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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5월 11일)

제목: "사랑으로 씻기시다"
말씀: 요한복음 13:1-15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이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구성찬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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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1-15,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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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응답을 체험하기 위해서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여 축복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예배해 주신 은혜를 충만하게 내려 주실 줄 믿는다. 오늘 우리에게 주실 말씀은 요한복음 13:1-15절이다. 신약성경 119면이다.
 
‘오늘 설교가 제가 사랑의 교회에서 하는 마지막 설교이다.’라고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 여러분들은 상당히 집중해서 오늘 들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이 라는 단어가 주는 힘 때문이다. 우리에게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더 집중하게 되고, 뭔가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우리 같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특별한 시간적 표현이 바로 이 ‘마지막’인 것 같다. 아직 긴가민가 하는데 제가 마지막 설교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바로 마지막을 앞두고 계셨다. 요한복음 11-12장까지는 표적의 책이며,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 예수님의 표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들이 나타나 있었고 오늘 본문인 13장부터는 영광의 책, 그 십자가를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이때 예수님은 이전과 달리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마지막’이라는 뭔가 그들에게 의미 있고, 그분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행동을 하신 것이다.
 
그 마지막 이야기의 배경은 ‘최후의 만찬’, 다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의시기 위해 전날 저녁에 벌어지는 일이다. 마침내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아셨다. 그 마지막의 시작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보통 마지막은 그냥 삶을 정리하고 이렇게 떠나는데, 예수님은 그 마지막, 그 끝까지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도 세상에 남겨지게 되는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신다. 세상에 남겨져서 오늘 이 저녁에 이 자리에 달려오신 여러분 한 분 한분도 동일하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구절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밑바탕이 되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끝까지 사랑함을 표현한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둘렀던 수건을 풀어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다. 사도요한은 마치 현장을 우리 눈앞에 이렇게 펼쳐주듯이 그림을 그리듯 이 한 장을 묘사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마치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추억도 떠오른다. 어릴 적 여름성경 학교 때에 꼭 했던 세족식, 선생님이 제 발을 씻어주시면 정확히는 기억은 안 나는데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이 내용을 잘 알고 있다. 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하신 이 세족식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가? 정말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자.
 
*요한복음 13:14,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은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족식의 모습이자 의미이다. 그런데 이 의미만 있는 것인가? 요한이 그토록 정성들여 묘사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주며 너희도 그렇게 씻어주라는 것에 정말 어떤 의미가 더 담겨져 있는 것인가?
 
또 그 의미를 풀어내는 설교 제목인 ‘사랑으로 씻기시다’는 어떤 것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가장 중요한 마지막 사역을 자신들의 사람인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발을 씻기신 더 깊은 마음과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께서 보여준 의미를 우리의 삶에, 우리 심령에 깊이 담아내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2절이 조금 애매하다. ‘마귀가 씌인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내용과 뒤의 세족식의 그 아름다움 사이에 뜬금없이 마귀가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는 것이 들어가 있다. 굳이 1절과 대조되는 내용을 왜 2절을 사도요한은 넣은 것인가? 결국은 이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시니까.. 마치 지금과 같은 우리는 그날 저녁으로 돌아가 보자. 그날 저녁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식사를 하실 때, 아무도 예수님에게 발을 씻을 물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보통 당시에 종이나 하인들, 그중에서도 천하게 여겨지는 이방인들이 주로 담당했던 일인데 그 집에는 그런 노예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 중에 누구라도 주님이 이렇게 오셔서 식사를 하시는데 발도 못 씻으셨다면 나라도 섬겨야 하겠다고 나서야 되는데 꼭 우리만이 아니라도 그 랍비를 따르던 제자들이 따르는 그 나라에도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도 안 한다. 왜인가? 당시 제자들은 누가복음 24:24절에 있듯이 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다툼은 ‘우리 중에 누가 더 크냐?’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에 예수님께서 오셨으니까, 이제 수도에 오셨으니까, 이곳에서 과거의 영광스러운 다윗 왕국을 다시 재건하실 텐데, 그 재건을 하시면 ‘우리 중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모두 하나 같이 영광스러워 보이는 그 세상적인 높은 자리를 향해 그들의 시선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엄마까지 찾아와서 우리 아들 예수님 안 계시면 ‘넘버 2, 넘버 3, 시켜 주세요.!!’ 라고 엄마의 로비까지 들어올 정도로 모두 하나 같이 현혹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내가 당신보다 아래입니다.’ ‘내가 당신보다 못 합니다.’ 라는 어떠한 메시지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발조차도 씻겨드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사실 한 명이 .있었다. 오늘 본문 12장에서 부활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지극히 비싼 향료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그때 가롯 유다가 했던 말 기억나는가? “이 향료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나를 위하여 이것을 간직하게 하라.” 자신의 발을 씻기시는 그 장소에서 예수님은 장례를 이야기 하셨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장례가 다가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장례를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그 공생애 생활에 마무리 하시면서 한 걸음씩 십자가를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가셨고 그날 저녁에 잡히시게 될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에 있는데 제자들은 그것을 1도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모르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사랑으로 씻기시다’의 첫 번째 의미는
 
I. 우리의 부족함을 용납하심이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가? 십자가를 향해 더 가까이 낮아짐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 은혜로운 찬양 가사의 곡을 부르지만, 예수님의 원래 모습이 아닌 내가 기대하는 예수님을 만들어 놓고 따라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2절에서 가롯 유다에게 보인 사탄에 이용당하는 모습은 가롯 유다에게만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 도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모두의 모습은 아닌가?
자신의 꿈과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이 따르고 있는 예수님을 위해 그들도 똑같이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나의 성공, 나의 성공, 세상적인 어떠한 영광을 쫓으면서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은 아닌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는 예수님 묻는 먼지가 보일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 동료 더러워진 발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얼마나 찝찝할까? 예수님은 정말 상쾌한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을 텐데 ‘아무도 안 섬기면 나라도 섬겨야지’, 라는 생각이 세상의 영광만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떠오르지도 않고, 그런 생각이 도저히 들지가 않는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좀 화가 나시지 않을까?
 
우리는 1년 제자훈련을 해도 변화가 나타나길 바랐는데, 예수님은 3년 동안이나 1년 365일 내내 그들과 함께 하면서 훈련을 시켰는데 그런데 기껏해야 이 정도밖에 안 되냐!고 예수님 그러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이런 그들의 마음에 부족함과 허물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며 사랑으로 씻기심으로 결국에는 자신이 마음도 지키셨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이 요동치는 감정을 예수님은 지키시며 사랑으로 섬기실 수 있었는가? 본문 3절을 보자.

*요한복음 13:3,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시각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만 생각하고 묵상하고 계시지 않았다. 사람을 보신 것이 아니다. 내가 키운 제자들이 좀 더 잘한다면 그래도 십자가 질 때 내가 덜 힘들 텐데, 푸념하고 한 숨 쉬지 않으셨다. 사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느끼시기에 충분히 그러한 푸념을 하셔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누구를 바라 보셨는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기감정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셨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사명이 더 크게 와 닿으셨다. 끝까지 사랑하신 비결이 여기에 담겨있다. 예수님은 100% 신이시지만 동시에 100% 인간이시다. 인간적인 생각이 얼마나 그 유혹이 강렬한지, 다를 잘 알지 않은가? 살면서 많은 그 유혹에 넘어져 보셔서 잘 알지 않는가? 그런데 그 생각, 그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예수님은 여기서 얻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셨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은 내게 모든 것을 내가 맡기셨고 내가 다시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은 생각하셨다. 그래서 저녁을 먹는 중에 즉시 일어나셨다. 저녁을 다 드시고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먹는 중에 일어나셨다. 요한은 그 모습을 생생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러니까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는 완전히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그렇게 움직이고 계시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한만 봤을까? 분명히 그 옆에 있는 제자들도 예수님은 뭐하시는지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뭐하시는지 생각도 못했다. 그 발을 씻기기 전까지는, 그만큼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그 예수님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둔감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의 모습, 상태, 반응에 상관없이 게의 치 않고 예수님은 묵묵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높아진 마음을 알고 계셨다. 세족식은 단순히 하루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니면서 발에 묻은 그 먼지를 그냥 씻어내는 그것만이 아니다. ‘사랑으로 씻기시다’의 두 번째는 의미는
 
II. 높아진 우리의 눈을 낮추심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의 억누르는 사랑의 몸부림을, 그 발 씻음을 통해 높은 곳을 향해 있던 제자들의 시선을 “어, 예수님이 뭐하시지?” 예수님은 낮추셨다. 내가 더 낮아져야만 저 제자들의 시선도 낮아질 수 있기에, 너희 시선을 낮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셨다. 가장 천한 종처럼, 가장 천한 노예처럼, 그리고 이 낮아짐은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은 낮아져 있는가?
제자들이 보지 못하고 있던 그 낮은 것을 보시는 그 예수님의 시선을 일상에서 따라가고 있는가? 식탁에 먹을 것만 보이지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발이 먼지에 덮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괜찮다고 하시면 자신이 가질 것 같은 영광의 위치에서 먼지 묻은 발이 그대로가 좋다고, 문제없다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은 저녁 먹는 중에 그 낮은 곳으로 시선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옮기셨다. 예수님은 그 낮은 곳으로 자신의 몸을 옮기셨기에, 제자들의 높아진 시선, 높아진 마음이 무릎 꿇고, 발 씻고 계신 곳으로 낮은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사랑으로 씻기시다’의 본질은 예수님 자신이 낮은 곳에서 그 사랑, 그 자체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 씻김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제자들이 발을 씻기셨다. 예수님이 그들의 발을 씻기실 때는 그들의 잘못함을 용납하고, 시선을 낮은 곳으로 옮기며, 표면적인 먼지만 씻어내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발이 저지를 앞으로의 발자국까지 씻어내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발이 어떠한 발로 걸어가게 될 것인지 아셨다. 지난 3년 동안 함께 걸어왔지만 그들의 발이 온전히 예수님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옮기며 따라오는 발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를 예수님께 그대로 투영시켜서 그 메시아, 자신들이 생각에 따른 그 메시아를 따랐던 발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리고 발을 씻겨도 그 밤에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계셨다. 자신을 저주하며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제자의 발도 씻기셨다. 그 밤에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하며, 그 겟세마네 동산의 먼지에 다시 더럽혀지는 발이 될 거라는 것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정말로 예수님이 가장 고통스런 십자가의 고난을 외로이 홀로 짊어질 때, 그 발자국은 자신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 발을 씻기셨다. 그냥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니까 그냥 묻어두고 씻기신 것인가? 아니다. 비록 나를 버리고 떠난 발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의 발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사랑으로 씻기시다’의 세 번째 의미는


III.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심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잘못도 이미 발을 씻기시며 용서하셨다. 십자가에 올라가서 뒤늦게 ‘그래 너희들이 그랬지만 용서하겠다.’가 아니라, 찔림의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 예수님은 발을 씻기시며 그 발이 어떠한 발로 걷게 됨을 알고 계셨지만 그 발을 씻기며 용서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감정도 분명히 흔들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날의 아픔을 용서함으로 사랑으로 끝까지 씻기셨다. 오히려 발을 씻기시며 감정도 온전해지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도 뜨겁게 기도하고도 내일은 똑 같이 잘못을 저지르고 예수님을 떠나 버린 그 제자들과 일상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발자국도 예수님은 이미 용서하셨다. 혹시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아직 이 자리에 나와 계시지만 죄책감으로 힘들어 하시는 분이 계신가?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나는 제자훈련을 받는다면서도, 나는 사역훈련을 받는다면서도, 나는 순장이 되었음에도, 나는 목사가 되었음에도 왜 이렇게 제자답게 못 사는지, 우리가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이미 당신을 용서하셨다. 집사님을 용서하셨다. 순장님을 용서하셨다. 그 한량없는 따스한 사랑으로 모든 잘못을 씻기셨다. 이러한 사랑으로 씻기신 예수님, 이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제자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그 삶을 위한 중요한 전제가 있다. 6절에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반응을 보인다..
 
