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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10월 27일)
제목: 무엇이 그들을 참 제자로 만들었는가?
말씀: 요한복음 21:1-14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최성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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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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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들을 참 제자로 만들었는가? 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 21장을 설교를 하려고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하는 실수 중에 하나는 사실 실수 없이 성경을 보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들을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배트맨이 아니면 악당이고 수퍼맨이 아니면 악당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 역시도 선입견의 피해자이자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저를 보시면 백옥같이 흰 피부와 귀공자처럼 생긴 외모와 왕족의 일원으로 보이는 모습에 엄청 훌륭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어떤 분들은 저를 보시면 멕시칸 사람, 말레이시아, 인도, 미국 원주민 인디언, 심지어 부자 태국인으로 선입견을 갖고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선교를 갈 때마다 현지에서 현지인으로 횃갈려 하는 사람도 있으니, 선입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겠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613개의 조항들을 율법들을 하나 같이 다 지켰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해서 또 율법들 지키는 것을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착각을 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오버해서 그랬지, 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경건했고 우리의 선입견처럼 나쁜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다. 주일 성수 하나만으로도 늘 갈등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613개의 모든 조항들을 지켜냈던 바리새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무조건 나쁘다고 선입견을 갖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얼마나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제자들이 등장하면 제자들은 무조건 좋은 사람으로만 생각한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 편이고 제자들은 언제나 바른 길을 가고 있고, 제자들은 늘 좋은 사람들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 제자들 중에 배신자가 있었고, 예수님께 늘 혼났던 것은 제자들이었고 오히려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 창녀들, 환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젊은 관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지들만 등장하면 이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성경의 결말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또 제자로 선택된 사람이니까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의 선입견을 갖는지 모르겠다. 아주 쉽게 이런 질문을 드려보겠다.
 
지금부터 500년 전, 1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왕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생각을 해보자. 오늘부터 이상한 소문이 들려온다.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 서당에서 훈장을 하고 있는 한 까만 훈장이 왕에 대해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심지어는 사람들을 모으고 자기가 스스로 하늘의 왕이라고 이야기 하며 반역을 준비한다고 하는 소문이 왕에게까지 전달된다. 왕의 주변의 있는 신하들이 이야기 한다. “이것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목양 4팀 그 훈장은 지금 반역을 꽤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하면서 왕권을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저는 바로 반역죄로 잡혀간다. 잡혀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다. 저만이 아니고 제 가족은 물론이고 온 집안이 몰사를 당할 것이다. 그것만이겠는가? 여기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도 저와 같이 몰살이다. 또 어쩌다 저를 만난 목양 4팀 식구들은 괴수의 무리가 되어서 전부다 한강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않고 바라보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장면이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반역죄로 돌아가시는데, 그 제자들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을까? 또 예수님과 같이 죽은 제자가 단 한 명도 없을 수 있었는가?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만 죽게 할 수 없다고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도 있었어야 할 텐데 왜 아무도 없는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열 두 제자는 어디가고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 등장하는 것인가? 죽을지라도 배신하지 않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던 베드로는 어디로 갔는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에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무리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인데, 어떻게 예수님의 패거리는 단 한 명도 같이 죽지 않고 예수님만 죽을 수 있었는가? 다 같이 요한복음 18:15절을 보자.
 
*요한복음 18:15,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요한복음 21장으로 마치니까 18장은 지금 한창 고난을 받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체포를 당하시되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신문을 받았다. 모두가 도망가서 예수님 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베드로와 또 다른 한 사람은 멀찍이에서, 성경은 멀찍이에서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과 베드로는 눈이 마주쳤다 라는 것이 기록된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멀지 않은 거리일 수 있다. 어째든 멀찍이에서 예수님께서 일어나는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 보고 다 듣고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대제사장과 아는 제자가 있어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들이 세 번씩이나 베드로가 제자라고 알아보아도 베드로는 잡혀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겠지만 이에 더해 제자들 중에 일부가 대제사장의 일부가 한패였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양다리를 걸쳤기 때문에 이들은 무사히 그 고비를 넘길 수 있던 것이다. 단지 잘 숨어서, 단지 잘 도망가서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만이 아니라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있던 그 제자들은 그들 스스로 살길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하기에 지금보다 더 무서운 시대에 반역죄를 지은 예수님과 한 패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죽지 않고 그 시기를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살짝 큰일인 것은 제자들을 너무 나쁜 사람들로 설명해서 나중에 천국에 가서 베드로 할아버지께 혼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자들이 죽음 이야기를 해보겠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다 도망가고 배신자의 길을 택했고, 자기 살길을 찾아갔던 그 나쁜 제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생을 마감했는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사실 성경에는 제자들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왜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았는지 그것도 한 번은 생각해 볼만한 그런 주제이지만 어떻든 제자들의 죽음은 성경이 아닌 역사적인 기록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해 내려오는 전승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몇 사람만 말씀드리자만 이러하다.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는 박해를 받을 때에 돌에 맞아 죽었다. 안드레는 십자가 모양이 아니라 엑스자 모양의 십자가에서 순교한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이 잘려 죽게 된다. 마가는 몸이 찢겨져서 순교한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게 되는데,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한다.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찔려서, 누가는 감람나무에 목이매여서 죽음을 당한다. 밤모 섬에서 죽은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복음을 전하다가 내가 언제 죽는지도 모른 체 순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도망가기에 바빴고 자기들이 살길만을 찾아갔던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는가? 복음서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철딱서니 없고 배신자들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들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고 목숨을 바치게 된 것인가?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무엇이 이들을 참 제자로 만들었던 것인가? 이 답으로 오늘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시는 장면이, 하늘로 가시기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이고, 지난 3년간의 시간이 모두 정리되는 장면이고, 앞으로의 향방이 결정 나는 그런 장면이다. 그래서인지 21장에는 참 많은 감정과 많은 이야기들이 많은 마음의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21장을 다 설명하려면 오늘 이 시간이 다가도 할 수 없어서 설교 주제에 맞추어서 우리가 읽은 본문의 세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1장에 들어가는

1. 첫 번째 마음은 제자들이 절망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 때는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이다. 학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경우는 누군가에게 분노하거나 실망했을 때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라고 한다. ‘나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이 들 때이다. 내가 무가치하다고 생각이 들 때,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 자살을 택하게 된다.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을 따랐다. ‘나를 따르라’ 라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 한 때는 이 분과 함께라면 이 세상을 뒤집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 있기도 했다. 한때는 병든 자가 나음을 입고, 귀신이 나가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면서 새로운 나라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예수님을 따라갔던 변화 산에서는 엘리야와 모세를 보기도 했고 이 분과 함께라면 여기서 죽어도 좋다라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늘 힘들게 했던 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힘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힘이 달랐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꿈꿔왔던 나라와 예수님이 꿈꿔왔던 나가 달랐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뭔가 될 듯 될듯한데 딴소리를 하는 것 같고 이 고비만 넘기면, 여기서 한 발만 나아가면 될 것 같은데, 다시 멈추시고 도대체 스승님의 뜻인 예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확 따르자니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웠고, 배신하자니 지금까지 따랐던 것이 아깝고, 또 배신하기에는 너무나 괜찮은 스승이다. 그러던 중에 스승이 먼저 십자가에서 죽었다. 도대체 ‘나는 지난 3년간 무엇을 한 것일까?’ 라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제자들을 찾아온다. 물론 주님의 잘못도 있다. 제자들의 마음은 몰라준 체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하시는 자신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만 이야기 하시는 예수님의 잘못도 있지, 더 근본적으로는 제자들이 문제였다. 이것을 주님을 따른 것도 아니고, 배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켜낸 것도 아니고, 이용한 것도 아닌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지난 3년간 무엇을 한 것일까라는 그 질문이 제자들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늘 말뿐이고 결국은 내 살길을 찾아가는 그것도 머저리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선택 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갈릴리로 돌아갔고 다시 고기 잡는 일을 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처럼 텅 비어있는 그물을 거두고 있고 심지어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알아보지 못한다. 절망과 갈등과 실망과 무가치함에 빠져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드러난다. 둘째로는 오늘 본문에서

 
2. 두 번째의 마음은 미안함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사과하는 말은 사과하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모토인 저 같으면 일단 무릎부터 꿇고 잘못했다고 이야기 하고 살려달라고 이야기 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했을 텐데,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를 알았는지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별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본문을 천천히 묵상해보면 그 미안한 마음은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했다. 제자들 스스로도 예수님이 우리가 배신자를 다시 찾아오시지를 않겠지를 생각하셨는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지 못했는지, 그물을 던져도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며 그곳에 있다. 그때 저 멀리에서 이야기하는 어떤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물을 던지라는 말에 따라 그 아저씨의 말을 따라 그물을 던졌고, 물고기가 그물에 가득하게 된다. 그때가 돼서야 눈치가 빠른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본다.
 
*요한복음 21:7,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반사적으로 베드로는 물에 뛰어든다. 제 생각으로는 배가 더 빨랐을 것 같은데 왜 물에 뛰어든 것인지 모르겠다. 보고 싶은 마음에 뛰어들 수 있고, 숨고 싶은 마음에 뛰어들 수 있고, 미안한 마음에 물로 들어갈 수 있다. 심지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는데 검은 옷을 입고 바다에 들어간다. 엉망진창 좌퉁우돌,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상황들이 베드로의 마음을 더 잘 드러내 준다. 물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향해 가면서 헤엄을 치는 베드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 처음에는 서둘러서 헤엄을 치다가 예수님께 천천히 가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까? 빨리 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차라리 물속으로 들어가면 좋겠다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같지는 않았을까? 바닷물과 섞여서 알아볼 수 없었겠지만 눈물과 바닷물이 얼굴에 범벅이었을 것이다. 또 고기가 가득한 배를 끌고 갔던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 앞으로 가면서 어떠한 마음으로 갔을까? 육지로 나온 제자들은, 예수님 앞으로 간 제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숯불과 떡과 고기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차마 예수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미안하다라는 말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진짜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이 본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몇 마디 앞에서 언제부터 예수님의 말을 잘 들었다고 알아서 착착 말을 잘 듣는다. 잘못한 것이 있는 사람이 알아서 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제자들의 미안함이 허둥지둥하는 모습과 침묵으로 이 본문 속에 숨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의 백미(白眉)인 용서의 마음이다.

