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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31일)
제목: "주께서 이루실 회복"
말씀: 출애굽기 4:10~17
대표기도: 나모세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쉐키나), 영광찬양대(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윤대혁 목사님-초빙(미국 LA 사랑의빛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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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0~17,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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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혁 목사님-초빙(미국 LA 사랑의빛선교교회)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풍성함을 내려 주실 줄 믿는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 주시고, 모세에게 사명과 비전을 주신 그 내용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세는 이 부르심 앞에 “못합니다. 안하겠습니다.‘ 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하고 있는데, 우리 같으면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주님, 나 한 번만 만나주시면 내가 세상 돌아가지 않고 오직 우리 주님만 바라보고 살겠습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주셔도 나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습니다.”라고 말할 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모세는 이와 같은 만남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못합니다. 나는 안 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기도 가운데, 예배 가운데 우리를 모세와 같이 만나 주신다면 우리가 모세와 같지 않게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우리도 모세와 같이 안 됩니다. 못합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못 한다고 말할 때는 모세의 실력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7:20절에 보면,
 
*사도행전 7:22,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 모세는 언어와 능력이 누구보다도 출중했던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같이 명령하시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지도자로서, 싸움도 잘 했는데 외국 건장한 군사를 죽게 이르게 할 만큼 그의 전투력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 앞에 “나는 못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항상 자기 마음 안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나는 무가치한 인생이다. 나는 그 때 나일 강에서 죽었어야 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나처럼 형편없는 인생은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40년을 살았을 텐데, 왜 그가 그렇게 살았냐면 모세 안에는 항상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40년을 살았을 것이다. 모세는 누구와 비교했냐면 항상 어린 시절 함께 자랐지만 지금은 애굽이라는 큰 나라의 왕이 되어버린 그 바로와 자신의 인생을 비교하면서 나보다 못했던 저 바로는 지금 왕이 되어 지금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나는 지금 평범한 무명의 양치기가 되어 살아가니 ‘나의 인생은 끝없이 부족하고 형편없는 무가치한 인생이야.’ 라고 늘 되 뇌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누구는 왕이 되었고 나는 무가치한 인생이 되었고,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누군가 나를 비교하는 순간 여러분은 세상을 살면서 나보다 잘 난 사람을 만날까, 안 만날까? 만난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만날까, 안 만날까? 만난다. 나보다 주관적인 생각에 좀 부족한 사람을 만날까, 안 만날까? 만난다. 그런데 살면서 나보다 잘난 사람을 만나면, 나보다 눈이 큰 사람을 만나면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눈이 작을까?’ 눈이 큰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스스로 눈이 큰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눈이 커졌을 거야’ 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나보다 눈이 더 작은 사람을 만나면 ‘역시 내 눈만큼 크고 아름다운 보석 같은 눈이 없을 거야’라는 그 착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열등감으로 가든지, 또는 교만함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비교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절대로 주신 마음이 아니다. 인류의 최초의 범죄 함이 이 비교의식 때문에 시작되었다. 미스터 사탄이 뱀을 가장해서 아담과 하와를 속인다. 그러면서 이런 마음을 준다.
 
