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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3월 21일)
제목: ''몸이 없으면 내가 없다''
말씀: (로마서 12:4~5)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기도: 임병영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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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4-5)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말씀을 통하여 필요한 은혜와 말씀에 맞는 봄비의 은혜와 단비가 되길 바란다.
영적으로 소생하기를 바란다. ‘몸이 없으면 내가 없다’는 온전한 시리즈 여섯 번째이다. 교회를 뜻하며 교회는 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가 없으면 내가 없다는 뜻이다.

 

I.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오늘 본문 12장 5절을 보면,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며, 우리 교회에서 용어로 이야기 하면 영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적 가족이 되었다는 것,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며 서로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관계라는 것이다. 오늘 이 코로나가 우리에게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한 사람의 건강이 끝나지 않고 그 건강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너의 건강이 없으면 나의 건강이 없고, 나의 건강이 없으며, 네가 아프면 내가 아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말한다. 환경적으로 말씀 앞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다. 이 내용은 교회의 한 몸이라는 것이다.

 

4절에 보면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한 몸의 지체를 가졌다는 것이다. 5절 뒤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이 내용은 바울이 교회가 서는 곳마다 계속해서 그 지역이 서도록 확신의 생각을 이렇게 반복한다.

 

고린도전서 12:12-14절에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 모두는 ⓐ한 몸으로 ⓑ 한 성령으로 ⓒ 한 소망을 가지고 ⓓ한 주님을 ⓔ한 믿음으로 ⓕ한 세례를 받고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긴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기를 믿는다. 모두가 다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에 하신다. 몸은 몸인데 한 몸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를 둔 자는 국경을 넘고, 인종을 뛰어넘어 전 세계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니까 그렇다. 모든 교회와 모두가 다 영광스런 교회가 한 몸임을 확신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인종이 다 다르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순간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남녀노소 모두가 다 영 가족이며, 권속이 된 것이다. 영 가족이 된 것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다. 한 가족이다. 특정한 그룹이 아닌 교회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몸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에 분명히 재확인해야 하는 것은 리컨 컴폼햐여 하는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것이다. 이 교회는 로마교회, 고린도교회, 향해서도 한 몸을 강조한다. 우리는 한 몸으로 한 성령을 받아, 한 소망을 가지고 한 주님을 한 세례를 받고, 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가 회복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삼위일체, 이런 핵심적인 것이 일치하면 한 교회로 회복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세계 교회 선교의 절박성, 성령님의 주권, 거룩한 공교회의 중요성, 등이 왜 중요한 것인가를 알듯이 이런 내용이 일치가 되면 ‘장감성순침’ 모두가 일치가 되면 한 몸이다.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성결교, 요새는 침례교 등이다. 교단이 나누어져 있어도 핵심교회와 핵심사역의 토대만 같이 간다면 다 한 몸인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 중에도 나온다.

 

유다서1: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 믿음의 핵심 교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삼위일체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과 부활, 재림의 교리, 피의 구원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단번의 믿음의 도이다. 개신교는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기독교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한 몸이 되어서 믿음의 도를 가지고 믿음이 계승을 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자의 말에 의하면,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초자연적인 사회이다. -JJ 패커-

-왜 초자연적인가? 사회는 빈부귀천과 초등 나온 자와 박사님과 함께 하기 어렵지만, 그 무학하고 박사도 모두가 성경 읽고 초자연적인 은혜를 받는 것이다. 여당야당이 다 예배하는 것이다. 시골 할머니도 교호에서 은혜 받으면 믿음으로 세계를 위해 기도하면 은혜로 성령 충만으로 초자연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것으로 이해가 안된다하지만 교회는 초자연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월적이다.

 

 

II. 교회는 조직체가 아니라(기계적 연명) 그리스도로 함께하는 생명의 유기체이다.

-교회는 조직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유기체이다. 조직체는 생명 없어도 기계적 연명은 하나 생명이 없으면 죽는다. 생명체는 지체가 떨어지면 죽는다. 그 조직체는 존재하긴 하나 유기체는 생명이 없으면 죽는다. 우리의 몸은 무조건 반사 작용한다. 조직체는 조건반사이다. 라인이 있다. 우리 몸은 생명체이다. 유기체이다. 유기체. 무조건적인 반응은 음식이 들어오면 위산등 위작용을 한다.

 

-다윗에게 골리앗이 와가지고, 다윗이 믿는 하나님을 골리앗이 하나님 조롱할 때, 다윗은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로 대항한다. 무조건적인 반응을 했다.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다. 다윗의 형들은 목동이 되가지고 형제들이 양치기가 아니냐고 한다. 조직적 반응을 했지만, 생명의 관계로 판단해야 한다. 교회가 조직체가 되면 안 된다. 생명의 은혜가 이끌어가도록 해야 한다. 유기체적으로 생명의 관계로 회복 되어야 한다. 100시대에 하나님의 교회가 되려면, 포스트코로나로 살아나려면 생명이 살아야한다. 조직체로 비난치 말고 생명으로 판단하라. 하나님의 교회는 생명으로 연결되고 유기체적으로 연결된다.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은 특별한 차원 생명적 유기체적 ~조직체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 교회가 생명이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조직이 이끄는 교회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는 여전도회장, 남전도회장 등이 없는 교회이다 제자훈련 교회는 생명이 이끌기 때문이다. 생명의 능력의 깊이로 움직이면 생명의 공동체가 되며 사활이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답게 되려면 전 세계 일만 명의 선교사가 있기를 소원한다. 가장 대표적은 다락방이다. 생명의 능력으로 돌아간다. 특새에도 생명의 능력이 있기에 다 모인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영적 세포 유기체의 생명의 역사가 지속되어야 한다. 생명의 은혜가 우선되어야 한다. 조직으로 하지 않고 생명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여의도 광장—80년대 초에 김중권 목사님의 주관으로 빌리그램 전도 집회가 있었다. 백만 명 모이면 걱정도 있었다. 전염병이나 무슨 걱정이 있을 것을 염려했다. 그렇게 많이 모이면 북한에서 미사일도 날라올 수 있다고 염려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복음의 역사는 초월적이기에 해결되었다. 생명의 역사로 폭발적인 단초가 되었다.

