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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2020년 10월 18일)

제목: ''돌아오면 회복된다''

말씀: 스가랴 8:1~8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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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you return, I will restore you.

그리스도인은 어디서부터 힘을 얻는가?만군의 하나님을 붙들 때이다. 가장 어리석은 것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다.

스가랴 8:3절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우리 가정은 ‘진리의 성읍이 되고 우리 사업은 ’은혜의 성산‘이 되기를 바란다“

- 진리의 성읍이 되고 가정이 여호와의 성산이 되어야 한다.

 

▷질투를 통한 회복의 구체적인 영역.

 

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ㅡ모든 것을 태우신다.

 

카나ㅡ질투

하나님 편에서는 질투가 최고의 보호막이며 안전장치이다. 코로나로 우리는 많은 한계가 있다.

진리의 장소 ㆍ가정 ㆍ사업 도 은혜로 회복된다.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결혼도 한다. 특새의 서광 언약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슥 8:4~5절

4.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슥 8:7-8절

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슥 8:23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은총의 표징의 그날에)

 

♣요약

하나님의 질투와 열심히... 페르시아로부터 돌아온 예루살렘이 하님의 언약, 말슴의 언약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성산으로 만들어 주었듯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언약이 임하시고 모든 것이 회복되고 안전한 삶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히 못 이루어지고 못하실 일들이 없다. 우리들 보기에는 기이하고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 눈에는 다 이룰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언약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반대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믿지 않고 세상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의 모두의 가정. 교회, 한국교회가 예루살렘 참 회복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성읍이 되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와 형통으로 우리들에게 스며 들어온 모든 오염을 소각시켜 주시고 참 회복하게 하여 행복한 은혜의 삶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예루살렘의 언약처럼 우리들에게도 회복되고 참된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성읍에서 살게 될 것이다.

 

♧ 느낀 점.

오늘 현장예배가 말씀처럼 진정한 진리 토대위에 우리가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천국 잔치처럼 말씀과 찬양으로 나를 드리고 나니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제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돌리며, 앞으로 더욱 우리 가족이 충만한 은혜를 누리고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회복되고 오직 주님 안에서 형통하고 건강한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현장 예배가 이렇게 은혜가 되는 것을 누구에게 알리고 싶을 정도로 좋았지만 아직도 코로나로 염려하는 친척이나 이웃들이 두려워한 그 모습이 안타깝기에 조심스럽게 주님과 나와 나의 영 가족을 위해 참음으로 기다리면서 예배와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 오늘 남편이 예배에 요약도 해서 나에게 질문하는 것도 좋은 것은 예배를 진정으로 드렸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평강의 주님이 우리를 영원하게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며 다음 주를 기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기이해도 하나님은 기이하지 않으시는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더욱 든든하고 어느 것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임을 감사하면서 나를 다잡아 게으르지 않고 순간순간 주님과 동행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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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년 10월 14일)

제목: ''두려움에서 경외로''

말씀: 마태복음 14:22~33절

설교자: 문진호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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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치유책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에 첫 번째 조건-자기와 함께 있게 하신 것이다. 함께 하는 훈련이다. 그만큼 제지들은 예수님은 함께 하셨다. 갈릴리 바다는 폭풍이 세다. 파도는 배를 침몰시키기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

주님은 떠나신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구하시려고 행했던 기적들에 대한 내용이다. 그 기적이란 그리스도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이다. 깊은 밤에 현장에 찾아오시는 것이었다. 조난당한 그곳에 오셨다. 우리를 폭풍이 덮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신다.

그리스도는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다(25절). 이 일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명을 알 수 있다.

 

▶ 그리스도께서 바다 위로 걸으심 14:22-33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구하시려고 행했던 기적들에 대한 내용이다. 그 기적이란 그리스도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이다.

 

(1) 그리스도는,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과 무리들을 떠나게 하셨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을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22절).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서둘러 이 모임을 해산시키신 것에 대해 특별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떡을 불어나시게 한 기적에 무리들이 몹시 감동케되어 그리스도를 '억지로 잡아 임금삼으려'(요 6:15)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는 무리들을 보내셨다. 그는 무리들에게 축복을 주신 뒤 주의와 조언과 위로의 말씀으로 무리를 보내신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앞서 가게 하셨다. 제자들은 가기를 꺼려 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가지 않았을 것이다.

 

(2) 이 일 후에 그리스도는 조용한 곳으로 가셨다.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23절).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 보자.