*창세기 3:5,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사단 마귀가 비교의식의 마음을 준 것이다. 누구랑 비교했나?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니까 영원하심,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자기를 비교하니까 자기가 한 없이 초라한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선악을 알게 하는 그 열매를 따먹고 보자는 유혹을 그 범죄를 시작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사단이 주는 마음이다. 여러분 비교의식은 절대로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의 가치도 잃어버리고 우리의 사명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제가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가서 많은 수업 가운데 설교 학에 관심이 있었다. 모든 전도사님들은 설교 학에 관심을 갖는다. 교수님이 수업을 할 때, 오리엔테이션 할 때, 앞으로 강의하기 전에 한 열 분의 전도사님이 뽑혀서 매주. 마다 이어서 강의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마음에 나도 뽑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열 명 중에 나도 뽑혀서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뽑히지가 않았다. 뽑히지 않음과 동시에 갑자기 그 설교 학에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맨 뒤에 앉아서 엎드리면서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강의 하는데 그 강의 전에 전도사님 한 분이 설교를 하는데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설교가 귀에 잘 안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별로 은혜가 되지 안 되고 버벅 거리시고 설교를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 마음에 평안이 드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기쁨이 이렇게 흐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서 ‘전도사님 설교를 좀 잘 준비하시지. 내가 뒤에서 중보기도를 해드려야겠다.’ 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이제 설교가 끝나고 나가는 길에 제가 그 전도사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전도사님, 저는 윤대혁 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데 너무 은혜가 되었습니다. 어쩜 이렇게 설교를 잘 하세요?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하면서 갔다. 그런데 어느 날은 다른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다. 너무 잘하시는 것이다. 와! 그 잘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왜 이렇게 잘하지? 저 분이 저렇게 잘하는데 이유가 있을 거야 나보다 나이가 세 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나도 3년 후에는 저렇게 잘하지 않을까? 나의 합리화하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 제가 그 전도사님을 찾아갔을까? 안 찾아 갔을까? 어떻게 잘하는가? 안 찾아갔다. 그냥 쌩 갔다.
 
여러분 그 신학생이 모인 자리가 어디인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내 목숨의 모든 것들을 드렸던 헌신된 자리에서 이 비교의식 때문에 열등감에 빠지고, 비교의식에 빠져서 가치와 사명을 잃어버리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여러분, 누군가와 비교한다는 것은 나를 무가치하게 만드는 길에 서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모세와 이와 같았다. “하나님, 나는 안 돼요. 나는 무가치한 인생이에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모세를 다시 만나주셔서 그를 회복시켰던 하나님의 손길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 역시도 회복이 필요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회복이 임하게 도는 거룩한 은혜를 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회복시키셨는가?
 
I. 첫 번째-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셔서 제일 첫 번째 던졌던 말씀은 이것이다.
 
*출애굽기 3:4,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다. 모세야, 모세야, 그런데 이름 없는 사람은 업지 않은가? 모세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는 것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모세가 회복을 누릴 수 있는가? 여러분 모세는 도망자의 인생으로 40년의 광야의 생활을 하면서 그는 내가 모세라는 이름을 누구에게도 한 번도 말할 적이 없다. 아니 말하지 못한 것은 도망자의 인생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된다. 그래서 자기의 신분을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모세라는 이름이 흔한 이름이 아니다. 그 뜻이 무엇인가? 나일 강에서 건짐을 받았다. 특별한 이름이다. 지금이야 영어이름, 한글 이름으로 듣지만, 그 당시의 애굽에 모세라는 이름은 딱 한 사람, 모세 밖에 없었다. 특이한 이름이었다. 여러분 이런 이름 없지 않은가? 한강에서 건짐 받았다고 해서 한건인가? 낙동강에서 건짐 받으면 낙건? 이런 이름은 안 짓는다. 특이한 이름이다. 내가 모세라는 이름을 아는 순간 그는 신분이 노출되고 잡혀간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장래에 자기의 아내가 되는 십보라가 그 마을에 불한당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모세가 도와준다. 자기의 생명의 은인에게 십보라가 묻는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물을 때, 내가 모세라고 말을 못했다. 집에 가서 아버지께 이렇게 이야기 했더니 이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그 이름이 무어냐?” 라고 “너 도와 준 사람의 이름은 알아야 될 것 아니냐?” 라고 했더니 그 여인들이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하면,