 
3. 세 번째의 마음은 용서의 마음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약속에 따라 갈릴리로 가셨다. 제자들이 보고 싶기도 했고 지난 며칠 간 일어난 엄청난 사건들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제자들이 걱정되기도 했고, 배신할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이 배신자들을 혼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갈릴리에 가니 예수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아니라, 제자들은 3년 전 모습처럼 고기를 잡고 있다. 고기를 잡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고 짠한지 모른다. 게다가 그물은 텅 비어있다. 예수님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씀을 하자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물을 던진다. 그래도 한 놈쯤은 이래도 나를 알아볼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기우였다. 더 멀리 배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가 물에 뛰어 들고, 뭔지 모를 작은 소동들이 벌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그토록 보고 싶던 제자들이, 그토록 얄미운 제자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일반적이라면 어떤 말이 오고 가겠는가?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님이라면 어떤 말을 했겠는가? 오늘 아침, 어제 저녁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야단쳤던 여러분의 자녀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니들이 사람이냐, 니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니? 그래도 한 놈은 나를 따라올 수 있었지 않냐?’고 막 쏟아 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정말로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사실 이 부분이 더 고수이시다. 아무 말도 안하면 더 불안하다. 잡은 고기를 가져오라 하니 가져온다.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소가 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다들 자식을 키우시니 잘 아시게지만 여러분이 다 자라면서 그런 일을 다 겪으면서 자랐겠지만. 잘못한 자식에게 아침이나 먹자라고 밥을 차려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야 꼴 보기 싫은 놈아, 왜 그랬느냐?’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새끼인데 ‘내가 어찌하는가? 내가 이번 한 번은 용서해 줄 테니 와서 밥 먹어라.’고 하는 것은 수십 수만의 의미가 담겨 있는 용서의 표현일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 밥을 먹으면서 모닥불을 보면서 물고기를 보면서 또 떡을 보면서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밥은 잘 먹었을까? 지난 3년이 지나갔을 것이고 지난 며칠이 지나갔을 것이다. 늘 양다리를 걸치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품어주시고 용서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눈물과 고기와 떡이 섞여있는 식사를 했을 것이다. 이제 다시 설교의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요한복음 21장을 보면서 제자들을 변화시킨 것이 무엇이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이들을 참 제자로 만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 답할 것이다. 맞다. 또 어떤 사람은 용서라고 말한다. 맞다 용서 때문에 또 어던 사람은 은혜라고 말한다. 그 은혜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저는 사랑, 은혜, 용서 이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님의 찾아가심이라는 답을 말씀드리고 싶다. 제자들이 변화된 것은 ‘하나님이 찾아가심’이다. 절망 가운데에 찾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은 변화되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찾아가신 그 예수님 때문에 제자들이 변화되었다. 사랑하기 위해 용서하기 위해 은혜를 베풀기 위해 끝까지 찾아가신 하나님이 제자들을 변화시킨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기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우리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이 언제부터 찾아오시는가 하면 창조 때부터 제자들인 우리를 찾아오셨다. 어떻게 찾아 오셨냐면, 말씀을 통해, 율법을 통해, 기적을 통해, 선지자들을 통해 찾아오셨다. 그래도 안 되니 또 어떻게 찾아 오셨냐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래도 바보 같이 또 어떻게 찾아 오셨냐면, 죽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다.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못 알아보니 또 어떻게 찾아 오셨냐면, 우리가 같은 바보 같은 인생들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셔서 또 찾아오셨다. 그래도 힘들어하시니, 어떻게 찾아 오시냐면,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 그러니 제자들이 배신자들이 갈팡질팡하는 좌충우돌하던 우리가 힘겨워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찾아가시고 또 찾아가시는 그 은혜를 입어서 자격 없는 자들이 변화되는 것이 이 성경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은 우리보고 자신을 감동시키라고 한다. 우리가 뭔가를 해서 우리의 자격을 증명하라고 한다. 돈이던 굿이든, 재물이든 돈이든 수천 번 절을 하든 뭐든지 해서 나를 감동시키면 내가 아주 조금 자비를 베풀어서 그것도 내가 기분이 좋으면 너희가 원하는 뭔가를 해결해 주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잘해야 보상을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이 뭔지도 몰라 배신하고 멍청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찾아오시고 배신당해도 또 찾아오시고, 심지어 죽기까지 찾아오시고 더 심지어는 다시 살아나셔서 찾아오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고 이 성경이 말하는 약속이고, 배신자였던 제자들이 참 제자들로 변화하게 된 이유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힘든 순간이 참 많다. 무엇보다도 나는 언제쯤 성숙해질까로 질문이 다가올 때, 나는 언제쯤 참 제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다가올 때, 나는 언제쯤 목사님 같은 목사가 될까하는 질문이 될 때, 마음이 진짜 어렵다. 제법 교회에 익숙해져서 예배도 하고 다락방도 하고 헌금 생활도 하고 훈련도 받고 순장도 하고 직분도 받고 뭔가 외적으로는 변화되는 것 같은데, 나만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은 늘 죄 가운데 있음을 알고 있기에 제자가 아니라 원수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어렵다. 제자들은 주님이 아니면 로마였지만 우리들은 그들보다 더한다. 교회, 세상, 자식, 음란함, 은행, 부동산, 성경욕심, 죄 온갖 마음이 갈기갈기 나누어져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회복되어져야 할 문제인지도 모를 만큼 엉망진창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격이 있는 것 같지만 시커먼 속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어렵다. 나를 볼 때마다 갈릴리의 제자들의 절망이 보인다. 예수님을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예수님 앞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모습, 그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자 도망가 버리고 마는 제자들과 다르지 않는 모습, 예수님이 찾아오셔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이 딱 우리의 모습이다. 다락방을 하다보면 도대체 언제 사람이 될 것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겨우 다락방 한 번 참여하는 것 가지고 그것도 맨날 지각하고 간식한 번 준비하지 않으면서 마치가 자기가 큰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인정받은 사람처럼 순원 들을 볼 때 마다 주먹이 우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언제 제자로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이 생긴다. 새벽마다 기도하고 다 베풀었는데 달라질 기미가 없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절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우리를 그리고 자녀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변화되는 힘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면 또 절망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결단과 열심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기에,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성숙하게 하는 우리의 은혜이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내가 나의 한계를 직접 뛰어 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도록 도우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 숨어버렸던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셔서 가죽 옷을 입혀주셨던 그 하나님, 아버지를 속이고 형제를 속이고 괴롭게 살아갔던 욕심쟁이 야곱을 일부러 찾아가셔서 네가 이겼다라고 은혜를 베푸셨던 그 하나님, 간음으로 죄에 갇혀있는 다윗을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 로뎀 나무 아래에서 더 이상 못해먹겠다던 엘리야를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 배신자들을 찾아가셔서 아침을 먹이셨던 그 하나님,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뒤로 한 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가셨던 그 하나님이 그리고 우리를 이 자리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셨던 그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의 순원과 우리의 자녀들을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기에 우리는 기다릴 수 있고 버틸 수 있고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울 겨울이 다가온다. 열매가 없어서 마음이 참 그렇다. 참 열심히 살아왔는데 믿었는데, 늘 제자리에 있는 우리를 본다. 하지만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낙심 말고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예배로 말씀으로 특새로 대각성으로 또 우리가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 장소로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 한다.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울어주시고 마침내 아침을 차려주시는 그 찾아오심의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하시는 은혜가 되기를 예수님의 은혜로 기도한다. 우리를 참 제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찾아오심이다.
 
♣요약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말씀을 통해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찾아오심임을 깨닫고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은혜로 살아가게 됨을 감사하며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내가 세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더욱 믿음으로 성숙해져서 절망과 미안함이 용서가 되었음을 감사해야 한다.

-한편 예수님은 옛 직업으로 되돌아간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도 함께하셨다. 이와 같이 죄 많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오신 임마누엘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고난과 실패의 삶 속에 함께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실패 가운데 있을지라도 기도함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을 보는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또한 주님은 말씀을 주심으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다. 지금도 주님은 말씀을 통해 성도의 삶이 풍성케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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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10월 23일)
제목: “에바다의 역사를 주옵소서”
말씀: 마가복음 7:31-37
기도: 김태권 안수 집사님(목양 8팀 교구장)
말씀읽기: 김진영 형제(청년 D국), 신예현(대학 5부)
찬양인도: 강중현(찬양 사역자)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SaGa 예배아카데미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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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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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강중현 찬양사역을 축복한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께서 이 찬양을 기쁘시게 받으신 줄 믿는다. 토요비전새벽기도회로 이 금 같은 시간에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처럼 집에서 더 자고 더 쉴 수도 있는데도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안아주심의 본당에 나와서 예배하는 성도님들, 그리고 온라인을 통해 예배로 참여한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저도 여러분이 사랑스럽고 감사한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를 생각해 본다. 저는 마가복음을 참 좋아한다. 누가 누구를 낳고, 그런 긴 부분도 없고, 곧장 예수님을 맞닥뜨린 인생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스토리마다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들이 마구 드러나기 때문에 제가 마가복음을 좋아한다. 예수님을 만난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들의 생계를 뒤로하고 예수님을 쫓아 나서던 제자들, 모든 병들이 치유되고 걷지 못한 자가 걷기 시작하므로 예언 된 메시아 증거들이 마구 쏟아지는 그런 귀한 말씀이다. 오늘 읽은 본문도 예수님을 맞닥뜨린 한 사람의 기록이 나온다. 갈릴리 해변에 오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나오신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7:32,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귀 먹고 어눌한 자라고 이야기 한다. 참 희한하다. 어눌하고 귀먹은 자도 아니고, 귀 먹고 어눌한 자, 그 다음에 33절에 보면,
 
