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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5월 11일) 제목: "사랑으로 씻기시다" 말씀: 요한복음 13:1-15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이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구성찬 부목사님 -------------------------------------------- *요한복음 13:1-15,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치유와 응답을 체험하기 위해서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여 축복한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예배해 주신 은혜를 충만하게 내려 주실 줄 믿는다. 오늘 우리에게 주실 말씀은 요한복음 13:1-15절이다. 신약성경 119면이다. ‘오늘 설교가 제가 사랑의 교회에서 하는 마지막 설교이다.’라고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 여러분들은 상당히 집중해서 오늘 들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이 라는 단어가 주는 힘 때문이다. 우리에게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더 집중하게 되고, 뭔가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우리 같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특별한 시간적 표현이 바로 이 ‘마지막’인 것 같다. 아직 긴가민가 하는데 제가 마지막 설교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바로 마지막을 앞두고 계셨다. 요한복음 11-12장까지는 표적의 책이며,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 예수님의 표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들이 나타나 있었고 오늘 본문인 13장부터는 영광의 책, 그 십자가를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이때 예수님은 이전과 달리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마지막’이라는 뭔가 그들에게 의미 있고, 그분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행동을 하신 것이다. 그 마지막 이야기의 배경은 ‘최후의 만찬’, 다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의시기 위해 전날 저녁에 벌어지는 일이다. 마침내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아셨다. 그 마지막의 시작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보통 마지막은 그냥 삶을 정리하고 이렇게 떠나는데, 예수님은 그 마지막, 그 끝까지 이 세상에 남겨지게 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도 세상에 남겨지게 되는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신다. 세상에 남겨져서 오늘 이 저녁에 이 자리에 달려오신 여러분 한 분 한분도 동일하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 구절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밑바탕이 되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끝까지 사랑함을 표현한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둘렀던 수건을 풀어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다. 사도요한은 마치 현장을 우리 눈앞에 이렇게 펼쳐주듯이 그림을 그리듯 이 한 장을 묘사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가 마치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추억도 떠오른다. 어릴 적 여름성경 학교 때에 꼭 했던 세족식, 선생님이 제 발을 씻어주시면 정확히는 기억은 안 나는데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이 내용을 잘 알고 있다. 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하신 이 세족식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가? 정말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후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자. *요한복음 13:14,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은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족식의 모습이자 의미이다. 그런데 이 의미만 있는 것인가? 요한이 그토록 정성들여 묘사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직접 씻어주며 너희도 그렇게 씻어주라는 것에 정말 어떤 의미가 더 담겨져 있는 것인가? 또 그 의미를 풀어내는 설교 제목인 ‘사랑으로 씻기시다’는 어떤 것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가장 중요한 마지막 사역을 자신들의 사람인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발을 씻기신 더 깊은 마음과 의미를 깨닫고 예수님께서 보여준 의미를 우리의 삶에, 우리 심령에 깊이 담아내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2절이 조금 애매하다. ‘마귀가 씌인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내용과 뒤의 세족식의 그 아름다움 사이에 뜬금없이 마귀가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는 것이 들어가 있다. 굳이 1절과 대조되는 내용을 왜 2절을 사도요한은 넣은 것인가? 결국은 이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시니까.. 마치 지금과 같은 우리는 그날 저녁으로 돌아가 보자. 그날 저녁 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시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식사를 하실 때, 아무도 예수님에게 발을 씻을 물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보통 당시에 종이나 하인들, 그중에서도 천하게 여겨지는 이방인들이 주로 담당했던 일인데 그 집에는 그런 노예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 중에 누구라도 주님이 이렇게 오셔서 식사를 하시는데 발도 못 씻으셨다면 나라도 섬겨야 하겠다고 나서야 되는데 꼭 우리만이 아니라도 그 랍비를 따르던 제자들이 따르는 그 나라에도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도 안 한다. 왜인가? 당시 제자들은 누가복음 24:24절에 있듯이 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다툼은 ‘우리 중에 누가 더 크냐?’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에 예수님께서 오셨으니까, 이제 수도에 오셨으니까, 이곳에서 과거의 영광스러운 다윗 왕국을 다시 재건하실 텐데, 그 재건을 하시면 ‘우리 중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모두 하나 같이 영광스러워 보이는 그 세상적인 높은 자리를 향해 그들의 시선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엄마까지 찾아와서 우리 아들 예수님 안 계시면 ‘넘버 2, 넘버 3, 시켜 주세요.!!’ 