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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예배(주후 2021년 3월 31일)

제목: 십자가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말씀: 로마서 3:23-26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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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지난 주 말씀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의 모든 것이 당신(내)안에 있다.

이것이 나의 비밀이다. 당신의 비밀이다. 내 안에 금광맥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한다. 원래 비밀은 나만 갖는 것인데 서로 나누면 좋다. 성도의 온전한 내안에 계신 예수님의 비밀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이 비밀은 나눌수록 커진다. 지난 주 액션 플랜으로 나눈 고난 주간 묵상 집을 통해 내 안네 계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비밀을 묵상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온전한 인격의 열매를 맺는다는 욥기의 말씀으로 묵상 집을 가지고 묵상을 했다. 이 묵상 집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놀랍고 온전한 은혜를 누리기를 바란다. 성도라면 누구나 십자가에 대해서 익숙하다. 이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교회에도 가정에도 자동차 안에도 어디에나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많이 있다. 십자가를 보여주면서 뭐가 보이냐고 묻는 게 좀 이상한 질문 같지만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지 오늘 본문 로마서 3장의 말씀과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상징인 이 십자가를 통해서 오늘 함께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먼저 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십자가는 고대 중동 베네키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제국에서 널리 사용했다. 처음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노예들을 나무에 묶어놓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한동안 먹지 못하도록 체벌을 주는 용도로 사용했다. 근데 이것이 로미 시대에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폭도들을 처벌하는 용도로 쓰다가 처음에는 단순에 나무에 묶어 놓은 용도였다. 그러다가 조금 더 고통을 주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잔인하게 십자가 발전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된 것이다.

 

로마시대 십자가 처형은 너무나 잔인해져서 로마 시민들에게는 사용되지 않고 노예나 피 지배자들에게 사용되었다. 1세기 유대학자 요세프스에 책에 의하면 유대 1,2차 항쟁 때에 하루에 매일 500명의 유대인들이 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나갔다고 한다. 먼저 죄인들의 주요 장기인 심장과 폐와 뇌 등을 직접 손상시키지 않고 즉시 사망하지 않게 해서 그 고통을 오래 느끼게 했고 손목과 발목에 못을 박아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십자가 나무에 수직으로 매달려서 장시간 있게 함으로써 몸 아래와 몸 위의 순환이 잘 되지 않아서 산소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과 근육 결련을 겪게 된다. 이 고통으로 십자가에서 쇼크가 와서 기절하고 또 깨어나고 반복을 하다가 결국에는 호흡곤란으로 질식사를 한다. 기절했다가 깨어났는데 아직 죽지 않은 자신을 보며 깊은 절망에 빠지게 하는 그 고통스러움이 십자가 위에는 있었다.

이 끔찍한 십자가형은 4세기 313년 로마 콘슨탄티누스 황제 때에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사용되다가 313년 기독교의 공인으로 공식적으로 십자가형이 폐지되었다. 그 후 70년이 지난 이후에 380년, 데오도시우스 1세 때에 데살로니가 칙령이라는 것을 통해 기독교가 로마에 국교가 된 이후에서 초대교회까지 예수님의 고난의, 승리의 상징으로 공경의 대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중세시대 때에 루터의 종교개혁에 의해서 우상화되고 형식화 된 십자가 공경이 폐지되고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의 상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상징하는 모습으로 사용되어져 왔다.

 

▷이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 이 십자가와 오늘 본문을 오버랩을 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I. 십자가를 통해서 먼저 보이는 것은 죄이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처형하는 형틀이다. 십자가 맨 위에는 십자가에 달려있는 사람의 죄명이 적혀있는 죄 패가 달려있다.

*마가복음 15장 26절에 보면,- 26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예수님도 그 십자가위에 죄 패가 달려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있는 죄 패는 예수님의 죄가 아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을 보면,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렇다면 누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졌는가? 바로 우리, 나의 죄 때문이다.

 

오늘 본문
*로마서 3:23절 -2
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선언처럼 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죄, 태어나면서 가진 원죄, 그리고 살면서 지은 모든 죄들을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은 죄가 그저 벌금 정도 낼 정도 죄라면, 아니면 교도소를 1-2년 정도 다녀오면 되는 정도 죄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죄를 대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우리의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1:21-31절까지 말씀을 보면, -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서 지은 많은 죄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로마서 1:32절에 보면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사형 온도를 내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을 때에 우리가 우리의 죄가 사형에 해당하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사형 중에서도 극악한 죄인들에게 내린다는 그 십자가형을 예수님이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죄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는데, 잘 다듬어진 고급 목재가 아니었다. 아주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나무였다. 십자가형이 많이 진행될 때는 그 십자가를 어쩔 수 없이 재활용을 했다. 재활용되는 십자가 나무에는 이전에 십자가에 달렸던 죄인들이 피와 땀과 기름과 살점들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마치 예전에 철길 밑에 놓은 버팀복, 침목이라는 것이다. 그 침목은 물에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 나무채로 시커먼 기름으로 범벅을 해놓는다. 마치 십자가 나무는 죄인들의 피와 땀과 기름과 살점들로 범벅된 그런 나무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배어있는 그 악취와 그 더러운 것들이 바로 우리의 죄이다. 그 죄는 철도의 침목처럼 아무리 닦아도 닦여지지 않고 아무리 깎아내도 스며들어 있는 그 나무처럼 십자가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이다. 그 죄의 나무를 예수님은 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셨다. 그리고 그 위에 누우시고 못 박히시고 달리셨다. 그래서 십자가에 배어있는 우리와 모든 사람의 죄가 보인다.

