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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9월29일)
제목: ''이 말씀이 살아 생명을 주리라''
말씀: 마태복음 5:17~20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김승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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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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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기도하기 참 좋은 밤이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기도의 응답과 기쁨이 있기를 소망한다. 제가 주일학교 전도사로 있을 때에 일이다. 하루는 주일 학교 학생의 어머니가 저를 찾아왔다. 이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다. 어떤 일인가 했고 제게 좀 생소한 일이었다. 어머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전도사님 이시지요?” 하시고 제가 전도사다웠나 보다. “제가 전도사입니다.”라고 하니 어머님은 “전도사님, 아이들에게 천국과 지옥의 설명을 하지 말아주세요. 우리 아이의 교양을 위해서 교회를 보냈는데 집에서 천국의 이야기를 들으니 참 답답하다. 계속 그렇게 가르치시면 교회를 그만 다니게 하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차갑게 할 말만 하고 가버리셨다. 이 말은 들은 전도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1번 천국 설교를 절대하지 않는다.
2번 천국에 대해 더 자세히 가르친다.
2번,,,,
 
이 전도사님은 그 다음 주에도 천국 시리즈를 계속 했다고 한다. 물론 그 아이도 교회를 그만 두는 일은 없었다. 이 어머님이 말씀하신 교양이란 무엇일까? 확실한 것은 천국을 말하거나, 죽음을 가르치거나 죄의 심판을 알게 하는 것은 교양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어머님이 말하는 교양은 오늘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를 사는 것도 어려운데 영원한 천국을 말하는 것은 현실 도피적이며 무지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렇듯 우리 사는 세상에서 천국을 생각하며 살아갈 여유가 없다.
 
담임 목사님께서 지난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인간은 두 가지에 사로잡혀 산다. 하나는 과거이고 하나는 미래이다. 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 내 뒤에 따라 다니는 지난날의 죄책감, 무마시킬 수 없는 후회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사로잡혀 살아간다. 과거는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서 고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갇힌 죄수가 되고 만다. 미래또한 그렇다 삶에 귀추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가늠할 수 없어서 불안하고 오늘의 기반이 엉망이라 내일도 힘겨울 것 같고, 막연한 기대는 실망감만 크게 할 것 같다. 어제도 내일도 우리는 반갑지 않는 날들의 사로 잡혀 그냥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천국을 기대하기보다 현실인생에 고단함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오늘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좋아도 죽겠다. 나빠도 죽겠다. 슬퍼도 죽겠다. 배불러도 죽겠다. 모든 느낌을 죽음으로 표시하고 살아가고 있다. 천국을 소망하기보다 생존의 밑금을 그어놓고 거기에 걸쳐서 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 하루 어떻게 살아내셨는가? 어떻게 살고 계시는가? 저녁을 바라보며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 살아가는가? 아니면 아침을 기다리듯 약속인 소망을 맞이하며 살고 계시는가? 오늘 말씀 앞에 모인 우리들 또한 녹녹치 않는 삶을 살다가 모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가 있었다. 무너진 교회를 사람들이 모였다. 쓰러지는 강대상을 일으켜 세우고 어느 한 목회자가 설교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자녀를 잃거나 남편을 잃은 여인 앞에서 폭격으로 집을 잃고 재산을 잃은 한 아버지 앞에서, 부모를 잃고 형제를 잃고, 내일도 굻어야 하는 아이 앞에서 목사님은 마태복음 5장을 펴고 말씀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 산상 설교는 이렇게 시작된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복이 있나니’ 로 번역되어 있다. 원어의 느낌을 살려 ‘행복하여라.’ 이렇게 번역하기도 한다. 복을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보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예수님의 뜻이 더 잘 드러나 있다. 누가복음에 보면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굶주린 사람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의 뜻과 바람과 달리 설교를 듣는 무리들에게 때로는 이것이 불편하게 들렸을 것 같다. 만약 어제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 있냐고 물었을 것이고, 남편과 오래도록 이혼 소송을 앞두고 있는 말에 등을 돌렸을 것 같다. 방탕한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답답함에 울었을 것이고 대도시 셋방에서 한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청년은 냉소적인 답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설교를 ‘행복하여라.’ 를 여덟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예수님의 ‘행복하여라’ 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 땅에는 소망이 없으니 천국에서 ‘행복하여라’ 는 말씀인가? 아니면 팔복이라는 그 복의 조건에 맞추어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게 하려는 것인가?
 