라고 엄마의 로비까지 들어올 정도로 모두 하나 같이 현혹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내가 당신보다 아래입니다.’ ‘내가 당신보다 못 합니다.’ 라는 어떠한 메시지가 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발조차도 씻겨드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사실 한 명이 .있었다. 오늘 본문 12장에서 부활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지극히 비싼 향료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그때 가롯 유다가 했던 말 기억나는가? “이 향료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나를 위하여 이것을 간직하게 하라.” 자신의 발을 씻기시는 그 장소에서 예수님은 장례를 이야기 하셨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장례가 다가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장례를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그 공생애 생활에 마무리 하시면서 한 걸음씩 십자가를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가셨고 그날 저녁에 잡히시게 될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에 있는데 제자들은 그것을 1도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모르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사랑으로 씻기시다’의 첫 번째 의미는 I. 우리의 부족함을 용납하심이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가? 십자가를 향해 더 가까이 낮아짐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피로써 나를 정케 하소서♪, 은혜로운 찬양 가사의 곡을 부르지만, 예수님의 원래 모습이 아닌 내가 기대하는 예수님을 만들어 놓고 따라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2절에서 가롯 유다에게 보인 사탄에 이용당하는 모습은 가롯 유다에게만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 도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모두의 모습은 아닌가? 자신의 꿈과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이 따르고 있는 예수님을 위해 그들도 똑같이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전히 나의 성공, 나의 성공, 세상적인 어떠한 영광을 쫓으면서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은 아닌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는 예수님 묻는 먼지가 보일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 동료 더러워진 발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얼마나 찝찝할까? 예수님은 정말 상쾌한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을 텐데 ‘아무도 안 섬기면 나라도 섬겨야지’, 라는 생각이 세상의 영광만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떠오르지도 않고, 그런 생각이 도저히 들지가 않는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좀 화가 나시지 않을까? 우리는 1년 제자훈련을 해도 변화가 나타나길 바랐는데, 예수님은 3년 동안이나 1년 365일 내내 그들과 함께 하면서 훈련을 시켰는데 그런데 기껏해야 이 정도밖에 안 되냐!고 예수님 그러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이런 그들의 마음에 부족함과 허물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며 사랑으로 씻기심으로 결국에는 자신이 마음도 지키셨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인간이 요동치는 감정을 예수님은 지키시며 사랑으로 섬기실 수 있었는가? 본문 3절을 보자. *요한복음 13:3,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시각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만 생각하고 묵상하고 계시지 않았다. 사람을 보신 것이 아니다. 내가 키운 제자들이 좀 더 잘한다면 그래도 십자가 질 때 내가 덜 힘들 텐데, 푸념하고 한 숨 쉬지 않으셨다. 사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느끼시기에 충분히 그러한 푸념을 하셔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누구를 바라 보셨는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자기감정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셨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사명이 더 크게 와 닿으셨다. 끝까지 사랑하신 비결이 여기에 담겨있다. 예수님은 100% 신이시지만 동시에 100% 인간이시다. 인간적인 생각이 얼마나 그 유혹이 강렬한지, 다를 잘 알지 않은가? 살면서 많은 그 유혹에 넘어져 보셔서 잘 알지 않는가? 그런데 그 생각, 그 감정을 억누를 수 있는 힘을 예수님은 여기서 얻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셨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은 내게 모든 것을 내가 맡기셨고 내가 다시 십자가의 길을 걷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은 생각하셨다. 그래서 저녁을 먹는 중에 즉시 일어나셨다. 저녁을 다 드시고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먹는 중에 일어나셨다. 요한은 그 모습을 생생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러니까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는 완전히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그렇게 움직이고 계시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한만 봤을까? 분명히 그 옆에 있는 제자들도 예수님은 뭐하시는지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뭐하시는지 생각도 못했다. 그 발을 씻기기 전까지는, 그만큼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그 예수님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만큼 둔감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의 모습, 상태, 반응에 상관없이 게의 치 않고 예수님은 묵묵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높아진 마음을 알고 계셨다. 세족식은 단순히 하루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니면서 발에 묻은 그 먼지를 그냥 씻어내는 그것만이 아니다. ‘사랑으로 씻기시다’의 두 번째는 의미는 II. 