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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10월 13일)
제목: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말씀: (로마서 1:16~17)
찬양인도: 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배성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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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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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신학대학원을 다니기 전에 직장을 6년 간 다니 적이 있다. 점심 때 볶음밥을 좋아해서 먹으러 간 적이 있다. 어느 날 밖에 나가보니까 새로운 볶음밥 집이 생겼다. 메뉴판을 펼쳐보는데 이상하게 볶음밥 메뉴가 없었다. 밥을 다 먹고 나와서 보니까 볶음밥집이 아니라 복음 밥집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복음으로 인도되었구나! 를 생각하게 되었다. 장차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인도하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는데 몇 년 뒤에 신학대학원에 가게 되었다. 또 그때 한 가지 느낀 것은 복음 밥집 주인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복음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쉬쉬하는데 이 분은 가게 이름을 복음밥집으로 정한 것이다. 복음을 정말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함을 느꼈고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대는 복음 전하기가 어렵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누군가를 교회 오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어느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교회 예배에 참여하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참 어렵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는 것은 코로나 펜데믹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불편한 마음과 편견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믿는 믿음에 대해서 세상이 흔쾌히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비웃기도 한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그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에 등장한 세속적인 세계관들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18,19세기는 모더니즘시대였다. 이 시대는 기독교가 반지성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대 사람들은 사람들의 이성이나 경험 과학적 증명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은 진리로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고대 어느 전설에 나옴직한 신화라고 칭하기도 하고 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 나옴직한 이야기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세상 사람들에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주장은 어쩌면 터무니없어 보일 것이다. 또 20-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배타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에 의문을 품으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 진리이며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복음의 주장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지금 세상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세속주의 세계와는 아주 강력하다. 얼마나 강력한지 옛날 이스라엘을 떨게 한 골리앗 장군처럼 느껴진다. 아무도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그 육중한 골리앗, 그 골리앗에 겁이 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에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년 다윗 외에는 골리앗을 향해 감히 칼을 들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듯이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이 골리앗 같은 세속주의에 겁을 내어서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불신자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복음을 전설이나 신화나 동화로 생각하며 그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혹시나 비웃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또 전도를 한다고 할 때,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그저 교회에 한 번 나오라는 말, 또 교회 나오면 복을 받는다는 등, 이런 애매한 말로 복음을 전하거나 전도를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도가 나온다.
 
바울 사도이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를 살펴보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할만한 시대에 사는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바울은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아주 단호하게 선언한다. 16절 상반기에 보면,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바울의 이 선언의 함축된 의미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복음이 당시 사람들에겐 부끄러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울에게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 두 이유는 우선 당시에 복음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었다. 당시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복음은 어쩌면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물론 우리 시대와는 다른 이유이다. 바울시대 복음을 터무니없게 여기는 두 무리가 있다. 첫째는 유대인이고 둘째는 헬라인이다. 복음에 대한 유대인과 헬라인의 관점에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고린도전서 1:22-23,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은 표적,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못된 상황에서 벗어나는 승리의 왕이다. 유대인은 메시아를 말할 때, 늘 모세를 떠올렸고 기적을 말할 때 모세의 기적을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장차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었듯이 새로운 메시아도 탁월한 기적을 통해서 자신들을 구원하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고, 다윗 왕국을 회복해줄 정치적 기적을 구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복음은 참 터무니없어 보인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긴 했으나 그 기적으로 백성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준 것도 많았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켜 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죽었다. 그냥 죽었는가?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는데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이며 그분을 믿을 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이 복음의 말은 유대인에게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저 십자가에서 죽은 거짓 메시아에 불과했다. 오히려 유대인의 신앙을 오염시키는 인물, 거리끼는 인물, 즉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이 복음의 말에 그들은 얼마나 비웃었을까?
헬라인에게도 복음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늘 철학적인 지혜를 찾는다. 이런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혀 지혜가 아니다. 십자가는 심각한 죄를 사형시키는 형벌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 악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십자가가 도덕적인 원리나 철학적인 원리를 제공해줄 수 있는가? 또 그런 악한 사람이 어떻게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 또 헬라인에게는 그리스로마신화가 있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신들은 영웅적이다. 그런 그들에게 신이 인간이 되어서 인간의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헬라인에게서는 그리스도인은 식인종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성찬식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헬라인들은 기독교를 조잡하고 교양 없는 종교라고 깔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이니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구원자이고 그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말에 그들은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복음을 비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복음을 비웃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헬라문화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바울은 다소라는 로마 식민지 제국에서 태어났다. 다소에서 태어난 이 바울은 헬라문화 중심에서 성장했다. 우리로 말하면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교포 2세 정도 될 것이다. 바울은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 식 정통 교육을 받게 되었다. 뉴욕의 교포 2세가 한국에 나와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양쪽 문화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구원이 있다는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어떻게 들릴 것이고 또 헬라인에게는 어떻게 들릴 것인지를 바울은 너무나 잘 알았다. 복음이 그들에게 조롱거리가 될 것이고 나아가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왜냐하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이해보다는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더 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더 큰 이유는 무엇일까?
 

I. 바울은 복음이 참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한다.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것이 바울은 복음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이 첫 번 째 이유이다.
오늘 말씀 16절에 보면,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 이 복음을 믿는 그 누구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곧 복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또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드리셨다가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그렇다. 지금 바울의 눈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헬라인들이 보이고 예전의 자신처럼 예수님을 잘못 오해한 유대인들이 보인다. 그들은 구원의 길에 서지 못해서 영원한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죽음을 향해 갔던 발걸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갈 수 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복음이 부끄럽니? 부끄럽지 않니? 의 말은 바울에게는 참 한가한 소리이고, 참 무책임한 소리였을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지금 내 앞에 물에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수영을 못해 물에서 허우적거린다. 지금 곧 구하지 않으면 익사할지도 모른다. 마침 내 앞에 밧줄이 있다. 그 밧줄을 던지면 그 사람은 살아날 수 있다. 문제는 그 밧줄이 더럽고 좀 까칠해 보인다. 문제는 새로 산 양복을 입고 있다. 밧줄을 잡아 던지면 좋겠지만 그러면 내 손이 더러워질 것 같기도 하고 자칫 새로 산 귀한 양복이 구겨지거나 잘못해서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손이 더러워지는 것이 문제이고, 양복이 상하는 것이 문제이겠는가? 무조건 밧줄을 던져야 하지 않는가?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바울도 그런 심정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과연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또 그들로 인해서 바울이 어떤 곤란한 일을 당할 것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그 영혼이 죽느냐 사느냐가 이 귀로에 서 있는데 이 시점에서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무조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들의 조롱, 그로 인해 내가 부끄러워지는 것, 그것들은 영혼을 살리는 것 앞에서는 바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복음이 그들의 영혼을 살려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이 어떻게 구원의 길이 되는가? 그것은 복음 아래 하나님이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게 대해 17절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이 문장은 다소 난해하다. 이 하나님이 의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님의 두 문구를 이해하는 대에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살펴보자. 성경에서 하나님이 의는 두 가지로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는 하나님의 신적 성품을 가리킨다. 정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한다.
둘째는 하나님의 신적 사유를 가르친다. 죄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적사역을 의미한다. 믿는 사람에게 의로운 지위를 주시는 구원사역이다. 17절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었지만 의미의 무게 중심은 신적사역을 가리키는 것에 있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를 의롭게 하시는 신적 사역이다.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은 그 복음을 통해 사람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복음을 듣는 사람을 어떤 과정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인가?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이다. 17절을 다시 보면,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는 말이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통해서 철저히 믿음을 통해서 라고 이해한다. 그러기에 이 17절의 의미는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이 죄를 의롭게 하시는데, 그것은 철저히 믿음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듣는 사람의 심령을 깨뜨려서 믿음을 갖게 한다. 그 믿음을 근거로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을 우리 신학적으로 ‘이신칭의’ 라고 말하는데,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 가운데 하나이고 또 종교개혁의 뇌가 되는 신학이기도 하다. 요약하면 사람은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데, 하나님은 복음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을 복음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길임을 알았다. 그런데 수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이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간다. 그러니 바울을 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복음에 대한 바울의 심정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손에는 영혼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비한 묘약, 복음이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죽어가는 영혼들이 있다. 더욱이 주님은 우리에게 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무엇을 부끄러워하는가? 우리가 무엇을 주저하는가? 영혼을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복음을 불신자들에게 전할 때, 그들이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육신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해도 그들의 영혼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혼은 어떻게 해야 심판을 피하고 구원 받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에 냉담한 그들의 육신을 보며 실망할 것이 아니라 그 육신 안에서 복음을 들으려고 아우성치는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육신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의 관계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심정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II.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다.
 
