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1~11절)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
코로나 확진자 나온지 1년이 되었다, 신간표지가 이 포스터이다. 말 그대로 팩트보고이다 코로나로 자영자가 힘들었다. 심지어 오랜시간 투병하다 가족의 임종 지키지 못한 경우의 가슴아픈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님 스가랴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다.
♣요약 주일학교가 말씀 자본, 기도자본, 기쁨 자본을 온전히 물려받아서 다음세대를 강력하게 이어가며, 영적 재생산의 전초기지가 되고, 주일학교가 혼탁한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캠퍼스선교사의 심장으로 영적 장벽을 돌파하여 다음 세대에 선교정책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내용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허탕만 치고 피곤에 지친 상태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다. 인생은 이처럼 자신 있는 분야에서조차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주님은 이럴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가장 귀하고 값진 일에 우리를 불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얄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삶의 심오한 차원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배에 가득히 차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만난 죄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베드로의 반응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사건들은 초점을 예수의 구속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하셨고, 절망의 인생에게 큰 용기를 주셨으며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수요예배(주후 2021년 1월 20일) 제목:"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는 방식(方式)" 말씀: 누가복음 18:23-27절, 19:1-7절 설교자: 박지웅 부목사님 ---------------------------------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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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20대에 가장 중요한 고민이 있을 시기이다. 그런 고민이 중요하기에 인생의 문제를 나누려고 한다. 말씀을 풀어 이해를 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만나주시는 것인가를 알아본다.
♣요약 삭개오에게 부르시면서 예수님이 특이한 표현을 하나 하신다. 이해되지 않는 말이 있다. 그냥 내려오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고 하시는데, 삭개오는 급히 내려온다. 삭개오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만 계시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를 덮어 싸듯이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자가 온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신다.이 마지막 반을 보고 그는 무너진다. 이것이 왜 중요한 것이냐면,삭개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존감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자존감의 기초란 삭개오가 이제부터는 누구앞에서도 이제는 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자기가 살아온 더러운 인생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돈 많다고 뻐길 수 있었지만 그 마음 속에는 이 자존감이 땅바닥이었다. 예수님이 찾아와 주신 삭개오를 보면,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이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방법이다. 우리의 영혼 속에 인도하셔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큰 기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 마음 가운데 삭개오처럼 그 마음이 있다면 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기적을 행하고 계심을 믿는다. 이 밤에 주님 앞에 삭개오처럼 달려가는 자 되어야 한다. 간절하게 주님 앞에서 세리의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만이 주인이심을 깨닫고 만나게 되길 소망한다.
(누가복음 18:23-27절)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움을 교훈하셨다. 재물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잊게 만들기 쉽다. 즉 재물이,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를 억제한다는 점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들은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눅19:1-7절 삭개오는 여리고의 조세를 책임지고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며, 그 지위를 이용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이로 인해 동족들로부터는 매국노, 착취자,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는 이러한 문제로 고민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어 뽕나무 위로 올라갔다. 이와 같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신앙은 은혜를 얻는다. 삭개오의 구원 과정을 보면, 먼저 그는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간다.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그의 집에 유하셨으며삭개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
♣토비새(주후 2021년 1월 16일) 제목: "그들을 멈출 수 없다" 말씀: 사도행전 5:29-42절 설교자: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목사님 ---------------------------------
(사도행전 5:29-42절)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 에필로그... 영적 재생산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예수된 자들이 다른 사람을 예수의 제자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과정이기에 멈출 수 없는 인내와 사랑이, 멈추지 않는 지혜와 기도가 필요하다. 영적 재생산은 멈추지 않는 헌신의 결과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영적 재생산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비대면 가운데 잠재되어 있다. 영적재생산을 멈추려고 하는 그 저항이 우리의 삶 가운데 익숙해지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열정을, 낙심으로 바꾸는 우리의 멈출 수 없는 걸음을 멈추게하는 저항이 있다. 사길 기독교 역사 모든 가운데 멈추려고 하는 저항이 동일하게 있었다. 구약. 신약, 오늘날도 동일하다. 우리가 가깝게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이런 저항을 대하고 있는 우리는 영적 재생산의 걸음을 어떻게 힘 있게 감당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시는 은혜의 확신 가운데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 회당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이 멈출 수 없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들을 멈추려고 한다. 왜 유대인들이 이들을 멈추게 하려는지 사도행전 4장 2절에서 보면,