높아진 우리의 눈을 낮추심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의 억누르는 사랑의 몸부림을, 그 발 씻음을 통해 높은 곳을 향해 있던 제자들의 시선을 “어, 예수님이 뭐하시지?” 예수님은 낮추셨다. 내가 더 낮아져야만 저 제자들의 시선도 낮아질 수 있기에, 너희 시선을 낮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셨다. 가장 천한 종처럼, 가장 천한 노예처럼, 그리고 이 낮아짐은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은 낮아져 있는가? 제자들이 보지 못하고 있던 그 낮은 것을 보시는 그 예수님의 시선을 일상에서 따라가고 있는가? 식탁에 먹을 것만 보이지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발이 먼지에 덮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괜찮다고 하시면 자신이 가질 것 같은 영광의 위치에서 먼지 묻은 발이 그대로가 좋다고, 문제없다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은 저녁 먹는 중에 그 낮은 곳으로 시선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옮기셨다. 예수님은 그 낮은 곳으로 자신의 몸을 옮기셨기에, 제자들의 높아진 시선, 높아진 마음이 무릎 꿇고, 발 씻고 계신 곳으로 낮은 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사랑으로 씻기시다’의 본질은 예수님 자신이 낮은 곳에서 그 사랑, 그 자체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그 씻김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제자들이 발을 씻기셨다. 예수님이 그들의 발을 씻기실 때는 그들의 잘못함을 용납하고, 시선을 낮은 곳으로 옮기며, 표면적인 먼지만 씻어내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발이 저지를 앞으로의 발자국까지 씻어내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발이 어떠한 발로 걸어가게 될 것인지 아셨다. 지난 3년 동안 함께 걸어왔지만 그들의 발이 온전히 예수님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옮기며 따라오는 발이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를 예수님께 그대로 투영시켜서 그 메시아, 자신들이 생각에 따른 그 메시아를 따랐던 발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리고 발을 씻겨도 그 밤에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계셨다. 자신을 저주하며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는 제자의 발도 씻기셨다. 그 밤에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하며, 그 겟세마네 동산의 먼지에 다시 더럽혀지는 발이 될 거라는 것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정말로 예수님이 가장 고통스런 십자가의 고난을 외로이 홀로 짊어질 때, 그 발자국은 자신을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 발을 씻기셨다. 그냥 아직 일어난 일은 아니니까 그냥 묻어두고 씻기신 것인가? 아니다. 비록 나를 버리고 떠난 발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의 발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사랑으로 씻기시다’의 세 번째 의미는 III.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심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과거뿐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잘못도 이미 발을 씻기시며 용서하셨다. 십자가에 올라가서 뒤늦게 ‘그래 너희들이 그랬지만 용서하겠다.’가 아니라, 찔림의 예수님을 보았을 때, 이 예수님은 발을 씻기시며 그 발이 어떠한 발로 걷게 됨을 알고 계셨지만 그 발을 씻기며 용서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감정도 분명히 흔들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날의 아픔을 용서함으로 사랑으로 끝까지 씻기셨다. 오히려 발을 씻기시며 감정도 온전해지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도 뜨겁게 기도하고도 내일은 똑 같이 잘못을 저지르고 예수님을 떠나 버린 그 제자들과 일상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는 우리의 발자국도 예수님은 이미 용서하셨다. 혹시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아직 이 자리에 나와 계시지만 죄책감으로 힘들어 하시는 분이 계신가?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나는 제자훈련을 받는다면서도, 나는 사역훈련을 받는다면서도, 나는 순장이 되었음에도, 나는 목사가 되었음에도 왜 이렇게 제자답게 못 사는지, 우리가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이미 당신을 용서하셨다. 집사님을 용서하셨다. 순장님을 용서하셨다. 그 한량없는 따스한 사랑으로 모든 잘못을 씻기셨다. 이러한 사랑으로 씻기신 예수님, 이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제자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그 삶을 위한 중요한 전제가 있다. 6절에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반응을 보인다.. *요한복음 13:6,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종들이 하는 일인데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다니요,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하는 것은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그러자 베드로는 절대로 씻지 못한다고 더 거부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 완강하게 아주 중요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내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자 베드로 성격을 알지 않는가? 깜짝 놀란다. 지금 고지가 눈앞인데 내가 조그만 잘 붙어 있으면 높은 자리를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시옵소서.”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끝에 전하!! 만 안 붙였지 베드로는 힘이 다시 왕국의 신하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예수님은 발 씻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3:10-11,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발 씻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신다. 그리고 이 회개가 단순히 몸의 깨끗함만이 아닌 마음의 깨끗함까지 연결되고 중첩된 의미로 표현하신다. 