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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예배(주후 2021년 11월 24일)
제목: "새생명 축제"
말씀: 요한일서 2:15-17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사회: 이원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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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반갑습니다. 사랑의교회를 섬기는 이 원준 목사이다.
이 자리에 한 분 한 분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르겠다. 오늘 이 자리는 초청되어 오신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

저희가 준비한 자리이다.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그 예수님의 사랑과 아버지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날마다 샘솟는 그 기쁨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지, 사랑하는 여러분과 꼭 나누고 싶어서 오늘 이 잔치를 정말 오랫동안 기다리고 고대하고 준비해 왔다.


그래서 그토록 기다리던 여러분이 우리 곁에 앉아 계시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자리는 이미 풍성한 잔치의 시작이 되었다. 깊어지는 가을 나무에 걸려 있는 색깔의 변화와 이제 흘러가는 시간들과 또 우리의 삶이 변화들이 이제 흘러가는 시간들과 또 우리의 삶이 변화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 가을의 풍성함보다 더 넓고 높고 깊은 여러분을 향하신 그 하나님의 오늘 그 나뭇잎 색색만큼 다채로운 모습으로 만나실 수 있는 그런 잔치가 되길 소망한다. 여러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모든 사랑을 꼭 나누는 그런 시간이기 때문에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은 선물과도 같은 그런 시간일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여러분께 선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오늘 이 시간 하나 하나 열어 갈 텐데, 마음을 활짝 열고 저희가 준비한 이 선물을 잘 받으시는 그런 마음으로 함께해 주시면 여러분이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함께 오신 분들과 또 앉아 계신 분들과 한 번 따뜻하게 인사를 나누심 한다. 우리 서로 마주보시면서 축복의 마음을 담아 전하면서 인사합시다. "축복의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서로 마주 보고 웃는 너무 좋다. 한 번 더, "함께 해서 너무 행복합니다." 이렇게 인사합시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이 세상에서 찾을 수가 없던 행복을 뛰어넘는 기쁨을 오늘 저녁에 한 분도 빠짐없이 충만히 맛보시길 소망한다. 여러분께 준비한 것을 첫 번째 게스트를 소개하겠다.

한양음대를 졸업하고 독일만하임 공립 음악대학 석사졸업하고 최고 연주자 과정을 수료 후에 2013년 제6회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을 수상하고 오페라 '라보엠', '사랑의 묘연, 카르멜', '뮤지켤 팬텀', '안나케레니나', 등 수많은 작품에서 주역과 호평을 받고 있는 매우 탁월한 아티스트가 오늘 이 강단에 왔다. 바로 소프라노 김순영님이다. 오늘 이 사랑의 교회 새 생명 축제에 첫 시간을 열어주실 것이며 이어서 김재원 아나운서님과 이성미, 조혜련님의 토크쇼가 이어서 진행이 될 예정이다. 순서 순서가 너무 기대가 된다.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껏 즐기시길 바란다. 하나님께 여러분에게 전하고 부으시길 원하시는 사랑을 받는 복된 시간되길 소망한다.

1. 김순영-소프라노
2. 김재원-사회
3. 이성미, 조혜련-게스트



▶김재원 아나운서입니다.

저는 사랑의교회 목양 8팀 105교구 마포서대문 남자 12다락방 순장을 맡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새 새명축제에서 뵙게 되어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무엇보다 생애 최초로 교회 문턱을 넘으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실 아주 어색하고 낯설 것입니다. 뜻을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단어가 다르게 사용하는 것 같으실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다락방이라는 표현, 순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요. 저희가 말하는 다락방은 이렇게 큰 교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녀도 사는 집을 중심으로 3-6명까지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삶을 나누고 또 성경 공부를 하는 그런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순장이라는 사람은 바로 그 모임을 진행하는 사람이며 이 말 즉 슨 제가 이 교회를 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마 지금쯤 엄청 궁금하실 것이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외투를 입고 나온 것일까? 자 질문을 드리겠다.

1번, 추울까봐 걱정되어서,

2번, 습관적으로,
3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사실 셋 다 맞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제가 외투를 입은 것이 좀 우스워 보이실 것이지만 사실 추울까봐 한 걱정, 우리가 하고 있는 걱정의 96퍼센트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에 대한 걱정이다. 그리고 두 번째 습관적으로 우리는 불필요한 것을 갖고 다닌다. 사실 제 눈에는 여러분도 그런 외투를 한 벌씩 입고 계실 것으로 여긴다. 바로 걱정과 불안의 외투이다. 어쩌면 죽음이 걱정되기도 하고 또 질병에 걸릴까봐 불안하기도 한다. 아울러 자녀의 미래가 걱정되기도 한다.


이제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 걱정과 불안의 외투를 벗어버리시길 바란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걱정은 정말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습관적으로 입고 다니는 그 외투를 지금 벗을 때이다. 저도 벗겠다. 자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여는 그런 역할을 하러 나왔다. 열린 여러분의 마음에 저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의 변화, 생각의 변화, 태도의 변화, 미래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해서 그래도 아침마다 보는 얼굴이 이렇게 나와 있다.


이제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 걱정과 불안의 외투를 벗어버리시길 바란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걱정은 정말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습관적으로 입고 다니는 그 외투를 지금 벗을 때이다. 저도 벗겠다. 자 이렇게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여는 그런 역할을 하러 나왔다. 열린 여러분의 마음에 저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의 변화, 생각의 변화, 태도의 변화, 미래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해서 그래도 아침마다 보는 얼굴이 이렇게 나와 있다.


-모든 것이 어색할 것 같아서 여러분에게 익숙한 얼굴들을 모시고 저희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한다. 누가 나올지를 다 아실 것이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이성미씨, 조혜련씨를 큰 박수로 모시겠다. 



중략~~~
오늘 두 분을 통해서 유독 공감 가는 부분이 있어서 부모님의 건강 혹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 또 내가 잘 해보려고 했는데 뭔가 느끼지 못하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또한 자녀와의 문제, 이런 문제들이 여러분이 하나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이실지 모르겠다. 우리 이 자리에 처음 오신 분 들게 한 말씀씩 하신다면

조혜련님-저는 최근에 기도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신이신데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정말 내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넌 내 자녀이다. 내 딸이야' 라고 자녀 삼아주시고 아버지 되심에 그게 너무 감사하다. 울컥, 너무 든든하고 하나님께 그래도 돼냐고 했다. 믿어지는 자체가 기적이어서 자고 일어나면 너무 감사하다. 더 이상 어떠한 것도 바랄 것이 없다. 여러분도 든든 아버지를 가지셨으면 좋겠다.


김재원 아나운서님-사실 처음 들으신 분들이면 이 표현이 조금 어려울 수 있으실 것이다. 낯설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든든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으실 것이다.

이성미님-저는 '오늘 이야길 들어서 참 좋았어, 다음에 시간 될 때 믿을게.', 그런다면 그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심 좋겠다. 왜냐하면 좋게 이야기 한 것인데, 내일이라는 게 허락 되어지는 것도 기적이다. 오늘이 있다는 것, 오늘이 귀한 시간에 여기 오셨다는 것, 저는 이 시간이 여러분들이 오늘 한 번 속는 셈 치고 내가 하나님께 쓱, 밀어내 주시면 하나님은 그 손 꽉 잡으실 것이다. 아멘, 아멘, ~~!!!


김재원 아나운서님- 사실 저희가 여기에 나와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오늘 처음 오신 여러분을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저희가 여러분의 편이 되어 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모두 예수님 편이 되자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여러분 편이시라는 걸 알려드리기 위함이다. 이 험한 세상사시면서 그동안 얼마나 외로우셨으며 또한 힘드셨는가? 누구에게 고민 될 일들이 많으실 것이다.



중략~

▶오정현 담임 목사님
-이 아름다운 밤을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아까 찬송하신 김순영 자매는 대한민국의 최고 수준의 소프라노인데 주님 앞에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럴 때 회복시켜 주심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 다음에 김재원 집사님과 개그맨 두 분 다 가만히 옆에 들으면서 더 이상 내가 설교가 필요가 있겠나 생각해 본다. 정말 아침마당이 아니라 은혜로운 저녁마당이다. 주님을 찬양 드린다. 너무 귀한 분들을 보내 주셔서 감사드린다. 이성미 집사님과 조혜련 자매에게 감사드린다. 우리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확신을 하게 되면 잊어버리지 않고 영원히 가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나 이것보다도 우리 생명과 소망이 되시고 지금도 살아 움직이시는 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이 말씀을 통해 확증을 하면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변함이 없이 끝까지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좀 하고 오늘 준비해온 곳보다도 반으로 줄이겠다. 요약을 하겠으니 집중해서 하나님 말씀에 뭐라고 하시는지를 듣기를 바란다.


오늘 죽음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오늘 이성미 집사님 같은 경우는 죽음 앞에서 자신을 적나라하게 하나님과 대면하고 그래서 죽음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저희 교회 같은 경우는 일 년에 장례식이 칠백여 번 정도이다. 별로 많지 않는가? 그저 한때는 장례 담당 목사님이 자격이 건강할 것이었다. 이게 너무 애를 써서 그리고 우리 교회가 크리스천에서 기독교에서 호스피를 처음 시작한 교회이다. 그래서 전에 호스피스 담당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제가 물었다. 임종을 얼마나 맞이했냐고 하니까 3천 명 정도의 임종을 만났다고 한다. 3천 건의 죽음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이라는 것을 어떤 생각이 드냐고 하니 그 목사님이 예수 믿지 않는 분이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과 나의 관계가 회복되고 주님을 모시고 구세주로 모시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죽음이 형벌이나 두려움이 아니고 죽음은 영원한 치유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와 닿았다. 죽음은 이터널 히어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벽이 아니라 죽음은 새로운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밤 죽음이 우리에게는 영혼한 치유가 되기 위하여 오늘 너무 귀한 시간이니 한 말씀을 통하여 정리하고 맺으면 좋겠다.


-죽음은 영원한 치유.
이것은 3천 명의 임종을 경험한 분이 확신 있게 말씀한 것이니 더 와 닿아야 한다.


