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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5월 1일)

제목: "영광스런 자유"
말씀: 출애굽기 12:41~4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박신일 목사님-초빙(캐나다 그레이스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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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2:41~43,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오늘도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해 나온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만이 주는 평강과 위로가 함께 하길 바란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참으로 믿는가? 정말 믿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 하게하실 것도 믿는가? 그날이 올 것이다. 제임스 페이커 라고 하는 신학자는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시간을 역사’라고 부른다고 정의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와 하나님이 이 역사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도대체 우리의 인생도 그 역사의 한 파트인데 이 역사를 지으신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모든 역사를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줄 믿는다.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다. 그 주님의 영광 속에 우리는 잠깐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침표를 찍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콤마를 찍는 사람이며 마침표를 찍을 분은 주님밖에 없으시다.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 주제는 우리가 아니다. 그 역사 속의 주제는 하나님이셔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우리와 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한다. 오늘 출애굽 사건 된 이유가 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처럼 430년의 노예 생활이 끝나는 장면이다. 이것은 감격 중에 감격이다. 이들이 출애굽을 경험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출애굽 된 첫 번째 이유가 --- 하나님께 이들이 기도하고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23-24,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애굽의 출발점은 백성들의 기도였다. 너무 힘들어서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이다.
 
▷출애굽 된 두 번째 이유 --- 하나님이 들으셨다.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이 약속의 땅에서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이방에 끌려서 객이 되었다가 다시 400년이 지나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때가 찼기 때문에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행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노동력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소유물이었다. 절대로 안 내보낸다. 그런데 열 번째 재앙이 내렸을 때, 모든 장자들을 다 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냥 있으면 다 죽는다. 그들은 주님 말씀대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하나님의 심판이 넘어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은 피를 발랐고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의 모든 장자들, 심지어 성경을 보면 감옥의 있는 장자까지도 다 죽었고 모든 짐승의 첫 것들도 다 죽는다. 그러나 피를 바른 가정은 살았던 것인 줄로 믿는다. 이것을 우리는 유월(踰越)절(節)이라고 부른다. 바로 유월절 사건에 일어난 일은 바로 왕의 권세가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구원인 줄 믿는다. 하나님의 권세 앞에 죄의 앞에 권세 앞에 무릎 꿇은 것이 구원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구원이 완성되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악이 정복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어떤 어둠이 없을 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구원을 믿는 사람들은 악과 싸우는 것이다. 죄와 싸우는 것이다. 그런 빛의 자녀로 우리가 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며 살아가는 이번 주간이 되길 바란다. 우리는 그 구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완성이 될 것을 알기에 그 주님의 동역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열 번째 재앙이 끝났을 때, 오늘 읽었던 출애굽기 12:41절을 다시 보자.
 
