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11월 10일) 제목: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말씀: 요한복음 15:1-8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설교자: 문진호 부목사님 ------------------------------ *요한복음 15:1-8, 1 나는 참포도 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뽑아다가 가나안 땅에 옮겨 심은 포도나무였다. *시편 80:8, 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이 심겨졌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기에 얼마나 좋은 환경이었을 것을 말해주는 표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좋은 열매를 맺는 일에 실패하고 만다. *이사야 5:2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포도 맺기를 원하신다. 성도들이 좋은 열매 맺기를 하나님이 소망하신다. 성도들이 열매를 많이 맺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에게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포도나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을까? 먼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환경 때문도 아니고 포도나무 때문도 아니라고 말한다. 가지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래서 네 가지 종류의 가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 *첫 번째 종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이다. 2절을 보면,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첫 번째 가지는 열매를 못 맺는 가지이다. *두 번째 가지는 맺는 가지이다. *세 번째 가지는 열매를 더 맺게 하는 가지이다. *네 번째 가지는 열매를 더 많이 맺는 가지이다.
5절에 보면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인가? 그냥 열매를 맺는 수준인가? 아님 남들보다 조금 더 봉사를 잘하고 조금 더 성경 읽고 조금 더 기도하는 더 열매는 맺는 수준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 기대가 8절에 나와 있다. 함께 읽어보자.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 -열매를 많이 맺으면 우리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으로 영광 돌릴 수 있는가? 인간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웨스트 민스트 신앙 고백서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른 내용들은 잘 몰라도 많이 들어서 익숙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인간의 본부이라는 사실이다.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우리가 살면서 맺는 많은 열매들로 인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줄로 믿는다. 기도응답의 열매, 인격 변화의 열매, 자녀를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자녀들로 세우는 열매, 관계 안에서 화평과 화목함의 열매를 맺는 것들이다. 전도의 열매, 선교의 열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수많은 열매들을 맺을 때에 우리는 많은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의 전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 그것이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하나님이 소망하는 삶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문제를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가지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신다고 하는가?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심각한 문제이다. 주님께 붙어 있다가 제거를 당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심각성이 6절에 극에 달하여 표현되고 있다.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는 가지는 말라져 버리고 불에 던져버릴 뗄 감처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져 버린 것이다. 불에 던져 사른다는 것이면 불어 던져지는 지옥의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제거 당하여서 불에 던져지는가? 굉장히 심각한 질문인 것이다. 우리가 꼭 생각해 볼 질문이다. 삶의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다면 제거되어 불에 던져지는가?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잠시 후에 생각해 보자. 열매를 맺거나 더 맺는 수준이 아니라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 방법에 대해서 3가지를 7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룬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3가지는 첫째는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말씀이 풍성한 공동체이다. 주일예배를 비롯해서 강단을 통해서 선포되어지는 귀한 말씀의 공동체이다. 삶의 계절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맞춤형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예비하신 아름다운 보물 창고인 이번 가을 특새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배해 주신 말씀이 풍성한 은혜를 다 받아 담고도 그것을 누리고도 남을 만한 큰 말씀의 그릇에 담기를 소망한다. 둘째는 기도이다. 특별히 기도중에서도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는 기도이다. 마음의 소원이 있어도 처한 환경에 따라 매이고 제한되고 신앙생황의 경험을 따라 어떤 것을 구하여도 내가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하는 그런 응답되지 못했다고 하는 경험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오랜 시간 동안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경우들이 많다 정말 마음이 원하는 소원대로 구하는 기도를 드리기보다는 제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만을 붙들고 기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희 아이들이 마트나 문방구나 어릴 적에 가서 보면 사달라고 한다. 그때는 아빠의 지갑 사이즈를 알지 못했기에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구한다. 어느 순간 틴에이저가 되고 고교생이 되니까 뭘 달라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왜인 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빠의 지갑 수준을 아이들이 벌써 알아버린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없을까, 지금 타임에 이것을 구하는 것이 좋을까, 다음에 더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이 좋을까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이 때로는 우리가 기도할만하고 응답될만한 것만 구하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게 되는지... 주님을 이것을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처럼 기도하라는 것이다. 순순한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8,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아시는 줄 믿는다.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입술을 열어서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이미 아신다. 중요한 것은 또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감출 수 없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다. 기도는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의 용량을 테스트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둔 할 말을 주님 앞에 쏟아 놓는 것이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어 올려드리는 기도를 주님이 바라고 계신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큰 기도를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는 기도는 어린아이처럼 순전함으로 올려드리는 기도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그냥 기도가 아니라 순수한 기도이며 하나님의 응답의 크기를 제한하지 않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처럼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제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나의 생각의 잣대로 크기로 제단 하여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도의 제목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크신 만큼, 하나님이 제한 없으신 만큼 하나님의 크기만큼 마음껏 우리가 원하는 기도를 올려드리길 우리는 간절히 소원한다. 셋 째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러니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은 그냥 일반적인 표현이 아니다. 여기에는 엄청남 축복을 내포하고 있다. 그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다. 참 포도나무, 요즘 말로 찐이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가짜 즐거움, 가짜 만족, 가짜 미래, 가짜 약속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찐인줄 믿는다. 포도나무의 핵심은 포도주가 원료이다. 포도열매에서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부터 19장 십자가에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면서 공생애를 시작하고 마치시는 이 예수님의 사역 중심에는 포도나무 비유가 있는 것이다. 포도나무가 주는 진짜 기쁨, 진짜 즐거움, 진짜 만족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구원의 기쁨, 영생의 즐거움,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만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가짜 포도나무의 세상이 향락과 돈과 성공과 명예, 권력,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을 것처럼 헛된 약속과는 완전하게 다른 차원인 것이다. 찐 기쁨, 찐 즐거움, 찐 만족을 누리게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주님 안에 거할 때 가능한 줄로 믿는다. 나무를 보면 그 뿌리는 땅에 이어있고 그 나무 잎사귀와 위를 향해서 자라는 것은 공기와 태양이 주는 빛을 통해서 광합성과 여러 가지 삼투압 작용을 통해서 나무가 그 생명과 그 진액을 가지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나무에게서 떨어져 나간 가지는 그 공급이 끊어지기 때문에 말라지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 연결된다고 하는 것은 그 가지는 하늘과 땅에 연결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것은 천지를 얻는 일이다. ‘하늘과 땅에 권세를 네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라.’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는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그 권세를 나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 속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참된 만족, 참된 기쁨, 참된 평안, 참된 감격을 주 안에 거하므로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또 이런 의미가 있다. ‘네 아버지는 농부라’ 여러분,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가지는 누구를 얻게 되냐면 농부를 얻는 것이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우리 주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에덴동산의 그 때와는 달리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대와 설렘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인생, 농부의 성실함으로 돌보심을 받는 인생, 넘어져도, 쳐 박혀도 이름을 받고 들어 올림을 받아 열매 맺는 자리로 다시 설 수 있도록 세움 받는 인생, 하나님을 농부로 모신 인생이 받는 축복이다. 농부로 모신 인생, 딱 끝이다. 인생 끝이다. 여러분 어떤 부모님을 만나냐에 따라 인생 딱 끝이 있고, 그때부터 인생 고생길이 열리는 인생이 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가 되시면 우리를 실족 지 않게 하시고 졸지도 않으시고 우리의 출입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는 우리의 농부로 우리의 아버지로 삼게 되는 은혜가 있는 줄로 믿는다. 그렇다면 마지막 가지는 열매 맺지 못하는 그 가지의 운명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거 되어서 불에 던져지는가? 그것이 아니다. 제거되었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아이로라는 표현의 단어이다. 그 단어의 뜻은 들어 올려 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제거한다는 뜻과 들어 올려 진다는 뜻, 어떤 뜻이 더 적당한가? 포도나무는 가지이기에 농부는 무엇인가? 땅바닥에 처박힌 가지를 들어 올려 주시는 가지인 것이다. 여러분 우리 인생 가운데 좌절하고 낙망하고 상처받아 땅에 쳐 박힌 가지 같은 인생이라고 한다면 열매 맺지 못하던 그 인생을 주님이 열매 맺지 못하는 원인을 제거하시고 우리를 들어 올리셔서 열매 맺도록 은혜 베푸시는 줄 믿는다. 넘어지고 낙망하고 있는 그 가지를 농부이신 주님은 실족하지 않게 지키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열매 맺도록 하시는 좋은 성품을 가진 그 농부이심을 믿는다. 오늘 그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이재화 형제가 지은 찬송인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일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이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 자국 난 그 손길 눈물 닦아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겠다고 하는 그 주님이 사람의 메시지를 듣고 3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러나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 안에 거하기로 썼던 우리 귀한 형제의 그 고백은 우리의 찬양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의 감동을 주고 우리가 지키고 넘어지고 땅 바닥에 쳐 박힌 순간에도 농부 되신 그 아버지,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고 하는 그 은혜와 그 약속을 믿고 다시 시작하심을 얻게 될 줄로 믿는다. ♣요약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대를 따라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소망하며 말씀에 대한 순종과 순전한 기도를 드리며 성실하신 하나님을 농부로 모시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심을 믿고 진정한 회복, 많은 열매를 온전히 맺어가야 한다. -먼저 참포도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포도 나무이시다. 그분만이 죄가 없으시기에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이와 반대로 세상 모든 종교는 들 포도나무로서 들 포도나무에 연결된 가지는 실과를 맺을 수가 없다. 그리고 가지치기를 잘해야 한다. 세속적인 가지를 잘 전지(剪枝)할 때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절제된 생활로 영육간의 경건을 유지함으로 아버지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거름을 잘 받아야 한다. 가꾸지 않고 거름 주지 않은 과수는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 읽기와 기도 생활은 신령한 거름을 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가랴 10:1~6) 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2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4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 5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 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