스코비라는 신학자는 여덟 가지의 복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복을 받게 된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여, 설명을 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행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갖추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팔복에 나오는 여덟 가지 상태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 행복한 사람들의 정체는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팔복은 포로의 상태의 고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포로의 상태란 배경을 벗어나 곧 복음을 경험하고 의의 나라에 들어가 살아갈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며 살기를 원하시며 또한 천국에서 만나기를 강렬히 원하신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의의 사람이 되어 천국에 들어가도록 가르쳐 주고 계신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의를 추구해야 한다.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중요한 단서가 나오는데 5장 17절에 보면,
 
*마태복음 5: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율법은 모세의 책을 이야기 하고, 모세의 5경을 말한다. 선지자는 시편을 포함한 나머지 성경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지서는 선지자들이 모세의 책을 해석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좋다. 예수님도 이 율법, 모세의 책을 다시 해석해서 지금 가르쳐 주고 계신다. 율법이라고 하면 오래된 두꺼운 법률 서적이 생각나게 한다. 또 냉철하고 객관적인 판사들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하거나 재판장에나 펼쳐져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이런 그림과는 관계가 멀리 있다. 율법을 서로 약속을 맺는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계명이나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의미보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관계라는 이 놀라운 의미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가르치실 때, 윤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약속을 맺었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어지는 5장 17절 하반 절 말씀을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 5: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완성인지, 폐하는 것인지를 따지면 훨씬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항상 율법을 반대하는 오해를 받으셨다. 유대문화를 싫어한다. 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때로는 ‘천하다, 미성숙하다.’ 라는 소리를 듣곤 했다. 예수님은 율법을 우습게 여기거나 그것을 불순종을 하는 것을 오늘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것은 어떤 순위를 매기고 크기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5장 20절에서 분명히 밝히듯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라고 하신다. 천국은 의로운 자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자가 ‘의로운 자’라는 의미도 된다.
 
담임 목사님께서 지난주일 말씀에 풀어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있기 때문에 천국이다. 하나님의 의의 통치는 의로운 자들에게만 미치게 된다. 왜냐하면 의롭지 않으면 의로우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에 충격적으로 강력하게 한 가지 더 붙이신다. 이러한 의로움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큰일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상대할 자가 없는 우월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이러한 의를 가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오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로움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했던 것은 윤리나 도덕 같은 의로운 의미였다. 그래서 산상 설교도 외적으로 이해하며 실천하여 살아가는 강조점을 두곤 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말씀하는 것 초차도 외적인 것들로 이해했다.
 
이 외적인 행복에 대하여 ‘파우스트’는 자신의 욕심을 성취하여 만족을 얻기가 무섭게 또다시 욕심을 내는 것이라고 했다.
 
헬라 문학들을 들어가 살펴보면 인간이 가장 행복한 상태는 신들과 같은 상태를 말하곤 한다. 신들과 같은 삶은 보살핌을 받으며 노동과 죽음이 없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상수훈은 이러한 외적인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며 보편적인 철학들인 것들과 종교라는 것들을 물어오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기도 하다.
 
좀 어려울 것 같아서 제가 어릴 적 전도사님께 들었던 예화를 하나 들려 드리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 이다. 아이가 교회를 가려고 하는데, 아빠가 불렀다. 이 아이가 헌금을 주면 교회를 가는 길에 자꾸 슈퍼마켓에 들러서 과자를 사먹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기지를 발휘하셔서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들고 한 손에는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야, 또 한 손에는 이것은 예배 마치고 과자를 사먹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각각 쥐어주었다. 양손에 오백 원짜리를 아이는 들고 교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디였는지 뛰어가다가 돌에 넘어지고 말았다. 한 손에 있는 동전을 놓쳐버린 것이다. 이 동전이 또르르 굴러가서 하수구에 폭 빠져버렸다. 그걸 보고 한 손에 들고 있는 동전을 보고 안심한 듯 아이가 한 마디를 한다. ‘어 헌금이 하수구에 빠졌네.’ 크크 !!!! 외적인 의로움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천주교가 변하기 시작한 모양도 이러했다. 산상수훈을 해석할 때,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되는데, 여기에 천주교회가 만든 가르침을 구분하여 덧붙이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 계명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위해 필요한 것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기에 그 외에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구원받은 사람이 더 높은 영성에 이르기 위해 천주교는 더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대단한 영성을 위해서 수도원도 만들었다. 더 큰 영성의 권위를 위해 사제라는 계급도 만들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 그 계명은 오백 원짜리 동전마냥 하수구에 굴러 빠져버렸고 교회를 장악했다라는 그 사람들의 가르침들만 손에 남아버렸다. 종교라는 것은 외적인 행동과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다. 달님에게 빌려면 소복을 입어야 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가장 깨끗한 물을 길어 와야 한다,. 108번이나 절을 해야 하고 아니 만팔 백번의 절을 해야 공덕이 쌓인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의로움을 알기 위해 우리 내면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가난해지는 것보다 하나님이 돈을 더 많이 벌게 해주셔서 헌금을 더 많이 드리는 삶이 더 좋다. 의를 위해 핍박 받는 것보다 나보다 의롭게 살며 의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 화평케 하는 것보다 조용히 분쟁 없이 하나님의 교회만 다니고 싶다. 모든 사람이 살인이나 간음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꽤 근사하게 깨끗한 편이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밤낮없이 매순간 다 지켜보고 계신다. 그분은 언제라도 살인과 간음으로 내 달 수 있는 우리 앞에 있는 많은 상념을 보고 계신다. 겉으로는 악수를 나누면서 속으로는 경쟁자가 망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보고 계신다. 우리를 좀먹는 격렬한 질투를 보고 계신다. 산상 속에 불손한 시선과 불같은 격노 또한 보고 계신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시 해석하시면서 율법의 참된 의도인 마음의 문제를 지금 강조하고 계신다. 인간됨은 전체가 외적인 행동과 일치해야 한다.
 
