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수요예배(주후 2021년 3월 10일
제목: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씀: 로마서 8:32~37절
설교자: 문진호 목사님
------------------------------------


(로마서 8:32~37절)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지난 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가 중앙선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아마 운전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중앙선 침범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운전자가 범하는 십대 중과실 중의 하나의 들어간다. 우리가 지켜야 될 것을 우리가 지키게 되면 지킨 그것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다. 운동 습관을 지키면 건강을 지켜준다. 시간을 지키면 약속 상대로부터 신뢰를 지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앙선을 지키면 그 중앙선 반대편의 차로부터 나를 지켜주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실 내가 메고, 그 십자가에 메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가 나를 지켜주는 줄 믿는다. 십자가를 붙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질문하나가 떠올랐다. 온전함의 고봉의 올라가려는 자기 성도가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가 과연 우리를 어떻게 지켜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어떻게 그 십자가 은혜 가운데 우리의 삶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앞 문맥에 해당하는 말씀을 보면, 29-30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정해 놓으셨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아주 원초적으로 부르심 받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천국 갈 자격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너무 은혜가 되는 말이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죽어 마땅한 죄인을 구원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의인의 옷을 입혀 주셨으니 이 복음의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의롭게 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주시는 부모님의 사랑처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신앙이 딱 여기까지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주시고 기도하는대로 다 응답해 주시고 응석을 부려도 다 받아 주시는 그 하나님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앙이 이것이 전부라면 실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실족할 일도 많고 내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는 이 공동체 안에 참 많이 있다는 사실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이 본다. 대부분 어릴 때 대체로 3-4세 이전에는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 처음 걸음마를 하게 되면 뒤뚱뒤뚱 걷게 되듯, 잘 걷는다고 칭찬한다. 마을 처음 배울 때에 옹아리를 한다. 어쨌든 소리를 내어서 말을 하면 또 칭찬한다. 그리고 기쁨을 표현한다. 나이가 30이 넘어서 그러면 똑바로 못한다고 말하게 된다. 옹아리를 한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큰 근심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은 자라야 한다. 사랑받는 자녀는 성장해야 한다. 나이에 맞게 신앙의 연줄에 걸맞도록 성장하고 더 온전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들의 형상을 보다 닮아가는 것, 그것이 의롭게 하셔서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일 것이다. 그래서 30절에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까지 신학적으로는 영화롭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한 존재, 영화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의롭다 하시는 것과 영화롭게 하시는 그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시간과 공간 속에 빚어내는 성화라고 하는 지나난 과정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의 단계에서 영화의 단계로 점프 하는 법은 없다. 날개 없는 동물이 점프하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난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추락이라고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좋은 것만을 얻어 내려하고 어린아이 시절에 신앙의 연수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받아주시고 다 들어주시고, 다 안아주시고 보듬어주셨던 그때를 생각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 성화를 이루어 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에배소서는 이런 기준을 제시하신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과정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지나난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중도에 어떤 사람은 포기도하고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는 것을 주적하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된다. 등산을 하게 되면 올라가고 나서 내려올 때 식당에 가야 그것이 보람이 있지, 아래에서 그냥 먹고 마시고 여기에 있겠다면, 등산로 입구에 머울러 있는 그 모습이야말로 제대로 등산을 경험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성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 것이 우리가 읽은 표현이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 본문을 쓰면서 사도 바울이 이것을 그냥 추상적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쓴 이 편지에 옮겨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고린도후서 11:26-27절에 보면,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이 목록을 우리가 읽기에도 숨이 찬다. 그 정도로 사도 바울이 사명을 받아 그가 이방인의 사도에 삶을 감당함에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던 것인가 하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을 가장 괴롭힌 것은 물리적인 환경의 어려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는 끝까지 그의 사명완수를 위해서 뚜벅뚜벅 그의 그 사명 인생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 목 베임을 당할 때까지...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종일 주를 위하여 당하게 되고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 부분에 있어 날마다 날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 고난과 어려움을 격고 있다고 고백을 하지만, 사실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마지막 위험이나 칼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부분에 칼로 목 베임을 당하는 마지막 그 순교의 사명을 제외하고는 직접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짜 힘든 것이 무엇인가? 환경의 어려움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힘든 것은 이런 표현이다.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이다. 이런 환경의 어려움이 찾아오면서 동시에 어떤 느낌을 받느냐면 바로 고립감이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를 생각한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마치 그 긴 터널을 지나가는 것처럼, 아무 그런 응답과 음성이 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어떤 평가를 내릴 때, 그것이 정죄이든 조롱이든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으로 시편 42편의 말씀처럼 –내 하나님이 과연 어디계신가? 그렇게 우리를 조롱하고 핍박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있는 그 소리들이 들린다라는 것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라고 하는 그 느낌,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조롱과 정죄를 당하고 있는 느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은 이 어려움들, 시편 42편에 보면 이 내적 갈등과 외부의 조롱, 외적인 어려움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4편 2-3절에 보면,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면의 이 고립감, 사람들의 조롱 소리 이것이 뒤섞이면서 주야로 눈물을 삼키고 있다고 시인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에 참 놀라운 고백을 보여준다. 자신의 영혼을 향해 놀라운 선포를 한다.

 

시편 42편 5절-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둘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이 나타나 나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영혼을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라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어떻게 도우시길래 그 고난의 이중고, 내면의 고립감, 외부의 조롱으로부터 그가 그것을 극복하고 자기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은 고난을 이기는 이 비밀에 관하여 다음가 같이 증언을 하는 것이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를 위하시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줄 믿는다. 이겨도 넉넉히 이긴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그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지금도 우리를 함께 동역함으로 영화로운 존재가 되기까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빚어내는 지나난 성화의 과정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삼위일체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하게 이기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가 이렇게 선언을 담대해 하고 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질문 하나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고난 대신에 꽃길만 걷게 하심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라고 말씀 하실까? 고난 자체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게 할 능력이 주님께 없어서 이기 때문일까? 또 주님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 고난의 상황 가운데 내가 힘겨워 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실 것이다. 그러면 고난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면 고난의 과정 속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한다. 고난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지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꽃길로만 인도하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신 데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밀은 사도 바울이 또다른 고백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는 본문 하나를 찾아보자.

 

*고후 12:9-10.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왜 그럴까? 내가 약해져야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강함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 하는 것에 약해지는 것보다 내가 약해지므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에 더욱 강해지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이 나는 약해졌지만 주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인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임재와 능력 안에서 머물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붇듯 부어지게 되는 것을 믿는다. 있는 척, 가진 척, 부족함이 없는 척, 그런 것은 주님의 능력이 오다가도 떠나버린다. 이것이 고난 중에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 이 고난의 신비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죄는 중력처럼 우리를 이 땅에 묶어놓는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고난은 비극적이긴 하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환상의 풍선을 터트리는 바늘과 같다. 그래서 죽음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붙잡고 긴급히 열정적으로 씨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죽어가는 세상에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 고약한 속박을 깨뜨려야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크고 가장 멋진 상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안길 수 있는 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매어있고 붙들려 있고, 또 내가 끄트머리를 살며시 붙잡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 세상의 욕심과 정욕이라고 하는 그것이 사실은 내가 좋아 붙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붙들려 진 그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 안에서 인기를 얻고, 힘을 얻고, 뭔가 내가 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자기 효능감을 느끼면서 그런데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우리는 약해지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고난이 가진 신비이다.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고난을 통해 세상에 매인 것들을 완전히 박살냄과 단절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 단절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함을 법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쓰셨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요셉, 모세, 다윗, 이외에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고난을 통해서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가족, 명예, 지위,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들을 무장해제 당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볼 때,

