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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특별새벽예배(주후 2022년 7월 23일) 제목: "귀가 아닌 눈으로" 말씀: 욥기 38:1~5 대표기도: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최우성 목사님 초빙(미국 보스턴 워터타운 에반젤리컬 교회) ㅡㅡㅡㅡㅡㅡㅡ *욥기 38:1~5,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 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여러분 반갑다. 이 귀한 예배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사랑의교회 식구들 여러분들을 다시 뵙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들 드린다. 우리 심령 가운데 역사하실 성령님께 감사드린다. 아멘!!!. 우리 가운데 고통과 고난을 겪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아무런 도움의 손길 없이 앞길이 막막할 때 ‘정말 끝이구나!, 이제는 정말 되돌아갈 수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왜 나는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어떤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건강 때문에 가정에 불화로 인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파도같이 밀어 닥칠 때, 하늘을 원망하신 적이 있는가?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Why me?’ 욥이 그랬다. 흔히들 욥기 서를 보면 욥의 인내와 믿음을 배우라고 한다. 고난을 인내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여러분 그런데 과연 그런가? 욥기 서 1장과 2장만 읽으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많은 분들이 첫 두 장과 마지막 장을 읽고 욥기 서를 다 안다고 말하고 있다. 흔히 마지막 장, 42장에 가서는 욥기서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욥이 마지막에는 두 배로 축복을 받는다. ‘욥이 인내하니까 결국 축복 받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도 무조건 참아, 무조건 참으면 돼, 인내 하면 돼, 기도하면 되는데, 그럼 축복해 주실 거야!’ 여러분, 이게 과연 욥의 메시지인가? 저는 욥기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38장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38장에서 41장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시간이 없어서 다 읽지는 못했지만 언제 시간이 되면 한 번 묵상해 보시기 바란다. 여러분, 욥의 인생은 출발은 너무 좋았다. 1장에서 보면 그에게는 부와 영성이 있었다. 여러분 얼마나 부러운 콤비인가? 부와 영성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은 요즘 흔하지 않다. 그는 부자였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아도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 물질의 축복, 만 마리 넘는 가축을 소유했다. 그리고 종도 수없이 많았다. 사업의 축복, 자녀의 축복, 아들이 일곱이고 딸이 셋이었다. 게다가 경건한 한 가장의 자리를 소홀이 하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행여나 자식들이 딴 길로 셀까봐 매일 새벽기도 제단을 쌓았다. 남들이 원하는 부와 건강과 가정과 자녀와 명예와 거기다 영성까지 있는데, 여러분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욥의 삶에 엄청난 고통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소유했던 모든 재산, 사업, 주식과 연금과 노후 퇴직금이 다 날아갔다. 재난으로 인해 열 지식을 다 잃었다. 여러분 물질을 잃는 것은 어느 정도 다 감안이 되는데, 열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하루아침에 잃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하루아침에 다 잃었다. 하지만 욥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1장 20절에 보면, 땅에 엎드려 예배한다고 나와 있다.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솔직히 그 상황에서 예배가 나오는가?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라고 고백한다. 2장에서는 피부병에 걸려 아내에게 구박 받는다.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한다. 욥이 뭐라고 하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리석게 말하지 말라고 오히려 꾸짖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부와 명예도 주시지만 고통과 고난도, 가난도 주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고백인가? 재미있는 사실은 욥은 자신이 왜 이러한 엄청난 고통을 겪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사탄과 함께 그의 1장에 보니까 욥에 대한 자랑을 하신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 같은 자가 이 세상에 없어.” 라고 말씀하신다. 처음에는 저도 욥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부러워했는데, ‘야,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나?’ 하는 생각, 계속 읽다보니까 그렇게 꼭 부럽지만은 않았다. 사탄이 이간질 한다. 욥이 하나님을 따른 것은 그가 소유한 물질 축복, 인생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탄과 딜을 하는 것이다. 생명만 놔두고 앗아가라, 그래도 욥은 끄떡없다. 여러분, 욥을 향한 하나님의 자신감이 왜 이렇게 넘치신다고 생각하는가? 과연 그가 인내를 잘해서? 그의 믿음이 좋아서? 여러분 욥의 인내와 신앙고백도 얼마가지 않는다. 3장에 보니까 욥이 죽고 싶다고 고백한다.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 왜 자기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자기가 잘못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얼마나 납득이 안 가는 일이 생기고 있는가? 