1) 그는 홀로 계셨다. 그는 조용한 곳으로 따로 가서 혼자 계셨다. 그는 때때로 혼자 계시기를 원했다. 그는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다. 혼자 있는 원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 외에 아무도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을 때 홀로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2) 그는 기도할 때 홀로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렇듯 홀로 계시면서 하신 일은 기도였다. 그리스도는 이 일을 통하여 은밀한 기도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는 자기가 가르친 규율에 따라서 은밀하게 기도하신 것이다(마 6:6). 제자들이 바다로 나갔을 때 그들의 선생은 기도하려 갔던 것이다.

3) 그는 오랫동안 홀로 계셨다. 그는 저물매 거기 혼자 계셨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대로라면 그는 아침이 가까워 오는 밤 사경이 될 때까지 거기 있었다. 밤이 다가왔고 또 폭풍이 몰아치는 밤이었지만 그리스도는 계속 간절하게 기도했다.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느낄 때 오랫동안 은밀한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3) 이때에 가련한 제자들이 처해 있던 상황(24절) :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24절).

 

1) 제자들은 폭풍이 일어났을 때 바다 가운데 있었다. 우리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는 맑은 날씨였으나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풍을 만나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랜 정적 뒤에는 반드시 어떤 폭풍이 몰려온다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2) 제자들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장소로 가다가 이 폭풍을 만났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폭풍들을 만나고 또 그들의 스승이 폭풍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셨음에도 그들이 바다로 보내지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임무를 언짢게 생각하며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임무를 통하여 제자들을 위한 더 놀라운 은혜를 그들에게 직접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3)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낙심해 있었다. 그들이 전에 폭풍을 만났을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제자들로 하여금 덜 어려운 고난을 당하게 하신 다음에 그보다 더 어려운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점점 더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4) 비록 바람이 거슬리고 제자들이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들의 선생이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바람받는 방향을 따라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이 비록 우리의 임무를 방해하더라도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들이 길을 바꾸어선 안된다.

 

(4) 그리스도는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셨다(25절). 이 일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명을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알 수 있다. 그는 제자들의 사정을 아시고 그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셨던 분으로서 그들에게 다가가셨다.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들이 당하는 곤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방문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모습을 나타내시는 기회가 된다.

2) 그리스도의 권능을 알 수 있다. 곧 그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는 통치권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중요한 실례가 된다. 우리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다. 그 일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권능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이 기뻐하시는 방법을 택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5)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다가갔을 때 그리스도와 고난에 시달린 제자들 사이에 생긴 일에 당한 설명(26-31)

1) 그리스도와 모든 제자들 사이에 생긴 일.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① 그들은 어떻게 두려움이 일어났는가.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다 하며 무서워하였다. 이 유령(spirit)이란 말보다는 망령(apparition)이란 말이 더 나은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 제자들은 "주님이다"라고 말했어야 했을 때 "유령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때때로 자기들을 구조하기 위하여 나타나 접근하는 것만 보고도 고통을 당하며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종종 그들은 거의 상처받지 않을 때 가장 많은 두려움을 느낀다. 유령이나 그 환영이 나타나면 누구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영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더 잘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키고자 더 주의를 기울일 것이며 우리는 그 두려움들을 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폭풍 속에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우리가 외적인 고통으로부터 당하는 대부분의 위험은 그 외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적인 고통이 생길 때 일어난다.

 

② 이 두려움은 어떻게 잠잠해졌나. 주님은 구조의 손길을 잠시 멈추셨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위험한 그들의 두려움에서 서둘러 구해 주셨다. 그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소동을 진정시키셨다. 그는 '내니'라고 하여 자신을 제자들에게 알리심으로써 그들의 오해를 바로 잡으셨다. 그는 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다. 단지 '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족했다. 그것은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처럼(요 20:16) 그의 양으로서 그의 음성(요 10:4)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바라보고 있는 분이 누구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도 충분히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올바른 지식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심으로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셨다. '내이 안심하라.' 만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폭풍 속에 있으면서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긴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을 안심시키실 것이다.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하셨을 것이다. 첫째, "너희는 이제 나라는 것을 알았으니 나를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모습을 본 사람들에게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를 올바로 깨닫게 될 때 그 두려움은 없어질 것이다. 둘째, "폭풍우가 몰아치고 심한 물결이 일어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가까이 있으니 그것들을 두려워 말라. 나는 너희에게 관심을 갖고 있으며, 너희가 죽게 되도록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가까이 모시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자기들의 소유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비록 그것이 죽음이라도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2) 그리스도와 베드로 사이에 생긴 일.

