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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1월 2일) 제목: "근심하지 마소서" 말씀: 창세기 45:4-5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 *창세기 45:4-5,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 ▶우리는 제 20차 가을 글로벌 특별새벽기도회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고 있다. 전야제를 포함해서 오늘이 4일째인데, 하루하루가 역사이고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혹시 4일의 시간 가운데 우리 개인적으로 가장 기쁘고 중요하고 살의 전환점이 되었던 한 시간 한 장면을 뽑아낼 수 있는가? 기억의 카메라를 휘리릭 돌려보기를 바란다. 지난 주일부터 지난 4일을 쭈욱 돌아보았을 때, 이때가 가장 나에게 좀 전환점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좋다. 이제는 우리가 지금 4일을 돌아보았는데, 혹시 다시 나의 전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중요하고 좋은 의미로서의 삶의 전환점이 된 어떤 순간들, 혹시 기억해 낼 수 있는가? 주님을 만난 그 사건, 인격적으로 교제했던 그 시간은 0순위이기 때문에 그것은 제외하고, 한 번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들을 한 번 기억해 보기를 바란다. 기억하기가 너무 오래 걸리면 그것은 중요한 것과는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금방 이렇게 기억이 나는 것이 있었을 수 있다. 어떤 사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어떤 분은 굉장히 중요한 시험에 합격했을 때이고, 어떤 분은 사랑하는 이에게 프로포즈 하는 장면, 어떤 분은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질병에서 온전히 나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 내 인생이 전환점이라고 삼을 수 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원의 어느 교회에서 텅 빈 예배 실에서 홀로 기도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절대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른 되도록 도망치던 저에게 말할 수 없는 주의 은혜로 목회자의 길로 가기로 결단하는 마음을 주셨던 저의 그 장면이 개인적으로 떠오른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시간이 있을 것이다. 아마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오늘 본문 요셉을 읽었다. 요셉의 삶에 가장 중요한 좋은 의미로서의 삶의 전환점이 언제일까? 보는 사람마다 시점이 다를 수 있겠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요셉의 인생을 잘 알듯이 형제들에 의해 17세에 팔려온 요셉은 정말 고생을 많이 한다. 종으로 사는 것도 억울한데, 그래도 열심히 살았는데, 주인 보디발에게 의리를 지키려다가 옥살이를 하게 된다. 미시즈 보디발 때문에 옥살이를 하게 된다. 거기서 간수장이의 인정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생활해 보려고 하는데, 두 관원이 들어와 가지고 꿈을 해몽해 주다가 한 관원의 꿈을 잘 해몽해 준다. 그 사람이 걱정하지 말라고 요셉을 빼준다고 하고 나서 그 사람이 잊어버린다. 그래서 또 2년의 시간이 옥(獄)에서 보내진다. 뭔가 될 듯 될 듯 하다가 시간이 계속 가면 참 힘들다. 요셉의 시간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인생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그 꿈의 해몽의 실력을 바로에게 인정받게 된다. 애굽 최고의 통치자, 바로의 꿈, 곧 7년 풍년, 7년 흉년, 그 꿈을 잘 해몽하여서 바로의 총리가 되는데, 애굽의 총리가 되는데 그때가 바로 요셉이 30세가 되던 해이다. 결혼도 한다. 아들도 낳게 된다. 아들의 이름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인데 므낫의 뜻은 ‘하나님께서 나의 괴로움과 내 온 집안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이다. 므낫세 낳고 ‘나 이제 다 잊었어.’ 라고 하는 것이다. 에브라임의 뜻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애굽이다. ’나를 풍성하게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이전 것은 다 잊고 나 여기서 풍성하게 잘 나가! 자녀의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고백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많은 분들이 요셉이 총리가 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이렇게 선포하는 이때가 가장 복 된 시간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정말 애굽에서 넘버 2, 엄청난 권세와 함께 없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형통한 상황이 요셉의 상황이다. 그렇게 풍년의 시간이 지나고 흉년의 시간이 접어들었을 때, 요셉이 38세~39정도쯤이다. 어느 날 두 둥이, 기근(饑饉) 중에 곡식을 사러온 혈육,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이후에 내용을 우리가 잘 알듯이 형제와 요셉 간에 옥신각신한 내용이 있다. 요셉이 그 형제들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 보여주기 위하여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기도 하고 전대 안에 무엇인가를 넣기도 하고, 형제를 잠시 억류해 두기도 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어렵고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나서 요셉은 결국 그 형제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그것 아는가? 요셉이 형제들과 이렇게 옥신각신 하는 시간들을 보내면서 굉장히 통쾌해 하거나 사소한 복수해 하며 고소해 할 것 같은데, 요셉은 이 모든 과정을 크게 세 번을 운다. 두 번은 형제들에게 엄하게 한 다음에 돌아서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운다. 마지막은 모든 신하들을 물리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며 운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서러움이었을까? 아니면 보고 싶은 베냐민의 얼굴을 보았기에 그러는가? 