*출애굽기 2:19,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모세의 이름을 몰랐다. 한 애굽 사람이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한 애굽 사람으로 불리었지, 모세라는 이름으로 불려 진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신다. 여러분 모세에게 이게 얼마나 충격적이겠는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아니, 대체 당신은 누구이기에 내 아내도 그 누구도 이름을 이야기 하지 않았던 나의 이름을 아십니까? 내가 모세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대체 누구이기에 내 이름을 부르십니까?” 걱정과 불안함이 앞섰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 이름을 부르신 것은 모세에게 이런 메시지는 “내가 너를 알이 내가 너를 지었고, 내가 너를 보냈고, 나일 강에서 너를 건졌으며, 네가 애굽에 있을 때, 네가 광야에 있을 때, 지키고 보호한 여호와가 나다.”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에게 모세야, 모세야, 하는 것은 이거다. “너는 나의 존귀한 자녀이고, 너는 나의 백성이고, 너는 내가 지었으며,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모세야, 모세아”, 하는 이름에 담겨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모세 이름만 아시는가? 오늘 이 안아주심의 본당에 계시는 모든 분들의 이름을 다 아신다. 그래서 목자 되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를 불러내어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아신다. 목회하면서 성도님들이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목사님,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한다. 그러면 “그럼요, 집사님, 집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요.” “그런데 목사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데 그 바쁘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그럼요. 그래서 기도를 들어주시니 바쁘신 거 에요 집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 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집사님을 다 알고 계세요..” “정말 그럴까요?” 라고 묻는 분들이 많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임을 믿는다.
 
저에게는 대학원생 아들이 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방학하기 일주일 전에 컴퍼런스 대회를 한다. 그때는 교실에 부모님을 다 초대해서 아이가 일 년 동안 한 내용들, 아이가 공부한 글짓기, 미술품 이런 것들을 이렇게 전시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내와 함께 갔더니 아이가 설명해 준다. “아빠 내가 그린 그림이야”, “그래? 너무 잘 그렸다. 피카소도 이 만큼 못 그릴 것이다.” 사진도 찍어주고 네가 쓴 글이야? 너무 잘 썼다. 옆에 서봐 하면서 찰칵 찍어주고, 공작품을 소개해서 너무 잘 만들었구나. 하면서 찍어주었다. 그래서 그것을 가져가려고 하니까 선생님이 아직 수업이 일주일 남았기에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만 오기를 기다렸다. 방학이 되어서 그것을 가져왔다. 그것을 보면서 그림 잘 그린다. 글 잘 쓴다. 그러니 너무 좋아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어느 날 그 애 방을 가보니 그림과 그 공작품들이 집안을 어지럽히는 쓰레기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랑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때깔이 안 난다며 우리가 작정했다. 그래서 아내와 저는 과감하게 버렸다. 집이 너무 깨끗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서 갑자기 아들이 나와서 “엄마, 이것 어디 갔어?” “아니 뭐가?”, “내가 일학년 때 그린 그림과 글짓기 한 것 말에요. 어디 갔냐고?: 했다. 그래서 “그 쓰레기인데 버렸지” “왜 버렸어, 왜 버렸어.” 하면서 방바닥에 누워서 울부짖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아들, 그거 아빠가 발로 그려도 그거보다는 잘 그릴 것 같다.”고 했더니 그래도 “왜 버렸냐?”고 하면서 하는 말이 “할머니 할아버지 오시면 그거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왜 버렸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막 우는데 납득이 잘 안되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집안을 어지럽히는 하나의 종이쪼가리에 불가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아들은 속상해 했겠는가? 이유가 무얼까? 하나다. 자기가 만든 것이니까, 내가 만든 것이니까. 너무나 귀하고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한다. 가진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있다 없다. 를 평가한다. 그렇다보니까 우리가 세상에 눌려있어서 너무나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쉽게 판단한다. 우리들의 존재를 누가 정하는가?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내가 가진 소유로 결정하지 않는 우리가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으시고 만드셨기 때문에 그것이 존귀하고 가치 있는 이유가 됨을 믿는다. 모세가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 Calling 앞에 회복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누구와 나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내가 좀 실수가 있고 내가 부족할지라도 내가 좀 연약하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하고 무너질 필요가 없다.
 