오늘 성경에

*요한일서 2:15-16,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3가지로 요약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 딱 세 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에 아담의 범죄 할 때에 선악과를 먹음직하고(육신의 정욕)과, 보암직하고(안목의 정욕)과, 하나님 같이 되리라(이 생의 자랑)이다.


또 예수님을 유혹했던 사탄이 그 굶주리시고 금식하고 있을 때에 도리떡덩이와 비교할 때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전하만국을 보여주고 그것이 다 된다고 그러고 이 생의 자랑은 그리스도인들은 다 아는 것인데 똑같이 시험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나갈 때도 그 모든 것들의 핵심은 육신의 정욕과-먹는 문제,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었다. 자기 프라이드, 이런 것들이 다 비슷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모든 인생의 종류를 정리하면 딱 3가지이다.


첫째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따라서 첫 번째는 어떤 인생이냐면 삶의 목표가 뭐냐면 쉬고, 놀고, 즐기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가 뭐냐면 여름 바캉스가 목표이다. 여려분, 7월 8월 달에 파리에 가면 파리 사람들은 전부다 남불이나 터키나 이런 데에 가서 쉬고, 한국 사람이나 아시아 사람들이 파리를 주름잡고 다닌다. 제가 20여 년 전에 뉴질랜드에 가서 제 3의 도사라고 있는데 남부에 크라시 처치이다. 아름다운 도시이다. 나중에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너무 아름다웠다. 찰스 황태자가 거기서 고등학교를 나왔다. 참 아름답고 공원도 좋았다. 20여 년 전에 한국에서 이민을 뉴질랜드에 많이 갔다. 왜 많이 갔냐면 주로 간 사람들이 전문인들이다. 치과 의사, 프로그래머, 아주 전문인들이 한국에서 너무 삶이 너무 치열하고 의사들도 힘들고 해서 컴퓨터로 머리가 아파서 좀 쉬겠다고 그러면서 이민을 갔는데 이민 가서 어떻냐고 했더니 6개월 동안 낚시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나고 하니까 코피가 나더라는 것이다. 노는 것도 피곤했다는 것이다.. 삶이라는 게 쉬는 것, 즐기는 것, 바캉스 하는 것이 목표인 소위 서바이블 라이프, 연명하는 인생,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이 자랑이다.


두 번째는 석세스 라이프(Success Life), 세상에서 입신양명인 성공한 사람이다. 재벌들이나 잘 되는 사람들에게 가보면 잘 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보면 그 깊은 내면과 그 집안을 들여다보면 그렇다. 돈이 없으면 가난이 원수, 돈이 많으면 혈육이 원수이다. 죄송하지만 이것을 아실지요... 혈육이 원수이다. 그 삶의 커튼을 열면 문제없는 집안이 없다. 아무리 잘나가도 그렇다. 주님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요한일서 2:17,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주님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영원히 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거한다는 것은 죽음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는 영원히 거하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시그니피컨트 라이프이다. 우리는 서바이블 라이프도 아니고 세상의 석세스 라이프가 아니라 우리는 한 걸을 더 올라가서 시그니피컨트 라이프(Significant Life), 죽음을 극복하는 인생, 그래서 오늘 이밤 여러분들은 죽음이 겁나지 않고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크시 은총의 대상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길 소망한다. 우리 교호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냥 우리는 죽음 그러면 육신의 죽음을 대체로 이야기 한다. 70, 80, 90세가 되면 죽는다. 사실은 성경 전체를 보면 세 가지 죽음이 있다.

세 가지 죽음이라는 것은
1. 육신의 죽음,
2. 영적인 죽음,
3. 영원한 죽음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순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지 아까 말한 대로 주를 섬긴다는 것이 이 세상의 어떤 광명의 영이다. 세상의 권세다. 어떤 뭐 무슨 우리는 짓누르는 모든 것들을 탈피할 수 있는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신다는 것은 경참동지(驚天動地-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는 뜻) 한 사건이고 이 세상 최고의 사건임을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살다가 인생 80-90으로 산다. 그런데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죽음 뿐 아니라 허물과 죄로 이미 영적으로 죽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 동물은 그냥 좋은 것 주면 끝이다. 여러분 돼지가 고민했다는 그런 것 들어봤는가? 돼지가 그런 사상적으로 집중한다는 것은 없다. 돼지는 좋은 환경이면 끝이다. 인간은 절대로 돼지가 아니다. 절대로 개도 아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의 문제, 주님과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육신의 죽음 뿐 아니라 영적 죽음이 오고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영원한 죽음이 오는 것이다. 죽음 이외에 끝이 아니고 죽으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펼쳐지는데 우리는 영혼의 존재인데 이 홍시가 일 주일 뒤에 다 말라지면 불태우는 것처럼 영원한 죽음이 계속되는데 그 영원한 죽음 가운데서 영원히 살 것이냐, 영원히 죽을 것이냐이다.


최소한의 확률이 50프로이다. 그것을 준비 안 했다가 여러분이 인생이 다 끝난다. 여기 지성인도 세상 적으로 잘 나가는 분들도 많이 계시고 하겠지만. 다 그렇지만 한 번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육신의 죽음, 영적죽음, 영원한 죽음 가운데 뭘 육신의 죽음, 안 죽으려고 다 난리치지만 영원한 죽음과 영적 죽음을 위하여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라이브 한 것이고 생각을 더 집중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 육신의 죽음과 영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죽음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그래서 중요한 게 요한복음 11:25절을 보면, 무슨 일이 있는지를 읽어 보자.


*요한복음 11:25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우리는 육신의 죽음, 영원한 죽음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이 왜 그러시는가?


*빌립보서 2: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이다. 우리가 치러야할 값을 주님이 대신 치루셨다. 그렇게 하신 것이다. 내가 무슨 내가 죄인이가? 내가 무슨 죄가 있을지 모르는데, 내가 오 씨인데 내가 사명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우리 부친이 오 씨니까 오 씨인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오씨가 싫었다. 오징어, 오강, 뭐 이런 별명으로 불리어져서 싫었다. 그런데 구원 받고 보니까 오 씨가 괜찮은 것 같다. 오!! 주님, 오 하나님, 오바마, 오바마는 저와 생일이 같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죄인이 아니라도 소용이 없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그 아담의 불순종으로 전가가 된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우리는 죄를 지어서도 죄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려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 하셨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3:18절에 보면


*베드로전서 3:18,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불의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대신 죽으셨다. 대신 갚으셨다. 소위 자리바꿈의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하여야 한다. 이걸 믿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과 '뜻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영혼의 귀와 영혼의 눈을 열어서 보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 밤에 그렇다는 것, 이 자리에 온 것 자체가 하나님이 부르셔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이 자리에 왔기 때문에 이 말씀이 깨달아지게 하시고 내 의, 내 능력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셔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걸 믿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임을 말할 수 가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고린도후서 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죄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깊이 깨닫고 은혜를 받으면 그냥 눈물이 콧물이 나고 그냥 감사하고 우리가 할 일은 감사하고 믿고, 마음을 열고 주님을 구제주로 모시면 그 순간부터 삶의 주소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결론은 예수님 믿지 않는 분들은 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분들은 죽음이 죄 값으로 나타나는 형벌이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 이 땅에는 죽음과 영적 죽음이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의 해결됮 않는 분들은 그것이 그렇지만 오늘 이것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우리가 고백하게 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즉음이 형벌이 아니라 오매불망 사모하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벽이 아니라 죽음이 새로운 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걸 믿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죽는 순간이 공포와 고통의 순간으로 얼굴이 엉망이 되고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가장 평안한 순간이 된다. 제가 5주 전에 저의 모친상을 당했다. 제가 장남이니까 저희 모친의 시신을 수습을 했다. 우리 어머니 얼굴도 닦아드리고 몸이 아프셔서 일주일 정도 아프셔서 돌아가셨는데 모습이 정말 평안했다. 제가 우리 어머니 닮았다. 우리 어머니는 예쁘다. 탈렌트 최지우가 우리 엄마의 조카이다. 우리 외삼촌 딸이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이것을 증언할 수 있다. 밝고 환하게 돌아가셨다. 우리 어머니는 천국에 가셨다. 저는 맏아들이다. 보면서 우리 어머니는 죽음이 벽이 아니라 새로운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의 문에 입성하심을 알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엄격하게 말하면 이 땅의 삶이 꿈이고 천국의 실체이다. 70,80,90이 이것은 꿈과 같은 인생이고 천국이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진짜 주님 만나는 그 순간 꿈처럼 있다가 주님 앞에 깨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탄성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이어주는 소망이다. 그리고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죽음은 끝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생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은혜가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 2:17,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약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우리는 그래서 새 생명 축제에 한 영혼이라도 귀하게 인도하여서 결신에 돕고 주님만이 모든 길이시며 모든 죄의 해결 자이시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되신 우리 주님을 사모하며 신실하게 무릎 꿇고 나아가야 한다. 주님을 구제주로 모시면 그 순간부터 삶의 주소가 달라지게 되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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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11월 22일)
제목: 우리 서로 기쁜 날
말씀: 누가복음 15:1~7
기도: 1부 김대규 부목사님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영광찬양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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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 오늘 와 니까 강단에 조이(Joy)라고 해 놓았네요. 제가 부탁해서 한 것일까요? 아님 그냥 했을까요?? 알아서 했다고 한다.ㅎㅎ LED로 이런 집 모습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게 뭐냐면  Wecome Home!!~~그래서 오늘 저녁부터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이 부르시는 영혼의 귀환이 있기를 바란다. 말씀은 살아 있는 것이다. 예배의 영광과 살아있는 말씀을 통하여 오늘 몸과 마음과 영이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자 오늘 본문을 읽었는데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목자가 찾기까지 찾는다는 내용이다. 잘 알 것이다. 이 말씀을 읽고 난 다음에 여려분들의 마음에 어떤 반응이 있는가? 어떤 분들은 아니 한 마리의 양을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가는 가는 것이냐 한다. 물론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잘 보호하고 있지만 그게 좀 합당하지 않다. 가당하지 않다. 이런 분들이 있고, 또 어떤 분들은 정말 한 마리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까지 찾으시는 그런 분들이 참 필요하다. 이런 마음의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하셨는가?

