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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7월 10일).
제목: "온유한 자의 복은 왜 하필 땅의 기업일까?"
말씀: 마태복음 5:5, 시편 37:7~11
대표기도: 김은석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초빙(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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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시편 37:7~11,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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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팔복 중에 가장 듣기에 솔깃한 복이 무엇인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가 아닌가? 한국인들은 땅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흥분하는데,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복이니까 가장 매력적인 복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논란이 많은 복도 ‘온유한 자의 복’이다. 예를 들어 다른 복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배부를 것이다. 그 다음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러한 복들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주관적이라 확인하기 어렵다. ‘천국이 너희 것이요’ 라든지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클 것이다.’라든지, 하는 복도 미래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검증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현실에서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주변을 보면 검증이 가능한데 솔직하게 온유한 자가 복을 받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논란이 많은 복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온유’란, 성격과 태도 따위가 온유하고 부드러움, 이라고 정의 되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변을 돌아보면 과연 성격과 태도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있는가? 오히려 땅을 차지하려면 좀 대담해야 하고 조금 무모해야 되지 않은가? 주변을 돌아보면 주식도 하고 비트코인도 하고 무리하게 빚을 내서 영까지 끌어와야 아파트 한 채라도 얻는 것 같지 않는가?
 
성경을 보면 땅을 정복한 여호수아나, 예루살렘을 정복한 다윗은 대담한 사람이고 용감한 사람인 게 분명하다. 이런 점을 염두 해 두고 마태복음 5장 5절을 들여다보면, 질문이 세 개가 생긴다.

*마태복음 5: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온유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가 헬라어나 히브리어로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온유의 개념이 아닐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란 무슨 의미인가? 성경에서 온유하다. 라고 지목한 인물은 딱 두 명이다. 한 분은 모세, 한 분은 예수님이다. 모세는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모세는 어떤 점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인가?
두 번째는 온유한 사람이 받는 복은 지위나 명예가 아니고 왜 하필 땅인가?
세 번째는 온유한 사람이 받는 땅은 무엇을 의미한가? 어떤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받는다는 것이 현실성이 없으니까 천국으로 영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의 복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복은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이다. 그렇다면 온유한 자가 받는 땅은 물질적인 면에서는 어떤 의미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어떤 의미인가? 세 가지 질문을 염두 해 두고 주님의 말씀을 함께 해석해 가는 가운데 온유한 자의 복을 깨닫고 갈망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무엇인가? 온유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하는 곳이 민수기 12장 3절이다.
 
*민수기 12:3,
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의 삶을 보면 온유하지 않다. 애굽에서 사람을 때려죽이지 않나, 바로 왕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를 않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니까 하나님이 반석을 한 번만 치라고 했는데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이나 치는 바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모세는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 태도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존재가 아니다. 도대체 모세가 온유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온유함은 히브리어 단어를 살펴보면 히브리어로 ‘아나브’이다. 이 아나브라는 단어가 기본음에는 ‘머리를 숙이다.’ 전쟁에 패해서 머리를 숙이든, 전쟁에서 고난으로 압박으로 고개를 떨구든 머리를 숙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구약에서 이 아나브라는 단어가 25번이 나오는데, 7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한다. 겸손한자로 8번, 가난한 자가 총 6번, 온유한 자가 4번, 곤고한 자가 2번, 빈곤한 자, 가련한 자, 연약한 자, 한 번씩 쓰였다.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지만 핵심은 분명하다.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억압을 받거나 누군가의 핍박을 받거나 여러 가지 환경 상 어려움이 많은데 아무런 힘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단어로 쓰이는 단어인데 문맥상 해석하기가 어려우니까 이렇게 7가지로 성경에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이며, ‘온유한 자’라고 하는 번역은 그중에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아나브라는 단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태도를 가리킨다. 해석자들은 ‘온유한 자’라고 하기 보다는 신뢰하는 자, 겸손한 자로 번역하는 게 더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 설교시간에 온유한자와 겸손한 자를 섞어서 사용하겠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의미는 인간을 대할 때, 온화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겸손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신뢰하고 겸손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볼 에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실이다. 그래서 온유하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이다. 이것만 명심하라. 그렇다면 왜 모세가 이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인가? 모세를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곤고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이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만나가 지겹다고, 광야에서 고기를 내놓으라고 한다. 모세가 무슨 수로 광야에서 고기를 내어 줄 수 있는가? 울면서 불평하는 백성들을 놓고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한 번 들어보라.