*요한복음 13:6,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종들이 하는 일인데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다니요,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하는 것은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그러자 베드로는 절대로 씻지 못한다고 더 거부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 완강하게 아주 중요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내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자 베드로 성격을 알지 않는가? 깜짝 놀란다. 지금 고지가 눈앞인데 내가 조그만 잘 붙어 있으면 높은 자리를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시옵소서.”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끝에 전하!! 만 안 붙였지 베드로는 힘이 다시 왕국의 신하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수님은 발 씻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3:10-11,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발 씻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신다. 그리고 이 회개가 단순히 몸의 깨끗함만이 아닌 마음의 깨끗함까지 연결되고 중첩된 의미로 표현하신다. 이 사랑으로 씻기는 제자의 삶을 우리가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영적으로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베드로와 제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먼지를 제거하는 예수님이 물로 씻겨주시는 것만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깨끗함, 마음의 깨끗함까지 함께 말씀하신다. 죄로 인해 물든 마음, 영혼을 예수님께서 씻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죄인에서 이제는 상관있는 의로운 자녀가 된 것이다. 내가 더러운데 누구를 씻길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예수님처럼 씻길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제자여러분,
예수님이 성경 속 제자들의 발만 씻어준 것인가? 아닌 것 알지 않는가? 오늘 이 저녁에 모인 우리의 발도 이미 씻어주셨다. 주님 뜻대로 살기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했던 내 발을 내 욕망의 목표를 이루어주기를 기도하기에 바빴던 이런 발을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내 가족, 내 자식의 성공만을 빌기에 바빴던 내 발을, 예수님은 이런 나의 발도 씻어주셨다. 이처럼 먼저 우리는 더러운 발을 씻음 받은 사람이다. 내가 누군가의 발을 씻기는 섬김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예수님이 먼저 내 더럽고, 추하고, 부끄러운 발을 씻어주셨기에 나의 영혼까지 이미 깨끗하게 씻어주셨기에 때로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주님이 하신대로 이미 받은 사랑을 따라서 나도 씻기는 것이다.
 
*요한복음 13:14-15,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그런 섬김의 본받아서 누군가의 발을 씻긴다고 하는 것은 “자, 이제 나가서 저 문 밖에 나가서, 누군가를 섬깁시다.”라는 구호가 아니다. 막연하게 어떤 사람을 섬기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 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신앙적, 삶의 기준에 모자라는 사람이 있다. 또 우리가 보기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그런 부족함, 왜 저러지?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이런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용납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 그 사람을 사랑으로 씻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높아진 마음과 우리의 높아진 시선과 그리고 우리의 높아져 있는 자리를 낮은 것으로 옮겨야 한다. 물론 우리 주변에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나는 모른다하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를 뒤에서 욕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나는 몰랐는데 그것을 위해서 나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 용납과 용서, 그것이 예수님이 사랑으로 발을 씻겨주시는 것의 의미이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우리 이웃의 발을 씻기는 것이다.
 
그런데 쉽지 않다. 특히 이 마음이 잘 안 따라 준다. ‘그래, 말씀대로 한 번 해보자,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나보다’ 라고 하지만 막상 그 사람 앞에 가면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주먹이 운다. 계속 그렇게 생각이 난다. 뭔가 생각나는 포인트가 자꾸만 나를 찌른다. 내 마음을, 그렇게 할 수 있겠어, 그래 생각해봐,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한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제자의 배신, 세 번의 부인, 모든 제자가 떠나가는 상황이 곧 펼쳐질 것을 아심에도, 자신의 마음을 감정을 추스르며 섬길 수 있으셨는가? 예수님의 섬김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닮아갈 수 있는가? 이 섬김의 출발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과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 익숙한가? 앞서 3절에서 나누었던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섬김을 행동으로 옮기시기 전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고 했던 생각,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과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매일 아침 큐티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오늘 하루에 하나님은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지, 질문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 시킴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리를 얻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얻어도 아침에 새벽예배까지 나와서 큐티를 통해서 이렇게 뭔가 힘을 얻어도 그래도 섬기기 싫은 마음이 들 때, 섬기기 힘들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의 섬김은 마음의 준비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때가 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그 순간이 자꾸만 예수님이 자신의 감정을 온전하게 추스르는 사랑하기에 몸부림치시는 시간이라고 자꾸만 느껴졌다. 무슨 말이냐면, 씻기기 전에 마음속으로 ‘이따가 저놈이 제일 먼저 도망갈 텐데, 그래도 사랑해야지, 주여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다짐하고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의 발에 묻는 먼지와 더러움을 씻어내며 예수님의 마음에 끊임없이 이렇게 생기는 미움과 증오까지 예수님이 씻어내고 계셨다는 것은 아닐까?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은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내시고 사랑으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한 사랑의 몸부림이 담겨져 있다고 여겨졌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론 싫지만 정말 죽어도 하기 싫지만 그래서 자꾸만 쭈뼛 거리게 되고 내키지 않지만,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겨서 예수님을 따라 사랑의 섬김을 실천할 때 우리 감정이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때론 마음보다 섬김의 행동이 앞서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시선을 두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과 하나님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게 될 때, 즉시 저녁 먹는 중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가 어떤 일을 할지, 어떤 것을 했는지 생각하시기 전에 즉시 저녁 먹는 중에 일어나 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많이 실패해 보신 사랑스런 우리 실패자 여러분, 우리 도전해 보자. 한 번 눈 딱 감고 한 번 예수님처럼 용납해보고 용서해 보자. 제 주변의 그 과정 속에 있는 집사님이 계시다. 정말 용서했는데 딱 마음먹고 용서했는데 힘든 것을 용서했는데, 그러고 나서 끝난 줄 알았는데 몇 주가 지나서 다시 그것을 뒤집어엎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더 힘들었는데 지난주일 이렇게 광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집사님 부부가 오셔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두 분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있다. “목사님, 그래도 끝까지 용서해 보겠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감동이 되었고 그 집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사랑하기 위해 몸부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두 분의 생각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중에는 시어머니께서 받은 상처로 인해서 정말로 마음이 힘들고 어려운데, 그래도 찾아뵙고 맛있는 것 사드리고 전화가 와서 뭐 좀 사달라고 했을 때, 그래도 구해다 드릴 때, 오히려 내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언제까지 사랑하지 않기로 결단하려는가? 그냥 그 미운 사람,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먼저는 혼자 있을 때 선포도 하고, 섬김의 행동으로 그저 용납하고 용서하라. 그래야 여러분이 산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먼저 씻기셨고, 그것을 진짜 보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여러분 힘들어 죽으라고 너희 발을 씻기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씻기시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우리도 서로의 발을 씻길 때 내가 먼저 살고 상대방도 살고 우리 삶에 예수님의 향기도 살아간다. 오늘 밤부터 교회 문을 걸어 나가는 일상에서 섬김의 우리 다시 해보자. 섬김의 받는 사람이 어떠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발이 더럽고 나를 뒤에서 음해하고 나한테 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섬겨야 되면 우리가 먼저 그 자리에 가듯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도 그 예수님의 자리에 가서 그 영혼을 섬기면 된다. 비록 힘겹지만 이 한 걸음, 그 한 사람을 섬기는데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너무나 힘겹고 버겁지만, 그렇게 내 딛는 한 걸음이, 그 작은 섬김이 우리의 일상을 예수님의 제자로 바꾸기에 충분한 줄 믿는다. 이 한 몸이 나의 묵었던 감정을 씻어내고 정리시키고 우리를 감정의 온전함을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 예수님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여 제자의 더러움을 자신의 손에 묻힐 때, 그 제자는 깨끗해지고 예수님은 그 더러움을 가지고 십자가에 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닌가? 사랑의 발걸음을 다시 우리가 따라가기로 결단하면 좋겠다. 가까이는 우리 가족에게, 제자반, 사역반, 공동체에서 다락방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상대방의 부족함을 용납하고 혹시나 높아진 우리의 눈을 낮은 곳으로 다시 향하고 앞으로 그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할지에 대한 기대감도 내려놓고 용서함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기를 원할 때, 그 자리가 이 예배의 영광과 예배가운데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그 강력한 임재보다 더 강력할 줄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낮은 자리에 이미 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상을 주님의 이름으로 누리기를 바란다.
 
♣요약
낮은 곳에 먼저 계신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시고 내 가족과 우리 이웃의 발을 씻기시고 계셨음을 깨달아서 그 예수님이 계신 곳에 나아가서 끊임없이 남보다 높아지는 마음, 내가 저 사람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하나님 앞에 더 잘 보이려고 하는 그 열심조차도 그것이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면 다 내려놓, 나는 아무것도 없이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 낮은 곳으로 가서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힘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사랑으로 씻기시는 본이 되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시고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린 자이다. 그는 예수님의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크게 신임을 받았으며 회계 사무의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다루다보니 탐심이 생겼고 돈을 훔치기도 했으며, 결국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렸다. 마태복음 27:3, 4에 보면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은을 대제사장에게 가져다 준 후 스스로 죽은 기사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그도 결국은 예수님의 무죄 성을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귀가 우리에게 침입할 경우,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치 못하게 하고, 미움, 질투, 복수심을 갖게 하여 번뇌케 하고, 부정적 생각을 갖게 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놓치게 함을 가룟 유다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는 먼저 겸비의 삶을 배우게 된다. 발 씻기는 일은 종이 하는 일인데 만주의 주되신 예수께서 발을 씻기심은 겸손의 덕을 실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또한 서로를 위해 봉사하는 숭고한 신앙인의 삶을 실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도 계속적인 회개의 생활이 필요함을 가르치시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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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5월 9일 (753)

1.수도는 타이베이며, 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자 파운드리 시장 1위 업체 TSMC 등을 보유한 ‘반도체 강국’이기도 한 나라는?