*출애굽기 12:41,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30년이 끝나는 기간 동안 살았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36년 살았다. 얼마나 그 기간이 힘들었겠는가? 열배가 넘는 430년, *여기서 자유케 된다는 것은 영광스런 자유이다. 이 놀라운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 우리 모두에게는 죄의 권세로부터 끊어지는 영광스런 자유가 임한 줄로 믿는다. 그래서 구원은 바로왕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왕이 없는 것이다. 이전에는 바로 왕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했다. 이제는 바로 왕이 없다.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가? 누가 그들의 왕이 되어야 하는가? 이때부터는 하나님이 말씀에 따라 이동한다. 구름기동과 불기둥을 따라 이동한다. 구원은 굉장한 중요한 의미를 출애굽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구원은 내 인생에 왕이 바뀌는 것이다. 왕이 바뀌는 것이 구원이다. 여러분 왕이 바뀌었는가? 출애굽 이야기에 중점내용이 하나 그것은 너무나도 기쁘게 떠난 것이다. 장정만 60만, 200만이 넘는 사람이 너무 너무 감격스럽게 탈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을 땅에 모두가 감격으로 출발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기쁨으로 시작했는데 원망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출발은 다 기쁨인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것 광야에서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들이 나온다. 신기한 일이다. 다 기쁨으로 출발했는데, 왜 광야에 신앙 여정에서는 피곤해지고 그만두겠다고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인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러한 일이 있고 일어나고 있다. 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구원의 감격은 영광스런 자유의 경험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너무너무 기뻐서 우리는 신양생활을 하는 것이다.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그런데 광야 같은 신앙여정을 걷다보면 지친 사람이 나온다. 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화가 나기도 한다. 심지어 종교인이 되어버린다. 우리 좀 솔직히 이야기하면 지칠 때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 오늘 나누고 저의 싶은 고민은 왜 우리가 영광스런 자유를 누렸는데, 비참한 자유로 바꾸었는가? 영광스런 자유를 주셨는데, 그 길을 걷고 있는데 왜 이렇게 초라한 자유를 누리는가? 초라한 자유를 누리는가? 왜 그렇게 지겨운 자유를 누리는가? 뭐가 문제인가? 이것을 고민해 보려한다. 원인을 알고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는 기쁨으로 순례의 길을 걸어가자는 것이다. 어떡하면 일이 일어날까? 문제를 잘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이라는 의미를 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로마서 5:17-18,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뭐가 왕 노릇 하냐면 죄가 예수 믿기 전에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기 전에는 죄가 왕이다. 그 죄의 결과 사망이 우리 모두를 지배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 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담당하신 그분을 믿는 순간 우리 모두는 죄의 모든 죄에게 해방되어 은혜의 생명의 왕 노릇하는 것으로 옮겨지는 주님이 왕이 되시는 삶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사망이 지배하지 않는다. 영생이 지배한다. 그래서 바울은 왕 노릇한다고 한다. 다른 표현을 보겠다.
 
*로마서5:12,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전에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을 했었는데, 예수님을 믿으니까, 의로 덮어주시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여 내가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 이것을 알고 믿어야 한다. 나는 죄에게 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떤 지식이 들어와도 죄를 못 이긴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가? “오, 나는 권고한 사람이로다.” 내가 주님을 원해서 주님과 살고 싶은데 몸으로는 죄를 짓고 있는 나를 본다고 말한다. 이 사망에서 나를 누가 건져내랴! 고 바울은 이 고민을 했다. 고민을 한 것만이 아니라 답을 얻었다. 그다음에는 어떤 지식이 와도 죄를 못 이긴다. 왜? 죄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죄는 파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파워가 죄이다. 아무것도 죄를 이길 수 없다. 그것은 글자로도 지식으로도 안 되며 왜 제가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론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다. 무슨 말인가? 바울이 깨달은 것이 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은 땅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여러분 구원은 능력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능력이시기 때문에 건져내신다. 이것을 왕 노릇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는 죄를 못 이긴다.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 안에 계신 줄로 믿는다. 이렇게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건져주신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고 걸어가는 우리가 지치고 피곤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짜증이 나고 원망이 날 때가 있다. 왜 영적인 직분의 행동이 자꾸 멈추는 것일까? 출애굽기를 보면 이유를 잘 분석할 수 있다. 원인은 간단하다. 먹고 싶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박이 없다. 먹고 싶은 것 없을 때, 부추, 마늘이 없다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이유로 실망하기 시작한다. 내가 원하는 삶이 누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먹을 걸로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끼지 이야기 인데 주님이 돈을 넉넉히 주시는가?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깊이 깨달은 바가 있는데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주님은 평생 먹고 살 것을 잘 안 주신다. 그런 분이 있다면 굉장히 천연기념물 같은 분이다.
 
우리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도 오늘 날 우리에게 일 년 먹을 것을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일 년 먹을 양식을 주면 불평 투성이 이다.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다. 그 사람은 감사하다. 우리가 왜 자꾸 쓰러지는 것인가? 왜 신앙생활이 종교생활로 전락해버리는가? 이유가 간단하다. 내가 원하는 삶이 누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정리하면 애굽에 살 때 노예로 살 때, 누가 왕이었는가? 바로였다. 광야를 탈출해서는 누가 왕인가? 하나님이 왕이시다. 지치는 이유는 은밀하게 우리 주특기가 등장한다. 저와 여러분은 전공을 안 해도 있다. 우리의 주특기가 있다.
 
