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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1년 4월 3일
제목: ''은혜의 폭포수''
말씀: 시편 42:5~8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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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5~8)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 교회가 오늘 좀 달라졌다. 뒤에 영상이 달라진 것이다. 전광판이 새롭게 들어오는 은혜가 되는 날이며, 감사의 박수들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영상이 앞뒤에 있어서 어느 구석에서라도 모두가 함께 편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4월 4일 연합예배를 기념하고 교회가 포스트 코로나 이후에 한국 교회가 회복되어야 하는 소망으로 교회 디지털 사역 팀의 수고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본당에 은혜의 사각지대가 없기를 바라며, 어디에 앉아도 다 은혜가 될 것이라 여긴다. 이 본당에서 함께 예배에 은혜가 되길 원한다.  또한 은혜의 폭포수인교회에 지상에서 지하 5층까지 썬큰(Sunken)이 오픈되었다.

-오늘이 성토비새이다. 우리교회만 있는 독특한 날이며 성 금요일 저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을 기념하면서 토요비전으로 묶어서 그 마음을 담아서 오늘 예배를 드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이 물리적으로 보면 가장 참혹하가 어렵지만 서양에서는 Good-Friday라고 하고 있다. 아주 최고의 금요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물리적인 아픔, 환경적인 어려움, 이런 것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찬란한 은혜가 있을 줄 믿는다. 그리고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있을 줄 믿는다. 이 은혜와 영광은 우리의 생각과 사고방식도 뛰어넘는 것을 확신한다. 성 금요일로 인해 찬양이 항상 기억나게 한다. 494장이다. 이 찬송은 장례식 하관 식에도 부르지만, 하나님의 그 은혜의 차원으로 우리 모두가 다 들어가기를 소망하며, 성 금요일 은혜가 영광이 되길 바란다. 기념하여 토비새를 통해 다 은혜 받기 위함이다.

 

*찬송가 494장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쉼이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 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4. 살아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아멘.

▷모든 인생들은 짐을 지고 인생의 많은 과정을 들을 겪고 시행착오를 저지르며 산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 우리가 부족함도 많고, 부끄러움도 많고, 주님 앞에 죄송한 것도 많지만, 오늘 빈손 들고 앞에 나가지만, 의의가 없는 자라도 주님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자에게 씻어 주실 줄 믿는다. 주님 십자가를 붙들 때, 씻어주심, 믿음 가지고 짐과 오염된 것과 때 묻은 것들을 정결하게 제거해 주시길 기도하자. 믿음의 4세대가 정결의 영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귀한 영상을 준비하게 해주심을 감사하며 모두가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주일을 준비하여야 한다. (72구절 암송 중 오늘 ‘하나님을 의뢰함’ 중에 6구절 외운 것을 하나님께 올려드리자).

-성 금요일과 함께 38미터인 ‘썬큰(Sunken)’을 오픈한다. 은혜의 폭포수를 관람하기를 바란다. 이 것을 건축 중에 넣은 것은 지하의 공기를 정화하는 목적으로 위에서 아래까지 셔큘레이션 공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며, 성큰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기 위해서이다. 많이 고민 중에 사랑의 교회 건축에 영광스럽게도 마무리를 잘 하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은혜의 폭포수’의 제목으로 만든 것이다. 은혜의 폭포수의 오픈의 날이다. 이 폭포수는 우리가 대법원 앞에, 대검찰청 앞에 교회를 짓고 여기서 사역을 하고 있다. 이 대법원과 대 검찰청은 수많은 애환과 인생에 艱難辛苦와, 짐과, 위험과, 인생사가 다 여기에 녹여져 있다. 그 모든 것을 말하자면 오늘 본문 시편에 들어있다.

 

*시편 42편 5절을 보면,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수많은 일들과 낙심한 일들, 불안해 할 일들이 많다. 일 년에 두 세 차례 사역보고서, 심방보고서를 받는다. 보면 우리교회 은혜롭고 평안한 분들도 많지만, 사실 삶의 짐들을 지고 사는 분들이 너무 많다. 낙심한 분들도 많고, 인생에 상한 일들이 너무 많다. 더구나 우리 개인적 ㆍ교회적으로 나라의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면 마음 너무 상한다. 이 민족의 장래는 한국교회가 성도들의 생사에 달려있다. 한국교회가 살아야 이 민족이 살고 한국교회가 죽으면 이 민족이 죽는 것이다. 아주 심플한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한국교회가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민족의 현재 상황들을 보면 너무 어려운 일들이 많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으로 점점 변해 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반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 하나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파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마음이 상하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자녀들도 아파하는 게 있다.

하나님의 자녀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는, 세상 사람들은 낙망하고 불안한 일들 때문에 가슴앓이 하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고 그것으로 끝나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낙망하고 낙심하고 상처받고 불안해 할 그일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찾게 된다. 하나님을 더 사모하게 되며, 믿음의 진수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자신의 믿음을 돌아본다. -examine yourselves!!~

 

-세상 사람들- 불안, 낙망, 낙심으로 그것으로 상처받고 끝난다.
-하나님의 자녀- 불안 낙망일 때, 하나님을 찾는다. 믿음의 진수를 안다.

 

*시편 42:1편에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차이는 똑같이 상처받고 똑같이 낙심하고, 똑같이 짐 진 것 있지만, 우리에게 특별한 것은 하나님을 찾기에 갈망하는 것이다. 이 갈망의 대표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충격이었다. 그이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요, 그의 인생에 유일한 위안이었고, 그의 인생에 유일한 믿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절하게 돌아가신 것을 보고 미칠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떻게 잘해 볼 수 없나를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시편에 말씀하신 것처럼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이 갈급함을 죽기 살기로 갈급하게 찾는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차이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이다. 어떤 경우에도 상하고 낙심하고 어렵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낙심치 않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차이를 나타낸다.

 

-첫째는 하나님을 절박함으로 사모하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절박 성를 가지고 주님을 사모한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사모한다. 절박한 심정으로 말씀 읽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믿음의 소원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에스겔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거처럼 된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수를 부어주신다.

 

-둘째는 과거에 주신 은혜가 너무 크다.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사모하는 것은 과거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기 그렇다.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과거의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에 하나님의 자녀는 기억한다. 전 세계 이 백여 나라 가운데서 수천년 내려오는 가운데에서 민족 종교를 백년 만에 바꾼다는 것, 이 민족이 유일하다. 지금도 인도에는 캘커타에서 아침마다 피로 신을 섬긴다. 발리도 좋다고들 하지만 그곳은 힌두 신전들이 즐비하다. 뭔가 모르게 좋지 않는 영들이 장악하고 떠도는 느낌이다. 전 세계를 다녀보면 다른 신들의 영들이 우리가 맞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감사하며, 너무 크다. 그래서 절박하게 찾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공동체의 은혜가 너무 크다.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를 주셨다. 우리는 항상 믿음의 형제들을 의지하고 서로 사모하라. 훈련생들과 다락방들과 서로 사랑하고, 각교구를 사모하라. 공동체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다. 어려울 때 의탁해보라, 이렇게 모인 것도 공동체의 은혜이다. 여기에다 몸을 서로 의탁해보라.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우리가 어떤 심정으로 할 것인가?

