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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10월 2일)
제목: “믿음의 증인으로”
말씀: 누가복음 24:26-49
기도:
말씀읽기:
찬양인도:
 
설교자: 박삼열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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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26-49,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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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우리 모든 성도님들과 훈련으로 오신 토비새 온라인으로 현장으로 오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누가복음 24장을 함께 읽으니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사모하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은혜가 되길 소원한다. 오늘 말씀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이다. 성경 말씀은 어느 부분이든지 다 중요하지만 오늘 읽은 이 24장 말씀이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점을 고려하고 묵상하면 좋겠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의 결론 부분이다. 결론이라는 1-23장까지 모든 말씀들을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24장이 없다면 앞에서 그 길게 말했던 것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앞에서 말한 모든 것들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좀 과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진솔하게 말하자면 24장의 말씀이 없으면 누가복음의 23장까지의 말씀이 속임이나 일종의 사기이고 범죄로 생각할 수 있다. 결론의 24장 말씀이 굉장히 중요하다. 만약에 23장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로 끝나버렸다면 이 24장 부활이 없으셨다면 그 이전까지 예수님께서 하셨던 가르침이나 행적들은 사실 상 맞지 않고, 이해가 어렵고, 황당한 이야기들 밖에 안 될 것이다. 당장 누가복음 1장부터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누가복음 1:31절에 보면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너무도 잘 아는 익숙한 말씀이다.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에 대한 말씀인데 이 누가복음 24장 이 부활의 관한 말씀이 없다면 이 마리아에게 한 그 천사의 그 수태고지는 황당한 말씀일 뿐이고, 좀 웃기는 이야기 일 것이다. 그 중요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무죄함, 그렇게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 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도 그것도 근거가 없는 소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예수님의 공생에 시작부분인 요단강에서 세례 사건을 잘 알 것이다. 그때 하늘에서 울려 퍼진 음성이 무엇인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 이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말씀도 그저 흘러가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누가복음 24장 말씀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복음 1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이 세례 사건에서 울려 퍼진 이 하늘의 음성도 너무도 소중하고도 맞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정말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생명이 되는 말씀이 될 수밖에 없다. 24장이 없다면 그 이전 1-23장까지 모든 말씀, 예수님의 공생애, 예수님의 가르침, 표적들, 사실상 별 의미도 없고 이해도 잘 안 되는 말씀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이 새벽에 모니터와 이렇게 안아주심 본당에 앉아 있는 우리들도 많이 불쌍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 점을 일찍이 사도바울은 잘 알고 깨달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고린도전서 15:17-,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이 진짜였다면 무엇인가? 믿는 자가 가장 복되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고로 잘하는 것이 된다. 그것 말고는 없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 맞는 말씀이고 참으로 그 말씀을 가까이 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답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누가복음 본문의 말씀처럼 그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이 믿음을 심어 주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는 24장의 말씀은 1장에서 23장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고 또 24장 말씀에 도달한 시점에서 보자면 이전까지의 모든 말씀들이 다 맞고 진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24장에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24장의 누가복음의 결론의 말씀 때문에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귀신을 쫓아 낼 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예수님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귀신을 쫓아낸 것이 맞는 확증이 되는 것이다. 율법의 정결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하여진다고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신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의 가르침도 정말 맞고, 우리가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또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이 떡을 떼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떡을 떼시면서 ‘이 떡은 너를 위한 내 몸이라.’고 하셨다. 또 ‘이 잔을 나누면서 내 피와 새 언약이라고 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떡은 내 살이요, 이 포도주 잔은 내 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이 부활이 없다면 황당한 말씀이고 괴기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맞고 24장 말씀이 맞다면, 예수님의 이 만찬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죽음을 설명하신 말씀이다.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사사건건 예수님과 대결하고 논쟁하고 갈등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잘못이고 예수님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결국에는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것이 아니라 잘못이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것을 그때는 몰랐고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예수님을 공격하고 대결하고 했던 그들이 옳은 것이 아니라 힘없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박해받고 죽으신 이 예수님, 이것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로 우리는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확신 가운데 거하면서 그렇게 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정 반대가 되었다. 예수님을 위해서 이 이 복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맞다고, 바울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은 참으로 맞으신 분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절대적인 진리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마무리하는 누가복음 24장은 무엇보다도 제자들에게 이 믿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애쓰는 예수님의 기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본문이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인 율법이 아닌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되는 것임을 다 믿는 줄로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믿음이 아니면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 일이 해결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믿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실제적으로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생활이다, 믿음생활이다. 라고 하지 않는가? 모든 예배나, 훈련이나, 양육이나, 봉사나, 섬김이나 어떤 것들이든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음 생활 한다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 얼마나 신앙적이고 중요하다. 이 믿음이 얼마나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인가를...
믿음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나면, 구원의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생활 전체에 대해서 대부분의 대해서 참 설명하기 어렵다. 참으로 황당할 것이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하다. 여기서 이 중요한 것 하나는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성경적인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대로만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적 믿음은 예를 들어서 이런 무엇이든지 개인적인 성향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또 반복되는 주장이나 주입된 견해로 생기는 착각이나 쇠뇌된 확신, 그런 것도 이 성경에 대한 바른 믿음이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든가, 이해하기 불가능한 현상이나 눈에 엄청난 것, 현실에서 실제로 힘을 발휘하는 어떤 권력이라든지, 이런 것들과 관련된 것들도 아니다. 성경의 바른 믿음과 다르다.
 