*민수기 11:11-15,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 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낳았나요? 내가 낳지도 않은 백성을 내 아버지처럼 품고 가는 게 너무 힘들다고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다. 온유해 보이는가? 하나님께 대들고 있다. 그러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나인 미리암과 형인 아론이 비방을 시작한다. 12:1-2절에 보면
 
*민수기 12:1-2,
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구스 여자가 모세의 아내 십보라를 가르키느냐, 아니면 다른 여자를 가르키느냐, 논란이 있는데 저는 모세의 아내는 십보라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많이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이름 두 개가 있다. 모세의 아내는 미디안 여인인데, 하박국에 보면 구산의 장막, 미디안이 나와서 구스가 미디안과 같은 지명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저는 모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인데 다른 여자를 첩으로 얻었을 가능성 보다는 구스여인이 미디안 여인이고 아내 십보라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렇게 안 믿어도 괜찮다. 미리암이 이방여인인데 모세가 아내가 된 것이 이 미리암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모세의 누나인데 갑자기 이방 여인이 들어와서 자기 사랑하는 동생의 아내가 되었으니까 이 여인들의 세계에서 뒤로 밀려난 것 같다. 자기가 앞장 서면은 되는데 안서고 오빠인 아론을 부추겨가지고 이제 구스의 여인을 취한 것이 문제인데 그것을 내 세우지 않고 모세하고도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했다. 이러면서 이제 비방을 시작한다. 실재로 미리암이 앞장을 섰지만 부추겨서 아론을 정면에 내 세운 것 같다. 여자이니까, 여자가 마음에 안 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누가 문둥병에 걸리냐면 미리암만 걸린다. 아론은 그냥 마지못해 따라가는데 하나님이 다 아시고 이제 미리암과 나병이 생기게 한다. 어쨌든 주변의 수많은 백성들이 울면서 고기를 내 놓으라고 난리이고 누나랑 형이 또 비방한다. 

실재로 미리암이 앞장을 섰지만 부추겨서 아론을 정면에 내 세운 것 같다. 여자이니까, 여자가 마음에 안 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누가 문둥병에 걸리냐면 미리암만 걸린다. 아론은 그냥 마지못해 따라가는데 하나님이 다 아시고 이제 미리암과 나병이 생기게 한다. 어쨌든 주변의 수많은 백성들이 울면서 고기를 내 놓으라고 난리이고, 누나랑 형이 또 비방한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 상황에서 성경 기자가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그의 아나브가 그의 겸손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꼭 집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백성들과 자족으로부터 온갖 비난을 당하는 가장 불쌍하고 비참하기 때문에 아나브를 ‘고개 숙인 남자’, 이렇게 해석하고 모세는 비참함과 불쌍함에 지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하다. 고 번역한다. 이거보다는 더 넓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모세가 아무런 반응을 안 한다. 하나님이 들으셨다. 모세가 침묵하는 것은 온화하고 부드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겸손함과 신뢰를 가르킨다. 그래서 최근에 성경학자는 모세는 겸손함과 신뢰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했음이 더 좋다고 보인다. 그러면 하나님만 의지하는 겸손한 모세, 온유한 모세를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시는가?
 
*시편 140:6,
6 내가 여호와께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여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하였나이다.
-겸손한 자가 ‘아나브’이다. 민수기 12장의 스토리를 보면 여호와께서 미리암과 아론을 회막에 불러내신 다음에 맹렬하게 비난하신다. 그리고 심지어는 진노하신다. 그리고 나서 미리암이 나병이 생겨 눈처럼 희게 되었고 끝내는 진영에서 쫓겨나 7일 동안 추방되었다.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하나님만 의지하는 모세를 붙드시고 미리암은 땅에 던지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겸손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럼 두 번째 문제가 무엇인가? 왜 하필 겸손한 자에게 굳이 땅을 주시는 것인가? 그 이유를 미리암과 아론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민수기 12장의 6-8절에 보면,

*민수기 12:6-8,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미리암이 모세하고만 여호와하고만 말씀하시는 것이냐? 우리 랑도 하지 않았느냐? 비방을 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 미리암과 아론을 불러낸 다음에 만약에 선지가가 있다면 그 선지자에게 나 여호와가 환상과 꿈으로 이야기 하지만 내 종 모세는 그렇지 않다. 내가 얼굴을 대면하여 명백히 말한다. 이렇게 모세를 두둔한 다음에 “내 종 모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단정적으로 칭찬하셨습니다. 여기까지 내 종이라고 부른 유일한 인물은 아브라함 밖에 없다.
 
