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예배(주후 2021년 3월 3일) 제목: "우리의 간절해야 할 소원" 말씀: 누가복음 11:1-4절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 (누가복음11:1-4절)
▶주기도문은 언제 많이 사용하는가? 70년-80년대에는 공포영화에 주기도문이 많이 나왔다. 주인공들이 아주 급박할 때, 주기도문을 외우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영화상으로는 큰 효험은 없었다. 그러나 특별한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주기도문과 굉장히 친숙하다. 학습과 세례를 받을 때도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을 외웠는지를 묻게 된다. 또 예배 때마다 주기도문으로 많이 마친다. 전 세계를 통 털어서 이시간도 지구 어느 곳에서나 암송되고 외워질 것이다. 어릴 때에 가정예배를 드릴 때에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 아주 행복했다. 주기도문을 한다는 것은 이제 가정 예배가 마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찬양하다고 말씀을 듣다보면 잠이 오기도 한다. 그런데 주기도문을 하자고 하면 기뻤다. 요즘 가정예배를 드릴 때도 같은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주기도문 하자고 하면 아이들이 좋아서 생생하다. 우리 자녀와 동역 자들도 모두 친숙한 기도문이다. 성경에 어떤 부분보다 익숙하다. 오늘도 우리는 성도의 온전함, 주기도문으로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준비된 자세로 고백하겠는가?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주기도문의 의미를 우리에게 그 마음을 알려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제자들은 지금 참으로 귀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제자들이 보고 주님께 달려가 기도하는 것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한다. 물론 요한도 가르쳐주었기에 직접 기도하는 마음을 가진 모습이 귀하다. 이 마음이 귀한 것은 우리 자신이 무엇을 정말 원하는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젊은 들에게 물으면 정말 잘 모른다. 기도해야 하는 것과 소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잘 기억이 안 나고 뭘 해야 할지를 모른다. 노부부의 소원을 이야기 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소원을 이야기 해보라고 하니 할머니는 첫째 소원은 소시지를 둘째는 소시지가 코에 붙고, 셋째 소원은 코에서 소시지를 떼어 달라고 할 것이다. 요즘 같아서는 수백억에게 요정에게 달라고 해서 좋은 외과 의사를 모셔서 소시지를 잘 떼고, 더 잘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을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가 그런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았음 한다. 무엇이든 마음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안하는 것보다 그냥 내 마음을 주님께 올려 드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귀하고 귀하다. 그렇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다 보면, 점차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지를, 내가 무엇으로 소원하기를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를 점차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이다. 제자들은 기도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 다시 기도하는 방법을 묻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정답을 가르쳐 주신다. 바로 ‘주기도문’이다.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마태복음 것은 길게 나온다. 누가복음은 간결하다. 주님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기도문을 가지고 간절히 이러한 내용들을 너희 마음에 소원해라’ 하셨다. 간절히 간구하고 원하라고 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시면서 오십 번 정도로 하면 무슨 응답이 생길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다. 횟수로 승부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문과 같이 사용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 안에 있는 소원을 간절히 바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절히 소원하고 바래야 하는가? 그렇다. -우리가 간절히 원해야 하는 것은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이름이 독특하다. 이름을 표시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이다. 우리에게 주민번호가 있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유일한 번호이다. 나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번호보다는 나와 같은 이름이 많듯이, 그중에 많은 사람 중에 한 명인 그 이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름에 의미를 둔다. 왜 그런가? 그 이름은 나의 과거와 나의 부모님, 삶과 나의 현재와 미래와 다 얽혀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함께 엮여 있어서 그 이름을 많은 사람들이 써도 그 이름은 여러 이름이 아닌 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어떠한가?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은 이름을 갖고 계신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가르쳐 주신다.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신다. 그게 이름입니까? 하면 정말 그 이름이다. 있다. 존재다. 나는 계속 있어 왔다.‘ I’m who I am’ 정말로 그대로 이름이 된 것이다. 이름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 그 자체로 드러내는 이름은 없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크고 크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붙여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보여 줄 수 있는 만큼만 보여주시니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 스스로 드러내겠다고 하시면, 우리는 그 만큼만 보게 된다. 그래서 구약은 다윗은 내가 하나님과 함께 나간다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블레셋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소서!!~.하나님의 이름은 맹세의 대상이 되고 찬양, 약속의 대상이 되며, 우리의 능력의 명명이 바로 이름이 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의 이름이 능력의 원천이 된다. 모든 그룹이 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성경은 선포한다. 이름은 전인격을 드러내는 것이고,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 간절히 원해야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뒤에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가 임하시길 소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라 여길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도 바로 지금 여기가 아닌 곳이기도 하고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다. 나라는 주권과 시민과 영토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하는 곳, 하나님 나라에 가서 역할을 감당하는 것, 하나님 나라에 백성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영토가 넓어지는 것,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있다. 장소에서부터 시간에 이르기까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주재 권에서부터 모든 넓어지는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우리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이며. 두 번째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이다. 전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겠다는 전제이다. 세 번째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내용이다.
