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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10월 30일)
제목: ''불확실성 속에서 헌신하기''
말씀: (히브리서 11:8~12, 17~19)
기도: 길헌창 안수집사님(새가족등록부총무)
찬양인도: 김지윤 성도
말씀읽기: 오수빈 어린이(소년부), 최지온 어린이(초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고성삼 부목사님(글로벌선교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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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8~12, 17~19)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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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주 전에 어느 미국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불확실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다섯 가지의 말씀을 하셨다.

첫 번째는 팬데믹이다. 코로나 팬데믹이다. 벌써 2년째 계속되는 그러한 상황 속, 위드 코로나라고 하지만 언제 이것이 끝마칠지 확실치 않은 그러한 상황에 살고 있고, 팬데믹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이러한 전염병은 이러한 한 지역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온 세계에 걸치는 그러한 불확실한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가 너무나도 불안하다. 미국 같은 경우는 예를 이렇게 들었다. 흑백간의 인종, 문제뿐만이 아니고 그것이 더 나아가서 요즘은 여러분과 저와 같은 아시안 인들도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서 있기가 참 힘들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너무나도 불안하다.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전하다. 2021년 초에 여러분 뉴스 들어보아서 알겠지만 미국에 의사당이 침범을 당하지 않았는가? 정치적, 한국 이야기만이 아닌 것 같다. 또 경제적인 불균형도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 빈부간의 차이, 일론머스크 같은 세계 최대의 부자는 올해 들어와서만 천억 달러 이상의 재산이 불었다고 한다. 한국 돈으로 무려 120조억원의 수입이 있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한 끼의 식량이 없어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 확실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확실한 것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뭐 미국 이야기만이 아닌 것 같다. 주중에도 주일에도 많은 성도님들이 나와서 피켓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맞느냐? 같은 성이 결혼하는 것이 맞느냐?’ 이제 잘못하다가는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를 들이게 되었다. 이것을 이 땅에서 합법화 하려고 하는 이러한 진리의 불확실한 상황에 처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가장 불확실한 그러한 상황 같이 생각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상황이 생소한 상황이 아니다. 예전에도 이 땅에 발을 두고 있는 우리는 이와 같은 불확실한 그러한 면이 많이 있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믿음의 이 아버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불확실한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헌신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상황에 아브라함이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는 믿음을 지켰고 헌신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네 가지로 아브라함의 그 헌신의 모습을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살펴보길 원한다. 아브라함의 생을 우리가 보면 최소한 4가지의 그러한 불확실한 그러한 상황, 4개의 질문이 항상 아브라함을 따라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했던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항상 ‘어디에,’ 라는 질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 ‘어디에’와 연관된 그런 질문이다.
 
*히브리서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그의 고향 땅을 떠나는데, 떠날 때에도 두 가지 최소한의 어려움이 있었다. 1) 나이가 너무나도 많았다. 새로운 땅에 이주해 가기는 너무 많았다. 일흔 다섯 살이었으니까,,, 2) 그리고 그가 가진 것이 너무도 많았다. 홀몸이면 그가 떠나기가 수월했을 터인데 가진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떠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이 두 가지 어려운 점도 굉장히 힘든 점이었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떠나긴 떠나는데 어디로 가야될지 알지 못하고 떠나야 되는 상황이 더 어려웠다. 아마 아브라함이 떠나면서 이러한 질문을 했을지 모른다. 내가 떠나긴 떠나는데 ‘어디로 가야하는 것입니까?’ ‘또 만약에 내가 떠난다고 해도 내가 그 땅에 도달했는지, 하나님께서 명하는 그 땅에 도달했는지 안했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아마 그러한 질문이 수없이 아브라함이 마음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답을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았는지 여러분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중에 알려주겠다.’ 나중에 알게 돼, 그저 떠나라면 떠나~’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헌신을 할 수 있었는가?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헌신했을 때에 우리에게 분명한 것이 주어져서 헌신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분명한 GPS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정확히 보고 따라갈 수 있는 그 네비게이션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오늘 헌신하는 토비새로 우리가 모인다. 헌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헌신의 모습을 보면서 헌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헌신이라는 것은 ‘어디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헌신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디에’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헌신하며 따라갔다.
 
