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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2월 11일)
제목: "왜 다윗인가?"
말씀: 사무엘상 17:45~47
대표기도: 최성현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김정우 목사님(한국신학정보연구원장, 전 총신대학원 교수님)-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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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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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우 목사님(한국신학정보연구원장,전 총신대학원 교수님)-초빙

 
-할렐루야!!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대림절은 ‘어드벤트’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어드벤트(Advent)란 ‘오신, 출현’ 이란 뜻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사람의 옷을 입고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준비하는 영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절기이다. 우리는 지난 만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참으로 대 환난을 겪은 것 같았는데 그래도 오늘 예배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 주시고, 평화 주시고, 기쁨 주시고, 사랑주시길 간절히 사모한다. 옛날 옛적에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는 그 별이 이번 성탄 기간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뜨고,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평화로다.” 하는 그 찬양 소리가 우리에게 다시 들리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 드린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스토리이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에 보면,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톰에게 “톰, 예수님의 첫 두 제자의 이름이 무엇이지요?”라고 물었는데 톰은 그 때에 성경구절을 2천개를 외운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답을 쉽게 할 줄 알았는데 톰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다윗과 골리앗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윗과 골리앗은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성경에서 다윗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등장하고 있다. 다윗은 목동이고, 효자이고, 시인이고, 수금을 잘 타는 자이고, 음악 치료사이고, 용사이고 왕자의 절친이고, 공주와 애인이고, 무엇보다도 남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을 통합하고, 동일한, 경건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실 백 가지 얼굴을 가지고 사람이고, 성경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 가운데서 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말 다윗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가를 알기 쉽지가 않은데, 그럼 다윗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어떤 사람일까? 다윗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하나님과 뜻이 같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무엘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다윗이 하나님 마음과 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네가 바로 그다. 나는 중심을 보는데, 이 아들이 바로 그다.” 라고 하나님께서도 친히 증거 해주셨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고 깊어서 잘 볼 수가 없는데,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다윗이 네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 나는 다윗과 함께 갈 수 있다. 다윗과 나는 너무 잘 통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바로 이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큰 스토리인데 여기서 다윗의 네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I. 다윗에게는 거룩한 동기(motivation)가 있었다.
 
*사무엘상 17:23,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전열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다윗이 이새의 심부름을 전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서 엘라 골짜기를 따라서 내려왔을 때, 그때에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참 모습이다. 여기에서 들었다는 말은 그냥 흘러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제가 아내 말을 들을 때, 그냥 흘러 들은 것이 아니고, 고도로 집주해서 듣고 몰입하여 들었다는 말이다. 다른 군인들은 이미 타성에 빠져가지고 골리앗의 말을 그냥 흘러갔는데 다윗은 유심히 들었다. 다윗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들었다. 다윗이 무슨 말을 들었는가? 골리앗의 말을 들었다. 골리앗이 많은 말들을 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말을 했는데, 골리앗의 말은 바로 이스라엘을 모욕(侮辱)하는 말이었다. 10절에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상 17:9-10,
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골리앗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이스라엘을 모욕했다. 모욕을 듣는 것은 참 어렵다. 모욕이라는 것은 사람을 놀리는 것이고, 골리는 것이고, 내 약점을 후벼 파는 것이고, 결국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모욕은 한 대 쥐어 막는 것보다 훨씬 감당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모욕(侮辱)을 들으면 내 인격이 파괴(破壞)되고, 지속적으로 모욕을 들으면 학교도 가기 싫어지고, 일도 하기 싫어지고, 무기력해지고, 그냥 죽고 싶고,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리고 이 모욕의 상처는 평생 가는 것이고, 아물지가 않는다. 골리앗이 계속해서 모욕을 하는데, 사울도 들었다. 사울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늘 25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25,
25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그들은 계속해서 모욕을 들었다. 모욕을 느끼고 있지만 얼어붙어 있고 무섭다고만 말을 하고 있다. 마치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서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타조처럼 이스라엘 군대들이 무력해졌다. 우리말로 말하면 다 봉이 되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사무엘상 17:26,
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6절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첫 번째 말이다. 다윗의 첫 번째 말은 “이 오랑캐 같은 자식이 어떻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군대가 계속해서 모욕을 들으면서도 이놈만 잡으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는데, 거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데, 다윗의 관점은 어떻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에 있었다. ‘살아있는 하나님이 군대’라는 이 표현도 다윗이 처음 하는 말이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셨다. 사울과 그의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이론적으로 살아계시고, 교리적으로 살아계셨는데, 다윗에게는 생생하게 살아계신다. 그의 몸속에, 뼈 속에, 삶속에, 인생 속에 체득되었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의 산 경험이었다. 어떻게? 그래서 다윗의 말이 너무나 진지하고 권위가 있는 것 같고 힘이 있어서 드디어 다윗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 왕에게로 데려 갔더니, 다윗이 사울 와 앞에 가서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36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36,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에게는 날마다 그냥 유대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지만 그 양을 키우는 현장 속에서 무게를 연습하지도 않았고, 바디빌딩도 안 했지만 살아있는 그 현장 속에서 하나님이 체험되었다. 다윗의 동기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는 모욕을 받을 수가 없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도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45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45,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의 마지막 말이 되겠다. 결전을 앞두고 말하고 있다. 다윗 믿음의 핵심적 고백이 되겠다. 모욕(侮辱)과 수치(羞恥)를 당하고 있는 바로 그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왜 다윗인가? 다윗은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고 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에게 뛰어나갈 수 있었겠는가? 목숨을 던지지 않고는 어떻게 골리앗하고 싸울 수 있겠는가? 골리앗 앞에 나아간 이유는 그에게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능력이 많고 출중해도 동기가 없으면, 자신을 발휘할 수가 없다.
 