▷주기도문에 관한 책들이 많다. 그래서 날마다, 일용할이 무엇인지, 시험이 무엇인지, 이런 단어들을 얼마나 많이 기도하면서 연구를 했겠는가? 여기서 아주 짧게 말하자만, 날마다 매일의 양식은 우리가 먹는 그 양식을 빼지 않는 포함이다. 영적인 양식으로만 보면 안 되고 정말 하나님 우리 먹을 것을 주시라고 기도이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도 민족의 죄, 우리 전체의 죄, 외치며 확장할 수 있겠지만 우선적으로는 내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신자로서 성도로서 짓는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시험에 걸려들지 않게, 큰 산을 잘 건너가게 해 주시라는 기도이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을 전체를 놓고 보면, 처음과 끝에는 거룩한 이름, 그의 권세, 영광이다. 중간에는 하나님!! 오늘 밥 좀 주세요!!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게 된다. 잘 보면 내용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칼빈은 주기도문을 대하면서 우리 성도가 매일 살아가면서 우리가 매일 꿈꾸고 소망해야 될 부분이 주기도문에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고 죄 용서함 받고, 용서하고, 시험을 피하고 시험을 뚫으며 나가면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면, 종말에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 나라, 그때 하나님의 이름이 정말 거룩히 이름을 받고, 그때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맞지만, 일제 강점기에 손양원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도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그저 등 들고 언덕에 나가서 혹시 예수님이 오실까하여, 주님 맞으러 그러면 이 어려운 세상이 다 끝나고 이제 하나님 나라가 될까하여 소망하고 기도하며 나아가는 그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동시에 칼빈은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 나라가 임함을 받는 것, 첫 결과는 우리 육신의 욕심에 길들임이라고 함께 이야기 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무엇이 첫 열매라고 말하는가? 위 육신의 욕심을 길들이는 것이 첫 열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기도문을 볼 때에 양쪽에 처음과 끝에 거룩한 것, 존귀한 무엇인가 있고, 중간에는 너무 그냥 개인적이고 살아가는 내용이 있는 것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보게 해준다. 무엇이냐면, 중간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 우리 하나님의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과는 달리 무관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유관하다. 밀접하다. 그 증거는 성경에 있다.
마태복음 6:10절에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그 섭리와 뜻이 여기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어디서 받아야 하는가? 여기서 받으셔야 한다. 우리에게, 인생들 가운데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전히 더 크게 강하게 받으셔야 하는가? 주님께서 계신 나라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이다. 우리들 때문에 허망해지고, 간절히 회복되기를 고대하는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매일의 양식의 문제들, 먹고 마시는 일, 죄 용서의 일, 시험에서 건져달라는 내용, 그 기도는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주님의 나라가 힘차게 임하는 것과 아주 큰 관계가 있어야 한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먹을 것을 주시라고 하는 것이 그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모든 문제를 우리가 기도하는가? 우리 하나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기도의 이해가 되는 것이다.
로마서 14장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레위기 45:11절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지어다.
마태복음 5: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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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예배(주후 2021년 3월 3일)"우리의 간절해야 할 소원"(김도훈 부목사님)-사랑의교회 ☆
2021. 3. 3.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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