*마가복음 7:33,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시는데 32절에 예수님께 나온 그 사람의 대한 표현과 33절에 나오는 어떤 일관성이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 단어들의 순서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귀 먹고 어눌한 부분을 우리가 이렇게 좀 묵상을 해보면 음악과 연관된 어떤 단어하나가 떠오른다. 음~~치, 이다. 음치이다. 음치(音癡)가 혹시 무엇인지 아시는가? 저는 처음에 이 단어를 들었을 때, 음을 다스리는 사람을 음치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닌 영어로는 ‘Tone death’이다. 중국말로는 ‘语气(Yǔqì)이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음치라는 단어가 사실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귀 먹고 어눌한 자, 음치와의 관계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말라. 제가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에 음치하신 분들을 제가 비하 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음치를 조금 더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우리가 소리를 듣되, 소리의 크고 작음은 듣기는 듣는데, 음감, 음의 감각, 음의 낮고 높은 것에 대한 감지가 잘 안 된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게 안 되니까 그것을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음치이다. 음치는 여러 가지 요인에서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노출되지 않은 삶을 오랫동안 사신 분들이 음치인 경우가 높고, 그 다음에 혹은 어렸을 때 심리적으로 상당히 내성적인 분들이 자기가 노래를 했다가 어떤 트라우마를 경험하거나 충격을 경험하면서 ‘나는 안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그 충격으로 인해서 후천적으로 음치가 되는 경우가 되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본인이 음치라는 것을 아는 것도 굉장한 일이다. 웃자고 한 것은 아니다. 노래방을 간다든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할 경우가 있을 때, 그분들의 심리적인 압박이 참 클 것이다. 제 친구들 중에 음치가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이 음치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자유 했고, 어떤 장르의 음악도 소화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떤 때는 그 친구가 참 부러웠다. 32절에 그 사람의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7:32,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구체적으로 귀 먹고 어눌한 자로 표현된 순서를 보면 그가 말이 어눌한 이유는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도 귀로 먼저 듣고 그다음에 혀와 입으로 무엇을 표현하므로 말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생각해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잘 기억해보면 우리는 생각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는 생각을 통해서 나의 생각을 듣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 저만 그렇게 사는 것 같다. 요사이 어떤 음성을 듣고 있는가? 신명기를 보면,
 
*신명기 11:13-15,
13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청종(聽從)이다.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소리가 있다. 때로는 뉴스의 사건의 소식을 들을 때, 제가 이제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거의 일 년이 되간다. 뉴스를 들으면 아마 미국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제가 잘 못들을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뉴스를 접할 때마다 겁이 난다. 너무나 잔인한 소식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32절 초반부에 보면 이 귀 먹고 어눌한 자를 주님께 데리고 나간 사람들이 있었다. 이 부분을 묵상하니까 우리 교회 다락방이 떠오른다. 우리 교회 순장님들이 참 자랑스럽다. 순장으로 섬기기 위해 매주 화요일에 나와 반나절을 주님께 드리며 훈련받고, 또 다락방 순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순원들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본인이 모든 일에 본을 보이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며 사시는 분들이라 참으로 귀한 분들이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성공을 추구하는데, 우리 순장님들은 오히려 자신에게 주시는 모든 것(리소스) 들을 영혼 구원이라는 지상 최대의 명령을 위해서 오히려 투자하고 헌신하는 작은 예수님이시다. 바로 그분들이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대로
 
*히브리서 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주님께서 귀 먹고 어눌한 자를 고쳐 주시되 어떻게 고쳐 주시는 것인지를 우리가 좀 집중할 필요가 있다. 33절에 보면,
 
*마가복음 7:33,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따로 데리고, 참 주님은 인격적이시다. 우리를 고치실 때, 따로 데리고,,, 사람들로부터 떨어져서 따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신이 이렇게 인격적이신가? 아마도 본인이 귀 먹고 어눌하기에 사람들의 눈들을 보느라고 굉장히 긴장했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사람을 고칠 때, 무엇부터 고치시냐면, 귀부터 고치신다. 33-34절을 보면,
 
*마가복음 7:33-34,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귀부터 고치시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귀는 너무나도 진리가 아닌 것들을 듣고 산다. 우리가 때때로 우리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열 받는다. 무척 받는다. 34절에 보면, 귀 먹고 어눌한 자를 향하여 주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이 또 보인다.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야고보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자’,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러분, 실제로 우리의 인생은 어떠한가?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다시 담을 수 없는 우리의 후회스런 말들과 망언들이 우리의 삶에 있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내가 귀 먹고 어눌한 자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의 탄식이 우리를 만져주신다. -참 이 연약한 저의 인생에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기도한다.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오 주님, 저의 연약함과 실수로 벌어진 이 상황이 제발 꿈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정도로 후회한 적이 우리 인생에 왜 없겠는가? 오늘 이 아침에 다시금 주님 앞에 예배자로 서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러분과 저의 삶 위에 주님의 탄식이 우리의 귀를 먼저 만져 주시길 간절하게 소원한다.
 
*마가복음 7:35,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귀가 열리고 희한한 일들이 생기는데, 우리가 알게 된다. 영적인 귀가 열릴 때, 즉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귀가 열리면 말이 분명해진다고 말씀하신다. 귀가 열리면, 혀가 풀리게 되어 있다. 우리의 영적인 귀가 열리면, 혀가 풀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잠언 4;20-24절을 보자.
 
*잠언 4:20-24,
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귀가 열리면 영적인 혀가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 말씀을 이제 준비하게 되었냐면, 저는 미국에 있을 때도 35년 동안 찬양대를 지휘했다. 유명한 곡들도 했고, 그렇지 않는 곡들도 했다. 많은 곡들을 연주했는데, 하나님께서 찬양대원들의 하나님의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헨델의 메시아, 하이든의 천지창조, 구사프 말러의 부활, 다 해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목표가 아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목표는 무엇이냐면, 우리의 혀가 성령님께 온전히 붙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찬양대만이 아니라 예배자로 불러주신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은 모든 자들을 다 불러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현실은 무엇인가? 너무나 연약하고 실수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마지막 호흡까지 예배자로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우리의 영적인 귀를 계속해서 열어주시고 그 결과로 우리의 혀가 하나님 앞에 풀려지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시편 51:15,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 하리이다.
 
*사도행전 1:16,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통하여, 어떤 번역에는 ‘다윗의 입을 의지하여’, ‘다윗의 입을 빙자하여’, 급기야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을 빌려 사용하시는 기막힌 역사(役事)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자, 다윗의 입술을 빌리시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귀 먹고 어눌한 자가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예배할 때, 주님 앞에 나온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예배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의 영적인 청력이 회복되어지고 다시금 일어서게 되고, 이런 은혜가 우리가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게 된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찬양이 있었다. 아마 오래된 찬양이어서 여러분들이 들어보실 수 있을 것이다.

♬열어주소셔!!~~~내 귀를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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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Time-
-This is the time
When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se are the days
When my Father's ways will be known to men
-This is the hour
When the spirit's power will move again
As we worship You in spirit and in truth
Lord we worship You in spirit and in truth
Lord we worship You in spirit and in truth
 
Chorus:
Holy, Holy, Holy is Your name
Worthy, worthy, let all the earth proclaim
Mighty, mighty, there is no God like You
And we worship You in spirit and in tr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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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우리 자신의 음성과 주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것을 우리가 듣고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우리는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그곳에서, 참된 예배자로 서야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다윗의 장막, 주님을 찬양하는 그 다윗의 예배가 우리 가운데 회복되어 우리가 다락방 안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그 진리위에 거룩하신 성령님이 능력과 힘을 주셔서 서로를 참된 영 가족으로 변화되어서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아야 하며 주님 앞에 삶을 드리며 모두가 무릎 꿇고 기도의 입을 열었을 때, 우리의 입을 통해 주의 일을 신실하게 행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한 장소에 오랫동안 머무셨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료해 주셨을 때 그는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므로 갈릴리 호수로 다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갈릴리 호수로 곧장 가지 않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돌아가셨는데 이곳은 대부분 요단강과 접해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병을 고쳐 주시는 이야기를 대하게 되는데 이 내용은 다른 복음서 기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내용이다. 그것은 곧 귀먹고 어눌한 자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귀먹은 자를 데리고 왔는데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는 전혀 대화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얻는 기쁨과 유익을 상실한 채 살아왔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는 일이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일에 전혀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청각을 보호해 주셔서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과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특히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자. 이 가련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온 그들은 그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그를 치료해 주도록 간구한 것이 아니고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처지를 살피셔서 기뻐하시는 대로 그에게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보통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하실 때 공개적으로 나타내셨는데 이 경우에는 은밀히 행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선을 행하도록 하자.
 
첫째로 주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셨다.
둘째로 주님은 그의 손가락에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셨으며 이렇게 해서 그의 혀 맺힌 것을 풀어 주셨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그를 고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될 수 없고 단지 그의 신앙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신앙을 격려해 주려는 표적에 불과했다. 이런 동작을 통해 그가 뜻했던 것은 그의 병 고침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이 결과로 들을 수는 없어도 볼 수 있는 그 병자에게 구원을 위해 하늘을 바라보도록 지시했다. 그것은 그가 기적을 행하는 데 어떤 어려움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인생들의 비참한 모습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나타냈으며 몸소 그들의 허약함에 감동되어 고통으로 번민하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표현했다.
 
이는 열리라는 뜻이다. 열리라고 한 말씀은 귀와 입에 모두 적용이 된다. "귀가 열리고 입술이 열려서 그가 자유로이 듣고 말하게 하라"는 뜻이며 그 결과는 응답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졌다. 처음으로 듣고 말할 수 있는 순간부터 자기와 아주 가까이 계시는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대화를 나눈 그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 병 고침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나타낸다.
 