욥의 고통을 듣고 그의 세 친구가 그를 찾아온다. 결국 위로보다는 오히려 궁지에 넣고 꾸짖는다. 그들이 말이 얼마나 많은지 그 말씀에 4-31장까지의 내용이다. 이 친구들이 말만 적았어도 욥기서는 얼마나 짧아졌겠는가? 세 친구가 번갈아 가면서 욥을 쪼아대는데, 4-31장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 내용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시고 악인은 저주하신다. 욥을 계속 심문한다. 욥은 분명히 숨기고 있는 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잘 생각해봐”, “네가 잘못한 것이 있을 거야, 반드시 있을 거야,” 욥의 딜레마는 무엇인가? 난 이 고통을 치러야 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이 고난을 받을 이유도 없다는데 있다.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의인을 축복하시고 악인을 저주하신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인가? 적용이 잘못되었다. 이 친구들은 무작정 상황판단이 없이 마치 욥의 이유와 해답을 찾으려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며 판단을 내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한 번 따라 읽어보라. “인간의 고통은 단순히 인간의 논리와 이해로만 풀리지 않는다. 2세 친구들 때문에 욥은 더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처음에는 죽고 싶다고 했다. 이제 점점 욥이 태도가 바뀐다.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든다. 저는 이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 잘못한 것이 없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 정당한 재판을 요구한다. 1장과 2장에서 봤던 욥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베 번째 친구, 가장 나이가 적은 엘리후 라는 친구가 찾아온다. 이 친구 역시 말이 적지 않다. 그게 32장과 37장까지의 내용이다. 여러분, 그래서 말 많은 친구를 두면 피곤하다. 말이 어찌나 많은지 4장에서 32장까지 자기네들끼리 말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친구 엘리후가 와서 그의 말을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다. “욥, 자네가 무지하다고 주장하는데 지금 하나님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를 보게 이것이 과연 무지한 사람의 행동인가?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반문하겠느냐? 하나님은 의인에게 이유 없이 고통을 허락 하지 않으시네, 반드시 우리가 모르는 더 높은 이유와 목적이 있을 거야,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야,”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 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나님은 어떤 고통과 고난을 우리의 삶에 그냥 허용하지 않으신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무슨 말인가? 욥은 그런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여러분 바른 말도 적절한 시기에 해야 약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주변에 혹시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계시는가? 함께 울어주면 된다. 함께 울어주어야 한다.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기도해 주라. 그냥 들어주면 된다. 자꾸 답을 주려고 하지 말라. 자꾸 아는 척 하지 말고, 자꾸 조언하지 말라. 같이 울어주고 함께해 주고 기도해 주어라. 여러분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한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욥기 서에서 누가 가장 많이 듣고 있는가? 욥인가? 욥의 친구들인가? 하나님이시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3장부터 37장까지 들으신다. 하나님이 잠잠하고 침묵하고 계신다. 침묵하고 계신다고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께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기억하라. 하나님의 침묵은 여러분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다.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를 귀를 기울이며 들으신다. 믿는가? 자 욥이 그동안 하나님께 무엇을 주장했는가? “하나님, 정당한 재판을 요구한다. 저는 이런 고통을 받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으니, 하나님, 공정한 재판을 주십시오.” 그게 37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38장부터 오늘 본문을 읽은 것 같이 답변하기 시작하신다. 여러분 세 구절을 보자. *욥기 38:1~3,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나님이 그러신다. 반문하신다. 너 말 다했니? 욥아, -Are you gone taking Job? 여러분 제가 욥이었다면 벌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하나님의 답변을 보니 욥에 대한 고통에 대해서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신다. “그래, 내가 지나쳤지, 1장에서 내가 사탄에서 내가 딜을 했어, 조금만 참아, 내가 곧 42장에 가서 축복해 줄 거야, 내가 깜박했구나!” 그러지 않으신다. “욥아, 할 말 다했니? 네가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는데, 네가 나를 의심하는데 이젠 내가 너에게 물을 테니 한 번 사나이 같이 대답을 해보라”는 것이다. 여러분 그 내용이 굉장히 흥미롭다. 창조론을 강의 하신다. 38장 4-5절에 보면, *욥기 38:4-5,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 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욥아, 내가 이 우주를 창조할 때, 네가 있었니? 