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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24일)
제목: "작은 섬김, 그리고 하나님 나라"
말씀: 룻기2: 8~9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최성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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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2:8~9,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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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이 다가오고 있다. 방학을 잘 보내셨나요? 지금 교역자들은 가을 학기를 준비하는 개강수련회에 또 9.26 준비를 위해서 한창 수양회 중에 있다. 다행히 이번 수양회는 금식이 아니라서 다들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화면으로 보실 수 있는 것처럼 저는 그다지 내 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목회자이다. 평범하고 평범한 목회자인데 한 가지 내 세울 것이 있다면 남들과는 다른 피부 톤을 내 세울 수 있다. 건강한 색깔을 갖고 태어나서 중고등시절 아무리 아파도 선생님은 저에게 얼굴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며 조퇴를 시켜주시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시고 구우실 때 조금 시간을 더 넣으셨는지 특별한 색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이번 여름방학을 지나고 나니 저희 교역자 실에 강력한 경쟁자 두 분이 나타났다. 본인들의 말로는 썬 크림을 깜박했다고 하는데 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까만 목사님들은 처음 보았다. 저도 좀 분발해야 하는 것 같고 정체성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 요즘 성도들 개인의 삶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엄청 잘 살고 있는 시대인데 막상 성도님들의 개개인을 살펴보면 그다지 잘 사는 것 같지 않다. 부동산이 어떻다. 주식이 어떻다. 코인으로 대박이 났다. 등등 많은 이야기들이 뉴스에 나오고 있지만 막상 그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겉으로는 커졌고 겉으로는 화려해졌고, 뭔가 된 것 같은데 막상 우리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여전히 힘듦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는 엄청 부흥했다. 또 한국교회는 엄청 커졌는데 성도님들의 신앙은 자라나지가 않는 것 같다. 성장과 달리 성숙과 깊어짐이 그리고 신앙생활의 즐거움이 요즘 특히 보이지 않다.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전부이다. 백화점 다녀오듯, 학원을 다녀오듯, 마트에 다녀오듯, 다녀온 것이 전부인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늘 총 다섯 덩어리의 이야기를 룻기를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특별히 지금 다락방에서도 개강하면, 다락방 룻기를 다루게 될 텐데, 지난 개강 전에, 방학 전에 다루었던 룻기를 기억하면서 앞으로 될 룻기를 기대하면서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첫 번째 –룻기는 어떤 성경인가?
-룻기는 참 평범하지 않은 성경이다. 일단 룻기의 주인공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아이구! 대답 잘한다. 여자이다.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가 룻기이다. 그렇다면 성경 66권 중에서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곳이 한권이 더 있다. 어떤 성경이 더 있는가? 바로 에스더이다. 성경이 참 많이, 많은 이야기들이 구성되어 있고,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단 한권으로 배정한 성경은 에스더서와 룻기가 전부이다. 당시의 문화를 생각해볼 때, 지금부터 수천 년 전을 생각해볼 때, 여성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의 책을 구성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흔치 않은 일이다. 게다가 룻기를 읽어보면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좀 횃갈린다. 룻기의 주인공은 룻이다. 보통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룻기를 찬찬히 묵상하다보면 룻기의 시작은 나오미로 시작한다. 룻기의 마지막도 나오미가 아기를 안고 축하받는 일로 끝이 난다. 어떤 사람들은 룻기를 룻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나오미의 이야기이다. 또 어떤 학자는 한발 더 나아가서 이것은 나오미의 이야기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생각해볼 때 지금이야 주인공이 둘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매우 흔하지만 당시를 생각해 볼 때는 흔치 않은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룻기가 이상한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다. 어떤 게 있는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사이가 너무 좋다. 이보다 더 이상한 이야기가 세상에 존재할지 모르겠다. 추석이 다가오고 시어머니의 전화 벨소리만 들려도 받지 않을까 하는 우리와는 달리 여러분은 아이고 이 성경에서는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너무 좋은 관점으로 등장한다. 정통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룻은 남편을 잡아먹은 며느리이다. 그리고 전통적 관점으로 본다면 나오미는 자기의 아들을 가지고 룻을 평생 저당 잡는 시어머니이다.