로마서 1:16,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바울은 복음이 전파될 때 단순히 말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이다. 이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에서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뒤나미스’이다. 훗날 다이나마이트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다이나마이트를 지을 때 노벨이 그 이름을 지을 때 능력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인 뒤나미스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뒤나미스라는 단어를 쓸 때, 다이나마이트를 염두해 둔 것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뒤니미스란 단어는 우리에게 굉장히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복음은 영적인 다이나마이트이다. 복음은 영적인 다이나마이트이다. 복음은 복음에 반대하고 복음에 저항하는 이 시대의 세력을 폭파시킬 힘이 있다.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이 복음이 가진 폭발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마음이 깨져버린다. 그리하여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사도행전은 그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오순절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다. 그때 베드로가 다른 무엇인가를 한 적이 없이 특별한 기적을 행한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한 것뿐이다. 그 때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결신한 사람들이 몇 명인가? 삼천 명이다. 그전만 해도 겨우 120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날 그리스도인이 3120명이 되었다. 26배가 되었다. 그중에 일부가 로마로 돌아가서 로마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복음의 메시지가 그들의 귀로 듣는 동안에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의 심령의 깊은 곳에 들어가서 다이나마이트처럼 폭발시켜 버렸고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할 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에베소나 고린도 외에는 대부분 짧게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헬라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을 때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심지어 오랜 세월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우상을 다 버리는 구원 받는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다. 바울은 그러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부끄러움이 없이 복음을 전한 것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베드로와 바울은 사도들이기에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적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전도폭발 교사 임상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4박5일 동안 전도폭발 교사 임상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전도폭발은 40분 동안 복음전도 시나리오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지금은 20분으로 바뀌었다. 제가 처음에 40분짜리 그 복음전도 시나리오를 읽고 외울 때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그 복음전도 시나리오는 다소 고리타분하고 설득력이 약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런 복음 전도 시나리오를 듣고 사람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까? 굉장히 많은 의심이 들었다. 조금도 설득력 있는 논리, 또 우리 시대에 맞는 품위 있고 알맞은 예화를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 세미나 기간에 생각이 완전히 깨졌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런 것에 게의치 않으셨다. 임상 세미나 기간에 실습할 것이 40분짜리 복음전도 시나리오를 노방에서 아무나 붙잡고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녁에 세미나 장소에 와서 실습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그때 나이 많은 한 권사님의 구호를 들었을 때,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다른 교회 권사님이셨다. 그 권사님은 반포 쪽을 배정받았다. 그곳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40분짜리 복음 시나리오로 전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용기가 없다. 말도 제대로 못하시는 분이셨다. 돌아올 시간은 다가오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가면 그래도 권사 체면에 면목이 없을 것 같아서 이를 악물고 해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고속터미널이다 보니 마침 휴가 나온 젊은 군인이 있었다. 손주 뻘 되는 젊은 군인이 권사님의 레이더망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그 군인에게 부탁한다. 지금 세미나 때문에 실습을 해야 하는데 40분짜리 복음전도 시나리오를 제발 들어주기만 해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니까. 젊은 군인이 시간이 남았던지 아니면 자기 할머니가 생각나서인지는 모르지만 한 번 해보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 권사님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젊은 군인에게 40분 동안 전했다고 한다. 상상해보라 듣는 그 군인이 얼마나 따분했겠는가? 그 40분이 오기 전에 10분이 지나서 그 젊은 군인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신한 것이었다. 권사님은 너무 놀랐고 노방전도를 해본 적이 없었고 그저 실습만을 위해서 나온 자리인데도 그 젊은 군인이 뜻밖에 예수님을 믿겠다니 그 권사님은 당황한 것이다. 군인도 놀라고 권사님은 더 놀랐다. 그 권사님이 저녁에 세미나 장소에서 발표를 하는데 그 세미나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 감동받았다. 비록 복음이 그 어설픈 권사님의 입과 어설퍼 보이는 시나리오를 통해 나갔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 권사님의 복음 전함과 함께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그 청년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게 역사하신다.
 
바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말을 잘한 것 같지는 않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자신의 말에 부족함이 있다고 인정했다. 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바울의 외모도 볼품이 없었고 키가 작고 대머리였고, 눈썹은 일자였고, 두 다리는 안짱다리였다고 한다. 바울은 자신의 이런 모습으로 전하는 복음을 누가 받아들일까를 늘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자만 바울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이 하나님이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이런 바울의 심령을 가지면 좋겠다. 복음을 전할 때 내 연약함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심정이어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상대방이 받아줄까? 혹은 비웃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실상은 내가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그때 하나님은 능력을 사용하셔서 복음 듣는 이에게 마음을 열게 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내 모습, 내 언어가 어떠하든 아무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복음을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하나님이 아직 그 사람의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내가 복음을 잘 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시는 것이다. 그 결과에 우리가 연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바울은 복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또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런 확신이 있으니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바울이 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양심 있는 사람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매를 맞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또 목숨을 빼앗기기도 하고 결국은 순교를 당했다. 그ㅏ럼에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다. 물론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죽어가는 영혼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자신이 비록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 듣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죽어가는 이웃, 가족들을 위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이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면서도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양심을 잃은 사람이다. ‘구조 불이행 죄’라고 있다. 선한 사마리안 법이라고도 한다. 위험한 사람을 보고서도 도와주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는 법이다. 유럽 선진국에 제정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는 이 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았다. 헌법으로 도덕을 강제한다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구조불이행의죄의 책임을 분명히 물으실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이 강도 만난 사람, 그 사람을 돕지 않는 인물로 나온다. 그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사랑의 부수적인 조언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돌보지 않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죽어가는 이웃을 그대로만 보고만 있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불편해 하신다. 복음이 구원의 길임을 확신한다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은 세속 적을 무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육중한 골리앗 같을 것이다. 그 육중한 골리앗을 우리는 한 없이 작아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것이 두렵고 떨릴 수도 있지만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질 때, 골리앗이 맞았다. 그때 다윗은 소년에 불과했다. 전투복이 맞지 않았다. 반면 골리앗은 삼 미터나 되는 거인이었다. 그런데도 소년이 던진 돌에 맞아 쓰러져버렸다.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이스라엘 군인들은 부끄러웠을 것이다. 저 소년 아이가 어떻게 저 육중한 골리앗을 상대하겠는가?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골리앗을 맞이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소년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용사 다윗이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졌지만 하나님은 그 돌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히셨다. 돌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돌과 함께 날아간 하나님의 능력이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은 그저 어린 소년 다윗이 던진 돌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소년 다윗이 던진 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한 용사 다윗이 던진 돌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사실 복음만 전달된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복음을 전하기 참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연약한 마음으로 던진 이 돌이 세상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돌을 던질 수 없다. 우리가 던진 돌에 골리앗이 비웃기도 할 것이고 심지어 이스라엘조차도 비웃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은 골리앗을 비유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의 돌을 던질 때 확신해야 할 것은 복음의 돌은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날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골리앗 같은 저 세상과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돌을 던질 때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을 덧입히실 것이며 돌과 함께 그 능력을 함께 날려 보내실 것이다. 그렇게 날려 보내는 복음의 돌이 그들의 죄를 깨뜨리고 그들을 살려낸다는 것이다.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가던 그 사람들이 우리가 던진 복음의 돌에 맞아서 영원한 생명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 가정, 우리 이웃이나 믿지 않는 자녀들, 우리가 복음을 전해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니 교회가자!! 이런 말이 아닌 우리는 죄인이어서 영원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핵심을 직설적으로 전해야 한다.
 

요약
복음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하고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던 낙심치 말고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복음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린다는 것을 확신하듯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아서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아서 내 연약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애끓는 마음으로 가족, 자녀, 이웃을 불쌍히 여겨서 기도하고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행위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믿는 자의 구원이 그 목적임을 보여 준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복음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이 구원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능력이 없다면 복음은 죽은 글에 불과하다. 복음의 구원은 믿는 자들,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아무리 잘 조제된 약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복용되지 않는다면 환자를 낫게 하지도 못할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이 먼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게서 복음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 복음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였다. 이제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은 위치에 있으며 똑같이 구세주께 환영을 받는다. 오랫동안 기다려졌던 메시야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일 뿐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도 되신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구원의 도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칭의의 도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은 의로운 것을 나타낸다. '복음에는' 그와 같은 의가 '나타나' 있다. 복음의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의이다. 그 의는 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한 공로로부터 나오는 의에 대한 모든 주장들을 끊어버린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이다.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우리로 의롭다함을 얻게 해 주는 믿음에서 우리로 살게 해 주는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이게 하는 믿음에서 우리의 뿌리이신 그로부터 덕행을 끌어내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이 두 믿음이 다음의 말에 포함되어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란 말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란 말은 우리를 유지시켜 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 믿음은 증가하고 계속되며 인내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갑작스럽게 유명해진 새로운 교리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약에서 잘 알려진 성경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영광의 삶을 살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즉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약의 믿음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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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10월 10일)

제목: ''회색지대란 없다''
기도: 김은규 부목사님
말씀: 마태복음
13:47~52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ㅡㅡ

(마태복음
13:47~52)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ㅡㅡㅡㅡㅡㅡㅡ


 
▶샘물과 같은 보혈이 여러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령이 부어지길 소망한다. 저는 ‘회색지대는 없다.’ 새 판짜기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이 말씀 한 절 한 절이 성령님이 스승 되셔서 진리로 우리 가슴에 확인되고 나의 고백으로 나타나 그래서 이 말씀이 고귀함으로 우리의 살이 현장으로 확증되었으면 좋겠다.
 
마태복음 13장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씨 뿌리는 비유부터 시작해서 오늘 큰 그물의 비유로 일곱 가지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 속성,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그래서 모든 비유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천국은 마치 밭에 뿌린 씨앗과 같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와 누룩과 같다. 천국은 마치 진주와 같다. 와 같이. 오늘 마지막 마태복음 13장에서 마지막 이 비유가 뭐냐면 그물의 비유이다. 이 그물의 비유를 놓고 중요한 정리를 하겠다.
 
예수님은 너무 신묘막측 하시고 탁월하시다. 예수님은 본래 목수이셨다. 씨 뿌리는 비유도 하시고, 농부의 말씀도 하시고, 땅에서 바다에까지 전체를 커버하시면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며 너무 신비하니까 51절에 이렇게 표현하신다.
 
*마태복음 13:51,
이 모든 것을 깨달으니...
-이 모든 것을 깨닫는다고 하신다. 오늘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소망한다. 만세!!~~
이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주님은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율법으로, 어떤 교조적이고, 탁상공론으로, 책상물림으로, 아니면 이론적인 것으로 많이 가는 것이고 실제로는 내 삶의 피부에 와 닿고 내 삶으로 변화하는 새 판짜기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에서부터 바다까지 다 커버하시면서 우리의 실재의 삶의 와 닿게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이 말씀에 51절을 깨닫느냐 하시면서 52절에 이어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3:52,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와 닿는가? 정직하다. 탁 와 닿지 않는다. 예수님은 어떤 탁상공론이나 어떤 조문이나, 어떤 율령이나 그런 것이 아니고 실체가 있어야 한다고 하신다. 서기관을 이야기 할 때, 대체적으로 신약에 서기관을 이야기 할 때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다하고 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3장에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3:29,
29 화 있을진 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부정적으로 이야기 한다. 다면 강점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다. 잘 안다. 잘 아는 것, 머리로 아는 것,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삶에 체험으로 이 말씀을 깨달았냐고 하신다. 이 말씀을 통해 내 삶에 ‘새 판짜기가 일어났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천국에 제자 된 서기관이 되었다.’라고 한다. 그러면 이 천국에 제자 된 이 서기관은 옛것과 새것을 마음대로 필요한 대로 쓰는 집 주인과 같다. 일반적으로 옛것-구약의 말씀, 신약-새것, 신구약의 말씀을 앞뒤 전체를 서로 상호 소통하고 상호 통용하고 집주인이 물건들을 맘대로 쓰는 것처럼 신구약의 말씀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마음껏 활용해서 삶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라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바울 같은 사람이다. 아니 우리는 이 66권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내 것으로 확인만 되고 삶에서 깨닫고 삶의 현장에서 체화하는 그런 은혜가 있을 때는 21세기 판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되는 것이다. 원래는 서기관이 엉터리인데 서기관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영적으로 깨달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새 판짜기가 되어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이 되는 것’이다. ‘천국 제자 서기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이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모두가 다 21세기의 천국의 제자가 되길 소망한다. 두가지 적용을 하겠다. 오늘 이 그물의 비유를 우리 앞에 놓고 먼저 질문을 하겠다. 그 질문은 앞으로 향후 100년간 중요한 질문이다.
 