①태국 ②대만 ③싱가포르 ④필리핀

2.주가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될 때 현재 주식가격이 매입 당시보다 낮더라도 추가 손실을 막기 위해 주식을 팔아버리는 것은?

①공매도 ②환차손
③손절매 ④셧다운

3.경제학의 세분화된 여러 분야 가운데 수학과 통계 기법을 활용해 경제이론을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학문을 무엇이라 할까?

①금융경제학 ②미시경제학
③거시경제학 ④계량경제학

4.정부 지출을 늘리면 그 금액보다 많은 수요를 창출하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은?

①기저효과 ②낙수효과
③승수효과 ④구축효과

5.국내총생산(GDP)에서 국민이 낸 국세, 지방세 등 세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가리키는 개념은?

①조세부담률 ②재정자립도
③통합재정수지 ④관리재정수지

6.지방자치단체의 총수입 중 지방세, 세외수입 등 자체수입 비율을 가리키는 것은?

①조세부담률 ②재정자립도
③통합재정수지 ④관리재정수지

7.다음 중 3대 소득분배 지표로 볼 수 없는 것을 고르면?

①소득 5분위배율 ②상대적 빈곤율
③지니계수 ④엥겔계수

8.특정 제품의 수요가 10억원어치 생겨날 때 직간접적으로 늘어나는 취업자 수로, 고용 창출 효과를 보여주는 지표는?

①실업률 ②고용률
③취업유발계수 ④지니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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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윤석열 정부' 출범…정부·국가는 무엇인가?

그래픽=신택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우리는 10일 새로운 정부를 가집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로 바뀌는 것이죠. 정부가 바뀐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나라 정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5년마다 바뀝니다. 대통령 임기가 5년이기 때문이죠. 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는 정부를 구성합니다. 그래야 국가를 통치할 수 있죠.

궁금증이 또 생깁니다. 정부와 국가는 다른 것인가? 네, 다릅니다. 정부는 국가의 일을 하는 조직입니다. 국가는 개별 국민 주권의 집합체일 뿐 직접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정부라는 인적(人的) 조직이 일을 대신하죠. 정부는 정기적으로 바뀌지만, 국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려에서 조선, 대한민국으로 정체(政體)가 바뀌지 않는 한, 국가는 단일한 주권으로 지속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에 반대할 수 있지만 국가를 부정하진 못합니다. 반(反)정부 시위와 반(反)국가 시위가 완전히 다른 이유죠.

인류는 왜 정부를, 국가를 만들었을까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홉스, 로크, 루소는 개인과 사회의 안전을 위해 사회계약으로 국가를 세우고 정부를 만들었다고 했어요. 정부와 국가를 공부해 봅시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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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5월 8일)
제목: "우리가 꿈꾸는 교회"
말씀: 사도행전 1:1~11
기도: 백승준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

설교자: 류응렬 목사님-초빙(와싱톤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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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1,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 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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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응렬 목사님-초빙(와싱톤중앙교회)
-할렐루야!! 정말 꿈만 같다. 저는 어젯밤 저녁 7시에 미국을 출발해서 어제 밤에 도착했다. 오늘 설교 하고, 목사님, 장로회 기도회에 인도하게 되었는데 제가 두 주 건에 코로나 양성 반응이 나왔다. 담임 목사님이 부르셔서 말씀하셨는데, 상황이 이렇다고 하니 목사님은 “아무 문제없을 테니 걱정 말고 오셔서 말씀을 전해 주세요.” 라고 하셨다. 양성 반응의 나왔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진단하시는 목사님이셨다. 한 주간 지나고 양성이 계속 나왔다. 그래서 다시금 목사님께 양해를 구했다. 다른 분을 준비해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담임 목사님께서 문자를 하나 보내주셨다. “사랑하는 목사님, 기도한 후에 선하게 인도를 기다립니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특별한 비법을 하나 전수해 주셨다. 하루 세 번 검사하면 한 번은 음성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시편 말씀 한 편을 함께 보내 주셨다. 하나님께 98% 의존이 아니라100% 납작 엎드려 의존하라는 것이다.

 
*시편 68:19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짐을 지실 분은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찬송해야 될 일이다. 이 말씀이 가슴에 박혔다. 밤중에 자다가 두 번 일어나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바짝 엎드려서 주님 앞에 기도하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정말 놀라운 은혜를 하나 주셨다. 제가 지난주에 책을 한 권 냈는데 제목이 ‘납작 엎드리기’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그 납작 엎드리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셨다. 목요일이 되었다. 금요일이 되면 한국에 들어올 날인가 데 마침 저녁으로 양성 반응이 나왔다. 금요일이 되었다. 믿음을 가지고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서 테스트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기적 같은 은혜로 음성이 나와서 들어오게 되었다. 부족한 종을 이렇게까지 해서 보내주시는가 많은 생각했다.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시는가를 생각했다. 990% 아니라 100를 나에게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100% 의존된 인생,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때는 하나님이 주실 말씀이 있을 줄 믿는다.
 
인류 역사에 오늘 BT(before today), AT(after today) 있기를 바란다. 오늘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른 역사가 일어날 줄 믿는다. 내 영혼이 소행함이 있기 내 개인적인 영혼뿐만이 아니라 교회가, 한국교회의 부흥에 새 판을 주도하는 교회, 우리 가정이 새로워지고 온 교회가 새로워져서 우리를 통해서 잠들어 있는 한국교회를 깨어내는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오늘 한 날이 되기를 축복한다.
 
※ 한자성어 중에 사(射)석(石)위(爲)호(虎)라는 단어가 있다. -돌을 호랑이로 알고 쏘았더니 돌에 화살이 꽂혔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이룰 수 있음을 이르는 말.-호랑이로 알고 바위를 쏜다는 이야기이다. 돌에 화살이 꽂힌 것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바위를 활로 쏘았을 때, 바위를 뚫는 것이 사석위호이다.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힘이 있다면 ‘간절함’이라는 단어이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를 잘 기억하실 것이다. 2005년도에 스탠포드 대학에서 연설을 했다.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stay hungry stay fullish” -“끊임없이 목말라 하면서 조금도 만족하지 말고 당당하게 끝까지 나아가라.” 간절함이란 단어가 사라지는 시대를 맞서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간절함이 없었다면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제자들이 누구인가?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문을 걸어잠그고 살았던 제자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일어났을 때 세상 변혁이 일어나는 갈급한 심정으로 나아갔을 때, 그 연약한 제자들을 통해서 사도행전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어떻게 종교개혁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이 유일한 주님이라는 것을 가르친 것 때문에 화형에 처해 죽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던 중세시대, 마침내 종교개혁의 불꽃으로 어둠을 뚫고 새로운 역사가 탄생이 되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140년 전에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20대, 30대에 한국에 들어와서 아직까지 양반 상놈이 있었던 나라, 조선이라는 이름도 몰라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있는 조그마한 나라, 이 나라를 위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왔고, 흑암의 세력을 뚫고, 한국 땅에 어찌하든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 갈급함으로 오늘 한국교회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뚫고, 625의 잿더미를 뚫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고난 때문이 아니라, 고난을 뚫고 이루어낸 위대한 간절함이다.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 이 간절함으로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우리 부모님들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려고 하는 것, 갈급한 심정, 그냥 교회를 다니는 기본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이 세상 한 복판에 뛰어 들어가서 겸손하지만 당당하게 세상을 변화시켜 나아가는 이런 제자, 이런 자녀들을 꿈꾸는 이런 간절함을 회복하는 이 시간되기를 바란다.
 
사도행전 역사에 딱 한 번 일어난 교회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이루어야 될 역사이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 이제 펜데믹도 지나가면서 엔데믹으로 나아가는 이 시점에 과거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원하시는 새로운 판을 짜는 이런 시대에,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주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사도행전 적 교회, 오늘 네 가지의 핵심 특징을 한 번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복음: 예수님 복음을 간직하는 교회.
둘째, 성령: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
셋째, 증인: 예수님 증인으로 사는 교회.
넷째, 재림: 예수님 재림을 사모하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새기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의 증인으로 주님 오심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이런 하나님이 성도들, 하나님의 교회, 그런 교회 뿐 아니라 우리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이 서울 지역을 새롭게 만들고 조국 교회에 새로운 영적 판을 짜내는 이런 하나님의 교회가 되길 바란다.
 
1. 첫째, 복음: 예수님 복음을 간직하는 교회.

-십자가의 복음을 가지고 살아내는 교회, 한국도 미국도 모두가 위기라고 이야기 한다. 고난의 시기가 맞다. 그래도 아무리 고난이라 하더라고 여러분 기억해야 한다. 고난이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 한다. 초대 교회 같은 교회가 고난이 있었나? 고난을 뚫고 사도행전에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고난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이 없을 때가 문제이다. 오늘 사도행전 첫 머리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워야 될 교회, 우리 성도들이 걸어가야 될 그 기본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사도행전 1:1-3,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 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교회에서 가장 먼저 추구해야할 교회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 십자가 없는 죄 용서함이 없고, 부활이 없는 천국의 소망은 없는 것이다. 성도님들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 기본적인 신앙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이 가슴에 확 새겨져서 그 십자가의 앞에 호흡하고 복음과 동행하는 그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살아내는 이런 하나님이 사람들이 되길 소원한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도 영적인 펜데믹 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청교도라는 이름은 있지만 더 이상 청교도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는 이런 시대에, 지난 1월에 존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을 했다. 아직 기독교 전통은 남아 있어서 대통령이 취임을 하면 성경위에 손을 얹고 세례를 한다. 그때에 실베스트 비만이라는 목사님이 기도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분의 기도를 마지막에 어떻게 맺는지를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존 바이든 대통령과 영부인 그리고 그의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 주소서.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아멘.’ 이 말씀에 동의하는가? 너무 놀라운 일이다. 목사라는 직분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 이름으로 맺었다. 목사이다. 지난 1월에 국회의원에서 목사를 모시고 기도를 인도하고 시작을 한다.
 
그때 초대 받았던 클레버라는 목사님은 어떻게 기도를 맺는지를 보겠다.
‘이 모든 것을 유일하신 신, 브라만, 혹은 다른 다양한 종교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신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Amen, A Women.-’ 마지막 말이 보이는가? 이 의원이 목사이다. 이게 진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성경에 손을 얹고 기도하지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시대가 사라지는 시대이다. 제가 한인들을 위해 몇 차례 기도한 적이 있다. 지난달에도 상원의원 기도인도를 하게 되었다. 기도를 인도하게 되면 지침서를 보내온다. 다양한 종교인들이 있으니까 특정 종교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당연히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다. 기도하러 갔더니 저를 소개하는 부지사가 잠시 저를 불러서 가보니 하는 말이 “오늘 목사님이 기도하실 때, 목사님이 믿는 하나님께 정직하게 평소대로 기도하세요.”
 
