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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8월 25일)

제목: ''불꽃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라''
말씀: (출애굽기 3:1~12)
찬양인도: 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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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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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를 사모하여 성도의 온전한 블레싱,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축복한다. 사모함의 걸 맞는 은혜와 기쁨을 충만히 공급해 주실 줄 믿는다.
 
▶ 강건우 부목사님.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인사를 건네면, 아주 짧은 적막이 흐르고 상대방도 반응을 보인다. 그 목소리에 힘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모르는 전화로 전화를 거니 낯설기도 하겠지만 혹시 스팸 전화가 아닐까라는 경계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제가 “안녕하세요!! 사랑의교회 강건우 목사입니다.”라고 말씀 드리는 순간 상대방 목소리 톤이 급격히 올라간다. “아!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러블리 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반응을 해준다. 무척 감사한 일이다. 이 목회자라는 이유만으로 반가워해주시니 말이다. 전화뿐이겠는가,
 
지금 코로나 상황에서 사실 심방(尋訪)이 어렵지만 사실 심방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가 인생에 깊은 곳에 감추어진 기도 제목을 나누게 된다. 느슨했던 소망의 고삐를 다시 움켜잡고 기도할 힘을 얻기도 한다. 왠만한 사이에서는 꺼낼 수 없는 이야기, 그러라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음에 거리가 금 새 좁혀진다. 이번 여름에 가나에 가서도 많이 느꼈다. 가나 사람들이 저를 볼 때, 그저 아시아 사람, 중국 사람일 수도 있고 일본 사람일 수도 있고, 한국 사람일 수 있다. 그러던 저러던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사랑의 교회 목사’라고 하면 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은지 폭발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기대감을 갖고 말을 건네는 것이다. 여러분 저마다 그런 존재들이 있지 않는가? 휴대폰에 그 사람의 이름만 떠도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그 사람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런 대상들이 있을 것이다. 이 사람하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으면 다른 사람과 달리 이런저런 마음속에 있는 말까지 하게 되고 그 김에 회복도 얻고, 소망도 하게 되는 사람이 저마다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는 데 그런 존재가 금 새 떠오른다면 여러분들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더 행복한 존재가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그 대상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인생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대할 때, 그 이름을 부를 때, 소망과 기쁨이 나름 밀려온다. 그 사람, 이와 반대의 경우로 하나님이 그다지 설레임이 없는 것, 그닥 그렇게 기대감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럼 오늘 본문의 모세는 어느 편이었겠는가?

(출애굽기 3:1~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성경은 모세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 모세의 장인이 어느 민족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바로 미디안이다. 그럼 모세는 어느 민족인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스라엘 중에 레위지파이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레위사람이 레위여자에게 장가들어 한 아이를 낳았다고 표현함으로써 모세는 레위지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낳은 모세가 이 소년시절은 어디서 보내는가? 애굽에 왕국에서 보낸다. 청장년 시절은 미디안에서 보낸다. 그렇다면 모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레위인, 애굽인, 미디안 사람인가? 혈통으로는 분명히 레위사람인 것은 맞다. 그러나 자랄 때는 애굽에 더 친숙하고 지금 살아가는 것은 미디안이다. 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게다가 지그 그는 양떼를 치고 있다.
 
본문에서 3장 1절에서 보면 양떼를 치더니를 원문으로 보면 시제가 ‘계속된다. 지속된다.’ 그 의미가 더 강조되고 있다. 즉 모세가 양떼를 치던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그의 나이 80세이다. 애굽에서 40세에 뛰쳐 나왔으니까 무려 40여 년간을 이 상황, 시절 가운데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보낸 그의 인생이 지금 양떼 치는 인생으로 끝날 것만 같다. 모세는 행복했을까? 수천 년 전에 모세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그 당시 근접한 상황으로 한 번 비교를 해보겠다. 창세기에서 모세처럼 왕궁하고 친숙했던 사람을 꼬집어 내 보겠다. 누구인가? 바로 요셉이다. 자문자답을 하는 것은 마스크를 끼어서 일 것이다. 대답을 잘 하고 있을 줄 믿는다. 요셉이 왕궁에서 요직으로 발탁된 나이가 언제인가? 창세기 41장을 보면 30세라고 하고 있다. 그 뒤로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말 못 할 문화를 겪었지만 그 뒤로 요셉이 얼마나 승승장구를 했는지 비록 여러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뒤 형통함, 그 뒤에 모든 문제들이 해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왕궁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너무나 다른 천국이 펼쳐진다. 심지어 자기의 가족에게도 은혜의 통로가 된다. 요셉이 왕궁에 들어가 다음에,,, 요셉도 똑같이 왕궁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세는 중간에 들어 온 것도 아니고 오래전부터 살았다. 그리고 공부의 품에서 자랐다. 그런데 가족을 건사하기는커녕 처가에 와 있으니까, 왕궁에서 쫓겨난 신세이고 그리고 80세까지 엄밀히 이야기 하면 남의 양들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40년간 켜켜이 쌓였을 그의 내면을 흑암과 혼란 속에서 모세는 지금 나타난 하나님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품었을까? 섭섭한 마음이 극에 달하고, 이제 어떠한 감정을 마음에 품기에도 지쳐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바로 그때, 떨기나무 불로 하나님이 모세 앞에 나타나신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왜 떨기나무의 불로 자신을 드러내시는가? 먼저 모세의 부르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찾아갈 사람이 모세만 있어서가 아니다. 모세밖에 찾아갈 없어서가 아니다. 보다 더 패기 있고 보다 더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찾아간 것이 나았을 것이다. 힘들어 하는 사람 말고, 아픈 사람 말고, 마음과 육신이 건강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뭘 원하면 할 수 있겠다고 하는 사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 효율적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왜 굳이 모세를 부르셨는가? 무엇보다 모세에게 그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세를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지금 삶의 원동력을 잃어가는 있는 모세이다. 자기의 정체성 측면에서 자기는 왕궁을 훑고 간 인생이다. 지나가는 인생이다. 그런 인생으로 오늘에 처한 인생으로서 여러 방문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세이다. 그래서 오늘에 현실이 수긍할 수 없고, 수긍은커녕 숱한 체념의 세월을 보냈다.
 
누가 이토록 깊이 침체된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누가 이토록 흑암에 빠진 사람에게 생기를 부어줄 수 있겠는가? 누가 그에게 삶의 이유와 존재의 필요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시다. 하나님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장면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 같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이 항상 인간에게 어떤 필요를 이야기 하실 때는 바로 그 사람의 궁극적인 필요와 맞닿아 있다.
 
*요한복음 4:3-7절에,
3 유대를 떠나 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요청을 한다. 어떤 요청인가? 물을 달라하신다. 예수님의 목마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의 필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4절에 보면, 국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런 예수님께 사마리아 여인을 괜찮은 듯 예수님께 물을 떠 드렸다. 실상 목마른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갈증을 몰랐던 이가 누구인가? 사마리아여인이다. 목마름의 필요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다. 바로 그 여인, 예수님이 그 물을 달라고 하는 그 여인이다. 물을 준 것은 누구인가? 심지어 물이 되시겠다고 하는 분이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다섯 살 난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한 숨이 나온다. 고집을 부린다. 사랑으로 달래기도 한다. 토라진 아이를 부르면 한 번 불러서 오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불러도 안 오고 제 앞으로 오지도 않고 제가 보일만한 곳에서 자기 존재를 잠깐 드러낸다. 그때서야 뭐가 잘못되었고, 너랑 나랑 어디서부터 비켜갔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다. 그러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눈물만큼 이야기를 하고 아주 잠깐이지만, 5분도 안되겠지만 수긍이라고 한다. 여러분, 제가 이 녀석이 필요해서 부르겠는가? 녀석을 부는 것은 제가 채워주고자 함이다. 지금 이 순간 더 성숙해지고 더 건강한 아이로 자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녀석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시는가? 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왜 우리에게 동역 자 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있으시지 않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고 한들 나여야 한다는 것도 없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그분을 사랑할 대상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찾고, 나를 부르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겠는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고자 함이 아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로 내게 가장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필요만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픈 일이다. 거기에 우리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의 예배가, 존립아 필요 하냐 마냐고 세상이 막 따지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인가? 무엇보다, 누구보다 교회는 내게 필요한 것 아닌가? 내 필요 때문에 주님이 피 흘리사 허락하신 그 분이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필요에 의해서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고 그래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착각하는지 모른다. 교회를, 우리의 신앙이 어떤 전반적인 부분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필요에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이다. 거기에 바로 내 필요가 있었다. 나의 필요가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의 필요만 생각하던 그 부담에서 좀 벗어나서 이것은 나를 위한 은혜이구나! 이것은 나를 위한 콜링이구나! 하는 그 은혜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떨기나무의 불을 꺼내 드신다. 떨기나무는 흔한 나무로 생각보다 좀 덥수룩한 형태의 나무를 말한다. 사막은 건조한 것이니까 나무에 불붙는 것 그렇게 뭐 대수이겠나? 모세가 40년 동안 있었다고 하면, 40년 동안 이런 일 한 번 없었겠는가? 모세가 이 큰 반경이라고 하면서 이 불난 곳에 다가간 것을 보면 예사불은 아닌 듯하다.

 
*출애굽기 3:2-3절에,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러분 이 광경이 특이한 것은,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2절과 3절에 반복하는 것이다. 진술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할 때, 성경은 챙겨 앍으라는 사인이다. 그럼 왜 안타는가? 성경에 이 가이드대로 말해야겠다. 왜 안타는지 궁금해 하다가, 그럼 탄다는 것은 무얼까? 를 고민하게 되었다 불‘에 타다’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는데, 멀리 갈 것 없이 저자가 같은 이 출애굽기 안에 들어가 있다.
 
*출애굽기 22:5절에,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여기 어디 태우다가 있는가? 없다. ‘먹다’라는 이 표현의 단어가 이 출애굽기 3장에서 나오는 불이 타다, 불이 붙다와 같은 단어이다. 여러분 이 ‘불다’라는 단어가 왜 같은 어휘일까? 그것만 생각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불이 전쟁을 하려고 뗄 감이 있어야 한다. 연료가 있어야 한다. 그 뗄 감을 소비하고 소화함으로써 불은 존재를 이어간다. 22장 5절에서 자기 짐승을 남의 밭에서 먹여버리면 문제이다. 먹어버리면, 다시 쓸 수 없다. 그렇게 소화하고 소모하는 것이다. 떨기나무에서 불이 소비되려면, 그 나무를 먹어야 된다. 나무를 뗄 감으로 사용해서 나무가 재가 되어야 정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모세 앞에서 그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왜 이런 방식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시는가? 하나님이 이런 존재라고 설명해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언가 집어 삼켜서, 무언가 소비해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나무를 태워야 불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는 뭘 소비해야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뭘 바치고 드려야 먹으면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고 말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이야기를 잘 시각 교재를 가져다가 잘 설명할 수 있는 그림으로 설명하시려면 모세가 자기 것을 다 태워버리는 사람이다.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애굽에 친구나 연줄이 있지 않다. 재산, 권위, 명예, 아무것도 없다. 태우고 싶어도 태울 것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있다고 한들 여러분 같으면 히브리 동족을 위해 다시 태우겠는가? 있다고 한들 하나님을 위해서 내어 드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 쫓겨 와서
 
*출애굽기 2:11-12절에,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그가 외국 왕궁에 있을 때, 히브리 동족을 위해서 분연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강력한 민족의식, 동족의식이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족을 위했다가 그가 잃은 것이 너무 많다. 뒤에 나오는 말씀이다. 출애굽기 2:15절을 보면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하여 바로가 찾는다.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으로 간다. 이렇게 살해 위협을 받고 미디안 땅에 가서 출애굽기 32장에 미디안 생활이 시작된다.
 