▶''응답의 단비가 필요합니다''-담임 목사님 -1년 만에 주님 앞에 본당에서 함께 예배드림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오늘 본문 11절에 보면 너희가 고난의 시간이 지나갈 때라는 말씀이 있다. 지난 1년 반 동안 고난이 바다를 코로나로 지나왔다. 그 코로나의 바다를 지나올 때, 코로나 불루, 어떤 분들은 코로나 블랙이라고 말한다. 불루는 우울감과 절망감, 코로나 블랙은 좌절과 절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위드 코로나 첫 주인데 우리는 위드 코로나가 아니라 beyond 코로나라고 말한다. 뛰어넘어서 어떻게 beyond하는가? 응답을 통한 열매를 가지고 위드 코로나를 beyond, 제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기를 원한다. 특별히 응답인 기도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기도에 대해서 그냥 말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고 확인하고 간증하고 고백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오늘 예배가 너무 감사가 되어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정말 오랜만에 주일예배에 오신 분들은 Welcome Home!!~~, 주님 앞에 환영합니다~~!! 정말 위드 코로나를 뛰어 넘어 beyond 코로나를 가지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역사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시길 기도한다. 고난의 바다를 지나갈 때에 응답의 단비로 beyond로.... 완전하게 보혈의 피로 한국교회 전체를 지켜 주시길 소원한다. 그래서 온갖 말들이 다 엉터리였다고 예배에 관해서는 그게 맞지 않았다고 그걸 확신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기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기본적이고 우리 삶 속에서 확인되고 각인 되어야 하는지 코로나 이후에 어떻게 내 것으로 체화가 되는지 먼저 성도에게서 기도가 기본인데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이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마상에서 꺼꾸러지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사도바울이 마상에서 제일 먼저 *사도행전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바울이 회심한 후 한 일은 바로 기도하고 있다. 사람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면 반응이 기도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어떤 타종교의 자기 수양이라든지, 어떤 신념의 확대라든지, 자기 도 닦는 그게 아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소생된 영혼의 즉각적인 반응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기도에 대한 말미가 터지지 않고 체험된 고백이 없다면 아무리 신앙의 연륜이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신앙의 은혜의 문을 열지도 못한 체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부흥의 역사, 지금 우리는 회복에 대한 기대와 부흥의 약속을 갖고 있는데. 사도행전의 부흥의 역사, 1막, 2막, 3막을 볼 때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오늘 바울이 제일 먼저 거꾸러져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기도한 일이라고 하는 것처럼, 제1막은 사도행정 1-2장에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될 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새로운 신약교회가 시작되었음을 확신한다. 제2막은 사도행전의 안디옥교회가 세계선교가 시작될 때에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 전혀 기도와 금식에 집중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제3막은 사도행전 16장에 유럽에 복음이 전해질 때에 빌립보 강가에 기도로 나아가서 마음을 모을 때에 빌립보 교회가 태동된 것이다. -내일부터 특새가 있기에 이러한 메시지를 전한다. 임을 버리고, 정말 내가 특새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내일부터 한 주간 동안 기도에 관한한 죽느냐 사느냐 하는 여기에 확보를 하느냐 안 하느냐에 대해서 그걸 위해서 오늘 이 말씀이 내 본문으로 다가오길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신앙세계의 제2막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혹시 blue와 black으로, 우울증과 무력감으로, 혹시 우리에게 좌절과 절망이 있는 분들은 오늘 이 은혜의 단비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다시 한 번 인생과 신앙의 2막 3막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 이렇게 나와 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제대로 체험하기 위해 *스가랴 10:1 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봄비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말코시인데, 이스라엘과 우리의 기후는 반대이다. 그러니까 물론 4계는 비슷하지만 우기에 관한한 우리와 정 반대이다. 10월과 11월에 비가 오면 파종을 시작한다. 그리고 3-4월에 수확을 할 때에 그때에 추수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종하는 때에 오는 비가 이른 비라고 하고 추수할 때에 오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한다. 그러면 가을비는 어떤 비인가? 가을비는 이른 비이고 봄비는 늦은 비가 된다. 신약에서는 이 늦은 비를 성령의 기름부음을 상징한다. 오늘 이 봄비를 이야기 할 때 그냥 봄비가 아니고 이것은 늦은 비, 추수를 위한 비이다. 오늘 우리가 육십 넘은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인생의 마지막이 잘 되기를 원할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이 잘 되기를 원한다면 저와 여러분이 삶의 늦은 비가 내려야 한다. 우리의 삶의 봄비가 와야 하는 것이다. 추수하기 전에 씨를 뿌릴 때에 파종할 때에도 중요하지만, 이스라엘에는 마지막 추수시기에 적당한 늦은 비와 적당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냥 피었던 이삭이 말라비틀어지고 그다음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 전답들이 거북이의 등처럼 쩍쩍 갈라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설 때에 아니 날이 가면 갈수록 은혜의 봄비, 성령의 늦은 비, 우리의 인생의 추수 때에 이 봄비가 내리지 않으면 우리의 삶의 추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다. 내일부터 특새에 단순한 것이 아니다. “주여, 내 인생의 늦은 비를 경험하게 하시고 내 인생의 추수가 되게 하시고 내 인생의 쩍쩍 갈라진 거북이 등껍질 같이 말라비틀어진 이삭과 같은 것이 있으면 주님이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응답의 봄비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인생의 마무리를 잘하게 하시고 내 인생의 추수를 감당하게 하시고 내 인생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원한다. 내일부터 응답의 단비를 부어주시기를 원한다. ※ 제가 지난주에 한 자매로부터 이 메일을 받았다. 지금 영화사 대표로 있는 자매인데 “코로나로 참석이 어려워진 이유 때문에 이런 저런 핑계로 거의 예배를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말씀으로 많이 멀어져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었습니다. 정신 차리고 그리스도인이라고 걸맞게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와 보니 내일부터 특새를 한다고 했습니다. 10여 년 전 강남 예배당 시절에 그 추운 새벽길을 달려와서 밖에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 줄을 서고 주일 예배든 특새이든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본당 1층에 앞줄 중앙을 사수했는데, 그러니까 얼마나 절박하게 은혜를 사모했던지, 그때는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붙들지 않았으면 죽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번 특새로 인해서 정신을 반듯하게 가다듬을까 합니다. 이제는 대표님 소리를 듣는 제작사 대표가 되긴 했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서 하루하루가 가시방석 같습니다. 마음 편하게 잔 날이 지난 몇 년간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모세의 광야생활 40년을 채워야 나도 끝나는 건가 하는 이런 자조 섞인 말을 매번 매초 하는데 중략,,, 특새부터 우직하게 완주해보겠습니다. 이제 위드 코로나에 접어들었으니 오랜만에 더 뜨겁고 은혜가 되는 특새가 되기를 목사님 소망합니다.”-영화 만드는 사람처럼 글도 잘 쓴다. 자 그렇다면 이런 현상을 앞에 놓고 저는 말씀의 설명이나 해석만이 아니라 이는 우리의 삶을 움직여야 한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I. 응답의 단비는 구해야 한다. *스가랴 10:1, 1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구하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름을 일게 하시고 소낙비까지 주시는 것이다. *신명기11:14, 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구한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다 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보자. 오늘 위드 코로나 첫 번째 예배를 드리니까 넥타이도 평소에 하던 것이 아닌 것으로 했다. 좀 새로워져 보자는 취지이다. 감이 잡히는가? 기도에 대해서 구한다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가보자는 것이다. 기도에 대해서, 바울이 꺼꾸러져서 제일 먼저 기도한 것처럼, 여러분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주님은 우리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아신다. 왜 그런데 우리가 구해야 되는가?
*에스겔 36:36~37 3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6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그래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구해야 한다는 것인가? 제가 볼 때는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의 통로이기 때문에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응답을 주셔야 하는데 통로가 있어야 하는데 그 통로로 응답이 해결되어야 하듯이 응답의 통로는 구하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고 알아서 하시겠지 라고 하는 가운데 일이 되는 게 없다. 하나님께 간절하게 구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응답을 하는 것이다. 통로가 없는데 어떻게 응답 받을 수 있겠는가? 구할 때에 응답을 주신다. *마태복음7:11,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있어야 할 것 다 하나님은 다 알아서 하시지만 간절하게 순수하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신다. 누구복음에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베스트 가운데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를 허락해 주신다. 특별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안 구해도 주신 응답은 보편적 은혜이고, 오늘 위드 코로나 이후에 beyond 코로나를 통해 여러분과 제가 생업과 사업과 일터에 장래에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꼭 맞는 맞춤형 은혜를 얻으려면 구해야 한다.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런 내용으로 비슷하게 했지만 오늘 다시 새로운 것이다. 지금 새롭게 구해야 한다. 그래서 구하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하시는가를 보라. *에베소서 1:17~18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간절한 마음으로 특새에 나와 가지고 매어 달리고 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의 시각이 달라져서 통찰력을 갖는 것이다. 간절히 구하면 순수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간절하게 구하면, 우리의 시각이 달라지는 것이며 영적인 말미가 터지면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목자의 심정을 깨닫게 되면 그 순간 믿음의 용량이 커진다. 그래서 구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서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시각이 커지고 용량이 커지면 믿음의 용량이 커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구하는 기도를 통해 믿음의 용량이 커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 저는 요즘 구하는 기도는 코로나 안 걸리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고 우리가 손 잘 씻고 비타민C만 잘 먹으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안 걸린다. 걸려도 치유제가 나올 것이며 걸려도 이삼일 앓고 그냥 감기처럼 넘어간다. 저는 지금 목숨 걸고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가 다시 예배가 회복되,느냐 안 되느냐가 달려있다. 목숨 걸고 구하는 간절하게 구하는 제목이다. 우리 이렇게 간절히 구할 때 오늘 특별히 위드 코로나에서 첫 주일 예배에 우리 성도들과 함께 제가 간절히 사모하고 확신하고 그리고 주님 앞에 매어달리고 구할 때 하나님은 어떤 은혜를 주시는가?
II. 구할 때 하늘에 보고를 열어주신다. *신명기 28:12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구할 때에 하나님은 하늘에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주신다. 영어로 아름다움 보고(Excellent Traction), 최고의 보물, 하늘의 보물창고를 비처럼 부어주신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변화하게 되면 구하게 된다. 구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영적 시각이 커져서 믿음의 용량이 커지면 하늘은 응답하신다.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하늘의 보물창고를 열어주신다. 그러면 2021년 11월 지금 이 순간 하늘의 보물 창고를 열었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되어서 우리보다 훨씬 더 척박한 환경에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어떻게 보물 창고를 주셨는가? *스가랴 10:3, 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보물창고 1. 너의 인생의 보물창고를 전쟁의 준마와 같이 하겠다고 하신다. 준마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전쟁에 임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삶의 영적 전쟁에서 탁월한 적토마와 같이 빼어난 천리마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피곤해하지 않는 한얼마와 같이 강하고 담대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의존과 순종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의존이란 기도를 통해 의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존할 때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에 참여하는 것은 준마와 같이 은혜의 평원을 달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어제 우리나라 건국에 대한 설교들 들었듯이 대한민국의 가장 사상적, 의식적, 기초가 기독교라고 했다. 고려는 불교이고 조선은 유교이지만 대한민국은 고려, 조선시대를 이어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민국 이 나라의 기초가 기독교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일본을 부를 때 하늘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준마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전쟁터에서 준마와 같이, 적토마와 같이, 천리마와 같이 은혜의 평원을 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준마의 은혜가 하늘의 보물 창고이다.
보물창고 2. 모퉁이 돌이 그에게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그에게서 나와서 모퉁이 돌의 창고의 은혜, 말뚝의 보물의 은혜, 활의 은혜, 모퉁이 돌은 안정감을 말한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시대에 집을 지을 때는 지하를 판다든지 콘크리트로 하지 아니하고 그 때는 모퉁이 돌을 놓고 집을 지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모퉁이 돌은 그 집과 인생의 안정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러분 지금 흔들리고 있는가? 삶이 흔들리는가?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주시면 우리에게 모퉁이 돌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말뚝의 은혜란 몽고 같은 나라의 천막(게르)의 중간 기둥을 말한다. 그 말뚝이 서면 흔들림이 없이 천막이 쳐지는 것이다. 안정되고 오래 인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왠만한 비바람과 천둥에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 준다. 폭우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말뚝의 은혜를 주실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활은 용기를 상징한다. 살다보면 기가 죽을 때가 있고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고개를 처박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용기를 주신다.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세로 용기를 가져야 한다. 활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안정과 인내와 용기의 축복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의 보물창고의 축복이다. 그럴 때, 5절을 보면, *스가랴 10:5, 5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원수를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즉 그들이 싸워 말 탄 자들을 부끄럽게 하리라. -사탄을 향하여 선제공격을 하고 원수를 밟는 축복을 주실 것이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새에 은혜의 준마, 모퉁이 돌, 그리고 말뚝, 또한 활의 용기를 주셔서 모든 사탄의 세력을 선제공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길 소망한다. 한 마디로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신적개입이 중요하다. 이번에 3주전에 브라질을 갔다 왔듯이 마무리 할 즈음에 브라질 그 장로교가 운영하는 브라질에서 제일 큰 대학 중에 하나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연세대 정도 될 것이다. 사만 오천 명의 학교이다. 거기에서 우리가 칼 세미나를 마치고 난 다음에 축하하는 일이 있었다. 거기에 브라질 장관 3명이 왔다. 교육부 장관이 목사님이시다. 오셔서 거기 귀한 자리를 축하해 주었고 그다음에 보건복지부 장관이 오시고 나중에는 외무부 장관이 오셨다. 특별히 전 농림부 장관인데, 안토니에 카브리에라는 분이다. 우리 교회에도 오셨고, 특새에도 참여하셨다. 이분은 대한민국을 사랑하셔서 우리 교회에도 오셨고 이북 평양에도 세 번이나 가셨다. 왜냐하면 미국대사관도 평양에 없고, 일본 대사관도 평양에 없다. 우리도 없지만 There is no embassy in Pyongyang. 그러나 브라질 대사관이 평양에 있다(The Brazilian embassy is in Pyongyang). 그래서 북한에 상황을 보고 틴에이저 아이들을 4명을 데리고 북한에 갔다. 거기서 스마트 폰 뺏기고 8일간 있었으니 이들에게는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이러한 분이신데 그분이 좀 부자였다. 사탕수수 농장도 있다. 안토니오는 부자라고 해서 얼마나 부자인지를 물어보게 되었다. 당신이 부자인데 어느 정도 부자입니까? 라고 물었다. 사탕수수 밭과 콩 농장이 제주도보다 더 크다고 했다. 그렇게 부자이면 북한에 코로나 때문에 엉망진창인 그곳에 그렇다고 하니 브라질은 대사관이 있으니, 그곳에 식량 좀 도와주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 번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미국을 갔다. 니고레란 목사님이 친한 친구인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목사님은 자기의 속을 다 공개하는 친구이다. 우리 교회를 위해 늘 기도하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자살을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래서 동지적 마음으로 잘 지내는데, 제가 이번에 브라질 다녀온 이야기를 했더니 북한의 어려운 식량을 좀 도와야 한다고 했더니 그러냐며 자기와 아주 친한 친구가 롤스케롤라이나 주지사를 지냈던 하나가 유엔 산하에 세계식량기구 사무총장이다. 세계 세계 최고의 부자가 누군지 아는가? 그전에는 아마존이었다. 지금은 일론 머스크이다(테슬라). 그래서 푸드프로그램, 세계 식량기구 사무총장이라는 비즐리라는 사람이 작년에 그 기구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두 사람에게 돈을 좀 내놓으라고 했다.