저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기도를 부탁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특정 종교 쓰지 말라고 하는데도 솔직하게 기도하라고 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내려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 것 때문에 박수를 받는 이런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사랑의 여러분, 세상은 이런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정말 믿고 있는 복음이 진실이라는 그 믿는 복음답게 여러분들이 모습 그대로 해달라고, 세상과 짝을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균형을 맞추어 살아가는 애매한 신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믿고 있는 예수가 진자라면 진짜 예수 믿는 복음, 복음을 살아내는 것 답게 여러분들의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여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복음을 가슴에 새기고 십자가 복음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이 시대를 개력하면서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복음을 만나야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다 상대적으로 사람을 바라보지만, 예수의 복음을 만나고 나면 사람을 바라볼 때 딱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다. 그 사람이 이 복음을 아는 사람인가? 아니면 복음을 알아야 될 사람인가? 우리 사랑하는 부모님들, 사랑하는 자녀들, 바라볼 때 정말 교회만 다니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의 가슴 속에 이 복음이 있는가, 오늘 밤 주님이 오신다면 천국을 갈 수가 있는가? 순장님들, 그냥 순모임이 아니라 모든 분들 가슴 속에 예수의 생명이 복음의 생명이 있는가이다. 우리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 복음을 심어내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한국을 새롭게 만드시는 유일한 분이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 한국을 새 판을 짜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 정말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세상에서 복음을 정리되는 이름 되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사도행전 적 교회의 두 번째 모습은,,,
 
2. 둘째, 성령: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

-성령의 역사가 일상이 되는 교회, 우리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비록 제자들이 살아가지만, 성령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이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차이는 무엇인가? 똑 같이 예수님을 따라다닌다. 기적도 일어나고 복음도 전하고 기도도 한다. 그러나 4복음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만 주인이 그들 자신이다. 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간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체험하고 성령을 체험하고 나니까 주인이 달라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과 사명을 위해서 인생을 던졌던 사람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평범한 신자와 진정한 제자의 차이는 성령을 체험했는가? 이다. 내가 주인이 된 인생과 예수님이 주인이 된 차이가 무엇인가? 그냥 예배하는 사람과 정말 예배당의 문을 나서면서 정말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내 속에 성령님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그냥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제자들은 그냥 그렇게 되는 줄 알았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고 예수님 따라 다니다가 왕 노릇 했을 때, 우리도 한 자리를 차지하리라고 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냥 땅에서 예수님 잘 믿고 구원 받고 나름대로 땅위에서 만족하면서 살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사람 인생은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뛰어난 4복음서의 제자라 하더라도 사도행전의 제자만 못한 것이다. 사도행전이 제자, 4복음서 인생을 끝을 내고, 사도행전이 성령을 따라 내 삶을 살아 불꽃처럼 던져내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도행전 1:4-5,
4 사도와 함께 모이 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반드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다. 사명을 받기 전에 먼저 받아야 될 것은 성령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명을 행하기 전에 먼저 체험해야 하듯이 성령 체험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성도님들 기본적인 제자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종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에 이끌려 나가는 이런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제가 성령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대학교 1학년을 들어가서 저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을 믿고 난 다음에 그 감격, 그 하나님의 은혜, 반응하면서 그렇게 젊은 날을 보낸 시절이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난 다음에 대학을 다니면서 통역관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사장님을 모시고 버어마, 요즘은 미안마라고 한다. 그곳에 통역을 하려고 들어갔다. 그곳은 얼마나 가난한 나라가 아닌가? 군부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나라였다. 호텔을 나오면 수십 명의 아이들이 구걸하며 따라다닌다. 아웅산 수지 여사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가택연금을 당했던 시절, 대학생들이 데모한다고 대학교 문을 닫고 계엄령을 선포한 나라, 일할 것이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들, 일을 게으른 사람들, 거짓말 하는 사람들, 교회라고는 하나도 그 나라를 다니면서 한 열흘쯤 일을 하고 난 다음에 너무 가슴이 터져왔다.
 
“하나님, 이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고귀한 피조물인데, 어떻게 세상에 이런 나라,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제 맘속에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이런 나라에 십자가의 복음이 필요하지, 네가 이런 나라에 위해서 선교사로 헌신하지 않겠니?’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때 마음에 주신 감격을 가지고 매일 하루 세 번씩 기도했다. 그곳의 선교사 적 삶이었다. 주님께서 그 말씀에 그때 하신 말씀이 있어서 NO라고 말은 못하고 주님께 물었다. “주님, 몇 년이면 되겠습니까? 일 년이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주님, 2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간적인 열정으로 할 수 있다면 5년이면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네가 정말 이 나라를 사랑한다면,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해야지”라고 하셨다. 그 주시는 말씀에 YES!라고 답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행기 안에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제가 젊은 날 주님을 만나서 그렇게 복음을 위해서 뛰어 다니고 방학이면 낙도로 오지로 뛰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전철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캠퍼스 곳곳을 누비면서 예수 복음을 전하면서 다니는데 주님이 원하시면 아프리카 끝까지도 갈 텐데, 왜 주님이 말씀하실 때, 제가 ‘예’라고 답변을 하지 못했는가!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여 주신 것이 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 아등바등 뛰어다니고 있는 제 모습이었다. 열심을 내는 것도 다 귀한 일이다. 여러분, 주님의 제자들은 어땠는가? 부친을 버려두고,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다. 엄청난 체험을 했지만 그러나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육신적인 제자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우리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면, 최선의 열매는 맺을 것이다. 그러나 4복음서의 최선이 아니라, 사도행전 적 놀라운 제자의 삶은 성령이 우리를 주도적으로 지배할 때 가능한 일이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인생, 단 한 번의 인생이다. 어느 정도로 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당장 순복음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 그것은 아니다. 우리 개혁 신앙의 모판이라고 볼 수 있는 사도바울, 바울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아야 한다.
 
*고전 2:4~5,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내었던 한 사람, 사도바울이다. 사도바울 정도가 되면 말씀에 출중한 사람이다. 구약 성경을 암송했던 바리새인 아닌가? 율법 앞에 완벽하게 살아내었던 한 사람, 그러나 하나님 받아서 예수님을 체험 했을 때, 그의 모든 것들을 그의 배설물들로 여기고 오직 그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만 나타나시기를 열망했던 사람, 나는 죽고 내 속에 살아 있는 성령님으로 살아내었던 사람이다.
 
여러분,
우리는 태양이 아니라 달과 같은 존재이다. 차이가 무언가? 태양은 빛을 발하는 존재이고 달은 반사하는 존재이다. 성령의 빛을 받아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빛이 나아간다. 예배할 때마다 성령을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매일의 삶이 성령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이런 삶이되길 바란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이 임했을 때, 특별한 문장이 하나 있다. ‘성령께서 각 사람 위에 임하시느니라.’ 우리가 예배는 같이 할 수 있다. 기도도 찬양도 같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처럼, 성령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한다. 70억 인구에 지문이 다 다른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성령을 부으시고 성령에 이끌려서 세상을 변화시켜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최선이 아니다. 성령이 이끌어가는 인생, 남자 집사님들 가운데 가끔 이런 분들이 계신다. ‘나는 아내의 옷자락만 붙잡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아니다. 우리 자녀들 중에 ‘나는 부모님의 기도 때문에 살아가는 자’라고 하는 것도 참 귀한 고백이지만 부모님들이 기도를 할 뿐만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기도를 가르쳐 주어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자녀로 탄생시켜야 한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 세 번째를 이야기 하겠다.
 
3. 셋째, 증인: 예수님 증인으로 사는 교회.

-예수의 증인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전도하러 오신 분이시다. 매일 아침을 깨워서 새벽을 깨워서 기도하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오늘은 이 마을, 내일은 저 마을,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의 말씀으로 세웠던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마지막 하신 부탁이 무엇인가? 땅 끝까지 가서 이 복음을 전파하라.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외치고 고백한 것이 무엇인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이 복음 전파에 힘쓰라. 전도하는 사명은 누구나 부담스럽게 여기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정말 전도하기 쉽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어야 한다. 이 시대에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가지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우리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성령을 주셨을 때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유를 보면, 8절의 말씀에 나와 있다.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말씀한다. 예루살렘 뿐 만이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다. 우리 가운데 이런 분들이 계시지 않는가? “주님, 저는 왜 이렇게 영혼을 향한 관심이 적을까요? 주님, 저는 전도에 대한 관심이 없을까요?” 하면, 우리 주님은 “너는 어찌하여 영혼을 향한 흘리는 나의 눈물을 그토록 모른단 말인가?” 하신다. “주님, 제가 전도사를 하게 해주세요.”라는 그 기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기도가 있다. “주님, 저에게 영혼을 향해 흘리는 주님의 눈물을 회복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의 모든 관심은 영혼이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을 만나야 될 사람인가?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하신 기도가 무엇인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전도하기 어려운 시기라는 것도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거센 이 시대에 여러분, 아무리 전도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초대 교회만 했겠는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목 베어 죽고 화형에 불타 죽고 그렇게 죽어갔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한국 땅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땅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느라고 그 고결한 20대, 30대를 이 땅에 뼈를 묻었던 믿음의 조상들,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녀들까지도 이 땅 위에 생명을 다 바쳤던 사람들이다.
 
헤롯 선교사를 기억하는가? 1885년도에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한국 땅에 28살 나이에 들어왔다. 지금처럼 전염병이 번졌을 때, 한 사람, 한 사람 돌보다가 그도 전염병에 걸려서 이 땅을 떠났다. 두 아이의 아버지, 서른세 살의 젊은이였다. ‘루빗캔드리’는 24살에 한국에 들어와서 일 년도 채 못 되어서 이 땅을 떠난 가련한 사람, 윌리엄 정킨스, 이름이 기억나는가? 한국 땅에서 세 명의 아이를 이 땅에서 묻고, 그도 43살 젊은 나이에 복음을 위해서 달려가다가 주님 품에 안긴 사람, 그의 자녀가 대를 이어서 계속 전도하고 있는 이 땅, 수많은 호주의 선교사들, 영국의 젊은이들, 캐나다의 젊은이들, 미국의 젊은이들의 피와 땀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오늘까지 왔다. 우리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영혼구원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증인의 삶이다.
 
제가 유럽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수련회를 인도할 때가 있었다. 유럽에 많은 나라들과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 또 이슬람권 나라들, 동구권에 있는 선교사님들, 한 150명이 참석을 했다. 그분들은 여러분들처럼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평신도로 계시다가 선교사로 오신 분들이다. 10년, 20년, 30년을 섬기는 분들, 그렇게 열심을 내어도 교회에 가면 10명, 20명, 30명이 다이다. 선교사님들의 아이들이 와서 저희 교회에 오면 저에게 이야기를 한다.
 