 

III. 교회는 생명력 있는 유기체가 되기 위해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

-개인적이 되면 안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잘못된 개인주의이다.
-잘못된 개인주의 경계를 필히 해야 한다. 개인이 먼저 되면 모래알 소비자생각.. 맘에 안 들면 떠나고 교회/설교쇼핑 1)한 몸이 되어 2)지체를 이루고 이런 인식은 개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는 일이다. 교회는 개인이 모인 공동체가 아니다.

 

12:5절 뒤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순서를 거꾸로 하면 안 된다. 몸이 먼저인가? 지체가 먼저인가? 몸이 먼저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있고, 지체로서 존재한다. 순서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코로나 이후에 나아갈 방법이다. 교회인 몸에 붙어 있어야 한다, 몸에 붙어있지 않으면 생명 없는 죽음이다. 분리된 지체는 생명 없는 죽음이다. 잘못된 개인주의 경계, 개인이 먼저 되면 모래알, 소비자 생각.. 맘에 안 들면 떠나고 교회/설교쇼핑 등이 그렇다. 소중한 사람이니 그리스도 몸에 붙어있어야 한다. 교회에 내가 붙어있다. 예수님의 교회가 있기에 내가 있는 것이다. 포도나무를 보면, 예수님의 몸이 둥치이다. 내 능력으로 포도나무의 열매가 맺히는 게 아니다. 눈물로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거룩하게 하나님의 교회에 붙어있어야 한다.
-내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

로마서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이 가졌던 평생의 그의 어떤 신앙을 보면, 내가 빚진 자는, 복음을 전했다. 그 헬라인이나 이방인이 바울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그들이 빚진 자가 될 수 있지만, 복음을 듣는 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 전한 바울이 왜 빚진 자? 바로 그들의 듣는 자가 있어야 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바울의 생명력 있는 사역이다. 바울이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고 그들이 있기에 존재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에 복음이 된다. 개인이 큰소리 칠 게 아니다. 왜곡되고 호도된 개인주의가 되지 않아야 한다. 나홀로 신앙생활은 안 된다.반드시 다락방과 연결하여 다락방을 통해 은혜 나눔 필요하다.

♣요약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 빈부귀천과 유무식을 초월하여 은혜를 부어 주실 때에 우리의 공동체가 잘못된 개인주의를 버리고 온전한 한 몸을 이루어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 되어야 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들의 관계 혹은 교회를 사람의 몸과 그 몸에 속한 지체들로 비유합니다. 몸에 속한 여러 지체는 각각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이다. 이러한 비유는 몸의 통일성과, 각 지체의 다양성과 이에 따르는 기능의 다양성, 그리고 여러 지체들의 상호 보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성도들은 이렇게 각기 다양한 믿음의 분량을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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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1년 3월 20일)
제목: ''영가족 하나님의 공동체''
말씀: 마가복음 2:1~5
설교자: 천동원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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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5)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천동원 부목사님
-우리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인생의 함께 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가족중 경사가 있으면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가족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비단 가족만이 아닌 주위 사람들도 내 일처럼 기뻐하며 함께 동참하게 된다. 물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일도 간혹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같이 이웃을 곁에 두고 있다면 함께 즐거워할 줄 믿는다. 역으로 가족 중,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 역시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다. 가족 모두가 고통스럽다. 육신의 질병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족이 있을 경우 그 가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가정에 웃음기가 없다. 침울하며, 그 집안의 공기조차 무겁다. 함께 아는 이웃들조차 침통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본문은 이 중풍병자가 어떤 고통을 당했고, 또한 이 중풍병자가 얼마만큼 견디어 왔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위중한 상황임에는 틀림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중풍병자가 절실히 만나야 할 사람은 의사였다. 자신의 질병을 치료할 명의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찾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열두 해 혈루 증 않는 여인이 많은 의사를 찾는 것처럼, 있는 가산조차 다 허비했던 그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처럼 이 중풍병자 역시 그랬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이 중풍병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글 메어다가 예수님께 나올 만큼 절박하고 위중한 상황이었다. 본문 말씀은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에서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마가복음은 이 사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마태 누가에서 표현하지 않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의 명수가 언급이 된다. 요약하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평소에 중풍병자를 알고 지냈던 그를 침상에 누인 체 메고 온 것이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과 문 앞에 들어설 자리도 없는 것이다. 그때 생각한 것이 네 사람이 이 중풍병자를 침상 채 지붕으로 옮겨다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데려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그 질병을 고쳤을 뿐 아니라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까지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 3절에 보면,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는 일에 집중하고 모든 이들이 공동체를 귀히 여기시며 공동체 은혜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공동체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되신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서로 사랑하시고 서로 교제하시며 서로 의존 하시고 서로 영광을 받으신다.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고 계신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를 보면,

창세기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는 엘로힘은 복수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한다.