-구약에서 요셉은 노예, 성 범죄자, 모세는 살인자 도망자, 다윗은 국가반란 전력을 가지고 수배중인 사람,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살인자, 당신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이단 창시자,

 

이들은 뭐하나 객관적으로, 외부적으로 쓸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하나님께 받은 소명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는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들을 들어다 쓰기 시작하셨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고난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사랑의 주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루어 가시는 이 방식을 우리가 신뢰하고 이 고난의 신비를 붙들며 나도 고난 자체는 싫지만, 그런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신다고 한다면 순종하기를 원한다. 한결같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의 그 자리에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베토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곡들 중에 청력을 잃어버린 뒤에 지은 곡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5번 운명 교향곡, 6번 전원 교향곡, 이런 곡들이 1800년대 초반에, 당시에는 나폴레옹이 그 군대를 밀고 들어와서 오스트리아를 다 점령해버렸다. 세상은 난리가 나고 청력은 상실하고 가장 절망적이라고 말하는 그 때에 가장 위대한 음악이 탄생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베토벤에 있어서 그 고난의 그 순간에 그로 하여금 가장 위대한 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힘은 그것의 추측의 단서가 있다. 청력을 거의 상실할 때쯤에 했던 고백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 합니다“라고 여기에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청력을 잃고 음악가, 작곡가로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사망선고와 같은 상황에서 세상과 단절 된 채로 숲속에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언어로 말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는 그 새로운 차원의 귀가 열린 것이다.

 

어떤 목사님의 칼럼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류가 영어로 휴먼레이스(Human race)이다. 남이 쉴 때 하나 더 해야 성공한다. 튀어야 홍보가 된다. 소유한 만큼 평안한 노후를 보장한다. 열심히 저축하라 축적하라, 투자하라. 열심히 일한 당신 쉬어라, 자주 듣는 이야기이다. 사회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이다. 이런 구호를 갖고 뛰는 것이 인간의 경주 휴먼레이스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뛰는 레이스가 있다. 그것은 갓 레이스(God race- 줄여서 Grace)이다.

일터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휴먼레이스는 인간의 경주는 우리로 끊임없이 경쟁하게 하고 남들보다 올라서야 하고 잘나야 하고 축적해야 하고, 그래야 잘 살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다 보니 다치고 다리에 힘 빠지고 상처 받아서 주저앉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그것이 그럴 때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무너지고 엎어진 그때가 하나님과 함께 뛰는 경주, 그레이스를 경험하는 때인 줄 믿는다. 세상에서 경쟁적으로 뛰다가 지치고 힘들고 고난을 만나고 또 하나님의 경주, 하나님의 레이스, 그 그레이스라고 하는 그것으로 옳겨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그 과정 속에서 겸손을 배우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힘들 때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더욱 전심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고난 중에 홀로 동굴로 들어가지 말고, 믿음의 동역 자들과 함께 하는 예배, 다락방의 말씀, 권면과 나눔과 함께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그런 합심 기도와 주님의 말씀을 통한 그 음성에 함께 귀 기울이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이기고 또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뛰는 경주, 그레이스의 승리의 주인공이 되길 소망한다.

                         ---------------------------------------------------------------------------------------------
♣요약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그 과정 속에서 겸손을 배우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힘들 때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더욱 전심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고난 중에 홀로 동굴로 들어가지 말고, 믿음의 동역 자들과 함께 하는 예배, 다락방의 말씀, 권면과 나눔과 함께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그런 합심 기도와 주님의 말씀을 통한 그 음성에 함께 귀 기울이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이기고 또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뛰는 경주, 그레이스의 승리의 주인공이 되길 소망한다. 

[1]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32절).
아끼지 아니하시고…내어 주신 이가. 우리에게 샘이 있는 한 누가 우리의 물줄기를 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생각해보자.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우리의 소망을 둔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는 그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에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보다 못한 것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고 사람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를 내어놓으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우리의 유익을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이 되도록 그를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 그는 우리를 아끼시기 위하여 자기를 섬기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2)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우리에게 해 주실 것이다. 그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실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실 것이라는 말에 모두 함축된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수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모든 선한 것을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주실 것이다. 그것도 은사로 즉 주저함 없이 그리고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실 것이다. 어찌…아니하시겠느뇨. 우리가 원수로 있을 때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선물을 주신 이가 그의 친구요 자녀가 된 지금에 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거절하시겠는가?
우리를 위해 면류관과 왕국을 마련하신 분이 또한 틀림없이 거기에 이르는 길목에서 충분히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2] 우리에게는 모든 비난에 대한 답변이 마련돼 있고 모든 정죄를 물리칠 수 있는 보증이 있다(33,34절).
"누가 무엇을 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다는 이 사실만 있으면 족하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다면 이것이 모든 비난을 막아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난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들의 비난을 늘어놓아 보라고 도전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 곧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사실이 모든 비난을 무너뜨릴 것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비록 그들이 그 고소에 성공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은 곧 정죄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번복될 수 없는 항변이 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우리가 이처럼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고 우리가 그와 연합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에 관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1) 그의 죽으심: 죽으실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우리의 빚을 갚으셨다.

(2) 그의 부활: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이 사실은 우리에게 훨씬 더 큰 격려가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 사실을 '그 뿐 아니라'라는 말과 함께 언급한다. 만일 그가 죽고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에 있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3) 그가 하나님우편에 앉으심: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사실은 모든 고소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무한한 격려가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법정에서 그런 친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친구는 바로 재판관 자신이다.

(4) 그가 거기에서 드리는 대언 기도: 그는 거기에서 우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잊어버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풍성한 위로를 주는 내용이 아닌가?
아직도 의심하고 불안해 할 여지가 남아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송사와 정죄를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사람들로부터 겪는 것으로 이해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악한 죄목들을 뒤집어썼었다. 권력자들이 그러한 죄목들로 그들을 정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한 우리가 사람의 법정에서 어떻게 판결 받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3]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 복된 상태 속에서 있을 수 있다는 충분한 보증이 있다(35-39절). 혹시 그리스도를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성도들의 두려움은 종종 그들을 매우 낙담케하며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곧 아무 것도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것이다.

1)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모든 적들에 대한 성도들의 담대한 도전: 누가…끊으리요(35절).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는데 다른 어떤 것이 그 사랑을 다른 데로 돌리거나 해체시킬 수 있겠는가?

①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재난들이 헤아려지고 있다. 그들은 환난을 겪고 곤고에 처하며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언제나 미워하는 악의가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핍박에 쫓기고 기근으로 쇠약해지며 적신으로 굶주리고 극심한 위험과 그들을 대적하여 뽑아든 관원의 칼에 노출되어있다. 이보다 더 암담하고 무서운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시편44:22에서 인용된 구절이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36절).

즉 계속해서 치명적인 타격에 노출되고 그것을 예상하고 있다는 말이다.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사람들은 양을 도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살해한다.

②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들 사이에 있는 사랑과 우정의 끈을 끊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 때문에 그만큼 우리를 덜 사랑하시거나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사랑을 감소시키는 원인도 증거도 되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다른 친구들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는 있다. 바울이 네로 앞으로 불려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지만 그때에도 주님은 그 곁에 계셨다(딤후 4:16,17). 핍박하는 원수들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발악을 할지라도 참된 신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둘째, 우리는 이러한 것 때문에 그를 그만큼 덜 사랑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그만큼 덜 사랑하신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 때문에 고난을 받을지라도 결코 그를 덜 사랑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결코 그를 나쁘게 생각지도 않는다.

