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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년 12월 30일)

제목: "삶의 퇴로(退路)가 막혔다고 느껴질 때"

말씀: 출애굽기 14:10-16절

설교자: 조철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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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4:10-16절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올해 생각나는 가장 의미 있는 단어가 있다. 두 가지가 떠오른다. 마음과 뇌리에 가장 남아있는 단어이다. 하나는 '돌아오면 회복된다'와' 또 하나는 '코로나 바이러스' 이다. 아마도 삶의 변화가 된 것은 맞다. 2020년 뉴노멀 시대에 가장 많이 했던 단어이다. 이 바이러스 단어로 인해 삶의 변화가 많이 일어나서이다. 한 매거진에서 본 코비드라는 단어로 이야기 하고 있다.

 

I.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삶의 변화.

첫째-Consumer trend:소비 시장의 변화.

-온 컨택트라는 비대면 시대에 이제는 사람이 마주대하는 일이 줄어든 것이다. 소비형태의 변화이다. 이 비대면 시대를 준비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도태된다는 것이다.

둘째-Ongoing Crisis: 지속될 경제 위기의 사회.

-새로운 변수인 바이러스로 인해 어떻게 하면 경제극복을 위해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변수를 속도감 있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중요한 포인트이다.

셋째-Virus outbreak: 재출혈한 신종 감염병에 대한 위협.

-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에 메르스, 사스를 기억하는가? 이 감염 병의 원인은 야생동물 접촉으로 인해서 감염된 것이다. 야생동물과 접촉이 많아지고 있고 이로 인한 것은 바로 환경파괴를 볼 수 있다. 결국 계속해서 도래 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넷째-International cooperation: 국제 공조의 필요성.

- 공조의 필요성은 증가되고 있으며, 이전에도 공조가 일어나야 했다.영국에도 너무도 많이 바이러스가 감염되었다고 한다. 장벽을 넘어서 우리는 이 시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 세계전역에 문제가 되고 있으며 변이된 바이러스를 잡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한 나라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함께 공조하면서 백신 계발부터 치료에 대한 것까지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국제 공조를 외면 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섯째-Deperssion:우울증에 대한 부분.

-비대면 시대에 사람과의 접촉이 줄어들면서 이 같은 우울증이 발발하는 일이 많다. 우울증은 사회가 건강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 노멀 시대에 어떻게 보면 편이성은 증가되고 우리에게 효율성의 가치는 계속 추구하게 되고 있지만 우리 사람이 본질적으로 누려야만 될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서 스트레스도 풀고 그리고 함께 나누고 공유하면서 함께 이겨내야 하는데 우울증으로 인해 사회 전체가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변화된 사회 안에서 우리를 우울로 몰아넣고 있다. 판단의 기준마저도 흐려지게 한다.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성도여러분 ``!! 지금 괜찮으신가요??? 평안하신가요??? 남몰래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신가요?? 답답함 속에서 풀고 싶었고, 이 문제들을 내놓고 풀고 싶었는데 방법을 알지 못해서 헤메이고 있지는 않는가요? 혹시 삶의 퇴로가 막혀있고 두려움을 느끼고 계신가요?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삶의 퇴로를 확보하고 길을 열어주실 줄 믿는다.

오늘 출애굽기 14장에서 우리의 삶의 퇴로가 막혔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길을 열어 가시고 계신지를 그 사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바로 애굽 군대와 홍해, 하나님의 시각을 정확하게 갖추어야 한다. 바로의 대한 시각, 애굽 군대, 그리고 홍해이며, 우리의 하나님의 대한 시각을 바로 갖추어야 함을 기억하면서 본문을 보도록 한다.

 

출애굽기 14:1-4절을 보면,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

4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잘 보여 진다. 이스라엘 자손이 가던 길을 돌이켜 장막을 치면 바로가 그들을 따라가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심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가던 길을 어떻게 하는가? 돌이켰다는 것이다.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좀 과격하게 인도하시는 부분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왜냐면, 행군에서 가장 싫어한 부분이 무엇이지 아는가? 바로 걸어가다가, 빽(back)이다. 돌이키라는 순간 어깨가 처진다. 이것은 군대만이 아니다. 지장도 마찬가지다. 다시 처음부터 새로 하라고 하면 어떤 기분인가? 모든 것을 준비했는데 가던 길 다시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 가면 좋은데 왜 뒤로 돌아오고 새로 처음부터 새로 하라고 하면 기분이 어떤가요? 불평불만이 마음속에 맴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후진을 명령하시고 계속해서 무엇을 하시길 원하시는가? 바로와 바로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나를 여호와인줄을 알게 하시려고 하신다. 현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 친 곳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거기 눈앞에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를 보면,

10절에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은 이 같은 삶을 원하지 않았다. 두려움 없이 평안하게 가나안에 입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두려움이 엄습한 다음에는 불평과 불만이 따르게 된 것이다. 우리를 왜 이끌어내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는지를 불평과 불만을 모세에게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왜 내게 때와 장소에 맞는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왜 내게는 솟아날 구멍이 없고 형편이 어렵게 되었는지를 하나님께서 이대로 두시는지, 누누나 두렵다고 하면서 퇴로가 막혀있고, 길도 보이지 않는다고 죽이시고 내버려 두실 것인지를 원망한다. 이런 불편불만은 다 한다.

내일이면 2020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런데 우리 앞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불평불만이 생겼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싶다. 중요한 사실은 이 코로라 바이러스로 잠식되어 있는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계속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퇴로까지 막혀있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서 길을 보여주셨다. 오늘 우리는 그 길을 찾아갈 것이다. 본문에 세 가지로 정리를 했다.

II.그 퇴로를 찾아가는 하나님의 방법.

첫째-가만히 굳게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을 봐야 한다.

13절에 -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보라-라흐이다.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하신다. 우리는 믿음을 무모함으로 오해한다. 눈앞에 수많은 대적이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서 있냐고 호들갑을 떠들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굳게 선다는 것, 믿음은 무모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는 것이며, 믿음은 살아계셔서 여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굳게 서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 도우심을 기억하고 나아가고 앞으로 도우실 일을 기대한다면, 그 자리에서 분명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때에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이미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도우심을 기억한다면 이 상황을 해결해 주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 그것이 가만히 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실 것을 기억하고 기대하는 것이 믿음이다. 가만히 굳게 선다는 표현이란....