그랬더니 6조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저와 닉고레 하고 이야기해서 된 것이다. 이게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제가 뭐가 있는가? 하나님이 하늘에 보물 창고를 열어주시고 일을 하신다. 북한이 식량이 뭐냐면 옥수수 밀가루이다. 쌀이 없다. 우리나라는 쌀이 썩어 남는다. 북한에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은 먹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물 창고를 여시면 준마가 되게 하시고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시며 말뚝 되게 하시며 활의 용기를 주신다. 그리고 원수를 밟게 하신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 우리가 꿈꾸지 않고 소원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결사적으로 주님께 매달리고 대신 말씀을 가지고 어제 내일부터 특새에서 주님 보물창고를 열어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명기 28장을 붙잡고 중언부언은 잘못이지만 말씀을 가지고 반복하는 것은 강력하다. 말뚝의 은혜를 주시고 나 지금 흔들리니 말뚝의 은혜를 주시길 기도해야 하고 내 삶이 안정되지 못했다면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시고 고개를 들지 못할 힘든 인생이라면 주님 활의 용기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한다. 은혜의 평원을 한없이 달리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매달려야 한다. 에베소서를 읽다가 바로 그것이야 라고 생각했다. 스가랴의 이 은혜가 에베소서는 어떻게 재해석 되었는지를 보았다. 에베소서의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빈다고 했다. *에베소서 3:16~17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이것은 성령으로 질주하고 달리는 삶이다. 모퉁이 돌, 말뚝, 활처럼 4절의 용기의 은혜 의미가 있다. 반복되고 재현된다. 그래서 힘들어도 기도하고 에베소서 3장으로 반복을 하면 성령으로 질주하게 하시고 풍성함을 허락하시며 안정과 능력을 주시고, 뿌리가 되며 터가 굳어지게 하시고, 우리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간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게 말뚝, 보물창고의 은혜, 결론은 *스가랴 10:6, 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우리는 모두가 과거가 있다. 아픔도 있다. 트라우마, 상처도 있다. 어떨 때 생각하면 열 받고 가슴앓이 하고 어떨 때는 부끄러운 생각도 있다. 다 부족함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을 없었음 같이 되리라고 하신다. 나의 아픔과 연약함과 모든 실수가 없었음 같이 되게 하신다. 트라우마가 치유되되 없었음 같이 내어버린 일이 없었던 것 같이 온전한 회복을 주시는 것이다.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버릴 때, 내용의 잔재 물과 쓰레기들을 완전히 삭제하고 공장 초기화 하는 것처럼 나의 아픔과 모든 것들이 없었던 것처럼 해주시리라 확신한다. 더 감사한 것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는 길, 8절을 보면, *스가랴 10:8, 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주여, 회복을 넘어 이전에 번성함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마치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 땅에 칠십 명이 들어갔지만 번성해서 강한 민족이 된 것처럼 번성하게 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성령 충만으로 회복된 열 두 제자로 통해 복음이 강력하게 선포될 때, 30명씩 5천 명씩 주님께 돌아오듯이, 한때는 교회를 핍박했던 사도 바울이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침없이 번성으로 선포할 때 그 복음 앞에 로마가 백기를 들었던 것처럼, 인생과 하나님의 백성과 공동체에 번성을 확인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교회로 말하면 주님 KBS 저녁 뉴스에 나올 만큼 사랑의 교회와 특새의 은혜와 능력이 있어서 그 번성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는다. 회복되리라 믿는다. 기도 제목을 많이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는지를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온 교우들과 중직자들이 모두가 우리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하면 매달릴 수가 있는지, 하나님 저에게 기도의 제목을 더 주셨다. *다니엘 9:17, 17 그러 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시옵소서. -황페한 성소는 불타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말한다. 성정이 완전히 파괴되고 못쓰게 되어버린 곳이 되었다. 와서 청소하고 깨끗하게 단정한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성전이 완전히 새롭게 되고 회복되기 위해서 뭘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얼굴빛을 성전에 비추어주셔야 한다. 신약시대는 우리 모두가 성전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천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전이 파괴되었다. 코로나를 통해 파괴되었다. 일 년을 교회를 못나오는 것이 파괴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세파와 유혹으로 때론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성전이 깨어지고 상처받고 신음하고 황폐되었다. 이 성전이 회복되고 부흥하는 길은 세상의 처세나 위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얼굴빛이 비추어져야 한다. 주님의 얼굴빛이 비추기를 필사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상처의 자국에 주님이 빛이 비추어지게 하시고 공동체와 한국교회에 비추어지게 하시고 저 북한의 어려운 가운데도 주님의 얼굴빛을 비추어지시길 기도한다. 정리하면,, 지금 우리 성도들 가운데 코로나의 터널을 지나면서 준마처럼 평원을 달려야 할 자도 있을 것이다. 모퉁이 돌처럼 안정감을 소원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 말뚝 같이 버티고 인내해야 할 환경 가운데에 있는 자도 있을 것이다. 활처럼 용기를 가지고 담대해야 할 자도 있을 것이다. 어떤 분들은 과거의 상처로 트라우마로 전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완전히 회복되길 바라는 분도 있을 것이다. 오늘 주의 얼굴 빛이 일마다 때마다 공동체마다 함께 허락하셔서 주의 얼굴빛을 받기를 소망한다. 그대로 응답 받아서 하나님의 신적개입을 순종하는 것처럼 브라질과 미국에서 만난 리고레 목사님과 만난 사람들을 기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잠언 17장에 보면, *잠언 17:20, 20 마음이 굽은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이런 이야기를 해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이 뜨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이 굽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항상 마음에 이런 이야기로 마음이 부정적, 의심이 많고 비판이 많으면 마음이 굽어진다. 그럴 때 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말끔히 처단을 해야 한다. 우리 주님 앞에 순수한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굽어지지 아니하고 하늘의 보물 창고에 응답의 대상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내게 무너진 절망감을 맞춤형 응답의 단비를 내려 주실 것을 확신하며 번성하는 인생의 제 2막이 열리게 하시며 두려움이 없이 기도의 준마를 타고 특별새벽 기도회에서 평원을 달릴 수 있을 때에 모퉁이 돌과 말뚝과 활처럼 흔들림이 없이 선제적 공격으로 사탄을 막아서 은혜의 무한자원을 공급받고 우리교회와 우리 가정에 그리고 일터에 주님의 얼굴빛을 비추어주셔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주실 것을 확신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여 풍성하고 번성하는 삶 가운데 성령 충만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시편 33:10~13) 10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
▶박명수 교수님(서울신대 명예교수님) -저는 사랑의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두 단어를 생각한다. 하나는 부흥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역사라는 단어이다. 우리 오정현 목사님이 좋아하시는 단어가 그 단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제가 한국교회의 부흥을 원한다. 그런데 사랑의 교회가 오래전부터 신학생들을 위한 부흥을 꿈꾸어왔다. 총신대학교 박영규 교수님과 함께 그 운동을 했다. 제가 매달 한 번씩 사랑의교회에 와서 우리 신학대 교수님들과 같이 기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의교회는 신학생들을 통한 한국교회 부흥을 꿈꾸는 교회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를 드린다. 또한 단어는 역사라고 하는 단어이다. 제 작년에 1919년 3.1운동 백주년 되는 해에 사랑의교회가 다른 한국교회가 다 무관심 할 때에 1919년의 3.1운동의 근본적인 운동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연구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해서 학자들을 모아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 연구의 참여하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제가 역사 교과서 개정운동을 했다. 역사교과서 개정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저의 딸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역사 교육과를 전공하고 있던 저의 딸이 그 당시 가장 많이 보급하고 있던 금성출판사 근현대사를 집으로 가져왔다. 제가 신학교수이고 역사학자이기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 기독교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 깜짝 놀랐다.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하는 그 몇 안 되는 구절 가운데 ‘한국 기독교는 지나치게 복음주의여서 제국주의와 일제침략을 옹호했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어 있었기에 이것은 북한 앞잡이이고 공산주의, 공산당이 한국 기독교를 비판할 때 쓰는 말이었다. 저는 너무나 화가 났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저희 연구소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했고 한국교회사 사학회에 이야기를 해서 우리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 당시에 금성사 출판사 근현대사는 국가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정부가 이 교과서가 잘못 되었다고, 집필자들이 개정을 하라고 요구했는데 자기들은 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문제를 제기 했을 때, 금성출판사에서 이 문제의 의견을 결국은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것을 수정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근현대사 교과과목이 고등학교 과목에서 사라졌다. 그 뒤에 저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말고, 정부가 만드는 그 당시는 국정교과서였다. 정부가 만드는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다. 한국사 교과서는 삼국시대와 교려시대에는 불교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가 시작되면서 정감록과 천주교의 도입에 대해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역사를 서술했다. 이제 기독교가 등장할 차례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등장할 차례에 우리 개신교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었다. 천주교, 불교, 유교를 설명하는데 한 줄씩 설명했다. 그러니까 불교도 한 줄, 유교도 한 줄, 천주교도 한 줄, 그리고 개신교도 한 줄 이었다. 이상하였다. 불교를 설명할 때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유교를 설명할 때도 자세하고, 그리고 정감록과 천주교를 설명할 때도 자세하게 설명을 했는데, 개신교를 설명할 때는 모든 종교를 설명할 때는 다 같이 설명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럴 수가 있냐고 했다. 그랬더니 교육부 담당자들이 뭐라고 했냐면, 집필 기준에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가 그냥 쓰여 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집필 기준이 있고, 기준에 의해서 역사교과서를 쓴다. 그래서 집필 기준을 봤더니 이러했다. 들어온 종교에 대해서는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서술해야 된다.’ 라고 되어 있다. 다른 때는 아무 소리 없다가 들어온 종교에 대해서는 똑같이 공정하게 쓴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도 한 줄, 유교도 한 줄, 천주교도 한 줄, 기독교도 한 줄로 이렇게 씌어 있는 것이다. 불교도 상당하게 썼고, 유교, 천주교도 상당하게 썼다. 그러나 개신교는 여러 종교와 더불어서 딱 한 줄 나오고 말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제가 생각할 때, 역사 교과를 제대로 만드려면 집필 기준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필기준 개정운동을 했다. 그래서 새로 만든 집필기준은 이렇다. ‘들어온 종교에 대해서는 개신교의 역사를 설명하고 그리고 이어서 여러 종교를 서술한다.’라고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적어도 우리 개신교에 대해서, 개신교의 출발에 대해서 반대로 설명하고 그다음에 다른 종교를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되었겠지 하고 교과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보았더니 여전히 과거와 똑 같았다. 그래서 교육부에 다시 항의했다. 아니 그 집필기준 때문에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했는데, 집필기준이 바뀌었는데 왜 이렇게 교과서가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냐고 항의했더니, 쓴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그 당시에 국정교과서 체제에서 검인정 체제로 바뀐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이 쓰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에게 집필기준은 권고 사항이지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하늘이 노랗게 바뀌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정부에서 이 문제를 심각성을 이해하고 정부가 나서서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를 써야 되겠다고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러 경로를 통로를 통해서 우리 개신교를 제대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새롭게 집필 기준을 만들었다. 그 새로운 집필 개정은 뭐라고 쓰여 있냐면 개항이후의 개신교에 대해서는 개신교 역사를 설명하고 개신교가 행한 것 가운데 특별히 교육과 의료에 대해서 서술한다. 로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정부에서 이 문제를 심각성을 이해하고 정부가 나서서 제대로 된 역사 교과서를 써야 되겠다고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러 경로를 통로를 통해서 우리 개신교를 제대로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새롭게 집필 기준을 만들었다. 그 새로운 집필 개정은 뭐라고 쓰여 있냐면 개항이후의 개신교에 대해서는 개신교 역사를 설명하고 개신교가 행한 것 가운데 특별히 교육과 의료에 대해서 서술한다. 로 되어있다. 그래서 새로운 집필 기준에 의해서 역사 교과서를 열심히 썼다. 그리고 출판할 때쯤이 되어서 박근혜 정부가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역사 교과서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역사 교과서에 우리 기독교에 대한 서술은 옛날과 똑 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역사의 주관자라고 한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인데, 정작 역사 교과서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전혀 기록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언론사회에서 기독교 학교인 대광학교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기독교와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독교가 다르다.’ 그것이 한국 역사를 주관한다고 우리 기독교를 이끌었다고 하는데, 학교에서는 기독교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이고, 일제침략을 옹호한 그런 세력이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여러분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역사가 주관한다고 외쳐서야 되겠는가? 역사 교과서를 바꾸어야 학생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지 않겠는가? 한국교회는 교회 내에서는 큰 소리로 이야기 한다. 세상에 나가서는 아무런 소리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역사 교과서를 비롯해서 소설, 영화, 드라마 등에서 기독교를 너무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 소설가의 소설인 ‘손님이라는 책에 거기서 말하는 손님은 마마를 말한다. 예쁜 얼굴을 망가뜨리는 마마~,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이 사회를 이끌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아름다웠던 사회를 마마처럼 이 나라를 망쳐놓았다는 것이다. 그게 황석영 소설가의 손님의 내용이다. 이런 것들이 널리 퍼졌다. 수백 만부씩 팔렸다. 그것을 읽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도전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전도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저는 신학대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 꽃이 피려면 봄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겨울에 핀 꽃이 아름다운 꽃이다. 모진풍파를 혹한을 견디고 한 송이의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아름다운 꽃은 한 송이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봄이 되려면 얼음이 녹아야 하고 땅이 풀려야 한다. 훈풍이 불어야 한다. 교회에서 아무리 전도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이 널리 퍼지려면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인 세력이 많아져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얼로 이루어지는가? 학교에서는 역사 교과서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방송에서는 드라마 영화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소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교의 영역이 아프리카나 남미나 동남아시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영역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특별히 우리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는가를 바로 알려야만, 그래야 부흥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이 땅을 위하여 끼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고 말한다. 학교를 세웠고 또 병원을 세웠고, 또, 음악도 발전시켰다. 오늘 아름다운 성가도 했지만, 한국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행한 일 가운데서 부동으로 아무도 이 일을 이유를 달 수 없을 만큼 막강한 영향을 미친 부분이 바로 음악이다. 음악은 교회가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 외에도 발전한 것이 많다. 