 
그런데 룻기에서는 사이가 너무 좋게 등장한다. 심지어 3장을 보면, 다들 무심하게 넘어가지만 3장으로 보면,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와 함께 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준다. 이게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어서 그렇지 요즘 우리말로 한다면 시어머니가 남자 꼬시는 방법을 며느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이상한 구성이 흔치않다. 라고 생각한다. 또한 룻기의 배경은 사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기에는 사사시대에 어울릴만한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뭔가 전쟁도 나타나지 않고 타락하거나 고난 받는 일도 없고, 영웅도 등장하지 않고, 영화로 친다면 드라마로 친다면, 크라이막스로 될 만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굉장히 평범하고 .일상적이고 작은 여자들의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다. 고난이 와도 극적으로 해결이 되어도, 오벳이 태어나도, 다윗의 족보가 등장해도 매우 담담하게, 소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토록 빈번하게 등장하시던 하나님도 룻기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연이라는 표현이 여러분 반복되는 만큼 심심하게 쓰여 진 성경이 룻기이다. 지나치리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 그래서 평범하지 않은 성경이 바로 룻기이다. 그렇다면 룻기의 주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다. 이 평범하지 않은 일반적이지 않은 성경을 통해
 
두 번째-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인가?
-창세기를 시작으로 해서 사사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삼손 등 뭔가 큰 인물들의 이야기로만 쭈욱 이어져오던 성경이 갑자기 소소한 이야기로 바뀌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성경이 룻기인데, 이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조금 전에 이야기 일인데, 선물을 할 일이 있어서 사플(사랑플러스 서점)에서 어린이 성경을 살펴볼 일이 있었다. 어린이 성경이 종류가 굉장히 많이 있었다. 그림도 예쁘고 편집도 잘 되어 있고 이야기도 잘 쓰여 져 있고, 전문 용어로 글 밥도 매우 적어서 이 책으로 목회를 한다면 우리 다락방 이 순장님들이 다락방을 이끌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순원 여러분!!!, 이렇게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성경은 주요 사건이나 인물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세상을 만드는 하나님, 홍해를 가른 모세, 아들을 바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등, 아이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사건, 구성, 인물로 되어 있다. 마치 일 년 만에 득음에 성공한 이원준, 헤어스타일이 웃으셔야 되는데, 헤어스타일의 최강자 이의수,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썬텐을 완성한 최성현 같은 위인전을 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 저와 아이들도 그렇고 뭔가 요셉처럼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을 멋지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인물이 되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하나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꿀 것이다. 얼마나 귀하고 좋은 꿈인 줄 모른다. 그런데 마음 한 편으로는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은 위인전이 아니고, 성경은 큰 인물을 찾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큰 인물을 만드시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은 훌륭한 사람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고, 뛰어난 사람, 아닌 사람을 구분하시는 분도 아니고, 마치 의사, 변호사, 판사쯤은 되어야 되고 스카이를 나오고, 유학을 다녀오고, 대기업을 취업해야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듯이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일차적인 수준에서 이해하지 않을까하는 조바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룻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같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길고도 길었던 노예 생활이 끝나고 죽음의 광야 생활도 마쳤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수많은 전쟁을 승리를 이끌고 들어왔는데, 이제는 무언가 될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아무리 보아도 모세는 보이지 않고 여호수아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우왕좌왕하고 조충우돌하면서 소견의 옳은 대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이 보인다. 애굽의 시대보다 광야의 삶보다 더 엉망으로 살고 있는 자신들을 보게 된다. 이만하면 좀 더 나아진 삶을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흉년 속에 있고 여전히 망한 인생이고 아들도 남편이 없는 인생이고, 또 남편도 자식도 없는 인생이고, 심지어는 잘해보려고 했던 모든 선택이 오히려 망한 것으로 되어가는 즐거움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나오미가 쓰다, 괴로움으로 변해버린 인생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대체 룻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시는데 나는 그냥 두시는가? 이스라엘이 잘 되면 내 인생도 잘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는 커지고 부유해지고 있는데 왜 나는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와 영웅과 큰일에만 있는 것일까? 내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나에게도 관심이 있을까? 하나님은 나를 돌보고 계실까의 질문이 룻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호소하지만 따뜻하지만 깊고 의미 있는 그런 답을 주시는 것이 바로 룻기이다. “내가 너희를 돌보고 있다. 나의 관심은 이스라엘과 영웅들과 큰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한 영혼 한 영혼에 있다. 나오미와 룻기도 돌보고 있고 또 돌보고 있고 텅 빈 인생도 돌보고 있고 쓴 인생도 돌보고 있다. 아픔 속에 있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잊지 않고 보고 듣고 기억하고 돌보고 있다. 너희도 이 돌봄에 함께 참여하지 않겠니?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지 않겠니?” 라고 하신다. 룻기가 우리의 삶에 주는 따뜻한 주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 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는 의미를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세 번째- 하나님이 갚으시지만 누구를 통해 갚으시는가?