아버지가 그래도 평안히 잘 계신 것을 확인해서 일수도 있다. 우리는 요셉의 그 복잡한 심경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런데 확실한 것은 요셉이 그 자신의 아들을 므낫세라고 하며 “나, 다 잊었어!” 말하지만, 사실 그것이 그렇게 쉽게 잊어지는 것이 분명한 것인 것 같다. ‘내가 여기서 풍성하게 잘 살아’, 에브라임이로 이름 하였지만 한 인생의 있어서 성공과 번영이 그 인생에 일생동안 난 그 구멍과 그 허한 심령, 그 빈 공간을 다 채울 수 없다는 것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複雜)다난(多難) 한 그 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 형제들은 가까이 부른 다음에 나를 판 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한탄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가리킬 때는 아주 정확하게 밝힌다. “내가 바로 당신들이 애굽에 판 요셉이요.”라고 정확하게 팩트 체크를 한다. 그런데 그 말을 한 다음에 바로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세요. 한탄하지 마세요.” 라고 말한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놀라운 성공이 요셉에게 관대한 마음을 주었을까? 아니면 그의 고도의 정치적인 처세술인가? 저 같으면 아무리 봐주어도 형제들 중에 몇 명은 종살이 체험을 몇 년 보내고, 몇 명은 따로 떼어다가 옥살이, 특별 투어 반으로 해서 좀 보내고, 그래서 내 마음을 조금이라고 이해시키고 싶었을 텐데, 그는 왜 이럴까?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 이유가 5절에 나온다. *창세기 45:5,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렇다 요셉이 이 놀라운 고백이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 적 계획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당신들이 팔았다고 말하지만 곧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바꾼다. 명백한 하나님의 중심적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 주어이다. 우리 하나님이 인도자로서 요셉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팔리기 전부터 요셉이 팔린 이후에도 계속해서 천천히, 하지만 더 명확히, 그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보여주셨다. 요셉의 사명을 깨닫게 해주셨다. 물론 그 요셉 인생에 대단 모든 것을 알려주시진 않으셨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계획과 섭리를 우리 인생들에게 다 알려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감당을 못한다. 종말의 때를 위하여 신비로 남겨 주신다. 필요한 만큼 알려주신다.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의 인생에 어떤 목적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지, 어떻게 예비 된 존재인지, 내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필요한 만큼 보여주시고 믿음으로 달려가게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요셉의 인생 가운데 그가 종살이, 옥살이 할 때나 총리로 섬길 때나 점차 점차 더 명확히 보여주시니까 그의 억울한 것, 압제 당한 것, 서러운 것, 맞은 것, 갇혀 있는 것, 잘 될 줄 알았는데 안 된 것, 실망감만 가득한 인생을 섭리 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 내가 하나님 손에 내가 쓰임 받고 있구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이 고백할 수 있는 것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 -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저는 주님께서 요셉에게 때마다 너 근심하지마, 위로해 주셨다는 확신이 든다. 제가 확신을 하냐면, 요한복음에 있다. 요한복음 14:1절이다. *요한복음 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때는 바야흐로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분위기가 너무 안 좋다. 얼마 전까지 누가 더 크냐고 치고 박던 제자들이 이제 한 자리에 쭈욱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이제 주님이 잡히신다는 직전인 것이다. “누가 나를 팔 것이다. 나는 잡혀간다. 너희가 잠시는 나를 따를 수 없다.” 라는 이런 말씀을 하시니까 제자들의 가슴에 근심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이제 어떻게 되나? 지금까지 주님 따라서 왔는데 이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나, 버려지는 것인가? 고향 떠나올 때는 우리 주님이 왕이 되시면, 집안 관리라도, 영주라도 한 자리 할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갈 곳이 없고 머물 곳이 없네.’ 어떤 고귀한 근심보다는 제자들 심령 가운데는 이걸 어떡하나? 한다. 그러데 베드로는 이제 세 번 배신할 베드로는 ‘죽기까지 따르오리다.’ 하고 큰 소리로 나아간다. 주님은 제자들의 세상적 근심을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다 아신다. 이들이 주님을 배신하고 곧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아시는가? 모르시는가? 아신다. 부활하고 나서도 제자들이 ‘고기나 잡으러 가련다.’ 하고 자기가 본업으로 돌아와 고기 잡으러 갈 것을 아신다. 속속들이 알고 제자들을 알고 계신다. 속속들이 우리를 알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제 십자가에 달리셔야 된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하실 정도로 십자가를 준비하셨던 우리 예수님, 그렇게 심령이 어렵고, 육신이 어렵고, 그리고 곧 배신할 제자들을 놓고 우리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제자들을 위로 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다.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 할 거야.” 라고 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할 거야.”