 

창세기 1:26-27절에-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동체이신 하나님은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과 모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발견하게 오늘 치유사건은 공동체이신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믿음을 통해 일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바라고 있다. 이 본문을 접할 때 교회를 떠올리게 된다. 이 중풍병자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믿음의 영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가족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는 가족 구성원 같은 영적인 가족, 영원한 가족이며 영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담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영 가족’이란 말씀이 참 들으면 들을수록 은혜가 된다. 교회는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가족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형제, 자매라는 단어가 130여 차례 이상 언급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보시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영 가족이다.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데려왔던 그들이 규모 적으로 교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구체적으로 언급된 네 명의 사람들은 우리의 다락방처럼 느껴진다. 다락방에서 영 가족들이 모여서 깊은 문제와 고민을 함께 나누며 세워져 나가는 모습이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8년째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동안 사랑의 교회의 형제, 자매의 삶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어떤 집사님의 예를 들어본다.

순원 집사님의 한 분이 허리통증을 24시간 앓았다고 한다. 통증이 시간적 주기가 있는데 그분은 지속적으로 통증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도 고치지 못한 일이어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순장님의 권유로 이 순원에게 특새를 권면 했다고 한다. 먼 거리를 두고 특새에 참여하고 순종하였다. 그 통증을 참으면서 교회를 오가며 버스와 교회에 도착까지 4시간을 보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순종했다. 순종하여 특새에 참여한 것이다. 마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순원들이 함께 부축해서 특새에 참여했다. 이 집사님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것을 현장에서 기자가 찍은 것이었다. 순원들이 부축하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특새 레터지에 소개된 것이다. 장면을 보니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이 순원과 함께 특새를 완주를 한 것이다. 결국 특새 후에 부활절도 참여하였는데 담임 말씀 앞에 통증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한다. 훗날 고백하기를 통증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했다고 한다. 고통 속에 지낼 때 차라리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랬던 집사님이 주일 말씀을 듣고 이제 그 통증이 깨끗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감격이었겠는가! 어찌보면 그 중풍병자를 침상 채 메어 지붕을 올라갔던 무모했던 네 사람처럼, 다락방 순원들이 순원집사님을 모시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마치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던 그 은총이 손길이 동일하게 이 순원 집사님에게 내려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 가족을 통해 은혜 나눔과 간증을 하게 하심과 본문의 공동체를 증명한 것처럼, 우리 또한 함께하는 믿음의 영적인 영 가족을 통해 함께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 담임 목사님.
우리는 영 가족이다. 영적 가족이다. 우리는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할 영적 가족이다. 부부가 소중한데, 신앙 가진 부부가 더 소중하다. 왜냐면 신앙을 가진 부부는 가끔 다투지만 잠시만이다. 천국까지 같이 가기 때문이기에 서로 잘하게 된다. 다투면 안 된다. 이런 생각하면 서로 잘해야 한다. 혼자서 제자 반 7개 하면서 주일 설교 다하니 너무 피곤했지만, 은혜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힘든 시기가 있었다. 우리는 영원한 영 가족이 가슴을 치게 했다. 오늘 토비새 나온 자들은 영적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내일은 교회 론에 대해서 말씀을 한다. 코로나 이후에 돌파할 수 있는 마음 주시길 소망한다. 지금까지 21일간 65만 명이 국내 인구 대비 1프로 좀 넘게 백신을 맞은 것 같다. 코로나가 속히 종식 되에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를 기도하자.

 

♣요약
그리스도께서 얼마 동안 변방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시다 그의 본거지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곧 사람들이 그를 찾아 왔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1,2절). 왕이 있는 곳에는 알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를 알현하려는 무리들의 수효가 많아서 그들을 모두 영접할 만한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계신 집으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매우 복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아마 그들 가운데는 병만 치유 받으러 온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고 또 단지 그의 모습을 보려는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모두 모이고 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 중엔 평일에 집에서 도를 전하는 것이 시간과 장소를 적당하게 선택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병든 자는 중풍병자로서 전혀 치료가 불가능했으므로 마치 시체처럼 침상에 실려 네 사람에 의해 운반되었다. 이렇게 운반되어야 할 정도로 그 중풍병자는 가련했지만 그를 침상에 실어서라도 운반한 것은 그 운반한 사람들에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정 많은 이들, 친척 또는 이웃들은 그 중풍병자를 그리스도에게 한번만이라도 데려 갈 수 있다면 더 이상 그를 운반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당히 힘든 일이지만 중풍병자를 그리스도에게 데려 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낼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 집은 다락방이 없는 단층집으로 지붕이 올려졌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운반해 온 사람들은 문 앞에 모인 많은 무리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모든 방법을 동원한 끝에 그 중풍병자를 그 집 지붕으로 들어 올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끈에 매달아 그리스도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집 안으로 내렸던 것이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믿음과 열심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에 의하면 그들은 열심 때문에 그냥 가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축복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가게 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저희의 믿음이란 그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병든 자를 데려왔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했다. 참되고 강한 신앙은 다양하게 작용하여 이성의 결함을 극복하기도 하고 또 감각의 결함을 극복하기도 하므로, 어떠한 믿음으로 나타나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실 것이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사용된 '소자'라는 호칭은 매우 다정한 표현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믿음을 지닌 자들을 자기 아들로 삼으시기 때문에 중풍병자라도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매우 간절했으므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죄의 결과로 병이 생겼다는 생각을 없애고 병의 원인인 죄를 깨닫게 하여 죄를 용서받는데 더욱 관심을 쏟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병에서 회복된 것이 죄의 용서를 받아 비롯된 것일 때 그것은 진실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결과를 없애는 길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데 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모든 병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므로 결국 병이 치유되거나 그 병의 상태가 호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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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3월 17일)
제목: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다"
말씀: 마가복음 1:7--11절
설교자: 양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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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온전함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마음 뺏기지 않겠습니다! 라고 외치시길 바라며, 오늘 본분은 마가복음이다. 오늘은 사순절 25일차 날이다. 사순절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참회하면서 기다리는 주간이다. 그래서 40일 전부터 사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40일의 시간을 기념하여서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을 가르쳤고, 십자가의 신앙을 가르쳤다. 그렇게 사순절이 지나고 난 후에 그가 정말 예수님을 향한 그 십자가의 고백을 하면 세례를 베푸는 풍습이 사순절에 있었다. 사랑의 교회 우리도 예수님을 사모하면서 4월 4일 오후 4시에 부활절 연합예배를 우리는 이 교회에서 사모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더 온전해지는 그러한 기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마가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전파하였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세례 요한이 모든 백성들에게 은혜의 길을 두 가지로 전파했다.