*이사야 29:23,
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백성의 입술로는 나를 찬양을 하지만 마음은 나에게서 멀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호세아 6:6,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그가 주신 명령들을 준수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한 자비의 마음과 긍휼에 더 관심이 많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산상수훈은 일관되게 인간의 마음 속, 내적으로부터는 나오는 의가 진짜 의이며 경건이며 거룩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면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행복하여라’, 말씀하실 때,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행복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통해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과 같다. 외적인 욕심이 충족이 되더라도 내면의 의로움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
 
다. 시적으로 밭고랑의 깊은 상처를 낸다라고 표현한다. 성령의 힘으로 우리 내면의 흙을 부수고 관통하여 시련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우리를 다 갈아엎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뒤엎고 명백하다라고 여기는 것들을 뒤집으며 우리의 욕망을 좌절시키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며 하나님 앞에 우리를 가난하고 헐벗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새 생명의 씨앗이 되는 장소로 준비되어 질 때에 그 내면 안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행복하여라.’는 대답 앞에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산상수훈은 내면과 외면이 다 의로운 자가 누리는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청년들과 함께 산 기도를 종종 다니기도 했다. 산기도가 처음인 청년들을 데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기도하는 분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후레쉬도 끄고 가파른 길을 올라간다. 청년들은 퇴근 후에 온 터라, 구두를 신고 산을 오르기도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기도를 한 후에 제법 시간이 흘러 산 아래에 다시 모여든다. 이 때 청년들은 기도했던 시간들을 무용담을 늘어놓듯 상기된 얼굴을 가지고 서로 나누기 시작한다. 익숙하지 않는 어두운 곳이 너무 두려웠다고 한다. 뱀이 나올 것 같아 계속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산 기도를 가면 유난히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분들이 있다고 말하며 이 분들의 기도가 이상하게 들리기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도를 하고 있으면 이내 어두움이 익숙해지듯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점점 편안해지고, 깊은 기도에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산에 와서 기도 많이 해보면 산이 주는 특별한 영성을 우리는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오늘 이 말씀은 산에서 전해지고 있다. 고대 배경에서 산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장소로 신의 계시가 중계되는 곳이었다. 구약배경에서 시내 산 위의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 백성에게 전했다. 종말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산에 모으라는 기대가 있다. 산에서 전하는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의 고통을 거하는 우리들에게 떡을 주는 모습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영원한 나라의. 무지한 이들을 위해 들려주는 설교이다. 죽음의 귀결 앞에 두려움이 가득한 이들에게 죽음이 새로운 소망이 됨을 알려주시는 메시지였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소망, 즉 천국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오늘의 괴로움을 우리는 이겨낼 방법이 없다. 손양원 목사님을 아실 것이다. 한샌 병인 문등병자들이 거하는 애양원을 평생 섬기시는 목사님이셨다. 두 아들이 공산당원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당원을 자기의 양자로 삼으셨던 목사님이시다. 잘 아실 것이다. 얼마 전 손양원 목사님이 양자로 맞아들였던 그분의 아들이 간증하는 것을 제가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손양원 목사님의 손자가 되는 것이다. 두 아들인 동인이 동신이가 죽임을 당해 장례를 치르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날 거기 모였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손양원 목사님은 그렇게 찬양을 하셨다고 한다. 갑자기 가슴을 치며 흐느껴 소리 내어 울기도 하시고 그러다 또 정신이 나면 찬양을 하시고 그러다 정신이 나면 마냥 울다가 찬양을 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번복하신 찬양의 가사가 있다. ‘고생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거니실 때, 주님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앞서간 친구를 만나 볼 때, 기쁨이 내 마음에 차려니와 주께서 나를 맞아 주시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 영광 영광일세.!!!~’ 무엇이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자리에서 영광일세, 열광일세를 노래하게 했겠는가? 앞서간 아들을 만날 소망이 노래하게 했을 것이다. 천국은 눈물 가운데 소망을 보게 한다. 하나님 나라를 아는 그리스도인은 소망하고 살 수 있다.
 