베드로전서 5:6-7, 12절을 보면,

6절-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리라.
7절-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12절-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베드로는 어디에 굳게 서라고 하는가? 은혜에 굳게 서라고 한다. 여기서 은혜란 감정적 표현만이 아니다. 바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시고 값없이 받았을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히 있을 때에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 바로 은혜이다.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건져내신다는 것이기에 사망으로부터 살리시기에 실체가 있다. 그 은혜위에 있는 것은 모든 일이 해결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라는 은혜를 이미 경험했다. 죽을 뻔 했다. 종살이 하다가 끝날 뻔 했다. 살려주셨다. 사망에서 살려주셨고, 자유를 주시고 은혜를 이미 경험한 민족이다. 지금 이 베드로전서에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은 때가 되면 높이신다고 하신다. 겸손하라고 하신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주님은 놓이신다고 하시고 움직여 주신다고

말씀해 주신다. 올 한 해 동안 참으로 많이 답답했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로 힘들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배하고 거리를 좁히며 영적 거리를 좁혀서 하나님께 가만히 그 자리에서 서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보는 것이다. 예배하는 자야말로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는 것이 참으로 우리에게 복된 일이다. 한 번 은혜에 대해서 궁금하면 이번 특새에 기록한 글들을 찾아서 보도록 하자.

우리 사랑의 교회는 이번 특새 때도 은혜 주셔서 그 마음속에서 어려운 가운데 집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서도 풍성하게 하셨다. 여러 강사 목사님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국내외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보여주셨다. 그 은혜들을 고스란히 은혜게시판에 있다. 힘들 때 다시 읽어보고 그 은혜를 느끼고 새기며 나누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서서일하시는 일들을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매일 큐티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힘과 능력이 있다. 그 말씀을 자신만의 고백이 되게 적어보라. 그러면 그 은혜를 적고 나무면 내 마음속에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고 마음속의 답답한 문제도 완전히 해결하실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이것이 무모함이 아니기에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그것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유일한 방법이다. 가만히 굳게 서서 주님이 행하시는 이들을 한 번 보기를 바란다. 그러면 퇴로가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다. 우리가 삶의 퇴로가 막혀있다고 생각이 들 때에 우리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마음이 계속 곤란하고 요동이 일어난다. 그게 굳게 서는 것이 안 된다. 그러나 말씀 위헤 서면, 마음을 붙들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홍해에 대한 인식을 바뿨야 한다.

14장 15-16절에 -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16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모세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셔서 애굽 군으로 하여금 턱밑까지 쫓아오게 하신 것이다. 그가 해야 할 행동은 말씀하신대로 홍해로 나아가야 한다. 앞에로 홍해가 막혀있고, 뒤에는 바로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나아가라고 하신다.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향해 그것을 갈라지게 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면 바다가 마른 땅으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분명 우리의 홍채처럼 삶 가운데 앞을 가로막을 때가 있다.

시편 106편 7절을 보면 홍해를 보면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 수 있다.

- 그들은 홍해에서 기억하지 않았고 명령을 거역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애굽 사람들이 나를 알게 하리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것만이 아닌 이 땅에 통치자가 누구이시며, 참신이 누구이신지를 그것을 알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이셨다. 클라스가 다르시다. 자기 백성만이 구출이 아니라 아직도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애굽 백성들에게 그가 여호와였다는 사실을, 그가 이스라엘을 돕는 자였다는 것을 알리게 하신 것이다. 이 모습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백부장의 고백과 동일하다.

마가복음 15:39절에 보면, -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는 장면을 보고서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백부장이 이 같은 고백을 듣기 위해서라도 십자가는 필요했다. 애굽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홍해는 필요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이 같은 계획까지 하신 것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앞에 있는 홍해는 나를 막고 있는 장애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빛내기 위해 준비 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준비물이다. 십자가가 하나님이 인류 구원을 위해서 준비하신 것이라면 홍해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대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준비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홍해를 장애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물에 사로잡혀 살기에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본질을 잊고 산다. 이 땅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홍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벗어나야 한다.

홍해를 장애물로 여기는 순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선하신 계획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홍해를 장애물이 아닌 하나님의 준비물로 여기는 순간 모든 문제가 풀리게 되어있다. 홍해는 하나님께서 가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홍해의 운명이다. 만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홍해라고 생각해 보자.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것인지를 들어야 한다. 그것도 홍해처럼 언젠가는 종식된다. 오히려 그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발견된 자신만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들을 점검하라. 나의 신앙을 點檢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홍해에 붙잡혀서 또한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라. 문제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는 백성이라면, 홍해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이며, 하나님만 보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가 두려워야 할 대상은 퇴로를 지키는 바로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10절에 바로가 가까이 올 때,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31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여기 보면 10절에 쓰였던 두려워하다와 31절에 쓰여 있는 경외하며와 같은 동사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뀐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이 경외함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바뀐 순간 우리는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다. 우리가 바로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퇴로를 막고 있는 것은, 그가 가진 권력과 힘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엄청난 군대와 바로의 권세 때문에 우리가 기가 눌린 채로 살아가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시편 106편 13-15절에 보면 - 행한 것을 곧 잊어버리고 가르침을 기다리지 못한 결과는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는 들어주셨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쇠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을 잊었고 가르침을 기다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영혼이 메말랐다는 것이다. 영혼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의 힘에 기가 눌린 체로 살다보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영혼이 메말라버려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상 사람들처럼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세상 사람들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바로와 같이 그 권력을 손에 쥐려거나 물질을 만들려고 하면 그것을 대항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영혼은 지속적으로 쇠약해진다. 불량식품을 먹으면서 건강해질 수 없다. 권력, 돈에 맛을 들여서 우리가 대항하려하면 우리는 절대로 회복할 수가 없다. 영혼이 건강해지지 않는다. 바로를 바로의 방식으로 대항하다가는 영혼이 쇠약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영혼을 살찌워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올 한해 우리가 함께 불렀던 찬양 중에 보면

-주 여기 함께 하시네, 나 예배해 나 예배해~~이곳에 운행하시네, 나 예배해 나예배해, 새 길을 만드시는 주, 큰 기적을 행하시는 주, 그는 나의 하나님 약속을 이루시는 주, 어둠 속에 빛이 되시네~ 그는 나의 하나님, ~~~