누가복음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누가복음 15:7,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가 주님 닮아가고 제자훈련, 사역훈련하고 순장으로서 영혼을 섬기는 것이 너무도 귀한 일이다. 그러나 하늘의 축복은 한 영혼이 예수 믿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더 귀하다. 진짜 기쁨은 한 영혼이 구원 받고 하늘 잔치는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다. 이 말씀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는가? 1절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말한다.
 
오늘 1-2절을 보면,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모든 세리와 죄인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 말씀을 듣는 대상들이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유대 나라에는 하층들이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유대 나라의 지도층이나 리더들 그룹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신분을 막론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계층을 관통해서 주시는 말씀이었다. 그렇다면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는 음성이 될 줄로 확신한다. 잘 아시는 대로 유대 나라는 목축업을 하는 나라였다. 우리처럼 농경사회가 아니고 유대 나라에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한국에서 양 치는 것과는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한국은 양을 치다가 양이 말을 안 듣고 이러면 양에게 욕도 하고 양을 때리기도 하고 안 되면 말 안 들으면  잡아 먹고, 양꼬치도 해 먹는다. 유대인들의 있어서는 양은 가족이었다. 여러분 나단 선지자가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한 후 와서 다윗을 뭐라고 할 때 '네가 딸 같은 양을 그렇게 탈취했다'고 말한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가족의 관계였고 이제 목자는 양을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의로 자녀를 돌보듯이 데리고 다니다가 황혼역에 양 울타리에다 넣어준다. 백 마리쯤 되는 양을 이제 숫자가 맞는지를 확인하고 숫자가 다 맞으면 목자가 안심을 하고 그날은 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양 떼를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니다가 황혼녁에 양을 점검하는데 양 한 마리가 없어져 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15:4,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목자가 일당 받는 자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목자는 양이 왜 그랬을까를 생각하며 한 눈 팔다가 길을 잘못 들었거나 뒤처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목자의 입장에는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이 양을 어떻하면 좋겠는가!!하면서 걱정한다. 혹시 늑대의 밥이 되지 않았나, 절벽에 발을 헛뒤뎌서 낭떠러지에 떨어진 것은 아닌가? 가시덤불에 걸려서 피를 흘리지는 않은가? 이런 마음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식이 열 명이 있는데 그 자식 가운데 한 명이 사라진 것이다. 나가서 밤새도록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 헤맨다. 양을 부르는 것이다. 양아!! 양이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 순간 음매 하면서 나타난다. 찾아보니 산 기슭에 가시덤불 속에 옴짝달짝을 못하고 끼어 있어서 목자가 가서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가시가 찔리기도 하고 피를 흘리기도 하면서 양을 꺼내온다. 유대 나라 광야에 목축지역은 가시가 아주 세다. 양을 치료하여 안고 온다. 너무 좋아서 목에 양을 메고 즐겁게 돌아 온다.

*누가복음15:5,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즐거워 어깨에 메었다. 나오라고 말도 안 했는데 우리 사랑의교회 스테인드 글라스에 새긴 그 문양이 바로 목자가 양을 멘 모습이다.

*누가복음 15:6-7,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첫번째 질문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목자와 양, 유대 지도자들의 개념이 소위 하나님 나라관과 천국관이 틀렸다. 너무나 전통에 고착화 되어있었다. 그래서 이 후에 이것이 드라크마 비유로 연결된다. 우리 돌아온 탕자가 이어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본질, 하나님나라의 올바른 개념,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아주 하나님 나라의 관, 천국관, 신앙관, 이런 것들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냐면, 유대 지도자들의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이었다. 편견과 선입견이 컸다.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악한 사람은 악하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절대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선한 사람들은 죄인들과 상종하면 안 된다. 라는 그 당시 사고 방식이었다. 이것이 팽배해서 그들의 메시아의 비유, 그러니까 메시아 관도 잘못되어 있었다. 메시아는 선하신 하나님인데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지극히 선하신 분이 어떻게 천한 육신의 몸, 죄인의 몸을 입고 오시겠는가이다. 선하신다는 것은 초월자, 정복자로서 오셔야지 인간이 몸을 입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욕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여겼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몸으로 오시고 성육신 하시고 우리가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는 모습으로 오신 그 메시아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섞일 수가 없고 융합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창기와 함께 예수님이 함께 밥 먹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 분리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잘못 된 선입관 때문에, 그래서 2절에 보면, 너무

*누가복음 15:2,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ㅡ펴견이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란 헬라어로는 '후토스'라는 단어인데 번역하면 사실은 아주 경멸의 표현이다. 이놈이, 이 자식이, 이 자식이 죄인을 영접하고, 이놈은 죄인과 한패야, 하면서 그런 경멸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못마땅했다.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음식을 나누겠는가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그 한 마리 부족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고 목자가 피를 흘리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천둥벼락 같은 말씀이고 워닝 사인이었다. 왜 이 말씀이 중요하냐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믿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의 절대 주권을 믿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영적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기적도 믿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 강한 분리의식, 차별의식, 자기들만이 선택된 집단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존경도 받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탕자 큰 아들, 분리의식, 차별의식, 영적 탈레반)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예수님의 행동을 비하하는 말)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런데 그들의 편견은 강한분리 의식 차별의식이다. 잘못된 텔레반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식사를 보통 하는데 거기에 이방인들이 와서 식사를 하게되면 그것을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그걸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무나 밥을 같이 안 먹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선입관, 저 사람은 안 될거야 등. 베드로는 얼마나 하나님이 사람인가? 베드로도 유대인이기에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은 생각의 패러다임이다. 그게 보자기를 보여주시고 부정한 것을 보여주시고 먹으라고 하신다. 베드로는 못 먹는다. 나중에 하나님은 세 번이나 보여주신다. 생각의 틀을 바꾸기가 그리 어렵다. 하나님이 이제 고넬료라는 로마 사람이 복음을 듣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잘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갈라디아사 2장에 가보면 베드로가 이방인과 밥을 먹다가 유대인들이 들어왔다. 함께 받을 먹던 중 베드로가 나가버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고 이방인들과 밥먹는다고 오해할까 싶어서이다. 그걸 보고 바울이 그 행동을 듣고 질책을 하는 것이다. 네가 말이 되냐고 한다. 그러면서 그만큼 유대인들이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했다는 것이다. 쉽지가 않았다. 저 사람은 안 돼, 저사람은 구원 못 받아. 예를 들어서 기독교와 적대적인 사람들, 신앙에 아주 무관심하는 자들, 세속주의자들 자기애에 사로잡힌 자들, 자기 숭배자들, 저 사람은 안 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신가? 분리주의 사고를 타파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굶고 밤새도록 목이 쉬도록 외치시면서 찾아다니시는 그 모습을 말씀하신다. 찾도록 찾으시는 것이다. 얼마만 찾겠는가? 끝까지 찾으신다. 유대인들은 양들이 가족 같았다. 그래서 오늘 새 생명 축제에 편견을 버려야 한다. 이 사람은 안 돼, 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야, 예를 들어 기독교를 적대하는 사람들, 신앙에 아주 무관심한 사람들, 아주 세속적이고 쾌락주의자들, 그리고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 다음에는 self worshiper(자기숭배자들),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가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주는데 찾도록 찾는 다는 것은 얼마가 걸리는가? 찾을 때까지...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찾는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성군 다윗도 목자였다. 찾을 때까지 가족 같은 마음으로 찾는 것이다. 사무엘상에 다윗은 자기가 사랑하는 양이 사자와 곰에게 물려갔을 때, 그 곰과 사자의 입을 찢고 그 양을 찾아서 구해냈다. 유대인들은 양에 대해서 생명을 건다. 그러고 난 다음에 다윗은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목자라고 했을 때,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그 정도가 아니라 목자는 곰의 입에서 피를 흘려가면서 자기 양을 살려내도록 피나는 투쟁을 하고 생명을 거는 것이다. 그것이 목자가 되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어떤 경우에도 찢어질 수 없는 생명의 관계이다. 그래서 주님은 피 흘리기까지 갈보리에서 피 흘리기까지 다윗은 예표이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살려주시는 은혜가 있는 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찾을 때, 광야에 있던 그 양을 찾는데 막 딱 보면서 이 멍청한 놈아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양을 안고 너무 좋아서 어깨에 메고 기쁘게 돌아온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서 아홉 명 열 명 정도 아이들이 예전에는 많았다. 자녀가 그 중에 한 사람 한 사람 다 사랑한다. 그러니까 100프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녀들을 데리고 어느 날 놀이공원에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리면 그러면 엄마가 It’s OK!~ 하지 않는다.

