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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1년 3월 20일)
제목: ''영가족 하나님의 공동체''
말씀: 마가복음 2:1~5
설교자: 천동원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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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1~5)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천동원 부목사님
-우리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인생의 함께 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가족중 경사가 있으면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가족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비단 가족만이 아닌 주위 사람들도 내 일처럼 기뻐하며 함께 동참하게 된다. 물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일도 간혹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같이 이웃을 곁에 두고 있다면 함께 즐거워할 줄 믿는다. 역으로 가족 중, 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 역시 당사자만의 일이 아니다. 가족 모두가 고통스럽다. 육신의 질병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가족이 있을 경우 그 가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가정에 웃음기가 없다. 침울하며, 그 집안의 공기조차 무겁다. 함께 아는 이웃들조차 침통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중풍병자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본문은 이 중풍병자가 어떤 고통을 당했고, 또한 이 중풍병자가 얼마만큼 견디어 왔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위중한 상황임에는 틀림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중풍병자가 절실히 만나야 할 사람은 의사였다. 자신의 질병을 치료할 명의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찾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열두 해 혈루 증 않는 여인이 많은 의사를 찾는 것처럼, 있는 가산조차 다 허비했던 그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간 것처럼 이 중풍병자 역시 그랬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이 중풍병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글 메어다가 예수님께 나올 만큼 절박하고 위중한 상황이었다. 본문 말씀은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에서 동일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이다. 마가복음은 이 사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마태 누가에서 표현하지 않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던 사람들의 명수가 언급이 된다. 요약하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평소에 중풍병자를 알고 지냈던 그를 침상에 누인 체 메고 온 것이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과 문 앞에 들어설 자리도 없는 것이다. 그때 생각한 것이 네 사람이 이 중풍병자를 침상 채 지붕으로 옮겨다가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데려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그 질병을 고쳤을 뿐 아니라 죄 사함과 구원의 은총까지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 3절에 보면,

 

3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는 일에 집중하고 모든 이들이 공동체를 귀히 여기시며 공동체 은혜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공동체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되신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서로 사랑하시고 서로 교제하시며 서로 의존 하시고 서로 영광을 받으신다.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고 계신다.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를 보면,

창세기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는 엘로힘은 복수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한다.

 

창세기 1:26-27절에-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공동체이신 하나님은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과 모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발견하게 오늘 치유사건은 공동체이신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믿음을 통해 일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바라고 있다. 이 본문을 접할 때 교회를 떠올리게 된다. 이 중풍병자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믿음의 영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가족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하는 가족 구성원 같은 영적인 가족, 영원한 가족이며 영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담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영 가족’이란 말씀이 참 들으면 들을수록 은혜가 된다. 교회는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가족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형제, 자매라는 단어가 130여 차례 이상 언급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보시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영 가족이다. 본문에서 중풍병자를 데려왔던 그들이 규모 적으로 교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구체적으로 언급된 네 명의 사람들은 우리의 다락방처럼 느껴진다. 다락방에서 영 가족들이 모여서 깊은 문제와 고민을 함께 나누며 세워져 나가는 모습이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8년째 사역을 하고 있는데, 그동안 사랑의 교회의 형제, 자매의 삶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어떤 집사님의 예를 들어본다.