첫째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권세에 대해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복음의 효력에 대한 실례가 된다. 불쌍한 죄인들에 대한 복음의 위대한 명령과 그리스도의 은혜는 에바다 곧 열리라는 것이다. 그는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도록 귀를 열어주시며 기도와 찬양을 드리도록 입을 열어주신다. 그가 '저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36절)고 하신 것은 그의 겸손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미덕을 밝히거나 적어도 남들이 그 미덕을 밝혀주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는 선을 행하는 일에 기뻐해야 하지만 그 선을 알리는 일을 기뻐해선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이 알려지도록 하기 전에 그들은 열심을 내어 이 일을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솔직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알렸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불순종의 행동이라기보다는 경솔한 행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을 알린 사람들이나 들은 사람들은 모두 심히 놀라게 되었다. 이 일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 사람들은 그가 잘 하였도다. 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무런 악도 행치 않았을 뿐 아니라 많은 선을 행했으며 아무 대가없이 무료로 선한 일을 잘 하였다고 증거 하려 했을 것이다. 그는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게 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잘 하셨기 때문에 그를 헐뜯으려는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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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향애-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10월 20일)
제목: “나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4:7-19
설교자: 금동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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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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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가 국민 학교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 학교 1학년 때에 저의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붉은 군단들에게서 지구를 지켜내는 로버트 태권브이를 만드는 과학자 김 박사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 웃으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것 같다. 그래서 저는 과학시간이 참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국민 학교 4학년쯤 되어서 로봇 태권브이를 만드는 과학자 ‘김 박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심히 우울했다. 저의 성씨는 김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김박사가 되지 못했다. 저만이 아니라 저희 반가운데 대통령이 되겠다던 15명의 학생들도 다 대통령이 못 되었다. 12명이 넘게 의사가 되겠다던 의사가 되어서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겠다던 친구들도 온데간데없다. 미스코리아가 되겠다고 그렇게 머리를 길렀던 몇 명의 여학생들은 매년 미스코리아 선발대에서 그녀들의 얼굴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렇게 다짐 했던 아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수십 년이 지나 이제 인생이 거의 절반을 살아 낸 저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어릴 적 꿈은 그저 씁쓸한 이루지 못한 추억일 뿐이다. 어린 시절 생각했던 멋진 삶, 다른 이들이 인정받고 있는 삶을 갈망했으나 우리 현재 삶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어른이 된 저도 저 자신이 없다. 이렇게 결여된 삶은 단순히 재물이 많거나 높은 지위에 올랐거나 유명해졌다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로봇 태권브이 김 박사가 되지 못해서 슬퍼하며 인생에서 패배한 것처럼 살아야만 할까?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미스코리아가 되지 못하고 좋은 가정과 풍족한 삶,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우리는 이제 포기해야 할까?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성경에 이러한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이 겹쳐진 인물이 등장한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수가에서 사는 여인이었다. 우리가 성경에 묘사되어진 부분으로 그녀는 모두 판단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잠시 그녀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녀는 유대인들이 배척하는 사마리아 연인이었다. 그리고 혼자 물을 길으러 온 모습을 통하여서 동네 다른 사마리아인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녀 가정에, 집에 대해서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4:17~18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렇게 초라하고 권고한 인생에서 그녀에게는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더 이상 남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 있었을까? 어린 소녀시절 꿈꾸던 동화처럼 고난과 그녀의 인생이란 탑 아래 갇혀버린 그녀를 구해줄 왕자가 나타날까? 아니면 어느 드라마처럼 경제적으로 풍족해 줄 수 있는 재벌 2세와의 우연찮은 만남이 이루어질까? 모두 허황된 이야기일 뿐이다. 과연 곤고한 가운데 자포자기 하고 자신의 상황 자신의 처지를 잊어야만 그저 살아갈 수 있는 인생들이 우리 눈앞에 너무도 많다.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것이다. 그녀의 인생가운데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이 질문이 나에게 우리에게 향해야 한다. 수많은 멋져 보였던 꿈들을 뒤로 하고, 재물을 뒤로하고, 잡히지 않는 명예와 허황된 것을 뒤로 하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먹고 마실 물 항아리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지금 진정 무엇이 필요한가? 이 지긋지긋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는 구원자는 누구일까? 오늘 본문은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정도 우리의 신앙의 회복과 우리의 삶의 소망에 대해서 살펴보길 원한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I. 나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질문 중에 무슨 질문을 교회에서 하든지 답을 모를 때는 ‘예수님’으로 대답하면 7-80퍼센트 맞다. 자 질문하겠다. 성경에 지금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왔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 .... 그렇다. 우리도 예수님이 필요하다. 비록 물을 길으러 왔지만 그녀가 만난 유대 청년을 통해서 그녀가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도 그랬을까? 정말 그녀도 예수님이 필요한 것인가? 물을 길으러 왔으면 물을 긷고 집에 돌아가면 되지,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 예수님 말씀 가운데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 기록되어져 있다.

 
*요한복음4:10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물을 달라하시는 예수님에게 물 대신 자신의 분노를 한 바가지 퍼붓는 사마리아 여인, 좀 이상하다. 마음의 상처가 참 큰가 보다. 이런 분위기의 예수님은 자신, 예수님 자신을 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어떤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가? 성경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 이 사마리아 여인의 눈과 입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내가 필요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는 그 여인이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저 유대인이었다. 9절에서 ‘당신은 유대인으로’ 라고 말한다.
두 번째는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 라고 말한다. 여기서 주여는 그 주여!~ 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줄 수 있는 생수에 대해서 말씀하시니까 그녀는 그 물 공급한, 물을 받는,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제공 받기 위해서 ‘주여!’ 라고 말하고 있다.
세 번째는 19절에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어떻게 말씀 하냐면 주여!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한다. 자기가 자신의 상황을 자기가 자신의 상처를 1도 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그녀의 상처와 마음과 상황과 역경과 슬픔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라고 그녀의 입으로 고백한다. 예수님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예배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말씀을 듣다가 예수님을 깨닫게 된다. 내 앞에 계시는 분이 내가 그렇게 기다렸던, 우리 사마리아인들이 그렇게 기다렸던, 유대인들과 모든 족속들이 기다렸던 메시아 그리스도란 사실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마을로 뛰어간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모두 모두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들, 내 인생이 어떤 것인지 잘 알죠? 그렇다. 나는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고 지금 집에 있는 남편도 내 남편이 아니다. 그런데 내 인생은 처참했고 보잘 것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이야기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서 아시는 그분이 저기 계시는데, 저분이 그리스도가 아니겠는가? 와서 보세요!, 나의 상처를 안아주고 나의 아픔을 위로해주시며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우리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왕이시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나를 바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가 강남역에 있을 때의 일이다. 강남역에 있을 때니까, 강남역을 많이 오갔다. 하루는 강남대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그곳에서 아는 청년을 만난 것이다. 그 청년이 참 멋지고 잘 생긴 청년인데 잘 안다. 그날은 얼굴이 죽을상이었다. 그 청년을 횡단보도에서 앞에서 만나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란 불이 켜지는데 그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제 마음 가운데 그런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이 친구를 잡고 계시는구나!. 제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다. “얘, 피조물이 피조물을 더럽힐 수 없단다. 오직 창조주만이 피조물을 더럽힐 수 있다. 더럽다 할 수 있고, 정결하다 말할 수 있단다. 내가 너의 사정을 잘 알 수 없으나 너의 얼굴을 보니 네게 참 힘든가 보구나. 예수님께서 너의 죄를 다 씻기시고 정결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셔서 예수님께서 깨끗케 한 방식이 있어.” 이 말을 하자마자 파란불 길을 걷다가 이 청년이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펑펑 울었다. 저는 그 친구가 거기서 왜 울었는지는 모른다. 정신이 이상한 것인지, 생각이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이 이야기가 꼭 필요했던 것인지 저는 확실하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청년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어떤 목사님이 물었다. 이 설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이 목사님이 물었다. 왜 예수님이 필요해요? 라고... 대답했다. ‘그냥 필요하니까요.? 그 답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제 한 이야기인데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했다. 왜 나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라고 생각하다가 지금 설교 바로 올라오기 전에 깨달았다. 아, 예수님이 나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 예수님이 보잘 것 없고 죄로 물들고 찌들고, 볼품없는 어렸을 때 꿈조차도 다 뭉개지고 무너져서 더 이상 살 소망도 무기력 가운데 아무것도 할 힘도 없는 나를 찾으시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이 필요하구나!‘ 오늘 이 자리에 예배를 위해 달려오신 성도님들, 왜 이 자리에 왔는가? 예수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우리 예수님을 찾은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 귀한 성도님들을 때로는 직장 가운데 실패하고 관계 가운데 실패하고 물질로 실패하고 실력으로 실패하고 자녀들에게 실패하고 이것저것 다 실패해서 볼품없어 어디 한 구석 누구 앞에도 내 인생을 내 삶을 자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 값으로 사신 우리가 필요하다고 찾으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은혜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찾는 데에 마음이 바뀌시는 적이 없다. 그 단 한 번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 변하지 않으신다.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은 조금도 흔적조차 나지 않는다.
 
제가 청소년 사역을 오래했다. 많은 청소년들이 질문이 그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 내가 믿는 것이 믿음인가요? 나 예수님 믿게 좀 해주세요.’ 참 어려운 질문이었다. 저도 그 친구들로 참 시험에 많이 들었다.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연 이 은혜로 주신 이 믿음은 변하는가? 에 대해 많이 힘들었다. 그런데 제가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살아보니까 믿음은 안 변한다. 내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내 감정이 변하는 것이지 우리 주님께서 주신 우리 믿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한 번은 왕따를 당한 소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고 있는 중에 어머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다. “목사님, 제 딸을 심방을 한 번 해주십시오.” 하셨다. 그래서 찾아갔다. 그 친구를 바라볼 때, 억장이 무너졌다. 정말 억장이 무너졌다. 왜 왕따 당했는지 이유가 너무도 황당했다. 임대아파트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친구들이 왕따를 당하게 했다. 제가 그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제 차의 핸들을 뽑을 뻔 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 아이가 얼마나 예수님을 의지했는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 아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저 아이를 왕따 시킨 친구들이 나쁜 것이잖아요?? 왜 친구들은 멀쩡하고 왜 저 아이는 병원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라고 하소연 했다. 밖에서 나를 누군가 봤다면 저를 미친 사람이라고 했을 것이다. 운전대를 뽑으려고 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다. 한 번은 또 가르치는 제자가 납치를 당했다. 여자 아이가 동네 불량한 남자 아이들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다. 그 기분 알 것이다. 심장이 녹는다. 아니 내장이 녹는다. 제가 염색해서 그렇지 머리가 하얗다. 그때 너무 충격을 먹어서이다. 하얗다. 30대부터 염색을 했다. ㅋ ㅋ ㅋ ~ 염색한 것이 그렇게 웃기는가? 슬프다. 그 애간장이 녹는다. 하나님 정말 살려달라고 했다. 참 신기하다. 일반 가정에서 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되면 기본적으로 집안이 망한다. 안 그런 분들도 계시는데 그런 분은 말하고 싶지 않고 저희 집은 쫄딱 망했다. 목사님이 망했는데 그렇게 좋은가? 대학 등록금을 못 내서 대자보에 붙어졌다. 그런데 금씨이니 제일 먼저 위에 붙여있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그렇게 돈을 안 주실 것이면 저 신학을 그만 하겠습니다.’ 했다. 그렇게 하소연을 대게 많이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참 힘들었다. 돌아가신 줄 모르고 그냥 찬양하고 기도하고 숨을 헐떡이시는 아버님께 아빠. 예수님 믿으시죠. 응 아들아, 옆에 며느리가 있었는데 며느리에게 피곤하니까 집에 들어가라고 하셨다. 당신도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마음이 쉽지 않았다. 저는 제가 믿음을 잃을 줄 알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 상한 것을 하나님께 안 믿는다고 하소연을 했다. 하나님 믿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잠을 청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그 다음날에 눈을 뜨면 예수님이 믿어졌고, 아무리 안 믿으려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발버둥 쳐도 저는 예수님이 믿어졌다. 신기한 은사, 경험, 기적 같은 일들이 펼쳐지지 않아도 비난과 가난과 핍박과 수없이 펼쳐져도 예수님이 자꾸 믿겨졌다.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 믿음을 주신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찾으신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하면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의 삶의 소망과 우리 신앙 가운데 회복이 되는가?
 