③ 이러한 일에 있어서 신자들의 승리: 그러나 이 모든 일에…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첫째, 우리는 이긴다. 묘한 방법으로이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법이다. 그것은 불과 검보다는 믿음과 인내로 이기는 좀더 확실하고 고귀한 방법이다. 때때로 원수들은 자기들이 순교자들의 꺾을 수 없는 용기와 지조에 의해서 당황하고 압도되었다는 고백을 하였다.

둘째,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성도들은 정복자보다 더 나은 승리자이다. 먼저, 그들에게는 손실이 적다. 많은 경우에 정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치뤄진다. 그러나 고난받는 성도들이 잃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그들도 잃는다. 그러나 그들은 금이 용광로에서 잃어버리는 찌끼 같은 것밖에 잃어버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그들은 많은 이득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명예, 평안, 그리고 시들지 않는 의의 면류관 등 전리품이 매우 풍성하다. 이러한 점에서 고난받는 성도들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고난이 많을수록 위로는 더욱 풍성하다(고후 1:5). 웃음을 머금고 화형틀로 가며 불꽃 속에서도 노래하던 이들이야말로 넉넉히 이긴 사람들이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1년 3월 7일)
제목: ''십자가(十字架)가 중앙선(中央線)이다''
말씀: 마가복음 8:34~36, 요한복음 10:27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


(마가복음 8:34~36)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요한복음 10:27)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 찬양을 주님 받으시길 원하신다. 우리는 전천후 신앙이며 온전함의 고봉을 향하여 함께 등정을 위해 올라가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비포(before)→ 에프터(after)가 두 가지가 확연한 차이가 나야 하며, 주님께서 은혜 주시길 사모한다. 그럴러면 우리에게 기준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모두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기준이다. 이 세상의 기준과는 차이가 있다. 이 세상 기준은 완벽하거나 영원하지 않다. 북극성은 북반구만 있으며, 남반구는 북극성이 없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기준을 두고 운전을 할 때에 서울이나 한국이나 미국은 왼쪽의 운전대이지만, 영국이나 태국 일본 사우스 아프리카는(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다. 그런 것처럼 운전하는 사람이 그곳에 가면 기준이 다르니 운전할 때 사고 나기 십상이다. 한 번은 사우스 아프리카에서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1200킬로는 운전해 보았는데 차가 없는데다 아무도 없어서 차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횃갈려서 좀 어려웠고, 그때 섬광처럼 깨달은 진리가 있는데, 이 기준이 다르니 운전대 옆이 중앙선임을 깨달았다. 운전석 옆이 바로 중앙선이라는 것이다. 기준이 그래서 확실해야 한다. 잘못하거나 역주행이 되면 사고가 난다. 정말로 신앙의 기준이 무얼까를 생각해 본다. 어떤 경우에도 경계함이 없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을 깨닫고 나면 영적인 자유함이 있게 된다. 겉으로는 엄청 무거워 보이지만 제대로 깨닫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벗겨주신다. 기준을 잘못 잡으면 우선 좋아 보이는 것을 잡았다가 중독되고, 노예가 되고 완전히 끌려가서 인생의 마지막이 되고 만다. 신앙의 기준이 우리는 확고하여 결국은 신앙의 생명의 은혜와 풍성한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본문은 막 8:34절에
*막 8:34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이 무거워 보여도 전체를 다해 초신 자들도 모두가 포함된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이 주시는 음성임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다’.



I. 첫 번째 기준, 자기 부인(34절)
-자기를 미워하고 인간됨을 무시가 아닌 내가 어떤 것과 연결이 되었는데 그 연결된 고리를 끊어야 한다. 내가 고리를 끊으면 된다. 그 잘못된 것을 끊는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제사장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같다. 어떤 대상과 연결된 고리를 포기하고 끊으라는 것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뜻이 담겨있다. 적당한 뜻이 아닌, 내가 나와 연결된 고리를 끊어야 한다. 내 인생에 주인으로 삼는 고리를 확실히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다. 내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 세월을 이것으로 인해 보냈고 소비했다. 주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라! 내가 내 자신과 끊는 것이며 내가 나를 제3자로 보아야 한다. 최종 결정권으로 날마다 열 받고 상처받고 산다. 그래서
온전함의 경지에 못 간다. 그러니 십자가를 깨달으면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올려드린다. 우리 자신이 큰소리치지만 최종 결정권을 우리는 내가 내리지 못할 때도 많다. 전신마취라는 것도 그렇다. 수술대에서도 그렇다. 보호자가 수술대에서 사인한다. 우리 모두는 정말 예수님을 믿지만 너무나 자기 부인을 못하고 산다. 예수를 믿어도 최종 결정권을 내가하고 있다. 자신의 종교를 믿는다. 기독교 안에서 나 자신의 종교이다. 내가 복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내 신흥종교가 되고 있다. 스스로 교주가 많다. 기독교에서 자기부인을 못하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를 잘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 깊은 실현은 자기부인이다. 주님께 최종 결정권으로 주님과 붙어있어야 한다. 중앙선을 이탈하여 역주행을 하지 말라. 나 자신과는 독립해야 하며 주님께 최종 결정권을 드리고 주님과 동행하여 살아야 한다. 딱 달라붙어야 한다. 중앙선을 이탈하지 말라.


II. 두 번째 기준, 자기 십자가(34절)
-주님이 주시는 것은 이 십자가의 길은 중앙선인데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가 너무 나름대로 미화되고, 익숙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과 모욕과 억울함과 능욕과 부끄러움의 대명사였다. 끔찍하고 이해가 안가고 지독한 십자가였다. 그래서 제자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이상하고, 엉뚱하고, 너무나 벼락같은 십자가였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십자가가 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을 층간 소음을 내고 괴롭히는 것인가? 내 주차 자리를 선점하는 옆집 사람인 것인가? 가족 중에 나를 누가 괴롭히는 것인가? 나의 신체적인 약한 것인가? 그런 것인 내 삶을 자기 십자가로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그런 십자가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 십자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치욕과 모욕과 억울함의 최악의 십자가이다. 이런 십자가는 우리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억울함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기준이며 중앙선이라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대부분 이런 부분을 모르기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시며 이 사람을 정말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게 해야겠다고 하시면, 환경적 상황적으로나 치욕과 수치와 억울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온전해지고 싶고,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고,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우리는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는다. 그러나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려면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억울하기도 하고, 남이 안 알아주고 할 때 순간 무시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열 받게 하고 할 때에도 그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주님 주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세상이 말하는 방식과 판단과 다르다. 초신 자들도 예외가 없다. 세상은 십자가를 피하라고 그런다. 부담스런 십자가 일지라도 주님이 내 속에서 일하게 하라신다.


*데살로니가 2: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바울이 열심히 복음 전하고,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 주고, 진짜 열심히 감당했는데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로마의 시민권자가 인격적으로 멸시받고, 모진 매를 맞고, 바울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이런 고난을 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가 없으면 얼마든지 대접을 받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믿기에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대기업들은 코로나로 인해 암흑 적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제제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바울이 억울함을 당했지만, 고린도후서 12장 10절을 보면,,,


*고후 12:10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수치와 어려움과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지를 보면, 신앙생활 1막이다.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수치와 능욕과 모욕의 십자가를 지게 되면 나와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면 구원한다고 하신다.



lll. 중앙선 기준을 잘 지키면 생명의 실체와 연결된다(35절).
주님이 지게 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면 우리는 잘 지키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지지 않는세상 십자가는 올무가 되고 죄의 종이 된다. 이단, 도박 알콜 등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세상 주는 것을 벗고 기쁘게 주님 주시는 것을 지면 내 삶을 주관해 주신다. 신앙세계가 새로운 차원이 된다.