 

II. 십자가에서 보이는 것은 또 무엇인가?- 죄로 찌든 나무에 누워계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기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십자가에 위에 켜켜이 쌓인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십자가에 누우시고 달리시고 돌아가셨다. 오늘 우리가 읽은 25절을 보면

 

*로마서 3:25절 본문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그 피는 구약제사에서 쓰인 화목제물로 쓰이셨다. 화목제물이란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인간 대신,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해서 용서받게 하는 임시적인 속죄에 사용되는 제물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그 찌들은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죄를 가리기 위해서 그 나무 위에서 제물인, 화목제물로 피를 흘리신 것이다.

 

*요한복음 1:29절에 보면, 세례요한은 이렇게 외친다.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을 살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 사역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사역임을 세례요한의 입을 통해 선포하게 하신 사건이다. 구약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지기 전에 임시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간과하시는 방법이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 본 척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나무에서 흘리신 피는 그저 십자가에 스며들고 찌들은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가려주시는 수준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 온전히 스며들어 죄의 나무가 아닌, 보혈의 나무가 되게 해주신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에 처음은 죄로 찌든 나무가 보이지만,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 때문에 그 나무의 누우시고 자신의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그 나무를 완전히 적셔 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보인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계속 달려 계시시지 않는다. 모든 사망의 권세를 깨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신 주님이시다.

※천주교의 십자가는 고통 받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다. 그 십자가를 ‘십자보상’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 십자가를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묵상하며 슬퍼한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죽으신 십자가에 몸이 없다. 그것은 예수님이 고통을 넘어 부활의 승리의 기쁨의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III. 십자가에서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자신이다.
-십자가의 죽음에는 예수님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인인 내가 의롭게 되었다.

본문 *로마서 3:26절에 보면, -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속물로 내어 주셔서 자기의 사랑과 공의를 만족하실 뿐 아리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 분 혼자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인 나의 죽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은 과거에 나는 살아있고,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 영원한 죽음의 대가를 대신 받으셨다라는 의미이다.

 

*로마서 6:6절에 보면,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2:20절에 보면,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내가 구경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옛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못박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힘입게 되는 것이다. 이 고백을 알게 하는 찬양이 있다.

 

♬~‘주 보혈 날 정결케 해’!!~~ 이 찬양에는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어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나 주와 함께 살리라~~

 

▷십자가에서 보이는 세 번째 나의 모습은 예수님 손에 얹어져 있고, 예수님 발에 나의 발이 얹어져 있고, 예수님 옆구리에 나의 옆구리도 얹어져 있고, 예수님의 가시관 그 자리에 나의 머리도 같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 포개어져서 나의 예전의 나는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내가 된 것이다. 여기 오늘 로마서 3장의 말씀에서 또 우리에게 은혜와 희생과 사랑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통해서 세 가지를 살펴보았다.

▷ 먼저는 십자가 위에 켜켜이 쌓여있는 나의 죄, 그리고 아무도 그 위에 눕고 싶지 않은 그 위에 누우신 예수님, 그 예수님 위에 누워있는 나, 이 세 가지가 십자가에서 보이는 듯하다.

 

*십자가는 과거형이면서 현재형이면서 동시에 미래형이다.

1. 과거형의 십자가는 나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2. 현재형은 십자가는 삶의 거룩을 위해서 매일매일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가는 온전함의 십자가이다.
3. 미래형의 십자가는 영적 고봉에서 최후 승리를 붙잡아야 하는 승리의 십자가이다.

-이 고난 주간, 우리 주변에서 어디에서는 볼 수 있는 이 십자가를 통해 이전의 나의 죄, 그 위에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 그 위에 함께 못 박힌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새기는 삶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를 통해 내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지금도 나를 온전함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경험하는 고난주간이 되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 주변에 많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고 십자가를 보아도 떨리지 않고, 십자가를 봐도 내 마음에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 십자가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를 깊이 새겨봐야 한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켜켜이 쌓여있는 나의 죄와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그 십자가 위에 누우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나의 손과 발을 포개어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보게 되고 나를 보는 자 되어야 한다. 이 십자가로 인해 나의 가장 존귀한 비밀이 되고, 이 비밀로 인해 나의 삶 가운데 모든 어려움과 고난들을 거뜬히 이길 수 있는 힘을 갖도록 기도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십자가가 비밀의 병기가 되어야 한다. 고난주간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무에 쌓인 모든 사람의 죄가 범벅이 된 십자가를 지시고 누우시고 달리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손과 발과 그 위에 함께 누운 나를 발견하는 자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묵상할 때 나의 죄를 완전히 해결해 주신 과거형의 십자가, 죄와 피흘리기까지 온전함을 이루게 하는 현재형의 십자가, 완전한 승리의 깃발로 붙잡을 미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순종으로 이제는 내 안에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입고 나올 의를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 이 말은 곧 인간이 최고 목표가 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마치 사수가 표적을 맞추는 데 이르지 못하고 달리는 선수가 상을 얻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이르지 못하게 됨으로 상을 얻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철저한 실패자가 된다. 이 사실을 좀 더 생각해 보면

첫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이런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이름을 더럽힌다.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앞에서는 무죄를 자랑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려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범죄하였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잠잠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수가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셋째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영광의 시작인 칭의에 이르지 못하고 사람에게 입혀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인 성화에 이르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흠 없는 결백으로 천국에 이를 수는 없다. 그 길은 막혔다.
하나님께서는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우심을 동시에 나타낸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속하려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삼으셨고, 동시에 의로우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허용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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