*시편 42:6절에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을 사모해야 한다.

 

*시편 42:7-8절에 보면,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오늘 사랑의 교회 은혜의 폭포를 보면서,,, 폭포수가 떨어질 때마다 주님! 인생이 낙심되고 상하게 될 때에, 하나님 우리는 사슴이 시냇물 찾기에 갈급함을 갖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공동체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은혜의 폭포처럼 우리를 엄몰하고 압도하게 되길 원한다.

 

▷결론은
내 인생살이에 내 배가 좌초될 때가 있다. 갯벌에 불시착을 해서 엉망진창 되어도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되지만, 은혜의 밀물, 만조가 되면 그 배가 둥실 떠서 항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저것 부족하다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더 큰 은혜를 받는 일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절박하게 사모하고,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주님의 공동체에 만족하고, 모든 성도들에게 만조를 밀려 들어서 그 은혜의 폭포가 밀려온 것처럼 압도하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개인, 공동체, 민족에게 부딪히는 모든 일들이 극복되기를 간절하게 소원한다. 폭포수처럼 압도하는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개인 공동체 이 민족에게 상황들을 극복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님 큰 은혜를 주셔서 덮어야 한다. 평생 그 폭포수로 은혜의 만조가 되길 바란다. 자기 의를 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의 폭포수가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은혜의 폭포수로 모두 하나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절박하게 사모하며, 과거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서로 공동체인 교회에서 헌신하며, 은혜의 폭포수를 만나서 모든 짐들을 극복하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불안, 낙망, 낙심으로 그것으로 상처받고 끝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불안 낙망일 때, 하나님을 찾는다. 믿음의 진수를 안다. 오늘 은혜의 폭포수와 전광판을 위해 힘쓰고 섬김에 정성을 다하신 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길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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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내가 낙망하는가? 그럴만한 이유, 실제적인 이유가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많은 이유들이 있는데도 그렇게 법석을 떨지는 않지 않은가? 동시에 우리에게는 격려 받을 만한 이유도 있지 않은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영혼의 의기소침과 불안을 치료하는 뛰어난 해독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의기소침을 꾸짖을 때는 하나님을 바라도록 우리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때 영혼은 가라앉은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붙잡는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그의 은총을 인하여, 즉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얻는 원조와 그 은총 안에서 얻는 만족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 것이다.

그는 자기 영혼이 낙담하는 것을 불평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6절). 그의 영혼은 낙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서 그 사실을 말씀드린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그는 종종 하나님을 기억하므로 위로받곤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도 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박해자의 격노를 피해 때로는 '요단 땅'으로 도망가기도 하고 때로는 '헤르몬 땅'으로 혹은 '미살'이라고 불리는 산으로 도망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나안땅 맨 가장자리에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항시 신앙을 지니고 다녔다. 그는 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며 그와 은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거리와 시간 때문에 그가 그렇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고 마음으로 가까이 느끼고 있는 것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의 표시들을 탄식하면서도 때가 되면 그의 은총이 돌아올 것을 기대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 그는 그의 근심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오는 것임을 보았고 그로 인해 낙담하였다(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즉 한 가지 고통 뒤에는 마치 급히 따라오라고 재촉이라도 받은 것처럼 또 다른 고통이 속히 뒤따랐으며 또한 주의 폭포 소리는 전쟁의 신호와 소리와 경보를 발하였던 것이다. 파도와 물결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많은 시험을 당할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바를 아시며 또 그 시험들이 이내 끝나리라는 것도 알고 계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오는 그의 구원을 기대하였다(8절). "그럴지라도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리라." 폭풍 뒤에는 평온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가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를 때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그가 찾는 모든 좋은 것의 원천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을 '명령하신다'(command)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은총이 값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주권적인 방법으로 수여되는 것이다. 즉 그가 왕으로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함을 명령하심으로써 파도와 물결에 명령을 내리신다. 그러면 그것들은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는 이 일을 '낮에'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함은 아무 때라도 영혼 속에 낮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담임 목사님께서 감사패 수여(안장원 안수집사님- 함께 사역훈련을 하신 유명실집사님 남편) ☆

                                       ☆(사진 이의수 목사님 촬영이시며 허락하에 올려 놓습니다) ☆

 

 

 

                                       -안장원 집사님의 디자인으로 설계된 '은혜의 폭포수'(Sunken)-

☆사랑의교회에 새로운 명소,
“은혜의 폭포”를 소개합니다.

대형 건물에 지상에서 지하 5층까지
썬큰(Sunken)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입니다.
이곳에 정선의 그림을 디지탈화해서
디지탈폭포를 만들어
오늘 오프닝행사를 하였습니다.
성도들에게 시원한 위로명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글로벌 디자인상 세 번째 수상 디자인 전문 기업
'이음파트너스' 안장원 대표가 수고해주셨습니다.
안집사님은 건물에 문화의 옷, 신앙의 옷을
적절하게 잘 입혀 주시는 은사가 많은 분입니다.




 

사랑의교회 은혜의 폭포수(안장원 이음파트너스대표(집사님) 作

                                          사랑의교회 은혜의 폭포수(안장원 이음파트너스대표(집사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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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예배(주후 2021년 3월 31일)

제목: 십자가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말씀: 로마서 3:23-26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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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지난 주 말씀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당신(내)안에 있다.

이것이 나의 비밀이다. 당신의 비밀이다. 내 안에 금광맥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한다. 원래 비밀은 나만 갖는 것인데 서로 나누면 좋다. 성도의 온전한 내안에 계신 예수님의 비밀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비밀은 나눌수록 커진다. 지난 주 액션 플랜으로 나눈 고난 주간 묵상 집을 통해 내 안네 계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비밀을 묵상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온전한 인격의 열매를 맺는다는 욥기의 말씀으로 묵상 집을 가지고 묵상을 했다. 이 묵상 집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놀랍고 온전한 은혜를 누리기를 바란다. 성도라면 누구나 십자가에 대해서 익숙하다. 이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교회에도 가정에도 자동차 안에도 어디에나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많이 있다.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뭐가 보이냐고 묻는 게 좀 이상한 질문 같지만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지 오늘 본문 로마서 3장의 말씀과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상징인 이 십자가를 통해서 오늘 함께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먼저 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십자가는 고대 중동 베네키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제국에서 널리 사용했다. 처음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노예들을 나무에 묶어놓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한동안 먹지 못하도록 체벌을 주는 용도로 사용했다. 근데 이것이 로미 시대에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폭도들을 처벌하는 용도로 쓰다가 처음에는 단순에 나무에 묶어 놓은 용도였다. 그러다가 조금 더 고통을 주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잔인하게 십자가 발전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된 것이다.