① 베드로의 용기와 그리스도의 후원. 첫째, 베드로는 감히 물 위로 걸어서 그리스도께 가려고 했을 정도로 매우 담대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38절). 베드로가 보인 용기는 그의 주께서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비록 다른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사랑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현하려는 그 용기가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 나가게 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오고 싶어 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애정을 나타내는 실례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고 몹시 그와 함께 있고싶어 했다. 그는 기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나를 명하사 당신에게 오라 하소서'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동하는 사람처럼' 나를 명하사 당신에게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던 것이다. 참된 사랑은 그리스도에게 오기 위하여 불과 물도 헤치고 나아가게 할 것이다. 구주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이처럼 믿음으로 그에게 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잠시나마 자기의 백성들을 떠나셨다가 돌아오시면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으실 뿐 아니라 가장 애정이 넘치는 포옹을 받는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허락 없이 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뜻에 유의하고 그 뜻을 합당하게 준수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례였다. 베드로는 "만일 주시어든 제가 가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 가장 대담한 사람들은 위험한 모험에 대한 부르심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솔하고 무례하게 그런 모험들을 저질러선 안 된다.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명하셨을 때 베드로가 감히 물 위로 오려 했던 것은 그의 믿음과 결단을 보여 주는 실례였다. 어떤 어려움이나 위험이 그와 같은 믿음과 열성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둘째, 그리스도는 매우 친절하셨으므로 베드로에게 그 일을 기꺼이 허락하셨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모험이 자기에 대한 열성적인 애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그 애정을 친절하게 받아들이셨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이 사랑을 나타낼 때 그 사랑 속에 비록 잡다한 결점들이 혼합되어 있을지라도 그들의 사랑을 매우 기뻐하시며 또 될 수 있는 대로 그 결점들을 이용하신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오라'고 명하셨다. 베드로가 표적을 구했을 때 그는 그 표적을 이미 소유한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로 결심하고 나서 그것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왔을 때 그를 도와 주셨다. 그래서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갔다. 참된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교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남으로써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참된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물 위로 걸어가는 이 기사 속에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의 권능을 힘입어 우리는 세상일을 견뎌내고 세상일에 빠지거나 압도되지 않고 이 세상일을 이기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의 유희나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께 가기 위해서 물 위로 걸어 갔다. 우리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도움을 받지 않는 한 결코 그에게 나아올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물 위로 걸었던 베드로처럼 어떤 권능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는'(신 33:27) 동안엔 가라앉을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이다.

 

② 소심한 베드로와 그를 책망하시며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여 '오라'하신 목적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옴으로써 그리스도의 권능을 알게 하시려는 것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물 속에 가라앉음으로써 그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무서워할 정도로 물 위로 걷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가장 강한 믿음과 가장 큰 용기 속에는 두려움이 깔려있는 것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처음에 매우 용감했으나 나중에는 낙심하고 말았다. 시험이 길어지면 믿음도 약해지는 것이다.

 

▶베드로가 두려워한 이유 :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말씀과 능력에 의지했을 동안 그는 아주 쉽게 물 위로 걸어갔었다. 그러나 그가 위험에 처하여 그 위험에 신경을 쓰자 그는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인식하고 약속받은 것보다 더 민감하게 어려움을 바라보면 우리는 심한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는 몹시 사나운 바람을 보고 바람과 바다조차 그리스도에게 순종했었던 사실을 기억했어야 했다..

베드로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 : 그는 빠져 가기 시작했다. 믿음을 지키고 있었을 동안 그는 계속해서 물 위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렸을 때 그는 물속에 빠져 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심령이 빠져 가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다.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졌을 때 그리스도께서 베드로가 물속에 완전히 빠져 '돌처럼 깊음에 내릴 때까지 내버려두지 않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칠 수 있는 시간을 준 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인에 관한 그리스도의 관심은 이와 같은 것이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연약하더라도 그들은 단지 빠져 가기 시작할 뿐이지 물속에 아주 빠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가 이런 곤경 속에서 의지했던 구제책은 침착하고 확실하며 인정을 받은 구제책이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한 기도였다.

첫째, 베드로의 기도 방법은 열렬하고 끈질겼다. 그래서 그는 소리 질러 기도한 것이다. 믿음이 약해졌을 때 기도가 강해야 한다. 둘째, 베드로의 기도 내용은 아주 적절했다. 그는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소리 질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빠져가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결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 의식이 생기면 우리는 이런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코로나가 걷히면 좋겠는데 이 폭풍처럼 믿음의 모험가였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해야 한다.