I. 향후 100년 동안 해야 하 가장 중요한 질문.
 
-가장 중요한 질문이 무엇인가? 이제는 인생을 백세 시대라고 이야기 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주고받아야 질문이 무엇인가? 4차 산업혁명이후에 미래가 어떻게 될까? 한국교회와 저 출산, 인간의 과학혁명,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런 것들로 나름 중요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앞으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 생애에서 중요한 질문은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이다. 그것은 타협할 수 없는 질문이다. 수많은 난재가 있고 많은 것들이 있지만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의 질문 앞에서는 나머지는 다 우수마발(牛溲馬勃)이고 기타 등등이다. 오늘 엄중한 질문 앞에 회색지대도 없고 타협도 없고 어떻게 보면 무시무시 하고 명징하고 분명한 것이다. 51절에 제자들처럼 천국의 서기관이 되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 실체가 와 닿으면 늘
나는 주님과 구원받은 사람인가?
주님과 인격적 교제가 있는가?
둘째로 나는 구원 받은 사람으로 주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
돌아본 탕자가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를 제대로 깨닫고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까? 그렇게 한 것처럼 향후 백 년간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구원 받느냐 못 받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인 걸로 확신한다. 이걸 위해서 본문을 더 깊이 들어가 보겠다.
 
*마태복음 13:47,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하나님의 나라 구원에 관한 것은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가지고 고기를 낚을 때 여기서 나오는 물고기를 모으는 모은다는 것은 적당히 그물을 내리는 이런 뜻이 아니고 배가 양쪽으로 쌍끌이를 하는 것이다. 그물을 밑에서부터 물고기를 모은다는 뜻이며 깡그리 잡는다는 뜻이다. 몽땅 싸그리 잡는 것이다. 저인망식으로 완전히 다 잡아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갈릴리 지역에 가면 그 당시 2천 년 전에 저인망식으로 물고기를 잡았던 배들이 지금도 있다. 그물로 유물 되어 있다. 고기가 잡히면 호숫가에서 그 그물을 끌어내 가지고 잡은 고기를 골라내는 것이다.
 
*마태복음 13:48,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갈릴리 바다에는 당시 성경학자들은 18~20가지 종류의 어종들이 살았다. 그런데 18~20가지 어종들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딱 잡았는데 하나는 좋은 것 또하나는 나쁜 것이다.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이 앞에 이 내용과 비슷한 같이 이해가 되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같다. 알곡과 기라지의 비유와 오늘 그물과의 차이는 좀 비슷하긴 한데 가라지의 비유는 악한자의 아들들 또 천국의 아들들 가리지의 비유와 그물의 차이는 가라지는 추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왜냐하면 좋은 곡식이 상하면 안 되니까 추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오늘 못된 고기와 좋은 고기의 차이는 이것은 즉결 심판이다. 기다리지 아니한다. 그래서 가라지와 못된 고기는 동일하다. 조금 더 설명을 할 때에,
 
*마태복음 13:41,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 넘어지게 하는 이것을 성경전체를 해석하면 좋은 물고기보다 못 된 물고기를 더 치우쳐 말하고 있다. 그러면 못된 물고기를 도덕적으로 열등하다. 덜 배웠다. 뭐 부족하다. 이런 뜻이 아니다. 이 못됐다는 악한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인가?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은 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사람이다. 여러분 대표적인 예로 십자가에 있는 강도를 생각해 보면 세상 적으로 엉터리였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으니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된 것이다. 믿으니까 좋은 고기가 된 것이다.
 
서기관은 옛것과 새것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들을 새롭게 재조명하여 전도와 교육에 집중시키셨다. 서기관은 원래 옛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은 옛것을 숙지한 후에 항상 새롭게 되기 위하여 새것을 준비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피 묻은 생명과 연결되지 않으면 다 못된 고기이다. 십자가와 연결되지 않으면 다 못된 고기이다. 하나님의 천국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을 멸시하는 자가 못된 고기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3:41,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대표적인 못된 고기가 가롯 유다였다. 가롯 유다의 변절은 초대교회의 아주 상처를 주었다. 41절의 말씀은 이 사람들은 천국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또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고 자기 나름대로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 오만한 인본주의자들, 대단할 지 모르지만 사실은 넘어지고 하는 자들이고 이 사람들이 나쁜 고기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그런 일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를 모두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구원하고 사람들을 키우고 교회가 전력투구 하는데 교회의 무슨 사소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비난하고 그것만 하면서 소위 아름다운 말로 교회를 핍박하고 파괴하는 사람들이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니까 어떤 일은 평가할 때 간단한 것이다. 그 일을 통하여 구원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그 일을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을 통하여 접붙임을 받는가? 아니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더 어려워지는가? 딱 대비가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좋은 물고기는 의인이고 못된 물고기는 악인을 상징하는데 성경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사람의 성품이나 도덕성이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이것이 좋은 사람에 대해서 좋은 사람은 천국을 사랑한 사람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눈을 뜨고 깨닫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교회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며 이것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냐면은
 
*마태복음 13:43,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좋은 물고기, 의인, 좋은 사람, 천국의 아들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다. 이와 같이 매주 이 번 주간 주님과 함께 동행 하고 살다가 다음 주일날 해와 같은 얼굴로 만나기를 바란다고 그러지 않던가? 이 자리가 천국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천국의 예고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게 천국의 예고편이다. 우리가 앞에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가지고 또 오늘 못된 고기와 좋은 고기의 비유를 가지고 종합적으로 말하면 좋은 씨, 좋은 물고기, 우리들, 천국의 아이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 다 한쪽이고, 가리지와 못된 물고기와, 악한자의 아들들과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복을 행하는 자들이 같은 편들이다.
 
우리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 아니라, 매주 천국의 아들들로 살다가 매주 천국의 예고편이 되기를 바라고 매주 이곳이 해와 같이 빛난 자들이 함께 모이는 안아주심의 본당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질문, 내가 좋은 물고기 의로운 물고기가 되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정말 겁나는 질문인가? 마지막 때에, 종국에 주님이 나를 부르실 때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가? 백년과 가장 중요한 질문과 연계해서 우리는 그 다음 질문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에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에, 내가 어떻게 주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내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님이 의로움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다. 내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가는 줄로 믿는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하여 본문을 더 살펴보자.
 
*마태복음 13:49,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천사들 역할이 나온다.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을 때에 그 영혼을 주님의 품으로 옮겨가는 줄로 믿는다. 그런데 이제 중요한 것은 악인들, 못된 고기들, 불법을 행한 자들, 모든 넘어지게 하는 자들, 가라지들, 그 가라지들은 천사들이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는 것이다. 타 종교에는 누가 지옥 간다고 했을 때 사탄 마귀가 지옥에 데리고 간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우리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데, 천사들이 의인은 하나님의 품으로, 악인은 지옥의 풀무 불에 던져 넣는 것이다. 다들 긴장이 되나요? 우리가 죽으면 천사들이 천국과 지옥으로 보낸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을 잘 가르치지 않는다. 악인들이 지옥 불에 던져지니까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천사들은 완전히 분리시킨다. 선과 악,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와 죄로 오염된 것을 구별한다.
 
마태는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를 구별하고, 악인과 의인을 분리시키고, 구원과 멸망을 분리시키고 ,천국과 지옥이 분리되고,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멸망과 영생과 영멸이 분리가 되는 것이다. 영생복락과 영원한 저주(咀呪)가 분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과 선행과 성품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의 달려있다는 것이다. 다 분리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두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천국과 예수님의 보혈이 나의 보혈로 소유하고 있는가?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정케 하오니 귀하고 고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임해가지고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과연 제대로 반응 하냐고 물었을 때, 답은 뭐냐면, 우리가 마음의 문설주에 예수님의 피를 발라 놓았느냐 안 놓았느냐이다.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백 년 동안 최고의 질문은 내가 구원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나머지는 다 그냥 가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라면 그 구원 받았냐? 안 받았냐?의 증거가 우리가 마음의 문설주에 어린 양의 보혈의 피를 발랐느냐? 안 발라 놓았느냐이다.
 
이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들이 구원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보라. 너희들은 홍해를 건넜다. 너희들은 열 재앙을 건넜다. 너희들은 홍해를 건넌 것이 바로 세례 받은 것이다. 죽음의 천사가 왔을 때 그 재앙을 피해가야 되는 것이다. 죽음의 천사가 어떻게 피해 가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설주 거기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놓았을 때, 죽음의 천사가 지나가는 것이다.
- Passover-유월(踰越)절이 되는 것이다. 이게 구약의 예표(typography)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 아버지, 우리 실력과 능력이 아닌 내가 좋은 고기, 좋은 씨, 천구의 아들들이 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어린 양의 보혈의 피를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도다.~~ 이것을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찬송하게 찬송하세 주님 나를 구하셨네!~~
성경은 딱 두 종류밖에 없다.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는 자와 악안 자로 되는 두 종류이다.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자, 두 종류이다.
 
*고후 10:18,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세상 적으로 도덕적으로 대단히 자 살아가지고 내가 대단하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주님이 칭찬하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우리를 잘하게 하신다. 십계명을 지키며 살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쩌다가 하얀 거짓말을 해도 가슴이 덜덜 떨린다. 보혈의 피로 구원 받은 사람들...우리는 오늘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내 삶의 문설주에 발라놓아야 한다. 이것이 귀하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로마서 5장1절에 설명하고 로마서 5장 9절에도 이렇게 말한다.
 
*로마서 5:9,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좀 추상적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마음이 문설주에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발랐기에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다.
 