내가 바로가 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길을 여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면 삶의 퇴로가 확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여신다는 것이며 그 사실을 믿어야 한다. 생명을 누리고 싶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부터 열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풀리며, 나의 퇴로를 지키고 서있는 대상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오늘 미가서 7장10절 큐티에 내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말하는 자들이 거리에 진흙 같이 밟힌다는 것이 나온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자는 종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와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아는 백성,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백성, 바로를 겁내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진흙에 밟히는 인생이 아닌 큰 길을 여시며 홍해를 가르시며, 홍해를 마른 땅으로 변하시게 하시며, 그길 가운데로 인도 하시는 그런 역사를 우리 가운데 허락해 주실 것이다. 우리는 분명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바로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교회 밖에서 수많은 대적들을 만나게 된다. 그 때마다 바로와 같은 방법을 이기려 하지 말라. 많은 군대와 끝판 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퇴로가 막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을 못 얻었기 때문에 아니라 내가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느냐, 나의 두려움의 대상이 애굽 군대 바로가 아닌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됨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백성은 길을 열어 가신다. 그렇기에 바로 앞에 무릎 꿇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온전히 경외하고 그 신앙으로 참 예배 자가 되면, 우리의 퇴로가 확보되며 앞길이 열리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두려움을 해결하신다. 그것을 믿고 나아가라.

삶의 퇴로가 막혔다고 느껴질 때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될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이 앞설 때 마다, 우리에게 주셨던 Way Maker를 부르면서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다. 우리 사회와 공동체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참 힘들었고 퇴로까지 막혀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한 해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열어줄 미래를 기대하길 바란다. 새 길을 만드시는 분이 누구신가!!~ 그분을 믿고 나아갈 때, 막힌 퇴로로 두려워하는 것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 나라에 모두는 소망으로 늘 기쁨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삶의 모든 자리에 퇴로가 막혀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막혀 있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고 길을 열어주시기에 우리는 이 땅의 모든 홍해와 퇴로를 만나더라도 은혜에 굳게 서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자 되어야 한다.

♣요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지만 어려움이 닥치자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이런 태도에서 근본적으로 돌이켜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하나님께 신실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두려워하는 백성을 보고 모세는 두려워 말고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말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싸우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홍해가 갈라지기 이전에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도록 명령함으로써 모든 어려움이 해결되리라고 믿고 행동한 것이다. 이처럼 참된 신앙인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의 구원을 진정으로 보아야 하겠으며, 삶의 퇴로가 막혔다고 느껴지는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은혜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바로 볼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내 앞에 놓인 홍해를 보고 장애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준비시키기 위한 준비물로 생각의 전환을 이루게 해주시길 소망하며 홍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주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퇴로를 지키는 바로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큰 길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억하여 기대하면서 2021년을 맞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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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년 12월 27일)

제목: “내 인생의 초막절”

말씀: 스가랴 14:12-21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사회: 윤하중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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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4:12-21절)
1
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13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14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방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15 또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돌아오면 회복된다 스가랴 시리즈 23.-------------------------

돌아오면 회복된다 시리즈(1-15장)

1장: 화석류 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타신 분 
2장: 측량줄을 잡으시고 '성곽 없는 성읍'을 약속하신 분.
3장:더러운 죄악의 옷을 입은 우리에게 깨끗한 예복을 입혀 주시는 분.
4장: 무한한 힘과 성령을 공급하여 주시는 분.
5장: 날아가는 두루마리와 에바로 죄악을 청산하시는 분.
6장: 영광의 면류관을 쓰신 분.
7장: 누구를 위해 금식하냐고 문책하시는 분.
8장: 거룩한 질투로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는 분.
9장: 우리를 왕관의 보석같이 만들어 주시는 왕.
10장: 우리에게 봄비의 축복, 참된 복을 주시는 분.
11장: 우리의 참 목자.
12장: 이 땅에 재림하시는 분.
13장: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
14장: 천하의 왕으로 오셔서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분.
이 말씀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갈 것이다.

▶ 스가랴의 대장정을 마친다. 돌아오면 회복된다로 6개월간 말씀을 마치게 된다. 어디로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오늘만을 집중하면, 모든 것이 커버된다.  스가랴의 대주제는 ‘돌아오면 회복된다’인데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목:  “내 인생의 초막절” (스가랴 14:12~21)(The Tabernacles to My Life)

0.1 스가랴의 대주제는 ‘돌아오면 회복된다’인데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Ⅰ. 배교자들의 운명 (12~15절)

1. 치명적인 전염병, 역병

• 12절,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치명적인 전염병을 말한다. 살아있는 죽음이다. 심지어는 사람만이 아닌

• 15절, “또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 동물들까지 심판을 면치 못한다. 이런 재앙을 핵폭탄 같다고들 신학자들은 이야기한다. 배교, 대적자들에게 역병이 온다는 것이다.

2. 큰 혼란

• 13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자기들끼리 손을 친다고 한다. 배교자들 대적자들 미디안인, 블레셋들이 자기들끼지 죽인 것처럼

크게 혼란하였다.

 

3. 예루살렘 부(富)의 회복

• 14절,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방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 모든 미족의 보화가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신다. 부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악한자들이 망한다.

 

Ⅱ. 초막절의 은혜 (16~19절)

1. 남은 자들이 지키는 초막절

• 16, 17절,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남은자들이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이다. 영적인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에 감사한다. 영적으로 택함을 받아서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3대 절기가 있다.
-유월절-과거,
-오순절,- 첫추수를 성령 강림으로 신약이 태동-도움을 주시고 매일 감사(현재)
-초막절을-미래에 대한 축제이다. 출애굽기 23장에 나온다.(미래) - 초막절을 지키라고 했는데 느혜미야가 제일 먼저 성전을 짓고 초막절을 지킨다.