그러나 제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한국교회가 기여한 것이 그런 파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이 땅에 들어와서 대한민국의 한반도에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여러분들 지금까지 한반도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중국에서 들어오는 대륙문명을 통해서 우리 한반도는 발전해 왔다. 대륙의 유교 문화권의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기독교는 대륙에서 들어오는 문화를 통해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서 서양을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문화를 향유하게 된 것이다. 방향이 바꾸어진 것이다. 저는 이 사건이 한반도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생각한다. 여러분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로,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바꾸어진 것은 별거 아니다. 다 똑같이 대륙에서 영향이 와서 이 땅에 역사를 바꾼 것이다. 작은 변화에 불과한 것이다. 여전히 대륙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새로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바다를 통해 들어온 사상은 옛날 과거의 사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래서 한국문화권은 유교 문화권에서 서구 문화권으로, 대륙문화권에서 해양문화권으로, 근본적으로 문화를 바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 기독교를 중심으로 해서 진행된 것이다. 여러분들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본가치가 무엇인가?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이다.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이다. 사상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잘 기억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종교의자유도 옛날 대륙문명에는 전혀 없었다. 이 새로운 문화는 기독교를 통해서 선교사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학교를 세우고 병원 몇 개를 세우고 이런 정도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완전히 한반도를 대륙문화권에서 해양문화권으로 유교문화권에서 서구문화권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 중심에 우리 기독교가 있는 것이다. 역사교과서에서는 이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저는 서울시내에 가보면 이 나라가 아직도 조선왕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광화문을 가보라 거기에는 누가 있는가?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이 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은 훌륭한 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분들이 오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민국이 제대로 되려면 대한민국의 근본적인 정신을 알아야 한다. 근본정신은 유교정신이 아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종교개혁 이후에 만들어진 근대서구 문명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여러분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대한과 민국이라는 말이 합해져서 만들어졌다. 대한은 한민족(큰 민족)이라는 말이다. 민족공동체를 말한다. 이 한민족은 단군 때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그런데 오늘의 대한민국은 여기에 민국이라고 하는 단어가 덧붙여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다. 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줄인 것이 민국이다. 민주라는 말이 동양이라는 말인가? 동양에는 민주라는 말이 없다. 군주는 있어도 민주는 없다. 공화라는 말도 동양에 없다. 주역에 공화라고 하는 것은 혼돈 상태를 이야기 한다. 전제(왕이 맘대로 하는 정치)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서로 합의해서 자유를 이끌어가는 공화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한민족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여기에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 서양에서 만든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이 새로운 사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 두 단어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것이 대한민국인 것이다. 한 민족은 시대를 따라서 자기들의 정치 이념을 바꾸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는 불교를 정치이념으로 했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기독교의 뿌리를 둔 민주공화국을 정치이념으로 해서 만든 나라이다. 그런데 지금 역사 교과서는 한민족의 역사만 가르치고 이 민주공화국이 어떻게 들어와서 오늘 대한민국을 만들었는지를 가르치지 않는다. 국민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킨다. 그러기 때문에 선거 때만 되면 항상 이럴까 저럴까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저는 이번에 이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은 적어도 대한민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괜찮다. 경제를 좀 몰라도 괜찮다. 그러니 이 나라의 근본적인 정신만은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을 이끌어간다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이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수가 있단 말인가? 저는 이런 대한민국의 뿌리는 기독교라도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들어온 것인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왔을 때에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다.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배제학당,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을 세웠다. 이런 학교를 통해서 민주주의도 가르쳤다.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도 함께 전한 것이다. 그 어린 학생들이 복음에 가담을 했고, 그 어린 학생들이 이제 우리도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기에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 때 여기에 참여한 어린 학생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제기했다고 해서 이승만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전제에서 민주주의를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은 지그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 하자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승만은 감옥에서 고생을 했다. 이승만은 젊은 사람이고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죽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했다. 이때 자기가 배제학당의 선교사 아펜젤러에게서 배웠던 말이 생각이 났다. 여러 학생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해보세요. 하나님은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 말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사실 이승만은 배제학당에 다녔지만 영어공부만 하려고 했지 기독교는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신신당부 부탁했다. 너는 배제학당에 가면 영어는 배워도 좋지만 기독교는 배워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왕손이 아니냐? 유교를 지켜야 하는 왕손이다. 그러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할 때는 귀로 듣지 않았다. 그런데 감옥에서 어려운 일이 부닥치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제가 이 민족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여러분들 바로 이 기도야말로 오늘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감옥에서 쓴 책이 ‘독립정신’이라고 하는 책을 썼다. 아주 훌륭한 책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 발전하고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나라의 크기나 또 역사의 길이나 인구에 많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했다. ”한 나라가 성공하느냐 성공하지 못하느냐는 그 나라가 어떤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영국을 보라. 작은 나라이지만, 영국보다 몇 십 배 큰 중국을 공격하고 있지 않느냐? 인도를 보라 인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남의 나라 식민지이다.” 이승만 박사 독립정신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아는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면 먼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육으로 된 사람에서 벗어나서 이제 영으로 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처럼 이제 새로운 나라의 백성들이 되려면, 민주국가의 백성이 되려면, 임금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예예하던 그런 백성들이 이제 주인의식을 갖는 새로운 삶으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말을 빌리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거듭남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국민, 주인으로서의 자각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상들이 점점 퍼지게 되었다. 널리 퍼지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도 여기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와 도산 안창호가 이런 운동에 시발이 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망했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미국에 있는 우리 기독교 교표들이 ‘이제 망한 나라,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어차피 대한제국은 망할 나라이다. 임금이 백성들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자기착취의 수단으로 삼는 그런 나라를 우리가 그런 나라에 미련을 둘 필요가 무엇이겠느냐? 이제 대한제국이 망했으니, 이제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 그래서 만든 나라가 대한인국민회이다. 1910년 8월에 대한민국이 망했다. 대한제국이 망했다. 1910년 9월, 이 대한인국민회가 낸 신한민보에 보면 이제 제국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 민주공화국 시대가 왔다. 이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겠다. 나라가 망해가는 그 시점에서 우리 기독인들은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다. 이 꿈이 이제 구체적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바뀌게 된 씨가 된 운동이 바로 3.1 운동이다. 씨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말을 많이 하고 꿈을 많이 꾸어야 씨가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그 이전에 개항부터 우리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나라를 민주국가가 되어야 된다고 라고 말을 많이 했는데 이것이 정확하게 ‘우리가 원하는 나라가 이런 나라요’, 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이 1919년 3.1운동이다. 여러분들 기미독립선언문에 제일 첨에 뭐라고 나오는가? ‘우리나라는 민주국가요, 독립국가요, 그리고 우리 백성들은 자주민이다.’ 이 독립과 자중, 독립과 자유, 이것은 민주국가라고 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1919년 4월 달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임시헌장을 만들었다.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그 제일 첫 일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다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이 말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미국의 교포들이 새로 세워진 임시정부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라야 된다. 기독교 정신의 근거한 미국식 민주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기 바로 전에 미국에 있는 이승만 박사가 상해에 있는 현수 목사님에게 전보를 쳤다. 현수는 임시정부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이다. ‘새로 헌법을 만들터인데 꼭 두 가지를 기억하시오!’ 첫 번째는 새로운 나라의 기독교 정신에 근거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새로운 나라의 미국식 민주주의인 입법, 사법, 행정부를 나눈 미국식 민주주의에 근거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 했다. 여기에 근거해서 말하자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는 대한민국은 미합중국의 정치제도를 본받아서 민주공화제로 한다. 라고 이렇게 써 있다. 그런데 미합중국이라고 하기에는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좀 그러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고 부른 것이다.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제가 국사편찬위원회에 자료를 하나씩 뒤져 보았다. 이승만 박사가 전보를 쳤을 때에 그 누가 도청을 하고 있었냐면, 일본 헌병들이 도청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을 그 즉시에 상해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 일본에 즉시 전했다. 이승만이 이런 지시를 했다며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1919년 4월 10일에서 15일경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들이 모였다. 이 한인들이 모여서 대회를 했다. 대회핵심은 앞으로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키워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독교 정신을 위해서 세워진 나라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식 민주주의 입법, 사법, 행정이 아우러지는 권력의 분점이 이루어지는 견제가 이루어지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상해에 보낸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와 아주 잘하는 선생을 상해에 보냈다. 그냥 보낸 것이 아니다. 돈을 묶어서 보낸 것이다. 그래서 상해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3.1운동은 일본에서 독립만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닌 이 3.1운동에서 앞으로 우리가 꿈꾸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그냥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20년부터 공산주의의 유업이 이 땅을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이동희이라고 하는 사람을 유혹을 해서 그 당시에 그는 부총리였다. 이동희에게 러시아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들을 도와 줄 테니 임시정부를 공산주의로 바꿔라. 이동희가 오케이 했다. 그렇게 넘어갔다. 그 당시에 임시정부의 젊은이 김구를 만나자고 했다. 김구에게 이야기 했다. 소련이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려고 하는데 우리 소련과 더불어서 공산주의로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김구가 이동희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련의 도움을 받는 것은 좋은데 도움을 받으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자치권이라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건 안 된다고 이동희가 말했다. 우리가 독립을 하고자 이런 고생을 하는데 소련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서 되겠냐고 따졌다. 거절했다. 여러분, 임시정부의의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로 넘어갔다. 공산주의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구 선생이다. 상해 임시정부 내내 공산주의와 맞서서 싸운 사람이다. 이 김구 선생을 뒤에서 도운 사람들이 누군 줄 아는가? 바로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 기독교인들이다. 김구 선생은 매일 교포들에게 임시정부가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편지 쓰는 것이 김구 선생의 일이었다. 이제 해방이 되었다.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사람들이 중경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는 미국이 강조하는 자주민주주의 체제를 원한다.’ 그런 나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귀국하기를 원하니 우리를 도와달라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3.1운동 때 우리가 나가야 될 방향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 뒤에 모진 박해 유혹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이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이승만 박사가 씨를 뿌렸고 김구 선생이 그것을 일구어 낸 것이다. 해방이 되었을 때에 북한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조만식 선생이었다. 함석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남한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하나님은 북한 땅에는 오직 한 사람, 똑똑한 사람은 조만식 밖에 남겨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만식 선생은 그만큼 위치라고 하는 것은 북한에서 대단했다. 바로 이 선생이 해방 직후에, 이 직후라고 하는 것은 아직 소련군도 오지 아니하고, 아직 미군도 오지 않은 그 상황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평안남도에서는 건국주의 준비 위원회를 만들었다. 남도에는 평양이 있고 평양은 북한사회의 중심이다. 이 건국 준비 위원회의 근본적인 정신이 임시정부를 봉대해서 임시정부가 나아가려고 하는 대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뒤에 얼마 있지 아니하고 소련군이 왔다. 소련군이 와서 보니까 이 조만식 선생이 건국 준비 위원회를 만들고 민주정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꺾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건국 준비 위원회를 인민위원회로 바꿨다. 조만식 장로를 위원장으로 있지만은 그 밑에는 완전히 공산주의자들로 가득 만들어 놓았다. 조만식 선생은 여기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1945년 11월 달 조선민주당을 만들었는데, 조선민주당의 각료회는 노동자와 농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계급이 없는 나라다. 그리고 유지들, 시민 계급이 주도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라고 이야기 했다. 이 때 조만식 선생과 더불어서 조선민주당을 만들었던 이운영 목사님은 우리가 바라는 바는 민주공화국이다. 