“목사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정말 존경스럽지만 이렇게 살아서는 되는지 모르겠어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이 좋은 대학을 나와서 여기서 석사 박사를 다 마쳤는데, 한국 땅에 들어가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편안하게 살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됩니까? 이렇게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20년을 목회하는 엄마 아빠, 열 명 앉혀놓고 독일 말로 설교하는 엄마 아빠를 보면, 존경은 스럽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선교사님들도 몇 분이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신다. “목사님, 제가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제 인생 주님을 위해서 드리기로 결단하고 한국 땅을 떠나서 이곳에서 공부를 마쳤고, 체코 말로 그렇게 설교를 해도 30년을 목회하는데 20명을 앉혀놓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신다. 제가 선교사님들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이 땅위에서는 제가 화려하게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천국에 이르게 되면 나는 너희 어머니 아버지의 그림자도 밟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했다. 선교사님들 앞에서 정말 존경하는 마음으로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그렇게 설교를 했다. 저는 말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그분들은 삶으로 예수를 증거 하는 분들이다.
 
여러분, 한 번 물어보시길 바란다. 그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과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정말 동일한 분이 맞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러분 가족들 가운데 아직도 이 예수님을 몰라서 오늘 밤 주님이 오신다면 영원한 이별을 해야 될지 모를 사랑하는 자녀가 있는가? 우리 자녀들이 이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를 떠나는 비율이 80%가 넘게 나타난다. 미국도 한국도 다 마찬가지이다.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에 만족을 해서는 안 된다. 정말 그들 가슴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오늘 밤 주님이 오신다면 영원히 이별을 해야 될 아내와 남편이 계시지 않은가? 지금 내 가족이 죽어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심정이 아파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오른 손을 심장에 올려놓고 한 번 물어보라. “주님, 제 속에 뛰는 이 피가 정말 당신의 피가 맞습니까?
 
내가 정말 유일한 예수님, 주님으로 말미암아 천국 간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까?” 한 번을 만나야 할 예수님이다. 이 땅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영생의 축복이 예수님이시다. 이 땅을 떠나 만나는 예수님은 심판의 예수님이시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 이 봄이 지나가기 전에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한 번은 만나야 될 예수님, 이런 예수님이 심장에 새겨지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교회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 펜데믹이 지나고 새 판을 짜야 될 교회, 마지막 네 번째이다.
 
4. 넷째, 재림: 예수님 재림을 사모하는 교회.

-예수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신앙인, 예수님 하늘로 올라가셨다.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가? 예수님은 죄인의 괴수처럼 이단자로 처형을 당하시는데 그들은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앞으로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죽지는 않는 걸까? 제자들 가슴 속에 착잡한 것이다. 오늘 하나님이 말씀 하신다.
 
*사도행전 1:11,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성도님들, 여러분의 눈을 보면서 제가 물어보고 싶다. 정말 오늘 에배하는 모든 분들은 진지하게 대답을 해보라. 우리 예수님이 다시 오시 것을 정말 믿는가? 아멘, 우리가 살아내는 동안에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순간 주님을 앞에서 눈을 뜬다는 것을 정말 믿는가? 주님의 재림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로 땅위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잠시 살아가는 인생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 땅에 호흡이 있게 하셨다는 것은 아직까지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명을 향해서 달려가다가 주님 부르시는 그날에 영광스럽게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이다.
 
진짜 신자, 진짜 신앙을 보고 발견하는 자가 십자가를 다 믿을 수 있다. 부활의 감격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정말 믿고 있는가? 영원한 천국을 정말 믿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다. 진정한 신앙인으로 보려면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말한다.
“어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살아내고, 오늘 부활하신 것처럼 살아내고, 마치 내일 오실 것처럼 재림 하실 것처럼 여기고 살아내라.” -마르틴 루터-
 
이 재림 신앙을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제가 목회를 한 지가 10년째가 되었다. 10년 동안은 총신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이제 미국에서 목회를 한 지가 10년째가 되었다. 참 행복한 교회, 즐겁게 목회를 하고 있다. 목회하면서 보람되고 감사한 시간이 있다. 참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주님 품안에 안기는 성도님들을 볼 때이다. 연세가 지긋하셔서 갈 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는가? 젊은 시기에 주님 품에 안기는 안타까운 일들도 있다. 그러나 믿음 하나 가지고 죽음 앞에서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정말 이게 신앙이구나 싶다. 60대 한 집사님, 제가 늘 형님이라고 불렀던 집사님이 있다. 이 땅을 떠나시는 순간 “목사님, 잠시 먼저 천국 가서 목사님을 기다리겠습니다. 목사님이 오실 때에 제일 먼저 가서 마중하러 나가겠습니다.”라고 하셨다. 한국에 잘 알려져 있는 에일리 양의 가수 어머리가 참 훌륭한 신자이시다. 너무나 안타깝게 50대에 얼마 전에 이 땅을 떠나셨다. 집사님이 마지막 호흡을 하시면서 “목사님, 신자의 이별은 굿바이가 아니라, 굿나잇 이에요.”라고 하시고 미소 지으면서 주님의 품으로 가셨다. 그런 것이다. ‘신자의 이별은 영원한 굿바이가 아니라 잠시 눈을 뜨고 다시 만날 굿나잇이다.’
 
제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두 가지 생명을 떠올린다.
하나는 육신적인 생명이고, 하나는 영적인 생명이다. 우리 예수님은 33세에 이 땅을 떠나셨는데 저는 이미 20년을 더 살았다. 예수님만큼 살면 오래 사는 것이지 얼마나 살아야 하는 것인가? 충분히 산 인생이다. 이제는 매일 매일이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그러니 무엇에 연연하고 무엇을 잡을 것이 있겠는가? 영원한 생명이다. 지금 눈을 감아도 영원한 천국에서 눈을 뜨는 인생이라면 더 이상 땅 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재림을 사모하면서 내일이 마지막처럼 여기고 살아내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가 펜데믹을 지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교회, 부흥을 살아내는 이 시대의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보았다.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바위를 뚫는 간절함이 있어야 간절한 갈망이 있어야 이런 교회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삶이 가능한 것이다. 복음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문자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듣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성령의 간절함이 있어야 기본 신앙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신앙이 가능한 것이다. 전도에 대한 영혼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자녀들을 바라볼 때, 눈물이 회복되고 목자의 심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재림을 향한 간절함이 있어야 땅 위에 화려한 것에 눈이 멀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늘의 태양을 본 사람들이다. 하늘에 태양을 보았다면 땅 위에 화려한 샹들리에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는다. 하늘의 태양보다 더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본 사람들이다. 이런 사도행전 적 교회를 다시금 이 세상 가운데 현실로 만들어내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한다. 펜데믹을 지나면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교회, 이제는 꿈꾸는 교회가 아니라 이런 부흥을 살아내는 교회가 됨으로써 사랑의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울타리를 넘어서 서울의 수많은 교회를 깨워내는 교회, 조국의 교회를 깨워내어서 모두가 이런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주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꿈꾸시는 교회,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교회가 되어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 가슴이 새로워져서 내가 죽고 성령이 살아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사석위호 같은 그 간절함으로 한 영혼을 향한 잃어버린 눈물을 회복하여야 한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내는 삶이 되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만이 아닌 모두의 교회가 새롭게 되는 교회, 이런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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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5월 4일)
제목: "가정의 온전함을 위한 길"

말씀: 여호수아 24:14-18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쉐키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이민형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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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4:14-18,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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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응답을 체험하기 위해서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14-18절까지 말씀이다.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 오월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지난 한 주간 맑게 게인 파란 하늘과 아침에는 좀 차갑지만 봄 꽃 내음이 묻어있는 신선한 공기들을 들이마실 때면 몸과 마음이 참 상쾌해지는 요즘이다. 이 오월의 푸르름은 그 어느 것과 다르고 그 어느 때와 차이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다음은 우리나라만을 파랑색을 의미하는 다양한 표현이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번 생각해보자. 푸르다. 파랗다. 퍼렇다. 새파랗다. 시퍼렇다. 파르스름하다. 푸르스름하다. 파릇파릇하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 차이를 구분을 할 수 있겠는가? 외국인들이 한국말 중에 어려운 말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모두 ‘blue’인데 말이다. 아무튼 새로운 계절의 신선함이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 가운데 풍성하기를 소원한다.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평소 가정에서 가족들 간에 평화를 잘 유지 했다면 이 오월이 참 많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될 것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목자의 심정으로 섬겨주시는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스승의 날, 그리고 부부의 날(5/21일), 교회적으로는 온 세대 연합주일, 그야말로 가정의 소중함고 서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풍성하게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정말 많다. 그런데 반대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혹시나 마음이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다면 하루걸러 하루가 조금은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내일이 어린이 날이다. 초등학교 이하 자녀를 둔 부모님은 이미 며칠 전부터 우리 아이들이 보내오는 사인을 눈치를 확인하셨을 것이다. 혹시나 우리 부모님이 부담되실까봐 말은 잘 안한다. 눈빛으로 이야기 한다. 어떻게 잘 준비했는가요? 기대 이상의 선물을 받으며 행복한 어린이날을 보내는 우리 아이들은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 가지로 생각에 스스로 놀랄 것이다. ‘아 어버이날,’ 교회나 학교에서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를 드리는 글을 쓰라고 해서 몇 자 적기는 했는데 이 편지만으로 어린이 마음에 너무 약소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의 큰마음을 담은 소중한 선물을 부랴부랴 준비한다. 색연필과 종이면 충분하다. 이렇게 종이에 쓰기 시작한다.

‘효도쿠폰, 어깨, 팔, 다리, 온몸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안마쿠폰, 청소, 설거지, 심부름 쿠폰 등’ 이 아이들이 평소하지 않았던 것만 해주겠다고 말하니 정말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참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효도 쿠폰을 받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얘들아, 유효기간을 좀 늘려주면 안 되겠니? 엄마 아빠가 깜박할 때가 있거든, 카톡으로 쏘아준 것도 1년 넘게 안 쓴 것도 있단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온라인에 함께 예배드리시는 모든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향해 이런 마음을 갖고 계실 것이다. “공부 좀 못해도 괜찮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 선물 보다는 우리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몸과 마음이 잘 자라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공부도 잘하고 믿음도 좋으면 더 좋을 것 같다. 글로벌 특새를 통해 사랑의 교회 영 가족은 수선대후, 신앙의 세대계승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다시 한 번 확인 하셨을 것이다. 십 년, 이십 년 뒤, 그리고 삼 십년 뒤 우리 자녀들이 한국교회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시대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인물로 쓰임 받을 줄로 확신한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함께 살펴보는 본문의 말씀을 자녀들과 부모님이 각각 마음에 새겨서 적용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가정의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바란다.