두 번째로 모세를 향해 내 종이라고 내 종 모세는 온 집에 충성한 인물이라고 두둔하신다. 그렇다면 여러분 너무나 분명하지 않는가? 자기만 신뢰하고 자기 온 집에 충성한 모세에게 하나님이 땅과 집을 하사하지 않으시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종인 아브라함에게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느혜미야 2장 8절에 보면 그의 마음이
 
*느혜미야 9:8,
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이렇게 주는 의로우시다. 고백하자 그의 마음이 충성됨을 보시고 그 충성됨이 내 종 모세는 온 집에 충성한다고 하신다. 같은 단어이다. 모세가 이제 고기 달라고 하는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하나님께 뭐라고 하는가?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습니까, 내가 그들을 낳았습니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들을 품듯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하신 땅으로 가라 하십니까?”라고 울부짖었지 않는가? 여호와께서 네 백성과 땅을 맡긴 것은 내가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요, 충성스런 종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 근동 아시아에 보면 황제가 충성스런 신하에게 땅을 하사한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개국공신이나 충성스런 신하가 있으면 땅을 하사한다. 

 
그래서 저도 경주 김씨 경순왕의 계림군파 39대 손이다. 맨날 저희 아버님 자랑하신다. 땅이 한 평도 없다. 뭐 11했나 몰라요. 경순왕의 후손이면 충성스럽게 해가지고 땅을 좀 하사 받아가지고 뭐 좀 대대로 유산을 물려주든지 뭐 제주도에 보니까 경주김씨 후손이 누구누구가 하사 받은 땅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봤는데 한 평도 없다. 충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말만 경순왕의 후손이다. 호적을 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ㅎㅎㅎ!! 대부분 다 양반이라는데, 사실은 양반 수가 잘 안 된다. 이렇게 말하니까 행복하신가? 상대방이 귀족이 아니라니까,,, 귀족이 아닌 것 같다. 제가 봐도 너무나 충성스럽게 해서 띵을 하사 받아서 좀 후손들에게 물려주면 이렇게 힘들게 안 살 텐데, 도대체 무얼했나 이런 생각이 팍 들었다. 실제적으로 이렇게 충성스러운 표현을 잘 안 쓴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사무엘하고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 네 분이다. 사무엘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사무엘상 2:35절에 보면
 
사무엘상 2:35,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사무엘이다.
 
