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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9월 3일)

제목: "드림과 채움"
말씀: 마가복음 15:42~47
대표기도: 이정보 집사님(남사역 2반 총무)
찬양인도: 제자, 사역훈련반

말씀읽기::정지윤자매(청년 6국), 박주용 형제(대학6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마무리 기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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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42~47,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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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드림과 채움’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겠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 전날 십자가에 달리셨다. 주님이 달리셨던 그날은 정오부터 어둠이 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의 기세는 하루의 시간대 중 가장 밝아야 될 그 시간대를 어둠으로 꽉 채우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지속하고 있었다. 마침내 오후 3시 어간, 우리 주님께서 숨지시고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을 때에 모든 제자들이 도망가고 그나마 남아있던 여자들이 그 너덜해진 마음 가운데 아마도 소망의 끈도 그 순간 끊어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을씨년스런 분위기, 제비를 뽑는 군병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들, ‘나사렛 예수’라는 자는 이제 처리가 되었으니 그를 따르던 도당들을 발본색원하려던 그런 관계 어린 눈빛들이 하루 종일 어우러지고, 여기저기 도망치고, 흩어진 제자들의 심령은 아마도 상실감, 패배감, 절망감으로 점철(點綴)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다시 부활하실 것을 말씀 하셨다. 끝내 승리하신다고 알려주셨다. 그러나 들은 것과 아는 것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또 아는 것과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또 다른 문제임을 우리 역시 여실히 느끼기에, 우리는 제자들을 안타까운 심령으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안타까운 심령으로 이 순간 바라보게 된다.
 
사실 나사로 죽었을 때도 그랬다. 주님께서 일부러 늦게 도착하셨을 때, 이렇게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아마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우리 주님도 사랑하는 나사렛의 죽음을 앞에 두고 아파하시며 마르다에게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때 마르다는 대답한다. “네, 마지막 날 살아나겠지요.” 이렇게 대답을 한다. 마르다의 대답은 확실히 잘 배운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계획은 더 원대하고, 더 역사적이며, 비상 적이셨다. 우리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하신다. 그때도 마르다가 말한다. 이렇게 4자를 가리킨다. 실제로 가리킨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 “벌써 나흘이 되었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제발 이러지 마시와요.” 라고 한다. 다 맞는 말이다. 마르다는 열심히 배워서 신학적, 학문적, 지식도 출중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데도 눌려있다. 슬픔에 정복당했다. 어둠과 무거움 밑에서 허둥대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다. 우리 안에도 이럴 때도 있는지? 우리 자신의 삶 가운데 가정과 기업에 걸어간 그 여정 중에서 이런 마음이 들 때도 있었고, 혹시 지금이 그런 중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를 지나오며, 우리 한국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기도할 때, 혹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된다. 우리 사랑의 교회 안에서는 코로나 전이나 중이나, 지금이나 오직 은혜, 오직 감사, 오직 기쁨이 충만한데, 조금만 눈을 들어 돌리고 조금만 귀를 열어보면, 여전히 끝나지 않는 코로나와 안정되지 않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 그리고 적대적인 여러 사회적인 이미지, 한국교회가 신음(呻吟)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며 마음이 시원해지신 적이 근래에 많은가?
 
저는요? 얼마나 답답하면, 근래에 권사님들이 더 많이 가슴을 치시며 기도하시는 것 같다. 물론 우리 주님 오시면 해결된다는 것,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주님께서 끝내 책임지실 것도 안다. 영원토록 주님의 교회가 영원토록 있을 것을 우리는 확실히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알고 고백하는데도, 이러한 사회적 기세에 환경적 어려움에, 신앙적 위협에, 마치 주님이 달리시는 그날과 같이 무거움과 비관적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 물과 피를 쏟던 그날, 어두움과 무거움이 지배하던 그 시간, 아리바대 지역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육신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존경 받는 공회원 산헤드린 멤버 활동을 하였다. 존경 받는 바리새인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다. 그 시절 존경 받는 바리새인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가 흔치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더라도 예수님과 관계없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육신을 달라고 한다.
 
