를 낳을까 하는 문제이기 이전에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도대체 구원을, 자기 아들을 잡는 방법을 쓰는가? 좋은 말로 하면 우리가 못 알아 듣냐? 이런 생각을 마땅히 해야 되는데 그냥 너무 쉽게 거기가 은혜의 부분이다. 은혜는 말이 안 되어서 나중에 설명을 하라고 하면 다 각각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다 한국어를 쓰지만 거의 방언 같이 통역이 없으면 해석이 안 되는 말들을 여기다가 이 말을 쓰자면 지껄인다. 다시 생각을 해야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다우시다. 그런 말에 대표적인 표현이 여러분이 잘 아는 요한복음 3:16절, 17절이다.
 
*요한복음 3:16,17,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건 그냥 선포이다. 조건이 없다.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구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부차적인 설명이다. 그래서 17절을 보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푸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하나님과 특별하심이 전개되고 증명되는 사건인데 이렇게 하나님의 의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구별을 지어서 자신을 증명을 한다.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 이런 시비가 생긴다. 구원을, 믿음을 지켰는데 어떻게 보상이 시원치 않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우리를 혼란시키는 것이 예수를 믿어도 형통하지 않다는 현실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련을 이겨야 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왜 하나님이 이렇게 이따구로 일하시는지 우리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우리끼라만의 비밀로 털어놓아야 되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좋은 배우자를 위해서 20년을 기도했는데 왜 후보하나 안 나타나냐? 이런 건 현실이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이따구로, 저는 천국에 가면 만나보지 못할 사람이 많다. ㅋㅋㅋ
 
이런 하나님은 베푸는 하나님이고, 너희는 그 은혜를 이제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법을 따지는 분이 아니고, 자격을 따지는 분이 아니고, 이렇게 베풀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너는 안 믿는 사람들 보다는 나아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뭐에서 나아야 하는가? 열심, 충성, 이런 것은 다 어디나 쓰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본문이 아니다. 무슨 충성, 누구에게 무엇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라는 맞는 차원이 다른 구별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무언가? 하나님이 죄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고 우리 로마서 5:8절을 이야기해서
 
*로마서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런 시제를 보라. 우리가 몰랐을 때, 구하지 않았을 때, 믿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다우심을, 하나님이 의리를, 하나님의 책임을 먼저 실천하신다. 왜? 하나님이시니까, 구원이 성립하는가? 창조주이시니까, 창조주가 피조물의 반란의 의해서 쫓겨 갈 일도 없고, 손해 볼 일도 없다. 창조주는 창조의 책임을 지기로 했다. 인간이 만든 우상들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불쌍히 여기신다.
 
“내가 너희들에게 화를 낸들 무얼 하겠느냐? 내가 하나님인데, 돌아오라, 내 집에 거할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마스크도 샌삥이다. ㅋㅋㅋ 기독교 신앙인의 가난함은 풍요한 자인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떤 업적을 남기고 실적을 남기는 이상으로 우선해서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 어디에서 달라져야 하는 것의 표가 있냐면, 하나님의 의리는 앞에서 이야기 한 것 같이 율법이 아니다. 행위가 아니다. 조건이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그 의리에 동료, 의리의 근거가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상대방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주는 게 사랑이다. 그렇다. 그렇지만 이 사랑, 하나님의 의리, 우리에게도 그 의리, 사랑을 하는, 사랑을 베풀고, 사랑의 대상이 되라고 하는 사랑은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은 절대적이라는 말의 비교되는 말이 아니라, 상대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혼자 할 수가 없고, 사랑이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반응하라고 한다. 여기가 어렵다.
사랑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3장이 생각이 난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의 기대와 많이 다르다. 왜 어떻게 다른가?
 