20년 전, 수십 년 전의 제가 40대 초반이었다. 목회할 때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할 때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 올라가는데 갑자기 고등부 전도사님이 달려와서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한다. 무슨 일이냐고 하니까 고등부 ‘고3 학생인데 부모님이 갑자기 어렵게 되고 이혼하고 이렇게 되는 바람에 타격을 받아가지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어서 친구기 넘 불쌍해서 오늘 처음 우리 교회 고등부에 데려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시간에 갑자기 막 고함을 지르고 난리를 때리고 막 발악을 하여서 보니까 귀신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기도를 해주고 그래야 하지” 라고 했더니 ‘목사님 다 해주었습니다. 기도를 해주었는데도 목사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뭡니까? 하니 기도를 하는데 그 아이 얼굴을 보니 귀신이 들어서 너는 안 돼!~~. 하는 모습이었기에 힘들어서 목사님께 왔습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3부 예배 설교를 마치고 기도할게 했다. ’나도 안 되면 어찌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담임 목사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제가 설교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도를 나를 위해서 하고 있으라고 하면서 그때도 너는 안돼!! 하면 그때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보혈의 능력에 의존하면서 ’그래 나는 안 되지만 그래서 내가 예수님의 피가 필요하다 어쩔래?‘ 하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가 필요하다. 어쩔래?? 하라고 했더니 3부 예배 설교하는데 내 마음이 콩닥콩닥했다. 어떡하면 좋겠냐는 걱정을 했다. 마치고 내려오니 전도사님이 뛰어오면서 “목사님, 목사님! 했다 왜 하니까. 나갔어요!!!~ 나갔어요! 했다. 정말 기쁜 소식이다.
 
그 당시 주님께 감사드리고, 그 고등부가 50명 모이는 고등부였었는데, 1년 안에 200명이나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다. 그 능력은 피의 복음과 연계되는 것이다. 백 년 내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최고의 질문은 구원 받았느냐? 구원받지 않았느냐? 이다.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복음의 급진성에 관한 것이다.

 
II. 복음의 급진성.
 
-왜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고 지금도 선한 목자이시고, 지금도 상처입은 진주처럼 모든 것을 품으시고, 지금도 돌아온 탕자를 기다리시는 그 온유하신 주님이시고, 우리가 고난당하고 어려울 때 함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그 사랑의 주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단호하게 못된 고기와 좋은 고기를 딱 두 가지로 구별하시고 심판하실 수가 있는가?
 
▶왜 사랑의 예수님이 심판을 단호하게 말씀하셨는가?

-주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짓 진리가 아니라 참된 진리에 거하길 원하셔서이다. 의사가 암환자를 사랑한다면 아는 것을 치료해야 되는 것이다. 한 번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신약에서 심판과 진노와 불과 형벌에 대해서 누가 가장 말씀을 많이 했는가? 사랑하는 예수님이시다. 그 사랑과 목자의 심정을 가지신 주님께서 심판과 진노와 불과 형벌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셨다. 이것이 겸손이다. 지금도 모래 같은 우리를 품고 그 진주 같은 은혜로 만들어 주시는 그 긍휼하신 그 주님께서 지금도 양팔을 벌려서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시고 싶으신 그 주님께서 하나님을 거부한 악한 물고기에 대해서 이렇게 단호한 말씀을 하시고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지 않는 자들의 종말에 대해서 엄중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러시는가?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요한 사도는 사랑의 사도이다.

*요한복음 13:34,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런데 그 요한사도는 요한 일서에서도 말하고 있다.
 
*요한일서 4:17,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의 주님이 이 심판을 단호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하게 설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그 심판과 사랑은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말씀이다. 유명한 어거스틴은 말한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문을 여는 열쇠이다.-어거스틴-
-심판에 단호함에 대해서 엄중하고 타협이 없고 회색지대가 없는 이 분명한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마음의 문설주에 바르는 일이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천국 백성들의 서기관의 삶의 형태이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그렇게 강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윽박지르거나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우리가 죄의 종에서 벗어나도록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죽음 이후에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심판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앞에 있는 죄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할 것인가? 완전히 다르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없다는 사람과 죽음 이후에 단호한 심판이 있다는 사람들이 죄에 대한 반응들이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 동의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의 죄를 돌아볼 때, 우리는 너무 무능한 존재이고 우리는 작심 3일이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유지하지 않으면 조금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실감한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의탁한다. 그런데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다.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대로 사는 것이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그렇게 하는 것 아닌가? 여러분 사실 진짜 도적적일 필요가 뭐있는가? 온갖 자기키로 사는 사람이고 인본주의이고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억울한 사람은 어떻게 살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오만한 인본주의자들의 조롱과 멸시와 하나님의 교회를 함부로 하는 자로서 이것이 우리는 억울해서 어떻게 살겠는가?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사실은 두렵고 어렵지만 거룩한 두려움이요, 사랑의 두려움이요, 사랑의 심판이니,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리하자.
 
바울은 이것을 깨닫고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 지금 우리 주님은 다 멸망치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기다리시지만 못된 물고기와 좋은 물고기의 이 상황은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즉결 심판을 하신다. 그 천사가 와서 다 풀무 불지옥으로 데려가서 풀무 불에 던질 때는 그때는 아무리 애원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생애에서 예수 안 믿으면 끝이다. 지금 회색지대가 없다. 지금 이때가 아니면 끝이다. 마지막 그물을 통해 악인과 의인의 시간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과 부모님과 소중한 사람들과 피의 복음이 없으면 영원히 이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지옥은 너무나 외로운 곳이다. 혼자, 그러니까 부자가 지옥의 고통을 자기 혼자 느끼니까 자기 형제들은 그러면 안 된다고 나사로 시켜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한다. 대답은 Too rait!~~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는 이 지옥은 비유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은 지옥과 풀무불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걸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주고 이 ‘천국과 지옥’의 관한 것과 복음을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말을 못하지 말고 이것을 잘 가르쳐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천국이 있다고 믿고 심판대가 있다고 믿을 때, 자기 맘대로 살겠는가? 명확하게 아는 것을 자식에게 가르치면 우리 자녀들은 스스로 잘 알아서 할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후회를 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13:48-49,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우리가 물가로 끌어내어야 할 책임이 있다. 제자들이 같이, 천국의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끌어내야 한다. 같이 온전한 뜻인 텔레이오스와 같다. 우리는 지금 한국교회가 심각한 코로나 이후에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 기로에 서 있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피 묻은 복음의 눈이 열리면, 우리는 매주일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어느 지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는 주일만이 아니라 매주일이 다 가르쳐야 한다. 맞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것을 너무 가르치다가 대면예배 안 드려도 되고 현장예배 안 드려도 되고, 알아서 주님과 동행하면 된다는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지금 현장예배 6개월 나오지 않으면 평가가 안 나오면 거의 전도 대상자이다. 지금 구원 받고 지금 은혜 받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마음의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백성들로서 함께 모여 예배해야 한다. 지금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 40분이내의 거리에 태신 자가 천 만 명이나 있다. 이들에게 분명한 회색지대가 없는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할 때, “주님 내게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우리는 이 시간 세상의 서기관이 아니라 회심한 서기관 천국의 서기관, 새 판을 짠 서기관이 되어야 한다. 강력한 천국 복음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하며 은혜의 서초 상륙작전이 일어나서 천국 맥박 소리가 커져서 크고 놀라운 은혜가 넘쳐서 우리의 심령이 백년 후에도 회색지대가 없는 피의 복음이 분명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우리의 마음의 문설주에 발라서 우리 모두가 다 천국 제자 된 서기관이 되어야 한다.
 
-진주 장사는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자기의 소유를 다 팔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것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구원은 오직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값진 것이다. 그물 비유에서는 그물로 물고기를 가득 잡아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별한다. 이는 천국 잔치에는 모두가 초청받을 수 있으나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준비가 된 사람만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서기관은 옛것과 새것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말씀들을 새롭게 재조명하여 전도와 교육에 집중시키셨다. 서기관은 원래 옛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옛것을 숙지한 후에 항상 새롭게 되기 위하여 새것을 준비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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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10월 9일)
제목: ''애국가를 부르자''
말씀: 느헤미야1:1~11
기도: 백복수 장로님
말씀읽기: (박혜미자매-청년C국),(김지환 대학8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하
찬양인도: 찬양-윤종민. 피아노-박인혜 성도)

설교자: 류효균 목사님(순회군선교사,전해군군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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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1:1~11),

1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2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5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8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9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10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11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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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전하면서 나라사랑을 새롭게 다짐할 수 있는 귀한 시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전화가 왔었는데 ''목사님, 제가 사랑의교회 나가고 있어요.'' 그랬다. 제가 진해 해군교회 담임으로 있을 때에 열심히 다니셨던 안수 집사님 내외분이신데 또 경기대 교수이자 전 해랑 구조대에 대장이셨던 분이다. 또 제 앞에는 해사 교수님이셨던 조박사님도 앉아 계시고 제 동창도 나오고 있고, 등등등 오니까 참 아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존경하는 이곳 목사님은 제가 해군 중령 때 미국 출장가서 점심을 대접 받은 적이 있었다. 주연종 목사님은 우리 군목 후배로 훌륭한 분이셨다. 



여러분, 언제 애국가를 한 번 불러 보았는가? 제가 듣기로 8,18 때 마다 4절까지 애국가를 부른다고 들었다. 저는 지금도 운전을 하다가 태극기가 보이면 집이 양평인데 워커힐 쯤 오다보면 큰 태극기가 펄럭인다. 경례를 한다. 길을 가다가도 경례를 한다. 느헤미야, 나라 사랑했던 사람이다.


I. 나라 사랑을 위해 울 수 있어야 한다.

먼저 울수 있어야 한다. 어제 오다가 지하철에서 어떤 모녀가 저에게 전도를 한다. 마스크를 주면서 보니까 이단이 아니다. 눈물이 확 나왔다. 이런 분들이 계시구나! 제가 목사입니다! God bless you! 했다. 울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비시 458년 에스라가 이끈 제2차 바벨론 포로귀향 이후에 성벽을 재건했던 사람이다. 그가 어느 날 소식을 듣는다. 큰일났다. 성이 무너지고 성이 훼파되고 불타고 동족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울었다고 한다. 뜨거운 가슴이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를 영광스럽게 또한 감격스럽게 산에 올라 기도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다. 느헤미야가 동생 하나냐에게 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듣고이지, 가서 보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자리에 어떤 분들은 극히 소수의 분들은 일제나 6ㆍ25같은 엄청난 환난을 참여했던 분들이 계실 것이다. 대부분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럴지라도 이 나라 현실을 바라볼 때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외적으로 또 국내외적으로 외교적으로 대유행 병으로 얼마나 울 일이 많은가! 문제는 눈으로 보면서도 울지 않는다. 애국 부재시에 살고 있다. 울어야 한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우린 과거의 아픈 역사를 보고 들었고 지금도 울어야 할 나라의 문제를 안고 산다. 우리는 이렇게 I don't care~! 다 잘 되겠지 방관자인지 모른다. 도전한다. 우는가? 이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을 떠난지 이런저런 비정상적인 민족의 죄 때문에 우는가? 그리고 상대주의가  절대주의를 비웃는 인권이 성경보다 우위를 시대의 죄를 보고 우는가?