*사도행전 4:2절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영적 재생산의 현장을 싫어하고 있다. 그 유대인들의 회당 안에서 삶을 통해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전하는 그 가운데 다. 멈추지 않고 전하는데 *4:20절에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런 사도들과 베드로는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며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아래 나와있다. *5:29-33절에 보면,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주장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제일 먼저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왕과 구원자로 삼으로셨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증언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메세시 선포 앞에 33절에 보면, *5:33절에 보면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사도들은 멈출 수 없이 전하려고 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멈추려고 하고 몹시 극렬한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다. 왜 이처럼 저항을 하고 분노하는가이다. 이유는 유대인들이 죽음 이후의 삶, 부활, 그리고 죽음이후의 삶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편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내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죽음 이후의 삶과 부활, 구원의 완성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삶 내면에 구원의 완성에 대해서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시편 49:14-15절에 보면, 14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셀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느냐면, 사람이 죽으면, 능력이 스올이라는 죽음의 상태, 죽음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는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을 건져내실 것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를 보면 *이사야 26:19절에 보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 역시 언젠가 우리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은 살려내시고, 시체들은 일어나게 하시고, 땅은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라고 하는 이 죽음 이후의 상태에서 건져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 곧 부활에 대한 분명한 개념은 가지고 있었다. *다니엘 12:2-3절을 보면, 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적어도 구약에 있는 말씀들, 하나님 말씀을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부활과 죽음, 그 부활이 유대인들의 삶에는 먼 훗날 많은 자들을 죽음 가운데 일으켜 내시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역사를 믿는 가운데 베드로와 사도들은 그 일이 지금 한 사람을 통해 일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먼 훗날 일어날 것이라는 그 부활이 지금 예수 안에서 부활이 시작 되었다고 선포하는 그것을 통해 우리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약속하신 그 구원의 시작이 바로 우리 앞에 열리고 있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세계관을 완전히 부정해 내는 지금 사도와 베드로를 통해서 유대인들의 삶 앞에 나타내고 있다. 베드로는 이 복음을 멈출 수 없고, 자기 아집을 내려놓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이들을 멈추고자 하는 것이다. 이 팽팽한 대립이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나의 세계관, 나의 소신, 나의 중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멈추지 아니하면, 내가 복음을 멈추게 되는 그 저항이 얼마나 증폭되고 이런 사람들을 없애고자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저항과 위협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영적 재생산의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 *5:34-39절에 보면,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 굉장히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며, 율법사도 가말리엘이다. 유대인들 가운데 막아서고 멈추서게 하는 말이다.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덕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자이다. 율법 해석사를 보더라도, 많은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말리엘 주장이 신빙성이 있었다. 드다라는 사람, 갈릴리 유다도 기억하지 않고, 따르고 추종하지 않는 사람들과 이 리더를 통해 일어난 사상과 움직임들, 일종의 무브먼트 들이 있었지만, 이들이 죽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고, 이들이 죽으면 그대로 없어지며 만일 이것이 인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작된 것이면 어차피 이들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신학자 요세프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가말리엘의 따르면 백성들에게 굉장히 신빙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상황들 가운데에 굉장한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갈릴리 유다가 죽고 나서 아무 일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할 때에 굉장한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갈릴리 무브먼트를 들어보았는가? 모든 것은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리더가 죽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이 세상의 모든 혁명과 사상은 사라지거나 또 다른 리더를 이어가거나 죽는다. 랍비 가말리엘은 조심하라했고, 드다나 갈릴리 유다도 망한 듯이 하나님이 하시면 무너뜨릴 수 없고 사람이 하면 무너진다고 한다. 리더를 계승하거나 사라진다는 것이며, 부활한 리더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당대 유대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목격한 제자들에게는 멈출 수 없는 복음 예수의 부활은모든 죄 사함을 선포하는 역사적 우주적 사건이기에 택한 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친 백성으로 삼으시는 사랑이다. 지금도 예수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멈춘 적이 없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베드로와 사도들은 왜 유대인들의 사고를 역행하면서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는가? 한 사람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가? 바로 모든 신들을 섬기는 가운데 그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숭배하게 되는가? 그 무브먼트가 죽음을 불사하지 않겠다고 하는가? 전 세계를 움직이는 교회 가운데 일어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모든 역사적 정황들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죽지만, 그만 먼저 다시 살아나심을 보고 경험한 이것을 이들은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교적 신념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종교가 계승하고 나누는 사상이나 정신이 아니다. 주님께서 장차 이루실 그 택한 백성들의 구원의 완성의 시작을 알리시는 것이다. 모든 죄가 사함 받는 우주적 사건이다. 우리가 그 증인들을 목격한 증인들의 증인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증언들을 성령께서 함께 증언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가 택한 백성들을 죽음 가운데 건져내시고 그 심정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은 그 신실하신 사람, 예수님을 살리시고 이 복음을 기뻐하게 하신다. 우리는 그래서 영적 재생산을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멈출 수 없게 하셨기 때문이며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그 증언을 저항하는 자들이 멈추어야 한다.