 첫 째는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의 기대와 많이 다르다. 왜 어떻게 다른가? 이건 사랑이 아니다. 세 가지의 예를 든다.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 사랑 아니다. 아니다. 이다. 나발 부는 것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고백하고 남자들은 늘 이래서 실패하는데 남자들은 강아지 같이 사랑하고 여자들은 고양이 같이 사랑한다고 한다. 남자는 자꾸 진심을 보이려고 한다. 그래서 앞에서 가슴을 찢고 심장을 꺼내서 “식기 전에 드세요.” 그러니까 다 도망간다. 얼마나 무서운가? 어떤 미국 언론인 하나 북한에 초청을 받아서 북한 사회가 인민들이 얼마나 만족해하는가를 보이기 위해서 이제 불러놓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스게임도 보여주고, 열병식도 하고, 어떤 필요한 데마다 가서 구경을 시키고 그가 돌아와서 북한에 대해서 비난을 할 수가 없다. 비난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이런 것도 멋있고, 저런 것도 멋있다고 한다. 마지막에 한 마디를 뭐라고 붙였냐면 “그런데 이상하게 공포가 있더라.” 그걸로 다한 것이다. 공포가 있더라고 한다.
 
사랑의 반대말이 공포이다. 공포란 칼부림을 하는 게 아니고 비정해지고 무정해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집중을 하면 이상하게 무서워진다. “너 안 믿어, 죽어볼래? 지옥 가!” 이건 굉장히 가난한 것이다.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눈빛만 봐도 알아서 기어야 되는 것 아닌가? 상대방이 나를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을 사랑이라고 그러는데, 강요하고, 그를 통제하고 무릎 꿇리려는 사랑, 감동으로, 진심으로, 이렇게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환상의 말이 아니다.
 
둘째는 산을 옮기는 능력이 사랑 아니다.
셋째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주는 것은 사랑 아니다.
-아까 심장 꺼내주는 이야기, 이제 휘발유 붓고 불 지르게 생긴 것이다. 그럼 무엇이냐?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정의이다. 영어 번역이 더 좋다. Love is long suffering. 끝없는 고통, 공감이 안 하는 이유는 안 살아봐서 그렇다. 살아보면 심장을 꺼내고 불도 붙여서 한 결혼인데, 해답이 없다. 이 사람만이 아닌 누구하고 살아도 낫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 감성적이지 않고 감동적이지 않고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무력하고 실망스럽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이어서 맞는 말이 나온다. “무례히 행치 않고 성내지 않고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이 견뎌야 되는 거라면 하고 싶지 않다. 요새 젊은이들이 결혼을 안 한다. 실례했다. ㅋ ㅋ ㅋ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이런 거라면 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 이게 뭐냐? 문제에 대해서 에베소서 5장에서 22절 이하에 세 가지 경우를 이야기 한다. 사랑이 어때야 되는가를...
 