출애굽기 2:15절에,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렸다. 이제 남아있는 것이 없다. 애굽에 신분이, 연줄, 재산이, 권위가, 명예가, 아무것도 없다. 태우고 싶어도 태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있다고 한들, 여러분 같으면 히브리 동족을 다시 태우겠는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내어드릴 수 있는가? 그래서 지금 모세에게 하나님은 떨기나무의 불로 질문을 던지신다. 지금도 태워져야 불이 붙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크게 네 방식일 수 있겠지만 지금도 내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그게 몰고 온 처참한 결과에 대해서 네가 침체될 수도 있겠지만 과연 내가 하는 일도 동일한 수준과 결과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이 질문하고 계신다. 아니다. 모세는 이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 가서 죽음을 몰고 올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 모세 앞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고 계신다. “내가 너를 부르는 것은 너의 무엇을 탈탈 털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내가 불을 붙이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내가 세상과 만천하에 드러내겠다고 하신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를 하실 때가 있다. 풍성해서 힘이 있어서 기꺼이 드릴 때도 있지만, 모세와 같이 아주 침체된 상황에서 어떻게 더 쏟아 붓느냐고 말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착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없는 것을 짜내서 그것을 받아야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상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떻게든 해야만 신이 통한다고 하는 것은 우상에게나 통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같은 방식으로 생각을 했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떨기나무의 불은 하나님이 신기한 불 쇼를 주신 게 아니다. 그동안 힘들었다고 불 멍하라고 불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나의 말을 듣는다면 지금 이것에 순종하고 반응한다면 ‘네가 너에게 불을 붙여 주리라.’ 너의 것이 타고 있다면 그 불을 다 거두고 내가 너에게 주는 불을 받으라고 하신다. 알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출애굽기 3:3-5절에,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밀 당의 천재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가까이 오면 죽는다. 떨기나무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늘 우리 걸 드려서 태워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오산인가? 하나님은 뭘 필요한 분도 아니다. 떨기나무 그림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뭘 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오산인가? 뭐 필요한 분도 아니시다. 원래 잘 뭐가 필요해서 창조하신 분은 아니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치자. 우리의 것이 필요했다 치자. 그런데 이 분 앞에 가면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가까이 하면 죽는다. 없어진다.
 
그럼 우리의 무엇으로 하나님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한 쪽은 사라져야 하는 것인데 불이 공존하는 것처럼 우리는 원래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이 임재하면 우리에게 임재하면 우리의 죄와 그분의 거룩의 따위는 우리는 소멸해야 하는 것이 맞는 존재이다. 그런데 떨기나무의 불처럼 우리가 존재하면서 심지어 우리의 것을 태우지 아니하면서도 하나님이 나 같은 존재에게 우리에게 그 인생에게 임하여 주신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은혜인 것이다. 이 은혜를 모르니까 내 것을 태워드린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신비를 깨달으면 하나님이 찾아주시고, 사용해 주시는 것과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이고 은혜이고 벅참으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실제 출애굽기 역사에게서도 그것이 증명된다. 
 
*출애굽기 1:22절을 보면,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이스라엘이 불어나는 숫자를 걱정하면서 바로가 비인격적인 정치를 펼친다. 남자아이를 나일 강에 던져버린다. 죽은 아이도 아니고 산 아이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던진다. 이 장면에서 떨기나무에서 이 이정표, 이정표로 세우는 두 갈레에서 한 갈레 길로 가는 바로를 볼 수가 있다. 그는 자기 왕권을 위해, 유지를 위해 이것저것 다 소모하고 태워버린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노동력만 소비했다. 그래서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생명까지 소모하려고 한다. 왜 그랬는가를 살펴보면 사람은 자신이 숭배하는 것을 닮아가는 것이 마련이다. 그래서 우상을 믿고 있으니 우상의 방법대로 자기 존재를 보호하려고 하고 연명하려고 한다. 그 보상의 방식은 무엇인가? 주변을 다 태워버리는 것이고 다 소모시키고 다 소진시키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지 않다. 물론 사탄이 여전히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을 다 몰아붙여서 한 쪽으로 몰아붙여서 무언가 다 태워지는 것처럼 다 소비되고, 소모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상과 다를 바 없다고 우리를 기만하려는 사탄의 아주 정교한 전략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다르시다. 결코 우리의 무엇을 태우거나 소비하려고 들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를 가만히 둔 채 사실은 뭐가 없어져야 하고 태워 없어져야 될 존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존재하게 하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위에 부를 입히셔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귀한 존재로 사용하신다. 아브라함과 약속에서 하나님이 질문을 다 쪼개게 하신 다음에 본인이 지나가셨다. 아브라함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것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성취가 되고 오늘 이 떨기나무에 불이 불 쇼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천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기만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될 거라는 계속 속삭여 대는 사탄이다. 저는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런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여러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더욱 사단의 계획이 더 정교해지고 강력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고결히 불을 붙이시는 하나님이시다. 내 것을 태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우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또 나에게 임재 하셔서 이같이 불타는 수준을 넘어서 빛나는 백성으로 제자로 쓰임받기를 소망하고 기대하는 귀한 인생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런 면에서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오늘 떨기나무에 불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이 사람은 방향감각이 다르다.
 
*출애굽기 3:6-10절에,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제 가라고 하신다. 모세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애굽으로 가야된다. 돌아가서 무엇을 하는가? 모양새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모세의 옛 영광이 회복되는 것인가? 애굽으로 돌아가니까,,, 이렇게 고생하다가 돌아가게 되는데 금의환향해야 되지 않겠는가?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동족을 위해 드렸던 모든 영광과 지위들이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제 모세가 돌아가면 그런 지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대적해야 하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세도 안 가겠다고 무지하게 버틴다. 여러분, 그럴 때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이마에 주셔서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게 뭔가 과거에 만족스럽던 어떤 지점으로 돌아가면, 그것보다 조금 더 수위가 높은 것이 그게 은혜라고 생각 될 때가 있다. 그럼 모세를 생각해보자. 모세가 나름 왕자였다. 공주의 자녀였으니까, 왕자의 신분에서 좀 더 좋은 자리인 왕의 자리로 가야 은혜이겠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방향은 애굽으로 간다고 그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다. 갈라지는 방향이다. 모세를 40여 년간 양치는 곳에 두시는 것은 앞으로 그의 혈기를 그동안 누그려뜨리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다음에 새로운 사역과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양새는 애굽으로 가지만 애굽에 가서 해야 할 일, 거기서 누려야 할 지위, 거기서 해야 할 사명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금 기도하며 간구할 것은 과거로의 회기가 아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옛 영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 지금 이 코로나 때문에 당하는 이 믿음의 고난이 반드시 활용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명, 새로운 역할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또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어떤 고점이나 정서적 만족이 없던 지점으로 그런 옛날로 돌아가는 게 은혜가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우리는 이런 시대에도, 이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지팡이가 되고 막대기가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의 임재 현장에서 내가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 일에 있어 누가 방향 감각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 나설 것이냐는 그 문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다. 여러분, 코로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간절히 소망한다. “주여!, 여기 있는 모세처럼 고난당하여 우리가 가게 될 곳에 그곳에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주옵소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부대로 우리를 사용해 주옵소서. 믿음을 가진 주의 백성들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이 고난 중에 주님 부르시고 찾으실 때, 반응하게 해 주옵소서.” 한 때 불꽃 같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지만 오늘은 꺼져가는 사람이 없게 해주옵소서. 한 때 불꽃 같이 하나님의 필요가 되려고 했지만 오늘은 어둠에 집어 삼켜지는 바로 그 연약한 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해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소멸하기 쉬운 나의 인생을 불 붓게 하시고 영원하게 하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귀한 축복과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이 떨기나무 사건으로 여러분께 감히 요청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 꽃 같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다 태워봐라, 다 헌신해봐라, 그 이야기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내가 불을 붙여 주리라.” 그 말씀을 하신다. 불꽃처럼 네 삶을 태워서 네 가진 것을 태워서 내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 아니라 ‘불같이 뜨겁게 나와 사랑하자,’ 그 요청을 하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대가 되는가? 하나님이 마음껏 내 인생에 불을 붙이시고, 내 인생을 새로운 지평을 향해 인도하시기를 소망하고 있는가? 이것도 억지로 짜내라는 것이 아니다. 불붙이시는 하나님이 불같은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부어 주실 것이다. 여러분의 헌신과 사랑이 하나님 앞에 충성이 너무나 귀했지만, 우리 모두 떨기나무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비춰보기를 원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의 헌신과 충성에 다시 한 번 불붙일 채비를 하면서 이 시대에 가라고 명하시는 그 방향을 향해 기꺼이 가고 기꺼이 쓰임 받는 귀한 인생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 처한 모든 현실에서 끝내 불붙이시고 빛내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오늘 주어진 현실을 이겨 나아가고 넉넉히 이겨 나아가는 귀한 성도가 되길 소망한다.
 
♣요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도 일하시는 줄 믿는다. 코로나 상황 중에 경제적, 정서적, 우리 인생 가운데 너무나 어려운 고난의 때를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찾으실 때마다 기쁨으로 반응할 수 있는 하나님 향한 불같은 사랑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희생에 더욱 불을 붙여 주실 것을 소망하고 고대하며 기꺼이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태워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 하시도록, 여전히 하나님이 이 땅 가운에 살아계심을 증거 하여야 한다. 우리를 통해 구원할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세가 양 무리를 치려고 호렙 산 밑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다. 떨기나무는 광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목이다. 그래서 사막의 열기 속에서 쉽게 불이 붙고 금방 타오르며 곧 사라진다. 그러나 모세가 본 그 떨기나무는 불이 붙었으나 타서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것은, 떨기나무와도 같이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고난과 압제를 당해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사그러들지 않고 타오를 것임을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 쓰신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주님 앞에 헌신하며 더욱 사모하고 성령중만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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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8월 22일)
제목: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해도 되는가?''
말씀: (사사기 6:33~40)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기도: 김우원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초빙)
ㅡㅡㅡㅡㅡㅡㅡ
 
*(사사기 6:33~40),
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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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예배-----

▶제가 살아온 지난 반세기 동안을 회고 해 보면, 돈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전보다 훨씬 더 커졌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돈에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한 정신과 의사에게서 들은 실험이야기이다. 침팬지가 말을 잘 듣거나 애교를 부리면 건포도를 주는 실험인데, 침팬지가 건포도를 먹으려고 말도 잘 듣고 큰 몸짓으로 애교도 부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에 침팬지가 애교를 부릴 때마다 건포도들 주는 것이 아니고, 플라스틱 칩을 주고 그 칩을 넣으면 건포도가 나오는 자동판매기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에 열 번정도 이쁜 짓을 하는 침팬지가 이 칩을 얻으려고 열 번 이상 이쁜 짓을 하는 반면에 하루 열 개씩 건포도를 먹던 침팬지가 여섯 개나 일곱 개를 먹고 나머지는 모아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칩을 한쪽에 쌓아놓고 칩을 볼 때마다 즐거워하면서 잘 때는 그 칩을 끌어안고 자는 모습을 실험을 통해 확인 했다고 한다. 여기서 플라스틱 칩은 돈이고, 침팬지의 이런 행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축척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신과 의사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이 부를 창조하는 사회가 아니고 부가 부를 낳고, 돈이 돈을 낳는 이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만물의 신을 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최근에 한 연예인이 ‘티끌모아 봤자 티끌이다. 그러니까 때로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하면서 ‘티끌모아 태산이다.’라고 하는 전통적 가치를 조롱하는 모습을 보았다. 과연 우리는 이런 탐욕자본주의 안에서 돈에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가?
 