저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설교학적으로 좋지 못한 핸디캡과 같은 나쁜 습관이 있다. 그게 무어냐면, 저는 설교나 이야기 할 때. 손을 자주 이용해야 한다. 이게 설교학적으로 솔직히 손을 방해하고 시선을, 주위를 산만하게 하기 때문에 좋은 게 아니다. 고쳐보겠다고 한 번은 강대상을 붙잡고 설교를 했더니 말이 안 나왔다. 아무래도 저는 두뇌 에너지와 이 엔진이 이 손에 있는 것 같다. 손이 움직여야 말이 잘 나오는 스타일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도 저는 손을 가만히 두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이렇게 뻗어야 기도가 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선교단체 훈련을 갔는데 아침 열시에 조금만 방에서 7-8명이 이렇게 동그랗게 좁은 공간에서 앉아서 한 시간 반 정도 중보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제가 어떻게 이렇게 기도하니까 옆 사람들이 눈감고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뭐가 왔다 갔다 하면 이게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 전는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저는 그래서 계속해서 하는 것이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나가는 문 앞에서 “형제님, 죄송합니다. 자매님, 죄송합니다. 기도할 때 좀 안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가 안 됩니다.”라고 한다. 어떤 형제는 “아, 알겠습니다.” 하고 시큰둥하면서 간다. 어떤 자매는 “아니에요. 형제님, 형제님이 기도할 때, 이렇게 하는데요. 이렇게 손을 뻗으시는 모습이 이 손이 성령의 검 같아서 어둠의 권세가 두 동강이가 난 것 같아요.” 한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그 다음 날 더 크게 했다. 더 크게,,,
 
여러분,
우리 인생에 실수가 같고 좀 연약한 것 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은 우리를 독특하게 고유하게 만드신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몇 개월이 지나고 체계적인 중보기도 사역자이신 조이도 호슨이 세미나를 했다. 그때 세미나를 하면서 영적인 기도를 강의 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어둠의 권세 공격 가운데 눌려있다면 그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기도하라. 손을 가지고 그것이 ‘성령의 검’인 줄 알고 이렇게 손으로 자르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들은 3만원 주고 세미나를 듣는데 알면서도 타고난 그런 것을 습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버릴 것이 없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하나님은 우리를 고유하게, 독특하게, 존귀하게 지으신 줄 믿는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한다. 못해요, 안 해요. 라고 말하는 모세를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시키셨던 것인가?
 
II. 두 번째-날마다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너를 ‘도와줄게’ 하십니다.

-모세가 난 못해요, 난 안 되요. 하니까 하나님께서 갑자기 설득하신다. 그런데 그 설득에도 안 되니까 모세가 출애굽기 4:13절에서 너무나 생뚱 맞는 표현을 한다.
 
*출애굽기 4:13,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이 모세의 숨겨진 스토리가 여러분 있는데 그 내용은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이 되었지만 그를 키운 사람은 모세의 친모인 요게벳이라는 여인이 유모가 되어 모세를 키우는데 모세에게 젓을 먹이고, 어렸을 때부터 무얼 가르쳤냐면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히브리사람이다” “너를 지금까지 지켜 주신 것은 하나님이시다.” “나일 강에서 건진 것은 너의 양모인 바로의 공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신 것이다. 네가 이 애굽의 왕자가 된 이유는 지금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라고 너를 이 자리에 보내신 것이다.” 이것을 교육 받으면서 모세가 자랐다. 모세가 만약에 애굽 땅에서 애굽 사람처럼 살겠다고 했다면, 모세가 한 선택은 누구보다도 히브리사람들을 괴롭혀야 된다. 그가 못 살게 굶으로 “나는 히브리 사람이 아니야, 나는 애굽 사람이야.” 라는 것을 드러냈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안 했다. 모세는 내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나의 민족 형제를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통 받고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가 살고 있는 마을에 간다. 딱 가보니까 애굽 사람이 자신의 형제를 때리면서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화가 나서 그걸 말리면서 애굽 사람을 쳤는데 죽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모래에 숨겼다. 그때 모세의 마음이 어땠을까? 뿌듯했을 것이다.
 