부모와 자식 그리고 직장에서 관계에서 사랑을 논한다. 그 사랑을 논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다 결혼을 하면 사랑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하고 행복이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혼을 하면 사랑의 종착점이고 행복은 영원히 외면 한다. 현실이다. 그러니까 ‘잘 할 수 있어’ 안 살아봐서 하는 이야기이고, 살면 누구나 아! 어른 말씀이 틀린 게 없구나.! 다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느냐? 시작이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자들이 싫어하는 성경구절이다. 에베소서에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런데 안 한다는 것이다. 주님만 사랑하기로 하고 사내들은 사랑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 같이 하라.” 벼락같고 거두절미 하고 명령으로 시작한다. 무슨 사랑이야기를 배경이야기를 무슨 클린트이스트우드가 나오는 것 같이 한다. 법도 양심도 없는 총잡이를 아는가? 서부영화 클린트이스트우드를 모르다니.... 구약을 모르구만,,, ㅋㅋㅋ 왜 이렇게 이딴 명령의 요구를 하시는가? 내가 너희를 부부로 삼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아내를 준비한 하나님이고 내가 내 남편을 너에게 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전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 하필 이 사람을 그리고 이 현실을 뭐라 말인가? “기다려봐!!!” 사랑을 배우고 믿음을 배우고 신앙의 모든 덕목들, 신앙만의 문제가 아니고 인생에서 인간됨에 많은 덕목들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란 자라나고, 시련을 겪고, 후회하고 하는 과정을 말한다. 그 시간에 걸려서 나무가 자라듯 열매가 맺듯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무시하고 초월적 개념으로 간구하면 즉시 필요할 때마다 즉시, 결과를 요구하는 바람에 뭐가 오느냐면, 문맥이라는 것이 없어진다. 문맥이 없다는 것이 없어진다는 것은 스토리가 없으면 본문을 담을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설명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다. 그 아들을 보내셨다. 십자가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모두 좋지만, 벤허 영화만큼 잘 만들 수가 없다. 우리는 거기서 주인공이 복수 하나만을 위해서 견뎌내고, 그리고 복수를 해서 답이 되지 않는 인생, 존재에 대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데까지 끌려가야 된다. 복수를 하고, 권력을 잡으면 답이 되는 게 아닌, 그 자리, 부인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메쌀라를 죽인 후에도 남편이 계속 어쩔 줄을 모르니까 “당신이 메쌀라 같아요.” 한다. 안 봤다 이것이다. 그 리메이크 된 것은 구라이다. 거기는 증오도 없고, 거기는 배신도 없고, 거기는 아무 드라마틱한 설정이 없다. 그게 없으면 본문을 다룰 수가 없다. 인생이 여러분의 기대대로 다 진행이 되면 아무 뜻 깊은 동복을 만들 수가 없다. 행복하고 형통하면 여러분이 기르는 강아지나 고양이 같이 된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밥 주시고 처먹으면 된다. 그딴 소리 말고 점잖게 하라고 제 아내가 평생을 저한테 해준 충고이다. ㅋㅋㅋ “당신은 어떻게 잘 나가다가도 그딴 말씀을 하세요?” 한다. O형이라 그렇다. 오정현 목사님도 O형이다. ㅋㅋㅋ!!!
 
붙잡혀 있어서 할 수 없이 견디는 것이다. 인내심이 있어서 믿음이 있어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헤어져 아무 쓸데가 없어서 붙들려 사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 아들을 보낼 때, 육신을 보내신다. 환장할 노릇이다. 뭐든지 하실 수 있는데 딱 묶어서 시간과 공간을 잡아놓아서 그 조건으로 해라. 시간이 가야되고 시대에 권력과 충정에서 따르는 자와 배척하는 자 속에 섞일 수밖에 없는 문맥들 속을 걸어서 십자가에까지 가는 것이다. “당신이 남을 살리면서 스스로는 죽음의 길에서 내려오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오셔 보십시오.” 그러자 내려오신다. “내려와서 따귀라도 때리고 다시 올라가면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안 하신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소서!“ 현실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ㅋㅋㅋ 저와 오 목사님 외에 아무도 없다.
 
사랑의 교회를 사랑하는 첫 번째 이유가 유머가 통하는 이유이다. 유머가 통한다는 것은 아량이 있고,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웃는 것은 재미있어서만이 아니다. 넘어갈 때 웃는 것이다. 핏대를 세우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의 고급한 성품이다.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한심한 것들이 아닌가요?” 그렇게 그 말은 안 하신다. 그렇게 우리를 몰아가는 것이 문맥 속에 잡혀 있기 때문에 도망을 갈수가 없어서 배울 수밖에 없다. 화도 낸다. 밥상도 엎고...
 