 
혹시나 남편과 아내, 부모님과 자녀들 사이에 힘든 관계의 문제가 있었다면 그 어려운 문제까지도 하나님께서 간섭해주시고 해결해 주시기를 소원한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 24장에 스토리는 앞서 기록된 23장의 내용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23장 숫자 옆에 있는 소제목을 보아도 나와 있는 것처럼 여호수아의 마지막 말, 즉 여호수아 할아버지가 유언과 같이 남기는 고별 설교의 내용이 여호수아 23장, 그리고 24장, 이 두 장에 걸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한국교회 어른이시고 신앙의 선배이신 고 정필도 목사님께서 소천하시기전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 기도의 내용을 영상을 통해서 들으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마지막 가쁜 호흡 가운데 사랑하는 가족들과 손님들에게 권하고 싶으신 말씀을 간절한 기도에 담아주시는데 핵심은 이것이다. “적당히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라.” 한국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속에 큰 울림이 되는 정말 큰 울림이 되는 메시지였다. 동일하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귀한 가정에 주시는 특별한 메시지가 되길 소망한다. 모세의 뒤를 이어 평생 멋지게 쓰임 받고 이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이 임박한 여호수아는 23장에서 먼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다 불러놓고 첫 번째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한다.
 
*여호수아 23:2~3,
2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나고 수많은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고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워 승리하게 하신 위대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지금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전쟁은 군사력이 강하고 최신식 무기를 가진 나라가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고 당연한 이치이다. 이 원리대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난공불락(難攻不落) 같은 여리고성을 절대 무너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이 말씀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엿새 동안에 하루에 한 번씩 한 바퀴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로 하여금 나팔을 불게 했다. 처음에는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의심의 강도는 점점 높아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을 돌지만 아무런 일도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첫째 날 성벽을 도는데 성벽 왼쪽에 금이 가 있고 둘째 날에는 한 쪽에 구멍이 나있고 뭐 이런 조짐이라고 보였으면 기대를 가지고 일곱째 날까지 신나게 돌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엿새 동안 아무 일도 먼지 하나 날리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안에 있던 적들도 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성벽 그 주위를 도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쟤네들 어떻게 된 것 아닌가?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마지막 일곱째 날 일찍이 새벽 일찍이 작전이 진행되었다. 설마, 설마, 설마, 혹시나 그들 가운데 여전히 의심의 마음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날 그 새벽, 기적은 일어났다. 여호수아 6장을 보자.
 
*여호수아 6:20~21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 하니라.
-이처럼 여호수아는 먼저 이스라엘을 지도자들을 다 모아놓고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여리고성 전쟁뿐만이 아니라 이어지는 모든 싸움과 전쟁가운데 공통점 한 가지가 있었다.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신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다. 여호수아의 이 마지막 유언과 같은 메시지를 들으며 사람들은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신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 이 메시지를 마음속에 분명히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설교의 본문은 이것이다.
 
*여호수아 23:11,
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수아는 이제 그의 인생을 마무리하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이 말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것이 그의 인생에 최고의 목표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마음의 결단과 그에 따른 행동의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마치 오래전 어느 SNS에서 한 초등학교의 4학년 학생의 연애 편지를 보게 되었다. 그때 이 내용이 너무 인상 깊어서 제가 잘 가지고 있었다. 성도님들께 잠시 소개드리겠다. 오늘 자녀들과 예배드리고 계실 텐데요. 삐뚤빼뚤 글씨로 쓴 초등 4학년의 글씨이다. ‘네 눈에서 눈물 나면 내 눈에서 피 눈물 난다. 네가 아프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너를 하루라도 못 보면 잠도 설쳐. 네가 전화 안 받으면 걱정되어서 미칠 것 같애, 넌 사랑한다는 말하지 마, 내가 해, 평생 내 옆에만 붙어있어 내가 인생을 사는 이유이고 내 인생의 전부이니까, 사랑해!’라고 썼다. ㅎㅎㅎ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이해되지 않은 모호한 철학적 개념이나 혹은 일주일에 한 번 예배드릴 때만 하는 표현이 아니라 이 아이의 순수한 생각처럼, 물론 대상은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이유이시며 모든 것이 되심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의미가 아닌가? 오늘 함께 나누는 말씀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가정의 온전함을 위한 첫 번째 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I.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고백을 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는가? “나는 너를 50%만 사랑해”, 또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부족해서 너를 80% 밖에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전부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찬양하는 것이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 되길 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 이 자리에 부모들이 많이 계시다. 우리 자녀들이 어디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가? 교회라고 대답할 수 있다. 물론 맞다. 그러나 가정에서 따뜻한 우리 가정에서 우리 부모님들께서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면 좋겠다. 아이들이 부모님께 묻는다. “엄마, 왜 특새 가요?” “응, 하나님 사랑하니까”.... “아빠, 요즘 진짜 많이 힘들어 보이시는데 매일 그렇게 찬송하고 기도하시나요?” “응 하나님 사랑하니까”... 우리 부모님들께서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주시는 모든 행동의 이유가 하나님, ‘사랑하니까’,... 그렇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 한 번 해보자. 백문(白門)일(一)답(答), “하나님 사랑하니까”....내일부터 연휴인데 어떻게 이 저녁에 여기 오셨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자녀들이 그렇게 말도 안 듣고 내 속을 박박 긁어 놓으실 텐데, 정말 속상 하실 텐데, 어떻게 끝까지 참으시며 기도하시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요”... 아멘!! 댁으로 가셔도 그렇게 말씀하시길 바란다. 이렇게만 대답하시면 가정의 평화뿐 아니라 이 나라가 새로워질 것을 믿는다. 하나님 사랑하니까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 사랑하니까,... 눈물 나고 마음이 무너져도 하나님 사랑하니까,....
그것이 우리의 삶의 대답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호수아는 오늘 본문에서 24장에서 이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두 번째 고별 설교를 한다.
*여호수아24:1,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여호수아 할아버지는 두 번째 유언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브라함은 어떤 존재인가? 그렇다. 이스라엘의 국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지금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내며 슬쩍, 그의 집안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솔직히 여호수아 정도 되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어디 감히 이스라엘의 시조이신 아브라함의 과거이야기, 그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나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부정적인 내용을 꺼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감추고 싶었던 아브라함의 과거사, 그 부정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여호수아 24:2,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은 원래 하나님과 관계없는 우상을 섬기는 집안 출신이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단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아브라함의 과거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존재는, 원래 부족하고 자격 없는 사람이었지만, 누가 부르시고 선택해 주셨는가? 하나님이시다. 그렇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처지, 상황과는 관계없이 그분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여호수아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자손들, 즉 요셉까지, 믿음의 4대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의 절정에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출애굽과 홍해 사건일 것이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수많은 적들과 싸워 승리하게 하신 것,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 사랑하는 성도님들 가정에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그저 답답한 마음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경험하고 계시는가? 그 모든 문제와 어려움들이 오직 하나님 은혜로만 해석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호수아는 여호수아 23장, 그리고 24장에 걸쳐서 목자의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구구 절절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야기 했다. 그리고 드디어 강력한 말씀 선포와 함께 과감한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14절 말씀을 보자.
 
*여호수아 24:14,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메시 성경으로 보면,
그러니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온맘과 뜻을 다해 그분을 예배하십시오. 여러분의 조상들이 유프라데스 강 건너 편과 이집트에서 숭배하던 신들을 없애버리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15절 말씀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는 제안을 한다. 읽어보겠다.

 
*여호수아 24:15,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마치 성경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여러분 각자 고민해보고 각자 생각해 보고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가? 그것을 여호수아는 말하려고 했던 것인가? 아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선택할 기회를 주며,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기 때문에 최후의 결단을 내릴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담임 목사님께서 새 판짜기를 위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 시리즈 중, 작년 10월에 ‘회색지대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마태복음 13장의 메시지를 전해 주신 것을 기억한다. 설교 말씀 중에 진리에 관해서는 회색지대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만큼은 정말 단호한 어조로 선포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가?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인생의 질문은 바로 우리 집값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 자녀는 어떤 대학에 갈 수 있을 것인가? 가 아니라, 나는 구원 받았는가? 우리 자녀들은 구원 받았는가? 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이지만, 우리 다음 세대가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시대적 상황은 믿음으로 결단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티기 힘든 그런 세상이다. 다음 세대 영혼을 파괴시키는 악법을 만들이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인 것처럼, 양의 탈을 쓰고 판을 치는 지금, 돌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을 우리가 바라보며, 여호수아 할아버지의 마지막 권면과 도전의 메시지를 반드시 마음에 새기고 결단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정의 온전함을 위한 두 번째도 바로 하나님만 섬기며 예배하는 것이다.
 

II.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다.

 
-너무 단순해 보이는 내용처럼 느껴지지만, 방금 말씀드린 대로 거짓과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 가운데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 이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매 순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만을 섬기며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겠다는 과감한 결단과 각오가 필요한 줄 믿는다.
 
말씀을 정리하겠다. 제가 어릴 적 가정의 달이 되면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자주 불렀던 찬송가가 있었다. 통일 찬송가는 305장, 새 찬송가는 555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있고’ 이다. 가사와 곡조는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데, 다만 후렴의 음이 조금 높아서 힘들게 불렀던 기억이 난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있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 집 즐거운 동산이다. 고마워라 임마누엘,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
-오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며, 사랑하는 영 가족 가정마다 모두가 하늘의 기쁨과 감사가 더욱 넘치길 바란다. 또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능력으로 충만해서 온전한 믿음의 가정으로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요약
가정마다 언제 임마누엘, 함께 하시며 때마다 일마다 꼭 은혜로 채우시는 우리 주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믿음의 명문가정이 되r길 소원한다. 우리가 교회의 주일학교, 중고등부, 대학부, 청년부가 다음세대를 살리는 복음의 전초기지로 사용되길 기도하며, 우리 가정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 가는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하며 힘들고 괴로운 일들 가운데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예배하면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에 우리 가정의 신앙의 유산을 다음 세대를 든든히 세워주실 것을 기대하며, 강한 믿음 보고를 올려드려야 한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정과 부모님과 교회와 목사님들과 영 가족들을 위해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섬기는 사랑이 넘치는 영 가족이 되어서 복된 오월의 가정의 달을 아름답게 맞이하고 보내야 한다.

-여호수아의 유언과도 같은 고별 설교이다. 모세가 죽기 전에 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강조하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섬길 것을 다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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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5월 1일)

제목: "영광스런 자유"
말씀: 출애굽기 12:41~4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박신일 목사님-초빙(캐나다 그레이스 한인교회)
--------------------------
 
*출애굽기 12:41~43,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오늘도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해 나온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만이 주는 평강과 위로가 함께 하길 바란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참으로 믿는가? 정말 믿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 하게하실 것도 믿는가? 그날이 올 것이다. 제임스 페이커 라고 하는 신학자는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시간을 역사’라고 부른다고 정의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와 하나님이 이 역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도대체 우리의 인생도 그 역사의 한 파트인데 이 역사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모든 역사를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줄 믿는다.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다. 그 주님의 영광 속에 우리는 잠깐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침표를 찍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콤마를 찍는 사람이며 마침표를 찍을 분은 주님밖에 없으시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 주제는 우리가 아니다. 그 역사 속의 주제는 하나님이셔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우리와 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오늘 출애굽 사건 된 이유가 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처럼 430년의 노예 생활이 끝나는 장면이다. 이것은 감격 중에 감격이다. 이들이 출애굽을 경험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출애굽 된 첫 번째 이유가 --- 하나님께 이들이 기도하고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23-24,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애굽의 출발점은 백성들의 기도였다. 너무 힘들어서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이다.
 