사무엘하 7:16,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것은 다윗에게 한 말이다. 솔로몬에게도 똑 같이 말한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너에게 주리가 경고했는데 같은 단어이다. 충실함은 든든함이란 뜻이기 때문에 사람을 보고 든든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양쪽에 쓰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와 사무엘과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온유한 자, 겸손한 자, 충성스런 사람들에게 땅을 맡기고 자신의 집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도 여러분과 제가 믿음의 선배들처럼 하나님만 의지 하는 충성된 자로 인정받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여기서 이런 성경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깊이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라고 하신 것은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시편 37편은 누가 기록했냐면 다윗이 기록했다. 과거에 땅을 차지한 구속사의 선배들의 설 례들과 자기에게 하나님이 땅과 집을 주신 것을 경험하면서 누가 그러면 땅을 차지 할 수 있는지를 시편 37편에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시편 37편을 읽으면 땅의 기업을 받는 온유한 자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12절, 14절 21절을 보면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고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지 하지만 길이 형통하고 큰 세력을 유지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온유한 자들이 불평하고 시기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 주변에는 영 끌 해서 부동산 사서 돈 벌었다는 이야기, 주식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심지어 암호 화폐에 투자해서 떼 돈 벌었다는 소식들이 난무하고 있다. 눈만 뜨면 부자가 되는 방법, 돈을 버는 수단이 사방에서 들여온다. 원래 세상은 돈에 눈이 먼 죽은 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십 년 전에 교수 세미나를 갔다. 말이 세미나이지 그냥 여행 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미나라고 붙인 것이다. 요세 잣대를 들이대고 가서 무얼했냐 고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 하고는 여행 한 것이다. 그러니까 세미나라고 말하기 그러니까 세미나로 한 것이다. 이해해 주시리라 본다. ㅋ ㅋ 값이 굉장히 저렴한 여행 상품이다 보니 계속 그 쇼핑몰이나 상품을 안내하는 곳에 끌려 다니는 여행인 것이다. 그래서 저희들이 상점에서 물건을 사지도 않고 교수들이 외국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보니 별로 살 것도 없고 집에 오면 쓸 만한 것도 없고 경험이 있으니까 안사는 것이다. 이제 가이드의 얼굴이 무거워진다. 마지막 곰 농장을 견학하는 것이다. 안 가려고 해도 표정이 너무 안 좋으니까 억지로 끌려 간 것이다. 농장 직원이 나와 가지고 이제 곰의 간과 쓸개가 매우 좋다고 선전하더니 갑자기 우리에 갇혀 있던 곰 한 마리가 마취가 된 채 카트에 실려서 끌려왔다. 초음파로 쓸개가 어딘지를 찾아서 바늘로 생즙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볼 수가 없어서 나와 버렸다. 마당에 실려 온 곰이 우리에 갇혀있는데 난리가 난다. 부르짖기도 하고 우리를 때리기도 하고 너무 민망해서 그 직원에게 “어떻게 그렇게 우리에 가두어 두냐?”고 물었다. 그분이 너무나도 당당하게 “선생님 너무 걱정을 마세요. 이곳에 있는 곰들은 근무를 서는 겁니다.”라고 했다. 더 넓은 곰 사육장에 있다가 3개월씩 이곳에 교대로 근무를 선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우리에 갇힌 채 마취되어 카트에 실려 나와서 생 쓸개즙을 채취당하는 곰을 가리켜 근무를 서고 있다며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그 순간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불 수 있었고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욱 슬픈 것은 이런 일을 일부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어를 바꾸어서 투기인데, 재테크, 투자하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꾼다. 물론 주식이든 부동산거래든 암호 화폐든 간에 건전한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다 투자라고 말한다. 저희가 투기나, 세미나, 근무 서는 것, 다 비슷하다.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을 합리화 시키고 단어를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조차도 투자니 재테크니 하면서 투기를 한다. 그런데 자주 이런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이렇게 얻은 땅은 죽은 자들의 땅이지, 산 자들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면 당연히 불평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데 아파트 값이 올라간 지역의 교우들과 그렇지 못한 교우들 사이에 심각한 정서적 차이가 있어서 시기를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같은 교인들 사이에서도 그런데 악인들과 불의한 자들이 땅을 차지하고 형통하게 된다면 불평하고 시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은 아닌가? 어떤 때는 화가 나고 분노가 치민다.
 
그런데 시편 37편 기자는 일절부터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시기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왜 그러면 악인들이 형통과 악인들의 번영으로 인해 시기하고 불평하지 말라고 하는가? 악인들의 형통과 부는 잠시 있다가 베임을 당하는 풀과 같지만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편 37편에는 땅을 차지한다는 표현이 모두 다섯 번 나오는데 한 결 같이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마태복음 5:9-11,
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37:22,
22 주의 복을 받은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들은 끊어지리로다.
 
*시편 37:28-29,
28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9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37:34,
34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이 다섯 번 다 악인은 끊어지고 베임을 당하고 없어진다. 이렇게 되어 있고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 온유한 자, 주의 복을 받은 자,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 땅을 차지한다. 이렇게 되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충성스러운 종들이 하나님만의 말씀만을 겸손한 자들이 어떻게 땅을 차지하였는지 자신의 삶의 토대로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똑 같다. 아무런 역사적 설 례가 없이 그냥 추상적으로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 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시편 37편을 인용한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온유한 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고, 온유한 자에게 굳이 땅을 주시는지를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교회 역사에서 온유한 자가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받는지 살펴보겠다.
 