우리는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답을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드온의 아버지의 집에 바알의 제단이 있을 만큼 사사시대에도 돈을 숭배하는 바알 사상이 횡횡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는데, 이 미디안의 핍박 때문에 이스라엘이 산에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파고 그 안에 살 만큼 피폐해졌다. 이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부르시고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라.” 이렇게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어떻게 바알과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가? 우선 기드온은 자기 자신부터 바알 숭배를 제거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기 아버지의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밤에 헐면서 ‘여룹 바알, 바알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만찬가지다. 남 이야기부터 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만물의 신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고, 혹시 우리 집안에 있는 만문에 있는 만문의 제단을 헐어야 한다. 어찌 됐던 기드온이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미디안이 13만 5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다. 이런 국가적인 위기의 순간에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고 기도온이 나팔을 불자 여러 지역에서 3만 2천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여 모여들었다. 오늘 본문에는 숫자가 안 나오는데, 뒤에 가면 숫자가 나온다. 그러면 기드온이 자원병들을 이끌고 미디안 군대와 전쟁을 한 판 벌일 것이라고 우리는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데, 그런데 기드온은 우리의 예측과는 달이 기드온이 양털을 가지고 여호와를 시험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이 생기는데, 전쟁을 앞두고 뜬금없이
 
1)기드온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2) 왜 하필이면 양털뭉치와 이슬의 표징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인가?
도대체 이 양털 뭉치와 이슬은 무엇이고, 이것은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3) 왜 하나님은 기드온의 양털 표징 시험을 허용하시는가?
 
성경에 하나님일 시험하지 말라고 여러 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왜 기드온이 시키는대로 행하시고 계시는가? 이런 질문들을 염두 해두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귀 기울이며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기도온이 양텅뭉치와 이슬의 표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36절에는 안 나오는데 39절에 보면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양털 표징을 구하는데, 그러면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의 내용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려졌다.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라”고 이미 하나님의 뜻이 알려졌는데, 문제는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과연 구원할 수 있을까? 한다면 기드온이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한 번 확인을 얻어내기 위해 양털로 시험하는 것이다. 기드온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지만 때로는 확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하는 영적인 전쟁은 무엇인가???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말한다.
 
*디모데 전서 6:9-12절에,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부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 한 복판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선행이다. 마치 기드온이 바알과 싸우도록 부름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만문숭배와 싸우도록 하나님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과연 나는 만문을 숭배하는 사람들 속에서 과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할 수 있을까? 라는 점에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기드온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인가? 양털과 이슬은 도대체 바알 숭배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를 알려면 이스라엘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포도나 무화과나 석류 같은 여름 과일이 성숙하려면 이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드온 이야기의 배경이 추수직후이다. 한 달에 평균 보름정도는 이슬을 볼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가나안 인들은 비와 이슬을 관장하는 신이 바알이라고 믿었다. 바알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르며, 기름이 비처럼 내리고 강들이 꿀이 되어 흘러내리고 여인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고 믿었다. 가나안 인들이 바알을 섬긴 것은 경제적인 풍요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긴 것과 동일하다.
 
*호세아 2:5절에,
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내가 사랑하는 자들, 나의 연인들이라며,(My lovers him) 이스라엘이 나의 연인들이라고 부른다. 바알이 지역마다. 있었기에 복수로 쓰이기도 한다. 왜 이스라엘이 바알을 나의 전부, 나의 연인, 나의 정부라고 왜 부르는가? 바알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다고 믿은 것이다.
 
▷바알이 준다고 믿는 것들
(1) 떡과 물: 기본 식량(basic nourishment).
(2) 양털과 삼: 의복(materials for clothing).
(3) 기름과 술: 양질의 삶을 위한 사치품(pleasant luxuries of the good life).
-바알이 기본 식량, 양털과 삼, 기름과 술을 준다고 믿고 바알과 연애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알종교는 도덕적인 요청을 하지 않은 채 내일의 삶과 복지를 약속하므로 인간의 탐욕을 호소하는 종교여서 바알의 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 신이기에 인간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신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을 나의 연인들이라고 여기고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 다음에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고 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나님은 하신다. 의식주를 해결해 줄 것이니 공평과 정의 긍휼과 사랑이 넘치는 제사장 나라를 만들고 살라고 살라 하신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가까이 있는 신, 물질의 풍요가 더 좋으니까 바알을 섬긴 것이다. 바알이 준다고 믿었던 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호세아 2:8절에,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사실은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바알이 준다고 믿은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실재로 하나님께서 엘리아 시대에 아합 왕이 시돈의 그 딸인 이세벨을 데려와 바알숭배를 강력하게 나라에 퍼뜨렸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비와 이슬은 물론 생명과 이슬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엘리야를 통해서 알려 주셨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바알을 무력화 시킨다. 바알 숭배자들은 기근이 들어 먹을 게 없었지만 그리심 시냇가의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고기로 먹이셨다. 바알의 텃밭이 시돈인데, 그 시돈 사람들이 굶주릴 때에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박 과부의 집에 보내셔서 그 과부의 집의 기름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했다. 시돈이 바알의 텃밭인데 바알을 믿는 사르박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를 살리셨다. 이렇게 바알이 다스린다고 믿는 시돈 땅에서 사르박 과부의 집에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사르박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참 생명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이미 선포하셨다. 시돈 땅에 가서, 사실 돌아와서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 4백 명과 대결하는데 천둥과 번개로 제단에 내리시고 비를 내리시므로 비와 이슬을 관장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의 양털 시험은 누가 비와 이슬을 관장하는지, 누가 진정한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주관자인지를 드러내 보여 달라는 표징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심을 믿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분이라고 한다면, 표징이 필요 없다. 그런데 모두가 돈을 번다고 미친 듯 뛰어다니고 있는데, 나만 바보처럼 가만히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이 들면서 확신이 사라지고 있다면, 표징을 요구해도 된다고 것을 기드온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기드온은 누가 진정한 신인지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한다. 기드온은 지금은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유혹 앞에 놓여있다.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모아서 집을 살 수 있었던 세대가 우리 세대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의 대가의 월급을 가지고는 집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방에서 돈을 벌 수 있다며 이것저것을 해보라고 유혹이 우리를 향해서 강력하게 우리를 손짓한다. 이전보다 더 교묘한 유혹 앞에 우리 모두 노출되어 있다. 빚을 내든 영혼까지 끌어오면 돈을 벌거라고 주장하는 우상들이 굉장히 많아졌다. 우상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부동산, 아파트 정도가 아니다. 그다음에 때로는 금, 코인, 최근에는 상품권으로 세금을 내면 절세를 한다는 등이다. 사사시대에 조상들을 유혹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신앙의 선배들이 알지 못한 교묘하고 새로운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유혹 앞에서 흔들림이 없다면 굳이 표징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드온처럼 마음이 흔들리거나 확신이 필요하다면 양털을 타작마당에 놓고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해도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공적인 타작마당이 아닌가? 우리 삶을 통해 누가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며 우리의 삶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타작마당인데 손님이 가장 많은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우리가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러한 타작마당인데, 이를 위해서 신앙의 선배들은 손님이 가장 많은 일요일에 주일 성수를 하기 위해 식당 문을 닫거나 택시 운전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기도했다. 양털 뭉치와 이슬의 표징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주일 성수를 하면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워주셨고 이상하게 토요일 날 손님이 두 배나 늘었다는 간증을 어렸을 때 많이 듣고 자랐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간증을 듣기가 어렵다. 최근에 성도들은 왠만 해서는 표징을 구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일부 성도님들은 기드온이 표징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시험이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고 반대한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믿는 이상만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시험의 삶을 들여다보면 표징도 구하지 않고, 믿음대로도 살지도 않는다. 표징도 안 구하면서 믿음대로 산다면 최선이다. 표징도 안구하고 믿음대로 살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혹시 흔들려 가지고 마음이 의심이 생긴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표징을 구하라고 요구하신다.
 
*이사야 7:10~11,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먼저 요구하신가?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한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그런데 북방의 이스라엘 왕과 다메섹 왕이 연합해서 남방 왕, 아하스를 공격해오니까
 
*이사야 7장 2절에,
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이제 왕과 그 남방 유다 백성들이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데 그 때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북방 왕과 다베섹 왕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위로하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한다. 얼마든지 표징을 통해 아하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아하스는 대답을 한다.
 
*이사야 7:12절에,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진짜 겉으로 보면 경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하스는 이를 핑계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이것을 간파한 이사야가 구하지도 않은 징조를 아하스에게 준다.
 
*이사야 7:14-16절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이것은 너무나 잘 아는 임마누엘 징조이다. 젊은 여인이 이제 아들을 낳으면 그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인데 그 아이가 젖을 떼기 전에 아하스 왕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북방 이스라엘 왕과 다메섹 왕의 땅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잉태를 해가지고 젖을 떼기까지는 한 3년이 걸린다. 3년 안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 주면서 아하스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이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임마누엘의 표징을 보여 준 것이다. 이렇게 표징을 보여주면 믿고 순종해야 하는데, 그런데 괜히 아하스가 표징을 구했다고 표징이 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저는 아이 셋을 키우면서 필요하면 표징을 구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특별히 공부가 중요하니까 대학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있는 공간을 드려야 한다고 했다. 주일 성수를 해야 하니까 학원가는 것을 반대했다.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오후에 학원에 가는 것도 허락지 않았다. 큰 아이가 중3 때인데 성적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분당도 입시에 과열했다. 아내랑 둘이 합세해서 예배를 드리고 학원가게 해달라고 저에게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래서 제가 여러 번 반대를 하다가 표징을 세웠다. ‘주일날 학원을 가봐라. 성적이 잘 나오는지를 보자.’ 만일 성적이 잘 나오면 대재앙이고 성적이 안 나오면 재앙이다. 물론 아프거나 그러면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코로나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인데 대구에 나훈아 콘서트에 4천 명이 모였다. 제가 얼마짜리인지를 뒤져 보았더니 R석이 16만 오천 원이고, S석이 14만3천원 이고 A석이 12만 천원이었다. 아니 콘서트로 비 대면으로 안하고 가서 보는데, 대면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데도 비 대면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면서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왜 콘서트는 비 대면으로 안하는가? 왜 정치인들은 대면으로 다니면서 그렇게 말하고 왜 비 대면으로 찍어가지고 돌리면 되지 않나? 얼마든지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시험 준비를 하려고 시간을 벌기 위해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겠는가?
시험 타작마당에 앙 털 뭉치를 놓고 표징을 구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막내가 대면 예배를 드리고 시험기간에 성적도 잘 나왔다. 그러니까 한 번에 되고 안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안 될 수도 있지만, 대면 예배를 드렸는데 시험 준비를 안 해놓으면 성적이 안 나온다. 준비 잘 하고 대면 예배를 드려야 그래야 성적이 나오는 것이지, 주중에도 놀고 주일에도 놀면 당연히 성적이 안나온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려면, 시험 준비도 잘 하고 주중에 1.2배를 해놓아야 그다음에 주일에 쉬면서 예배를 드리면 성적이 나오는 것이다. 다 놀면 성적이 안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중에 열심히 하고 그리고 주일에 시간을 하나님께 나와서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친구들도 만나고ㅈ 함께 찬양도 하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아야지 이 영혼이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인데, 도대체 좋은 대학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를 안 보내고, 시험 기간만 되면 반 토막이 되는 이 한국 주일학교 상황은 심각한 상황이다. 표징을 구하여야 한다. 되나 안되나 표징을 구하라. 안 나와서 성적이 잘나오면 대재앙이다. 그렇다고 성적 떨어지라고 기도한 적은 없다. 보면 뻔하니까. ...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표징을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시험해 보라고 초청한다.
 