느헤미야 8:14-18절

-7일간 지키고 마지막 날에서 큰 성회를 열었다. 감사, 기쁨, 말씀, 영적 잔치가 있다. 순간순간마다 가정,교회, 사희에 초막절의 은혜를 부어 주시길 소원한다. 초막절에 의미를 중요시 하지 않는 현대이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가 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물붓듯 은혜의 비를 내려 주시길 기도한다. 그래서 이 은혜가 있어서 축복이 된다.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2. 유대인의 3대 절기 가운데 초막절은 가장 큰 절기

3. 유월절과 오순절의 원형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초막절의 원형은 아직 완성되지 않음
1) 유월절은 지나간 은혜, 오순절은 현재에 대한 축제, 초막절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축제
2) 느헤미야 8:14~18절로 본 초막절의 회복
: 초막절은 기쁨과 눈물의 절기, 감사와 찬양의 절기, 풍성한 말씀과 참된 쉼이 있는 절기이다.

4.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1) 17절,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2) 재앙 내림
• 18, 19절,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이방인들에게 대적자와 불신하는 자들에게 그 재앙이 온다는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독특했다. 이른비와 늦은 비가 간절하듯이 애굽 사람들을 비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만해서 나일강의 범람을 원했다. 주님은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주님은 역병과 혼란으로 재앙을 준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영역 주권을 벗어나서 하나님이 치신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면 징벌이 있다.

16절- 초막절이 회복되면 어떤 예언이 이루어지고 영적추수와 감사와 기쁨이 있게 된다.
계:14:15-16절-초막절에 영적 추수를 위해 당신의 낫을 휘들러 거두어 달라고 했다. 주님의 낫으로 영적 추수를 거두어 주시길 원한다. 이 코로나 중에도 초막절의 은혜가 있기를 허락하시길 소원한다. 어떤 상황에도 초막절의 은혜로 우리 모두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이방인들은 초막절의 의미를 오염 시킨다. 우리가 남은 자로서 초막절의 은혜와 공동체의 은혜를 사모하여야 한다. 우리는 말씀의 은혜로 부활절, 성탄절 추수감사절도 다 그렇다. 초막절은 우리 사랑의 교회의 특새이다. 눈물과 기쁨. 영적 추수가 있다. 신약에서 요한복음 7:37-39절에 -명절-초막절이다. 마지막 날에 물을 길어서 제사장들이 바위에 부으면서 생수가 예루살렘에 솟아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경에 이름과 같이 ~초막절의 은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수의 은혜를 내려 주신다는 것이다
-상처와 고통의 모든 것을 될때까지 말씀의 항아리 믿음의 항아리에 다 부으시길 기도한다. 이 말씀 가운데 말씀이 사람이 살리고 치유하신다. 우리를 살려 주시길 바란다. 성전이 회복이 되어야 한다.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5. 영적인 초막절이 회복되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선교운동이 일어남
• 요한계시록 14:15, 16,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Ⅲ. 성전 회복 (초막절의 은혜로) (20, 21절)

1. ‘여호와의 전’ 회복
• 20, 21절, “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여호와의 전이 완전히 회복된다는 것이며, 함께 모여서
-에스겔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축복이 계신다는 것이다.
-지금 이 코로나 시대를 아마도 기억할 것이다. 이 마지막때에 수많은 시험이 많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마음의 성전이 회복 되어야 한다.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세리, 창기도 천하게 여겼지만, 먼저 선택받은 자들은 주님께서 역사하신다.

• 하박국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 ‘여호와삼마’의 은혜로 여호와의 전이 완전히 회복된다. (겔 48:35)

2. ‘여호와께 성결’ 회복

1) 대제사장의 금패

• 출 28:36, “너는 또 순금으로 패를 만들어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2) 말 방울에도 ‘여호와께 성결’ (20절)

3. 천한 솥이 거룩한 주발로 (20, 21절)

4. 천하고 멸시 받는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1말방울- 하찮은 것, 여호와의 성결이 되었다는 것.
2솥-비참, 하찮은 솥이 비천하지만,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주발-여호와의 보혈이 있는 곳.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다.
마지막 때에는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천한 솥이 거룩한 주발이 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19:6절에 너희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한다.

• 마가복음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5. 삶의 전 영역에서 거룩함의 일상화 (출 19:6)

6.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더라 (21절b)
여호와 삼마-거룩하게 만드시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하신다. 가나안 사람도 물러가게 하신다.
스가랴의 1-1절을 보면 연결되어 있다. 익숙하지 않지만 거룩하지 않는 우상을 숭배자들을 대표한다.
그당신 인신제자, 속된자 상인들이며 성전에서 돈 받은 자들이다. 나중에 이것으로 인해 가나안의 습성이
있는 자들처럼 가나안들을 척결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에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전이 깨끗이 청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이니 우리 속에 가나인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되고 거짓된 것이 깨끗해진다. 마지막 남은 벽장에 있는 비밀한 것, 숨겨둔 것을 내 개인적인 것을 그 키를 하나님 앞에 내놓아야 한다. 믿음으로 주님께 올려 드리면 인생의 새로운 차원에 서게 하실 것임을 확신한다.

정리하면, 스가랴는 포로에서 돌아왔다. 신앙적으로 절벽에 있었다. 현실은 척박했다. 스가랴는 적당한 선지자 노릇해도 되었지만, 애걸복걸하면서 주님 앞에 그 마음을 준비하게 그 스가랴의 절박한 그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길 원한다. 말씀 붙잡고 포물전의 사명자가 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고 절망하지 않는 21세기의 스가랴의 은혜를 받는 포물전의 은혜가 되어 우리의 전이 회복되고 회복된 성전을 통하여 그 성결함으로 모두가 다 여호와의 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축복한다.

[ 결 론 ]
1. 참된 회복은 내 마음의 성전 청결로.
2. 이를 위해 내 마음의 은밀한 벽장 열쇠를 주님께로 이양.
- 스가랴서 강해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요약
열방들에 대한 징계 ( 14:12-15 )
이스라엘을 공격한 열방들에게는 살과 눈과 혀가 썩어들어가는 재앙이 임하고, 상호간에 전쟁을 일으켜 자멸하게 되며, 재물을 빼앗기고, 육축도 재앙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한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를 박해하면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됨을 의미하며,
마지막 날에 되어질 일 ( 14:20, 21 )지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땅의 모든 생물이 거룩한 성물이 되며, 이 성물들이 하나님께 바쳐진다. 이는 메시야 왕국의 완전한 성화를 의미하다며.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질서 체계가 다시 회복되어 새로운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질 것을 말
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육축도 주인을 명망시킨 그 재앙을 같이 할 것임과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매일의 삶이 곧 초막절의 날이며 특별한 의미로는 여호와의 날이다.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고 절망하지 않는 21세기의 스가랴의 은혜를 받는 포물전의 은혜가 되어 우리의 전이 회복되고 회복된 성전을 통하여 그 성결함으로 모두가 다 여호와의 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우리는 영육이 모두 정결하여서 성전으로써 본이 되어 복음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직까지 내어 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비밀한 것까지도 다 내어놓아서 자유함을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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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0년 12월 26일)

제목: “축복(祝福) 받은 자의 사명(使命)”

말씀: 누가복음1:67-79절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사회: 박주성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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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67-79절)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세 가지의 감사한 것이 있다.