*아이작 뉴튼이 한 말이다.
-우리가 가져올 변화는 우리 속에 있는 동기의 힘에 정비례한다.-
 
나는 왜 공부를 못 했을까? 동기가 없어서, 동기만 있었으면, 한국 사람만큼 아이큐가 좋은 사람이 없는데 왜? 공부를 못했는가? 동기가 있다면 우리는 산도 넘고, 바다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동기가 무엇인가? 깊은 내 속에서 늘 끓어오르는 동기가 무엇인가? 다윗은 “주님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한다. 주님은 살아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은 온 세상에서 너무나 영광스런 이름을 가지고 계셔서, 그 이름이 모욕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여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빌려 표현을 한다면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우리 주기도문의 첫 번째 문장이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고 영광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우리의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가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이 연약하고 작은 나를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 영광을 받을 수 있는가? “내 직장에서, 내 직업에서, 내 은사 속에서, 내게 주신 생명의 날 동안,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것이 다윗의 동기였다.
 
II. 다윗에게는 미션(mission)이 있었다.
 
*사무엘상 17:29,
29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 앞에 강력한 강적이 나타났다. 바로 그이 형님인 엘리압이었다. 엘리압은 그 집에서 제일 큰 자였다. 다윗은 가장 작은 자였다. 엘리압은 다윗을 보고 갑자기 화를 내었다. 그리고 꾸짖었다. “야 꼬맹아, 들에 있는 양들은 누구에게 맡기고 여기에 와서 전쟁을 구경하려고 하느냐?” 라고 한다. 마치 양떼 같은 이 꼬맹이 다윗을 조롱(嘲弄)하고 있다. 형님이... “너의 완악함을 안다. 너는 늘 무모한 자식이야. 건방진 자식이야, 뻔뻔스러워, 왜 이렇게 자꾸만 주제 넘는 짓을 하려고 해, 그리고 늘 충동을 잘 당해, 전쟁은 어른들이 하는 것이니, 빨리 집에 가서 아버지 양이나 키워. 어디 양 냄새나는 것이 이 거룩한 전쟁터에 나타났니? 너는 막내지, 키도 작지, 군사학이나 공부한 적도 없지., 학력도 없지, 너는 주님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된 놈이야.”라고 형님이 이야기 한다. 형님이 골리앗보다 더 힘들다. 이런 형님과는 싸울 수가 없어서, 다윗이 농담을 한다. 아주 짧게... “형님,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이유라는 것이 일이다. 말도 못하겠습니까?”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라고 이유가 없겠냐고 한다. 이것이 이 중요한 일이 아니겠냐고 한다. 미션으로 번역으로 하면, “이것이 미션이 아닙니까?” 다윗은 늘 미션을 가지고 살았다.
 
