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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3월 7일) 제목: ''십자가(十字架)가 중앙선(中央線)이다'' 말씀: 마가복음 8:34~36, 요한복음 10:27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 (마가복음 8:34~36)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요한복음 10:27)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 찬양을 주님 받으시길 원하신다. 우리는 전천후 신앙이며 온전함의 고봉을 향하여 함께 등정을 위해 올라가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비포(before)→ 에프터(after)가 두 가지가 확연한 차이가 나야 하며, 주님께서 은혜 주시길 사모한다. 그럴러면 우리에게 기준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모두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기준이다. 이 세상의 기준과는 차이가 있다. 이 세상 기준은 완벽하거나 영원하지 않다. 북극성은 북반구만 있으며, 남반구는 북극성이 없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기준을 두고 운전을 할 때에 서울이나 한국이나 미국은 왼쪽의 운전대이지만, 영국이나 태국 일본 사우스 아프리카는(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다. 그런 것처럼 운전하는 사람이 그곳에 가면 기준이 다르니 운전할 때 사고 나기 십상이다. 한 번은 사우스 아프리카에서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1200킬로는 운전해 보았는데 차가 없는데다 아무도 없어서 차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횃갈려서 좀 어려웠고, 그때 섬광처럼 깨달은 진리가 있는데, 이 기준이 다르니 운전대 옆이 중앙선임을 깨달았다. 운전석 옆이 바로 중앙선이라는 것이다. 기준이 그래서 확실해야 한다. 잘못하거나 역주행이 되면 사고가 난다. 정말로 신앙의 기준이 무얼까를 생각해 본다. 어떤 경우에도 경계함이 없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기준을 깨닫고 나면 영적인 자유함이 있게 된다. 겉으로는 엄청 무거워 보이지만 제대로 깨닫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벗겨주신다. 기준을 잘못 잡으면 우선 좋아 보이는 것을 잡았다가 중독되고, 노예가 되고 완전히 끌려가서 인생의 마지막이 되고 만다. 신앙의 기준이 우리는 확고하여 결국은 신앙의 생명의 은혜와 풍성한 축복을 받기를 바란다. 본문은 막 8:34절에 *막 8:34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이 무거워 보여도 전체를 다해 초신 자들도 모두가 포함된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이 주시는 음성임을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다’. I. 첫 번째 기준, 자기 부인(34절) -자기를 미워하고 인간됨을 무시가 아닌 내가 어떤 것과 연결이 되었는데 그 연결된 고리를 끊어야 한다. 내가 고리를 끊으면 된다. 그 잘못된 것을 끊는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제사장 뜰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같다. 어떤 대상과 연결된 고리를 포기하고 끊으라는 것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뜻이 담겨있다. 적당한 뜻이 아닌, 내가 나와 연결된 고리를 끊어야 한다. 내 인생에 주인으로 삼는 고리를 확실히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다. 내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 세월을 이것으로 인해 보냈고 소비했다. 주님께 신뢰하고 의탁하라! 내가 내 자신과 끊는 것이며 내가 나를 제3자로 보아야 한다. 최종 결정권으로 날마다 열 받고 상처받고 산다. 그래서 온전함의 경지에 못 간다. 그러니 십자가를 깨달으면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올려드린다. 우리 자신이 큰소리치지만 최종 결정권을 우리는 내가 내리지 못할 때도 많다. 전신마취라는 것도 그렇다. 수술대에서도 그렇다. 보호자가 수술대에서 사인한다. 우리 모두는 정말 예수님을 믿지만 너무나 자기 부인을 못하고 산다. 예수를 믿어도 최종 결정권을 내가하고 있다. 자신의 종교를 믿는다. 기독교 안에서 나 자신의 종교이다. 내가 복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내 신흥종교가 되고 있다. 스스로 교주가 많다. 기독교에서 자기부인을 못하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를 잘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야 한다. 기독교 깊은 실현은 자기부인이다. 주님께 최종 결정권으로 주님과 붙어있어야 한다. 중앙선을 이탈하여 역주행을 하지 말라. 나 자신과는 독립해야 하며 주님께 최종 결정권을 드리고 주님과 동행하여 살아야 한다. 딱 달라붙어야 한다. 중앙선을 이탈하지 말라. II. 두 번째 기준, 자기 십자가(34절) -주님이 주시는 것은 이 십자가의 길은 중앙선인데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가 너무 나름대로 미화되고, 익숙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 당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과 모욕과 억울함과 능욕과 부끄러움의 대명사였다. 끔찍하고 이해가 안가고 지독한 십자가였다. 그래서 제자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이상하고, 엉뚱하고, 너무나 벼락같은 십자가였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십자가가 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을 층간 소음을 내고 괴롭히는 것인가? 내 주차 자리를 선점하는 옆집 사람인 것인가? 가족 중에 나를 누가 괴롭히는 것인가? 나의 신체적인 약한 것인가? 그런 것인 내 삶을 자기 십자가로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그런 십자가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 십자가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치욕과 모욕과 억울함의 최악의 십자가이다. 이런 십자가는 우리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억울함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기준이며 중앙선이라는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대부분 이런 부분을 모르기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시며 이 사람을 정말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게 해야겠다고 하시면, 환경적 상황적으로나 치욕과 수치와 억울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온전해지고 싶고,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고,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고 싶지만, 우리는 수치를 당하고 싶지 않는다. 그러나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려면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억울하기도 하고, 남이 안 알아주고 할 때 순간 무시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열 받게 하고 할 때에도 그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주님 주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세상이 말하는 방식과 판단과 다르다. 초신 자들도 예외가 없다. 세상은 십자가를 피하라고 그런다. 부담스런 십자가 일지라도 주님이 내 속에서 일하게 하라신다. *데살로니가 2: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바울이 열심히 복음 전하고,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 주고, 진짜 열심히 감당했는데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로마의 시민권자가 인격적으로 멸시받고, 모진 매를 맞고, 바울이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았으면 이런 고난을 당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자기 십자가가 없으면 얼마든지 대접을 받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믿기에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다. 대기업들은 코로나로 인해 암흑 적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제제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바울이 억울함을 당했지만, 고린도후서 12장 10절을 보면,,, *고후 12:10 -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는 진정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수치와 어려움과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지를 보면, 신앙생활 1막이다. *막 8;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수치와 능욕과 모욕의 십자가를 지게 되면 나와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면 구원한다고 하신다. lll. 