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11월 17일)
제목: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말씀: 사도행전 8:1-8
찬양인도: 이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김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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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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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한다. 아파트 엘리베이트 안에 한 남자가 음식을 쓰레기봉지를 들고 탄다. 마침 아침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 엘리베이터 안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탄 이 남자를 보면서 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한다. 아침 시간에 사람도 많은데 왜 저 냄새나는 음식식물 쓰레기봉투를 지금 들고 타는거야! 라는 생각을 한다. 그 옆에 있던 한 여자 분은 이런 생각을 한다. ‘저 남자 부인은 좋겠다. 남편이 음식물 쓰레기도 버려주고 우리 남편은 집에서 아무것도 안하는데’ 이 여자 분과 살고 계시는 남자 분들은 회개하시기 바란다. 그 옆에 계신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은 이란 생각을 한다. ‘아이구, 뉘 집 자식인지 돈 버는 일도 힘들 텐데 쓰레기까지 버리네, 우리 아들도 저러고 사는 것은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여기 그제 어르신이 계시면 그것을 알아주시길 바라고 있다. 여러분의 아들도 그러고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식욕이 왕성한 한 청년은 그 장면을 보고 생각한다. ‘저 집은 어제 치킨을 먹었나보다. 나도 빨리 퇴근해서 저녁에 치킨 먹어야지’라고 생각한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베에 탄 사람은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저는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면서 많은 사람의 생각은 각기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가운데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일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 자세, 삶의 태도는 모두가 다르다.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 8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도행전 8:1,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 등장하는 사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바울이 다. 그리고 그가 죽임을 당함을 에서 그는 사도행전 7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전한다. 산헤드린의 당회의 결정으로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 집사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한 이후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예루살렘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마다 한 번에 3천명씩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모였던 사람들은 고향과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서 양육을 받게 된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쓸 것과 먹을 것을 나누며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놀라운 교제가 일어난다. 당사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교인들은 교회에 오기만 하면 너무나 행복하다.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를 온통 뜨겁게 채우고 있다. 반면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인들은 이런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사도들을 잡아들인다. 그러면서 복음을 막아보려고 그 복음의 길을 막아보려고 애쓰지만 도리어 사도들을 잡아들이면 천사들이 와서 옥문을 열어주고 사도들을 지키는 간수(看守)까지 회심하는 바람에 이 산헤드린 공회와 유대인들은 참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신흥 이단 종교인 예루살렘교회를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무너뜨려야 했다. 또 다른 교회를 엿보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존경받던 집사 스데반을 잡아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그의 죄목은 신성모독이었고, 스데반은 처형된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로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돌무더기에 묻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런 끔찍한 장면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이 장면을 아주 가까이서 목격한 한 사람이 바로 사울이다. 당시 사울은 유대교의 열심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울에게 신성모독이란 스데반의 돌에 맞아 죽음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사울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오늘 본문 2절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데반의 죽음에 교회의 장례를 치르며 크게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성경에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대인들 중에 이 스데반의 메시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그 이상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예루살렘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은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스데반이 전한 이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는 복음에 크게 감명 받았고 어느 정도 동의하였기 때문에 스데반의 죽음에 크게 울 수가 있었다. 우리가 보면 이들이 스데반을 장사하며 크게 울었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럴 수도 있다 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끔씩 우리가 장례식을 가보면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아닌데도 유족들의 슬픔을 보면서도 엉엉 우시며 마음이 약한 분들이 있다. 때문에 이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를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산헤드린 공회가 내린 판결에 외해 사형에 집행된 사람을 위해서 우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운다는 행위자체가 산헤드린 공회가 내린 결정에 반발하는 행위, 이것에 불복하는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울음 자체가 권력자들이 행한 재판과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공식적인 판결이 되었기 때문에 이 산헤드린 공회가 내린 재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사람을 위하여 우는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스데반의 우는 죽음에 크게 울었다.
 