아버지가 맡긴 양떼들을 너무나 잘 돌보고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의 심부름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하는 그리고 아버지가 증표까지 받아오라는 것까지 확실하게 한다. 요즘 이런 친구를 찾아볼 수 있을까? 이런 책임감이 다윗에게 있었다. 다윗은 자발적이고, 즉각적이고, 부지런했고, 책임감이 투철하고, 다윗의 마음속에는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온전하게 해야지.’ 마치 온전 론으로 살고 있는 다윗을 본다. 다윗에게는 목장과 전장이 구별되지 않았다. 목장이 전쟁터이고 목장이 전쟁터였다. 장소는 달라도 늘 미션은 동일했다. 사랑의 교회 식으로 말하면 다윗은 ‘일터선교사’이다. 일터도, 미션도 분리가 되지 않는다. 엘리압은 일터는 일터이고, 미션은 미션이지, 라고 한다. 다윗은 그렇지 않다. 늘 미션이 있었다.
 
III. 다윗은 목자의 심정(Shepherd's heart)을 갖고 있었다.

*사무엘상 17:33.
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무엘상 17:36,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이제는 목자의 마음이 사울 왕 앞에서 진술되고 있었다. 다윗의 말에는 신중함과 예의와 확신과 위엄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드디어 사울 왕 앞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려면, 사울왕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사울 왕이 다윗을 내어 보내려고 하면, 사울 왕이 다윗에게 설복(設伏)이 되어야 한다. 왕의 마음은 마치 깊은 보의 물과 같다고 해서 왕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럼 다윗이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말해야 될까? 사울은 다윗을 보자마자, “너는 할 수 없어.” 엘리압과 똑 같은 말을 한다. “너는 어리고 골리앗은 어린 시절부터 용사야, 전쟁의 용사야, 골리앗은 철저하게 훈련되었어.” 맞는 말이다. 사실이다.
 
사울의 프레임과 엘리압의 프레임과 같다. 둘 다 사실을 잘 보는데, 믿음의 프레임이 없다. 그러자 다윗이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가? “우리의 밥입니다.” 성경은 인용하지 않았다. 그때 다윗은 사실에 대해서 사실로 대답을 했다.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자 않고 분석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이 아버지 양을 지키고 있을 때, 목양을 하고 있을 때, 현장 속에 있을 때를 말하고 있는데, 그 때 나는 사자와 짐승과 곰과 붙은 적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사자하고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이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야수들과 싸웠는데 대표적으로 싸운 것이 사자이고, 그리고 곰이다. 야수들과 싸울 때마다 다르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이 야수들, 강한 짐승들, 맹렬한 짐승들, 자기 새끼를 위해서 먹을 것을 꼭 챙겨야 되는 굶주린 이 야수들, 야수들도 목숨을 걸고 다윗에게 덤비고, 인정사정없이 먹으려고 덤볐을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다윗은 여러 목자들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홀로 싸웠다. 짐승을 잡을 때 수염(鬚髥)도 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짐승들과 싸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새끼 한 마리를 위해서 싸웠다고 한다. 한 마리... 다윗은 자기 양도 아니고, 아버지의 양이다. 아버지 것이다. 아버지의 먕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다. 그 때 아버지 양의 한 마리이지만 내가 건져 냈다고 한다. 그래서 일어나서 으르렁 거릴 때, 사투를 벌일 때, 내가 따라가서 건져내고 잡아서 쳐 죽였다고 한다. 다윗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적용
골리앗도 이 짐승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간증에 있어서 사실은 생생한 체험보다 더 중요하고 더 놀라운 것은 37절이다.
 