이렇게 증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47년 여름에 미..소 공회에 미국 대표인 브라운이 평양을 방문했다. 소련이 반대했지만 브라운이 어떻게 해서라도 조만식을 만나겠다고 했다. 그리고 조만식 장로를 만났다. 질문했다. ‘당신은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 라고 했더니 ‘민주주의’를 원한다.’ 라고 했다.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다. 소련이나 미국도 민주주의를 말하는데, 당신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원하는 민주주의는 미국식 민주주의이다.’ ‘지금 북한의 사람들이 85%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되면, 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지지할 것이다.’ 이렇게 브라운에게 이야기했다. 이것이 문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감히 저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소련군만 오지 않았다면 북한은 민주주의가 되었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생각해보라. 북한에 기독교가 많았다. 전체 기독교의 3분의 2가 북한에 살았다. 그 사람들이 해방 직후에 북한 사회를 이끌어 갔다. 평안북도 건국 준비 위원회도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인이었다. 평안남도 건국 준비 위원회도 조만식 장로님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이었다. 황해도에도 김흥순 목사님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오늘의 북한의 공산주의 국가는 바로 이 기독교인들이 세우려고 했던 그 나라를 무너뜨리고 자기들이 강제로 북한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공산주의들을 만든 것이다.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 북한 사람들이 원래부터 공산주의를 원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다시 한 번 하나씩 하나씩 뒤집어 보아야 한다. 해방이 되었을 때 남한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은 여운영이다. 그리고 여운영은 박헌영과 함께 조선 인민공화국을 만들었다. 미국이 오기 전에 만들었다. 북한의 조만식 장로는 민주국가를 만들려고 했는데 남한의 여운영과 박헌영은 인민공화국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 세력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군이 9월에 왔다. 9월에 온 것은 서울이다. 또 경상도 지역에는 6월에 전라도 지역에는 10-11월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미군이 장악을 하게 된 것은 1946년 2월 달에 가서야 장악을 하게 된 것이다. 왜 우리나라의 좌파가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줄 아는가? 바로 1945년 해방 되었을 때, 그리고 아직 미군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 여러 날 동안 각 지역에 서울에서 이미 이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을 했지만 각 지역에서는 좌익들이 뿌리를 내렸다. 9-12월에 4-5개월 동안 이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가지고 인민위원회가 정부처럼 행세를 했던 것이다. 무슨 일을 한줄 아는가? 일본 사람들이 남기고 간 재산들을 자기 것으로 했다. 과거에는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이제 좋은 집에 살게 되었고 권력의 맛을 보게 되었다. 미군들이 그 다음에 와서 그걸 내놓으라고 하니까 내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좌익들이 될 수 있었는가? 거기에 대항마가 있었다.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이 한국에 왔다. 이승만 박사는 10월에 오고 김구 선생은 11월에 왔다. 그분들이 1946년 1-2월에 무엇을 만들었는가? ‘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었다. 이 독립촉성국민회가 우익들이 몰려있는 당이었다. 이 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면 안 되겠다는 취지와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든 것이다. 이것이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이 함께 만든 것이다.
여기에 총재는 이승만 박사, 부총재가 김구 선생이었던 것이다. 같이 만든 것이다. 임시정부 세력인 이승만 박사가 같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도 임시정부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다보니 국내에 기반이 없는 것이다. 이 때 이승만 박사가 김구와 더불어서 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기독교 목사님들이다. 기독교 목사님들이 그분들과 손을 잡고 각 지역마다 조직을 만들었다. 여러분들 기억하라. 전라북도에서는 배은희 목사님, 전라남도 이남규 목사님, 충청북도 구현직 목사님, 충청남도 남상욱 목사님, 이렇게 해서 이 독립촉성국민회의 반 이상을 목사님들이 주도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분들이 공산주의와 싸운 것이다. 1948년 나라가 만들어질 때 국회의원들 제일 많이 배출한 집단이 바로 독립촉성국민회의가 많은 국회의원을 만들었다. 한민당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바로 이승만, 김구 이 두 분과 더불어서 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든 우리 기독교 목사님들이 만든 것이다. 물론 이승만 박사님도 기독교인이시다. 김구 선생도 중국에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못했지만 귀국하는 즉시 교회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 사실 많은 분들이 왜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이 서로 틀어졌을까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다. 원래 이승만 박사와 김구는 공산주의를 반대해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 데 있어서 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피치 선교사라고 하는 사람을 이승만 박사도 잘 알고 김구 선생도 잘 안다. 김구 선생이 죽음의 위해에 처했을 때, 누가 도와주었냐면 피치 선교사가 도와주었다. 피치 선교사가 쓴 글에 의하면 두 사람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두 사람이 약속을 했다.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을 하고 김구 선생은 부통령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김구 선생이 스스로 이야기 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그와 함께 부통령으로 섬기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런데 1948년에 결정적으로 길을 두 분이 달리하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 김구 선생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둘 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당시 1945-48년 동안 계속 하나의 통일된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북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소련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먼저 38선 이북은 분명한 공산주의로 만들었다. 이미 1946년 북조선 임시 인민회를 만들었고, 1947년에는 임시라는 말을 빼고 조선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만들었다. 인민위원회는 그냥 위원회가 아니다. 사랑의교회가 여러 위원회 가운데 있는 위원회가 아니다. 나라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미 나라를 맘대로 긋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북한과 좋게 타협해서 통일을 이룰 수 있는가를 이승만 박사는 거기에 퀘스쳔 마크를 찍은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남한만이라도 민주주의를 만들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면 북한도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지 북한에 먼저 공산주의가 분명하게 만들어졌고 그것을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자들에게 양보를 해서 통일된 국가를 만든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여러분들 이 당시에 대부분 한국기독교인들은 어느 편에 선줄 아는가? 한국기독교는 대부분이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공산주의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분들이 생각할 때, 이승만 박사의 판단이 옳다. 이렇게 해서 한국 기독교는 이승만 박사를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을 너무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나중에 김구 선생은 돌아기시기 얼마 전에 남북한의 통일은 중요한데 먼저 우익적인 사람과 함께 만나자는 것이다. 북한에는 위대한 지도자 조만식 선생이 있었다.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 소련이 조만식 선생을 감금해놓고 있었다. 이제 김구 선생은 북한의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과 남한의 민족주의자 김구 선생이 같이 만나서 통일을 이야기해보자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저는 김구 선생이 바랐던 것은 공산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로 통일을 이루길 원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아쉽게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에 김구 선생이 암살을 당했다. 여러분들 오늘의 대한민국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적어도 세 가지 세력을 극복하고 만들어졌다. 그것은 중국의 중화사상이고, 또 하나는 일본의 천왕중심주의이고 또 하나는 소련의 공산주의이다. 그럼에는 무엇으로서 이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시간상 간단하게 이야기 하겠다. 우리 한반도 주변에 세 나라가 있다. 중국, 일본, 소련이 있다. 중국은 한국을 뭐라고 하는가? ‘중국의 심장을 보호하는 왼팔이다.’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북경이 있다. 한반도는 이렇게 있다. 서양에서 북경을 점령하려고 올 때 이 한반도가 없으면 북경은 넘어가고 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한반도를 자기들의 속박에 놓으려고 가진 노력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그것을 섬겨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화사상이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 중화사상의 세상의 중심은 북경에 있는 천자(중국의 황제)이고 하늘이 천자에게 권한을 주었고, 천자가 조선의 왕에게 권한을 주었고, 왕은 대부에게 권한을 주었고, 대부는 사에게 권한을 주었고, 사는 보통사람들에게 권한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천하질서라고 말한다. 이러해서 우리 기독교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나님의 뜻은 중국의 천자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과 직접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이 직접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서 국민주의이다. 천자가 주인이 아니라 국민이 한 사람 한 사람 주의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한문으로 말하면 천자이다. 천자가 중국 북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하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봉건주의를 무너지게 한 것이 우리 기독교이다. 이 기독교적인 이 평등사상이 중국의 봉건주의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럼 일본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은 대륙에서 ‘일본에서 다루는 단두이다.’라고 설명한다. 생각해보라 대륙이 있다. 그런 일본열도가 있다. 그리고 일본 열도의 가운데를 향해서 한반도가 있는 것이다. 이 한반도가 다른 세력에 들어가면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한론이다. 한반도 장악하지 아니하면 일본열도가 위험해진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1910년 한일합방을 한 것이다. 결국 일본은 천왕중심주의로 우리나라를 장악을 하려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반대한 세력이 있다. 일본은 겉으로 볼 때 근대 국가이다. 그런데 내면적으로 볼 때는 천왕중심인 신또이즘을 섬기는 미신국가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물건을 빼앗아간다. 이런 것에 분노했지만 일본이 자기들의 혼을 한국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별 말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세력이 누군 줄 아는가?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일제 말 일본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본 천왕을 섬기도록 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호와외에 어떤 세력에도 머리를 숙일 수 없다.라고 이야기 했다. 역사의 주관자는 일본천왕이 아닌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재림하면 이 일본 천왕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천왕주의를 극복한 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인 것이다. 또 하나는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 세력을 무너뜨린 것도 우리 기독교인들이다. 소련도 마찬가지이다. 소련을 우리 한반도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일본이 자본주의가 되어서 발달하면 한반도를 거점으로 해서 이제 러시아를 침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러.일 전쟁이 아닌가? 그러니까 한반도를 자기들이 차지하지 않고서는 러시아가 위태로운 상태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한반도는 매우 위험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여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한반도를 지배한 것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 공산주의가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위험한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을 통해서 우리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배척한 것이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한다. 국가를 부정한다. 가정을 부정한다. 개인의 인권을 부정한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세상이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1920년도부터 한국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반대한 것이다. 해방 된 다음부터 반대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었을 때 이런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이제 해방된 다음에 좌익들이 인민위원회를 각 지방마다 만들어가지고 공산주의로 이 사회를 바꾸려고 했을 때,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승만 김구 두 분과 함께 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서 목사님들을 동원해서 공산주의를 극복케 하는 민주공화국을 만들 수 있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여러분들 한반도에 주변에 있는 세 나라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아직도 우리 한반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자기들이 중화 중심, 아시아의 중심세력이 되길 원하고 있다. 일본도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길 기다린다. 소련은 지금 힘이 없기에 그런 생각을 못하지만 힘이 있게 되면 또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여러분들, 지금 우리의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과 소련의 위험아래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중국은 중화주의로, 일본은 천왕주의로, 소련은 공산주의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가 미국과 손을 잡고 미국에서 온 기독교와 손을 잡고 여기에서 극복해 나갔다. 역사의 주인은 천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천왕은 하나님 아니라 인간에 불과한 것이고 공산주의는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련에 속지 말라고 하는 말을 우리 어른들은 하고 있지 않는가? 저희 서울신학대학의 총장님은 아버지가 북한에서 내려오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한 가지 유언이 있는데 소련에게 속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속기가 쉽다.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중국은 자기들이 중심이라고 여긴다. 중국은 지금 공산주의 플러스 중화사상, 옛날 유교적인 중화사상이 두 개가 믹스가 되어서 한반도를 자기 세력 안에 넣으려고 한다. 지금 이것이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를 선택하셔서 세계 역사를 이끌고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 신약시대에 오면 로마제국을 택하셨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18세기에는 영국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9세기 20세기에는 미국이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의 중심축이 유럽에서 동북아시아로 바뀌어가고 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바뀌어지고 있다. 여기 중요한 나라가 다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이 있다. 그리고 그 한 복판에 우리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이 대한민국이 과거에는 이리 체이고 저리 체이는 그런 나라였다. 대한민국이 정신만 차리고 그리고 우리 기독교 정신을 제대로 뿌리를 내려고 미국과 손을 잡았다면 이 주변에 있는 세 나라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히려 그 나라를 새롭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저는 이런 점에서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많다. 여러분 1907년 부흥운동 때에 선교사들이 무어라고 했는가? 중국은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 소련은 많은 땅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근대 문명을 가지고 있다. 조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조선은 아무것도 없다. 넓은 땅도, 많은 인구도, 근대문명도 없다. 그런데 조선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다. 언젠가는 이 성령의 역사로 주변에 있는 나라를 복음화 시키고 민주화시키는 것이다. 여러분, 세계 선교의 실패와 성공은 중국이 기독교가 되느냐 안 되느냐에 달려 있다. 중국이 기독교화 되지 못한다면 세계 선교는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한국은 중국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이다. 대한민국을 부흥시켜서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세계 10대 경제대국, 그 다음에 우리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국가, 지금 현재 종교계의 상황을 보면 이제 기독교 국가라고 말해도 된다. 왜냐하면 불교 인구가 얼마 안 된다. 