아무리 오래된 전통을 당연한 것이라고 믿어도 어떤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초월적인 그런 현상이라 할지라도, 또 눈에 보이는 대단한 것이라도 그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믿음의 혼동, 믿음의 착각, 더 나아가서 그런 믿음의 이런저런 유혹의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미리 잘 알고 있듯이 바른 믿음에서 사실상 성경은 반대적인 설명을 아주 좋아한다. 아시겠지만 어찌 보면 좀 어리석은 전략이기도 하다. 성경은 믿음을 꺼져가는 등불에 비유하기도 한다. 들릴락 말락 할까 하는 약하고 작은 소리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 다른 목사님의 주일 설교처럼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에 비유하기도 한다. 성경은 오히려 이 믿음을 고난 받는 것, 죽는 것, 굶주리는 것, 이름 없이 나그네 되는 삶, 이런 것들과 연결 지어서 설명을 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바울을 생각할 수 있고 순교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할 것이다.
 
또 무엇보다 믿음의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을 읽어보길 바란다.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믿음의 대한 이와 같은 성경의 설명들은 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리이고 미련해 보인듯하지만 그것은 참된 지혜요, 진리이다.
 
오늘 본문에 성경의 말씀에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에 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런 믿음, 영생을 얻게 하는 그런 믿음은자신의 성격이나 기질, 혹은 우리의 체험에서 출발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한 마디로 예수님에게서 출발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의 어떤 것에 대해서 출발하는 것이다. 예수님 어떤 분이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생케 하는 그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가는 결정적인 것이 이전에 모든 가르침과 예수님의 행적을 확증해 주는 바로 이 부활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잘 믿어지는가?
 
믿음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고 믿음은 본질적으로 쉽지 않다. 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이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믿음이 쉽지 않다. 요한복은 3장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령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믿음이다.
 
*고린도전서 12:3,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고 했다. 바른 믿음은 한두 번 대단한 체험이나 경험을 한다고 해서 그런 사건적인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신 하나님, 인격적인 하나님, 시간들 두면서 함께 동행 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그런 과정적 믿음이다. 인격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고, 깊은 교제가 필요한 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성경의 관한 이 믿음이다.
 
*이사야 55:9,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 말씀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차원보다 높은 분, 높아도 보통 높은 것이 아니라 대단하시고 유일하시고 진리이신 그 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알아가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에 관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을 믿는 바른 믿음을 위해서는 40년이라는 반복되는 광야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또 반복되는 광야의 시간이 필요했고 또 반복되는 타락과 회개와 구원을 경험했던 사사시대와 같은 그런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믿음이 설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그런 믿음이다. 이 믿음에는 어떤 사건적인, 명사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이 성경의 믿음에는 동사적인 요소가 있다. 그런 성경적 바른 믿음을 갖는 것이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공생애를 함께 보냈던 제자들을 반복적으로 만나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믿음을 갖도록 하시는 것을 보면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우리가 확인하게 된다. 감사하게도 오늘 본문은 바른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 싶다.
 
I. 첫 번째로 이 예수님께서 바른 믿음을 제자들에게 하신 일.
 

*누가복음 24:36,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첫 번째로 이 예수님께서 바른 믿음을 제자들에게 하신 일은 체험하도록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있는데 제자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들은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하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이렇게 나타나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이미 여러 번 십자가에서도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도 이미 들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나서 계신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바른 믿음, 예수님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4:38,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기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들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이것이 실제임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대화를 해주신다.
 
*마태복음 24:39,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리고 손과 발을 보이신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 그런 분위기이다.
 