하나님이 묻고 계신다. “육지와 바다와 해와 달, 눈과 번개와 천둥, 빛과 구름, 그 모든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으며 네가 하늘에 한 줌의 비를 보낼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39장에 가서 계속 추궁하신다. 내가 산 염소와 암사슴의 새끼를 언제 낳는지 아느냐? 들 나귀, 들소, 타조, 메뚜기, 말, 매, 독수리, 별의 벌 동물이 다 나온다. 소위 39장은 동물원 장이다. 여러분 이것을 언급하는 하나님의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창조한, 나의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너는 어찌 나의 생각과 나의 뜻을 의심하고 있느냐? 욥아, 네가 정녕 나의 공의와 사랑을 의심하기 전에 우리 한 번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자,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이냐?” 하나님이 묻고 계신다. Who are my to you job? -정말 네 말대로 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 번 묻고 싶다고 하신다. 네 고통의 문제를 다르기 전에 네가 다루고 있는 나 하나님, 여호와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40장 후반과 41장에 가서는 육지와 바다에 사는 거대한 괴물 같은 동물들이 나온다. “내가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네가 불만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욥을 심문하는데 이 찍소리도 못한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다가 왜 이런 고통과 아픔으로 가득한지, 정말 살기 힘들다고 호소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을 원망한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나를 되돌아 보다는 얼마나 나의 삶을 정당화 시키고 합리화 시키려고 했는가? “하나님, 저에게 관심이나 있는가? 하나님 정말 불공평하세요. 제 기도가 들리시나요? 왜 이리 응답이 늦으십니까? 왜 하필 접니까? 하나님!” 그러한 욥을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창세기 1장으로 데리고 가신다. 창조론을 거론하신다.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하시는 것 같지 않은가? 왜 우리 하나님은 창세기 1장 창조론을 언급하시는 것인가? 왜 그런지 아는가? 우리가 너무 우리의 고통과 고난에 사로잡혀 있을 때, 기쁨이 사라진다. 안 그런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해진다. 모든 게 어두워 보이고 우울하다. 내가 믿고 알아왔던 하나님에 대한 시선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인생의 고통과 역경에 치우치다보면 우리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잊을 때가 많다. 인간의 시각에서 보면 욥의 문제는 고난처럼 보인다. 고난 밖에 안 보인다. 내가 겪는 고난의 이유를 찾으려 한다. 합리화 하려들고 정당화시키려 한다.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고통과 고난이 나의 생각으로 이해가 되는가? 이 세상의 그 해답이 있는가? 얼마 전에 교인의 손주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3개월 된 간난 아기였는데,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숨이 멈추어져 있다고 했다. 장지에서 엄마가 “Why, Why?” 그러면서 게속 우는데, 목사로서 뭐라고 위로를 할지, 그냥 안아주었다. 같이 울었다. 고통의 해답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서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저도 모른다. 아는 척 하기도 싫다. 고통의 해답은 오직 한 곳이다. 오직 한 분,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그 해답이 있다. 그분 안에서만 해결이 가능하다. 마지막 42장에 보니까 하나님이 욥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여러분, 얼마나 걸리는지 아는가? 37장이나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친구들과 욥이 계속 이야기 하는데 42장에 가서 하나님이 욥의 인생을 해결시켜 주는데 반장도 안 걸린다. 몇 구절에 끝난다. 읽어보신 분들은 알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의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 제가 설교하기 전에 물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신감이 왜 그리 넘쳤는가? 욥이 잘나서? 그의 믿음이 좋아서? 그가 인내를 잘해서?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 지켜 주신다. 여러분의 인생을 누가 책임져 주신다고? 바로 하나님께서 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아버지께서, 우리 주님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이다. 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욥의 문제는 고난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욥의 궁극적인 욥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욥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성경의 하나님이 달랐다는 것이다. 욥의 문제는 하나님을 자기중심 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이 가지고 있던 하나님을 바라보던 자기중심 적인 이해와 시각을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욥이 가졌던 자기중심적인 시각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시각으로 바꾸어 놓으신다. 