1.우리 은총(恩寵)과 연합(聯合)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지켜주심을 믿고 사명을 감당하는 중직자들이다.

2. 성탄축하예배만큼 들어와 예배했다.

그것이 주일예배처럼 예배해서 감사하다.

반드시 헌신(獻身)과 수고가 헌신됨을 주님은 갚아주실 것이다.

3. 권사회 역할을 잘해서 중직자들과 오랜 기간 교회생활을 감사하다. 이 세 가지가 있다.


I. 중직 자와 권사님의 역할.

첫째-권사님은 -기도의 소통, 모범이 되어야 한다. 코로나 시대 더 에너지를 내어야 한다.

둘째- 축복의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의 후예들이어서 다음 세대를 축복했듯이

중직 자들은 축복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한다. 미국에서도 장로 축복기도회가 있었다.

우리도 다음세대를 위해 축복해야 한다.

셋째- 내 인생의 소망을 주님께 드려야 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노아, 시몬 안나와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다. 기도, 소망, 축복의 소통자가 되어야 한다.

▷미혼모인 마리아는 참담한 상황에서 엘리사벳에게 찾아가서 이야기 하니 축복하는 순간 마리아는 평강을 얻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평강주시고, 자연스런 어떤 패턴이 형성된다. 은혜를 받으면 기도의 소망의 축복의 소통 자가 된다. 사명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 어른들을 생각해 보면 교회 어른들은 기도의 소통 자, 소망의 소통 자, 축복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하고 사명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한다.

-민수기 6:27절, 24-26절에

24 여호와는 네게 을 주시고 너를 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게 체화가 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복지얼얼’이 되게 하신다. 매일매일 그렇게 되어야 한다. 아침마다, 손자들에게 기도해 주어야 한다. 복지얼얼을 선포해 주어야 한다.

 

민수기 6: 27절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찬송도 축복 송을 불러야 한다. 어른들은 주일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자연스럽게 체화가 되어야 한다.모든 성도들은 사명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신앙의 모형이 되어야 한다. 자신에게 느즈막에 아들을 주신 것에 대해서 특별히 오실 메시아를 위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서 메시아가 온다고 하신다.

누가복음 1:17절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그냥 자기 자식이 아니라 메시아 오심을 첩경을 예비하신다.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 목자의 심정, 예수님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믿어야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성경 믿고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자가 많다. 보수주의자들이 그래서 잘 싸운다. 성경에 나타난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정이다. 아버지의 심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누가복음 1:76절-77절에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한다. 첩경을 예비한다. 주님의 길을 만든 것이다. 기도, 소망, 축복, 사명의 소통자로 예비한 것이다. 영적, 믿음, 구원의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2-3절에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그가 네 길을 준비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명 자가 되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마자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게 기도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이다. 인생은 기도, 소망, 축복의 사명의 소통자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다. 축복의 마음을 주고 자녀들을 쓰다듬어주면 그 축복의 말로 인해 더 크고 놀랍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 말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셔서 더욱 지키시고 축복하신다.

축복을 해주면 신앙으로 한결같이 더욱 믿음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 삶이 가장 중요하다. 대형교회는 인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래서 항상 그렇게 축복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해주고 세워주어야 한다.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자라야 하는데 다 잘 갖추어져서이다. 그러니 특새(특별새벽기도회)를 꼭 하게 해야 한다. 그것을 초등부터 중고등부터 다 개근하면 거룩한 고난이다. 그런 것을 지키다보면 부모의 신앙이 전수되는 것이다. 다음세대에 놀라운 결과이다.

민수기 6:27절--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결론]

누가복음 1:78-79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축복은 78절 79절에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셨다. 세상은 쉽지 않지만 이런 기도와 소망 소통으로 어두움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심을 찬양한다. 축복의 송가는 구원받은 자의 노래가 되기에

이사야 35:10절에 -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슬픔과 탄식이 다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제 의사회에서 통계가 나왔다. 종교기관에서 나온 것이 4.2%밖에 안 된다. 정부는 교회에서 다 나온 것처럼 말한다. 특별히 예배드리다가 확진 된 케이스는 없다. 무슨 교회가 난리 난 것처럼 그런다. 이것은 훈장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이것은 기록해 놓아야 한다.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축복의 유통자들이다. 세상의 슬픔도 다 사라지며 주의 나라는 왕성 한다는 것이며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시편 107:8절-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우리 모두의 일생을 축복의 송가로 가득 채워주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축복의 송가를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길 바란다. 1:79절을 특별히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이사야 9:2절을 말한다. 찬양이 찬양을 낳고, 찬양이 축복을 낳고, 축복이 축복을 낳고, 축복이 충만을 낳고, 충만은 다음세대를 영적으로 사모하게 만든다. 축복의 송가는 축복을 재생산하고 충만도 재생산한다.

정리하면,
마리아의 축복의 송가는 마리아의 송가는 사가랴의 베네딕투스를 낳았고, 누가복음 2장의 천사들의 영광송을 낳았다. 나중에 누가 복음 2장 시몬의 헌신의 찬양의 영광송을 낳았다.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패턴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권사님들은 기도, 소망, 祝福의 疏通자로 살고, 온 성도들은 사명자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위리 모든 성도들은 이 4가지 소통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뚜벅뚜벅 걷기를 소원한다. 모든 어두움과 슬픔이 사라지길 소원한다. 축복의 채널로 바꾸어 가자. 이 코로나시대에 우리가 전력투구했음을 여기고, 교회와 다음세대를 지켜 주시길 기도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소망 축복 사명의 소통 자가 되게 기도해야 한다. 목자의 심정을 깨달아 평생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

 

 

 

 

 

 


[사랑의교회 3분 미라클] "천하의 왕의 귀환"(The Return of Our Cosmic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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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년 12월 25일)
제목: 성탄 축복 송가
말씀: 누가복음 1:67-79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

0.1 성경에 예수님의 ‘초림’에 대해 456회, ‘재림’에 대해 1,518회 기록되어 있다.  3배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약속대로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약속대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기대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 본문해석 ]
1. 본문은 사가랴의 축복 송가, 베네딕투스(Benedictus)이다.
라틴어 ‘베네딕투스(Benedictus)’에서 ‘축도’를 의미하는 영어 ‘Benediction’이 유래했다.
-세례 요한은 아버지가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다. 여기서 축복이라는 원어가 유래한 것이다.