그 한 명을 찾기 위해서 목이 쉬도록 찾을 것이다. 아이를 보는 순간 기쁘고 안고 너 괜찮니? 밥과 숙식을 물어볼 것이다. 그 마음보다 주님은 더욱 사랑하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오늘 말씀에 목자의 심정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를 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부 100프로 전부로 사랑하는 줄로 믿는다. 이게 복음이다. 모두가 다 백퍼센트이다. 우리를 대중, 도매금으로 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오직 사랑할 자가 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주님을 깨닫게 되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된다. 주님이 나를 적당히 로 대우하지 않으시고 나를 완전하게 전부로 대우하신다. 나를 대우하시고 찾아오시고 접근하시고 찾아오시고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때부터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된다. 그렇게 회복되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복음 중에 핵심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것을 깨달으면 어떤 환경으로 인한 핑계가 없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인격적으로 잘 잡히면 나와 주님과의 관계 때문에 주님의 자녀로서 고유한 가치가 있어서 주님이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니 나도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하길 원한다. 이런 인격적인 만남이 형성이 된다. 오늘 저녁부터 오늘 헤매고 있는 모든 삶의 종류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주님이 나를 전부로 대하시는 그 은혜 앞에 목자의 심정을 깨닫고 오늘 기쁨이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 주셨다는 것 자체가 지나온 2천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고 인격에 있다. 그리고 난 다음에 7,5,6절에도 즐기자. 로 나온다. 그다음에
 
*누가복음 15:7,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즐거움이 생긴다. 5절에도 즐겁다. 6절에도 7절에도 다 같은 내용이다. 제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니 너무 감사해서 삼각산 꼭대기에서 친구와 밤 12시 비오는데 찬송하세 찬송하게 주님 나를 구하셨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은혜가 넘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7절에 잘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더 기쁨의 강물이 넘칠 것이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예수님의 제자훈련하고 사역훈련하고 순장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장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것보다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와서 주님과의 생명의 관계로 접붙임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피의 보혈의 은혜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모든 사람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보다도 그 순간 더 큰 기쁨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 친구, 친척들에게 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제가 이 새 생명의 축제를 위해서 물어보면 어떤 분들은 매년마다 안 되니까 4명을 작정을 했는데 두 명은 오기로 하고 두 명은 올까말까 속을 썩인다고 한다. 그래서 좀 귀찮았지만 팔년을 계속 데리고 오는 분의 말을 듣고 그렇게 심정이 고민할 마음이 없어지고 애써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병원 원장님은 무료 진료권으로 초청했다. 스킨케어를 하시는 분은 스킨케어를 무료로 하면서 초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미장원 하시는 분은 머리를 무료로 해주시면서 머리하는 동안 꼼짝 못하니까 이야기를 전하고 초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이 돌아오면 우리 모든 성도를 누리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제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 공동체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여기에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편견으로 안 된다고 하는 입장으로 보지 말고 망가진 양, 파괸 된 양, 허물로 지켜 있는 양, 선입관으로 포기한 양들이 돌아올 때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하늘에서는 엄청난 환희의 영광의 불꽃을 쏘아 올리는 21발의 축포가 터지는 것이다. 하늘의 합창대가 찬양을 하고 기쁨의 대 잔치가 열리고 어떻게 보면 안 된다고 하는 분리주의적인 오염된 그런 사고방식에서 하나님의 심정과 천국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돌아올 때, 천국에서는 기쁨과 희락의 국경일이 선포되고 새 생명의 대잔치가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새 생명 잔치라고 이름을 붙였다. 얼마나 기쁜지 스펄전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이 구원받는 그 순간 하늘의 새 예루살렘 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의 눈물이 강물처럼 되어 넘쳐흐를 것이다. 천사들과 이미 앞서간 성도들은 이 기쁨의 강에서 헤엄쳐 가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아멘. -스펄전 목사-
 
여러분 한국교회의 기쁨이 왜 사라졌는가?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기쁨의 저장고가 이렇게 바닥이 되었는가? 우리 민족에게 왜 기쁨의 강수가 약해졌는가? 우리 성도들에게 기쁨의 먹구름이 끼었는가? 우리는 할 일이 많다. 한국교회 이미지로도 많이 나타나야 하고 또 우리 구제 봉사도 더 잘해야 되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남북 복음도 더 해야 한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도 더 해야 하겠지만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먼저 무얼 해야 하는가? 바로 기쁨의 근원, 기쁨의 모퉁이 돌, 기쁨의 초석을 세우고 희락의 만세 반석을 세우는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오후부터 우리 서로 기쁜 날 은혜로 충만하기를 바란다.
 
♤C.K. Lee라는 유명한 중국의 학자가 있는데,
이 학자는 미국의 유명 대학에 가서 강의를 부탁받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자기 강의를 하는 게 아니고 간증을 했다. 그러니까 설교를 한 것이다. 그래서 다 마치고 난 다음에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를 했다. 마친 후 학생들과 Q&A를 했다. 학생들이 질문을 했다. 중국에 유교와 공자가 있는데 왜 기독교를 전하는가? 라고 질문했다. 그때 대답이 3가지로 답한다.

 
첫째, 공자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선생이 아니라 구세주이시다.
-중국은 선생임이 아니라 구세주가 필요하다. 라고 답했다. 대한민국에도 지성인들, 좋은 분들이 많이 있지만 오늘 대한민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과 생명의 복음을 통한 구세주가 필요한 줄로 확신한다.
둘째, 공자는 죽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다시 살아나셨다. 중국은 부활하신 구세주가 확실히 필요하다.
셋째, 공자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기보다는 구세주로 만나기를 원한다. 라고 이야기 했다.
 
이것이 생명의 복음이고 물타지 않는 복음인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오늘 태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으면 오늘 하나님을 접하게 될 때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지 말고 구세주로 만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이혼의 위기의 친구가 있었는데 새 생명 축제에 초대를 했다. 부적도 굿도 해보았다고 했다. 안 해본 것은 교회 가는 것을 안 해보았다고 했다. 그날 데리고 왔는데 주님을 영접했다. 기쁨이 있어야 전도할 수 있다. 또 영혼을 구원하면 더 기쁨이 더 생긴다. 행복해야 전도할 수 있다. 전도하면 행복할 수 있다. 이 은혜의 선순환이 되는 것이다. 기쁨과 행복이 많이 약해지는 시대 앞에 생명의 복음을 통해 기쁨과 행복이 회복되기를 소원한다. 오늘 구원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겠는가? 제가 70년도 후반에 사직도 문간방에서 가난해서 거기에 자취를 했다. 나보다 나이어린 형제 하나 그는 하숙을 했다. 그 친구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 예수를 믿고 그 형제는 지금 북한의 해외 동포 외국 상을 받았다. 그는 정치와 상관없이 북한의 밑바닥부터 보기를 시작했다. 미국 시민권으로 계속해서 식량이나 구호를 펼쳤다. 아픈 사람 돕고 아이들 영양실조와 무너진 학교를 세워주면서 순전하게 북한을 도움으로 북한에서 외국상을 받은 것이다. 내가 참으로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 사람이 없도다..우리가 전한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왔을 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하여도... 우리 한국 사회에도 다시 한 번 복음을 통한 기쁨과 행복이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코로나로 인해서 번 아웃 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4차 산업혁명의 디지털 과부하로 지친 영혼들을 만지셔서 이 생명의 복음으로 기쁨과 행복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하며 예수님의 심정을 깨닫고, 목자의 심정을 깨닫고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서 더 이상 환경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 묵묵히 주님만을 섬기는 남녀종이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은 안돼 라는 차별적인 의식을 버리고 목자의 심정으로 찾아서 주님이 자녀로 삼아야 한다. 태신자를 데리고 와서 주님의 품안에 안주하도록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귀한 생명을 천국 잔치에 초대하여 서로 기쁨을 나누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율법은 죄인과 어울리기만 해도 부정해지므로 이를 금하고 있다. 율법의 근본 취지는 죄를 근절하기 위함이었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을 통해 죄가 오히려 만연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 사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므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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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11월 19일)

제목: "축복된 사명, 복음 전도"
말씀: 사도행전 20:24
말씀읽기: 남궁이삭학생(다니엘중등부), 김시현학생(다윗중등부)
기도: 김동현 장로님(전파사역부 담당)
찬양: 전파사역부, 목양1팀 찬양대
(지휘: 이영주집사님-솔리스트:김준환, 피아노:이혜영)

설교자: 이병욱 장로님(의사 전도왕,대암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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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24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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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의 교회는 훌륭한 교회이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서로 축복해야 한다. 전도하는 당신은 하나님의 큰 기쁨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큰 축복이다. ~ 당신을 통하여 열방이 예배하게 되리...♬ 저는 하루가 참 행복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말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제가 출근을 하기 위해서 엘배를 탄다. 아내와 저녁이 보자며 엘베를 타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엘베에 하나님 많은 사람을 태워 보내 주세요.’라고 제가 39층 아파트에 16층에 산다. 그러면 3-5명이 탄다. 그럼 타고나면 한국 사람은 엘베의 문화가 순조롭지 않다. 어떤 사람은 북쪽, 어떤 사람은 남쪽, 요즘은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니 아래를 보거나 스마트폰 확인을 하고 있다. 그럼 저는 엘베 문이 닫히면 뒷찜지고 조용한 가운데 ‘주목!~ 한다. 주목하라고 하니 모두가 주목한다. 그럼 제가 반갑습니다.!~~“저는 16층사는 여빈이 아빠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 잘 믿고 천국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만나뵙게 돼서 기쁩니다. 다음에 만나면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고 잘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하면, 미친....”라고 하는 듯하다. “그럼 저는 그냥 감사합니다.” 한다. 어떻든 주님 은혜 가운에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 받으시다 생각 말고 여러분이 거절당하는 것이 아닌 주님을 거절하는 자들이다 여기고 넘어가면 된다.
 