 

l. 하나님은 겸비하여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의 길을 주신다.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자복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그것을 돌릴 때에 기뻐하신다. 세례 요한의 첫 번째 전파는 자복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상상해보면, 세례요한이 엘리야처럼 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친다. 회개하라!, 죄를 자복하라!, 그리고 세례를 받으라고 한다. 세례요한의 모습이 굉장히 영향력이 있고,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것 같다. 요즘 길거리에 확성기를 켜놓고 외친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에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확성기도 플랭카드로 어떤 홍보도 없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요단강에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갈릴리, 에브라임 산지, 욥바, 가이샤랴 등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에 모였다. 이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무거운 선택인가? 걸어서 왔다. 요한의 외침, 회개하고 자복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말 앞에 선택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고 마음의 결정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지 않습니까? 이 물세례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는 삶의 결단을 할 수 있는 행위, 그 은혜의 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가 세례하면, 물로 세례를 주신다. 세례는 씻는 예식이다. 이 세례를 뜻하는 말은 베티죠는 완전히 적셔지는 것이다. 완전히 가라앉는 것이다. 완전히 담그는 것이다. 세례하면, 담임목사님이 물을 듬뿍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신다. 세례라는 것은 실제로는 완전히 가라앉는 것, 완전히 적시는 것, 완전히 담그는 것, 식빵을 우유에 완전히 담궈 보았는가? 담궈서 꺼내면 먹을 수 없다. 녹아버린다.

요한의 세례는 죄에 빠진 인생, 그리고 죄에 젖어 사는 인생을 향하여서 나와라, 새 출발해라, 그리고 하나님께 빠지라고 외치는 것이다. 세례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새 출발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왔다라는 것은 어떤 말씀인가?

(양목사님은 낙동강에서 세례를 목사님은 받았다고 한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세례를 묵상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여 나아가는 새로운 은혜의 길임을 묵상할 때에 이 시간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자복하라고 하면, 아마 제일 먼저 받을 것 같다. 또 잠기고 잠겨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나아가는 은혜가 임할 때까지 받을 것 같다. 이 사순절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은혜의 길을 걷기를 축복한다.

 

2.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면 새 생명을 얻는다.

세례 요한이 두 번째로 외친 것은 바로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 베푸시는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자복하고 회개하는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그 분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돌아갔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언제 그분이 오셔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베풀어 주실까? 언제 그분이 오셔서 성령으로 푹 담궈 주실까를 기다리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 여러 날을 세례요한의 곁에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9절에 보면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성령이 그들을 잠구실 그 메시아! 그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에 제자들의 무리가 없었다. 예수님은 목수셔서 아마도 멋있는 옷을 입고 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 마가는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동일한 맥락에서 이사야가 소개하는 예수님, 이사야가 소개하는 메시아는 어떤 모습인지 이사야 53장 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사야 52: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요한복음에는 세례요한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그러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세례요한조차도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리고 두 번이나 표현한다. 세례요한도 성려께서 지시한 바가 없었으면, 자기 앞에 오셔서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 분임을 몰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직접 갈릴리에서 요단으로 내려 오셨다. 아무도 주목하는 사람이 없고, 수많은 사람들과 줄을 서서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시기에 죄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으시다. 그러니 세례를 받을실 필요가 없으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세례 받는 그 대열에 서 계시고 요한 베푸는 그 세례를 받으셨다. 요한은 그의 신발 끈도 풀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분에게 예수님은 직접 나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같은 대열에서 세례를 받았을까?

 

※어느 성경학자의 설명을 보니,
‘하나님이 사람 되신 자체가 겸손의 표징이다. 궁중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수도가 아니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우리의 내면은 마구간 같이 매우 지저분하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보여드릴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가난하고 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살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와 같다. 예수님이 요단 강에에 섰을 때에 하늘이 열렸다. 요단강에서 요한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요단 강물은 사람들의 죄로 가득 채 있다. 사람들의 죄로 가득한 요단강 물에 그 죄를 씻은 강물에 예수님이 적셔졌을 떼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 세례를 지켜보았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나올 때에 하늘에서 하늘의 기쁨을 선언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시며 기뻐하신다. 왜 예수님의 세례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가? 왜 예수님의 세례를 사랑스럽게 보시는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니까 세례요한이 외친다. “보라 세상 짐을 지고 가신 어린 양”이라고 외친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또 다른 얼굴이다.