-헬라어로 보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원어로 ‘내가 어떤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 연결된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가 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면, 점점 쉽고 가벼워진다. 초라하고 더러워지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현재형이다. 자기 부인은 참 생명과 연결된다. 모든 것을 가지게 된다. 생명과 연결되니 모든 것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다. 재산목록 첫째 둘째 셋째 모두가 예수님이시다. 참 생명과 연결되며 풍성하게 연결된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주님의 지혜를 얻어서 산다. 목숨의 한계가 있을 때, 큰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한계를 뛰어 넘게 된다. 믿음으로 이긴다. 사탄과 우울 건강에서 절망일 때도 은혜의 감탄사가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재산목록 1호가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재산목록 1호가 될 때 주님이 일하시게 된다.!!!



※중국의 흑룡강성에서 설교를 가니 느낀 것은 2시간 설교를 하고나니 어떤 성도들이 자기는 차를 타고 5시간 6시간 기차를 타고 왔는데 그것만 설교를 하느냐고 해서 그 신앙의 야성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신앙에 비밀을 가졌다. 우리는 기준이 있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앙이다. 우리는 신앙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이젠 영적으로 깊이를 가지고 평생 주님의 기준선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확신하며 나아가야 한다. 칼빈은 조직 신학적으로 많은 교리가 좋지만, 마르틴 루터 “오직 십자가만이 깨달음이 크다”라고 했다.
1. 죄로 인해 비참함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2.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신앙의 기준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3. 모든 죄의식과 절망으로 고통 하는 인간의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4. 주님이 지어 주신 자기 십자가가 아니면 더 큰 세상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 대신 주님의 십자가는 가볍고 쉽다. 그러나 세상의 십자가는 점점 무겁고 옥죄고 중독되게 하고 노예로 만든다.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주님을 닮아가는 온전한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요약
자기를 주인 삼는 시대에 '자기부인의 십자가'를 져야 하며, 내 인생의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며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는 평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이 지신 모욕적 십자가를 지고 중앙선을 지키며, 재산목록 1호이신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참 생명을 경험하여야 한다. 참 생명과 연결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된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앙이다/마틴 루터'
유일한 소망은 신앙의 기준이다.

막 8:34-36절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육신의 안일에 빠져선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34절)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곧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려 하지 말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계속 그리스도를 좇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환자가 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교훈과 책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육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을 때조차도 그들은 결코 육신의 생명을 위해 염려해선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에 의해 그를 따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일까? 우리가 생명 그 자체보다 그리스도에 의한 유익을 선택할 수 있을지 조용히 생각해 보자. 마귀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과 종들을 유혹할 때 그는 가장 나쁜 것은 숨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어렵고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 전에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가장 나쁜 것을 안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만일 우리가 양자를 모두 공평하게 놓았을 경우 그를 섬김으로써 얻는 유익이 그를 섬기다 생기는 좌절을 충분히 보상해 주기 때문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35절).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신앙 고백을 한 후에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부인함으로써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그는 그 목숨과 영생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역경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 즉 진실로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할 것이며 말할 수 없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자기들의 왕과 나라를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 유가족을 원호해 주는 것은 어느 정도의 보상이 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얼마나 큰 보상이 되겠는가?
2.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그리스도를 부인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절).

요한복음 10:27절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부르는 소리에 따르지 않는 귀 먼 양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는 양들은 자기의 양으로 계산하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은 그를 따른다. 목자가 내리는 명령은 언제나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목자가 발걸음의 인도를 그대로 따라 가야 한다. 즉 그가 어디로 가든지 어린 양이 이끄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를 따르지 않으면서 그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우리는 헛되이 그 음성을 듣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양무리에 포함되지 못한 자들의 커다란 불행과 비참함을 확실히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여기에서 자기를 따르는 자기 양들의 지복의 상태와 경우를 묘사하신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양을 아시고 계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27절).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비새(주후 2021년 3월6일)-(사랑글로벌아카데미(SaGa) 개강식)

제목:''이런 인물이 필요합니다''
말씀:행 7:36~38절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사도행전 7:36-38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뭐가 큰일인가? 우리 같은 인생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애 구주로 모심을 내 한 몸 가누기 힘든 인간사 가운데 오늘 이와 같이 예배 아카데미로 훈련 아카데미로 일터와 글로벌아카데미로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과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자체가 큰일임을 확신한다.

오늘 하나님 앞에 가능하게 쓰임 받는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고 헌신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줄 생각한다. 지난 40여 년간 주님을 섬기면서 마음 속에 확신하는 것 하나가 ‘마음 맞는 사람 세 사람만 모이면 나라도 세운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여고보, 요한을 통해, 그 3명이 12 제자가 되고, 12명 제자가 70명인 전도대가 되고, 70인 전도대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았던 120명의 기도의 사람이 되고, 그 120명의 사람들이 오백여명이 예수님이 승천할 때, 주님 승천을 보고 마지막 지상명령을 들었던 오백여 형제가 되고, 그 세 명이 열두 명, 칠십 명, 백 이십 명이 오백 명 된 것처럼, 교회도 세우고, 어떤 교단도 세우고, 나라고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 세계에 이렇게 선포하게 된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음을 확신한다. 그래서 오늘 아카데미가 153명이다. 152명이었으나 교우들이 나머지 한 명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한 명이 다시 들어와서 153명의 훈련생이 되었다. 사역을 해보니 한 가지 그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더라도 그 명예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 좀 부족해도 그 마음에 순수함을 담아가지고 순전함으로 Pure(순수) heart, Simple(단순) heart, humble(겸손) heart를 담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내가 부족하지만, 나 같은 인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써주시길 원하는 자가 가장 감격이 넘치는 자세이다. ‘나 같은 자를 사용해 주시는 것이 내 인생에 가장 Thrilly넘치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진정하고 분명하게 쓰시고, 사용하심을 확신한다. 이번에 1기생이 이 코로나 시대에 한국 교회에 어떻게 될 것이며 저 출산, 인구 절벽 시대에 수많은 부정적인 것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래도 이 모든 시대 흐름 가운데에도 하나님 나 자신과 가정과 그리고 우리 교회, 한국 교회가 주님 앞에 크게 쓰임받기를 바란다. 그렇게 쓰임 받는 것이 내 인생에 가장 감격이 되고 가장 뜨릴리 넘치는 일임을 기억하여 순순하게 끝까지 갖고 가기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다면 하나님은 붙잡아 주신다. 그리고 크신 일을 이루어 주신다. 그렇게 쓰실 때에 우리 앞에는 역할 모델이 있다. 후발 주자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 앞에 너무 멋지게 쓰임 받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학교들이 7년 내로 전국의 대학들이 25퍼센트가 문닫을 것이라고 한다. 20내에 전 세계가 50프로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 사랑글로벌아카데미는 철저하게 지난 이천년 교회사 가운데 하나님께 쓰임 받은 귀한 개인, 공동체, 학교들을 우리가 잘 벤치마킹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각자 그 비전과 그 은혜들을 다 모아서 역할 모델을 하여 한결같이 달려가면, 하나님은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돌파하고, 모든 장벽을 뛰어 넘게 하시리 것을 믿는다.
그 역할들의 중심인물은 바로 모세이다. 모세는 본문에 보면, 모든 힘을 주실 것을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모든 1기 훈련생들에게 온 성도들을 통해 완전한 주님이 모세와 같은 인물이 나오길 소원한다. 그 지도력으로 우리 사랑글로벌 아카데미가 인도자가 되길 기도한다. 이 모세가 예수님의 예표도 되고 우리의 삶의 모든 주의 신실한 종들의 역할 모델인데, 모세는 잘 알듯이 40년 애굽 왕궁, 40년 광야, 40년 리더쉽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사람이다. 누구든지 그 인생을 보면 40년 배우고, 40년 훈련하고, 40년 하나님 앞에 지도력을 받아서 적재적소에 쓰임 받는 것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애굽에서 훈련 받을 때, 자기가 썸씽인 줄 알았다. 죽을 고비를 당할 때, 자기가 나씽인 줄 알았다. 그러면서 깨어져서 40년간 하나님께 쓰임 받아서 하나님이 내 삶에 에브리씽 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다 이런 과정들을 지나오면서 우리가 많은 것들을 배우지만,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쓰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모세의 삶에 보면 하나님의 인물을 쓰실 때 그 예외가 없다.