▷출애굽 된 두 번째 이유 --- 하나님이 들으셨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약속의 땅에서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이방에 끌려서 객이 되었다가 다시 400년이 지나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때가 찼기 때문에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행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노동력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소유물이었다. 절대로 안 내보낸다. 그런데 열 번째 재앙이 내렸을 때, 모든 장자들을 다 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냥 있으면 다 죽는다. 그들은 주님 말씀대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은 피를 발랐고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 심지어 성경을 보면 감옥의 있는 장자까지도 다 죽었고 모든 짐승의 첫 것들도 다 죽는다. 그러나 피를 바른 가정은 살았던 것인 줄로 믿는다. 이것을 우리는 유월(踰越)절(節)이라고 부른다. 바로 유월절 사건에 일어난 일은 바로 왕의 권세가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인 줄 믿는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 죄의 앞에 권세 앞에 무릎 꿇은 것이 구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악이 정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떤 어둠이 없을 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구원을 믿는 사람들은 악과 싸우는 것이다. 죄와 싸우는 것이다. 그런 빛의 자녀로 우리가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며 살아가는 이번 주간이 되길 바란다. 우리는 그 구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완성이 될 것을 알기에 그 주님의 동역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열 번째 재앙이 끝났을 때, 오늘 읽었던 출애굽기 12:41절을 다시 보자.
 
*출애굽기 12:41,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30년이 끝나는 기간 동안 살았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36년 살았다. 얼마나 그 기간이 힘들었겠는가? 열배가 넘는 430년, *여기서 자유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런 자유이다. 이 놀라운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 우리 모두에게는 죄의 권세로부터 끊어지는 영광스런 자유가 임한 줄로 믿는다. 그래서 구원은 바로왕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왕이 없는 것이다. 이전에는 바로 왕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했다. 이제는 바로 왕이 없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가? 누가 그들의 왕이 되어야 하는가? 이때부터는 하나님이 말씀에 따라 이동한다. 구름기동과 불기둥을 따라 이동한다. 구원은 굉장한 중요한 의미를 출애굽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구원은 내 인생에 왕이 바뀌는 것이다. 왕이 바뀌는 것이 구원이다. 여러분 왕이 바뀌었는가? 출애굽 이야기에 중점내용이 하나 그것은 너무나도 기쁘게 떠난 것이다. 장정만 60만, 200만이 넘는 사람이 너무 너무 감격스럽게 탈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을 땅에 모두가 감격으로 출발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기쁨으로 시작했는데 원망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출발은 다 기쁨인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것 광야에서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들이 나온다. 신기한 일이다. 다 기쁨으로 출발했는데, 왜 광야에 신앙 여정에서는 피곤해지고 그만두겠다고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인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일이 있고 일어나고 있다. 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구원의 감격은 영광스런 자유의 경험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너무너무 기뻐서 우리는 신양생활을 하는 것이다.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그런데 광야 같은 신앙여정을 걷다보면 지친 사람이 나온다. 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화가 나기도 한다. 심지어 종교인이 되어버린다. 우리 좀 솔직히 이야기하면 지칠 때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 오늘 나누고 저의 싶은 고민은 왜 우리가 영광스런 자유를 누렸는데, 비참한 자유로 바꾸었는가? 영광스런 자유를 주셨는데, 그 길을 걷고 있는데 왜 이렇게 초라한 자유를 누리는가? 초라한 자유를 누리는가? 왜 그렇게 지겨운 자유를 누리는가? 뭐가 문제인가? 이것을 고민해 보려한다. 원인을 알고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는 기쁨으로 순례의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다. 어떡하면 일이 일어날까? 문제를 잘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이라는 의미를 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로마서 5:17-18,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뭐가 왕 노릇 하냐면 죄가 예수 믿기 전에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기 전에는 죄가 왕이다. 그 죄의 결과 사망이 우리 모두를 지배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 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담당하신 그분을 믿는 순간 우리 모두는 죄의 모든 죄에게 해방되어 은혜의 생명의 왕 노릇하는 것으로 옮겨지는 주님이 왕이 되시는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망이 지배하지 않는다. 영생이 지배한다. 그래서 바울은 왕 노릇한다고 한다. 다른 표현을 보겠다.
 
*로마서5:12,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전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을 했었는데, 예수님을 믿으니까, 의로 덮어주시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여 내가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 이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나는 죄에게 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떤 지식이 들어와도 죄를 못 이긴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가? “오, 나는 권고한 사람이로다.” 내가 주님을 원해서 주님과 살고 싶은데 몸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나를 본다고 말한다. 이 사망에서 나를 누가 건져내랴! 고 바울은 이 고민을 했다. 고민을 한 것만이 아니라 답을 얻었다. 그다음에는 어떤 지식이 와도 죄를 못 이긴다. 왜? 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죄는 파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가 죄이다. 아무것도 죄를 이길 수 없다. 그것은 글자로도 지식으로도 안 되며 왜 제가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론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다. 무슨 말인가? 바울이 깨달은 것이 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은 땅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여러분 구원은 능력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능력이시기 때문에 건져내신다. 이것을 왕 노릇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는 죄를 못 이긴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 안에 계신 줄로 믿는다. 이렇게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건져주신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고 걸어가는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짜증이 나고 원망이 날 때가 있다. 왜 영적인 직분의 행동이 자꾸 멈추는 것일까? 출애굽기를 보면 이유를 잘 분석할 수 있다. 원인은 간단하다. 먹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박이 없다. 먹고 싶은 것 없을 때, 부추, 마늘이 없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이유로 실망하기 시작한다. 내가 원하는 삶이 누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먹을 걸로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끼지 이야기 인데 주님이 돈을 넉넉히 주시는가?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깊이 깨달은 바가 있는데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주님은 평생 먹고 살 것을 잘 안 주신다. 그런 분이 있다면 굉장히 천연기념물 같은 분이다.
 
우리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도 오늘 날 우리에게 일 년 먹을 것을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일 년 먹을 양식을 주면 불평 투성이 이다.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다. 그 사람은 감사하다. 우리가 왜 자꾸 쓰러지는 것인가? 왜 신앙생활이 종교생활로 전락해버리는가? 이유가 간단하다. 내가 원하는 삶이 누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정리하면 애굽에 살 때 노예로 살 때, 누가 왕이었는가? 바로였다. 광야를 탈출해서는 누가 왕인가? 하나님이 왕이시다. 지치는 이유는 은밀하게 우리 주특기가 등장한다. 저와 여러분은 전공을 안 해도 있다. 우리의 주특기가 있다.
 
제가 시골교회 담임 전도사로 3년을 사역해야만 목사 안수 자격을 저는 농촌 교회에서 강원도 원주의 농촌교회에서 86년도부터 20대에 시작했다. 저는 목회 반을 시골 교회에서 시작했다. 심방을 가면 어머님 같은 권사님들이 전도사님이 오신다고 마당 앞을 50미터를 쓸었다. 그리고 전날 쓸고 아침에 또 쓸었다. 마치 새파랗게 젊을 전도사를 주님 대하듯 맞이해 주셨다. 안방에 들어가면 나무로 불 떼는 시골집이다. 정말 뜨겁게 떼놓고 꼭 아랫목에 앉게 하셨다. 앉으면 덴다. 방석 깔고 거기에 앉으라고 하신다.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제일 안방에 아랫목에 앉으라는데, 6개월 담임을 하고나서 주특기를 알았다. 어디가든지 아랫목만 보인다. 그게 제 자신처럼 보인다. 저와 저의 아내 기도가 있다. 끝까지 순전하게 목회를 해달라는 것이다.
 
1) 첫 번째 우리의 주특기는 왕이 되는 것이다.
광야에서 왜 피곤해지는 것인지 아는가? 우리는 몰래 내 왕국을 건설한다. 내가 왕이 되니까 내 뜻대로 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는 주님을 손가락질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신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지금 우리의 말하면 1조로 말하면 믿지 못하니까 지금 백억을 빚진 자가 있다. 백억을 빚진 사람이 주인이 갚으라고 하니까 제가 평생을 일해서 갚겠다고 한다. 그러나 갚을 수가 없는 돈이다. 그것은 비유로 이야기 한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 주인이 다 용서해 준다. 백억을 용서 받았다는 것을 듣고 이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았겠는가? 엄청 좋았을 것이다. 백억을 받는 것보다 탕감 받은 것이 덜 기쁜 것은 알지만 ㅋㅋㅋ 너무 기뻐서 걸어 나오는 게 환상일 것이다. 자기에게 10만원을 빚진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주님 보시기에 좋은 형상인가? “십 만원 없던 것으로 해!!”라고 이야기해야 옳은데 이 사람은 십 만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 그 소식이 주인에게 들리자 주인은 그 사람을 데리고 와서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너, 왜 그렇게 사니? 너, 왜 기뻐하지 못하고 사니?” 주님의 의도이시다. 그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이 비유를 주신다. 이것은 이렇게 설명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하는 기쁨이 있다. 이것이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냐면 내가 용서받은 백억보다. 내 돈 십만원을 못 받은 것이 억울한 것이다. 인생의 주제가 ‘나’이다.
 
여러분, 인생의 주제가 내가 되는 순간 인생이 피곤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주제가 되면 그 사람은 매일이 감사가 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주 안에 있는 나에게 근심 있으랴!! 정말 매일 실제가 될 것이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 은혜가 주제가 되길 바란다. 그러면 매일이 찬송이 터진다. 하나님은 그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하신다.
 
질문하나를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어디인가??
어떤 교회이냐면 예수님이 담임 목사가 되는 교회이다.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예수님은 한 교회의 담임 목사님을 안 하신다. 다른 교회가 질투할까봐... 더 놀라운 것을 가르쳐 주신다. 모든 교회의 담임목사이시다. 이것은 구원역사에서 어떻게 설명 하냐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신 줄 믿는다. 그런데 그분을 모시는데 우리의 주특기가 발동을 하는 것이다. “주님은 잠깐만 비켜 주시고 우리 부부싸움에서는 눈 좀 감고 계십시오.”한다. 우리가 지친 이유가 있다. 내가 왕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늘 첫 번째로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 이 고백을 통해 내 왕권을 무너뜨리는 오늘 살아있는 예배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다시 세워지고 주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서 여러분, 신앙생활이 지겨운 종교생활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감격이 회복되는 신앙생활이 되길 바란다. 첫 번째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친 이유가 있다.
 