말라기 3:10절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어떤 해석자들은 백성들이 너무나 고갈해졌기 때문에 자신을 시험하라고 하시니까 매우 비상적인 상황이며, 따라서 일반적인 원칙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다른 해석자들은 나를 시험하라고 한 것은 수사법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험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잘 드리라는 권면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본문을 오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하라는 명령에 뭐가 붙었냐면 ‘제발’ 영어로 Please,라고 하는 ‘나’라는 조사가 붙어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하시냐면 ‘제발 나를 시험해보라’고 하는 뜻이다. 믿음이 사라졌던 약속을 믿기가 어렵든 상관없이 제발 나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권면은 핑계를 대면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불신앙일 수 있는 것이다. 시험하지 않고 드린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시험하라고 하시는가?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에게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늘 문은 노아와 홍수를 가리키는 어구이다.
 
*창세기 7:11절에,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홍수 때처럼 직접 하늘 문을 여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늘 창문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겠고 하시는 것이다. ‘붓다’라고 하는 단어가 텅 비게 만들다. 이다. 하늘의 문을 열어서 복을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쏟아 부어 텅 비게 만들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얼 약속하시는 것인가? 시험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라기서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초청하신 것을 보면 기드온의 양털의 시험을 받아들이셨는지 이해가 도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첫 번째 시험에 긍정적으로 답을 하셨다. 양털에만 이슬이 모인 것이다. 이슬을 짜니까 물이 그릇에 가득했다. 아시다시피 공기가 따뜻하게 하면 이슬이 맺히는 것인데 짜니까 그릇에 가득했다.
 
여러분 우리가 그 캐시미어, 양털을 좋아하는가? 이것을 입으면 수분을 흡수한다고 한다. 그래서 양털로 만든 것을 입으면 가벼운데다가 이게 수분이 흡수해서 쾌적한 것이다. 양털이 물을 흡수하니 양털에 이슬이 모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마당에는 없고 아시다시피 딱딱한 이런 곳에 공기가 따뜻한 공기가 찬 공기에 닿으면 이슬이 맺히는 것인데, 양털에 이슬이 맺히기도 하지만 주로 다른 것에 많이 맺히기도 한다. 양털을 짜니까 그릇에 물이 가득한 것이다. 기드온이 만족하지 않고 그러면 양털에는 이슬이 없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신다. 그래도 행하셨다고 했다. 마치 기드온의 명령에 순종하시는 것처럼, 그대로 행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단순히 기드온에게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때로는 기드온이 요청을 하니까 그대로 행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왜 기드온의 시험을 긍정적으로 응답하셨을까? 확신과 신뢰가 부족한 기드온을 이해하고, 믿음이 많은 기드온을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시다. 사랑이 많으신 여호와는 기드온을 전쟁의 용사로 훈련시키기 위해 오래 참으신 것이다.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요청도 들어주시면서 기드온을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기드온을 용사로 만들어 가신다. 그래서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부자가 되려는 전투에 나설 건지, 아니면 선한 싸움을 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물론 이때 표징을 구하지 않고 담대하게 선한 싸움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최선이다. 그러나 표징도 구하지 않고 선한 싸움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최악이다. 그렇다면 이럴 때 기드온처럼 양털 표징을 구하면서 선한 싸움을 싸운다면 이것은 차선일 수 있다.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해 보라가 하신 말씀은 십일조를 내라는 강요가 아니다.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돈을 섬기는지 솔직히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제도이기 때문에 폐기되었다면서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만 할 뿐, 실제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안 드리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하늘 창고를 여시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하늘에 양식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라기서 핵심 메시지이고 바로 기드온이 구한 양털과 이슬을 구한 핵심인 것이다.
 
※중국 내지 선교에 창시자인 허드슨 테일러 역시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표징을 맛본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위해서 표징을 구했다. 그의 자서전에 오직 하나님께만 메어 달리리라고 한다. 영국을 떠나기 전에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테일러가 병원에서 의사의 조수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의사가 자신이 바빠서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자신의 봉급날이 되면 알려 달라고 했는데, 테일러는 의사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인의 기억을 상기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이 안 알려주신다. 의사는 잊어버린다. 봉급날이 지났는데 주인이 기억을 못했다. 테일러가 며칠이 지나도록 기도만 했다. 당시 주머니에 1실링의 화폐만 남아 있었는데 그러던 주일 저녁에 가난한 사람이 자기 아내가 죽어간다고 기도해달라고 한다. 허드슨 테일러가 처음에는 자기가 2실링 5페니만 있으면 그 형제에게 줄 수 있을텐데,,, 라고 생각했을 뿐 있는 돈을 주지 못했다고 했다. 병든 여인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돈이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는 법을 신뢰하는 삶을 살 준비가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내 주었다고 한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의 일기에 적어놓았다. 축복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이 사라졌다고 한다. 불쌍한 여인의 목숨이 구원 받은 게 다가아니고 바로 나의 영혼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날 편지를 받았는데, 가죽 장갑한 켤레와 반 파운드 금화가 들어 있었다. 큰 소리로 외치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열 두 시간 만에 4배로 갚아주시다니요! 이런 수지맞는 일이 어디 있나요!” 그 자리에서 팔리지 않는 천국 은행에 내 수입을 저금 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았다. 대학 한 번 못가고 더구나 선교훈련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의료학교의 학력과 자기의 경험만으로 허드슨 테일러 6천 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일을 하는 창립자가 된 것은 표징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와 재물을 강조하는 물질적인 세상에서 우리를 어떻게 선한 싸움을 싸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디모데전서 6:9-10절에,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가 왜 시험과 올무에 떨어지는가? 부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파멸과 멸망에 빠지는가?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해로운 욕심이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일찍이 간파했다.
 
*예레미야가 3:24절에,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우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파멸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50년대 중반부터 태어난 베이붐 세대가 은퇴하고 재산이 이제 자녀들에게 넘어가고 있다. 만일 자녀들이 돈을 사랑하여 십일조나 헌금을 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쓰지 않게 되고 허망한 데 사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돈과 재물이 우리의 자녀들을 삼키고 말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왜 우리가 유혹을 받는가? 탐욕 때문이며, 왜 우리가 믿음에서 떠나는가? 돈 때문이다. 왜 우리가 많은 빈 심으로 자기를 찌르고 있는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디모데전서 6:11-12절에,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싸우라는 단어는 수 천 만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원형 경기장에서 죽기까지 싸우는 검투사의 싸움을 묘사할 때 사용된 동사이다. 필사의 노력을 하다. 목숨 걸고 싸우다.는 뜻이며 승리로 결론 날 때까지 영생을 목표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며 오직 선한 싸움에 구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 때문이다. 우리가 쌓아놓은 돈은 한 푼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기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아직 부자가 아닌데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싸움이라면, 이미 부유한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7-18절에,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의 자기를 위한 선한 터, 선한 터를 쌓아 참되 싸움을 하는 것이다. 부한 자들에게 내리는 말씀 가운데에도 선하다는 동사가 선한 성, 선한 성을 쌓으라고 나와 있고 그 다음에는 단어는 좀 다르지만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신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그것을 위해 애를 더 써야한다. 없는 것 가지고 그냥 족한 줄로 알라고는 하지 않았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이해서 애를 쓰고 그것이 있으면 만족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며 이미 부유한 분들은 선한 사업을 하고 선한 터를 쌓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하면 부한 대로 각자가 담당해야 될 선한 싸움이 따로 있는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대리석으로 우리가 선한 조각품을 만들면 된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무얼 가지고 가겠는가? 저만 가지고 간다. 저의 싸움의 결과와 저의 행위와 믿음을 가지고 간다.
 
칼뱅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가난을 주신 것은 그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보기 위해서이고, 부자에게 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은 이웃을 어떻게 섬기려고 하는지 보시려고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울 수 있는가?
 
*히브리서 13:5절에,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하고,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지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면 끝내 영생을 취할 수 있다. 바울은 말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4:7-8절에,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임박한 죽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도로서 30년간의 사역을 회고해보면서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바라본다.
-왜 하필 의의 면류관인가?

-첫째로, 바울은 그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의 삶의 내용은 의였고, 의의 면류관을 받기를 원한다.
-둘째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잘 싸웠는데 믿음의 선한 싸움은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경건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것인데, 의가 대표적인 미덕이니까, 의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로, 의로우신 재판장이사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때, 의로운 기준을 가지고 공정한 판결에 따라서 의로우신 재판장님이 우리에게 의로우신 것이기 때문에 의의 면류관(冕旒冠)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양털 표징을 구하면서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마침내 3백 명의 용사로 13만 오천 명의 미디안 군대를 이기고 승리한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이 선한 싸운다면 만문과의 전쟁에서 끝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울처럼 우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의 달려갈 길에 믿음을 지킨다면 의로우신 재판장님이 우리에게도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주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씌워줄 의의 면류관을 고대하며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우리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요약
우리에게 주신 이 권면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때로 필요하다면 우리의 삶에 타작마당에 표징을 놓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신을 삶 가운데 주실 것을 기도하는 그 표징을 받아서 담대하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계속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연약함이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직 사랑과 은총과 자비로 연약한 인간을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의 구름이 걷히지 않아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사정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려 확신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의 달려갈 길에 믿음을 지킨다면 의로우신 재판장님이 우리에게도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주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씌워줄 의의 면류관을 고대하며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우리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내습했다. 수많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은 기드온이 살던 성읍에서 멀지 않은, 므낫세 지파의 심장부에 있는 이스라엘 골짜기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이 충만하여 보수의 때가 이르렀음이 입증되었다. 이제 그들의 약탈은 종말을 고하고 도리어 약탈당할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들은 기드온의 타작을 위해, 타작마당의 곡식단과도 같이 모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을 통하여 기드온에게 활기를 집어넣으셨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즉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겉옷과도 같이 그에게 입혀졌으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쇠 미늘 갑옷과도 같이 그에게 입혀졌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위해 부르신 자를 그 일에 합당하게 만드시며 격려하신다. 기드온의 나팔 소리는 그의 이웃들에게 원기를 불어넣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①아비에셀 사람들은 비록 최근에 그가 바알의 단을 헐어 버린 것에 분노하여 그를 범죄자로 처형하도록 정죄까지 했었으나 이제는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그를 도우러 용감히 나아왔다.