II.우리는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질문이다. 오늘 수가 성에 사는 그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첫 번째 질문과 같지 않다. 무엇이냐면 바로 예수님이 아니고 물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분명 그녀는 자신이 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수님도 이 사마리아 여인이 물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4:14,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5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같은 물을 말하지만 전혀 다른 물이다. 여인은 지금 당장 갈증을 해결하고 다시는 귀찮고 불편한 이 일을 하고 싶지 않게 하는 물을 말한다. 요즘 말하자면 수도 시설인 정수기 하나를 설치를 해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단순히 목마름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갈증에서 해결해 주길 원하신다. 무기력하고 쓰러지고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원하신다. 우리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요한복음7:38~39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사마리아 여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거듭난 여인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크게 인생이 변화된 것이다.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네가 필요한 것은 너를 찾는 나, 예수, 내가 너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나에게 생수를 요구했을 거야. 오늘 이 시간 우리가 확실히 깨달을 것이 있다. 나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았다면 절망의 삶 가운데, 무기력 가운데, 그저 나의 처지와 상황을 잊어야만 걸음걸음 인생 가운데 신앙이 회복되어지고 삶의 소망이 생길 줄 믿는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한 번은 시험이 들었다. 기도가 안 되었다. 전혀 안 되었다. 주일 날 전도사 생활을 교회에서 하지만 몸만 움직이지 마음이 없다. 정말 죽고 싶었다. 정말 더 이상 이 생활을 못할 것 같았다. 힘든 4주를 버티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 한 통화가 왔다. 한 정년이 저에게 “전도사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전도사님 저 힘들어요. 기도가 안돼요.!” 얼마나 되었냐고 물었더니 5일이나 되었다고 대답했다. ‘제 속으로 나는 4주나 되었는데’... 이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이 겨우 5일 되었는데, 사마리아 여인이 4주차 된 나에게 덤비는 군!!!~ 했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전도사이니까. 한 참 이야기 하다가 이렇게 이야기 했다. 그럼 다음 주에 잠시 보자고 했다. 제가 좋은 설교 테이프가 하나 주겠다고 했다. 그 테이프를 주기로 했다. 그 청년을 만나야 하는데 깜박했다. 은혜 받았던 테이프가 복사했다. 그 선교사님이 볼륨을 올리니 “당신은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 세 번을 하셨다. 그때 제가 다시 꼬꾸라졌다. 그래서 전도사 사역도 오래했다. 나는 예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전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이 진짜진짜 필요합니다. 그때 은혜를 주셨다 은혜를 주시니까 나의 죄가 고백이 되었다. 낱낱이 고백되었다. 그렇게 나의 죄를 고백하니까 4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눈을 뜨니 눈물과 콧물, 침이 삼위일체가 되어서 눈앞에 펼쳐지는데, ‘와 여기가 천국이구나.’ 했다. 오늘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설교를 한 이유가 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소개를 할까한다.
 
※‘리처드 포스터, 개리비비‘ -이 분들이 쓴 책이다. 영성이 좋은 책이다. 맨 뒤쪽 부분에 요한복음 4장이 등장하는데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 이름은 포티니, 우물가에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 포티니, 그녀는 오순절 날 다섯 자매와 두 아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꿈에 로마로 가라고 지시해서 꿈을 따라 로마로 간다.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한다. 어찌나 전도와 선교를 열심히 했던지 아주 소문이 무성해서 당시 황제 네로가 그녀를 불러서 예수를 못 전하게 한다. 결국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가 허락하신 생수, 성령에 충만하여 네로 황제의 딸, 도미나 공주와 그녀의 시녀의 백 명을 전도한다. 그녀의 이름이 ’포티니‘이다. 우리 성도님들의 이름, 우리 주님께서 다 아신다. 어떤 모습이라도 어떤 상황이라도, 어디 숨어 계시더라도 우리 주님은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 성도님들을 찾아내신다. 우리는 나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요약
사마리아 여인처럼 곤고한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나를 찾아 주시라고, 고백하고 날 받아 주시라고 기도하고,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께서 허락하신 소명과 사명 앞에 다시 한 번 충성 되이 삶을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기대하여 예배와 찬양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당하던 사마리아 여인과 상종하시며 그녀와 많은 사마리아인을 구원하셨다. 이는 그분이 만백성의 구주이심을 분명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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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10월 17일)

제목: ''기도 사전에는 포기가 없다''
말씀: (누가복음 18:1~8)
기도: 최성현 부목사님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권성수 목사님(대구 동신교회)-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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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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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면예배와 비대면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는 모두가 기도의 발동이 열리고 사명에 발동이 걸려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길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한다.

여러분은 최근에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최근에 기도해서 응답 받은 것이 무엇인가? 간증을 하라고 하면 최근에 받은 응답에 어떤 것을 간증할 수 있는가? 여러분이 계속해서 기도하는 분들이라면 기도할 때 무엇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가? 계속 기도하는데도 응답이 없을 때,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는 이름 같은 것을 느낄 때, 여러분은 마음이 어땠는가? 여러분의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 몇 년이 지나도 가족들이 돌아오지 아니하면 마음이 어떠한가? 여러분의 자녀의 신앙의 발동이 열리도록 기도하고 있는데 자녀들이 계속해서 엉뚱한 길로 갈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가? 여러분이 질명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할 때, 계속해서 치유되기는커녕 더 병이 악화될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한가?
 
저는 평생기도 하는 사람으로서, 또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응답을 수도 없이 체험한 사람으로서,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의 기도 생활을 역사하시는지, 그것을 나누어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제일 큰 어려움이 무엇이냐고 할 때, 그것은 당장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심리를 잘 아시기에 오늘 말씀을 주셨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들, 낙심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여기 보면 항상 기도하라.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말라 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의 명령이유이다. 항상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예수께서 왜 이러한 명령을 하시고 계시는가? 기도 안 해도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계시는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시고,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마음속에 있는 신음 소리까지도 듣고 계시는데, 굳이 항상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굳이 기도하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고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여러분도 기도해 보시면 다 느끼시겠지만, 세상의 워낙 어려움이 많아서, 여러분이 말씀을 안 하셔서 그렇지, 여러분의 가슴을 터지게 만든,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때로는 세상살이가 힘든, 문제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런 문제가 많이 계속되고 있는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바로 염려에 빠지고 만다. 바로 고민에 빠진다. 바로 공포에 빠진다. 그리고 때때로 불평은 안 하면서 짜증이 터져 나온다. 짜증을 부리면서 자기를 정당화 시킨다.
 
▷기도하지 않으면 당장 마음이 파괴된다. 기도라는 것은 억지로 응답받는 차원이 중요하지만, 기도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접속이 되는 것이다. 항상 하나님에게 플러그를 꽂아놓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늘 들어오고, 하나님의 능력이 늘 들어오고, 하나님의 축복이 늘 들어오고, 하나님이 주신 희망이 늘 내게 공급되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항상 기도하라, 기도를 쉬지 말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접속되어져 있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능력과 축복과 희망, 의욕을 받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포도나무가 생명의 수액을 공급 받는 것처럼 계속 공급받게 하시려고 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또 기도하면서 특별히 응답이 없고 당장 응답이 없어도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주시고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이 비유는 잘 아시는 대로 과부와 법관의 비유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한다. 물론 법관 중에 진실하고 착한 사람도 많지만 유대인들 사회에서 그 당시에 부패가 심했다. 법조계 불의가 심했다. 그러다보니까 법관 비유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듣는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있었다. 이 불의한 법관에게 과부가 찾아갔는데, 남성 중심에서 유대 사회에서는 절망덩어리이다. 억울한 원한이 있고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하나, 억울한 원한을 갚아줄 삶이 없다. 거기다 법정에서 호소해 봐야 여성의 법정호소는 무시하는 시대였다. 그럴 때, 불의한 법관에게 억울한 절망덩어리, 과부가 계속 찾아갔다. 자주 찾아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한다. 이렇게 간청한다. 여기 본문 말씀에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한다. 이 낙심하다이다.
 
♤원문에 단어는 헬라어로 ‘엥카케오’-..낙심, 마음을 잃다, 지치다, 포기하다, 이러한 뜻이다.
-마음이라는 말이 중심이다. 마음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마음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잃으면 인생을 잃어버린다. 아무리 삶의 어려움이 많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면 여러분이 어떠한 어려움도 돌파하고 이겨낼 줄 믿는다. 그래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영혼이 마음이다. 마음이 속사람이,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오니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만 꺾이지 않으면, 마음만 하나님께 접속되어 있으면 여러분은 마침내 모든 것을 축복하고 범사에 강건하게 하시며 축복을 누릴 것이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이 험악한 코로나 상황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잃지 말고, 마음을 지키길 기도한다. 문제 복잡성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초점은 마음, 영혼이며, 속사람에 있다. 모든 지킬만한 것에 마음을 지키라 하시고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하신다. 마음을 지켜라. 인생의 원천이 마음이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대할 것이 없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계속 언제이냐고 묻고 응답을 기다리게 한다.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인지를 계속 질문하고 응답해 주시길 언제까지냐고 늘 기도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응답이 없어도 계속해야 한다. 주님은 너무나 잘 아시기에 그렇다. 하나님 언제입니까? 언제 해결 될까요???? 매일 질문하고 기도해야 한다. 귀찮게 해드려야 한다.
 
법관은 뭐라고 말하는가? 자주 호소를 하는데 들어주지 않다가 번거롭게 하니 과부의 원한을 들어준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원문에 이렇게 나온다.
 