-목회를 하다보면 좋은 순장님들을 만나게 된다. 교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귀한 분들을 많이 보게 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쪼개서 다락방을 섬기고 공동체를 섬기고 어려운 분들을 섬기는 귀한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분들의 섬김과 헌신을 서로 기억해 주면서 서로 돌봐주는 좋은 분들도 많음을 보고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이런 분들의 헌신을 고마워하기는커녕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순장님께서 복주실거야, 하나님께서 도우실거야, 라고 말로 모둔 것을 퉁치는 분들을 보곤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하시는지는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헌신과 수고를 기억하고 복 주실 것이다. 라는 좋은 의미의 말씀이라고는 알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미루는 듯한 그런 말처럼 들려서 마음이 편치가 않을 때가 있다. 순장님 중에 우리 공동체 않에 보상을 바라면서 사역을 하는 분은 하나도 없다. 교회에서 섬김을 하면서 무엇을 바라는 분도 없다. 하나님이 좋아서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또 이 교회를 사랑해서 나에게 주어진 여혼들을 사랑해서 그들을 돕고 섬기고 돌보는 것이 대부분의 헌신이다. 그런데 그 돌봄의 섬김은 하나님을 향해 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향해 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하나님만 향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섬기고 돌보다 보면 많은 수고와 헌신이 사람을 향해진다. 그런데 그 헌신과 섬김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끝내버리면 그 상황이 참 거시기 한다. 순자님을 통해 헌신하시는 분을 통해 섬김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저이다. 그리고 여러분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같으셔야 하는가? 하나님이 갚으시지만 누구를 통해 갚으시는가? 우리를 통해 서로를 통해 갚아야 한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이런 예를 들어보겠다. 여러분들이 환갑, 회갑이 되어서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 자식들이 보상해 줄 것을 바라고 키우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날이 되면 자녀들이 찾아와서 축하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싶고 또 가족이 모여 식사라도 하고 싶고, 케이크도 자르고, 또 당연히 거기에 알맞은 헌금도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자녀가 60, 70의 생일에 와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등을 두드리더니, “어머니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하나님께서 다 갚으실 거에요.”하고 집에 가버린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60년 곱하기 365일을 해서 최소한 21,900대를 때려야 풀리지 않겠는가?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으실 거에요.” 라는 말의 의미를 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이 사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에 말씀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돌보시는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는가? 메추라기가 동풍을 타고 오는가? 아침에 일어났더니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는가? 물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방법을 잘 사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 우리가 있다는 게 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돌보신다. 저와 여러분을 통해 돌보신다. 오고가면서 나는 진심의 감사의 한 마디, 또 커피 한 잔, 성의 표시, 그리고 무엇보다 일한 만큼 정당하게 치러지는 월급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방법이다. 룻기가 바로 이런 성경이다. 어려움에 처한 시어머니를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는 룻을 통해 하나님을 돌봄이 나타나는 성경,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보는 룻을 돌보는 보아스를 통해 그 돌봄을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이 드러나는 성경, 그래서 나오미와 보아스와 룻기가 서로를 돌보며 이 돌봄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성경이 바로 룻기이다.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께서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돌보는 것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사랑, 헤쎄드, 인애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그 사랑을 의지해서 돌봄을 하는 것, 어쩌면 그 사랑이 다 뭔지도 모르지만 율법에 하나님의 말씀에 고아와 가난한자와 아픈 자와 연약한자와 어린이를 돌보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냥 돌봤던 그 돌봄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이어져 감을 보여주는 성경,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룻기이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은 곧 우리가 돌본다는 의미이다.