두 번째 질문은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어디에’라는 질문뿐만이 아니라 ‘언제’라는 질문과 연관된 그러한 질문이다.
 
*히브리서 11:9-10,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 부르심을 받는다. 부르심을 받자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다. 이 땅, 약속의 땅을 너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히브리서를 보니까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도 이 삼 대에 걸쳐서 주어지지 않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삼 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이 주어지지 아니하고 아직까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장막에 살고 있었다. 임시거처인 그 텐트에 살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불확실 치고는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그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상황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헌신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헌신했다는 정의를, 또한 다른 정의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헌신이라는 것은 ‘언제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헌신이다. 다시 헌신이라는 것 언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헌신이다. 아브라함은 삼 대에 넘게 하나님이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여러분,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가장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찾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시간이다. 성경을 보라. 가장 불확실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를 찾아온다. 또 이 교회 역사적으로 볼 때도 부흥 운동을 보면 여러 가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도 가장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잘 알려진 웨일즈 부흥운동, 1904년에 일어났다. 여러분, 웨일즈에서 그러한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가보시면 알겠지만, 그 어두운 탄광 속에서 전기도 아니고 등잔 하나로 다니면서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탄광 속에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한 순간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그곳에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 영향을 받아서 1907년 여러분께서 잘 알듯이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났다. 국가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일본이 모든 분야에서 이 대한민국에서 지배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그러한 가장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종종 언제라는 질문에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언제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할 것인가? 아니 회복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언제 이 땅의 한국 교회의 부흥을 가져다 줄 것인가? 불확실하다. 상황을 보면 여러 가지 상황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헌신이라는 것은 언제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에게 부흥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헌신이다. 내일 종교개혁주일이다.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504년이 되는 것이다. 그 주일이 바로 내일이다. 종교개혁도 보면 그 카톨릭교회의 그 부패로 인해서 재정이 파산 직전까지 간다. 그것을 메꾸기 위해서 우리는 알지 않는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데 그들은 면죄부를 팔았다. 얼마에 돈을 내면 죄를 사하여 주겠다고,,, 이러한 어두운 상황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헌신의 모습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어디에 라는 질문으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는 것이 헌신이고, 언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헌신이다. 자,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생을 보니까 헌신에는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세 번째 질문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어떻게’와 연관된 질문이다.
 
*히브리서 11:11,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아브라함도 사라도 그렇고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을 때는 열방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렇게 때문에 사라는 열방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이다. 미션임파서블이다.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헌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헌신의 다른 정의가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헌신이라는 것은 어떻게 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 헌신이다. 아이를 도저히 가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킬 것을 믿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 것이 오늘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헌신의 모습이다. 제가 이 성경을 통해서 가장 중요하는 말 중에 하나, 하나님을 표현할 때,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시다.’ 라는 가장 아름다운 말 중에 하나가 우리는 종종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미쁘신’ 이라는 표현이다. 미쁘신, ‘당신은 너무나도 미쁘신’을 사용해 보는가? 어떤 면에서는 예쁘다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미쁘시다가 더 좋은 말이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 faithful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이다. 조석 간에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칭 3일에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 삶 가운데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11전에 복음의 서진 사역을 우리 교회에서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그러한 이 약속이 있다. 비록 우리가 불가능하게 느껴지겠지만 유럽 땅에 천 개의 교회를 이루라는 약속을 우리들에게 주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어떤 면에서는 존 과장스런 표현이었지만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없었던 것보다도 더 불가능한 그러한 목표로 우리에게 그러한 약속을 주셨다. 저는 제가 종종 유럽에 가서 설교할 때마다, 우리 식구들에게 이러한 설교를 한다. 그들을 격려하면서 이러한 사역에 비전을 설명하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전하고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얼굴을 보세요. 제가 여러분의 말, 문화, 모습이 다름에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비전을 주셔서 이러한 일을 한다.’라고 말한다. 아무튼 자격이 없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저희가 헌신했는데 기적적으로 140개 교회를 개척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 코로나 펜데믹 때문에 2년 간 가서 사역을 하지 못했다. 한두 달 전에 처음으로 웨일즈 지역에 가서 사역을 했는데 가는 내내 하나님께서 거룩한 부담을 주신다. 벌써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한지가 10년이 넘었다.
 