중앙선 기준을 잘 지키면 생명의 실체와 연결된다(35절). 주님이 지게 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면 우리는 잘 지키면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지지 않는세상 십자가는 올무가 되고 죄의 종이 된다. 이단, 도박 알콜 등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세상 주는 것을 벗고 기쁘게 주님 주시는 것을 지면 내 삶을 주관해 주신다. 신앙세계가 새로운 차원이 된다. -헬라어로 보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원어로 ‘내가 어떤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 연결된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가 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면, 점점 쉽고 가벼워진다. 초라하고 더러워지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현재형이다. 자기 부인은 참 생명과 연결된다. 모든 것을 가지게 된다. 생명과 연결되니 모든 것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다. 재산목록 첫째 둘째 셋째 모두가 예수님이시다. 참 생명과 연결되며 풍성하게 연결된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주님의 지혜를 얻어서 산다. 목숨의 한계가 있을 때, 큰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한계를 뛰어 넘게 된다. 믿음으로 이긴다. 사탄과 우울 건강에서 절망일 때도 은혜의 감탄사가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해도 재산목록 1호가 되어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재산목록 1호가 될 때 주님이 일하시게 된다.!!! ※중국의 흑룡강성에서 설교를 가니 느낀 것은 2시간 설교를 하고나니 어떤 성도들이 자기는 차를 타고 5시간 6시간 기차를 타고 왔는데 그것만 설교를 하느냐고 해서 그 신앙의 야성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신앙에 비밀을 가졌다. 우리는 기준이 있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앙이다. 우리는 신앙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이젠 영적으로 깊이를 가지고 평생 주님의 기준선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확신하며 나아가야 한다. 칼빈은 조직 신학적으로 많은 교리가 좋지만, 마르틴 루터 “오직 십자가만이 깨달음이 크다”라고 했다. 1. 죄로 인해 비참함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예수님의 십자가이고 2.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성도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신앙의 기준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3. 모든 죄의식과 절망으로 고통 하는 인간의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4. 주님이 지어 주신 자기 십자가가 아니면 더 큰 세상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 대신 주님의 십자가는 가볍고 쉽다. 그러나 세상의 십자가는 점점 무겁고 옥죄고 중독되게 하고 노예로 만든다.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주님을 닮아가는 온전한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요약 자기를 주인 삼는 시대에 '자기부인의 십자가'를 져야 하며, 내 인생의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며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는 평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이 지신 모욕적 십자가를 지고 중앙선을 지키며, 재산목록 1호이신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참 생명을 경험하여야 한다. 참 생명과 연결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된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앙이다/마틴 루터' 유일한 소망은 신앙의 기준이다. 막 8:34-36절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육신의 안일에 빠져선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34절)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낸다. 곧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려 하지 말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계속 그리스도를 좇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환자가 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교훈과 책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육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을 때조차도 그들은 결코 육신의 생명을 위해 염려해선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에 의해 그를 따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일까? 우리가 생명 그 자체보다 그리스도에 의한 유익을 선택할 수 있을지 조용히 생각해 보자. 마귀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과 종들을 유혹할 때 그는 가장 나쁜 것은 숨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어렵고 위험한 일이 무엇인지 전에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우리가 가장 나쁜 것을 안다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만일 우리가 양자를 모두 공평하게 놓았을 경우 그를 섬김으로써 얻는 유익이 그를 섬기다 생기는 좌절을 충분히 보상해 주기 때문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35절).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신앙 고백을 한 후에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부인함으로써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그는 그 목숨과 영생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역경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자, 즉 진실로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할 것이며 말할 수 없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자기들의 왕과 나라를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 유가족을 원호해 주는 것은 어느 정도의 보상이 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기를 위해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얼마나 큰 보상이 되겠는가? 2.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그리스도를 부인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절). 요한복음 10:27절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부르는 소리에 따르지 않는 귀 먼 양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는 양들은 자기의 양으로 계산하지 않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은 그를 따른다. 목자가 내리는 명령은 언제나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목자가 발걸음의 인도를 그대로 따라 가야 한다. 즉 그가 어디로 가든지 어린 양이 이끄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를 따르지 않으면서 그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우리는 헛되이 그 음성을 듣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양무리에 포함되지 못한 자들의 커다란 불행과 비참함을 확실히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여기에서 자기를 따르는 자기 양들의 지복의 상태와 경우를 묘사하신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자신의 양을 아시고 계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2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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