바보처럼 복음을 전하면 된다. 바보는 암에 걸리지 않는다. 행복해야 전도할 수 있다. 어제 저녁에 부인과 싸웠는데 새 생명축제에 부담감으로 밖에 나왔다. “예수를 믿읍시다. 하면 너나 잘 믿으세요. 할 것이다. 가정이 행복해야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다. 저는 고신대의대 교수로 있을 때에 제가 인턴, 레지던트, 교수가 되었을 때도 제가 드레싱을 다했다. 그건 놀라운 일이다. 드레싱 하면서 이 보잘 것 없는 이 드레싱 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의 사명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쁨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다가 찬양을 했다.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내 마음 속에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있네.~~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이분들이 막 기뻐한다. 환자들이 약 10일 정도 입원하고 있으면 적어도 하루에 3번 회진하니까 30-40분 복음을 증거하니까 다 돌아오더라. 여러분도 해보라. 될 때까지 해보라.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이병욱 교수님을 위해서라도 꼭 낫고 싶고, 암도 나아야 하겠다는 의지가 생기고 속히 퇴원하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수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전도하고 나서 예배도 드리게 되면 병원 환자들이 다 예배를 드린다. 우리 의대 안에는 교회가 있다. 그래서 예배를 다 드리니 복음이 되었다. 저는 수술장에서 한 번도 레지던트 선생들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여러분 그건 놀라운 일이다. 교수들 대체로 화를 많이 낸다. ‘땡겨 이 씨~’ 하면서 화를 많이 낸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또한 재수술 한 적도 없다. 너무 놀라운 일이다. S병원, A병원 등 교수님들 강의를 하면 그분들도 놀라워 하신다. 제가 수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화를 내면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이다. 수술이나 잘하지 무슨 전도를 하냐고 할 것이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고쳐주시고 수술해 주시라고 기도한다. 인턴이 3조수로 들어온다. 그러면 수술할 때 대체로 잠이 모자라서 존다. 그러면 보통 교수들은 조수의 다리를 차면서 막 화를 낸다. 그럼 저는 옆에서 ‘김선생 왜 화를 내니?’라고 한다. 서선생이니 그냥 깨우면 되는 것이지 왜 화를 내냐고 말해준다. 봐봐, 우리 의사들은 부드러워야 한다. 부드러워야 조직이 건강한 것이다. 경직되면 영원히 병든 것이다.라고 하면서 김선생 너도 인턴 때 많이 잤다. 라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서선생 밥도 못 먹었지 하면서 달랜다. 김선생에게 서선생을 잘 돌봐 주라고 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조금 덜 중요한 부분이 나오면 재워드릴께요. 라고 이야기 한다. 그때부터 잠을 안 잔다. 최선을 다해서 수술에 집중한다. 그러고 나서 그 서선생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예수를 구주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렇게 전도한다. 인턴들이 실수를 해도 저는 짚어주기만 할 따름이고 화를 내지는 않는다. 저는 그것이 전도의 문이 열리는 믿음이라 여겼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이 세상 이기네~~♪그래서 복강경 수술이 전문인데 드레인을 바꾸어 끼워놓는다. 그것이 환자에게서 빠진 것이다. 출근을 하니 난리가 났다. 수간호원이 큰일 났다고 걱정이라고 하면서 환자가 화가 났다고 한다. 한 번만 보고 끄집어 내 보겠다고 했다. 막상 손이 짧은 것이 좋다고 했는데 그런데 겨우 빼냈다. 그래서 그 환자가 안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 보호자가 아니었음 고발하려고 했다. 교수님 때문에 살았다고 했다면서 그분이 주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또한 수술했던 환자가 또 한 분은 전화가 걸려왔다. 교수님 47세 남자 환자가 복강에 칼이 찔려서 실려 왔는데 복강이 그렇고 간과 비장이 절제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사람 맥박도 흔들리고 수술하다고 자칫 잘못이면 안 될 것 같다고 전화를 했다. 내가 곧장 갈 테니 혈액을 많이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다. 가서 보니 체격이 대단했다. 수술을 진행하면서 절제할 것은 절제하고 잘 수술을 해서 좋아졌다. 그러고 나서 깨끗이 씻고 교수가 새벽에 불려 나왔기 때문에 전공의들이 마무리 하고 보통은 다시 퇴근을 하게 된다. 저는 그렇게 안했다. 다 봉합을 하고 보니 용 문신이 커다랗게 되어 있었다. 온 몸이 대단했다. 이것을 봉합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교수님, 그 문신 그림을 잘 맞추어 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문신을 잘 맞추어 주었다. 그래서 잘 회복이 되었고 그 사람도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가족까지 다 주님을 만난 것이다.
 
70이 훨씬 넘은 노스님이 한 분 수술을 하러 오셨다. 중소 병원을 전전하면서 자기들은 수술이 부담스러워하다고 해서 대학병원에 실려 온 것이다. 그때 당직이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니 참 불쌍했다.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데 어찌 ‘스’가 되었나 생각했다. 스님이 되었다는 생각에 누군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받게 되면 저 분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니 그러면서 수술하지 않고 퇴원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았다고 말할 것이다. 은혜를 덧입었다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수술을 하루를 연기한 다음에 함께 기도하고 나도 기도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레지던트 선생이 난리가 났다. 폐혈증, 황달이 깊어져 있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리는 영이시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그래서 다 기도하기로 했다. 그런 후에 새벽에 갔다. 새벽기도 마치고 가니까 어떤지를 물으니 교수님, 아주 좋아졌고 검사 결과가 다 정상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이 노스님에게 지난밤에 힘드셨냐고 물었다. 누워 보게 해서 진찰을 해보니 많이 부드러워졌다. 이렇게 질문했다. 이번에 들어오신 김에 수술을 받고 퇴원하고 싶은지, 아니면 수술을 안 받고 퇴원하고 싶은지를 물었다. 그야 안 받고 퇴원하고 싶지 수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한다. 그래서 수술 안하는 방법이 있으니 우리 하나님 앞에 예수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했더니 처음에는 못 들은 체 했다 스님 배 쨀래요? 기도하실래요? 강권을 했다. 그러더니 합장을 했다. 그래서 손을 잡고, 기도 안하려고 용을 쓰니까 일사천리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 스님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 수술을 안 하고 퇴원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고 아멘 하시라고 했더니 믿는다고 아멘 하시라고 했더니 아멘을 안 하다가 배 쨀 랍니까? 하니까 겨우 허허허 멘!!~ 했다. 수술을 안 받고 퇴원했다.

 
저희 병원은 아침에 인제 우리가 큐티를 하고 제가 큐티를 한 지가 30년이 된다. 제 책이 한 서른 권쯤 된다. 여러분 놀랍지 않는가? 제 자랑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보고이다. 주님 은혜 가운데 저 같이 무익한 가운데 예수님 믿지 않는 가정에 우리 할머니부터 부모님 가족을 복음을 다 전했다. 제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제 형이 살았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저도 이 강대상 앞에 나오면 쪽팔린다. 그런데 한다. 제 나이가 62이다. 주님 은혜 가운데 나이가 먹어도 하나님 앞에는 어린 아이이다. 어린 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을 회복하라. 예수님 믿으니 얼마나 좋은가!! 처음 신앙처럼 내가 예배드리고 세례 받고 주님을 알았을 때의 그 감격이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 회복하라. 그 감격을 회복하라. 그 감격을 우리가 새 생명축제를 통해서 드려야 한다. 나누자 베풀자, 함께 하자. 그래서 전도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그럴 때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 우리가 이 정도로 살려고 주신 것이 복음이 아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얼굴을 들고 하나님 앞에 정말 복음을 증거 하는 복음의 전사가 다 되시기를 축복한다.
 
저희 병원이 점심때에 식사를 하려고 간다. 그런데 어느 날은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주 역 사거리에서 역삼역 방향으로 시끄러운 오토바이가 헬리데비슨이라고 하는 오토바이다. 여기도 그런 것을 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 검정색으로 장식했다. 전도지를 들고 그 사람 옆에로 갔다. 제가 고 3때부터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했다. 전도지를 내미니까 놀라더라. 오토바이 손잡이를 잡고 있기에 받을 생각을 안했다. 자기는 빼고 싶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거고 나서 저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순간 기도했다. 어떤 트럭이 담배꽁초를 버렸다. 그래서 주워주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다. 식사하면은 종업원들을 섬기자고 약속했다. 저희 병원은 16년쯤 되었다. 또한 택배하시는 분들에게 음료수를 제공한다. 여러분 놀랍지 않는가? 이 병원이 따스하다고 말한다. 전도가 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등도 드린다. 이 분들이 좋아한다. 식사 전에 기도하니까 보고 나서 예수 믿는다고 했다. 식사비로 내가 다 내준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내 준다고 말한다.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공궤를 하면 작은 교회가 되는 것이다. 예수 이름 높이세...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 예수 이름을 전하는 자, 복이 있도다!~~ 저희 병원에는 췌장암이 말기 된 사람들이 온다. 눈물로 기도하고 치료한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일하신다. 췌장암이 고약한 병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치셨다. 이 시대에도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참된 제자라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어야 한다.
 
강남에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온다. 갑자기 대로에 비가 왔다. 우산을 프랑스 사람에게 드렸다. 그랬더니 노 땡큐하면서 받았다. 그래서 나는 병원으로 뛰어 들어갔다. 간호사가 보니 원장님 왜 비를 맞고 오시냐고 했다. 그 우산은 본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 좋은 것 사준다고 했다. 프랑스 관광객에게 우산을 주었다고 하니 우리 서울 여행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Jesus christ you are savior. 예수님은 당신을 구원하신다. 그랬더니 탱큐 소우 머치했다. 여러분, 우리 사랑의 교회도 이렇게 섬기면 우리 인생이 놀라워질 것이다.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이 될 것이다. 매 순간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전도는 그래서 기쁘게 해야 한다. 제가 치질을 수술을 했다. 저보다 수술을 잘하는 교수를 만나지 못했다. 하 하 하~~~ 농담. 웃으면 도움이 된다. 가장 수술을 잘한다는 서울 D 병원을 택했다. 그래서 했더니 다시 피가 났다. 재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간호사는 시간이 지나면 더 괜찮을 거라고 하면서 나갔다. 그래서 간호사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했다. 믿으면 친절한 간호사라고 이야기 하겠다고 하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원장님이 오셨다. 피떡이 고였으니 보라고 했다. 원장님도 예수를 믿으면 재수술했다는 이야기 절대 안 하겠다고 했더니 지명도 있는 분이 예수 믿으니 자신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전도하는 데 부담이나 걱정 근심도 하지 말라. 하나님이 다 책임지신다. 여러분은 단지 입만 놀리면 된다.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는 천국을 소유합시다. 전도 못할 사람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 주님을 전하고 전도 왕이 되길 축복한다. 제주도까지 가서 전도한다. 안동, 양평, 양수리, 화곡동 등에 까지 가기도 한다. 어떤 섬김 어떤 시간 어떤 모든 것이 소비된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영혼이라는 것을 항상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는 자 되길 바란다. 행함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행함으로 증명하고 증언하고 증인 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매 순간 순간 그런 고백으로 살아가라. 이번 새 생명 축제를 놓치지 않는 시간되길 소원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지상의 사명을 감당하고 주님을 만나면 주님께서 물으실 질문이 있을 것이다. 얼마나 돈을 벌었니? 몇 펑 아파트 살아보았니? 너 어느 정도 땅을 가졌니? 등은 묻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너 예수 믿고 얼마나 행복하게 살면서 예수님을 닮아왔냐고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두 번째 질문도 있다. 얼마나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복되게 증거 한 적이 있니? 라고 물으실 것이다. 여러분 준비해야 한다. 축복 중에 축복, 사명 중에 사명, 이 축복된 사명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행복과 축복은 절대 소홀하지 않는다. 오늘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다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그 삶을 살고 오늘 2021년 새 생명 축제에서 내가 절대로 놓치지 않고 한 가정,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이 빈자리를 앉히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기도하고 결단해야 한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마치겠다.