여러분은 언제 우는가? 사람들이 언제 울까 궁금해서 저는 몇 분의 목사님들께 물어보았다. 최근에 언제 울었냐고... 그러자 한 목사님의 대답이 제 마음을 울렸다. 그 목사님께서 얼마 전 순장님 심방을 하는데 그 심방을 맡으면서 그 순장님과 기도제목을 나누면서 자신의 순 원의 기도제복을 이야기 하면서 형편이 어렵고 그 아픈 순 원의 이야기를 하며 우는 순장님의 눈물을 보면서 본인도 함게 울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눈물이다. 여러분, 타인의 눈물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것,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함이다 타인의 눈물에 함께 반응하며 함께 울어주는 것이 영적 성숙이며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들이 누구인가? 아파하는 자들일 것이다. 우는 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분들이 있다. 누구인가?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서 그것이 멸망인지도 모르고 영원한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길인 줄도 모르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을 향하여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생들, 그것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인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 우리가 그들을 보며 함께 울기를 소원한다. 오늘 본문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스데반의 죽음에 2절에 경건한 사람들, 이상으로 아파하고 통곡했던 분들이 분명 있다. 바로 예수살렘 교회의 성도들이다. 그러나 온 교회가 존경하며 따르던 스데반의 죽음에서 슬퍼하고 통곡할 틈도 없이 자신들의 고난과 마주해야 했다. 실제로 보면 '그날에 예루살렘의 교회에 있는 큰 박해가 있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올 고난, 박해, 고통에 대비할 틈이 없었다.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가 처형되던 그날 신문하고 감옥에 가둬두던 그때와는 확연이 달랐다. 이전에는 서로 기도하고 격려하며 서로 뭉쳐서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가 죽던 그날 시작된 박해는 달랐다. 그 박해는 치밀하게 계획되고 조직적으로 행해졌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앞장서서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우리 이제 3절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다.
 
*사도행전 8:3,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였다. 라고 한다. 원어 상으로 잔멸하다. 라는 뜻은 멧돼지 데가 밭에 들어가서 그 밭을 진 이겨 놓는다는 것이다. 여러분 상상해 보라. 내가 정성껏 텃밭을 가꾸어 놓았는데 멧돼지 떼가 와서 그 밭은 짓이겨 놓았다. 그 밭의 꼴이 어떠하겠는가? 또 이 잔멸이라는 단어는 이러한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사자가 자기의 먹이 감을 잘근잘근 씹어서 짓이겨 놓는다.' 이렇듯 사울을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와 예루살렘 성도들을 향한 박해는 참으로 잔혹하고 처절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 라고 기록한다. 각 집에 들어가, 사울을 필두 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성도들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남녀를 불문하고 사라들을 끌어낸다. 끌려나온 사람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린아이인지 노인인지 관계없이 포박되어서 짐승처럼 끌려간다. 끌려가는 도중에도 끔찍한 매질이 가해지고 멈추지 않는 매질과 고문에 의하여 견디다 못해 죽는 사람들도 생기고 오랫동안 감옥에 갇힌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아 죽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이 예루살렘 성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로 인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발적인 이주자 아닌 핍박의 바람, 피바람에 의하여서 그것을 피하여서 자신들이 평생 살며 일구어 왔던 고향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이제 도망자가 되었고 나그네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서 행한 사울과 산헤드린의 그 계획이 너무나도 치밀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의 명단을 이미 확보했다. 그들의 신상을 이미 다 파악하고 그들의 신앙 등급도 이미 나뉘어졌을 것이다. 그들의 주소지도 확보했다. 이렇게 모든 계획을 완벽하게 마친 후에 동이 트면 주저 없이 공격하는 로마의 군사들처럼 스데반이 순교하는 그날 마치 멧돼지가 밭을 짓이겨 놓듯이 사자가 자신의 먹이 감을 갈기갈기 찢어 놓듯이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완전히 뭉개고 찢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 만이 교회가 완전히 박멸되고 부흥을 멈추고 예루살렘 교회를 완전히 끝장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조금이라도 틈만 준다면 다시 똘똘 뭉쳐서 날아날 수 있다. 라고 생각 하에서 이들의 계획은 치밀하고 빠르고 또 강력하게 교회를 탄압했던 것이다.
 
여러분,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이다. 여러분 사단의 정병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영역을 넓혀야만 하고 사단의 권세 아래 영원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들을 한 명이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끌어들여만 한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전투에 징집 되었다는 뜻이다. 전투에서 군인이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어떻게?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는 사단보다 더 치밀해야 된다. 우리는 사단보다 더 빨라야 한다. 우리는 조금 더 적극적 이여야 하고 조금 더 전투적 이여야만 한다. 치밀어 오르는 복음의 감격을 가지고 전장에 나와 싸워야만 한다. 여러분 오늘 성경을 보면 교회를 핍박하는 이들은 이렇게 정교하고 조직적이며 빠른데 우리는 그것보다 더 조직적이고 빨라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군사로소 해야 하는 전투는 바로 전도이다. 우리 눈에 띄는 전도 대상자가 있다면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어오는 태신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위해서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행복한 일, 힘든 일, 필요로 하는 것들을 우리는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작전을 짜야 된다.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작전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주저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주저하지 말고 다른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을 어떻게든 교회에 데리고 와야 한다. 새 생명 전도 축제 기간에 마음에 품은 그 사람을 이곳에 데려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 전투에서 모두가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2천 년 전 예루살렘교회는 예상하지 못한, 대비하지 못한 산헤드린 작전에 자신들의 근거지를 두고 떠나야 했다. 사단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전투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제 무너지고 그리스도인들도 이제 더 이상은 예수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하지 않을 아니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아주 달랐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다.
 