♤위포피아조-눈을 치다, 고문하다
-권투선수가 상대방 권투선수를 고문하는 것이다. 고문하는 법관이지만 과부가 자주 와서 졸라대니까 마치 권투선수가 눈을 맞는 것처럼 너무 괴롭다.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그렇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과부를 이해하거나 배려해서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귀찮으니까 그렇다. 눈을 치듯 이러한 고통을 당하니까 풀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비유를 하시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저같은 경우는 주님이 저의 기도를 굉장히 빨리 응답해 주셨다. 제가 최근의 기도 응답을 소개하지 않고 예번 것을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의 것을 소개하면 듣는 분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참 많다. 그리고 동신교회 우리 교인들이 최근의 기도응답을 말씀드리다보면 가족문제도 나오는데, 나오면 교인들의 생각에 우리 목사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를 안 하시고 늘 자기 자식 밖에 모르신다고 하실 지로 모르는 오해가 되면 안 되기에 최근의 응답은 하지 않는다. 예전에 하신 기도응답이다.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안 한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을 할 때 필라델피아에서 6년 정도 유학을 했다. 근교에서 살다가 시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집사람(사모님)이 세탁소에서 일을 하셨는데 이제 시내로 들어가야 하니까 일터를 옮겨야 할 처지가 되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보니 저 앞쪽에 73번가 근처에 세탁소 하나가 보였다. 그래서 집사님에게 “여보, 여기서 일하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하나님께도 ‘하나님 여기서 아내가 일을 하면 좋겠네요.’ 했다. 서너 시간 쯤 되니까 어떤 성도님께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 73번가에 세탁소에 사람이 나가서 사람을 찾는 중이었다. 세 시간 전에 기도하면서 차를 타고 지나갔는데 응답하신 것이다. 이렇게만 응답이 온다면 기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집사님의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사모님께 전화가 왔다고 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아들들이 둘 다 공무원이 되게 해달라고 귀찮게 매달렸더니 되게 하셨다. 한 명은 시청, 한 명은 도청으로 발령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귀찮게 하듯이 매달려야 한다. 할렐루야~~!!하나님께 귀찮게 번거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이 비유가 나올 수밖에 없는가? 이 비유를 놓고 주석을 살펴보면 항상 이 비유의 내용은 7절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
 
*누가복음 18:7,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여기서 하물며는 대조이다. 앞에 불의한 법관이 나오지만 하나님은 불의한 법관이 아니고 너희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하신다. 너희를 사랑하셔서 내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너희 구원을 완성 하신 사랑의 아버지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바보가 아니고 선민이다. 하나님의 공주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18:6,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앞의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이다. 만약에 대조만 강조하시길 원하셨다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비유 자체를 안 하셔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법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고도 안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을 하셨냐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심리를 다 아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내 속에서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으면 마음속에 낙심이 찾아올 것이다. 찾아오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렇다. 여러분이 기도하다가 보면 아이고 하나님, 말씀 한마디를 하시기가 그렇게 힘드십니까? 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 입을 꿰매셨습니까? 하면서 오냐 듣자, 라고 수십 년간 말씀을 안 하시고 계십니까? 라는 이런 마음이 생긴다. 여러분이 심리 상태를 주님께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다. 기도를 할 때,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라고 말할 수 있다.
 
*욥기16:12~13,
12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13 그의 화살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사정없이 나를 쏨으로 그는 내 콩팥들을 꿰뚫고 그는 내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은 저런 분이 아니시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낙심하면 저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의 느낌이다. 아무리 선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응답이 없으면 안타까운 것이다.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하나님,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라고 이런 탄식이 나올 수 있다. 이것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판기가 아니시다. 동전을 넣으면 바로 음료수가 탈칵하고 나오듯이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이 응답을 주실 때, 여러분을 유익하게 해 놓으시고, 우리를 예수 닮은 작품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 교회에서 말씀하는 온전 론, 온전한 예수의 제자로 만들어 가도록 작업을 하시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온유하신 예수님을 닮고 말로, 행동으로 삶 전체에 예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서 흘러나오도록 이 귀한 작업을 먼저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과정을 보니 제일 먼저 당장 평화를 주시고 계속 기도하면 마음의 평화가 온다.


○ 기도하면 응답을 어떻게 주시는가?
1)당장 평화,-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보초를 서 주신다. 나쁜 생각이 못 들어오게 하시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과 평정심이 우리를 지배하실 줄 믿는다. 특히 특새에서 기도하고 나갈 때 평온을 많이 느낀다.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마음이 평온이 되는 것이다.
 
2)계속 성화,-점점 예수 닮게 하신다. 삶의 현장에서 아픔 고통 울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바라보게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밀착되어서 하나님께 붙어 있어서 포도나무 가지가 늘 붙어있어서 생명의 수액을 공급 받는 것처럼 수액을 통해 힘을 발하고 열매 맺는 것처럼 계속해서 밀착작업을 하게 하시고 성화 작업을 하게 하신다.
 
3)결국 응답.- 결국 응답을 하신다. 마침내 복을 주려 하심이다. 이 과정이 있다. 기도하고 마치면 과정을 생각하여야 한다. 내 인생을 업그레이드 시키시고 내게 더 놀라운 생명, 능력, 축복을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믿음의 근육을 키우시는 것이다.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이 처지듯이 믿음의 근육이 처지지 않도록 기도하면 죄로부터 멀어지고 세속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취해서 그저 주일날 한 번 교회 나와 예배드린 것 외에는 세상에 완전히 젖어 사는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세속에서 떨어져 나오게 한다. 죄를 멀리하게 만드셔서 계속 주님을 닮게 하시고 밀착접속을 하게 하시고 그 과정을 하게 하신다.

 
*욥기42:5,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여기서 남의 이야기 같다. 그런데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고 난 후에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안 보인다. 귀로 안 들린다.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연단을 받고 나면 우리는 눈으로 보이지 않고 귀로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귀로 들리고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옆에 있는 어떤 인격자보다 더 아찔하게 살아계심을 믿는다. 이 펜데믹 사태 중에서도 삶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본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이 붙잡아 주셔서 눈으로 보고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 낮추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실 줄 믿는다. 이렇게 변화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누가복음 18:7,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그 외아들을 사랑하시되 그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피 흘리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처리하시고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의 완벽한 은혜를 본받게 하게 위해서 완벽하게 살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그리고 구원을 완성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에 집에 들어가서 구원을 마음껏 누리게 입주하게 만드신 것이다. 이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신 줄 믿는다. 정말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신다. 참 좋으신 하나님, 이 찬송을 부를 때, 우리의 마음이 감동이 넘치길 축원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천국의 왕자와 공주가 되도록 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겸손하여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는데 여러분의 밤낮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고 속히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아에게 주신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어 눈물을 보았다고 하신다. 히스기아의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로 믿는다. 속히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속히와 우리의 속히가 다를 뿐이다. 하나님이 속히 응답하신다. 이 놀라운 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매달리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마치 바보처럼 기도해야 한다. 자주, 밤낮, 부르짖으라. 이 말씀을 전하면서 기도의 거성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이엠 바운즈가 한 말이다. 이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전한다.
 
※“끈질김(importunity)은 붙들고 매달려 놓지 않을뿐더러 놓을 수 없도록 붙잡고 기다리는 능력입니다. 쉼 없이 갈망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E.M. bounds-

-하나님의 뜻이면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포인트에 맞추어서 기도하라. 끈질기게 하라. 포기가 없는 기도의 사람 기도의 발동이 걸리기를 축원한다. 전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끈질기에 붙들고 놓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 매달려서 놓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놓을 수 없도록 붙잡고 기다려야 한다. 쉼 없이 계속 주여!!! 언제입니까?? 나타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라. 그러면서 쉬면서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포기가 없다.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
 
어떤 기도는 7년 만에 응답하셨다. 응답 된 것은 참 많은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영국 가서 논문을 놓고 자동차를 굴리지 않고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지를 놓고 기도했다. 미국가서 논문을 준비해야 하니 칠천 불이 필요하다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논문을 써야하니 주시길 기도했다. 하나님께만 기도했다. 사람을 의지 하지 않았다.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제가 늘 다니던 웨스턴 민스터 우편함을 가는데 교수님이 주시는 과제를 체킹을 해야 해서 우편함을 본다. 참 놀라운 현상이었다.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물고 왔는데 현대판 까마귀는 저에게 떡과 고기가 아니라 달러를 물고 왔다. 매일 물고 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했다. 매일 누가 보낸 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사람을 움직여서 보내셨다. 계속 보내시고 어떤 때는 삼사백, 오백, 무명으로 계속 보내주었다. 그렇게 해서 17일 동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다 채우셔서 제가 17일 만에 칠천 불을 채워주셨다. 하나님이 저에게만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매달려야 한다. 계속해서 집요하게 매달리면 기도의 발동이 걸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을 하실 때, 여기 믿음이라고 할 때, 밤낮 부르짖는 믿음, 과부처럼 귀찮게 매달리는 믿음, 집요하게 끝까지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믿음을 원하신다. 말세에 더욱 원하신다. 얼마나 전도를 하는가도 그렇다. 평소의 일만 생각하며 졸면 안 된다. 전 세게 코로나 사태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경고의 나팔소리이다. 이 나팔을 전 세계에 불고 계신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경고이다. 경고의 나팔을 부시는 것이고 성도들은 졸지 말고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오심을 준비하라. 기도의 발동을 걸어라, 마음이 둔하여지는 마지막 시대에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부처럼 귀찮게 매달려야 한다고 하신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 여러분이 그런 기도의 발동이 켜지기를 바란다. 더 넘치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게 하실 것이다. 청년들은 기도하여 적금을 많이 해야 한다. 기도의 적금이다.


*빌립보서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계18:4
거기서 나오라

마태5:13~16
거기서 비추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살아서 삶의 현장에서 지구촌, 글로벌, 세계 어디에 가든 집회에서 사랑의 교인들이 있다. 호주 미국, 사랑의 교회 출신들이 많다. 지금도 하나님은 낙심치 않게 하신다. 기도의 사전에는 포기가 없다. 마침내 복을 주심을 믿는다. 평생 사명이 되길 기도한다. 생명과 능력을 주시길 소망한다.
 
♣요약
기도를 시작하면 믿음으로 계속해서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주심을 믿어야 한다. 기도의 발동이 켜져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이기는 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이기지 못하니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며, 내 기도 사전에는 포기란 없음을 결단해야 한다.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낙망치 말고 기도하도록 권하기 위함이다. 흔히 우리들은 기도 응답이 없으면 낙심하여 기도를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응답이 쉬 나타나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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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10월 16일)
제목: “킹덤)KIMNGDOM)생일”

말씀: (마태복음 14:6-12)
기도: 문정미 집사님(목양7팀 여자대교구장)
말씀읽기: 문준수(고등1,2부), 정한빈(다니엘 중등부)
찬양인도: 노희재(반주 장혜리 성도)

설교자: 김대순 부목사님(Sa1Ga 제자훈련아카데미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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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4:6-1),
6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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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생일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10월 생일을 맞이하신 분을 축하한다. 어제 기도하는데 3자라는 숫자가 자주 보였다. 혹시 설교 듣는 분들 가운데 3자가 들어있는 분 중에 적어도 세 분 정도 계실 것이다. . 태국에서 저희 가정을 오픈해서 교회를 시작할 때, 불교가정 여인이 치즈 케이크를 받으면서 생일 축하를 해주었더니 자기가 이렇게 생일을 받아본 적이 처음이라고 감동했다. 생일을 맞이하면 다 좋다. 저도 생일을 맞아서 카드를 받았다. 딸은 성령의 질서에 의해서 글을 잘 써서 보냈고 아들은 성령의 창조력이 뛰어나서 자세히 읽어 보아야 한다. 아빠에 대해서 생일을 축하해 주는 것만도 감사하다. 생일을 맞으면 어떤 생일 축하를 받고 싶은가? 오늘 본문의 생일은 킹덤 생일이다. 킹덤에 걸 맞는 제자의 삶을 말씀한다.
 