또 그다음에 천주교, 유교 인구가 얼마 안 된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합치면 30퍼센트이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은 믿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가 그 나라의 종교를 결정할 때 무엇을 보고 결정하는가를 발표했다. 그 나라에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그 나라의 종교이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고려의 종교였다. 조선시대는 유교가, 지금은 전체 인구의 30프로가 기독교인이다. 이 기독교가 대한민국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아직도 대한민국을 유교 문화권 불교 문화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자체가 서구문화에서 만들어진 기독교 문화로 만들어진 나라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해를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복음화를 해야 한다. 중국, 일본, 소련을 복음화해야 한다. 일본의 문화가 겉으로는 훌륭하지만 속으로는 미신으로 가득하다. 러시아 정교회가 있다. 그 종교는 생명력이 없다. 이 사랑의교회가 부흥의 불길이 생명력이 없는 나라인 러시아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또 하나는 민주주의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사람 형상을 따라서 구원 받았고,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만든 민주국가이다. 이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아니하면 항상 그 사회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편안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무엇인가? 20세기 전반에는 일본 군국주의가 우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어두운 세력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우리의 평화의 위협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중국의 중화주의의 새로 각색된 공산주의 국가이이다. 그것을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어 놓지 않으면 우리는 어렵게 된다. 여러분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중국이 복음화 되길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기업된 나라라면 우리는 두 가지를 꼭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아시아의 복음화와 두 번째는 중국의 민주화이다. 이 두 가지를 하나님께서 맡겨놓은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대한민국을 이처럼 복되고 아름다운 나라로 성장한 나라로 만들어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업으로 만드셨다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성령의 가득 체험을 받아서 살아야 한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가 우리 하나님으로 깊이 모시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 이 자리를 서기 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바로 이 사랑의 교회가 하나님의 기업의 중심이 되는 그런 교회가 되길 기도했다. 여기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오길 바란다. 여기로부터 하나님을 기업을 깨닫고 하나님의 기업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깨닫는 그런 자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역사를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되길 원한다. 오늘 이 새벽 기도회가 그러한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 ♣요약 하나님께서 이리체이고 저리 체이는 우리 나라를 이렇게 강성한 나라로 인도하셨으니, 앞으로 더욱 우리 한국을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무엇을 원하시나를 깨달아서 대한민국의 미션인 아시아의 복음과 중국의 민주화를 이루어가는 나라가 되기를 이 토비새 기도회와 특별 새벽 부흥회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역사의 모든 변혁을 통해서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방책을 바꾸지 않으시며 오히려 매 사건마다 심지어 우리에게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도모를 성취하신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 -한국교회와 사랑의교회가 기도하기 때문에 다음 대선과 남북문제와 한국민족의 앞으로의 세계 선교를 마무리 하는 위상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리라 믿는다. 사람이 바뀌려면 의식이 개혁되어야 하고 의식이 개혁되려면 새로운 흐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확고함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나라 구국 기도회를 통해 오늘 박명수 목사님을 초빙했다. 한국교회의 보물이시니 집중하여 듣고 이 민족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데에 모두가 다 말씀을 통해 거룩한 남녀 종 들이 되어야 한다.
설교자: 주성진 부목사님 ------------------------------ *마가복음 5:25-43, 25 열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 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 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소리를 듣고 왔는가? 세상에는 눈으로 보는 것으로 가득 차 있지만 듣는 것들로도 온갖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살아있다 라고 한다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번 듣고 금방 잊어버리는 소리도 있다. 기계음, 자동차 소음,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들었던 구두 발소리 등을 이런 것들을 간직하면서 살아가진 않는다. 또 내가 정말 원해서 듣고자 하는 것들을 찾아서 듣는 것들도 있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또 가슴까지 쓸어내리는 이런 파도소리 같은 것들은 우리가 의도를 가지고 듣기 위해서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 소리들이다. 또 이런 소리도 있다. 듣고 싶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엄마의 잔소리, 상사의 꾸중, 누군가의 진심어린 충고는 우리가 들어야만 한다. 이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아도 이 고통으로 인한 끙끙 앓은 소리를 쉬지 않고 들어야만 한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그리고 갑작스럽게 죽음의 공포가 엄습(掩襲)해 오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하는 이 두려움의 소리가 마치 시계 초침처럼 계속 들여온다고 한다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자리에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분들도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다 보면 고통의 소리, 또 죽음 앞에서 공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믿음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체성인 거룩한 정체성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죄 많은 세상에 살아가다보면 내가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듣게 되고 또 들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죽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지금이라도 당장이라도 죽음의 소리가 멈춰버렸으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도 한다. 또 때로는 작정하면서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멈춰버릴 기세는 보이지 않고 점점 커질 뿐이고 멈추질 않는다. 여러분 만약에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살아가면서 들을 수밖에 없는 이 고통의 소리, 죽음의 공포 앞에서 듣는 이 두려움의 소리 앞에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하겠는가? 실제로 많은 주의 백성들이 살아가면서 세상에서 찢기고, 상처받고, 또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두려워 떨며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정답은 있다. 말씀 안에 있다. 정답이 있다는 알지만 들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듣고 싶지 않아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고통으로 절규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으로 떨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지금도 생명의 소리, 구원의 기쁨의 소리를 들려주시는 줄 믿는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 이 구원의 기쁨의 소식을 고통과 사망에서 이겨낼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린다. 오늘 본문은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야기가 굉장히 유명한 이야기이다. 설교로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오늘 간단하게 설교하겠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가지 장면이 나온다. 하나는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는 이 고통의 소리를 들으면 오로지 온 몸으로 아픔을 견뎌야만 했던 열 두 해 동안 혈루 증을 앓아온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사랑스런 딸을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상황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한 아버지도 등장한다. 여인을 살아있다. 그녀의 삶은 죽은 삶과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는 딸의 죽음을 직감하며 그야말로 사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거라사 지방 반대편으로 가시고 그 바닷가에 도착하셨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주변에 둘려 싸여 있었다. 그때 회당 장중에 하나인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간곡히 청한다.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여러분 예수님이 공생애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주변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온갖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께 몰려와서 그의 옷에 손만 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몰려들었다. *마가복음 3:10,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 손만 대어도 나을 줄로 믿고 예수님 앞에 수많은 각색 병자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야이로도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예수님을 청하여서 자신의 집에 가서 딸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낫게 해 주기를 간청했다.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집에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죽을병에서 살려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야이로에게 진짜 참된 바른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고백을 했을 것인가? 예수님께서 만유의 창조주시요, 구원자이심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믿었다라고 한다면 집으로 가서 딸아이에게 손을 얹고 죽을병을 고쳐달라고 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에 야이로에게 주님을 아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주님, 지금 말씀하시면 여기서 말씀하셔도 집에 있는 딸이 당장 고침 받을 줄로 믿습니다. 말씀만 해주세요.” 이렇게 청했어도 그의 딸은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야이로는 그러지 않았다. 예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제한 된 지식으로만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는 정도의 소문으로만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의외로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지금 내 말을 믿기만 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의 딸에게 명하노니 죽을병에서 살아날지어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는가?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 그와 함께 그의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 디디신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치유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청대로 그의 집에 가서 그에게 손을 얹고 고쳐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가신 것이다. 왜 이래야만 했는가? 야이로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고쳐주는 것이 그에게는 안심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에 야이로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딸이 죽게 되는 이 절박하고 급박한 상황을 주님이 모르실리 없었을 텐데 왜 이러하시는가? 여기에는 주님의 의도적인 지체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의도적인 지체하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지체하신다. 그래서 또다른 구원의 역사를 펼쳐주시기 위한 주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위해 출발한다. 함께 있던 수많은 무리들도 궁금했는지 예수님을 둘러싸면서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면서 나서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에 12년 동안 혈루 증을 앓던 많은 의사에게 치료비를 허비하였지만 나아지기는커녕 더 위중한 상태로 악화되었던 한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온몸은 통증이 위중해가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그 무리들을 따라가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간다. 이 무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뒤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살며시 만진다. 그녀에게도 예수님의 소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소문인가?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줄 그가 생각했다고 오늘 말씀이 기록하고 있다. 나을 줄로 믿는 그 믿음이 그 조그만 한 믿음이 열 두해를 혈루 증을 앓는 그 여인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자신의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직감한다. 또 그 순간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능력이 빠져나갔다는 것을 아시게 된다. 그리고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한다. “무리가 너무 많은데 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되묻는다. 여러분, 예수님이 몰라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냐고 물으셨을 것 같은가? 아니다. 예수님의 의도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여인이 누구인지도 아셨을 것이다. 몇 년 동안 고통을 당한지도 아셨을 것이다. 그녀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 앞에 나와서 내 병을 고쳐주십시오 라고 머리를 내밀지 못했던 것도 그 모습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물으시는 것이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몰라서 물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열 두해 혈루 증을 앓고 있던 그녀가 이 주님의 대한 부족한 지식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녀에게 또 다른 구원의 역사를 펼쳐주시기 위한 주님의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여러분, 그녀가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었던 지식에 대해서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녀를 오랫동안 얽어매었던, 그리고 오랫동안 삶의 중심이 되었던 율법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이다. 12년을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는 이 여인은 모든 것을 다 잃었다. 가족조차 그녀를 버렸고 유대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배척을 당했다.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무려 12년 동안 홀로 감내하기 위해서 살아야만 했다. 어쩌면 아무런 소망 없이 죽지 못해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던 이 여인에게 어떤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수많은 각색 병자들이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낫는다고 들었다. 정말 어두운 긴 터널의 끝에 보이는 한줄기 소망 같은 소식이 그녀에게 들린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가?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율법에 의하면 이 혈루 증은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지기의 가족들, 그리고 자기가 손을 대었던 물건이나 사물들도 똑같이 부정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야말로 홀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었고 그 무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에게 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예수님의 뒤에 가서 살며시 그의 옷만 만지고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찾으신다. 그녀가 어떠한 상황인지 또 그녀에게 어떤 은혜를 펼쳐주실 것인지를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아셨지만 그녀를 찾으신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주인이시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을 온전케 하시는 것은 주님이심을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주변에 있던 수많은 유대인들에게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돌려보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자기에서 있었던 일들을 고백하게 만든다. 왜 그런가? 유대인들에게 어쩌면 그들의 법이 될 수 있었지만 어쩌면 그들에게 거짓된 잘못된 의로움을 갖게 만드는 그 율법의 구원론의 있어서의 또 그것이 불완전성이며 예수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관자 되시고 참된 구원자이심을 병 나음 받았던 그녀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이 열두 해를 혈루 증으로 고생하였던 여인의 태도로 믿음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내가 주님에 대해서 지극히 제한적으로 아는 것, 그것 하나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잘못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 라고 오늘 이 여인을 통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신다. 