*사도행전 8:4,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예루살렘의 교회를 향한 광기어린 폭력에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이 유대 땅과 사마리아 그리고 모든 땅으로 흩어진다. 그들이 그렇게 흩어진 이후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숨죽여 살았다면 사단의 계략이 승리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흩어진 사람들은 오히려 두루 다니며 무엇을 했다고 하는가?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한다.
 
여러분, 산불이 났을 때 가장 위험한 상황은 바람이 부는 것이다. 불이 아무리 크게 나도 바람만 불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불길을 잡고 끌 수가 있다. 하지만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 불길을 잡기가 매우 어렵다. 가끔씩 산불이 바람이 불어서 나뭇가지에 붙은 불이 불덩이가 돼서 이산으로 저산으로 옮겨져서 삽시간에 많은 산을 태운다는 것을 뉴스에서 종종 우리는 보게 된다. 예루살렘에 대한 핍박과 교회가 당한 고난이 복음의 불길을 끄는 물인 줄 알았는데 사실 그 핍박과 고난은 바람이었다. 예루살렘의 복음의 불길은 고난과 핍박의 바람을 타고 이제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 땅과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을까? 예루살렘에 핍박을 피하여 흩어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집에 없다. 삶의 터전이 없다. 운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먼 친적 집에 얹혀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자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끼니와 잠 잘 것을 걱정하며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며 살아야 했다.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또 쫓아오지는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핍박이 있었기에 당분간은 숨죽여서 그냥 내 신앙 지키면서 조용히 살 법도 한데, 왜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고 위험을 무릎 쓰고 두루 다니며 도망자의 신세가 된 그때에, 나그네 신세가 된 그때에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을까?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주체하지 못하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신세, 그 지경이 되었지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혹 운전 중에 까닭 없이 차가 막힐 때가 있다. 왜 이리 차가 막히는지 우리가 차가 막히면 대게 궁금하다. 앞에 공사를 하는지, 차 사고가 났는지, 찻길이 좁아졌는지, 궁금했는데 이 세 가지 이유가 아니었다. 이유는 그 길 앞쪽에 한 매장 때문이었다. 그 매장은 복권방이었다. 제가 그 길을 지나가던 길이 토요일이었고 여러분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토요일 저녁에는 로또복권 추첨이 있다고 한다. 왜 그렇게 차가 많은지 복권방에 복권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서서 한 차로를 아예 막고 있었다. 이렇게 차가 많아서 보니 로또명당, 로또 1등 당첨 11번이라고 쓰여 있었다. 얼마 전 근처에 살고 있는 목사님께 물었더니 대답에 당첨이 21번이라고 하신다. 로또를 사기 위해서 당첨자가 많이 모인 곳을 찾아온 것이다. 사람들은 왜 그리 로또를 사려고 할까? 로또의 당첨되기만 하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생각하기에 로또 명당을 찾아서 모여들고 있다. 주변 사람들만 그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복권을 사기 위해서 지방에서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그러기에 토요일만 되면 극심한 교통정체가 일어난 것이다. 여러분, 21번의 로또 1등 당첨자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로또를 산다고 한들, 로또 당첨 확률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희박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률에 사람들이 자기 행복을 꿈꾸며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런데 만일 그곳에 가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한 번 이십억을 지급한다. 아니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1억을 준다. 너무 많다. 천만 원도 많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백만 원 준다고 하면 가겠는가? 모두가 월차를 내고서라도 어떠한 일을 미루고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곳에 가서 백만 원을 받아왔다. 백만 원 가지고 맛있는 것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사고 행복을 누렸다. 그 다음은 어떠하겠는가? 그곳이 있다고 내 가까운 사람에게 알려줄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이가 내 가족을 믿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 그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 살의 터전을 옮기고 힘들게 살고 있지만 그들 마음 가운데는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기쁨, 생명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복음의 신비와 능력이 우리 안에 있고 그 덕분에 내가 살았고 내 인생이 달라졌고 내가 지금 행복하다면 우리는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처럼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대표하는 사람이 있다. 5절에 등장하는 빌립 집사님이다. 이 빌립은 초대 교회에 스데반과 더불어 일곱 집사님 중에 한 사람이었다. 빌립 또한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서 사마리아로 갔다. 여러분 사마리아 땅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땅인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한다. 사마리아인들조차 유대인들의 대한 분노와 증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빌립이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서 절대로 환영받지 못하는 곳이다. 유대인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가장 힘든 사마리아 땅으로 빌립 집사는 들어간다. 지금처럼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을 하고 지원을 해서 들어간 곳이 아니다. 핍박을 피해 도망하다시피 들어간 곳이다. 하지만 빌립 집사는 그곳에서 주저하지 않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다. 4절에 보면,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빌립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러분,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어려분 복음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사시고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빌립이 이 그리스도를 전하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유대인들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살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한다. 듣지 않을 것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빌립 집사의 이 복음을 적극적으로 원하신다. 표적을 보여주신다. 기적들이 일어난다. 우리 7절을 함께 읽어보자.
 