이 마가복음에서는 이 ‘당돌한’ 그 표현을 그대로 썼다. 이것의 헬라어는 ‘톨마오‘라고 한다. 성경에서 어디에서 이 단어를 썼는지 살펴보면, 로마서 5장 7절에 있다.
*로마5:7,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이 ‘용감히’가 ‘톨마오’이다. 빌립보서 1장 14절에도
*빌립보서 1:14,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여기서 ‘담대히’도 ‘톨마오’이다. 이때 사용한 단어이다. 아리마대 요셉이 용감히, 담대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육신을 달라고 한다. 원래 그는 당돌한 사람인가? 감사하게도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서 신약 성경 4복음서가 다 말씀하고 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이 선하고 의로운데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라고 평이하게 기록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이 아리마대 요셉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예수의 제자라고 설명하며 그런데 유대인이 두려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라고 말씀한다. 그러고 보면 이 아리마대 요셉은 원래 외향형, 돌출 형으로서 여기저기서 당돌히 담대히 튄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 두려움 가운데 늘 조심하던 사람이었다. 주님의 제자로서 그 마음가운에 정체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튀지 않고 조심조심 조신조신 그렇게 무리 되지 않게 나아가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합치면 유대인이 두려워서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조신하던 그가 당돌히, 담대히, 용감히,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신 육체를 요구한 것이다. 조용히 가만히 자신의 역학을 하던 그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에 어둠이 장악하고 있을 때에 두려움이 그 모든 길을 주도하고 있을 때, 기적을 행하며 주가를 행하던 제자들이 다 흩어지고 이제 아무것도 없다 할 때에 당돌히 주님의 육신을 거둔다. 자기가 죽은 후 누워야 하는 돌무덤에 말이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세마포로 쌌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염(殮)을 한 것이다. 주님의 머리에서 가시관을 벗겨내고 찢겨진 손과 발을 씻어내고, 포개고, 피와 땀으로 얼룩진 것을 닦아내고, 세마포를 입히는 과정, 그 모든 현장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참으로 당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소위 “나 예수님의 제자요!”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 지난 순장 반시간에 우리 강사 목사님께서 커밍아웃(comming out)이라는 말씀하시며 이 단어가 특정한 노출하는 제한이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시대에 아주 담대한 커밍아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예수님의 제자요.” 이후에 그를 바라보는 동료 바리새인들을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는가? 그는 이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에 세상 적으로 유대인 사회에서 더 이상 존경 받는 공회의에 멤버로 역할을 당하기에는 ‘이제 글렀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섬긴 이모든 것은 재정적으로 큰 손해였을 것이다. 그 무덤은 사람을 장사하는 무덤이 아니다. 새 무덤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가문을 위해, 예루살렘 바로 근처에 준비한 무덤이다.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육체를 거두며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중에 천국에서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가 당시의 습관을 쫓아서 무덤에 돌을 굴러서 막은 것으로 보아서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실 거야!’ 라고 백 프로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물어봐야 된다. 정확하게는 모른다, 제자들도 다 도망갔는데, 엠마오 제자들도 슬픔과 두려움 가운데 고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마가도 돌을 조금 돌을 열어두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본다. 오히려 ‘사랑하는 예수님, 우리 주님 몸이라도 내가 건사해야지’, 하는 그런 주님 사랑하는 갸륵한 마음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본다. 무지막지한 평판의 손해, 재정의 손해, 관계의 손해, 미래의 출세에 있어서의 손해를 감수하고 그의 행동은 결코 어떻게 결과 지어지는가? 기적의 역사의 현장이 된다. 온 인류와 피조물이 간절히 고대하는 바가 이루어지는 그 역사의 자리, 그 시간을 그 빈 무덤이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곳에서 만물의 변곡점이 이루어지고 바로 그 시간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방문하여 은혜를 누리고 주님이 누우셨던 자리라고 하는 곳에 입을 맞추며, 은혜의 불쏘시개 역할을 감당했던 곳이 바로 그 자리이다. 그리고 아미마대 요셉이 바로 그 자리에 주인인 것이다. 이렇듯 아리마대 요셉의 결단과 헌신은 우리에게 큰 은혜의 도전으로 다가온다.
 
특별히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우리가 소마트 예수라고 헬라어도 이렇게 편히 많이 이야기 한다. 소마가 육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당돌히 비움의 자리로 들어간 자신을 비워드림으로 예수님이 육체를 모시는 아이마대 요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성경적 의미를 더욱 확장하여 생각한다면, 오늘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살아계신 우리 주님의 몸이다. 가장 작은 교회나, 주님께서 사역의 영역을 확장시켜 주신 교신 교회나, 도시에 있는 교회나, 시골에 있는 교회나, 모두 우리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 교회를 지 교회라고 한다고 부르기도 하는데, 때 앞에 있는 이 지자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본사 지사라고 할 때 그 지자를 쓰지 않는다. 그 지자는 갈리워질 지(枝) 자이다. 바로 갈리워 질 지(枝) 자 옆에 나무 목자가 붙는다. 지(枝), 그래서 가지 지 자를 써서 지(枝)교회(敎會)라고 한다. 왜 그럴까? 한 몸기 때문에 그렇다. 갈리워져서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한 몸통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한 줄기에 붙어 있고 한 뿌리에 연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웃에 있는 교회, 또 도시에 있는 교회, 시골에 있는 교회, 많은 교회들에 나뭇가지의 색이 바래지고 병충해가 들며 신음하고 힘들고 아파할 때에, 어찌 우리가 우리의 가지는 튼실하고 우리의 줄기는 굵으며, 우리의 나뭇잎은 청청하니 괜찮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님의 육체가 신음하고 있다. 주님의 약속을 많은 교회들이 붙잡고 있으면서도 이 땅의 어두움과 무거움의 기세에 그 마음이 위축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달리시던 그날, 멀리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지금 이 시간 주의 제자들이 주의 몸 된 또 다른 많은 교회들이 안타까움으로 지금의 무거움과 어려움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한국교회가 지상 교회가 한 몸 공동체로서 함께 부흥해야 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나라와 민족도 산다.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할지 많이 고민 안 해도 된다. 우리 주님께서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우리에게 아름답고 귀하게 섬기게 허락해 주셨다.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를 나누어주기만 한다거나, 도와주는 지혜자로서 우리가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회복하고, 함께 부흥하는 수혜자로서 우리가 서는 것이다. 바로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 뵈올 때까지 전투하는 지상 교회가, 여러 지역의 교회 서로 상처를 보듬어 주고 필요를 채워주며 함께 기름을 바르고 기도할 때 우리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우리는 한 몸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함을 확신해야 한다.
 