*마태복음 24:41-43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 사건은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하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 우리의 믿음은 없는 것, 허황된 것을 우리끼리 만들어서 꾸며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종교적인 어떤 경향 때문에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꼭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일어난 일, 실제 하는 팩트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고,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눈에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거나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을 믿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그야말로 우리가 믿기 힘든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와 이 심판을 용서받게 하셨고 그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우리의 기대나 생각이나 논리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여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다행이도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을 잘 아시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체험 교육을 반복해 주신다.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과정을 이끌어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 가운데 나타나 주신다. 손과 발을 보여주신다. 또 그다음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꿈인가 생시인가 할 때 꼬집어보라고 말하듯이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다. 그러고도 안 되니까 먹을 것이 있는지 달라하셔서 직접 그들 앞에서 식사를 하신다. 이 36절에 보면 ‘이 말을 할 때’,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도 나누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았고 그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하고 경험했던 그 제자들이 바로 지금 그들의 체험을 나누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정도면 정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믿을 수 없지 않는가? 우리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니 확답하기는 좀 조심스럽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특별히 의심이 많거나 특별히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 같으면 한 번 만이라고 보여주시면 완전히 믿겠다. 영원히 변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들과 달리 잘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의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본문의 제자들을 믿기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함부로 깔보기는 우리가 어려울 것 같다. 아니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다. 생각보다 우리가 믿는 것과 체험하는 것과의 관계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무리해도 믿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 속담이 있지 않는가?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도 안 믿는다.‘ 는 말이 있다. 메주는 콩으로 만들 듯이 콩으로 만들었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고 보는데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보여 주어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쉽게 연결은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체험이 중요하다. 매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체험으로 부활의 예수님을 완전히 믿는 것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에서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사건은 너무 중요하다. 우리가 이 본문의 상황을 다시 체험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 직접 체험 했다면 사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으로 진실의 문제, 팩트 체크는 끝난 것이다. 기록된 이 체험이 반복되어 질 수 있다거나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지 않는다. 체험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본문에 기록된 체험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사실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직접 체험해본들 그 이상을 넘어설 수도 없다. 성경이 말하는 이 바른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II. 성경 말씀을 잘 설명해 주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이 놀라운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그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마태복음 24:44-47,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본문의 의미를 한 가지 생각해야 되는 좀 표현이 있는데, ‘이루어지리라’ 이 표현은 누가복음 2:49절에 처음 등장하고 누가복음 안에서, 복음서에서 이렇게 몇 번 반복이 되는데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9:22절이나, 17:25절, 9:37절 등에서 반복하여 사용되는 이 표현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런 뜻을 표현하는 표현 방법이다. 이 표현을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결국 예수님께서 구약의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사는 것이 맞고 그래서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부활하신 것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예수님의 생애가 어떤 것인가를 결정적으로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하는 표현이다. 이 때문에 44절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과 시편, 구약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고난 받고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다윗을 부르신 그 구원을 이루어내시는 것이 맞다는 것을 예수님은 증명해주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애와 죽음, 부활을 설명하시면서 그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에게 일어난 사실들을 제자들에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돕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서 제자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세계를 넘어서 우리 생각,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셨던 모든 공생애와 그의 말씀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들의 세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이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놀라운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2년간이나 제자훈련, 사역훈련을 받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한 번만 이 믿음을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부분의 과정을 통해서 체험으로도 이 믿음을 채우시고 말씀으로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 예수님을 받아들이므로 그 이전까지 3장까지 하신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가르침이 진리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훈련생들도 제자훈련 1년, 사역훈련 1년, 2년간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은 45절에서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자신들의 생각과 거기에 반대되는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고 성경의 말씀이 이렇구나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 과정,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이후에 초대교회 증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여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막아도 막아지지 않는 그런 찬양이 있다. 누가복음은 1장, 2장, 초반부에서 비천한 자를 돌아보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데, 비천한 인생을 돌아봐 주시는 그 완성이 되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기쁨과 찬양으로 이 누가복음은 마무리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죽고 부활로 인해서 참 예수님을 만나고 받아들이고 믿을 수밖에 없는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동의하게 되는 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증인들의 제자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의 삶에 이런 믿음으로, 이런 믿음으로 이 믿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요약
우리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저주와 절망 가운데, 영원한 죽음과 심판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또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전부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놀라운 믿음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심에 감사영광 돌리며,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우리의 기대하는 것이 다르기에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방식이 있으심에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우리에게는 참된 소망이 믿는다. 우리 평생을 이런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가르침과 행적들을 정말 진리일 수밖에 없음을 확신하며 그 믿음의 증인으로 설 수 있어야 한다. 단번에 주신 우리 믿음,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또한 과정적 믿음, 계속해서 함께 달려가야 되는 인격적 믿음으로 원하시는 주님, 체험을 통해, 말씀의 성취를 통해, 우리를 담금질하시며 이끌어주신 주님을 찬야해야 한다. 우리 훈련생들은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세워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결국 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 마음이 감동되었고, 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 때 영의 눈이 밝아졌다. 말씀과 나눔은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이다. 한편 예수님의 부활을 깨달은 제자들은 즉시 다른 제자들에게로 가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부활을 증거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짐으로 불안하고 괴로운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여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분명하게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게 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증거를 넘어선 인격적 증거로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그 손과 발의 상처를 직접 만져 봄으로써 예수님의 인격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심으로써 자신이 십자가 죽음 이전의 바로 그 예수님이심을 입증해 보이셨다. 성도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일의 증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살아야 한다. 즉 부활의 주님을 믿고, 예언의 성취이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예하며, 죄사함을 얻을 수 있도록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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