그리고 상대주의가 절대주의를 비웃는 시대의 죄, 인권이 성경과 하나님보다 우위를 전한 시대의 죄를 보고 우는가? 이단을 이용해서 건전한 기정교회를 흔드는 사단의 전술을 보면서 전율하지 않는가? 팬데믹으로 고통 하는 민초들을 위해서 우는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진단하고 마음으로 고통 해야 한다. 사랑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사랑은 관심이다. 사랑은 조바심이다. 사랑은 떨림이다. 사랑은 직관적인 느낌이다. 의식적인 통제와 탐색의 과정이 없이 바로 감각으로 더 필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움과 설레임이다.

 
느헤미야가 관심과 조바심과 떨림과 가슴 벅찬 그리움과 설렘으로 언제나 조국을 그리워했다. 언제나 조국을 그리워했다. 생각했다. 그리고 아픈 소식을 듣자 털석 주저앉고 운다. 눈물은 하나님 마음을 뜨겁게 해서 그 우는 자로 그 눈길을 향하게 하신다. 이런 시대에 민족을 위해 애통했던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보시고 하나님 중심이 뜨거워지셨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거라고 하신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때에 바로 울부짖어 여러분처럼 기도할 때에, 이렇게 담임 목사님과 여러 주의 종들과 장로님들과 성도들이 모여서 이 새벽을 깨울 때에, 우리 하나님 마음이 뜨거워지시고 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부터 많이 울었다. 바벨론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우시길 바란다. 비록 본국 태생이 아닌 포로지 2세였지만 그는 나라 생각에 울었다.

 
II. 조국 사랑은 기도로 승화된다.

-이제 주의 종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니, 라고 했다. 그리고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백성의 죄를 나의 죄인 것처럼 가슴 아파하고 기도하는 사람, 바로 크리스찬이다. 그의 기도를 보자. 죄의 연대성이다. 나는 사랑의 교회이다 의 명맥이다. 내가 교회이고 교회가 나이다. 내기 만족이고 민족이 나이고 내가 세계인 것이다. 여러분, 연대성이 무언가? 철옹성 여리고성을 쉽게 무너뜨렸다. 하나님 작전 명령을 따라서 그런데 그 작은 아이 성이 이기지 못했다. 바로 아간의 범죄를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로 본 것이다. 나와 내 아버지 집이 범죄 하여, 그래서 내 나라가 아프다는 것이다. 너와 너의 집이 아니라 나와 나의 집이 내 조상이 아니 내가 범죄 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나라의 아픔을 볼 때, 자신을 돌아보는가? 저는 영원한 해군인 것 같다. 그래서 해군에서 아픈 소식이 들리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 은혜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처음 군목이 되어서 지금까지도 전무후무한데 그 은혜를 입었는데, 내가 너무 못해서, 죄를 많이 져서 해군이 아픈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느헤미야가 조국의 아픈 소식을 듣고 슬퍼하고 금식하면서 이스라엘의 아픔이 내 죄인 양 회개했다.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며, 했다. 공동체의식이 소중하다. 나와 나라가 하나이고, 나와 교회가 하나이고, 나와 열방도 하나이다.
 
여러분 이 시대의 특징이 무엇인가? 개인주의이다. 자기 울타리에 갇혀서 타인과 주변을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애국 신자인가? 애국신자의 글을 만들어 보았다. 너의 죄, 이웃의 죄, 사회와 민족과 세상의 죄를 나에게로 좁혀오는 끌어당기는 연대성과 너와 이웃과 사회와 민족과 세계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는 긍휼, 그 가슴을 갖는 확장성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컴패션이다. 함께 고통 받는 것이다. 소위 축소와 확대에 신축적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내가 죄를 짓고, 전체의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여러분 나라 사랑하면, 여러분처럼 기도할 줄 믿는다. 그 크기만큼 기도하는 것이다. If you love a lot, you will pray a lot. - 반대로 많이 사랑하면 많이 기도할 것이다.
 
존 낙스는 이렇게 기도했다. 스코트랜드를 나에게 주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옵소서! 영국의 메리여왕은 스코트랜드의 모든 군사보다 잔낙스 한 사람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왜? 기도했으니까...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일, 아이젠하워 장군은 작전 개시 전에 연합군의 모든 참모들 앞에서 기도하고 연설한다. ‘우리는 오로지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 싸울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고결한 작전을 위해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당시 독일군 기상 장교의 눈을 혼미하게 만드셨다. ‘D-day 6일 날, 악천후가 계속될 것이다.’ 롬네는 휴가를 떠났다. 그러나 연합군의 제임스 스태그 대령은 기상 책임자였는데 그날만 날씨가 좋으니 액션을 취하라고 한다. 기도하니까, 눈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노르망디는 성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다. 기도하니까, 스태그 대령의 판단이 옳았고, 옳은 판단을 하게 했고 기도하니까 독일군 기상 장교의 눈을 멀게 했다. 기도하니까 아이젠하워가 결항한 것이고, 그래서 이긴 것이다. 기도하기 바란다.


 
III. 나라 사랑은 몸 던져 희생하자.

-영국의 한 대학교의 같은 학과에 이스라엘 학생과 아랍학생 둘이 유학을 하고 있었다. 문화 교수가 그들을 불렀다. ‘야, 큰일 났다. 너희 두 나라가 싸운단다.’ 1961년 6월 5일부터 10일까지 제3차 6일 전쟁이 일어났다. 너희들은 열심히 공부해라. 가지 말고, 다음 날 수업에 학생이 안 보였다. 교수님이 기숙사 사감을 찾아갔다. 혹시 학생들을 보았냐고 하자 어제 보니까 이스라엘 학생은 짐을 싸서 급하게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아랍학생은 도망가기 바쁘게 짐 싸고 다른 방 구한다고 갔다고 했다. 결과는 뻔하다. 6일 전쟁 승리는 300만 작은 군사가, 작은 나라가, 1억이 넘는 열세의 나라 아랍 군대를 싸워서 이겼다. 애국심이다. 희생이다. 모세의 다양장군이 말한다. 우리에게는 비장한 무기가 숨어있다. 서방 세계는 혹시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닌가? 염려했지만 그 숨겨진 무기는 애국심이었다. 라고 말한다. 여러분들의 숨겨진 무기가 애국심이기를 축복한다. 나라를 걱정하면서 오늘 담임 목사님께서 내년의 대선도 걱정하시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아파하는 여러분 때문에 나라가 살 줄 굳게 믿는다.
 
어느 날 느헤미야는 왕을 찾아간다. ‘절 보내 주세요.’ 그리고 성을 건축에 앞서서, 여러분, 왕 앞에서 수색을 띄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일이다. 죽음을 불사하고 왕을 찾아가서 본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요창 했을 때, 왕이 감동한다. 기도했으니까, 그리고 자원을 보내준 것을 전폭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52일 만에 성을 재건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왕의 마음도 움직이신다. 그리고 구속사의 한 페이지를 그는 장식한다. 구약과 신약을 잇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언약의 백성들, 장차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는 탄탄한 역할을 그 시대에 느헤미야가 기도함으로 희생을 감당한 것이다.
 
저희 해사에서 교훈이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 였다. 우리는 안일한 불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택한다. 로 그렇게 배웠다.


 
IV. 진정한 사랑은 복음 전도이다.
 
-사랑은 근심과 눈물과 고통을 동반한다.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동족을 위해서 내가 끊어질지라고 내 동족은 주님 앞에 안기라는 것이다. 고통한가? 그렇다면 전도하라. 지옥에 빠지는 민족의 가장 큰 애국은 전도이다.
 
영국의 존 스타트 목사님은 ‘전도하지 않는 죄’라는 책을 썼다. 우리의 유죄는 침묵이다. 그는 복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기쁜 소식이라면, 우리가 그 사실을 확신한다면 왜 복음을 담대히 전하지 않는가?
 
한인 청년 한 사람을 소개한다. 뉴욕 콜롬비아 대학에서 응용학 박사를 한 청년이다. 그 청년은 성령이 인도하면 늘 전도를 한다. 죄의 삯은 사람이라고 할까? 그토록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힘차게 전하는가? 조롱도 받으면서 위험도 있지만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신 하나님, 어메이징 브레싱에 감격해서 전도하는 것이다. 너무 감격해서 영혼을 사랑하니까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하길 바란다.
 