제목이 멋있는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가 있다. 그 유명한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송강호씨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조금 전까지 알아듣다가 이제는 못 알아듣는가? 조폭 서열 3위쯤 되는 고위 조폭인데 아내와 딸이 아버지가 조폭인 것이 꼴 보기가 싫어서 늘 사람 취급을 안 하고 경멸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린다. 여기는 매일 시달린다. 조폭은 밤낮 주먹으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 다툼 속에서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는 이쪽 편과 저쪽 편 사이에서 공갈도 쳤다가 도망도 갔다가 하는 것을 계속해야 되는데, 그날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왔더니 아무도 없다. 아내랑 딸이랑 이민가고 도망을 갔으니까 TV를 켜놓고 마누라가 보내준 동영상, 딱 그것만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서 손수 끓인 라면을 먹고 있는데 물장난을 치는 깔깔 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저 그냥 자기 처지가 너무 한심하고 너무 비참하고 분통이 터져서 밥상을 걷어찬다. 울면서 “아이 썅!!!” 그 다음 장면이 명장면이다. 그게 어떻게 했겠는가? 일어나서 치웠다. 누가 치울 것이여, 자기밖에 없는데... 이 부분을 굉장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 특별한 미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조폭이 된 것은 조폭 세계를 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건 넌 센스이다. 우리 전문 용어로는 불신앙이다. 여러분이 기대치 않은 컨테스트 속에 조건 속에, 정황 속에, 환경 속에 여러분을 붙들어 맨다. 여러분이 부모를 택하지 못하면, 자식을 택하지 못하면, 심지어 친구도 택하지 못한다. 친구는 어쩌다 친구가 되냐? 학교 짝 하는 바람에 친구가 된다. 저 새끼가 내 연필을 쌔벼갔는데 나이 들어보니까, 그까짓 것 뭐, 지금도 만나면, 이 새끼가 당구 치면서 속이기도 하는데 그냥, 저 새끼는 왜 그러냐? 옛날에도 그랬잖아, 이렇게 넘어가게 되어 있지, 뭐 골라서 뭐 이순신, 강감찬, 이렇게 친구를 선택할 수 없다.
 
그 속에서 절망, 비참, 그리고 자신의 한계, 처지의 부름, 같은 것들이 여러분을 위협하고 흔들어서 어쩔래? 아직도 살아있을래? 넌 뭐야? 이런 도전을 계속 하는 것이다. 편안하면 절대로 받지 않을 도전을 받는 것이다. 나는 뭐야? 인생은 뭐야? 인간이 뭐야? 이렇게 깊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구약을 읽으면 다 오해 하는 게 구약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밤낮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을 안 들어서 포로가 되도록 병신 짓들을 해서 그렇게 했을까? 거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평안하게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계속 왜적이 와서 두들기게 만든다. 사사기 때는 이웃 나라들을, 또는 원주민까지 남겨 두었다가 옆구리에 가시가 되게 하고, 열왕기 때는 이웃 나라들, 아람, 나라 자체도 둘로 나뉘어서 북 왕조와 남 왕조 사이에서 싸움이 그치질 않고 아람이 등장하고 뒤에 앗수르가 등장하고 바벨론이 등장해서 포로까지 되는 그 도전들 속에서 “난 뭐야? 우리는 뭐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뭐야?” 이렇게 묻게 만드신다. 공식적으로 답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얼 만들어 냈냐면, 우상을 만들어 낸다. 우상은 뭐냐면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이 우상을 이렇게 놀린다. “네가 나무 잘라다가 적당하게 뗄 감 만들어서 밥 지어 먹고 그 중에 일부를 조각해서 앉혀놓고 말도 못하고, 입도 없는 놈에게 절을 하나?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놈들이 있어.” 이렇게 꾸짖는데도 그것을 한다. 왜? 하나님은 답을 안 주시거든,
 
맨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나 내일 수술 받으러 가는데 의사가 보고 기도 많이 했으니까 ”멀쩡한데요? 뭐 때문에 수술하기로 했죠?” 이렇게 말하게 해 주십시오“ 한다.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 하나님은 답을 안 하고, 현실은 급급하니까 말 듣는 신을 만든다. 끝없이 말 듣는 신을 만들고 종교 개혁을 해도 종교개혁이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결과까지는 가지 못하고 그럼, 우상을 섬기는 것과 방불한 정서, 절기를 지키고, 율법을 지키고, 제사 제도를 완비하고 성전을 수리해도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깨닫지 못했음을 끝이 난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전 인류가 답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도 이런 붙잡힘 속에서야 비로소 믿는다는 게 무언가? 까지 질문이, 의심이 생겨야 정상이다.
 