고난의 쓰나미가 오기 전에 욥이 가졌던, 욥은 자신이 크게 죄를 짓지 않는 한 의롭고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자신의 신앙과 경험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만을 보고 있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한정된 지식과 경험과 기대치로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을 그린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아프면 치유해 주시길 기대한다. 어떤 어려운 고통의 터널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길 기대한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이렇게 반드시 응답해 주셔야만 돼”, 여러분, 하나님께 간구한다고 하면서 명령하듯 요구한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협박한다. “주님, 이렇게 응답 안 해주시면 이렇게 안 해주시면, 아시죠?” 그리고 내가 기대치에 못하면 실망한다. 시험 받는다. 하나님을 원망한다. 교회를 원망한다. 때론 떠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해결사가 아니다. 물론 도우신다. 역사하신다. 치유하신다. 고쳐주신다. 우리를 건져주신다. 구원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이 가졌던 하나님의 피상적이고 좁은 자기중심 적이었던 이에 도전하시는 것이다. 나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 하나님이 아니야, 내가 이해하고 있는 단순히 자라면 축복하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그 수준의 하나님이 아니야’, 여러분,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이것이다. “내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어떤 인생의 풍랑이 몰아쳐도 나의 절대적인 주권과 변함없는 나의 사랑을 믿을 수 있겠니? 욥아, 내가 볼 때 비록 불합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보여도, 이해가 안 되고 불공평해 보여도, 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나를 신뢰하고 믿고 끝까지 따라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욥기서 38장에서 41장에 하나님을 여러분이 제대로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욥기 42:5,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여러분, 전에는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본다는 것이다. 여러분 차이를 아는가? 욥이 예배를 안 드렸는가? 새벽 기도를 안 했는가? 욥이 가정 예배를 안 드렸는가? 10년 20년 그런데 그 수십 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다는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여러분 귀로 들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피상적으로 지식으로만 알았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어떠한가? 예배를 드릴 때, 말씀을 묵상할 때, 기도할 때, 귀로만 듣는 성도들이 많다. 눈으로 살아계신 주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욥은 자신이 믿고 따랐던 하나님의 모습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하나님의 모습이었는지 그는 깨닫고 회개를 하고 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제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오니 정말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사랑하는 그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어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가?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만 듣고 있는가? 아니면 눈으로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매일 매일 만나고 있는가? 적용 두 가지를 하겠다. 첫 번째, 하나님의 올바른 시각과 이해 없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우리 하나님을 여러분의 생각과 이해의 틀, 원하는 틀 안에 자꾸 끼워 맞추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이 참 단순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 하나님의 모습이 자기중심적이고 깊이가 없이 편협한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의 신앙은 그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욥기서 38장에서 41장에 나오는 하나님을 우리가 정녕 만난다면,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줄 믿는다. 두 번째,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선하심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겪는 그 어떤 고통도 헛되지 않다. -여러분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을 비하하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승화시키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믿는 것이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미국 맨하탄에서 사역하시던 팀 켈러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You don’t realize Jesus is all you need until Jesus is all you have. -내가 의지할 곳이 주님 밖에 없을 때에야 비로소 주님만이 나의 삶에 전부인 것을 깨닫게 된다. -팀 켈러 목사님- 여러분, 주님 외에 의지할 곳이 있는가? 의지 하는 것들이 있는가? 아멘인가? 하나님이 욥으로부터 요구하시는 것이다. “욥아, 내가 너의 삶에 전부냐? Job am I really everything. ”욥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도 심지어 네 식구들까지도 정말 나만이 너의 삶에 전부이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만이 전부인가? 2013년 9월 22일, 파키스탄에 패셔월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ALLTHING’s 교회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9월 22일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이슬람 자살 테러범이 들이 닥쳤다. 