물론 유럽 전역에 140개의 개척을 하는 이 축복을 주셨지만 우리의 사역을 시작한 곳이 웨일즈인데 저는 11년간 이런 기도를 했다. 특별히 웨일즈를 사용하여 주시고 웨일즈 지역에 탄광 지역으로 알려진 웰리라는 곳이 있다. 가면 골짜기라른 지역이다. 영국이지만 웨일즈의 언어를 사용한다. 아주 낙후된 곳이며 가장 낙후 중에 낙후된 곳이다. 교회도 거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출장 내내 기도했다. 이 땅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제가 주위에 있는 그곳에 목사님들을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저는 그러한 부탁을 했더니 한 두 명의 목사님만 나와서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분 웨일즈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사역하고 싶은 그 사역자들이 모임 장소에 나왔는데 20-30대 초반까지의 11명의 사역자가 그곳에 온 것이다. 이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그렇게 큰 넘버처럼 들리지 않지만 그곳에서 열 한 명은 정말로 우리 상황에서는 만 명 이상의 그런 숫자를 말한다. 너무나 힘든 상황이다. 가장 사역하기 힘든 곳에 열 한 명의 사역자는 엘리야 시대 때에 나머지 사람 7천명을 예비해 주셨듯이 그들을 모이게 하여 주셨다. 그러한 사역이 곧 그래서 시작된다. 웨일즈 지역을 그 위해서 함께 모이는 사역모임, 우리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이 있느냐고 하신다.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면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는다. 이것이 헌신이다. 세 가지의 질문을 지적해 보았다. 어디에, 언제, 어떻게,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 헌신이다. 또 한 가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왜와 연관된 질문이다.

 
네 번째 질문은 왜와 연관된 질문이다. Why,
 
*히브리서 11:17,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75세 때 약속을 받고 무려 한 25년 이상 기다려서 참 기적의 아이를 선물로 받았다. 이삭을 받았다. 말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루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아들을, 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설명 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은 왜 하나님께서 25년 전에는 약속하셨다가 25년 후에는 이 약속을 폐하시고 이 아들을 죽이라고 하는가? 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가? 왜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많다. 지난 2년간 이 팬데믹 때문에 직장을 잃은 사람도 주위에 많다. 소상인들도 많이 있다. 여러분이 잘못인가? 아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한 질문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 또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교회에 오랫동안 나와서 예배드리지 못한 초유의 상황이 지난 2년 동인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젊은이들 결혼식도 못하고, 저 같은 경우도 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캐나다의 요양원에 어머님이 계시는데 2년 간 102세이신 어머님을 못 뵈었다. 이해되는가? 그러니까 사회적로 신앙생활 가족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이해되지 못한 그러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뭐라고 말하는가?
 
*히브리서 11:19,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무슨 말인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헌신이라는 것은 왜에 대한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분명히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 헌신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다음 주부터 위드 코로나라는 참 반가운 소식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교회적으로 회복을 넘어서 부흥하게 해주시길 기도하고 있다. 신상의 거룩한 새판 짜기를 하여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다. 새판 짜기란 무엇인가? 우리가 오래전부터 이 기도를 하고 있지 않는가? 거룩한 새 판자기는 예전 것은 싹 걷어내게 하시고 성령의 불로 연단시켜서 새로운 지경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새판 짜기이다. 우리 이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질문이 우리에게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어디에, 언제,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켰고, 아브라함은 헌신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이 시간에 도전하는 그러한 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참 감사한 것이 특별새벽부흥회가 있다. 한 주간에 있다. 하나님이 시간이다. 원래는 2주 전에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2주 연장시켜서 11월 8일부터 시작된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새벽부흥기도회를 통해서 그 은혜가 무엇인지 정말로 가슴 떨리고 기대가 된다. 이 특새를 우리가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여 우리의 삶 속에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디에, 언제, 어떻게, 왜 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면서 나아가서 정말로 이번 특새에 빠지지 말고 다 모여서 기도해야 한다. 핑계 댈 것이 없다. 이번 기회에 거룩한 새판짜기가 되고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회복을 넘어서 부흥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고 시간시간 기대하여 모든 것을 가지고 헌신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는다. 우리 교회 가정 사회 온 세계에 하나님이 축복하시길 소원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다. 우리 상황 속에서
 