 
♣요약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비상하는 거룩한 삶, 은혜의 삶이 되어 영적 재생산의 근원지가 되어서 우리는 주님 앞에 진정한 행함으로 새 생명을 구하게 구원할 수 있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겨서 이 빈자리에 주님 자녀들을 채우고 함께 주님 나라를 소유하는 자 되어야 한다. 행복해야 전도도 할 수 있다. 그러니 항상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가 행복해야 한다. 우리는 입을 벌려서 주님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니 걱정 말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꿈꾸며 지상 명령을 반드시 실천해서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베푼 하나님의 호의의 증거인 동시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선한 활동의 수단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가 은혜로운 분임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우리를 은혜롭게 성장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단지 이 복음 지식을 전파하는 도구로서 사는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바울이 자신의 임무를 잘 마쳤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죽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길을 기쁨으로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길 또는 경주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지정된 수고와 한계성을 보냄을 받은 것은 항상 이곳에 머물러 있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통과하도록, 아니 세상을 헤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세상의 여정은 곧 끝나게 된다. 바울은 그의 여정이 끝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 날이 가까운 장래에 도래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죽음은 우리가 명예를 얻든지 불명예를 얻든지 간에 경주의 종착점이다. 바울은 그 경주를 잘 마치는 데에 전적으로 관심을 쏟았다. 그는 아무리 엄청나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망정 그것을 완수하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그는 기쁨으로 그 일을 잘 완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우리의 생애의 사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걱정 없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환희에 찬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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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11월 17일)
제목: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말씀: 사도행전 8:1-8
찬양인도: 이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김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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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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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아파트 엘리베이트 안에 한 남자가 음식을 쓰레기봉지를 들고 탄다. 마침 아침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 엘리베이터 안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탄 이 남자를 보면서 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한다. 아침 시간에 사람도 많은데 왜 저 냄새나는 음식식물 쓰레기봉투를 지금 들고 타는거야! 라는 생각을 한다. 그 옆에 있던 한 여자 분은 이런 생각을 한다. ‘저 남자 부인은 좋겠다. 남편이 음식물 쓰레기도 버려주고 우리 남편은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는데’ 이 여자 분과 살고 계시는 남자 분들은 회개하시기 바란다. 그 옆에 계신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은 이란 생각을 한다. ‘아이구, 뉘 집 자식인지 돈 버는 일도 힘들 텐데 쓰레기까지 버리네, 우리 아들도 저러고 사는 것은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여기 그제 어르신이 계시면 그것을 알아주시길 바라고 있다. 여러분의 아들도 그러고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식욕이 왕성한 한 청년은 그 장면을 보고 생각한다. ‘저 집은 어제 치킨을 먹었나보다. 나도 빨리 퇴근해서 저녁에 치킨 먹어야지’라고 생각한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베에 탄 사람은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저는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면서 많은 사람의 생각은 각기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가운데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일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 자세, 삶의 태도는 모두가 다르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8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도행전 8:1,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 등장하는 사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바울이 다. 그리고 그가 죽임을 당함을 에서 그는 사도행전 7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한다. 산헤드린의 당회의 결정으로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 집사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한 이후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예루살렘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한 번에 3천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모였던 사람들은 고향과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서 양육을 받게 된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쓸 것과 먹을 것을 나누며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놀라운 교제가 일어난다. 당사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교인들은 교회에 오기만 하면 너무나 행복하다.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를 온통 뜨겁게 채우고 있다. 반면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인들은 이런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사도들을 잡아들인다. 그러면서 복음을 막아보려고 그 복음의 길을 막아보려고 애쓰지만 도리어 사도들을 잡아들이면 천사들이 와서 옥문을 열어주고 사도들을 지키는 간수(看守)까지 회심하는 바람에 이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인들은 참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신흥 이단 종교인 예루살렘교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무너뜨려야 했다. 또 다른 교회를 엿보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존경받던 집사 스데반을 잡아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그의 죄목은 신성모독이었고, 스데반은 처형된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로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돌무더기에 묻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런 끔찍한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이 장면을 아주 가까이서 목격한 한 사람이 바로 사울이다. 당시 사울은 유대교의 열심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울에게 신성모독이란 스데반의 돌에 맞아 죽음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사울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오늘 본문 2절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데반의 죽음에 교회의 장례를 치르며 크게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성경에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대인들 중에 이 스데반의 메시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그 이상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예루살렘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은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스데반이 전한 이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는 복음에 크게 감명 받았고 어느 정도 동의하였기 때문에 스데반의 죽음에 크게 울 수가 있었다. 우리가 보면 이들이 스데반을 장사하며 크게 울었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럴 수도 있다 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끔씩 우리가 장례식을 가보면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아닌데도 유족들의 슬픔을 보면서도 엉엉 우시며 마음이 약한 분들이 있다. 때문에 이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를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내린 판결에 외해 사형에 집행된 사람을 위해서 우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운다는 행위자체가 산헤드린 공회가 내린 결정에 반발하는 행위, 이것에 불복하는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울음 자체가 권력자들이 행한 재판과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공식적인 판결이 되었기 때문에 이 산헤드린 공회가 내린 재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을 위하여 우는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데반의 우는 죽음에 크게 울었다.
 
여러분은 언제 우는가? 사람들이 언제 울까 궁금해서 저는 몇 분의 목사님들께 물어보았다. 최근에 언제 울었냐고... 그러자 한 목사님의 대답이 제 마음을 울렸다. 그 목사님께서 얼마 전 순장님 심방을 하는데 그 심방을 맡으면서 그 순장님과 기도제목을 나누면서 자신의 순 원의 기도제복을 이야기 하면서 형편이 어렵고 그 아픈 순 원의 이야기를 하며 우는 순장님의 눈물을 보면서 본인도 함게 울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눈물이다. 여러분, 타인의 눈물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것,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함이다 타인의 눈물에 함께 반응하며 함께 울어주는 것이 영적 성숙이며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아파하는 자들일 것이다. 우는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분들이 있다. 누구인가?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서 그것이 멸망인지도 모르고 영원한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길인 줄도 모르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을 향하여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생들, 그것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인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우리가 그들을 보며 함께 울기를 소원한다. 오늘 본문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스데반의 죽음에 2절에 경건한 사람들, 이상으로 아파하고 통곡했던 분들이 분명 있다. 바로 예수살렘 교회의 성도들이다. 그러나 온 교회가 존경하며 따르던 스데반의 죽음에서 슬퍼하고 통곡할 틈도 없이 자신들의 고난과 마주해야 했다. 실제로 보면 '그날에 예루살렘의 교회에 있는 큰 박해가 있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올 고난, 박해, 고통에 대비할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가 처형되던 그날 신문하고 감옥에 가둬두던 그때와는 확연이 달랐다. 이전에는 서로 기도하고 격려하며 서로 뭉쳐서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가 죽던 그날 시작된 박해는 달랐다. 그 박해는 치밀하게 계획되고 조직적으로 행해졌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앞장서서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우리 이제 3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다.
 
*사도행전 8:3,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였다. 라고 한다. 원어 상으로 잔멸하다. 라는 뜻은 멧돼지 데가 밭에 들어가서 그 밭을 진 이겨 놓는다는 것이다. 여러분 상상해 보라. 내가 정성껏 텃밭을 가꾸어 놓았는데 멧돼지 떼가 와서 그 밭은 짓이겨 놓았다. 그 밭의 꼴이 어떠하겠는가? 또 이 잔멸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사자가 자기의 먹이 감을 잘근잘근 씹어서 짓이겨 놓는다.' 이렇듯 사울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와 예루살렘 성도들을 향한 박해는 참으로 잔혹하고 처절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 라고 기록한다. 각 집에 들어가, 사울을 필두 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성도들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사라들을 끌어낸다. 끌려나온 사람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아이인지 노인인지 관계없이 포박되어서 짐승처럼 끌려간다. 끌려가는 도중에도 끔찍한 매질이 가해지고 멈추지 않는 매질과 고문에 의하여 견디다 못해 죽는 사람들도 생기고 오랫동안 감옥에 갇힌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아 죽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이 예루살렘 성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로 인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발적인 이주자 아닌 핍박의 바람, 피바람에 의하여서 그것을 피하여서 자신들이 평생 살며 일구어 왔던 고향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이제 도망자가 되었고 나그네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행한 사울과 산헤드린의 그 계획이 너무나도 치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의 명단을 이미 확보했다. 그들의 신상을 이미 다 파악하고 그들의 신앙 등급도 이미 나뉘어졌을 것이다. 그들의 주소지도 확보했다. 이렇게 모든 계획을 완벽하게 마친 후에 동이 트면 주저 없이 공격하는 로마의 군사들처럼 스데반이 순교하는 그날 마치 멧돼지가 밭을 짓이겨 놓듯이 사자가 자신의 먹이 감을 갈기갈기 찢어 놓듯이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완전히 뭉개고 찢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만이 교회가 완전히 박멸되고 부흥을 멈추고 예루살렘 교회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조금이라도 틈만 준다면 다시 똘똘 뭉쳐서 날아날 수 있다. 라고 생각 하에서 이들의 계획은 치밀하고 빠르고 또 강력하게 교회를 탄압했던 것이다.
 
여러분,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이다. 여러분 사단의 정병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영역을 넓혀야만 하고 사단의 권세 아래 영원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한 명이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끌어들여만 한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전투에 징집 되었다는 뜻이다. 전투에서 군인이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어떻게?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는 사단보다 더 치밀해야 된다. 우리는 사단보다 더 빨라야 한다. 우리는 조금 더 적극적 이여야 하고 조금 더 전투적 이여야만 한다. 치밀어 오르는 복음의 감격을 가지고 전장에 나와 싸워야만 한다.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면 교회를 핍박하는 이들은 이렇게 정교하고 조직적이며 빠른데 우리는 그것보다 더 조직적이고 빨라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군사로소 해야 하는 전투는 바로 전도이다. 우리 눈에 띄는 전도 대상자가 있다면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어오는 태신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위해서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행복한 일, 힘든 일, 필요로 하는 것들을 우리는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작전을 짜야 된다.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작전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주저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주저하지 말고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을 어떻게든 교회에 데리고 와야 한다. 새 생명 전도 축제 기간에 마음에 품은 그 사람을 이곳에 데려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 전투에서 모두가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천 년 전 예루살렘교회는 예상하지 못한, 대비하지 못한 산헤드린 작전에 자신들의 근거지를 두고 떠나야 했다. 사단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전투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무너지고 그리스도인들도 이제 더 이상은 예수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을 아니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아주 달랐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다.
 