※다른 교역자가 나누신 말씀 중에 레위기 16장에 대속제 일에는 검은 염소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린다. 한 제사이다. 두 마리의 염소를 가지고, 한 마리는 아사세일=완전히 제거한다. -아사세일 염소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다 지워가지고, 광야로 내어보낸다. 그리고 낭떠러지로 몰아내 죽게 한다. 죽음으로써 백성들의 죄를 소멸하는 제사양식이다. 또 한 마리의 염소는 피와 기름, 고기까지 완전히 태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다. 대속제일의 이 제사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더러워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만이 그 죄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죄가 너무 더러워서 먹을 수 없고, 하나님만이 백성의 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찔렸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고,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분의 설명이 아픔을 느끼고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담임 목사님이 사용하시는 말씀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영단번이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백성의 죄를 덮어쓰고 나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기쁨이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사건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백성들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담당할 수 있는 그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로마서 8:4절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모두 예수님에게 그 죄를 전가하시고 그 육신과 함께 죄를 멸하실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가 죄를 담당하는 어린양이시기에 그가 지금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다. 그분은 우리 곁에 서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곁에 서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우리를 적셔주신다. 이 저녁에 이 예수님을 우리가 가까이서 만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우리는 온전함을 사모하며,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은 영단번에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가 받는 회개의 세례를, 우리를 깨끗케 하시려고 그 대열에 서서 함께 그 몸을 담그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를 제자의 삶을 살도록 은혜를 주시려고 성령으로 우리를 담그기를 원하신다. 그는 항상 우리 가까이 계신다. 이 주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길 바란다. 우리의 연약함을 회개하며 슬퍼하고 그분 앞에 주님께 기도하자. 나는 생수가 필요하고 나는 목마름을 고백하자, 내 힘으로 안 되는 그것을 주의 성령에 푹 담구어 주시길 사모해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은 지금도 영단 번에 은혜를 우리에게 채우시고 만나주시고 우리를 성령으로 담구실 줄 믿는다. 우리 그리스도로 정결케 되길 원한다. 이 시간 감사의 겸손의 마음으로 엎드려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복음의 능력을 주시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가족, 형제, 이웃들에게 사랑의 선포 자가 되어야 한다.

 

♣요약
겸손히 세례를 받으신 주님을 본받아서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겸손과 섬김을 닮아서 실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완전한 사랑을 날마다 깨달아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회복되어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지상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는 믿음의 자녀로서 가족,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자 되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분은 너무도 고귀하다. 그리스도가 너무 숭고하고 위대한 분이셨기에 세례 요한은 스스로 굽혀 그의 신메(신발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7절)고 생각한다.
둘째, 그리스도는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이시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8절)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그리스도는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위대한 약속을 하신다. 즉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은 자기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세례 의식에 순종한 모든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서, 이 방법은 개종자들이 회개와 개혁으로 자신들을 정결히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여 거룩하게 만드신다는 징표가 되었다.

 

세례 요한의 성공적인 전도 및 세례를 통해 받아들인 제자들 속에서 복음교회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광야에서 세례를 주었지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가 되어 그의 규율을 따르게 되었는데 세례 요한은 그들이 죄를 고백했다는 징표로서 그들을 자기 제자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후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들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겨자씨 한 알이 큰 가지로 됨과 같은 것이다. 이 본문은 예수의 세례와 시험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예수가 오랫동안 나사렛에게서 이름 없이 살아오다가 공생애로 들어가게 된 최초의 사건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일이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나온 것을 볼 때,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겸손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하고 흠 없는 분이지만 자신이 더러워지기나 한 것처럼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자 하나님은 예수께 아주 놀라운 영광을 돌리셨다. 예수께서 하늘이 갈라짐을 보셨다. 이로써 그는 하늘에서 내려 온 주님으로 인정받으셨다. 이 말을 마태는 '하늘이 (그에게)열렸다'(마 3:16)고 했으며 마가는 '하늘이 갈라짐을 보시더니'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도 하늘이 열리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 이 말에 대해 초대 교회에선 일반적으로 한 줄기 찬란한 빛이 예수가 있는 곳을 비추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들으신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용기를 주려는 뜻이었으므로 본문에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11절) 이라는 예수께 하신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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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3월 14일)
제목: ''마음 지키기''
말씀: 사도행전 13:21~23절
기도: 홍진귀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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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21~23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온전함을 사모합니다~~!!!. 온 사, 다섯 번째 마음 지키기이다.

지금 코로나 이후에 어떤 교회가 살아남나? 어떤 기업, 어떤 학교가 살아남느냐의 관심이 많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살아남는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방선교사로 파송 받고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첫 번째 메시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아주 기름 부음이 있는 강력한 성령 충만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 메시지 가운데 다윗에 관한 표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 13:22절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마음에 맞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주신다고 하신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기에 우리도 예수님이 구주임을 깨닫는다.

*행 13:22절 -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이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을 통해 구세주가 나시고, 다윗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다윗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다윗으로 인해 예수님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가 있다는 뜻이다.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심정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어야 한다. 다윗을 깊이 깨달았을 때 22절에 다시 한 번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다는 것을 좋아하시며, 하나님이 찾고 찾았는데, 다윗을 만났기에 하나님이 너무 기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안테나, 하나님의 채널에 맞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오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가정 누구누구 할 때에 우리의 이름이 나오길 원한다. 다윗은 문문의 달인이었고, 정말 그가 시를 쓰면 세익스피어와는 비교가 안 되며, 그런 대단한 왕국을 형성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장군이며 문학예술에 능했다. 다윗도 인간이니까 나약하고 범죄도, 어리석음도, 음부 속에 빠진 적도 있었다. 인간적으로 부족했고, 한없이 배신도 겪었으며, 배신의 골짜기에서 통곡할 때도 많았다. 놀라운 것은 다윗의 생애를 마무리하면서 다윗은 역대상에 이렇게 말씀한다.