이 사랑으로 씻기는 제자의 삶을 우리가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영적으로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베드로와 제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먼지를 제거하는 예수님이 물로 씻겨주시는 것만 생각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깨끗함, 마음의 깨끗함까지 함께 말씀하신다. 죄로 인해 물든 마음, 영혼을 예수님께서 씻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죄인에서 이제는 상관있는 의로운 자녀가 된 것이다. 내가 더러운데 누구를 씻길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기에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예수님처럼 씻길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제자여러분, 예수님이 성경 속 제자들의 발만 씻어준 것인가? 아닌 것 알지 않는가? 오늘 이 저녁에 모인 우리의 발도 이미 씻어주셨다. 주님 뜻대로 살기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했던 내 발을 내 욕망의 목표를 이루어주기를 기도하기에 바빴던 이런 발을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내 가족, 내 자식의 성공만을 빌기에 바빴던 내 발을, 예수님은 이런 나의 발도 씻어주셨다. 이처럼 먼저 우리는 더러운 발을 씻음 받은 사람이다. 내가 누군가의 발을 씻기는 섬김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예수님이 먼저 내 더럽고, 추하고, 부끄러운 발을 씻어주셨기에 나의 영혼까지 이미 깨끗하게 씻어주셨기에 때로 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주님이 하신대로 이미 받은 사랑을 따라서 나도 씻기는 것이다. *요한복음 13:14-15,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그런 섬김의 본받아서 누군가의 발을 씻긴다고 하는 것은 “자, 이제 나가서 저 문 밖에 나가서, 누군가를 섬깁시다.”라는 구호가 아니다. 막연하게 어떤 사람을 섬기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 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신앙적, 삶의 기준에 모자라는 사람이 있다. 또 우리가 보기에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그런 부족함, 왜 저러지?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이런 사람들이 꼭 있다.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으로 용납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 그 사람을 사랑으로 씻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의 높아진 마음과 우리의 높아진 시선과 그리고 우리의 높아져 있는 자리를 낮은 것으로 옮겨야 한다. 물론 우리 주변에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자기에게 불리하면 나는 모른다하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를 뒤에서 욕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나는 몰랐는데 그것을 위해서 나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 용납과 용서, 그것이 예수님이 사랑으로 발을 씻겨주시는 것의 의미이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우리 이웃의 발을 씻기는 것이다. 그런데 쉽지 않다. 특히 이 마음이 잘 안 따라 준다. ‘그래, 말씀대로 한 번 해보자, 하나님이 내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나보다’ 라고 하지만 막상 그 사람 앞에 가면 눈에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주먹이 운다. 계속 그렇게 생각이 난다. 뭔가 생각나는 포인트가 자꾸만 나를 찌른다. 내 마음을, 그렇게 할 수 있겠어, 그래 생각해봐,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한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제자의 배신, 세 번의 부인, 모든 제자가 떠나가는 상황이 곧 펼쳐질 것을 아심에도, 자신의 마음을 감정을 추스르며 섬길 수 있으셨는가? 예수님의 섬김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닮아갈 수 있는가? 이 섬김의 출발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과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는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 익숙한가? 앞서 3절에서 나누었던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섬김을 행동으로 옮기시기 전 하나님께 시선을 맞추고 했던 생각,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과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도 매일 아침 큐티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내가 오늘 하루에 하나님은 내가 무엇 하기를 원하시는지, 질문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 시킴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리를 얻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얻어도 아침에 새벽예배까지 나와서 큐티를 통해서 이렇게 뭔가 힘을 얻어도 그래도 섬기기 싫은 마음이 들 때, 섬기기 힘들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의 섬김은 마음의 준비보다 행동이 앞서야 할 때가 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그 순간이 자꾸만 예수님이 자신의 감정을 온전하게 추스르는 사랑하기에 몸부림치시는 시간이라고 자꾸만 느껴졌다. 무슨 말이냐면, 씻기기 전에 마음속으로 ‘이따가 저놈이 제일 먼저 도망갈 텐데, 그래도 사랑해야지, 주여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다짐하고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씻기시며 그들의 발에 묻는 먼지와 더러움을 씻어내며 예수님의 마음에 끊임없이 이렇게 생기는 미움과 증오까지 예수님이 씻어내고 계셨다는 것은 아닐까?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은 사랑으로 그들을 품어내시고 사랑으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한 사랑의 몸부림이 담겨져 있다고 여겨졌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론 싫지만 정말 죽어도 하기 싫지만 그래서 자꾸만 쭈뼛 거리게 되고 내키지 않지만,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겨서 예수님을 따라 사랑의 섬김을 실천할 때 우리 감정이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때론 마음보다 섬김의 행동이 앞서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시선을 두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과 하나님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게 될 때, 즉시 저녁 먹는 중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가 어떤 일을 할지, 어떤 것을 했는지 생각하시기 전에 즉시 저녁 먹는 중에 일어나 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많이 실패해 보신 사랑스런 우리 실패자 여러분, 우리 도전해 보자. 