*사도행전 8:4,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예루살렘의 교회를 향한 광기어린 폭력에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이 유대 땅과 사마리아 그리고 모든 땅으로 흩어진다. 그들이 그렇게 흩어진 이후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숨죽여 살았다면 사단의 계략이 승리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흩어진 사람들은 오히려 두루 다니며 무엇을 했다고 하는가?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한다.
 
여러분, 산불이 났을 때 가장 위험한 상황은 바람이 부는 것이다. 불이 아무리 크게 나도 바람만 불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불길을 잡고 끌 수가 있다. 하지만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 불길을 잡기가 매우 어렵다. 가끔씩 산불이 바람이 불어서 나뭇가지에 붙은 불이 불덩이가 돼서 이산으로 저산으로 옮겨져서 삽시간에 많은 산을 태운다는 것을 뉴스에서 종종 우리는 보게 된다. 예루살렘에 대한 핍박과 교회가 당한 고난이 복음의 불길을 끄는 물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 핍박과 고난은 바람이었다. 예루살렘의 복음의 불길은 고난과 핍박의 바람을 타고 이제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 땅과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을까? 예루살렘에 핍박을 피하여 흩어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집에 없다. 삶의 터전이 없다. 운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먼 친적 집에 얹혀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자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끼니와 잠 잘 것을 걱정하며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며 살아야 했다.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또 쫓아오지는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핍박이 있었기에 당분간은 숨죽여서 그냥 내 신앙 지키면서 조용히 살 법도 한데, 왜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위험을 무릎 쓰고 두루 다니며 도망자의 신세가 된 그때에, 나그네 신세가 된 그때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을까?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주체하지 못하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신세, 그 지경이 되었지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혹 운전 중에 까닭 없이 차가 막힐 때가 있다. 왜 이리 차가 막히는지 우리가 차가 막히면 대게 궁금하다. 앞에 공사를 하는지, 차 사고가 났는지, 찻길이 좁아졌는지, 궁금했는데 이 세 가지 이유가 아니었다. 이유는 그 길 앞쪽에 한 매장 때문이었다. 그 매장은 복권방이었다. 제가 그 길을 지나가던 길이 토요일이었고 여러분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토요일 저녁에는 로또복권 추첨이 있다고 한다. 왜 그렇게 차가 많은지 복권방에 복권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서 한 차로를 아예 막고 있었다. 이렇게 차가 많아서 보니 로또명당, 로또 1등 당첨 11번이라고 쓰여 있었다. 얼마 전 근처에 살고 있는 목사님께 물었더니 대답에 당첨이 21번이라고 하신다. 로또를 사기 위해서 당첨자가 많이 모인 곳을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왜 그리 로또를 사려고 할까? 로또의 당첨되기만 하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로또 명당을 찾아서 모여들고 있다. 주변 사람들만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복권을 사기 위해서 지방에서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그러기에 토요일만 되면 극심한 교통정체가 일어난 것이다. 여러분, 21번의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로또를 산다고 한들, 로또 당첨 확률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희박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률에 사람들이 자기 행복을 꿈꾸며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런데 만일 그곳에 가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한 번 이십억을 지급한다. 아니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1억을 준다. 너무 많다. 천만 원도 많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백만 원 준다고 하면 가겠는가? 모두가 월차를 내고서라도 어떠한 일을 미루고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곳에 가서 백만 원을 받아왔다. 백만 원 가지고 맛있는 것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사고 행복을 누렸다. 그 다음은 어떠하겠는가? 그곳이 있다고 내 가까운 사람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이가 내 가족을 믿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 그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 살의 터전을 옮기고 힘들게 살고 있지만 그들 마음 가운데는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기쁨, 생명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복음의 신비와 능력이 우리 안에 있고 그 덕분에 내가 살았고 내 인생이 달라졌고 내가 지금 행복하다면 우리는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처럼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대표하는 사람이 있다. 5절에 등장하는 빌립 집사님이다. 이 빌립은 초대 교회에 스데반과 더불어 일곱 집사님 중에 한 사람이었다. 빌립 또한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서 사마리아로 갔다. 여러분 사마리아 땅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땅인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한다. 사마리아인들조차 유대인들의 대한 분노와 증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빌립이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서 절대로 환영받지 못하는 곳이다. 유대인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가장 힘든 사마리아 땅으로 빌립 집사는 들어간다. 지금처럼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을 하고 지원을 해서 들어간 곳이 아니다. 핍박을 피해 도망하다시피 들어간 곳이다. 하지만 빌립 집사는 그곳에서 주저하지 않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다. 4절에 보면,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빌립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러분,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어려분 복음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사시고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빌립이 이 그리스도를 전하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살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한다. 듣지 않을 것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빌립 집사의 이 복음을 적극적으로 원하신다. 표적을 보여주신다. 기적들이 일어난다. 우리 7절을 함께 읽어보자.
 
*사도행전 8:7,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많은’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처럼 이러한 일들이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묶였던 귀신에게서 해방되고 나음을 입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인해 삶의 변화를 경험했을 것이며 새 생명을 얻었다. 에제는 사마리아 땅이 빌립의 전도사역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제2의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 땅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 했던 놀이 중에 놀이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 집에 왜 왔지?’라는 놀이를 기억할 것이다. 두 편으로 나뉘어서 손을 잡고 앞걸음과 뒷걸음을 반복하며 우리 집에 왜 왔니 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한 대표가 나와서 가위바위보, 한다. 그리고 이기는 편이 진편의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게임이다. 여러분 기억하는가? 우리 편이 이기면 어떠한가? 이긴 편이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한다. 결국 상대편의 사람은 꽃 찾으러 왔단다. 라고 대답한다. 기억할 것이다. 그 꽃을 다 찾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한 사람이 이름을 부르고 데려오고 승리를 누리는 이 기쁨의 게임이 이제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기를 바란다.
 
여러분, 마음에 품었던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곳 안아주심의 본당에 데려와서 함께 기쁨 누리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줄 알았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잃어버린 천국의 꽃을 찾아 떠났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을 복음의 꽃밭으로 물들이기 위해 그들은 흩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다해 주체할 수 없는 복음의 기쁨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꽃을 하나 둘씩 찾아와 복음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고난과 핍박으로 시작된 그 일은 처음에는 상처와 고통 그 자체였으나 그들은 곧 그것을 복음이 바람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기쁨으로 반응하였다. 여러분, 코로나로 인해서 지난 2년의 시간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인종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여 온 세계가 고난의 시간을 지나야만 했다. 교회 또한 예배드리는 것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 주 톡새를 통해서 우리는 온 교회가 함께 바라보면서 극복하면서 이것이 이 2년의 시간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제 전환의 시기를 우리는 복음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지치고 코로나로 인해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복음으로 이곳이 회복될 수 있음을, 복음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음을, 복음으로 인해 살아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11월 21일 시작되는 새 생명 전도 집회 축제에 잃어버린 꽃들로 이곳 본당이 가득차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새로운 복음의 역사, 잃어버린 꽃들로 가득 찰 안아주심의 본당을 기대하면서, 2천 년 전 사마리아 땅에서 있었던 큰 기쁨을 뛰어넘는 더 큰 기쁨이 이곳 가운데 가득할 것을 믿는다.
 
*사도행전 8:8,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랑의교회 행전 11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사랑의교회에 큰 기쁨이 있더라.’ 아멘, 우리 모두가 그 기쁨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요약
특새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을 경험을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놀라운 크신 역사가 영혼구원의 잔치로 이어져 한 사람의 생명을 얻는 새로운 복음의 역사를 기록하는 교회가 되게 기도하며 2천 년 전 척박한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이루어져 기쁨이 충만해진 것처럼 우리도 그 복음전파를 통해 새 생명을 얻는 기쁨의 삶이 되어야 한다. 태신자를 품고 간절히 기도하여 새 생명을 얻어 성 전체가 큰 기쁨으로 누렸던 것처럼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많은 영혼들이 새 생명을 누리게 되고 그로 인해 온 교회가 더 큰 기쁨을 누리길 기도해야 한다. 성령 충만으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주님께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준비하는 은혜로운 복음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며 우리 교회에 기쁨이 충만한 교회와 가정이 되어야 한다.
 
-남은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 흩어졌으나 성령의 충만을 받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이다. 한편 사마리아 성에 내려간 빌립은 더러운 귀신을 쫓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등 수많은 이적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빌립의 전도 활동으로 인해 사마리아 온 성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쁨이 넘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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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11월 14일)
제목: "하나님께 참으로 부요한 자"
말씀: 누가복음 12:16-21
기도: 이 다니엘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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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6-21,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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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가족 여러분,
영광스런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고 한 주간의 꿈을 꾸는 것 같았던 특새(특별새벽기도회)를 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 주간만 뿐만이 아니라 이번 특새를 누가 상상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하게 하셨다. 영적으로 대 성황으로 이루어주시고 개인마다 공동체마다 하나님이 반전 드라마처럼 인도하셨다. 이 코로나 팬데믹을 뛰어넘게 하심과 꿈같은 특새를 허락하신 주님을 다시 한 번 찬양한다. 어제 마지막 찬양인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산 소망’을 모두가 다 한 마음으로 은혜가 되어 마음을 모았다. 다시 한 번 자녀들 비상하기를 바란다. 오늘 특새 후 첫 추수감사주일인데, 사도 바울이 변화되고 난 다음에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사도바울 첫 번째 한 일은 기도이다. 그러면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여러분 우리가 영광스런 이 땅에서 천상의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기억나는 것이 24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일이었다. 예배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바울이 변화 후 첫 번째 기도였다면,
 
*요한계시록 11:16~17,
16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24장로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난 다음에 첫 번째 하는 일은 ‘감사하옵나이다.’! 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함이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한해 우리가 한 해를 돌아보면 머리도 아프고 가슴도 조이고 특별히 지난 일 년 십 개월 동안 확진자 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특새를 지나고 이 추수감사절주일 예배를 통하여 제일 먼저 나오는 시각이 바뀌면 ‘하나님 감사합니다!!’로 우리 입술로 고백하면 여러분의 삶의 복잡함이 뻥 뚫릴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아는 누가복음 비유이다.
 