제가 시골교회 담임 전도사로 3년을 사역해야만 목사 안수 자격을 저는 농촌 교회에서 강원도 원주의 농촌교회에서 86년도부터 20대에 시작했다. 저는 목회 반을 시골 교회에서 시작했다. 심방을 가면 어머님 같은 권사님들이 전도사님이 오신다고 마당 앞을 50미터를 쓸었다. 그리고 전날 쓸고 아침에 또 쓸었다. 마치 새파랗게 젊을 전도사를 주님 대하듯 맞이해 주셨다. 안방에 들어가면 나무로 불 떼는 시골집이다. 정말 뜨겁게 떼놓고 꼭 아랫목에 앉게 하셨다. 앉으면 덴다. 방석 깔고 거기에 앉으라고 하신다.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제일 안방에 아랫목에 앉으라는데, 6개월 담임을 하고나서 주특기를 알았다. 어디가든지 아랫목만 보인다. 그게 제 자신처럼 보인다. 저와 저의 아내 기도가 있다. 끝까지 순전하게 목회를 해달라는 것이다.
 
1) 첫 번째 우리의 주특기는 왕이 되는 것이다.
광야에서 왜 피곤해지는 것인지 아는가? 우리는 몰래 내 왕국을 건설한다. 내가 왕이 되니까 내 뜻대로 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우리는 주님을 손가락질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신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지금 우리의 말하면 1조로 말하면 믿지 못하니까 지금 백억을 빚진 자가 있다. 백억을 빚진 사람이 주인이 갚으라고 하니까 제가 평생을 일해서 갚겠다고 한다. 그러나 갚을 수가 없는 돈이다. 그것은 비유로 이야기 한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 주인이 다 용서해 준다. 백억을 용서 받았다는 것을 듣고 이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았겠는가? 엄청 좋았을 것이다. 백억을 받는 것보다 탕감 받은 것이 덜 기쁜 것은 알지만 ㅋㅋㅋ 너무 기뻐서 걸어 나오는 게 환상일 것이다. 자기에게 10만원을 빚진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주님 보시기에 좋은 형상인가? “십 만원 없던 것으로 해!!”라고 이야기해야 옳은데 이 사람은 십 만원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는다. 그 소식이 주인에게 들리자 주인은 그 사람을 데리고 와서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너, 왜 그렇게 사니? 너, 왜 기뻐하지 못하고 사니?” 주님의 의도이시다. 그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이 비유를 주신다. 이것은 이렇게 설명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하는 기쁨이 있다. 이것이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냐면 내가 용서받은 백억보다. 내 돈 십만원을 못 받은 것이 억울한 것이다. 인생의 주제가 ‘나’이다.
 
여러분, 인생의 주제가 내가 되는 순간 인생이 피곤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주제가 되면 그 사람은 매일이 감사가 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중에 주 안에 있는 나에게 근심 있으랴!! 정말 매일 실제가 될 것이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 은혜가 주제가 되길 바란다. 그러면 매일이 찬송이 터진다. 하나님은 그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하신다.
 
질문하나를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가 어디인가??
어떤 교회이냐면 예수님이 담임 목사가 되는 교회이다.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예수님은 한 교회의 담임 목사님을 안 하신다. 다른 교회가 질투할까봐... 더 놀라운 것을 가르쳐 주신다. 모든 교회의 담임목사이시다. 이것은 구원역사에서 어떻게 설명 하냐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신 줄 믿는다. 그런데 그분을 모시는데 우리의 주특기가 발동을 하는 것이다. “주님은 잠깐만 비켜 주시고 우리 부부싸움에서는 눈 좀 감고 계십시오.”한다. 우리가 지친 이유가 있다. 내가 왕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늘 첫 번째로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 이 고백을 통해 내 왕권을 무너뜨리는 오늘 살아있는 예배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다시 세워지고 주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서 여러분, 신앙생활이 지겨운 종교생활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감격이 회복되는 신앙생활이 되길 바란다. 첫 번째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친 이유가 있다.
 