 

로마시대 십자가 처형은 너무나 잔인해져서 로마 시민들에게는 사용되지 않고 노예나 피 지배자들에게 사용되었다. 1세기 유대학자 요세프스에 책에 의하면 유대 1,2차 항쟁 때에 하루에 매일 500명의 유대인들이 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나갔다고 한다. 먼저 죄인들의 주요 장기인 심장과 폐와 뇌 등을 직접 손상시키지 않고 즉시 사망하지 않게 해서 그 고통을 오래 느끼게 했고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아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십자가 나무에 수직으로 매달려서 장시간 있게 함으로써 몸 아래와 몸 위의 순환이 잘 되지 않아서 산소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과 근육 결련을 겪게 된다. 이 고통으로 십자가에서 쇼크가 와서 기절하고 또 깨어나고 반복을 하다가 결국에는 호흡곤란으로 질식사를 한다. 기절했다가 깨어났는데 아직 죽지 않은 자신을 보며 깊은 절망에 빠지게 하는 그 고통스러움이 십자가 위에는 있었다.

이 끔찍한 십자가형은 4세기 313년 로마 콘슨탄티누스 황제 때에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사용되다가 313년 기독교의 공인으로 공식적으로 십자가형이 폐지되었다. 그 후 70년이 지난 이후에 380년, 데오도시우스 1세 때에 데살로니가 칙령이라는 것을 통해 기독교가 로마에 국교가 된 이후에서 초대교회까지 예수님의 고난의, 승리의 상징으로 공경의 대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중세시대 때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해서 우상화되고 형식화 된 십자가 공경이 폐지되고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의 상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상징하는 모습으로 사용되어져 왔다.

 

▷이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 이 십자가와 오늘 본문을 오버랩을 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I. 십자가를 통해서 먼저 보이는 것은 죄이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처형하는 형틀이다. 십자가 맨 위에는 십자가에 달려있는 사람의 죄명이 적혀있는 죄 패가 달려있다.

*마가복음 15장 26절에 보면,- 26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예수님도 그 십자가위에 죄 패가 달려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있는 죄 패는 예수님의 죄가 아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을 보면,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렇다면 누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졌는가? 바로 우리, 나의 죄 때문이다.

 

오늘 본문
*로마서 3:23절 -2
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선언처럼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죄, 태어나면서 가진 원죄, 그리고 살면서 지은 모든 죄들을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은 죄가 그저 벌금 정도 낼 정도 죄라면, 아니면 교도소를 1-2년 정도 다녀오면 되는 정도 죄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죄를 대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의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21-31절까지 말씀을 보면, -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지은 많은 죄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로마서 1:32절에 보면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사형 온도를 내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때에 우리가 우리의 죄가 사형에 해당하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사형 중에서도 극악한 죄인들에게 내린다는 그 십자가형을 예수님이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죄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 잘 다듬어진 고급 목재가 아니었다. 아주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나무였다. 십자가형이 많이 진행될 때는 그 십자가를 어쩔 수 없이 재활용을 했다. 재활용되는 십자가 나무에는 이전에 십자가에 달렸던 죄인들이 피와 땀과 기름과 살점들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마치 예전에 철길 밑에 놓은 버팀복, 침목이라는 것이다. 그 침목은 물에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 나무채로 시커먼 기름으로 범벅을 해놓는다. 마치 십자가 나무는 죄인들의 피와 땀과 기름과 살점들로 범벅된 그런 나무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배어있는 그 악취와 그 더러운 것들이 바로 우리의 죄이다. 그 죄는 철도의 침목처럼 아무리 닦아도 닦여지지 않고 아무리 깎아내도 스며들어 있는 그 나무처럼 십자가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이다. 그 죄의 나무를 예수님은 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셨다. 그리고 그 위에 누우시고 못 박히시고 달리셨다. 그래서 십자가에 배어있는 우리와 모든 사람의 죄가 보인다.

 

II. 십자가에서 보이는 것은 또 무엇인가?- 죄로 찌든 나무에 누워계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기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십자가에 위에 켜켜이 쌓인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십자가에 누우시고 달리시고 돌아가셨다. 오늘 우리가 읽은 25절을 보면

 

*로마서 3:25절 본문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그 피는 구약제사에서 쓰인 화목제물로 쓰이셨다. 화목제물이란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인간 대신,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해서 용서받게 하는 임시적인 속죄에 사용되는 제물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그 찌들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죄를 가리기 위해서 그 나무 위에서 제물인, 화목제물로 피를 흘리신 것이다.

 

*요한복음 1:29절에 보면, 세례요한은 이렇게 외친다.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을 살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 사역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사역임을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 선포하게 하신 사건이다. 구약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지기 전에 임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는 방법이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본 척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나무에서 흘리신 피는 그저 십자가에 스며들고 찌들은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가려주시는 수준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 온전히 스며들어 죄의 나무가 아닌, 보혈의 나무가 되게 해주신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에 처음은 죄로 찌든 나무가 보이지만,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그 나무의 누우시고 자신의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그 나무를 완전히 적셔 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보인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계속 달려 계시시지 않는다.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이시다.

※천주교의 십자가는 고통 받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그 십자가를 ‘십자보상’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 십자가를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묵상하며 슬퍼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죽으신 십자가에 몸이 없다. 그것은 예수님이 고통을 넘어 부활의 승리의 기쁨의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III. 십자가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자신이다.
-십자가의 죽음에는 예수님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인인 내가 의롭게 되었다.

본문 *로마서 3:26절에 보면, -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속물로 내어 주셔서 자기의 사랑과 공의를 만족하실 뿐 아리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분 혼자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인 나의 죽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은 과거에 나는 살아있고,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 영원한 죽음의 대가를 대신 받으셨다라는 의미이다.

 

*로마서 6:6절에 보면,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2:20절에 보면,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내가 구경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옛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못박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힘입게 되는 것이다. 이 고백을 알게 하는 찬양이 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해’!!~~ 이 찬양에는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어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나 주와 함께 살리라~~

 

▷십자가에서 보이는 세 번째 나의 모습은 예수님 손에 얹어져 있고, 예수님 발에 나의 발이 얹어져 있고, 예수님 옆구리에 나의 옆구리도 얹어져 있고, 예수님의 가시관 그 자리에 나의 머리도 같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 포개어져서 나의 예전의 나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내가 된 것이다. 여기 오늘 로마서 3장의 말씀에서 또 우리에게 은혜와 희생과 사랑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통해서 세 가지를 살펴보았다.

▷ 먼저는 십자가 위에 켜켜이 쌓여있는 나의 죄, 그리고 아무도 그 위에 눕고 싶지 않은 그 위에 누우신 예수님, 그 예수님 위에 누워있는 나, 이 세 가지가 십자가에서 보이는 듯하다.

 

*십자가는 과거형이면서 현재형이면서 동시에 미래형이다.

1. 과거형의 십자가는 나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2. 현재형은 십자가는 삶의 거룩을 위해서 매일매일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가는 온전함의 십자가이다.
3. 미래형의 십자가는 영적 고봉에서 최후 승리를 붙잡아야 하는 승리의 십자가이다.