▷두려움에 빠진 베드로에게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큰 은혜 :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그는 베드로를 구원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때는 우리가 낙심할 때라는 것을 주의하라. 그는 우리의 필사적인 노력이 요할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신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아직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계신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그는 자기의 백성들을 지키실 것이다. 나를 붙잡아 주신 그분을 믿고 배에 오른 베드로처럼 우리의 폭풍 속에서도 우리는 걸어 나갈 수 있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붙들 때 주님은 더욱 붙잡아주시기에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다. . 베드로는 물 위로 걸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졌지만 자신을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믿음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용기를 꺾는 의심과 두려움은 모두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더 많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덜 의심하게 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버리시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쳤다.' 그리스도께서 영혼에게로 오실 때는 바람과 폭풍을 그치게 하여 평온해지도록 하신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라. 그러면 요동하는 바다의 물결도 곧 가라앉을 것이다. 평온을 찾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심을 아는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경배 받으셨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33절). 그들은 이런 곤경과 구원을 통하여 두 가지 유익을 얻었다.

1) 그들은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었다. 그들은 전에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 그 사실을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믿음 없음으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겪고 나서 믿음은 더욱 적극적으로 변모되며 체험한 것에 의해 더 강한 힘을 얻게 된다.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진실로 알게 되었다. 믿음은 그 믿음이 확신에 도달하여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고 진실로 말하게 될 때 성장하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리스도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므로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는 그를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말하며 경배드렸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고백도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믿음이 예배에 필요한 고유 원리라면 예배는 믿음이 낳은 순수한 결과인 것이다. 이제 주일예배가 회복될 줄 믿는다.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시길, 믿음의 승리를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서 나가야 한다. 다시 나를 잡아주신 주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온전히 나아가야 한다.

 

♣요약

상황이 주는 놀라움으로 우리가 두려움을 갖지 말고, 주님 앞에 확고히 서서 주님 앞에 더 나아가야 한다. 늘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이 폭풍 속에서도 우리를 담대하게 하시는 주님이시기 우리는 믿음을 뚜벅뚜벅 걸어 나아가야 한다. 주님 손을 붙들고 이 폭풍에서도 너끈히 두려움에서 경외를 승리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배에서 삶의 모든 폭풍을 잠재워 주실 줄 믿는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도 수많은 폭풍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잠재워 주시길 기도하며 두려움을 갖기 말고 주님을 경외하면 모든 것이 풀리고 하늘 문이 열리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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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년 10월 11일)

제목: “누구를 위한 금식인가?”(For Whom the Fasting Is Done?)

말씀: (스가랴 7:1~14)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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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주일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말씀에 대한 거룩한 갈증이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면서 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어서 말씀이 오늘도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바르게 책망하고 우리를 변화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은 누구를 위한 금식인가?

 

0.1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한다.- 교회에서 은혜가 제일 많은 곳이 어디인가? -주차장일 것이다. 신앙과 삶이 생활에서 일치하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일치된 사람은 고민한다. 앞뒤가 다른 자들이 있다. 누구나 삶과 신앙의 일치를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영적 성숙으로 맞출 수 있다. 어떻든 간에 신앙의 뿌리를 잘 자리 잡아서 기본을 갖추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영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지 위해서는 뿌리가 좋아야 한다. 영적인 싹을 잘 키워야 한다. 생명 씨가 들어오면 열매가 들어온다.

 

• 마태복음 7:20,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0.2 뿌리가 약한 나무에게 좋은 열매를 요구하는 것은 ‘영적인 억압’이 될 수 있다.

 

Ⅰ. 동문서답

 

1. 벧엘 지역 사람들이 예루살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대표단을 보내어 ‘금식’에 대해 질문 했다.

• 3절,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2. 이스라엘의 공식적 금식은 일 년에 한 번 ‘대속 죄일’에 행하는 것이었으나,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후 비극적 역사 사건을 기억하고자 금식 절기를 추가하여 지켰다.

• 레위기 23:27, “7월 10일은 속죄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 여호와 앞에 모여서 금식하며 죄를 슬퍼하고 나에게 화제를 드려라.” (현대인의 성경)--이스라엘 백성은 슬퍼하고 울 일이 많아졌다.

 

• 스가랴 8: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금식이 자주 기다리고 있다.

 

3. 벧엘 사람들의 “앞으로 계속 금식 절기를 지켜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오히려 하나님은 “너희가 과연 나를 위해 금식했느냐?”고 물으셨다. 정곡을 찌르고 있다.

 

• 5절,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강한 수사법이다. 반복을 한 것은 형식적이 아닌 것이 맞는지 정성을 다했는지를 물으신다. 하나님의 간절한 회복을 바라시는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있으며, 참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다.

 

Ⅱ. 누구를 위해 금식하는가?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에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 8절,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금식여부는 옛 선지자를 통해 핵심을 말한다.

 

2. 하나님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겉으로 보여 지는 금식이나 종교의식을 행한 자라면마땅히 지켜야할 삶의 규범, 참된 금식의 의미를 말씀해 주셨다.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느냐는 것이다.