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위로 자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영접해 주시는 주인이시고,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아니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세상 적 염려로 점철(點綴)된 제자들에게 세상적인 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본질적 염려도 내가 다 해결했으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신다. 영원토록 동일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인생 가운데도 그렇게 찾아오시며 동행해 주셨다. 그가 옥살이를 할 때, 그가 종살이를 할 때, 그가 해방되기를 기다리며, 내가 도와 준 관리가 내일 오나, 오늘 오나 하면서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때(학수고대 할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요셉과 동행하시면서 야,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형통한 거야.’ 라고 말씀하신다. 나중에 거기 형통한 단어가 많은지를 찾아보라. 우리 하나님께서 요셉과 동행하시면서 요셉의 기도를 때마다 밤마다 들으시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안 하셨을까? 저는 100%, 하셨을 것이라 여겨진다.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데, 요셉에게 역사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위로하지 않았겠는가? 하셨을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 인생 가운데 점차 자신을 향한 섭리 적 계획,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니까 요셉은 반응한다. 요셉은 세 가지 반응을 한다. 첫째반응-상처가 감사가 된다. -요셉이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그의 섭리 적 계획을 다 받았으니까, 자기가 팔린 것이 막 기쁘고 유쾌하고 외롭고 고단한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될까? 그때 아픔의 괴로움은 사실은 요셉의 몸과 마음에 상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프고 눈물이 난다. 대성통곡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아픔과 눈물의 기억이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감사와 소망의 기회로 변하게 된 것이다. 섭리를 알게 되기 때문에 감사한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니까 나를 이렇게 사랑하심을 감사하게 되며, 이 나라를 구원해 주시니,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 사랑하는 우리 가족을 이렇게 구원해 주시는구나!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니까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상처가 흔적이 있지만 그것이 감사로 바뀐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 하면, 이전에 배신당한 것, 아픈 것, 억울한 것, 여러 생각들로 눈물이 나는데, 주님 크신 은혜라!!~~ 하면, 주님 감사합니다. 그런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고 여기까지 살게 하시고, 그리고 지금 주의 사명자로 세워주시니 감사의 고백이 나온다. 그때는 참 힘들었는데, 눈물로 시작하지만 주님 얼마나 감사한지를 우리의 고백이 바로 요셉의 고백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반응이 그래서 상처가 감사로 바뀌는 반응이다. 둘째반응- 분노와 복수심이 사라진다. -지금 요셉은 비록 울고 있지만 그의 심령에 상처와 흔적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 섭리와 놀라움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을 향한 분노와 복수심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완악했던 그들의 마음, 변화지 않는 그들의 심정, 그들의 지금 상황 때문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나중에 뒤에 본문에서도 자꾸 이런 것이 반복되니까 너무 슬퍼서 운다. 요셉이 어찌 나의 마음을 몰라주나, 왜 이렇게 나의 형들은 불안해하는가? 그에게 분노와 복수심이 없기에 정직한 마음으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한다. 나중에는 “내가 당신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한다. 혹시 우리 안에 어떤 사건에 대한 누군가에게 분노와 복수심이 벌떡벌떡 살아있다면 오늘 우리의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서 주님의 섭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주님의 계획에 우리의 몸을 맡겨야 할 것이다. 주님을 오래 안다고 하지만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주님을 더욱 간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위로를 받고 섭리를 깨달은 자의 반응이다. 셋째반응- 자신의 마음을 이입(移入)하여 진정으로 위로하게 된다. -정말로 위로하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하는 근심하는 말은 부모님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야, 내일 시험 걱정하지마, 너 운동하는 것 너무 걱정하지마. 괜찮아 잘 될 거야!” 할 때, 이런 근심하고는 차이가 크다. 구약 성경에서 오늘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본문을 찾아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력을 당한 다음에 그 다음에 오빠들의 그 심령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썼다. ‘근심’, 어떤 느낌인지 알겠는가? ‘아차부’라는 단어를 썼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게획 한 것을 요나단이 듣고 그 마음이 ‘아차부’해졌다. 사랑하는 압살롬이 죽고 나서 다윗의 마음이 ‘아차부’ 근심하게 되었다. 이사야 54장 6절에서는 *이사야 54:6, 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버림받음을 당한 아내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냥 살짝 염려하는 마음이 아니다. 