저의 사역을 잠시 보여주고자 한다. 저는 최초 군종감으로 군선교사로 한 곳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을 다니고 있는 군에 군 선교사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푸른 영혼이 보여서 간다. 영혼이 어떻게 보이냐고... 여러분 첼린지 한다. 영혼을 사랑하면 영혼이 보인다. 저는 이 비전을 바로 더 불루 비전(The blue vision)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혼을 사랑하면 영혼이 보인다. 아름답고 예쁘고 만나면 기쁘고 눈물이 난다. 푸르고 젊기 때문에 이 해군 형제를 보자. 신명준 형제, 대전에 산다고 한다. 이등병이었다. 지난주에 가보니 일병이 되었다. 대전 산다기에 교회 다니냐고 했더니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너무 마음이 아프고 불쌍해서 핫도그 박스를 쥐어주고 울면서 기도했다. 그리고 나중에 복학하게 되면 새로남교회에 나가라. 내 친구가 있는데 가라고 했다. 네, 했다. 전도했다. 저는 지역적으로 엮어준다. 그저께 갔더니 한 친구를 데려왔다. 성경을 주면서 성경을 읽으라고 했다.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고 만나면 눈물이 나온다. 푸른 영혼이 눈에 보이고 가슴이 벅찼던 첫 군목 지였던 해군신병소, 그 이야기를 드리고 마치겠다. 저는 해군 군목으로 첫 번째로 군목이었던 해군사령부 신병훈련소이다. 자전거에 빵을 싣고 커피를 타서 군종병과 함께 나누어주면서 때론 빵 살 돈이 없어서 마침 미군에 근무하는 한국계 미군장교의 집의 빵을 가져와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5주째는 꼭 교회 오라고 했다. 기독교, 천주고, 불교 중에 한 종교를 택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5주가 되었다 마음이 떨렸다. 저 막사에서 오는데 하나 둘 셋 하면서 온다. 전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저 멀리서 가장 긴 줄과 중간 줄과 더 짧은 줄이 있는데 이미 정해진 것, 하나님, 가장 긴 줄을 저한테 보내 주시옵소서.’ 기도했다. 깃발을 들고 온다. 저들이 타종교에서 더 좋은 것을 먹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정보가 빠르다. 그래서 이름 붙이기를 순례교도들이라고 했다. 하나님, 저쪽에서 많이 얻어먹었지만 결단은 우리 교회에서 하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심지어 하나님 저쪽에 두 군종 장교들 새벽에 일할 때, 주무시게 하시고 외출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주님 마음에 담겨있으니 그들을 위해 기도하오니 저들을 감동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여러분, 그때 배웠다. 전도는 떨리는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도는 두려움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50미터 10미터, 전원 멈춰!!!, 어는 줄이 멈추었을까? 저희 교회를 지나가면 법당과 연결되고 우회전 하게 되면 성당이 있다. 저희 교회에서 멈추어서 좌회전해야 교회에 온다. 짧은 6년을 근무하면서 한 번도 그 가장 긴줄이 교회를 지나친 적이 없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다. 제가 받을 박수는 아니다. 정말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담긴 첫 사역지이다. 처음 사역했던 그곳에서 늘 만났던 형제들, 바로 훈련소를 마치고 그렇게 주의 종이 되기를 원했던 제 모교의 해사 교회를 사역하게 되었다. 열심히 사역을 했다. 당시 40퍼센트가 안 되던 신자 율이 60퍼센트로 올라갔다. 얼마나 감사한지... 푸른 영혼들이 귀하다.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두려움이었다. 귀한 영혼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영혼 사랑이 되었다. 여러분, 영혼을 사랑하라. 그 영혼이 마귀에게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전도하기를 바란다. 지금도 저는 방방곡곡을 찾아가고 매주 마다 강원도 양양을 찾아간다. 그리고 항공대를 찾아가고 그리고 산꼭대기 해상 감시대를 찾아간다.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해병대 푸른 영혼이, 육군 푸른 영혼들이, 눈에 밟히고 제 심장을 뛰게 한다. 여러분 도전한다. 영혼이 보이는가? 안 보이면 기도하라. ’하나님, 영혼을 보게 하소서. 그리고 달려가게 하소서.‘ 이제 말씀을 짧게 맺는다.
 
2002년 6월 29일 제2 연평해전을 기억하는가? 윤영하 소령을 태운 6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2010년 3월 26일 북한 어뢰에 침몰한 북침된 천안 함, 백령도 해상을 기억하는가? 46명이 전사했다. 그 전사자 중 목사였던 고 김태석 원사의 딸 김해나 양이 해군 장교가 된다. 오늘 저는 그 빼지를 달고 왔다. 그리고 한 사람을 더 구조하기 위해서 심해에 들어갔다가 순직하신 한주호 준위가 있다. 어제 이 그림을 준비하면서 한참 울었다.
 
이곳 목사님께 새로 제작된 빼지를 드리고 싶다.
여러분,

얼마나 우는가?

얼마나 기도하는가?
얼마나 희생하는가?
얼마나 전도하는가?

이 4가지가 애국심의 기초이다. 가끔 애국가를 불러보세요.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애국자가 아닐지 모른다. 한 번 불러봅시다. 어느 색의 깃발을 들고 있는가? 어떤 깃발을 들고 있든 노건 소건 여기건 저기건,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볼테르는 말한다. ‘조국은 우리의 마음이 묶여 있는 곳이다.’ 라고 우리 마음이 꽁꽁 묶여있는 조국 대한민국, 껴안고 싶은 우리의 애인, 이 나라 위해서, 세계 선교를 위해서, 눈물과 기도와 희생과 복음 전도로 달려가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말이다. 우리가 느헤미야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로 역사의 한 모퉁이에 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소망을 주고 하나님이 택정한 귀한 백성을 찾는 전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그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대의 쓰임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 오늘부터 달려가길 바란다. 눈물로 기도로 희생으로 복음전도로 말이다. 우리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오늘 기도하는 우리가 진정한 애국 전사들이다.
 
♣요약
우리가 이 시대의 느헤미야가 되어 나라를 위해 울며 기도하고 희생하고 복음으로 승리하여 시대적 사명 자가 되어야 한다. 오늘부터 나라를 향한 마음을 집중하여 눈물과 기도와 희생과 복음전도로 진정한 애국 전사되어야 한다. 나라사랑의 실체를 경험하고 류효균 목사님의 아드님인 류찬양 군의 콜롬비아 대학의 광장에서 외치는 그 복음 전도의 사명을 우리도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우리 자녀들과 자손들이 본받고, 나라와 민족을 주님께 의뢰하고 느헤미야처럼 나라를 대표하는 모습을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울고, 기도하고, 희생하고, 복음 전도의 사명을 회복하길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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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10월6일)

제목: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드러나려면''
말씀: (고린도전서 4:14~21)
설교자: 강대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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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14~21)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할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를 구별하였고 또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여기 있었다. 하지만 그 실상을 바라보면 실제로 우월하다는 그 의식만 가지고 있었지 당을 지었고, 서로 나누면서 분쟁했다. 서로 헐뜯고 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그들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아비의 심정을 담아서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호소하고 있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읽기 전에 앞서서 그들에게 먼저 책망하고 또 왜 이렇게 교만하고 서로 분쟁하느냐고 계속 질책하였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좀 다르다. 앞서 질책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랑이 넘치는 그러한 마음을 담아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른 신앙의 본보기로 살아가야 된다. 그렇게 이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랑의 권면으로 그들을 안아주고 또 품어주겠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랬던 것은 고린도교회를 설립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사랑의 마음으로 믿음의 자녀나 내 자식처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으로 그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바울은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말씀으로 양욱하면서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길을 걸어가도록 간절히 원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혹시 곁길로 새나간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 자녀가 없다면 부모님께서 나를 어떻게 양육했는지 한 번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혹여 라도 좀 잘못된 길로 가거나 그것이 바르지 않다 라고 여겨지면 바로 부모님께서는 책망하거나 혹은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신다. 그 부모의 마음이 오늘 바울의 마음이었다. 때로는 혼내보기도 하고 때로는 당근을 주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나아의 놀라움을 맛볼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바울은 그의 자녀도 아니면서 이렇게 안타까운 심정, 아비의 심정을 담아서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서 말씀을 전했을까?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진정성 있는 그 목자의 심정, 그 한 영혼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심정이 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아주 간절한 심정으로 권면하고 있다. 이런 바울이 권면은 또 우리를 향한 권면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바라보자.
 
우리도 고린도교인들처럼 서로를 바라볼 때 구별하고 있지 않는가?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 우리가 판단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삶으로 우리를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말이 앞서는 그러한 인생이 되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믿음을 교제를 나누고 또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자기도취에 빠지기 쉽다. 그때 영적 교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4:20,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다. 바로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는 그날에 도래할 그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초림하시고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 성도들에게 구현되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여전히 성도님들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직접적 바로 개입 하셔서 펼쳐지는 그 나라,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곳에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완성될 그날을 고대하고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고 능력이라고 오늘 본문을 말씀한다.
 
여기에 말이라는 것은 로고스, 즉 말씀인 것이다. 말씀이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말씀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나라가 계시되어야 그 하나님 나라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즉 말씀은 우리에게 위대한 스승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21절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한다. 왜 그런가? 이 시대도 만찬가지이다. 여러분 이 시대에 말씀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가? 아니다. 말씀은 넘치지만 능력이 없는 것이 비극이다. 말씀은 너무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라는 것이다. 정말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 말씀이 우리 삶을 인도하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따르는 모범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머리로만 안다고 하여서 그것이 진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을 생활이다. 어떤 활동이 아니다. 신앙이 인격이 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라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런 모범적인 신앙인이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것이다. 지나간 시대를 바라보면 왜 교회가 정체 되었고, 또 선교가 밥보 상태가 되었겠는가? 그것은 바로 능력이 없고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럴듯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불신하고 또 복음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나타나야 할 것은 바로 능력인 것이다. 가시적으로 실체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 인격과 우리의 삶이 변해야 되고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드러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체험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에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I.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다 거져 받았다. 우리가 날 때부터 우리가 뭔가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지 않는가? 지금 내가 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도록 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가진 것을 가지고 남들에게 자랑을 한다. 나는 이런 은사를 주셨다.~~그것을 가졌다고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우월하게 생각하며 자가당착에 빠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셨다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왜? 우리에게 은혜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4:7,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 3가지이다. 이렇게 세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첫째는 누가 당신을 남과 구별하여 구별하였나?
둘째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셋째는 그 모든 것을 받았다면 왜 받지 아니 한 것을 자랑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적게 받았고, 어떤 사람은 누구는 너무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면 뭔가 내가 낫다고 우월의식을 갖게 된다. 이 우월의식이 무섭다. 왜? 남들과 비교하면서 남을 대적한다. 저런 사람은 만나서 안 된다. 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비교의식을 타파해야 한다. 하나님 주신 것에 그저 감사해야 함으로 겸손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난 그래도 넘 작게 받았고, 나는 흙 수저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저렇게 많이 줄까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 자기 주인에 대해서 말한 것은 저 주인은 ‘굳은자’이다. 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악한 인격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노동을 착취했다는 것이며 종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불노소득을 얻는 아주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 달란트도 한 달란트 비유도 어마어마한 것이다. 우리 주인은 마음이 그렇게 굳은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가운데 후히 주시길 원하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함으로 비교의식을 타파할 때 그때에 겸손해 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II. 위탁해야 한다.
 
-맡겨드려야 한다. 위탁한다. 라는 것은 위탁한다는 것은 좀 다르다. 위탁한다는 것은 맡길 수도 있고 나중에 때가 되면 다시 찾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위탁은 전적으로 다 맡기는 것이다. 나중에 찾을 수도 없다. 한 번 맡기면 그 다음에는 찾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위탁이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 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삶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위탁이 안 된다. 내 판단대로 나갈 때가 참 많다. 문제는 내 판단의 기준이 내 유익에 따라 바뀌어 진다. 언제는 이렇게 판단했다가 언제는 또 이렇게 판단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판단인 것이다. 그것은 바른 판단이 아니다.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판단할 것이 전혀 없고 그리스도의 판단에 맡겨드려야 한다.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심판하겠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부족하다. 우리의 생각은 온전치 못한다. 그렇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판단하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 될 수 있다. 판단하려면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겨드리자.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도록 맡겨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탁인 것이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는 맡겨드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가 우리들 가운데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 언제, 어떠한 것입니까? 라고 묻는 그때에 하나님은 그 카이로스의 때가 온다면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은 언제이냐? 우리의 한계를 인정할 때,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위탁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에 능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III. 충성해야 한다.
 