*역대상 29:28절에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의 끝이 좋았다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finish well’이다. 온전함의 시리즈로 말하면, 온 사(穩思) (온전한 사모함)-가면 갈수록 온전해졌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온전해졌다이며, 구약에서는 샬롬이다. 다윗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샬롬의 경지에 올랐다 점점 온전해졌다. 샬롬이라는 말을 BDGA란 사전에 온전함으란, 완전함이 있고, 건강한 몸이 있고, 평화와 고요함이 있고, 만족하고, 전쟁을 다 극복하고, 더 이상 분쟁이 없다는 뜻이고, 조화로움, 올바름, 평화의 독특한 경지에 올라갔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의 생의 마지막의 이 샬롬의 경지, 어떻게 그의 생의 마지막에 온전함과 점점 더 온전해졌는가? 그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인생의 문무의 출중함과 예술 감각의 뛰어남 그것 때문도 아니고, 압도적 언변과 카리스마 같은 리더쉽과 모든 정치적 판단과, 모든 지도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딱 하나다. 다윗이 마지막 샬롬의 경지에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켰기 때문이다.

 

좋고 나쁜, 인생의 골짜기에서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켰기에 샬롬이 이유가 되었다. 마음을 지켜서 살아남았다. 오늘 우리 코로나 시대에 마귀의 작전 중에 하나가 우리 마음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못 지키게 하고 있다. 마음을 지키기 보다는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요즘 더 많다. 내 고집, 프라이드 내 신념을 지키라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마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목자의 심정,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마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마음과 중심이라는 말씀이 870번이나 성경에 나온다. 성경에 나타나는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선택과 결정을 좌우하는 인격의 중심이다. 요새는 이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다. 예전에는 잘 안 드러나니까 어른들을 잘 섬기었다. 그러나 다락방에도 순장님에게 마음대로 자기 고집을 내세운다. 요즘 코로나 이후에 건강을 지키려는 마음이 많아졌다. 부동산, 주식 광풍 등으로 재산 기키기에 난리이다. 그런데 재산, 건강지키기의 상황 가운데서 마음 지키는 것이 백배나 중요하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화장실을 내 힘으로 죽을 때까지 스스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마음을 빼앗기면 다 빼앗긴다. 다윗의 특별함은 모세는 홍해, 광야의 기적 등으로 엄청난 기적이 많았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여호수아 태양을 멈추고 머무르게 하는 기적들이 많았다. 엘리야도 기도하니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기적이 있었다.

다윗의 생애에 물맷돌 외에는 기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는 마음을 지킨 게 기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66권의 성경의 장수를 할애를 했다. 그 이유는 특별한 기적이 없었어도, 다윗에게는 수많은 우역곡절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켰기 때문이다. 마음 지키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21세판 기적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온 성도들이 주님 앞에 서는 순간 다윗처럼 샬롬의 경지를 누리길 소망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before와 after이 잘 정리되길 바란다.

 

다윗은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었는가?

첫 번 째: 다윗은 형들에 비해 외로움과 고독이 있었다.

다윗은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는 훈련을 시켰다.
사무엘이 아들을 고를 때 무 존재로 무시당한자로 들에서 양을 치며 고독을 견디었다. 광야의 냉기와 더위를 참으로 이겨냈다. 사자 ㆍ곰의 위협을 지키기 위해 철저한 견고한 고독을 이겨냈다. 황량하고 쓸쓸하고 억센 고독이었다. 그곳에서 다윗은 목자의 심정을 깨닫고 사자와 곰들에게서 지켜냈고, 목자의 심정을 평생 거기서 배우고 마음을 지킬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고독의 문제는 무엇인가? 방을 함께 써도 고독할 수 있다. 직장도, 이곳에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잘 만 다루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 마음을 훈련하고 마음을 지키는 데에 참으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고독의 문제에서 표현을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에 부엉이와 참새와 같다고 했다. 고독의 대명사이다. 그 고독을 통해 훈련을 하니 시편 62:5절을 말하고 있다.

 

*시편 62:5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그 고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되고 깨닫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의 시각을 깨닫고, 마음이 청결해진다. 고독하면 마음이 청결해진다. 온갖 오염으로 마음을 온통 더럽게 하지만, 왜곡을 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지만, 하나님께 눈이 열리면, 우리의 흐려진 마음을 청소해 준다. 깨끗한 창문을 통해 깨끗해지면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마음을 지키는 데는, 주님이 주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이 주인이 되시면 마음의 질서가 잡힌다. 그 혼돈된 마음이 정리된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 지는 곳은 고독현장에서 청결해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에게 철저한 고독을 준다.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한다.

바울은 삼 년 동안 외로운 고독을 마치고 왔는데 사람들이 바울에게 네가 무슨 사도이냐고 했다. 그런 식으로 바울을 힐난했다. 바울의 고독도 엄청났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고독은 내적인 공허와 우울증(憂鬱症)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신앙인의 고독은 하나님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된다.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다. 주님을 바란다는 것은 마음의 주인은 주님 밖에 없다고 고백하며, 내 마음의 질서가 잡힌다.