 
특별히 목양으로 모였는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성경을 볼 때 여러 방법으로 볼 수 있다. 어떤 목사님은 한 구절만으로 설교하시기도 하고 어떤 목사님은 필요한 부분으로 다 모아서 설교하시며, 어떤 목사님은 한 스토리로 이야기하시기도 한다. 오늘 성경은 14장 전체와 13장과 연결해서 말씀을 나누겠다.
 
13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내용이다. -(Kingdom of God).
그 다음 스토리로 연결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마태라는 사람을 통하여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이 스토리를 이 가운데 좀 아귀가 안 맞는다. 퍼즐이 안 맞다. 왜 넣어놓았을까? 14장에 하나님께서 천국 킹덤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어떤 것을 보이기 위해서 헤롯왕이랑 비교하시기 위해서 넣어 둔 것이다. 그래서 13장부터 14장, 15장에 스무드하게 지나간다. 성경에 보면 생일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온다. 천국이 어떤 것인가? birthing(출산), 장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생일에 대한 이야기는 3번 나온다. 구약에 창세기 40장 보면 바로의 생일에 대해서 나온다. 또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장과 마가복음 6장에 동일한 내용인데 헤롯에 대한 생일이 나온다. 주로 왕이 자기 생일을 위해서 잔치하는 그 내용으로 드러난다.
 
헬라어로 생일은 제네시아(Genesia)로 genesis가 같은 부류의 단어이다. 제네시스 차도 그 단어가 같다. 창세기가 영어로 제네시스이다. 처음 시작, 그 단어는 앞으로 차도 제네시드를 많이 타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 이 복된 것을 세상처럼 헤롯처럼 생일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킹덤에 걸 맞는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본문에 보면, 헤롯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영적으로 천국 제자로서 생일을 맞이할 때의 내용이 여기 있다. 여러분은 가장 기억나는 생일이 있는가? 생일의 비본질적인 질문은 내가 무슨 선물을 받았는가? 누가 나의 관심을 주었는가? 누가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는가에 중점을 둔다.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생일의 본질적인 질문은 누가 나를 창조하였는가? 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왜 이 땅에 소명과 사명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이것이 생일을 맞이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다.
 
▷생일에는 세 가지 방향들이 있다.
1). 수직 방향이다. - 생일은 하나님께 회복을 위해서 돌아가는 날이다.

2). 수내방향- 자신을 돌아보는 날이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위해서 그래서 토비새는 매주일 마다 툰업하는 시간이다(Turn up).
새로운 것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나가는 시간이다.

3). 수평방향- 생일은 주위의 영혼들을 돌보는 것이다.
-내가 중심이 아니다.
 
 
오늘 본문 14장에 1-12절 말씀을 보면 전체 내용에는 군림하는 세상의 왕,
 
I. 군림하는 세상의 왕.(A Ruling King of Earth(14L1-12)-헤롯
 
-권력들을 사용해서 나의 존재를 과시하는, 특별히 생일이라는 것을 맞이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복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삶, 감소하게 사는 삶, 그런 삶이 오늘 본문 헤롯왕의 이야기이다. 분 봉왕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지역을 지배한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대왕이 나온다. 그 헤롯대왕의 그의 아들이 오늘 본문에 14장에 나오는 분봉왕 헤롯이다. 이 헤롯 대왕은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다. 그중에 사마리아 여인인 마타스라는 여자와 관계해서 태어난 아들들이 두 명이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오늘 본문의 헤롯 안티파스가 그 아들이었다. 아버지 헤롯대왕이 죽고 난 후에 4명의 아들들이 그 왕국을 나누어서 가졌다. 그래서 아들인 분봉 왕 헤롯은 안티파스이다. 그는 갈릴리 지역을 분배받아서 거기서 결혼하고 지배를 했다. 헤롯 안티파스의 배다른 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 동생 헤롯 필립이다. 그는 로마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한 번은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 헤롯 필립의 그 로마를 방문했을 때 헤롯 안티파스가 그 배다른 동생 필립의 아내와 바람이 났다. 그래서 두 사람이 결혼했다. 역사를 잘 모를지 모르지만 드라마 같은 이야기이다. 사마리아 피를 받아서 항상 자격지심으로 열등의식에 빠졌던 이 헤롯왕이 스펙도 좋지 않고 교만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간다. 이 헤롯이 생일을 맞이한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13장에 예수님께서 천국 비유를 하시면서 천국은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그 사이에 이 이야기를 넣어놓았다.
▷생일을 맞이한 헤롯이 한 일이 3가지가 있다. 세상에서 하는 생일의 특징이 있다.
 
1. 자신의 배만 채운다.
- 자기 생일에 파티를 연다. 배터지게 먹는다. 소반이라는 단어이다. 거기에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놓는다. 처음부터 우리는 참 큐티를 한다. 처음처럼, 참이슬, 다 소주이야기디다. 이름을 잘 지은 것 같다. 자기 생일을 어김없이 찾아먹는 이기주의, 그리고 국민의 세금으로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헤롯 왕, 인정받고 싶어 한다. 자기 명예를 보호받고 싶어 한다. 참여한 자들에게 과시하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이 갈릴리 지역의 정치가, 왕으로 살고 있다. 또 딸에게 과시 하고 싶었다. 생일 날 우리 배를 채우는 세상적인 문화이다.
 
※저에게 아들, 딸이 있다. 미남 미녀이다. 믿어주세요. 미국에서 태어나서 미국 남자, 미국 여자이다. 큰아들은 첫 장손이라서 돌때 아버님이 큰 잔치를 해주었다. 그래서 중국 식당에서 100명이상 모였다. 그런데 두 번째 딸은 집에서 초라하게 했다. 그것을 사진으로 본 딸이 앨범에서 보고 돌잔치를 오빠는 화려하게 해주었냐고 했다. 딸에게 미안해서 한국의 돌은 아이들을 핑계로 해서 배부르게 먹는 날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생일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자기 배만 채웠다.
 
2. 자신의 권력을 휘둘러 죄 없는 영혼을 위협했다.
-생일날은 즐겁고 행복하고 사람들에게 베푸는 날인데, 세례 요한은 죄 없는 사람이었다. 권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해서 세례요한의 목숨을 빼앗아 간다. 자기에게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안 든 사람은 무조건 감옥에 다 넣었다. 자유를 박탈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방해되는 사람은 다 제거해 버린다. 권력을 영혼을 위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남용한다. 그래서 사랑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지도자의 복을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다. 왕으로서 받은 그 파워를 섬기는 도구가 아니라, 남을 위협하고 죽게 만드는 마태가 왜 그렇게 이야기를 거기에 넣어놓았는가?
 
3. 자신의 위치의 권력으로 약한 영혼에게 상처를 주었다.
아픈 곳을 더 아프게 한다. 더 힘들게 한다. 상처가 더 깊어지게 한다. 감옥에 넣은 것도 부족해서 세례 요한의 목숨을 빼앗는다. 생일날이면 베풀고 정의로 오히려 세례요한을 풀어주어야 하는데, 장례식을 일어난다. 성경에 읽어보면, 생일이랑 장례식이 일어나난 것이 14이다. 세례요한은 장례식이었지만 진짜 주님 앞에서 생일날이었다. 주님만나는 날이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터칭이 필요하다. 만져주고 안아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터칭과 부모의 터칭, 신부의 터칭, 영적 지도자의 터칭, 영혼을 살리고 새롭게 하는 그런 따뜻하고 포근한 그런 터칭이 필요한데, 헤롯의 터칭은, 정책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영혼을 죽인다. 세상의 왕, 헤롯은 군림하는 왕으로 왔는데,
 
오늘 본문은 14장에서 이유로 세 가지 스토리로 나온다.
 
1. 예수의 생일은 영혼들의 배고픔을 채우기 휘함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오병이어 기적 스토리가 나오고, 오늘 본문의 내용과 다 연결되어 있다.
2. 예수님께서 물위로 가셔서 베드로를 건지기 위함이다.
3.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터칭을 해서 치료하기 위함이다..
 
세상의 왕은 군림하지만, 예수님은 섬기는 왕으로 오셨다. 그래서
 
*마가복음 10:45,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생일을 맞이하신 이유는 예수님은 섬기러 오신 것이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오셨다. 헤롯왕, 세상왕은 세상 적으로 살았고 이렇게 살았고 세상 정치가들은 이렇게 살았는데, 그럼 왕 중의 왕,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1).예수님의 생일은 영혼들의 배고픔을 위함이다.
-헤롯은 자기 생일날 자기 배를 채웠지만 예수님은 영혼들의 배고픔을 위해서 오셨다. 그것이 바로 오병이어 스토리이다. 빵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는 샌드위치 밖에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그 작은 빵 다섯, 물고기로 오천 명이상 채워주신다.
 
*마태복음 2:6,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 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미 예수님은 목자로 목양으로 오셨다. 오늘 목양으로 모이는데, 목양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배고픈 영혼들에게 가득하게 만족하도록 채워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아셨다. 예수님은 공급자이시고 목자이시다. 예수님은 남들로부터 생일을 축하를 받는 것보다 예수님이 그 생일날 축복이 되셔서 온 세상이 이 땅에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다. 오천 명 이상 모인 오병이어 사건 가운데 그날 생일 맞은 영혼은 그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하고 살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왕으로 오셨지만, 섬기는 자로 오셨다.
 
※제가 태국에 있을 때 독신이신 남아프리카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계셨다. 한 70세 정도 되셨다. 현지 제자들이 케이크를 준비해서 축가를 불러주었고 볼품없는 케이크인데 그 케이크에 적혀 있는 내용이 감동적이다. 잊어버릴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생일 축하합니다.’ -
At Jesus subtrack I.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세례요한의 명언이 있다. ‘예수님은 흥행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
Jesus must increase and I must decrease.이것이 킹덤을 맞이하는 제자의 생일이다.
 