내가 왕의 권세를 가지고 내가 나의 민족을 도왔다. 아마 어깨 힘이 가득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의기양양해서 자신의 형제들을 만나고 가면 자신을 박수치고 환영해 줄줄 알았다. 그런데 가보니까 이제는 나의 형제들끼리 유대인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힘을 합쳐도 힘들 판에 우리가 서로 싸우면 어떻게 하냐고 말리는 가운데 그렇게 말한다. “어, 네가 우리의 왕 노릇하려고 하냐? 이제는 판단 자가 되어서 왕 노릇을 하네.” 그래서 모세를 고발해 버린다. 저자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고....
 
그래서 모세가 40년의 광야, 도망자의 인생을 시작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내가 도와주었던 나의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한다. 그랬더니 40년의 광야생활을 하면서 모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후회, 후회의 시간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그때에 매를 맞는 형제를 도와주지 말았어야 했어. 매를 맞아 죽도록 내가 가만히 놔두어야 하는데, 내가 그들에게 형제가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들을 도와주어서 지금 이게 뭐냐? 배신당하고 내가 그들을 돕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 후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고통 받고 있는 너의 형제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의 손에서 구하라.” 이 말을 들었을 때 모세가 어땠을까? “하나님, 나를 아신다면서요? 나를 지으셨다면서요? 제가 젊었을 때 40살의 나이에 힘이 있었을 때, 제가 그 일을 하려고 제가 그들의 힘이 되어주려고 했는데요.” “광야생활이 배신입니다. 광야생활 40년을 고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보고 그 일을 하라구요? 하나님,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세요. 저는 안합니다. 저는 절대로 안합니다. 보낼만한 보내세요.” 지금 모세의 심정이었다.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라고 한다. 이 모세의 심정이 우리 모두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담겨져 있다. 열심히 신앙생활과 기도와 봉사와 선교도 훈련도 받았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의 가정만은 지켜주세요. 우리 부모님의 건강과 자녀를 보호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했고, 열심히 봉사했고, 수고의 헌신을 했건만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이다. 마음이 어떤가? ‘하나님 저는 다시는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헌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낼만한 사람 시킬만한 사람을 시키세요. 저는 절대로 다시는 예배는 드려도 기도도, 봉사도, 헌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도 많이 만나게 된다.

 
‘하나님, 저는 안 해요.’ 혹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있지는 않은가? 저도 이 모세와 같이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어둠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저의 아버님은 개척교회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저는 어린 시절에 개척교회가 1-2년 지나고 나면 개척교회가 아닌 줄 알았는데 저의 아버지가 섬겼던 교회는 계속 개척교회였다. 그렇다보니까 경제적으로 이렇게 넉넉하지가 않았다. 초등학교때 제 작은 마음이 뭐냐면, 일 년치 육성회비를 한꺼번에 내보는 게 제 소원이었다.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육성회비가 5860원이었다. 항상 육성회비 안 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기도 했다.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님은 왜그리 자식은 많은지, 저의 형제가 일곱이다. 누나가 7명에 아들 저 막내 하나이다. ㅎ그러니까 여섯 번째 누나를 낳고 나서 누나를 안고 기도는 안 해주시고 “하나님, 나도 아들 주세요. 아들 주시면 목사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제 허락도 없이 저를 드려서 제가 이렇게 목사로 와 있다. ㅎㅎㅎ. 뭐 그래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목회자의 길이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잘 지내왔다. 어려움이 굳이 없었다.
 