한 번 눈 딱 감고 한 번 예수님처럼 용납해보고 용서해 보자. 제 주변의 그 과정 속에 있는 집사님이 계시다. 정말 용서했는데 딱 마음먹고 용서했는데 힘든 것을 용서했는데, 그러고 나서 끝난 줄 알았는데 몇 주가 지나서 다시 그것을 뒤집어엎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더 힘들었는데 지난주일 이렇게 광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집사님 부부가 오셔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두 분이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있다. “목사님, 그래도 끝까지 용서해 보겠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감동이 되었고 그 집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사랑하기 위해 몸부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그 두 분의 생각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중에는 시어머니께서 받은 상처로 인해서 정말로 마음이 힘들고 어려운데, 그래도 찾아뵙고 맛있는 것 사드리고 전화가 와서 뭐 좀 사달라고 했을 때, 그래도 구해다 드릴 때, 오히려 내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것을 경험하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언제까지 사랑하지 않기로 결단하려는가? 그냥 그 미운 사람,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먼저는 혼자 있을 때 선포도 하고, 섬김의 행동으로 그저 용납하고 용서하라. 그래야 여러분이 산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먼저 씻기셨고, 그것을 진짜 보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다. 여러분 힘들어 죽으라고 너희 발을 씻기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씻기시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우리도 서로의 발을 씻길 때 내가 먼저 살고 상대방도 살고 우리 삶에 예수님의 향기도 살아간다. 오늘 밤부터 교회 문을 걸어 나가는 일상에서 섬김의 우리 다시 해보자. 섬김의 받는 사람이 어떠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발이 더럽고 나를 뒤에서 음해하고 나한테 별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섬겨야 되면 우리가 먼저 그 자리에 가듯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도 그 예수님의 자리에 가서 그 영혼을 섬기면 된다. 비록 힘겹지만 이 한 걸음, 그 한 사람을 섬기는데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너무나 힘겹고 버겁지만, 그렇게 내 딛는 한 걸음이, 그 작은 섬김이 우리의 일상을 예수님의 제자로 바꾸기에 충분한 줄 믿는다. 이 한 몸이 나의 묵었던 감정을 씻어내고 정리시키고 우리를 감정의 온전함을 향해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한다. 예수님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몸을 낮추고 머리를 숙여 제자의 더러움을 자신의 손에 묻힐 때, 그 제자는 깨끗해지고 예수님은 그 더러움을 가지고 십자가에 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 아닌가? 사랑의 발걸음을 다시 우리가 따라가기로 결단하면 좋겠다. 가까이는 우리 가족에게, 제자반, 사역반, 공동체에서 다락방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상대방의 부족함을 용납하고 혹시나 높아진 우리의 눈을 낮은 곳으로 다시 향하고 앞으로 그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할지에 대한 기대감도 내려놓고 용서함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기를 원할 때, 그 자리가 이 예배의 영광과 예배가운데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그 강력한 임재보다 더 강력할 줄 믿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낮은 자리에 이미 가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상을 주님의 이름으로 누리기를 바란다. ♣요약 낮은 곳에 먼저 계신 예수님이 발을 씻겨주시고 내 가족과 우리 이웃의 발을 씻기시고 계셨음을 깨달아서 그 예수님이 계신 곳에 나아가서 끊임없이 남보다 높아지는 마음, 내가 저 사람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하나님 앞에 더 잘 보이려고 하는 그 열심조차도 그것이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면 다 내려놓, 나는 아무것도 없이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 낮은 곳으로 가서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힘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사랑으로 씻기시는 본이 되신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시고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린 자이다. 그는 예수님의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크게 신임을 받았으며 회계 사무의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다루다보니 탐심이 생겼고 돈을 훔치기도 했으며, 결국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렸다. 마태복음 27:3, 4에 보면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은을 대제사장에게 가져다 준 후 스스로 죽은 기사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그도 결국은 예수님의 무죄 성을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귀가 우리에게 침입할 경우,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치 못하게 하고, 미움, 질투, 복수심을 갖게 하여 번뇌케 하고, 부정적 생각을 갖게 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을 놓치게 함을 가룟 유다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여기서 우리는 먼저 겸비의 삶을 배우게 된다. 발 씻기는 일은 종이 하는 일인데 만주의 주되신 예수께서 발을 씻기심은 겸손의 덕을 실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또한 서로를 위해 봉사하는 숭고한 신앙인의 삶을 실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도 계속적인 회개의 생활이 필요함을 가르치시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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