I.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분이 높임을 받아야 한다. 나는 쇠하여야 하고 주님은 흥하여야 한다.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저와 여러분은 많은 꿈들이 깨어질 때가 있다. 나오미 집안처럼 모든 남자가 죽을 때도 있다. 우리의 꿈이 깨어진 게 많은가? 적은가? 정말 이 남자인줄 알고 살았는데 이게 아닌가봐!! 사실 우리가 말 못하는 깨어진 분들이 많다.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왜? “하나님 이러하십니까? 왜 내 삶을 방해하십니까? 왜 막으십니까?”할 때가 있다. 여러분 가정에도 깨어진 가정, 깨어진 꿈들이 너무 많다. 그럴 때 주님께 질문한다. 주님은 눈물로 대답해 주실 때가 있다. “미안하다. 네 꿈이 깨져야 내 꿈이 보인다. 너무 아파하지 마라.” 하신다.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나님, 제가 왕권을 바꿔치기 한 것을 회개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나의 왕이십니다.” 이 고백을 통해 기쁨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친 이유가 있다. 왜 사는지를 잊고 살 때가 있다. 영국 BBC에서 2000년 중반에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다. 세계 10개국을 대상으로 이런 질문을 국민에게 했다. 자기 종교를 조사했는데 질문 내용은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나 당신이 믿고 있는 교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이 10개국 중에 1등은 나이지리아. 93%가 기꺼이 죽는다고 말한다. 인도네시아 회교권 90%이다. 미국이 70%, 3등이다. 인도가 45%, 이스라엘이 36%, 러시아 20%, 영국 19%이고 대한민국이 12%, 꼴찌였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다.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 국가들이 한국이기도 한다. 실제로 그분을 위해서 죽을 수 있냐고 했더니 죽을 마음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 분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내 삶이 추구하는 목표가 신앙생활과 다르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결혼은 아내랑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을 위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목표가 내가 잘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건져준 목적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을 넘어 온 땅에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위해 살아가는데 익숙해져가고 있다.
 
2) 두 번째 우리의 주특기는 내 영광을 바라는 것이다.
내가 잘 되는 것을 찾는 것이다. 미국의 로스캐롤라이나에 ‘서밋 처치’라고 하는 교회가 있다. 이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유명한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기도하다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접게 했다. 그리고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를 했다. 변화가 된 것이다. 그리고 로스캐롤라이나에 ‘서밋 교회 300명 담임 목사로 부임을 한다. 그래서 예배를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하는데 어느 날 그 주변에 있는 대학생들이 교회를 탐방을 온 것이다. 몇 명이 위해서 기도를 드렸는데 너무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 다음주에는 300명의 교회인데 300명을 데리고 온 것이다. 한 주 만에 600명이 된 것이다. 300명이 늘었긴 했는데 13불 53센트가 늘었다는 것이다. 우리 돈으로 1만 5천원 는 것이다. 헌금이 그것을 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주일에 예배가 끝나고 특별한 헌금이 들어왔다. 담임 목사님에게 보여드린다. 그 헌금은 베이컨, 계란, 치즈, 과자였다. 이것들이 돈이 없으니까 아침 식사를 헌금한 것이다. 기숙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을 하나 써 놓았다는 것이다. “은과 금은 내기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주나니” 그 목사님이 그 헌금을 보면서 참 기쁘기도 하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교회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기도하게 한다. 졸업하면 어떤 길로 갈 것인가를 기도한다. 답을 못 받은 대학교 4학년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백지 위임을 해서 주의 나라를 위해서 2년간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한 해에는 백지 위임에는 백 명이나 헌신을 한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개척교회나 선교지에 개척지에 이 학생들을 다 파송한다. 그러다가 중앙아시아에 아주 근본주의 이슬람 개척 선교지를 시작했다. 그때 스므살에 클라라 라는 자매가 함께 참여했는데 안타깝게도 근본주의 이슬람들에게 어느 날 납치를 당한다. 아무 조건도 없이 그냥 사라진 것이다. 교회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모두 정부와도 협상을 하고 미국 군부와도 함께 도와서 찾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때 이슬람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클라라 자매의 사랑을 받았던 현지인 여성 300명이 회교국가 앞에서 그들이 데모를 했다. 그 근본주의 회교권 앞에서 여성들이 나와서 여러분 이렇게 한 것은 그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클라라 자매가 보여준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클라라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다. ’당신은 그 편한 나라를 두고 여기에 와서 고생을 하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대답은 “만약 예수님이 저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여기 있겠습니까?”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택했다면 이 나라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랑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서 이 클라라를 위해서 데모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클라라 자매는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도 돌아오지 못했다. 교회는 매우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명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교회를 이 슬픔을 거룩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우리는 왕권을 바꿔치기 하는 주특기만 가진 것이 아니라, 사명을 바꿔치기 하는 주특기를 가지고 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일이 왜 죽어 가는가? 내가 잘되는 것을 목표로 삶을 바꿔치기 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이 고백으로 다 살기를 바란다.
 
*로마서 14:8,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고백을 가지고 살면 우리는 영광스런 자유를 회복한 것이다. 한 번 더 읽어보자.
 

II.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옆에 사람보고 인사하자. “형제님, 자매님, 당신은 주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저에게 깨닫게 하신 것이 있다. 이 이야기를 주셨다. 이런 이야기이다. 아주 친한 친구 세 명이 있는데 한 적한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침구 ABC가 함께 걷고 있었다. A앞에 걸어가는 쪽에 십만 원이 있었다. 질문한다. 이때 먼저 집으로고 싸워야 하는가? 그래서 A가 주웠다. 그것을 집는 순간 A씨의 기분이 어떠한가? 또 백 미터 앞을 걸어가는데 B 앞에 100만 원짜리 돈이 떨어져 있었다. B씨가 100만원을 주웠다. A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A의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친구지만 기분은 그렇다. 우리의 마음과 같다. 또 C의 기분도 그러했을 것이다. 백 미터를 또 걸어가고 있는데, C앞에 천만 원짜리 돈이 있다. 누가 제일 기뻤겠는가? C가 너무 기뻐하고 A는....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복잡한 관계로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후 경찰이 오고 있었다. 가까이 와서 “혹시 한분의 신고가 들어왔는데 천백십만 원(1,110만원)을 누가 잃어버렸는데 주우셨냐?”고 물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은 누구인가? 대답은 당연히 A였을 것이다. 온갖 주머니를 다 뒤지면서 C는 안 주려고 했을 것이다. 주님이 이 이야기를 저에게 깨닫게 하시면서 하셨다. “네가 나를 만나는 날, 똑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네가 내 앞에 서는 날, 내가 예레미야서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 만날 날을 준비하라.’ 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주님 만나는 것, 그날 달려갈 것이지만,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안 했던 사람들은 참 걸어오는 길이 거리낌이 있지 않겠느냐? 물론 나는 다 안아주실 것이다.’라고 하신다. 왜 신앙생활이 지치는 생활로 전락하는가? 왜 구원의 감격이 종교인의 피곤한 삶으로 바뀌는 것인가? 우리는 왕이 되어버렸고, 내가 잘 되는 사명을 향해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 중에, 어느 나라 살든, 몇 살을 살든, 하나님 나라에 방향을 맞추어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늘 행복하다. 아멘..
 
※저는 평택에 이 교회를 방문했는데 이 말씀은 온 세계에 알리고 싶어졌다. 한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초등학생이 있었다. 물었더니 5학년 3학년 등 12명이나 앉아있었다. 왜 왔냐고 했더니 어른 예배 마치고 주일 예배를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부흥회에 4일 내내 온 것이다. 말씀을 나누는데 질문을 했는데 틀리지 않고 다 대답을 했다. 그래서 통성기도를 하는데 5학년 여자아이가 가슴을 때리면서 기도했다. 저는 눈물이 터져서 기도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교회가 어떻게 된 교회인가를 생각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눈물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격의 눈물도 회복하고 회개의 눈물도 회복하여야 한다.
“하나님, 저는 구원으로 주님을 왕으로 모셨는데, 내가 왕으로 살아가는데 너무 익숙합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님 오늘 예배를 통해 고쳐주세요. 저 좀 고쳐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에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다. 제가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기쁨을 잃어버린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살기 때문이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저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제 아내라고 믿고 산다. 자신도 아닌 것을 안다. 저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 남자 분들, 암기하시기 바란다. 아내를 가장 예쁜 여자로 믿고 사니까 너무 좋다. 제 아내와 신앙의 여정을 35년째 걷고 있다. 물론 신혼부부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오십대 노부부가 손잡고 가는 모습은 그 사랑의 무게를 이길 수 없다. 저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제 아내와 저는 살면서 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잘 안 된다. ㅋ ㅎ ㅎ 우리는 서로 영적 전우라고 하면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제 아내가 저에게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신앙의 여정을 같이 걸어오면서 넘어질 때도 있었고, 정말 살려달라고 울면서 기도할 때도 많았다. 그 믿음의 무게가 우리 여정 속에 있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에서 오늘 세 번째 고백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3)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살면 인생은 피곤하다. 지치고 짜증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믿음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나누겠다. 솔직하게 대답하라. 키가 큰 사람이 멋있는가? 작은 사람이 멋있는가? 누가 더 멋있는가? 영적으로 대답하지 말고 본능적으로 대답하라. 키가 큰 사람이 멋있다는 것을 모두 보편적인 멋있다는 대답이다. 조금 더 질문을 하면 상체가 긴 사람이 멋있는가? 하체가 긴 사람이 멋있는가? 하체가 길어야 멋있다. 그래서 백화점 가면 마네킹은 다 다리가 길다. 그래서 멋있는 옷을 입으면 안 어울린다. 그 핏이 안 나온다. 제가 나누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아는 것이 있다. 저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울하지 않다. 저와 모든 키와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책임지신 얼굴이고 하나님이 책임지신 키이다. 아멘,,, 저는 대한민국 평균키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보편적으로 육으로 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영적이 멋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어떤 교인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멋이 있는 것이다. 어떤 교인이 말씀을 따로 올곧고 정말 순종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멋이라고 한다. 여러분 영적으로 멋있어야 기쁘다. 자신감이 있다. 육적으로는 틀렸다. ㅋㅋㅋ 저는 여러분 교회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살지 말고 주님이 행하실 약속을 믿고 말씀을 따라가 살고 영적인 멋이 있는 자로 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합심 기도문---“하나님, 우리가 왕이 되는 데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출발한 그 ‘영광스런 자유’가 어느 새 내가 잘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성취되지 않아 지쳐버렸습니다. 하나님, 감격의 눈물도 회복시켜 주시고, 회개의 눈물도 회복시켜 주셔서, 영적인 멋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요약
우리가 신앙의 길이 기쁨이 되어 이 영광스런 자유를 주신 것을 피곤하고 짜증나는 순례의 길처럼 느껴지지 않게 살기를 주님께 소원해야 한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에 소홀 하는 삶을 살았음과 종교인이 되어가고 있는 나의 잘못을 깨달아 내가 지금 왕이 되고 싶어 하지 말고, 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무너뜨리고 되돌아와서 다시 눈물을 회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격이 되고 이 말씀으로 순종하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 진정한 깊이가 있기를 소원해야 한다.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은 그 당시에 생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찬양했던 일시적인 구원이었지만 우리 주님의 구원은 거룩한 성도들이 세상 끝날까지 찬양해야 할 영원한 구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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