• 9~10절,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➀진실한 재판을 행하며서로 ➁인애와 긍휼을(인간관계) 베풀며 10 ➂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사회적 약자 영역까지 섬겨야 함) ➃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음모, 고소 악한 마음, 참된 예배가 안될 수 있다). 하였으나”

이 말씀은 옛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이다(이사야, 예레미야).

-믿음의 뿌리를 강화시키고 싹을 키우고 성숙시키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속에 있는 것들을 주님의 본당에 와서 모두 내려놓기를 바란다. 그래야 병이 되지 않는다.

 

• 이사야 58:6~7,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Ⅲ. 참된 금식은 생활 예배에서의 순종이다.

1. 하나님이 ‘참된 금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 듣기를 싫어하고 불순종했다. 진짜 금식이다. 하나님은 금식을 기뻐하신다. 바로 먹지 못한 자를 섬기는 것이다. 주님은 올바른 인식이 확인 될 때에 기뻐하신다. 내 삶에서 실지로 나와야 한다. 생활이 순종이 되는 것이 금식이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 11~12절, “11 그들이 ① 듣기를 싫어하여 ②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③ 귀를 막으며12 ④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벽창호 같은 것이다. 형식적인 것을 말한다. 소가 멍에를 메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자이다.

 

2. 예수님은 40일 금식 이후 이사야 61장 말씀을 통해 약자를 돌보는 사명을 선포하셨다.

• 누가복음 4:18~19,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였더라”- 영적인 통찰력이다. 금식은 약자를 돌보고, 최고의 약자는 몸을 파는 여자를 돌로 치는 일이었으나 예수님은 죄가 없는 자는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진정한 약자를 보호하는 자 되어야 한다.

 

3. 삶의 현장에서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은 목자의 심정을 보여주셨다.

• 14절,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하시니라”-뻔뻔 남녀가 되어서 하나님은 진노하신 것 같지만, 항상 하나님은 동구 밖에서 기다리시니 회복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흩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시다. 금식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서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Ⅳ. 껍데기냐 실체냐 (가짜 예배 vs. 참 예배)

 

1. 스가랴 7장의 신약 적 재해석이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이다.

• 누가복음 18:11~12, “11 바리새인(껍데기-자기중심:교만)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참 예배 죄책감을 가지고 용서를 구함-겸손)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 누가복음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남들의 시선을 갖지 말고 가짜 예배가 아닌 진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율법, 공로적인 예배가 아닌 참 예배자로 승리하기를 바란다.

• 누가복음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

2. ‘좋은 전통’은 죽은 자들을 통하여 ‘살아있는 믿음’을 강화시키고,‘잘못된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자들에게 ‘죽은 믿음’을 갖게 한다.

 

[ 결 론 ]

1. 영적으로 성공하려면 먼저 공적 예배에 성공해야 하며, 공적 예배의 성공을 통하여 생활 예배에 성공할 수 있다. 생활예배가 함께 일치 되어야 한다. = 共生一致, 信行一致,

 

• 하박국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2. 주중에 ‘가인’처럼 살면서, 주일에 ‘아벨’처럼 예배드릴 수는 없다.

 

• 주일 공적 예배 수준이 주중 생활 예배 수준을 결정하고, 주중 생활 예배 수준이 주일 공적 예배 수준을 결정한다.

-로마서 2:13절: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디모데후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서 네가 돌아서리.

 

▶▶주중에 가인처럼 살면서, 주일에 아벨처럼 예배드릴 수는 없다.

 

♣요약

참된 금식은...

스가랴는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버리고 참된 종교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한다. 이는 금식의 참된 의미, 즉 여호와께 대한 전적인 신앙을 교훈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이 결여된 외식적인 종교 생활은 허울이요, 자기기만이며, 이기심의 발로임을 모든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납작 엎드려서 주시는 말씀에 진정한 실천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실한 재판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실에 대해 올바르게 재판하며 공의를 실천하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도록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셨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을 말한다. 불 신앙적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에 아무리 호소해도 듣지 않으셨고, 그들을 열국에 흩으셨고, 거하던 땅을 황무케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중심으로 자기의 죄를 통회하는 자는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다(시34:18). 그러니 우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진정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실천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가인처럼 살면서 아벨처럼 예배드리는 자 되지 않아야 하며, 주님의 참된 금식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도 주님처럼 함부로 판단치 말고, 약한 자를 돌아보고, 그늘진 곳을 살피며, 남을 사랑하는 자 되기를 소원한다. 주님 안에서 현장예배에 힘쓰기를 기도해야 한다.

 

♣느낀 점.