 

I. 쓰임 받기 위한 머리훈련.

7절 22절을 보면, -22절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궁정에서의 삶을 모세가 40년 궁정에서 배운 것은 머리의 훈련이었다. 쓰임 받기 위한 훈련이다. 그당시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서 실권자의 아들이어서 모세가 훈련 받았을 때, 건축학, 철학, 천문학, 수사, 기아학 등을 여러 가지로 박사 정도의 머리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모든 애굽 사람의 지혜를 배운 것이다. 전광훈 목사님의 말씀도 지적인 예배이고 깊은 예배였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지적인 깊이가 있다고 성도님들이 이야기 한다. 사랑의 교회가 글로벌스탠다드로서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닌 사랑의 글로벌 훈련이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한 머리훈련이길 바란다. 자세는 바로 예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배우려는 자세였다. 어벨러블, 페이스풀, 티쳐블이 되고 가지고 수첩에 다 기록하고 기억하여야 한다. 고위 관리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이야기를 하면 다 받아 적는 것을 보고, 기억하도록 기록하는 것을 보았고, 그 소중함을 적는다는 것은 남다르게 보였다. 70을 넘어도 받아 적어야 한다. 그 자세도 중요하다. 그래서 머리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

 

II. 쓰임 받기 우한 몸의 훈련.

40년간 광야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도와주었지만 광야 시대에서 일교차가 심한 곳이다. 물과 나무가 보존이 안 되어 춥고 냉기가 있을 때, 애굽의 왕궁에서 호의호식했던 그 모세가 광야에서 엄청 고생을 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몸의 훈련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새벽예배가 몸의 훈련이다. 특새가 몸의 훈련이다. 해외에서 새벽에 아들을 데리고 가니 괜찮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더라. 대답이... (This is my Destiny=디스이즈마이 데스티니)라고 대답했다. 나의 운명이다 라고 했다. ㅋㅋㅋ 큰 교회나 유복한 집안에서 큰 인물이 못나오는 것은 그가 몸의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낮의 열기와 냉기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인물이 안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 가서 사막을 경험을 못해도 몸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종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란다. 훈련을 참여하지만, 사람은 몸은 대우할수록 버릇이 없어지고,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더 교만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몸의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성전관리 하듯이 해야 한다. 성전관리를 잘해야 한다. 바쁘지만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기 위해 몸의 관리를 잘해야 한다.

 

▶모든 훈련도 참여하지만, 12명 목사님들도, 모든 제자훈련사역, 일터선교등이 있지만 특히 제자훈련 목사님들의 멘토링을 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하나님이 잘 준비되는 것인지를 보려고 한다.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모든 훈련생들의 영육을 건강하게 훈련 끝까지 은혜 주시길 원한다. 시종일관 또한 잘 길러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훈련시키실 때에 머리 몸, 그리고 마음이다.

 

III. 쓰임받기 위한 마음 훈련.

쓰임 받기 위해서 마음을 훈련하신다. 40년 머리, 40년 몸, 그리고 40년 마음훈련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훈련하는가?

-80년이 되어서 떨기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으라’ 고 하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췌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초라한 모습이었을 때에, 이 모세의 자아는 철저히 파괴 되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은 그 과정을 자가게 하신다. 그것으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홍해와 기적을 일으키게 하시고, 그 정도로 충분할지 모르지만, 모진 마음의 훈련이 시작된다. 광야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그 온유 했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이지만, 마음의 훈련을 엄청 받았다. 그러나 심지어 형님과 미리암의 배신으로 많이도 힘들었다. 모세가 마음 훈련 중에 힘들어서 반역자들도 있게 되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 백성들을 낳지도 않았는데 왜 그리 힘들게 하는지를 묻는다. 그 광야에서 양을 쳤기 때문에 그 광야의 길이 익숙했어도 그런데 모세를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끝없이 가게 했다. 그래서 피곤했다. 광야 길을 가야했기에 가고 멈추고, 하면서 사람들을 다듬으신다. 사람을 쓰실 때에 여유없이 하신다. 그가 가진 것이 아무리 대단해도 마음의 훈련을 통해 모든 깨어진 후에 하나님께서 주인으로 운행하시고 사용하신다. 광야의 투어가이드로 완벽했어도 깨셔서 모세의 힘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뭔가 일을 하려면, 이 훈련생들, 순장, 중직 자들이 가치 있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깨어지는 과정이 철저하다. 어떤 짐이 크지만, 많이 생각했다. 이런 개강을 하면서 감당할 짐과 기도제목이 많아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이고 이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려면 이것 외에는 다름 길이 없다. 많은 일이 산적해 있는 일이 있더라도 한결같이 이 길을 가야만 한다.

 

민수기 12:3절에 -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마음이 깨어지고 훈련하니 온유한 자가 되었다. 온유란 교회가 쥐어주는 하나님이 수시는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지고 가는 능력이 온유이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 내게 주신 십자가를 끝까지 지는 능력을 훈련생들에게 주시길 기도한다. 그것을 온유한 힘들다 말고, 제대로 지면, 풍성한 능력의 스탠다드로 올라가게 된다.

 

7:38절-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모세는 광야 교회에서 짊어지는 짐을 끝까지 지고 나아간 것이다. 인간이니 좌절하기도 상처도 많았지만 온전한 지도자가 되었다. 머리, 몸, 마음의 훈련을 제대로 받아서 21세기의 온유한 모세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관통할 훈련이 되어 광야를 이기는 능력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길 바란다. 수많은 가설, 음모론 등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 사용되길 바란다. 백신을 맞지 말라고 하지만, 그런 음모론 등을 믿어서는 안 된다. 백신은 꼭 맞아야 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돌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무장되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아서 모세의 손에 들린 홍해의 지팡이가 되라. 머리 몸 마음이 잘 조화롭게 되어 그 어느 것 하나도 우연이 없고 의미 없는 것이 없다. 본래 모세의 지팡이는 양치기 지팡이였다. 그런데 하나님께 쓰임 받아서 모세의 지팡이는 홍해를 가르는 지팡이가 되었다. SaGa의 훈련생들의 새로운 지팡이는 훈련을 통해 이 받은 훈련, 무장이 되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를 바란다. 홍해를 가를 수 있는 능력이 되어 하나님이 강력히 쓰시길 바란다. 여러분의 손에 들린 물 한 방울, 지팡이가 이시대의 지팡이가 되길 원하다.

 

마무리.