 

*마가복음7:21~23 -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의 마음이 오염될 수밖에 없듯이, 철저하게 고독 훈련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고 내 마음의 질서를 잡게 된다. 하나님과 이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질서가 올바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정리가 된다. 다윗은 고독한 시간에 물맷돌 던지는 훈련을 하고, 고독한 시간에 하프와 음악으로 시를 쓰고, 양들을 키우면서 목자의 심정을 키웠다. 결정적인 순간에 싸울 날을 위해 예비한 것이다.

 

*잠언 21:31절 -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을 통해 배워서 솔로몬이 기록한 것이다. 고독의 순간에 마병을 다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마병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는 우리 마음 지키는 힘든 시기가 되었다. 이 코로나 시대에 수많은 고독들을 잘 감당하고, 마음을 지켜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번째는
*사무엘상 16:13-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이 날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날이다. 다윗이 왕으로서 사명을 받은 날이다. 다윗의 생애에 가장
Divine momentum(신성한 추진력)이며, 다윗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다. 저 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명 받은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임을 뜻한다.

-기름붇고(17세) 대관식(37세)까지 20년이 흐른 뒤에 정식 대관식이 된 것이다.
-사명을 깨닫고 집중한 것이 마음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왕의 소명

사명의식이 마음지키기
-사명의식 임재의식
- 사명이 목숨보다 중요하다.
Devine momentum

전체 12지파 왕이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이미 사무엘상 16장에서는 사명 받았다. (allreay) 이미 대관식을 받았지만, 왕 될 것은 아직 Not yet이었다. 그 기간 사이에 그 마음을 어떻게 지켰겠는가?

나는 사명 받은 자라고 한다. 성령의 능력이 임했고, 우리도 주님 만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모두가 사명 받은 자가 된 것이다. 성령 받아서 하나님과 구세주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세주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영혼을 위해 살라고 한다. 신비한 존재이니 이 땅에 것을 바라지 말고 영혼을 위하여 투자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예배를 드리면서 주일마다 말씀과 찬양과 사명, 성령의 영감을 통해 매주일 영적인 대관식(coronation)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다윗은 수많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다윗은 마음을 지켰다. 사명의식, 청소년 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사명)을 받은 것이 평생의 결정타이다. 말씀을 가지고 영혼을 섬기면,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임재의식
-다윗이 가장 두려웠던 것..하나님이 떠나는 것이었기에...
사명의식 + 임재의식 -> 예배자로.. 믿음의 용량이 커지는 것이다. 영적 대관식, 사명자로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지킬 것인가?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길만이 영원하리라.-The only once life will pass quickly.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면, 내가 무엇을 못할 것인가? 그 사명감이 영적으로 어떤 계기(Divine Moment)가 된 것이다. 그 때 영적인 계기가 나에게 탄력이 된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마음을 지키게 하심을 우리는 감사하다. 영원한 것을 지키는 것이 영적 대관식이다. 외로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싸울 날을 위해 마병을 예비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사명의식이 강해지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식도 강해진다. 사명의식이 없으면 왠만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자녀들과 주위 사람들이 우리 부모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고 말을 듣기를 바란다. 이렇게 반응할 은혜 주시길 원한다. 다윗은 마음을 지켜 회개하고 회복했다. 여디디야 솔로몬을 주셨다. 인구조사로 다윗은 고통이 와서 징벌이 되었지만 마음 지키어 회개하여 여디디야가 되었다. 우리도 문제가 있어도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 다윗의 영원한 모험 개척을 하게 하셨다. 믿음의 용량이 커지면 무엇을 해도 이루게 하신다. 한번이라도 창조적 모험 사명을 시도해 보았는가??

세상은 마음먹기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지켜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 나를 평가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 일컬음 받아야한다.

*사도행전 13:36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 당시에는 그 때만이 아닌 다윗은 한 평생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잠들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지키고, 잘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다가 마지막 샬롬의 경지를 누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흘러 넘쳐서 우리가 주님이 붙잡아 주시길 원한다.

 

♣요약

다윗처럼 영적으로 마음을 지키는 자 되어서 기적을 체험하고 날마다 주님 안에서 은혜를 구하며, 사명으로 무장되어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나와 가정 교회를 온전히 섬기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샬롬의 경지에 이르도록 실천하고 주님 마음을 알아가야 한다. 고독 현장에서 창조적 모험의 바다에 담대하게 뛰어 들어갈 용량을 키우고, 주님 앞에 마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아들이시고 날 위해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마음을 지킬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저들의 왕으로 세우사 그와 그의 후손들과 더불어 충성의 언약을 맺으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증거를 인용하고 있다. 바울이 인용한 증거 중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은 거룩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내가 다윗을 찾았다고 말씀하셨다. 찾는다는 것은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도에 적합한 인물을 찾기 위해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을 샅샅이 뒤지셨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두 번째 증거는 다윗이 하나님을 닮은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22절).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자라는 의미이자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이란 의미이다. 세 번째로는 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를 바라고 노력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행할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권 교체는 그 국가가 완전하지 못함을 시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정권은 메시야의 영적인 왕국으로 반드시 이양되어야 하며, 이제 그 왕국이 비로소 수립되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에 대해 전혀 시기할 필요가 없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에 관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설명했으며 바로 이 예수가 다윗의 약속된 후손임을 증거 한다(23절). 이 사람의 씨에서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부터 그의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을 위해 구세주를 세우셨으니 그가 곧 예수이시다. 예수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대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야 주신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선택된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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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1년 3월 13일)
제목: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
말씀: 요한복음 5:24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기도: 박요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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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24절)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에 대해서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사람이 절대로 인간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세 가지의 벽이 있다.