*사무엘상 17:37,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싸운 것 같지만 다윗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당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내었다. 정말 다윗도 죽을힘을 다해 수없이 다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냈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양이다. 주님의 나의 목자이시다. 내가 양 한 마리를 위해 애썼는데 이 양 한 마리조차 내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웠는데 사실은 나도 수없이 나도 죽을 뻔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건져내셨다. 내가을 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건지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양이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다. 내가 양을 건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건지신 것,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내 실력과, 내 용기와, 내 기백과, 내 지식과, 내 기백과 내 기술로서 이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 나를 건져내셨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시편 23:4,
4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다윗이 살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하고 무언가 다윗이 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뭉클한, 또 다윗 마음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진짜로 함께 계시구나. 늘 함께 계시구나, 이놈과 싸울 때도, 저 원수와도 싸울 때도, 계시구나.” 이게 쌓인 것이다. 믿음은 이런 체험들이 주님을 위해서 싸울 때, 쌓여가는 것이다.
 
IV. 다윗은 비전(vision)이 있었다.

*사무엘상 17:45,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과 싸우는데 골리앗이 다윗을 저주하면서 나왔다. 없인 여겼다. 이 신들을 저주하며 없이 여긴다. 골리앗은 완벽한 방어체계를 갖고 있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머리에는 놋 투구와 가슴에는 어린 갑을 다리에는 놋 경갑을, 그리고 그 앞에는 큰 골리앗은 거구였다. 골리앗의 전신을 커버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마치 아이언도구로 자신을 완전히 방어한 모습이다. 그리고 칼과 창과 단창을 공격무기로 가지고 나아왔다. 이런 골리앗에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가 나아간다. 고 한다. 이 표현도 성경에서는 처음 나오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는 사무엘에서 처음 나오지만 ‘내가 만군의 여호와 이름’이라는 이 말은 골리앗에게 처음 만군의 하나님이었다. 천군을 의미한다. 천상에 있는 군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내가 군대를 못 부를 줄 알았느냐? 로마의 군단은 5860명 되고 모든 것들이 다 있는데,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내가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늘 사는 것처럼,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에게 늘 하나님은 실존의 하나님이시고, 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우습게 보여도 주님의 지상 군대이다. 이것을 사울과 그의 군대는 몰랐다. 다윗은 알고 있었다. 다윗은 이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비전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사무엘상 17:46,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사울의 전투에서 이루어지는 엘라 골짜기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만 싸움이었지만, 다윗은 이 싸움이 온 세상이 듣게 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장차 중요한 영적 교훈을,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다윗은 글로벌 시각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 우리에게 적용을 한다면, 열국들이 우리를 볼 때, 와! 대한민국은 복음으로 복 받은 나라구나. 한국에는 아직도 교회가 살아있구나. 예내가 살아있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미션이 있구나, 비전이 있구나. 온 세상이 알게 되리라고 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이 무리는 바로 우리 공동체, 싸우고 있는 우리 공동체이다. 우리 로칼 처치,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주님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 우리가 주님의 싸움을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하고 내 칼도 내 창도, 우리에게 힘은 언제 생기는가? 나를 부인할 때, 주님을 긍정할 때, 우리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긍정으로 전쟁의 승패는 주님께 속했다. 이게 바로 요나단의 고백이었다. 요나단도 블레셋을 쳐서 이길 때, 여호와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한다. 믿음이 없는 군대는 사울의 군대처럼 수단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믿음이 있으면, 다윗에게는 네 가지 동기가 있었고, 미션이 있었고, 목자의 마음이 있었고, 그리고 비전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가?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서 골리앗이 죽었는가? 49절을 보면,
 