 
네 번째- 하나님은 왜 우리를 이 땅에 남겨주셨는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죽어서 가는 곳, 혹은 죽어야지만 가는 곳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천국, 하나님 나라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고 나타나듯이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보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제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다 알지는 못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세상을 싹 밀어버리고 다시 창조하는 방법이다. 또 괜찮은 사람만 하늘에서 이렇게 보시면서 괜찮은 사람만 오늘 수요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 정도만 뽑아서 구원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더 쉽고 편한 방법이 분명 하나님께는 있으셨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그것도 33년 동안 죽을 날만 기다리고 계시면서 살고 계시다가 가장 수치(羞恥)스럽고, 가장 고통(苦痛)스럽고, 가장 저주(詛呪)스러운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돌아가시는 방법은 사실 생각하기 쉬운 방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그리고 이곳에 살고 계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곳이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곳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를 회복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에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셨는데 예루살렘도 아닌 베들레헴에 오셨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로마가 아닌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그 이후에로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라 주로 갈릴리에 지내시면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과 함께 하시더니 심지어는 가장 치욕(恥辱)스런 방법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들이야 마르고 닳도록 들은 이야기이니까 이것이 아무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고 그냥 감사한 은혜로만 다가오지만 왜 하나님이 굳이 이 방법을 택하셨을까? 라고 질문을 던져보면 조금 다른 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를 이 땅에 그대로 남겨두셨다.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편한가? 구원과 동시에 천국에 사는 것이 편한가? 천국에 사는 것이 훨씬 편하다. 죄와 싸울 일도 없고 하나님이 혹시 나를 버리실까 두려워할 일도 없고, 슬픔과 고통 가운데 헤맬 이유도 없고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순간 저를 싹 뽑아서 데려가시면 그 얼마나 편한 인생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 땅에 그대로 남겨두셨다. 구원받은 자들을 다 천사로 만들거나 혹은 힘센 자로 만들어서 예수님의 대리 통치자를 세우고 그들이 악한 자를 심판하고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를 이 모양 이 꼴로 그대로 남겨두셨다. 왜냐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 그 자리에서 이 삶 속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구원하시고 그렇게 구원한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이유는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구원 받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이 땅에 남겨두셨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오늘 읽은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룻기 2:8~9,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이 본문은 보아스가 룻에게 부탁하고 허락하는 말씀이 들어있는 장면이다.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내 땅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한다. 밭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해 둘테니 마음껏 이삭을 줍고 물도 마시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말해서 공급해서 받으라는 보아스의 말이 이 본문이다. 자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다. 원래 주관식으로 드리려고 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안 될 것 같아 객관식으로 드리겠다. 주관식이 두 가지 이니까 50% 확률을 갖고 있다. 잘만 찍으시면 서울대에 간다.
 
▷보아스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는가?
⓵번 보아스는 룻의 처지가 안타까워서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다.