*5:42절에 보면 -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영적 재생산의 현장이다. 이 멈출 수 없는 복음의 역사 앞에서 우리의 삶을 내어 드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열정을 간구하기를 바란다. 삶 가운데 사랑하고 인내하고 한 영혼을 살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그 영혼을 사랑하고 영적 재생산이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 1우리의 삶과 영적 재생산을 새로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 2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성령께서 이끄시길 간구하길 소망한다. 3. 영적 재생산의 과정 속에서 이 영적 재생산이 이루어지 않는 것, 낙심되고 저항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도 거절 당하셨다. 우리가 거절당할 때, 오직 예수님 한 분을 믿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그리스도는 멈추지 않으시니 능력과 은혜가 멈추지 않으시기에 그 은혜로 멈출 수 없는 주님의 음성을 만나야 한다. 부활의 증거 앞에 모들 삶을 내어놓고, 영적 재생산에 함께 하기를 소망한다. 청년부 안에서 영적 재생산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란다.
♣요약 사도들은 복음을 막는 자들에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사람의 명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상반되는 상황에서 사도들은 인간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성도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가말리엘 바리새인에 속한 교법사로 유대인에게 존경을 받았고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문제를 중재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유명한 랍비 힐렐의 손자로서 진보주의적 견해를 가진 공회원이 되었는데 관용으로 인하여 만인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많은 청년들을 가르쳤는데 사도 바울이 그 문하에서 배우기도 했다. 공회에서 능욕받은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주를 위해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오히려 기뻐했다. 성도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과연 나는 그 고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참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들의 복음 전파는 이들은 공회에서 풀려나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했다. 사도들에게 있어 복음 전파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삶의 중심이고 전부였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바로 이러한 자세가 필요함을 깨달아서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복음의 삶을 살아내고 증거하는 삶에 힘써야 한다. 우리 청년들의 영적 재생산을 오늘 소식을 통해 보고 우리도 진정한 주님의 지상 명령을 가르치고 전파하기를 소망한다. 삶 속에서 선한 능력을 성령님께서 주시기를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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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해서 더할 나위 없이 우리는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 직면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목마르고 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혹여 경쟁 가운데 뒤쳐져서 우리가 실패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가운데는 불안과 두려움이 점점 자라난다. 우리 내면에 불안함이 거대해 질 때마다 우리 안에는 은혜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하나가 쓰러지면, 전부가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또한 무너져버리고 만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고 소망이 되기를 소망한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75세에 고대시대 문명이 가장 발달한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창세기 12-16장까지는 아브라함이 75세에서 86세에 이르기까지 11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뤄낸 신앙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창세기 16장 16절을 보면,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지난 11년의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장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17장 1절을 읽어보니까 갑자기 16장에서는 86세였는데 지금 17장 1절에서는 99세로 껑충 뛰어버렸다.
-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아브라함에 86-99세가 될 때까지 13년의 시간동안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왜 성경에는 13년이란 기간 동안 아브라함의 행적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분명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오늘 창세기 17장을 읽어보면 실재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그 자손의 문제에 대해서 매우 인간적이고 상식적이며, 매우 이성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아내 사라의 몸은 노화로 인해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었다. 아내 사라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약속대로 가문의 계보를 이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육신의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이다.