I.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분이 높임을 받아야 한다. 나는 쇠하여야 하고 주님은 흥하여야 한다.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저와 여러분은 많은 꿈들이 깨어질 때가 있다. 나오미 집안처럼 모든 남자가 죽을 때도 있다. 우리의 꿈이 깨어진 게 많은가? 적은가? 정말 이 남자인줄 알고 살았는데 이게 아닌가봐!! 사실 우리가 말 못하는 깨어진 분들이 많다.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왜? “하나님 이러하십니까? 왜 내 삶을 방해하십니까? 왜 막으십니까?”할 때가 있다. 여러분 가정에도 깨어진 가정, 깨어진 꿈들이 너무 많다. 그럴 때 주님께 질문한다. 주님은 눈물로 대답해 주실 때가 있다. “미안하다. 네 꿈이 깨져야 내 꿈이 보인다. 너무 아파하지 마라.” 하신다. 우리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나님, 제가 왕권을 바꿔치기 한 것을 회개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나의 왕이십니다.” 이 고백을 통해 기쁨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친 이유가 있다. 왜 사는지를 잊고 살 때가 있다. 영국 BBC에서 2000년 중반에 설문조사를 한 것이 있다. 세계 10개국을 대상으로 이런 질문을 국민에게 했다. 자기 종교를 조사했는데 질문 내용은 ‘당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나 당신이 믿고 있는 교리를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이 10개국 중에 1등은 나이지리아. 93%가 기꺼이 죽는다고 말한다. 인도네시아 회교권 90%이다. 미국이 70%, 3등이다. 인도가 45%, 이스라엘이 36%, 러시아 20%, 영국 19%이고 대한민국이 12%, 꼴찌였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다. 가장 열정적인 기독교 국가들이 한국이기도 한다. 실제로 그분을 위해서 죽을 수 있냐고 했더니 죽을 마음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 분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내 삶이 추구하는 목표가 신앙생활과 다르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결혼은 아내랑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영광스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을 위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목표가 내가 잘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건져준 목적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것을 넘어 온 땅에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위해 살아가는데 익숙해져가고 있다.
 
2) 두 번째 우리의 주특기는 내 영광을 바라는 것이다.
내가 잘 되는 것을 찾는 것이다. 미국의 로스캐롤라이나에 ‘서밋 처치’라고 하는 교회가 있다. 이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유명한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기도하다가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접게 했다. 그리고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를 했다. 변화가 된 것이다. 그리고 로스캐롤라이나에 ‘서밋 교회 300명 담임 목사로 부임을 한다. 그래서 예배를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하는데 어느 날 그 주변에 있는 대학생들이 교회를 탐방을 온 것이다. 몇 명이 위해서 기도를 드렸는데 너무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 다음주에는 300명의 교회인데 300명을 데리고 온 것이다. 한 주 만에 600명이 된 것이다. 300명이 늘었긴 했는데 13불 53센트가 늘었다는 것이다. 우리 돈으로 1만 5천원 는 것이다. 헌금이 그것을 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주일에 예배가 끝나고 특별한 헌금이 들어왔다. 담임 목사님에게 보여드린다. 그 헌금은 베이컨, 계란, 치즈, 과자였다. 이것들이 돈이 없으니까 아침 식사를 헌금한 것이다. 기숙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 말씀을 하나 써 놓았다는 것이다. “은과 금은 내기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주나니” 그 목사님이 그 헌금을 보면서 참 기쁘기도 하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교회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기도하게 한다. 졸업하면 어떤 길로 갈 것인가를 기도한다. 답을 못 받은 대학교 4학년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백지 위임을 해서 주의 나라를 위해서 2년간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한 해에는 백지 위임에는 백 명이나 헌신을 한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개척교회나 선교지에 개척지에 이 학생들을 다 파송한다. 그러다가 중앙아시아에 아주 근본주의 이슬람 개척 선교지를 시작했다. 그때 스므살에 클라라 라는 자매가 함께 참여했는데 안타깝게도 근본주의 이슬람들에게 어느 날 납치를 당한다. 아무 조건도 없이 그냥 사라진 것이다. 교회가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모두 정부와도 협상을 하고 미국 군부와도 함께 도와서 찾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때 이슬람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클라라 자매의 사랑을 받았던 현지인 여성 300명이 회교국가 앞에서 그들이 데모를 했다. 그 근본주의 회교권 앞에서 여성들이 나와서 여러분 이렇게 한 것은 그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클라라 자매가 보여준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클라라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다. ’당신은 그 편한 나라를 두고 여기에 와서 고생을 하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대답은 “만약 예수님이 저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여기 있겠습니까?”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택했다면 이 나라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랑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서 이 클라라를 위해서 데모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클라라 자매는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도 돌아오지 못했다. 교회는 매우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명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교회를 이 슬픔을 거룩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우리는 왕권을 바꿔치기 하는 주특기만 가진 것이 아니라, 사명을 바꿔치기 하는 주특기를 가지고 있다.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일이 왜 죽어 가는가? 내가 잘되는 것을 목표로 삶을 바꿔치기 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이 고백으로 다 살기를 바란다.
 