1855년에 이제 중국 선교를 허드슨 테일러가 이제 5년 만에 병이 생겨가지고 귀국해서 영국으로 치료를 하면서 길이 잘 열리지 않았기에 오 년 동안 선교를 못하다가 혼자 하기 보다는 여러 명이 선교하는 게 좋겠다고 이래서 1865년에 중국 내지 선교를 결정하고 16명의 선교사와 함께 가기로 결정했는데 그 때 비용이 이천 파운드가 필요했다고 한다. 선교 소식지에다가 필요한 액수를 제시 했고 개인적으로 호소하거나 모금 하거나, 헌금 명단을 게시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놀랍게도 날마다 합심하여 기도만 했는데,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채워주셨다. 사실 굳이 다 채워졌다는 사실을 광고할 필요가 없는데 소식지에 이 사실을 광고하고 다 채워졌다고 광고하고 난 후에 일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예물이 너무 많이 들어왔으므로 성막에 쓸 물건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했던 모세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헌금을 하라고 덜 요청하고 거룩하신 성령님의 능력의 더 의존하며 우리의 영성을 더 깊이 판단하면 모세의 체험이 기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될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
 
-한 번은 중국에 관련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헌금하지 않고 그 자리에게 두 번째 헌금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는 조건으로 허락을 했다. 큰 지도를 가지고 가서 중국이 얼마나 큰 지, 중국의 인구가 얼마인지, 어떤 영성의 각성의 필요성을 설명해서 아마 감동을 준 것 같다. 초대한 사회자가 마지막에 헌금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런 하나님의 선한 사역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게 되면 마음의 부담이 있을 것 같으니까 허드슨 테일러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헌금을 하면 좋겠다. 라고 이렇게 광고를 한 것이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서전에 ‘나는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감정적인 이유로 부담을 지우는 것보다 부담을 안고 집에 돌아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기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헌금을 하라”고 하는 게 확신이 든다면 중국관련 선교 단체이거나 런던에 있는 우리 선교 본부에 도움을 우송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한 자녀들을 선교사역에 보내는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나는 자칫 헌금을 하다보면 돈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상을 남길 수가 있다고 했다. 강력히 나의 소원을 이야기 하자 사회자가 내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에 나를 초청한 사회자가 이렇게 말했다. “테일러 선생, 어제 밤에 나는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했었소, 그러나 오늘은 당신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소. 나는 어젯밤 죽음으로 향하는 수많은 중국 영혼들을 향해 주님, 내게 무엇을 하시길 원하시는지를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소.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고, 이것이 바로 그 결과요.” 그는 오백 파운드짜리 수표를 건네주면서 전날 밤 헌금 시간이 있었으면 몇 파운드만 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그 수표로 배 삯을 지불했다. 우리는 1866년 5월 26일 라메르 무호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22명의 손님 가운데 16명이 선교사였고 이것이 중국 내지 선교회 첫 출발이었다. 우리는 허드슨 테일러에게서 하나님은 겸손 자에게 어떻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지를 볼 수 있다.

 
라이프 윈터가 이렇게 말한다. 대학도 못 가보고 더구나 선교 훈련도 못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의류학교의 학력과 과거의 적당한 경력만으로 선교 현장에서 그렇게 멋진 활약상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자를 멸시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사용하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의 모든 약점을 감추어 주셨으며 중국 내지 선교회는 6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해 중국 내지 선교사역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세 번째 질문이 남았다. 과연 온유한 사람이 받는 땅은 무슨 의미인가? 그냥 영적으로 생각해서 땅을 천국이라고 얼버무리면 안 된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복은 인간이 몸과 영혼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이 받은 땅은 물질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고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겠다. 이를 알기위해 세상 사람들이 차지하는 땅은 무슨 의미인지 살펴보겠다. 우리는 땅과 학벌이 중요한 한반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무작정 앞으로 달리고 있다. 그렇게 달리면 땅을 차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렇게 무작정 달리고 나면 원하는 땅에 도착할 수도 있고 땅을 차지할 수도 있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무작정 달렸는데 도착해보니 우리가 바라던 땅이 아닐 수 있다. 영화감독 장진이라는 사람이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착해 보니 지옥이었다.” 그렇다. 어딘지 모르고 세상 사람들처럼 달리다 보면 도착한 곳은 지옥이고, 죽은 자들의 땅일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의 상류층 안에 진입을 했고 자녀교육에 올 인을 했고, 원하는 대학과 직장에 들어갔지만 무슨 일이 생겼는가? 그 사이에 일부 자녀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고 교회보다 세상이 너무 좋아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주일 성수를 예로 들어보겠다. 학원을 가기위해 주일 성수를 드리지 않는 것이 이제는 예사 일이 되었다. 주일에 공부하지 않고도 원하는 대학에 갔다는 1960년대, 70년대 시대의 간증은 이제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었다. 중간고사 학기말 고사가 되면, 교회의 주일학교 출석률이 반 토막이 난다. 심각한 것은 오히려 교회의 중직 자 자녀들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서 입시나 학벌보다 더 센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하나님도 성적 앞에서는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해서 원하는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고 땅을 차지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열 정탐꾼의 그 말에 그 대답이 들어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나안 땅이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교육을 무시하고 세속 교육에 올 인하다 보면 도착한 곳은 약속의 땅이 아닐 수 있다. 왜냐면 그 땅은 산 자들의 땅이 아니라, 자녀를 삼키는 땅, 죽은 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온유한 자에게 주는 땅은 죽은 자의 땅이 아니라 산 자의 땅이다. 시편 142편 5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시편 142:5,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죽은 자들의 땅일 수도 있고, 산 자들이 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향락을 즐긴다면 그 땅은 죽은 자들의 땅이다.
 
