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주후 2021년 3월 10일 제목: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씀: 로마서 8:32~37절 설교자: 문진호 목사님 ------------------------------------ (로마서 8:32~37절)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지난 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가 중앙선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아마 운전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중앙선 침범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운전자가 범하는 십대 중과실 중의 하나의 들어간다. 우리가 지켜야 될 것을 우리가 지키게 되면 지킨 그것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다. 운동 습관을 지키면 건강을 지켜준다. 시간을 지키면 약속 상대로부터 신뢰를 지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앙선을 지키면 그 중앙선 반대편의 차로부터 나를 지켜주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실 내가 메고, 그 십자가에 메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가 나를 지켜주는 줄 믿는다. 십자가를 붙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질문하나가 떠올랐다. 온전함의 고봉의 올라가려는 자기 성도가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가 과연 우리를 어떻게 지켜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어떻게 그 십자가 은혜 가운데 우리의 삶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앞 문맥에 해당하는 말씀을 보면, 29-30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정해 놓으셨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아주 원초적으로 부르심 받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천국 갈 자격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너무 은혜가 되는 말이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죽어 마땅한 죄인을 구원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의인의 옷을 입혀 주셨으니 이 복음의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의롭게 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주시는 부모님의 사랑처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신앙이 딱 여기까지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주시고 기도하는대로 다 응답해 주시고 응석을 부려도 다 받아 주시는 그 하나님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앙이 이것이 전부라면 실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실족할 일도 많고 내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는 이 공동체 안에 참 많이 있다는 사실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이 본다. 대부분 어릴 때 대체로 3-4세 이전에는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 처음 걸음마를 하게 되면 뒤뚱뒤뚱 걷게 되듯, 잘 걷는다고 칭찬한다. 마을 처음 배울 때에 옹아리를 한다. 어쨌든 소리를 내어서 말을 하면 또 칭찬한다. 그리고 기쁨을 표현한다. 나이가 30이 넘어서 그러면 똑바로 못한다고 말하게 된다. 옹아리를 한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큰 근심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은 자라야 한다. 사랑받는 자녀는 성장해야 한다. 나이에 맞게 신앙의 연줄에 걸맞도록 성장하고 더 온전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들의 형상을 보다 닮아가는 것, 그것이 의롭게 하셔서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일 것이다. 그래서 30절에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까지 신학적으로는 영화롭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한 존재, 영화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의롭다 하시는 것과 영화롭게 하시는 그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시간과 공간 속에 빚어내는 성화라고 하는 지나난 과정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의 단계에서 영화의 단계로 점프 하는 법은 없다. 날개 없는 동물이 점프하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난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추락이라고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좋은 것만을 얻어 내려하고 어린아이 시절에 신앙의 연수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받아주시고 다 들어주시고, 다 안아주시고 보듬어주셨던 그때를 생각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 성화를 이루어 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에배소서는 이런 기준을 제시하신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과정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지나난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중도에 어떤 사람은 포기도하고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는 것을 주적하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된다. 등산을 하게 되면 올라가고 나서 내려올 때 식당에 가야 그것이 보람이 있지, 아래에서 그냥 먹고 마시고 여기에 있겠다면, 등산로 입구에 머울러 있는 그 모습이야말로 제대로 등산을 경험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성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 것이 우리가 읽은 표현이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본문을 쓰면서 사도 바울이 이것을 그냥 추상적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쓴 이 편지에 옮겨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고린도후서 11:26-27절에 보면, - 이 목록을 우리가 읽기에도 숨이 찬다. 그 정도로 사도 바울이 사명을 받아 그가 이방인의 사도에 삶을 감당함에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던 것인가 하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을 가장 괴롭힌 것은 물리적인 환경의 어려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는 끝까지 그의 사명완수를 위해서 뚜벅뚜벅 그의 그 사명 인생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 목 베임을 당할 때까지...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종일 주를 위하여 당하게 되고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 부분에 있어 날마다 날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 고난과 어려움을 격고 있다고 고백을 하지만, 사실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마지막 위험이나 칼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부분에 칼로 목 베임을 당하는 마지막 그 순교의 사명을 제외하고는 직접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짜 힘든 것이 무엇인가? 환경의 어려움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힘든 것은 이런 표현이다.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이다. 이런 환경의 어려움이 찾아오면서 동시에 어떤 느낌을 받느냐면 바로 고립감이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를 생각한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마치 그 긴 터널을 지나가는 것처럼, 아무 그런 응답과 음성이 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어떤 평가를 내릴 때, 그것이 정죄이든 조롱이든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으로 시편 42편의 말씀처럼 –내 하나님이 과연 어디계신가? 