*로마서 14:8,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고백을 가지고 살면 우리는 영광스런 자유를 회복한 것이다. 한 번 더 읽어보자.
 

II.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옆에 사람보고 인사하자. “형제님, 자매님, 당신은 주님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저에게 깨닫게 하신 것이 있다. 이 이야기를 주셨다. 이런 이야기이다. 아주 친한 친구 세 명이 있는데 한 적한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침구 ABC가 함께 걷고 있었다. A앞에 걸어가는 쪽에 십만 원이 있었다. 질문한다. 이때 먼저 집으로고 싸워야 하는가? 그래서 A가 주웠다. 그것을 집는 순간 A씨의 기분이 어떠한가? 또 백 미터 앞을 걸어가는데 B 앞에 100만 원짜리 돈이 떨어져 있었다. B씨가 100만원을 주웠다. A의 기분이 어떻겠는가? A의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친구지만 기분은 그렇다. 우리의 마음과 같다. 또 C의 기분도 그러했을 것이다. 백 미터를 또 걸어가고 있는데, C앞에 천만 원짜리 돈이 있다. 누가 제일 기뻤겠는가? C가 너무 기뻐하고 A는....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복잡한 관계로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후 경찰이 오고 있었다. 가까이 와서 “혹시 한분의 신고가 들어왔는데 천백십만 원(1,110만원)을 누가 잃어버렸는데 주우셨냐?”고 물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대답한 사람은 누구인가? 대답은 당연히 A였을 것이다. 온갖 주머니를 다 뒤지면서 C는 안 주려고 했을 것이다. 주님이 이 이야기를 저에게 깨닫게 하시면서 하셨다. “네가 나를 만나는 날, 똑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네가 내 앞에 서는 날, 내가 예레미야서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 ‘하나님 만날 날을 준비하라.’ 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은 주님 만나는 것, 그날 달려갈 것이지만, ‘나를 위해서 아무것도 안 했던 사람들은 참 걸어오는 길이 거리낌이 있지 않겠느냐? 물론 나는 다 안아주실 것이다.’라고 하신다. 왜 신앙생활이 지치는 생활로 전락하는가? 왜 구원의 감격이 종교인의 피곤한 삶으로 바뀌는 것인가? 우리는 왕이 되어버렸고, 내가 잘 되는 사명을 향해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 중에, 어느 나라 살든, 몇 살을 살든, 하나님 나라에 방향을 맞추어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늘 행복하다. 아멘..
 