Ⅰ. 축복의 송가를 부르면 다시 살아난다
1. 고통스런 삶의 여정 가운데서도 축복하면 살아난다.
1) 마리아의 축복 송가 (눅 1:46~55)
-누가복음 1장이 축도의 개념의 내용이다.

2) 마리아가 엘리사벳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순간(눅 1:42) 그녀의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눅 1:46).
여기서 그 유명한 ‘마그니피카트(Magnificat)’가 나왔다.
• 누가복음 1:46, 47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2.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을 찾아가 축복을 선포할 때 수많은 영혼들이 치유받게 된다.
1) 힘든 상황에서도 축복을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3. 욥은 친구를 축복함으로 축복의 수혜자가 되었다.
• 욥기 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4. 축복 선포의 말씀이 체질화되어야
• 민수기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 누가복음 10: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다른 사람을 위해 축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항상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Ⅱ. 축복을 하기 위해서는 충만해야 한다
1. 9개월 동안 사가랴의 입술이 닫혀 있었지만, 대신 ‘찬양 충만’, ‘성령충만’으로 ‘마음의 입’이 열렸다.

• 로마서 15: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2. 67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간구함,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신다. 평강주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신다.

민수기 6:27절에 복을 준다고 하신다. 어려운 사람들, 안통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누가복음 10'6절에도 평안을 구해주고 내 마음에 안든 사람일지라고 축복해 주어야 한다.

직장을 위해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축복해 주길 바란다. 자녀들에게도 그들의 영혼에도 골수에 새겨지도록 축복하고 기도하라. 살아나고 기적이 일어남을 확신하여야 한다. 전제 조건은 충만함이다. 본문에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잉태를 주신다.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의 간구함을 들린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때에 따라 응답하신다. 하지만 늙었는데 무슨 아기냐고 한다.

그렇지만 9개월을 기다리라고 하신다. 엘리사벳이 잉태하지만 믿음이 충만하도록 하신다. 사가랴가 벙어리로 하나님은 만드신다. 그것은 내 말을 믿지 않으신다고 하나님께서 믿음의 용량이 찰 때까지 기다림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주 안믿어도 응답하신다. 그러나 믿음의 용량이 차도록 인내하신다. 이제 9개월 뒤에 요한이 태어나게 하신다. 엘리사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아빠 사가랴가 입이 열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데,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서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백성을 속량하시고 구원을 주신 것이다. 남들을 축복하려면 믿음이 충만해져야 한다. 믿음과 성령이다. 사가랴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자였다. 그에게 다만 성령이 충만하지 않았다. 우리 성도들도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분들도 있다. 믿음이 약하고 성령 충만이 약하면 모두가 부족하니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세례 요한도 성령 충만이 된 것처럼, 믿음 충만, 성령충만 기쁨 충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나의 영을 나의 자손에게 나의 복을 모두에게 충만한 은혜가 넘치도록 축복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충만을 받도록 해야 한다.

-로마서 15:29-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바울은 이야기 한다. 이 성탄에 성령충만을 받아서 가족과 형제 지인에게 나누기를 바란다.
사가랴의 베네딕투스를 재생산이 되었다.  형제 자매들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믿고 그렇게 축복하고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 요약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 ( 1:67-79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잘나고 권세 있는 자, 교만한 자를 결코 긍휼히 여기지 않으으신다. 오히려 비천하고 못난 자, 겸손한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그래서 사가랴는 그 백성을 속량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구원하신 사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신앙의 부모는 자녀들이 주님의 구원 사역에 쓰임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Ⅲ. 축복을 받은 자의 사명
내일 새벽에 나누어야 한다. 오늘 너무나 코로나 상황중에 소중하기에 충만한 말씀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6시15분 나누기를 바란다.

1.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

• 누가복음 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2. 참된 성탄의 은혜는 주님의 재림의 그날을 사모하고, 깨어서 기다리며,
기도하면서 준비하는 마음을 각성하는 데 있다.

3. 당신의 자녀를 축복함으로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 (민 6:27)

[ 결 론 ]
1. 축복은 저주를 물러가게 하고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

• 누가복음 1:78, 79 “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 이사야 35: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 시편 107: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 2000여 년 전의 ‘첫 노엘’이 2000년 후의 코로나 시대의 ‘뜻 깊은 노엘’로 재현되기를



                       ★ 주일예배(주후 2020년 12월 25일)"성탄 축복 송가"(오정현 목사님)-사랑의교회 ☆















 

 



        ★ [사랑의교회] 나는 찬양하리라/참 반가운 성도여/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내 구주 예수님/기쁘다 구주 오셨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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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년 12월 23일)

제목: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말씀: (레위기 10:1-7절)
설교자: 전승현 부목사님. 
--------------------------------

성경 말씀을 읽다보면 성경에는 참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이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또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가 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에 때로는 은혜보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은혜보다 마음에 큰 부담감이 있을 때가 있다. 말씀을 읽었는데 말씀 가운데 편치 않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큰 찔림이 있다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오늘 본문 레위기 10장 1-7절은 개인에게는 은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음에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담감과 불편함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나답과 아비후이다. 나답과 아비후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 그냥 평범한 히브리인이 아니었다. 그 12지파 가운데에 13개이지요. 12지파에 속하지 않고 따고 구별되어 있던 레이지파에 속했던 사람이고 또 이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아들로서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님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즉사를 당한다. 그 자리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죽게 한다. 너무나도 끔직한 사건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말씀은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사장인데 성막에서 거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했던 자들이다. 하나님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비참한 현실인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며, 도대체 나답과 아비후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말을 듣고 죽임을 당하게 될까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코로나로 말미암아서 성전에 가까이 나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우리 말씀을 통해서 반면교사 삼고 은혜 나누는 이시간 되기를 바란다.