또한 우리 자신의 처지와 상황 때문에 또 우리의 과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오늘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혹시라도 그동안의 믿음생활이, 신앙의 지표가 되어서 그 경험 때문에 나 스스로가 주님의 역사를 제한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주님에 대한 지식은 측량할 수 없이 크고 광대한 것이다. 아주 크고 놀랍다. 그렇다고 주님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는 것만 알겠다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자녀라고 한다면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주님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더 알기를 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알되 힘써 아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줄 믿는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계획도 다른 어떤 세상의 목표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아는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기를 우리는 소망한다. 그러기에도 모자란 시간이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면서 주님을 온전히 바르게 알아가는 일을 가장 우선순위에 둘 수 있는 우리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린다. 혈루 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간증을 듣고 있는 와중에 마음의 한 구석에 타들어가는 한 남자가 있었다. 야이로이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만으로도 이 고침 받은 사실을 목격한 이 야이로는 어쩌면 예수님이 나의 딸도 고쳐주실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을 더욱 더 강하게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지체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지금 빨리 가야하는데, 그 여인 고쳐주고 축복해주고 보내면 되었을 텐데 왜 그 여인을 도로 그 많은 무리 중에 찾으셨으며 또 그 무리 중에서 나타난 그 여인에게 자신이 있었던 사실을 왜 듣게 만드시는가? 죽어가는 딸을 갖고 있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절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여인에 대한 원망도 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만 하시면 좋겠고 그 정도면 되었으니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이제 주님 모시고 우리 집으로 가겠다.’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듣고 싶지 않은 절망의 소식이 야이로에게 들린다.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온다. 당신의 딸이 죽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소식을 전한다. 왜 야이로의 집에 가게 하는 것이 선생님을 괴롭게 하는 것인가? 어쩌면 그 바닷가에서 야이로의 집과는 굉장히 먼 거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선생님을 모셔다가 자기 집으로 야이로의 집으로 모시고 가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마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 그 죽어있는 딸 앞에 예수님을 모시고 갔는데 병 고침이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혹시 그런 능력이 없어서 당황하면 어쩌실까? 그러면 예수님을 괴롭게 하면 어쩔까? 이런 생각, 이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야이로 집사람들은 절망의 소식을 들어가면서 전해가면서 선생님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 말씀 본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경말씀 원문에는 예수님께서는 딸의 말을 전하는 야이로의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신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기 들어도 그 야이로의 사람들의 죽음의 소식을 무시하셨다는 것이다. 이 파라고 하는 이 번역의 단어는 불순종, 거부하다, 라는 의미이다. NIV성경에도 무시하다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딸이 죽었다라고 하는 야이로의 집 사람들을 대놓고 무시하셨다는 것이다.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절망 가운데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발걸음으로 야이로의 집으로 향한다. 많은 무리가 야이로의 집에 모여서 떠들고 곡소리를 낸다. 애도하는 소리로 왁자기껄하다. 초상집의 전형적인 모습이 그대로 전해졌다. 죽음에 드리운 그림자가 야이로의 온 집안 가운데 가득하다. 여러분 그 때 야이로가 믿음이 약해졌다고 한다면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선생님 제 딸아이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먼길 오시는 수고를 마시고 그냥 저와 저의 가족들을 위해서 위로의 기도를 해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야이로는 그러지 않았다. 야이로는 믿음이 생겼다. 예수님이 병 고침을 하실 수 있는 능력 있는 소문을 들어서 자신의 딸의 죽을병을 고쳐 주십사 부탁하고자 찾아왔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신의 딸까지도 다시 도로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 구원자이심을 그가 믿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 곡하는 소리를 듣고 떠들지 말, 조용히 해, 이 아이는 죽은 게 아니야, 잔다라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예수님의 그 말에 비웃는다.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을 철저하게 분리하신다.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또 야이로의 딸 엄마 야이로 이 다섯 사람만 데리고 들어가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쿰”하고 말한다. 번역하면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마치 잠자고 있던 아이가 잠자고 일어나는 것처럼 깨어난다. 놀라운 기적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 야이로의 딸을 원래부터 창조하시고 만드셨던 하나님께서 죽은 줄로 알았던 소녀에게 달리다쿰 하고 말씀하시니 죽었던 그 소녀가 일어난 줄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놀랐다. 도대체 이게 어떤 일인가? 여기 말씀에도 놀라고 놀라더라 라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 그 야이로의 집에 나타났다. 여러분, 죽었다가 살아난 야이로의 딸만이 아니라 야이로와 또 그 사실을 현장에서 멀리서나마 목격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야말로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지 않았겠는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일이 그 가정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 두 눈으로 보고 믿는 것과 보기 전에 듣고 믿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존귀한 믿음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보고 믿는 거보다, 듣고 믿는 것이 더 귀한 믿음이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서 선물 받은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는 주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믿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을 구한다. 하나님은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다.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응답하실 줄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소리, 구원의 기쁨의 소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을 들어야 될줄로 믿는다. 성경은 어떤 책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신 책이다. 그 말씀에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가 나타나고 듣지 않는 자가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항상 말씀하신다. 말씀을 멈춰보신 일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할 때 빼고는 하나님은 항상 말씀하셨고 지금도 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줄로 믿는다. 여러분,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그럴싸하다. 그 말을 듣고 살지 않으면 뒤처지고 손해 보는 것 같다. 바보처럼 사는 것 같다. 말씀대로 지켜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조롱할 것만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참된 믿음이 생길 뿐아니라 그 믿음을 바라고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신 줄 믿어야 한다. 우리의 그 제한된 이해, 우리의 부족한 지식을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해서는 안 될 줄로 믿는다. 주님의 무한한 역사를 자신의 범위 안에 가두어 드리면 안 된다. 구하는 믿음에서 듣는 믿음의 소리를 듣기를 소망한다. ♣요약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부족한 지식으로 주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고 주님을 힘써 알고 더 잘 알아서 모든 일에 주님의 통치하심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한다. 세상이 들려주는 유혹에 귀를 닫고 말씀의 귀를 열어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 영원하신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여야 한다. 그래서 들으면 생명이 살아나 어디서든 주님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여인의 믿음은 주님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 자 이심을 믿는 믿음이었고, 많은 무리를 뚫고 주님께 나아온 적극적인 믿음이었으며, 옷자락이라도 붙드는 간절한 믿음이었다. 또한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었고, 모든 것을 고백하는 담대한 믿음이었다. ‘달리다굼’의 의미 이 말은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뜻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최초의 기적이다. 성도들은 믿음을 통하여 핍박과 환란 중에 도우시는 주님을 경험함으로써 위로를 받고, 부활의 소망으로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나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육체의 죽음 후에는 부활이 있고,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신적 권능의 소유자이시며,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부활을 암시하셨다.
(히브리서 11:8~12, 17~19)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
▶▶한 2주 전에 어느 미국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불확실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다섯 가지의 말씀을 하셨다. 첫 번째는 팬데믹이다. 코로나 팬데믹이다. 벌써 2년째 계속되는 그러한 상황 속, 위드 코로나라고 하지만 언제 이것이 끝마칠지 확실치 않은 그러한 상황에 살고 있고, 팬데믹이라는 말의 의미처럼 이러한 전염병은 이러한 한 지역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온 세계에 걸치는 그러한 불확실한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가 너무나도 불안하다. 미국 같은 경우는 예를 이렇게 들었다. 흑백간의 인종, 문제뿐만이 아니고 그것이 더 나아가서 요즘은 여러분과 저와 같은 아시안 인들도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서 있기가 참 힘들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너무나도 불안하다.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불안전하다. 2021년 초에 여러분 뉴스 들어보아서 알겠지만 미국에 의사당이 침범을 당하지 않았는가? 정치적, 한국 이야기만이 아닌 것 같다. 또 경제적인 불균형도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 빈부간의 차이, 일론머스크 같은 세계 최대의 부자는 올해 들어와서만 천억 달러 이상의 재산이 불었다고 한다. 한국 돈으로 무려 120조억원의 수입이 있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한 끼의 식량이 없어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 확실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도덕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확실한 것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뭐 미국 이야기만이 아닌 것 같다. 주중에도 주일에도 많은 성도님들이 나와서 피켓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맞느냐? 같은 성이 결혼하는 것이 맞느냐?’ 이제 잘못하다가는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를 들이게 되었다. 이것을 이 땅에서 합법화 하려고 하는 이러한 진리의 불확실한 상황에 처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가장 불확실한 그러한 상황 같이 생각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상황이 생소한 상황이 아니다. 예전에도 이 땅에 발을 두고 있는 우리는 이와 같은 불확실한 그러한 면이 많이 있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믿음의 이 아버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불확실한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헌신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이었다.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상황에 아브라함이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는 믿음을 지켰고 헌신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네 가지로 아브라함의 그 헌신의 모습을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살펴보길 원한다. 아브라함의 생을 우리가 보면 최소한 4가지의 그러한 불확실한 그러한 상황, 4개의 질문이 항상 아브라함을 따라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했던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항상 ‘어디에,’ 라는 질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 ‘어디에’와 연관된 그런 질문이다. *히브리서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그의 고향 땅을 떠나는데, 떠날 때에도 두 가지 최소한의 어려움이 있었다. 1) 나이가 너무나도 많았다. 새로운 땅에 이주해 가기는 너무 많았다. 일흔 다섯 살이었으니까,,, 2) 그리고 그가 가진 것이 너무도 많았다. 홀몸이면 그가 떠나기가 수월했을 터인데 가진 것이 너무나 많으니까 떠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이 두 가지 어려운 점도 굉장히 힘든 점이었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떠나긴 떠나는데 어디로 가야될지 알지 못하고 떠나야 되는 상황이 더 어려웠다. 아마 아브라함이 떠나면서 이러한 질문을 했을지 모른다. 내가 떠나긴 떠나는데 ‘어디로 가야하는 것입니까?’ ‘또 만약에 내가 떠난다고 해도 내가 그 땅에 도달했는지, 하나님께서 명하는 그 땅에 도달했는지 안했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아마 그러한 질문이 수없이 아브라함이 마음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답을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았는지 여러분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중에 알려주겠다.’ 나중에 알게 돼, 그저 떠나라면 떠나~’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헌신을 할 수 있었는가?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헌신했을 때에 우리에게 분명한 것이 주어져서 헌신하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분명한 GPS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정확히 보고 따라갈 수 있는 그 네비게이션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오늘 헌신하는 토비새로 우리가 모인다. 헌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가졌던 이 헌신의 모습을 보면서 헌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헌신이라는 것은 ‘어디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헌신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디에’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고 헌신하며 따라갔다. 두 번째 질문은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어디에’라는 질문뿐만이 아니라 ‘언제’라는 질문과 연관된 그러한 질문이다. *히브리서 11:9-10,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 부르심을 받는다. 부르심을 받자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다. 이 땅, 약속의 땅을 너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히브리서를 보니까 약속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도 이 삼 대에 걸쳐서 주어지지 않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삼 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이 주어지지 아니하고 아직까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장막에 살고 있었다. 임시거처인 그 텐트에 살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불확실 치고는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그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상황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헌신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헌신했다는 정의를, 또한 다른 정의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헌신이라는 것은 ‘언제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헌신이다. 다시 헌신이라는 것 언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헌신이다. 아브라함은 삼 대에 넘게 하나님이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여러분,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시간은 가장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찾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시간이다. 성경을 보라. 가장 불확실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를 찾아온다. 또 이 교회 역사적으로 볼 때도 부흥 운동을 보면 여러 가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도 가장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잘 알려진 웨일즈 부흥운동, 1904년에 일어났다. 