SAGA 글로벌아카데미를 후원하시는 장로님이 캐나다에서 여려 대학이 있지만, 요즘 코로나로 다른 학교는 학생이 너무 많이 줄었다지만, 그 학교는 만 팔천 명이 오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유튜브나 SNS를 잘 활용하니까 만 팔천이 오만 팔천이 되었다. 디지털 플랫폼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다. 우리는 잘 훈련된 자들이 소명을 가지고 디지털 플랫폼을 사용해서 어떤 종교를 관통하여 우리는 사랑글로벌의 소명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로 이루어가길 모세처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는 자로 쓰임 받아야 한다. 21세기에 머리, 몸 머리를 사용하라.

 

♣요약

하나님께서 주님 나라는 부족한 사람이 가치 있게 쓰임 받게 됨에 머리, 몸, 마음으로 훈련하는 자들을 통해 주님의 일을 이루게 하시고 신실한 지팡이가 되어야 한다. 모든 섬기고 헌신하는 자들이 한 마음으로 뭉쳐서 시대의 벽을 돌파하기를 소원한다. 시종일관 지켜주시길 기도한다. 사랑글로벌아카데미(SAGA)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세계 교회의 복음주의 쇠퇴를 막는 강력한 영적 비밀 병기요, 목음 의 지팡이로 쓰임 받아야 하며 모세와 같은 신실한 준비된 사람으로 쓰임 받아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도고, 영적 사관학교에서 머리 몸 마음 훈련을 받는 153명의 SAGA 용사들이 전 세계의 온전한 영적 선교사로 파송되길 바란다. 영적 광야와 같은 민족과 열방을 향하여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과 세계 선교 마무리의 사명인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자로 거듭나길 기도한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마땅히 그들에게 그의 도움을 거절하실 수도 있었으나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으셨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스데반이 모세를 하나님의 영광스런 도구로 존경한 것은 모독이 아니었다. 또한 모세는 그릇에 불과하고 이 예수를 통하여 재조명된다고 스데반이 말했다고 해서 그의 정당한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해 해방되었다.

 

모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가장 큰 영광중의 하나였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위대한 예언자가 이 세상에 올 것을 보여주셨다. 예수는 관습적인 의식법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스데반은 모세를 모독하기는커녕 오히려 모세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라고 하셨다. 모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들 중에서, 그 민족 중에서 한 예언자가 일어날 것인데 그는 더 나은 계약의 중보자로서 자기가 준 관습을 바꿀 권위를 가졌고 더 좋은 소망을 가져다 줄 권위를 가진 자라고 하였다. 스데반은 그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그들을 촉구했다. "이것이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들으라고 했던 모세와 그의 율법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가 될 것이다."

모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데에 쓰인 후 계속해서 그들에게 탁월한 공헌을 했다. 모세의 명예는 다음과 같다. 그는 '광야 교회'에 있었다. 그는 40년 동안 그 교회의 일을 주재하였다. 만일 모세가 그곳에 있으면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그 교회는 여러 번 해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더욱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에 대한 인도자이며 주재자이시다. 그리고 모세가 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 교회의 생명과 영으로 그 안에 계시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있었다. 모세는 광야에 있었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함께였다. 그 천사가 그를 인도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천사이며 따라서 모세를 능가하는 권위를 가지셨다.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였다. 십계명뿐만 아니라 다른 계명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로 인해 모순이 해결되는 확실하고 오류가 없는 도이다. 그것은 생명의 도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생명이며 영이다. 모세의 율법은 생명의 길을 보여 줄 수는 있지만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았으며 그가 처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대로 전하였다.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관습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수를 통해 그 관습을 변경하시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시고자 이전에 모세가 받았던 것보다 더욱 분명한 생명의 도를 받으셨다.


 

 




                                                                 ☆ 부전교회 박성규 목사님 ☆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예배(주후 2021년 3월 3일)

제목: "우리의 간절해야 할 소원"
말씀: 누가복음 11:1-4절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


(누가복음11:1-4절)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주기도문은 언제 많이 사용하는가? 70년-80년대에는 공포영화에 주기도문이 많이 나왔다. 주인공들이 아주 급박할 때, 주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영화상으로는 큰 효험은 없었다. 그러나 특별한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주기도문과 굉장히 친숙하다. 학습과 세례를 받을 때도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을 외웠는지를 묻게 된다. 또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으로 많이 마친다. 전 세계를 통 털어서 이시간도 지구 어느 곳에서나 암송되고 외워질 것이다. 어릴 때에 가정예배를 드릴 때에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 아주 행복했다. 주기도문을 한다는 것은 이제 가정 예배가 마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찬양하다고 말씀을 듣다보면 잠이 오기도 한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하자고 하면 기뻤다. 요즘 가정예배를 드릴 때도 같은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주기도문 하자고 하면 아이들이 좋아서 생생하다. 우리 자녀와 동역 자들도 모두 친숙한 기도문이다. 성경에 어떤 부분보다 익숙하다. 오늘도 우리는 성도의 온전함, 주기도문으로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준비된 자세로 고백하겠는가?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주기도문의 의미를 우리에게 그 마음을 알려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제자들은 지금 참으로 귀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고 주님께 달려가 기도하는 것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한다. 물론 요한도 가르쳐주었기에 직접 기도하는 마음을 가진 모습이 귀하다. 이 마음이 귀한 것은 우리 자신이 무엇을 정말 원하는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젊은 들에게 물으면 정말 잘 모른다. 기도해야 하는 것과 소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잘 기억이 안 나고 뭘 해야 할지를 모른다. 노부부의 소원을 이야기 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소원을 이야기 해보라고 하니 할머니는 첫째 소원은 소시지를 둘째는 소시지가 코에 붙고, 셋째 소원은 코에서 소시지를 떼어 달라고 할 것이다. 요즘 같아서는 수백억에게 요정에게 달라고 해서 좋은 외과 의사를 모셔서 소시지를 잘 떼고, 더 잘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을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가 그런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음 한다. 무엇이든 마음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안하는 것보다 그냥 내 마음을 주님께 올려 드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귀하고 귀하다. 그렇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다 보면, 점차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지를, 내가 무엇으로 소원하기를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점차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이다. 제자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 다시 기도하는 방법을 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정답을 가르쳐 주신다. 바로 ‘주기도문’이다.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마태복음 것은 길게 나온다. 누가복음은 간결하다. 주님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기도문을 가지고 간절히 이러한 내용들을 너희 마음에 소원해라’ 하셨다. 간절히 간구하고 원하라고 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시면서 오십 번 정도로 하면 무슨 응답이 생길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다. 횟수로 승부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문과 같이 사용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안에 있는 소원을 간절히 바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절히 소원하고 바래야 하는가? 그렇다. 