※첫 번째 추수감사주일이었던 미국의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순례자들이 죽기도 하고 온갖 고통을 겪었지만 그 가운데 제일 먼저 한 일은 감사였다. 감사하면 시각이 바뀌는 것이다. 감사하면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경배하고 우리가 특새하면서 찬양을 하면서 첫 번째는 감사였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부분이다. 감사하면 생각이 바뀐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각이 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12장 어리석은 비유이다.
 
*누가복음 12:16-21,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부자가 소출이 풍성한 것이다. 당시는 농경사회였다. 농경사회는 농사를 지어서 얼마나 추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재산과 권력이 판가름 나는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것이다. 부자가 된 것이다. 자꾸 창고를 지었다. 농경사회는 그 사람의 부를 상징했다. 아주 만족해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기에 비난할 일이 없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 그 부자는 내 곳간은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을 거기에 쌓아둔다고 말한다. 요즘 식으로는 내가 돈을 엄청 벌었다는 것이다. 주식에, 부동산, 통장잔고, 안심할 정도로 많이 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잘 될 때,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그 부자는 아주 만족해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맘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 정도까지는 부자가 뭘 잘못했는지 판단이 쉽지가 않다. 그 시대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이런 이야기기 있다. 어떤 돈 많은 부자가 ‘재산의 일부분을 하나님께 드릴 테니, 저 좀 오래 살게 해주세요.’ 했다. 대답하신 하나님은 ‘전 재산을 반을 바치면 너를 천년 살게 해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부자는 그래서 앞으로 천 년 살 거라고 자랑을 막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것을 본 그 부자의 아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서 하나님께 항의를 한 것이다. ‘하나님, 어떻게 거짓말을 하십니까? 천 년을 살게 해 주신다 더니요.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지니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이놈아, 너는 성경도 못 보았느냐?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라고 하신다. 우리는 천 년 사는 줄 아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이다. 이 부자의 시각이 잘못 된 것이 무엇냐면, 그 부자가 3가지로 어리석었다.
 
I. 왜 부자가 어리석었는가?
 
첫째는 자기의 재산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다.
 
자신은 관리자일 뿐이며 주인을 하나님이시다. 그걸 모른 것이다. 청지기의식이 없던 것이다. 모든 소유는 그에게 잠시 맡겨주신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우리가 아파서 우리가 생명이 짧아서 우리가 어떤 힘든 일을 할 때, 내 재산으로 내 재산이 다 내 것이 아니다. 우리 금요일 현승원 의장이 한 이야기를 생각하면 젊은이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보기 드문 사업가이다. 그리고 청지기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대부분 자수성가 자들은 청지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돈 내가 벌었다고 여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재산의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이다. 그런데 그걸 몰랐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역대상 29:11~12,
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다윗이 한 말이다. 다윗 왕 시대에 거의 예루살렘에 은이 돌같이 여겨졌다. 그 부자로서 나라를 다스렸던 이 말씀을 믿어도 된다. 어느 시대에 은이 돌같이 여겨진 시대는 없다. 다윗이 그렇다면 믿어도 된다. 그리고 이 부자가 이것을 잘 몰랐다. 자기 재산이 자기의 생명을 유지할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둘째는 재물을 쌓고 즐기는 데에만 마음이 가서 더 중요하게 쓰임 받는 것에 가치를 몰랐다.
-자아가 충만했다.
셋째는 자기가 땅에 있는 곳간에는 잔뜩 쌓아두었지만 모든 사람은 재산을 남겨놓고 죽는다.
-사람들이 이걸 잘 모른다. 영구차 뒤에는 현금수송차가 따라가지 않는다. 깊이 생각해 보면

 
II. 능력을 넘어선 성공이 문제이다.
 
모든 죽은 사람은 전부를 남긴다. 그런데 자기가 죽을 것을 잘 모른다. 문제는 시각이 잘못되어 어리석다. 돈의 통치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부자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것을 뭐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자신의 성공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섰을 때, 마음이 어리석었다는 것이다. 마음이다. 잘못된 판단이 문제이다 로또의 비극, 돈 때문에 아내가 남편을 죽이고 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것이다. 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반지의 제왕이라고 하는 영화에서도 절대 반지가 권력이나 재물이 될 수 있는데, 그때부터 어리석은 부자는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것이다. 오늘 이 추수감사주일 날, 이 시간 24장로가 감사함으로 하였듯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을 회복해야 한다. 참된 부요함이다. 인생을 즐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영원한 세계, 영원한 하나님, 죽음이후의 세계, 부활의 능력, 그것도 모르고 즐기다가는 인생이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열차와 같이 된다. 폭주하는 열차이다.
 
바울은 영원한 세계를 어떻게 말하냐면 나도 영원한 세계, 부활의 세계가 없다면 나도 이 땅에서 즐기고 살겠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15:32,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 우리가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하나님과 그 다음에 부활의 능력을 모른다면 그냥 퀘세라세라이다. 돈 많으면 신혼부부가 많이 가는 곳인 몰디브에서 모히또 먹으면서 살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모르고 축적한 부와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면 그것이 죄악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과 재물을 두 가지를 섬기지 못한다. 이게 창조질서이다. 우리가 재물을 귀하게 여기고 열심히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 재물이 우리에게 재앙이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6:26,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여러분 두 가지를 섬기다가 사고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III. 하나님께 참된 부요함.

※이것을 유진 피터스 목사님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면, ‘너희의 창고를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 창고로 채우면 바로 이렇게 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느냐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의 key이다. 오늘 우리가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 특새도 하나님께 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중요하다. 하나님보다 자기가 쌓은 부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면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짜증, 불안한 것은 내가 신뢰하는 것이 내가 의지하는 것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면 짜증나는 것이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없으면 사람들은 짜증이 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부요함이 눈에 뜨이면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이면 짜증이 사라진다. 내가 지식을 쌓으면 지식의 창고, 재물의 창고를 권력의 창고, 물질의 창고를 하나님보다 더 의뢰하면 나중에 껍데기만 남는다. 한결 같은 내용은 주위에 가까운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빈 껍데기만 남기를 원하면 해보라. 그걸 미리 깨닫는 자가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된다. 마무리 돈이 많아도 하루아침에 빈껍데기이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전적의지가 되어있는가이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 성도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합시다.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면
하나님께 부요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절실하게 느껴야 한다. 당연시 하던 것도 감사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하고 내 마음에 사명을 꿈, 우리가 가야할 길, 우리가 죽어도 가야할 곳, 우리가 그 깃발을 가지고 달려갈 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날마다 은혜에 감사하며 절실하게 느낄 때이다. 나의 일생을 주님께 바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자기와 하나님만 남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 작품이다. What.should we do? 헌금도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쌓는 것이다. 물질만이 아닌 내 생명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대해서 부요함이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신적 개입을 하신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었던 완와메이커는 어릴 때 그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을 가졌기에 벽돌 두 장을 가지고 갔다. 그래서 백화점을 가지게 했다. 어떤 분은 병아리 열 두 마리가 수조원이 되게 하신 것이다. 수입이 빠뜻해도 그 집안에 건강을 주시고 자녀들을 지켜 주시는 것이 다 하나님께 부요함이다. 돈이 없어도 주님께서는 모자라지 않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부자라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이 없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부요함은 또 한 가지는 영혼구원에 대한 마음이다. 우리는 새생명 축제를 한 주일 앞두고 있다. 우리가 나아갈 일은 영혼구원은 단순이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부요함이다. 결신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이 된다. 믿음의 부요와 이 땅에 살아가는 부요함도 채워주신다. 이 병든 사회에서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은 이 민족의 치유까지도 가게 하신다. 하나님께 내 마음이 향해 있는 것이다. 서구사회는 물질이 주인이 되었기에 물질이 주인이 된 것이다. 그렇게 되었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이 되는 것은 사상 무장을 하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기독교나라이고 복음이다. 우리가 사고 안치면 사 만불 오만 불도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기 때문이다. 한국의 자유에 대한 것은 기독교가 기본이 된 것이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 앞에 귀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이 건국의 바탕이 되어서 한국이 되었다. 다시 한 번 예수 믿고 하나님의 부요함이 될 자 부요함이 될 자가 아직 80%가 남아있다. 우리는 새 생명 축제에 최선을 다해서 주님 자녀로 인도하길 소망한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이 일어나길 소원한다. 그래서 이 나라가 세계선교를 마무리 하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8;9,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가난하심으로 우리가 부요함이 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가 될 때에 우리도 살고 우리 가정, 공동체도 살게 될 것이다. 은혜받은 자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이고 믿게 되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배드리는 자가 제일 먼저는 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다 하나님께 집중하게 해달라고 찬양하자.
 
♣요약
주님이 맡겨주신 부와 성공이 내 것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착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청지기로 삶을 살며 감사함을 가지고 인생 창고를 내 자아로 채우지 말고 오직 영원하신 주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채우며 하나님께 대한 부요함을 가진 자로 살아가야 함을 깨달아서 천국소망을 이루는 새 생명 축제게 더욱 힘써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참된 부요함의 귀한 자녀로 사명을 다하게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비유를 통해서 탐심은 끝없는 물욕을 일으키고 물질은 영혼을 풍요롭게 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생은 잠시뿐으로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취하실 때가 반드시 오며, 물질의 풍요가 하나님의 복 주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구한다는 것은 결핍되어 있는 것을 얻기 위해 꾸준히 바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결핍 사항은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진리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능히 채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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