순원 집사님의 한 분이 허리통증을 24시간 앓았다고 한다. 통증이 시간적 주기가 있는데 그분은 지속적으로 통증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도 고치지 못한 일이어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순장님의 권유로 이 순원에게 특새를 권면 했다고 한다. 먼 거리를 두고 특새에 참여하고 순종하였다. 그 통증을 참으면서 교회를 오가며 버스와 교회에 도착까지 4시간을 보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순종했다. 순종하여 특새에 참여한 것이다. 마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순원들이 함께 부축해서 특새에 참여했다. 이 집사님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것을 현장에서 기자가 찍은 것이었다. 순원들이 부축하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특새 레터지에 소개된 것이다. 장면을 보니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이 순원과 함께 특새를 완주를 한 것이다. 결국 특새 후에 부활절도 참여하였는데 담임 말씀 앞에 통증이 깨끗이 사라졌다고 한다. 훗날 고백하기를 통증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했다고 한다. 고통 속에 지낼 때 차라리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랬던 집사님이 주일 말씀을 듣고 이제 그 통증이 깨끗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감격이었겠는가! 어찌보면 그 중풍병자를 침상 채 메어 지붕을 올라갔던 무모했던 네 사람처럼, 다락방 순원들이 순원집사님을 모시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마치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던 그 은총이 손길이 동일하게 이 순원 집사님에게 내려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 가족을 통해 은혜 나눔과 간증을 하게 하심과 본문의 공동체를 증명한 것처럼, 우리 또한 함께하는 믿음의 영적인 영 가족을 통해 함께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 담임 목사님.
우리는 영 가족이다. 영적 가족이다. 우리는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할 영적 가족이다. 부부가 소중한데, 신앙 가진 부부가 더 소중하다. 왜냐면 신앙을 가진 부부는 가끔 다투지만 잠시만이다. 천국까지 같이 가기 때문이기에 서로 잘하게 된다. 다투면 안 된다. 이런 생각하면 서로 잘해야 한다. 혼자서 제자 반 7개 하면서 주일 설교 다하니 너무 피곤했지만, 은혜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힘든 시기가 있었다. 우리는 영원한 영 가족이 가슴을 치게 했다. 오늘 토비새 나온 자들은 영적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내일은 교회 론에 대해서 말씀을 한다. 코로나 이후에 돌파할 수 있는 마음 주시길 소망한다. 지금까지 21일간 65만 명이 국내 인구 대비 1프로 좀 넘게 백신을 맞은 것 같다. 코로나가 속히 종식 되에 올바른 예배를 드리기를 기도하자.

 

♣요약
그리스도께서 얼마 동안 변방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시다 그의 본거지인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곧 사람들이 그를 찾아 왔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1,2절). 왕이 있는 곳에는 알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을 만큼 그리스도를 알현하려는 무리들의 수효가 많아서 그들을 모두 영접할 만한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계신 집으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매우 복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아마 그들 가운데는 병만 치유 받으러 온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고 또 단지 그의 모습을 보려는 호기심 때문에 나온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모두 모이고 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 중엔 평일에 집에서 도를 전하는 것이 시간과 장소를 적당하게 선택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전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병든 자는 중풍병자로서 전혀 치료가 불가능했으므로 마치 시체처럼 침상에 실려 네 사람에 의해 운반되었다. 이렇게 운반되어야 할 정도로 그 중풍병자는 가련했지만 그를 침상에 실어서라도 운반한 것은 그 운반한 사람들에게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정 많은 이들, 친척 또는 이웃들은 그 중풍병자를 그리스도에게 한번만이라도 데려 갈 수 있다면 더 이상 그를 운반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당히 힘든 일이지만 중풍병자를 그리스도에게 데려 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낼 정도로 열심이었다. 이 집은 다락방이 없는 단층집으로 지붕이 올려졌다. 그래서 중풍병자를 운반해 온 사람들은 문 앞에 모인 많은 무리 때문에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모든 방법을 동원한 끝에 그 중풍병자를 그 집 지붕으로 들어 올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중풍병자의 침상을 끈에 매달아 그리스도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집 안으로 내렸던 것이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믿음과 열심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에 의하면 그들은 열심 때문에 그냥 가지는 않았을 것이며 또 축복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가게 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저희의 믿음이란 그들이 중풍병자를 데려온 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병든 자를 데려왔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했다. 참되고 강한 신앙은 다양하게 작용하여 이성의 결함을 극복하기도 하고 또 감각의 결함을 극복하기도 하므로, 어떠한 믿음으로 나타나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실 것이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사용된 '소자'라는 호칭은 매우 다정한 표현이다. 그리스도는 참된 믿음을 지닌 자들을 자기 아들로 삼으시기 때문에 중풍병자라도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매우 간절했으므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죄의 결과로 병이 생겼다는 생각을 없애고 병의 원인인 죄를 깨닫게 하여 죄를 용서받는데 더욱 관심을 쏟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병에서 회복된 것이 죄의 용서를 받아 비롯된 것일 때 그것은 진실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결과를 없애는 길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데 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모든 병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므로 결국 병이 치유되거나 그 병의 상태가 호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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