I. 첫 번째 내용은 – 하나님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이 앞설 때,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는 사라지게 된다.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13년이 흘렀다. 우리가 13년이란 시간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믿음의 자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언약의 자손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 아브라함의 계보 안에 태어나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구원 계보에 포함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아브라함의 생각의 차이점이었다. 이것이 기껏해야 많으면 백년을 사는 좁은 안목을 가진 인간의 생각과 영원한 안목을 가진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점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과거 11년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으며, 특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에 13년이란 시간동안 그 긴 인생 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 교제가 나누는 그 대목이 사라져버렸다. 더욱이 하나님 교제 속에서 누리던 은혜도 그 인생 가운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은혜가 사라져버린 것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 19로 인해서 약이 된 문제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에도 우리 신앙 가운데 하나님의 친밀한 영적인 교제가 사라지는 것을 非一非再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은 신앙이 어떻게 신앙이 뜨거울 수 있겠냐고 그런 태도로 체념하는 모습으로 말한다. 또, 이러한 영적인 정체의 상태를 빠져나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함께 나와 하나님을 부르짖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과 과거에 나누었던 풍성한 그 은혜를 다시 누리게 해달라고 부르짖고 기도한다. 하지만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가 조금씩 약화되어져 간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냉담해지기 시작한다. 현재 나의 삶에는 과거 내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누렸던 그러한 교제가운데 누렸던 그 풍성한 은혜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충돌할 때,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육신의 뜻을 선택한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충돌할 때, 하나님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을 최고의 대안으로 선택할 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사라져간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이 앞설 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무너져버리고 만다. 더욱이 우리 안에 있는 은혜조차 사라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언제나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또 나눌 내용이다.
II. 두 번째 내용은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무려 13년이란 동안 기다리시고 인내 하시다가 하나님의 길로부터 인간의 길로 동떨어져버린 그 아브라함을 찾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셨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하신 말씀에 주목하면, 위로부터 내려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끊어진 것을 참지 못하시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선택하신 은혜이다. 바로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행하시는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누렸던 것이 사라지고 교제가 무너져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결단코 하나님의 백성이 망해져가는 것을 목도하시지 않는다. 언제나 무조건적 사랑과 선택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친밀한 교제가 무너진 아브라함과 같이 자신의 생각이 최선으로 믿었던 그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이번에도 하나님 자신의 사랑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 친히 개입하셨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우리에게 행하시는 그 영원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신다.
5절에 -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라함을 친히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친히 이름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부르신 대로 반드시 성취되는 것을 믿는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리고 부르시면,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게 될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거대한 제국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거대한 땅을 정복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묻힐 막벨라 굴조차 가족의 무덤으로 사용할 것이 그 전부였다. 13세의 이스마엘과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삭이 전부였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그의 영적인 능력이 가득 찼고, 전 세계 77억 명 가운데 3분의 1 가까운 인구가 그리스도인이다. 그 많은 영적인 후손들이 온 세계 가운데 가득 채워졌다. 유대인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영적인 후손들이 가득채운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신 이름의 개명은 아브라함의 전환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역사의 전환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신 이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영광스런 역사적인 사건이다.
창세기 26:24절을 보면,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2장 32절에 보면,
마태복음 22: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의 호칭을 부르고 계신다.
ex) 아들 하니가 있다. 아니 아빠 엄마라고 부르면 더 좋다. 그래서 아들을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그렇게 부를 때, 자랑스럽고 기쁘다. 아브라함의 개명 사건은 박요한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하니 아빠라고 부르는 것처럼 더 이상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호칭으로 불리신 것이 역사적인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이라고 경멸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혈통도 아닌 이방인을 우리를 위해서 친히 아빠 아버지라고 불려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으로 자신이 불려주시기 위해서 단 하나 뿐인 독생자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무너져 버리고 마치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 은혜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육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갈 방법은 무엇인가?
1절에 보면 하반 절에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한다. 영적인 준비상태를 의미한다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영적인 준비상태를 갖추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영적인 준비를 갖추라고 하신다.