 오늘 예배에 일찍 나갔으나 놓고 간 헌금을 다시 가지러 들어오는 바람에 헌금예배에 늦어서 마음이 급했다. 도착하니 모임 10분이 지나버렸다. 지각은 되도록 하지 말아야 함을 깨달았지만, 헌금 봉사 자리에 들어가려 하자 방역 지침으로 문이 닫혀버렸다. 그래서 사정해서 결국은 들어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회개의 시간의 예배였다. 오늘 목사님의 말씀처럼 예배가 형식적이 되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오늘 도착했을 때에, 바로 남측에서 나를 들여보내지 않고는 봉사자님들이 헌금 지역장님께 자주 전화를 하시는 것도 불편했다. 나의 불찰과 지혜롭지 못한 일들로 인해서 남을 탓하는 일이 되지 않기를 기도했다. 내가 늦었는데 왜 그들을 원망했는지도 회개가 되었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버리고 참된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으며, 외식적인 신앙이 나에게 깨끗해져서 진실 되게 주님을 경외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시간을 잘 지키고 진정한 참된 예배 자가 되어야 하겠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남을 아량으로 덮어주고 주님을 대하듯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이기를 기도하며 진정한 주님을 향한 금식이 되길 소원한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뿌리가 좋아야 한다. ~~~

 

                                                     ▲ 대표기도 장은진 목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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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0년 10월 10일)

제목: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말씀: (요한복음 20:31, 1:14절)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부서소개: 박요한 목사님(대학부),

이원준 목사님(청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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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31, 1:14절.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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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명의 목자이신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길 바란다.

에너지를 앗아 가는 자 있고, 에너지를 주는 자있고, 모두가 영적 에너지를 주는 자 되길 바란다. 이 영적으로 투명하고 순결하기를 바라며 우리가 암송처럼 모든 일들이 신적개입이 있기를 바란다. 토비새를 통해 영적인 대관식, 하나님의 잔치가 되기를 바라낟. 코로나 이후에도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제대로 가야하는가? 이 코로나사태는 우리가 일곱가지를 지켜야 한다.

첫째는 성경의 절대권위이며, 둘째는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 주님은 The Way, The Truth, The Life이시다. 주님을 모실 때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요한은 어떤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의 심정을 깨달은 사람이다. 예수님의 심정을 깨달은 자로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곳곳마다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풍성한 생명을 체험을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적당함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한 은혜가 되기를 신실한 종이 되라. 지치지 않는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 주인공이 되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가 믿어지고 신학적 받침이며 어떤 경우에도 말씀이 등대가 되어야 한다.

구약에는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 구원자이시다. 예수님이 어떤 삶의 영역에서나 그리스도이시며, 구원자이시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짐이나 상처로 영적으로 치유되고 정리가 된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주님은 삶에 체화되어 다락방 ㆍ가정 ㆍ교회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소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면 기적이 생긴다. 현장을 회복시켜 주시길 소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마음의 상처가 치유 받는다. 마음의 짐이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면 정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서 구원받고 힘을 얻기를 바란다.

 

ex) 안의숙 사모님(김동명 목사님 부부) 이야기이다. 역사의 길목에서 섬광처럼 빛나는 분들이 있다.

남강 이승훈 목사님 ,교육계를 바꾸었다. 머슴 출신이다. 그는 성경을 접하게 되고 요한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에 와 닿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했다. 신앙의 자세. 주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기뻐하게 된다. 그러면, 우울증 자살 등, 혼돈도 회복된다. 남강 이승훈은 주인의 요강을 치우는 자였다. 주님을 만나고 주인의 요강을 치웠고 깨끗하게 해서 주인이 감동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닦았다고 했다. 주인이 일본에 유학을 보내며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우게 된다. 그 학교 출신이 바로 주기철 목사님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집중할 때에, 주기철 목사님 같은 자들이 나오길 바란다. 내일 주일 예배는 스가랴 7장을 한다. 하나님의 나라 말씀으로 인해, 주일예배, 토시배 수요예배 다락방, 큐티 등,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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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소개...

박요한 목사님(대학부)

대학부-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 매 주일 예배가 주님께 우리의 삶과 은혜가 금과 은으로 왕관을 만들어 올려드리는 메시아의 대관식이 될 줄 믿는다. 대학부는 예배는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슬로건으로 예배드림 무브먼트를 행한다. 소그룹과, 증인 공동체로 전도폭발, 현재 온라인으로 유일한 구원자임을 선포하고 있다. 가정, 캠퍼스에서 증인의 삶을 살고 있다. 대면 수업, 비 대면에서 온라인 줌으로 기도회를 열고 있다. 위기 속에서도 영적기백으로 흔들림 없이 유일한 구원자를 선포하고 있다. 싸울 날을 위해 마병을 예비하라는 말씀으로 사역 적 기회로 삼아 경건생활의 모임을 사역의 전환을 이루어 내고 있다. 큐티와 아침저녁 기도회와, 미혼모 돌봄 팀과 저소득 아동 돌봄 팀, 학습팀 등으로 뜨겁게 기도하면서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현장모임에 참여를 못하지만 함께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대학부는 유일한 생명이신 주님을 선포하는 숙련공이 되겠다.