②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그와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아셀과 납달리 지파까지도 그의 소집에 응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표징으로써 그들을 만족시키셨다.
-표징을 보여 달라는 기드온의 요청이다.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께서 나의 불신앙을 도와주소서"가 이 요청의 의미이다. 그가 첫 번째 표징과는 반대 현상인 두 번째 표징을 다시 요청하게 되었을 때, 그 요청이 하나님에 대한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불신임처럼 보였으므로 제발 분노하지 말아 주시기를 바라는 매우 겸허한 사과를 드리며 요청했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때, 우리는 큰 경외심을 품고, 즉 우리의 부족을 인식하며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구해야 한다. 그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응답하신다. 참된 신자들이 비록 나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다정하신가를 보라. 기드온은 양털이 젖고 땅은 마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슬이 아무리 조금 내리더라도 양털은 그것을 흡수해서 머금고 있을 것이므로 이 일에 특별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라는 이의가 생기지 않도록 그는 양털에서 충분한 양의 물을 짜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밤에는 땅은 젖고 양털은 마르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 일은 이루어졌다. 심지어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통해서까지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큰 안위를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끈덕진 요구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의심과 불만을 해결해 주시기까지 하신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 내려지기를 원했는가? 그는 양털이 이슬로 젖은 것을 봄으로써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슬처럼 임하시기를 원했는가? 보라, 온 땅이 젖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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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8월 21일)

제목: ''뼈 계곡에서 글로벌 계곡으로''
말씀: (에스겔 37:4~6, 28)
기도: 신대옥 안수 집사님
말씀읽기: 김다인(고등 1,2부 학생), 선한(다니엘 중등부 학생)
설교자: 김대순 부목사님(SaGa 제자훈련 아카데미 학장님)
마무리 기도와 인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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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7:4~6, 28)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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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동영상.


▶이른 아침에 온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한다. 우리 살아계신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글롤벌 곳곳마다 역사하고 계신다. 할렐루야!!~ 제가 이번에 4주 동안 해외에 다녀와서 모자를 하나 사왔다. 머리가 벗겨져서 커버하기 위해서 사온 것도 있지만 제가 이 모자를 사온 것은 Fullyvaccimid!! You can hug me. 코로나 때문에 기가 죽어 있어서 일부러 사왔다. 물론 나라에서 주는 백신도 받아야 되겠지만 한 번 받으면 영구적으로 예수님의 백신을 맞을 때, 하나님과 저에게 누구를 만나든지 안아주실 수 있도록, You can hug me. 안아주실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특별히 안아주시는 본당에 와서 오늘 아침에, 이아침에, 이 새벽에,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실 때, 주님 품에 함께 안겼으면 좋겠다. 정치가들은 시월까지 한국 모든 분들 가운데 70퍼센트가 백신을 맞는다고 계획을 하고 있지만 저는 기도한다. “하나님, 대한민국 이 땅에 70퍼센트 이상이 예수님의 백신(vaccine)을 맞아서 구원을 얻어서 주님의 안아주심을 체험하는 우리나라 되길 축복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하루에 생존을 위해서는 세 번의 안아주심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루에 성공을 위해서는 여섯 번의 누군가로부터 안아주심을 받아야 하는데, 하루에 창조적인 살을 위해서는 아홉 번의 안아주심이 필요하다.
 
특히 코로나 상황 가운데 기죽지 말기를 바란다. 그래서 저희들이 복음을 위해 다녀왔다. 제 이름이 김대순인데 법적 이름은 대니얼이다. 영어이름은 다니엘이다. 구약에 보면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있다. 그의 친구 기억나는가? 그래서 사랑의교회 다니엘과 세 친구가 가나에 다녀왔다. 그때는 박수를 쳐라. I say You.- )유이상 목사님), 장은진 킴, 그리고 강건우 목사님, 영어이름이 없어서 가나에 가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원준 목사님은 매튜(Matthew), 강건우 목사님은 폴(Paul)강이다. 4사람 하나님의 은혜, 코로나 사태로 힘들지만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 모두 기도해 주셔서 장로님 집사님들 뒤에서 기도해주신 덕택으로 잘 다녀오게 되었다. 제자훈련과 DMGP, 사랑글로벌아카데미, 여러 가지 확장을 위해서 다녀왔다. 4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왔다. 40시간 비행기 안에 있었고, 40시간 운전을 했다. 미국에서,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음성이 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코로나 때문에 눌러 있었는데, 주님께서 제게 주신 음성에서 “코로나 계곡에서 글로벌 계곡으로 담대히 가라” 오늘 그래서 우리가 나누고 싶으 내용이
 
본문에 “뼈의 계곡에서 글로벌 계곡으로 함께 갑시다”.이다. 사랑의교회는 온 장로님과 온 성도들이 글로벌 상태이지만 글로벌 코로나 상태이지만, 글로벌 계곡으로 전부가 해야 할 비전이 있다. 이제는 제자훈련이 아니라 제자 선교하는 교회로, 이제는 주일학교가 아니라, 글로벌 영적 지도자들을 세우는 선교하는 우리 주일학교, 행정 장로님이 아니라 선교하는 장로님, 권사님, 안수님, 집사님, 순장님들이 이제는 글로벌 제자가 되어야 되겠다는 그 마음으로 오늘 본문을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다. 오늘 본문은 37장이지만,
 
본문에 33-48장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영공이 떠났다. 예루살렘이 멸망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주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시 뼈를 세워서 군대를 만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글로벌까지 이루고 가기를 스토리가 33장에서 마지막 48장 그 내용가운데 오늘 37장 내용을 보는 것이다. 특별히 그중에 38-39장에는 전쟁의 내용이 나온다. 지금 코로나 상황은 의학적인 문제도 있지만 실지로는 영적 전쟁이다. 38-39장에 글로벌한 영적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적인 말씀을 주신다. 여러분이 설교를 많이 들으셨을 것이니 37장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아니면 종말적으로, 그 내용들을 많이 들었겠지만 오늘 특별히 우리가 21세기의 코로나 상황에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제자라서 받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이 4가지를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리겠다. 이 네 가지를 거기서 끄집어냈다. 제가 주님의 제자로서 이 말씀을 보면서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드릴까를 그 네 가지를 오늘 함께 나누겠다.
 
I.흡입력(Receptivility이다.
 
*(에스겔 37:4~6, 28)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지금 코로나 상황에서는 어떤 상황서도 우리가 뼈 같은 삶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주님이 주시고 말씀하실 때에 바싹 말라있는 뼈들이 해야 될 첫 번째 것은 어린 아이가 어머니 젖을 빨고 우유를 받아 먹는 그 간절함처럼 흡인력 있게, “주님 주십시오. 먹겠습니다. 받겠습니다. 채워주세요.” 아니면 화석화된다. 화석화 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편하기 때문이다. 편안하니 화석화를 만들게 된다. 결국은 뼈로 남게 되어 계곡에 쓸모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갈망과 배고픔으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받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가뭄을 떨쳐 나와서 우리가 점프되어야 할 첫 번째 ‘뼈의 계곡에서 글로벌 계곡’으로 가려면 정말 여러분과 제가 사랑의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지막 그 모든 열방이 주님을 알기를 원하는 그 하나님의 역사에 참석하기를 원한다면 저희들이 이 시간, 매주, 매일 마다 해야 될 것이 흡입력이다. Receptivility이다. 주님이 주실 때,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가나에 가서 목사님들, 감리사들, 여러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요청하는 것이 있다. 우리 가나에도 사랑의교회처럼 날샘(날마다 솟는 샘물)을 통하여 큐티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요청이 왔다. 저희들은 2500원으로 쉽게 살 수 있지만 제가 국제제자훈련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여러분, 코로나 팬데믹에 오히려 날샘이 더 많이 팔려야 되는데 많이 구입하는 성도가 적어졌다고 전해 듣고 저는 충격을 받았다. 특별히 코로나 사태인 상황에서 저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물론 대 예배를 통해서 일주일마다 주시는 영적 에너지를 받지만 하나님께서 매일 마다 다락방이든지, 친구든지,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배우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은 매일 주님 앞에 하는 것이다. 저도 설교를 하기 위해서 QT를 한다. 주님 저도 목마릅니다. 메마릅니다. 40시간 미국 오하이오 주와 미시간을 거쳐 켈리포니아로 오는데 11개의 주를 지나는데 차안에서 주님과 대화하면서 ‘주님 저에게 처음 주님 만났을 때, 주님이 어떤 이야기를 하시든지 흡입력을 회복하여 주시옵소서.!“를 기도했다. 사랑의 교회는 절대 화석화되지 않고 순장을 할수록 주님 말씀 받는 그런 귀한 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II. 역동력(Vitality)
역동력이 없고 생명력이 없는 뼈들이 맥박이 쾅쾅 뛰기 시작한다. 코로나 때문에 통제를 받아서 숨 쉬는 것이 거북할 수도 있겠다. 나라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힘들다. 제가 미국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유월에 강릉에 갔다. 바닷가에서 미국을 향하여 보면서 제가 큰 소리로 외쳤다.
-President Biden, Lead America well!!!~(바이든 대통령님, 미국의 정치를 잘 해주세요!!!) 그래서 이번에 남가주 캘리포니아에 가서 유포비치라는 곳이 있다. 나중에 남가주를 가보길 바란다. 해변 가에서 한국을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무엇이라고 외쳤는지를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오늘 본문에 보면 ‘생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생기(breath)’, 숨, 5절, 6절, 8절. 9절, 10절에 히브리 단어에 생기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여러분이 창세기 1:2절에 보면, 모든 것이 혼동이 되었을 때, 여호와의 신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역동력 있게, 생기 있게,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군대로, 글로벌 계곡으로 가려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어서 흡입력으로 해서 받아야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코에 우리 삶 가운데 매일 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할 때, 우리가 움직일 수 있다. 11절에 소망이 없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생명이 들어가면 소망이 있다. 살아있다는 증거는 생동력이다. 역동력이다. 생동력과 역동력이 없는 것은 죽은 시체 뼈와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도 사도요한을 통해서

 
*요한복음 1:12절에 보면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새로운 주님의 제자로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여호와를 영접하라고 되어 있지만, 실재로 그 단어는 받으라는 뜻이다. Receive이다. 그 동일한 헬라어 단어가 있다.
 
*요한복음 21장 22절에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제자들을 보시고 힘없는 제자들을 보시고 뼈의 계곡이 있는 계곡이 있는 소망 없는 제자로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 그 받으라는 단어와 요한복음 1:12절에 말씀처럼 하나님이 자녀가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받아야 된다는 단어와 헬라어의 같은 단어이다. 예수님도 받아야 하지만 우리 성령님도 받아서 살아 있는 역동력 있는 역동성 있는 다이나믹한 그런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이 아침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안아주시면 좋겠다. 저는 4주 동안 코로나 테스트를 다섯 번이나 받았다. 한 번 할 때마다 거의 150$-180&이다. 여행이른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한 주 에 한 번의 코로나 테스트를 받았다. 저는 이 생각을 하면서 왜 주님의 교회 백성들이 예배들 드려야 되는 지를 그것을 깨달았다. 공항을 통과하기 위해서 어떤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 내 몸에 좋지 않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을 하기 위해서 PCR테스트를 다섯 번이나 했다. 적어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역동력 있는 신앙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려면, 매주 주님의 성전에 함께 모여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해서 가능하면 오프라인에서 예배를 통해서 백신을 맞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몸과 삶 가운데 아직도 좋지 못한 백신이 있는가에 대히서 이런 것들을 주님께서 매주 마다 점검을 해주셔야 한다. 매일 마다 큐티를 하지만 주님의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좋겠는가!! 미국 중부 쪽은 마스크를 안 쓴다. 그렇게 다닥다닥 앉는다. 코로나가 언제 왔는지 모를 정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나라에서 정책이 있지만 우리 성도님들에게 그 날이 속히 오도록 그리고 적어도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상황이 이렇지만 제 가슴 속에서는 영적 맥박이 쾅쾅 뛸 수 있도록 뼈 계곡에 머물러서 기죽지 않고, 영적으로 갈 수 있도록 살 수 있도록 나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세요’를 주님이 축복 주시길 원한다. 흡입력, 받아야 한다.
 