-5분 전투 대기조를 아는가? 군대 용어이다. 잘못하면 징계를 받는 일이다. 이것은 이러한 군인처럼 영적으로 무장하고 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일터에서 우리의 일상의 최전선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삶의 최전선에서 영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무장되고 긴장된 상태로 살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나눌 내용의 마지막이다. 하나님을 날마다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기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III. 세 번째 -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중심사상이 코람데오였다. 코람데오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이 코람이라는 단어는 면전에서,~앞에서란 의미를 담고 있고, 데오는, 데오스, 하나님이란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코람데오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매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날마다 살아가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을 하다고 처형당할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늘 오직 하나님 앞에서라는 생각으로 생명의 위협가운데 위클리프를 하나님은 보호하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코람데오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전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서야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듣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친히 서 계셔서 직접 보고 듣는 것처럼 서야 한다. 우리가 시청이 아닌 예배를 전인격적으로 드려야 한다. 은혜는 박재된 과거의 기억이 아니다. 또한 그저 내일 오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대면하여 바로 설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고 교제가 된다. 은혜가 목마르고 힘들 때, 지금 누릴 은혜가 무엇인가? 1절에 보면,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거하게 된다. 말씀 앞에서 전인격적으로 직접보고 들을 때에 우리 안에 은혜가 거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지금 살아내는 자 되어야 한다.
♣요약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인 반면에 새로 얻은 이름인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다. 즉 그의 이름에 하나님과의 언약이 비로소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요구 사항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하는 것이다. 우리도 성도로서의 이름에 걸맞게 살려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야하며, 하나님의 약속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후손에 대한 것 외에도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 땅의 기업을 넘어서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약속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 우리는 과거 하나님과 함께 친밀하게 교제하며 살았던 그 풍성한 은혜가 사라지고 위태로운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피시고, 나의 좁은 생각을 오히려 더 크고 놀라운 능력을 주시며, 하나님의 생각을 딸라서 영적으로 준비되고 충만한 교제가 되어야 한다. 선택받은 우리 백성은 망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되게 하신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순간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동행하고 경험하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목마르지만,.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아브라함에게도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찾아오신 것처럼, 아브라함과 같이 여전하게 우리를 향하시고 계심을 믿고, 성령을 의지하여 삶 가운데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하나님과 친밀하기를 소망해야 한다. 늘 성령이 충만해져서 해갈되고, 우리 안에 은혜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을 듣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대하듯 주님 말씀을 듣고 보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서서 살아내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여 어디서나 복음이 되기를 소망한다.
주일예배(주후 2021년 1월 10일) 제목: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말씀: 이사야 43:18-21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사회: 윤하중 목사님 ------------------------------------
(이사야 43:18-21절)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30년 만에 온 한파를 뚫고 생중계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 지난 한 해의 모든 묵은 것들과 짐과 아픔을 주님의 은총아래 다 덙져 버리길 바란다.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를 위해 축복하시길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 예배를 통해 새로운 전기, 새로운 모멘텀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눈이 확뜨이길 바란다. 본문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가 새로운 전진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오늘 확 열리게 하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니, 우리를 지으신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송 예배예배하는 것은 목적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수 있는가이다. 찬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영적인 통찰력을 주시길 바라며 소망한다. 인생은 어떤 동기가 있어야 움직인다. 아무리 대단해도 삶의 동기가 약해지면 불타는 소명을 끝까지 완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하는 어떤 동기가 있어야 한다.
I. 영원의 삶의 동기 1.내적 동기이다. 사람답게 살아보는 것이며, 2.외적 동기- 잘하는 것이 있다. 대부분은 이 두 가지로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가 내적, 외적 움직임보다 한차원이 높은 영원함의 동기이다= (Eternal motivation-영원함의 동기). 우리가 온생예배를 통해 우리가 마음의 중심으로 잡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 드리는 것은, 영원함의 동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영원을 바라보고 뛰는 것이다. 영원을 향한 동기는 열심 정도가 아니라. 그냥 내 속에서 불이 붙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지치지 아니하고 성령이 주시는 은혜로 삶의 경주에서 속에서 불이 붙는 것이다. 영원에 불이 붙으면 소중한 것과 버릴 것이 무엇인지, 실체와 허상을 구분할 수 있으며, 남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것을 다 해보니까 인생에서 다 해봐도,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 속에 불붙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이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다. 영원함에 대한 동기가 흐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함에 대한 동기를 갖게 되면 지치지 않고 규칙적인 에너지를 받게 된다. 영원함이란 갖으면 옳고 그름을 구분하니 전체가 기쁨이 되고 과정이 즐겁다. 영원함으로 인해 육신은 피곤해도 영은 피곤치 않는다. 모든 과정 자체가 즐겁다. 특히 마음 맞는 자들을 만나면 영원함의 동지들을 만나면 갑절의 즐거움이 있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자주자주 감옥 가운데서도 그들이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했다. 서로 영원의 즐거움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영원이란 동기가 분명하면 영원한 새로움을 깨닫게 된다. -영원한 새로움에 눈을 뜨면, 영원한 옥시멈(Holy Oxymum)이다. 그것은 늘 프레쉬하게 새마음으로 살아간다. 영원함의 눈이 제대로 새로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까....