이렇게 열심히 믿고 하나님과 다 하는데 ”왜 제 기대와 다른가요? 왜 하나님, 저하고 박자가 안 맞는가요?“ ”하나님 계속 제 발을 밟으시잖아요?“ 춤도 안 추어본 뭐 어쩌라는 건가? 이렇게 시간이 걸려야 ”왜 이 사람을 주었습니까? 왜 이 자식을 주었습니까?“ 그들의 아우성과 그들의 분노와 그들의 심한 반발을 겪으면서 사람이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사람이 자기 한계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겸손히, 겸손히는 결코 경험을 빼놓고 쓸 수 없는 단어이다. 겸손히 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행복, 편안함이 답일 수 없다. 그것보다 더 깊은 답이 나와야 내 일생에 고통과 분노가 해결될 수 있다. 형통하자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몰랐을 때 찾았던 일반적인 보상으로는 인간을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그 이상으로 하나님 가십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한 것만큼 인간은 어때야 하는가를 누구에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외치게 된다. 이것을 순종이라고 한다. 순종이라는 것은 ‘하나님, 내 욕심을 다 내려놓았으니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는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얼 하라는 것인가는 시험문제나 도덕법 같이 나오지 않고 현실에 주어지는 것이다. ”이 사람과 계속 살라구요? 이런 때는 어떻게 견뎌야 합니까?” “어떻게 할래? 전 나가겠습니다.” 한다. 친구네 갔다. “야, 너 왜 왔니? 심심해서, 야 이 시간에 무슨 심심? 너 정신이 있냐 없냐?” 갈 데가 없는 것이다. 탕자가 왜 돌아오는가? 정신이 들지 않는다. 갈 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온다. 아버지가 환영을 한다. 탕자의 비유에서 뭘로 치냐면, 큰아들 같이 군다. 다 말아먹고 소를 잡고, 나는 오늘도 일하다가 들어왔는데 나는 염소새끼 하나 잡아주지 않는다.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내 것이 네 것이다.” 돌아와서 환영을 하는 것이지, 잘 했다고 환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온 다음에 이 큰아들의 말처럼 늘 고생만 하는 것이다. 왜 고생만 시키는가? 욥은 욥기를 잘못 읽는 가장 큰 이유는 1장에 설정을 놓친다. 욥기 1장에 설정은 욥은 의인이다. 욥은 잘못하지 않았다. 시작에 욥의 고난에서 친구들이 와서 회개하라고 남발하는 이유는 난 회개할 게 없다 였고 친구들이 욥의 꼬투리를 잡는 것은 말을 그따구로 하는 것만 봐도 너는 죄는 졌다 였다. 그래서 계속 싸운다. 몇 가지 중요한 구약 성경에 그 보석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13장에 이르러 욥이 드디어 자기 생애를 저주하고 나 죽어버리겠습니다. 하고 남발하다가 비로서 어디까지 가냐면
 