‘하나님, 저는 안 해요.’ 혹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있지는 않은가? 저도 이 모세와 같이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어둠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저의 아버님은 개척교회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나셨다. 저는 어린 시절에 개척교회가 1-2년 지나고 나면 개척교회가 아닌 줄 알았는데 저의 아버지가 섬겼던 교회는 계속 개척교회였다. 그렇다보니까 경제적으로 이렇게 넉넉하지가 않았다. 초등학교때 제 작은 마음이 뭐냐면, 일 년치 육성회비를 한꺼번에 내보는 게 제 소원이었다. 그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육성회비가 5860원이었다. 항상 육성회비 안 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기도 했다.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님은 왜그리 자식은 많은지, 저의 형제가 일곱이다. 누나가 7명에 아들 저 막내 하나이다. ㅎ그러니까 여섯 번째 누나를 낳고 나서 누나를 안고 기도는 안 해주시고 “하나님, 나도 아들 주세요. 아들 주시면 목사로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다. 제 허락도 없이 저를 드려서 제가 이렇게 목사로 와 있다. ㅎㅎㅎ. 뭐 그래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아도 목회자의 길이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잘 지내왔다. 어려움이 굳이 없었다.
 
제가 총신대학을 딱 들어가고 나서, 이제 입학소식을 듣고 등록하는 시점에서 얼마 안 남기고 저희 아버지께서 고향을 내려가시는 길에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어머니가 전화가 아버지가 안 보이신다며, 전화가 왔다. “그래요? 아버지 장난 잘 치시니까 출발할 시간에 나타나실 거 에요.” 라고 하고 기다렸는데, 출발시간이 30분이 지났는데도 또 아버지가 안 보이신다고 하셨다. 저희 어머니가 고속버스 온 전체를 찾아나 다니셨다. 이곳에 인상착의를 물어도 모른다고 한다. 화장실에 술 취한 사람이 한 분 누워있긴 한데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세 시간, 네 시간이 흘렀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어머니 머릿속에 술 취한 사람이 누군가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 화장실에 갔더니, 외투를 벗어놓고 거기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신 것이다. 4시간 만에 발견되었다. 강남 성모병원에 갔지만 수술실이 없었고,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바로 수술을 못하고 그 다음날 새벽에 수술을 했는데, 수술을 앞두고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수술을 해도 살 가망은 10%도 안 된다고 했다. 살아도 말씀은 못하시고, 한 쪽 몸은 못쓰시고, 생각도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했다. 그 수술을 하셨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오전에 다녀오시면 그 다음 오후 시간에 제가 이제 들어갔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모습을 보면서 제가 아버지 앞에 했던 말은 “저 목사 안합니다. 목회 안합니다. 아버지를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저 목사 안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하고 나왔다. 밖에 기다렸던 누님이 아버지 어떠시니? 제가 아버지 형편을 보지 않았다. 제 할 말만 하고 나왔다. 누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누나, 나 학교 등록 안 해, 나 목회자 안 해,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하나님, 나 믿을 수 없어. 나 안 해”라고 했다. 누님이 듣고 있다가 너무나 속상했던지, “너 아빠가 신학대학 갔다고 얼마나 기뻐하셨는데, 깨어나셔서 대혁아, 너 열심히 공부하고 있니?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말씀드릴래?”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까 그래서 억지로 대학을 등록하고 다녔다. 그러고 나서 오랜 시간 중환자실에 계시고 재활병동에 계시면서 5-6개월 계시다가 퇴원을 하셨는데, 그러면서 저희 아버지의 통장을 정리하다 보니까 마이너스 통장이 4개나 발견되었다.
 