스스로 폭탄 조기를 입고 자폭했다. 그로 인해 12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70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 중에 37명이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예배당에 성도들의 시체와 피로 가득했다. 이들은 이 마을에서 왕따 당하는 소수 기독교인들이었다. 파키스탄은 아직도 이슬람국가이다. 대다수의 성도들이 청소부이거나 쓰레기장에서 청소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무슬렘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소수 공동체였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이나 재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교인들은 그 테러가 일어난 다음 날 본당에 모여서 시체를 치우기 시작한다. 주일학교에서 사용했던 성경과 교제들, 문구류 등, 본인들의 본업처럼 물건들을 분리하며 사망한 어린 아이들의 신고 있던 신발을 모아서 닦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신발은 닦으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피로 물든 벽을 닦기 시작한다. 그들은 성도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오열하며 피로 물든 벽을 닦았다. 벽을 다 깨끗이 닦고 긴 의자를 나열하며 오열했던 목소리보다 하나님을 더 큰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럼 왜 그들이 찬양을 했는가? 그 상황에서 찬양이 나오는가? 죽어간 시체를 바라보면서 찬양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교회가 창립된 1883년, 그들은 이 무슬렘 도시에서, 이 마을에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다. 이 교회가 1883년 창립된 이후에 끝까지 신실한 교회로 남아있어야 된다. 이것으로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끝가지 피 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하필 그날, 테러범을 막아주시지 않고 그리고 예배 한 가운데 그런 끔찍한 테러가 이루어지게 두셨을까? 하나님이 잠시 한 눈 파셨는가?납득이 안 간다. 이유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를 영원히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침에 빛과 밤에 달과 별을 띄우시며 참새 한 마리도 그 분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고 여러분의 머리카락 수도 세시는 그 하나님,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얼마나 우리가 못 믿으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의 머리카락 수도 센다. 나좀 믿어라. .최 목사, 네 머리카락 수도 다 안다.” 그 전지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그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 전부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인생의 마지막에 선 욥은 그의 삶의 전부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귀로 아닌 눈으로 만났다. 만약 우리가 그날 욥이 봤던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연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욥이 봤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따른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바뀌는가? 그날 욥이 봤던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여러분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심을 믿는다면, 당신의 제자들을 향해서 이 세상에 너희가 환난을 당하여도 담대 하라. 내가 이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 그 주님, 바로 그 주님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이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고 책임지시고 인도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 그분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만난다면 과연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우리의 삶 가운데 찾아오시는 그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귀로만이 아닌 눈으로 직접 만나는 역사가 이 아참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하나님을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꿰 맞추며 살았던 나를 깨닫고, 주님을 원망했던 나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더 이상 귀로 듣지 말고 눈으로 만나는 것을 원해야 한다. 눈으로 주를 뵈는 실체가 있는 신앙을 가지고 내 삶의 모든 주권을 날마다 내어 드리는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육체를 갖지 않은 순수한 영이시지만, 인간과 유사한 모습과 품성으로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타락한 지금도 하나님의 성품이 부패한 채 남아 있다. 이에 제한된 인간의 성품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근심(창6:6), 진노(출22:24), 질투(민25:11), 맹세(사62:8) 등의 표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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