※저는 평택에 이 교회를 방문했는데 이 말씀은 온 세계에 알리고 싶어졌다. 한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초등학생이 있었다. 물었더니 5학년 3학년 등 12명이나 앉아있었다. 왜 왔냐고 했더니 어른 예배 마치고 주일 예배를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부흥회에 4일 내내 온 것이다. 말씀을 나누는데 질문을 했는데 틀리지 않고 다 대답을 했다. 그래서 통성기도를 하는데 5학년 여자아이가 가슴을 때리면서 기도했다. 저는 눈물이 터져서 기도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교회가 어떻게 된 교회인가를 생각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눈물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격의 눈물도 회복하고 회개의 눈물도 회복하여야 한다.
“하나님, 저는 구원으로 주님을 왕으로 모셨는데, 내가 왕으로 살아가는데 너무 익숙합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인생의 사명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님 오늘 예배를 통해 고쳐주세요. 저 좀 고쳐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에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다. 제가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기쁨을 잃어버린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살기 때문이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저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는 제 아내라고 믿고 산다. 자신도 아닌 것을 안다. 저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 남자 분들, 암기하시기 바란다. 아내를 가장 예쁜 여자로 믿고 사니까 너무 좋다. 제 아내와 신앙의 여정을 35년째 걷고 있다. 물론 신혼부부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오십대 노부부가 손잡고 가는 모습은 그 사랑의 무게를 이길 수 없다. 저는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제 아내와 저는 살면서 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도 잘 안 된다. ㅋ ㅎ ㅎ 우리는 서로 영적 전우라고 하면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제 아내가 저에게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신앙의 여정을 같이 걸어오면서 넘어질 때도 있었고, 정말 살려달라고 울면서 기도할 때도 많았다. 그 믿음의 무게가 우리 여정 속에 있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에서 오늘 세 번째 고백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3)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을 행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살면 인생은 피곤하다. 지치고 짜증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주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믿음으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나누겠다. 솔직하게 대답하라. 키가 큰 사람이 멋있는가? 작은 사람이 멋있는가? 누가 더 멋있는가? 영적으로 대답하지 말고 본능적으로 대답하라. 키가 큰 사람이 멋있다는 것을 모두 보편적인 멋있다는 대답이다. 조금 더 질문을 하면 상체가 긴 사람이 멋있는가? 하체가 긴 사람이 멋있는가? 하체가 길어야 멋있다. 그래서 백화점 가면 마네킹은 다 다리가 길다. 그래서 멋있는 옷을 입으면 안 어울린다. 그 핏이 안 나온다. 제가 나누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아는 것이 있다. 저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울하지 않다. 저와 모든 키와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책임지신 얼굴이고 하나님이 책임지신 키이다. 아멘,,, 저는 대한민국 평균키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보편적으로 육으로 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영적이 멋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어떤 교인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멋이 있는 것이다. 어떤 교인이 말씀을 따로 올곧고 정말 순종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영적인 멋이라고 한다. 여러분 영적으로 멋있어야 기쁘다. 자신감이 있다. 육적으로는 틀렸다. ㅋㅋㅋ 저는 여러분 교회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살지 말고 주님이 행하실 약속을 믿고 말씀을 따라가 살고 영적인 멋이 있는 자로 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합심 기도문---“하나님, 우리가 왕이 되는 데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출발한 그 ‘영광스런 자유’가 어느 새 내가 잘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성취되지 않아 지쳐버렸습니다. 하나님, 감격의 눈물도 회복시켜 주시고, 회개의 눈물도 회복시켜 주셔서, 영적인 멋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요약
우리가 신앙의 길이 기쁨이 되어 이 영광스런 자유를 주신 것을 피곤하고 짜증나는 순례의 길처럼 느껴지지 않게 살기를 주님께 소원해야 한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에 소홀 하는 삶을 살았음과 종교인이 되어가고 있는 나의 잘못을 깨달아 내가 지금 왕이 되고 싶어 하지 말고, 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무너뜨리고 되돌아와서 다시 눈물을 회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격이 되고 이 말씀으로 순종하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주님은 흥하셔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 진정한 깊이가 있기를 소원해야 한다.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은 그 당시에 생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찬양했던 일시적인 구원이었지만 우리 주님의 구원은 거룩한 성도들이 세상 끝날까지 찬양해야 할 영원한 구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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