 
우리 계급장 떼고 만납시다.” 거기까지 간다. 나중에 결말에 보면 결말에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 놓치고 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묻는다. “너는 무슨 근거로, 너는 잘못한 것이 없고 나는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나님께 대드냐?” 네가 무슨 근거로 하나님게 잘못 했다고 하느냐? 그러니까 욥의 대답이 이것이다.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거기서 딱 틀리다. 무얼 틀리는가? 나중에 하나님이 욥을 데려다가 창조 세계를 보여주신다. 대표적으로 “세상의 기둥들을 어디에 세웠는지 아느냐? 산양이 새끼 치는 것을 보았느냐? 네가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악어의 창고가 어디서 나오는지 보았느냐? 이런 이야기들을 왜 하냐면, 이 욥을 옆에 세워놓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 “너는 이것들과 다르다. 너는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후사이다. 네가 잘못하지 않으면 네가 다가 아니다. 너는 창조 세계의 관리인이고 주인이야. 당연이 훈련을 받아야 한다. 네게 잘못 한 것이 없으면 다냐?” 그게 욥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 된 결론이다. 욥이 마지막에는 회개한다. 내가 주께 대해서 이렇게 하니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지껄였습니다. 회개 하나이다.” 듣기만 하다가 봤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님 코끼리 만지기’ 라는 우화를 알지 않은가?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는 기둥이야, 코끼리는 부채야, 이야기 하는 것은 저것들은 코끼리의 한 부분만 만져보고 저러네, 라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코끼리를 보니까, 코끼리가 뭔지 아니까, 기둥이라고 해도 우습고, 호스같애 해도 우습다. 왜 봤으니까,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당연한 거쳐야 할 단계이긴 하지만 너무나 확실한 것 하나 붙잡고 난 다 알았어, 나는 하나님은 이거야, 하나님은 계속 우리를 만족과 완성 속에 놓아두시지 않고 밀어 붙이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9장에서 실로암 사건이 나온다. 날 때부터 장님이 된 자가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눈이 뜨인다. 그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 와서 예수가 정말 고쳤느냐? 네가 예수이냐고 묻는다. 예수가 고친 게 너무 본 사람이 많아서 반대할 수 없다. 그에게 말하기를 진짜 너 장님이었냐고? 묻는다. 너는 눈을 감고 예수님과 짜고 이렇게 기도하니까 딱 뜨고 처음으로 눈을 떠서 사기 쳤지? 이렇게 한다. 뭐라고 할까? 그가 뭐라고 답하느냐면 “안 보이든 게 보여요.” 그렇다. 안 보이던 게 보인다. 그때는 빛을 본 것, 뭐가 보이는 것에 놀라지만 이렇게 말한다. ‘나무 같은 게 걸어 다녀요.“ 신앙이 어디까지 커야 되는가 말할 때, 크기라든가 진정성의 문제라든가 안목이 커야 된다. 안목이 커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한대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이다. 책임이 해결하라는 것이 아니라 견디라는 것이다. ‘네 자리를 지켜라. 우리가 둥글게 손을 잡고 원을 그렸을 때, 손 붙잡고 있는 것을 놓지 말아라.’ 말하자면, 사랑을 우리의 실력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것은 성육신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의 제한 속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펼치신 기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기적과 초월은 문맥은 벗어나서 있지 않고 문맥 속으로 들어온다. 제한 속에 초월이 들어온다. 우리로서 상상이 안 간다. 초월은 한계를 벗어나는 게 초월로 알고 있는데, 그 초월이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왔다. 네 인생, 네 조건이 아무것도 네가 불만할 필요 없다. 그저 미혼모가 난 자식은 평생 얼마나 그러하겠는가? 처녀였다. 미혼모보다도 못한, 처녀가 낳았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으로써만 이해하는데 처녀가 등장하고 있지 원래 애도 못 키우는 자가 낳았다. 조건이 그렇다. 하나님이 거기다 놓았다. 그리고 그 조건 시작부터 말구유이다. 말구유, 헤롯에게 쫓기고, 나중에 공생애에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쫓기고, 로마 행정권에 치이고, 하는 길들을 걸으시는 지고, 지고, 지고 또 지고 또 져서 상대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 수 없는 문맥이 만들 수 없는 그 문맥 속에 들어온 기적을 부활로, 죽음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빌립보서 2장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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