2절에 읽은 것처럼,
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가 간절히 원해야 하는 것은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이름이 독특하다. 이름을 표시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이다. 우리에게 주민번호가 있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유일한 번호이다. 나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번호보다는 나와 같은 이름이 많듯이, 그중에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인 그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름에 의미를 둔다. 왜 그런가? 그 이름은 나의 과거와 나의 부모님, 삶과 나의 현재와 미래와 다 얽혀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함께 엮여 있어서 그 이름을 많은 사람들이 써도 그 이름은 여러 이름이 아닌 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떠한가?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은 이름을 갖고 계신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가르쳐 주신다.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신다. 그게 이름입니까? 하면 정말 그 이름이다. 있다. 존재다. 나는 계속 있어 왔다.‘ I’m who I am’ 정말로 그대로 이름이 된 것이다. 이름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 그 자체로 드러내는 이름은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크고 크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붙여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보여 줄 수 있는 만큼만 보여주시니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 스스로 드러내겠다고 하시면, 우리는 그 만큼만 보게 된다. 그래서 구약은 다윗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나간다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블레셋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소서!!~.하나님의 이름은 맹세의 대상이 되고 찬양, 약속의 대상이 되며, 우리의 능력의 명명이 바로 이름이 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이 능력의 원천이 된다. 모든 그룹이 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성경은 선포한다. 이름은 전인격을 드러내는 것이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 간절히 원해야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뒤에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가 임하시길 소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라 여길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바로 지금 여기가 아닌 곳이기도 하고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다. 나라는 주권과 시민과 영토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하는 곳, 하나님 나라에 가서 역할을 감당하는 것, 하나님 나라에 백성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영토가 넓어지는 것,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있다. 장소에서부터 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재 권에서부터 모든 넓어지는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우리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절히 원해야 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문법 형태로 보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 아이들이 주기도문을 외울 때면 얼마나 빨리 넘어가는가? 얼마나 우리 주님께서 붙잡으라고 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슬쩍 넘어갈 수 있는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임하시오며, 이 단어들이 문법적으로 잊어도 된다. 이게 중요하지 않다. 구약을 신약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면, ‘빛이 있으라’ 하나님의 명령이 나온다. 바로 그것과 똑같은 형태로 보면 된다. 너는 있어야 돼! 명령하는 순간 어떻게 되는가? 빛이 있어지게 된다. 수동명령형이다. 지금 그런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고 할 때 이것이 구조가 같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하나님께 명령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떤 느낌인가?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받으세요!!~가 된다.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가 이곳에 임하셔야 합니다이다. 간절히 간절히 원합니다라는 간청이 이 고백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너무나 간절히 원해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주기도문에 제일 뒤에 보면 대게 나라와 권세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고 나온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온다. 거기에 파생되는 권세와 영광이 나온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맨 처음에 그것으로 시작했는데 맨 끝에도 바로 그 주제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앞과 뒤가 완벽하고 명확하게 맞다. 우리 예수님께 간절히 소원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주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주기도문이 몸이 있다.  몸체에는

첫 번째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이며.

두 번째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이다. 전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겠다는 전제이다.

세 번째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내용이다.

 

▷주기도문에 관한 책들이 많다. 그래서 날마다, 일용할이 무엇인지, 시험이 무엇인지, 이런 단어들을 얼마나 많이 기도하면서 연구를 했겠는가? 여기서 아주 짧게 말하자만, 날마다 매일의 양식은 우리가 먹는 그 양식을 빼지 않는 포함이다. 영적인 양식으로만 보면 안 되고 정말 하나님 우리 먹을 것을 주시라고 기도이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도 민족의 죄, 우리 전체의 죄, 외치며 확장할 수 있겠지만 우선적으로는 내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신자로서 성도로서 짓는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시험에 걸려들지 않게, 큰 산을 잘 건너가게 해 주시라는 기도이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을 전체를 놓고 보면, 처음과 끝에는 거룩한 이름, 그의 권세, 영광이다. 중간에는 하나님!! 오늘 밥 좀 주세요!!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게 된다. 잘 보면 내용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칼빈은 주기도문을 대하면서 우리 성도가 매일 살아가면서 우리가 매일 꿈꾸고 소망해야 될 부분이 주기도문에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고 죄 용서함 받고, 용서하고, 시험을 피하고 시험을 뚫으며 나가면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면, 종말에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 나라,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정말 거룩히 이름을 받고, 그때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맞지만, 일제 강점기에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도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그저 등 들고 언덕에 나가서 혹시 예수님이 오실까하여, 주님 맞으러 그러면 이 어려운 세상이 다 끝나고 이제 하나님 나라가 될까하여 소망하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그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칼빈은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 나라가 임함을 받는 것, 첫 결과는 우리 육신의 욕심에 길들임이라고 함께 이야기 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무엇이 첫 열매라고 말하는가? 위 육신의 욕심을 길들이는 것이 첫 열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기도문을 볼 때에 양쪽에 처음과 끝에 거룩한 것, 존귀한 무엇인가 있고, 중간에는 너무 그냥 개인적이고 살아가는 내용이 있는 것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보게 해준다. 무엇이냐면, 중간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우리 하나님의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과는 달리 무관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유관하다. 밀접하다. 그 증거는 성경에 있다.

 

마태복음 6:10절에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그 섭리와 뜻이 여기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어디서 받아야 하는가? 여기서 받으셔야 한다. 우리에게, 인생들 가운데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더 크게 강하게 받으셔야 하는가? 주님께서 계신 나라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들 때문에 허망해지고, 간절히 회복되기를 고대하는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매일의 양식의 문제들, 먹고 마시는 일, 죄 용서의 일, 시험에서 건져달라는 내용, 그 기도는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주님의 나라가 힘차게 임하는 것과 아주 큰 관계가 있어야 한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먹을 것을 주시라고 하는 것이 그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모든 문제를 우리가 기도하는가? 우리 하나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기도의 이해가 되는 것이다.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본문은 주기도문과 합하여 생각한다면,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우리가 오늘 양식을 먹어도 무엇을 위해 먹는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과 그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위해서 그 양식을 우리가 먹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죽는 것이 아니고 큰 시험을 당하여 시험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엇을 위해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과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때문에 그 안에서 버티고 인내하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무릎은 제자들이 처음으로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하는 것을 이 내용을 안다면 예수님께서 간절히 소원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제는 주여! 내가 어찌 하오리까라는 물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거룩히 여김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 양식도 주시고, 죄악도 용서해 주시고, 나도 영서하게 하시고, 시험도 비껴가게 해주셨는데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시작하자마자 “주여 어찌 하오리까?”라고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사실은 어찌 하오리까라는 것에 답이 될 것이다. 성경 말씀에 주여 어찌 하오리까 하면 너는 이렇게 하라고 하신다. 그 중에 굉장히 중심되는 말씀은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근본 되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


레위기 45:11절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주신 말씀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우리 주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온전하시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바로 드러나고 바로 이곳에서 드러나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주께서 주시는 매일의 양식과 피하게 하시는 모든 순적함과 매일 죄 사함의 은혜를 가지고 무엇을 소원해야 하는가? 우리 주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우리도 날마다 날마다 온전하심의 고봉을 향하여 힘 있게 걸어가는 것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여김을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시다. 이 땅에서 무엇으로 그 이름이 거룩하여지고 온전하여 지는 것을 드러내시겠는가? 자연을 통해서도 일부는 드러난다. 그러나 인격이신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온전하심은 인격인 우리를 통해 드러나시길 원하신다. 그러니 주기도문을 우리가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할 때, “주여 나도 거룩하게 되길 인도해 주시며 주님따라 온전해 지게 하소서!!~”라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거룩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온전해 지기를 소원하며, 거룩해지기를 소원하며 날마다 임하는 곳, 거하는 곳, 가서 행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넓혀지고 성숙해 지는 것이다. 결국에는 주님 닮아가는 것이다. 함께 거룩해지는 것, 함께 온전해지는 것이다. 주님을 닮아가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매일 양식을 위한 기도는, 죄의 용서의 기도는,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는, 잘 먹고, 사고치지 않고, 살게 해 달라는 기도로써 끝나는 것이 아닌 그의 나라를 위해 거룩함을 위해 고봉을 올라가고 싸우기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고 한 몸이 되게 해달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가고 주님 닮아 가는데 거칠 것이 없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사명감을 요청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밥 주세요가 아닌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원대한 목적, 원대한 비전과 꿈이 있기에 그것을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미 온전함의 걸음은 시작되었다. 우리 교회의 온전함의 여정은 모든 영역에서 다 연결되어 한 마음으로 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소원하기를 바라시는 그 기도의 제목에 함께 합하기를 원한다. 성도의 온전함이 주기도문을 고백하며, 함께 이루어나가길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하자.