*고전 4:1-2,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하나님 나라의 계시를 비밀로 맡은 자들이 구할 것이 있다면 충성이다. 우리가 위이 받은 것이 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고자 맡겨주신 분명한 것이 있다. 그 맡겨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충성되이 섬겨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비교하고 있다. 나에게 이런 것이 있지, 나에게는 저런 것이 없어,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맡겨주신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여서 맡겨주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의 삶은 청지기적인 인생이 되어야 한다. 맡겨진 것에 대하여서 묵묵히 감당하는 삶, 주인의 의도를 잘 따라서 그 사명대로 걸어가는 인생길, 그것이 바로 청지기적인 삶이다. 주인은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가? 맡겨진 것을 잘 감당할 때, 적극적으로 그것을 감당함으로 살아갈 때, 그때 주인이 기뻐하신다. 우리가 정말 청지기라면 주인이 맡겨주신 것에 대하여서 그저 충성되이 섬기면 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각각 은혜를 맡은 청지기 같이 쓰임 받을 때, 그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장깔벵은 이렇게 청지기를 정의하고 있다.
‘건전하고 지혜로운 생각으로 양심의 순결성을 지켜 나가는 자다.’ 무슨 말인가? 세상의 여러 가지 압력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가운데 많은 압박이 있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우리에게 주신 양심의 그 순결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렇게 청지로서 하나님 앞에 소신 있게 나아가는 그러한 삶이 나타날 때,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중에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IV. 십자가를 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높은 자리를 예비한 자들, 영광의 면류관을 예비한 자들, 그런 자들에게 땅에서는 낮추어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왕 노릇하지 않는다. 오히려 낮아지고 섬기며 나아간다. 그 영광의 면류관을 쓰려면 십자가의 수고와 고난을 감내해야 한다. 그 피와 그 땀과 눈물 없이 그 영광과 기쁨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서 우리가 함께 받아야 할 것은 바로 고난이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죄송하지만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싶지 않지만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비참한 자리로 몰고 가실 때가 있다. 참 끔찍하고 난감하다. 믿음의 선진들은 어떠했는가? 그분들은 이 땅에서 영광 된 삶을 살지 않았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바라보면 대부분 순교했다. 순교하지 않는 요한도 심한 박해를 당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이 땅을 살아갈 때, 자신을 기꺼이 주님 앞에 희생할 그 때에 드러나게 된다. 우리의 전적인 희생, 그래서 우리가 높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서, 그의 이름을, 그의 뜻을 위하여서 헌신하고 희행하며 나아가야 한다. 이 중에 누가 고난을 바라고 그 고난 가운데 살기를 원하겠는가? 그리스도와 믿음의 선진들은 많은 고난도 당하고 또 수모(受侮)도 당하였지만 우리는 그저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축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나의 배부름과 안락을 위해서 마치 은혜를 모르는 자처럼 살 때도 많이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와 또 축복은 선조들이 우리를 위하여서 피 흘리고 땀 흘리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놀라운 은헤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양화진에 가보면, 우리 민족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외국 선교사님들, 그분들의 묘가 있다. 또한 그 가족들이 안장되어 있다. 당시 선교사님들은 정말 잘 알지도 못하는 변방이라는 코리아 한국에 가서 복음의 빛을 위해서 헌신했다. 자가 목숨까지 바친 것이다. 오죽하면 언더우드 기도문에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지 아는가? 기도 처음에 이렇게 나오고 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어둡습니다. 막막합니다. 한 걸음을 걸을 만한 빛도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조선의 마음도 보이지 않고 해야 할 일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부르셔서 이곳 가운데 왔는데 무얼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 선교사는 끝까지 순종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메마르고 가난한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기 위하여서 그저 순종했다. 그들이 사는 인생길에 고통이 고통인 줄도 모르고 그 삶이 저주로 온 줄도 모르고 그 삶이 그 인생길을 주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그 복음의 씨앗을 되살리고자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선교사님은 끝까지 주님께서 펼쳐주실 미래를 기대하고 소망한 것이다. 믿음의 보고들 드린 것이다. 그 분은 십자가의 길임을 당연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고 순종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병원도 없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계속적으로 심기 시작하였다. 여러분 그런 선교사님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찌 편하게 예배를 드리고 은혜 가운데 만족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우리도 세상에서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주변의 이웃이 있다면, 죽어가는 자가 우리 주변에 있다면 그들을 위하여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복음을 전하기가 힘들다 라고 많이들 이야기 한다. 하지만 분명히 나아갈 길이 있다. 미래의 보고서를 써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써 나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드러나기 위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드러나기 위하여서 우리가 기꺼이 헌신해야 되는 것이다.
 
‘사랑의 전도단’을 섬기면서 코로나 기간에 어떻게 전도해야 할지를 많이 고민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해왔던 사역지가 다 막혔습니다. 병원에, 부대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기에 들어가서 전도하려고 하면 자꾸 쫓아냅니다. 전도하려고 하는 그 모든 현장마다 우리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그렇게 부를 때 하나님께서 오히려 길을 열어 주셨다. 전도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셨다. 그 구령의 열정을 가지고 복음의 능력으로 복음의 씨앗을 지금도 계속적으로 심고 있는 것이다. 각각 자신의 처소에서 만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열매로 거두어 주셨다. 지금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이 부르심에 응답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믿고 따르며 미래의 보고서를 써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드러나려면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려면 우리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 실체가 나타나야 한다. 이 시대를 변혁하는 그 길은 말이 아니다. 언변이 아니다. 무엇인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위탁하고 맡겨드리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이 감당할 그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 길이 비록 천하고 낮은 길일지라도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다 들어주시는구나, 어디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우리가 가는 그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혼자 있을 그 때에도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있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담임 목사님께서 이 어둑한 시국 가운데 새로운 시대를 견인하는 그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시리즈를 계속하시고 계시지 않는가? 여러분 이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누리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겨자씨 같은 인생길에도 산을 옮길만한 그러한 믿음을 허락해 주신다. 그 능력이 우리들 가운데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얼마나 진흙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그 인생길을 바로 진주와 같은 인생길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날마다 믿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는 말로만 아멘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삶으로 실체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사는 인생, 정말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가셨는지 매순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말로만 고백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다. 모든 성도들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성령 충만한 인생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한다.
 
♣요약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친 백성 삼아주셔서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누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감에 감사하고 연약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를 해결해 주셨으니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늘 살아가며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수가 없듯이 우리 가운데 주님이 개입하셔서 내 뜻대로 살지 말고 교만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비록 힘든 길일지라도 전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통치권 앞에 위탁 드리며 주님을 인정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충성되게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서 우리의 삶에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서 어디서든 하나님 나라의 능력만을 드러나게 살아야한다.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내는 것이 아닌 말씀을 좇아 겸손하게 주님께 맡기고 충성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 드러나고 주님의 온전한 제자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충성스럽게 주어진 사명 잘 감당하고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며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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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10월 2일)
제목: “믿음의 증인으로”
말씀: 누가복음 24:26-49
기도:
말씀읽기:
찬양인도:
 
설교자: 박삼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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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26-49,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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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과 훈련으로 오신 토비새 온라인으로 현장으로 오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누가복음 24장을 함께 읽으니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사모하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은혜가 되길 소원한다.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다. 성경 말씀은 어느 부분이든지 다 중요하지만 오늘 읽은 이 24장 말씀이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점을 고려하고 묵상하면 좋겠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의 결론 부분이다. 결론이라는 1-23장까지 모든 말씀들을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24장이 없다면 앞에서 그 길게 말했던 것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좀 과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진솔하게 말하자면 24장의 말씀이 없으면 누가복음의 23장까지의 말씀이 속임이나 일종의 사기이고 범죄로 생각할 수 있다. 결론의 24장 말씀이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에 23장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로 끝나버렸다면 이 24장 부활이 없으셨다면 그 이전까지 예수님께서 하셨던 가르침이나 행적들은 사실 상 맞지 않고, 이해가 어렵고, 황당한 이야기들 밖에 안 될 것이다. 당장 누가복음 1장부터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누가복음 1:31절에 보면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너무도 잘 아는 익숙한 말씀이다.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에 대한 말씀인데 이 누가복음 24장 이 부활의 관한 말씀이 없다면 이 마리아에게 한 그 천사의 그 수태고지는 황당한 말씀일 뿐이고, 좀 웃기는 이야기 일 것이다. 그 중요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무죄함, 그렇게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 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도 그것도 근거가 없는 소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에 시작부분인 요단강에서 세례 사건을 잘 알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 울려 퍼진 음성이 무엇인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 이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말씀도 그저 흘러가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누가복음 24장 말씀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복음 1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이 세례 사건에서 울려 퍼진 이 하늘의 음성도 너무도 소중하고도 맞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정말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생명이 되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다. 24장이 없다면 그 이전 1-23장까지 모든 말씀,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의 가르침, 표적들, 사실상 별 의미도 없고 이해도 잘 안 되는 말씀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 새벽에 모니터와 이렇게 안아주심 본당에 앉아 있는 우리들도 많이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 점을 일찍이 사도바울은 잘 알고 깨달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고린도전서 15:17-,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였다면 무엇인가? 믿는 자가 가장 복되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고로 잘하는 것이 된다. 그것 말고는 없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 맞는 말씀이고 참으로 그 말씀을 가까이 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답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누가복음 본문의 말씀처럼 그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이 믿음을 심어 주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는 24장의 말씀은 1장에서 23장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고 또 24장 말씀에 도달한 시점에서 보자면 이전까지의 모든 말씀들이 다 맞고 진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24장에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24장의 누가복음의 결론의 말씀 때문에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귀신을 쫓아 낼 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예수님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귀신을 쫓아낸 것이 맞는 확증이 되는 것이다. 율법의 정결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하여진다고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신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의 가르침도 정말 맞고, 우리가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이 떡을 떼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떡을 떼시면서 ‘이 떡은 너를 위한 내 몸이라.’고 하셨다. 또 ‘이 잔을 나누면서 내 피와 새 언약이라고 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떡은 내 살이요, 이 포도주 잔은 내 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이 부활이 없다면 황당한 말씀이고 괴기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맞고 24장 말씀이 맞다면, 예수님의 이 만찬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을 설명하신 말씀이다.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사사건건 예수님과 대결하고 논쟁하고 갈등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잘못이고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결국에는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것이 아니라 잘못이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것을 그때는 몰랐고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예수님을 공격하고 대결하고 했던 그들이 옳은 것이 아니라 힘없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박해받고 죽으신 이 예수님, 이것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로 우리는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확신 가운데 거하면서 그렇게 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정 반대가 되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이 이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맞다고, 바울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은 참으로 맞으신 분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절대적인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마무리하는 누가복음 24장은 무엇보다도 제자들에게 이 믿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애쓰는 예수님의 기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본문이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인 율법이 아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다 믿는 줄로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믿음이 아니면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 일이 해결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믿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실제적으로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생활이다, 믿음생활이다. 라고 하지 않는가? 모든 예배나, 훈련이나, 양육이나, 봉사나, 섬김이나 어떤 것들이든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음 생활 한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얼마나 신앙적이고 중요하다. 이 믿음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인가를...
믿음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나면, 구원의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생활 전체에 대해서 대부분의 대해서 참 설명하기 어렵다. 참으로 황당할 것이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하다. 여기서 이 중요한 것 하나는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성경적인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대로만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적 믿음은 예를 들어서 이런 무엇이든지 개인적인 성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또 반복되는 주장이나 주입된 견해로 생기는 착각이나 쇠뇌된 확신, 그런 것도 이 성경에 대한 바른 믿음이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든가, 이해하기 불가능한 현상이나 눈에 엄청난 것, 현실에서 실제로 힘을 발휘하는 어떤 권력이라든지, 이런 것들과 관련된 것들도 아니다. 성경의 바른 믿음과 다르다.
 