여러분, 웨일즈에서 그러한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가보시면 알겠지만, 그 어두운 탄광 속에서 전기도 아니고 등잔 하나로 다니면서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탄광 속에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한 순간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그곳에 웨일즈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 영향을 받아서 1907년 여러분께서 잘 알듯이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났다. 국가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일본이 모든 분야에서 이 대한민국에서 지배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그러한 가장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종종 언제라는 질문에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언제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할 것인가? 아니 회복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언제 이 땅의 한국 교회의 부흥을 가져다 줄 것인가? 불확실하다. 상황을 보면 여러 가지 상황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헌신이라는 것은 언제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우리가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에게 부흥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헌신이다. 내일 종교개혁주일이다. 1517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504년이 되는 것이다. 그 주일이 바로 내일이다. 종교개혁도 보면 그 카톨릭교회의 그 부패로 인해서 재정이 파산 직전까지 간다. 그것을 메꾸기 위해서 우리는 알지 않는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데 그들은 면죄부를 팔았다. 얼마에 돈을 내면 죄를 사하여 주겠다고,,, 이러한 어두운 상황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헌신의 모습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어디에 라는 질문으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는 것이 헌신이고, 언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헌신이다. 자,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생을 보니까 헌신에는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세 번째 질문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어떻게’와 연관된 질문이다. *히브리서 11:11,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아브라함도 사라도 그렇고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을 때는 열방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렇게 때문에 사라는 열방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이다. 미션임파서블이다.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헌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헌신의 다른 정의가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헌신이라는 것은 어떻게 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 헌신이다. 아이를 도저히 가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킬 것을 믿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 것이 오늘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헌신의 모습이다. 제가 이 성경을 통해서 가장 중요하는 말 중에 하나, 하나님을 표현할 때,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시다.’ 라는 가장 아름다운 말 중에 하나가 우리는 종종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미쁘신’ 이라는 표현이다. 미쁘신, ‘당신은 너무나도 미쁘신’을 사용해 보는가? 어떤 면에서는 예쁘다는 말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미쁘시다가 더 좋은 말이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 faithful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이다. 조석 간에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칭 3일에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 삶 가운데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11전에 복음의 서진 사역을 우리 교회에서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그러한 이 약속이 있다. 비록 우리가 불가능하게 느껴지겠지만 유럽 땅에 천 개의 교회를 이루라는 약속을 우리들에게 주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어떤 면에서는 존 과장스런 표현이었지만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없었던 것보다도 더 불가능한 그러한 목표로 우리에게 그러한 약속을 주셨다. 저는 제가 종종 유럽에 가서 설교할 때마다, 우리 식구들에게 이러한 설교를 한다. 그들을 격려하면서 이러한 사역에 비전을 설명하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전하고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얼굴을 보세요. 제가 여러분의 말, 문화, 모습이 다름에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비전을 주셔서 이러한 일을 한다.’라고 말한다. 아무튼 자격이 없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저희가 헌신했는데 기적적으로 140개 교회를 개척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 코로나 펜데믹 때문에 2년 간 가서 사역을 하지 못했다. 한두 달 전에 처음으로 웨일즈 지역에 가서 사역을 했는데 가는 내내 하나님께서 거룩한 부담을 주신다. 벌써 그 땅을 위해서 기도한지가 10년이 넘었다. 물론 유럽 전역에 140개의 개척을 하는 이 축복을 주셨지만 우리의 사역을 시작한 곳이 웨일즈인데 저는 11년간 이런 기도를 했다. 특별히 웨일즈를 사용하여 주시고 웨일즈 지역에 탄광 지역으로 알려진 웰리라는 곳이 있다. 가면 골짜기라른 지역이다. 영국이지만 웨일즈의 언어를 사용한다. 아주 낙후된 곳이며 가장 낙후 중에 낙후된 곳이다. 교회도 거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출장 내내 기도했다. 이 땅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제가 주위에 있는 그곳에 목사님들을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저는 그러한 부탁을 했더니 한 두 명의 목사님만 나와서 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분 웨일즈어를 사용하는 곳에서 사역하고 싶은 그 사역자들이 모임 장소에 나왔는데 20-30대 초반까지의 11명의 사역자가 그곳에 온 것이다. 이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그렇게 큰 넘버처럼 들리지 않지만 그곳에서 열 한 명은 정말로 우리 상황에서는 만 명 이상의 그런 숫자를 말한다. 너무나 힘든 상황이다. 가장 사역하기 힘든 곳에 열 한 명의 사역자는 엘리야 시대 때에 나머지 사람 7천명을 예비해 주셨듯이 그들을 모이게 하여 주셨다. 그러한 사역이 곧 그래서 시작된다. 웨일즈 지역을 그 위해서 함께 모이는 사역모임, 우리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이 있느냐고 하신다.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면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는다. 이것이 헌신이다. 세 가지의 질문을 지적해 보았다. 어디에, 언제, 어떻게,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 헌신이다. 또 한 가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왜와 연관된 질문이다.
네 번째 질문은 왜와 연관된 질문이다. Why, *히브리서 11:17,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75세 때 약속을 받고 무려 한 25년 이상 기다려서 참 기적의 아이를 선물로 받았다. 이삭을 받았다. 말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게 하루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아들을, 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설명 될 수 없고 이해될 수 없은 왜 하나님께서 25년 전에는 약속하셨다가 25년 후에는 이 약속을 폐하시고 이 아들을 죽이라고 하는가? 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가? 왜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많다. 지난 2년간 이 팬데믹 때문에 직장을 잃은 사람도 주위에 많다. 소상인들도 많이 있다. 여러분이 잘못인가? 아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한 질문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 또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교회에 오랫동안 나와서 예배드리지 못한 초유의 상황이 지난 2년 동인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젊은이들 결혼식도 못하고, 저 같은 경우도 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캐나다의 요양원에 어머님이 계시는데 2년 간 102세이신 어머님을 못 뵈었다. 이해되는가? 그러니까 사회적로 신앙생활 가족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이해되지 못한 그러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뭐라고 말하는가? *히브리서 11:19,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무슨 말인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왜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헌신이라는 것은 왜에 대한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분명히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 헌신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다음 주부터 위드 코로나라는 참 반가운 소식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교회적으로 회복을 넘어서 부흥하게 해주시길 기도하고 있다. 신상의 거룩한 새판 짜기를 하여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다. 새판 짜기란 무엇인가? 우리가 오래전부터 이 기도를 하고 있지 않는가? 거룩한 새 판자기는 예전 것은 싹 걷어내게 하시고 성령의 불로 연단시켜서 새로운 지경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새판 짜기이다. 우리 이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 질문이 우리에게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어디에, 언제,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을 지켰고, 아브라함은 헌신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이 시간에 도전하는 그러한 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참 감사한 것이 특별새벽부흥회가 있다. 한 주간에 있다. 하나님이 시간이다. 원래는 2주 전에 하기로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2주 연장시켜서 11월 8일부터 시작된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새벽부흥기도회를 통해서 그 은혜가 무엇인지 정말로 가슴 떨리고 기대가 된다. 이 특새를 우리가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여 우리의 삶 속에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디에, 언제, 어떻게, 왜 라는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신뢰하면서 나아가서 정말로 이번 특새에 빠지지 말고 다 모여서 기도해야 한다. 핑계 댈 것이 없다. 이번 기회에 거룩한 새판짜기가 되고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회복을 넘어서 부흥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고 시간시간 기대하여 모든 것을 가지고 헌신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는다. 우리 교회 가정 사회 온 세계에 하나님이 축복하시길 소원한다.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다. 우리 상황 속에서 ♣요약 아브라함도 질문이 많았듯이 우리도 어디에 대한 질문에 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가고, 언제하나님께서 찾아오실지 몰라도 하나님의 시간을 신실하게 기다리고, 어떻게라는 질문에도 우리는 종종 좌절하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줄 행하심을 믿고, 왜에 대한 질문을 미쁘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실 줄 믿어야 한다. 우리 가족이 헌신하고 이번 특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새 판짜기가 경험되어 주님께 헌신하는 특새가 되기를 결단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불확실 속에서 헌신하여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기를 소원하며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헌신하고 예배하면 우리가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거룩한 삶이 되어 회복을 넘어 부흥하는 교회와 가정에 영혼의 열매를 추수하는 가을 특새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불확실 속에서도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주님 앞에 때를 구하며 상황을 질문할 때, 하나님은 보여주시고 담대하게 만들어 주신다. 우리는 말씀으로 찬양으로 헌신하며 주님을 동행하여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모든 사역 가운데 우리는 헌신해야 한다. 특별새벽예배를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철저히 무장되어 한 영혼을 위해 전심으로 함께 기도하여 모든 부서가 함께 선을 이루어야 한다. 담임 목사님을 귀하게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며 주일의 말씀 가운데 주님과 평생 함께하길 소원한다.
-그는 하나님께 친구라 불리웠고 믿음의 조상이며 모든 히브리인이 자랑으로 여기는 인물이었다. 사도는 다른 어떤 조상들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위대한 업적을 상술하였다.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는 중에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이다. 첫째, 그를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었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순종함으로써 그는 자기 아비의 집의 우상 숭배로부터 거듭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리 극악한 죄인에게도 완전히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이전에 우리에게 오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로 죄 뿐만 아니라 악한 친구들로부터도 떠나도록 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께서는 그가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하신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유업으로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후사로 부르신다. 비록 그들은 이 유업을 즉시 소유하지 못했지만, 그 약속은 확실하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곳으로 어디든지 이끄시기만을 바랐다. 순종케 하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따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자기의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자기를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저는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였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행위였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나그네처럼 살았다. 또한 그는 자기와 같은 약속의 후사인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 이 약속은 신자와 그의 자녀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모와 자녀들이 하늘의 유업의 상속인으로서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해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늘나라의 도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성을 바랬다. 그는 이곳을 기다렸고 또한 적당한 시기가 오면 그 곳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이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온갖 고초속에서도 그를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사라의 믿음이다. 그녀는 잠시동안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웃었던 불신의 마음이 있었다. 그녀가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약속은 사실 매우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다. 그녀의 불신앙은 사죄와 용서를 받았다. 그녀의 믿음은 장성해졌고 성경에 기록되게 되었다. '그녀는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버린 태에 자식을 생산할 힘을 주시듯이, 죽어버린 영혼을 살려 열매 맺게 하실 수 있다. 사라는 약속의 아이를 얻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아이를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얻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재언급(17-19) 사도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서 그 누구에게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대의 시험과 이에 따르는 믿음의 행위의 본보기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 이 시련은 그 어느 것보다 큰 것이었다. 그는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 사라에게서 난 네 외동 아들 이삭을 바쳐라 곧 네게 웃음을 주며 네 기쁨과 즐거움인 네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거기다 두고 올 뿐만 아니라 번제로 바쳐라"고 명하셨다. 여기서 이 시험이 대단히 큰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몇가지 사실이 덧붙여진다. 그 첫째는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은 후에 이 시험을 받았다는 것이다. 자기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그에게 있어서 자기 자손을 끊고 하나님의 약속을 취소한다는 선언으로 보였다. 이삭은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난 외동아들이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유일한 자손이었다. 그는 이 아들에게 온갖 사랑을 쏟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기대를 걸고 있었다. 따라서 만일 그가 죽으면 자기도 죽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아들을 희생 제물로, 그것도 자기의 손으로 드려야 했다. 이 시험이야말로 아무리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시험이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죽이기 직전까지 나갔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저지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아들을 죽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