*사무엘상 17:49,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그런데 어떻게 돌이 이마에 박혔을까? 골리앗은 완전한 놋 투구를 눈만 보이는 놋투구를 쓰고 나왔는데 어떻게 돌이 이마에 박혔을까? 이마에는 뼈인데 어떻게 박혔을까? 골리앗이 뒤로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엎어졌다고고 한다. 이마와 정강이 바지와 발음이 같다. 다윗은 그 당시 물맷돌로 골리앗의 정강이 바지 사이로 쏘았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엎어지자 골리앗의 칼을 뽑아서 죽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재미있겠다. ㅋㅋㅋ 그렇다면 우리의 골리앗은 누구인가? 골리앗은 유아독존이고 신성모독이고 바벨탑을 쌓은 자이고 인간의 교만과 오만한 자이고, 골리앗은 완전무장을 한 군국주위이고 전체주의이다. 우리 모두를 가난하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적용을 할 때는 우리에게도 골리앗의 모습이 있다. 오만하고 교만하고 나하고 다르고 나보다 약한 자들을 골려먹고, 모욕하는 내가 오만한 인간이 아닌가? 깨어지지 않는 인간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가운데 카르바조가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다윗의 손에 들린 골리앗의 머리는 바로 카라바조 자신의 그림이었다. 무기를 믿고 살고, 내 실력으로 자만하고 내 광기를 따라 살고, 하나님 없이도 내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가 골리앗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윗처럼 되기를, 하나님의 마음을 합한 다윗처럼 되기를 사모한다. 

다윗과 골리앗. [카라바조], 바로 내 얼굴

왜 다윗인가? 다윗의 동기와 미션과 목자의 마음과 비전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분명한 것 같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다. 다윗은 예수님 모형이고, 예표이고, 그림자이고,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주가 되심으로서 진정한 다윗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둘 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고, 그래서 우리도 늘 성령의 기름부음 받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둘 다 거룩한 동기가 있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이 내 실수 때문에, 나의 부족함 때문에 모욕당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기도도,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늘 우리는 세속적인 동기, 자기중심적 동기를 이제는 좀 벗어버리고, 더 영적이고, 더 공적이고, 더 하나님 중심적인 동기가 우리 속에서 불탔으면 좋겠다. 이 동기가 날마다 새롭게 생산적이고 열매 맺으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둘 다 목자의 마음을 가졌다. 다윗은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참 목자였다. 종말론적으로 장차 다윗이 오리라고 할 때,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 표현들이, 다윗이 모델이 된 것이다. 예수님도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내가 목숨을 바칠만한 코즈가 우리 마음 속에 있기를 원한다. 우리도 목자의 마음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착한 양떼들, 식구들, 나보다 연약한 학우들, 사회의 연약한 자들,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창조만물들, 목자의 마음으로 돌볼 수 있기를 축원한다. 둘 다 거룩한 용사로 싸웠다. 둘 다 적장의 머리를 베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을 죽였다. 예수님은 사단의 무기인 죽음으로서 죄와 사망 권세를 폐하셨다. 우리의 날마다 우리의 은사를 연습해서 우리 생활전선에서 책임을 온전히 다하고 우리의 기술과 실력과 지식과 덕을 날마다 향상해서 오늘도 주님 편에 잘 살았구나! 하는 그래서 기뻐하는 거룩한 용사로서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 둘다 미션과 비전이 있었다. 다윗에게 온 땅을 향한 비전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는 그런 비전을 가지셨다. 날마다 주님 닮아가자. 그리고 주님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실력을 쌓고 선행의 용량을 키우고, 더 선명한 높은 비전으로 주님과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요약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의 친구가 되고 용사가 되어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생생하시고 말씀하시고 운행하셔서 우리의 삶에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하며 우리의 마음을 다 씻어서 정화되어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야 한다. 다윗의 거룩한 동기(motivation)와 다윗의 미션(mission)과 다윗의 목자의 심정(Shepherd's heart)과 그리고 다윗의 비전(vision)을 닮아서 우리가 담대히 주님의 삶을 닮아가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와 민족에게만 국한된 하나의 지역 신이 아니라 온 우주의 통치자시며 만군의 주재자이심을 강조하는 하나님을 뜻한다. 만군의 하나님은 권세와 능력이 무한하사 온 세계에 악한 자들을 징계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대적들과 전쟁하신다. 다윗은 전쟁의 목적을 살아서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이 선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고, 모든 일의 승패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좌우되며 전쟁을 통해서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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