아무리 오래된 전통을 당연한 것이라고 믿어도 어떤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초월적인 그런 현상이라 할지라도, 또 눈에 보이는 대단한 것이라도 그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의 혼동, 믿음의 착각, 더 나아가서 그런 믿음의 이런저런 유혹의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미리 잘 알고 있듯이 바른 믿음에서 사실상 성경은 반대적인 설명을 아주 좋아한다. 아시겠지만 어찌 보면 좀 어리석은 전략이기도 하다. 성경은 믿음을 꺼져가는 등불에 비유하기도 한다. 들릴락 말락 할까 하는 약하고 작은 소리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 다른 목사님의 주일 설교처럼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에 비유하기도 한다. 성경은 오히려 이 믿음을 고난 받는 것, 죽는 것, 굶주리는 것, 이름 없이 나그네 되는 삶, 이런 것들과 연결 지어서 설명을 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바울을 생각할 수 있고 순교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또 무엇보다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을 읽어보길 바란다.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믿음의 대한 이와 같은 성경의 설명들은 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리이고 미련해 보인듯하지만 그것은 참된 지혜요, 진리이다.
 
오늘 본문에 성경의 말씀에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에 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런 믿음, 영생을 얻게 하는 그런 믿음은자신의 성격이나 기질, 혹은 우리의 체험에서 출발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한 마디로 예수님에게서 출발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의 어떤 것에 대해서 출발하는 것이다. 예수님 어떤 분이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생케 하는 그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가는 결정적인 것이 이전에 모든 가르침과 예수님의 행적을 확증해 주는 바로 이 부활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잘 믿어지는가?
 
믿음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고 믿음은 본질적으로 쉽지 않다. 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이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믿음이 쉽지 않다. 요한복은 3장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령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믿음이다.
 
*고린도전서 12:3,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했다. 바른 믿음은 한두 번 대단한 체험이나 경험을 한다고 해서 그런 사건적인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시간들 두면서 함께 동행 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그런 과정적 믿음이다. 인격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고, 깊은 교제가 필요한 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성경의 관한 이 믿음이다.
 
*이사야 55:9,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차원보다 높은 분, 높아도 보통 높은 것이 아니라 대단하시고 유일하시고 진리이신 그 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에 관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을 위해서는 40년이라는 반복되는 광야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또 반복되는 광야의 시간이 필요했고 또 반복되는 타락과 회개와 구원을 경험했던 사사시대와 같은 그런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믿음이 설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그런 믿음이다. 이 믿음에는 어떤 사건적인, 명사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이 성경의 믿음에는 동사적인 요소가 있다. 그런 성경적 바른 믿음을 갖는 것이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공생애를 함께 보냈던 제자들을 반복적으로 만나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믿음을 갖도록 하시는 것을 보면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우리가 확인하게 된다. 감사하게도 오늘 본문은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 싶다.
 
I. 첫 번째로 이 예수님께서 바른 믿음을 제자들에게 하신 일.
 

*누가복음 24:36,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첫 번째로 이 예수님께서 바른 믿음을 제자들에게 하신 일은 체험하도록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제자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들은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하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이렇게 나타나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이미 여러 번 십자가에서도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도 이미 들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서 계신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바른 믿음, 예수님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4:38,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기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들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이것이 실제임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대화를 해주신다.
 
*마태복음 24:39,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리고 손과 발을 보이신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 그런 분위기이다.
 
*마태복음 24:41-43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 사건은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 우리의 믿음은 없는 것, 허황된 것을 우리끼리 만들어서 꾸며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종교적인 어떤 경향 때문에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꼭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일어난 일, 실제 하는 팩트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고,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눈에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거나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을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야말로 우리가 믿기 힘든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와 이 심판을 용서받게 하셨고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우리의 기대나 생각이나 논리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여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다행이도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을 잘 아시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체험 교육을 반복해 주신다.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과정을 이끌어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 가운데 나타나 주신다. 손과 발을 보여주신다. 또 그다음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꿈인가 생시인가 할 때 꼬집어보라고 말하듯이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다. 그러고도 안 되니까 먹을 것이 있는지 달라하셔서 직접 그들 앞에서 식사를 하신다. 이 36절에 보면 ‘이 말을 할 때’,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도 나누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았고 그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하고 경험했던 그 제자들이 바로 지금 그들의 체험을 나누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정도면 정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믿을 수 없지 않는가? 우리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 확답하기는 좀 조심스럽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특별히 의심이 많거나 특별히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 같으면 한 번 만이라고 보여주시면 완전히 믿겠다.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들과 달리 잘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의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본문의 제자들을 믿기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함부로 깔보기는 우리가 어려울 것 같다. 아니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다. 생각보다 우리가 믿는 것과 체험하는 것과의 관계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해도 믿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 속담이 있지 않는가?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도 안 믿는다.‘ 는 말이 있다. 메주는 콩으로 만들 듯이 콩으로 만들었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고 보는데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보여 주어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쉽게 연결은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체험이 중요하다. 매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체험으로 부활의 예수님을 완전히 믿는 것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에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사건은 너무 중요하다. 우리가 이 본문의 상황을 다시 체험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 직접 체험 했다면 사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진실의 문제, 팩트 체크는 끝난 것이다. 기록된 이 체험이 반복되어 질 수 있다거나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는다. 체험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본문에 기록된 체험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사실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직접 체험해본들 그 이상을 넘어설 수도 없다. 성경이 말하는 이 바른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II. 성경 말씀을 잘 설명해 주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이 놀라운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그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마태복음 24:44-47,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본문의 의미를 한 가지 생각해야 되는 좀 표현이 있는데, ‘이루어지리라’ 이 표현은 누가복음 2:49절에 처음 등장하고 누가복음 안에서, 복음서에서 이렇게 몇 번 반복이 되는데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9:22절이나, 17:25절, 9:37절 등에서 반복하여 사용되는 이 표현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런 뜻을 표현하는 표현 방법이다. 이 표현을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 구약의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사는 것이 맞고 그래서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부활하신 것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생애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적으로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는 표현이다. 이 때문에 44절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과 시편, 구약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고난 받고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다윗을 부르신 그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것이 맞다는 것을 예수님은 증명해주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애와 죽음, 부활을 설명하시면서 그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들을 제자들에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돕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서 제자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우리 생각,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공생애와 그의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세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이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놀라운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2년간이나 제자훈련, 사역훈련을 받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한 번만 이 믿음을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부분의 과정을 통해서 체험으로도 이 믿음을 채우시고 말씀으로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 예수님을 받아들이므로 그 이전까지 3장까지 하신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가르침이 진리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훈련생들도 제자훈련 1년, 사역훈련 1년, 2년간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은 45절에서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자신들의 생각과 거기에 반대되는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고 성경의 말씀이 이렇구나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 과정,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이후에 초대교회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여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막아도 막아지지 않는 그런 찬양이 있다. 누가복음은 1장, 2장, 초반부에서 비천한 자를 돌아보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데, 비천한 인생을 돌아봐 주시는 그 완성이 되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기쁨과 찬양으로 이 누가복음은 마무리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죽고 부활로 인해서 참 예수님을 만나고 받아들이고 믿을 수밖에 없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동의하게 되는 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증인들의 제자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 이런 믿음으로, 이런 믿음으로 이 믿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요약
우리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저주와 절망 가운데, 영원한 죽음과 심판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또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전부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놀라운 믿음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심에 감사영광 돌리며,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우리의 기대하는 것이 다르기에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방식이 있으심에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우리에게는 참된 소망이 믿는다. 우리 평생을 이런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가르침과 행적들을 정말 진리일 수밖에 없음을 확신하며 그 믿음의 증인으로 설 수 있어야 한다. 단번에 주신 우리 믿음,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또한 과정적 믿음, 계속해서 함께 달려가야 되는 인격적 믿음으로 원하시는 주님, 체험을 통해, 말씀의 성취를 통해, 우리를 담금질하시며 이끌어주신 주님을 찬야해야 한다. 우리 훈련생들은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세워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결국 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 마음이 감동되었고, 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영의 눈이 밝아졌다. 말씀과 나눔은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이다. 한편 예수님의 부활을 깨달은 제자들은 즉시 다른 제자들에게로 가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부활을 증거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짐으로 불안하고 괴로운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여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분명하게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게 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증거를 넘어선 인격적 증거로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그 손과 발의 상처를 직접 만져 봄으로써 예수님의 인격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심으로써 자신이 십자가 죽음 이전의 바로 그 예수님이심을 입증해 보이셨다. 성도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일의 증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살아야 한다. 즉 부활의 주님을 믿고, 예언의 성취이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예하며, 죄사함을 얻을 수 있도록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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