죽을 것 같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견딜 수 없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마음, 그것이 바로 ‘아차부’라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님 자신에게도 이 단어를 언제 쓰셨느냐면, 창세기에 6:6절에서 사용하신다. *창세기 6:6,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나서 ‘모든 사람들이 온갖 죄를 저지르고 먹고 마실 때에 내가 이들을 지은 것을 한탄한다. 내 마음에 이들의 죄악을 보니 근심이 된다.’고 하신다. 이 근심이 이것이다. 죄악을 앞에 놓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죄악과 도저히 상종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가슴을 치며 마음을 두드리며 아파하고 힘들어 하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죄악으로 분노하고,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 하는 이 단어가 바로 이 단어이다. 그러니까 요셉은 형제들에게 너무 그렇게 힘들고 너무 그렇게 죽을 것 같이 마음이 ‘어려워하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근심하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제들이 정말 이만큼 힘들어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이 죄악으로 회개하고 눈물로 오열하면서 요셉에게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흔적은 안 보이는 것 같다. 오히려 요셉이 혹시 자기들을 죽일까, 힘이 있으니까, 나중에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서도 득달같이 달려온다. “아버지가 우리들 죽이지 말라고 했어.” “너 아버지 죽었다고 우리한테 그러면 안 돼” 라고 한다. 그렇게 요셉에게 하는 것이다. 형제들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런 단어를 썼다는 것은 형제들이 그런 마음을 꼭 가져야 된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가 이렇게 팔려 와서 내가 이렇게 종살이, 옥살이 하면서, 오해 받으면서, 다른 종족들에게 얻어맞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얼마나 근심 된 일이었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요셉의 마음의 탄성인 것이다. 피해자인 당신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가해자인 당신들 얼마나 지금 힘들겠는가요? 당신들 죄악을 마주하면서 평생 어떻게 어렵게 그렇게 사셨는가요? 얼마나 그렇게 사셨는가요? 밥은 먹고 다니셨나요?” 이것이 괜찮다고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힘든 군대 생활, 엄한 시어머니 밑에 있으면 본인도 엄한 것으로 나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일 수 있는데 요셉은 자신의 마음에 이렇게 힘든 어려움들을 가지고, 영 가족을, 자신을 사랑하는 형제를, 위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섭리 적 계획을 알게 되었기에 이렇게 하나님께는 감사로서 전심의 고백을, 그리고 형제들에게는 진심의 고백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영 가족 여러분, 제가 오늘 이 장면이 요셉에 있어서 이 장면이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그 억울한 인생이 해소되고 대 반전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유쾌 통쾌한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렇지가 않다. 아팠던 기억이 그냥 마치 아팠던 순간이 지우개로 지울 수 있듯이 싹 없어져버렸기 때문에 이게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스토리를 제일 중요하냐면 춘향전에서 이 도령이 암행어사로 나와 가지고 변학도를 쫓아내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한다. 그때 카타르시스를 확 느낀다. 이제까지 기다렸다.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한 주인공이 영화에서 어찌어찌 해가지고 마지막에 그냥 힘차게 복수를 완성했을 때, 자기의 복수를 완성했을 때 그냥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이다. 너무너무 악한 사람들을 연약한 주인공이 정의구현을 하면서 이겨버리니까 시원한 것이다. 그러나 요셉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고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은 위로와 함께 깨닫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그 마음을 알게 되면서 요셉이 위로하면서, 사명자로서 선포하기 순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이제 사명자로서, 형제들을 위로하고, 70인 가족을 위로하며, 온 민족을 위로하는 위로자로서 이제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전 것은 다 준비가 되었고, 너무너무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제자들은 주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다 뿔뿔이 흩어지고, 부활이후에도 그렇다. 하지만 제자들이 주님의 마음을 깨닫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혀 같이 갈라지는, 정말 불의 혀 같이 성령의 임재가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달려 나가게 된다.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게 되고, 복음을 가지고 피스 메이커 역할을 힘 있게 생명을 걸고 감당하게 된다. 그래서 저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전환점의 시점이 어디냐고 물으신다면, 순교하는 그 순간보다도 오히려 공회 앞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라고 고백하던 그 순간인 것 같다. 사명자로서 그 고백의 시작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쓰임 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 요셉도 주님의 제자들도 위로받고 주님의 섭리를 조금이라고 깨닫게 된 자는 그 심령이 매에 있으면서, 꼬여 있으면서 억울하면서 분노해서 자유하게 된다.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슬픔과 고통이 서러움이 잠시 깃들일 수 있다. 