⓶번 보아스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룻과 결혼하게 될 것을 알았고, 그래서 오벳을 낳게 될 것을 알았고, 그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어서 심지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것을 알고 다 알고 큰 그림 속에 다 알 고 했다. ⓵번인가? ⓶번인가? ⓵번.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맞히다니. 룻은 그렇다면 룻은 어떤 마음으로 나오미를 따랐는가? 내가 시어머니를 따르면 내가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게 되고 그렇다면 다윗의 할머니가 되어서 성경에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오미를 도왔는가? 나오미는 내가 여기서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면 성경에 길이 기억되는 좋은 시어머니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며느리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는가? 보아스는 기업을 무를 차례도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룻을 돌보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몰랐다. 룻도 마찬가지이고 나오미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룻이 좋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있으니 그냥 호의를 베푼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율법을 따라서 잘 모르지만 그냥 도와야 한다고 하니까 이삭 몇 개 줍는 것이니까 도왔을지 모른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그냥 작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작은 일이, 그 작은 섬김이, 그 작은 돌봄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간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허락하시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내 삶에 허락하시는 그 일들, 도대체 나에게 이 사람을 붙여주시고 이 상황을 붙여주시는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일들만 붙여주시는지 다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봐도 원수 같은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과 그 일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돌보는 것,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이것이 하나님의 돌봄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의 방향이다.
 
룻기에는 나름 큰 비중을 가지고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두 사람이 있다. 혹시 누구인지 아는가? 사라지는 인물, 바로 한 사람은 오르바, 또 한 사람은 이름조착 기록되어 있지 않은 아무개라는 친척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이라고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성경의 룻기에서 가장 공감이 되는 사람들이다. 아무개라는 사람은 너무 인간적이다. 법적인 순서로 따지면 무엇을 책임져야만 하는 사람이 이 아무개이다. 처음에는 잘 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룻을 젊은 여인을 아내로 취할 수 있다는 말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기업을 묻겠다고 했다가 자신의 재산에 손해가 올 수 있다고 하자 바로 취소해 버리는 사람이 바로 아무개이다. 얼마나 합리적이고 얼마나 당연한 선택인가? 오르바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떠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먼저 고향으로 가라고 한다. “더 이상 우리가 함께 살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가업을 이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 것도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니 너희들도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제가 오르바였더라도 알겠다고 이야기 했을 것이고, 제가 오르바의 어머니였다면 나오미에게 백번 천 번 고맙다고 절을 했으며 제 딸 오르바를 데려갔을 것이다. 오르바나, 아무개나, 둘 다 너무 인간적이고 너무 합리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룻기에서도 이 사람을 정죄하는 뉘앙스를 볼 수 없다. 그런데 꼭 우리들이 모습처럼 느껴진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 악하지도 않는다. 찾아오는 이들을 굳이 외면하지 않지만 알고도 손해를 보려하지 않는다. 굳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이정도로는 충분해 라고 생각하면서 따라가는 사람이 우리이고, 오르바이고, 아무개라는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들, 돌봄을 실천하는 사람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을 돌봄을 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엄청난 큰 손해, 엄청난 큰 결심이 아니라, 삶에 순간순간 찾아오는 작은 결심과 작은 섬김을 택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성경의 역사가 진행되어 오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다. 물론 제가 시어머니를 모셔야겠디고 결단한 룻의 결심을 작은 결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룻을 돌보겠다고 하는 보아스를 작은 결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룻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을 때, 보아스의 그 멋진 모습을 별거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아니다. 제가 작은 결심이라고 드리는 이유는 자신들의 섬김과 헌신과 돌봄이 만들어 낼 그 큰 결과를 몰랐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는 작고 작은 소소한 결단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작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다. 섬김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방법으로 사용되었을지 그 섬김이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루어갈지 알지 못했지만 내 삶에 주어지는 상황들을 포기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받아들이고 돌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작은 결정이 하나님의 돌봄이 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라고 말씀 드리는 것이다. 그 증거가 어디에 나타나는가?