-이 고난 주간, 우리 주변에서 어디에서는 볼 수 있는 이 십자가를 통해 이전의 나의 죄, 그 위에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 그 위에 함께 못 박힌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새기는 삶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를 통해 내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지금도 나를 온전함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경험하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 주변에 많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고 십자가를 보아도 떨리지 않고, 십자가를 봐도 내 마음에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십자가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를 깊이 새겨봐야 한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켜켜이 쌓여있는 나의 죄와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그 십자가 위에 누우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나의 손과 발을 포개어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보게 되고 나를 보는 자 되어야 한다. 이 십자가로 인해 나의 가장 존귀한 비밀이 되고, 이 비밀로 인해 나의 삶 가운데 모든 어려움과 고난들을 거뜬히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기도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십자가가 비밀의 병기가 되어야 한다. 고난주간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무에 쌓인 모든 사람의 죄가 범벅이 된 십자가를 지시고 누우시고 달리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손과 발과 그 위에 함께 누운 나를 발견하는 자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묵상할 때 나의 죄를 완전히 해결해 주신 과거형의 십자가, 죄와 피흘리기까지 온전함을 이루게 하는 현재형의 십자가, 완전한 승리의 깃발로 붙잡을 미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순종으로 이제는 내 안에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입고 나올 의를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이 말은 곧 인간이 최고 목표가 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마치 사수가 표적을 맞추는 데 이르지 못하고 달리는 선수가 상을 얻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이르지 못하게 됨으로 상을 얻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철저한 실패자가 된다. 이 사실을 좀 더 생각해 보면

첫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이런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이름을 더럽힌다.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앞에서는 무죄를 자랑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려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범죄하였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잠잠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수가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셋째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영광의 시작인 칭의에 이르지 못하고 사람에게 입혀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인 성화에 이르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흠 없는 결백으로 천국에 이를 수는 없다. 그 길은 막혔다.
하나님께서는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우심을 동시에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속하려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삼으셨고, 동시에 의로우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허용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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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3월 28일)
제목: ''코로나 피로 증후군 극복''
말씀: 골로새서 1:24~27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찬양 인도: 김원준 부목사님
기도: 배성진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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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24~27)
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오늘 예배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모든 짐들이 벗겨지기를 바란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영혼의 봄 동산이 되길 소망한다. 100년만에 한 번 올까 말까하는 역사의 불청객 코로나 사태가 일 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내적으로 통증과 피로감이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내적으로 통증을 느끼고, 우리 가운데 영적으로 통증을 느끼며 피로 증후군이 있다면 오늘 말씀 속에서 이 모든 피로감이 치유되길 바란다.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만이 아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낙심으로 왔다 갔다 한다. 쌌다가 풀었다가 반복을 하는데,  그러나 일관성을 가지고 영적인 집중과 영적인 비밀병기가 있어야 한다. 영적인 필살기아 있어야 한다. 영적인 견고함과 은혜의 필살기와 은혜의 진원지가 있어야 한다.

*골로새서 1:27절,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 이 비밀은 신비한 것이다.
헬라어로 미스텔리어이다.(Mystery-비밀, 신비). -이 땅에서 가치관과 안목이 없이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금강산이나 산에서 도를 닦고, 억만금을 주어서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을 열어주셔야 한다. 오늘 성령께서 이 예배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깨달을 수 있는 영안을 주실 줄 믿는다. 오래 전 혼란스러운 나라일 때, 나의 컨디션이 따른 것이 아니라 어찌 할 바를 모를 때 하늘의 확성기처럼 들려 주셨다. 이 비밀은 자격이 아닌 내 속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말씀이 적당하게가 아니라 이 말씀이 가슴에 부딪히는 순간 가슴이 요동쳐서 응답받고, 찬송의 고백이 터져 나왔다. -찢긴 내 마음의 삶에 갈보리 언덕에 흘린 피로 생명 주신 예수님 나 영혼이 섬기리...~~~

영 가족 여러분, 오늘 고난주간이다. 정말 그러면, 우리 속에 예수님이 비밀인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부족해도 환경이 어려워도 버틸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고 주님의 눈치만 살피는 것이다. 내가 주님 앞에만 있다면 사람들에게 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비밀이 되어야 하며 제대로 깨달으면 피로 증후군이 사라지며, 삶의 어두운 영역, 피로감, 다 회복된다. 어쩌면 금광맥을 찾는 것이다. 전에 South Africa의 산을 가보았다. 보니 다이아몬드를 파려고 산을 만들어 놓았다.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금광맥을 판 것을 보았다. 그렇지만 이런 광맥이 아닌 오늘 우린 진정한 금광맥을 말씀에서 광맥 3가지를 보았다. 골로새서 1:27절을 보면,

 

*골1:27,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3가지 광맥(鑛脈))

①첫째는 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신다.
②둘째는 그리스도가 비밀이다. 엄청난 비밀이며, 이 세상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신비한 것이다.
③셋째는 그리스도가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의 소망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 안에 있게 된다.

 

이것을 깨달으니 자아가 깨어졌고, 능력을 받고, 피곤이 눈 녹듯 사라지고 진짜 귀한 것으로 피곤이 사라진 것이며, 늘 소풍가는 마음이다. 원족(遠足-휴식을 취하기 위해 야외에 나갔다 오는 일이다)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 속에 딱딱함이 사라지고 주님이 사역하시고 일하신다. 내 대신 주님이 사역을 하신다. 내 속의 비밀을 알게 되니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의 모는 것 내 안에 있다. 오늘 모든 성도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미국의 CDC(Centers for Dosease Control and Prevention)-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 감염병을 연구하는 미국의 전문기관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코로나 이후의 성인 40%가 정신건강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나서 너무나 놀라워했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함이라고 했다. 그 이전에는 자신의 어려움이 부정적이 것으로만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가시들을 없애달라고 기도했다. 내 속에서의 그 비밀을 체험하고 나서 바울이 한 차원 올라간 것이다. 오늘 온전함 시리즈의 뼈대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성도의 온전함이란 자신이 도를 닦고 노력하고 면벽수행을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나의 약함 속에서 자신의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체험하고 그 순간 온전해지는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온전함은 내 노력이 아닌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 온전하게 나타남으로써 되어지는 것이다. 주님이 역사하신다.

 

*고린도후서 12:9a,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성도의 온전함은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남으로 온전해지는 것이다.
중요한 통찰력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슴으로 새겨야 한다. 심비에 새기라. 이것은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함을 도덕적으로 고결함으로 여긴다. 성경은 약함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온전함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고린도후서 12:9b,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다시 한 번 새겨야 한다. 바울 사도는 흠 없는 사람이었고 자기 열심, 능력, 충성이 아닌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역이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이 깨달아서 한 차원 올라갔다. 약할 때 강함 주심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이 온전해짐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역의 원천이 참된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깨달았다.

 

*골로새서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의 능력이 무엇인가? 바울이 말하는 이 능력은 내 속에서 비밀로 역사하시는 상대방을 패배시키는 능력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십자가를 더 깊이 깨닫는 능력이며, 죄, 유혹에 빠지지 않는 이기는 능력이며,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능력이다. 성령으로 이기는 것이다. 이 능력을 체험하게 되면 내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면 탐욕의 목을 짓밟고, 내 마음을 통제케 하시는 거룩한 능력의 영역을 갖춘다. 단칼에 정리하는 것, 모든 유혹을 정리하게 되는 것이다. 미움 증오도 정리 해결되고 나쁜 습관도 해결되게 하신다. 그래서 내 속에 그리스도의 이 능력의 비밀을 깨닫기를 주인공이 되기 바란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는 비밀의 두 가지가 있다. 두 가지 현상이 있다. 그 두 가지는

그는 만물의 으뜸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다. 예배하는 것이다. 나의 삶이 예배하는 것이며, 예배를 가장 우선순위로 하는 것이 내 속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신다. 하늘의 신령함과 풍성함으로 채워주신다.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예배하는 자에게 내 속에 하늘의 은사를 물 붓듯 부어 주신다. 이 코로나 과정에서도 특히 현장 예배에 피로 증후군을 극복하게 하신다.