 
♣요약
아브라함도 질문이 많았듯이 우리도 어디에 대한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고, 언제하나님께서 찾아오실지 몰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신실하게 기다리고, 어떻게라는 질문에도 우리는 종종 좌절하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줄 행하심을 믿고, 왜에 대한 질문을 미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실 줄 믿어야 한다. 우리 가족이 헌신하고 이번 특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새 판짜기가 경험되어 주님께 헌신하는 특새가 되기를 결단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불확실 속에서 헌신하여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기를 소원하며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헌신하고 예배하면 우리가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거룩한 삶이 되어 회복을 넘어 부흥하는 교회와 가정에 영혼의 열매를 추수하는 가을 특새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불확실 속에서도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주님 앞에 때를 구하며 상황을 질문할 때, 하나님은 보여주시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신다. 우리는 말씀으로 찬양으로 헌신하며 주님을 동행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모든 사역 가운데 우리는 헌신해야 한다. 특별새벽예배를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철저히 무장되어 한 영혼을 위해 전심으로 함께 기도하여 모든 부서가 함께 선을 이루어야 한다. 담임 목사님을 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주일의 말씀 가운데 주님과 평생 함께하길 소원한다. 

-그는 하나님께 친구라 불리웠고 믿음의 조상이며 모든 히브리인이 자랑으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사도는 다른 어떤 조상들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한 업적을 상술하였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는 중에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이다.
첫째, 그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었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그는 자기 아비의 집의 우상 숭배로부터 거듭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극악한 죄인에게도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이전에 우리에게 오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로 죄 뿐만 아니라 악한 친구들로부터도 떠나도록 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하신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유업으로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후사로 부르신다. 비록 그들은 이 유업을 즉시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 약속은 확실하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곳으로 어디든지 이끄시기만을 바랐다. 순종케 하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따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자기의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자기를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저는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였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행위였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 또한 그는 자기와 같은 약속의 후사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 이 약속은 신자와 그의 자녀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모와 자녀들이 하늘의 유업의 상속인으로서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해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늘나라의 도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성을 바랬다. 그는 이곳을 기다렸고 또한 적당한 시기가 오면 그 곳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이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온갖 고초속에서도 그를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사라의 믿음이다.
그녀는 잠시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웃었던 불신의 마음이 있었다. 그녀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약속은 사실 매우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다. 그녀의 불신앙은 사죄와 용서를 받았다. 그녀의 믿음은 장성해졌고 성경에 기록되게 되었다. '그녀는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버린 태에 자식을 생산할 힘을 주시듯이, 죽어버린 영혼을 살려 열매 맺게 하실 수 있다. 사라는 약속의 아이를 얻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아이를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얻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재언급(17-19)
사도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서 그 누구에게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대의 시험과 이에 따르는 믿음의 행위의 본보기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이 시련은 그 어느 것보다 큰 것이었다. 그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사라에게서 난 네 외동 아들 이삭을 바쳐라 곧 네게 웃음을 주며 네 기쁨과 즐거움인 네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거기다 두고 올 뿐만 아니라 번제로 바쳐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이 시험이 대단히 큰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몇가지 사실이 덧붙여진다. 그 첫째는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후에 이 시험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그에게 있어서 자기 자손을 끊고 하나님의 약속을 취소한다는 선언으로 보였다. 이삭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난 외동아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유일한 자손이었다. 그는 이 아들에게 온갖 사랑을 쏟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다. 따라서 만일 그가 죽으면 자기도 죽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아들을 희생 제물로, 그것도 자기의 손으로 드려야 했다. 이 시험이야말로 아무리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시험이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이기 직전까지 나갔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저지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아들을 죽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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