 

▶이원준 목사님(청년부)

- 청년들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청년들의 삶 가운데 고민을 생각하면 어떤 고민이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 삶의 고민은

첫째는 먼저 모이지 못하는 영적침체이다.- 교회는 에클레시아이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불러내는 회중이고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모이지 못하는 상황이 당연히 영적 침체이다.

둘째는 코로나로 인해 경제적,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여건이다. - 코로나로 맞이하고 있는 고민들을 마주하고 있는 현실 중 하나다.

셋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 무기력함이며, 지금까지 해온 것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이 종종 찾아온다. 이런 여러 가지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소망과 능력이 되실 줄 믿는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복음만이 이 모든 현실을 돌파할 수 있고, 우리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영광스러운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의 현실을 그리스도의 유일성으로 돌파하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제자의 걸음을 계속해서 걸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 i9기도회를 통해 돌파하고 있다. -i9은 인스타그램이며, 9시에 진행하는 기도이며, SNS플랫폼이다. 이곳은 개인이 방송을 할 수 있어서 공간적인 제약이 없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어서 기도회도 진행할 수 있다. 이사야 9장 2절을 붙잡고, 이사야의 I, 인스타그램의 I를 따고 9장의 9, 9시의 9를 따서 i9기도회가 되었다. 매일 저녁 함께 나라와 민족, 교회 공동체,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기도회가 되고 있다. 영적침체를 돌파하는 길을 이 i9을 통해 새롭게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현실도 돌파하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가지고 돌파하는 길이며 이 현실을 약속을 붙잡고 사경회를 진행하고 있다. ‘zero groud’의 타이틀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사무엘상 7장 8-9절을 가지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여 엎드리며 영적 쇄신과 도약으로 가는 현장으로서 제로 그라운드로 섬기며, 박성민 대표를 모시고 온라인으로 진행을 하지만 모두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되기에 영적인 도약이 되는 이 시간을 위해 기도해 주길 바란다. 무기력함을 돌파하는 것도 온 세상의 구주이신 주님을 창의적으로 돌파하며 선교사님 케어 패키지를 운영하며, 청년부 모두와 파송 선교사님을 위해 생필품을 발송하고 있다. 슬기로운 집 콕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만이 약점을 돌파하는 길이다.

 

♣요약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가운데 허락하신 문제들을 나눌 수 있고, 예수님의 유일성을 가지고 믿음의 대체물에 흔들리지 말고, 믿음 안에서 삶의 기초를 세우며, 내일의 혼인 잔치를 사모하며 현장예배 참여에 혼신을 다하여 오직 우리의 구원자이신 우리 주님을 통해 새로운 영적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대학부, 청년부의 부서 소개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가지고 모두가 온라인으로 도약하고 있다.

 

☆대학부서 -박요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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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년 10월 7일)

제목: “용서 계산법”

말씀: 마태복음 18:23-5절

설교자: 양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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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뉴스에 보니 여성들의 명절 스트레스는 값으로 따지면 = 약 천 만원 값과 동일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자와 함께 하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게 하겠는가? 부정적 감정의 에너지가 술술 빠져나간다.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돈으로 계산해 본 적이 있는가? 만약에 누군가가 나의 이런 감정의 원인을 해결해 준다면 얼마로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 내가 반대로 상대방에게 감정을 제공한 사람이라면, 그 잘못을 지워준다면 얼마로 보상하겠는가? 이렇게 값을 계산한다면 나는 얼마의 값을 지불할 수 있는가? 이런 값을 정해보는 것은 우리의 반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몇 번이나 지불할 수 있겠는가?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한다. 주여! 형제가 내게 범죄하면,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겠는가로 여쭙고 있다. 그 때에는 예수님의 설교들 들은 바로 그때 여쭙는 것이다. 베드로가 왜 7변 용서한다고 말하는가? 용서의 정신은 3번이면 된다고 말한다. 3번 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4번째는 용서 받을 수 없다라고 한다. 베드로가 이것에 두 배로 곱하고 한 번을 더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냐고 예수님께 묻는 것이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면 조용히 가서 1:1로 이야기 하라고 하신다. 안 들으면 두 명이나 한명의 증인을 데려가서 말마다 모두다 증거를 삼고 이야기 하라고 하신다. 세 번째 이야기 하라고 하고 안 되면 교회에다 이야기 하라고 하신다. 교회에서 말을 해서 안 들으면, 세리나 이방인처럼 여기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끝나자마자 그때에 기다린 듯이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한다. 형제가 내게 죄를 지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하냐고 여쭙는다. 이유가 어찌되었던 베드로는 용서를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계산이 맞는지 예수님께 확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대답을 하신다. 네게 이르노니 하신다. 너는 몇 번의 손가락을 접었냐며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네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비유를 하신다. 마태 세리에 대한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천국의 계산법이다. 예수님의 계산법이다. 이 비유를 살펴보면, 용서를 7번을 70번이라도 용서하라시며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는 어떤 임금과 같다라고 하신다.