* 디모데후서 5:5-6,
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다닌다 해도 죽은 자들의 땅에서 살수도 있다.
 
*요한계시록 3:1,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신뢰하는 겸손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땅을 선물로 주실 것이고 그때 그 땅은 비로소 산 자들의 땅이 된다.
 
시편 기자는 27장 13절에서 노래한다.
*시편 27:13,
13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온유한 자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게 되면 그 땅은 비록 이 썩어져 가는 세상 안에 있다 하더라도 산 자들의 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 하는 겸손한 자로서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종으로 인정이 되어 하나님께 기업으로 받은 것이라면 그곳이 어디든지 간에 산 자들의 땅이 되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이든, 땅이든, 직장이든, 교회이든, 다 산 자들이 땅인 것이다. 겸손한 자로 인정받아 우리가 얻은 직장, 우리가 얻은 지위, 우리가 얻은 신분, 우리가 얻은 재물, 우리가 얻은 명예는 모두 하나님이 산 자들에게 주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땅이 비슷해 보여도 이렇게 주님이 겸손한 자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으면 그 땅은 산 자들의 땅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산 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 그 영원한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이것을 깨달았다. 이 땅은 성도들이 살게 될 일종의 하늘이며, 그래서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사는 곳은 낮은 영역이라고 본다면 그곳은 땅이다.
 
그러나 저 위에 하늘과 비교할 때, 그곳은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린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진짜 신학자가 아닌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은 일종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 자들의 땅이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낮은 영영이니까 땅이긴 하지만, 저 위의 하늘과 비교할 때, 그곳은 이미 산 자들의 땅이고 주님이 오시는 영원한 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기업을 받을 것이라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미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다. 땅을 차지하니까...어떤 사람들은 불의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은 온갖 불법을 동원하고 온갖 방법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땅은 산 자들이 땅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땅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시기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이고, 끝내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악이 아닌가?
 
제가 아는 친구가 20만원을 암호 화폐에 투자를 했다고 한다. 갑자기 알람이 울리더니 두 배로 뛰었다는 것이다. 팔까 하다가 내일 아침에 팔자. 라고 생각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반 토막이 났다는 것이다. 불과 여덟 시간 사이에, 20만원을 투자 했으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몇 천 만원 몇 억씩 집어넣고 나면 악이다. 그게 무언가? 자기를 해치는 해가 아닌가? 얼마 벌겠다고,, 많이 벌어서 뭐할 것인가? 그거 가지고 선택하겠는가? 하나님은 안 바라신다. 그런 것은,,, 산 자들의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온유한 자의 땅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그 비전으로 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 그 땅을 기업으로 삼아 산 자들이 땅에서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복된 교우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요약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겸손함과 신뢰함과 온유함으로 무장되고 땅의 기업을 받는 축복과 기쁨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깊이 새겨서 죽은 자들의 땅 가운데서 산 자들의 땅으로 주시는 기업을 고대하고 기대하는 또한 우리에게 지금 주셨다고 한다면 그 산 자들의 땅 안에서 이 아름다운 안아주심의 본당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맛보는 복된 남은 생애가 되어야 한다.
 
-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영적 복은 풍요한 화평이다. 이는 아무리 물질적 부요함을 누릴지라도 악인으로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하늘의 놀라운 복이다. 또한 이러한 화평은 현세적인 복을 넘어 천국에서 누릴 영광과 기쁨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악인의 일시적인 번영보다 영원한 영적 복을 사모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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