개척교회 목사님은 다 마찬가지이다. 먼저 현찰을 받아서 교회 물건을 사고 있을 법한 그 물건이 다 교회 에어컨, 의자, 컴퓨터 등을 바꾼 것이다. 교회는 우리와 상관없다고 그것을 감당해 주지 않았다. 더 이상 말씀이 어버버 하시고 생각이 짧아져서 목회를 하실 수 없어서 퇴직금을 가지고 어머니가 사셔야 하는데, 치료비로 모든 퇴직금이 나갔기 때문에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제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교회에 대한 상처가,,, 하루는 이 뇌출혈로 쓰러지신 분은 환경이 바뀌면 안 된다고 저희 어머니가 운동을 시키신다고 큰 벨트를 사다가 아버지를 그 안에 놓고 이렇게 운동을 하시는데, 하루는 장로님이 찾아오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모님, 목사님 운동을 안 하시면 안 되냐고, 목사님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말씀도 못하시고 저렇게 되셨는데 덕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운동을 안 하시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저희 어머니 은평구에 사셨다가 가장 끝 방향인 도봉구로 바로 이사를 하셨다. 제가 이런 것을 봤으니 제가 이 목회를 하고 싶었겠는가? 그래도 목회자 아들로 갖고 있는 십계명 외 열 한 번째 갖고 있는 것이 ‘들키지 말자.’ 열심히 봉사해도 항상 들키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까 제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학교는 다니지만, 제가 친구 만날 때 제가 했던 것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봐도,,, 뻔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살았다. 그것도 그런데 하나님은 저에게 다가오셨다. 내적 치료를 해주셨다. 저를 만나주신 것이다. 저에게 다가오셨다. 남들은 하나님을 만나면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고 감격이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하나님께 이야기 한 것, “하나님, 왜 그러신 거에요? 하나님, 왜 우리 아버지 왜 그렇게 만드신 거 에요? 우리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 왜 그러신 것이냐?” 라고 얼마나 하나님께 따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시간이 꽤 흘렀다. 제 주변에 하나님께서 무너지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가 더 문제이다. 그때부터 제 기도가 바뀌었다. “하나님, 나 이제 어떡해요?” 목회자의 서원기도로 태어나서 그 길만이 다 인줄 알았는데, 지난 몇 년 동안 제가 하나님 원망하고 저주하고 살았는데, “이제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다. 아버지를 멘토 삼았는데 지금은 저렇게 누워계시고 아무것도 못하시는데 “이제는 하나님 어떡해요?”라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니 너는 내게 와 배우라 내가 너를 가르치리라.” “너는 내게 와 배우라 내가 너를 가르치리라.” 하신다. 이 말씀이 제 가슴에 확 오셨다. 그 때 기도했다. “주님, 이제는 제가 어떤 인생이고 어떤 일을 경험했던지 간에 저는 날마다 하나님께 엎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주님께 나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저를 가르쳐 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제가 하나님 앞에 날마다 엎드리겠습니다.” 그런 기도와 함께 저를 신비롭게 저의 삶을 이끌어 가셨다.
 
제 능력과 실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셨다. 오륜교회에 사역자로 사역을 하게 하시고 꿈은 있었는데 어떻게 막막하게 생각만이 있었는데 갑자기 미국에 남가주 사랑의교회에서 저를 불러주시는 것이다. 함께 사역하자고 하신다.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2013년도에는 아버지가 인생 가운데 아픔의 시간 가운데 계실 때, 사랑의빛선교교회에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지금 안아주심의 본당 현장의 교회에서 설교 하고 있다는 것에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있는지, 내가 내 힘으로 해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맡겼더니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열어 가시는데, 이렇게 되어 지게 하시는 역사가 있을까? 늘 감사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빛선교교회에 부임(赴任)할 때는 저희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이셨다. 그렇게 쓰러지고 나셔서 20년을 투병하시고 사셨다. 마지막을 침상에 누우셔서 아무것도 기력 없이 사실 때에 사랑의빛선교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되었다는 이야기를 저희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누워계신 채로 힘이 없는데도 손을 들더니 박수를 이렇게 치시더라는 것이다. 어머니 옆에 계시는데 아버지가 나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어머니보고 갔다 오라고 손짓 하신 것이다. “당신 아픈데 어떻게 가”라고 했다고 하신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제가 청빙 후에 2주 만에 하나님이 아버지를 부르셨다. 지나왔던 인생이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의 시간이었지만,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을 사니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가기 시작하셨다.
 
여러분, 저에게만 이런 일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줄게 다시 한 번 시작하자. “내가 너에게 준 이 지팡이를 가지고 사명의 길에 서서 그 일을 감당하지 않을래?” 우리 주님께서 손 내밀어 주실 때, 우리가 그 손 붙잡으면 산다. 그 손 붙잡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는 못해요. 나는 안 해요.” 하는 그 모세를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 시키셨을까?