-'영원한 새로움'에 대해서 눈이 열리면, '영원함'과 '순간'의 통합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늘 새로운 현재'가 된다. 반대로 영원함을 모르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산다. 영원함으로 언제나 새로워져야 한다. 일시적인 지금 이 순간이 영원을 평생 준비하고 살게 된다. 성경은 늘 새롭다. 이사야 43장은 오늘도 다시 새롭다.Way maker- 주님이 새롭게 하신다. new way maker가 된다. 시간이 그냥 지나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별거아니다. 다 노쇠하고 젊고 아름다운 것은 다 지나가고 처절하고 한탄함이 오는 것이다. 이 시간에도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긍정적이고 눈부신 소망이 있게 된다. 영원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시간이 흐를때마다 긍정적 에너지와 눈부신 소망이 열리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고후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 믿는 사람은 아프거나 나이가 들어가도 뭔가 깊이가 있다. 성령님으로 깨닫게 되면 눈부신 소망에서 믿음 보고를 한다. faith report가 되는 것이다. I'm still strong!!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동일하다. 우리는 그래서 수많은 가나안 땅들을 영적으로 정복할 수 있다. 우리가 영적으로 소망이 되는 것이다. 육의 사람은 잘 모른다. 영적으로 생명의 역사가 있는 사람은 깨닫게 되며, 다르다. 뭔가 깊이가 있다. 새로운 영원의 언어이며, 시각이며, 새로운 영원한 현재를 경험한 사람의 고백이다. 막장 드라마 같은 일들이 지금도 있는 것은 영원함의 새로움을 모르고,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그 욕심으로 말미암음이다. 펜데믹 상황에서 전 세계가 막장 드라마 같은 이 시대에 절대 굴복하지 않고, 우리의 시선이 바울처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과 깨달음이 된다면, 핍박이 있더라도 절망치 않고 영적 DNA를 갖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교회들은 핍박 속에서도, 영원한 천국의 소망으로 살았다. 현재 상황을 그래서 이겨냈다. 영적 장차나타날 것을 보고 축복과 은혜들을 현재의 상황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 고통 상황에서도 소망으로 살아 숨쉬는 소망이 되었던 것이다. 스데반이 돌을 맞아 죽을 지경이었도 그런데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고, 현재 장차 나타날 것을 지금 갖고 있는 것이다. 해석하면 돌로 쳐죽이는 사울이 충격을 받는 것이다. 이 펜데믹 가운데서도 우리 사랑의 교회는 매일 매일이 살아 숨쉬는 소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영원의 영광에 대해서 해석하기 바란다. 온 성도들이 새하늘과 새 땅에 영원한 새로움의 관점으로 우리의 신앙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II. 영원한 새로움이 있으면 과거에 안주하지 않는다.
광야의 길, 사막의 길에 -인간의 상식으로는 깨닫지 못하지만 영원을 가진 사람은 깨닫는다.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광야의 길, 사막의 길-현실자체이다. 앞뒤가 막혀있는 것이다. 포로 생활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 상황이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영원한 시각으로 봐야 한다. 반드시 광야의 길을, 사막의 강을 내신다고 하신다. 택한 자를 마시게 하신다고 하신다.
18절- 너희는 이전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유대 민족은 전통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그것을 기억하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이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구원역사를 기억하지 말라는 것은 반어법이다. 바로 19절에 보라 새일을 행하리라와 연계되어 있다. 이전에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그 새 일이 너무나 영광스럽고, 찬란하기에 과거와 비교해서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 하신다. -과거의 은혜에 안주하지 말자.~~!!!그 기적을 다음 세대를 기대하라고 한다. See~~! 모든 것들을 분사형으로 I'm doing!! 계속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다.