 

◆용서 계산법.

1 용서는 탕감해 주는 것이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다. 문제는 이 종에게 갚을 돈이 없다는 것이다. 임금은 그의 몸을 팔고 자녀들을 팔아서라도 그 빚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데 그 좋이 내게 참으소서! 하며 다 갚으리이다! 한다. 한 달란트는 금 34킬로그램이다. 만달란트 금 34킬로가 만개가 있는 것이다. 만 명이 지고 가는 돈이다. 삼십사만 킬로그램의 금을 빚진 것이다. 빚은 어쩌면 이 일만 달란트는 죄의 크기이며 일만 달란트는 죄의 횟수이기도 하다. 빚 앞에는 간절한 것이다. 그래서 왕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천국은 일만 달란트를 용서받는 것이다. 임금의 탕감으로 하는 하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탕감 받은 자이며 용서 받은 자다.

2. 용서는 잘못된 행동처리보다 존재를 받는 것이다. -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것처럼 똑같다. 가두었다는 것은 잡아서 던졌다는 것이다. 백 달란트는 팔백에서 천만원정도이다. 이 임금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형제가 형제에게 진 빚이다. 다르게 말하면 헤아릴 수 있는 크기이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크기라는 것이다. 마음으로 용납하지 안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용서를 가장 잘하는 것은 바로 자녀들 에게이다. 우리는 항상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용서할 것이면서 우리 아이들에게 치사하게 그랬다. 처벌과 배상 규정을 아이에게 용서해서가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그 용서는 존재를 용서하고 용납했다는 것이다. 자녀는 쉽게 용서가 된다. 다만 형제는 잘 안 된다. 섭섭하면 잘 해결이 안 된다. 별거 아닌 것으로 용납이 안 된다. 용서는 아비의 심정이다. 하나님의 심정이다. 하나님의 자비로 하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의 성품이 아니다. 늘 우리는 계산하고 따지지만, 용서는 하나님의 것이다. 만달란트 빚진 자로서 주님 앞에 설 때에 주의용서가 내 전체에 용서를 하신다. 탕자에게도 기뻐하시고 잔치를 베푸셨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누구를 향하여서 손가락을 접고 있냐를 말씀하신다.

 

3. 용서를 선포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불쌍히 여기라는 것이다. 복음에 대해서 관심 밖에 있는 자처럼 불싸히 여기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18:18-20절 보면, - 매는 것, 푸는 것이 무엇인가? 이 일을 위해서 하늘 아버지께서 일하시겠다는 것이다. 푸신다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은 자녀에게 주신 특권이다. 요한복음 20:22-23절을 보면, --- 성령 받은 공동체, 성령 받은 성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우리가 죄를 사하여야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죄를 사할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알기에 기도해야 한다. 그 사랑을 맛보지 못한 자에게 이방인 세리 같은 자에게 향하여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자본은 늘 헤아린다. 우리의 자본은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풀지 않지만 용서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본으로 용서로 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용서의 크기를 선포하는 것이 교회이다. 그것을 선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이니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우리의 용서가 필요한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세리와 이방인 같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용서한다는 것이다. 그 자비로 용서로 충만한 매 주일마다 인도하실 것이다. 용서, 자비, 사는 행복을 알도록 그 용서의 크기를 못하는 자에게 전하게 하고, 용서로 천국을 경험하길 바란다.

 

♣요약---코로나 상황이지만, 모두 어둡다. 우리의 용서가 필요한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으로 기도해야 될 그 대상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얻어서 세리와 이방인 같은 자가 누구인가를 바라봐야 한다. 그 용서의 은혜를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다락방, 가정, 훈련에 용서를 베풀어 주신 은혜로 함께 기도하며, 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용서의 은혜가 다른 영혼들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도 전해지기를 원한다. 용서에 대한 천국 계산법,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계산법을 우리가 가진 짐을 깨끗이 덜어내는 경험이 되고, 하나님 자본으로 나도 그 능력을 받아서 다른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 계산법을 받아서 그렇게 용서의 마음으로 주님을 순종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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