미국에서 책을 30권이나 사왔다. 이번에 사온 책 중에 펜데믹에 제자훈련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도 많이 하고, 그래서 제가 사온 책 중에 하나가 ‘Creat future“이다. 미래를 창조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destructive thinking이다. 그동안에는 Think outside the box. 박스 바깥쪽으로 생각 해석 했지만 이제는 박스를 파괴하세요. 그런 생각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어떤 상품을 팔기 위해서 저렇게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성령과 새로운 것에 대해서 흡입을 받고 그 다음에 역동력 있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되는 것이다.
 
III. 단결(UNITY).
오늘 본문에 갈라졌던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뼈가 모일 때, 공동체가 된다. 하나가 될 때, 정치성이 회복된다. 갈라지면 또 과거의 뼈 상태로 간다. 그래서
 
*에스겔 37:19절에 보면
19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한 막대기가 되었고, 두 개가 하나가 되었다. 저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특별히 리더 쉽에 있는 담임 목사님을 비롯하여 장로님, 지금은 작은 일 가지고 테클 걸때가 아니다. 큰 그림을 보고 하나되게 도우시길 바란다. 그리고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어디를 가든지 정말 피스케이커(Peacemaker)가 되어야 한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두 개로 나누어졌던 나라가 하나가 되고 한 임금이 한 임금(King),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민족이 아니라, 갈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그런 것이 일어나도록 주님께서 축복 주셨으면 좋겠다.
 
저는 이번에 가나에서 여러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같이 기도하면서 격려했던 그런 부분은 지금 코로나 때문에 가나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교회가 힘들어 할 때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 되는 데에 힘쓰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하실 때,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저들이 하나 되게 도와주옵소서.” 17정 바로 전에 보면 16장에도 있다.
 
*16:32절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가 코로나 같은 상황을 당할 때,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 교역자들, 당회, 순장님들, 권사님들, 어린아이부터 포에버까지 하나 되는 그런 축복이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본문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37장에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함께 모여 있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
-첫 번째는한 가족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46장에 보면 회복되어 하나가 되었을 때, 드러나는 첫 번째 표현이 예배이다.
-두 번째는 비전을 위해서 같은 사명을 가는데 같이 나간다.
 
※저희들이 대표로 네 목사님이 함께 갔는데, 기도하고 헌금하신 분들, 자료를 준비해 주신 권사님들, 선교 담당 장로님 등 여러 분들이 담임 목사님 가시는 것도 격려해 수신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우리끼리 간 것이 아닌 하나 되어서 갔기에 계속 사랑의교회에 하나 되는데 코로나의 상황에서 우리 자손들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겼냐고 물어보면, 우리 자녀들에게 그 때 힘들 때, 우리는 하나된 것과 자리를 지킨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흡입력, 역동력, 단결력이며, 네 번째는 모빌리티이다.
 
 
Ⅳ. 추진력(Mobility)
-뼈들이 모여서 이제 군대가 되었으면 두 다리로 서야 된다. 영어에는 They stood as army. 하나님의 군대로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코로나 상태는 우리를 주저앉게 만든다. 기죽어서 일어나지 못하게 만들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잘 것 뼈들이 모여서 함께 모였을 때, 졸부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글로벌 가는 멋있는 군대가 되었다. 저는 그래서 코로나 사태는 더 제자훈련을 잘해야 하고, 더 선교와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위해서 더 열심히 할 귀한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아프칸니스탄의 사건을 다 들으셨을 것이다. 아마 안타까워한다. 미국과 유럽들이 말한다. 백억 조(ten billion)가 넘는다. 20년 동안에 갖다 부었는데 탈레반 내부 지도자가 왜 이길 수 있는지의 인터부를 듣고 깜짝 놀랐다. 교회에 던지는 주님의 음성이 오늘 에스겔 37장에 있다. 마른 뼈들이여, 일어나서 별동대가 되라. 큰 부대가 되었다고 한다. 영적 사관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여러분 교회가 .세미터리(Cemetry)가 되어야 할까? 세미너리(Ceminary)가 되어야 할까? 교회는 모든 분들이 훈련 받아 하나님의 군인으로서 글로벌까지 가서 오늘 본문 28절처럼,

 
*에스겔 37:28절에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 가운데에 있으리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을 열국이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열방이 가나 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두바이, 중동, 아프칸니스탄, 유럽, 모든 곳에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오늘 에스겔의 핵심이다. 저는 그래서 사랑글로벌 아카데미를 섬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여러분을 초대한다. 잘모르지만 입학원서를 써보라. 지금도 무릎꿇지 않고 당당하게 두 발로 강하게 쓰는 주님의 군대가 사랑의교회를 통해서 대한민국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 가나의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주님 앞에 자신도 드린다. 한국에 와서 41년 동안 조국을 떠나 있다가 왔기에 한국 여러 지역을 잘 모른다. 한 번은 양평에 갔다가 지평리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친척과 조그만 박물관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집에 와서 깜짝 놀랐다. 지평리 전투를 아는가?
1950년 2월 12-15일까지 영하 20도에서 산악 전투에서 유엔군과 미국과 불란서 장병 5600명이 중국 군대 39단 5만 명과 전투를 벌였다. 그 지평리 전투에서 중국을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을 준 것이 그 승리의 첫 번째였다. 다시 말해서 한 명 잘 훈련된 사람이 열 명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지평리 전투에서 이끌었던 몽클라르 군인이있다. 이 분은 원래는 별이 세 개인 사람이다. 그런데 한국 전쟁 소식을 듣고 이 전투에 지원을 하려고 별을 떼고 원래 장군은 전방에 갈 수 없다. 이분은 오히려 중령으로 계급을 낮추어서 한국에 와서 그 전쟁을 이기게 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하나님, 코로나 사태인데 무슨 계급이 중요합니까? 무슨 나이가 중요합니까? 계급장 다 떼게 해주세요.” 중장이 중령으로 계급 낮추어서 대한민국에 필요해 의해서 왔다면, 사회가 달아준 계급장, 교회가 달아준 계급장을 다 내려놓고 우리는 동일한 주님의 군인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사랑의교회는 질서는 있지만 그런 계급장에 대해서는 주님이 다 정리해 주셔서 누구나 동일하게 같은 선상에서 추진력을 “주님의 병사로 가겠습니다.”.하는 마음이 되어 열방이 주님을 알 수 있도록 축복하시길 기도한다.
 
셈슨 키모 장로님, 영국 사람이다. 비즈니스하는 분이시다. 장로로 섬기고 있다. 칼 세미나에도 여러 번 오셨다. 제자훈련에 미쳐있다. 이번에 개인적으로 도전을 받았다. 그 교회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교회이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다. 소명을 주셨다. 그 분이 섬기는 교회를 떠나서 슬럼지여게 교회를 짓고 있다. 너무 멋있는 분이다. 행정도 좋지만 영혼을 위해 교회를 개척하는 셈슨 장로님께 이런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아프리카와 세계 곳곳마다. 계급장을 떼고, 하나님의 앞에 주님의 병사로, 자녀로, 함께 손을 잡고 나가는 좋겠다.
펜데믹이 온 이후에 교회는 늘 성장했다.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기독교의 상승이란 책이 있다. 그 책에는 주후 165년에, 265년에, 펜데믹이 일어났다. 이 상황이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가 개인의 삶이 영적으로 부흥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을 하길 소원한다. 팬데믹을 오히려 팬테스틱으로 하실 것이다.
 
♣요약
우리가 21세기의 코로나 상황에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제자라서 받을 수 있는 영적 교훈이 4가지가 있다. 흡입력, 역동력, 단결력, 추진력으로 주님의 병사로 하나 되어, 예배와 사명을 위해서 하나로 함께 가야 한다. 또한 영혼을 위해 늘 글로벌을 목표하는 우리 교회의 훈련에 더욱 관심과 사랑으로 기도하고 후원하고 함께하여 주님의 자녀로서 계급장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서 뼈의 계곡에서 단결계곡으로 가서 글로벌 계곡으로 가야 한다. 모든 사역이 회복되게 기도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여 함께 가야한다.
 
-마른 뼈들의 환상과 두 막대기의 상징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묘사하며, 종말론적으로 다윗 왕권을 통해 임하는 메시아 왕국을 예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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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8월 18일)
제목: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말씀: 역대하 20:1-13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임상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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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하 20:1~13,
1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2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
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4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5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6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7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8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9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10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돌이켜 그들을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11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1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13 유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아내와 자녀와 어린이와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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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수요저녁기도회 예배 가운데 모두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길 바란다.
-지난 8월 11일 헤드라인을 장식한 하나의 기사의 제목이 있었다. 그 기사 제목이 무엇이냐면 이스라엘 신규확진 반 년 만에 최다, 영국 전문가 ‘집단 면역 불가능’이란 제목의 기사였다. 델타변이를 비롯한 각종 변이 바이러스들이 점점 커지자 세계 안에서 코로나가 점점 확산되는 것을 기사로 담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 내용 가운데 이런 기사 내용이 있었다. 바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개발을 주도했던 옥스퍼드대학의 엔드류 폴라드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집단면역이 불가능 할 것으로 예측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코로나가 온 지 어느덧 1년 8개월이 지나고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로 있었다. 백신이 나오면 모든 문제들이 ‘잠잠해지겠지’ 라는 커다란 기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저는 이 기사 내용을 보자 한 순간에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다. 기독교 변증가인 존 레독스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로 고통과 고난의 문제를 직면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이 코로나로부터 직면하게 된 것은 무엇이냐면 바로 우리가 이 고통과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와 동떨어지고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직면해야 되는 것이기에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더욱 아프게 하고 두렵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두려움에 찾아올 때가 있다. ‘내가 언제 생명을 잃지 않게 될까?’ 내가 살아온 패턴이고 내가 살아오던 삶의 모습이 있는데 그것이 무너지지 않을까? ‘나의 직장, 나의 사업이 이대로 존속할 수 있을까?’ 라는 그런 두려움들이 나의 마음 가운데 엄습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려움이 이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코로나시기를 어떻게 지내고 있고 이 재단의 때에 나는 믿음을 이 상활을 바라보고 그리고 믿음으로 반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것으로 인해 온전함을 사모하고 제자 된 삶을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순간에도 이 현장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우리가 대답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을 보자.
 
유다의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을 마주한다. 여호사밧은 남유다왕국에서 보석과 같은 인물이었다. 성경은 여호사밧을 향하여 묘사하기를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아끼는 사람,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역대 하 17:3,
3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여호사밧에게 함께 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바로 여호사밧이었다. 그런데 이 여호사밧은 성경이 묘사하기를 바로 다윗이 걸어갔던 ‘그 처음 길로 행하였던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호사밧은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삶의 문제가 다가오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찾아갔다. 하나님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죠?‘ 저는 도무지 이 문제를 풀 수 없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주님 앞에 간구했다.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에 어려움이 찾아온다. 그 어려움이 찾아오면 정치, 권력, 경제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하나님께 나아왔다. ’하나님 제가 도무지 풀 수 없는 이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라고 주님 앞에 간구했던 사람이 바로 여호사밧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여호사밧이 자기 자신만 믿음을 지켰던 것이 아니다. 그가 왕이 되고 행하였던 놀라운 개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다 땅에 있었던 산당들과 아세라의 목상들을 모두다 없애버렸다. 국가적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는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또한 방백들을 불러 모으고, 레위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방백사람들과 레위사람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지혜가 있으니 유다 성읍 곳곳에 돌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가르치십시오.”라고 말한다. 유다 전역이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놀라운 부흥의 손길을 마련했던 것도 바로 여호사밧이었다. 어때요? 여호사밧이 멋있나요? 멋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사밧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다. 여호사밧이 통치하는 유다를 견고하게 하셨다. 또한 유다 근처에 사는 나라들이 여호사밧을 두려워하게 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특별한 왕,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특별한 남유다 왕국이 되었다. 여기까지 마무리 하면 참 좋겠지만, 우리 모두가 꿈꾸는 삶, 우리 모두가 꿈꾸는 나라, 바로 이러한 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예기치 못한 전쟁, 예기치 못한 재난이 앞으로 찾아온다.
 