두 번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우리의 비움 가운데 생명의 역사를 우리는 간절히 기대해야 된다. 한 몸 공동체를 기억해야 된다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우리는 기대해야 된다.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은혜를 누리면 우리의 힘으로 한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으로 눈물로 기도하고 우리의 진심을 담아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이 귀한 것으로 감당할 때, 오직 우리 주님만 영광 받으실 줄 확신한다.
 
아리마대 요셉이 모든 희생으로 자신을 제자로 드러내고, 그의 자리를 주님께 드렸을 때에 그가 생각했던 것에 몇 백만 배의 역사가 일어나듯이 우리는 그저 제자로서 우리 자신을 드려보는 것이나, 그냥 제자로서 우리의 것을 주님 앞에 우리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나, 우리 주님께서는 9.26 주님의 섬김의 날을 어떤 변곡점으로, 어떤 출발점으로, 어떤 결과들로 채우실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얼마나 기대해야 될까? 저는 정말 많이많이 우리가 소망하고 기대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간절함, 기대함, 우리의 소망이 바로 믿음 보고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당돌함으로 세상의 기준에 앞서며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우리가 소원한다. 지금 강단 기도회가 한주일 진행되었다. 이제 3주 더 진행 될 텐데, 와봐야 기도의 영적 기백과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이 모든 일이 정말 담대한 것이다. 당돌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후추파 정신이 발휘되기를 소원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9절에서
 
*고린도전서 16:9,
9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그가 기도하며 애쓰며 주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여 나아갈 때에 선교할 광대함이 전도할 유효한 문이 영안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할 때, 연이어서 사도바울의 고백은 ‘그러나 대적하는 자’가 많다고 또 고백한다. 악한 세력들은 교회들이 살아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단 마귀의 권세는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란다. 위장된 평화 속에서 그저 천천히 우리 교회들이 잠식되기를 소원하고 원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 성경 안에서 깨어있는 영 가족 여러분, 시간의 당돌함을 선포하기를 바란다. 기도의 당돌함을 선포하라. 재정이 담대함을 선포하라. 강단 기도회 중, 담임 목사님을 통하여 주신 뱀 꼬리잡기는 그날 이후 계속하여 영적 울림으로 남아 있다. 어떻게 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우리가 붙잡았던 그 지팡이가 평생 모세가 들고 의지하며 왔었던 그 지팡이가 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거, 생활, 건강, 재정, 노후 문제 등, 든든히 붙잡아야 될 우리의 지팡이가 우리의 혹시 우선순위가 가장 1번으로 등극을 할 때에 그것은 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말씀에 순종하든지 실체가 드러나게 되고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당돌히, 담대히, 그 뱀의 꼬리를 잡으면 뱀에게 물리고 죽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막대기, 주님께서 주신 전략무기가 되어서 홍해를 가르고 주님이 주시는 능력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무지하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뱀 꼬리를 잡는 것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가 아니고, 말씀 안에서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이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는 아리마대 요셉보다 복음의 비밀을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더 잘 아는 모든 이 하나님의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더 잘 아는 복 받은 성도들이다. 우리가 한 몸 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더 크고 넓고, 놀라운 일을 기대하기를 바란다. 아리마대 요셉 같이 당돌히, 담대히, 세상이 기준에 맞서서 교회 회복과 부흥을 위해 비워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한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기쁨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운 것처럼 9.26 한국교회 섬김의 날을 통한 우리의 비움의 섬김이 우리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기쁨의 충만한 채움으로 역사할 줄 확신한다.
 
♣요약
우리의 생애에 담대히, 당돌히 믿음 보고할 수 있기를 원한다. 주님의 작정과 뜻을 기억하여서 주의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게 하심을 믿고 이제 분연이 일어나 담대히 당돌히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 우리 사랑의교회가 9.26 섬김의 날을 위해 헌신을 시간과 기도와 비움으로 준비하여서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체험하고 주님이 약속하신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한국교회를 채우시도록 간절히 원하며 각자의 개인의 삶에도 드림과 채움이 충만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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