그렇게 우리를 조롱하고 핍박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있는 그 소리들이 들린다라는 것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라고 하는 그 느낌,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조롱과 정죄를 당하고 있는 느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은 이 어려움들, 시편 42편에 보면 이 내적 갈등과 외부의 조롱, 외적인 어려움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4편 2-3절에 보면,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42편 5절-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둘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이 나타나 나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영혼을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라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어떻게 도우시길래 그 고난의 이중고, 내면의 고립감, 외부의 조롱으로부터 그가 그것을 극복하고 자기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은 고난을 이기는 이 비밀에 관하여 다음가 같이 증언을 하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를 위하시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줄 믿는다. 이겨도 넉넉히 이긴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그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지금도 우리를 함께 동역함으로 영화로운 존재가 되기까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빚어내는 지나난 성화의 과정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삼위일체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하게 이기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가 이렇게 선언을 담대해 하고 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질문 하나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고난 대신에 꽃길만 걷게 하심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라고 말씀 하실까? 고난 자체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게 할 능력이 주님께 없어서 이기 때문일까? 또 주님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 고난의 상황 가운데 내가 힘겨워 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실 것이다. 그러면 고난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면 고난의 과정 속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한다. 고난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지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꽃길로만 인도하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신 데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밀은 사도 바울이 또다른 고백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는 본문 하나를 찾아보자.
*고후 12:9-10. -왜 그럴까? 내가 약해져야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강함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 하는 것에 약해지는 것보다 내가 약해지므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에 더욱 강해지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이 나는 약해졌지만 주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인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임재와 능력 안에서 머물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붇듯 부어지게 되는 것을 믿는다. 있는 척, 가진 척, 부족함이 없는 척, 그런 것은 주님의 능력이 오다가도 떠나버린다. 이것이 고난 중에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 이 고난의 신비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죄는 중력처럼 우리를 이 땅에 묶어놓는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고난은 비극적이긴 하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환상의 풍선을 터트리는 바늘과 같다. 그래서 죽음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붙잡고 긴급히 열정적으로 씨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죽어가는 세상에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 고약한 속박을 깨뜨려야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크고 가장 멋진 상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안길 수 있는 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매어있고 붙들려 있고, 또 내가 끄트머리를 살며시 붙잡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 세상의 욕심과 정욕이라고 하는 그것이 사실은 내가 좋아 붙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붙들려 진 그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 안에서 인기를 얻고, 힘을 얻고, 뭔가 내가 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자기 효능감을 느끼면서 그런데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우리는 약해지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고난이 가진 신비이다.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고난을 통해 세상에 매인 것들을 완전히 박살냄과 단절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 단절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함을 법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쓰셨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요셉, 모세, 다윗, 이외에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고난을 통해서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가족, 명예, 지위,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들을 무장해제 당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볼 때, -구약에서 요셉은 노예, 성 범죄자, 모세는 살인자 도망자, 다윗은 국가반란 전력을 가지고 수배중인 사람,
이들은 뭐하나 객관적으로, 외부적으로 쓸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하나님께 받은 소명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는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들을 들어다 쓰기 시작하셨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고난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사랑의 주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루어 가시는 이 방식을 우리가 신뢰하고 이 고난의 신비를 붙들며 나도 고난 자체는 싫지만, 그런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신다고 한다면 순종하기를 원한다. 한결같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의 그 자리에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의 칼럼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류가 영어로 휴먼레이스(Human race)이다. 남이 쉴 때 하나 더 해야 성공한다. 튀어야 홍보가 된다. 소유한 만큼 평안한 노후를 보장한다. 열심히 저축하라 축적하라, 투자하라. 열심히 일한 당신 쉬어라, 자주 듣는 이야기이다. 사회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이다. 이런 구호를 갖고 뛰는 것이 인간의 경주 휴먼레이스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뛰는 레이스가 있다. 그것은 갓 레이스(God race- 줄여서 Grace)이다. --------------------------------------------------------------------------------------------- [1]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3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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