첫번째-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의 그 거룩함을 분별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오늘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듣지 않았기
때문이며 잘못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절에 ~~
- 짧은 한 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한 3가지가 
살펴볼 수 있다.

1. 나답과 아비후가 분양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주의 일을 감당했던 제사장은 맞지만 제사장이 감당해야 할 일과 감당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분양단에 분양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제사장에게
맡기신 일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맡기셨냐면 바로 아버지인 아론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대제사장이 할 일인 일을 월권을 하여서 하였다는 것이다.

2.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향로ㄴ를 옮기는 것은 정금으로 만든 그릇인 향로가 따로 있었다.
.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무런 그릇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져다가 이 불을 
옮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잘못된 모습이다.

3.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향단에 분양을 할때에 번제단에 불을 향로에 담아다 성소에 들어가 그 분향 단으로 분향을 해야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번제단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기 집에서 그냥 쉽게 볼 수 있는 불 종류를 하나님 앞에 분향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에 불이 나와 그들을 불사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나답과 아비후가 왜  이러한 실수를 했을까요??? 늘 본문에 10장에 보면 8장 9장 10장이 이어져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일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어찌보면 책무를 담당해야 하는데 거기에 메너리즘에 빠져서 지금 실수를 했을까요? 그렇지 않다. 8장에서 아론의 아들들이 위임식을 제사장들의 위임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직을 받았을 때, 그들이 그 에봇옷을 입은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 저역시 10여년 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서 머리에 안수를 받고 목사 가운을 받았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이관대 
목사로 나를 세우셨느지요? 했다. 주의 일을 감당을 하게 하심을 목숨을 다해서 하겠다고 결단했다. 나답과아비후는 잉크도 마르지 않았던 순수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메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실수로 이렇게 됐을지를 9장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성막도 짓고 여러 성물들도 만들고 세사장 위임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나서 레위기 9장에서 첫 제사를 드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제사를 드리는데 그 감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제사보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던 제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 후 출애굽하여 처음으로 드렸던 제사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서 십의 광야에 있을 때에 아픔이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특죄하게 된다.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시게 된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우상을 만들었는데 행여나 하나님께서 이 광야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까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혈육들이 죽어갔던 슬픔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두려움과 슬픔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9장 하반절 23-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제사를 드렸던 그 제사를 흠향하시는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기뻐한다. 두려웠던 것 그리고 슬펐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순간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베풀었겠는가? 아마도 축제를 벌렸을 것이다. 그리고 축제를 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술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10장 이후를 보면 아론과 아들들에게 주시는 주례이다. 9절에 -이 나답과 아비후 외에 동생들도 같이 술에 취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것에 열심은 있었던 것 같다. 그들 나름대로 아버지가 해야 될 일들을 그들이 대신하였고, 그리고 향로를 하나님 앞에 드릴 성물 향로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불을 가지고 분향을 해야 되는데 그들 나름대로 열심을 있었으나 분별을 못했다. 술취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대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특죄를 하게 되고 하나님이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10절에 말씀하신다. - 나답과 아비후는 술취함으로 거룩함을 분별하지 못했다. 그 거룩함을 분별하지 못했기에 결국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는 거룩하고 속된 것이 서로 반대의 개념, 상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속된 것이 무엇인가? 거룩함을 알기 이전에 우리가 속된 것을 살펴보면, 히브리어 원어를 보게 되면, 이 속된 것으 하울이라고 말한다. NIV 영어 성경에는 이 속된 것을 무엇이라고 하냐면 COMMON이라고 표현한다. 바로 일반적인 것이다. 흔한 것, 평범한 것이다. 그 거룩이란 말씀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그 거룩의 반대의 개념은 추하고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 속된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그 불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분향했다. 그들이 가져간 번제단에 있는 불과 그들이 가져간 불이 화학적, 물리적으로 차이 있었겠나? 우리가 보기에는 같은 불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래요. 우리의 삶도 그렇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어떠한가?