 

찬양대 못하는 게 아쉽다. 청와대에 편지를 좀 쓰고 싶다. 왜 찬양대를 못하게 하는지를...우리 속에 주님이 살아계심을 느끼며 예배하는 자에게는 상한 심령으로 치유하신다. 예배가 살아 있으면 얼굴에 눈에 광채가 난다. 인생의 짐이 무거워도 내 속에 계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하신다.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매주일 기대하면서 은혜를 사모하게 하신다. 무슨 은혜를 주실 지를 손꼽아 기기다리는 자에게는 은혜의 빛을 주실 것이다. 영혼의 봄 동산, 희락의 강수, 은혜의 빛을 주신다.

 

*골로새서 1: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구원 사역으로 완성하셨기에 내 속에서 비밀로 역사하시는 그 능력을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채우기를 힘쓴다. 마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원사역을 완성하지 못하게 공격한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지상에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셨다. 예수님을 마귀가 시험한다. 마귀가 수많은 고통과 고난을 준다.

 

바울은 *골로새서 1: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이 땅에서 수고하고 희생하고 쓰임 받은 것이 너무나 커서 그래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도 이 말씀으로 영적 피로 증후군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집단 면역력을 갖게 된다. 사랑하면 덜 힘들 피로가 사라지듯이 그렇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다 지키면 기쁨의 집단 면연력을 주신다..

 

적용- 그의 교회를 위해 어떻게 남은 고난을 채우시는가? 독일교회나 지역교회 다 좋지만 내가 속한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지역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우주적 교회도 다 사랑하지만, 우리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내가 다니는 교회를 사랑해야 다른 교회, 한국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를 사랑할 때, 평생 목숨을 걸고 교회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 평생 생명을 걸어야 한다. -사랑의교회~모두가 부족하다. 그것은 내 속에서도 싸우기도 한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7개 교회가 나온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들을 붙잡고 계신다고 했다. 고린도교회도 문제가 많았다.

 

♣요약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비밀로 삼는 자는 예배를 사모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
회를 사랑하는 것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인생의 피로 증후군을 이기는 비결이기도 하다. 내 상하고 찢긴 마음의 삶에 영적으로 금광맥이신 예수님이 깨달아지고, 풍성한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님을 친히 내 속에서 사역해 주시는 평생이 되어야 한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그리스도의 온전함이 목숨 건 교회 사랑이 비밀 병기가 되어서 우리 사랑의 교회가 이 코로나 시대의 고난을 극복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서 이 코로나 피로 증후군을 초월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자가 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운 직책으로 생각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다음과 같다. 바울이 어찌하여 그의 사역을 하게 되었나? 그는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받았으며 또한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였다. 그는 누구를 위하여 사역을 하였나? 우리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즉 그것을 충분히 전파하기 위하여)그의 백성의 유익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다. 바울은 어떠한 설교자였나? 첫째, 그는 고난의 설교자였다.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절). 그는 그들에게 보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 또한 그는 선한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의 고난을 기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우려'했다. 바울과 다른 선한 사역자들의 고난은 그들을 그리스도에 합당한 자로 만들었다. 그들은 봉랍인을 찍을 때 인장의 요철에 채워지는 밀랍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그 자신의 고난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는 '남아 있는 것을 채웠다.' 그는 남아 있는 것 혹은 그의 몫으로 남겨진 것을 더욱 더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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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1년 3월 27)
제목: ''서로, 각각 짐을 지는 공동체''
말씀: 갈라디아서 6:2~6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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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6:2-6절)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는 내용이다. 우리가 이 시대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두 가지 면에서 우리 마음이 불편할 수 있다.

*첫째는 짐이란 단어이다.
-짐을 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도 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전에는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챙기는 것을 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짐은 임무나 책임, 수고로운 일, 그리고 귀찮은 일이라고 포함된 단어이다. 정말 짐은 무겁고 수고롭고 일생 가운데 가져가야 할 짐들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곤 한다.

*둘째는 서로라는 단어이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1인 시대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혼자 있으려고 하고 또 혼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모든 처소에서 혼자 놀기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서 더 가중되었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전과는 다르게 서로는 간섭하지 않는 상황에서, 부담되지 않는 상황에서, 쓰는 단어가 되었다. 누구나 함부로 다가서면 안 되고, 간섭하면 안 되고, 개인적인 취향도 절대 판단하면 안 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이러할 때 서로라는 말은 서로서로란 단어 자체가 굉장히 불편할 수 있다. 짐을 진다는 것이나, 서로 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상황에 오히려 이 편지를 받은 이 지역 교회들은 이 말씀을 더욱 익숙하게 받았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에게 보내는 서신의 전반적인 내용은 다른 복음에 대해서 다른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사도의 엄중한 경고가 있었다. 그렇게 보면 갈라디아 교회의 주축이 되는 교회의 멤버들은 이전 유대인이 유대교에서 개종을 하였거나 이방인이라 하더라도 율법에 정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일 것임을 추측해 본다. 그런데 율법의 전체적인 구조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므로 공동체가 살고 개인이 살게 되는 그런 구조이긴 하지만, 롯기에서 보아스가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기업 무를 자에게 섬김, 헌신, 고아나 과부나 객에 대한 나그네에 대한 배려와 재정적 지원들, 연약한 이웃을 위하여 애쓰게 된 부분들이 율법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에 서로서로 짐을 지는 마음이 이들이 우리보다 더 편안하고 쉬웠을지 모른다. 그들이 잠깐 의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면, 바로 말씀 중에서 서로 짐을 짐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서로 짐을 짐으로 율법을 성취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율법대로 열심히 하면 율법이 성취되고 자기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은 너희가 서로 짐을 짐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신다. 법이란 여기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번역할 때에 율법을 번역하는 노무스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말씀할 수 있다. 서로 짐을 진다는 것은 이전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이 무엇인가? 여기서 완벽하게 가르쳐 주신 두 분이 있다.

*첫 번째 (마태복음 22:37-40절),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것이 첫째 되는 사랑이다. 둘째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선지자의 강령으로 말씀하신다. 율법을 우리 주님께서 온전히 해석을 해주신 것이다.