*사도행전 8:7,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많은’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처럼 이러한 일들이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빌립이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묶였던 귀신에게서 해방되고 나음을 입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인해 삶의 변화를 경험했을 것이며 새 생명을 얻었다. 에제는 사마리아 땅이 빌립의 전도사역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제2의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 땅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 했던 놀이 중에 놀이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 집에 왜 왔지?’라는 놀이를 기억할 것이다. 두 편으로 나뉘어서 손을 잡고 앞걸음과 뒷걸음을 반복하며 우리 집에 왜 왔니 라는 노래를 부르다가 한 대표가 나와서 가위바위보, 한다. 그리고 이기는 편이 진편의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게임이다. 여러분 기억하는가? 우리 편이 이기면 어떠한가? 이긴 편이 깡충깡충 뛰면서 좋아한다. 결국 상대편의 사람은 꽃 찾으러 왔단다. 라고 대답한다. 기억할 것이다. 그 꽃을 다 찾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한 사람이 이름을 부르고 데려오고 승리를 누리는 이 기쁨의 게임이 이제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기를 바란다.
 
여러분, 마음에 품었던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곳 안아주심의 본당에 데려와서 함께 기쁨 누리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줄 알았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잃어버린 천국의 꽃을 찾아 떠났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을 복음의 꽃밭으로 물들이기 위해 그들은 흩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다해 주체할 수 없는 복음의 기쁨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의 꽃을 하나 둘씩 찾아와 복음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고난과 핍박으로 시작된 그 일은 처음에는 상처와 고통 그 자체였으나 그들은 곧 그것을 복음이 바람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기쁨으로 반응하였다. 여러분, 코로나로 인해서 지난 2년의 시간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아이에서부터 어른까지 인종을 초월하고 국가를 초월하여 온 세계가 고난의 시간을 지나야만 했다. 교회 또한 예배드리는 것이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 주 톡새를 통해서 우리는 온 교회가 함께 바라보면서 극복하면서 이것이 이 2년의 시간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제 전환의 시기를 우리는 복음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지치고 코로나로 인해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복음으로 이곳이 회복될 수 있음을, 복음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음을, 복음으로 인해 살아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11월 21일 시작되는 새 생명 전도 집회 축제에 잃어버린 꽃들로 이곳 본당이 가득차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새로운 복음의 역사, 잃어버린 꽃들로 가득 찰 안아주심의 본당을 기대하면서, 2천 년 전 사마리아 땅에서 있었던 큰 기쁨을 뛰어넘는 더 큰 기쁨이 이곳 가운데 가득할 것을 믿는다.
 
*사도행전 8:8,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랑의교회 행전 11장 1절은 이렇게 기록될 것이다. ‘사랑의교회에 큰 기쁨이 있더라.’ 아멘, 우리 모두가 그 기쁨의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요약
특새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을 경험을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놀라운 크신 역사가 영혼구원의 잔치로 이어져 한 사람의 생명을 얻는 새로운 복음의 역사를 기록하는 교회가 되게 기도하며 2천 년 전 척박한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이루어져 기쁨이 충만해진 것처럼 우리도 그 복음전파를 통해 새 생명을 얻는 기쁨의 삶이 되어야 한다. 태신자를 품고 간절히 기도하여 새 생명을 얻어 성 전체가 큰 기쁨으로 누렸던 것처럼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많은 영혼들이 새 생명을 누리게 되고 그로 인해 온 교회가 더 큰 기쁨을 누리길 기도해야 한다. 성령 충만으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주님께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준비하는 은혜로운 복음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며 우리 교회에 기쁨이 충만한 교회와 가정이 되어야 한다.
 
-남은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 흩어졌으나 성령의 충만을 받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것이다. 한편 사마리아 성에 내려간 빌립은 더러운 귀신을 쫓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등 수많은 이적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빌립의 전도 활동으로 인해 사마리아 온 성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쁨이 넘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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