첫째는 죄의 문제,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죄 문제를 놓고 이야기 해본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한때는 우리 인간들이 다 잘 나간다고 하지만, 다 같다. 그 에덴동산의 아담의 조상들은 다 죄를 지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 그럼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우리가 심지어 자녀가 없고, 남편, 아내가 없어도 죄 문제만은 해결해야 하는데,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중요하다. 구원은 쟁취해서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선물로 얻는 것이다. 그럼 선물로 받았다면 왜 그리 싸우고, 상처주고, 왜 그렇게 힘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도 주시는데 나머지 부분도 다 주신다. 왜 그런데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인가?? 믿음을 갖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5:24절에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죄를 지은 영원한 형벌을, 죄 지은 형벌을 다 면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죽음의 문제, - 나이 80, 90을 자랑할 수 없고, 50이 넘으면 미모의 평준, 60이 넘으면 지성의 평준화, 70이 건강의 평준화, 80, 90이 넘으면 반은 밖에 나와 있으며, 반은 공동묘지에 있다. 80, 90이면 잘 자는 것이 일이다.

-죄를 통해서 얻는 것이 또 하나가 죽음이다.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있는데, 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평생에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서 복음이 여승흔 목사님의 말씀이 있다. 최근에 복음을 전하면서 예를 들었는데 감동이 왔다. 교회와 중직자, 헌신 자들이, 모두가 포스트 코로나로 걱정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 이 복음으로 무장한다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 여승흔 목사님은 하이킹을 하면서 젊은 미국인 부부가 심호흡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운동으로 온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가까이 살고 있고 남편과 자녀가 있다고 했다. 질문에 그 자매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 자매님이 오늘 밤이라도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냐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냐고 물으니, 자매님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매에게 성경은 영생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냐고 질문하지 자매님은 영혼한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성경은 영생의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명해 주고 강조하고, 이어서 선물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만약 그 자매님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준다면, 그 선물을 주고 나서 돈을 받겠는가? 아니면 선물로 주겠으며, 값없이 주겠냐고 질문을 하니 대답으로 선물은 값없이 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자매님은 착한 일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어떻게 되냐고 하니, 그 자매님을 잘못되었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은 성경은 죄에 대하여 정의하는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셨고, 죄에 대한 설명은

첫 번째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죄이다. 성경은 수많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두 번째로 성경은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죄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도 많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을 모른다다는 것이 죄이다. 부모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부족해도 한결 같이 무언가 사로잡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혜의 기름이 부어지고, 하나님은 나의 관계 때문에 그래야 한다. 죄라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도 죄고 하라는 것을 안 하는 것도 죄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죄이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자매님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냐고 질문하니 본인이 죄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확실히 하기 위해 재차 물으니, 분명한 의미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죄는 반드시 죄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죄인은 스스로 절대로 지불할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매님의 죄를 지불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 은혜를 그 자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믿음의 결신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매님을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렇게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영생의 선물로 받게 됨을 전해주고 나서,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은 자매님에게 영생을 선물을 주시길 원하시는데, 자매님은 하나님의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 영생을 선물로 받으시겠냐고 하니, 상기된 표정으로 기꺼이 받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확실히 받아들이겠다고 했기에 자매님에게 결신기도를 해주었다고 한다. 아주 기뻐하는 모습과 표정이었고, 차후 약속도 했다고 한다. 성경구절과 차후에 양육 훈련도 받으라고 안내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고 한다. 이것을 메일로 보내 준 예를 들어보았다. 한국 교회가 목회자를 뽑을 때에도 복음 제시를 잘 하는 능력을 가진 자를 뽑아야 하고, 교회 중직 자를 선출할 때도 이 복음이 분명한가를 놓고 뽑아야 한다. 복음제시를 꼭 하고 뽑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니면 한국 교회가 살길이 없다.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이 다시 한 번 일렁일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이 선물을 우리 모두가 받았는데 선물 받은 자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바란다. 복음 제시의 가장 강력한 핵심이 그리스도를 전파함의 B파트, 모든 사람이 죄를 받음, 죄의 형벌, 그리스도가 혈벌을 받음,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함, 그리스도를 모셔야 함, 구원의 확신,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 교회는 이 복음이 영력히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길 바라며, 이번 훈련생들이 이런 마음으로 복음의 역사와 능력을 가지고 끝까지 잘 훈련을 하여야 한다. 영적 에너지를 통해 즐겁고, 사명감으로 감당하기를 바란다.

-우리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찬양을 제대로 합시다.


셋째는 허무의 문제이다. - 그 어떤 인생도 허무를 피해 갈 수 없다.


♣요약
*사람이 절대로 인간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세 가지의 벽이 있다.
첫째는 죄의 문제,
첫째는 죄의 문제,
셋째는 허무의 문제이다
.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온전함을 닮기 위해 훈련 기간 동안 사고, 감정, 의지, 관계, 행실의 온전함을 내면과 외면 모두 단련되고, 훈련 기간동안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기름부음이 충만히 있어서 가정과 일터에서 주님의 불성곽을 깨달아 훈련의 은혜가 넘치며 자신을 회복하고 나와 가정, 이웃에게 복음의 핵심을 제시해야 한다. 제자훈련 46기와 사역훈련 33기 사역훈련생들은 주님의 제자로서 은혜의 빚진자이니 값을 치르는 과정에 담대하게 주를 위해 선물로 주신 구원의 핵심을 갖고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감사하며, 누리기를 소망한다.

-영생은 믿는 순간부터 주어진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영생에 들어간 상태로 부활의 날에 누리게 될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된다. 구원의 보장은 죽을 때 또는 미래 심판 때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상태이다. 영생은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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