 

*두 번째 (요한복음 13:14절),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 하셨다. 그렇다면 온 율법과 강령인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율법을 새롭게 온전히 해석을 해주시면서 또 새 계명으로 무엇을 주셨는가? 서로 사랑하라이다. 결국은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의 율법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을 위해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법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가?-서로 짐을 져야한다고 하신다.
-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루려면 우리는 서로 짐을 져야 한다. 구약 백성이 짐을 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했느냐면 그들은 가문이 책임을 지고 구제하고 재정적으로 돕고 헌신하는 것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새롭게 짐을 지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6:2절의 말씀을 보면, 배경을 살펴보니 5장, 6장, 1절까지의 내용에서 이렇게 가문적 책임을 지고 재정적 후원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5장에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데 육체의 일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분냄, 시기, 투기 육체의 일에 관해서 엄청나게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대신 무엇을 해야 하냐고 말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아홉 가지를 말하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법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되어있다. 항상 오래 참음을 네 글자여서 네 번째 나온다. 지금 육체의 일을 하지 말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성령으로 씨를 뿌리고 성령으로 행하여 된다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범죄 하거든 바로 잡아주고 네 자신도 살펴보라고 하신다. 시험 받을 지를 주의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서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고 말씀을 하신다. 서로 짐을 지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바로 새 말씀을 주신다. 바로 짐을 지는 것은 연약한 부분을 보충해 주고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서로 격려하고 그렇게 서로 함께 씨를 뿌리고 함께 경작하고 서로 열매를 만들어가며 서로 짐을 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은 그만하고 성령의 일은 서로 함께 하자는 것이다. 서로 성령으로 짐을 진다는 것 북돋아서 서로 짐을 지라는 것이다. 새롭게 주시는 온전한 계명에 따라서 우리가 짐을 지는 것도 새로운 차원으로 서로 구제와 헌신이 아름답게 정령이 되고 그 안에서 녹아서 피어나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에서 이러한 모든 것이 안에 함께 들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이 성취하기 위해 바로 이렇게 서로가 짐을 져야 한다. 그래서 그런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겠는가? 바로 우리교회 다락방, 청년들은 GBS 모든 주일하교 등에서 모든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 아름답게 서로 짐을 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 핵심이 되는 주일예배 말씀으로 선포되는 말씀과 그 귀한 말씀을 받아서 실천하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말씀으로 우리가도 도전받고 한주가 살아가게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고 권면하고 바로 잡으며 서로 짐을 지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주님의 법을 성취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설교로 인해서 바로 다락방으로 준비되고 준비된 것이 서로를 격려하고 말씀으로 결단하고 변화받기를 소망하며 나아가고 있다. 실천하고 간증하는 아름다운 일들이 우리의 다락방이다. 우리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물론 짐이 무겁고 쉽지 않는 것처럼 천국잔치와 동일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인생들이 모이고 말씀의 중심에서 놓고 몸부림치는 현장이기에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치열하고 때로는 아픔도 있고 때로는 상처가 있기도 한다. 주님은 그래서 자고하지 않고, 교만치 않고 연약한 자를 세우고 사랑하라고 하신다. 자고 교만치 말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한다. 공동체 안에서 해야 한다.

 

*3절에,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랑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말고,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의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인도하며 책임이 많은 분들만이 아니다.

 

*6절에,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말씀을 인도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길은 성령 충만으로 서로 마음을 합하여야 한다. 바로 다락방에서 다른 사람에게 권면 격려하고 나를 돌아보고 함께 기도하여 서로 섬기는 일들이 바로 다락방에서 일어나야 한다. 서로 존중하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길 원하신다.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라. 소그룹 공동체를 통해 주님의 법을 우리가 성취해 가길 원하신다. 가장으로서, 어머니로서 자녀로서 지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너희가 서로 서로 짐을 지라하신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서로 짐을 져야한다. 울고 웃으며 결단하여 온전하여 지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짐을 져라. 감사함으로 하기를 소원한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짐을 서로 지는 것이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듯이 우리가 그 짐을 서로의 짐을 지고자 하면 오히려 가볍게 하실 것이며, 인생의 모든 짐들을 현저히 축소시켜 주실 것이며, 무거움을 없이 하여 주실 것이다. 그 고백으로 이 명령을 지켜 나아가야 한다.

 

요약

다락방마다, 소그룹마다 생명의 말씀과 은혜를 우선으로 삼아서 서로 각각 짐을 지고, 순장님의 인도함을 순종하고, 서로 격려와 사랑 안에서 보듬어 주고, 연결해 가며, 연약한 부분을 기도로 돕고 서로 헌신하며 섬기며, 교회에서도 예배와 찬양으로 말씀을 받아 더욱 주님을 닮아가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각각 짐을 지고 겸손하게 주님을 경외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자기기만과 자신을 남과 비교하려는 심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는 내적인 성찰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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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3월 24일)
제목: ''부족해도 괜찮아요''
말씀: 시편 34:9~10절
설교자: 이의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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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4:9~10)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이 생수의 위쪽에는 비워져 있다. 약간의 비워져 있다. 밀폐된 물은 병이 약간씩 비워져 있다. 이 생수 안을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병을 잡을 때는 살며시 잡아주세요. 첫 개봉 시에는 물이 넘칠 수 있으니 주의해주세요라고 쓰여 있다. 이 물이 넘치지 않도록 적절하게 좀 부족하게 넣는다. 부족한 것은 여기까지가 좋다. 우리 인생은 여기에서 1%라도 아래로 내려가면 고통스럽고 힘들다. 뭐 그까짓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당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견디어야 하는 사람은 힘들고 매우 고통스럽다. 인간에게 힘들고 압박하는 단어가 있다. 완벽이라는 단어이다. 옆 사람을 보라 완벽한가를.... 완벽한 사람은 늘 완벽하기 위해서 힘들게 산다. 온전함이란 말씀으로 요즘 우리는 붙들고 산다. 온전함도 완벽함과 같은 단어이다. 이 온전함이란 완벽을 요구하는 단어 같아서 좀 무거운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온전함을 사모한다’ 로 바꾸어 쓰면 참 많이 다르다. 이 온전함을 사모한는 것은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성장 계획이다. 이것이 바로 온전함을 사모하는 것이다. 온전함을 사모하는 것은 부족함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이 부족하고 연약한 그 지점부터 온전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함을 사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리이다. 지난주일 온전함 시리즈의 담임 목사님 말씀 가운데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고 말씀하셨다. ‘몸이 없으면 내가 없다’라고 하셨다. 교회는 조직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위한 유기체이고 교회가 생명력 있는 유기체가 되기 위해서는 잘못된 개인주의를 뛰어 넘어야 한다고 하셨고,. 나 때문에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잘못된 개인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셨으며,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대상들에 대하여 왜 빚진 자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이다. 그들도 역시 미래의 지향적으로 한 몸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대하여 빚진 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마음속에 굉장히 큰 은혜였다. 함께 울고 함께 웃을 때,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비로소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강한 공동체 온전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명력 있는 유기체가 되기 위해서 잘못된 개인주의를 벗어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유기체로 되어야 한다는 점,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 안에 부족한 것들을 온전함으로 잘 채워가고 성장시켜가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부족함, 제일 잘 사용하는 단어가 있는데 얼굴 자체가 부족하다. 남들이 있는 머리카락이 나는 없다. 전에는 스트레스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카락이 없어도 하나님은 머리카락 대신 내 안에 하나님은 다른 것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 부족함은 생각해보면 시디푸스의 바위와 같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코린트의 왕. 제우스를 속인 죄로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그가 밀어 올리는 바위는 산꼭대기에 이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그는 영원히 이 일을 되풀이하였다고 한다). 내가 부족함을 채운다는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부족함이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너 부족한 것 알지?’ 한다. 언제까지 부족함의 바위를 옮기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겠는가? 온전해지기 위해서 내안에서 가장 먼저 이 온전함이 시작되어야 한다. 온전함을 사모하는 나의 이 부족함, 내안에 있는 이 부족함을 믿음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가야 좋을지를 시편 34편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나눈다.