2). 예수님의 생일은 영혼을 위해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함이다.
마태복음 14:22-33절에 나온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마태복음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신다고 이미 말씀하셨다. 그 내용을 마태복음 14장에 헤롯왕의 사건을 비교하면서 마태가 기록한다. 예수님, 정말 물에 빠져서 헤매고 어려워하는 영혼들을 구원하러 오신다. 헤롯은 죄 없는 사람을 거짓으로 뒤집어 씌어서 감옥에 넣지만, 예수님은 물에 빠진 영혼들을 위해서 그 영혼들을 구하러 오신 것이다. 목양이 다른 것이 아니다. 배고픈 영혼들에게 예수님의 양식으로 넉넉하게 채워주고 지금도 위험에 물속에 빠진 영혼들을 위해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생일의 목적이다.
 
*마태복음 14:30,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외치는 소리이다. 간절함이다. 헤롯은 사람들에게 위협해서 무섭게 떨게 만들지만, 예수님은 위험에 떠다니는 자들을 구해주러 오셨다. 코로나 가운데 예수님 모습대로 살아가려 하는데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이런 상황이라면 오늘 예수님께서 위를 동일하게 빠져있는 우리를 위해 손을 내시면서 구원해 주실 줄 믿는다. 캄캄하고 감옥 같은 가운데서도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헤매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
 
3). 예수님의 생일은 영혼들을 상처에서 치유하기 위함이다.
 
*마태복음 14:34-36,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님께서 만져주신다. 헤롯은 만지면 사람이 아프고 힘들다. 죽는다. 상처, 아픔, 병, 불완전, 이런 것들이 있는 영혼들에게 주님께서 오셔서 만져주신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아픔을 더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아픔을 치유하신다. 이것 때문에 이 땅에 예수님은 오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영적으로 아픈 사람, 경제적으로 아픈 사람, 인간관계로 아픈 사람, 정서적으로 아픈 사람, 아픈 모든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님께서 초대하신다. 생일에 초대하신다. 데리고 와서 사람들이 다 데리고 온다. 이번 특새에도 데리고 오셔야 한다. 왜 예수님께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만져주시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으로 배가 고프고, 갈증도 나고, 어려운 가운데 빠지기도 하고, 또 외롭기도 하고, 예수님의 터칭이 필요한데, 오늘 마태라는 제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두 왕을 비교해서 하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킹덤 생일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내용이다. 우리도 생일이 올 때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진장한 생일 제자도이다. 코로나 때문에 어려운 이들이 많다. 상처받은 받은 분들이 많다.
 
※미국에 있는 워싱턴 대학의 어떤 렌디 스파크라는 교수님이 몇 년 전에 책을 썼다. ‘더 롸이즈 어브 크리스챤’-초대 기독교가 어떻게 컸는가? 주로 역사가들이 많이 기록을 한다. 이 분은 사회자인데, 그 당시의 사회 상황에 대해서 쓰면서 왜 기독교가 많이 성정을 했는가에 대해서 책을 썼다. 사회학자로서 왜 기독교가 그 당시 그렇게 컸는가이다. 그 내용을 읽다가 몇 가지 팬데믹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생일을 전도를 해야 하는가? 이것을 나누길 원한다.
 
주후 165년에 큰 팬데믹이 왔다.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가 있었는데 병이 퍼져서 15년간 로마왕국의 3분이 1일이 다 죽었다. 그리고 그 황제도 그 병 때문에 죽었다. 그리고 주후 251년에 다시 팬데믹이 다시 왔다. 홍역병 같은데 로마 왕국에 하루에 오천 명씩 죽었다고 한다. 그 당시 아프리카 카르타고 하는 튀니지 아프리카 북쪽에 있는 해변 지중해에 사역하고 있었던 사이프리라는 주교가 있었는데 그분이 이렇게 적었다. 형제자매 가운데 많이 죽어간다고 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북쪽, 지중해 가까운 도시에 있는 디오니시오스라른 주교가 말한다. ‘푸른 하늘에 벼락치듯 이 질병은 그동안 어떤 재해보다도 더 무섭다.’라고 한다. 이런 상황이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상황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다. 상처받고 예수님의 터칭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사이프로란 주교가 편지를 다시 썼는데 이렇게 적고 있다.
“비 기독교 인들은 이 역병을 모두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기쁨으로 순교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라는 주교는 교회 성도들에게 초대교회 펜데믹 상황을 이렇게 설교한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펜데믹 상황이 축제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의 시간이다.”라고 설교했다.
 
여러분,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이 예수님의 탄생, 기독교를 믿어왔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어떤 어려움 팬데믹 가운데서도,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만져 주시고, 채워주시고, 위험에서 구원해 주신다는 그 복음을 믿었다. 그래서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 당시 초대교회는 전도가 없었지만 서양도 전도하는 것이 없었다. 현지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킹덤에 맞는 생일에 사는 사람처럼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오히려 팬데믹이 교회 부흥의 기회가 되는 것임을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비교한 표를 보라. 군림하는 세상의 왕은 자신의 배만 채웠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일은 배고픈 사람의 영혼들을 구했다. 위험에서 구원하시고 상처를 만지시고 치료하신다. 예수님처럼 생일을 맞이해야 한다. 성령에 맞는 생일을 맞이해서 킹덤 주인을 모셔야 한다. 예수님은 섬기는 왕이셨다. 헤롯은 죄 없는 영혼을 위협하고 죽였지만 예수님의 생일은 영혼들을 상처를 치유하시고 위협에서 건지셨다.
 
예수님은 천국 킹덤의 왕이시며 최고의 왕으로 오셨다. 예수님처럼 걸 맞는 생일을 맞이하라. 세상적인 문화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맞는 생일을 맞이해서 킹덤 주님을 꿈꾸어야 한다. 헤롯은 섬뜩한 왕이었지만 예수님은 사랑으로 섬기는 왕이셨다. 헤롯은 영혼들을 위협해지만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로하셨다.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배고픔에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고통이 있고, 따뜻한 터칭이 필요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오셔서 여러분을 치유해 주시길 원한다. 우리 주위의 배고픈 자들을 살피고 상처로 인하여 터칭이 필요하신 분들에게 예수님처럼 천국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를 통해 이러한 역사가 이루어지길 소원하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인도하신다. 목양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예수님이 채워주시는 만족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코로나와 그 외로 인해 어려움에 빠진 분들이 계실 것이다. 제대로 살아보려고 해도 관계도 꼬일 수 있다. 상처투성이인 우리이다. 나에게 주시는 귀한 음성, 세상의 왕은 자기 배, 권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하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만이 아니다. 매일 오신다. 간절히 기도하자. 모든 기도제목을 내려놓고 우리를 만져주시길 기도합시다.

 


♣요약
말씀을 통해 황의 생일과 예수님의 생일을 깨달아서 어려움에 상처 있는 영 가족들을 위해 위로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회복되길 기도하고, 목자의 심정으로 영혼들을 섬기며 향기 있는 삶을 살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의 나라 킹덤이 임하게 되심을 정말 감사하며 이렇게 마음껏 주의 제자로 나아야 한다. 세상의 왕, 헤롯이 아닌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본받아서 천국제자로서 킹덤 생일을 맞이하여서 본질적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세례 요한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헤롯 안디바가 자신의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사건을 세례 요한이 강력히 비판했기 때문이다. 정의와 진리를 외치던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한 여인의 춤 값에 죽어야 했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왜곡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죽음은 그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자라는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헤롯은 자기 생일에 춤을 춘 소녀로 말미암아 만족을 얻었다. 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궁전에서 연회가 꼭 열렸다. 그리고 그 연회를 빛내기 위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녀는 왕비의 딸이었기 때문에 보통 때보다 더 친절한 것처럼 가장한 것이다. 이 어린 소녀의 춤은 헤롯을 기쁘게 했다. 헤롯은 이 방자한 소녀에게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는 경솔하고 어리석은 약속을 했다. 헤롯은 이 약속을 굳게 지키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헤롯이 여기서 맹세까지 한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 그 어린 소녀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잔인한 요구를 했다. 그녀는 이미 그 어미 헤로디아로부터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악한 행동을 하라고 시키는 부모를 둔 자녀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매우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헤로디아가 악한 일을 하도록 지시한 상태에서 헤롯이 그녀에게 무엇이든 청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그녀는 소반에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담아 달라고 요청했다. 요한은 그때 참수되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죽음이었다. 그러나 참수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 일은 사람의 비위에 잘 맞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지닌 원한과 죄에 대한 공상이 만족되어야 한다. 곧 요한의 머리는 피를 흘리면서 소반에 담겨져 그녀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요한의 머리가 그녀에게 주어져야 그녀는 그 요한의 머리를 춤을 춘 대가로 생각할 것이며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소녀의 이런 요구에 대해 헤롯이 허락하였다.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많은 사람이 후회하면서 죄를 짓지만 그 후회가 자기의 죄에 대한 참된 후회는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은 마지못해 죄를 지으면서도 그 죄를 계속 짓고 마는 것이다. 헤롯은 여기서 허울 좋은 명예와 정직을 보이며 자기가 맹세한 것을 양심적으로 지키려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는 자기가 반드시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조치를 취해야 되는 것처럼 가장했던 것이다. 악한 맹세가 악한 행동을 정당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1) 그 여아는 자기의 사악함과 원한으로 얻은 요한의 머리를 승리의 우승컵처럼 그 어미에게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갖다 주었다.
2) 제자들은 요한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주 예수께 그 소식을 전했다.
①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뿐 아니라 그들이 죽을 때에도 그들의 몸과 유물에 대한 존경을 받는다.
②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예수께 고했다. 그들이 가서 예수께 고한 것은 예수님이 안전하게 자리를 옮길 수 있도록 하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그들 자신이 예수님에게 위로를 받고 그의 제자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생각에서였다. 언제든지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이 있을 때 그리스도에게 그것을 알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친구에게 우리 자신에 대해 털어놓는 것은 우리의 부담스런 마음을 덜어줄 것이다. 목자들이 죽어도 양들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동일한 큰 목자가 있는 한 흩어지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큰 위로들을 받아도 종종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그 위로들이 우리와 그리스도의 사이를 이간시키며 또 그리스도만이 얻을 수 있는 사랑과 존경을 빼앗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전혀 찾아 가지 않는 것보다는 부족한 것과 잃어버린 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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