우리의 모습도 세상 사람들고 별반 다르지 않다. 똑같이 먹고 자고 또 일하고, 학생들은 똑같이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함을 나타내야 될 거룩한 모습은 무엇이고, 우리가 분별해야 할 거룩함이 무엇인가? 우리는 때로 그 거룩함에 대해서 그 거룩함을 너무 작은 의미로 축소하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생활이라 알면 우리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그렇게 기도하고 말씀보고 찬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체 10%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그 90%는 그저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의 모습인가이다. 아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될 거룩함의 모습은 바로 그 가운데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슨의미이냐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모습은 같지만, 그러나 삶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같이 먹고 마신다 할지라도 그 건강을 위해서도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이 식물을 통해서 건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모습, 그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이라는 사실이다. 거룩이란 것이 고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주어진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려가는 모습이 바로 거룩함이다. 바로 분별하는 모습이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모습이다.  교구에 안수집사님과 권사님은 사랑부를 섬기시는 분이 계시다. 그 두 분을 심방하면서 여쭈어 본 기억이 있다. 그때 두분은 대답하신다. 목사님, 그 사랑부를 통해서 더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새 힘을 얻는다고 대답하셨다. 몸에 육신에 연약함을 가진 자들의 지체들을 돌보는 것이 힘들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분은 말씀하신다. 최소한 사랑부 지체들이 육신의 장애는 있을지 모르리만 예배 드리는 순간 만큼은 그들이 비장애인이고 내가 장애인임을 느끼게 된다고 대답한다.  사랑부 지체들이 찬양을 할 때에 하나도 맞지 않지만, 화음이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부부는 목청껏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을 부르짖는 그 지체들을 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외치는 것을 너무 간절히 느끼게 되었다. 거룩이 그렇다. 어떤 것으로 좋은 것으로 꾸민 것이 아니다. 부족해도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거룩함을 분별한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것을 분별하지 못했다. 물론 술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기 못했고, 하나님을 결국 가까이 하지 못했음으로 말미암아 그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둘쩨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그것은 하나님의 나에게 맡기신 관유를 수행할 수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 즉~~ 획막에 나가지 말라고 한다.
모세와 아론과 그의 두 아들은 죽었고, 세 번째, 네 번째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주는 말씀이다. 너희에게 관유가 있은즉 회막에 머물라고 명령하시고 있다. -바로 관유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리브 기름에 향유와 몰약 계피를 섞어 만든 기름이다. 그리고 이 관유는 성막에 성물에 바를 때,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세울 때에 사용한다. 머리에 부은 것이 관유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성경에서는 이 관유를 함부로 만들면 죽임을 당한다고 말씀한다. 관유는 오직 제사장들만 만들고 관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두 아들들에게 그러니까 조카들에게 말하고 있다. 명령한다. '관유가 있은즉'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형이 두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슬펐을 것이다. 본문에 6절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에게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고 한다.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을 못하게 하신다. 슬픔을 이기라고 한다. 그 이유는 관유가 너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각자의 관유가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말씀으로 그 관유가 섬김의 자리이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책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훈련생들에게는 훈련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관유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상황이나, 여건으로 말미암아서 그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것, 내 목숨을 다해서 감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나아가는 제자되고 자녀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어해야 한다. 슬픔조차도 이기라고 말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셋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어떤 자인가?
-앞에 두 말씀을 뒤집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어린 자녀들을 보면, 엄마 아빠 곁을 떠나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아빠엄마 껌딱지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 아이가 엄마아빠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아빠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언제나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한다. 당연히 믿지요. 때론 우리가 삶 가운데 의심을 할 때가 참 많다. 우리가 이틀 뒤면 성탄절을 보내게 된다.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가?, 독생자 예수, 성자 하나님이 그 육신을 이끌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성탄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신다. 하ㅏ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성자되신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역하셨던 모습을 보라.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예수님이 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시고, 예수님이 먼저 병든자와 약한 자를 찾아가셨다. 가까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삭개를 봐도, 수가성 여인을 봐도 알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성경을 통해서 다 살펴볼 수 있지만 요한 복음 21장에게 나와있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사건이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계신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그 사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을 베드로가 모른다고 했는데도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는 나를 사랑하냐고 하신다. 세번의 질문을 하시고 계신다. 뒤끝 장렬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 예수님은 인격적이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1장 15절에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하시는데 조반 먹은 후의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침을 차려주시고 말씀하신다. 그 질문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이 질문을 식사전에나 식사 중간에 했다면 베드로가 어떠겠는가?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혼낼때는 혼내시더라도 먹이고서 혼내심을 본다. 인격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우리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나를 사랑하냐고 세 번을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해서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듣고 기록해 놓았는데,,, 그저 아람어에서 헬라어로 옮긴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아가페와 필레오로 쓰고 있다. 아마도 다른 단어를 쓴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 대화했던 의미와 의도가 달랐음을 보여주고자 다른 단어를 썼다고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세번의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은 동일하지 않다.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고 하신 것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을 이 비교 선상에 올려놓고 한 말이 아니다. 바로 베드로를 올려 놓고 있다. 베드로에게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많이 따라왔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바로 너인 베드로라고 질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냐고 하신다. 그때 아가페라는 말을 쓰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결국에는 이 질문이 "베드로야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자는 바로 너이겠지?"라고 하신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하냐고 질문하신다. 베드로는 대답에 필레오로 하고 있다. 친구를 사랑하듯이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신다고 말하고 있다. 두번째도 앞에 나온 조건이 빠지고 아가페로 하신다.

그때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것을 대답하며 친구를 사랑하듯이 말한다. 세번째는 아가페로 질문하시지 않는다. 이제는 필레오로 질문하신다. 네가 친구처럼 정말 사랑하냐고 하신다. 그때 베드로가 다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신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을 질문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자 질문을 하셨는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해보면 어떤가? 내가 사랑한 만큼 그렇게 해주길 원한다. 그것은 대단히 개인주의적이다.  사람이 하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사랑 중에서 절대적 사랑은 바로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할 때 자녀들이 사랑을 하지 않아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생명도 바칠 수 있다. 자녀가 나를 위해서 생명을 위해 바치는 자는 없다. 자녀에게 내가 그 만큼 사랑한다고 알아주라고는 할 지는 모르지만 동일하게 사랑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질문이 너도 목숨도 아끼면서 나를 사랑하라고 강요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3번의 질문을 하신 것인가? 목사님의 딸이 4살인데 아빠가 나를 좋아하냐고 한다. 너무 자주하면 장난이 치게 된다. 아니 안 좋아 한다고 했더니 다시 말해 보라고 한다. 결국은 대답은 좋아하는데 조금 좋아한다고 대답했더니 나는 아빠를많이 좋아한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다시 요한 복음을 묵상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질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것인가? 지금 갈릴리 바다에서 그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가? 세번이나 부정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고 할때, 예수님은 사랑하냐고 질문을 하신다.

그 질문이 아닌 예수님은 모두의 질문이 아닌 고백이다. '베드로야 나는 너의 친구란다' 하시는 것으로 묵상되었다. 너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신다고 하신 말씀으로 여겨졌다. 그 이후에 모습을 보면 베드로가 에수님께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베드로에게 나아오셔서 만져주시고 만나 주시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멀리 계신다고 느껴져도 주님을 만나겠다고 하면 돌아서는 그 순간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것을 믿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이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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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 즉 제단에서 사르는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을 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들은 직무를 다하려는 열심이 있었지만 잘못된 신앙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봉사도 나 자신의 판단이나 경험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과, 명령에 따라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불이 삼킴으로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 이처럼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제사를 소홀히 한 죄는 중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아론은 두 아들의 죽음 앞에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현재 벌어진 사건을 묵묵히 인정했다.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에도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의 손길을 인정하며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 믿음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부활절, 성탄절을 모두 현장예배를 못드리고 있다. 하나님 전에 나아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했는지를 생각해 보고 낙망하지 말고, 그러한 삶가운데 주님은 함께 하심을 말씀하시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상황을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도록,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살아계신 한 분만을 붙잡는 자 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무리 되어지는 이 시간들이 주님 앞에 온전히 나아갔는지 회개하게 된다. 그 가운데 주님 앞에 부족하지만 이 말씀으로 기억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자 되기를 사모하며 주님이 항상 먼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찬송하며 예배하기를 기도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이 어려운 코로나 시기에도 주님과 늘 가까이 하여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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