 

I. 나 원래 참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 (나 원래 그래 어쩔?)

- 부족하다는 것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부족한 것은 당연하다. 내가 부족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 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부족하지 않다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환자라고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부족함의 또 다른 표현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참아야 하는 일들과 견디어 내야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원하는 순간 즉시, 바로, 그 모양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인생은 인생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펼쳐지지 않았던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요셉과 다니엘과 다윗이다. 이들은 원하지 않는 현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다. 요셉이 팔려가고 종살이를 하면서도, 다윗이 사울을 피해 유랑자로 평생 살면서도 12년을 살았고, 또 포로로 끌려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았던 다니엘도, 내가 왜 이런 상황을 경험해야 하는지를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믿음의 사람들, 요셉과 다윗과 다니엘은 누구나 갖고 있는 자신의 인생의 한계와 수많은 현실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족감을 열등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의 부족함을 세상을 향한 불평과 원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부족함을 기도의 영역이라고 언제나 확인하며 하나님께서 한 걸을 더 나아갔던 믿음의 삶을 살았다. 내 부족함을 인정하는 일에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용기가 필요하다. 창피한 것은 창피하다. 머리카락이 없다고 자랑하는 것은 좀 뻔뻔한 것이다. 그러나 괜찮지 않다. 창피한데 창피하지 않은 척하려고 그냥 나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면, 더 부끄럽다.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편하게 사는 것이 좋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편하다. 극복하고 벗어나는 것이 용기이다. 노력이 시도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9절에,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주를 믿는 성도들아 그를 경외하여라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새 번역 성경)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사울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다라는 것이며 하나님 한 분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내 생각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집중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경와 하는 자 되길 축복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내 부족함을 온전케 하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믿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들을 괜찮다라고 하신다.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일들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순간이 우리에게 펼쳐져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기 원한다면, 하나님만 생각하길 원한다.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얼굴 미인 한동대 이지선 교수이다.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렸지만 그녀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에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 전에 보지 못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그러진 얼굴과 옛 얼굴과 바꾸고 싶지 않다고 한다. 더 좋은 것을 하나님이 주셨기에 본인의 외모보다 지금이 더 좋다고 말한다. 우리 예배 가운데 부른 ‘나 가진 것이 없으나’ 찬양곡도 그렇다. 송명희 시인, 어려서부터 장애로 태어난 자이다. 가사를 보면, 은혜롭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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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양으로 눈물이 났다. 이 송명희 시인은 공평하신 하나님은 남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주시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부족함 없는 믿음과 그 은혜를 자신에게 주셨다고 고백한다. 여러분도 삶에 부족함이 있는가? 그게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실지로 그 부족함을 채워주신다. 기도하면 더 커질 수 있지만 기도하고 견딜 수 있는 믿음과 생각을 주신다면, 부족함의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음을 믿는다. 내 인생의 부족함을 깨닫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이루지고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고백하라. 나는 부족합니다라고,,,, 하나님은 나는 안됩니다라고 하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실 것이다. 모든 부족함이 없게 해주신다고 하실 것이다. 사울은 가장 부족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부족했던 다윗도 가장 온전한 사람이었다. 내 삶의 주권자인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

▷“나 원래 참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부족한 상태로 머무른 것이 아니라, 더욱 내가 온전함을 사모하겠다는 내 결단의 시작이다. 이 결단으로 온전한 사모함의 시리즈를 계속 은혜 받아 더 온전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성도가 되길 바란다.

 

II. 부족해도 괜찮아요, 주님을 찾으면, 모든 좋은 것들로 부족함 없이 채워진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다. 다윗이 이야기 한다. 내가 사자와 곰도 죽였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저 이방 블레셋 사람을 못 죽이겠냐고 한다. 사자와 곰처럼 반드시 그를 죽인다고 한다. 한 사람도 골리앗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벌벌 떠는데 심부름 왔던 그 어린 목동이 이야기 한다. 저 버릇없는 놈이라 하면서 어디서 하나님을 욕하고 다니냐고 한다. 혼자만 골리앗을 깐다. 돌았다고 한다. 양이나 기르는 아이가 하고 비하한다. 결국 그러나 죽인다. 골리앗을 죽인다. 이것보다 더 액션이 있나? 이것보다 더 반전은 없고 정말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그런데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사울이 보낸 모든 일들을 잘 해내기도 한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정 충실하고 성실한 다윗은 사울 왕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고마운 신하가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가 된다.

 

*사무엘상 18:29절에,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골리앗을 죽인 이후 블레셋과 전쟁이 또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 다윗은 사울이 기분 나쁘게 한 번 더 강력한 승리를 이루고 만다. 인생에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다. 인생에는 하나님이 필요한 두 개의 순간이 있다.

그 첫 번째는 고난과 고통이 나를 에워싸고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칠 때, 정말 죽겠다고 생각이 들 때이다. 솔직히 기도와 찬송이 안 되고 뭔가 나를 압박하고 짓누르는 것 같다.
둘째는 내가 노력하고 기대했던 것들이 이상으로 모든 것들이 잘 될 때이다.