-구속자(사 43:14), 창조자(사 43:15),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는 자(사43:16),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내어 쓰러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는 자(사 43:17), 새 일을 행하시는 자(43:19).
지금도 새로운 것을 주신다. 영원과 순간의 통합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전의 아픔도 다 기억하지 말라와 비교할 수 없다. 옛날의 영광스러움과 앞으로의 영광이 대립이 있을 수 없다. 이 새일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지금도 하나님은 뉴 웨이 메이커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조심해야 한다. 한 때 그리스 헬라제국, 스페인과 포루투칼이 화석화 되었다. 그리스도 그렇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40년에 안주하지 말아야한다. 우리 사랑의 교회를 위해 새일을 행해 주시길 원한다. 기도하면서 이 말씀을 통해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말고 우리에게 사람을 키우고 영적 재생산을 해야한다. 그릇을 키워야한다. 사랑글로벌 아카데미도 하나님의 새일이 되게 해주시길 원한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영적으로 3년간 뒤집어졌다. 공동체에서 훈련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삼고초려을 한 것이다. 바나바로부터 코칭받고 시대의 새일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시대에 보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는가를 새로운 시각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다. 유대인 중에 완고한 사람들이 안 믿었다가 바울로 인해 새로운 그들이 글로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 사랑글로벌 아카데미가 목자의 심정으로 영적 사관학교가 되어야 한다.지금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깨달아서 우리가 기대하면서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를 통해 진정한 영적 재생산이 되어야 한다. - 20절 -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주님이 이루실 새 창조의 일을 말씀하신다. 가슴이 웅장하다. 장차 들짐승이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승냥이와 타조는 혼돈과 폐허를 초래하는 짐승들도 새창조의 주님을 찬양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출애굽이다. 놀라운 일이다. 신학자들은 출바벨론이라 한다. 출애굽보다 낫다고 말한다.
-3월에 사랑글로벌 사역이 시작하는데, 새로운 일을 위해 신선한 사역이 되길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길 소망한다. 우리에게 큰 그림을 주셨듯이 공동체적, 개인적으로 어떻게 적용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스가랴의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접목되어야 한는가? 새로운 길, 새로운 삶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적으로 접목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2:22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 부대가 되길 바란다. 담는그릇이 새것이 되어야 한다. 그 시대에 걸맞아야 한다. 주님 나라의 역사를 담을 때가 되었다. 대 변화의 차원에 대해서 이 시기에 너무나 큰 변화이고 속도가 빠르기에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듯이 대변불관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각, 우리가 감당할 대변직관, 큰 변화를 보고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것에서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광야에 감추인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사막의 강을 발견하는 축복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분사형으로 체험하고 영적 중심을 체험하게 되어야 한다. 사랑글로벌이 영적 용기를 주고 받아야 한다. 우리는 규칙적으로 영적 교제가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전 16:18절에 -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통하여 신선해졌다. -우리도 신선해지게 주시게 될 것이다. 과거의 은혜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아서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빛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용장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 대변불관(大變不觀)시대에 대변직관(大變直觀)을 주시고 새로운 길을 평생이 되게 하시길 원한다.
♣요약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일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이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내려졌던 불행한 역사가 끝나고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롭고 큰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 냉담하던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고 계시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향한 ‘새 일’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증인이요, 증거자가 되기 위해서 선택되었다. 본래 모든 인생의 목적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증거는 쉼없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부끄러움과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하며,
영원한 새로움으로 말씀을 통해서 나와 가정, 교회, 나라가 회복되고, 모두가 대변불관 시대에서 대변직관이 되어서, 우리 속에 주님이 계셔서 우리의 눈과 가슴이 답답함 속에서 눈과 귀가 열리고, 주님과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한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영원을 향한 새로움의 동기로 가슴에 불이 타올라 갑절의 은혜로 평생을 주님 말씀과 믿음 안에서 살아 숨쉬는 믿음의 보고를 새롭게 하여, 사랑 글로벌 아카데미가 영적 사관학교로서 무한한 사명을 펼치며 주님 나라에 헌신하는 사관학교로 비상하는 주님 자녀로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