 

♣요약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과 주의 나라가 임하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온전한 성도이니 우리가 거하는 모든 영역에서 힘있게 무장하여 주님의 뜻을 받아 나아가며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면서 올바른 기도 자세에 대해 교훈하신 내용이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모범이다. 마태복음에 수록된 내용(마 6:9-13)에 비해 누가의 기록이 간결하지만, 주된 내용은 일치한다. 성도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 거듭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여야 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려야 한다. 또한 기도 내용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가운데 그 도우심을 간구하되, 이기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1년 2월 28일)
제목: ''목자의 심정을 통한 온전함''
말씀: 시편 23:1~6)
기도: 이한길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

 

(시편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다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하면서 이웃을 비난하고 사는 경우도 있다. 성경을 읽되 하나님의 심정을 제대로 깨달으면, 우리가 온전함으로 깨달아져서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과 묵상하고 사귀면 품격 ㆍ거룩한 디그니티(Dignity)가 되어야 한다.

 

I.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목자의 심정.

-우리가 살다보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그것으로 영적 에너지를 빼앗겨서 너무 시간을 허비한다. 정말 중요한 것을 집중하지 못한다. 우리를 가끔 하나님은 우리가 곰팡이가 끼지 않도록 흔드신다. 목자의 심정으로 어떤 상황이 와도 끄떡없는 인생 되기를 바란다. 오늘 목자의 심정을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창세가 48;15절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야곱이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가 되심을 감사한다. 유대인은 양과 목자는 삶과 죽음을 상징한다. 이것을 그의 목자가 되셔서 인생을 주관하시고 요셉과 자녀들을 축복하는데, 그 모든 자손들을 평생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을 깨닫게 된다.

시편 80:1절에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을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

요한복음 10:11절- 나는 선한 목자라...말씀하시고, 은혜 받은 베드로는 나중에 예수님을 뭐라고 하는가? 주님은 목자장이시다. 라고 한다. 이처럼 목자의 심정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왜 하나님은 목자의 양의 관계를 이렇게 자주 말씀하시는가? 목자와 양의 관계는 특별히 이 시간 깨닫는 정도가 아닌, 목자의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있어온 것이다. 이미 창세기부터 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힐난하신 것이 아니라 목자의 심정으로 아담이 회복되기를 원하셨다. 창세기부터 목자의 심정으로 회복시켜 주시려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목자의 심정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자의 심정은 창조주 하나님 때부터 온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고백한다.

 

요한복음 17:24절에 –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창조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심정을 먼저 깨달으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을 성자 예수님이 깨달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아들 예수님은 알고 계신 것이다. 아들이시지만, 사역 적으로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그리스도는 동일하시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목자의 심정을 갖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가 동일하게 가지신 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우리의 신앙이 잘 못 지키면서 남의 못 지킨 것을 지적한다. 우리는 다 부족하여도 목자의 심정을 깨달으면, 다 율법적 굴레와 유교적 압박에서 뛰어 넘을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심정을 제대로 깨닫게 된다.

 

로마서 8:32절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성부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 아니시고, 아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바울은 목자의 심정을 깨닫고 성부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다 주신다는 것이다. 목자의 심정을 우리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존스토트

 

시편 23편 1-6절에 목자의 심정이 나타난다. 다윗 한 사람의 단순한 고요한 고백이 아닌 창세기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목자 되심과 선대의 조상으로부터 축적되어 전해오는 목자의 심정이 다윗으로 하여금 폭발적으로 선포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시편 23을 목자의 심정이 아닌 메시아적 시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먼저 말씀하시고 온전한 것이란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의 특성을 기른다. 시편 23편에서 본 것이다. 제대로 모두가 다 깨달아지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시편 23편에서 볼 수 있다. 목자의 심정으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공급하신다.

 

23편 1절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들 예수님이 광야의 시험을 받으실 때, 아버지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수중 들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부족함 없으셨다(마 4:11)’/영혼의 만족.

 

2절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예수님은 물리적으로 머리 둘 곳도 없으셨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러 한적한 곳으로 가실 때(막 1:35)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의 은혜를 누리셨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떡’ 대신 취하셨다(마 4:4)/영혼의 인도.

 

3절-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예수님의 마음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을 때 그리 영혼이 소생되어(마 26:38,39)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의의 길(마 3“15)을 뚜벅뚜벅 걸어가실 수 있었다/영혼의 소생.
얼마나 메마른 상황인가?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이다.

 

4절 –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예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장 고통스러운 갈보리로 이끌려 가셨지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이 당하는 수많은 고난 가운데서 그들 보호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행 3:15)/영혼의 보호.

 

5절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부요함과 풍성함으로 하셔서 충만하시고 기름 부음 받으시고(시 2:2-9, 행 13:33),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아들 메시아의 혼인 잔칫상’을 위해 하늘로 올림 받으셨다(계 19:9)/영혼의 공급.
하늘의 잔칫상이다. 보석점이다. 영적인 대관식이다.

6절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 영원이 거하시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다(막 16:9, 골 3:1)/영혼의 영원한 거처.

 

-시편23편은 단순히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의 목가적인 시편’ 정도가 아니라 ‘메시아적 시편’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목자의 심정’을 선포한 것이다. 선교 적으로 가장 전략적인 맞춤형이다.

메시아적 시편- 창조주 하나님의 목자의 심정을 깨닫자.
정리하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목자이심을 믿는다. 아들 예수님이 완전한 신뢰를 했듯이. 우리고 온전히 믿고 신뢰해야 한다. 항상 믿고 신뢰하면, 신앙의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

 

시편 4:8절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다윗의 고백.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양은 만족하지 않는다. 사람이 밤에 잠자는 게 중요하다. 70-80을 살다보면 잠 못 이룬 적이 많다. 그런데 다윗처럼 고생하는 하는 것이다. stayed up all night(밤을 샜다)이다. 수많은 장애가 있지만, 절망하지 않고 목자의 심정이 있다면 다 극복할 수 있다.
양은 겁이 나면 못 눕는다. 불안하면 절대 눕지 않는다. 양은 주위가 고요하고 평화로워야만 눕는다. 그럴 때, 목자가 긴장을 풀어주면 건강하게 자란다. 주님이 예비하신 곳에 누워야 한다. 방황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는 이것으로 인해 주님을 의지하게 될 때 평안이 온다.

 

III. 목자의 심정이 이식이 된 제자의 길.

벧전5:3~4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목자의 심정이 이석된 제자의 길.
매력은 하나님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심장으로 이석된 길이다. 평생을 낙심하지 않는다. 가장 멋진 면류관은 영광의 면류관이다. 영혼이 편안하라~ 외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에서 적극적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좁은 시간을 넓혀야 한다. 충전소ㆍ발전소가 되어야 한다. 목자의 심정이 우리에게 이식 되어야 내면이 기쁘고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 극복할 능력을 주신다.

 

♧ 요약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 ‘목자의 심정’이 십자가 사랑을 통해 나에게 부어질 때 부족함을 영원히 채우시는 주님을 평생 신뢰하며, 가슴 뛰는 기쁨과 매력을 온전히 회복할 때, 우리 교회와 개인과 가정이 어떤 장애물도 돌파하고 귀한 사명이 될 것이며, 주님이 주실 능력을 기대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목자의 심정을 깨달아야 한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