*역대 하 20:1-2절,
1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2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
-저 멀리 한 명의 전령이 급히 찾아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왕이시여! 큰일 났습니다. 저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이 하나둘씩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에게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지금 모압과 암몬의 연합군은 엔게디 앞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우리가 지도에서 보고 있는 이 엔게디는 예루살렘과 근접해 있는 지역이다. 예루살렘 턱 밑까지 이방인의 적군이 진을 치고 쳐들어온 것이다. 이제 조금만 지체하면 예루살렘이 함락될 뿐 아니라, 모든 전쟁에서 패배하고 모든 백성들의 목숨이 사라질 그 위험 앞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역대 하 20:3절에,
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여호사밧도 그의 삶 속에 예기치 않는 고난과 전쟁이 찾아오자 그도 두려움을 느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온다. 우리 모두가 다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역대 하 20:12절,
2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한 가지를 더 표현하고 있다. 두려움과 자신에게 다가온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가 고백한다. 갑작스럽게 재난과 고난이 다가오면 그것을 대처할 능력이 사실 우리는 없다. 어려움이 찾아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될지를 못해서 전전긍긍을 하는 모습이 우리의 실상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왕이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전쟁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어떻게 할지를 몰라 마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코로나도 우리에게 갑자기 다가왔다. 조금 있으면 지나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의 삶에 엄습해 있고, 우리의 삶을 꽉 가두어 두는 이 어려움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우리도 때때로 두려움을 느끼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두려움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두려움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방향을 설정한다.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발걸음을 내 딛는다.
 
.1.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낯을 향한다.
*역대 하 20:3절에,
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여호사밧은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가장 먼저 여호와께로 낯을 향한다. 낯을 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이다. 다른 그 무엇을 바라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나님 저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봅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1075년에 스페인의 톨레드 출신의 유대 철학자 예후다할렙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유대문학의 거장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의미를 유대 문학적 관점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내 임금의 얼굴을 뵙는 것이 나의 유일한 갈망이다. 나는 그 분만을 두려워한다. 그 분만을 공경한다.“라고 말했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한다. 낯을 향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 주님, 유일한 갈망은 바로 하나님이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한분만을 공경한다.‘고 하는 것이 담겨있다.
 
여호사밧은 이 마음을 가지고 바로 여호와께로 낯을 향한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주님 앞에 여호와를 갈망했던 것처럼, 다윗이 광야의 한 복판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간절히 찾았던 것처럼 여호사밧은 유일한 갈망, 유일한 두려움, 공경의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낯을 여호와께 향했던 것이다.
 
2.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간구한다.
-간구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간구라는 것은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성도님들이 걸어가는데 전혀 모르는 다가와 “저기요, 사람이 와서 얼굴이 잘 생겼네요. 저에게 십 만원 주세요.”하면 돈을 주는가? 아니면 욕이나 흘끗 쳐다보는가? 마스크로 다 대답을 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어떤 대구도 없을 것이다. ‘간구한다’ 라는 것은 그 대상과 신뢰와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나를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의 상황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돌보아 주신다’ 라는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간구하였던 것이다.
 
3. 여호사밧은 온 유다에게 금식을 공포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금식을 해본 적이 있는가? 저는 금식을 좋아한다. 일 년에 금식을 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금식을 하면 할수록 저의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다. 금식을 하면 하나님만을 더 의지하는 그런 습관이 형성되는 것 같다. 금식은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의 힘, 세상의 어떤 힘, 그것을 의지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담겨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신앙의 모습이다.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낯을 향하고 간구한다. 금식을 공포한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 나와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한다. 여호와의 전의 새 뜰 앞에 모든 회중들을 불러 모은다. 이것은 굉장히 용기 있는 행위였다. 여호와의 전뜰 앞에 불러 모은 것은 모든 적군이 쳐들어오면 모두가 한 순간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여호와 앞에 기도를 한다. 오늘 이 기도의 담겨있는 내용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푯대를 붙잡고 나아가는 우리의 삶의 징표가 될 줄 믿는다.

 
I. 여호사밧의 기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도.

*역대 하 20:6절에,
6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여호사밧의 간절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억하는 것이었다. 여호사밧은 당장의 시급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지도 않는다. 가장 먼저 “하나님,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제일 먼저 그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라고 하나님의 성호를 부른다. 제가 부르짖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우리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의 인도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심을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부른 이후에 하나님 앞에 나가 질문을 한다. 두 가지를 질문한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 하나님은 하늘을 창조하시고 온 만물의 지은 창조주가 아니신지요?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십니까?”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 속에 담겨있는 놀라운 의미가 있다. 강력한 대답이 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고, 온 만물을 조성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시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그 고백이 담겨있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세와 능력이 누구에게 있다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았다. 우리의 삶의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결단코 나의 지식과 나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한다.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결여된 지식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지식이다. 이것은 가벼운 기독교, 가벼운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해 낸다.” -J.I.패커-
 
이 땅에 수많은 지식들이 놓여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엄위하신 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지, 하나님이 얼마나 경외받기 합당하신지를 놓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호사밧은 전쟁의 한 바탕 속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고 인정한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깊어져가길 소원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 하나님의 위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 앞에 진실로 우리의 무릎을 꿇고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찬양하는 이 온전한 고백이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한다.

 
II. 여호사밧의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도.

*역대 하 20:7절에,
7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사밧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온전히 인식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분명하게 역사적으로 성취되고 이루어졌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허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실상을, 역사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마치 자식이 아빠 앞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 같다. “아빠 이것이 사실이죠?” “그래, 이건 사실이야!” 변함없는 사실이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천성케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살리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적도 없으시고, 미루신 적도 없으시다. 여호사밧은 이 하나님의 역사를 굳게 붙잡고 기도한다.
 
성도여러분, 기도는 나의 염원, 나의 소원, 나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셨던 그 역사, 하나님 부족한 나이지만, 너무나 연약한 나이지만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신 그 은혜의 역사를 저는 기억하고 붙잡고 신뢰하는 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도의 내용인 것이다.
 
III.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기도.

*역대 하 20:8-9절에,
8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9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여호사밧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솔로몬에게 허락하신 그 언약을 붙잡고 나아간다. 역대하 7장에 보면 성전 낙성식이 거행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그 겸손한 마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시는 것을 보시고 너무 기뻐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언약의 말씀을 전하신다.
 
역대 하 7:13-14절에,
13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핵심은 재앙이 아니다. 메뚜기가 아니다. 전염병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중심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백성이 겸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를 찾으면 내가 죄를 사하고 내가 그 땅을 고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사밧은 이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나의 의로, 나의 형편, 나의 상황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의 백성이 내 이름을 일컫는 백성이 하나님 겸비하오니, 저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고백합니.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라고 구한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역사를 분명하게 알았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 약속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알았다. 위대한 성인인
 
※존 번연 자신의 책[경외함의 진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역사한다는 것을 올바르게 깨달을 때 비로소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경외한다. 그가 왜 낯을 구하였는가? 말씀이 그의 영혼에 역사하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호와께 낯을 향하는 것은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더 이상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그 시간, 이미 판가름이 난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신음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사업하는 성도님들도 정말 힘드실 것이다. 정말 힘들고 어렵다는 이야기를 너무도 많이 듣게 된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대학 청년들도 힘들다. 어디로 가야할지, 도대체 알지 못한다. 이제 수능도 얼마 남지 않은 입시생들도 입시 때문에 불안하고 백신을 맞았는데 몸은 더 힘들어지고, 우리는 또 어떠한가? 언제 코로나에 걸릴지 모른다는 이 두려운 마음이 우리에게 엄습해 있지 않는가? 이 어려운 가운데 이러한 재난 가운데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지금은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주님께 무릎을 꿇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진실로 나 여호와를 알고 있니?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행한 그 역사를 너는 기억하고 믿고 있니?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너에게 허락한 나의 언약을 믿고 있니?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있노라면 우리들이 취해야 할 길은 바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여호와의 낯을 구하는 길일 것이다. 성경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갈 길을 우리 가운데 보여주신다. 우리가 살아갈 길은 세상의 권력, 세상의 힘, 세상의 방식, 세상의 방법, 그것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길로 살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코로나의 상황, 이것보다 더한 상황이 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이 올지라도 오직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들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믿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한다. 믿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있다. 아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코로나를 잠잠케 하여 주실 것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언약을 구할 때, 이 나라와 열방과 온 세계를 회복하여 주실 것이다. 이 믿음을 붙잡고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가까이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의 삶에 예기치 못하게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담대하게 믿음과 온전한 성도로 굳게 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날마다 더해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언약을 붙잡고 살아가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납작 엎드려 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여 나의 삶이 복음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오직 주님께 낯을 향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지금 우리 삶에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재난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눌리고 두려움이 엄습해 있는 가운데 있다하더라도 이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을 온전하게 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이 땅을 고치시고 회복해 주시고 새롭게 해주심을 경험할 수 있게 응답해 주실 줄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거룩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여호사밧은 외국 연합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여호와께 간구하고 백성들에게 금식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는 여호와의 전 뜰에서 백성 가운데 서서 기도했다. 여호사밧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간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을 대표해서 기도함으로써,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교회의 지도자는 위기를 만날 때 무엇보다 먼저 기도해야 한다. 또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해 주며 그들도 기도에 동참케 하여 위기를 극복하도록 해야 한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며 이 땅의 거민을 쫓아내시고 환난 가운데에서 부르짖으면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응답받을 수 있다. 과거에 이스라엘은 모압과 암몬을 멸할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용납 치 아니하심으로 그들을 살려 주었는데, 그들은 배은망덕하게도 과거의 은혜를 잊고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본성이 악한 인간들은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곧잘 저지르곤 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며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낯을 향하여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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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8월 15일)

제목: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말씀: 갈라디아서 5:1
기도: 이기원 부목사님

찬양인도: 오준석전도사님외 쉐키나찬양단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김상복 목사님-(할렐루야 교회 원로목사님-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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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인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갈라디아서 5:1,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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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복 목사님-할렐루야 교회 원로목사님-초빙)-"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이렇게 드리는 예배가 한국교회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너무 기뻐서 미쳐버린 날도 있었다.

오늘이 8월15일인데, 제 기억에 한국 사람들이 너무 기쁘고 흥분해서 날뛰고 소리지른 기억이 3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나라 축구가 월드컵에서 4강까지 갔을 때 완전히 대한민국이 미쳐버렸다. 그저 떠들고 춤추고 소리 질렀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소리 지르고 춤춘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래서 미쳤다고 한 것이다. 그때는 축구를 4강까지 갔을 때, 스페인과 할 때 골차기에서 4:5로 이겼을 때 그서을 본 한국 사람들의 모습은 다 정신들이 다 나가버렸다. 제 아내는 조용한 여인인데 그날 하루만 미쳤다. 이겼으니까 그때는 그 기쁨이 우리 팀이 열심히 준비 했고 열심히 했기에 자기의 노력의 결과로 얻은 기쁨이었다.