하지만 곧 이내, 주님의 섭리와 주님의 인도에 감사함으로 기대함으로 변하게 되고, 복음 들고 사명자로 선포하게 되고, 위로자로 공급자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가?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혹시 달려가고 나서 얼마 안 된 요셉의 모습인가? 아니면, 사명을 깨닫고 위로하는 모습인가? 누가 크냐고 싸우던 제자들이 모습인가? 아니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 받고 주님께 사용되던 그 제자들의 모습인가? 정말 혹시 우리의 모습이 요셉의 위로를 듣고 있는 그 형제들의 모습은 아닌지? 주님 앞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서게 된다. 이 시간 우리에게 사도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빌립보서 4:6-7절에 말씀이다. *빌립보서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근심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라고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계신다. 우리를 향한 계획이 주님께는 있다. 우리가 다 모를 뿐이다. 지금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캉통이라고, 고통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보시며 형통이라고 명령하실 수 있다. 우리가 특새 기간에 기도할 때에 먼저 하나님이 섭리적 그 은혜를 깨달아지기를 소원하며 감사함으로 기도하길 바란다. 하나님, 깨닫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만 알려주십시오. 기도하게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 주님은 알려 주실 것이다.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특색 기간에 기도할 때, 요셉과 같이 이제는 먼저 용서해 주시기 바란다. 나에게 섭섭하게 한사람, 내 마음을 찢어놓은 그 어떤 이, 회사, 내 수고를 몰라주는 가족, 내 모든 상황 중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건, 용서를 선포하라. 사명 자는 연연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사명 외에는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눈물과 아픔이 내 마음에 흔적으로 상처로 남아 있지만 복수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용납함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 적 역사를 이해했다는 것이 바로 증거이다. 그게 증거이다. 아무리 예수님 잘 믿는 것 같고 매일 예배당에 있어도 여전히 심령에 맺히고 꼬여 있는 것이 있고, 풀리지 않는 것이 가득 차 있다면,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용서하고 싶지 않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면 거기에는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십자가 앞에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님 앞에 나를 맡기시고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못 내려놓아도 우리에게 내려놓게 하신다. 정말 신가하다. 역기를 들어보았는가? 10kg로 짜리는 들어서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런데 100kg 짜리를 들어 올려서 서있다고 하면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그것 못 내려놓는다. 서있지도 못한다. 더 있다가 못 내려놓는 것이다. 바들바들 떨면서 무릎도 못 굽힌다. 도와주어야 내려놓는다. 우리 주님께서 기도할 때에 용납하고 용서하고 내려 놓 수 있는 은혜를 주실 줄 확신한다. 아울러 이제 위로자로서 소원하면서 서길 바란다. 복음의 들고 사랑하는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요셉처럼 근심하지 말라고, 우리 예수님처럼 염려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한다. 공급함으로 말미암아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하여야 한다. 이 소원하는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아가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 시간, 바로 지금 이 시간이 우리 삶에 가장 유의미하고 중요하고 전환점이 되기를 소원한다. 이게 믿음보고이다.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믿음보고이다. 그것이 바로 삶에 정점이며, 하이라이트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해야 되고, 앞으로 그것을 경험하기를 소원해야 된다. 남은 특새 기간 동안 정말 사랑하는 모든 영 가족들이 주님 손에 붙들리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형들은 요셉의 정체를 알고는 놀라며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을 만난 기쁨에 앞서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이 이를 알고 안심시키기까지 그들은 참 기쁨을 잊고 있었다. 성도의 참 기쁨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섭리(攝理)란 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간섭하시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믿었다. 그가 하는 말에는 항상 ‘하나님’이 언급되고 있다. 이 단어는 그의 전 생애를 조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인 것이다. 요셉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관점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형들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된 가해 행위 자체 만을 보고 형들을 미워하거나 복수심을 갖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을 들어 그런 행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살폈던 것이다. 다만 용서하기에 앞서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했기에 그는 형들을 시험하며 회개의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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