캘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을 초월하고 육신의 고통너머에 그들의 행복을 듣는 철학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게 될 때, 여행이 여행일 수 있는 이유는 돌아갈 곳이 있어서라고 한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여행은 방랑이 될 것이다. 천국은 우리가 돌아갈 곳이다. 잠시 좋아 보이는 여행지가 아니다. 내 본향이고 내 집이고 내 아버지가 계신 곳이다. 언젠가 하늘과 땅이 없어질 때,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처럼, 율법도 사라지고 아니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여기어 주시는 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 내 사랑하는 이들을 한 번 보시지요. 내가 큰 값을 치르고 이 자리에 데리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들을 보십시오. 이제 품에 안아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이 놀라운 소망의 은혜는 미래라는 시간 안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이 땅 안에서 의로운 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래서 산상 설교는 현실과 현세에 맞추어 사는 삶을 우리 가운데 더욱더 진리 안에 사는 삶을 우리 안에 힘을 북돋아 넣어 주게 된다.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삶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반드시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약속을 확증하는 말씀이다. 이 땅에 메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망도 천국도 그냥 이곳에 두고 싶어 한다. 위치는 복잡해도 학군이 좋고 이름이 있는 동네가 천국이며 동네 주민이 배운 사람들이 모여 있고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천국이라 여기고 신경 쓰이지 않는 노동과 일상을 오락하듯 살아가는 곳이라며 천국이 여기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불편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없는 곳이면 더 천국일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왕 되신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기다리게 된다. 그날이 언제일지 열망하게 된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복음의 뿌리 중에 뿌리가 되어간다. 숨겨져 있으나 살아 숨 쉬고 보이지 않으나 죄악 된 세상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막막한 이웃에게 생동하는 생명을 전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산이라는 대지 위에 깊고도 숨겨진 복음의 뿌리로 살아간다. 이러한 복된 희망, 행복한 기대, 복의 근원이 된다. 저는 중보기도 사역을 담당한다. 코로나 시간이 길어지면서 멈춰버린 것들이 많아졌다. 늦은 시간의 만남도, 가족들 간의 교류도, 해외로 나가는 시간들도 다 멈추어버렸다. 하지만 기도의 제목은 멈추지 않는다. 신음하는 기도의 요청들은 점점 크게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 기도의 제복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기도의 사람들은 의를 바라는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의 기도도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아파하는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때로는 전화로 기도제목을 요청을 오실 때마다 나의 상처, 나의 고민, 나의 불안을 기록하고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아 기도하는 중보기도 자들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이다. 보이는 소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의의 역사를 믿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제 정리한다.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가 번영하여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말씀해 주고 계신다. 우리 삶에 샬롬이 임하도록 축복하고 계신다. 이 샬롬을 시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시편 33:12,
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여호와가 그의 하나님이신 자이다. 의로운 사람이며 팔복의 나타난 복된 사람이다. 이 사람들은 천국을 누리며 살아간다. 천국은 하나님의 것 외에 남아있지 않는 곳이다. 천국만이 참된 복인 천국에 계신 그곳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만이 참된 복이시며 그분으로 인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성도님들을 심방할 때면 마음을 열어 섬기시며 삼켜왔던 삶을 왈칵 쏟아내는 눈물을 만나곤 한다. 이럴 때면 목사에게 간절한 소망은 오직 성도님과 가정이 행복한 것 밖에 없다. 그래서 만남을 뒤로하고 나설때면,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우리 주님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늘 이곳에 모인 성도님들, 천국을 소망하며 행복하시길 소망한다. 예수님의 의로운 가르침으로 행복하고 하나님께서 관계 맺으며 약속하신 약속을 붙들고 행복해야 한다. 가난해도, 애통해도, 주리고 목말라도, 핍박을 받아도, 행복하여야 한다. 천국이 성도님들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였다.

 
♣요약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주시는 말씀으로 행복하고 참된 의를 이루어 하나님나라의 은혜를 경험하며
일상에 고단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아 말씀 앞에 서서 감사하며 소망보다 생존의 밑금을 다한 채 살아가듯 우리를 찾아오셔서 천국의 소망을 가지게 주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며 말씀에 능력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며 다시 사신 주와 함께 하여 새 생명의 복음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설교를 들은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규칙으로서 구약 성경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스도는 그 점에서 그들이 바른 위치에 있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모범"으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았는데 그리스도는 그 점에서 그들이 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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