두 번째는 6.25때에 제가 평양에 있었는데, 10월 19일 날이었다. 우리가 좀 피난을 가서 다른 곳에 숨어 있었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어머니가 무슨 소리냐고 물으셨다. 밖에 나가서 보니 저 언덕 꼭대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것이 무엇인가 했다. 한창 전쟁 중인데,,, 그래서 그곳에 제 누이와 언덕에 올라갔더니 남한 군대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유엔군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때 북한군인데도 태극기를 언제 만들었는지, 그것을 들고서는 완전히 사람들이 미쳐버렸다. 평양 시민들이 미쳐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그날 바로 내려와서 어머니께 유엔군과 남한 군이 들어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집으로 가자고 했다. 해서 빨리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는 혼자 아버지가 계셨는데 도착하니 아버지 혼자 갑자기 깜깜한 방에서 소리를 지르시면서 해방되었다고 소리를 지르셨다. 자유를 얻으시니 사람이 미쳐버리는 것이다. 너무 좋아서이다. 그 자유, 기쁨, 해방, 너무 좋았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날에 우리 집은 평양에 큰 길 거리에 있었는데 그날도 우리 집 앞이 큰길이니까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그때는 다 흰옷들을 입었다. 색 있는 옷이 없었다. 천이 없으니 다 흰옷을 입었는데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얼싸안고 국민들이 기뻐하는 것을 저는 보았다. 해방의 기쁨을 보았고, 또 6.25때의 기쁨도 저는 보았다. 얼마나 자유라는 것이 중요한지 국민들이 감격하는 그 모습을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해방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이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다. 물론 노력은 했다. 일본에게 침략을 받아가지고 민비가 독살을 당하고 고종황제가 죽임을 당하고, 결국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36년 동안 온갖 한국 사람들이 고생과 수모를 당했다. 압박과 설움과 견딜 수 없는 제가 일제 때에 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이름을 쓸 수 없었고 일본이름을 썼다. 학교 가서 한국말을 못하면서 일본말로 공부했다. 그리고 우리의 형뻘 되는 형들이 군대로 잡혀가는 것을 보았고 또 우리 여자들이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제가 평양 시내에서 그런 것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36년 동안을 너무 고생하고 압박과 설움을 견디고 36년을 살다가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별일을 다 했다. 3.1운동이 일어나서 만세를 부르고 자유를 외치고 독립을 선언하고 히지만은 그런 노력을 했지만 그 결과는 결국 아무런 열매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고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제일 많이 죽었다. 제가 다니던 산정현교회를 다녔는데,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를 당했다. 7년 동안 감옥에서 고생하시다가 결국은 순교를 당해서 담임 목사님을 잃은 경험이 있다. 그런 어려움에서부터 해방을 받았을 때, 그 기쁨이라는 것은 소리를 지를 만하고 춤을 출 만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저 해방을 받았다는데 대한 기쁨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가 해방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독립을 해서 많은 희생을 당했을 뿐이지 우리가 드디어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만약에 제2차 대전에 미국이 원자탄을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두 개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원자탄을 투하함으로 인해서 일본이 항복을 해서 미국 때문에 우리가 해방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국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 해방을 주신 것이다. 자유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8.15가 되어서 해방을 생각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다. 월드컵은 우리가 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은 특별히 우리들의 노력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국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8.15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온 민족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해방되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 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은혜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셔서 오늘의 한국이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갈라디아서 5:1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억압된 삶이 아니라, 종으로 노예 생활이 아니라, 인간은 자유롭게 살게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자유를 주신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야 인간답게 산다. 억압에 눌려서 억지로 강제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고 평안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너희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한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이다. 우리도 죄의 종으로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된다고 하신다. 우리의 죄 성 때문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죄를 범하고 싶지 않지만 도리가 없다. 죄 성, 사상, 세상, 우리의 인격 때문에, 죄에 노예가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로 하여금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너희가 자유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다.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8.15가 되면, 우리가 자유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한국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온 민족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야 한다. 그 자유 때문에 우리 한국의 건물도 세계 10대 국가가 된 것이다. 이런 건물들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께서 자유를 주셔서 믿음을 주시고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니 이런 건물도 나타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제 강점기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요, 8.15로 해방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가슴속에 이 놀라운 축복 때문에 오늘의 한국이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리길 바란다.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박수....~!!!
 
8.15의 자유뿐만 아니라,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또 자유를 주셨다. 1950년 6월 25일 그때에 평양에서 교회가려고 모였는데 어른들이 거리에 잔뜩 모여서 그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어들에게 들어보니 “김일성 수령이 지금 말씀을 하실 거래” 해서 우리도 서서 들었다. 김일성이 나타나서 아홉시쯤 되었는데, “오늘 아침 새벽에 남조선 괴뢰군들이 우리 조국을 침략해서 우리 군대가 반격을 시작했다.”라고 방송을 했다. 아 제가 그 말을 듣고 나쁜 괴로 군으로 여겼었다. 알고 봤더니 거짓말이었다. 거짓말로 시작한 북한은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지금도 남쪽이 침략했다고 한다. 16개국을 모아서 남쪽이 북한을 침략했다고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사탄은 살인자이다. 그래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두 달 만에 낙동강까지 다 빼앗겼다. 결국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만약에 그 때,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와서 인천상륙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시간에 이렇게 앉아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맥아더장군을 보내고 미국을 통해서 인천상륙을 하고 결국은 북한군들을 위로 올려서 압록강까지 갔다가 중국이 한국을 개입해서 두 쪽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때 통일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압록강까지 갔으니까, 10월 19일에 통일이 된 것이다. 중국이 한국을 방해해서 다시 두 쪽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미국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회복시켜 주셨다. 남한 군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사흘만에 서울을 뺏기는 비참한, 연약한 그런 군대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국을 사용해서 그 군대를 보내셔서 결국에는 남한에 자유를 주셨고, 오늘 제가 누리는 자유는 미국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해방도, 일제로부터의 하나님의 은혜요, 북한으로부터의 자유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래서 이 땅에는 오천 이백만의 다 자유가 있다. 이 자유를 뺏으려고 하고 자유를 없애려고 국민을 억압하려고 그런 경향성도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지도자가 나타나길 기도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국민을 자유롭게 만들어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고 정말 자유를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이 주신 창의력과 삶의 노력과 수고와 충성을 통해서 이 나라를 더 발전시키는 그런 나라가 참된 자유로운 나라가 되길 바라며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해방도 하나님의 은혜요, 북한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다. 이 땅의 천만의 하나님의 자녀를 세워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참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노력과 수고와 기도와 인내가 있어서 하나님이 이 땅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그렇다. 대한민국이 북한에 대해서 제일 잘 한 것이 제 생각에는 한 가지가 있다. 정주영씨가 천 마리의 소를 몰고 가서 도운 것도 잘한 것이지만, 결과는 수많은 돈을 보내주었어도, 아니다.
 
그러나 제일 잘한 것은 3만 6천명의 탈북자를 받아준 일이다. 이 땅에 와서 자유롭게 살고 노예처럼 살지 말라고 주신 탈북 민을 집을 주고 정착하게 한 것이다.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감격해서 자유를 가지고 살라고 한 것이다. 자유를 주니 그것을 모르고 그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탈북자 3만 6천명이 자유를 외치는 자가 이 땅에서 자유를 외치는 용사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해방과 자유는 우리 자유는 오천만 국민에게 있는데, 북한은 한 명만 자유가 있다. 나머지는 다 노예이다. 종들이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이 자유를 잃지 않아야 한다. 자유를 위협하는 어떤 세력도, 자유를 해방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면 왜 자유를 잃었는가? 그것은 힘이 없고 약했기 때문이다. 예전 우리 조상들이 약해서 일본에게 넘겨주고 포기하고 그런 억압된 삶을 산 것은 우리가 약해서이다. 일제에 먹혀서 고생을 한 것이다. 우리가 약해지면 영적으로 약해지만 고생을 한다. 사탄의 공격을 받는다. 죄의 공격, 세상의 공격, 육신의 공격, 약해지만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일본이 잡아먹었다. 왜 침략을 받았겠나?
 
6.25때에 남한 군대가 약했고, 남한 정부가 약해서 공격을 받고 삼백만의 군인들과 북한과 남한 군인들 삼백만이 죽었다. 약한 나라여서 희생을 당하고 침략을 받은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약하기에 중공과 유엔군이 죽어갔다. 연약한 나라, 힘없는 나라였다. 그런 정부들이었기에 고생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너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셨다. 누구에게도 종이 되는 사람들이 되지 말라고 하신다. 일본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북한이든지, 누구든지 앞으로 종이 되지 말라하신다. 자유를 누리며 번창하고 억압 받지 말라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다. 다시는 한 번은 모른다. 그러나 두 번은 없다. 두 번째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깨달아야 한다. 다시는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를 넘보는 자들이 없어야 한다. 그 이야기는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힘을 갖고 능력을 가지라. 능력을 가지라고 하신다. 가장 큰 능력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힘을 입어서 사는 나라, 그 능력으로 강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 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해야 하고, 외교도 탁월하여 모든 오래된 적들을 일본 중국 러시아들을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을 세우시고 국민들을 강하게 하실 것을 구해야 한다.
 
자유를 하나님이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야 한다. 흔들리지 말고, 강한 민족, 강한 신앙, 강한 군대, 강한 정부, 강한 외교, 강한 교육이 있어서 이 땅이 계속적으로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서 굳건히 서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고, 놀라지 말라. 하신다.” 불과 같은 시험이 오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고 놀라지도 말라고 하신다. 오히려 시련 속에서도 더 강해지는 그런 민족이 되라고 하신다. 대한민국은 은혜에서 은혜로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부강하지만, 예전에 미국에서 살면서 보니, 한국 제였다. 언제부턴가 보니 저 같은 사람에게 맞는 옷이 생겼다. 미국에는 가는 백화점마다 메이드 인 코리아였다. 보니까 메이드 인 코리아였다. 미국이 우리나라 잘되라고, 경제가 성장하라고, 미국이 통상조약을 맺었는데 특별한 관세 특혜를 주었다. 대한민국이 무슨 물건이든지 갖다가 미국에다 마음대로 팔아서 돈 벌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부강하라고 그런 특혜를 주셨다. 미국을 반대하면 안 된다. 미국이 몇 번이나 살려준 것인가? 경제 부흥에 너무 많이 도와주었다. 심지어 가발까지 만들어서 팔았다. 그래도 시작할 때, 수공업이 일어날 때부터 오늘까지 온 것이다. 우리의 노력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신 것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신다. 굳세게 서라, 강한 나라가 되라고 하신다. 큰 나라에 둘러싸여 있지만, 작은 나라지만 감히 손대지 못하도록 그런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이나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수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자비와 긍휼로 번창하고 세계를 축복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 감사하며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요약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해방과 자유는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러니 항상 우리는 계속 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기도하고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되어 강한 나라, 굳건한 나라로, 담대한 나라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나라가 되길 기도해야 한다. 오히려 다른 나라를 축복하고 도우는 나라가 되길 기도해야 한다. 미국의 도움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준 은혜이다. 그러니 우리도 항상 주님 앞에 올바르게 서서 자유함을 누리는 가운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자가 되어서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으며 모세의 율법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이제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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