 
룻기의 제일 마지막이다. 룻기의 제일 마지막에는 무엇이 등장한가? 족보가 등장한다. 이 족보는 길지도 않다. 그리고 매우 간결하게 쓰여 져 있다. “또 족보야, 라고 지겹네!” 라고 보시면 안 되고 가만히 아주 가만히 몇 번을 묵상해 보시면 조금씩, 조금씩 얼굴에 미소가 나타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 족보에는 다말이라고 하는 과부가 등장한다. 생각해보면 라합이라는 기생의 인생이 보이고 룻이라는 과부이자 이방인이었던 여인이 이 족보를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짧고 아주 소소하고 아주 간결한 족보이지만 마치 하나님께서 룻과 보아스와 나오미에게 또 우리에게 작은 선물을 주시듯이 “봤지 그렇게 사는 거야” 그렇게 했더니 “너희의 삶은 내가 돌보고 있어, 또 너희 스스로 돌보니 잘하고 있네, 이렇게 살아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거야, 그 작은 돌봄이 하나님 만들었어,”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마지막에 나타나는 족보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맺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만들 때, 그 비행기가 이렇게 날아다니고 우주를 날아가 다녀오는 그런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냥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에 정신 나간 짓을 했던 일이 큰 변화를 만들었다. 열 두 제자도 바울도 룻도, 보아스도 자신들의 삶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알았다면 영원토록 남아서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쉽게 제자가 될 수 있고 배신할 수 있고 예수님을 모른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나라는 자신의 삶에 주어지는 수많은 선택들을 하나씩 하나씩, 믿음으로 말씀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의 방법으로 실천하고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세워져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쪼개어 주셨고, 자신을 주셨듯이 자신의 삶을 쪼개어서 돌봄에 참여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자신의 삶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와 아픈 자들과 가난한 자를 돌보셨듯이 그들을 돌보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삶에 주어지는 일들과 영혼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하는 그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 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돌보고 계신다. 우리의 삶을 하나 하나 돌보고 계신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우리를 통해 돌보고 계신다. 그 돌봄에 동참하고 있는가? 자신의 것을 내주면서도 너무 부끄러워했던 그 따뜻한 돌봄에 의해서 자신의 삶도 어렵지만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었던 그 돌봄을 통해서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이지만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영혼과 일들을 끝까지 섬겼던 그 돌봄을 통해서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돌보고 계신다. 그리고 그 돌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돌봄이 다윗으로 이어졌듯이 하나님 나라가 이어진다.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했던 자는 가고, 어머니를 돌보겠다고 했던 자는 가고 이삭을 줍도록 허락했던 관용과 나눔, 며느리를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 비록 손해가 올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던 그 보아스의 헌신이 하나님의 돌봄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룻기를 통해 볼 수 있다. 가을이 오고 있다. 수많은 기대도 있지만 수많은 걱정도 공존한다. 코로나는 끝나지 않고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으며 부동산이 오르라고 했던 그 탐심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찌르는 무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우리의 자녀들은 여전히 갈 길을 몰라 인생에서도 신앙에서도 방황하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차마 꺼내지도 못할 그러한 기도제목들이 우리의 삶에 많이 있다. 도대체 누가 내 삶을 돌보는지 햇갈리는 그런 때가 있다. 이런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결심, 작은 섬김, 작은 돌봄 들을 실천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를 위해 그 돌봄이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작은 관심이 누군가를 살려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힘이 될 것이다. 이번 가을 학기는 룻처럼, 나오미처럼, 보아스처럼 작지만 따뜻한 이야기, 모르고 한 일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이야기, 나에게 찾아온 일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보는 이야기 그래서 그 작은 돌봄이 하나님을 돌봄이 되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일들이 펼쳐지는 그런 사랑의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요약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의 돌봄이 다윗으로 이어졌듯이 하나님 나라가 이어져야 한다. 비록 손해가 올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던 그 보아스의 헌신이 하나님의 돌봄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을 룻기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우리도 작은 결심, 작은 섬김, 작은 돌봄 들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9월 26일을 위해서 준비하고 헌신하여 그 작은 결심으로 우리는 서로 돕고 챙기면서 공동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장으로 만들어가고, 말로만이 아닌 진정한 실천으로 다락방과 순장님과 공동체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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