이 두 상황은 다른 것 같은데 똑같다는 것이다.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하나님이 필요하고 잘 될 때에는 나를 잘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도록 민감하게 하나님 뜻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하다.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두 가지 일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윗의 인생에 골리앗을 이길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승리가 이루어지는 순간 자신이 죽을 때까지 다윗을 포기하지 않는 추격자가 생긴다. 예상치 못한 인생의 복병이 생겨난 것이다. 다윗이 왕으로 섬기는 바로 사울이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이 아말렉과 전투하는 과정에서 승리한 후에 전리품을 취하는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불순종 하는 사울을 책망하시면서 사울 왕을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신다. 여화와의 말씀을 버리니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했기에 이제 하나님이 인정하는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회셨다는 것은 노아의 홍수 때에 쓰여 진 비슷한 표현이 여기에 쓰였다. 사울이 이때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자기의 부족함을 잘 다룬다면 위기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의 자리로 옮겨갈 수 있을 텐데, 무너지기 시작한 이 상태를 더 깊이, 더 파괴적으로, 더 인본주의적으로 풀어가고 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 생각과 자기 마음을 따라 가다가 결국 단창을 가지고 다윗을 향하여 광야에 사로잡혀 던져버린다. 다윗은 그 일로 도피를 시작한다. 사무엘상 21장이 바로 오늘 이 시편 34편 9-10절의 배경이다. 사울이 창을 피해 도망치는 가운데 바두왕 아기스 앞에 갔다. 그때 사울이 다윗을 향하여 창을 던졌다는 근거가 되는 다윗이 만만이요, 사울이 천천이라는 말이 다시 듣게 되면서 이 아기스 앞이나 사울 왕 앞과 다를 바 없다는 상황을 파악한다. 그 순간 대문짝에 그적거리고 침을 흘리고 아주 제대로 미친 행동을 시작한다. 아기스 왕은 미치광이라고 비난한다. 성경에서 이보다 더 부족한 상태로 추락할 수 있을까? 극단적인 상황을 놓고 보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든 곡식들이 다 사라졌을 때에, 오늘은 네 자식을 먹자라고 하는 상황들을 보면, 아무도 돕는 사람도, 함께 하는 사람도 없다. 다윗은 미치광이 같은 행동을 하고 겨우겨우 빠져 나온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극단적인 부족함의 상태, 나 홀로인데, 나 홀로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미치광이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 절망 중에 더 큰 절망의 상태가 된 것이다. 그 순간에 다윗은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그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얼마나 찾았을 것인가? 더 간절하게 더 크게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 찾았겠는가? 아기스 왕 앞에서 아무도 도울이가 없었다. 거대한 골리앗 앞에 선 그 순간은 아무것도 아니었어도 이 아기스 앞에 있는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미치광이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엄청난 모멸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아둘람 굴로 가게 하신다. 여기에 400명이 다윗에게 주워졌다. 다윗은 이 아둘람 굴에서 큰 소리로 외친다. 젊은 사자들은 먹이를 잃고 굶주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찾는 자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축복한다. 사람이 많고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은 다윗을 홀로 있게 하지 않으셨다. 골리앗의 전투 앞에는 모두 앞에서 싸웠다. 다윗은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이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은 인생으로 전환된다. 돌 하나 던지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사백 명을 주셨다. 내 인생을 하나님 밖에 없다고 고백하면, 내 인생의 부족함을 하나님께서 직접 채우신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듯이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 이것이 온전함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인생의 믿음 생활의 방식이다. 부족해도 괜찮아요, 주님을 찾으면 가득 채워진다.

 

III. 부족해도 괜찮아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삶의 순간순간들이 내 인생의 계획을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 과정이다. 이것이 자기 인생을 바라보는 성도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다윗이 10년간 사울의 추격을 받는다. 사울이 죽을 때까지 다윗을 핍박한다. 이 핍박을 다윗은 불평하거나 대들지 않고 잘 견딘다. 시편 57편에 보면, 아굴람 굴에 있을 때에 비탄한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시편 57:2절을 보면,

 

*시편 57:2, 2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다윗은 이 고백을 통하여 당신의 그 십년을 지낸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듣고 있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사람이 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순한 표현으로 10년을 견딘 것이 아니다. 사울이 추격하는 위험한 순간순간도, 다윗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엔게디 광야에서 사울의 옷자락을 베고 나서 다윗의 마음이 찔렸다고 하는데 그 말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대로 사울을 다루어가고 계시고 나를 향한 계획들을 이끌어 가시는데 감히 내가 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일에서 다윗은 괴로워한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하나님의 목적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 다윗이 그 사건을 알게 된 것은 사무엘상 16장에 나타난다.

 

*사무엘상 16:13절에,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 성령께서 그날 이후로 다윗을 사로잡아 감동시켰다. 다윗을 감동시킨 것이다. 자신이 놀라고 두렵고 힘든 순간, 눈물을 흘려야 하는 그 고통의 순간에 왕이 된 이후에도 그 파란만장한 그 수많은 사건들 속에 다윗이 어떻게 평정을 이끌어 갈 수 있었을까? 여전히 한결같은 믿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었던 다윗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에 놀라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지금 성취하고 계심을 깨닫는다. 내 상황이 어떠하든지... 다윗은 자신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들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삶의 현장에서 확인한다. 골리앗, 블레셋 군대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허약한 사울왕의 추격을 피하고 또 피한다. 도망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이끌 수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다.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어도 자신의 손으로 사울을 죽이거나 해롭게 하지 않는다. 부족하지 않는 다윗이 부족한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어떤 마음으로 도망을 갔을까? 다윗처럼, 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면, 이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우리 인생의 일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서 시편 57편에 이렇게 찬송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이 찬송을 들으면 담임 목사님이 떠오르며 힘 있게 찬송하시는 모습니다.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라고 한다. 다윗은 바울이 말한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소망의 과정을 직접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 등에 오는 단창을 피하기 위하여 시년동안 도망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질 때까지, 하나님의 시간표가 채워질 때까지 견디는 것은 죽는 것보다 힘들었을지 모른다. 소망에 대한 내용을 아무리 분명히 내가 알고 있어도 소망까지 도달하기까지 멀고 험하고 고통스럽다. 암도 그 과정의 아픔과 고통을 당해 보지 않고 그 고통은 모른다. 이 과정을 지나가는 절대적인 믿음, 하나님께 향하고 하나님께만 집중되어지는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찾지 않으면, 부족함이 없는 일을 경험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 아둘람 굴 앞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 한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오늘 두 사람의 인생의 끝이 온전함 사모하는 사람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인생의 끝을 정확히 보여 주고 있다.

1. 사울-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자기 마음을 따라서 사울의 인생의 끝,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날에 함께 죽었다. 다 가졌는데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적인 빈털터리였던 그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2. 다윗-하나님 없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그 인생에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기간은 40년이며, 헤브론에서는 7년간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렸고,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존귀를 누리도록 죽으매 그이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된다.


-나이 많아 늙도록 존귀를 누리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족했지만 언제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이 인생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성경에 담고 있다. 온전함의 시리즈를 한 주 한 주, 지나갈 때에 우리의 인생의 끝의 결론은 다윗과 같아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좀 부족해도 괜찮다. 왜냐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고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 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심을 믿어야 한다. 온전함을 사모하여 지치지 않고 힘 있게 달려가야 한다.

 

♣요약
우리가 온전함을 사모하여야 한다. 우리는 죄인이고 부족하다 우리의 영혼의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듯이 내안에 부족함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정하고, 주님을 더 찾아야 한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찾으면 모든 좋은 것들로 채워주심을 믿고, 평생 흔들림 없이 살아가야 한다. 부족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지금도 이루어가시고 계심에 감사하며, 다윗과 같은 믿음으로 어떠한 상황도 극복하고, 온전함을 사모하여야 한다. 부족한 우리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그의 존재의 아름다움과 온유하심 그리고 그의 섭리와 은혜의 후하심과 자비로우심이 다 포함된다. 그는 우리도 그와 함께 하나님을 구하고 그를 섬기며 계속해서 그를 경외할 결심을 하도록 권유한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즉 "그를 경배하고 모든 일에 마땅히 그에게 행해야 할 너희의 본분을 자각하라.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지 말고 그를 경외하고 찾으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찾도록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여기서 그렇게 하는 자들은 이 부족한 세상에서도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그들은 영적 생활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은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생활에 있어서도, 그들은 생활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부터 받아 누릴 것이다. 곧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그들을 좋은 음식으로 기르실 것이다. 그들이 그 이상으로 바라는 좋은 것이 있다면 무한하신 지혜 자께서 선히 여기시는 한 그것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다른 것으로 보충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절하시는 것이 있을 때라 해도 그것 없이도 족하게 지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바울은 자족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풍족히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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