III. 세 번째-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를 준비하였다” 하십니다.
 
*출애굽기 3:10-11,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 이야기를 들었던 모세가 이렇게 반문한다. 11절에 보면, 내가 누구이게, Why me?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왜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까?” 한다.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궁에 있는 애굽 사람들이 바로를 만나게 해주겠는가? 당시 애굽은 권한과 권력을 가진 나라이다. 당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로다.” 의 신앙의 고백을 했던 것은 그의 삼촌 모르드게가 하만의 누명을 쓰고 죽게 되었던 것을 전달하면서 네가 사랑받는 왕비이니까, “네가 왕에게 가서 하만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고 네가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냐?”고,. “우리 민족을 살려 달라고 이야기 하면 안 되겠냐”고 하라고 물을 때에 에스더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왕비라고 할지라도 왕이 저를 부르지 않는데 왕을 만나러 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믿음의 고백으로 이 표현을 한다. 그러면, 양치기였던 모세가 “내가 바로를 만나겠소.” 하면 그 문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왕에게 전하세요.. 모세가 왔다고”, 그러면 바로가 모세가 왔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을 했겠는가? “누가 왔다고? 어린 시절 함께 지낸 그 모세가 왔다고?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고? 그 모세가 왔다고? 얼른 들어오라.”고 할 것이다. 왕을 무사통과할 사람은 모세 밖에 없었다.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로 왕에게 전해야 하는데 거기는 언어가 달랐는데, 그 애굽에서 쓰는 말과 그 지혜와 명철함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모세 밖에 없었다.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서 누구도 옴짝달싹을 못하고 지금 살고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데, 포로가 되어서 있는데 유일하게 유대인 사람 누구밖에 없는가? 모세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미지의 땅, 그 광야로 인도해야 하는 한 번도 애굽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했던 그 이백만의 백성들이 애굽이 밖에 무엇이 있고 그 광야에 뭐가 있는지 모를 때, 유일하게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은 모세 밖에 없었다.
 
여러분, 모세를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셨다. 40년의 광야 시간들이 잊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들이 내 인생에 버려진 시간 같지만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큰일을 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의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말이 있다. ‘인생의 굴곡은 은혜의 저장소’이다. 우리는 살면서 굴곡 없는 인생은 없다. 다리미로 필 수만 있다면 그 굴곡을 피고 싶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그 굴곡은 뭐가 되냐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면 그 길은 평지가 될 수 있고 그 채워진 그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복되고 귀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게 될 줄 믿는다. 여러분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낸다 할지라도 어떤 어려움의 시간을 보낼지라도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심을 믿고 날마다 우리를 복되게 쓰실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누구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이다. 저와 여러분은 늘 실패하고 넘어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늘 가다가와서 손을 내밀어 주신다. “다시 한 번 믿고 나를 의지하고 시작하지 않을래?” 하신다. 그 손을 붙들면 다시 회복의 길에 설 줄 믿는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인생의 어떤 어려움과 형편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복되고 귀하게 쓰실 그날을 소망하며 날마다 회복의 길에 서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요약
우리가 세상이 던져주는 말과 세상이 무너뜨리는 말 가운데 우리가 늘 무가치 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저는 못합니다. 저는 안 돼요” 라고 하면서 실패 가운데서 살고 있는 왜 나만 이러하냐고 원망하며 사는 우릴 용서하여 주시길 기도하며 우리에게 주신 회복으로 날마다 존귀한 자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여전히 끝나지 않은 광야의 길이지만 모든 것이 은혜의 저장소가 되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게 되는 도구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모세가 자신은 말에 능치 못하며 적당한 사람이 아니니 보낼 만 한 자를 보내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와 늘 함께하여 부족함을 채우겠다고 위로하시며 그를 권면하셨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다만 그 힘을 의지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내와 자비로써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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